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도로 눈을 감고 가시오
박지원지음ㆍ김혈조 옮김
상상의 추락
중국에 같이 간 일행은 소일도 할 겸 술값을 벌 요량으로 투전판을 벌였다. 그들은 나더러 투전 솜씨가 서툴다 하여 판에서 따돌리고 가만히 앉았다가 술만 얻어먹으라고 한다. 속담에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라"는 격인데 속으로 안 끼워주는 것이 분통 터지고 못 배운 것이 한스러웠으나 하는 수 없었다. 앉아서 누가 따는지 구경이나 하다가 술잔은 내가 먼저 들 터이니 해롭잖은 일이다.
벽 틈으로 가끔 아낙네 말소리가 새어 들린다. 가냘프게 속삭이며 아양스럽게 하소연하는 소리가 마치 제비가 꾀꼬리 소리 같았다. 나는 물을 나위도 없이 필시 주인집 아가씨가 절세가인이리라 생각하고 짐짓 담뱃불을 붙이러 가는 척하고 부엌에 들어갔다. 나이가 한 오십이나 넘어 뵈는 여자가 문 앞 평상 위에 걸터앉았는데 상판이 아주 험상궂고 추하게 생겼다. 나를 보고는,
"아주버니, 안녕하시오."
하기에 나는,
"덕분에 무고하오."
하고는 일부러 재를 오래 뒤적거리면서 곁눈으로 흘낏흘낏 훔쳐보았다. 머리에는 빈 자리 없이 꽃을 꽂았고 금비녀, 옥귀고리에 연지까지 엷게 발랐다. 몸에는 검정빛 긴 옷을 걸쳤는데 은단추를 죽 꿰었고, 발에는 화초와 벌, 나비를 수놓은 신을 신었다. 대체로 만족(滿族) 여자는 전족(纏足)을 하지 않고 궁혜(弓鞋)를 신지 않는다.
주렵 속에서 한 처녀가 나오는데 나이나 얼굴이 스무 살 남짓 되어 보인다. 머리를 가운데 갈라서 틀어올린 것으로 보아 처녀임을 알겠다. 얼굴은 역시 우악스럽고도 사납게 생겼으나 몸집은 뚱뚱하고 살결은 희다. 양푼을 들고 초록빛 자배기를 기울여 수수밥 한 보시기를 수북하게 담고 물 한 사발을 따라서는 서쪽 바람벽 아래에 있는 의자에 걸터앉아 젓가락으로 들아마시듯 먹으며 두어 자 길이나 되는 잎이 달린 파를 들고 밥과 번갈아 된장에 찍어 먹었다. 목에는 계란만한 혹이 붙었고 밥을 먹고 차를 들이켜는 것이 조금도 수줍은 빛이 없었다. 아마 해마다 조선 사람들을 겪고 보니 모두가 심상스럽고 친숙해진 탓이리라.
(熱河日記, 渡江錄 중에서)
은둔하게 만드는 세상
영숙(永叔, 白東脩의 자)은 장수 집안의 후손이다. 그의 조상 중에는 충성으로 나라를 위해 죽은 사람이 있어 지금까지도 그를 위해 비분강개하는 사대부들이 있다. 영숙은 전서와 예서에 능하고 우리나라의 제도와 관습에 익숙하였다. 나이 젊어서는 말도 잘 타고 활도 잘 쏘아 무과에 급제하였다. 비록 벼슬과 봉록은 시운에 구애되었으나, 그 충군 애국하려는 뜻이야 넉넉히 조상의 ㄱ큰 공적을 계승할 만하며, 사대부란 신분을 가짐에 부끄럽지 ㅇ낳을 만하다.
아하! 그런 영숙이 어째서 온 집안을 이끌고 두멧구석으로 들어가려는가?
영숙은 일찍이 나를 위해 금천 연암이라는 산골짜기 집터를 잡아준 일이 있다. 산은 깊고 길은 없어서 종일을 가도 사람 하나 만날 수 없었다. 둘이서 갈대밭에 말을 세우고 채찍으로 높은 언덕빼기에 금을 그으면서 말하였다.
“저기에 울타리를 치고 뽕나무를 심으면 좋겠군. 갈대를 불사르고 밭을 일구면 한 해에 좁쌀 천석은 거두겠군.”
시험삼아 부싯돌을 쳐 불을 놓으니 바람을 따라 불길이 솟아올랐다. 꿩이 푸드덕푸드덕 놀라 날아가고 노루 새끼가 앞으로 튀어 달아났다. 우리는 팔을 걷어붙이며 쫓아가다가 시냇물에 막혀 돌아와 마주 보고 웃으며 말했다.
“백년도 못 살 인생에 어떻게 답답하게 일생을 나무와 돌 속에 파묻혀 조밥이나 먹고 꿩, 토끼나 사냥하는 사람으로 살까 보냐?”
그랬던 영숙이 이제 기린협(麒麟峽, 강원도 땅)으로 들어가 살려고 하매 송아지를 업고 들어가 길러서 밭을 간다고 하고, 소금과 메주도 없어서 돌배나 산아가위로 장을 담그리라 한다. 그 험준하고 궁벽한 품이 연암협과 어찌 비교나 할 수 있으랴!
그런데 나 자신은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면서 아직까지 거취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하물며 감히 영숙의 길을 만류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의 결심을 장하게 생각할지언정 그의 곤궁함을 가엾이 여기지는 않는다.
(贈白永叔入麒麟峽序)
《열하일기》의 내력
그들이 《열하일기(熱河日記)》를 두고 오랑캐의 칭호를 쓴 글이라고 시비한다는 게 대체 무엇을 두고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청나라 연호인 건륭(乾隆)을 썼다고 그럽니까? 청나라 지명을 말하는 것입니까? 《열하일기》는 기행록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글이 있든 없든 또 잘된 글이든 못 된 글이든 간에 세상에 그다지 큰 영향을 끼칠 것이 못 됩니다. 애초부터 춘춘 의리에 비교하여 따질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만약 어떤 사람이 갑자기 그런 것을 들고 나서서 나메엑 책임을 추궁한다면 잘못된 일입니다.
