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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불세출의 군사 천재

51. 불세출의 군사 천재

 

전쟁의 신 나폴레옹(1769~ 1821)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칭기즈 칸 이래 가장 위대한 장군일지도 모른다.

 

1793년 이후 프랑스군은 잇달아 승리를 거두었다. 그들의 전술은 단순하고 많은 인명 손실이 따랐지만, 젊은 장교들과 정열적인 병사들로 모아진 군대에게는 적합한 전술이었다. 당시 전쟁은 경험과 기술보다는 용기와 의욕을 더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경보병이 먼저 공격하고 이어서 포병이 전방에서 포격을 가한 후 젊은 장교들을 앞세운 주력 보병이 총검을 꽂은 채 돌격했다. 이때 그들은 사기를 드높이기 위하여 함성을 질렀다. 프랑스군은 뛰어난 지휘관들을 많이 배출했다. 그 가운데서 가장 걸출한 자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였다.

나폴레옹은 1769년 지중해의 작은 섬 코르시카에서 태어났다. 그는 프랑스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포병 소위로 임관했다. 많은 전쟁사 서적들과 루소(J. J. Rousseau)의 저술을 탐독했고, 군사적으로는 드기베르(de Guibert)의 저술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

한편 프랑스 군인들은 혁명 후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혁명정부에 대해 실망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군대야말로 평등 정신과 능력 위주이며, 공동이익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최고의 이상을 펼치는 곳으로 생각했으나, 혁명정부가 차츰 부패하면서 군을 방치하고 또한 혁명 그 자체까지 부정하는 듯한 인상을 보여주자 군인들은 정부를 불신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군사적 명성을 떨친 나폴레옹과 같은 인물이 정치적 야심을 품은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 모른다.

나폴레옹은 1796년 절세미인이며 미망인이었던 조세핀과 결혼했다. 극적으로 그는 결혼 이틀 후 이탈리아군을 지휘하기 위하여 현지로 떠났다. 그의 나이 약관 26세였다. 38,000명을 거느린 사령관이었지만 47,000명이나 되는 오스트리아 · 피에몬테 연합군과 싸워야 했다.

이때 그는 병사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 다음과 같은 유명한 연설을 남겼다.

 

장병 여러분! 여러분은 헐벗고 굶주린 상태에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들에게 많은 빚을 졌습니다만 아무것도 줄 수 없는 형편입니다. 이런 난관 가운데 여러분이 지금까지 보여준 용기와 인내는 참으로 감탄할 만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에게는 아무런 조그만 영광도 얻은 것이 없습니다. 본인은 지구상에서 가장 비옥한 평야로 여러분을 안내하겠습니다. 풍요로운 지방과 부유한 도시 모두를 여러분은 마음대로 차지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명예와 영광과 재산을 발견할 것입니다. 장병 여러분! 여러분에게 용기와 인내가 부족합니까?”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군과 피에몬테군을 분리시키고 각각을 격퇴한 다음에 롬바르디 평야를 완전히 장악하기까지 12개월 동안 12차례의 승리를 거두었다. 신속하게 행군하고 유연하게 작전행동을 취하고 적의 취약 부분에 병력을 집중하여 연전연승했다. 이탈리아에서 프랑스군의 사기는 하늘 높이 치솟고, 동시에 나폴레옹의 인기도 급상승했다.

이탈리아에서 군사적 명성을 떨친 나폴레옹은 자신에 대해 대단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하겠다는 야심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1798년 또 다른 큰 승리를 기대하며 출정한 이집트 원정에서 넬슨에게 패배한 그는 1799년 군대를 버리고 허겁지겁 파리로 돌아왔으며, 곧 쿠데타를 일으키고 제1통령이 됨으로써 일거에 정권을 장악했다.

정치가로서도 그는 유능했으며 여러 가지 업적을 남겼는데 행정 · · 교육 · 종교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대개혁을 성공적으로 추진시켰다. 그는 뛰어난 의지와 지성을 갖춘 훌륭한 리더였다. 그는 모든 것에 열정을 쏟고 주변의 사람들을 확실히 장악하는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이었다.

1 통령으로서 그는 1800년 마렝고에서 다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고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을 와해시켰다. 그 뒤 1802년에는 영국과도 강화조약을 맺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전략과 전술의 달인이었다. 그는 혁명군대의 장점을 최대로 살리고, 징집령으로 확보한 무장병력을 자유자재로 활용했다. 1806년부터 1814년 사이에 징집된 숫자는 200만 명에 육박했다.

나폴레옹은 그의 군대에 적합한 전투방식을 끊임없이 연구 발전시켰다. 타국 군대가 횡대 대형을 고수하는 데 반해 그는 혼합대형을 택했다. , 일부는 횡대로, 다른 일부는 종대로 배치하고, 지형과 상황에 따라 혼합대형을 다양하게 조합했다. 기본적으로는 작은 접전으로 적을 괴롭히면서 횡대 대형을 유지한 부대로 적을 견제하고, 적의 취약한 부분을 향해 종대대형을 유지하면서 돌파하는 것이었다.

그는 최신정보를 수집하고 세심한 조사를 거쳐 작전계획을 수립했으며, 그 자신이 직접 최종명령을 내렸다. 기동 · 무기 · 보급 · 재정 · 점령지 정책 등 모든 분야에 걸쳐 그는 철저히 점검하고, 이러한 작업으로 며칠 동안 밤을 새우기도 했다. 그는 전투 전에 전투할 장소를 직접 살핀 후 여러 가지 준비를 했다. 그리고 적절한 시간을 포착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승패는 단 한 수에 달려 있다', '그릇의 물을 넘치게 하는 것은 단 한 방울의 물이다라는 그의 표현대로 결정적인 순간을 잘 포착하고 지형을 잘 이용하는 뛰어난 안목을 지녔다.

1804년 나폴레옹이 스스로 황제 제관을 쓰고 대제국을 건설하기 시작하자 영국 · 오스트리아 · 러시아 등은 제3차 대 프랑스 동맹을 구축했다. 1805년 작전을 개시하기에 앞서 그는 프랑스군 편제를 전략적으로 발전시켰다. 영구적인 사단편제에 기초를 두되 새로이 2~3개 사단을 결합한 군단체계를 도입했다. 전투규모가 커지면서 군단 단위로 운용하고 군단장에게 최대의 작전권을 부여했다. 그 혼자서 대군을 지휘하기에는 한계가 있었기에 군단별로 임무를 부여한 것이다.

보급문제에 관한 한 나폴레옹은 원시적인 방법인 현지조달에 의존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그 방법은 부대의 기동성을 증대시키고 사기를 유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그 폐단 또한 커서 후에 나폴레옹이 패배할 때는 바로 치명적인 요인이 되었다. 현지조달은 부유한 지역에서 가능한 일이었고, 그 방법으로는 한 곳에 오래 머물 수 없으며, 러시아처럼 빈촌이 많은 지역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람들이 나폴레옹을 전쟁의 신이었다고 부르는 것은 그가 단순히 적을 격퇴시킨 것이 아니라 적을 격멸시켰기 때문이다. 그러한 목적으로 그는 부대를 신속히 이동시켜 적 측방과 후방을 겨냥하고 공격했다. 이때 일부 부대는 정면에서 적을 견제했다. 이러한 나폴레옹 식 공격은 언제나 적 퇴로를 차단하기 때문에 적을 섬멸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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