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가을 넥타이
가을비
가을 저녁
가을은 눈의 계절
가을의 기도
가을의 시
가을의 향기
가을이 아직 오지 않지만
가을이 오는 달
가을이 오는 시간
가을 저녁
가을 치마
감사
검은빛
겨우살이
겨울 까마귀
겨울 나그네
겨울 실내악
겨울의 입구에서
견고(堅固)한 고독
고독
고독의 끝
고독의 순금(純金)
고독의 풍속
고독한 이유(理由)
고백의 시(詩)
그냥 살아야지
근원적 골짜기
길
꿈
꿈을 생각하며
나무
나무와 먼 길
나의 시(詩)
납
내 마음은 마른 나뭇가지
내가 가난할 때
내일
너와 나
눈물
다형(茶兄)
당신마저도
독신자(獨身者)
동체시대(胴體時代)
떠남
마음의 집
마지막 지상(地上)에서
만추의 시
무기(武器)의 의미(意味)
무등차(無等茶)
바다의 육체
바람
별 하나로도 충분하다
병(病)
보석(寶石)
봄이 오는 한 고비
부재(不在)
부활절에
불완전
불을 지키며
빛
사는 것
사랑과 관습 – 고독 이후
사랑을 말함
사랑의 동전(銅錢) 한 푼
사랑하는 여인에게
사월
산까마귀 울음소리
삼월생(三月生)
삼월(三月)의 시(詩)
새벽
새벽 교실
새벽은 당신을 부르고 있습니다
새해 인사
샘물
생명의 합창
선을 그으며
속죄양
순수
슬퍼하지 않는 것은
슬픔
시(詩)의 맛
신년 기원
신년송(新年頌)
신설(新雪)
십이월(十二月)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
아버지
아버지의 마음
아침
아침 식사
아침과 황혼을 데리고 갈 수 있다면
양심의 금속성
어린 것들
어린 새벽은 우리를 찾아온다 합니다
어제
연(鉛)
영혼의 고요한 밤
오월(五月)의 그늘
오월(五月)의 환희
옹호자의 노래
완전 겨울
우리는 일어섰다
우수(憂愁)
육체
이 어둠이 내게 와서
이별에게
이별의 곡(曲)
이상(理想)
인간은 고독하다
인간의 의미
인내
인생 송가(頌歌)
인생을 말하라면
일년의 문을 열며
일요일의 미학
자유의 양식(糧食)
자화상
재
전환
절대고독
절대 신앙
조국의 흙 한 줌
지각(知覺)
지상(地上)의 시(詩)
지평선
참나무가 탈 때
창
책(冊)
책과의 여행
치아(齒牙)의 시(詩)
크리스마스와 우리 집
파도(波濤)
평범한 하루
플라타너스
하운소묘(夏雲素描)
행복의 얼굴
형광등
호소(呼訴)
흙 한 줌 이슬 한 방울
희망
희망에 부쳐
희망이라는 것
가을
김현승
봄은
가까운 땅에서
숨결과 같이 일더니
가을은
머나먼 하늘에서
차가운 물결과 같이 밀려온다.
꽃잎을 이겨
살을 빚던 봄과는 달리
별을 생각으로 깎고 다듬어
가을은
내 마음의 보석을 만든다.
눈동자 먼 봄이라면
입술을 다문 가을
봄은 언어 가운데서
네 노래를 고르더니
가을은 네 노래를 헤치고
내 언어의 뼈마디를
이 고요한 밤에 고른다.
가을 넥타이
김현승
볕은
이순(耳順)하고,
이삭들
바람이 익는다.
아침 저녁
살갗에 묻는
요즈막의 향깃한 차거움......
四十은 아직도 溫血動物인데
오늘은
먼 하늘빛
넥타이 매어 볼까.
가을비
김현승
팔굽이에 닿는 것
은시계(銀時計)처럼 차다.
세로팡으로
싸는 밤.
배암무의 손잡이
우산(雨傘)을 받고 혼자 섰나.
전에는 더러
이러기도 하였던
뽀야다란 마음.
가을 저녁
김현승
긴 돌담 밑에
당거미 지는 아스팔트 위에
그림자로 그리는 무거운 가을 저녁.
짙은 크레파스의 가을 저녁.
기적은 서울의 가장자리에서
멀리 기러기같이 울고.
겹친 공휴일을 반기며
먼 곳 고향들을 찾아가는
오랜 풍속의 가을 저녁.
사는 것은 곧 즐거움인 가을 저녁.
눈들은 보름달을 보듯 맑아가고
말들은 꽃잎보다 무거운 열매를 다는,
호올로 포키트에 손을 텋고 걸어가도
외로움조차 속내의처럼 따뜻해 오는
가을 저녁.
술에 절반
無等茶에 절반
취하여 달을 안고,
돌아가는 가을 저녁 ----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그러나 가을은 여름보다 무겁다!
시간의 잎새들이 떨어지는
내 어깨의 제목(題目) 위에선......
가을은 눈의 계절(季節)
김현승
이맘때가 되면
당신의 눈은 나의 마음,
아니, 생각하는 나의 마음보다
더 깊은 당신의 눈입니다.
이맘때가 되면
낙엽(落葉)들은 떨어져 뿌리에 돌아가고,
당신의 눈은 세상에도 순수한 언어(言語)로 변합니다.
이맘때가 되면
내가 당신에게 드리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은,
가을 하늘만큼이나 멀리멀리 당신을 떠나는 것입니다.
떠나서 생각하고,
그 눈을 나의 영혼 안에 간직하여 두는 것입니다.
낙엽(落葉)들이 지는 날 가장 슬픈 것은
우리들 심령에는 가장 아름다운 것...... .
가을의 기도
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落葉)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謙虛)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肥沃)한
시간(時間)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가을의 시
김현승
넓이와 높이보다
내게 깊이를 주소서,
나의 눈물에 해당하는......
산비탈과
먼 집들에 불을 피우시고
가까운 곳에서 나를 배회하게 하소서.
나의 공허를 위하여
오늘은 저 황금빛 열매들 마저 그 자리를
떠나게 하소서.
당신께서 내게 약속하신 시간이 이르렀읍니다.
지금은 기적들을 해가 지는 먼 곳으로 따라 보내소서.
지금은 비둘기 대신 저 공중으로 산까마귀들을
바람에 날리소서.
많은 진리들 가운데 위대한 공허를 선택하여
나로 하여금 그 뜻을 알게 하소서
이제 많은 사람들이 새 술을 빚어
깊은 지하실에 묻을 시간이 오면,
나는 저녁 종소리와 같이 호올로 물러가
나는 내가 사랑하는 마른 풀의 향기를 마실 것입니다.
가을의 향기(香氣)
김현승
남(南)쪽에선
과수원(果樹園)의 임금(林檎)이 익는 냄새,
서(西)쪽에선 노을이 타는 내음......
산 위엔 마른풀의 향기,
들가엔 장미들이 시드는 향기......
당신에겐 떠나는 향기,
내게는 눈물과 같은 술의 향기
모든 육체(肉體)는 가고 말아도,
풍성한 향기의 이름으로 남는
상(傷하)고 아름다운 것들이여,
높고 깊은 하늘과 같은 것들이여......
가을이 아직 오지 않지만
김현승
한 해의 육체를
우리는 8월까지 다 써 버리고,
이제는 영혼의 절반만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가을이 아직은
오지 않지만,
두고 온 쪽빛 먼 바다엔
구름들이 바캉스를 떠나며
흰 손수건을 바람에 흔든다.
가을이 아직은
오지 않지만,
검은 살갗 검은 눈으로 바라보면
파란 하늘 저쪽
다정한 벗들의 흰 얼굴이 떠오른다.
가을이 아직은
오지 않지만,
한결 고요해진 달빛 위에
초저녁 쓰르라미 첫울음을 얹으면
1년의 저울추는
햇빛에서
그늘로
잔에서
잔의 탄식으로
조금씩 기울어져 간다.
가을이 오는 달
김현승
구월에 처음 만난 네게서는
나푸타링 냄새가 풍긴다.
비록 묵은 네 양복이긴 하지만
철을 아는 너의 넥타인 이 달의 하늘처럼
고웁다.
그리하여 구월은 가을의 첫 입술을
서늘한 이마에 받는 달.
그리하여 생각하는 魂이 처음으로
네 육체 안에 들었을 때와 같이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너의 눈은 지금 맑게 빛난다.
이 달엔
먼 수평선이
높은 하늘로 서서히 바꾸이고,
뜨거운 햇빛과
꽃들의 피와 살은
단단한 열매 속에 고요히 스며들 것이다.
구월에 사 드는 책은 다 읽지 않는다.
앞으로 밤이 더욱 길어질 터이기에
앞으론 아득한 별들에서
가장 가까운 등불로
우리의 눈은 차츰 옮아올 것이다.
들려오는 먼 곳의 종소리들도
이제는 더 질문하지 않는다.
이제는 고개 숙여 대답할 때다.
네 무거운 영혼을 생명의 알맹이로 때려
얼얼한 슬픔을 더 깊이 울리게 할 것이다.
그리고 구월이 지나 우리의 마음들
갈가마귀처럼 공중에 떠도는 시월이 오면,
이윽고 여름의 거친 고슴도치는
산과 들에 누워
제 털을 호올로 뽑고 있을 것이다.
가을이 오는 시간
김현승
우리들의 마음들은 벌써 황마차(幌馬車)가 되어버린다.
우리의 마음들은 벌써 구름처럼
지평선가에 몰려 선다
에머랄드빛 하늘이 멀어지는 가을이 오면
해변에선
별장들의 덧문을 닫고,
사람마다 사람마다
찬란턴 마음의 샹들리에를 졸이고,
저녁에 우는 쓰르라미가 되는
지금은 폐회와 귀로의 시간
우리의 마음들은 벌써 낙엽이 진다.
우리의 마음들은 남긴 것 없음을
이제는 서러워한다.
지금은 먼 길을 예비할 때---
집 없는 사람들 돌아와 집을 세우는
지금은 릴케의 시와 자신에
입 맞추는 시간
가을 치마
김현승
서둘러 봄을 나서던
한국의 여인들도
가을에 닿으면 애틋한 마음을 깨닫나 부다.
그래서 회장저고리는
봄날의 꽃소식처럼 짧게 입고
그래서 열두 폭 치마는 굽이굽이
긴긴 가을밤처럼 늘이어 두르나 부다.
한국의 맑은 눈들이여
그 마음을 지키는 눈들이여!
이 가을엔 미니로 더럽힌
차가운 무릎을 덮고
저 파란 하늘빛으로 긴긴 가을 치마를 늘이어지이다.
그 끝자락엔 그리고 귀뚜라미 맑은 울음으로
가을의 보석이라도 달아지이다.
감사
김현승
감사는
곧
믿음이다.
감사할 줄 모르면
이 뜻도 모른다.
감사는
반드시 얻은 후에 하지 않는다.
감사는
잃었을 때에도 한다.
감사하는 마음은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감사는
곧
사랑이다.
감사할 줄 모르면
이 뜻도 알지 못한다.
사랑은 받는 것만이 아닌
사랑은 오히려 드리고 바친다.
몸에 지니인
가장 소중한 것으로--
과부는
과부의 엽전 한 푼으로,
부자는
부자의 많은 寶石으로
그리고 나는 나의
서툴고 무딘 납변(納辯)의 시(詩)로.
검은빛
김현승
노래하지 않고,
노래할 것을
더 생각하는 빛.
눈을 뜨지 않고
눈을 고요히 감고 있는
빛.
꽃들의 이름을 일일이 묻지 않고
꽃마다 품 안에 받아들이는
빛.
사랑하기보다
사랑을 간직하며,
허물을 묻지 않고
허물을 가리워 주는
빛.
모든 빛과 빛들이
반짝이다 지치면,
숨기어 편히 쉬게 하는 빛.
그러나 붉음보다도 더 붉고
아픔보다도 더 아픈,
빛을 넘어
빛에 닿은
단 하나의 빛.
겨우살이
김현승
마른 열매와 같이 단단한 나날,
주름이 고요한 겨울의 가지들,
내 머리 위에 포근한 눈이라도 내릴
회색의 갈앉는 빛깔,
남을 것이 남아 있다.
몇 번이고 뒤적거린
낡은 사전의 단어와 같은……
츄잉 껌처럼 질근질근 씹는
스스로의 그 맛,
그리고 인색한 사람의 저울눈과 같은 정확,
남을 것이 남아 있다.
낡은 의자에 등을 대는
아늑함.
문틈으로 새어드는 치운 바람,
질긴 근육의 창호지,
책을 덮고 문지르는 마른 손등,
남을 것이 남아 있다.
뜰 안에 남은
마지막 잎새처럼 달려 있는
나의 신앙,
그러나 구약을 읽으면
그나마 바람에 위태로이
흔들린다
흔들린다.
겨울 까마귀
김현승
영혼의 새
매우 뛰어난 너와
깊이 겪어 본 너는
또 다른,
참으로 아름다운 것과
호올로 남은 것은
가까와질 수도 있는,
언어(言語)는 본래
침묵으로부터 고상(高貴)하게 탄생한,
열매는
꽃이었던,
너와 네 조상(祖上)들의 빛깔을 두르고.
내가 십이월(十二月)의 빈 들에 가늘게 서면,
나의 마른 나뭇가지에 앉아
굳은 책임(責任)에 뿌리 박힌
나의 나뭇가지에 호올로 앉아,
저무는 하늘이라도 하늘이라도
멀뚱거리다가,
벽에 부딪쳐
아, 네 영혼의 흙벽이라도 덤북 물고 있는 소리로,
까아윽--
깍
겨울 나그네
김현승
내 이름에 딸린 것들
고향에다 아쉽게 버려두고
바람에 밀리던 플라타나스
무거운 잎사귀 되어 겨울길을 떠나리라.
구두에 진흙덩이 묻고
담쟁이 마른 줄기 저녁 바람에 스칠 때
불을 켜는 마을들은
빵을 굽는 난로같이 안으로 안으로 다스우리라.
그곳을 떠나 이름 모를 언덕에 오르면
나무들과 함께 머리 들고 나란히 서서
더 멀리 가는 길을 우리는 바라보리라.
재잘거리지 않고
누구와 친하지도 않고
언어는 그다지 쓸데없어 겨울옷 속에서
비만하여 가리라.
눈 속에 깊이 묻힌 지난 해의 낙엽들같이
낯설고 친절한 처음보는 땅들에서
미신에 가까운 생각들에 잠기면
겨우내 다스운 호올로에 파묻히리라.
얼음장 깨지는 어느 항구에서
해동의 기적소리 기적(奇蹟)처럼 울려와
땅속의 짐승들 울먹이고
먼 곳에 깊이 든 잠 누군가 흔들어 깨울 때까지.
겨울 실내악(室內樂)
김현승
잘 익은
스토브가에서
몇 권의 낡은 책과 온종일
이야기를 나눈다.
겨울이 다정해지는
두꺼운 벽의
고마움이여.
과거의 집을 가진
나의 고요한 기쁨이여.
깨끗한 불길이여,
죄를 다시는 저지를 수 없는
나의 마른 손이여.
마음에 깊이 간직한
아름다운 보석들을 온종일 태우며,
내 영혼이 호올로 남아 사는
슬픔을 더 부르지 않을
나의 집이여.
겨울의 입구(入口)에서
김현승
땅에서 나는
꽃들이 아무리 어어뻐도,
하늘에서 나리는 첫눈만큼
땅을 사랑하진 못한다.
그의 마른 손등에 입맞추고,
그의 여윈 어깨를 가득히 안아 주고,
그리고 나선 사라져
마지막엔 그의 뼈속까지 깊이깊이
스며 들진 못한다.
오월(五月)의 풀밭이
아무리 알뜰하여도,
십이월(十二月)의 흙만큼 다습고 깨끗하진 못하다.
오랜 친구를 위하여
포도주의 단맛을 지하실(地下室)에
깊이깊이 숨겨 두고,
어린 씨앗들의 머리를
어둠 속에 쓰다듬어 주고,
그리고 나서
한 푼어치 개구리의 할딱이는
숨통마저도,
뛰는 너의 맥(脈)처럼 조심성스럽게
품어 주진 못한다.
견고(堅固)한 고독
김현승
껍질을 더 벗길 수도 없이
단단하게 마른
흰 얼굴
그늘에 빚지지 않고
어느 햇볕에도 기대지 않는
단 하나의 손발
모든 신(神)들의 거대(巨大)한 정의(正義) 앞엔
이 가느다란 창끝으로 거슬리고
생각하던 사람들 굶주려 돌아오면
이 마른 떡을 하룻밤
네 살과 같이 떼어 주며
결정(結晶)된 빛의 눈물,
그 이슬과 사랑에도 녹슬지 않는
견고(堅固)한 칼날 - 발 딛지 않는
피와 살
뜨거운 햇빛 오랜 시간의 회유(懷柔)에도
더 휘지 않는
마를 대로 마른 목관 악기(木管樂器)의 가을
그 높은 언덕에 떨어지는,
굳은 열매
쌉쓸한 자양(滋養)
에 스며드는
에 스며드는
네 생명의 마지막 남은 맛!
