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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스페인의 무적함대 아르마다 패배

39. 스페인의 무적함대 아르마다 패배

 

영국해군, ‘프로테스탄트 바람을 등지고 싸워 이기다(1588)

 

아르마다의 패배. 루터버그

 

16세기 유럽에서는 포르투갈 · 스페인 · 네덜란드 · 영국 · 프랑스 등이 강력한 해상무역 강국으로 등장했다. 과거 해외무역은 주로 지중해를 거쳐 동방으로 연결하는 육로에 의존했으나, 이제는 지브롤터 해협과 대서양을 이용한 해상무역로들을 발견하고 신세계를 개척하는 사업에 많은 유럽인들이 참여했다. 그리하여 이른바 탐험의 시대가 개막되었다.

탐험의 시대에서 가장 선구적인 나라는 포르투갈이었다. 이 나라는 보다 크고 빠른 선박 제조기술과 항해술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 어느 나라보다도 적극적이었다. '항해왕자'로 알려진 헨리 왕자(1394~1460)는 전 생애를 항해기술 발전에 봉사했다. 항해술을 전공하는 대학을 창설하고 탐험가들에게 막대한 자금을 지원했다. 그의 후원으로 바스코 다 가마는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가는 항로를, 그리고 페드로 카브랄은 남미의 브라질을 발견했다. 이후 포르투갈은 일약 강국으로 등장하고, 수도 리스본은 세계적인 상업도시로 부상했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선구자로서의 특권을 오래 누리지 못했다. 강력한 지도력이 결여된 포르투갈은 점차 기울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1580년에는 스페인에게 합병되고 말았다.

포르투갈보다는 한발 늦게 탐험에 참여했으나 포르투갈을 합병한 뒤 스페인은 막강한 해군을 보유하고 최강 해상국으로 올라섰다. 16세기 말 스페인 왕 필리페 2세는 스페인 · 포르투갈 · 네덜란드 · 프랑쉐-콩테 · 밀라노 · 나폴리 · 시칠리아 · 사르디니아 · 북아프리카 일부 등과 중남미의 거대한 식민지를 통치했다. 식민지로부터 들어오는 금은괴의 양은 실로 막대했다. 필리페는 야심가로서 세계 정복까지는 아니더라도 유럽 통일을 원했고, 종교적으로는 프로테스탄티즘을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러한 필리페에게 가장 큰 장애는 영국이었다. 영국이 프로테스탄티즘을 굳건히 지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스페인의 신대륙 독점에 대해 가장 세차게 도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6세기 초 영국은 비록 경제적으로 낙후되고 탐험 및 무역에 저조했지만,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해군력 확보와 함께 신세계 탐험에 큰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영국 해군은 짧은 시간에 큰 발전을 이루었는데, 그것은 대서양 가장자리에 위치하여 노를 사용하는 배가 아닌 범선으로 바다를 개척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영국왕 헨리 8세는 갈레온 위주로 해군을 조직, 현대적인 해군의 발단을 이루었다. 갈레온은 3~4층 갑판과 3~4개의 돛을 갖추고 무역과 군용으로 사용되는 400톤급 이상의 대형범선이다. 군용은 화물갑판에 장전식 대포를 장착하여 무서운 공격력을 발휘했다.

헨리 8세의 딸 엘리자베스 여왕이 재위하던 기간(1558~1603)에 영국과 스페인의 적대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엘리자베스는 해군력을 강화하는 한편, 영국 선박의 스페인 선박에 대한 약탈활동을 방치함으로써 스페인을 자극시켰다. 그러자 필리페 2세는 갤리 선을 갈레온으로 교체, 해군력을 보다 강화하고 영국을 침략할 계획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스페인의 전략은 네덜란드에 주둔한 파르마 공(Duke of Parma)의 부대로 1케르크와 칼레 지역에서 도버 해협을 건너 영국을 침공하는 한편, 거대하게 구축한 아르마다 함대로 하여금 제해권을 장악하고 영국 침공작전을 보호한다는 것이다. 1588525일 영국해협을 향해 출발한 아르마다의 규모는 거대했다. 137척 중 65척은 대형 갈레온이었다. 갤리 선과 갈레아스는 각각 4척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아르마다에 장착된 대포들은 대체로 사거리가 짧았다. 이는 레판토 해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스페인인들은 아직도 포격 후 신속하게 배에 기어올라 전투를 전개하는 해전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30,000명의 병력 가운데 약 2/3는 기어올라 싸울 목적으로 준비된 것이었다.

한편 플리머스(Plymouth)에 정박한 영국 함대는 총 197척이었는데, 34척은 여왕의 배이고, 163척은 개인 소유였다. 갈레온의 숫자는 아르마다와 대등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기동 및 관리가 용이한 소형 배들과 정확하고 신속하게 포격을 가할 수 있는 선원들을 많이 보유했으며, 배 위에서 육박전을 펼칠 병력을 따로 갖지 않은 점 등은 아르마다와의 중요한 차이였다. 한 마디로 영국군의 해전개념은 대포에 의존한 것이었다.

스페인의 전술은 단거리에서 적을 포격해 돛에 손상을 입히고 접근하여 쇠갈퀴로 적선을 끌어당겨 올라타 싸우는 것이었다. 반면 영국군의 전술은 먼 거리에서부터 적선에 포격을 가해 적선을 침몰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보다 가볍지만 사정거리가 긴 포탄을 사용했다. 당시 기술로는 무거우면서도 사정거리가 긴 포탄을 날리기는 불가능했다.

기상 악화로 2개월을 기다린 후 7월 하순 드디어 아르마다는 영국 함대를 향해 진격했다. 영국군은 플리머스 항구를 박차고 나왔다. 영국군 지휘관 드레이크(Francis Drake)는 해전에서 명성을 떨친 인물로서 함대를 잘 이끌었다. 그는 일단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차지하기 위해 갈지자를 그리며 함대를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리하여 바람을 등지고 싸우는 위치를 계속 지키고 전투를 주도했다. 이른바 '프로테스탄트 바람'이라는 남서풍이 계속 불어온 덕분이기도 했다. 아르마다는 바람에 의해, 그리고 영국함대의 압력에 의해 영국해협으로 올라갔다.

영국군은 우수한 기동성과 사정거리가 긴 대포를 활용하여 적 후미를 따라가며 매일같이 공격을 퍼부어댔다. 함대를 4개의 소함대로 나누어 조직적으로 일제사격을 가하며 공격했다. 그리고 몇 척의 화선(火船)을 보내 아르마다에 큰 혼란을 주기도 했다. 영국군이 안전한 거리에서 날린 가벼운 포탄으로는 적선을 침몰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아르마다의 포탄이 다 떨어지자 영국 함대는 가까이 접근하여 적선들을 침몰시킬 수 있었다. 아르마다는 많은 부서진 배들을 이끌고 표류하다시피하면서 스코틀랜드 북쪽으로 도주하고 또한 폭풍을 만나 참변을 당하고 말았다. 본국으로 귀환한 배는 심하게 부서진 상태의 53척에 불과했다.

영국군의 아르마다에 대한 승리는 해전술에서 획기적 전환점을 이룬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전투 이후 영국이 곧 최강 해상국으로 등장했다거나 스페인 제국이 금방 몰락한 것은 아니었다. 큰 승리 후 자주 일어나듯이 영국해군은 자만했고, 그동안 스페인은 놀랍도록 짧은 기간에 새로운 아르마다를 재건했으며, 그리하여 상당기간 더 해상강국의 면모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전투를 통해 스페인 해군은 오히려 거듭났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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