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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기관총과 신무기 등장

62. 기관총과 신무기 등장

 

20세기 전쟁 양상을 결정짓다(1883)

 

20세기 초 최강의 전함이었던 영국의 드레드노트 호

 

1871~1914년 제국주의 시대에 열강들이 벌인 군비경쟁의 결과 각국 군대는 무기체계를 크게 바꾸게 되었다. 산업혁명에 힘입어 새로 등장한 많은 무기를 채택하게 된 것이다.

개개인이 휴대하는 소화기로는 오늘날처럼 강선소총(라이플) · 권총 · 카빈(본래 기병이 사용한 짧은 총신의 라이플)을 갖추었다. 라이플은 탄창으로 장전하는 방법이 개발되었으며, 구경이 좁아지고 탄환이 가벼워지고 일직선 형태의 탄도를 유지하며 보다 정확히 빨리 발사되는 성능을 유지하게 되었다. 또한 연발총 · 기관총 · 속사포 등이 등장하고, 이러한 무기들에 새로 도입된 무연화약은 총의 위치를 노출시키지 않음으로써 전장의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총기 가운데 무엇보다도 가장 위력적인 발명품은 기관총으로서, 이 총은 실제 그 후 전장을 지배하는 무기가 되었다. 1883년 맥심(Hiram S. Maxim)이 최초로 특허를 낸 기관총은 방아쇠를 당기고 있는 한 자동적으로 계속하여 장전 발사되는 총이었다. 분당 수백 발씩을 발사할 수 있는 이 총의 장점은 곧 널리 인식되어 군에 빠르게 확산 보급되었다. 그러나 총과 총가를 합친 무게가 보통 45정도였기 때문에 공격보다는 방어용으로 적합하다고 볼 수 있는 이 총에 대해 당시 사람들은 공격 위주로만 생각하는 경향에 빠져 있었다.

대포는 지상용이든 바다에서든 모두 전장식에서 후장식으로 바뀌었다. 1890년에는 수압 완충기가 딸린 포가가 개발되었다. 1897년 프랑스에서 개발한 75밀리 대포는 그전의 야포에 비해 포탄 성능뿐만 아니라 분당 발사속도도 6~10발로 크게 향상되었다.

이러한 신무기가 내뿜는 화력에 대해 당시 공격 중시론자들은 무작정 돌격을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서도 기습적으로 공격하는 경우 어떠한 방어도 견디지 못하리라고 여전히 믿었다.

신무기는 공중에서도 출현했다. 일찍부터 영국 · 프랑스 · 독일에서 기구(氣球)가 발전되고 독일에서는 체펠린이 비행선을 발전시켰다. 1903년 라이트 형제가 최초로 하늘을 난 이후 비행기는 점차 공중에서 신속히 그리고 오래 날 수 있도록 개발되어갔으며, 군사적으로는 일단 정찰용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해군경쟁을 벌이는 가운데 유럽 군함들은 보다 강하면서도 얇은 철갑을 사용하고 대형 대포를 장착했다. 1904년 영국은 전함 드레드노트(Dreadnought) 호를 진수시켰다. 10문의 12인치 대포를 장착한 17,900톤의 이 배는 화력 및 속도에서 과거 어느 전함보다 앞선 것으로서 2차대전 때까지 주력함의 모델이 되었다. 동력장치로 증기 터빈이 도입되고 석탄 대신에 석유가 이용되었다. 그밖에 수뢰정과 잠수함 개발은 재래식 해전의 양상을 일변시킨 것이었다.

이와 같이 군에 놀라운 수준의 과학기술이 도입되었음에도 당시 군의 큰 문제점은 간부들이 그러한 기술에 대한 인식이 뒤떨어진 채 아직도 낡은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제독들은 넬슨의 범선 시대로부터 이어받은 전통에 집착했다. 그런가 하면 육군 간부들도 여전히 나폴레옹 식 전술과 작전개념을 갖고 있었으며, 다만 화력증대로 인한 공격력 강화만 중시하고 방어력 증가에 대하여는 정신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일관했다.

프랑스의 군사이론가였던 뒤피크(Ardant du Picq)나 포슈(Ferdinand Foch)는 공격 제일주의를 주장했다. 그들은 "신무기들은 결국 공격력을 증대시켰다"고 말하고 다만 화력 증대로 인한 정신력의 쇠퇴를 우려한 나머지 "승리는 왕성한 공격정신에 뒷받침된 공격력에 의해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사상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다른 유럽국들도 공유했다. 그리하여 각국 참모본부는 1차대전을 준비하면서 한결같이 공격적인 작전계획만을 궁리했다.

기관총과 신무기 등장으로 인한 방어력 증대에 대해 이 문제를 진지하게 걱정하는 군인은 없었으며, 다만 폴란드의 민간인이었던 블로흐(Ivan S. Bloch)가 외로운 주장을 펼친 바 있다. 1898년 블로흐는 그의 저서 기술 · 경제 및 정치적 측면에서 본 미래의 전쟁에서 새로운 화기로 말미암아 공격대형이 분산되고 방어가 강화되어,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 참호전의 양상을 정확히 예견했다. 사실 블로흐 이전 미남북전쟁에서 이미 사람들은 산병호에 의존하는 방어전을 치를 경우 공격이 얼마나 어려운가에 대한 교훈을 충분히 배울 수 있었다. 하지만 유럽 군인들 가운데는 남북전쟁의 교훈을 곱씹으려 하거나 또는 블로흐의 주장을 귀담아 들으려 한 자들이 거의 없었다.

러일전쟁이 발발하기 2년 전이었던 1902년 블로흐는 사망했는데, 러일전쟁은 그의 주장이 얼마나 옳았는가를 여실히 입증했다. 병사들은 호를 파고 총탄세례를 피함으로써 공격은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그에 따라 전투는 참호전으로 진행되고 양쪽에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하는 가운데 장기전화했다.

유럽 각국 군대가 충돌할 1차대전 전투 장소는 플랑드르 지방, 로렌 협곡, 폴란드 등이 되겠으나, 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유럽 군인들은 신무기 출현에 따르는 신전술을 연구하지 못함으로써 큰 재앙을 맞게 되었다. 유럽에서 멀리 떨어진 미개발 식민지에서 주로 비정규전 성격의 전투경험만을 쌓은 그들은 남북전쟁이나 러일전쟁의 교훈에 눈을 감았으며, 또한 블로흐와 같은 사람들의 합리적인 주장에 대해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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