고독
김현승
너를 잃은 것도
나를 얻은 것도 아니다.
네 눈물로 나를 씻겨주지 않았고
네 웃음이 내 품에서 장미처럼 피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다.
눈물은 쉽게 마르고
장미는 지는 날이 있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다.
너를 잃은 것을
너는 모른다,
그것은 나와 내 안의 잃음이다
그것은 다만......
고독의 끝
김현승
거기서
나는
옷을 벗는다.
모든 황혼이 다시는
나를 물들이지 않는
곳에서.
나는 끝나면서
나의 처음까지도 알게 된다.
신(神)은 무한히 넘치어
내 작은 눈에는 들일 수 없고,
나는 너무 잘아서
신(神)의 눈엔 끝내 보이지 않았다.
무덤에 잠깐 들렀다가,
내게 숨 막혀
바람도 따르지 않는
곳으로 떠나면서 떠나면서,
내가 할 일은
거기서 영혼의 옷마저 벗어 버린다.
고독의 순금(純金)
김현승
하물며 몸에 묻은 사랑이나
짭쫄한 볼의 눈물이야.
신도없는 한 세상
믿음도 떠나
내 고독을 순금처럼 지니고 살아 왔기에
흙속에 별처럼 묻힌 뒤에도 그 뒤에도
내 고독은 또한 순금 처럼 썩지 않으련가.
그러나 모르리라.
흙 속에 별처럼 묻혀 있기 너무도 아득하여
영원의 머리는 꼬리를 붙잡고
영원의 꼬리는 또 그 머리를 붙잡으며
돌면서 돌면서 다시금 태어난다면,
고독의 풍속
김현승
매아미의 노래가 남긴 껍질을, 네 손으로 열매처럼 주워
본 일이 있는가.
잠 안 오는 밤, 네 벽에서
단 한 번 치는 시계 소리를
맹랑하게 들어 본 일이 있는가.
나는 내 장지를
엄지로 튕기쳐,
손바닥 도툼한 곳에서 딱 소리를 내어,
내 고독에 돌을 던져 본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왜 울지를 않았는가?
나는 너를 사랑하였다기보다
나의 빈 무덤을 따뜻하게 채웠으며,
단 한마디를
열두 권에 나누어
고요한 불빛 아래 아름답게 꾸며낸
책들을 너는 읽어 보았는가.
새옷을 떨쳐 입고
거리를 한 바퀴 휘저어 돌아온 나의 하루-
그 끝에서 소낙비와 같이 뚝 그쳐 버린 내 춤의 둥근 속도.
박수의 날개들은 메추라기떼와 같이
빈 공중으로 흩어질 때,
나는 이처럼 고독에 악하다.
생애는 남은 것도 없고 또 남기지도 않았다.
고독한 이유(理由)
김현승
고독은 정직(正直)하다.
고독은 신(神)을 만들지 않고,
고독은 무한(無限)의 누룩으로
부풀지 않는다.
고독은 자유(自由)다.
고독은 군중(群衆) 속에 갇히지 않고,
고독은 군중(群衆)의 술을 마시지도 않는다.
고독은 마침내 목적(目的)이다.
고독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고독은 목적(目的) 밖의 목적(目的)이다.
목적(目的) 위의 목적(目的)이다.
고백(告白)의 시(詩)
김현승
나도 처음에는
내 가슴이 나의 시(詩)였다.
그러나 지금은 이 가슴을 앓고 있다.
나의 시(詩)는
나에게서 차츰 벗어나
나의 낡은 집을 헐고 있다.
사랑하는 것과
사랑을 아는 것과는 나에게서는 다르다.
금(金)빛에 입 맞추는 것과
금(金)빛을 캐어내는 것과는 나에게서 다르다.
나도 처음에는 나의 눈물로
내 노래의 잔을 가득이 채웠지만,
이제는 이 잔을 비우고 있다.
맑고 투명한 유리빛으로 비우고 있다.
나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얻으려면 더욱 얻지 못하는가,
아름다운 장미도 아닌
아름다운 장미와 시간의 관계도 아닌
그 장미와 사랑의 기쁨은 더욱 아닌 곳에,
아아 나의 詩는 마른다!
나의 시(詩)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나의 시(詩)는 둘이며 둘이 아닌
오직 하나를 위하여,
너와 나의 하나를 위하여 너에게서 쫓겨나며
나와 함께 마른다!
무덤에서도 캄캄한 너를 기다리며...... .
그냥 살아야지
김현승
생각하면 할수록 흔들리일 뿐,
그냥 살아야지 ……
노래하면 노래할수록 멀어질 뿐,
그것도 그냥 살아야지 ……
사상(思想)은 언제나 배고프다,
또 싸움을 준비하고 있다.
그냥 살아야지 ……
겨울에는 눈을 맞고
가을밤엔 달을 보고
그런대로 이웃들과 어울리어 살아왔다.
그냥 살고 말아야지 ……
그냥 살아야지,
쪼개 보면 쪼갤수록 사라져 버리는 것,
별들이 보석처럼 보이는 이 거리 ㅡ 이 땅에서
그냥 살아야지 ……
새것 속엔 새것이 없다,
새것은 낡은 것의 꼬리를 물고
낡은 것은 또 새것의 꼬리를 문다.
그냥 그냥 살아야지 ……
근원적 골짜기
김현승
사과나무가 사과를 떨어뜨렸다 이곳에선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잠자리에서 벽지 들뜨는 소리를 듣고 우리는 숨을 죽이고
사과나무를 이해하기 위하여 바람이 불어오는 골짜기를 쳐다봐야 한다
어쩌면 구름을 바라보는 당신의 습관도 조금은 바뀌어야 할지 모른다
중력이 없다면
바보들의 행동을 더욱 쉽게 이해하게 될 거야
최소한 야구경기 같은 것은 볼 수 없게 되겠지
사과나무는 자신이 떨어뜨린 사과에 대해서 생각중이다
자신의 아파트 난간으로 아이들을 떨어뜨렸던 여자가 있었다
골짜기에서 웅웅거리는 소리들이 바람에 날려왔다
길
김현승
나의 길은
발을 여이고
배로 기어간다
오월(五月)의 가시밭을.
너의 길은
빵을 잃고,
마른 혀로 입맞춘다
칠월(七月)의 황톳길을.
그대의 길은
사랑을 잃고,
꿈으로만 떠오른다
십월(十月)의 푸른 하늘을.
우리의 길은
머리를 잃고,
가는 꼬리를 휘저으며 간다
산하(山河)에 머흘한 구름 속으로.
꿈
김현승
내가 사월(四月)에 피는 수선(水仙)을 사랑함은
내가 그대의 아름다운 눈동자
기억하여 잊지 못함도,
내 꿈의 영자(影子)를 어렴풋이나마
저 자연(自然)과 그대의 얼굴에서 바라볼 수 있기에......
내 꿈이 사라질 때,
나의 사랑도 나의 언어(言語)도
나의 온갖은 비인 것뿐
이렇듯 빛나고 아름다운 그곳에 서서
언제나 내 갈 길을 손짓하여 주는
내 꿈은 나의 영원한 깃발
나의 영원한 품!
꿈을 생각하며
김현승
목적은 한꺼번에 오려면 오지만
꿈은 조금씩 오기도 하고
안 오기도 한다.
목적은 산마루 위 바위와 같지만
꿈은 산마루 위의 구름과 같아
어디론가 날아가 빈 하늘이 되기도 한다.
목적이 연을 날리면
가지에도 걸리기 쉽지만
꿈은 가지에 앉았다가도 더 높은 하늘로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다.
그러기에 목적엔 아름다운 담장을 두르지만
꿈의 세계엔 감옥이 없다.
이것은 뚜렷하고 저것은 아득하지만
목적의 산마루 어디엔가 다 오르면
이것은 가로막고 저것은 너를 부른다.
우리의 가는 길은 아 - 끝없어
둥글고 둥글기만 하다.
나무
김현승
하느님이 지으신 자연 가운데
우리 사람에게 가장 가까운 것은
나무이다.
그 모양이 우리를 꼭 닮았다.
참나무는 튼튼한 어른들과 같고
앵두나무의 키와 그 빨간 뺨은
소년들과 같다.
우리가 저물녘에 들에 나아가 종소리를
들으며 긴 그림자를 늘이면
나무들도 우리 옆에 서서 그 긴 그림자를
늘인다.
우리가 때때로 멀고 팍팍한 길을
걸어가면
나무들도 그 먼 길을 말없이 따라오지만,
우리와 같이 위으로 위으로
머리를 두르는 것은
나무들도 언제부터인가 푸른 하늘을
사랑하기 때문일까?
가을이 되어 내가 팔을 벌려
나의 지난날을 기도로 뉘우치면,
나무들도 저들의 빈손과 팔을 벌려
치운 바람만 찬 서리를 받는다, 받는다.
나무와 먼 길
김현승
사랑이 얼마나 중한 줄은 알지만
나무, 나는 아직 아름다운 그이를 모른다.
하늘 살결에 닿아 너와 같이 머리 고운 여인(女人)을 모른다.
내가 시(詩)를 쓰는 오월(五月)이 오면
나무, 나는 너의 곁에서 잠잠하마,
이루 펴지 못한 나의 전개(展開)의 이마아쥬를
너는 공중에 팔 벌려 그 모양을 떨쳐 보이는구나!
나의 입술은 메말라
이루지 못한 내 노래의 그늘들을
나무, 너는 땅 위에 그렇게도 가벼이 느리는구나!
목마른 것들을 머금어 주는 은혜로운 오후(午後)가 오면
너는 네가 사랑하는 어느 물가에 어른거린다.
그러면 나는 물속에 잠겨 어렴풋한 네 모습을
잠시나마 고요히 너의 영혼이라고 불러 본다.
나무, 어찌하여 신(神)께선 너에게 영혼을 주시지 않았는지
나는 미루어 알 수도 없지만,
언제나 빈 곳을 향해 두르는 희망(希望)의 척도(尺度)-- 너의 머리는
내 영혼이 못 박힌 발부리보다 아름답구나!
머지않아 가을이 오면
사람마다 돌아와 집을 세우는 가을이 오면,
나무, 너는 너의 수획(收獲)으로 전진(前進)된 어느 황토(黃土)길 위에 서서, 때를 맞춰 불빛보다 다스운 옷을 너의 몸에 갈아입을 테지,
그리고 겨울이 오면
너는 머리 숙여 기도를 올릴 테지,
부리 고운 가난한 새 새끼들의 둥지를 품에 안고
아침저녁 안개 속에 너는 과부(寡婦)의 머리를 숙일 테지,
그리고 때로는
굽이도는 어느 먼 길 위에서,
겨울의 긴 여행(旅行)에 호올로 나선 외로운 시인(詩人)들도 만날 테지.....
나의 시(詩)
김현승
비록 짧기로서니
그럴 바엔,
외국(外國) 손님 시곗주머니 속에
호락호락 들어가는
아홉 카라트짜리 금강석이라도 되든지.
그럴 바엔
꼭지를 뗀 수류탄(手榴彈)이 되어
베트콩의 땅굴이라도 부수든지.
그렇지도 못할 바엔,
종일 지중해(地中海)의 물결 위에 떠 있는
오나시스의 요트라도 된 것처럼
가장 기쁘게 출렁거려야 할 텐데.
그래야 사람의 땟국 냄새라도 풍길 텐데,
나의 시(詩)는 풀냄새도 나지 않는 바람이 되어
뽀얀 모래가 되어
더 나아갈 수도 없는 땅끝에서
까마득히 불고 있다
까마득히 불고 있다
납
김현승
나는 내가 항상 무겁다,
나같이 무거운 무게도 내게는 없을 것이다.
나는 내가 무거워
나를 등에 지고 다닌다.
나는 나의 짐이다.
맑고 고요한 내 눈물을
밤이슬처럼 맺혀보아도,
눈물은 나를 떼어낸 조그만 납덩이가 되고 만다.
가장 맑고 아름다운
나의 시를 써보지만,
울리지 않는다. -- 금과 은과 같이는
나를 만지는 네 손도 무거울 것이다.
나를 때리는 네 주먹도
시원치는 않을 것이다.
나의 음성
나의 눈빛
내 기침소리마저도
나를 무겁게 한다.
내 속에는 아마도
납덩이가 들어 있나부다,
나는 납을 삼켰나부다,
나는 내 영혼인 줄 알고 그만 납을
삼켜버렸나부다.
내 마음은 마른 나뭇가지
김현승
내 마음은 마른 나무가지
주여
나의 머리 위으로 산까마귀 울음을 호올로
날려 주소서.
내 마음은 마른 나무가지
주여
저 부리 고운 새새끼들과
창공에 성실하던 그의 어미 그의 잎사귀들도
나의 발부리에 떨여져 바람부는 날은
가랑잎이 되게 하소서.
내마음은 마른 나무가지
주여
나의 육체는 이미 저물었나이다!
사라지는 먼뎃 종소리를 듣게 하소서
마지막 남은 빛을 공중에 흩으시고
어둠 속에 나의 귀를 눈뜨게 하소서.
내 마음은 마른 나무가지
주여
빛은 죽고 밤이 되었나이다!
당신께서 내게 남기신 이 모진 두 팔의 형상을 벌려
바람 속에 그러나 바람 속에 나의 간곡한 포옹을
두루 찾게 하소서.
내가 가난할 때
김현승
내가 가난할 때......
저 별들의 더욱 맑음을 보올 때.
내가 가난할 때......
당신의 얼굴을 다시금 대할 때.
내가 가난할 때......
내가 肉身일 때.
은밀한 곳에 풍성한 생명을 기르시려고,
작은 꽃씨 하나를 두루 찾아
나의 마음 저 보라빛 노을 속에 고이 묻으시는
당신은 오늘 내 집에 오시어,
금은(金銀) 기명과 내 평생의 값진 도구(道具)들을
짐짓 문(門)밖에 내어 놓으시다!
내일
김현승
나는 이렇게 내일을 맞으련다.
모든 것을 실패에게 주고,
비방은 원수에게,
사랑은 돌아오지 못하는 날들에게......
나의 잔에는
천년의 어제보다 명일(明日)의 하루를
넘치게 하라.
내일은 언제나 내게는 축제의 날,
꽃이 없으면 웃음을 들고 가더래도.......
내일,
오랜 역사보다도
내일만이 진정 우리가 피고 가는
풍성한 흙이 아니냐?
너와 나
김현승
너의 눈은 사월(四月)이 데리고 온 꾀꼬리의 노래와 같이 명랑(明朗)하고나.
너의 모양은 가을의 코스모스같이 청초(淸楚)하고나.
너의 웃음은 황혼(黃昏)의 언덕을 넘는 양(羊) 떼와 같이 고요하고나.
너의 뜻은 바위를 때리는 파도(波濤)의 한 조각같이 위대(偉大)하고나.
너의 추억(追憶)은 처녀(處女)들의 상상(想像)같이 아름답고나.
너의 하루는 소 떼를 몰고 돌아오는 저물녘의 농부(農夫)와 같고나.
너의 노래는 오월(五月)의 호수(湖水)와 같이 맑고 푸르고나.
너의 웃음은 한 입 덥썩 깨문 능금같이 선명(鮮明)하고나.
너는 늠름한 대지(大地)를 찾는 지평선(地平線)의 처녀광(處女光)같이 기껍구나.
너의 희망(希望)은 하늘 위에 빛나는 별과 같고나.
너의 이야기는 밤비 오는 봄날과 같고나.
너의 잔에는 붉은 술이 넘쳐 흐르는고나.
너는 휴전(休戰)의 나팔 소리를 듣는 병사(兵士)와 같고나.
나의 눈은 까마귀의 소리와 같이 거칠고나.
나의 모양은 압록강(鴨綠江)의 흘러가는 뗏목과 같고나.
나의 마음은 회오리바람 부는 장터와 같이 어수선하고나.
나의 뜻은 파도(波濤)를 맞는 바위의 울음과 같고나.
나의 추억(追憶)은 북빙양(北氷洋)의 얼음장 찢어지는 소리와 같이 서글프고나.
나의 하루는 아들을 때리고 난 아버지의 마음 같고나.
나의 노래는 칠월(七月)의 홍수(洪水)와 같고나.
나의 웃음은 한 입 덥썩 깨문 풋감과 같이 괴롭고나.
나는 지평선(地平線)에 떨어지는 붉은 태양(太陽)의 솟는 ×와 같고나.
나의 희망(希望)은 땅 위에 곤두박질하는 유성(遊星)과 같고나.
나의 잔에는 ×××가 넘쳐 흐르는고나.
나는 개전(開戰)의 호외(號外)를 받은 시민(市民)과 같고나.
눈물
김현승
더러는
옥토(沃土)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生命)이고저…….
흠도 티도,
금 가지 않은
나의 전체(全體)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니인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다형(茶兄)
김현승
빈 들의
맑은 머리와
단식의
깨끗한 속으로
가을이 외롭지 않게
차를 마신다.
마른 잎과 같은
형에게서
우러나는
아무도 모를
높은 향기를
두고 두고
나만이 호올로 마신다.
당신마저도
김현승
애오라지 나의 살결을 사랑할 뿐
당신은 나의 뼈를 사랑하지 않는다.
