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프리드리히 대왕과 7년전쟁
로이텐 싸움은 기동과 결단의 걸작품(1756년 ~ 1763년)

프리드리히 대제가 로이텐 교회 앞에서 지휘관들에게 연설을 하고 있다.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평화를 정상적인 것으로, 전쟁을 예외로 간주한다. 그러나 1750년대 프로이센인들은 달랐다. 절대군주 프리드리히 대왕 치하에서 그들은 오히려 전쟁을 통해 안전을 얻을 수 있다는 신념을 가졌다. 인접 국가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대왕의 팽창야욕은 큰 지지를 받았다. 그리하여 프로이센 군대는 늘 전쟁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슐레지엔의 합병에 따르는 영토 확장과 1740년의 200만에서 1752년의 400만으로 늘어난 인구증가는 프리드리히 대왕으로 하여금 보다 전쟁정책 위주로 나라를 끌도록 했다. 그는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판단되면 충분한 군사력과 기동성을 전략의 요체로 하여 선제권을 장악하고 적 영토에 대한 과감한 공격을 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직접 총사령관직을 맡은 그는 연중 약 절반을 야전부대를 방문하는 데 보냈으며, 훈련 및 군기를 강화하고 군대의 질을 대폭 개선시켰다. 그는 연대장이었던 그의 아우에게 직무 태만을 이유로 부대 내에서 근신하도록 하는 벌을 내릴 만큼 엄격했다. 행군 · 보급 · 장비 · 전술 등 모든 분야에 대해 대왕은 철저히 감독했다. 병력도 계속 증강시킨 결과 그가 즉위했을 때 8만 명이던 것이 1756년에는 15만 명으로 증가했다.
7년전쟁은 불안한 평화시대에 외교혁명이라고 부를 만큼 동맹관계에 극적인 변화가 발생하면서 야기되었다. 각국은 동맹관계를 크게 바꾸었다. 영국 대 프랑스, 그리고 오스트리아 대 프로이센의 숙적관계는 변함이 없으나,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 때 생긴 불신으로 말미암아 각국은 서로 동반자들을 과감하게 바꾸기 시작한 것이다. 전에 프리드리히 편을 든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적대시해온 합스부르크 가의 오스트리아와 손을 잡았다. 한편 영국의 권익을 방어하기를 꺼리는 오스트리아에 대해 불만을 품은 영국은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었다. 또한 프리드리히를 증오한 러시아는 영국과 결별하고 프랑스 · 오스트리아 동맹에 가입했다.
이러한 파트너 바꾸기로 가장 어려운 처지에 빠진 나라는 프로이센이었다. 대륙 내에 동맹국을 두지 못한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 · 프랑스 · 러시아 동맹 세력에 둘러싸이게 되었다. 3국의 인구를 다 합하면 프로이센의 15배나 되었다. 동맹국 영국은 해상과 식민지에서 전쟁에 종사하느라 프로이센에 대해 직접적인 군사원조를 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위협을 극복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선제공격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적들이 규합하여 공격해올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은 멸망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그는 내선작전의 이점을 활용하여 신속하게 군대를 이동시켜 하나의 적을 격파하고 그다음에 다른 적을 향해 공격했다.
1756년 프리드리히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프로이센에 대한 전쟁 결행을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여러 가지 증거를 입수했다. 그러자 곧 전에 슐레지엔을 침략할 때처럼 선전포고 없이 이번에는 작센 지방을 침략하고 7년전쟁을 개시했다. 오스트리아가 볼 때는 침략전쟁이었으며, 프리드리히 입장에서는 물론 예방전쟁이었다.
그는 작센 지방을 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 작센 군대가 싸움을 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령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결코 승리한 것은 아니었다. 오스트리아의 지연전에 말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프리드리히는 적이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나오는 데 대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1757년 프라하에서 그는 오스트리아군을 무찔렀으나 그해 후반에는 훨씬 증강된 적을 만나 패하고 말았으며 러시아군과의 전투에서도 다시 패했다.
이때 프로이센의 운명은 암담해 보였으나, 프리드리히에게 다행스러운 것은 첫째, 그의 군대가 여전히 질적으로 우수하고, 둘째, 적 지휘관들이 무능하다는 점이었다. 러시아 장군들은 겁이 많았고,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장군들은 대체로 너무 무능했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는 대륙과 해상에서 양면전쟁을 수행해야 하므로, 프로이센만을 향해 전력투구할 형편이 못되었다. 한편 영국은 해상에서 눈부신 승리를 거두고 지중해와 대서양에서 프랑스 함대를 대파했다.
