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아쟁쿠르 전투
화살로 기병대 격파(1415년)

아쟁쿠르에서 맹위를 떨친 영국 궁수 보병들
크레시 싸움 이후에도 백년전쟁은 지속되었다. 영국이 주도적인 군사강국으로 부상하고 여러 전투에서 대체로 영국군이 우세를 보였다. 그러나 백해무익한 전투가 많았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원정군에 대한 프랑스의 지구전 전략은 효과를 거두었다. 또한 영국과 프랑스 양국 다 왕정의 불안정과 교체를 거듭하는 가운데 전쟁의 국면과 성격은 자주 변했다.
1415년 늦여름, 아쟁쿠르 싸움은 야심가였던 영국 왕 헨리 5세가 잃었던 땅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면서 프랑스에 대한 공격을 재개함으로써 발발했다. 그동안 양국 간에는 잃거나 얻었던 땅들이 많았으며, 그런 곳은 늘 분쟁의 소지를 안고 있었다. 헨리 5세는 센 강 동쪽 프랑스 북부지방 칼레(Calais)와 그 일대를 찾고자 했다. 1204년 존 왕이 잃어버린 노르망디 공국의 영토를 완전히 회복하겠다는 것이다.
헨리 5세가 침공을 위해 끌어모은 병력은 궁수 보병 8,000명과 중기병 2,000명, 모두 10,000명이었다. 8월 14일 영국군은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하고 동쪽으로 진출, 약 1개월 만에 센 강 하구 하르플루(Harfleur)를 함락시키고 전초기지를 마련했다. 그 후 칼레를 향한 공격 경로에서 솜 강을 제외하고는 크게 문제가 되는 방해물은 없었다. 솜 강 상류에서 적절한 장소를 찾아 도하를 완료한 것은 10월 19일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영국군은 가을비로 인한 질병 환자가 많이 생기고, 약 500㎞의 행군으로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이때 프랑스군은 내륙 깊이 들어온 영국군을 압도적인 병력으로 제압하겠다는 계획을 수립하고 아쟁쿠르 요새 가까운 곳에서 전투대형을 갖추었다. 10월 25일 양군은 약 900m 거리를 두고 대치했다. 프랑스군은 약 25,000명으로서 주로 중기병이었으나 그들 가운데 일부만이 말을 타고 있었고, 대부분은 말을 타지 않은 채 마치 보병처럼 행동했다.
4시간 동안 양측은 움직이지 않았다. 헨리 5세는 프랑스군이 선제공격하기를 원했다. 한편 프랑스군도 헨리 5세가 퇴각하리라 판단, 그때를 노리며 공격을 미루었다.
헨리 5세는 전투를 결코 피하자는 것은 아니었으며, 어떻게 하면 유리한 위치에서 싸울 수 있을까를 노렸던 것이다. 그러다가 최종적으로 결심한 것은 선제공격으로 적을 화나게 하여 그들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방법이었다.
약 300m 거리에 좁혀 들어갔을 때 영국군 궁수들은 화살을 날려보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헨리 5세가 예상한 대로 프랑스군은 공격채비를 서두르며 먼저 양측방 말을 탄 중기병들이 돌격을 실시해오고 이어서 말을 타지 않은 중기병들도 공격해왔다.
그러나 프랑스 기병들은 영국군 궁수들이 쏜 불화살을 견디지 못하고 말머리를 돌려 돌아가다가 후속해오던 도보 부대와 충돌하는가 하면, 전체적으로 너무 밀집된 공간에서 무기를 제대로 사용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은 크레시 전투처럼 장궁의 위력을 최대로 발휘했을 뿐만 아니라, 궁수부대 전면에 날카롭게 깎은 막대기들을 꽂아놓음으로써 적 기병대의 돌격을 저지하는 데 큰 효과를 거두었다.
궁수들은 기병대를 맞이하여 잘 싸우도록 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프랑스 기사들은 불리할 때 말들이 본능적으로 숙영지로 회귀하려 한 점을 무시한 채 무리하게 돌격을 강요함으로써 재앙을 초래했다. 화살 공격으로부터 죽음과 낙마를 피해 달려온 기병들은 다시 막대기 장벽 때문에 넘어지거나 정지되곤 했다.
프랑스 기병대가 퇴각하기 시작하자 영국 궁수들은 소나기처럼 화살을 쏘아댔다. 기병대의 패주는 자신들의 혼란으로만 끝나지 않고 후속하던 '말을 안 탄 중기병'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들 행군대열에 난입한 말들은 병사들을 쓰러뜨리고 그들의 진격을 크게 방해했다.
이때 영국군 주력부대는 신속히 진격하여 밀집된 프랑스군과 육박전을 전개했다. 이 육박전에서 영국군은 헨리 5세의 통제를 받으며 싸웠던 데 반해 프랑스군은 강력한 지휘관 없이 우왕좌왕하며 싸웠다. 더구나 프랑스군은 영국군보다 짧은 창을 갖고 싸워 불리했으며, 갑옷의 무게는 훨씬 무거워 매우 둔하게 움직였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프랑스군 내에는 공포심이 확산되고, 이윽고 제1전열이 쉽게 무너졌다. 그 뒤 제2전열, 제3전열이 지원했지만 서로 뒤엉키기만 하여 엄청난 학살을 당하고 말았다.
이 전투는 크레시 전투의 교훈을 재확인시켜주었다. 말을 탄 기사에 대해 기강이 잘 잡힌 보병이 준비되어 있으면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밖에 이 전투는 한계상황에서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정신적 요인이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기나긴 행군에 지쳐 있었지만 영국군은 프랑스군과는 달리 왕이 그들과 함께 있다는 사실에서 정신적인 일체감을 이루고 커다란 용기를 발휘함으로써 승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