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1차 대전 전야
사라예보에서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1914년)

사라예보를 방문한 페르디난트 대공 부처
1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 유럽은 정치적 · 군사적으로 마치 복마전과 같았다. 위대한 정치가이면서 저명한 역사가였던 윈스턴 처칠은 1차 대전의 원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흔히 인간지사는 계획보다는 과오 투성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가장 훌륭한 사람들도 제한된 사고와 흔들리는 권위로 말미암아 엄청난 문제를 일으키고, 그 문제는 다시 통제 범위를 벗어나 더 큰 문제로 변해버리는 경우가 흔히 일어난다. 1차대전 전 사건들은 일정한 궤도를 타기 시작했고 그러자 아무도 그 궤도를 벗어날 수 없었다. 독일은 가장 완고하고 무모하게도 그러한 궤도로 빠져들었으며, 우리 모두를 그 속으로 끌어들였다.”
대전 발발 책임을 독일에게 모두 돌리는 것은 부당하다. 다만 어느 나라보다도 독일이 가장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비스마르크 시대에 독일은 통일을 이루고 그의 찬란한 외교활동에 힘입어 유럽의 평화를 주도했다. 그러나 젊은 황제 빌헬름 2세의 등극 2년 뒤였던 1890년에 그가 보수적이고 노회한 비스마르크를 해임하고 보다 모험적인 외교 군사정책을 도입하면서 유럽의 국제정세는 큰 변화와 함께 새로운 긴장 속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빌헬름 2세는 독일인들에게 ‘태양의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식의 여론을 이끌며 민족주의적 감정을 부추겼다. 게다가 독일뿐만 아니라 다른 열강들의 국내 정치의 주요 흐름을 보면, 중산층 이하의 거센 도전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보수주의자들이 기득권을 누리기 위한 방편으로 민족주의자들과 결탁하여 군사력을 양성하는 정책과 각국 간 제휴 및 동맹을 맺는 정책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1894년 빌헬름 2세는 해상력의 예언자 머핸의 책 《역사에 미친 해군력의 영향》으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았다. 독일을 세계 최강국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대함대를 건설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 그는 티르피츠(Alfred von Tirpitz) 제독에게 영해군을 능가하는 해군력을 양성하라는 특별임무를 부여했다. 티르피츠는 영국이 전통적인 숙적 프랑스나 러시아와 제휴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가정과 함께 독일이 지속적으로 해군력을 증강하면 어느 날 영해군을 격파하고 세계의 제해권을 장악할 날이 오리라는 환상 속에서 지냈다. 그는 프랑스 · 러시아 · 영국의 3국 연합 결성을 예측하지 못했고, 또한 영해군의 지리적 이점, 즉 영국해협과 북해 출구에서 독일해군을 쉽게 봉쇄할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다.
독일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다는 공동 인식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1904년 불편한 관계를 해소하고, 그 뒤 모로코 위기를 만들어낸 독일의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보다 긴밀한 협조관계를 발전시켰다. 1907년에는 영국과 러시아가 유사한 협상을 이끌어냈으며, 1912년에는 영국과 프랑스는 상호간에 매우 중요한 군사적 지원을 약속하기에 이르렀다. 즉, 영국은 지중해에서 해군을 북해로 전환하고 대신 프랑스는 지중해 상에서의 영국 이권을 보호해준다는 것이며, 이보다 더 중요한 약속은 프랑스가 독일로부터 침략을 받는 경우 영국은 원정군을 파견한다는 내용이었다.
1차대전은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황태자 페르디난트 대공이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에서 한 세르비아 청년으로부터 저격받아 피살된 사건이 일어나자, 그 뒤 한두 달 사이에 여러 국가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한꺼번에 전쟁에 뛰어들면서 시작되었다. 사라예보에서의 권총 한 발이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화약고에 불을 댕긴 것이다. 그러나 사라예보 사건은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것에 불과하고, 사실상 기폭제와 도화선은 일찍부터 준비되어 있었다.
오스트리아 경찰이 진상조사에 나서려 했으나 유럽인들은 별로 호응을 보이지 않았고 신문들도 암살사건을 크게 다루지 않았다. 영국은 사건을 진정시키려 하면서 독일도 조용한 처리를 원하고 있다고 순진하게 믿었다. 그러나 독일은 이중 플레이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영국의 노력에 대한 지지를 표면적으로 보내면서 배후에서는 오스트리아를 부추기고 드디어 모든 지원을 보장하겠다는 의미의 백지수표를 끊어주었다.
7월 23일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보내고 세르비아 측으로부터 양보를 의미하는 응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28일에는 선전포고를 발했다. 이어서 슬라브계 민족의 후원자인 러시아가 오스트리아에 대항해 군을 동원하고, 그 후 독일 · 영국 · 프랑스 · 터키 등이 각국의 동맹조약에 따라 차례로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밖에 다른 작은 나라들도 이해관계에 따라 3국 연합 측 또는 3국 동맹 측을 선택하여 가담함으로써 전쟁은 두 동맹체제 간의 큰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사실 암살사건이 일어났을 때 유럽인들이 그것을 호기로 삼아 모두 전쟁에 뛰어든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정치가들은 진정으로 전쟁을 막으려고 노력하지는 않았다. 모두들 오랫동안 전쟁을 예상 준비했고, 따라서 한판 승부를 벌일 만하고 나름대로 다들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외교가들은 허세를 부리며 자국 편에 유리한 방향으로 생각하고, 군사전략가들은 공격적인 작전계획을 세우고 그러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것만이 남았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전쟁결과에 대해 지독하게들 낙관한 것이다. 바로 1차대전은 그러한 상황이 각국 간의 경쟁 및 적대관계를 돌이킬 수 없는 위험 지경으로 몰고 가 전쟁이 일어남으로써 발발된 대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