서글픕니다. 청나라의 연호를 세상에 처음 쓸 때 우리 선현들 중에 관직의 직첩(職牒)에 청나라 연호를 쓰지 말자고 제의한 분이 있었습니다. 또 사대부들이 묘비문을 새길 때 숭정기원(崇禎紀元)의 연호를 쓰는 관례는 있습니다. 그러나 공문서이든 사문서이든 모든 문서에는 그것을 피할 수 없으니 대개 부득이한 까닭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논밭이나 집을 장만할 때는 모두 후세까지 계승시키려 하지만 정작 문서를 만들 때는 그 당시의 연호를 쓰게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매매가 성립되지 못합니다.
그래 춘추의리에 그렇게 철저한 그들이라고 해서 집문서에 오랑캐 칭호가 붙었다고 그 집에서 살지 않으며, 또 밭문서에 오랑캐 칭호가 붙었다고 그 땅에서 나는 소출을 먹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예전에 내가 중국 여행을 하면서 그 노정, 숙박지, 날씨를 기록해놓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압록강을 건너던 그날에 첫머리를 “세번째 되는 경자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주석을 달았습니다.
“왜 몇 번째란 말을 쓰는가? 숭정기원이 지난 이후부터 따지기 때문이다. 왜 세 번째인가? 숭정 이후 세 번째 돌아오는 갑자이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알지 못하게 쓰느냐? 장차 압록강을 건너 청나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렇게 쓰고는 붓을 던지고 웃으며 말하기를,
“옛날에는 겉으로는 군소리가 없었으나 속으로는 옳고 그름을 따지는 소위 피리춘추(皮裏春秋)-살가죽 속의 《춘추》-라는 것이 있었다더니 이제 나는 겉껍데기만 따진다는 소위 곽외공양전(鞹外公羊傳)-공양전은 《춘추》의 해설서, 곽외공양전이란 《춘추》겉껍데기 밖의 공양전이라는 뜻-을 쓰고 있구나.”
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그 자체가 벌써 구차스러운 가식임을 스스로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날의 날씨를 기록하며 그 위에 춘추식의 연월일 쓰는 법으로 대서특필한다면 정말 틀려먹은 것입니다. 이렇게 쓸까 저렇게 쓸까 망설이다가 가끔 청나라 연호인 강희(康熙)나 건륭으로 그 시대를 구별했던 것인데 도리어 이를 가지고 춘추필법으로 책망하니 어안이 벙벙해지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건 정말 《열하일기》를 보지도 않고서 억지소리를 하는 겁니다. 꼭 ‘되놈의 임금’이라거나 ‘오랑캐 황제’라고 떠들어야만 비로소 춘추의리에 철저하다는 말입니까?
만약 중국이 오랑캐 땅임을 수치로 여겨 중국 지명을 따서 책 이름도 지을 수 없다면 그것은 더욱이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불행하게 중국이 오랑캐에게 점령된 것은 비단 오늘날에만 그렇게 된 건 아닙니다. 그러면 모두 오랑캐 땅으로 되었던 곳이라고 해서 그 지명을 쓰지 못해야 합니까? 순임금은 동쪽 오랑캐에서 나온 인물이고 문왕은 서쪽 오랑캐에서 나온 인물입니다. 지금의 춘추의리를 찾는 사람과 같을 양이면 장차 순임금과 문왕을 위해서 그 출생지도 억지로 숨겨야 되지 않겠습니까?
《춘추》란 본래 중국을 존중하고 오랑캐를 배척하는 책입니다. 그렇지만 그 저자인 공자도 일찍이 동쪽 오랑캐 땅에서 살고 싶다고 말씀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저들처럼 따져서야 어떻게 자기가 배척하는 그 땅에 성인 자신이 가서 살 수 있겠습니까? 춘추의리를 그들 같은 방식으로 지킬진댄 오랑캐에 관한 일을 일체 연구하지 말아야 할 것 아닙니까? 나를 벌주거나 나를 알아주거나 간에 정당하게 변론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무릇 내가 과거시험을 폐하고서부터 자못 마음과 생각이 한가하여 법도 밖에 노닐려는 숙원을 이루게 된 겁니다. 멀리는 고려 말 목은(牧隱) 이색(李穡)을 사모하고 가까이는 노가재(老稼齋) 김창업을 본떠 주체궂은 짐도 없이 채찍 하나로 중국 여행 만리 길을 떠났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아무리 직책이 없다고 하나 명색 선비입니다. 역관도 의원도 아닌 신분이라 처신하기 불편하고 또 슬그머니 갔다가 슬그머니 온다고 해도 행색을 숨기기도 어려웠습니다. 애초부터 조심하고 경계하는 떳떳한 도리로 따져보더라도 내심 스스로 부끄러워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매일 동틀 무렵 말고삐를 쥐며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천하 명승을 구경한다는 것이 무어 그리 장한 일인가? 유명한 고적이 있는 지방도 구경하지 않고 돌아온 사람이 있지 않았는가?’
조금 지나서 시뻘건 아침 해가 요동벌을 꽉 차고 우뚝 솟은 탑이 말머리에서 나를 맞아주는데 수은 같은 연기는 나무에 자욱하고 황금빛 기와집들은 구름 속에 옹긋쫑긋 솟아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왼편으로 푸른 바다를 따르며 바른편으로 험준한 산을 끼고 앞으로 앞으로 가니, 마음과 눈이 하루하루 새로워져 전날의 소견이 좀스러웠음에 가소롭고 마음속이 탁 틔어 짐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드디어 만리장성을 나가서 북으로 사막에까지 갔던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열하까지 구경하고 돌아오게 된 까닭입니다.
