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 전쟁
후장식 강선소총 등장(1866년)

황제 빌헬름 1세와 프로이센군 참모본부 요원들
나폴레옹에 의한 신성로마 제국 붕괴 이후 중부 유럽은 어느 한 나라에 의한 지배가 어려운 상황에 처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두 강국이 게르만족의 재통일을 위한 주도권 잡기 싸움을 벌였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게르만족 외에도 많은 이민족을 포함하고 있어 게르만족의 소원을 풀어주기에는 프로이센만 못했다.
프로이센은 '피와 철' 정책을 표방한 수상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를 따르며 그동안 개혁 · 육성해온 최고의 군대를 사용하여 덴마크(1864), 오스트리아(1866), 프랑스(1870)와 차례로 전쟁을 벌이고 또 잇따라 성공함으로써 독일통일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1861년에 등극한 황제 빌헬름 1세는 그의 야심적인 정치적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보다 강력한 군사정책을 추진했다. 신기술을 도입하고 대규모의 징집병을 훈련시키는 데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었으며, 프로이센 육군 일반참모본부에 막대한 권한을 부여했다.
1812년 창설된 일반참모본부는 효율적인 군 관리를 위해 편성되었으나, 차츰 최고 두뇌 역할을 맡아 군의 모든 문제를 기획하는 것뿐만 아니라 결정하는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다. 일반참모본부 출신 장교들은 쾌속도로 승진하는 특전을 누렸다. 1857년 참모총장으로 임명된 몰트케(Helmuth von Moltke) 장군은 황제를 정기적으로 알현하고 황제로부터 최고의 신임을 받았다. 그 바람에 수상 비스마르크와 가끔 알력이 생기기도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지나가는 과정에 불과했을 뿐, 수상과 참모총장 그리고 국방장관 룬(von Roon)은 독일통일을 이루는 데 있어 주요 역할을 한 삼총사였다.
1864년 비스마르크는 덴마크가 과거 독일공국이었던 슐레스비히를 합병하려 하자, 게르만 족의 민족주의를 부추기고 오스트리아와 합세하여 덴마크에 대한 손쉬운 승리를 거두었다. 그 뒤 그는 노련하게 홀슈타인을 배후 조종하고 그들로 하여금 오스트리아군을 축출하도록 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간단히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을 수중에 넣게 되었다.
다음 단계로 비스마르크는 독일연방 북부를 프로이센이, 그리고 남부를 오스트리아가 장악하는 방안을 공식적으로 제의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을 아예 동격의 나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식의 반응을 보이며 일언지하에 그러한 제의를 거절함으로써 두 국가는 곧장 전쟁에 돌입했다. 이때 프랑스는 두 나라 간 전쟁을 장기전이 될 것이라고 전망하며 적절한 시기에 개입하여 이익을 챙길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프로이센에게 상당히 불리한 점은 첫째, 독일연방 내 다른 국가들이 오스트리아 편으로 기울어 있고 둘째, 프로이센 영토가 동서 둘로 나뉘어 있으며 셋째, 보헤미아가 오스트리아군의 베를린 진격을 위한 좋은 발판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상의 불리한 점들을 몰트케와 일반참모본부는 역으로 이용했다. 그들은 1개 군으로 하노버를 점령하여 우선 분할된 영토를 합한 데 이어, 1866년 6월에는 3개 군을 철도를 이용하여 신속하게 이동시켜 곧장 보헤미아에 집결토록 했다. 이때 오스트리아군도 보헤미아 중앙으로 병력을 집결시켰지만, 1개 철도에만 의존한 결과 그 이동속도는 5개 철도망을 이용하는 프로이센군에 비해 훨씬 뒤졌다. 내선작전의 이점을 살리려 했던 오스트리아군 계획은 결국 시간에서 그 주도권을 빼앗김으로써 프로이센군의 전장 내 집결과 외선작전에 말려들고 말았다.
전쟁 전 몰트케는 전략철도 건설을 강조하고 그것을 강력히 추진하는 정부정책을 주도했다. 프로이센은 1860년에 이미 3,500마일의 철도를 확보했다. 일반참모본부는 계속 증설한 철도를 이용하여 군대를 신속히 동원하고 전개하는 방법에 대해 체계적으로 연구했다.
프로이센군의 속도에 밀린 오스트리아군은 7월 3일 베네덱(Ludwig von Benedek) 왕자 휘하 215,000명(작센 군 25,000명 포함)이 쾨니히그라츠 요새 전방에서 200,000명의 프로이센군과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그날 몰트케가 전신체계 고장으로 프로이센군을 2개군밖에 집결시키지 못한 것은 오스트리아군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날 하루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은 40,000명의 전사상자와 20,000명의 포로가 발생하는 참패를 당했다. 프로이센군 손실은 오스트리아군의 약 1/5에 불과했다.
전장에서 승패의 분기점을 이룬 중요한 요인으로는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 오스트리아군은 심리적으로 전투 전부터 이미 패배했다. 왜냐하면 사령관이 자신 없는 모습을 보이고 패배주의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프로이센군 병사들이 보유한 소총이 기술적으로 오스트리아군 소총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프로이센군은 이미 1842년부터 요한 드라이제(Johan Dreyse)가 발명한 니들건(needle gun)이라고 불리는 후장식(後裝式) 강선소총(rifle)으로 무장하고 있었던 데 반해, 오스트리아 보병의 개인화기는 아직도 전장식이고 게다가 강선소총이 아닌 활강소총(musket)이 많았다. 니들건을 가진 프로이센군은 훨씬 신속하고 정확하게 발사할 수 있었고, 또한 누운 자세에서도 쉽게 사격을 함으로써 대단히 중요한 이점을 누렸다. 오스트리아군이 1발을 사격할 때 프로이센군은 6발을 사격했다. 오스트리아군은 포병과 기병에서 우세했지만 니들건의 화력을 감당하지 못해 프로이센군의 평범한 정면공격에도 불구하고 크게 패배하고 말았다.
쾨니히그라츠 전투 후 빈으로 진출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군부 내에서는 이 기회에 합스부르크 왕조체제를 완전히 무너뜨리자는 주장도 있었으나, 현명한 비스마르크는 황제를 설득하여 진격을 중지시키고 협상을 추진했다. 그는 오스트리아를 반드시 점령하지 않고도 독일통일을 달성할 수 있으며, 또한 프랑스와 러시아가 가만히 보는 앞에서 집안싸움으로 나라를 완전히 피폐시켜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