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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콘스탄티노플 함락

36. 콘스탄티노플 함락

 

투르크인들이 유럽의 대포기술을 도입하다(1453)

 

콘스탄티노플 공성전

서유럽의 전쟁 기술이 백년전쟁 중 가파른 발전을 이루고 있을 때, 남동쪽의 비잔틴 제국은 투르크인들과의 충돌에서 잇달아 패배하고 쇠망의 길에 들어섰다.

 

투르크인들은 중앙아시아에서 팽창하는 몽골 세력에 쫓겨 아라비아와 동지중해 지역으로 진출, 비잔틴 제국을 공격하게 되었다. 셀주크 왕조가 몰락한 뒤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한 오스만(Osman) 세력이 급팽창하여 오스만 제국을 건설했다.

오스만투르크인들은 적의 분열 때문에 손쉽게 팽창할 수 있었다. 이미 십자군 전사들이 콘스탄티노플을 유린했을 때 서유럽과 비잔틴 제국의 관계는 금이 갔고, 종교적으로도 서유럽은 동방정교를 고집하는 비잔틴에 대해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투르크인들은 세력을 팽창하고 메메트 2세가 술탄(오스만 제국 황제)이 되자, 드디어 오랜 숙원사업인 콘스탄티노플 공략작전을 시작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기 위해 약 22의 성벽 내에서 수비하는 약 7,000명에 대해 무려 10만 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투르크군은 술탄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바치고 고도의 훈련과 엄격한 기율로 다져진 당시 유럽의 어느 적보다 우수한 군대였다. 주력부대는 정예의 기병대와 보병대로 구성되었으나, 그밖에 포병 · 공병 · 해병 · 갑옷제작 · 대장장이 · 병참 · 군악 등 각 분야별로 전문화 부대를 보유하고 근대식 병과들의 협동작전을 구사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투르크인들은 전쟁사상 하나의 이정표를 세웠다. 그것은 최초로 대포를 사용해 요새를 파괴하고 그 도시를 함락했다는 점이다.

투르크인들은 화포의 혁명적인 의미를 유럽인들보다 더 빨리 파악하고 있었다. 본래 대포 기술은 크리스트교도들로부터 스페인의 이슬람교도들에게 전해지고, 다시 스페인을 통해 북아프리카로, 그리고 다시 투르크인들에게 전파되었다.

투르크인들은 성벽을 부수는 데 대포만큼 적합한 수단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최고의 대포를 개발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삼중 성벽은 중세 요새들 가운데 가장 튼튼한 요새로서, 웬만한 대포로는 효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당시 최고의 대포는 비잔틴 제국에서 먼저 개발할 수 있었다. 1452년 우르반(Urban)이라는 헝가리 기술자가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찾아와 그러한 대포 제작을 제의했다. 그러나 황제는 값이 비싸다는 이유를 들어 그 제의를 거절했다.

그러자 우르반은 보스포러스 해협을 건너 메메트에게 접근했고, 이때 술탄은 우르반이 요구한 액수의 4배까지 지불하고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지원함으로써 결국 1453년 초에는 원하던 최대의 대포 제작에 성공했다.

이 거포는 포신의 길이 8.2m, 구경 0.9m로서 450이상의 돌덩이를 1마일 정도 날려보냈다. 이 포를 운반하는 데는 병력 200명과 황소 60마리가 필요했다. 포성이 워낙 커서 발사실험을 할 때 약 19떨어진 곳에 있던 임산부가 유산을 했다고 한다. 이 대포는 사용 중 파열되고 말았으나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보다 작지만 다른 대포들을 동원하여 포격의 위력을 한껏 발휘했기 때문이다.

투르크인들은 성벽 가운데 가장 취약한 곳을 골라 6주 동안 쉬지 않고 집중적인 포격을 가했다. 대포는 발사 후 식혀야 하기 때문에 하루에 7회 이상 발사하지 못했다. 수비군들은 밤낮 없이 성벽 뒤에 방책과 토루를 쌓아올리며 온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무자비한 포격에 견디지 못해 결국 콘스탄티노플은 함락되고, 그와 동시에 비잔틴 제국은 멸망했다.

콘스탄티노플 함락은 군사강국으로서 투르크인들의 대약진을 의미하는 서곡이었다. 그들은 이어서 그리스와 세르비아를 완전히 정복하고 동부 지중해와 근동 일대를 지배했다.

투르크인의 승리에서 흥미로운 점은 유럽인은 대포기술을 먼저 개발하고도 그 가치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함으로써 오히려 적에게 당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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