1757년 11월 프리드리히는 작센 지방의 로스바흐(Rossbach)에서 프랑스 · 오스트리아 동맹군에게 대승을 거둔 후, 12월에는 슐레지엔 지방의 로이텐(Leuthen)에서 오스트리아 대군을 격파하는 쾌거를 이뤘다.
로이텐에서 프리드리히 군대는 결코 유리한 상황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스트리아군은 84개 보병대대와 144개 기병대대, 총병력 7만 명과 210문의 대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프리드리히는 48개 보병대대, 128개 기병연대, 167문의 대포로 3만 6천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으니 정상적인 전투로는 이길 수 없었다. 그는 전에도 늘 그랬듯이 승리는 숫자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쪽이 더 용기 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을 부하들에게 강조하면서 자신의 전략을 믿고 용감하게 싸워줄 것을 당부했다.
프리드리히가 확신한 비장의 전략이란 이미 기원전 4세기에 그리스 테베의 장군 에파미논다스가 사용한 바 있는 사선진(斜線陣) 전법이었다. 한쪽 날개는 접어두고 그 대신 다른 쪽 날개를 최대로 이용하여 공격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포진은 적에게 노출시키지 않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실천에 옮길 계획이었다.
12월 4일 오스트리아군은 북쪽의 니페른 늪지에서 로이텐을 거쳐 남쪽의 자그슈츠까지 뻗어 있는 약 9㎞ 전선에 걸쳐 있었다. 전선은 길지만 결코 느슨한 방어태세는 아니었다.
12월 5일 프리드리히는 서쪽에서부터 곧장 오스트리아군 진영에 대하여 수직으로 진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계획은 좌익으로 오스트리아군 우익을 공격하는 체하다가, 주력을 보로나 고지 후방을 이용해 적의 긴 전선을 따라 은밀히 행군하여 적 좌익을 집중공격하는 것이었다.
프리드리히가 선봉부대를 내보내 오스트리아군 우익을 공격하자, 그곳의 적 지휘관은 다급한 나머지 오스트리아군 좌익에 도움을 요청했다. 프리드리히는 자기 계획대로 움직이는 적의 모습을 보고 쾌재를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프리드리히는 이제 주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4열종대를 2열종대로 바꾸고 지형과 안개를 이용하여 신속히 남쪽으로 행군했다. 그의 군대는 마치 사열을 받는 것처럼 정확한 작전행동을 통해 사선진 대형을 취했다.
오스트리아 지휘관들은 정면공격을 예상하고 있다가 느닷없이 남쪽에 나타난 프로이센군의 모습을 보고 몹시 흔들렸다. 총사령관 카를은 우익으로 보낸 병력을 되부르는 한편, 로이텐과 자그슈츠 사이의 평야로 대대들을 잇달아 투입했다. 오스트리아군은 결국 우왕좌왕하고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전투에 임하게 되었다.
프로이센군이 로이텐을 함락시키는 동안 북쪽의 오스트리아군은 그런 대로 잘 싸웠다. 그러나 주도권을 빼앗긴 상태에서 잘 싸우던 북군도 중앙 및 남쪽의 참패 소식을 듣고 나서부터는 그날 저물녘 모두 도주하고 말았다. 프리드리히는 사흘 동안 부근의 패잔병들을 철저히 소탕하고 약 2주 후에는 브로츨라프를 함락시킴으로써 슐레지엔 지방을 완전히 장악했다.
나폴레옹은 이 로이텐의 싸움을 가리켜 "기동, 작전행동, 결단의 걸작품"이라고 평가하고, "이 전투만으로도 프리드리히는 불멸의 명장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승리는 전술적으로는 확실한 것이었지만 전략적으로는 미흡했다. 전쟁은 이후에도 5년을 더 끌었고, 프로이센은 훨씬 더 강한 적과 싸워야 했다. 여러 전장에서 프리드리히는 뛰어난 지휘로 패배를 면했다. 대 프로이센 동맹국의 분열로 프로이센은 슐레지엔을 오랫동안 정복했으며, 유럽의 군사강국으로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