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프랑스 혁명과 군사 개혁
프랑스 혁명군은 모든 면에서 구군대와 달랐다(1789년)

1792년 프랑스를 침공한 프로이센군이 발미 싸움에서 진격을 저지당하고 있다.
7년전쟁 후 전쟁에서 상당한 충격을 받은 프랑스는 기존의 전쟁방식과 군사제도에 대한 비판을 통해 몇 가지 중요 개혁을 단행하기 시작했다.
기동성을 증대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프랑스 포병은 그리보발(Gribeauval)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이고 대포의 포신을 단축시켜 무게를 가볍게 했다. 그리고 프리드리히 대왕의 아이디어를 도입하여 황소 대신 말이 대포를 끌게 했다. 또한 청동제 대포를 값싸고 보다 개량된 철제 대포로 거의 모두 교체했다. 행군 시 포병대는 보병과 보조를 맞출 만큼 기동성을 증대시켰다. 보병도 미국 독립전쟁의 영향을 받아 경보병의 이점을 깨닫고 그 숫자를 늘렸으며, 그들로 하여금 지형을 최대로 활용하도록 하고 주요역할을 맡도록 했다.
이러한 변화는 기동성과 화력 간의 협조 및 대형 등에 관한 전술개념의 변화를 둘러싸고 군사이론가들 간에 활발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그들 가운데서도 폴라르(Folard)와 기베르(Guibert)가 제시한 이론은 프랑스군의 대형 변화와 훈련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그리하여 새로 채택한 평행종대 대형은 종대 사이에 생기는 공간을 경보병으로 보완하면서 다양한 지점에서 횡대 대형을 유지하고 있는 적에 대해 집중공격을 가함으로써 돌파를 용이하게 했다. 프랑스군은 평소에 횡대에서 종대로 또는 종대에서 횡대로 신속히 전환시키는 기술을 맹훈련으로 다졌다.
공격과 기동성을 중시하는 전술의 영향을 받아 전략은 자연히 과감한 전투를 선호하는 방향을 택하게 되었다. 진취적인 지휘관은 주력부대를 여러 공격용 종대로 나누어 신속하게 움직여 적을 함정에 몰아놓고 전투를 강요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요새들을 무시하고 대담하게 적 수도로 진격하는 모험을 걸 만했다. 도로와 운하 등 보급로가 개발되고 농업 생산성이 증대됨에 따라 그들은 보급에 대한 큰 우려 없이 대담한 작전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은 군조직에 있어서 보수주의를 무너뜨렸다. 혁명 이전까지 장교단의 2/3 이상이 귀족들로 구성되었으나, 이제 귀족들의 그러한 특권은 사라졌다. 1794년경 귀족 출신 장교들의 5/6가 군대를 떠났다. 장교단은 신분보다는 능력 있는 군인들을 환영하고 그들에게 상위계급으로 진급할 수 있는 문을 활짝 열었다.
혁명 열기에 넘치는 프랑스군은 그 성격이 일변했다. 1793년 징집령으로 프랑스는 모든 젊은 청년들을 군에 소집하는 이른바 국민개병제도를 택했다. 그러나 혁명이 일어났을 때부터 이미 그들은 애국심에 불타 기꺼이 군에 입대한 많은 자원병으로 충원되어 있었다.
1792년 혁명의 불길이 번져오는 것을 두려워한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이른바 프랑스 혁명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초기단계에서 프랑스는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운데다가 군대가 훈련 결여와 능력 있는 지휘관들 부족으로 북동부 국경 지역에서 잇따른 패배의 고배를 마셨다.
그러나 프랑스인들은 용기와 열정으로 신속하게 혁명군대를 개선시켰다. 혁명군대의 진가는 1792년 북동부 국경 지역의 발미(Valmy) 전투에서 발휘되었다.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 동맹군 측의 여러 가지 과오가 프랑스에 승리를 갖다 준 측면이 많이 있었으나, 보다 더 결정적인 요인은 혁명 열기에 넘치는 국민군대로서 프랑스 보병이 용기 있게 행동함으로써 승리를 얻어낼 수 있었다.
발미 전투 후 자신을 얻은 프랑스는 대 프랑스 동맹에 대해 결사항전을 외치며 그야말로 전 국민이 무장하여 싸우는 대규모 국민전쟁 시대의 막을 올리게 되었다. 1793년 8월 23일 프랑스 혁명정부는 전국적으로 다음과 같은 유명한 징집령(levee en masse)을 선포했다.
젊은 청년들은 전투를 하고, 결혼한 남자들은 무기를 만들고 보급품을 날라라. 여자들은 천막과 군복을 만들고 병원에서 봉사하라. 어린이들은 천 조각을 줍고, 노인들은 광장에 나와서 전사들의 용기를 북돋우고 왕정에 대한 증오와 공화국의 단결을 위하여 연설하라.
그리하여 1794년 여름 프랑스 혁명군은 1백만 명에 달했다. 그 가운데 약 75%가 무장하고 있었는데 실로 방대한 규모였으며, 그들은 사회적 계급이나 직업 또는 출신 지역별로 모든 계층을 포함한 시민집단이었다. 카르타고시민군은 구군대와 같은 제식훈련을 결코 받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비교적 짧은 기간의 훈련을 통해 대대별 종대대형으로 공격하는 요령을 터득하고 전장에서 신속하게 기동했다. 무엇보다도 혁명군대가 누린 가장 큰 전술적 이점은 구습을 탈피하고 상황과 지형에 따라 새로운 전투방식을 좇는 융통성을 갖게 된 것이고, 이제 승리의 관건은 그러한 이점을 최대로 이용할 수 있는 위대한 지휘관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