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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공

37.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공

 

용병군대를 쓰러뜨리다(1494)

 

북부 이탈리아의 파비아 싸움(1525)

화승총을 든 흰옷의 군대가 방진을 펼친 모습이 보인다. 합스부르크 가의 칼 5세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 군을 패퇴시켰다.

 

15, 6세기 유럽 전쟁사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나라는 영국 · 프랑스 · 스페인 3국으로서 이 3국은 유럽 내에서 일어난 주요 민족 간 또는 왕조 간 전쟁에 대부분 개입했다.

부유한 나라 이탈리아는 나폴리 · 베네치아 · 밀라노 · 피렌체 · 교황령(로마) 등 다섯 군소국으로 분할되어 있었다. 그러나 15세기 말에 내전으로 혼란을 겪게 되자, 각각 복잡한 동맹관계의 인접국 군대를 불러들이는 바람에 1494~1559년 이탈리아 전쟁의 소용돌이에 말려들게 되었다. 이 전쟁에서 각축전을 벌인 주요 강대국은 프랑스와 스페인이었다.

1494년 프랑스 왕 샤를 8세는 약 65,000명의 대군(보병 40,000)을 거느리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에 침입했다. 그는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피렌체를 점령하고 로마로 진격한 뒤, 이듬해에는 나폴리까지 함락하고 베네치아와 밀라노 연합군에게 승리를 거둠으로써 전 이탈리아를 수중에 넣었다.

그러나 이 침략은 모든 이탈리아 군소국들뿐만 아니라 나폴리를 자기 소유라고 주장하는 스페인 왕, 북부 이탈리아와 알프스 무역로의 안전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신성로마제국황제 등을 자극해 전쟁에 끌어들임으로써 전쟁을 확대시켰다.

한편 스위스 용병들은 이 전쟁을 돈을 벌 수 있는 호기로 반기고 이편저편에 가담하면서 무차별 전투를 벌였다.

초기에 샤를 8세의 혁혁한 승리는 이른바 '콘도티에레(용병대장) 전쟁시대'의 막을 내렸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었다. 이탈리아의 각 군주는 용병대장과 계약을 맺고 그에게 전쟁을 맡겼는데, 일반적으로 용병대장은 전투를 피하고 기동훈련을 하는 식의 부드러운 전쟁을 진행시켰다. 그러나 샤를 8세의 군대는 질풍처럼 몰아치고 대살육전을 전개함으로써 콘도티에레 군대를 격멸했다.

여기서 이탈리아인들은 크게 충격을 받았다. 유명한 정치사상가 마키아벨리는 불후의 저서 군주론전술론을 통해 후세 정치인들과 군인들에게 국가안보를 위해서는 군사력 육성과 군사개혁을 소홀히 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강조했다. 특히 용병이나 원병이 아닌 국민군대의 필요성, 보병 · 포병 위주의 군사력, 결전을 통한 승리 추구 등을 역설했다.

샤를 8세는 이탈리아를 휩쓸고 다니면서 최신의 대포 기술을 선보였다. 가벼운 청동포를 개발하여 그것을 보병부대 행군속도에 맞추어 이동하는 야포로 사용하려는 노력을 시도하고, 포탄도 돌멩이 대신에 금속뭉치를 사용한 것은 포술을 한 단계 높인 중요한 발전이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성벽 공격용 대포를 개발하는 데 치우쳐 있었다. 기동성 있고 신속하게 발사할 수 있는 야포는 17세기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전쟁 초기에 나타난 또 하나의 두드러진 특징으로는 '아퀴버스(arquebus)'라는 화승총 사용을 들 수 있다. 이 총은 종래의 것보다 가벼우면서 사거리는 늘어나고 정확성이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화승-발사장치를 개발하여 발사방법이 한결 편리해졌다. 화승에 불을 붙여 점화하는 대신에 방아쇠를 이용한 화승-발사장치에 의한 자동점화가 가능하게 됨으로써 발사의 효율성이 높아진 것이다.

1503년의 체리놀라 싸움에서 스페인의 곤살로 데 코르도바의 보병대는 화승총 부대를 적절히 활용해 창병과 기병 위주로 편성된 프랑스군을 크게 격파했다. 이 전투는 참전병력이 적고 정치적 의미도 별로 없는 전투였으나, 전쟁사적으로는 소총보병 시대의 개막을 알린 서곡이었다.

1525년의 파비아 싸움에서 스페인의 화승총 부대는 프랑스 기병에게 승리함으로써 또다시 그들의 우수성을 확실히 입증했다.

이탈리아 전쟁은 이탈리아 정치체제를 완전히 무너뜨렸을 뿐만 아니라 용병군대와 기병의 한계를 드러내고 소총보병대의 위력과 대포의 등장에 따르는 보병 · 포병 · 기병 협력의 필요성 등을 입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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