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워털루 전투
웰링턴과 블뤼허의 승리(1815년)

워털루 싸움
1815년 6월 18일,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은 웰링턴 군을 맞아 분전했으나 블뤼허 군의 기습공격에 무너지고 말았다.
나폴레옹의 몰락은 그가 지나친 야심가로서 쉼 없이 타국을 정복하려 한 데서 이미 예정된 일이었다. 유럽을 수중에 넣은 후 그는 대륙봉쇄령을 선포하고 영국과의 모든 교역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그것은 영국이 바다를 장악하고 있는 한 비현실적인 정책이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영국과의 밀무역을 계속하며 프랑스의 지배에 저항했다. 1808년 나폴레옹은 스페인 왕을 강제로 폐위시키고 자기 형 조제프(Joseph)를 왕위에 앉혔다. 이 사건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인들로 하여금 거국적 민족항쟁에 나서도록 했고, 졸지에 프랑스군은 정규전 아닌 비정규전에 시달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원정군을 증강시켜 보았지만 이베리아반도에서 프랑스군이 처한 상황은 결코 호전되지 않았고, 그러자 오스트리아와 독일 곳곳에서도 동요와 함께 저항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연달아 무리수를 두어 1812년 러시아 정복을 위한 원정에 나섰다. 러시아에 침공해 들어가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그 후 춥고 배고픈 땅에서 러시아군의 초토작전에 견디지 못하고 나폴레옹 군대는 거의 자멸하고 말았다. 60만 명 가운데 무려 50만 명을 잃었는데, 포로 10만이었으며 전사 및 동상으로 사망한 자가 40만이나 되었다. 간신히 본국으로 돌아온 그는 1813년 새로 군대를 일으켰으나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제4차 대프랑스 동맹군에게 다시 패배했다. 그는 황제의 자리를 빼앗기고 그해 5월 엘바로 쫓겨났다. 엘바로 떠나는 배에서 나폴레옹을 존경하던 갑판장은 "우리 모두는 폐하가 다음번에는 좀 더 운이 좋기를 바라 마지않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1815년 3월 엘바 섬을 탈출, 다시 파리로 돌아와 이른바 백일천하 시대를 열었지만, 이미 재기불능 상태였다. 다른 유럽국들은 나폴레옹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그가 더 이상 전쟁을 원하지 않고 다만 프랑스를 통치하겠다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리하여 다시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나폴레옹 군대가 쇠퇴한 데 반해 다른 유럽 군대는 나폴레옹의 전법을 모두 터득할 만큼 충분한 경험과 훌륭한 지휘관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지지 않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라이프치히에서처럼 프랑스군을 격파하기 위해 보다 공격적인 연합작전을 구사할 수 있었다.
결국 1815년 6월 나폴레옹은 브뤼셀 부근의 워털루에서 영국의 명장 웰링턴(Wellington)과 프로이센의 명장 블뤼허(Gebhard Leberecht von Blücher)가 이끄는 동맹군에게 최후의 패배를 당했다. 워털루 전투가 끝난 뒤 웰링턴은 "나폴레옹은 구식으로 싸우고 우리는 신식으로 싸워 우리가 승리했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나폴레옹과 같은 나이였던 웰링턴은 나폴레옹과의 마지막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명성을 떨쳤고, 영국인들은 그 사실을 대단한 자랑거리로 내세웠다. 그는 나폴레옹과 같은 번뜩이는 재능은 없었지만, 확신과 끈기를 갖고 주도면밀하게 전쟁을 지휘하는 전형적인 영국식 명장이었다.
그러나 6월 18일의 워털루 전투를 살펴보면 웰링턴의 작품이라기보다는 프랑스군의 실수가 전투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사실상 결전 3일 전 웰링턴과 블뤼허의 군대는 너무 멀리 흩어져 있어 두 군대 사이에 위치한 나폴레옹이 초기 이탈리아에서처럼 보다 번개 같은 공격을 감행했더라면 동맹군은 큰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6월 16일 전투에서 나폴레옹 본인은 리니(Ligny)에서, 그리고 부하 장수였던 네(Ney) 원수는 카트르브라(Quatre-Bras)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그가 젊었을 때만 같아도 있을 수 없는 또 하나의 큰 실수를 저질렀다. 그는 리니 전투 후 프로이센군을 끝까지 추격하여 웰링턴 군대를 지원하지 못하도록 섬멸했어야 했다. 사실 블뤼허는 그곳에서 낙마로 부상을 입고 정상적인 지휘를 못하는 상태에 있었다. 만약 나폴레옹이 그랬더라면 블뤼허의 군대가 18일 웰링턴을 지원하기 위해 워털루에 나타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실수와 태만으로 승리의 호기를 놓치자 나폴레옹은 워털루에서 연합작전을 펼친 영국 · 프로이센 동맹군에게 병력 열세로 패배하고 말았으며, 이로써 그의 운명에 최후의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돌아올 수 없는 먼 곳 남대서양의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추방되었으며, 1821년 그곳에서 눈을 감았다. 향년 52세였다.
만일 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실수를 줄였더라면 어쩌면 승리했을지도 모르지만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대군이 그를 가만 두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비록 승리했더라도 프랑스 국민들은 더 이상 전쟁에서 견디지 못하고 나폴레옹을 지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프랑스 젊은이들은 약 20%가 목숨을 잃었다. 이 숫자는 총력전을 치른 1차대전 때의 25%와 엇비슷한 수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