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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미국의 독립전쟁

49. 미국의 독립전쟁

 

미국, 독립국으로 탄생(1775~ 1783)

 

벙커힐 싸움

 

독립전쟁의 서전을 장식한 전투로서 정규군과 비정규군의 싸움이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은 177674일 온 세계를 향해 독립을 선언했다. 미국이 독립한 사실에 대해 흔히들 표현하기를 '미국의 혁명'이라고 한다. 그것은 신대륙 식민지로부터 독립하여 새로 탄생한 미국이라는 나라가 정치적으로 그 후의 세계사에 그야말로 혁명적 영향을 초래했기 때문에 매겨진 평가라고 생각된다.

한편 군사적으로도 독립전쟁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본래 영국 당국은 1763년경까지 캐나다와 미시시피강 서쪽 땅에서 프랑스인들을 추방하고 대서양 연안 식민지에 대해 보다 확실한 장악과 함께 더 큰 부담을 요구하는 각종 세금을 부과했다. 영국은 설탕 조례, 군대 숙영 조례, 인지조례, 타운젠드 조례 등으로 식민지 부담을 가중시킴으로써 프랑스 · 인디언 전쟁과 7년전쟁에서 치른 막대한 전비를 보충하고자 했다. 그 결과 빚어진 잦은 충돌사태는 1773년 보스턴 차 사건으로 확대되었고, 이 사건이 일어난 2년 뒤 매사추세츠 렉싱턴에서는 영국군과 식민지인들 사이에 첫 무력 충돌이 일어남으로써 마침내 독립전쟁이 개막되었다.

초기의 독립전쟁은 유럽인들에게는 몇몇 전투에서 겨우 몇 개 대대 정도가 충돌을 벌인 사소한 분규쯤으로 받아들여졌다. 열렬한 독립주의자들은 수적으로 열세하고 아직도 많은 식민지인들은 영국 편에 있었기에 독립전쟁은 독립주의자들에게 처음부터 매우 불리했다.

독립전쟁을 모국에 대한 반란으로 여긴 사람들은 식민지 정책이 좀 가혹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평화적 해결책을 찾지 않고 굳이 동족끼리 싸움을 벌이려는 데 대해 반대했다. 이들을 독립주의자들은 '왕당파'라고 불렀는데, 전체 식민지 인구의 1/3'왕당파'에 속했다. 그들은 1776년 독립선언 후에도 미국보다는 영국을 편들기 일쑤였다.

그러한 열악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영국이 초기에 승리할 수 있는 호기를 현지 지휘관들의 무능 때문에 놓쳐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1778년 프랑스가 미국 편에 가담하여 참전하게 된 이후로는 점차 지구전 양상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1780년까지 전투는 주로 뉴욕과 필라델피아를 둘러싼 공방전으로 벌어졌다. 허드슨 강으로 통하는 전략적 요충인 뉴욕은 수도 필라델피아에 큰 위협을 가할 수 있는 곳이었다. 큰 싸움으로는 1775년의 벙커힐 전투, 1777년의 새러토가 전투 등이 있지만, 대부분은 진지에 처박혀 지루하게 대치하거나 아니면 소규모 유격전으로 흘렀다.

영국군은 제해권을 장악했지만 본국으로부터 병력과 보급품을 한없이 지원받을 형편이 못되기 때문에 더 이상 장기전으로 가면 제풀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영국군은 돌파구를 남부에서 찾고자 했다. , 미군이 북부 방어에 치중하고 있으므로, 남부를 공격한 다음에 북진하면서 버지니아를 점령하여 조지 워싱턴 휘하의 미군을 남북 양쪽에서 압박을 가한다는 작전이었다.

17805월 영국군은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요충 찰스턴을 공격하여 크게 성공했다. 미군은 그때까지의 전투 중 가장 큰 피해를 입어 약 5,000명이 영국군의 포로가 되었다. 영국군은 캐롤라이나와 버지니아 전역을 휩쓸고 17818월엔 체사피크만 입구의 요크타운을 점령했다. 이로써 영국해군은 이제 체사피크만을 맘대로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영국군이 남부를 유린하는 동안 별로 한 일이 없는 미군은 비상대책을 수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본래 워싱턴은 뉴욕을 꼭 지키기만 하면 궁극적인 승리는 자기네 것이라고 믿고 있었으나, 만일 남부에서 패배하면 전군에 번져갈 사기저하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고, 더욱이 프랑스군 측의 강력한 요크타운 공격 주장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워싱턴은 비밀리에 대병력을 남쪽으로 보냈다. 동시에 프랑스 함대도 서인도제도를 떠나 체사피크만으로 향했다. 178195일 프랑스 함대는 방심하고 있던 영국함대를 급습하여 대승을 거두고 쉽게 제해권을 장악했다. 프랑스 배들은 이제 막 도착한 미군과 프랑스 군대를 신속하게 이동시켜 요크타운에 집결시켰다.

요크타운을 포위한 미군과 프랑스군 총병력은 15,000명이었고, 이에 비해 영국군은 약 그 절반 정도였다. 포위망 안에 갇혀 보급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한 영국군에게 유일한 희망은 뉴욕에서부터 구원군이 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뉴욕 주둔 사령관은 주저했고, 그러는 사이에 사태가 더욱 악화되자 결국 요크타운을 수비한 콘월리스(Charles Cornwallis) 휘하 영국군은 1017일 항복하고 말았다.

요크타운 전투로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영국군은 아직도 뉴욕 · 찰스턴 · 디트로이트 등 주요 도시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워싱턴에게는 전과를 크게 확대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사실 양쪽 다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다만 차이는 영국이 더 지쳤다는 데 있었다. 유럽에서는 이미 프랑스에 이어 스페인과 네덜란드가 영국에 대한 적대적인 선언을 했다. 영국 국내에서는 반전 여론이 들끓었고, 정부 내에서도 이제 전쟁을 끝내자는 분위기가 일기 시작했다.

결국 영국 왕 조지 3세는 협상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파리에서 참전국 대표들이 모인 가운데 강화회의가 개최되고, 178393일 드디어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미국은 독립전쟁에서 이기고, 대서양에서 미시시피강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보장받은 독립국으로 탄생했다. 영국이 협상을 통해 얻은 것은 미시시피강을 영국 상인들에게도 개방한다는 것과 전쟁 중에 미국이 몰수한 왕당파 재산을 되돌려준다는 약속이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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