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레판토 해전
16세기 최대 규모 해전에서 떨친 화력의 힘(1571년)

그리스 중서부 코린토스만 북쪽 해안에 있는 레판토 앞바다에서 16세기 유럽 최대의 해전이 벌어졌다.
15~16세기 유럽인들은 그 이전 시대보다 비교적 외국인들로부터 침략을 덜 받고 자유롭게 살았다. 그들 가운데는 새로운 세계를 향해 바다로 진출하는 자들이 부쩍 증가되었다. 부자가 되고 싶은 욕망, 크리스트교를 전파하고자 하는 열기, 또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 등 여러 가지 동기와 함께 항해술 및 해군력의 발전은 유럽 열강들의 신세계 정복 경쟁을 부추겼다.
그 경쟁에서 가장 앞선 나라는 스페인으로서,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16세기 초에 멕시코의 아스테크 제국과 페루의 잉카 제국 등을 정복했다. 스페인인들은 다른 나라보다 기술적으로 우수한 배와 대포를 갖고 인디언들의 배를 제압했으며, 지상에서는 석궁 · 화승총 · 대포 등으로 인디언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한편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이 대서양에서 세력을 팽창시키고 있을 때, 지중해에서는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이후 서쪽으로 세력을 뻗치면서 북아프리카 연안 일대를 장악하기 위한 팽창정책을 계속 밀고 나갔다. 그 결과 지중해를 놓고 유럽 세력과 오스만투르크 제국 간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1566년 술탄으로 즉위한 셀림 2세(Selim Ⅱ)는 드디어 1570년에 베네치아 소유령인 키프로스 섬을 공격했다. 베네치아가 약 100년을 지배해온 곳으로, 동지중해의 지배를 상징하는 곳이었다.
베네치아는 로마와 스페인에 도움을 요청했다. 교황 피우스 5세는 신성동맹(가톨릭 동맹)을 향해 투르크 족을 격퇴하고 크리스트교 세계를 보호하자고 호소했다.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오랫동안의 상호 적대관계로 말미암아 협조 요구에 미온적이었다. 그러나 스페인 왕 필리페 2세는 교황의 호소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왕으로서 그는 베네치아의 쇠망을 은근히 바랐었지만, 키프로스의 상실은 곧 스페인의 지중해상 권익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우선 베네치아를 돕기로 결심했다.
1571년 5월 베네치아 · 로마 · 스페인 3국은 스페인 왕의 이복동생인 오스트리아의 돈 후안(Don Juan)을 사령관으로 하는 단일 함대를 편성했다. 그 후 이 함대는 다른 여러 유럽국들도 개별적으로 선박과 승무원들을 파견함으로써 민족주의를 초월한 '십자군 함대'로 발전했으며, 8월 말 메시나에 집결, 9월 16일 출항했다. 당시 투르크 함대는 코린토스 만의 레판토에 집결해 있었다.
크리스트교 함대는 200척 이상의 갤리 선, 6척의 갈레아스 선, 24척의 대형 수송선, 그리고 50척의 소형선으로 구성되었다. 알리 파샤(Ali Pasha)가 이끄는 투르크 함대는 250척의 갤리선, 40척의 갤리오트 선(소형 갤리 선), 그리고 20척의 소형선으로 구성되었다.
당시 해전술은 배끼리 부딪치고(Ramming), 배에 기어올라(Boarding) 싸우는 것이 전부였다. 기어올라 싸우는 전투병력은 크리스트교 측 20,000명, 투르크 측 16,000명이었다. 노를 젓고 항해하는 데 투입된 선원들은 이보다 훨씬 많아 각각 64,000명과 72,000명이었다.
레판토 해전에서 사용된 전함은 갤리 선으로서 페르시아 전쟁 중 살라미스 해전(BC480)에서 사용된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당시 갤리 선은 길고 협소하며, 갑판이 하나인 배로서 길이 약 150피트와 무게 170톤쯤 되었다. 배 양쪽에 30개씩 60개의 노를 설치하고, 각각의 노에는 4~6명의 선원을 배치하는데 노예들을 많이 활용했다. 바람이 좋을 때는 바람의 힘을 이용하기 위해 돛을 사용했으나, 갤리 선은 기본적으로 노를 저어 항해하는 배였다.
