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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탱크의 출현

69. 탱크의 출현

 

솜 전장에서 최초 사용(1916)

 

1차대전 중 최초로 등장한 영국 탱크

 

마른 전투 이후 서부전선에서 양쪽 지휘관들은 교착된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그 방법을 찾기 위해 골몰하고 각종 시행착오를 반복했다.

모든 전선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회는 불가능하고, 그렇다고 어느 한 곳에 병력을 집중하는 재래식 방법으로는 너무나 많이 발생하는 인명손실을 견뎌내기 어려웠다. 따라서 무모한 공격보다는 우선 방어가 최선이라고 여기고 방어진지들을 강화했다. 참호 내에는 깊은 대피호를 마련함으로써 상대방 포격으로부터 안전하게 머물러 있을 수 있었다.

방어력의 핵심은 기관총이었다. 병사들은 참호 속에서부터 라이플과 기관총으로 사격을 가했다. 기관총은 소나기처럼 실탄을 연속 발사함으로써 적의 접근을 막았다. 처음에는 대대당 두세 정이 할당되었으나 나중에는 수십 정이 배정되었다.

그러나 승리는 결코 방어로만 이루어낼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공격 없이 방어로 일관되는 전쟁은 정부 · 국민 · 군인 모두가 싫어하게 되어 있다.

전선을 돌파하기 위한 여러 가지 공격방법이 등장했다. 가장 많은 시도를 한 것은 포격방법이었다. 요는 어떻게 조직적으로 적의 철조망과 기관총을 무력화시키는 포격을 실시할 것이며, 그 뒤 보병공격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었다.

처음에 대포는 질이나 수량에서 독일이 앞섰으나 나중에는 서로 비슷해졌다. 전쟁 동안 보다 위력 있는 대포가 많이 개발되었다. 영국은 6인치, 8인치, 9.2인치 곡사포를 주로 사용했고, 독일이 사용한 대포에는 초대형인 17인치 포가 있었다. 오래전에 폐기된 박격포가 다시 등장하여 참호전에서 맹위를 떨쳤다. 포탄도 여러 가지 용도와 보다 고성능의 제품이 쏟아졌다.

광범위하게 분산 배치된 대포는 점점 집중화되어 공조 체계를 이루고 적시적소에 집중 포격을 가했다. · 무선 전화와 관측 비행선 등으로 함께 체계를 이루고 상당한 수준의 포술 발전을 이룩했다. 처음에는 며칠 동안 집중적인 준비 포격을 가했으나, 그 방법으로는 기습효과를 발휘하지 못하자 나중에는 짧은 시간의 준비포격을 채택했다. 보병이 공격할 때는 그들 전방에 포격을 해 탄막을 치게 했다. 그러나 탄막의 위치를 정확히 어디에 설정하고 보병과 어떻게 긴밀하게 협조할 것인가 등의 과제는 쉽게 풀리지 않았으며, 그런 동안 수없이 시행착오가 반복됐다.

1915년 이프르 전투에서 독일군은 사상 최초로 독가스를 사용해 전선돌파를 시도했다. 주로 염소가스였으며, 질식 · 최루 · 수포 등에 의한 살상 효과를 나타냈다. 이 공격에서 독일군은 영국군 2개 사단을 격파했으나, 독가스로 오염된 공기가 정화될 때까지 오랫동안 기다려야 했기에 신속한 돌파로 이어가지는 못했다.

양측의 전선 돌파를 위한 전술 및 무기 개발 노력 가운데서 가장 혁신적인 것으로는 연합군 측이 최초로 전차(탱크)를 개발해 사용하게 된 점을 들 수 있다.

1914년 가을 참호전 양상을 목격하게 된 영국의 공병장교 스윈턴(E. D. Swinton) 중령은 적 포탄 세례와 기관총 및 철조망을 극복하고 전진할 수 있는 전차를 개발할 것을 육군성에 건의했다. 전쟁 전에 이미 개발된 장갑차량과 무한궤도 트랙터를 함께 결합하고 공격용 기관총과 경포를 장착하자는 그야말로 기발한 아이디어였다.

스윈턴의 제의를 환영한 것은 육군이 아닌 해군이었다. 해군상 처칠은 '상륙함 건조 위원회'를 편성하고 비밀리에 전차 제작사업을 추진시켰다. 제품의 명칭은 보안을 유지하고 적으로 하여금 식수 저장 시설로 오인하도록 하기 위해 '탱크'라고 붙였다.

최초의 전차는 다른 발명품이 초기에는 다 그러하듯 완전하지 못했다. 시간당 4마일로 속도가 느리고 행동반경도 좁았다. 기관총을 사용한 전차도 있고 해군 함포를 탑재해 사용한 전차도 섞여 있었다. 탱크는 1916년 솜(Somme) 전투에서 최초로 사용되었으나, 진흙땅에서 여러 결함을 보이며 기대만큼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영국군은 1917년 캉브레(Cambrai)에서 전차를 사용해 전선돌파에 성공했다. 324대의 전차를 준비포격 없이 집중 운용해 독일군 전선을 강습했다. 전차 3대당 보병 1개 소대가 후속해 공격했다. 동시에 포병은 적 포대에 대해 집중포격을 퍼부었다. 첫날 공격에서 상당수 전차가 고장이 난데다가 예비대가 부족한 탓으로 이튿날의 공격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당시 상황에서 하루 만에 4마일 가량 돌파한 것은 꽤 성공적인 것이었다.

그 후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전차전술을 정교하게 다듬어갔다. 한편 독일군 참모본부는 연합군 측이 전차를 개발해 사용하는 것으로부터 충격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개발하는데다 최우선권을 부여하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첫째, 물자가 부족했기 때문이고 둘째, 그것에 큰 관심을 보이는 경우 독일군 사기에 악영향을 미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독일군은 대전이 끝날 때까지 통틀어 45대의 전차를 제작했다. 반면 영국은 3,000여대 이상의 전차를 제작했고, 프랑스는 1918년에 들어서서는 매주 50대의 경전차를 생산했다.

1차대전 때 등장한 전차는 그것만으로 전쟁을 종결지을 만큼 위력을 떨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미래 지상전에서 참호전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로서의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후에 독일군이 2차대전을 준비하면서 가장 중점을 둔 분야는 전차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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