귀국한 후에는 비단 시비하는 사람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나의 여행을 부러워하는 사람까지 있었습니다. 그 뒤 연암협에 은거하여 무료하기도 해서 전날 적어놓았던 종이쪽지를 정리해서 몇 권의 책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 《열하일기》를 짓게 된 까닭입니다.
예리하고 세심한 나의 관찰력으로 보지 못한 것이 없었다고 여겼는데 정작 문자로 옮겨 적고 보니, 구우일모(九牛一毛)격으로 대부분 빠졌고 그나마도 필치가 변변치 못한 것이라 베개에 기대어 졸다가 생각해보면 여행 출발 초의 마음에서 이미 멀어졌습니다.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하면 이리저리 떠돈 것이 부질없고 이따금 책장을 떠들어보면 별볼일이 없다는 게 드러납니다. 내가 보기에도 시답잖으니 다른 사람이야 누가 보기나 할 것입니까? 그 동안 집안에 우환이 잦고 초상도 나서 미처 거두어 갈무리할 경황도 없었으며, 또 벼슬살이를 한 뒤로는 더 더욱 이리저리 흐트러지고 그저 이름만 남아 가증스럽고 몹쓸 책으로 취급받았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소위 오랑캐의 칭호를 썼다는 글입니다. 지난 20년 동안에 글을 슨 나 자신은 마치 꿈속에 쓴 것 같건만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사람들을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정도가 아니라 호랑이에 두 날개까지 돋쳤다고 떠듭니다. 이 어찌 과하지 않습니까?
그대는 나를 위해 지금 춘추의리를 따진다는 그자들에게 전해주기 바랍니다. 왜 이렇게 나를 책망하지 않느냐고.
“자네가 전에 돌아다니던 곳은 중국 고대 이래로 성인과 훌륭한 임금 및 한ㆍ당ㆍ송ㆍ명 나라들이 다스리던 지방일세. 지금 비록 불행히 오랑캐가 차지하고 있을 망정 그 성곽, 궁실, 인민들은 모두 그대로요, 인간생활에 필요한 모든 도구도 본래 있던 그대로요, 최(崔)ㆍ노(盧)ㆍ왕(王)ㆍ사(謝)와 같은 이름난 씨족도 없어지지 않았고, 정자나 주자의 학문도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있네. 저 오랑캐들도 중국이 이롭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강탈하여 차지하기에 이른 것일세. 자네는 어째서 옛날부터 내려오던 중국의 훌륭한 법과 아름다운 제도라든지 중국의 자랑으로 될 만한 전통과 사실을 알아다가 모두 책으로 저술하여서 우리나라에 유용하도록 하지 않았는가? 자네는 이런 일은 하지 않고 한갓 사신들의 뒤꽁무니만 따라다녔는가? 지금 《열하일기》에 기술된 내용이란 난잡하고 알맹이가 없는 말뿐이니, 이따위 떠돌아다닌 내용을 가지고서야 어떻게 남들에게 큰소리로 자랑할 수 있단 말인가? 단지 자기 수양에도 손해요 인격마저 손상시킬 뿐이네.”
이렇게 말한다면 듣는 나로서도 어찌 등에서 식은땀이 나고 말문이 막혀 고개를 푹 파묻은 채 여생을 마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제후를 끌어안고서 제후를 공격하는 거기에 《춘추》의 본뜻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갑자기 어떤 사람이 나서서 《춘추》를 끌어안고서 남을 욕하려 한다면 그것이 옳습니까? 나는 모르겠거니와 춘추의리를 어떻게 말소리와 웃는 맵시로서야 할 수 있겠습니까?
(答李仲存書)
꿈에 중을 보면 문둥이가 된다
남의 말이라고 적어 보내신 편지 내용은 한바탕 웃음밖에 터져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꿈에 중을 보면 문둥이가 된다”는 속담이 있지요. 무슨 말이겠습니까! 중은 절에서 살고, 절은 산에 있고, 산에는 옻나무가 있고, 옻나무는 사람을 문둥이처럼 옻 오르게 합니다. 꿈에 본 중과 문둥이는 이렇게 연결되는 것입니다.
예전에 내가 중국에 갔었지요. 그 중국은 오랑캐가 점령하고 사는 곳입디다. 애가 그들과 같이 놀기도 하고 함께 음식도 먹었으니 꿈속에 중을 본 그 정도 수준이 아니죠. 세상 사람들이 나를 문둥이라고 하더라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죽마고우로 자라고 늘그막까지 허물없이 지내던 한 친구가 잠잘 때 쓰는 내 갓을 오랑캐의 마래기라고 조롱하고, 낡아빠진 내 베저고리를 오랑캐의 털옷이라고 비웃은 일도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말 붉은 실로 된 마래기요, 홀태소매를 단 털옷이란 말이겠습니까? 대체로 오랑캐라고 비웃으면 애들까지도 수치로 여기는 까닭에 얼토당토 않게 오랑캐 것이라고 끌어대어 한번 웃기고 흉을 보는 격이니 누가 골을 낼 수 있겠습니까?
지난 수십 년 이래로 옛날 함께 놀던 친구는 대부분 이 세상에서 없어졌습니다. 하룻밤 우스갯소리나 하면서 지내보고 싶은 때도 있지만 그런 날이 있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아니 슬픈 일입니까?
그렇지만 지금 평생 알지도 못하던 사람이 갑자기 내가 오랑캐옷을 입었다는 등등의 말을 던진다면 옳지 않은 일입니다. 더구나 글로 써서 함부로 욕설을 퍼부을 수 있겠습니까? 정신병에 걸려 실성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하루아침에 오랑캐로 지목되는 수모를 당하고 있을까요? 보통 생각으로 따져보더라도 동에 닿지 않는 일입니다. 하인들 보기에도 부끄러울진대 더구나 어떻게 뻔뻔스럽게 아전과 백성들을 대하고 앉았겠습니까?