당신은 잿속에서 나의 뼈를 추리지만
당신은 그 속에서 내 속삭임을 추릴 수는 없다.
당신마저도 나의 곁을 스쳐 가고 만다,
나를 사랑하지 못한다,
당신의 팔은 짧아서 나의 목을 겨우 두르고 만다.
당신은 나의 입술을 지나
나에게 뜨겁게 입맞출 줄을 모른다.
당신은 내 무덤 위에 꽃을 얹지만
당신의 나는 언제 고요히 눈을 감았던가?
당신은 끝내 나의 겉을 어루만지고 만다,
나를 사랑하지 못한다.
당신의 팔은 나의 가는 허리를 두르고 있다.
살과 뼈를 붙일 수 없는
살과 뼈에 가로막힌 나는
당신의 사랑이 그리워 오늘도 당신의
집 앞을 지나고 있다.
허전한 바람과 같이 나는
당신의 집 앞을 맴돌고 있다.
독신자(獨身者)
김현승
나는 죽어서도
무덤 밖에 있을 것이다.
누구의 품안에도 고이지 않는
나는 지금도 알뜰한 제 몸 하나 없다.
나의 그림자마저
내게서 가르자
그리하여 뉘우쳐 머리 숙인 한 그루 나무같이
나의 문 밖에 세워 두자.
제단은 쌓지 말자
무형한 것들은 나에게는 자유롭고 더욱 선연(鮮硏)한 것......
크리스마스와
새해가 오면
나의 친구는 먼 하늘의 물 머금은 별들......
이단을 향하여 기류 밖에 흐르는 보석을 번지우고
첫눈이 내리면
순결한 살엔 듯
나의 볼을 부비자!
동체시대(胴體時代)
김현승
우리는 짧아졌다.
우리는 통나무가 되었다.
우리는 배와 배꼽 아래께서
한여름의 생선처럼
토막나버렸다.
배는 먹고 또 씨앗을 보존하면서
우리는 마른 통나무로
쌓여 가고 있다.
넝쿨 장미가 그 가슴에서 순 돋아
아름다운 어깨 위로 저 구름에까지
자라가기는 틀렸다.
깊이 생각할 뿌리는 말라,
우리와 우리의 어린것들에게도
남아 도는 유희가 없다.
우리는 지금
도끼 옆에 놓여 있다!
통나무가 부르는
가장 친근한 이미지는
도끼다.
손바닥에 침 뱉는
든든한 도끼다.
떠남
김현승
떠남 너의 뒷 모양은 언제나 쓸쓸하더라.
너는 젊음을 미워하고 사랑을 시기한다.
너는 어머니와 아들같이 친한 사이를 간섭하기를 유달리
좋아하더라.
사람들은 너를 위하여 산을 헐어 길을 닦고
물 위에 배를 띄운다.
너는 왜 아득한 모래 위에 혼자 앉아
로렐라이의 노래만을 부르고 있느냐.
나는 너를 잘 안다.
너는 나의 검은 머리털의 힘을 빼앗고
네가 사랑하는 寶石은 眞珠나 落葉보다 눈물이다.
네게 만일 세월의 친절이 없었던들
이를 무엇에다 쓰겠느냐?
떠남 너는 한 번도 약속을 어기지는 않더라.
네 앞에 自然은 빛을 잃고 汽笛은 사라지며
원수도 뉘우친다!
너는 왜 훌적훌적 울면서도 가고야 마느냐?
돌아서 너의 마음을 뉘우침이 좋지 않느냐?
아아, 떠남 너의 발자취를 덮을 땅 위의 바람과 눈이 영원히 없음을
너는 모르느냐?
마음의 집
김현승
네 마음은
네 안에 있다 하지만,
나는 내 마음 안에
있다.
마치 달팽이가 제 작은 집을
사랑하듯…
나의 피를 뿌리고
살을 찟던
네 이빨과 네 칼날도
내 마음의 아늑한 품 속에선
어린아이와 같이 잠들고 만다.
마치 진흙 속에 묻히는
납덩이도 같이.
내 작은 손바닥처럼
내 조그만 마음은
이 세상 모든 영광(榮光)을 가리울 수도 있고,
누룩을 넣은 빵과 같이
아, 때로는 향기롭게 스스로 부풀기도 한다!
동양(東洋)의 지혜(智慧)로 말하면
가장 큰 것은 없는 것이다.
내 마음은 그 가없음을
내 그릇에 알맞게 줄여 넣은 듯,
바래움의 입김을 불면 한없이 커진다.
그러나 나의 지혜는 또한
풍선(風船)처럼 터지지 않을 때까지만 그것을…
네 마음은
네 안에 있으나
나는 내 마음 안에 살고 있다.
꽃의 아름다움은 제 가시와 살보다
제 뿌리 안에 더 풍성하게 피어나듯…
마지막 지상(地上)에서
김현승
산까마귀
긴 울음을 남기고
해진 지평선을 넘어간다
사방은 고요하다!
오늘 하루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의 넋이여,
그 나라의 무덤은
평안한가.
만추의 시
김현승
먼저 웃고
먼저 울던
시인이여
끝까지 웃고
끝내 울고 갈
시인이여
한 세대에 하나밖에 없는
언어를 잃은 시인이여
역사의 애인인 그대여
그대 영혼에게
까마귀와 더불어 울게 하라!
마지막 빈 가지에 호올로 남아
울게 하라
울게 하라
길고 - 또 깊이 -
무기의 의미(武器의 意味)
김현승
1
빼지 않은 칼은
빼어 든 칼보다
더 날카로운 법
빼어 든 칼은
원수를 두려워하지만
빼지 않은 칼은
원수보다 강한
저를 더 두려워한다.
빼어 든 칼은
이 어두운 밤이슬에
이윽고 녹슬고 말지만
빼어 들지 않은 칼은
저를 지킨다.
이 어둠의 눈물이
소금이 되어 우리의 뺨에서 마를 때까지……
2
가장 날카로운 칼과
가장 날카로운 告白은
다르지 않다.
가장 날카로운 칼은
그 칼날에
그리하여 저의 낯을 비춰 본다.
그리하여
가장 날카로은 칼은
꽃잎 앞에도 무릎을 꿇고,
그 꽃잎은
그 칼을 쥔 손목에
입을 맞춘다.
그리하여
칼집 속에
칼을 잠들게 하고서
우리는 勝利를 얻는다.
밤 이슬에 녹슬지 않는 그 빛나는
이름으로
우리는 누구의 勝利도 아닌...... .
무등차(無等茶)
김현승
가을은
술보다
차 끓이기 좋은 시절......
갈가마귀 울음에
산들 여위어가고
씀바귀 마른 잎에
바람이 지나는,
남쪽 십일월의 긴긴 밤을,
차 끓이며
끓이며
외로움도 향기인 양 마음에 젖는다.
바다의 육체(肉體)
김현승
푸른 잉크로 시(詩)를 쓰듯
백사장(白砂場)의 깃은 물결에 젖었다.
여기서는 바람은 나푸킨처럼 목에 걸었다.
여기서는 발이 손보다 희고
게는 옆으로 걸었다.
멀리 이는 파도(波濤)-- 바다의 쟈스민은 피었다 지고,
흑조(黑潮)빛 밤이 덮이면
천막(天幕)이 열린 편으로
유성(流星)들은 시민(市民)과 같이 자주 지나갔다.
별들은 하나하나 천년(千年)의 모래 앞에 씻기운
천리 밖의 보석(寶石)들......
바다에 와서야
바다는 물의 육체(肉體)만이 아님을 알았다.
뭍으로 돌아가면
나는 다시 파도(波濤)에서 배운 춤을 일깨우고,
내 꿈의 수평선(水平線)을 머얼리 그어 둘 테다!
나는 이윽고 푸른 바다에 젖는 손수건이 되어
뭍으로 돌아왔다— 팔월오일(八月五日).
바람
김현승
시인(詩人)이면 누구나 모두 아끼는
알타이의 모음(母音)과 반모음(半母音)으로
추리고 고루어 보아도
바람, 너의 모양을 알알이 드러낼 수는 없구나.
파아란 참나무 수풀이 흔들릴 때
문득 너를 보았을 뿐,
그래서 나는
너를 그렇게도 아름답다고 기억할 뿐!
네가 지나는 느낌은
나의 등이 이리 시원코나,
나의 멍에도 가벼워지는 듯!
바람, 너는 지금 들을 지나
어느 먼 곳으로 금(金)빛 저녁 종(鍾)을 실으러 가느냐?
그러나 여긴 목쉰 기적소리 산까마귀의 울음소리
더 많은 나의 고장이다.
이제 네 발앞에 한 송이의 들꽃을 드리우면,
너는 얼마나 많은 향기로써 옷 입히듯 내게 갚아 줄 것이냐?
그러나 산과 들은 비고
너는 이제 황량(荒凉)하여 갈 뿐,
너는 내 고장의 형제들과 더불어 더욱 거칠고
더욱 황량(荒凉)하여 갈 뿐…
별 하나로도 충분하다
김현승
사는 일이란 내 편을 장만하는 일이다
내 편은 너에게로 편향
하나를 내주듯 모두를 건네고
예의를 호의로 넓히고
어긋나는 건 손목을 긋는 일이라 침묵하고
아무도 모르게 투명하게
풀숲에 없다가 있다가 있다가 없다가
비율을 잘못 맞출까 이리 어림잡다 저리 유추하다
알고 보면 바탕은 생각 없는 머리고
내게 이러는 건 여우들에게 처세술을 빌렸기 때문이다
생태에 끝이 있음을 발견하던 날
날짜에 별딱지 하나 붉게 염색한다
붉은 별에 당도하기까지
하늘이 공중에 모이면 안도하다가
하나의 새가 뒷걸음질 치면 여기가 폐허인 줄 안다
밤으로 접히는 게 일과가 되고
별,
별별,
물이 깊어지는 시간을 다 세고도
창틀을 뜰 줄 모른다
관대함으로 사는 데
병(病)
김현승
믿음이 많은 사람들은 가벼운 날개를 달고
하늘나라로 사라져가는데,
저녁나절의 구름들은
저 지평선의 가느다란 허리를
꿈 많은 손으로 안아주는데,
나는 문을 닫고
시들시들 나의 병을 앓는다.
나의 창가에서 까맣게 번지는
부드러운 꽃잎의 가장자리여,
네 서느럽고 맑은 이슬과 같은 손도
나를 짚는 이마 위에선 힘을 잃는다!
나의 병이 네 부드러운 살갗에 한 번 스며들면
네 가느다란 손가락 마디의 보석들도
그 아름다운 눈빛을 잃을 수밖에,
바람에 실려 네 품 안으로 가던
꿈의 쪽지도 청동과 같이 녹슬어
무거운 공중에 걸리고 만다.
꽃들의 주둥이가
젖줄을 빠는 기름진 흙의 나라에서
순금의 무게가 백년가약으로
가슴 깊이 그 머리를 파묻는 흙의 향기에서
내 목숨의 가시덤불은 시들시들 마른다!
어둠을 기다려
박쥐빛 날개로 내 사랑의 메마른 둘레를
한 바퀴 돌고서는,
다시 돌아와 내 안의 문을 닫고
시름시름 나의 병을 나 혼자 앓는다.
보석(寶石)
김현승
사랑은 마음의
보석(寶石)은 눈의
술.
어느 것은 타오르는 불꽃과 밤의 숨소리가
그 절정(絶頂)에서 눈을 감고.
어느 것은 영혼의 의미(意味)마저 온전히 빼어 버린
깨끗한 입술.
그것은 탄소(炭素) 빛 탄식들이 쌓이고 또 쌓이어
오랜 기억의 바닥에 단단한 무늬를 짓고.
그것은 그 차거은 결정(結晶) 속에
변함없이 빛나는 애련한 이마아쥬.
그리하여 탄환(彈丸)보다도 맹렬한 사모침으로
그것은 원만(圓滿)한 가슴 한복판에서 터진다.
나는 이것들을 더욱 아름답고 더욱 단단한
하나의 취(醉)함으로 만들기 위하여,
불붙는 태양(太陽)을 향하여 어느 날
이것들을 던졌다!
그러나 이 눈의 눈동자, 입을 여는 혀의 첫 마디,
이 적(敵)과 같이 완강(頑强)한 빛의 맹서(盟誓)는
더 무너질 길이 없어,
날마다 날마다 그 빛의 뜨거운 품 안에서
더욱 더 새롭게 타는 것이다.
봄이 오는 한 고비
김현승
눈을 돌려
눈을 돌려
눈을 네게까지 돌려 보아도
묻는 이는 없다.
만나는 이마다
만나는 이마다
묻지 않고
대답해 버린다.
대답이 한층 어려운데
짤막한 대답은 피눈물로 짜내는데,
한마디 한마디의 대답은 지금껏 모든 땅에서
한걸음 한걸음씩 좁은 길로 걸어 왔는데
물음이 그 대답보다 더 외로운
지금은 봄이 오는 한고비
제비 주둥이같이
제비 주둥이같이
열심히
어미를 향해 입을 벌리지도
못하는,
뽀죽 뽀죽 뽀죽
열심히
수선화의 새순처럼 머릴 들지도 못하는
지금은 지금은 봄이 오는 한 고비......
부재(不在)
김현승
나는 네 눈동자 속에
깃들여 있지도 않고,
나는 네 그림자 곁에 따르지도 않고
나는 네 무덤 속에 있지도 않다.
나의 말은 서툴러
나는 네 언어 속에 무늬 맺어
남지도 않고,
나는 내 꿈 속에 비치지도 않는다.
네가 나를 찾았을 때
나는 성전에 있지 않았고,
나는 또 돌을 들어 떡을 만든 것도 아니다.
나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네 튼튼한 발목으로 뛰어 내리지도 않았고,
나는 나의 젊은 곁에
암사슴처럼 길게 누워 있지도 않았다.
나는 끝내 어디에 있는가.
나는 내 한 줌의 재로 뿌려지는
푸른 강가 흐린 물 속에 있는가.
그 흐르는 강물을
한 개의 별빛이 되어
물끄러미 나는 바라볼 것인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내 단단한 뼛속에 있지도 않고,
비 내리는 포도의 한때마저
나는 내 우산 안에 있지도 않았다.
부활절에
김현승
당신의 핏자욱에선
꽃이 피어-사랑 꽃이 피어,
따 끝에서 따 끝에서
당신의 못자욱은 우리를 더욱
당신에게 열매 맺게 합니다.
당신은 지금 무덤 밖
온 천하에 계십니다-두루 계십니다
당신은 당신의 손으로
로마를 정복하지 않았으나,
당신은 그 손의 피로 로마를 물들게 하셨읍니다
당신은 지금 유태인의 옛 수의를 벗고
모든 4월의 관에서 나오십니다.
모든 나라가
지금 이것을 믿습니다
증거로는 증거 할 수 없는 곳에
모든 나라의 합창은 우렁차게 울려납니다
해마다 삼월과 사월 사이의
훈훈한 땅들은,
밀알 하나가 썩어서 다시 사는 기적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 파릇한 새 목숨의 순(荀)으로...
불완전
김현승
더욱 분명을 듣기 위하여
우리는 눈을 감아야 하고,
더욱 또렷이 보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숨을 죽인다
밤을 위하여
낮은 저 바다에서 설탕과 같이 밀물에 녹고,
아침을 맞기 위하여
밤은 그 아름다운 보석들을
아낌없이 바다에 던진다
죽은 사자의 가슴에다
사막의 벌떼는 단꿈을 치고,
가장 약한 해골은
승리의 허리춤에서 패자의 이름을 빛낸다
모든 빛과 어둠은
모든 사랑과 미움은
그리고 친척과 원수까지도,
조각과 조각들은 서로이 부딪치며
커다란 하나의 음악이 되어,
우리의 불완전을 오히려 아름답게
노래하여 준다.
불을 지키며
김현승
맨 처음 불을 켠 손은
맨 나중엔
불을 지른 손이 되었다.
떨리는 갈대 끝으로 붙인 밝은 불이
바람과
기름을 부으며,
메마른 욕망의 바다 - 잠기는 未來의 저
마스트 끝까지 태울 줄은 몰랐다.
이처럼 아름답게
햇빛을 끄고.
장미빛으로 - 마지막 장미빛으로
타오를 줄은 몰랐다.
거대(巨大)한 불덩이 - 불의 神이
빵처럼 까맣게 부스러져
반달형(形) 네 눈썹 위에서
가느다란 숫 껌정으로 이렇게 남을 줄은
아무도 몰랐다.
한 세상 불을 지키며 살아가는 길 -
열매는 꽃 속에
법(法)은 사랑 속에 있지만,
칼은 칼 속에
불은 불씨 속에 있는 것을…
빛
김현승
우리의 모든 아름다움은
너의 지붕 아래에서 산다.
이름을 부르고
얼굴을 주고
창조(創造)된 것들은 모두 네가 와서 문(門)을 열어 준다.
어둠이 와서 이미 낡은 우리의 그림자를 거두어들이면
너는 아침마다 명일(明日)에서 빼어 내어
새것으로 바꾸어 준다.
