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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과 말버러 장군

46.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과 말버러 장군

 

다국적군을 지휘, 프랑스군을 격파하다(1701~ 1714)

 

블렌하임 전투에서 진군하는 말버러 공 휘하 영국 육군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은 스페인 왕 카를로스 2세 이후 왕손이 끊기자, 유럽 주요국들끼리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일어난 전쟁이다.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 오스트리아는 서로 계승권을 주장했다. 다 기울어가고 있었던 당사국 스페인은 프랑스와 결탁하고 카를로스 2세 사후에 루이 14세의 손자를 펠리페 5세로 왕에 즉위시켰다. 그러자 오스트리아는 즉각 군대를 출정시키고, 여기에 영국과 네덜란드가 가세하여 연합군을 편성함으로써 1701년부터 1714년까지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연합군을 지휘한 사람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장군은 공(Duke of Malborough, John Churchill)이었다. 과묵하고 다소 친해지기 어려운 성격이었으나, 휘하 병사들에겐 헌신적인 관심을 기울인 그는 무엇보다도 매우 복잡한 상황을 처리해야 했던 연합군 사령관으로서는 최고 적임자였다.

말버러가 거느린 다국적군은 참으로 통제하기 어려운 군대였다. 네덜란드 장군들은 그의 실력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단지 왕실과 가까운 배경으로 최고사령관에 올랐다고 생각하며 극히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실제로 그는 앤 여왕과 절친한 사이였던 부인의 덕을 크게 입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의회로부터도 호응을 받지 못했다. 상비군 자체를 자유에 대한 위협으로 여기고 있던 풍토에서 신병 모집이 결코 용이하지 않았는데, 의회는 군의 요구사항을 까다롭게 조사하고 자주 제동을 걸곤 했다.

영국군은 재력 있는 대령이 연대병력을 모집하고 무장시켰다. 사병 대부분은 천민 출신들로서 사기가 낮았다. 군대 내 행정처리가 부정부패로 만연되어 있고 장교들 급여와 군량 및 장비를 횡령하는 사건들이 비일비재했다. 말버러는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데 최선을 다함으로써 앤 여왕으로부터 절대적 신임을 받았다. 덕분에 그는 전쟁을 지휘할 때 누구로부터도 간섭을 받지 않고 최대로 재량권을 행사했다.

1704년 말버러는 군 편성에서 창병을 제거했다. 17세기 후반기에 개발되어 일부 사용된 총검을 모든 화승총 병사들에게 착검하도록 하여 그들이 창병 역할까지 동시에 수행하도록 했다. 이로써 착검 사용을 훨씬 늦게 한 프랑스군보다 전술적으로 우위를 차지하게 됐다.

전쟁 초기 상황은 여러 가지로 프랑스와 동맹군 측이 유리했다. 중앙에 위치한 그들은 파리에 단일사령부를 두고 지중해에 이르는 모든 접근로를 확실히 장악했다. 말버러의 연합군은 공조작전을 펼치기가 어렵게 분할되어 있는데다가 방어해야 할 곳이 많았다. 네덜란드 장군들은 연합군 주력을 본국 가까이 배치하기를 원했으나, 북쪽 전선 못지않게 남쪽의 이탈리아 지역이 중요하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게다가 북동쪽에서 위협을 받고 있는 오스트리아를 간과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지중해를 장악하기 위해서 영국함대를 투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승리란 전 전선에 걸쳐 균형을 유지하는 것만으로 보장되는 것이 아니므로 말버러는 어느 한 곳의 결전장을 선택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그는 오스트리아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고 동시에 오스트리아와 공조하여 라인 강 저지대에서 프랑스군을 격멸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1704년 프랑스 · 바이에른 동맹군 57,000명은 다뉴브 강변 울름에서 빈으로 육박했다. 위기의 오스트리아군을 구출하기 위해 말버러는 신속히 움직였다. 그는 516일 네덜란드에서부터 40,000명을 이끌고 라인강을 따라 내려와 610일 다뉴브강에서 오이겐(Eugen) 휘하의 오스트리아군 30,000명과 합세했다. 이 순간 연합군은 유럽에서 가장 노련한 두 지휘관이 결합함으로써 싸우기 전에 이미 전략적 우위를 점한 것이다.