그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란 게 도대체 경솔하고 조잡하기 짝이 없습니다. 길가의 아이들이나 저잣거리의 심부름꾼조차 누가 믿으려 할 얘기이겠습니까? 한차례 웃음거리로 돌려버리는 것이 옳습니다.
내 자식들에게는 행여 남에게 어떠 어떻다고 변명하지 말라고 타일러주기 바랍니다. 설사 오랑캐옷을 입었다고 꾸며낸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저 얼굴은 허옇고 눈썹이 드문드문한 그런 사람이라고 대답해둘 것입니다.
(答李仲存書)
앵무새의 지혜
낙서(洛瑞, 이서구의 자)가 푸른 앵무새를 얻었는데 말하는 앵무새로 총명하게 만들려 해도 총명해지지 않고, 깨우칠 듯하다가도 깨우치지 못했다.
낙서가 새장 앞에 서서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네가 말을 못하니 까마귀나 갈가마귀와 다른 점이 뭣이냐? 너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으니 내 마음이 괴롭고 언짢구나!”
이러는데 갑자기 앵무새가 총명해지고 깨우쳤다. 그래 《녹앵무경(綠鸚鵡經)》이란 책을 짓고 나에게 책의 서문을 청했다.
내가 일찍이 꿈에 하얀 앵무새를 본 적이 있다. 그래서 박수무당을 불러 꿈을 털어놓으며 점을 치게 하고 이렇게 말했다.
“내 평생 꿈을 많이 꾸었네만 밥 먹는 꿈을 꾸어도 배부르지 않고 술 먹는 꿈에도 취하지 않으며, 악취를 맡는 꿈에도 더럽지 않고 향내를 맡는 꿈에도 향기롭지 않았으며, 힘을 쓰는 꿈에도 힘이 세어지지 않고 누구를 부르는 꿈에도 소리는 나오질 않았네. 어떤 때는 날아가는 용이 하늘에 있기도 했고, 혹은 봉황ㆍ기린ㆍ귀신과 이상하게 생긴 짐승들이 이리저리 몰려다니기도 했네.
눈이 넷 달린 신장(神將)은 등에 입이 붙었는데 이빨로 칼을 씹고 있으며 손에도 눈이 달려 있었지. 눈과 귀가 작아지기도 하고 입과 코가 커지기도 하더구만. 어떤 때는 큰 바다에 파도가 크게 일고, 푸른 산을 불이 태워버리기도 했으며, 어떤 때는 해ㆍ달ㆍ별 들이 내 몸뚱이를 둘러싸고 있으며 혹은 천둥과 벼락이 쳐서 놀랍고 두려워 진땀이 흐르기도 했네. 혹은 높고 먼 하늘에 올라가서 저 빛나는 구름을 타기도 했지. 어떤 때는 아홉층 누각에 날아올라갔지. 울긋불긋한 단청은 아늑하고 창문은 유리로 되었는데 그 속에서 아름다운 부인이 눈웃음을 치며 눈짓을 하고 기묘한 몸놀림이 하늘하늘 날리며, 피리 소리와 노랫소리가 함께 어울리기도 하였네.
혹은 몸뚱이가 매미 날개처럼 가벼워져 저 나뭇잎을 붙기도 하며, 혹 지렁이와 싸우기도 하고, 혹 개구리의 울음을 거들기도 하였네. 혹 담벼락을 뚫고 들어가면 곧 넓은 방이 나오기도 하며, 혹은 큰손님이 되어 깃발을 휘날리며 정1품 관리나 할 수 있는 파초선(芭蕉扇)을 받치고 외바퀴 초헌(軺軒)이 백 채나 에워싸고 나다니기도 한다네. 곧 무슨 망령된 생각이 이다지도 뒤죽박죽하여 종작이 없는가?”
박수가 큰소리로 말했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죄과(罪過)를 받을까 겁난다. 네가 잘 생각해보라. 네가 늙지 않고 죽지 않는 약을 만들고 공기를 호흡하고 신령한 정기를 모아 마시면 음식이 필요치 않을 것이며, 점차 사는 집에 싫증이 나서 집이 필요치 않아 저 바위굴 속에서 살겠구나. 아내와 자식을 내버리고 붕우와도 이별하고 하루아침에 몸이 가벼워져서 어깨에 상수리나무 잎을 걸치고 허리에 호랑이 가죽으로 된 잠방이를 두르고 아침에는 푸른 동해바다에서 놀다가 저녁에는 곤륜산(崑崙山)에서 놀 것이라. 그 이튿날 낮이나 밤에 잠시 돌아와보면 그 상이 천년 세월이, 혹 8백년 세월이 지나게 된다. 그처럼 불로장생하는 것을 곧 신선이라 이름하니 그리되면 어찌할 텐가?”
내가 얼른 사양하며 말했다.
“망령된 생각이네. 천년이나 8백년의 긴 세월이 겨우 하루아침 저녁 나절로 지나가버린다니, 어찌 그리 짧은가? 내가 불로장생한다지만 누가 다시 나를 알아보랴? 어느 벗님이 있어, 나를 나인 줄 알겠는가. 만에 하나라도 요행히 내 살던 집이 무너지지 않고 향리도 그대로 있으며 자손이 번성하게 뻗어나 팔세손, 구세손, 심지어 십세손에 이르렀다고 하세. 내가 내 집으로 되돌아가 문에 들어설 때는 잠시 기쁘겠지만 이내 서글퍼지리라. 한동안 앉았다가 낮은 목소리로 후손들에게 가만히 ‘후원의 배나무와 부엌의 솥들, 진주와 귀고리가 무엇은 있고 무엇은 없어졌다’말하여 그 말이 차츰 맞아들어가면 자손들은 버럭 성을 내어 저놈이 어떤 망령난 늙은이며, 저놈이 어떤 미친 늙은이며, 저놈이 어떤 술 취한 놈이기에 여기 와서 우리를 욕보이냐고 소리를 지르며 작은 막대기로 쫓아내고 큰 몽둥이로 내려칠 터이니 내가 어찌하란 말인가? 무슨 문서로 나를 증명할 수도 없으며 관가에 송사한들 어찌할 것인가? 비유하자면 내가 꿈꾸는 것과 같다. 나의 꿈이란 내가 꾸는 것이요, 남이 나의 꿈을 꾸는 것이 아니니, 누가 나의 꿈을 믿겠는가?”