나의 가슴에 언제나 빛나는 희망(希望)은
너의 불꽃을 태워 만든 단단한 보석(寶石),
그것은 그러나 한 빛깔 아래 응결(凝結)되거나
상자(箱子) 안에서 눈부실 것은 아니다.
너는 충만(充滿)하다, 너는 그리고 어디서나 원만(圓滿)하다,
너의 힘이 미치는 데까지…
나의 눈과 같이 작은 하늘에서는
너의 영광(榮光)은 언제나 넘치어 흐르는구나!
나의 품 안에서는 다정하고 뜨겁게
거리(距離) 저편에서는 찬란하고 아름답게
더욱 견고(堅固)하고 청명(聽明)하게,
그러나 아직은 냉각(冷却)되지 않은,
아직은 주검으로 굳어져 버리지 않은,
너는 누구의 연소(燃燒)하는 생명(生命)인가!
너는 아직도 살고 있는 신(神)에 가장 가깝다.
사는 것
김현승
사는 것 그것은
살고 있는 것도 아니고
살아 버린 것도 아니다.
살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살려면 못 사는 것도 아니다.
사는 것
그것은 살려는 것이다.
내가 아니며 나이려 하고
네가 아니며
너의 옷을 입어 본다.
복숭아 속에
복숭아인
오직 복숭아의 씨로,
복숭아가 되게 한다.
사는 것 - 그것은
살지 않는 것이다.
나를 위하여 둘이 되지 않으며
너를 위하여,
너의 슬픔이 되지 않는다.
살기 전에
죽기도 하고,
살기 전엔
끝내 살지도 않는다.
사랑의 동전(銅錢) 한 푼
김현승
사랑의 동전 한 푼
위대(偉大)한 나라에 바칠 수는 없어도,
사랑의 동전 한 푼
기쁘게 쓰일 곳은 별로 없어도,
사랑의 동전 한 푼
그대 아름다운 가슴을 꾸밀 수는 없어도,
사랑의 동전 한 푼
바다에 던지는 하나의 돌이 될지라도,
사랑의 동전 한 푼
내 맑은 눈물로 눈물로 씻어
내 마음의 빈 그릇에 담아
당신 앞에 드리리니……
사랑의 동전 한 푼
내 눈물의 곳집 안에 넣을 때,
이 세상의 모든 황금(黃金)보다도
사랑의 동전 한 푼
더욱 풍성히 풍성하게 쓰이리니…….
사랑을 말함
김현승
그것이 비록 병들어 죽고 썩어 버릴
육체(肉體)의 꽃일지언정,
주(主)여, 우리가 당신을 향하여 때로는 대결(對決)의 자세(姿勢)를
지을 수도 있는, 우리가 가진 최선(最善)의 작은 무기(武器)는
사랑이외다!
그 밖에 무엇으로써 인간(人間)을 노래하리이까?
파편(破片) 위에 터를 닦는 저들 부귀(富貴)와 영화(榮華)이오리이까,
순간(瞬間)에 안식(安息)하는 영웅(英雄)들의 성(城)이오리까,
그 밖에 다른 은혜(恩惠)는 아무런 허용도
당신은 우릴 위하여 아직 창조(創造)하지 않으셨나이다,
그러나 당신은 우리들의 사랑조차 가변(可變)의 저를 가리켜,
아침에 맺혔다 스러지는 이슬을 보라 하시리이다.
그러면 주(主)여, 나는 다시 대답하여
이렇게 당신을 향해 노래하리이까?
처음은 이슬이요, 나머지는 광야(曠野)니이다.
우리의 짧은 하루는…
사랑하는 여인에게
김현승
우리의 창이 되어
고요히 닫힌
그러한 눈.
보석보다
별을 아끼는
그러한 손-왼손.
우리의 뜻을
밝게도 장미빛으로 태우는
그러한 가슴-둥근 가슴.
목소리-우리의 노래인
맑은 목소리.
우리의 기도를 다소곳이
눈물에 올리는
깨끗한 무릎.
그러한 여인을
아내와 어미로 맞는
남자의 기쁨.
남자로 태어난 기쁨.
사실과 관습 - 고독 이후
김현승
나는 차를 앞에 놓고
고즈녁한 저녁에 호올로 마신다.
내가 좋아하는 차를 마신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사실일 뿐,
차의 짙은 향기와는 관계없이
이것은 물과 같이 담담한 사실일 뿐이다.
누구의 시킴을 받아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누구의 손으로 들국화를 어여삐 가꾼 것도 아니다.
차를 마시는 것은
이와 같이 스스로 달갑고 가장 즐거울 뿐,
이것은 다만 사실이며 또 관습이다.
물에게 물은 물일 뿐
소금물일 뿐,
앞으로 남은 십 년을 더 살든지 죽든지
나에게도 나는 나일 뿐,
이제는 차를 마시는 나일 뿐,
이 짙은 향기와는 관계도 없이
차를 마시는 사실과 관습은
내가 아는 내게 대한 모든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모든 것도 된다.
사월
김현승
플라타너스의 순들도 아직 어린 염소의 뿔처럼
돋아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도시는 그들 첨탑 안에 든 예언의 종을 울려
지금 파종의 시간을 아뢰어준다
깊은 상처에 잠겼던 골짜기들도
이제 그 낡고 허연 붕대를 풀어버린 지 오래이다
시간은 다시 황금의 빛을 얻고
의혹의 안개는 한동안 우리들의 불안한 거리에서
자취를 감출 것이다
검은 연돌(煙突)들은 떼어다 망각의 창고 속에 넣어버리고
유순한 남풍을 불러다 밤새도록
어린 수선들의 쳐든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개구리의 숨통도 지금쯤은 어느 땅 밑에서 불룩거릴게다
추억도 절반, 희망도 절반이어서
사월은 언제나 어설프지만
먼 북녘에까지 해동의 기적이 울리이면
또다시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이 달은 어딘가 미신(迷信)의 달
산까마귀 울음소리
김현승
아무리 아름답게 지저귀어도
아무리 구슬프게 울어예어도
아침에서 저녁까지
모든 소리는 소리로만 끝나는데,
겨울 까마귀 찬 하늘에
너만은 말하며 울고 간다!
목에서 맺다
살에서 터지다
뼈에서 우려낸 말,
중에서도 재가 남은 말소리로
울고 간다.
저녁 하늘이 다 타버려도
내 사랑 하나 남김없이
너에게 고하지 못한
내 뼛속의 언어로 너는 울고 간다.
삼월생(三月生)
김현승
눈보다 입술이 더 고운
저 애는,
아마도 진달래 피는 삼월에 태어났을 거야.
삼월이 다하면 피는 튜우립들도
저 애의 까아만 머리보다
더 귀엽지는 못할 거야
저 애는 자라서
아마 어른이 된 후에도,
푸라타나스 눈이 틀 때
타고난 그 마음씨는 하냥 부드러울 거야.
그렇지만 저 애도
삼월이 가고 구월이 가까우면
차츰 그 가슴이 뿌듯해 올 거야.
어금니처럼 빠끔이 터지는
그 여린 가슴이......
겨울은 가고
봄은 아직 오지 않는
야릇한 꿈에서 서성일지도 모를 거야.
수선화 새순 같은 삼월생(三月生).
저 애는 돌맞이 앞니같이 맑은
삼월생(三月生).
삼월의 시(三月의 詩)
김현승
다시 피게 하라!
내가 나의 모국어(母國語)로 삼월(三月)의 시(詩)를 쓰면
이 달의 어린 새들은 가지에서 노래하리라,
아름다운 미래(未來)와 같이
알 수 없는 저들의 이국어(異國語)로.
겨우내 어버이의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들이 이제는 양지(陽地)로 모인다,
그리고 저들이 닦는 구두 콧부리에서
삼월(三月)의 윤(潤)이 빛나기 시작한다!
도심(都心)엔 시청(市廳) 지붕 위 비둘기들이
광장(廣場)의 분수탑(噴水塔)을 몇 차롄가 돌고선
푸라타나스 마른 뿔 위에 무료(無聊)히 앉는
삼월(三月)이기에 아직은 비어 있다.
그러나 그 속에
모든 수(數)의 신비가 묻혀 있듯,
우리들의 마음은 개구리의 숨통처럼
벌써부터 울먹인다. 울먹인다.
그러기에 지금
오랜 황금(黃金)이 천리(千里)에 뻗쳐 묻혔기로
벙그는 가지 끝에 맺는
한 오라기의 빛만은 못하리라!
오오, 목숨이 눈뜨는 삼월(三月)이여
상자(箱子)에 묻힌 진주(眞珠)를 바다에 내어 주라,
이윽고 술과 같이 출렁일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여 저 아지랭이의 요정(妖精)과 마법(魔法)을 빌려
피빛 동백(冬柏)으로
구름빛 백합(百合)으로
다시 살아나게 하라!
다시 피게 하라!
출렁이는 마음-- 그 푸른 파도(波濤) 위에...... .
새벽
김현승
새벽
세상이 쓴지 괴로운지 멋도 모르는 새벽
종달새와 노래하고
참새와 지껄이고
시냇물과 속삭이고
참으로 너는 철모르는 계집애다.
꽃밭에서 이슬을 굴리고
어린 양을 풀밭에 내어놓고
숲속에 종을 울리는
참으로 너는 부지런한 계집애다.
시인(詩人)은 항상 너를 찍으려고 작은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더라.
내일은 아직도 세상의 고뇌(苦惱)를 모른다.
그렇다면 새벽 너는 금방 우리 앞에 온 내일이 아니냐?
나는 너를 보고 내일을 믿는다.
더 힘있게 내일을 사랑한다.
그리하여 힘있게 오늘과 싸운다.
새벽 교실
김현승
새벽의 밤의 밀림을 치는 그윽한 소리가
또다시 머언 사면에서 들려 옵니다.
까아만 남빛 유리밀림(琉璃密林) 속에 고요히 잠들었던 작은 별들은
그만 놀라 깨어 머얼리 날아가 버리느라고
아마 새벽마다 이렇게 잔잔한 바람이 이는 게지요!
우유(牛乳)를 짜는 것도 아니지만,
누구인가, 들의 여명을 밟으며 따뜻한 유방의 감촉을 등에 메고 들어와
여기 저기 아직도 등불을 내어버린 자욱한 거리 위에
하얀 밀크를 얹고 돌아가면
참새들은 이제 바쁜 듯이 떠돌며 점잖은 동상이 있는 곳으로 모이겠지요?
그러면 그렇지요. 고 얄미운 아우 같은 것들이 벌써 일어나
오늘 아침은 무엇인지 토론회를 개최하고 있나봅니다그려.
야단들이에요. 밀월의 은빛 소낙비 퍼지던 어젯밤……
다람쥐가 기다리는 붉은 골짜기도 잊어버리고
북극의 보초가 멀리 지평의 새벽을 기다리는 하늘에
대상(隊商)들의 발자욱과 떨어뜨린 손수건의 모양을 만들며
늦도록 놀다가 돌아간 작은 구름들의 태도가
도무지 옳으냐 옳지 않으냐, 이것이 그들의 제목인 줄 압니다.
아름다운 상선과 첨탑을 자랑할 수 있는 지방(脂肪)의 귀족들의 트렁크를
두루 찾던 장한(壯漢)들이 여호의 굴과 같은 쓸쓸한 마을의 초상을 안고
흩어지는 성읍(城邑)의 황혼이 오면
포도빛 지평선에 실려 돌아가기로 약속하고서 글쎄 얼마나 분하였겠어요.
그러나 재미있는 성품을 가진 구름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넘어 오고 있습니다그려-
저걸 좀 보세요. 칠면조 웅변가 식인조-
모두 우습게 평화와 자유를 그러나 상징하고 있지 않습니까?
납작한 푸른 캡을 쓴 버스가 포플러의 정거장에 머무는 오후가 오면,
저 구름들은 고산식물과 먼 해협을 건너 식인조의 수림(藪林)을 찾아간다 합니다.
그러니, 참새들은 암만 바라보아야 누구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요.
토론회는 어떻게 되었는지 군축회의같이 흩어져 버리는구먼.
유리창-금빛 태양이 물결치는 빌딩의 아침 해협을 열고
젊은 폐혈관(肺血管)들은 서재(書齋)의 탄산가스와 새벽을 우주로부터 바꿉니다.
폭탄과 같이 태양은 멀리 밤을 깨뜨립니다.
아아 여보세요. 새날의 승리를 안고-
아세아 또 지구의 들을 용맹스럽게 달릴 광명의 젊은 피더스여
어둡고 쓸쓸한 당신의 투숙-세기의 창을 열고
새날의 경륜과 구가로 우렁차게 돌파하는 새벽을 바라보지 않으렵니까?
아아 얼마나 아름답고 씩씩한 당신들의 새벽입니까?
새벽은 당신을 부르고 있습니다.
김현승
새벽은 푸른 바다에 던지는 그물과 같이 가볍고 희망이 가득 찼습니다.
밤을 돌려 보낸 후 작은 별들과 작별한 슬기로운 바람이
지금 산기슭을 기어 나온 작은 안개를 몰고 검은 골짜기마다
귀여운 새들의 둥지를 찾아 다니고 있습니다.
이제 불교를 믿는 저 산맥들이 새벽의 정숙한 묵도(黙禱)를 마친 후에 고 어여쁜 산새들을 푸른 수풀 속에서 내어 놓으면
이윽고 저 하늘은 산딸기 열매처럼 붉어지겠지요?
빨간 숯불을 기다리는 오후에 깨끗한 세탁물을 입고 자장가 부르던 빨랫줄이
새벽의 프레젠트-맑은 이슬을 모아놓고 훌륭한 작품의 감상자를 부르고 있습니다그려!
아아 여보 얼마나 훌륭한 작품인 이슬들입니까?
날마다 모든 사람들이 피곤을 씻으려는 자리에 누워 구상하는 세계가 새벽의 맑고 고요한 틈을 타서 저렇게 작품화된다 합니다.
그러나 밀밭과 노래를 좋아하는 참새들이 일어날 때 다 따 먹고 말겠지.
백색 유니폼을 입은 준령의 조기체조단(早起體操團)인 구름들이 벌써 동방 산마루를 씩씩하게 넘어옵니다.
아마 저렇게 빛나고 기운찬 구름들이 모이면
오늘은 그 용감스런 소낙비가 우리의 성읍(城邑)을 다시 찾아오겠지요?
시원한 바닷바람을 몰고 들어와 문지방에 흐르고 있는 송진과 같이
느긋한 오후의 생존을 약탈하여 가는 그 용감한 협도(俠盜)들 말입니다.
저것 보세요. 붉은 소나무 뚝뚝 찍어 우달북달 묶어 놓은 참외막이 제법 조포미(粗暴美)를 자랑하며 저 산등 위에 가서 있습니다그려!
가지나무의 자색 열매와, 타원형의 푸른 호박과, 산딸기 붉은 열매들이 또한 새벽의 맑은 들을 장식하여 놓기를 잊었겠지요?
그러면 여보, 아침과 저녁 하늘에 애닯고 찬란한 시를 쓰는 예술지상주의자인 태양이 우리들의 사랑하는 풀밭에 내려와 맑고 귀여운 이슬을 죄다 꼬여 가기 전에 당신은 새벽이 부르는 저 푸른 들에 나가지 않으렵니까?
새벽은 위대한 보물을 저 들에 숨겨 놓고 밤의 슬픈 이야기를 계속하는 우리를 부른다 합니다.
새해 인사
김현승
오늘은
오늘에만 서 있지 말고,
오늘은
내일과 또 오늘 사이를 발 굴러라.
건너뛰듯
건너뛰듯
오늘과 또 내일 사이를 뛰어라.
새옷 입고
아니, 헌 옷이라도 빨아 입고,
널뛰듯
널뛰듯
이쪽과 저쪽
오늘과 내일의 리듬 사이를
발 굴러라 발 굴러라.
춤추어라 춤추어라.
샘물
김현승
깊고 어진 사람의 성품과 같이
언제나 누구에게나 풍성히 솟는 샘물……
몇천 몇만년 얼마나 많은 길손들이
저들의 무거운 멍에를 이 샘물 곁에
쉬고 갔을까.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오고 올 사람들이
저들의 피곤한 다리와 메마른 입술
저들의 평생을
이 샘물에 적시우고 가려는가?
깊은 밤이 지새고
먼동이 트이면
서로이 낯익은 아낙네들이 이 샘물에 모여
넘치도록 가득히 긷는 질동이의 물들은
정녕 은이나 금보다 훨한 것은 아니언만,
그러나 아낙네들은
금은보화를 나를 때와 같이
서둘거나 다투지도 않는다.
그 마음이 날로 새로워
항상 아름다운 꿈을 지니이듯
억만 년 이 정결한 품속에서 씻기운 푸른 하늘을
저만이 호올로 간직한 보배처럼
때때로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가는
흰 구름들도 있다! 구름들이 있다!
언제나 누구에게나
풍성하게 솟아 넘치는 샘물이기에
오히려 그의 은총을 지나쳐 버리는 우리의 허물은
허물이어도 오히려 아름다운
우리의 크낙한 행복이다! 행복이다.
생명(生命)의 합창(合唱)
김현승
솟는 나의 생명(生命)이 넘칠 때
검은 흙에서는 꽃이 피나부다
피빛 진달래도 구름빛 백합화(百合花)도!
