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30년전쟁 이후 제한전쟁
평화스럽게 진행된 전쟁들(17세기 ~ 18세기)

17, 8세기 기병들은 말 양육과 마초 수집에 주로 시간을 보냈다.
일반적으로 전쟁사의 흐름을 보면 대전쟁 이후에는 소전쟁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전후 평화조약과 강국들에 의한 전쟁 억제 노력이 상당기간 주효했기 때문일 것이다.
유럽에서 대전이었던 30년전쟁과 나폴레옹 전쟁 사이의 약 150년 동안에 일어난 전쟁들의 특징은 한마디로 제한전쟁이었다. 이 기간에도 전쟁은 자주 일어났으나, 그 규모 · 목적 · 수단 등에서 여러 가지로 제한적인 전쟁 양상이 나타났다.
이렇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먼저 군주를 비롯한 지배자들은 30년전쟁이 너무 잔인했던 데다가 무자비한 약탈과 파괴행위를 일삼은 군인들을 방치한 데 대해 책임을 느끼고 전쟁을 자제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이성의 시대(the Age of Reason)에 들어선 당시 유럽의 분위기는 법과 질서를 존중하고 폭력을 배척해야 한다는 사상이 주류를 이루었다. 따라서 전쟁은 국제정책 결정자들의 합리적 사고의 범주 내에서 고려되었으며, 그 결과 전쟁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숫자도 옛날보다 훨씬 줄었다. 다수의 시민들은 전쟁이 일어났을 때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아도 될 만큼 당시 전쟁의 규모 및 영향은 작았다.
군대는 각국의 경제성장 우선주의 정책에 밀려 생산 분야에서 별로 가치 없는 사람들로 충원되었다. 그리하여 군대가 게으른 귀족 출신 장교들과 죄수나 사회 밑바닥 출신의 사병들을 위한 직장처럼 전락하자, 각국 정부는 군대의 질이 너무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외국용병들을 고용하기 시작했다.
용병제도에 대해서는 그 단점보다도 장점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즉, 용병 한 사람은 첫째, 아군 한 사람을 증가시키고, 둘째, 적 한 사람을 줄이고, 셋째, 자국인 한 사람을 생산 분야에 종사하도록 하여 세금을 내게 함으로써 한꺼번에 세 사람의 몫을 한다는 식으로 계산했다.
그러나 용병을 유지하는 데는 훈련 · 장비 · 봉급 등으로 고액의 비용을 지불해야 했고, 따라서 한 명의 용병을 상실하게 되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바로 이 문제 때문에 전술은 크게 제약을 받게 되었다. 부싯돌 장치 화승총의 등장과 함께 전장에서 용병들의 주무기는 종래의 창에서 화승총으로 교체되었다. 그런데 이것을 제대로 익히는 데는 2~5년의 기간이 필요했으므로, 용병을 상실하게 되면 그 자리를 메우는 데 그만큼 긴 시간이 소요되었다.
만일 전투를 벌인다면 두 부대가 나란히 서서 화승총 사격으로 한판 승부를 겨루게 될 것이고, 그 장면을 구경하는 사람들은 명쾌한 판정을 내릴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전투 결과 패자 측 지배자는 다수의 용병 상실로 엄청난 재정손실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래서 손실을 막기 위해 당시 지배자들은 전투보다는 기동을 선호했고, 훌륭한 지휘관들은 이기기 위해 싸우기보다는 지지 않기 위해 싸웠다.
성곽의 발전 또한 17, 8세기 전쟁 양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적국을 침입하는 경우 일차적으로는 요새화된 국경 지역에서 너무 지체됨으로써 큰 승리를 기대하기가 어려웠다. 더구나 보급조달을 창고에 의존한 결과, 군대는 공격하면서 창고를 건설해야 하고, 창고로부터 3~4일 행군 거리 밖에서는 작전이 어려웠다.
성곽 공격 시 절대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이끌고 온 공격자 측은 주로 연병장에서 기동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접근하여 큰 포위대형을 취했다. 이런 장면은 대단한 구경거리를 제공했다. 루이 14세는 숙녀들을 초대하여 그 같은 광경을 잘 바라볼 수 있는 장소에서 잔치를 벌이고 바이올린 연주와 함께 왈츠 춤을 즐기곤 했다. 방어자 측은 만일 외부지원을 기대할 수 없다면 끝까지 버티기보다는 출혈을 피하고 항복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분위기였다. 공격자 측도 방어자 측에게 적절한 순간에 항복을 할 수 있도록 명예로운 조건을 제시하는 것이 상례였다. 이런 교묘한 행동을 취하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당시 군사학교들은 요새를 사수하기보다는 명예롭게 항복하는 절차에 대해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교육했다.
만일 요새를 수비하는 사령관이 끝까지 저항하다 실패하게 되면, 점령군은 수비대에 대한 살육은 물론이고 전도시를 약탈하는 권리를 부여받은 것처럼 행동할 수 있었다는데, 실제로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정치 지도자들은 야전사령관들에게 거의 재량권을 주지 않고 엄격하게 통제했으며, 전장에 나타나서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간섭했다.
전략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17, 8세기 사령관들은 적을 격멸하는 전투를 수행하지 않고 그것을 피하는 전략으로 싸워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