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41. 구스타프의 군사개혁과 브라이텐펠트 전투

41. 구스타프의 군사개혁과 브라이텐펠트 전투

 

근대전의 아버지 구스타프(1631)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아돌프

신교도로서 페르디난트 2세를 도와 30년 전쟁에 투신, 북유럽을 장악한 그는 유럽 최강의 군대를 만든 근대전의 아버지였다.

 

군사적으로 중세에서 근대로의 본격적인 전환은 17세기에 이루어졌다. 창이 화승총으로 교체되고 중기병대의 모습은 전장에서 사라졌다. 전투대형은 밀집대형에서 점차 선형으로 바뀌었다. 또한 포병이 야전에서 크게 활용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괄목할 만한 발전은 화승총의 개선이었다. 무게가 과거 6.8~11에서 5으로, 길이가 1.2m로 줄어져 화승총은 한결 가볍고 다루기 쉬워졌다. 발사속도도 분당 2발 이상을 유지하는 수준으로 빨라졌다. 부싯돌에 의한 발사장치가 고안됨으로써 발사는 기후변화에 덜 영향을 받게 되었다.

한편 17세기의 전쟁에서 큰 변화 가운데 하나는 군 규모의 확장이었다. 스페인의 필리페 2세가 서유럽을 장악했을 때, 그의 군대는 4만 명에 불과했으나, 이제 작은 나라도 그 정도 규모의 군대를 유지했다.

군 규모의 확장과 기술의 변화를 전장에 어떻게 적용시킬 것인가? 이는 군 개혁가들의 최대 관심사였다. 17세기 초기에 가장 큰 공적을 남긴 자는 스웨덴 왕 구스타프(Gustavus)였다.

구스타프는 어린 시절부터 전쟁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고대 그리스의 군인 · 문필가인 크세노폰의 회고록 아나바시스(anabasis, 大陸行)를 읽었다고 한다. 이 책을 가리켜 리들 하트는 '모든 군사저술 가운데 최고의 책'이라고 극찬한 바 있다. 구스타프는 모든 군사문제를 과학적으로 연구했다. 그는 르네상스 정신으로 군사문제에 접근한 최초의 군인이었다.

161117세에 왕위에 오른 구스타프는 곧 덴마크 · 폴란드 · 러시아와 전쟁을 치르며 실전경험을 쌓고,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엉성한 군대에 전면적인 수술을 가해 유럽 최고의 군대를 만들었다. 그의 업적 중에는 근대전의 효시를 이룬 것이 많아 그를 근대전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첫 번째 업적은 최초의 국민군을 창설한 점이었다. 그는 대규모 용병부대를 끌어모을 자금의 여유가 없어 '사지가 튼튼한 18세에서 30세 사이의 용감한' 스웨덴 인 가운데 4만 명 이상의 신병을 모집했다. 수송이나 군수품 제조업에 종사하는 자들은 군복무를 면제했다. 그러나 턱없이 부족한 병력의 보충을 위해서는 여전히 용병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둘째, 화력과 기동성을 대폭 살리는 전술체계를 개발했다. 총병(銃兵)과 창병(槍兵)의 비율을 종래의 1:3에서 1:1로 증가시켰다. , 기본 전투단위대대를 216명의 창병과 192명의 총병으로 구성, 화력을 강화했다. 화승총은 다른 나라 것보다 무게를 가볍게 했다. 또한 공성포와 달리 운반하기 용이한 가벼운 야포들을 개발했다. 포의 길이 1.2m에 전체 무게 280이며 1.3짜리 포탄을 날린 작은 포는 전투 시 언제나 보병을 따라갔다. 이 포는 한 마리의 말 또는 세 사람에 의해 운반 가능했다. 기병은 경기병 위주로 편성하고 권총 · 기병검 · 화승총 등으로 무장토록 했다.