박수무당이 큰소리로 말했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죄과를 받을까 두렵다.”
다시 큰 자비심을 드러내며 탄식하고 말했다.
“네 말인즉 기실 크게 옳은 말이로다. 너는 알아야 하리라. 자손과 처첩들이 잠시만 떠나고 이별해도 곧 너를 아랑보지 못한다면 너는 그들을 어찌 연연할 것인가? 서방에 나라가 있으니 중생이 모여 사는 극락세계라. 네가 고행을 하고 행실을 크게 닦다가 그 나라에 왕생하면 삼재(三災)를 벗어나고, 몸이 토막나거나 불태워지는 데에 들지 않으리라. 이를 이름하여 부처라 하니 네가 그리된다면 어떤가.”
내가 얼른 거절하며 말했다.
“이것도 하나의 망령된 생각이라. 이미 왕생, 곧 영영 가서 다시 태어난다고 말함은 이승에서는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다비(茶毘)를 하여 그 뼛가루를 재로 날려버렸는데 무엇이 토막치고 불태움을 면한다는 것인가. 지금의 즐거운 일을 내버리고 뼈를 깎는 고행을 하여 저 극락세계를 기다린다고 하니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거기가 극락세계임을 누가 알 수 있으랴? 만약 저 세상에 극락세계가 있는 줄을 안다면 무슨 까닭으로 이승에서는 전생을 알 수 없는가?”
어떤 사람이 말했다.
“박수무당의 말은 정말로 신선이나 부처가 되겠냐고 물은 것이 아니다. 신선은 신령스럽고 부처는 지혜로운 존재여서 한 말이다. 앵무새가 바로 신령스럽고 지혜로운 그런 성향을 가졌다면 이는 박수무당이 앵무새가 신령스럽고 슬기로워 능히 사람의 말을 흉내낼 수 있으리라는 것을 점친 것이네. 자네의 문장 솜씩 장차 날마다 발전하겠구먼.”
아아! 그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18년이 지났건만 도(道)는 하루하루 더욱 서툴러지고 글은 더 진보하지 못했다. 그 미련한 마음과 망령된 생각은 꿈을 꿀 때뿐 아니라 깨어 있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이 《녹앵무경》이란 책을 보니 둥근 혀와 갈라진 발가락이 완연히 꿈에 본 앵무새와 같고, 그 성질이 신령스럽고 깨우침이 오묘하며 슬기로운 말을 구슬을 굴리듯 하니, 과연 신선의 신령함과 부처의 지혜로움을 다했도다. 박수무당의 해몽이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인가?
(綠鸚鵡經序)
자신의 본분으로 돌아가라
자신의 본분으로 돌아가라(還他本分). 이 말이 어찌 문장에만 해당되는 것이라요. 일체의 가지가지 만사가 모두 그렇지요.
서 화담(徐花潭, 화담은 서경덕의 호) 선생이 출타했다가 집을 잃어버리고 길가에서 울고 섰는 사람을 만났더랍니다.
“너는 어찌하여 울고 있느냐?”
“저는 다섯 살 때 눈이 멀어서 지금 20년이나 되었답니다. 오늘 아침 나절에 밖을 나왔다가 홀연 천지만물이 맑고 밝게 보이기에 기쁜 나머지 집으로 돌아가려 하니 길은 여러 갈래요, 대분들이 서로 어슷비슷 같아 저희 집을 분별할 수 없습니다. 그래 지금 울고 있습지요.”
선생은,
“네게 집에 돌아가는 방법을 깨우쳐 주겠다. 도로 눈을 감아라. 그러면 곧 너의 집이 있을 것이다.”
라고 일러주었답니다.
그래서 소경은 다시 눈을 감고 지팡이를 두드리며 익은 걸음걸이로 걸어서 곧장 집에 돌아갈 수 있었더랍니다.
이는 다른 까닭이 아닙니다. 색깔과 모양에 정신이 뒤죽박죽 바뀌고, 슬픔과 기쁨에 마음이 쓰여서 이것이 곧 망상이 된 것입니다. 지팡이를 두드리며 익숙한 걸음걸이로 걷는 것, 그것은 바로 우리가 우리의 본분을 지키는 이치요, 집으로 돌아가는 증인(證印)입니다.
(答蒼厓 之二)
말똥구리의 미덕
자무(子務)와 자혜(子惠)가 외출했다가 소경이 비단옷을 입은 것을 보았다. 자혜가 한숨을 쉬며 탄식하고는,
“안됐네, 제 몸에 입은 비단을 제 눈으로 볼 수 없으니!”
자무가 말하기를,
“무릇 소경이 아닌 사람이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과는 어느 쪽이 나을까?”
드디어 서로 논변하다가 청허(聽虛) 선생을 찾기에 이르렀다. 선생도 손을 내저으며,
“나도 모르네, 나는 몰라.”
하고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옛날 황희(黃喜) 정승이 공사를 마치고 퇴청하니, 그 딸이 마중하여 묻기를,
“아버지, 이라는 벌레를 아시지요? 이가 어디에서 생깁니까? 옷에서 생기지요?”
“그렇지.”
딸이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참말로 이겼다.”
며느리가 묻기를,
“이가 피부에서 생기는 것이지요?”
