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벨리사리우스 장군과 다라 전투
비잔틴 제국이 낳은 명장(530년)

벨리사리우스 장군
395년 로마제국은 영구히 서로마와 동로마제국으로 분리되고, 각각은 수도를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에 두었다. 그로부터 81년 뒤인 476년 서로마제국은 무너지고 그 자리에 많은 게르만 족 왕국들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동로마제국은 1,000년이 넘게 로마제국의 명맥을 유지하다가, 1453년 오스만투르크에게 멸망했다. 흔히 우리는 동로마제국을 비잔틴 제국이라고 부른다.
사실상 로마인들은 구제국의 붕괴를 멸망이라기보다는 여러 정치단위체로의 분할로 여겼다. 제국이 분열되고 결국 망한 것은 정치 · 경제 · 군사 등 제반 분야의 부패와 도덕의 추락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으나, 부패는 하루아침에 온 것이 아니고 오랜 기간에 걸쳐 서서히 곪아 들어간 것이었다.
군사적으로도 로마군이 아드리아노플 전투 이후 전쟁 기계로서의 효능을 완전히 상실해버린 것은 아니었다. 사상누각의 군대가 아니고, 본래 엄한 훈련과 우수한 전법의 전통을 이어온 워낙 기반이 튼튼한 군대인지라 패배 이후 곧 재기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개혁가들이 출현해 기울어지는 군에 대해 그것을 바로 세우려는 노력을 대대적으로 펼치곤 했다.
비잔틴 제국 황제 가운데 가장 강력한 황제는 38년간이나 통치한 유스티니아누스(527~565)였다. 비잔티움의 영원한 꿈이었던 대로마제국의 재건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그는 매우 유능한 젊은 지휘관 벨리사리우스(Belisarius)를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정복전쟁을 개시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콘스탄티노플에 위치하여 권좌를 확실하게 하고, 벨리사리우스를 비롯한 장군들에게 군대를 맡겨 대제국 재건을 위한 팽창정책을 주도했다.
그의 팽창정책은 성공을 거두어 비잔틴 제국의 영역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크게 확대했다. 벨리사리우스의 로마군은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남부 스페인 등을 재정복했다.
27세의 약관에 총사령관이 된 벨리사리우스는 비잔틴 제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장군이었다. 그는 대단히 용감했을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전투에서 상대적으로 적은 병력을 갖고도 뛰어난 용병술과 전략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가장 대표적인 전투는 그가 본격적인 정복전쟁에 나서기 전에 동쪽으로부터 페르시아군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530년 소아시아의 다라(Dara)에서 치러냈던 싸움이다.
다라는 동부 국경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였는데, 약 4만 명의 페르시아군은 이 요새를 목표로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벨리사리우스는 25,000명을 거느리고 요새를 지키기 위해 요새 안에서 싸우기보다는 밖으로 나가 싸우기로 결심했다. 그는 미리 전장을 선정하고 그곳으로 적을 유인한 다음, 적시에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시킬 계획을 준비했다. 당시 로마군은 기병과 보병으로 구성되었고, 기병은 주로 중기병이었다. 주무기는 활과 창이었다.
벨리사리우스는 중앙에 보병을, 양익에 기병을 배치했으나, 평상시와 달리 기병을 보병보다 상당히 앞에 위치시키고 각 부대 전방에 참호를 파도록 했다. 그러나 진격을 불가능하게 할 정도로 참호를 깊게 파지는 않았다.
병력이 우세한 페르시아군은 로마군의 방어적인 태도를 보고 일단 전투를 피하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또한 벨리사리우스의 '상호 협상' 제의에 속아 득의양양하게 공격을 개시했다. 적으로 하여금 먼저 공격해오도록 하는 벨리사리우스의 전법에 말려든 것이다.
로마 중기병은 짐짓 후퇴하는 척하면서 적 기병을 그들 보병과 완전히 분리될 때까지 유인한 뒤, 보병들이 뒤따라오자 계획대로 창끝을 돌려 일제히 반격을 개시하여 크게 승리했다. 이때 로마군이 퍼부은 화살들은 무장상태가 별로 좋지 않은 페르시아군에게는 매우 치명적이었다. 쌍방이 활을 사용했으나 로마 활이 페르시아 것에 비해 훨씬 크고 위력적이었다. 과거 기원전에 벌어진 페르시아 전쟁 때와는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다라 전투 이후 벨리사리우스는 활로 무장한 정예 로마군을 이끌고 아프리카 · 시칠리아 · 이탈리아 등의 지역에서 엉성한 게르만 족에 대하여 연전연승하면서 구로마제국의 상당 부분을 되찾았다. 그러나 단단한 내치의 기반을 마련하지 못하고 국경선만 확장시킨 유스티니아누스의 팽창정책은 한계에 부딪히고, 그의 후계자 때에 이르러서는 정복지역들을 다시 상실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