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아우스터리츠 전투
프라첸 고지로 유인, 러시아군 격멸(1805년)

아우스터리츠에서 전투준비를 하고 있는 나폴레옹 군의 모습
황제 나폴레옹이 대제국을 건설하기 시작하자, 1805년 오스트리아 · 러시아 · 영국은 제3차 대 프랑스 동맹을 결성했다.
나폴레옹은 영국을 침략하고 싶어도 해군력 열세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대륙에 대한 공세를 펼치기로 결심했다. 당시 그는 최상의 육군을 거느리고 있었다. 절반가량의 병사들이 실전경험을 가졌고, 그동안 강도 높은 훈련으로 전투력을 다졌으며, 재능 있는 젊은 장교들이 지휘했다. 9명의 원수들 가운데 가장 고령이 50세였고, 가장 젊은 사람이 32세였다.
오스트리아 · 러시아 동맹군 규모는 프랑스군을 훨씬 능가하지만 그들은 흩어져 있었다. 따라서 나폴레옹은 그들이 합류하기 전에 선제공격으로 각개격파할 결심을 내렸다. 그는 라인강과 도나우강 유역을 축으로 하여 먼저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고 다음에 러시아군을 격멸한다는 전략을 수립했다.
오스트리아군은 이탈리아에 95,000명, 그리고 울름 지역에 72,000명을 배치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이탈리아에서 마세나 휘하 50,000명으로 적을 견제하도록 한 후, 자신은 21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9월 26일 라인강을 건너 약 10일 만에 도나우강에 도달했다. 그 후 울름을 포위하여 크게 승리한 다음에 오스트리아군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
이때 러시아군은 이미 오스트리아에 발을 들여놓은 상태였으며, 프로이센도 프랑스에 대해 반기를 들 태세를 보였다. 나폴레옹은 울름 전역 후 병사들이 지쳐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격이 최선의 방책이라는 생각으로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으로 진격했으며, 이어서 러시아군을 사냥하기 위해 나섰다.
그러나 쿠투소프(Mikhail Kutusov) 휘하의 러시아 · 오스트리아 동맹군은 교묘히 전투를 피하며 지연전을 꾀했다. 시간은 그들 편에 있으니 러시아의 제2군, 프로이센군, 그리고 이탈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오스트리아군으로부터 증원을 받은 후 반격을 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다.
나폴레옹은 함정에 빠진 듯싶었다. 그 무렵 트라팔가르 해전에서의 패배 소식까지 전해 듣게 되니 더욱 난감했다. 그러나 그 어려운 순간에 역으로 함정을 놓는 생각을 했으니, 그는 참으로 군사적 천재였다. 유리한 지형을 찾아낸 다음 그곳으로 적을 유인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아우스터리츠 후방에서 적이 계속 증원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한 나폴레옹은 바로 아우스터리츠 전방에서 행군을 멈추고 병사들을 쉬게 하는 한편, 적이 공격해오도록 미끼를 던졌다.
쿠투소프는 약 85,000명을, 나폴레옹은 73,000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전선의 우측을 엉성하게 노출시키고 쿠투소프가 공격해오도록 유인했다. 중요 지점인 프라첸 고지 후방에 예비병력을 숨기고 그곳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골드바하 강변에 약 40,000명의 병력을 노출시켰다. 쿠투소프가 약 2배나 병력이 많은 것처럼 착각하게끔 나폴레옹 군의 우측을 포위하도록 유혹하는 그야말로 정교한 작전계획이었다.
쿠투소프는 매우 신중했다. 나폴레옹 군의 병력 배치가 아무리 엉성해도 굳이 서둘러 공격할 이유가 없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동맹군 진지를 방문한 최고사령관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28세의 젊은 나이에 나폴레옹에 대한 승리를 눈앞에 둔 것처럼 믿었으며, 다른 아첨하는 부하들로부터도 부추김을 받아 12월 1일 진격을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그날 저녁 러시아군은 주력을 남쪽으로 이동시키고 다음날 새벽 공격을 개시했다. 나폴레옹은 자기가 구상한 계획 그대로 적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드디어 자신의 계획을 부하들에게 밝히고 만반의 태세를 갖추도록 명했다. 한편 그날 저녁, 쿠투소프를 포함한 러시아 고급장교들은 술에 취해 있었으니, 전투에 임하는 그들의 자세는 나폴레옹과 너무나 대조를 보였다.
이튿날 전투는 나폴레옹이 뜻한 대로 진행되었다. 러시아군 공격은 조잡하고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미끼로 내던져진 나폴레옹 군 우측은 적 공격을 잘 버텨냈으며, 그동안에 숨어 있던 중앙부대는 안개를 뚫고 나와 삽시간에 프라첸 고지를 점령하고 적을 두 동강 냈다. 프랑스군 중앙은 방향을 돌려 남쪽으로 진출한 러시아군을 포위하고 무자비한 공격을 가했다. 러시아군은 일부만 포위망을 뚫고 달아났을 뿐 대부분은 탈출하지 못하고 살상당했는가 하면, 얼음 섞인 호수에 빠져 익사하거나 생포되었다. 북쪽의 러시아군도 견디지 못하고 모두 도주했다. 이 전투에서 동맹군은 27,000명의 병력과 180문의 대포를 잃고 프랑스군은 7,000명을 잃었다.
이 전투 후 오스트리아는 동맹국 대열에서 이탈했으며, 그 대신 프로이센이 새로이 동맹국에 가맹하고 나폴레옹의 전 독일지역 지배를 막아보려 했다. 그러나 1806년 예나와 아우엘슈테트 두 지역의 전투에서 프로이센군 역시 괴멸되고 말았다.
1805~1806년 나폴레옹의 승리는 절정에 이르렀고, 이때 그는 사실상 유럽 대륙을 수중에 넣었다. 이제 한없는 정복욕을 가진 그에게 남은 문제는 어떻게 정복지역을 잘 다스리며 또한 영국과 러시아를 굴복시킬 것인가였으며, 결국 이 문제와 씨름하면서 그는 워털루 전투까지 10년을 보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