그러한 우위는 말버러의 결단과 성공적인 장거리 행군으로 이루어낸 것이었다. 그는 적과 우군을 동시에 속이며 부대를 이동시켰다. 먼저 코블렌츠에서 모젤 강 쪽으로 이동한다고 말하여 네덜란드인들을 기만시킴으로써 그들의 방해를 피했다. 코블렌츠에 도착한 다음에는 주요장비와 보급물자를 라인강 수로로 보내고 알자스 지방으로 진출하려는 듯한 행동을 취하면서 적을 속였다. 그러자 프랑스군은 급히 알자스 지역에 병력을 증강시켰다. 속임수를 연출해온 말버러는 라덴부르크에서 부대를 라인 강 동쪽 네카르 강을 건너 다뉴브 강을 향해 신속히 진출시켜 오이겐 군과 합세했다.

이 눈부신 행군은 사실 이른 봄부터 준비된 것이었다. 말버러는 미리 독일인 관리들로부터 허락과 지원을 받아내고 군량과 보급품을 철저히 준비시켰다. 징발한 물건들에 대해서는 그 값을 즉석에서 지불했기 때문에 말버러 군대는 현지주민들과 전혀 마찰을 겪지 않았다.

말버러는 병사들에게 충분한 음식과 피복을 제공했으며, 그런 다음에 엄격한 기강을 요구했다. 말버러 이후 영국 장군들은 그의 리더십을 귀감으로 삼아 언제나 보급과 충분한 준비를 중시하고 결코 졸속작전을 전개하지 않는 것을 전통으로 생각해왔다.

말버러와 오이겐 두 명장의 협력은 연합군의 가장 큰 자산이었다. 오이겐은 공식적으로는 말버러와 동격이었으나, 지휘통일을 위하여 말버러의 전략을 전적으로 따랐다. 오이겐은 모험을 좋아하는 반면 상상력은 부족했으나, 말버러처럼 뛰어난 전략가를 만나면 기꺼이 존중할 줄을 아는 인물이었다. 한편 말버러도 매우 겸손한 사람이었기에 두 사람은 서로 신뢰하고 존경했다.

말버러는 프랑스군이 라인강을 건너기 전에 먼저 바이에른 군을 공격하고 이어서 지원하러 올 프랑스군을 맞아 격멸하고자 했다. 그러나 바이에른 군을 지휘한 막스 에마누엘은 말버러의 전략에 말려들지 않겠다는 듯이 전투를 피하며 계속해서 프랑스군의 지원을 기다렸다.

드디어 812일 프랑스와 바이에른 군은 다뉴브강 상류의 블렌하임에서 약 6에 걸쳐 진을 친 채 네벨 강을 사이에 두고 연합군과 대치했다. 그러나 네벨 강에서 약 900m 뒤에 위치함으로써 방어의 이점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그들은 기습공격을 받을 가능성에 대해 전혀 대비하지 않아 연합군은 장애물을 방해 없이 통과하여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만일 프랑스군 사령관 탈라르가 부대를 좀 더 강둑에 근접시켜 놓았더라면 연합군 도강작전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블렌하임 전투에서 명장 말버러는 탈라르와 같은 어리석은 장수로부터 도움(?)을 받아 큰 승리를 엮어낼 수 있었다.

13일 아침 실시한 말버러의 기습은 성공적이었다. 아무 저항을 받지 않고 네벨 강을 건넌 연합군은 삽시간에 유리한 위치를 차지한 뒤에 보병과 기병이 긴밀하게 협조하여 공격했다. 기병이 선두에서 공격하고, 보병은 그 뒤에서 넓게 포진하여 일제사격을 가하면서 접근한 뒤 총검을 사용하며 백병전을 전개했다. 하루 종일 전투에서 연합군은 프랑스군을 거의 괴멸시켰다. 연합군은 12,000명의 손실을 입은 데 비해 프랑스군은 14,000명의 포로를 포함하여 46,000명의 병력과 대포 60문을 잃었다.

이 전투 후 루이 14세는 유럽 지배를 위한 모든 계획을 중단했고, 프랑스 군대는 1세기 후 나폴레옹이 등장할 때까지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편 과거 두 세기 반 동안 거의 잊혀졌던 영국군은 강군으로 거듭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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