내가 나의 모국어(母國語)로 시(詩)를 쓰면
새들도 가지에서 노래하리라
먼 미래(未來)와 같이 알 수 없는 저들의
이국어(異國語)로......
보라 우리는 다수(多數)이며 하나이다!
우리는 하나이며 폭발(爆發)한다!
황금(黃金)과 사자(獅子)들이 함께 잠든 저 광야(曠野)엔
3월(月)의 어린 풀잎들이 입맞추고
끓는 육체(肉體)들은 왜 탄환(彈丸)보다 빠르게 갔나.
갔으나 사라지지 않고
빈 들에 울리는 우리의 노래를 듣는가
우리는 오늘이며 내일(來日)이다
우리는 죽음이며 또 생명(生命)이다.
선을 그으며
김현승
내가 긋는 선(線)은
아무리 가느다라도
넓이는 그냥 남는다.
네가 가는 칼날은
아무리 날카로워도
무게는 아직도 남는다.
그렇지 않을 수 없다.
사랑은 끝났는데
사랑은 어찌하여 머뭇거리고
마음 한구석 어딘가 바늘구멍으로
나는 눈물을 흘린다.
그럴 수밖에 없다.
밤이 오는데
별은 빛나고,
장미는 네 밝은 웃음 그 한복판에
벌레를 재운다.
우리는 그럴 수밖에 없다.
온전이란
국어 가운데 국어일 뿐,
우리는 선(線)을 긋기는 하여도
우리는 선(線)의 정의(定義)를 긋지는 못한다.
나의 착한 친구들이여.
속죄양(贖罪羊)
김현승
먼 언덕에서는 구름과 놀다가도
돌아오면 머리맡에 燈불을 사랑할 줄 아는
너이......
너이 우리 안에
오늘 밤은,
다비데의 시편(詩篇)을 나직이 읽어 줄까.
사랑하는 우리의 어린것들을 위하여
너이의 옷을 벗기면,
오월(五月)의 기후(氣候)가 깃들어 있는 너이 체온(體溫)...... .
너이의 착한 울음소리와 먼 구름의 옷 빛은
그렇잖아도 우리를 위하혀 흘리는
너이의 피를 더욱 붉게 만든다!
나는 영혼과 함께 죄(罪)를 아는---
너의 영혼과 함께 죄(罪)를 모르는---
나와 너는 슬픔과 아쉬움을
서로이 바꾸어 지니인 채,
그러면 다소곳이 사는 자매(姉妹)이냐.
순수
김현승
만일 이 강물과 저 평야와 산들이
모두 금은보석으로 만들어졌다면,
그 때는 한 줌의 흙을 얻기 위하여
사람들은 오늘과 같이 싸웠을 것이다.
만일 이 거리와 저 마을들이
모두 화려한 주랑으로 두른 궁전이었다면,
그제는 한 작은 오막살이를 위하여
저녁 노을은 더욱 아름답게 저 언덕에서 빛났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모두
저 별 위에 깃드는 사람들이라면,
이처럼 산만한 우리들의 지구도
거기서는 진주보다도 견고하게 빛났을 것이다.
가치란 무엇인가,
결핍에서 오는 것인가?
순수란,
자기의 처지와 동포의 문제를
한 줌의 흙을 사랑하듯,
씨를 뿌리며
꽃나무를 가꾸는 마음.......
슬퍼하지 않는 것은
김현승
슬픔이나 만면의 웃음 그런 것들,
그런 것들을 되도록 우리는 대면하지 않기다!
우리는 많이 자랐기에,
우리는 그렇게도 많이 자라고 말았기에.
우리는 슬퍼하지 않거든,
그리고 우리는 기뻐하지도 않거든......
흰 이빨로 파도처럼 웃는 것을,
봉선화 꽃잎처럼 우는 것을,
손가락 매듭 굵은 아버지의 이름같이
우리는 되도록 피하고 모르는 체 하거든......
이마를 살얼음만큼이나 찌푸리고 이내 태연할 줄 알거든,
우리는 그렇게도 많이 자라나고 말았거든.
탄생이란
강보에 싸인 아기의 울음,
그 울음을 태우러 시간은 온다.
그리고 해체되면 우리는 추락한다-우리가 모르기에
그 이름을 부르는 영원과 무한으로......
우리는 이 어려운 고비에도 존재할 줄 알거든,
우리는 벌리던 팔을 이내 안으로 굽힐 줄을 알거든.
초월한다는 것은 그 가운데 산다는 것보다도
육체를 더욱 수척케 하는 것,
슬퍼하지 않는다는 것은,
밤이 되어도 우리들의 꽃밭에 이슬이 내리지 않는 것......
슬픔
김현승
슬픔은 나를
어리게 한다.
슬픔은
죄를 모른다.
사랑하는 시간보다도 오히려.
슬픔은 내가
나를 안는다,
아무도 개입할 수 없다.
슬픔은 나를
목욕시켜 준다,
나를 다시 한번 깨끗게 하여 준다.
슬픈 눈에는
그 영혼이 비추인다.
고요한 밤에는
먼 나라의 말소리도 들리듯이.
슬픔 안에 있으면
나는 바르다!
신앙이 무엇인가 나는 아직 모르지만,
슬픔이 오고 나면
풀밭과 같이 부푸는
어딘가 나의 영혼……
시(詩)의 맛
김현승
멋진 날들을 놓아두고
시(詩)를 쓴다. 고궁엔 벚꽃,
그늘에 괴인 술,
멋진 날들을 그대로 두고
시(詩)를 쓴다.
내가 시(詩)를 쓸 때
이 땅은 나의 작은 섬,
별들은 오히려 튼 나라,
멋진 약속을 깨뜨리고
시(詩)를 쓴다
종아리가 곧은 나의 사람을
태평로 2가의 플라스틱 지붕 아래서
온종일 기다기게 두고,
나는 호올로 시(詩)를 쓴다.
아무도 모를 마음의 빈 들
허물어진 돌가에 않아,
썩은 모과 껍질에다 코라도 부비며
내가 시(詩)를 쓸때,
나는 세계의 집 잃은 아이
나는 이 세상의 참된 어버이
내가 시(詩)를 쓸땐
멋진 너희들의 사랑엔 강원도풍(江原道風)의 어둔 눈이 나리고,
내 영혼의 벗들인 말들은
까아만 비로드 방석에 누운
아프리카산(産) 최근의 방석처럼
눈을 뜬다.
빛나는 눈을 뜬다.
신년기원
김현승
몸 되어 사는 동안
시간을 거스를 아무도 우리에겐 없사오니,
새로운 날의 흐름 속에도
우리에게 주신 사랑과 희망―당신의 은총을
깊이깊이 간직하게 하소서.
육체는 낡아지나 마음으로 새로웁고
시간은 흘러가도 목적으로 새로워지나이다!
목숨의 바다―당신의 넓은 품에 닿아 안기우기까지
오는 해도 줄기줄기 흐르게 하소서.
이 흐름의 노래 속에
빛나는 제목의 큰 북소리 산천에 울려 퍼지게 하소서!
한 쪽의 빵을 얻기 위하여
한 세기의 희망이 굶주리던 지난 일년
한 이파리 꽃술에 입맞추기 위하여
한 세대의 젊음이 시들어버린
지난 일년의 얼굴 없는 물웅덩이 속에
1972년의 쉬임 없는 시간들이 고이어 고이어
끝 모를 심연을 우리의 눈망울에 잠기게 마옵소서.
검은 땅에 입맞추는
저 임자년(壬子年)의 첫 입술―새벽의 붉은 태양을
희망과 사랑의 눈빛으로 다만 바라보게 하소서!
우리를 오히려 도리어 더욱
슬프고 배고프고 목마르게 만들던,
단추로 눌러버린 이 기쁨들
빛의 이 영화(榮華)들
엉겅퀴 우거진 이 욕망의 벌을 지나,
낡은 경험 위에 새로운 슬기를 띄우며
새 아침의 도소주(屠蘇酒)를 마음의 새 푸대에 부으며,
아침 태양이 반짝이는 강물처럼
굽이쳐 굽이쳐 우리의 새로운 시간들을
당신의 품-당신의 영원한 바다로
흘러가게 하소서 하소서.
신년송(新年頌)
김현승
단 한 마디를
열 마디와
백 마디로
이윤(利潤)을 남기면서,
오십(五十)도 넘도록
나는 천국(天國)의 노래를 불렀다.
보석(寶石)과 눈물과
하얀 치아(齒牙)가 반짝이는
이방(異邦)의 시(詩)를 썼다.
그 백 마디를
이제는 열 마디와
한 마디로
겸손을 배우면서,
모든 언어(言語)의 재산을 팔아
나의 마지막 침묵을 지키는
내 언어의 과부(寡婦)가 되고져.
신설(新雪)
김현승
시인들이 노래한 일월의 어느 언어보다도
영하 5도가 더 차고 깨끗하다.
메아리도 한 마정이나 더 멀리 흐르는 듯……
정원의 썰매들이여,
감초인 마음들을 미지의 산란한 언어들을
가장 선명한 음향으로 번역하여 주는
출발의 긴 기적들이여,
잠든 삼림들을
이 맑은 공기 속에 더욱 빨리 일깨우라!
무엇이 슬프랴,
무엇이 황량하랴,
역사들 썩어 가슴에 흙을 쌓으면
희망은 묻혀 새로운 종자가 되는
지금은 수목들의 체온도 뿌리에서 뿌리로 흐른다.
피로 멍든 땅,
상처 깊은 가슴들에
사랑과 눈물과 스미는 햇빛으로 덮은
너의 하얀 축복의 손이 걷히는 날
우리들의 산하여
더 푸르고 더욱 요원하라!
십이월(十二月)
김현승
잔디도 시들고
별들도 숨으면,
십이월(十二月)은 먼 곳
창(窓)들이 유난히도 다스운 달…
꽃다운 숯불들
가슴마다 사위어 사위어,
십이월(十二月)은 보내는 술들이
갑절이나 많은 달…
저무는 해 저무는 달,
흐르는 시간(時間)의 고향을 보내고,
십이월(十二月)은 언제나
흐린 저녁 종점(終點)에서 만나는
그것은 겸허하고 서글픈 중년(中年)…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
김현승
아침 해의 축복(祝福)과 사랑을 받지 못하는 크고 작은 유리창(琉璃窓)들이
순간(瞬間)의 영광(榮光)답게 최후(最後)의 찬란(燦爛)답게 빛이 어리었음은
저기 저 찬 하늘과 추운 지평선(地平線) 위에 붉은 해가 피를 뿌리고 있습니다.
날이 저물어 그들의 황홀(恍惚)한 심사가 멀리 바라보이는 광활(廣闊)한 하늘과 대지(大地)와 더불어 황혼(黃昏)의 묵상(默想)을 모으는 곳에서
해는 날마다 그의 마지막 정열(情熱)만을 세상에 붓는다 합니다.
여보세요. 저렇게 붉은 정열(情熱)만은 아마 식을 날이 없겠지요.
아니 우랄산(山) 골짜기에 쏟아뜨린 젊은 사내들의 피를 모으면 저만 할까?
그렇지요. 동방(東方)으로 귀양 간 젊은이들의 정열(情熱)의 회합(會合)이 있는 날
아! 저 하늘을 바라보세요.
황금창(黃金窓)을 단 검은 기차(汽車)가
어둡고 두려운 밤을 피하여 여명(黎明)의 나라로 화살같이 달아납니다.
그늘진 산(山)을 넘어와 광야(曠野)의 시인(詩人)--검은 까마귀가 성읍(城邑)을 지나간 후
어두움이 대지(大地)에 스며들기 전에
열차(列車)는 안전지대(安全地帶)의 휘황(輝煌)한 메트로 폴리스를 향하여
흑암(黑暗)이 절박(切迫)한 북부(北部)의 설원(雪原)을 탈출(脫出)한다 하였읍니다.
그러면 여보! 이날 저녁에도 또한 밤을 피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적막한 몇 가지 일을 남기고 해는 졌읍니다그려!
참새는 소박(素朴)한 깃을 찾고,
산속의 토끼는 털을 뽑아 둥지에 찬바람을 막고 있겠지요.
어찌 탄색(灰色)의 포플러인들 오월(五月)의 무성(茂盛)을 회상(回想)하지 않겠습니까?
불려 가는 바람과 나려오는 서리에 한평생 늙어 버린 전신주(電信柱)가
더욱 가늘고 뾰죽해질 때입니다.
저녁 배달부(配達夫)가 돌아다닐 때입니다.
여보세요.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허다한 사람들에게
행복(幸福)한 시간(時間)을 프레센트하는 우편물(郵便物)입니까?
해를 쫓아 버린 검은 광풍(狂風)이 눈보라를 날리며 개선행진(凱旋行進)을 하고 있습니다그려!
불빛 어린 창(窓)마다 구슬피 흘러나오는 비련(悲戀)의 송가(頌歌)를 듣습니까?
쓸쓸한 저녁이 이를 때 이 땅의 거주민(居住民)이 부르는 유전(遺傳)의 노래입니다.
지금은 먼 이야기, 여기는 동방(東方)
그러나 우렁차고 빛나던 해가 서(西)쪽으로 기울어지던 날
오직 한마디의 비가(悲歌)를 이 땅에 남기고 선인(先人)의 발자취가
어두움 속으로 영원(永遠)히 사라졌다 합니다.
그리하여 눈물과 한숨, 또한 내어버린 웃음 위에
표랑(漂浪)의 역사(歷史)는 흐르는 세월과 함께 쓰여져 왔다 합니다.
그러면 여보, 이러한 이야기를 가진 당신들!
쓸쓸한 저녁이 올 때 창(窓)밖에 안타까운 집시의 노래를 방송(放送)하기엔
--당신들의 정열(情熱)은 너무도 크지 않습니까?
표랑(漂浪)의 역사(歷史)를 그대로 흘려보내기엔
--당신들의 마음은 너무도 비분(悲憤)하지 않습니까?
너무도 오랫동안 차고 어두운 이 땅,
너무도 오랫동안 차고 어두운 이 땅,
울분의 덩어리가 수천 수백(數千 數百) 강렬(强烈)히 불타고 있었읍니다그려!
마침내 비련(悲戀)의 감정(感情)을 발끝까지 찍어 버리고
금(金)붕어 같은 삶의 기나긴 페이지 위에 검은 먹칠을 하고
하고서, 강(强)하고 튼튼한 역사(歷史)를 또다시 쌓아 올리고
캄캄하던 동방산(東方山) 마루에 빛나는 해를 불쑥 올리려고.
밤의 험로(險路)를 천리(千里)나 만리(萬里)를 달려 나갈 젊은 당신들--
정서(情緖)를 가진 이, 일만 사람이 쓸쓸하다는 겨울 저녁이 올 때
구슬픈 저녁을 더더 장식(裝飾)하는 가냘픈 선율(旋律) 끝에 매어 달린 곡조(曲調)와
당신의 작은 깃을 찾는 가엾은 마음일랑 작은 산새에게 내어 주고
선색(線色) 등잔 아래 붉은 회화(會話)를 그렇게 할 이웃에게 맡기고
여보! 당신들은 맹렬(猛烈)한 바람이 추운 거리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읍니까?
소름 찬 당신들의 일을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버지
김현승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 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 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 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 아버지의 동포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 것들이 간직한 그깨끗한 피로
아버지의 마음
김현승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 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 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아버지의 동포(同胞)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잔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英雄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는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 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아침
김현승
새벽의 보드러운 촉감이 이슬 어린 창문을 두드린다.
아우야 남향의 침실문을 열어제치라.
어젯밤 자리에 누워 헤이던 별은 사라지고
선명한 물결 위에 아폴로의 이마는 찬란한 반원을 그렸다.
꿈을 꾸는 두 형제가 자리에서 일어나 얼싸안고 바라보는 푸른 해변은 어여쁘구나.
배를 쑥 내민 욕심 많은 풍선이 지나가고
하늘의 젊은 퓨리탄-동방의 새 아기를 보려고 떠난 저 구름들이
바다 건너 푸른 섬에서 황혼의 상복을 벗어 버리고 순례의 흰옷을 훨훨 날리며 푸른 수평선을 넘어올 때
어느덧 물새들이 일어나 먼 섬에까지 경주를 시작하노라.
아우야 얼마나 훌륭한 아침이냐.
우리들의 꿈보다는 더 아름다운 아침이 아니냐.
어서 바다를 향하여 기운찬 돌을 던져라.
우리들이 저 푸른 해안으로 뛰어갈 아침이란다.
아침 식사
김현승
내 아침상 위에
빵이 한 덩이,
물 한 잔.
가난으로도
나를 가장 아름답게
만드신 주여.
겨울의 마른 잎새
한 끝을,
당신의 가지 위에 남겨 두신
주여.
주여,
이 맑은 아침
내 마른 떡 위에 손을 얹으시는
고요한 햇살이시여.
아침과 황혼(黃昏)을 데리고 갈 수 있다면
김현승
수탉의 울음소리 고요한 하늘에 오르고
집 위와, 공중(空中)과, 먼 산(山)에 선명(鮮明)한 침묵(沈默)이 안개와 같이 기어 다닐 때
당신은 일찍이 아침을 아름다와하였읍니까?