“옳고 말고.”
며느리가 웃으며 말하기를,
“아버님은 내 말이 옳다고 하시던걸.”
황 정승 부인이 나무라며 말하기를,
“누가 대감더러 슬기롭다 말할 것입니까? 시비곡직을 다투는데 양쪽 모두 옳다고 하시니.”
황 정승이 어이가 없어 빙그레 웃으며 말하기를,
“너희들 이리 오너라. 무릇 이란 벌레는 피부가 아니면 태어나지 못하고 옷이 아니면 붙어 있지 못하기 때문에 두 사람의 말을 다 옳다고 한 것이니라. 그렇긴 하여도 옷을 농 안에 넣어두어도 또한 거기에 이가 있으며, 너희들이 벌거벗고 있더라도 오히려 가려울 것이니라. 피부에 땀냄새가 물씬물씬 나고 옷에 풀냄새가 풀풀 나는 중에 어느 한쪽에 떨어지지도 않고 어느 한편에 붙지도 않는 바로 피부와 옷의 중간에 있느니라.”
백호(白湖) 임제(林悌)가 말을 타려고 하자 마부가 나서서 여쭙기를,
“영감님께서 취하셨나 봅니다. 갖신과 짚신을 한짝씩 짝짝이로 신고 계십니다.”
백호가 꾸짖기를,
“예끼. 길 오른편에서 보는 사람은 나더러 갖신을 신었다 말할 것이며 길 왼편에서 보는 사람은 나더러 짚신을 신었다고 말할 것이니, 웬 걱정이란 말이냐?”
이로써 논하건대 천하에서 가장 눈으로 보기 쉬운 것은 사람의 발만한 것이 없을 터인데도 보는 방향이 다르면 갖신과 짚신도 분간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참되고 바른 소견(眞正見)은 진실로 옳고 그르다는 그 중간에 있는 것이다. 예컨대 땀이 변해 이로 됨은 지극히 미세하여 살피기 어렵거니와, 옷과 피부 사이에는 본래부터 약간 떠 있는 공간이 있어 어느 한쪽에 붙지도 떨어지지도 않으며 오른쪽도 왼쪽도 아니니 어느 누군들 이가 그 중간에 있음을 알 것이랴?
말똥구리는 제가 굴리고 다니는 말똥구리를 아껴서 용의 여의주를 부러워하지 않고, 용 또한 자신이 여의주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말똥구리의 똥덩어리를 비웃지 않는다.
자패(子珮)가 이런 얘기를 듣고 기뻐하며 그것을 자기 시집의 이름으로 삼을 만하다 하여 드디어 말똥구리란 뜻에서 《낭환집(蜋丸集)》이라 명명하였다. 나에게 시집 서문을 부탁하기에 이런 말을 하였다.
“옛날 정령위(丁令威)라는 사람이 신선이 되었다가 학으로 변하여 고향에 돌아왔으나 아무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이는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격이 아니겠는가? 《태현경(太玄經)》이 세상에 크게 유행했건만 정작 그 저자인 양자운(揚子雲, 자운은 揚雄의 자)은 보지 못했다 한다. 이는 소경이 비단옷을 입은 격이 아니겠는가? 이 《낭환집》을 보고 한편에서 용의 여의주 같은 것이라 여긴다면 그것은 자네의 한쪽 갖신만 본 것이요, 다른 한편에서 말똥덩어리 같은 것이라 여긴다면 그것은 자네의 한쪽 짚신만 본 것이리라. 남들이 자네 시를 알아주지 못한다면 이는 정령위가 학이 된 격이고, 시집이 세상에 크게 유행하건만 자네 스스로 볼 수 없다면 이는 양자운의 《태현경》과 같이 되는 격이네. 자네의 시집이 여의주가 될지 똥덩어리가 될지에 대한 논변은 오직 청허 선생만이 알 터이니 내가 무엇이라 말하겠는가?
(蜋丸集序)
까마귀는 검은 새인가
총명한 선비에게는 괴이하게 생각되는 것이 없으나 무식한 사람에게는 의심스러운 것이 많다. 그야말로 견문(見聞)이 적으면 괴이하게 여김이 많다는 격이다.
무릇 총명한 선비라고 해서 어찌 일일이 물건을 제 눈으로 봐야만 아는 것이랴? 한 가지를 들으면 눈에는 열 가지가 형상화되고 열 가지를 보면 마음에는 백 가지가 설정되어 천 가지 괴이한 것과 만 가지 신기로운 것에 대해, 그 물건의 본질에 충실하여 객관적으로 보려 하되 주관을 섞지 않는다. 그런 까닭으로 마음에 여유가 있어서 응수를 무궁무진하게 할 수 있다.
본 것이 적은 사람은 해오라기를 가지고 까마귀를 비웃고 물오리를 들어서 학의 자태를 위태롭게 여긴다. 그 사물 자체는 전혀 괴이하다 생각하지 않는데 자기 혼자 성을 내어 꾸짖으며 한 가지라도 제 소견과 다르면 천하 만물을 다 부정하려고 덤벼든다.
아아! 저 까마귀를 바라보자. 그 날개보다 더 검은 색깔도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햇빛이 언뜻 흐릿하게 비치면 얕은 황금빛이 돌고, 다시 햇빛이 빛나면 연한 녹색으로도 되며, 햇빛에 비추어 보면 자줏빛으로 솟구치기도 하고, 눈이 아물아물해지면서는 비취색으로 변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푸른 까마귀라고 불러도 옳으며 붉은 까마귀라고 불러도 역시 옳을 것이다.
그 사물에는 애초부터 전해진 색깔이 없건만 그것을 보는 내가 눈으로 색깔을 먼저 결정하고 있다. 어찌 눈으로만 색을 결정하는 것뿐이랴? 심지어 보지도 않고 미리 마음속으로 결정해 버리기도 한다.
