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베르사유 조약 이후 유럽과 히틀러의 등장
독일 재군비(1934년)

뉘렌베르크 나치 집회의 히틀러
수십만 당원이 모여 당과 히틀러에 충성을 맹세했다. 전후 뉘렌베르크에서 나치 전범 재판이 열렸다.
전쟁이 끝난 다음에 참전국 간에 중요한 일은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것이다. 물론 그러기에 앞서 승전국은 패전국에 대해 배상책임을 묻는 특권과 특전을 누리게 되어 있다.
1919년 6월에 조인된 베르사유 조약은 화해에 바탕을 둔 평화를 약속하지 못하고 특히 독일에게 가혹하고 굴욕적인 내용으로서, 장차 전쟁을 방지하는 장치가 아니라 오히려 유발시킨 근원을 제공한 셈이 되었다. 이 조약체결을 듣고 프랑스의 포슈 장군은 “그것은 평화가 아니라 20년 정도의 휴전을 보장하는 데 그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독일은 알자스와 로렌 지방을 프랑스에 내주고 비스마르크 제국의 약 1/8을 상실했다. 그리고 무장해제를 당한 외에 징병제도와 일반참모제도를 폐지하고, 육군을 10만 명 이상 유지하지 못하도록 엄격한 규제를 받았다. 나아가 유독가스 · 전차 · 군용기 · 잠수함 보유 금지, 무기제조공장 폐쇄, 전쟁물자 수출입 금지, 북해와 발틱 해 해안 요새 해체 등의 조치를 당했다. 뿐만 아니라 '전쟁을 도발한 범죄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고 연합국 측이 입은 피해에 대해 엄청난 액수의 보상금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독일 국민들의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분노는 대단했다. 패배한 자는 어느 정도 굴욕을 당하게 되어 있으나, 그럼에도 독일인들은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그 순간부터 연합국들에 대한 강렬한 적개심을 다시 품게 되었다. 사실상 독일은 연합국 감시는 받고 있지만 직접적인 점령통치를 받는 상태는 아니었으므로 만일 연합국 감시체제에 이상이 생기면 얼마든 재무장하고 결집할 수 있는 위험성이 남아 있었다.
라인강 서쪽의 라인란트 지방을 독일로부터 분할하려 했던 프랑스의 노력은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 의해 좌절되었으며, 그 대신 연합국은 주위에 군대를 주둔시켜 그곳의 비무장을 감시, 유지토록 했다. 그러나 얼마 후에 미국과 영국이 군대를 철수시켜버림으로써 프랑스군만 남게 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프랑스도 독일을 감시하기는커녕 자국을 방어하는 데 급급해야 하는 처지로 바뀌고 말았다.
프랑스는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에 걸쳐 금세기 가장 견고하고 정교한 요새 선이라 할 수 있는 마지노선을 구축했다. 이는 베르사유 조약에도 불구하고 장차 독일에 대한 프랑스의 두려움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1920년대에 많은 독일인들은 1918년의 패배 책임에 대해 유태인들과 공산주의자들의 음모로 돌리는가 하면, 베르사유 조약을 수락한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에 대해 비판을 가하기 시작했다. 독일 정부는 전쟁배상금을 지불하라는 프랑스의 압력을 무력화시키는 방법으로 통화발행을 남발하는 등 스스로 파탄의 길을 걸었다.
1929년 대공황으로 온 세계 경제가 위기에 빠져 혼란을 겪으면서, 독일 정치는 혁명을 맞게 되었다. 바이마르 공화정 체제가 무너지고 강력한 정치지도자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해 전체주의 독재국가로 체제를 완전히 바꾸었다. 다른 전체주의 국가 지도자였던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소련의 스탈린,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처럼 히틀러도 기존의 세계질서를 깨뜨리고자 하는 야심을 품었다. 이들 독재자들의 공통점은 기존의 국제질서에 강한 불만을 품었으며, 영토를 최대로 팽창시키려 한 팽창주의자들이었다는 점이다.
1차 대전 후 군인들은 대전의 교훈을 분석하고 무엇보다도 신무기였던 전차와 항공기 운용방법에 대해 중점 연구했다. 그러나 승전국의 군사이론가였던 풀러(J. F. C. Fuller)나 리들 하트(B. H. Liddell Hart)와 같은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훨씬 더 큰 관심을 보였던 쪽은 패전국 군수뇌부 측이었다. 특히 1920~26년 독일 육군사령관이었던 젝트(Hans von Seeckt)는 공식적으로 일반참모제도를 둘 수 없는 여건 아래서도 비밀리에 59개 위원회를 편성해 1차대전을 세밀히 분석했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창의력 · 융통성 · 리더십이며, 장차 전쟁에서는 기갑전을 최대로 활용하는 전격전으로 참호전을 극복하고 신속하게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정권을 장악한 후 처음에는 군수뇌들에게 존경을 표하는 방법으로 군부를 대우해주었다. 그러나 기계화부대를 창설하고 공군을 창설하는 데 있어서는 그 자신이 매우 정열적으로 나서고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군인들은 너무 서두르는 히틀러에 대해 불안을 느낄 정도였다. 그들은 독일군을 재무장시키고 또 다른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점에서는 히틀러를 감히 따라가지 못했다.
히틀러는 1934년 총통이 되고, 1935년 징병제를 재도입했으며, 1936년 라인란트를 재무장하고, 그리고 1938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티(주데텐) 지방과 오스트리아를 합병했다. 그해 영국 수상 체임벌린과 프랑스 수상 달라디에는 뮌헨에서 히틀러를 만나 독일의 베르사유 조약 무시와 재무장, 그리고 일련의 침략 점령을 모두 인정했다. 유화주의자였던 그들은 그 단계에서 차라리 히틀러를 인정해주는 것이 장차 낫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들은 히틀러를 잘못 이해해도 한참 잘못 이해했었다. 뮌헨 회담 이후 히틀러는 그의 세계대전 계획에 더욱 자신을 갖고 박차를 가했다. 처칠이 언급했듯이 “사악한 자의 악의는 선한 자의 허약함 때문에 강화”되었다.
히틀러는 적에 대해 마치 마르크스가 계급으로 구별한 것처럼 인종으로 구별하는 개념을 갖고 있었다. 지독한 인종 차별주의자였던 그는 독일 민족을 세계 문명을 창조한 가장 위대한 아리안족이라고 떠들었으며, 그들은 세계를 이끌고 갈 세계사적 사명을 다하기 위해 별 볼 일 없는 인종들이 살고 있는 땅을 점령해 유용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그의 자서전 《나의 투쟁》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땅에 욕심을 낸 것은 기본적으로 슬라브족에 대한 경멸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가 독일인들을 잘못 이끌고 간 악질적인 인종 차별정책에서 최대의 피해를 보게 된 민족은 유태인들이었다. 그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창조한 인종이 유대인이기 때문에 아리안족은 그들을 유럽에서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미 2차 대전 전부터 그들을 학살했다.
히틀러가 2차 대전에서 원한 것은 1차대전 이전의 영토에 대한 단순한 회복이 아니라 아리안족에 의한 전 유럽 지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