산(山)봉우리에 피어오르는 처녀광(處女光)과 함께 이슬을 몰고 날아가며, 서며, 혹은 놓여 있는
투명(透明)한 아침의 모든 족속들이.
그러난, 침실(寢室)을 암시(暗示)하는 곳—낮은 하늘과 초지(草地)와 머언 인가(人家)와 또한 황토(黃土) 언덕과 삼림(森林)과 강(江) 건너는 늙은 나룻배 위에 진달래빛과 그윽한 심호흡(深呼吸)이 흘러갈 떄
황혼(黃昏)은 또한 아름답지 않습니까?
노을을 입고 깃들이며, 누우며, 혹은 사라지는 하늘
땅의 젊음의 모든 표정(表情)들이.
나의 왼편 팔에
또한 나의 오른편 팔에,
황혼(黃昏)과 아침을 가벼이 데리고
기차(汽車) 가는 플랫포옴과 포석(鋪石)의 도로(道路)들과 또한 주막(酒幕)을 지나
푸른 하늘 아래 빛나는 평야(平野)를
천리(千里)나 만리(萬里) 끝없이 갈 수 있다면
아아 자연(自然)은 왜 이다지 아름답습니까?
양심의 금속성
김현승
모든 것은 나의 안에서
물과 피로 육체를 이루어 가도,
너의 밝은 은빛은 모나고 분쇄되지 않아
드디어는 무형하리 만큼 부드러운
나의 꿈과 사랑과 나의 비밀
살에 박힌 파편처럼 쉬지 않고 찌른다.
모든 것은 연소되고 취하여 등불을 향하여도,
너만은 물러나와 호올로 눈물을 맺는 달밤.....
너의 차거운 금속성으로
오늘의 무기를 다져가도 좋을,
그것은 가장 동지적이고 격렬한 싸움!
어린 새벽은 우리를 찾아온다 합니다
김현승
새까만 하늘을 암만 쳐다보아야 어딘지 모르게 푸르러터니
그러면 그렇지요, 그 우렁차고 광명(光明)한 아침의 선구자(先驅者)인 어린 새벽이
벌써 희미한 초롱불을 들고 사방(四方)을 밝혀 가면서
거친 산(山)과 낮은 들을 걸어오고 있었읍니다그려!
아마 동리에 수탉이 밤의 적막(寂寞)을 가늘게 찢을 때
잠자던 어느 골짜기를 떠나 분주히 나섰겠죠.
여보세요. 당신은 쓸쓸한 저녁이 올 때 얼마나 슬퍼하였읍니까?
당신이 사랑하는 해가 거친 산정(山頂)에서 붉은 피를 쏟고
감상시인(感想詩人)인 까마귀가 황혼(黃昏)의 비가(悲歌)를 구슬피 불러
답답한 어두움이 방방곡곡(坊坊谷谷)에 숨어들 때
당신은 끊어져 가는 날의 숨소리를 들으며 영원(永遠)한 밤을 슬퍼하지 않았읍니까?
그러기에 당신은 또한 절망(絶望)을 사랑하기에 경솔(輕率)하고,
감정(感情)을 달래기에 퍽도 이지(理智)가 둔(鈍)하였다는 말이지요.
지구(地球)의 구석까지 들어찰 광명(光明)을 거느리고, 용감(勇敢)스러운 해는
어둡고 험준(險峻)한 비탈과 절벽(絶壁)을 또다시 기어오르고 있다는 걸요.
이제 그 빛난 얼굴을 동방산(東方山) 마루에 눈이 부시도록 내어놓으면
모든 만물(萬物)은 환호(歡呼)를 부르짖고
새로운 경륜(經綸)을 이루어 나간다 합니다.
힘 있고 새로운 역사(歷史)가 광명(光明)한 그 아침에 쓰여진다 합니다!
저것 보아요. 어두운 밤을 지키고 있던 파수병정(把守兵丁)인 별들은 이제 쓸데 없고요.
그리고 당신이 작은 낙천가(樂天家)라고 부르는 고 얄미운 참새들이
어느새 해를 환영(歡迎)하겠다면서 어린 이슬들이 밤새도록 닦아 놓은
빨래줄 위에 아주 저렇게 줄지어 앉았겠죠.
평생 지껄여야 무슨 이야기가 저렇게도 많은지.
그러면 글쎄, 참새들은 지금
이른 아침 새벽 정찰(偵察) 나온 구름의 이야기를 하고있읍니다그려!
저걸 좀 보아요. 우렁차고 늠름한 기상을 가진 흰 구름들이 동방(東方)에서 일어나
오늘은 벌써 서부원정(西部遠征)의 새벽 정찰(偵察)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나간 여름에 저 구름들이 황하연안(黃河沿岸)을 공격하였을 때
너무도 지나진 승리(勝利)를 하였다고 합니다그려.
그러니 어찌, 감상시인(感想詩人)인 까마귀들만이 그냥 있을 수 있어야지요.
아마 황혼(黃昏)에 읊을 시재(詩材)를 얻기 위(爲)하여 지금 저렇게 산(山)을 넘어
거칠고 쓸쓸한 광야(曠野)로 나가는가 봐요.
동(東)편에선 언제나 가장 높은 체하는 험상궂은 산(山)봉우리가
아직도 해를 가리우며 내어 놓지를 아니하는데
그 얌전성 없는 참새들은 못 기다리겠다고 반뜻한 줄을 흩으리고
그만 다들 날아가 버리겠지요.
그러난 그 차고 넘치는 햇발들이 사방(四方)으로 빠져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어제밤 당신을 보고 말하지 않았읍니까?
밤을 뚫고 수천(數千) 수백리(數百里)를 걸어 나가면 광명(光明)한 아침의 선구자(先驅者)인 어린 새벽이
희미한 등불을 들고 또한 우리를 맞으려 온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어린 것들
김현승
너희들의 이름으로
너희들은 허물할 것이 없다.
너희들의 아름다움은
그 측은한 머리와 두려워하는 눈동자,
연약한 팔목과 의지함에 있다.
너희들의 귀여움은,
대숲에서 자고 나오는 아침 참새들처럼
재재거리는 그 소리와,
이유 없는 기쁨과 너희들이 깎는 연필심과 같이
까아만 너희들의 눈동자에 있다.
너희들이 슬프게도 아아 슬프게도
달리는 흉기 그 앞바퀴에 깔려
너희의 고사리 같은 손을 아스팔트에 던지고
쓰러졌을 때,
나는 너희들의 이름이 애끊는 이름이
저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나는 눈물이 너무 많아서
나는 아무래도 천국으로 갈 수는 없겠다!
너희들은 햇빛을 햇빛이라 부르고
서슴지 않고 배고픔을 배고픔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너희들의 깨끗한 한국어는
가장 강한 노래의 샘물이 된다.
빈틈없는 어른들의 교훈보다
어설픈 너희들의 이상한 꿈과 말의 지껄임,
그 처음의 생명 속에서
너희들은 종교보다 한걸음 앞서서
언제나 이 세상에 태어난다.
어제
김현승
어제,
그 시간(時間)을
비에 젖은 뽀오얀 창(窓)밖에 넣어 보자.
어제,
그 시간(時間) 옆에
멀리 검은 나무를 심어 두자,
오랜 그늘을 지키는…
어제,
그 시간(時間)을
정한 눈물로 닦아 두자,
내게는 이제 다른 보석(寶石)은
빛나지 않으려니…
연(鉛)
김현승
나는 내가 항상 무겁다.
나같이 무거운 무게도 내게는 없을 것이다.
나는 내가 무거워
나를 등에 지고 다닌다,
나는 나의 짐이다.
맑고 고요한 내 눈물을
밤이슬처럼 맺혀보아도,
눈물은 나를 떼어낸 조그만 납덩이가 되고 만다.
가장 맑고 아름다운
나의 시를 써보지만,
울리지 않는다 - 금과 은과 같이는,
나를 만지는 네 손도 무거울 것이다,
나를 때리는 네 주먹도
시원치는 않을 것이다.
나의 음성
나의 눈빛
내 기침소리마저도
나를 무겁게 한다.
내 속에는 아마도
납덩이가 들어 있나부다,
나는 납을 삼켰나부다,
나는 내 영혼인 줄 알고 그만 납을 삼켜 버렸나부다.
영혼의 고요한 밤
김현승
고요한 가을 밤에는
들리는 소리도 많다.
내 영혼의 씀바귀
마른 잎에 바람이 스치는……
고요한 가을 밤에는
들리는 소리도 많다.
내 육신의 높은 언덕 그 위에 서서
얄리얄리 보리 피리 불어주던……
고요한 가을 밤에는
들리는 소리도 많다.
누구의 감는 갈피엔가
뉘우치며 되새기며 단풍잎 접어 넣는……
고요한 가을 밤에는
들리는 소리도 많다.
낙엽보다 쓸쓸한 쓰르라미 울음소리
내 메마른 영혼의 가지에 붙어 우는……
고요한 가을 밤에는
들리는 소리도 많다.
책상 위에 고요히 턱을 고이면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읽어 버린 다 읽어 버린……
오월의 그늘
김현승
그늘,
밝음을 너는 이렇게도 말하는구나
나도 기쁠 때는 눈물에 젖는다.
그늘,
밝음에 너는 옷을 입혔구나
우리도 일일이 형상을 들어
때로는 진리를 이야기한다.
이 밝음, 이 빛은
채울 대로 가득히 채우고도 오히려
남음이 있구나
그늘―너에게서……
내 아버지의 집
풍성한 대지의 원탁마다
그늘,
오월의 새 술들 가득 부어라!
이팝나무 - 네 이름 아래
나의 고단한 꿈을 한때나마 쉬어 가리니……
오월의 환희(五月의 歡喜)
김현승
그늘,
밝음을 너는 이렇게도 말하는구나,
나도 기쁠 때는 눈물에 젖는다.
그늘,
밝음에 너는 옷을 입혔구나,
우리도 일일이 형상을 들어
때로는 진리(眞理)를 이야기한다.
이 밝음, 이 빛은,
채울대로 가득히 채우고도 오히려 남음이 있구나,
그늘-- 너에게서......
내 아버지의 집
풍성한 대지(大地)의 원탁(圓卓)마다,
그늘.
오월(五月)의 새 술들 가득 부어라!
이깔나무-- 네 이름 아래
나의 고단한 꿈을 한때나마 쉬어 가리니...... .
옹호자의 노래
김현승
말할 수 없는 모든 언어가
노래할 수 있는 모든 선택된 사조(詞藻)가
소통할 수 있는 모든 침묵들이
고갈하는 날,
나는 노래하련다!
모든 우리의 무형한 것들이 허물어지는 날
모든 그윽한 꽃향기들이 해체되는 날
모든 신앙들이 입증(立證)의 칼날 위에 서는 날,
나는 옹호자들을 노래하련다!
티끌과 상식으로 충만한 거리여,
수량(數量)의 허다한 신뢰자들이여,
모든 사람들이 돌아오는 길을
모든 사람들이 결론에 이르는 길을
바꾸어 나는 새삼 떠나련다!
아로새긴 상아와 유한의 층계로는 미치지 못할
구름의 사다리로, 구름의 사다리로,
보다 광활한 영역을 나는 가련다!
싸늘한 증류수의 시대여,
나는 나의 우울한 혈액 순환을 노래하지 아니치 못하련다.
날마다 날마다 아름다운 항거의 고요한 흐름 속에서
모든 약동하는 것들의 선율처럼
모든 전진하는 것들의 수레바퀴처럼
나와 같이 노래할 옹호자들이여,
나의 동지여, 오오, 나의 진실한 친구여!
완전(完全) 겨울
김현승
섰다.
입을 다물었다.
사라졌다.
빈 하늘만이
나의 천국(天國)으로 거기 남아 있다.
사랑과 무더운 가슴으로 쓰던
내 시(詩)의 마지막 가지 끝에...... .
우리는 일어섰다
김현승
우리의 조국은 둘이며 하나이다.
자유와 그에의 애수!
우리는 일어섰다. 참혹한 사월이 지나간 맑은 새아침
모든 시내 모든 강물 위에 흘러가는 그 소리와
모든 골짜기 모든 산비탈에 울려 가는 그 노래와
동서로 가는 남북으로 뻗은 모든 길 위에는 통하는
이 우리들의 제목을 위하여.......
우리는 일어섰다. 사월이 지나간 유월에도,
북소리와 같이 멀리서도 들리는
우리네 절은 심장의 고동,
그리고 제목은 오직 하나 --- 미소하는 눈짓과
우리네 하늘에 자유로이 날으는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우짖음과
먼 산등에까지 우리는 그리운 공명의 메아리를 위하여......
우리는 일어섰다!
쓰라린 눈물과 어제 위에 남긴 동지들의 발자국 ---
자유에의 거치른 이정표와,
해마다 피어나는 핏빛 진달래 --- 그네들의 부활과
그네를 지키는 천국의 영원한 그네의 조국을 위하여.
우리들의 젊은 지혜의 눈동자는
총부리와 같이 겨누고 있다!
어둠을 깨뜨리는 새벽 --- 1960년의 저편을 향하여
우수(憂愁)
김현승
가을이 긴 나라
그 나라의 저녁참은
까닭없이 바람 속에 설레이고,
가을이 긴 나라
그 나라의 여인들은
수심 깊은 눈망울에 저녁 해를 받고 있다.
가을이 긴 나라
그 나라의 정든 마음
길고 긴 한을 남겨 잠잠히 이어 보내고
가을이 긴 나라,
그 나라의 늦은 새들
해지는 먼 땅끝까지 쭉지로 울고 간다.
육체(肉體)
김현승
나의 육체(肉體)와 찔레나무의 그늘을 만드신
당신은,
보이지 않으나 나에게는 아름다운 시인(詩人).
내 눈물의 밤이슬과
내 이웃들의 머금은 미소(微笑)와
저 슬픈 미망인(未亡人)들의 눈동자를 만드신
당신은,
우리보다 먼저 오시어 시(詩)로서 지상(地上)을 윤택(潤澤)케 하신 이.
당신의 그 사랑과
당신의 그 슬픔과
그 보이지 않는 당신의 아름다운 얼굴에
나도 이제는 어렴풋이나마 육체(肉體)를 입혀
어루만지듯 나의 노래를 부릅니다.
이상(理想)
김현승
오르는 산은
오르지 않는 산보다 더 높다.
하늘의 순결한 눈으로 덮이고
구름으로 머얼리 낭만(浪漫)을 두르면서......
천사(天使)들은 어리석은 우리를 위하여
언제나 그 곳에 살아 날고,
낮은 흙에서는 더욱 아름답게 드높은
태양(太陽)이 뜨는 곳----그 위에 머리를 둔
빛나는 산 위의 산.
그 높이로 우리의 명예(名譽)를 재고
그 아득함으로 우리에게 쉼을 주지 않으면서,
푸른 하늘에 깊이 심은
영원의 뿌리----그 뿌리에서
생명의 강줄기가 뻗고
슬픔과 기쁨의 작은 시내들이 흘러간다.
그 시내와 시내의 가지 사이에
마을들이 모여
사랑을 나누고 뜻을 같이 하되,
티끌과 안개 속에 빠지지 않고
구름에 빠진 시인(詩人)들을 부르지 않는다.
한 손발의 피는
심장으로 모이고
또 심장에서 퍼져 나가듯,
한 시대의 높은 산마루도
하늘에서 땅으로 물구나무서지 않는다!
오르지 않는 산은
오르는 산보다도 가파롭지 않은 것,
그러나 물 없는 저 산에
노를 저어 오르는 이만이,
더 높은 눈으로 더 높은 산을
산 위에 바라볼 것이다.
이 어둠이 내게 와서
김현승
이 어둠이 내게 와서
요나의 고기 속에
나를 가둔다.
새 아침 낯선 눈부신 땅에
나를 배앝으려고.
이 어둠이 내게 와서
나의 눈을 가리운다.
지금껏 보이지 않던 곳을
더 멀리 보게 하려고.
들리지 않던 소리를
더 멀리 듣게 하려고.
이 어둠이 내게 와서
더 깊고 부드러운 품안으로
나를 안아 준다.
이 품속에서 나의 말은
더 달콤한 숨소리로 변하고
나의 사랑은 더 두근거리는
허파가 된다.
이 어둠이 내게 와서
밝음으론 밝음으론 볼 수 없던
나의 눈을 비로소 뜨게 한다!
마치 까아만 비로도 방석 안에서
차갑게 반짝이는 이국(異國)의 보석(寶石)처럼,
마치 고요한 바닷 진흙 속에서
아름답게 빛나는 진주(眞珠)처럼 .......
이별(離別)에게
김현승
지우심으로
지우심으로
그 얼굴 아로새겨 놓으실 줄이야......
흩으심으로
꽃잎처럼 우리 흩으심으로
열매 맺게 하실 줄이야......
비우심으로
비우심으로
비인 도가니 나의 마음을 울리실 줄이야......
사라져
오오,
영원(永遠)을 세우실 줄이야......
