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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미국의 1차대전 참전

70. 미국의 1차대전 참전

 

윌슨 대통령, 대독일 선전포고(1917)

 

1차 대전 때 미군의 징병 모집 포스터

 

1914년 전쟁이 발발했을 때 미국인들은 조상에 따라 두 편으로 나누어졌다. 대체로 중서부 사람들과 최근에 이민 온 사람들은 동맹국(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중부 유럽국을 일컬음. ‘중추국이라고도 부름) 계통이 많았고 아일랜드인들은 물론 영국편이 아니었다. 동맹국과 연합국(영국 · 프랑스 · 러시아 등 3국 협상 가담국가들) 양측은 모두 미국인들을 상대로 엄청난 선전전을 전개했다.

미국 정부는 중립을 선언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연합국 편으로 기울었다. 많은 미국인들에게 독일은 군국주의와 독재의 상징과 같았으며, 반대로 영국과 프랑스는 문화적으로 훨씬 가까운 나라였다.

전쟁 중 미국은 전쟁물자 수출에 열을 올렸다. '어느 측이든지 돈만 가져오면 제한 없이 가져갈 수 있다(cash-and-carry)'는 원칙을 표방했다. 결과적으로 1916년 말경 미국은 연합군의 보급창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미국의 대연합국 수출액은 그들의 대미 수출액의 4배에 달하고, 미국인 투자가들은 연합국 측에 엄청난 액수의 차관을 제공했다.

해운권 때문에 미국은 영국 · 독일 양쪽과 가끔 분쟁을 겪었으나, 독일과 훨씬 더 심각한 사건에 부딪혔다. 영국은 미국이 네덜란드나 스칸디나비아 국가들과 교역하는 것을 방해하곤 한 데 비해 독일은 영국 선박에 대한 잠수함전을 중립국 선박에까지 확대시킨, 이른바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폄으로써 미국인들로부터 큰 분노를 사게 되었다.

19155월 영국 상선 루지타니아(Lousitania)호가 격침되고 그 안에 탄 사망자 1,198명 속에 미국인 희생자가 128명이나 되자 미국 내 반독일 여론은 비등하기 시작했다. 미국정부의 강력한 항의를 잠재우기 위해 독일은 무제한 잠수함 작전 중단을 선언했다. 그러나 19172월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의 강력한 제의로 독일은 다시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영국 함선을 격파하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다른 대안이 없으며 미국을 무시해도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무렵 독일 외상 치머만(Zimmermann)이 멕시코 주재 독일대사에게 보낸 비밀전문 내용이 영국해군 정보부서에 의해 공개되면서 미국의 대독일 감정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 그 전문에서 독일은 멕시코에 대해 미국침략을 감행하면 그 대가로 미국 남부를 획득하도록 보장하겠다고 한 것이다. 드디어 191746일 윌슨 대통령은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를 했다.

미국이 선전포고했다고 해서 전세가 당장 연합군 측으로 기운 것은 아니었다. 미국은 늘 그랬듯이 이 전쟁에도 준비가 덜 된 상태로 뛰어들었다. 13만 명밖에 되지 않는 군대로 세계대전에 뛰어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원정군을 편성해 유럽에 보내는 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데, 그동안이 문제였다.

1917년 전선의 변동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으나, 연합국은 여러 차례 위기를 맞이했다. 첫째, 독일 잠수함에 의한 피해는 견디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전쟁 중 연합국과 중립국 측 선박 피해는 1,500만 톤에 이른 데 비해 새로 건조하거나 나포한 선박은 1,300만 톤에 지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연합국 측 경제는 큰 타격을 입고 있었다. 영국 선박은 지중해를 피해 멀리 희망봉으로 우회해야 했고, 이탈리아는 공장들 상당수가 가동을 중단했다.

둘째, 프랑스군은 조프르 후임인 최고사령관 니벨(Nivelle)의 무모한 작전으로 말미암아 와해 직전에 도달했다. 19174월 엔 강에서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가 일주일 만에 약 15만 명이 넘는 손실을 입고 그 후유증으로 100건이 넘는 집단 하극상 사건이 발생했다. 이 위기는 새로 교체된 페텡(Petain)에 의해 수습되기는 했지만, 프랑스군이 전투력을 회복하는 데는 상당 기간이 걸렸다.

셋째, 러시아는 3월 차르 정부가 붕괴하고 11월에는 볼셰비키 혁명정권이 들어서면서 완전히 방향을 전환하고 전선에서 떠났다. 그들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독일과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동부전선에서 독일의 승리를 완전히 인정해주고 말았다. 이로써 소련은 러시아 제국의 땅 1/4과 철과 석탄 자원 3/4을 잃었다. 한편, 독일은 주둔병력을 제외한 나머지를 동부에서 서부로 보내 서부전선을 보강할 수 있게 되었다.

1918년 봄, 독일군이 서부전선에서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을 때 독일군 대 연합군의 병력 비는 156:125만으로 독일군이 우세했다. 이 공격에서 독일군은 솜 강에서 영국군과 프랑스군을 분리시키고 드디어 전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때부터 미군도 본격적으로 전선에 병력을 투입할 수 있게 됨으로써 연합군은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7월 말에 이르렀을 때 병력 비는 140:168만으로 연합군이 우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미국은 징병제를 도입해 대군을 편성하고 약 6개월 이상의 국내 훈련과 2개월의 해외 훈련을 끝낸 다음부터 사령관 퍼싱(John J. Pershing) 장군 휘하에 원정군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총 200만 명이나 파견했다. 이로써 숫자에서 압도하게 된 연합군은 19189월 전쟁에 지친 독일군에 대한 대반격 작전을 실시하기 시작했고, 11월에 독일로부터 무조건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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