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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손자병법과 손무

9. 손자병법과 손무

 

동서고금 최고의 군사 고전(BC 6세기)

 

손자병법

 

춘추전국시대의 전법이 어느 정도로 높은 수준이었던가는 그 시대의 전략가들이 저술한 병서들의 내용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병서는 기본적으로 역사 서적이 아닌 이론 서적이라고 하지만, 그 시대의 전쟁과 군대 그리고 전법에 기반을 두고 이루어진 연구 결과로서 상당 부분이 그 시대의 경험과 유행했던 전법을 집대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래전부터 중국뿐만 아니라 동양에서는 군인들이 읽어야 할 병서 7권을 '무경칠서(武經七書)'라고 불러왔다. 손자, 오자, 육도(六韜), 삼략(三略), 사마법, 울요자, 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등이다. 이 병서들은 기원전 1100년대부터 서기 600년대에 걸쳐 나온 저서들로 모두 군사학의 기본 원리를 담고 있어서 오늘날도 고전으로 널리 읽혀지고 있다. 이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한 병서는 역시 손자.

손자의 저자는 춘추시대 제()나라 태생의 손무(孫武)였다. 통상 유명한 사람에 대한 존칭은 성에다 ''를 붙여서 부르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손무의 저서를 손자병법이라 불렀다.

손무의 생애에 대해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공자와 같은 시대 사람으로 추정하고 있다. ()나라 제후 합려와 그의 아들 부차 밑에서 유명한 장수로 활약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제나라 사람이었던 손무가 오나라로 국적을 옮기게 된 데는 제나라 정치가 극도로 어지럽고 정변이 자주 발생하자 오나라에 망명을 간 것이라 한다.

당시 오나라는 서쪽의 초()나라와 원수지간의 관계에 있어 두 나라 사이에는 전쟁이 그칠 날이 없었다. 초나라가 오나라를 침공하고 실패하면 이듬해는 반대로 오나라가 초나라에 쳐들어갔으며, 이러한 공방은 오랫동안 되풀이되었다. 그러던 중 기원전 514년 오나라에서는 정변으로 왕요가 암살되고 새로운 왕으로 합려가 즉위했다.

먼저 합려는 크게 약화된 군사력을 강화시킬 적임자를 찾던 중 마침 손무가 저술한 손자병법을 입수하여 탐독하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합려는 손무를 초빙하여 실력을 테스트하고 기용했다. 이때 손무가 궁녀들을 대상으로 하여 병법의 효험을 시범 보인 일화는 유명하다.

손무는 180명의 궁녀들을 두 부대로 나누어 집합시키고 그 가운데서 왕의 총애를 받는 두 사람을 지휘자로 임명하여 지휘하도록 했다. 명령에 따라 전후좌우로 방향 전환 동작을 취하는 시험이었다. 사전에 동작 요령을 충분히 알려주고 복종하지 않을 때는 도끼로 처형한다는 규칙을 충분히 설명했다. 그러나 궁녀들은 폭소를 터뜨리며 명령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손무는 다시 설명하고 명령을 내렸다. 그래도 궁녀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손무는 명령이 불명확할 때는 장수가 책임을 지지만 반복하여 명확히 설명했는데도 명령이 지켜지지 않는 것은 지휘자의 책임이다라고 말하고, 형수를 시켜 두 지휘자의 목을 쳤다. 그리고 다른 두 사람을 새 지휘자로 임명하고 명령을 내렸더니 궁녀들은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는 이야기다.

손무는 전군에 대한 지휘권을 위임받은 후 엄격한 훈련을 통해 오나라 군대를 4년 만에 막강한 군대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기원전 512년 오나라는 숙적 초나라와의 전쟁을 재개했다.

손무는 단계적 교란작전을 통해 초나라 국력을 피폐시키고 6년 후 정예병 3만 명을 직접 이끌고 기습침공, 적의 수도 70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집결된 20만 명의 적 병력을 보자, 그 대병력을 분산 격파하기 위하여 다시 200후퇴하여 적을 유인하는 계략을 사용했다.

손무 군을 무작정 추격하던 초나라 군대는 결국 함정에 빠지고 여러 지역에서 역습을 받아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러자 손무는 이번에는 승세를 몰아 적 수도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약소국 오나라는 일약 강국으로 등장하고, 초나라로부터의 위협을 제거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인접국인 제 · · 월나라 등에 대해 위협을 가하기에 이르렀다.

기원전 492년 합려는 월나라를 공략하던 중에 전사하고 그의 아들 부차가 즉위했다. 손무는 계속하여 부차를 보좌하고 월나라를 굴복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나이가 든 후 손무는 관직에서 은퇴하여 여생을 군사학 연구와 저술에 전념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전국시대의 전략가 가운데 유명한 사람으로 손빈이 있는데, 그는 손무의 손자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손빈도 병법을 저술했다는 기록이 있어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손자병법에 대해 그 저자가 손무가 아닌 손빈일지도 모른다는 설이 과거에는 있었다. 그러나 이 설은 1972년 산동성에서 손빈병법이 따로 발굴된 이후 그 근거를 잃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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