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카이사르 시대 로마군과 파르살루스 전투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BC 48년)

루비콘강을 건너는 카이사르
이때 그는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르네상스 시대의 태피스트리. 베른 역사박물관 소장.
포에니 전쟁이 끝난 후 로마는 도시국가에서 광대한 제국으로 흥기했다. 그러나 곧 장기간의 내란에 휩쓸렸는데, 불세출의 영웅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가 출현한 것은 바로 내란 중이었다.
카이사르는 정치가이자 웅변가로서 명성을 날렸지만, 로마를 지배하게 된 것은 사실상 위대한 장군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지방에서 총독 겸 군사령관으로 병력 4개 로마 군단을 거느리고 9년에 걸친 정복 전쟁을 지휘하는 동안 용병술을 터득했다. 갈리아는 그를 장군으로 만든 훈련장이었다. 갈리아를 정복하고 나아가 북해까지 이르는 라인 강 서쪽 대부분의 땅을 로마제국에 흡수시킴으로써 카이사르의 명성은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카이사르 지휘하의 로마군은 훈련이 잘 된 훌륭한 군대였다. 그들은 우수한 보병이면서 동시에 교량설치 · 도로공사 · 함선건조 · 요새구축 · 요새공격에 정통했다. 그런데 국가의 성격이 변하고 영토가 확대됨에 따라 로마군은 이미 민병대에서 직업 상비군으로 변했다. 기원전 105년 통령 마리우스(Gaius Marius)는 과감히 군 개혁을 추진하고, 군인이 될 수 있는 엄격한 자격요건을 풀었다. 즉, 토지를 소유하지 않은 가난한 시민에게도 군 지원을 가능하게 하여 병력 충원의 길을 넓히고, 그 대신 국가가 전적으로 재정을 부담하는 정규군 제도를 도입했던 것이다.
로마 정규군은 신체 건장하고 실력 있는 병사들을 모집하여 발전을 이룬 듯하지만, 정신적으로는 과거만 못했다. 무엇보다도 애국심이 결여되어, 전장에서 그들은 명예보다는 급료와 보상을 생각하며 싸우고, 국가보다는 자신의 군 입대를 승인한 통령 또는 지방총독에게 충성을 맹세함으로써 쉽게 정치적 도구가 되고 사병화(私兵化)될 우려가 있었다.
마리우스 시대에 로마 군단 조직은 종래와 크게 다른 개념으로 개편되었다. 먼저 최소 전술단위가 중대에서 대대로 바뀌고, 10개 대대가 모여 로마 군단을 이루었다. 경보병이 사라지고 600명의 중보병으로만 구성된 각 대대는 연령 또는 장비 구별 없이 편성되었다. 그리고 기병은 주로 정복지역에서 모집한 연합군에 의존했다.
로마 정치는 카이사르 · 폼페이우스 · 크라수스에 의한 3두체제가 먼저 크라수스의 전사로 무너지고 남은 두 사람 간의 세력다툼과 내전으로 이어졌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는 자신을 타도하려는 폼페이우스와 원로원의 음모를 읽자, 군대를 이끌고 원로원의 승인 없이는 절대로 건널 수 없는 그의 지휘영역 경계선인 루비콘 강을 건너 순식간에 로마에 입성했다. 이때 그는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후 약 20여 년 동안 로마는 로마 군단끼리 서로 치고받는 내전상태에 돌입했다. 5년 동안 카이사르는 전 지역을 평정하지만 부하의 칼에 암살되고, 그 후 권력가들의 싸움은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가 최종적인 승리자가 되어 기원전 27년 로마 제정의 초대 황제로 즉위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간의 싸움에서 가장 결정적인 전투는 기원전 48년 파르살루스 전투였다. 당시 폼페이우스군은 스페인과 그리스에 나뉘어 있었고, 폼페이우스 자신은 그리스에 위치했다. 한편 카이사르군은 중앙인 이탈리아에서 대단히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군은 수적으로 우세할 뿐만 아니라 함대를 보유, 바다를 지배하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먼저 그리스에 위치한, 상대적으로 약한 폼페이우스 군을 공격하여 한쪽을 해결할 수는 있으나, 그러는 동안 적 주력이 배후를 공격할 가능성을 두려워했다. 그리하여 그는 그의 《논평집》에서 말한 바와 같이 “먼저 지휘자 없는 군대와 싸우고 다음에 군대 없는 지휘자와 싸우기로” 결심했다.
스페인에서 폼페이우스 군은 폼페이우스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며 카이사르와의 전투를 피했다. 한편 카이사르는 적을 포위했으나 로마인끼리 피 흘리는 것을 피해 항복을 강요했고, 결국은 전투 없이 항복을 받아냈다. 그리고 관대하게 대우하여 그들 일부를 자기편에 합류시켰다.
이후 카이사르군은 마케도니아 해안에 상륙해 폼페이우스와의 일전을 시도했다. 폼페이우스의 전략은 가능한 한 전투를 피하고 카이사르군이 보급 문제를 겪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었으나, 병참선을 노출시킨 채 그리스 본토 깊숙이 들어오는 카이사르군의 유인에 말려들어 파르살루스에서 대전투를 치르게 되었다.
카이사르군의 병력은 보병 22,000명과 기병 1,000명이고, 폼페이우스 군은 보병 40,000명과 기병 7,000명이었다. 이와 같이 폼페이우스는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세적이었다. 그의 군대의 가장 큰 약점은 전투 경험이 없는 신병들이 많고 그 자신이 너무 조심스럽고 우유부단하다는 점이었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군을 평지로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 후 양군이 전투대형을 취할 때 폼페이우스의 평범한 배치를 보고 카이사르는 우측의 기병이 적에 비해 7:1로 열세한 점을 역이용하기 위한 전략을 수립했다. 그것은 그 약점을 보강하기 위하여 6개 보병대대를 후방에 따로 배치해놓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투입한다는 것이다.
전투 개시와 함께 폼페이우스 기병은 예상대로 공격해왔으며, 카이사르 기병은 천천히 유인하면서 뒤로 후퇴했다. 그러다가 적시에 창으로 무장한 6개 대대를 돌진시켜 적 기병에 맞서게 했다. 이 용감한 돌격부대는 삽시간에 적 기병을 분산시켰으며, 나아가 적 보병 측후방으로 우회를 시도했다. 이와 때를 맞추어 카이사르는 보병 주력부대를 제3 전열까지 가세토록 하여 적 주력부대를 향해 돌진시켰다. 이 돌격에 폼페이우스군은 완전히 와해되어 버렸다. 폼페이우스는 간신히 도망쳐 나올 수 있었고, 그 후 이집트로 건너갔지만 그곳에서 동료에게 암살되었다.
파르살루스 후에도 내전은 4년이나 지속되었으나, 이 전투에서의 승리로 카이사르의 권력 장악은 거의 확실하게 되었다. 이후 카이사르는 쉽게 이집트를 정복한 데 이어 소아시아, 튀니지, 스페인 등 지역에서의 반란을 평정했다. “veni, vidi, vici(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는 바로 소아시아에서 반란군을 진압한 후 친구에게 보낸 편지의 첫 문장이다.
카이사르는 특별한 전법을 고안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결단력이 있고 신속한 상황판단 능력과 지칠 줄 모르는 추진력을 겸비했으며, 병력이 열세할 때도 시기를 잘 활용할 줄 알고 그리하여 언제나 전쟁을 주도하며 승리를 엮어냈다. 또한 아무리 어려운 역경에서도 부하들을 따르게 한 그의 특출한 리더십 면에서는 전쟁사에서 그를 능가할 자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