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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조미니와 클라우제비츠

55. 조미니와 클라우제비츠

 

전쟁술 개요(1837)전쟁론(1832) 집필하다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

 

나폴레옹 몰락 이후 유럽은 평화를 되찾고 비교적 오랜 기간 평화를 누렸다. 참혹한 전쟁을 경험한 각국 군주들은 도발을 자제하고 외교적으로는 메테르니히가 주도한 빈 국제회의를 정기적으로 갖고 열강 간에 세력균형과 협력을 도모하게 된 것이다.

평화를 구가하던 시대에도 각국은 어느 정도 전쟁 가능성을 대비하고 각국의 특수한 안보상황에 따라 군대를 편성 · 훈련 · 유지시켰다. 19세기 전반기 산업혁명과 인구의 폭발적 증가로 인한 변화의 물결은 유럽 각국에 점차 제국주의와 민족주의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산업혁명의 영향을 받아 군대도 부분적으로 새로운 무기와 기술을 받아들이고 미래의 전쟁에 대한 대책들을 강구했다.

신기술에 따르는 변화를 어떻게 수용할지에 대해서는 아직 자신이 없었던 군사이론가들은 주로 나폴레옹 전쟁이 남긴 교훈을 분석하고 그것을 기초로 하여 전술을 발전시키는 데 주안을 두었다. 통상 군인들은 앞서 일어난 큰 전쟁으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찾는데, 그런 점에서 19세기 유럽 군대는 나폴레옹의 그늘 속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나폴레옹 전쟁의 성격이 국민전쟁으로서 현대전의 발단을 이룬 만큼 그 전쟁에 대한 분석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다.

평화시대에 군사이론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드물고 별로 인기를 얻지 못했으나, 스위스 태생 조미니(Henri Jomini, 1779~1869)와 프로이센인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 1780~1831)는 탁월한 군사사상가로서, 오늘날까지 높은 평판을 받고 있는 군사고전을 저술했다. 클라우제비츠의 대표적 저서 전쟁론은 그가 죽은 다음 해인 1832년에, 그리고 조미니의 전쟁술 개요1837년에 출간되었다.

조미니는 파리에서 은행원으로 근무하던 중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전투에 관한 승전 벽보를 읽고는 프랑스군에 입대했다. 나폴레옹의 제갈공명이 되겠다는 포부와 함께 시대를 초월하는 전쟁원칙을 발견하려는 원대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조미니는 그의 능력을 나폴레옹으로부터 인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의 수석 참모 베르티에(Berthier) 원수의 방해로 말미암아 승진 및 출세하는 데 있어 벽에 부딪쳤다. 그러자 그는 1813년 러시아로 망명하여 러시아 장군으로 활약했다.

한편, 클라우제비츠는 베를린 사관학교에서 학교장 샤른홀스트 장군의 수제자였으며, 예나 전투 이후에는 프로이센군을 개혁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워털루 전투에서 참모로 참전했던 그는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뒤 1818년부터 수년간 사관학교 교장으로 재직했다. 이때 그는 강의를 할 수 없는 행정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전쟁이론을 글로 정리하여 유명한 전쟁론을 집필했다. 전쟁론은 탈고하기 전에 저자가 사망함으로써 그 유고를 저자의 부인이 출간한 일종의 미완성 작품이었다.

조미니와 클라우제비츠, 이 두 이론가는 이론적 접근방법과 핵심주제에서 많이 다르며 둘 사이에 끊임없이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이론은 상호보완적인 부분이 많고, 최초로 현대전의 기초이론을 정립함으로써 당대뿐만 아니라 그 후 오랫동안 세계적으로 군인들의 사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클라우제비츠의 저술은 너무 난해하여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것이 큰 약점이었다. 정치가의 동기와 인간의 심리적 현상을 깊게 분석하면서 전쟁의 본질을 다룬 그의 이론은 19세기 및 20세기 초까지는 주로 프로이센 군대에 이상한 방향으로 영향을 미쳤다. 프로이센군은 클라우제비츠가 현실전쟁을 설명하기 위해 설정한 '절대전쟁'의 개념을 잘못 해석하고는 그것을 현실에 적용하려는 노력을 하나의 정책으로 삼다시피 했다.

그러나 오늘날 독일 아닌 영 · 미에서 더 많이 읽혀지고 있는 전쟁론에 대하여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없다. 클라우제비츠 사상의 핵심은 그가 전쟁의 폭력성과 불확실성을 다루면서도 본질적으로 전쟁은 하나의 정치적 수단에 불과하다는 점을 갈파한 것이다. , 최상은 외교적 해결이고, 전쟁은 최후의 수단이라는 것이다.

19세기에 프로이센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는 조미니의 이론을 크게 환영했다. 그는 전쟁수행에 대해 기술적으로 분석했으며, 일반적으로 군인들이 주로 갖는 관심 주제를 명쾌하게 정리함으로써 큰 호응을 얻었다. 그리하여 결정적 지점에 적시에 병력을 집중하라는 등 그가 강조한 전쟁원칙은 각국 군사교리의 기초를 이루었다. 특히 나폴레옹을 존경하는 많은 군인들에게 조미니는 마치 나폴레옹의 전도사처럼 보였다.

그러나 여러 가지 원칙과 도해를 통해 전쟁수행을 너무 과학적으로 다룬 나머지 다른 면을 간과한 것은 조미니 이론의 큰 약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엄격히 말해 복잡다단한 전쟁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확실한 법칙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전쟁에서 사람들은 너무나 많은 불확실하고 예상하지 못한 요인들로 말미암아 고민하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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