어둠 속에
어둠 속에
보석(寶石)들의 광채(光彩)를 길이 담아 두시는
밤과 같은 당신은, 오오, 누구이오니까!
이별의 곡(曲)
김현승
등불을 남기고 돌아가는 것은
오래 전부터 이 거리의 미풍이다.
안개는 자욱이 잠든 밤 위에 쇠를 잠그다.
멀리 바라보면 이층집이 서고
자욱한 포도로 넘어오는 만도의 초상들-
호! 밤은 이리도 슬픈 것인가?
빙산은 화려한 심장을 깨뜨리다.
나의 슬픔을 층층계의 중간에서
쓸쓸한 건강을 발견한 것뿐 아니란다.
눈과 제복의 고향에 우는 나아중 기적
안개는 버터빛으로 흐르고
등불은 차거운 심야를 동그랗게 파다.
떨어진 샤쓰 속에 지혜를 얻으련다……
잘 있어라. 젊은 제복의 코사크
이 밤은 장미도 만찬도 없이 그대를 떠나다!
아아, 마음은 멀리 사막의 지도를 펴 들고
매아미 허물같이 외로워 외로워……
흐를 참이다!
그대는 젊고, 저는 어리고
희망은 저보다도 어리기는 하지만……
인간(人間)은 고독(孤獨)하다
김현승
나로 하여금
세상의 모든 책을 덮게 한
최후(最後)의 지혜(智慧)여,
인간(人間)은 고독하다!
우리들의 꿈과 사랑과
모든 광채(光彩) 있는 것들의 열량(熱量)을 흡수(吸收)하여 버리는
최후의 언어(言語)여,
인간(人間)은 고독하다!
슬픔을 지나,
공포(恐怖)를 넘어,
내 마음의 출렁이는 파도(波濤) 깊이 가라앉은
아지 못할 깨어진 중량(重量)의 침묵(沈默)이여,
이상(理想)이란 무엇이며
실존(實存)이란 무엇인가,
그것들의 현대화(現代化)란 또 무엇인가,
인간(人間)은 고독하다!
로우마가 승리(勝利)하던 날-- 로우마는 끝나고 말았다.
너의 이름은
가장 겸손한 최후(最後)의 수습자(收拾者)--
무화과(無花果)나무의 그늘로 즐기던 상하(常夏)의 계곡(谿谷)과
그 경쾌(輕快)한 회랑도로(廻廊道路)에서
너의 이름은 지금 그들의 전쟁(戰爭)이란
흉작(凶作)의 몇몇 이삭들을 줍고 있을 뿐,
가장 아름답던 꿈들의
마지막 책장을 넘기며
우리는 깨어진 보석(寶石)들의 남은 광채(光彩)를 쓸고 있는
너의 검은 그림자를 바라본다.
그리하여 모든 편력(遍歷)에서 돌아오는 날 우리에게 남은 진리(眞理)는
저녁 일곱 시의 저무는 육체(肉體)와
원죄(原罪)를 끌고 가는 영혼의 우마차(牛馬車),
인간(人間)은 고독하다!
신앙(信仰)을 가리켜 그러나 고독에 나리는 축복(祝福)이라면
깊은 신앙(信仰)은 우리를 더욱 고독으로 이끌 뿐,
내 사랑의 뜨거운 피로도 너의 전체(全體)를 녹일 수는 없구나!
추상(抽象)으로도 육체(肉體)로도
용해(溶解)되지 않는,
오오, 너의 이름은 모든 애정(愛情)과 신앙(信仰)을 떠나
내 마음의 왕국(王國)에서 자유(自由)와 독립(獨立)을 열렬히 호소(呼訴)하는구나!
그러면 우리를 고독케 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잃어버린 지평선(地平線)-- 저 풍요(豊饒)하던 창고(倉庫)들인가,
헬렌의 슬픈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 호우머의 시(詩)들인가,
아니면 사랑이 가고 지혜(智慧)가 오기 전 무성턴 저 무화과(無花果)나무의 그늘들인가.
비록 그것들에 새로운 시간(時間)의 수액(樹液)을 흐르게 하여,
현재(現在)와 미래(未來)의 꿈많은 여정(旅程)을 주어,
시(詩)를 산문(散文)으로 종합(綜合)을 분석(分析)으로, 결핍(缺乏)을 생산(生産)으로
성장(成長)케 한들 그것은 또한 무엇인가?
나로 하여금
세상의 모든 책을 덮게 한 고독이여!
비록 우리에게 가브리엘의 성좌(星座)와 사탄의 모든 저항(抵抗)을 준다 한들
만들어진 것들은 고독할 뿐이다!
인간(人間)은 만들어졌다!
무엇하나 이 우리의 의지(意志) 아닌,
이 간곡한 자세(姿勢)-- 이 절망(絶望)과 이 구원(救援)의 두 팔을
어느 곳을 우러러 오늘은 벌려야 할 것인가!
인간의 의미(人間의 意味)
김현승
아는 것은 신(神)
알려는 것은
인간(人間)이다.
마침내 알면
신(神)의 탄생 속에서
나는 죽어 버린다.
사랑은 신(神),
사랑하는 것은
인간(人間)이다.
인간(人間)은 명사(名詞)보다
동사(動詞)를 사랑한다.
나의 움직임이 끝날 때
나는 깊은 사림(辭林) 속에서
그러기에
핏기없는 명사(名詞)가 되고 만다.
아는 것은 신(神)
알려는 것은 인간(人間)이다.
알려는 슬픔과
알아 가는 기쁨 사이에서
나는 끝없는 길을 간다.
나의 길이 끝나는 곳은
나를 끝내고 만다.
인내(忍耐)
김현승
원수는
그 굳은 돌에
내 칼을 갈게 하지만,
인내는
이 어둠의 이슬 앞에
내 칼을 부질없이 녹슬게 하지 않는다.
나는 내 칼날을 칼집에 꽂아둔다.
이 어둠의 연약한 이슬이
오는 햇빛에 눈부시어 마를 때까지.....
인생 송가(人生 頌歌)
김현승
힘들여 산다는 것보다,
우리가 죽은 뒤에
얼마나 아름다운 이른 저녁을 지상에 가져오겠느냐!
어느 미망인(未亡人)의 방명록(芳名錄)에 오를 때,
금요일(金曜日)의 이듬날 어느 회관(會館)에서
무명(無名)의 시인(詩人)들이 그의 추모시(追悼詩)를 읽을 때......
초조한 땅에서 사는 것보다,
우리가 죽은 뒤에
얼마나 아름다운 들가의 꽃잎들이,
꿈이 되어 우리 섰던 자리에 피어나겠느냐!
후조(候鳥)는 찾아와 철을 따라 무덤가에 앉고......
우리가 사는 동안
그렇게도 소중턴 그처럼 보람 있던
한숨도 절망(絶望)도 관노(慣怒)와 웃음 또한 사랑하는 애인(愛人)들도
누굴 상속자(相續者)로 물음조차 없이
구름 지워 가 없는 하늘에 흩날려 버리는 것은,
모든 애착(愛着)과 긍정(肯定)보다도
얼마나 풍성한 무한(貿限)에의 계단(階段)이냐!
우리가 죽은 뒤에도
인생(人生)은 언제나 즐겁고 또 슬프고
길이 있으랴!
인생을 말하라면
김현승
인생을 말하라면
모래 위에 손가락으로 부귀를 쓰는
사람도 있지만,
인생을 말하라면 팔을 들어
한 조각 저 구름 뜬 흰 구름을
가리키는 사람도 있지만,
인생을 말하라면 눈을 감고
장미아름다운 가시 끝에
피나게 입 맞추는 사람도 있지만
인생을 말하라면 입을 다물고
꽃밭에 꽃송이처럼 웃고만 있는
사람도 있기는 있지만
인생을 말하라면 고개를 수그리고
뺨에 고인 주먹으로 온 세상 시름을
호올로 다스리는 사람도 있지만,
인생을 말하라면 나와 내입은
두 손을 내어보인다.
하루의 땀을 쥔 나의 손을
이처럼 뜨겁게 펴서 보인다.
이렇게 거칠고 이렇게 씻겼지만
아직도 질기고 아직도 깨끗한 이 손을
물어마지 않는 너에게 펴서 보인다.
일년의 문을 열며
김현승
금을 캐는 광부가 부자는 아니고
전복을 따는 해녀가 반드시
전복을 배불리 먹지도 않는다.
우리의 모든 살림도 이렇듯 흐를 데로
흐르고 돌아갈 곳으로 돌아가야 했다.
국회의사당 앞 오월의 플라타너스들이
시청 지붕 위 푸른 비둘기떼가
날아와 앉던 오월의 플라타너스 잎들이
십일월의 짙은 서리에 무겁게 떨어질 때,
우리의 마음들도 낡은 경험 위에
새로운 지혜를 쌓아 올려야 했다.
그 꼭대기에는 민권의 깃발이 향수처럼
휘날리는……
화려한 언어는 본래
침묵으로부터 고귀하게 탄생하듯,
우리는 다시 고요한 새벽과 같은
고요한 일년으로 돌아가서
질주하는 역사의 대낮을 맞아야 했다.
어지럽고 가난한 나라의
아직은 회복된 건강의 연약한 일년-
그러나 소풍길에 나선 아이들이
룩샥을 메고 북악산(北岳山)의 새벽 구름을
바라보듯
낙동강 공업지구의 가동하는 기계 소리를
주민들이 귀담아 듣듯
광야를 향하여 서서히 움직이는 기관차에
불붙는 석탄을 집어 넣듯,
우리는 일년의 문(門)을 열고,
핏대와 희망과 엇갈린 의견으로
윤기 있게 때묻은 일년의 문(門)을 열고
우리의 길들을 찾아 햇발처럼 쏟아져 나간다.
차도와 보도를 가려 디디며
질서와 자유의 화려한 길을……
일요일의 미학
김현승
노동은 휴식을 위하여
싸움은 자유를 위하여 있었듯이,
그렇게 일요일은 우리에게 온다.
아침빵은 따뜻한 국을 위하여
구워졌듯이.
어머니는 아들을 위하여
남편은 아내를 위하여 즐겁듯이,
일요일은 그렇게 우리들의 집에 온다.
오월은 푸른 수풀 속에
빨간 들장미를 떨어뜨리고 갔듯이.
나는 넥타이를 조금 왼쪽으로 비스듬히 매면서,
나는 음부(音符)에다 불협화음을 간혹 섞으면서,
나는 오늘 아침 상사(上司)에게도 미안치 않은
늦잠을 조을면서,
나는 사는 것에 조금씩 너그러워진다.
나는 바쁜 일손을 멈추고
이레만에 편히 쉬던 신의 뜻을 이제야 알 것 같다.
나의 남이던 내가,
채찍을 들고 명령하고
날카로운 호루라기를 불고
까다로운 일직선을 긋는 남이던 내가,
오늘은 아침부터 내가 되어 나를 갖는다.
내가 남이 될 수도 있고
또 내가 될 수도 있는
일요일을 가진 내 나라-이 나라에
태어났음을 나는 언제나 아름다워한다.
자유의 양식(自由의 糧食)
김현승
감옥의 벽을 깨뜨리고
빵을 얻은 우리가
빵 없는 감옥으로 걸어 들어갈 때,
손목의 모진 사슬을 끊은 우리가
고리 없는 사슬에 두 손을 내어밀 때,
우리는 자유(自由)를 얻는다.
우리의 절규(絶叫)가
고요한 마음 진흙 깊이
서서히 가라앉을 때,
우리의 기쁨이
기쁨의 불꽃에 재가 될 때,
우리는 자유(自由)를 얻는다.
사랑에게서 멀리 떨어져
친구로부터 버림을 받으며,
우리는 비로소 자유(自由)를 즐긴다.
비로소 자유(自由)를 사랑하게 된다.
눈을 감고
저 깃발들의 물결을 바라보며
저 퍼지는 종소리들에 귀를 막으며
가장 외롭게 자유(自由)를 얻는다
우리는 자유(自由)의 벙어리가 된다.
가장 높은 수치(羞恥) 위에서
가장 높은 형틀 위에서
가장 높은 별 위에서
자유(自由)는 자유(自由)를 저버린다!
자유(自由)는 자유(自由)에게 버림을 받는다!
얻은 꿈을
다시 깨뜨리며,
얻은 자유(自由)를
차마 반환(反還)하며,
자유(自由)에서
자유(自由)의 우리로 돌아와,
역사(歷史)에서
역사(歷史)의 손으로 돌아와,
그 손으로 굶주림의 기를 올린다!
배반(背叛)의 종을 울린다!
자유(自由)의 따뜻한 양식을 얻기 위하여...... .
싸우기 위하여...... .
자화상(自畵像)
김현승
내 목이 가늘어 회의(懷疑)에 기울기 좋고,
혈액(血液)은 철분(鐵分)이 셋에 눈물이 일곱이기
포효(砲哮)보담 술을 마시는 나이팅게일......
마흔이 넘은 그보다도 뺨이 쪼들어 연애(戀愛)엔 아주 실망(失望)이고,
눈이 커서 눈이 서러워
모질고 사특하진 않으나,
신앙(信仰)과 이웃들에게 자못 길들기 어려운 나--
사랑이고 원수고 몰아쳐 허허 웃어 버리는
비만(肥滿)한 모가지일 수 없는 나--
내가 죽는 날
단테의 연옥(煉獄)에선 어느 비문(扉門)이 열리려나?
재
김현승
나는 나의 재로
나의 모든 허물을 덮는다.
나의 모든 기쁨과 슬픔을
나는 한 줌의 재로 덮고 간다.
그러나 까마귀여,
녹슨 칼의 소리로 울어 다오.
바람에 날리는 나의 재를
울어다오.
나의 허물마저 덮어 주지 못하는
내 한 줌의 재를
까마귀여.
모든 빛깔에 지친
너의 검은 빛 - 통일의 빛으로
울어다오.
전환
김현승
이제는
밝음의 이쪽보다
나는 어둠의 저쪽에다
귀를 기울인다.
여기서는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
어둠의 저쪽에다 내 귀를 모두어 세운다.
이제는 눈을 감고
어렴풋이나마 들려 오는 저 소리에
리듬을 맞춰 시도 쓴다.
이제는 떨어지는 꽃잎보다
고요히 묻히는 씨를
내 오랜 손바닥으로 받는다.
될 수만 있으면
씨 속에 묻힌 까마득한 약속까지도……
그리하여 아득한 시간에까지도 이제는
내 웃음을 보낸다,
순간들 사이에나 떨어뜨리던 내 웃음을
이제는 어둠의 저편
보이지 않는 시간에까지
모닥불 연기처럼 살리며 살리며……
절대고독
김현승
나는 이제야 내가 생각했던
영원의 먼 끝을 만지게 되었다.
그 끝에서 나는 하품을 하고
비로소 나의 오랜 잠을 깬다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영원의 별들은 흩어져 빛을 잃지만,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나는 무엇인가 내게로 더 가까이 다가오는
따뜻한 체온을 느낀다
이 체온으로 내게서 끝나는 영원의 먼 끝을
나는 혼자서 내 가슴에 품어 준다.
나는 내 눈으로 이제는 그것들을 바라본다.
그 끝에서 나의 언어들을 바람에 날려 보내며,
꿈으로 고이 안을 받친 내 언어의 날개들을
이제는 티끌처럼 날려 보낸다.
나는 내게서 끝나는
무한의 눈물겨운 끝을
내 주름 잡힌 손으로 어루만지며 어루만지며
더 나아갈 수 없는 그 끝에서
드디어 입을 다문다 - 나의 시는.
절대 신앙
김현승
당신의 불꽃 속으로
나의 눈송이가
뛰어듭니다.
당신의 불꽃은
나의 눈송이를
자취도 없이 품어 줍니다.
조국(祖國)의 흙 한 줌
김현승
조국(祖國)의 흙 한 줌
멀리 계신 어머님께 드리지 말고,
네가 앉아 생각하는
책상 서랍에 넣어 둘지니.
조국(祖國)의 흙 한 줌
멀리 있는 벗에게 보내지 말고,
내가 심는 꽃나무
그 뿌리 밑에 묻어 두리니.
조국(祖國)의 흙 한 줌
온 세계의 황금(黃金)보다
부드럽고 향기롭게
그대의 살을 기르리니.
조국(祖國)의 흙 한 줌
가슴에 품던 그 따뜻함
코에 스미던 그 짙은 내음을
오늘의 우리는 잃어 가고 있나니.
지각(知覺)
김현승
내게 행복이 온다면
나는 그에게 감사하고,
내게 불행이 와도
나는 또 그에게 감사한다.
한 번은 밖에서 오고
한 번은 안에서 오는 행복이다
우리의 행복의 문은
밖에서도 열리지만
안에서도 열리게 되어 있다.
내가 행복할 때
나는 오늘의 햇빛을 따스히 사랑하고
내가 불행할 때
나는 내일의 별들을 사랑한다.
이와 같이 내 생명의 숨결은
밖에서도 들여쉬고
안에서도 내어쉬게 되어있다.
이와 같이 내 생명의 바다는
밀물이 되기도 하고
썰물이 되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끊임없이 출렁거린다!
