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보어 전쟁
무연화약과 자동소총 시대 예고(1899년 ~ 1902년)

보어 전쟁에서 최초로 사용하기 시작한 맥심 기관총
19세기 말 남아프리카에서 영국군은 라이플이란 현대무기를 사용해 아프리카 최고의 전사들인 줄루(Zulu)족을 물리치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들의 지속적인 식민지 확장정책을 유지시키는 데 있어서는 또 다른 큰 식민지전쟁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네덜란드의 이주민인 보어(Boer) 인들이 모여 사는 보어 공화국에서 새로 발견된 트란스발 지방의 금광 노다지는 공화국과 영국 간에 긴장을 고조시켰다. 바로 문전까지 이른 대제국 영국이 그곳에 탐욕의 손길을 뻗치려 한 것은 그 시대의 조류로 볼 때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드디어 1899년 10월 보어 공화국 군대와 영국식민지 군대 간에는 전면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물론 영국인들은 다른 식민지전쟁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어렵지 않게 성공하리라는 생각을 가졌다.
보어 공화국에는 정규전을 수행할 만한 정규 상비군은 없고 다만 엉성하게 편성된 민병 조직이 있을 뿐이었다. 무장단체를 이끄는 지휘관들은 전략 · 전술에 관한 군사지식이 없고 엄한 군기를 유지시킬 만한 능력도 없는 자들로서, 다만 소속을 함께 하는 강인한 투사들을 대표할 뿐이었다. 민병들은 주로 어려운 환경에서 강인한 생활을 한 농부들이었으며, 모제르(Mauser) 소총으로 무장한 뛰어난 사격수들이었다. 그들은 잘 아는 지형을 십분 이용, 끈질기게 저항하며 소규모의 근접전에 강한, 그야말로 천부적인 게릴라전 감각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보어인들은 말을 탈 줄 알면서도 전투 시에는 말에서 내려서 싸웠다. 그들은 또한 유럽의 많은 전문가들로부터 도움을 받음으로써 포술에도 능했다. 영국의 식민정책을 견제하는 다른 열강들은 노골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았지만 심정적으로는 보어인들 편에 있었으며, 암암리에 무기 및 군사기술을 수출했다. 보어인들의 가장 큰 약점은 조직력과 기강이 약한 것이었다. 지휘관이 작전에 들어가기 전에 제대로 점호를 취하기가 어려울 만큼 군기가 잡혀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투에서 적을 앞에 두고 도망가는 사건은 전혀 발생하지 않았기에 군기 이완이 전투 수행에서 그렇게 크게 문제되지는 않았다.
한편 영국군은 보어군에 비해 조직 · 훈련 · 군기 등에서 우수한 군대였으며, 직업군인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수적으로 열세할 뿐만 아니라 적과 지형에 대해 너무 몰랐고, 그런데다가 적을 너무 과소평가했다.
1만 명도 못 되는 식민지 주둔 영국군은 그 몇 배에 이르는 보어인들의 공격을 받고 레이디스미스 · 킴벌리 · 마페킹 · 콜렌소 등 전장에서 크게 패배했다. 무엇보다도 영국군에게 치명적인 사실은 보어인들에게 거의 피해를 입히지 못한 채 그들만이 일방적으로 엄청난 인명 손실을 입었다는 점이었다. 영국군이 용감하게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사상자가 많이 발생한 것은 그들이 사격술에서 보어인들보다 뒤진 데다, 또한 지형을 활용하지 않고 몸을 노출시킨 채 싸웠기 때문이다. 반면에 보어인들은 몸을 숨긴 채 사격을 하고, 순간적으로 노출되는 적의 팔다리를 명중시킬 만큼 정확한 사격술을 보였다.
영국군에게 12월 둘째 주는 ‘암흑의 일주일’이었다. 도처에서 사상자가 극에 이르고, 게다가 아직도 보이지 않는 적 때문에 차후 상황이 더욱 어두워 보이기만 했다.
만일 보어군이 기강이 잘 잡힌 군대였다면 그들이 초기에 이룬 승리를 그대로 놓치지 않았겠으나, 그들은 그러지를 못했다. 지휘관들은 병사들이 날뛰고 이미 전투가 종료된 것처럼 취하는 개별행동에 대해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아무리 잘 싸워도 기강이 흩어져 있으면 그 군대는 궁극적인 승리를 거머쥐지 못하는 법이다. 보어군이 초기의 대승에 도취되어 있는 동안 영국인들은 명예회복을 위해 발 벗고 나섰다. 처음과는 반대로 그들이 끈기를 발휘하면서 보어인들을 굴복시키는 방법을 찾아냈다. 그것은 대군을 편성하고 또한 서두르지 않는 작전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1900년 초 영국은 대제국의 체면회복을 위해 본국과 캐나다 · 오스트레일리아 · 뉴질랜드로부터 가용 인력자원을 총동원해 대규모 증원군을 편성했다. 사령관에는 인도에서 실전경험을 쌓은 베테랑 지휘관 로버츠(Lord Frederick Roberts) 장군을, 그리고 그 참모장에는 일급 조직가인 키치너(Horatio Kitchener) 장군을 임명했다.
그해 2월 작전을 개시한 영국군은 보어군을 격파하기 시작했고, 곧이어 여름에는 중심지를 함락시켰다. 공화국 대통령은 유럽으로 도주했다. 그 후에도 보어인들은 2년 이상 게릴라전을 펴면서 끈질기게 저항했다. 그러나 키치너는 조직적인 잔인한 방법으로 보어 공화국 전 지역을 철저히 파괴하고 가시철망을 둘러쳐 구획정리한 다음, 게릴라 소탕작전을 치밀하게 전개했으며, 그 결과 1902년 봄 보어인들의 저항을 완전 종식시키고 오렌지 자유국과 트란스발 지방을 영국식민지에 추가시킬 수 있었다.
영국군의 보어 전쟁 승리는 순전히 숫자로 이룬 것이었다. 최초 주둔군 1만 명으로 싸우기 시작했으나, 2년 반이 지난 다음에는 30만 명이 참전했다. 보어인들뿐만 아니라 영국인들에게도 결코 작은 전쟁이 아니었던 보어 전쟁에서의 경험을 거울삼아 전후 영국, 육군은 보병훈련을 크게 강화하는 방향으로 군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군 간부들은 자기들이 결국 승리했다는 자만에 깊이 빠져 초기에 왜 패배했는지, 즉 무연화약과 자동소총 등 현대화기가 방어전에서 대단히 큰 위력을 떨치게 되었다는 참 교훈을 제대로 터득하지 못했으며, 그러다가 1차 대전 중 값비싼 수업료를 치른 다음에야 그 쓰라린 교훈을 재확인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