양측 갤리 선은 근본적으로는 똑같은 유형이나 몇 가지 차이가 나는 점이 있었으며, 그 차이가 상당히 중요한 결과로 나타났다. 크리스트교 갤리 선은 뱃머리에 5문의 대포를 올려놓았고, 약간 작은 투르크 갤리 선에는 3문이 있었다. 그리고 크리스트교 함대만 보유한 갈레아스 선은 각각 약 30문의 대포를 보유했다. 갈레아스 선은 갤리 선보다 약 2배의 크기로서, 느리기는 하지만 많은 병력을 싣고 많은 포를 운반했다. 그러나 이런 포들은 작은 포들로서 배를 격퇴시키기보다는 사람을 죽이는 데 사용되었다. 크리스트교 전투병력들은 화승총으로 무장한 데 반해 투르크 병사들은 주로 활로 무장되어 있었다. 이와 같이 크리스트교 측이 기술적으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10월 7일 아침 양측 함대는 레판토 서쪽 약 40㎞ 떨어진 곳에서 서로의 시야에 들어오면서 공격준비를 갖추었다. 양측은 8㎞ 전선에 뻗쳐 대치했고, 10시 30분부터 교전을 벌여 정오경에는 주력부대가 완전한 교전상태에 들어갔다. 갈레아스 선이 투르크 갤리 선에 대포를 쏘고 전열을 흐트러뜨렸지만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3시간의 난전이 벌어지는 동안 크리스트교의 항해술과 병사들의 무장이 우위라는 사실이 점차 입증되고 투르크 측이 패색을 보이기 시작하자, 그들 갤리 선에서 노를 젓던 크리스트교인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켜 투르크와의 싸움에 가세했다. 육지와 가까운 곳의 투르크 함대는 해안으로 도주하고 크리스트교 측 좌익에서의 승리는 완벽했다.
중앙에서의 전투는 다소 시간을 끌었지만 결국 크리스트교 측이 승리했다. 두 기함 간의 격렬한 싸움에서 많은 투르크인들은 화승총에 쓰러졌다. 돈 후안은 투르크의 기함을 쇠갈퀴에 걸어 잡아당기고 군기를 빼앗았다. 그리고 알리 파샤의 목을 벰으로써 승리를 결정지었다.
우익은 보다 긴 투르크 전열에 눌려 초기에는 매우 고전했다. 그러나 예비대 지원 이후 반격하기 시작했고, 중앙 전투의 패배를 뒤늦게 알고 투르크인들은 도주했다. 4시경에 모든 전투는 끝이 났다.
이 전투에서 투르크 측 손실은 막대했다. 53척의 갤리 선이 격침되고 117척과 대포 274문이 포획되었다. 15,000~20,000명이 전사하고, 크리스트교 인 노예는 10,000명이 죽고 15,000명이 해방되었다. 한편 크리스트교 측은 13척의 갤리 선과 7,566명을 상실하는 데 불과했다.
이 전투를 통해 크리스트교들은 단합하고 투르크의 지중해 위협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들의 지중해 장악은 오래가지 못했다. 투르크인들은 곧 새로운 함대를 건설했고, 17세기까지는 그곳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이 전투는 약 17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바다에서 격돌한 16세기 유럽의 최대 규모 해전이었으며, 화력으로 승부가 결정난 최초의 해전이었다. 동시에 갤리 선 시대의 최후 전투였다. 양측 함대는 거의 육군처럼 싸웠다. 그들 지휘관들은 육군이었고, 지상에서의 경험을 기초로 한 전술을 적용했다. 범선과 포술의 발전에 의해 대양에서 본격적으로 해상세력을 겨루는 해전의 양상은 레판토 이후에 나타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