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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알 알라메인 전투

80. 알 알라메인 전투

 

여우와 생쥐의 대결(1942)

 

사진은 노획한 독일 탱크를 방패 삼아 싸우고 있는 영국군

알 알라메인의 승리는 기갑부대와 보병의 긴밀한 협동작전에 힘입은 것이었다.

 

2차대전 중 여러 전장에서는 유명한 장군들이 서로 대결을 벌였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도 사람들에게 가장 인상적인 대결은 독일의 롬멜 장군과 영국의 몽고메리 장군이 북아프리카 사막에서 맞붙은 싸움이었다. 당시 언론들은 두 장군을 각각 '사막의 여우''사막의 생쥐'라고 부르며 흥미 있게 보도했다.

북아프리카는 히틀러나 연합군에게 지중해를 장악하는 요충이기는 하지만 결코 양측의 사활을 결정할 만큼 그렇게 중요한 곳은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전장은 어디까지나 유럽 대륙이었다. 그러나 1941~42년에 영국군과 미국군이 유럽 대륙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있는 입장에서 북아프리카는 독일군 전력을 분산시키고 간접적으로 동부 전선의 소련군을 지원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다음에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같은 큰 작전을 실행하기에 앞서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좋은 훈련장이 되기도 했다.

본래 북아프리카에서 전쟁은 히틀러가 아닌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일을 벌임으로써 시작되었다. 1940년 여름 히틀러가 프랑스를 함락시키는 모습을 보고 무솔리니는 북아프리카로 진출해 옛 로마제국을 건설하고자 했다. 히틀러와 아무런 협의도 없이 이집트와 그리스를 침공한 그는 히틀러와 달리 전략도, 계획도 없고 보잘것없는 군대로 서투른 공격을 했다가 도리어 연합군의 반격을 받아 곧 패배하고 말았다.

이탈리아군의 패배는 독일을 지중해 지역으로 끌어들였다. 1941년 봄 독일은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를 유린하고 크레타 섬을 침공했다. 다른 한편으로 히틀러는 19412월 롬멜 휘하의 1개 기갑군단('아프리카 군단'이라고 불렀음)을 아프리카에 파견해 리비아 주둔 이탈리아군을 지원하도록 했다.

롬멜이 오기 전까지 북아프리카에서 영국군 총사령관 웨이블(Archibald Wavell) 대장은 비록 2개 사단밖에 되지 않는 열세한 병력이지만 사막에서 500마일을 진격해 10개의 이탈리아 사단을 격퇴시켰고, 해상에서 커닝험(Andrew C. Cunningham) 제독의 지중해 함대는 이탈리아 해군에 심대한 타격을 가했다.

그러나 롬멜이 트리폴리에 도착한 이후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위대한 지휘관과 성능이 좋은 장비를 지닌 독일의 아프리카 군단은 영국의 사막군단을 제압하며 눈부신 속도로 진격했다. 독일 탱크는 영국 탱크보다 속도가 빠르고, 독일의 88밀리 대전차포는 영국의 어느 대포보다 위력이 강했다. 그것은 본래 고사포였으나 롬멜은 창의력을 발휘, 그것을 개조하여 대전차포로 사용한 것이었다.

롬멜은 작전지역을 넓게 이용하고 독일 기갑군단의 강점인 기동성과 화력의 우세를 최대로 활용했다. 그는 유인전의 대가였다. 그는 언제나 선제공격으로 영국 탱크를 유인한 다음, 대전차포 엄호하에 기갑부대를 진격시켜 공격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1941년 겨울 독일은 잠수함 U-보트를 사용해 장비와 보급품의 지중해 통과를 보호함으로써 보급난을 해결했다. 이듬해 6월에는 중요기지인 토브루크를 빼앗고 영국군을 계속 추격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55마일 떨어진 알 알라메인에까지 퇴각했을 때 영국군은 참으로 큰 위기를 맞이했다. 영국군은 철군을 고려하고 있었고, 이집트 정치인들은 승리가 확실해 보이는 독일군 편에 설까 망설이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에 롬멜은 진격을 중단하고 말았으니, 그것은 증원군을 기대할 수 없고 보급기지에서 너무 떨어진 곳에서 최악의 보급 난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독일군 주력은 소련 땅에서 카프카스를 향한 진격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어 아프리카를 돌볼 여유가 없었다.

영국 지상군은 알 알라메인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공군은 토브룩에 대해 맹폭을 가했다. 토브룩 기지를 이용할 수 없게 된 독일군 보급은 후방 약 600마일 떨어진 벵가지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와 같이 롬멜군의 공격이 한계상황에 이르렀던 19428월경 몽고메리(Bernard L. Montgomery) 장군이 이집트 주둔 영국 제8군사령관으로 새로 부임했다.

몽고메리는 부임하자마자 곧 반격을 실시하라는 압력을 상당히 받았지만, 완전히 준비될 때까지는 작전을 개시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장비와 군수품을 충분히 확보, 우선 방어에 충실하고 모든 것이 확실할 때 공격한다는 그의 작전 스타일은 과거 나폴레옹을 상대한 웰링턴 장군과 같았다.

그는 병력 · 탱크 · 공군력에서 두세 배 우세를 유지할 때까지 기다리며 철저한 전투준비를 했다. 정교한 위장계획을 세워 가짜 설비들을 짓고, 적에게 마치 남쪽에서 주공을 실시할 것 같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1023일 보병사단을 투입, 기갑사단을 뒤따르도록 하면서 대대적인 공격을 펼쳤다. 몽고메리는 독일 기갑사단이 영국 기갑사단을 공격하도록 유도해 기갑사단 간에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에 보병으로 하여금 적 보병을 공격하도록 했다.

12일간의 치열한 전투에서 영국군은 어떤 기발한 기동이나 전술이 아니라, 순전히 숫자와 화력으로 적을 제압하고 승리했다. 전투에 투입된 영국군 병력과 탱크는 각각 23만 명과 1,030대였으며, 독일군은 10만 명과 500대였다.

몽고메리의 우직한 전술에 처음으로 참패를 당한 롬멜은 이제 더 이상 공격작전을 수행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증원군과 보급품이 끊겼을 뿐만 아니라, 석유가 너무 부족했다. 그는 트리폴리를 거쳐 튀니스로 장거리 철수를 하고, 19435월에는 시칠리아로 철군함으로써 북아프리카를 완전히 연합군에게 내주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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