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크림 전쟁
현대 과학 · 기술의 중요성이 입증되다(1853년 ~ 1856년)

세바스토폴 요새 포위전
크림 전쟁은 전술지도, 병참 체제, 통신 등이 치졸하여 러시아는 물론 영 · 프 연합군에게도 비참한 전쟁을 강요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약 40년간 유럽 군대는 큰 전쟁 없이 주로 나라 안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러시아와 프로이센은 아직도 대규모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으나 나머지 국가들은 소규모의 직업군대에 의존했다.
1853년에 발발한 크림 전쟁은 상당히 긴 기간의 평화와 빈 회의의 협력 체제를 동시에 무너뜨렸다. 이 전쟁의 발단은 다 기울어가는 오스만투르크 제국에 대해 러시아가 야욕을 드러내고 제국의 일부 지역을 점령한 데서 비롯되었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는 1848년 혁명으로부터 아무 영향을 입지 않고 헝가리인들의 독립운동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데 자신을 얻은 나머지, 발칸 지역에서 보다 공격적인 정책으로 나왔다. 그와 같이 발칸 반도를 통해 직접 지중해로 진출하려는 러시아의 남진정책을 결코 좌시할 수 없었던 영국과 프랑스는 오스만 지원을 선언하고 1854년 6월 콘스탄티노플에 원정군을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연합군과의 충돌을 두려워한 러시아는 일단 점령지에서 군대를 철수시켰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 정치지도자들은 여전히 러시아를 응징하기로 결의하고, 그해 9월 러시아군이 주둔하고 있는 강력한 요새 세바스토폴을 공략하기 위해 요새 북쪽 30마일의 해안에 군대를 상륙시켰다. 19세기 최대 규모의 상륙작전이었다.
아무 저항을 받지 않는 가운데 상륙한 연합군은 세바스토폴을 향해 진격했다. 이때부터 크림 전쟁은 양측 공히 잇단 실수와 준비 부족, 무모한 지휘로 인한 실패를 거듭거듭 보여준 전쟁이 되고 말았다. 콜레라가 창궐하고, 가을 폭풍우가 심한 흑해지역에 대한 사전 지식은 물론, 지도 한 장 갖지 않고 적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출정한 연합군은 요새를 포위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했고, 그 사이에 러시아군은 새로운 축성물들을 구축, 요새 방어를 강화시켰다. 연합군은 공성포가 도달할 때까지 한 달을 기다린 끝에 보루를 공격하기 시작했으나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번에는 증원된 러시아군이 반격을 시도했으나, 그들 역시 준비가 불충하여 실패했다. 발라클라바에서는 영국 근위기병이 무모하게도 러시아 포병부대를 정면공격하다가 참담한 실패를 맛보기도 했다.
그 후 러시아군은 개인호를 여러 열로 배치하는 참호전으로 나왔다. 두 달 후에는 폭풍우가 불어닥쳤고 이로 인한 피해는 교전에 의한 것보다 훨씬 더 컸다. 참호들은 종종 물 속 깊이 잠기고 그 안에서 병사들은 각종 질병으로 고생했다. 진창 속에 누워 있는 환자들이 즐비했으며, 전투로 사망한 숫자보다 질병으로 사망한 숫자가 훨씬 많았다.
동계작전에 대한 준비 없이 겨울을 보내고 전쟁비용이 늘어남에 따라 각국 정부는 큰 부담을 안게 되었다. 영국 내각이 총사퇴하고 러시아 황제도 러시아 군대의 무력함에 화병을 얻어 죽고 말았다. 이듬해 연합군 함대가 해안 일대를 완전히 봉쇄하는 데 성공한 이후 가을에 연합군은 드디어 세바스토폴을 함락시켰다. 모두 지쳐 있었으나, 오스트리아까지 러시아에 선전포고하고 나왔을 때 러시아는 마침내 연합군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백기를 들었다.
크림 전쟁은 성공보다는 실패가 많았던 전쟁이었으며, 연합군이 승리했다고 하나 어떤 큰 의미 있는 정치적 결과를 얻어내지도 못했다. 다만 그들은 러시아의 남진을 일시적으로 중단시키고 터키의 몰락을 1세기 정도 늦추는 데 성공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전쟁에서 과학과 기술은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바로 이 분야에서의 우세로 연합군이 승리했다는 사실이다.
첫째, 연합군은 처음으로 총신에 강선이 있는 소총과 현대적인 총알을 사용함으로써 구식 활강 화승총을 사용한 러시아군에 비하여 사거리 · 관통 능력 · 정확도 등에서 압도적이었다.
둘째, 연합군 해군은 범선 아닌 기선을 이용함으로써 터키와 크림 반도에 훨씬 용이하게 병력과 물자를 수송할 수 있었다.
셋째, 전신을 최초로 사용함으로써 연합국 정부는 각각 파리와 런던에서부터 현지 사령관과 교신을 했고, 종군기자들은 전황을 본국에 신속히 알릴 수 있게 되었다.
넷째, 이 전쟁은 의료부대를 크게 혁신시키고,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헌신적인 활동으로 간호체계를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여성들의 전쟁 참여와 더불어 지위향상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이 전쟁으로부터 앙리 뒤낭은 인도주의를 주창하며 국제적십자를 발족시켰고, 1864년에는 12개국이 최초로 일명 적십자조약이라고 일컫기도 하는 제네바 협약을 맺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