아아! 까마귀를 검은 색깔에다 봉쇄시키는 것쯤이랴 그래도 괜찮다. 이제는 천하의 모든 빛깔을 까마귀의 검은색 하나에 봉쇄시키려 한다.
까마귀가 관연 검은색으로 보이긴 하지만 소위 푸른빛, 붉은빛을 띤다는 것은 바로 검은색 가운데서 푸르고 붉은 빛이 난다는 사실을 의미함을 그 누가 알고 있으랴? 검은색을 어둡다고 보는 사람은 까마귀만 모를 뿐 아니라 검은색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물은 검붉기 때문에 능히 비출 수 있고 옻칠은 까맣기 때문에 능히 비추어볼 수 있다. 그런 까달에 색깔이 있는 것치고 광채가 없는 것은 없고, 형체가 있는 것치고 맵시가 없는 것은 없다.
아름다운 여인을 관찰할 수 있다면 시(詩)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여인의 고개 숙인 모습에서 그녀가 부끄러워하고 있음을 보고, 턱을 괸 모습에서 그녀가 원망하고 있음을 보고, 혼자 서 있는 모습에서 그녀가 그리워하고 있음을 보고, 눈썹을 찡그린 모습에서 그녀가 수심에 차 있음을 보고, 난간 아래 서 있는 모습을 보고 그녀가 누구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파초 잎사귀 아래 서 있는 모습을 보고 그녀가 누구를 바라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만약 그녀가 재(齋)를 올리는 중처럼 가만히 서 있지 않고 진흙 쌍처럼 우두커니 앉아 있지 않는다고 책망한다면 이는 양귀비에게 치통을 앓는다고 꾸짖고 전국시대의 미인 번희(樊姬)에게 쪽을 찌지 말라고 금하는 꼴이며, 미인의 맵시 있는 걸음걸이를 요망하다고 나무라고 춤추는 자태를 경망하다고 질책하는 격이다.
나의 조차 종선(宗善)은 자(字)가 계지(繼之)이다. 시에 뛰어났으되 한 가지 법(法)에만 얽매이지 않고 온갖 체법을 골고루 갖추었으니 울연히 동방의 대가가 됨직하다. 성당(盛唐)시대의 시체로 지었는가 해서 보면 홀연히 한위(漢魏)시대의 시체가 되고 또 송명(宋明)시대의 시체가 되어 있고, 가까스로 송명체라고 말하려니 어느덧 다시 성당체를 띠고 있었다.
아아, 슬프다! 세속의 무식한 사람은 까마귀를 비웃고 학을 위태롭게 여김이 또한 매우 심하겠지만 조카 계지의 정원에 있는 까마귀는 자줏빛으로 변하기도 하고 혹 비취빛으로 변하기도 한다. 세속의 무식한 사람은 재를 올리는 중이나 진흙 소상처럼 미인을 가만히 고정시키려 하겠지만 미인의 춤사위와 걸음걸이는 하루가 다르게 더욱 경쾌하고 맵시 있게 되고, 앓는 이와 쪽찐 머리는 다 나름대로 자태가 있는 법이다. 세속의 무식한 사람들의 노여움이 하루하루 불어나리라는 것을 의심할 바 없구나!
세상에는 총명한 선비는 적고 무식한 사람들은 많으니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잠자코 있는 것이 옳으리라. 그런데도 말을 그치지 않음은 무슨 까닭인가? 어허! 연암 노인이 연상각(烟湘閣)에서 쓰노라.
공작새의 빛깔
백척오동각(百尺梧桐閣)의 남쪽 마루방을 공작관(孔雀館)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남쪽으로 수십 보를 채 못 가서 둥근 지붕이 마주 바라다보이는 집이 하풍죽로당(荷風竹露堂)이다. 그 뜰의 한중간을 막고 대나무를 엮어 울바자를 만들어 세운 다음, 그 가운데 구기자, 해당화, 아가위, 박태기나무 등을 섞어 심으니 긴 가지와 보드라운 넝쿨이 한데 얽히고 서로 포개어졌다. 그것이 봄과 여름에는 병풍 구실을 하다가 가을과 겨울에는 울타리 구실을 한다. 병풍에는 꽃들이 어우러지는 것이 좋았고, 울타리에는 눈이 쌓이는 것이 좋았다. 게다가 그 사이에 모가 난 구멍을 천연의 문짝으로 삼으니 일부러 삽짝문을 달지 않아도 되었다. 북쪽 담 밑을 뚫고 물을 끌어서 북쪽 연못에 대고 넘치는 물은 다시 그 앞을 구불구불 돌아 흐르게 만들었다. 이 물굽이에 연잎을 따서 넣고 그 귀에 술잔을 놓아 띄워서 흘러가게 할 수 있게 하였다. 이는 공작관이 동일한 방안에서 다른 경치를 볼 수 있고 자리를 옮기는 대로 볼거리가 바뀌게 되는 까닭이다.
내 나이 열여덟, 아홉 살 때 꿈에 한 누각으로 들어간 적이 있었다. 높고 깊숙하고 훤하게 빈 것이 마치 관청 건물이나 절간의 대웅전 같았다. 좌우 양편에는 비단으로 만든 책갑과 옥으로 만든 메뚜기 꽂은 서책들이 정연하게 꽂혀 있고, 굽이굽이 꺾어 들어가면 겨우 한 사람이 통해 다닐 만하였다. 그 가운데 몇 척 되는 푸른 화병이 놓이고 그 속에 천장까지 닿을만큼 기다란 새의 푸른 깃 두 개가 꽂혀 있었는데 한참을 서성거리다가 잠이 깨었다.