지상(地上)의 시
김현승
보다 아름다운 눈을 위하여
보다 아름다운 눈물을 위하여
나의 마음은 지금, 상실의 마지막 잔이라면,
시는 거기 반쯤 담긴
가을의 향기와 같은 술……
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
사라지는 것만이, 남을 만한 진리임을 위하여
나의 마음은 지금 저무는 일곱 시라면,
시는 그곳에 멀리 비추이는
입 다문 창들……
나의 마음-마음마다 로맨스 그레이로 두른 먼 들일 때,
당신의 영혼을 호올로 북방으로 달고 가는
시의 검은 기적 -
천사들에 가벼운 나래를 주신 그 은혜로
내게는 자욱이 퍼지는 언어의 무게를 주시어,
때때로 나의 슬픔을 위로하여 주시는
오오, 지상의 신이여, 지상의 시여!
지평선
김현승
이 눈이 끝나는 곳에서
그 마음은 구름이 피고
이 말이 끝나는 곳에서
그 뜻은 더욱 멀리 감돈다.
한 세상 만나던 괴롬과 슬픔도
그 끝에선 하나로 그리움이 되고
여기선 우람한 기적도
거기선 기러기 소리로 날아간다.
지나가 버린 모든 시간,
잊히지 않는 모든 기억,
나는 그것들을 머언 지평선에 세워 두고
바라본다.
노을에 물든 그 모습을.
참나무가 탈 때
김현승
참나무가 탈 때,
그 불꽃 깨끗하게 튄다.
보석들이 깨어지는 소리를 내며
그 단단한 불꽃들이 튄다.
참나무가 탈 때,
그 남은 재 깨끗하게 고인다.
참새들의 작은 깃털인 양 따스하게 남는 재,
부드럽고 빤질하게 고인다.
까아만 유리 너머
소리 없이 눈송이가 나리는 밤.
호올로 참나무를 태우며
물끄러미 한 사람의 그림자를 바라본다.
짧은 목숨의 한 세상,
그 헐벗은 불꽃 속에
언제나 단단하고 깨끗하게 타기를 좋아하던,
지금은 마음의 파여 풀레스 안에
아직도 깨끗하게 따스하게 고여 있는,
어리석은 한 사람의 남은 재를 생각한다.
창
김현승
창을 사랑하는 것은,
태양을 사랑한다는 말보다
눈부시지 않아 좋다.
창을 잃으면
창공으로 나아가는 해협을 잃고,
명랑은 우리에게
오늘의 뉴우스다.
창을 닦는 시간은
또 노래도 부를 수 있는 시간
별들은 12월의 머나먼 타국이라고......
창을 맑고 깨끗이 지킴으로
눈들을 착하게 뜨는 버릇을 기르고,
맑은 눈은 우리들
내일을 기다리는
빛나는 마음이게......
책(冊)
김현승
가장 고요할 때
가장 외로울 때
내 영혼이 누군가의 사랑을 기다리고 있을 때,
나는 책을 연다.
밤 하늘에서 별을 찾듯
책을 연다.
寶石箱子의 뚜껑을 열듯
조심스러이 책을 편다.
가장 기쁠 때
내 영혼이 누군가의 선물을 기다리고 있을 때
나는 책을 연다.
나와 같이 그 기쁨을 노래할
영혼의 친구들을,
나의 행복을 미리 노래하고 간
나의 친구들을 거기서 만난다.
아-- 가장 아름다운 영혼의 住宅들
아-- 가장 높은 정신의 城들
그리고 가장 거룩한 영혼의 무덤들......
그들의 一生은 거기에 묻혀 있다.
나의 슬픔과 나의 괴롬과
나의 희망은 노래하여 주는
내 친구들의 썩지 않는 영혼들
나는 거기서 만난다-- 그리고 힘주어 손을 잡는다.
책과의 여행
김현승
가장 고요할 때
가장 외로울 때
내 영혼이
누군가의 사랑을 기다리고 있을 때
나는 책을 연다
밤하늘에서 별을 찾듯 책을 연다
보석상자의 뚜껑을 열듯
조심스러이 연다
가장 기쁠 때
내 영혼이
누군가의 선물을 기다리고 있을 때
나는 책을 연다
나와 같이 그 기쁨을 노래할
영혼의 친구들을
나의 행복을 미리 노래하고 간
나의 친구들을 거기서 만난다
아, 가장 아름다운 영혼의 주택들
아, 가장 높은 정신의 성(城)들
그리고 가장 거룩한 영혼의 무덤들
그들의 일생은 거기에 묻혀 있다
나의 슬픔과 나의 괴롬과
나의 희망을 노래하여 주는
내 친구들의 썩지 않는 영혼을
나는 거기서 만난다
그리고 힘주어 손을 잡는다
치아의 시(齒牙의 詩)
김현승
네 미끄러운 혀보다도
네 부드러운 입술보다도
네 이빨로 말하는
너의 詩가 나를 깨문다.
질긴 고기를 가래어 찢는
네 모진 이빨로 말하는
너의 詩가 나를 깨문다.
네 영혼을
칼 위에 세우고,
머뭇거리는 네 영혼을 몰아
칼날 위에 세우고,
너를 동여 감은 사슬을 성한 밧줄을
온종일 물어 뜯으며
물어 뜯으며,
네 아픈 이빨로 말하는
너의 詩가 나를 깨문다.
文法도 질서도 音樂도
으깨져 사라져 버린,
네 마지막 숨소리와도 같이
토막토막 끊어지는,
네 소리를
네 소리의 피를
나는 듣는다,
내 영혼의 비록 아둔한 귀일지라도.
크리스마스와 우리집
김현승
동청(冬靑) 가지에
까마귀 열매가 달리는
빈 초겨울 저녁이 오면
호롱불을 켜는 우리 집.
들에 계시던 거친 손의 아버지,
그림자와 함께 돌아오시는
마을 밖의 우리 집.
은(銀) 접시와
이층(二層)으로 오르는 계단은 없어도,
웃는 우리 집.
모여 웃는 우리 집.
소와 말과
그처럼 착하고 둔한 이웃들과
함께 사는 우리 집.
우리 집과 같은
베들레헴 어느 곳에서,
우리 집과 같이 가난한
마음과 마음의 따스한 꼴 위에서,
예수님은 나셨다.
예수님은 나신다.
파도(波濤)
김현승
아, 여기 누가
술 위에 술을 부었나.
이빨로 깨무는
흰 거품 부글부글 넘치는
춤추는 땅--바다의 글라스여.
아, 여기 누가
가슴들을 뿌렸나.
언어(言語)는 선박(船舶)처럼 출렁이면서
생각에 꿈틀거리는 배암의 잔등으로부터
영원히 잠들 수 없는,
아, 여기 누가 가슴을 뿌렸나.
아, 여기 누가
성(性)보다 깨끗한 짐승들을 몰고 오나.
저무는 도시(都市)와
병든 땅엔
머언 수평선(水平線)을 그어 두고,
오오오오 기쁨에 사나운 짐승들을
누가 이리로 몰고 오나.
아, 여기 누가
죽음 위에 우리의 꽃들을 피게 하나,
얼음과 불꽃 사이,
영원과 깜짝할 사이
죽음의 깊은 이랑과 이랑을 따라
물에 젖은 라일락의 향기--
저 파도(波濤)의 꽃떨기를 칠월(七月)의 한때
누가 피게 하나.
평범한 하루
김현승
파초는 파초일 뿐,
그 옆에 핀
칸나는 칸나일 뿐,
내가 넘기는 책장은 책이 되지 못한다.
의자는 의자일 뿐,
더운 바람은 바람일 뿐,
내가 누워 있는 집은 하루 종일
집안이 되지 못한다.
그늘은 또 그늘일 뿐,
매미 소리는 또 매미 소리일 뿐,
하루 종일 비취는 햇볕이
내게는 태양이 되지 못한다.
넝쿨 장미엔 넝쿨 장미가
담은 담일 뿐
차라리 벽이라도 되지 않는다.
나는 그만큼 이제는 행복하여져 버렸는가?
플라타너스
김현승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 모르나
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에 올 제,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프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이제 너의 뿌리 깊이
나의 영혼을 불어 넣고 가도 좋으련만,
플라타너스,
나는 너와 함께 신이 아니다!
수고로운 우리의 길이 다하는 어느 날,
플라타너스,
너를 맞아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이 있느냐?
난는 길이 너를 지켜 네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이다.
하운소묘(夏雲素描)
김현승
그날의 은방울이
하늘에서 울기 전
여섯시엔
산마루의 정말체조(丁抹體操)
삼십분엔 분홍빛 공길 찢어라
태양이 보석처럼 쏟아지게……
오전의 해협을 건너오는
너희들의 여름 옷이 이다지도 흰 것은
저 봉우리와 젊은 섬들이
이렇게도 푸른 탓.
정오의 사이렌이 채찍 끝처럼
어느 도심에서 휘어지면
일제히 서쪽으로 셔터를 내리는
가로수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소낙비의 급강하 훈련이 없는 오후엔
띄엄띄엄 만화를 그리거나
이발(理髮).
또
사라진 궁전을 짓기 위하여
푸른 들 끝에 화강암을 나르기도 하고,
고가선 너머
도시의 가장자리가 연기에 물드는
보랏빛 시간이 오면
먼 들 끝에 호올로 나아가
제주마(濟州馬)를 몰고 가는 목동이 되든지
그렇지도 않으면
먼 하늘 가에 아름다운 홍포(紅布)를 입은
꿈속의 성주(城主)라도 한 번 되어 봐야지……
행복의 얼굴
김현승
내게 행복이 온다면
나는 그에게 감사하고,
내게 불행이 와도
나는 또 그에게 감사한다.
한 번은 밖에서 오고
한 번은 안에서 오는 행복이다.
우리의 행복의 문은
밖에서도 열리지만
안에서도 열리게 되어 있다.
내가 행복할 때
나는 오늘의 햇빛을 따스히 사랑하고
내가 불행할 때
나는 내일의 별들을 사랑한다.
이와 같이 내 생명의 숨결은
밖에서도 들이쉬고
안에서도 내어쉬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내 생명의 바다는
밀물이 되기도 하고
썰물이 되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끊임없이 출렁거린다.
형광등
김현승
갑자기 밝아지면
스스로도 눈이 부신 듯,
깜빡깜빡 몇 번이고 망설이다가 켜지는……
더 밝으면서도
밝음과
겸양의
수줍은 이 불빛.
달빛을 떠난 지 오래이면서도
아주까리 호롱불보다도
더 달빛에 가까이 가려는
파르스럼한
정교한 손으로 만든 이 불빛.
번쩍번쩍 먼 데서 높은 데서
다만 비춰준다고 여기기보다는,
고요히 다정히 언어 속에 스며들며
가을 밤을 더 깊어 가게 하는……
기쁨 속에 슬픔이 스며들고
슬픔 속에 기쁨이 스며들어,
다만 참되고 아름다운 하나의 언어만이
되게 하는……
상하기 쉬운
영혼을 간직하기 위하여
팔리지 않는 책을 사랑하고,
그 책을 사랑하기 위하여
또 눈을 보호하여 주는,
이 부드러운 - 내 책상머리에서
나와 함께 이 밤을 지키는 불빛……
호소(呼訴)
김현승
사랑하지 않고서
나는 이 길을 더 나아갈 수 없나이다,
사랑하지 아니하고서는...... .
결핍(缺乏)된 우리의 소유(所有)는
새로운 가설(假說)들의 머나먼 항로(航路)가 아니외다,
길들은 엉키어 길을 가리우고 있나이다.
사랑의 기름 부음 없이
꺼져가는 내 생명(生命)의 쇠잔한 횃불을
더 멀리는 태워 나갈 수 없나이다,
사랑의 기름 부음 없이는...... .
배불리 먹고 마시고, 지금은 깊은 밤,
모든 지식(知識)의 향연(饗宴)들은 이따위에
가득히 버리워져 있나이다,
이제 우리를 풍성케 하는 길은
한 사람의 깊은 신앙(信仰) 사랑함으로 신(神)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외다.
사랑하지 아니하고 어찌하리이까,
허물어진 터전, 짓밟힌 거리마다,
싸늘한 철근(鐵筋)만이 남은 가설(假說)들을 부여잡고
오늘 멍든 우리들의 가슴을 부비어야 하리이까?
부러진 우리들의 죽지를 파닥거려야 하리이까?
하염없이 무너져 나간 문명(文明)의 자국들—진보(進步)의 이름으로
우거진 주검의 쟝글 속에서,
지난날 지(智)의 관(冠)을 꾸미던 모든 나라의 찬란한 보석(寶石)보다
더욱 빛나는 것은 오늘 사랑의 한끝인 당신의 눈물이외다!
사랑하지 않고 어찌하리이까,
위대(偉大)한 상실(喪失)을 통(通)하여--
숨지던 극동(極東)의 산맥(山脈)에서 디엔비안의 더운 시체(屍體) 위에서
저무는 날 구원(救援)을 기다리던 북해(北海)의 먼 항구(港口)에서
오오, 마침내 형제(兄弟)의 의(義)로 맺어진 저주(咀呪)받은 따위 우리들,
푸른 하늘에 사는 눈동자, 타는 입술이 그렇게도 닮은 우리들
우리들의 처음 고향은 사랑이었나이다!
영겁(永劫)에도 그러할 것이외다!
흙 한 줌 이슬 한 방울
김현승
온 세계는
황금으로 굳고 무쇠로 녹슨 땅,
봄비가 내려도 스며들지 않고
새소리도 날아왔다
씨앗을 뿌릴 곳 없어
날아가 버린다.
온 세계는
엉겅퀴로 마른 땅,
땀을 뿌려도 받지 않고
꽃봉오리도
머리를 들다
머리를 들다
타는 혀끝으로 잠기고 만다!
우리의 흙 한 줌
어디 가서 구할까,
누구의 가슴에서 파 낼까?
우리의 이슬 한 방울
어디 가서 구할까
누구의 눈빛
누구의 혀끝에서 구할까?
우리들의 꽃 한 송이
어디 가서 구할까
누구의 얼굴
누구의 입가에서 구할까?
희망
김현승
나의 희망,
어두운 땅 속에 묻히면 황금이 되어
불같은 손을 기다리고,
너의 희망,
깜깜한 하늘에 갇히면 별이 되어
먼 언덕 위에서 빛난다
나의 희망,
아득한 바다에 뜨면
수평선의 기적이 되어 먼 나라를 저어 가고,
너의 희망,
나에게 가까이 오면
나의 사랑으로 맞아 뜨거운 입술이 된다.
빵 없는 땅에서도 배고프지 않은,
물 없는 바다에서도
목마르지 않은 우리의 희망!
온 세상에 불이 꺼져 캄캄할 때에도,
내가 찾는 얼굴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
우리는 생각하는 갈대 끝으로
희망에서 불을 붙여 온다.
우리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을 때에도
우리의 무덤마저 빼앗을 때에도
우릴 빼앗을 수없는 우리의 희망!
우리에게 한번 주어버린 것을
오오, 우리의 신도 뉘우치고 있을
너와 나의 희망! 우리의 희망!
희망에 부쳐
김현승
희망은 가장 멀리 가는 내 마음의 뱃머리,
우리가 더 붙들 수도 없는 그곳에선
까뭇까뭇 꿈을 꾸는
한 점 생명의 씨앗으로
망막한 바다에 떨어진다.
희망은 가장 깊이 묻힌 내 마음의 순금,
분별의 오랜 금언들 깨어져 골짝에 잠들고
사자의 울음을 부르는 수풀들 우거지면
너의 빛은 불 같은 손을 기다리며
한 줄기 마르지 않는 샘물과도 같이
소리 없이 빈 들에 묻힌다.
희망은 가장 높이 뜨는 내 마음의 흰 구름,
우리가 너를 붙들러 산마루에 오르면
더욱 높은 곳으로 우리를 끄을며
너는 갖가지 꿈들에 형상을 입혀
우리의 눈을 즐거움에 어둡게 만든다.
희망은 가장 아름다운 내 마음의 떨기꽃
낙엽은 떨어져 뿌리에 돌아가고
그 뿌리들 다시 꽃의 무덤가에 잠들 때에도
너는 내 생명의 줄기 그 가장 가녀린 꽃에서
눈부시게 타오른다 타오른다.
희망이라는 것
김현승
희망.
희망은 분명 있다.
네가 내일의 닫힌 상자(箱子)를
굳이 열지만 않는다면…
희망.
희망은 분명히 빛난다.
네가 너무 가까이 가서
그 그윽한 거리(距離)의 노을을 벗기지만 않으면…
희망.
그것은 너의 보석(寶石)으로 넉넉히 만들 수도 있다.
네가 네 안에 너무 가까이 있어
너의 맑은 눈을 오히려 가리우지만 않으면…
희망.
희망은 스스로 네가 될 수도 있다.
다함없는 너의 사랑이
흙 속에 묻혀,
눈물 어린 눈으로 너의 꿈을
먼 나라의 별과 같이 우리가 바라볼 때…
희망.
그것은 너다.
너의 생명(生命)이 닿는 곳에 가없이 놓인
내일의 가교(架橋)를 끝없이 걸어가는,
별과 바람에도 그것은 꽃잎처럼 불리는
네 마음의 머나먼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