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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서부 전선 교착

68. 서부 전선 교착

 

마른 전투 이후 참호전 양상(1914~ 1918)

 

독가스에 오염된 병사들이 병원으로 후송을 기다리고 있다.

 

1914년 늦여름 유럽은 각국이 전쟁에 뛰어들면서 수백만 명이 거리에 운집해 대중 집회들을 열고 전쟁 선포를 환영하는 분위기 일색이었다. 조국을 수호하겠다는 애국심과 더불어 승리에 대한 자신감의 발로였다.

84일 독일군은 슐리펜 계획에 따라 백만 명이 벨기에를 침공하고 메츠 남쪽의 국경지역에서도 프랑스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리에주 요새를 함락시키고 벨기에군을 앤트워프로 몰아내는가 하면 프랑스군을 도처에서 퇴각시킴으로써 독일군은 서전을 꽤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그러한 성공이 얼마나 오래 갈지는 두고 볼 일이었다. 왜냐하면 독일은 홀로 프랑스 · 러시아 · 영국 3대 강국과 싸워야 하며, 게다가 이들 3대 강국에 대해 미국이 지원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전쟁계획 ‘17계획은 독일군의 의도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채 작성된 것으로 완전 실패작이었다. 그러나 구체적 기동계획 없이 대략적인 집결지만 표시한 엉성한 계획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프랑스군 사령관 조프르가 17계획의 비현실성을 곧 인정하고 그것을 독일군 진격을 저지시키는 적절한 방어계획으로 신속히 전환해 대처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전쟁계획도 대단한 것은 못되지만, 프랑스 정부 요청에 따라 동원이 덜 된 상태에서도 동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를 공격함으로써 독일로 하여금 처음부터 양면 전쟁의 큰 부담을 안도록 했다. 러시아군은 타넨베르크와 마주리아 호변 등의 지역에서 독일군에게 크게 패배했으나 남쪽의 오스트리아 · 헝가리군에게는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사실상 독일군은 동맹군이 있었지만 혼자 싸운 것이나 다름없었다. 왜냐하면 동맹군은 전투력이 워낙 별 볼일 없는데다가 의욕도 마지못해 싸우는 식이었기 때문이다.

8월 하순 서부전선 상황은 독일군과 프랑스군이 다 파리를 향해 하루 20마일씩 행군했다. 그러나 파리를 수호하기 위해 알자스 · 로렌에서부터 이동해 오는 프랑스군의 속도가 더 붙고 독일군 우익의 속도는 처지기 시작했다. 독일군은 파리에 육박하면서 보급난을 겪고 병력도 충분치 않음을 절감했다. 설상가상으로 최고사령부는 동부전선의 위협 때문에 2개 군단의 병력을 서부에서부터 동부로 이동하도록 조치했다.

독일군은 파리를 점령하려는 계획을 포기하고 파리 문전에서 동남쪽으로 진출했다. ‘망치머리를 길게 잡는 대신에 짧게 잡아 치자는 개념이었다. 그러자 파리에서 이미 강화되고 새로 편성된 병력과 영 · 원정군은 역으로 독일군 우익의 노출된 측면에 위협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대충돌이 벌어진 것이 95~10일의 마른(Marne) 전투였다. 이 전투는 약 200만 명이 맞붙은, 그때까지 전례가 없는 최대 격돌이었다.

독일군은 마른 전투에서 패배했다. 그들은 '망치머리' 역할을 한 제1군과 제2군 간에 큰 간격이 생김으로써 위기를 맞았으며, 그 뒤 더 이상 진격할 수 없음을 깨닫고 마른 강에서 엔 강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연합군은 이 전투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둔 것은 아니나, 파리를 지키고 독일군의 진격을 정지시키는 데 성공함으로써 심리적인 승리를 쟁취했다.

6주 내에 프랑스를 함락시키려는 슐리펜 계획은 마른 전투에서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 독일이 벨기에를 침공해 기동전을 펼치고 국경지역과 마른 지역 전투에서 양측이 입은 전사자의 숫자는 50만 명에 달했다.

이 단계에서 독일의 전쟁 계획은 실패라고 말할 수 있겠으나, 그렇다고 전쟁이 곧 끝날 만큼 전황이 어느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진 것은 아니었다. 사실상 1차대전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각국 참모본부가 수립한 단기결전 계획의 과오를 증명하는 데 약 40일 정도의 기간이 소요되었고, 그 후 전쟁은 일찍이 블로흐가 예언한 장기전과 소모전 양상을 보이며 거의 4년을 끌게 되었다.

마른 전투 이후 양측은 서로 정면을 공격할 만한 여력을 잃어버렸으며 그래서 서로 측방을 우회해 기동공간을 확보하려는 경쟁을 벌였다. 그리고 확보한 땅은 참호를 파고들어 가 지키려 함으로써 방어에 치중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른바 '바다를 향한 경주'에서 양측은 참호선을 북쪽 해안의 뉴포트 항구까지 연결짓고 남쪽으로 스위스 국경까지 뻗게 하는 공사를 벌이며 서로 팽팽히 대치했다.

10월에 독일군은 주요 항구인 앤트워프를 점령하는 작전을 전개해 성공하지만, 이 작전에서도 독일군은 엄청난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36,000명의 학도예비군을 투입시켰는데, 그 가운데 온전하게 살아남은 자는 6,000명에 불과했다. 히틀러는 그중 한 생존자였다.

11월 양측은 스위스에서 해협까지 약 500마일의 참호 진지 공사를 완료하고 그 안에서 서로 마주 보고 싸우게 되었다. 진지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철조망과 콘크리트로 단단하게 구축되어갔다. 화력의 엄청난 파괴력 때문에 기동전이 불가능해지고 그에 따라 전선은 큰 변동이 있을 수 없었다. 뚜렷한 승리나 패배가 없는 전투상황이 지속되는 가운데 사상자 숫자만 엄청나게 불어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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