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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헤이스팅스 전투

29. 헤이스팅스 전투

 

노르만족, 영국 정복의 발판을 마련하다(1066)

 

노르만족 기병과 색슨 족 보병 간의 백병전

접근전에서 기병은 말 위에서 칼을 휘둘러 우세를 나타냈다.

 

11세기경 유럽에서 군사적으로 가장 두드러진 민족은 노르만 족이었다. 북유럽 해안에서 해적질을 일삼다가 서유럽에 침입한 그들은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노르망디 공국을 봉건 영토로 제공받고 세력을 키워갔다.

노르만족 군대는 기본적으로 보병으로 구성되었으나, 프랑스 땅에 정착하면서는 그곳에서 배운 전법을 익혀 당시 유럽의 중기병과 요새 축성술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전쟁에 길들여져 있고 전쟁 없이 살지 못하는 민족'이라는 평판을 얻은 그들은 전쟁으로 영토를 크게 넓혀나갔다.

영국을 점령할 때, 1066년 헤이스팅스(Hastings) 싸움에서 명성을 떨친 노르망디 공국의 윌리엄 대공(1028~87)은 위대한 지배자이며 전략가이자 훌륭한 전술가였다.

윌리엄 대공의 영국 원정은 영국 왕 에드워드(참회왕)가 죽은 후 왕위계승권을 놓고 이루어졌다. 에드워드가 매제인 해럴드 2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자, 사촌이었던 윌리엄이 원정에 나서게 된 것이다. 이때 교황 알렉산더 2세는 윌리엄을 지지했다.

해럴드의 영국군은 백작들과 지방관리들 휘하의 지방군과 왕이 거느리는 소수의 상비 직업군으로 구성되었다. 영국군은 기본적으로 보병들로 찌르는 창과 투창 · 양날 검 · 도끼 등으로 무장했다. 방패는 원형 또는 연 모양이었고, 부유한 자들은 금속 투구와 쇠미늘 갑옷을 착용했다.

윌리엄은 영국을 침입하기 위해 9개월 전부터 군대를 모아 준비하고 450척이 넘는 수송선 함대를 확보했다. 봉건제도가 확고하게 자리 잡은 상태에서 노르망디 공국의 모든 귀족과 영주들은 윌리엄에게 기사들을 제공했다. 긴 쇠미늘 갑옷을 걸친 기사들은 코 보호대가 달린 원뿔형 투구를 쓰고 대개 연처럼 생긴 높이 1m가량의 방패를 사용했다. 주무기는 길이가 2.7m되는 가벼운 창으로 끝에는 넓적한 쇠촉이 붙어 있었다. 칼은 양날 검으로서 길이가 약 1.1m쯤 되었다. 이외에도 기사들은 전투용 도끼나 쇠뭉치를 단 철퇴를 보유했다.

기사들은 공국 영토 범위 내에서 1년에 40일만 복무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대다수 귀족들은 윌리엄과 함께 영국에 원정 가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러한 제한은 저절로 해결되었다. 교황의 묵인이 있고 또한 부유한 나라로 소문난 영국을 정복한다는 것은 대단히 매혹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윌리엄은 모두 2~3천 명의 기사를 모았다.

그 밖에 그는 약 3~4천 명의 보병을 소집했다. 이들은 창과 칼로 무장하고 궁수도 포함되었다. 궁수들 가운데는 일부가 석궁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석궁은 예전의 활보다 훨씬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 것이었다.

8월 말 영국 해협을 건너기 위한 준비를 마친 윌리엄은 남서풍이 불 때까지 한 달을 기다리다가, 927일 밤 드디어 솜(Somme)강 하구에서부터 해협을 건너기 시작하여 이튿날 아침에는 헤이스팅스 근처에 상륙하는 데 성공했다.

해럴드와 그의 군대는 북부를 침입한 노르웨이인들과 전투하느라 남부해안은 무방비 상태로 두었었다. 따라서 윌리엄은 아무런 저항 없이 영국 땅에 들어갈 수 있었다.

101일 노르만군의 상륙 소식을 들은 해럴드는 곧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장이 400나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동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사실상 해럴드 입장에서는 이미 윌리엄이 영국 땅에 들어와 있는 바에야 서두르기보다는 시간을 끄는 것이 더 현명한 전략이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원정 온 윌리엄의 군대는 전투가 오래 지연되면 될수록 점점 지치고 사기가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윌리엄은 해럴드에 대한 충동질의 일환으로 헤이스팅스 지역을 무참히 약탈하기 시작했다. 과거 해럴드가 백작 시절에 소유한 영지의 일부였던 그 지역에 대한 유린을 그가 그대로 관망할 리 없다고 계산한 것이다.

