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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샤를마뉴의 서유럽 정복

27. 샤를마뉴의 서유럽 정복

 

조직과 기강으로 대제국 유지(8세기 ~ 9세기)

 

샤를마뉴를 맞이하는 교황 하드리아노 1

 

서로마 멸망 후에 유럽을 휩쓴 게르만족 가운데 최고 실력자로 떠오른 종족은 프랑크족이었다. 이들은 라인 강 하류의 네덜란드 · 벨기에 · 라인란트 등에서부터 차츰 남쪽으로 세력을 뻗쳐나갔고, 샤를마뉴(Charlemagne, 샤를 대제, 742~814) 때에 이르러서는 유럽의 최강국으로 성장하고 사실상 서로마제국을 부활시킨 듯한 인상을 주었다.

768년에 프랑크 왕국 왕위를 승계한 샤를마뉴는 덕망 있는 통치자로서 프랑크족의 용감성을 최대로 발휘하도록 하면서 정복 전쟁을 계속 이끌어갔다. 8세기 말까지 그는 지배 판도를 계속 넓혀 과거 서로마제국 영토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빠진 곳은 북아프리카, 스페인, 남부 이탈리아, 시칠리아, 그리고 앵글로-색슨족의 영국 땅 등이었다. 그 대신 로마제국에 병합된 적이 없는 라인강과 엘베강 사이의 땅을 새로 포함시켰다.

800년 제국을 건설하고 유럽의 지배자로 자처하고 나선 샤를마뉴는 로마제국의 정신적 지도자로 자처하는 교황 레오 3세와 극적 제휴를 이루었다. 그해 성탄절, 교황은 샤를마뉴에게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제관을 씌워주었다. 교황은 동로마제국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샤를마뉴를 인정하고, 샤를마뉴는 유럽을 지배하기 위해 교황의 지원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이로써 샤를마뉴는 서로마제국의 계승자로서 유럽 일대를 석권하고, 또한 교황과 크리스트교의 수호자로서 이교도들을 크리스트교도로 개종시키기 위한 정복 전쟁을 계속 벌여나갔다.

제위 기간 중 샤를마뉴는 수많은 전쟁에서 롬바르디인 · 색슨족 · 세르비아인 · 아바르족 · 스페인인의 이슬람교도를 비롯, 동로마제국 식민지인 등과 싸우면서 빛나는 승리의 기록을 남겼다. 승리는 대부분이 적의 퇴보한 군사기술에 대해 그의 군대를 활력 있게 움직임으로서 가능했다. 당시 전장에서는 과거 로마군의 훌륭한 훈련과 전술을 찾기 어려웠는데, 그래도 상대적으로 가장 잘 전수받은 것은 프랑크족 군대였다.

샤를마뉴 군대의 핵은 중기병으로서, 그들은 아바르 족의 기마 궁수들이나 롬바르디족 창병들을 효과적으로 제압했다. 기병의 가치를 인식하면서도 유지비용 때문에 처음에는 그 양성이 수월하지 않았다. · 갑옷 · 마구 · 사료 등을 확보하고 기사와 말의 장기간 양성 및 훈련에 드는 비용은 엄청났다. 게다가 한 명의 기사에는 갑옷 시중을 들고 말을 돌봐야 하는 등 최소한 두 명의 시종이 필요했다.

그렇게 비싼 기병을 유지하는 방법을 프랑크 왕국은 봉건제도로서 해결하고 샤를마뉴는 그것을 최대로 활용했다. 봉건제도의 핵심은 왕이 영주들에게 토지를 하사하고 그 대신 영주들은 왕을 위해 군사력을 제공하는 의무를 지도록 하는 것이었다. 영주들은 토지를 소유하고 장원을 보호하기 위해 일정한 숫자의 기사를 거느렸으며, 왕의 명령에 따라 군대를 보냈다.

그리하여 샤를마뉴는 따로 돈 들이지 않고 주로 귀족 출신 기사들로 구성된 상비군을 보유한 거나 다름없었다. 수는 많지 않았으나 질이 우수한 기병대 내 각 기사는 쇠미늘 갑옷과 투구 · 방패 · · · 도끼를 모두 갖추었다. 그리고 규모는 축소되었지만 훌륭히 무장함으로써 질이 개선된 보병은 주로 궁수로 활약했다.

보병 궁수가 가벼운 접전으로 탐색전을 벌이고 기병들이 일제히 결정적인 공격을 하는 방법으로 전투를 벌였다. 프랑크족이 서유럽 정복에 성공을 거둔 것은 어떤 화려한 전술이 아니고, 우수한 조직과 기강 잡힌 군대를 이끌고 지칠 줄 모르며 지휘했던 샤를마뉴의 리더십과 추진력 덕분이었다.

그러나 샤를마뉴 개인에 의해 이루어진 제국은 그가 죽자 이내 붕괴되었다. 유능한 왕이 나타나지 않아 프랑크족의 봉건 군대가 기강이 없는 군대로 전락되어 갔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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