셋째, 강인한 훈련을 통해 보병 · 기병 · 포병의 질을 향상시키고, 세 병종 간 팀워크에 의한 최대의 전투력을 발휘케 했다. 6열 종심대형을 지키는 총병들은 3개열씩 동시에 일제사격을 실시하여 화력을 집중했다. 그러는 동안 창병들은 총병을 보호하다가 육박전을 전개할 때는 결정적인 공격을 가함으로써 총과 창의 공격력을 효과있게 결합시켰다.

넷째, 그는 통일된 군복을 지급하고 계급에 따르는 견장을 도입하여 군기를 잡고 사기를 북돋았다. 그밖에 병참부를 조직하고 무기를 표준화하여 국가가 무기조달에 대한 모든 책임을 맡았다. 복지 차원에서도 각 대대에 한 명씩의 군의관을 배치하고 군 병원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포획 물자에서 1/10을 따로 적립했다.

구스타프의 개혁을 보면 결코 새로운 아이디어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당대의 수준 높은 과학기술을 전쟁과 군대에서 최고로 활용하는 기술에서 천재적이었다.

1630년 가톨릭의 합스부르크 세력이 한창일 때 구스타프는 군대를 이끌고 북부 독일해안에 상륙함으로써 30년전쟁에 뛰어들었다. 프로테스탄트를 보호한다는 명분과 함께 발트 해로부터 적의 위협을 제거하고 발트 해를 스웨덴의 호수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행동이었다.

그는 넓디넓은 독일 땅에서 전쟁을 하면 비록 작은 군대를 거느리고도 적의 허점을 공격하여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적은 10만 명으로 병력이 우세했지만 질적으로는 결코 두려워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독일 내에서 프로테스탄트를 지지하는 귀족들은 겁이 많고 비관적이어서 구스타프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첫해에는 기지를 보강하고 병력증원을 위해 노력하면서 다음해 전투를 준비했다.

16319, 드디어 신성로마제국의 연합군과 구스타프의 스웨덴 동맹군은 라이프치히 북쪽으로 8떨어진 브라이텐펠트에서 전투를 벌였다. 구스타프의 군대는 42,000, 가톨릭 군대는 35,000명이었다. 프로테스탄트 군대 가운데 24,000명은 스웨덴 인들로서, 오랜 훈련과 여러 전투를 통해 구스타프의 전술을 완전히 터득한 병사들이었다.

구스타프의 전술대형은 T자형을 유지하고 총병과 창병을 절묘하게 결합했다. 그리하여 구스타프의 여단은 '장벽과 삼각보루의 모습으로 이동하는 작은 요새'라는 평을 받았다. 한편 70세의 노장 틸리(Tilly)가 지휘하는 가톨릭 군대는 일률적으로 50열로 구성된 단단한 밀집대형으로 정렬하여 중앙에 보병, 양익에 기병을 배치했다.

전투 시작부터 가톨릭 군대의 병력 열세가 분명했다. 대포의 숫자도 26문 대 54문으로 열세했다. 한 차례 포격을 할 때마다 적으로부터 약 3차례의 포격을 받았다. 포병공격에 이어서 구스타프는 신속하게 기병대와 T자형 보병대형을 유연하게 운용하면서 협동작전의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에 대해 틸리 군은 기병대를 활용하고 보병집단으로 구스타프 군을 수차례 공격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이 전투에서 틸리 군은 약 21,000명의 병력을 잃고 대포를 모두 빼앗겼다. 구스타프 군의 손실은 틸리 군의 1/10에 불과했고, 그것도 주로 최초 포격전이 전개될 때 발생한 것이었다.

군사적으로 볼 때 브라이텐펠트 싸움은 구스타프 군이 마치 로마 군단처럼 유연한 대형을 유지하고 싸움으로써 그리스 방진처럼 빽빽한 밀집대형으로 싸운 틸리 군에 대해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정치적으로 이 전투는 30년전쟁의 전 과정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고 북유럽에 대한 합스부르크가의 지배를 막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는 모두 위대한 개혁가이자 전사였던 구스타프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목차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