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독일의 소련 침공
역사상 최대 규모의 지상전(1941년)

소련 침공 첫해 충분한 방한 장비도 없이 모스크바 근교로 진입하는 독일군
히틀러는 한마디로 과대망상증 환자였다. 영국 전투를 개시하기 2주 전 그는 휘하 장군들에게 말하기를 이듬해 봄에 소련을 침공하고 싶다고 했다. 영국과의 공중전, 그리고 영국 침공계획 등을 수립하고 있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도 알 수 없는 시점에서 소련 침공 의사를 표명한 것이다.
그래서 독일군은 영국과의 공중전이 실패로 끝난 뒤 곧 소련 침공계획을 수립하고 1941년 6월 22일 소련을 침공했다. 이때는 이미 독일이 지중해와 아프리카에서 영국과 싸우고 있었던 중이었는데, 그것을 해결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또 다른 강대국인 소련과 전쟁을 벌인 것이다. 그런가 하면 6개월 후에는 미국에 선전포고함으로써 히틀러는 세 강대국을 맞서 싸우는 매우 어려운 과정을 스스로 선택했다.
히틀러는 본래 2차 대전 훨씬 전부터 소련 정복을 꿈꾸어왔다. 독일의 보다 큰 번영을 위해서 소련 땅의 풍부한 자원을 이용하고, 정치적으로 공산주의를 격멸하고, 인종적으로는 그가 증오하는 유태인들(동유럽에 많이 살았음)과 그가 열등민족으로 간주하는 슬라브 족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독일은 소련 침공계획을 중세시대 유명한 게르만 족 황제의 이름을 따서 ‘바바로사(Barbarossa) 계획’이라고 불렀다.
독일 군부는 소련의 작전지역이 워낙 광활하고 대규모 예비대를 보유하고 있어 서유럽에서처럼 단기결전은 어렵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무적의 전격전 군대를 가진 이상 3개월 정도면 충분히 소련군을 섬멸할 수 있다고 과신했다. 작전의 관건은 초기에 집중 포위공격으로 소련군 전방에서 그들을 일련의 자루 속에 담아 넣어야 하며, 광대한 후방지역으로 끌려 들어가면 성공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소련군은 국경 근처에 158개 사단과 55개 기갑연대를 보유하고 있었고 독일군은 20개 기갑사단을 포함한 145개 사단을 거느리고 있었다.
독일군의 집중 포위공격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많은 소련 항공기를 지상에서 파괴하고, 전격전 전술로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 최초 5개월간 전투에서 독일군은 전사상자가 74만 명인 데 비해 소련군은 그들이 인정하는 자료만으로도 약 3배에 이르는 210만이었다. 그밖에 독일 측은 약 300만의 포로를 획득했다고 주장했으며, 소련은 약 50만을 인정했다.
약 2주가 지난 다음에 독일육군 참모총장인 할데르(Franz von Halder)는 그의 일기에서 '2주 만에 독일군은 승리했다. 그러나 방대한 소련 영토와 소련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앞으로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 같다'고 정확하게 기록했다. 독일군은 초기에 엄청난 전과를 올리고 대승했지만, 과거 나폴레옹이 그랬던 것처럼 소련을 정복하는 데는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1차대전 때 서부전선처럼 2차대전은 동부전선에서 4년 동안이나 치열한 싸움을 벌이다가 결국 독일은 파멸했다.
초기의 전과에 대한 과대평가로 독일장군들은 심각한 의견대립을 보이고 히틀러는 중대한 전략적 실수를 범했다. 북부 · 중부 · 남부 집단군 사령관들이 각각 레닌그라드 · 모스크바 · 우크라이나를 향한 공격에 집착하고, 그 바람에 집중 공격할 어느 한 방향을 선택하는 데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육군 총사령관 브라우히취(Walter von Brauchitsch)는 모스크바 진격을 원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남부에 중점을 두고 우크라이나를 공격하도록 지시했다.
독일군은 우크라이나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그 사이에 1941년 9월이 지나갔다. 1812년 나폴레옹이 히틀러 군대보다 하루 늦게 니멘 강을 떠나서 9월 중순에 모스크바에 입성했던 기록과 비교해보면 히틀러의 전격전 부대가 오히려 훨씬 느린 셈이다. 독일군이 남쪽에서 다시 방향을 바꾸어 모스크바 문전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전투력이 크게 약화된 데다 추운 겨울과 싸워야 하는 이중의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다.
소련군은 많은 인명손실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병력을 동원하고, 12월 5일 모스크바에서는 명장 주코프(Georgie Zhukov)가 대반격작전을 개시했다. 2차대전 발발 이후 지상전에서 독일군이 후퇴하게 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으며, 이로써 독일의 소련 침공은 이미 실패한 거나 다름없었다. 이후 독일은 그들이 결코 바라지 않는 장기전을 치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스탈린 독재체제의 정치적 능력과 소련군의 예비대 동원 능력을 분명히 과소평가했다. 소련군은 어느 날 10개 사단이 격멸되면 바로 그날 후방에서 10개 사단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하나의 전체주의 국가가 또 다른 전체주의 국가의 능력을 과소평가한 것은 희한한 실수였음에 틀림없다.
많은 소련군이 항복을 강요당한 처지에 이르렀지만, 실제로 완전히 무너진 곳은 주로 우크라이나 지방이었다. 그곳은 오랫동안 소련정부에 대해 불평불만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히틀러를 해방자로 맞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의 무자비한 정복정책은 우크라이나 주민들마저도 등을 돌리도록 했으며, 이런 기운은 곧 소련 전지역에 전파되어 소련인들을 더욱 단합시키고 빨치산(partisan) 전을 벌이도록 해 독일군의 정규전 수행에 큰 차질을 주었다.
4년에 걸친 독일 · 소련 전쟁은 사상 최대 규모의 지상전으로서, 이 전쟁에서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다. 독일 인명 손실은 약 350만의 전사자 외에 53만의 민간인 희생자가 있었다. 소련 인명 손실은 독일 측 추정에 의하면 군인 사망자만 해도 2,000만 명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전쟁 중 독일은 50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을 학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