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일본의 팽창
만주 침략(1931년)

만주를 침략하여 주민들이 거주하는 민가를 지나는 일본군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일본은 아시아와 태평양에서 무한한 팽창 야욕을 보였다. 1차대전 중 연합국 측에 가담함으로써 쉽게 중국 산동반도에 대한 독일의 이권과 함께 캐롤라인 제도 및 마샬제도를 차지했다. 러시아 혁명 뒤 1918년에는 군대를 동부 시베리아에 보냄으로써 그곳에 한발 늦게 병력을 파견한 미국과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미국이 함대를 태평양에 진출시키면서 영국 · 일본 · 미국 3대 열강은 본격적으로 해군력 경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일본은 1922년 워싱턴 군축회담에서 영 · 미 · 일의 주력함 톤 수의 비율을 5:5:3으로 정하는 데 동의했지만, 나중에 얼마든지 만회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일단 해상보다는 중국대륙에 대한 팽창정책을 우선적으로 추진했다.
대공황 이후 서구 열강들의 해외 진출에 대한 관심은 비교적 떨어졌다. 바로 이 틈을 이용해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아시아 대륙에 대해 본격적으로 침략하기 시작했다.
1931년 일본은 만주를 점령했다. 6년 후 일본은 노구교 사건을 기화로 북경을 점령하고, 상하이와 수도 남경을 침략하면서 이른바 동아시아 전쟁을 개시했다.
장개석 휘하의 엉성하기 짝이 없는 중국군은 곳곳에서 일본군에게 패퇴하고, 국민당 정부는 겨우 명맥만을 유지한 채 양자강 상류의 중경으로 퇴각했다. 일본군은 해안지역과 주요 도시를 장악하고 선량한 민간인 학살을 일삼았다.
중국군은 인도차이나와 미얀마(버마), 그리고 소련을 통해 들어오는 막대한 양의 보급품에 의존했으나, 총 300개의 사단 중 약 10%만이 장개석에게 절대 충성을 바쳤다. 장비는 제조국과 모델이 너무 다양한데다가 부품이 맞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병사들은 급료와 급식을 제대로 지급받지 못했고 질병 환자가 많이 발생했다. 국민당 정부의 무능 · 부패와 일본군의 만행이 겹치는 가운데 공산당은 점차 영역을 확대해갔다.
중국과의 전쟁이 장기전으로 흐르자, 일본은 만주 · 소련 국경지역에서 일련의 사건을 일으켜 소련군을 시험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님을 파악하고는 다른 돌파구를 찾던 중 1940년 프랑스가 독일군에 함락되자, 동남아시아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유럽인들이 2차대전에 빠져 있는 틈을 이용해 그들의 식민지를 공략하고자 한 것이다. 다만 필리핀에 있는 미국 군사력과의 충돌이 예상되나 요령껏 잘 피해나가거나 협상으로써 충분히 해결 가능하리라고 생각했다.
1940년 일본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북부를 점령하고 9월에는 독일 · 이탈리아와 군사 · 경제협력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이듬해 4월에는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체결, 일본 동북부의 안전을 보장받는 대신에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에서의 전쟁에 전념할 준비를 완전히 갖추기에 이르렀다.
그동안 조용한 반응을 보여 온 미국은 1941년 7월 일본이 인도차이나 남부까지 점령하자, 드디어 일본의 팽창을 반대 · 저지하는 단호한 조치를 취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에 대해 전면적인 수출 금지령을 내렸다. 그러자 태평양에 막대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영국과 네덜란드도 미국과 똑같은 조치를 단행했다.
석유 수입을 미국에 80% 의존하고 있는 일본으로서는 막대한 손해가 예상되지만, 미국과의 일전은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수출금지를 해제하는 조건으로 1931년 이후 일본이 획득한 땅을 모두 환원시키라는 미국의 요구를 들어준다는 것은 전쟁에서 패배하는 것보다 더 굴욕적이라고 생각했다.
일본 군부는 동남아시아를 정복한 다음 그 주위로 방어선을 설정하고, 그곳을 침범하려는 어떠한 적도 막아낸다는 개념의 구체적 전쟁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자원의 한계로 말미암아 미국에 대해 전면적인 승리를 거둘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희생이 따르는 전쟁에 쉽게 지치는 미국인들의 무른 성향을 계산하고, 초기에 승리를 거둔 후 적절한 단계에서 협상으로 전쟁을 종결시킬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면서 태평양전쟁이라는 엄청난 불장난에 뛰어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