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프로이센 · 프랑스 전쟁
독일 통일 이루다(1870년 ~ 1871년)

스당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이 노획한 프랑스 대포들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 전쟁이 끝나자, 프로이센과 프랑스 양국은 다음번 자기들 차례의 전쟁에 대해 예상하고 그에 대비하는 본격적인 군비경쟁 및 전쟁계획에 착수했다. 프로이센은 독일통일을 최대의 과제로 삼은 데 반해, 프랑스는 통일독일의 출현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충돌은 불가피하리라고 내다본 것이다.
나폴레옹 3세와 국방장관 니엘은 프랑스군을 프로이센군 수준 이상으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향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프랑스 국민들은 군 개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았기에 군대는 국민과 유리된 집단으로 발전되고 장교단도 사회적으로 멸시되었다.
1870년경 프랑스군은 기본적으로 직업군대로서 50만 명 수준이었으며, 위력적인 샤스포 강선소총으로 무장했고, 탄약과 보급품 사정도 결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계획과 참모업무에 있어서는 프로이센군보다 한참 아래 수준이었다.
그들은 18세기와 마찬가지로 평시 최고 수준의 부대를 연대로 제한하고 그 이상의 부대는 전시에 편성한다는 뒤떨어진 개념의 편제를 운용했다. 훈련도 결여되고 계획 · 편성 · 보급 · 철도 · 동원 등을 위한 효율적인 참모제도가 전혀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 다만 지휘관들 가운데는 과거 식민지 전쟁 출신으로 용기 · 기개 · 순발력 등에서 뛰어난 사람들이 꽤 있었으나, 그들도 나이가 많은 것이 흠이었다. 나폴레옹 3세는 기본적으로 수비 위주의 계획으로 전쟁에 임했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자 여론에 밀려 대책 없이 군대를 자르 지방으로 진격시킬 만큼 즉흥적인 면이 있었다.
한편 몰트케와 그의 일반참모본부는 1866년 전쟁에서의 실수를 심층적으로 분석한 다음에 여러 가지를 개선시켰으며, 특히 각 참모부서의 기능을 더욱 구체화하고 보다 효율적인 공조체제를 갖추었다. 몰트케의 계획은 프로이센군의 속도를 이용하여 가능한 한 신속히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는 1866년 이후 프로이센군 동원시간을 5주에서 18일로 절반 가까이 단축시켰다. 최초의 병력집중을 중요한 요소로 고려했으나, 그 후의 작전에 대해서는 융통성을 갖고 예하 지휘관들에게 최대의 권한을 부여했다. 프로이센 장군들은 임무만 명시된 명령에 의해 독자적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들을 갖추고 있었다.
8월 2일 프랑스군 사령부는 자르브뤼켄에 3개 군단을 집결시켜 싸움을 개시하도록 했으나, 그 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었다. 라인 지방에 집결한 프로이센군은 우익에 제1군, 중앙에 2군, 좌익에 3군을 배치했다. 몰트케는 3군을 국경 넘어 알자스 북부로 진격시킴으로써 프랑스군 우익을 포위하기 위한 작전을 펼쳤다. 이후 전황은 결코 몰트케가 계획한 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프로이센군 각 군은 예기치 못한 사건들에 부딪히고 여러 가지 실수를 연발하면서 혼전을 벌였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프로이센군보다 훨씬 더 허둥댔고, 무엇보다도 그들의 방어망이 무너지고 있는 데 대한 불안을 떨치지 못했다.
어느 편도 전쟁의 흐름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혼전 상황에서는 흔히 행운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 행운이라고 하는 것도 보다 용감하고 자신 있는 편에 굴러들게 되어 있다. 프로이센군은 때때로 프랑스군보다 더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전투를 치르기도 했으나, 어디까지나 자기들이 이기고 있고 프랑스군은 후퇴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자신감에 차 있었다. 장교들은 서로를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신뢰했다. 상관의 실책에 대하여 예하 지휘관들은 정보력과 충성심으로 무마하고 끝까지 따랐다. 병사들도 장교에 대한 신뢰로부터 여러 가지 실수를 기강과 용기로 보완했다.
국경 지역에서 퇴각한 프랑스군 주력부대는 9월 1일경 스당(Sedan)에서 프로이센군에 포위되었다. 프로이센군은 주로 포병 화력으로 프랑스군을 살상했다. 샤스포 강선소총 사정거리 밖에서 퍼붓는 위력적인 대포 공격을 받고 사면초가의 지경에 이른 프랑스군은 이튿날 항복하고 말았다. 프로이센군은 나폴레옹 3세를 포함한 104,000명의 포로를 잡았다.
스당 함락 소식과 함께 파리에서는 혁명이 일어나 제3공화국이 선포됨으로써 전쟁은 6개월을 더 끌다가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32세의 내무장관 강베타(Leon Gambetta)는 파리를 끝까지 사수할 것을 선언했다. 프랑스인들은 프로이센군의 파리와 메츠 포위에 맞서 끈질기게 저항했으며, 지방에서는 의용병들이 나서서 게릴라전을 펼쳤다.
그러나 공화정부의 결사 항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조직적인 프로이센 군사력 앞에 결국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1871년 1, 2월 파리와 기타 지역에서 활동하던 저항군은 모두 항복하고 말았다. 굶주림에 지치고 감기나 티푸스 등 병마로 시달리다가 죽은 자들이 전사자들보다 더 많이 나왔다. 빌헬름 1세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스스로 독일 황제임을 선언하고, 이제 이름을 독일군으로 바꾼 그의 군대는 파리 시가에서 개선 행진을 벌였다.
이 전쟁으로 프로이센군은 세계적 명성을 얻었으며, 많은 국가들이 프로이센군의 일반참모본부와 같은 기구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통일독일은 프랑스로부터 확실히 유럽 제1군사강국으로서의 자리를 빼앗았으며, 그에 따라 세계적인 군사사상의 흐름도 프랑스로부터 독일로 바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