해럴드는 윌리엄이 예상한 대로 곧장 헤이스팅스로 진군했고, 1013일 저녁에는 헤이스팅스 북방 도로변 산등성이에 진지를 폈다. 한편 윌리엄은 이튿날 아침 적 기습을 받기 전에 미리 움직여 영국군 진지 전방에 도착했다. 그리하여 기습당해 놀란 것은 오히려 영국군이었다. 그들은 밤중에 도착하여 아직 잠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쌍방은 각각 약 1만 명으로 전투대형을 편성했다. 영국군은 순전히 보병 밀집대형으로서 중앙에 정예 상비군을 배치하고, 모든 보병이 방패와 창을 들고 이른바 방패벽을 형성하고 숲과 같은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제대로 무장되지 않은 병사들이 많았고 강행군 뒤라 매우 지쳐 있었다.

한편 헤이스팅스에서 행군해온 노르만 군대는 좌익 · 우익 · 중앙 등 3개 부대로 확실히 나누어져 각 부대별 작전이 가능하게끔 편성되었다. 윌리엄은 중앙의 정예군을 직접 지휘했다. 각 부대는 3개 전열을 유지하고 제1전열은 궁수, 2전열은 중보병, 3전열은 기사로 편성했다. 궁수들과 중보병들이 적을 약화시킨 다음에 기사들로 하여금 결정타를 가한다는 전열 편성이었다.

해럴드는 전투대열을 순시하고 다니며 방패벽을 확고하게 유지하는 한 두려울 것이 없다고 부하들을 격려했다. 그의 말은 옳았지만 과연 방패벽이 그대로 유지될 것인가가 문제였다.

149시 무렵 전투가 개시되자 노르만군은 먼저 궁수들이 활을 쏘아댔다. 그러나 언덕 위로 쏘아야 하기 때문에 화살 대부분은 영국군 머리 위로 지나가거나 방패만 맞추었다. 영국군은 지형의 이점을 활용하고 노르만 궁수 및 중보병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그러나 영국군 우익은 대열을 이탈하여 비탈에서 퇴각하는 노르만 기사들을 추격했다. 이는 해럴드의 명령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 생긴 결과로서 재앙을 자초했다. 보병이 기병을 추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계곡에 이르자 머뭇거리는 영국군에 대하여 윌리엄은 노르만 기사들에게 반격을 명령했다. 기사들은 집단전술을 취한 것이 아니고 개별적으로 공격했지만 용맹했다. 특히 윌리엄 자신은 철퇴를 휘두르며 전투를 지휘하고 부하들의 용기를 북돋워줌으로써 추격한 영국군에 대해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영국군 중앙과 좌익은 언덕 위에서 바위처럼 버티고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며 그의 공격이 아무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윌리엄은 색다른 방법을 시도했다. 그는 궁수들을 언덕 위로 올려보낸 다음 적과 90m 거리에서 화살을 거의 수직으로 하늘을 향하여 날리도록 했다. 화살은 영국군에게 빗줄기처럼 쏟아졌으며, 그러자 영국군은 겁에 질리고 혼란상태에 빠졌다. 그 순간 기사들은 일제히 공격하여 방패벽을 무너뜨리고 대승을 거두었다. 추격을 마치고 돌아온 윌리엄은 전장에서 거의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갈가리 찢겨진 해럴드의 시신을 확인할 수 있었다.

헤이스팅스 전투 이후 윌리엄은 영국을 쉽게 정복하고, 그해 성탄절에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왕위에 올랐다. 12세기에 노르만 제국은 유럽에서 가장 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영토를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잉글랜드, 서부 프랑스를 거쳐 피레네 산맥까지 판도를 확장했다.

이 전투는 봉건시대의 다른 전투와 마찬가지로 기병대가 요체를 이루어 승리한 전투였다. 윌리엄과 해럴드 두 지휘관의 차이는 사실상 승부의 관건이었다. 왜 해럴드가 남부해안을 무방비 상태로 두었는가, 그리고 지상전투를 하는 동안 그는 왜 해군력을 이용한 해상공격을 하지 않았는가 등을 지적하면서 지휘관의 전략적 판단의 중요성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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