그로부터 20여 년 후 내가 중국에 가서 공작새 세 마리를 보았다. 학보다는 작고 해오라기보다는 크며 꼬리 길이가 두 자 남짓했다. 붉은 다리는 뱀의 껍질처럼 얼룽얼룽하고 검은 주둥이는 매부리처럼 꾸부러들었다. 온몸의 깃은 진한 불빛, 연한 금빛으로 빛날 뿐 아니라 그 끝부분에 각각 한 개의 금빛 눈이 박혀 있었다. 파란빛으로 동자를 이루고 퍼런빛으로 다시 그 동자를 쌌으며 자줏빛으로 테를 그리고 쪽빛으로 금을 그어 자개가 아롱지듯, 무지개가 뻗친 듯했다. 이를 두고 푸른 새라고 해도 틀리고 붉은 새라고 해도 틀린다. 가끔 몸을 웅크리는 대로 빛이 어둠침침및해졌다가 곧 깃을 털고 나서면 도로 환해졌다. 잠깐 몸을 뒤치는 대로 퍼렇게 보이다가 갑자기 벌게지면 불꽃이 타오르는 듯했다.
대체 문채(文彩)의 극치가 이보다 더 훌륭할 것이 없다. 저 색깔이란 광명에서 생기고 광명은 비침에서 생기고 비침이란 번쩍임에서 생기는 것이다. 번쩍임이 있어서야 빛이 나니 빛이 난다는 것은 광명과 비침이 색깔에서 떠올라서 눈으로 넘쳐 들어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글을 지으면서 종이와 먹에만 매달리는 것은 전아(典雅)한 말이 아니며, 빛을 논하면서 마음과 눈에 선입견을 가지는 것은 올바로 보는 것이 아니다.
내가 북경에 있을 때 그 나라 동남쪽의 선비들과 날마다 단가포(段家鋪)에서 만나서 술을 마시고 글을 의논할 적에 언제나 공작새를 예로 들며 시문을 평하였다. 그 자리에 태사(太史) 고역생(高棫生)이 앉았다가 내게 희언으로
“우리 손님들은 선생의 짐에 기르는 새 중에서 무슨 새로 받아들이시려우.”
라고 하여 다같이 크게 웃었다.
그 후 다섯 해 만에 한 친구가 중국을 가더니 ‘공작관’아리고 쓴 글씨 석 자를 가지고 왔는데 전당(錢塘) 사람 조설범(趙雪帆)이 쓴 것이었다. 그 전에 나는 조씨와 만난 일이 없건만 다른 사람들에게서 내 이야기를 듣고 만리 밖에서 교분을 맺자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관(館)이란 명칭은 개인의 집에 붙일 이름이 아니고, 또 내가 늘그막까지 방 한칸도 못 가졌는데 어디에 그것을 걸어놓으랴? 이제 다행히 성은을 입어 경치 좋은 고을의 원 노릇을 한지 4년째인데 관청을 내 집으로 알고 지낸다. 손때 묻은 책을 담은 헌 상자짝도 벼슬하는 곳으로 함께 가지고 다녔는데 장마비 끝에 책을 말리다가 우연히 이 글씨를 찾아내었다.
아하! 공작새를 다시 볼 수는 없으나 예전의 꿈을 더듬어 생각건대 그 인연이 바로 여기 있는 것은 아닐는지 어찌 알랴? 드디어 판각을 하여 들보 위에 걸고 이러한 사연까지 아울러 기술한다.
(孔雀館記)
개미ㆍ파리ㆍ사슴ㆍ코끼리의 크기
우연히 거칠고 못난 성질을 이야기하다가 제 자신을 사슴에 비의한 것은 사람이 가까이 다가가면 잘 놀란다는 의미이지 감히 제 자신이 크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지금 그대의 편지에서 그대 스스로를 말꼬리에 붙은 파리에 비유하고 계시니 어째 이렇게 자신을 하찮게 여기십니까? 만약 그대가 작게 되기를 바란다면 파리도 오히려 크지요. 개미가 있지 않습니까?
제가 일찍이 약산(藥山)에 올라가서 밑의 고을을 굽어본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달음질치고 뛰어가며 땅에 붙어 꿈틀꿈틀하는 모습이 마치 개미집의 개미와 같아서 한번 휙 불기만 해도 다 날아갈 듯싶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고을 사람더러 저를 바라보라고 한다면, 산비탈을 기고 바위를 돌고 풀덩굴을 더듬어잡고 나무를 붙잡고 산꼭대기까지 올라가서는 함부로 거들먹거리는 모습이 머리의 이가 머리카락을 따라 기어오르는 것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그러고서도 이제 큰소리로 제 몸을 사슴에다 비의한다고 하면 그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마땅히 대가(大家)들에게 비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만약 몸뚱어리의 크고 작은 것을 따지려 하고 시력이 좋고 나쁨을 변별하려 든다면 그것들은 모두 허망한 생각입니다. 사슴이 과연 파리보다야 크다고 하겠지만 코끼리가 있지 않습니까? 파리가 사슴보다는 작다고 하겠지만 개미와 비교한다면 사슴과 코끼리의 관계와 같습니다.
이제 저 코끼리가 서 있는 모습은 집채처럼 크고, 나다니는 것은 풍우처럼 빠르며, 귀는 구름장을 드리운 것처럼 넓으며, 눈은 초승달처럼 작고, 발가락 사이에 낀 진흙덩이는 봉긋한 둔덕처럼 큽니다. 개미가 그 둔덕 속에서 집을 짓고 살다가 비가 오는지 살피러 밖으로 나와서 두 눈을 부릅뜨고도 코끼리를 보지 못함은 무슨 까닭입니까? 보이는 대상물이 너무 멀리 있기 때문입니다. 코끼리가 한 눈을 감고 노려보아도 개미를 보지 못함은 무슨 까닭입니까? 보이는 대상물이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좀더 넓은 안목을 가진 사람이 있어 다시 백리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게 하더라도 아물아물하고 가물가물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어디서 소위 사슴이니 파리니 개미니 코끼리니 하고 분간해낼 수 있겠습니까?
(答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