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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1차 대전 해전

71. 1차 대전 해전

 

독일 무제한 잠수함전(1917)

 

미국의 1차대전 참전 원인이 되었던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에 의한 미국 여객선 루지타니아호의 침몰

 

독일육군이 해군과의 협조를 바탕으로 하여 종합적인 전쟁 계획을 세우지 않은 것처럼, 독일해군은 해군대로 바다를 장악하기 위한 독자적인 야심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영국해군의 해안봉쇄 작전을 예상하고 덴마크와 네덜란드 사이의 근해에 수뢰 · 어뢰정 · 잠수함 등을 집중적으로 배치했다. 그리하여 그곳에서 전투를 하는 동안 독일 전함들을 출동시켜 대영국함대의 나머지를 집중 공격한다는 복안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독일해군의 작전계획은 크게 빗나갔으니, 그것은 영국해군이 전혀 딴판으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영해군은 독일해군이 예상한 것처럼 해안 가까이에서 봉쇄하는 것이 아니라, 멀리서 보이지 않는 봉쇄망을 구축하고 전반적으로 해상을 장악하는 전략을 펼쳤다. 그러한 전략은 독일군의 위협적인 수뢰와 잠수함으로부터 피해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영국 대함대는 오크니 제도(스코틀랜드 동북부의 섬)의 스캐퍼플로(Scapa Flow) 군항에 기지를 두고 이곳저곳에 소함대를 파견했다. 주임무는 독일 상선의 나포와 중립국 배의 점검 외에 주로 독일 잠수함과 전투를 벌이는 것이었다. 전함과 순양함에서 뒤진 독일군은 바다 가운데서 영함대와 정면 격돌하는 작전을 피했다.

영국해군은 해전을 주도했다. 프랑스 해군이 지중해를 맡고 러시아 함대가 발틱 해와 흑해에서 작전하는 동안 영국군은 다른 바다를 장악해 연합국들과의 보급선을 보호하고 적 보급선에 타격을 가하는 작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했다.

북해에서 소규모의 충돌은 가끔 있었으나, 양측 함대가 대규모로 격돌한 것은 19165월 유틀란트 반도 해역에서 단 한 차례 있었다. 독일 제독 셰어(Reinhard Scheer)는 영국해군의 일부를 격파하고 영국 주력함대가 나타나기 전에 안전한 곳으로 피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영국군은 독일군의 그러한 기도를 미리 알아차리고 출항준비를 하고 있는 적에 대해 선제 포격을 가했다. 영국군은 적의 암호신호 체계를 거의 다 읽을 수 있었다. 셰어 제독은 과감하게 방향을 돌려 항구를 빠져나와 도주했다. 한편, 영국제독 젤리코(Sir John Jellico)도 잠수함으로부터의 피해를 두려워하고 무리한 추격으로 잘못하면 모든 것을 다 잃게 될 것을 염려한 나머지 도주하는 적을 그대로 두고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큰 전투가 전개될 뻔한 순간에 서로 충돌을 피하고 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영국이 북해 해상을 역시 확실히 장악한 데 반해 독일은 해상에서 영국함대에 대한 도전을 포기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바다 밑은 상황이 달랐다. 독일은 잠수함을 대단히 효율적인 무기로 발전시켰다. 잠수함의 타격력은 어뢰에 있었는데, 500파운드의 TNT로 만들어진 어뢰는 시속 586~7거리를 항진했다. 처음에 독일은 잠수함 숫자에서도 뒤졌으나, 해상에서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잠수함 개발에 주력한 결과, 곧 영국을 훨씬 앞질러갔다. 무엇보다도 U-보트라고 불리는 위력적인 잠수함은 맹위를 떨쳤다.

독일군은 U-보트를 대영함대 기지인 스캐퍼플로 기지에까지 침투시키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으나, 그 대신 연합국과 중립국 상선들에 대해 눈에 띄는 대로 경고 없이 소위 '무제한 잠수함전'을 전개함으로써 연합국을 곤경에 빠뜨렸다. 무수히 많은 배가 U-보트 공격을 받고 파괴되었고, 그 숫자는 1917년 봄에만 100만 톤을 넘어섰다. 영국에서 출항한 배의 1/4이 귀항하지 못했는가 하면, 피해가 늘어난 외국선박들은 영국으로 항해하는 것을 기피했다.

영국은 잠수함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 기뢰를 폭넓게 부설하고, 지그재그 방식 항해를 하고, 잠수함 탐지기를 개발하는 등 여러 가지 시도를 했으나 별로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다가 호위선 체계를 갖추어 항해하는 것이 최상의 방책임을 알게 되었다. 호위선들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상선 선단을 보호했다. U-보트는 고립된 선박은 쉽게 공격했지만 호위선단은 함부로 공격하지는 못했다. 대전 마지막 해인 1918년 여름에 호위선단은 매월 미국군 25만 명씩을 유럽에 실어 나름으로써 독일에게 치명타를 가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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