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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올리버 크롬웰

44. 올리버 크롬웰

 

청교도주의적 철기병들(1599~ 1658)

 

신모델 군(New Model Army)

 

영국은 다른 유럽 강국들과는 달리 30년전쟁으로부터 비교적 초연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1642년에 내란이 발발함으로써 큰 변혁을 겪게 되었다.

오래전부터 영국 왕 찰스 1(Charles )와 의회 간에는 적대관계가 형성되어왔다. 왕을 지지하는 세력은 왕권을 강화하고 보다 공격적인 대외정책을 추구하려는데 반해 의회주의자들은 청교도들과 결탁하여 더 자유롭고 능률적인 의회제도와 양심에 따라 종교를 선택할 자유, 그리고 가톨릭 성향이 비교적 약한 종교국가를 원했다. 왕이 의회를 해산하고 정치적 · 종교적 탄압과 함께 중세 부과로 밀어붙이자, 드디어 많은 의회주의자들은 독재에 항거하기 위해 무기를 들고 일어섬으로써 내란이 폭발하고 말았다.

내란 초기에 왕당파와 의회파 양측 다 군대의 면면은 별로 보잘것없었다. 영국군은 직업군적 요소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군대였다. 전통적으로, 상황에 따라 급히 편성되었다가 상황이 끝나면 해산되는 군대였다. 전국적으로 모집하기도 하고 지방 민병에 의존하기도 했는데, 후자의 경우에는 자기 향토를 떠나 싸우려 하지 않는 것이 큰 문제였다.

초기에 왕당파의 기병대가 약간 우위를 보였으나, 그러한 우위는 올리버 크롬웰의 등장으로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164243세였던 크롬웰은 본래 군사적 경험이 없었으나, 대지주 신분과 열렬한 청교도 자격으로서 기병대장을 맡아 의회파에 합세했다.

서투른 경험으로 초전에 실패를 맛본 크롬웰은 군사문제를 깊이 숙고하게 되었다. 보다 효율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농부에게 총만 쥐어주고 군인이라고 부르는 그러한 오합지졸의 집단에게 승리를 기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왕의 기병을 무찌르기 위해 크롬웰은 직업군인으로 구성된 기병대 조직 및 훈련에 착수했다. ‘소수의 정직한 대원들이 다수보다 낫다는 철학에 의거하여 엄격한 선발과정을 거쳐 기병대를 모집했다.

바탕이 우수하고, 청교도주의에 입각한 기율과 맹렬한 훈련을 받은 크롬웰의 군대는 곧 영국에서 가장 잘 싸우는 '철기병'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군대는 정기적으로 보수를 받는 직업군대였으나 결코 용병군대는 아니었다. 그는 돈보다는 전쟁목적에 부합하는 사명감을 갖고 지원한 정직한 사람들의 집단인 직업군대와, 오직 돈벌이에만 연연하는 용병군대를 확연히 구분했다.

크롬웰의 철기병은 1644년 마스턴 무어(Marston Moore) 전투에서 기고만장한 왕당파 군대를 깨고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의회는 크롬웰에게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고 철기병 방식을 도입하여 전군을 개편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크롬웰은 '신모델 군(New Model Army)'을 편성했다. 신모델 군은 보병 12개 연대와 기병 9개 연대로 구성되고, 각 연대 인원은 1,000명 정도 되었다. 이때 군인들이 입은 유니폼이었던 진홍색 상의(redcoat)19세기 말까지 영국군의 전통적인 군복이 되었다.

보병 내에서 총병과 창병의 비율은 2:1 정도였다. 화승에 의한 발사장치는 부싯돌 발사장치로 교체되었다. 총병들은 전투 시 종래의 금속투구 대신에 테가 넓은 모직 중절모를 착용했다. 또한 방어무장보다는 보다 신속한 사격동작을 위한 복장을 갖추었다. 총병을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창병은 마름모형 촉이 달린 4.9m의 장창과 칼을 지녔고, 무거운 방어용 갑옷을 걸쳤다. 보병연대는 보통 6열 종대대형을 유지하고 전투했다.

기병들은 화승총 · 권총 그리고 칼로 무장하고 때때로 도끼까지 지니고 싸웠다. 그들은 가벼운 갑옷이나 가죽으로 된 코트를 입었다. 전투가 시작되면 양측방에 배치된 기병대는 처음에는 화승총을 이용하다가, 가까운 거리에 이르면 권총과 칼을 주로 사용하며 돌진했다. 한편 1개 연대 규모가 있었던 용기병들은 주로 정찰 · 수송 그리고 주요지점 엄호와 같은 임무를 수행하고, 때때로 말에서 내려 기병대를 지원하는 소총수 역할을 했다.

1645년 신모델 군은 네이즈비(Naseby) 싸움에서 대승을 거두고 크롬웰은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어서 48년 프레스턴, 50년 던바, 51년 우스터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드디어 왕당파의 무장저항을 종식시켰다.

1649년 크롬웰은 반혁명의 뿌리를 뽑기 위해 찰스 1세를 처형하고 왕정을 폐지시켰다. 그리고 '코먼웰스(Commonwealth)'라고 부르는 공화국 수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자유선거를 실시하지 못하고 출범한 공화국은 군대에 기반을 두고 권력을 장악한 크롬웰의 독재정치로 흘렀다.

입헌주의자였던 그는 결코 독재자가 되기를 원했던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분열된 영국의 특수한 상황에 직면하여 본의 아니게 독재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1653년 의회를 해산하고 그 자신이 호국경의 지위에 올라 호국경 통치를 시작했다.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적대 세력 그리고 그밖의 반란세력을 진압하면서 보다 강력한 철권정치를 폈다. 55년에는 전국을 10개 군구(軍區)로 나누고, 각 군구를 군정장관으로 하여금 통치케 하는 군사독재를 실시했다. 57년 의회가 겸허한 청원과 권고를 그에게 제출, 왕위에 오를 것을 요구했으나 그는 이를 거절하고 58년 사망했다.

크롬웰은 개혁주의자로 기병대의 조련사이자 지휘관, 그리고 전략가로서 빛나는 명성을 떨쳤으나, 정치가로서는 실패하여 영국역사에 군사독재의 오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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