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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를 삼킨 여자(Beloved) 1

 

남북전쟁이 끝난 지 이미 4, 5년이 지났다. 어떤 자는 자신들을 부양시킬 수 없는 가족으로부터 도망치는 참이었고, 어떤 자는 가족들에게로 도망치는 참이었다. 그 외에도 흉작으로부터,

죽은 육친으로부터, 생명의 위험으로부터, 주인이 바뀐 토지로부터 도망치는 참이었다.

 

 

1

 

124번지는 저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곳에는 갓난아기의 원한이 서려 있었다.

그 집에 살고 있는 여자들은 물론 자식들까지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그 저주를 참고 견뎌왔다. 1873년까지도 세스와 그녀의 딸 덴버는 피해자로 남아 있었다.

세스의 시어머니 베이비 색스는 이미 죽었으며, 아들 하워드와 버글러는 열세 살이 되던 해에 도망치고 없었다.

이상한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거울이 저절로 산산조각이 나기도 하였고 케이크 위에는 두 개의 조그만 손자국이 나기도 하였다. 그래서 두 달도 채 안 되어 여자들만 블루스톤 거리에 있는 백회색 집에 남겨 두고 차례로 집을 나갔다.

신시내티가 오하이오주가 된 지는 불과 70년밖에 안 된다. 형과 아우가 집을 빠져나올 때 그 집은 번지수도 없었다.

그들이 발꿈치를 들고 몰래 빠져나갈 때 베이비 할머니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손자들이 다른 집과 이 집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 데 이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이 이상했다.

죽은 자의 저주와 구역질이 날 것 같은 인생 속에서 할머니는 죽을 기력도 없이 병상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공포에 떠는 손자들을 다독거려 줄 기력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의 삶은 줄곧 그랬다. 생각하기조차 끔찍했던 일들은 죽음마저도 망각을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얼마 남지 않은 생명의 불길로 색깔 보는 일에 전념하였다.

"붉은 자주색을 조금 갖다 다오. 없으면 분홍색이라도 좋겠다."

그러면 며느리인 세스는 천 조각이나 심지어 혓바닥까지 내보이며 시어머니의 시중을 들었다.

색채를 즐기는 사람에게 오하이오의 가을은 몹시 황량했다. 하늘만 유일하게 맑았다. 그래도 세스와 어린 딸 덴버는 할머니의 시중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면서 어머니와 딸은 힘을 합해 집 안에서 일어나는 괴상한 일들에 임기응변식으로나마 대처해 나갔다. 뒤집혀진 변기, 궁둥이를 찰싹 때리는 보이지 않는 손과 싸워야만 했다.

손자들이 가출하고 얼마 안 되어 베이비 색스는 죽었다.

그 후, 세스와 덴버는 유령의 정체를 밝히기로 결심하였다. 유령과 의사소통이 되는 방법이 있다면 사태는 조금 호전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 모녀는 손을 잡고 소리쳤다.

"나와라, 나와! 정정당당하게 얼굴을 보여라!"

소리치자마자 옷장이 약간 움직이며 앞으로 밀렸다.

"베이비 할머니가 틀림없이 말리는 걸 거야."

열 살밖에 안된 덴버는 아직도 할머니가 죽은 것에 화를 내고 있었다.

"그럴까?"

세스가 눈을 크게 떴다.

"나오지를 않잖아요?"

"너는 유령이 갓난애라는 걸 잊은 모양이구나. 두 살도 채 못되어 죽었으니 말도 제대로 못 할거야."

"알아듣지도 못할까요?"

"글쎄, 그 애가 나오기만 하면 알아듣도록 설명해 줄 수 있을 텐데...."

모녀는 다시 옷장을 제자리로 밀어 넣었다.

"내가 그 애를 사랑한 것은..."

세스가 입을 열기 시작하자 다시금 그때의 광경이 떠올랐다.

 

다듬지 않은 묘석에는 분홍빛 반점이 흩어져 있었다.

"10."

남자가 말했다.

"10분간 나와 섹스를 하게 해주면 무료로 새겨 주지."

세스는 장례식 때 목사가 한 말을 전부 갓난애의 묘석에 새기고 싶었다. 그러나 '사랑받는 사람'이란 말만 새겨 넣는 데도 10분이 걸렸다. 결국 그녀는 묘비 옆에서 석공과 개처럼 관계를 가지면서 '둘도 없이 사랑받는 사람'이라고 더 새겨 넣었다.

갓난애였던 딸의 영혼이 이처럼 격렬한 노여움을 품게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묘석에 둘러싸여 석공의 아들이 보는 앞에서 개처럼 관계하는 것만으로는 속죄가 부족했던 것일까?

목이 잘려 나간 갓난아기의 노여움 때문에 목숨이 끊어지는 날까지 공포에 떨며 살아야 한다.

"이사를 간다면...."

언젠가 시어머니에게 말을 해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뭐가 달라진다는 거냐?"

시어머니는 그렇게 대답했었다.

"죽은 검둥이의 원한이 집 천장까지 가득 찬 집은 이 나라에 얼마든지 있단다. 그래도 우리 집의 유령은 갓난아기라서 차라리 재수가 좋은 편이지. 쓸데없는 소리 작작해라. 너에겐 자식이 셋씩이나 있잖니. 저승길에서 찾아와 행패를 부리는 건 한 명뿐이잖아. 그것을 고맙게 여겨라. 내게는 여덟 명의 자식이 있었다. 지금은 모두 유령이 되어서 누군가의 집을 괴롭히고 있겠지."

베이비 색스는 눈썹을 문질렀다.

"첫 번째 계집에는 빵 밑바닥이 탄 것을 무척 좋아했었지. 난 여덟이나 낳았는데도 그것밖에 기억나지 않아."

세스 자신도 죽은 갓난아기의 기억밖에 없었다. 버글러와 하워드에 대한 기억은 희미했다. 의식적으로 마음이 산란해지지 않도록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초원을 가로질러 뛰다시피 하여 펌프가 있는 우물에 이르렀다. 다리에 묻은 풀물을 씻어내기 위해서였다. 다른 일은 일체 머리 속에 없었다. 풀물을 씻어내는 데 온 정신을 집중시켰다. 지름길로 오려고 잡초가 우거진 초원을 달려왔기 때문에 풀이 무릎을 찌르는 것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한창 씻고 있는데 갑자기 첨벙하고 물이 튀는 소리가 났다. 웅덩이에서 물을 마시고 있는 개가 눈에 띄었다. 그 개를 보자 갑자기 스위트 홈 농장이 떠올랐다. 비명을 지르고 싶을 만큼 혐오스러운 농장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녀의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었다. 지옥도 이런 식으로 아름답게 보일 수 있는 걸까.

풀물의 얼룩이 지워지자 구두와 스타킹을 주워 들고 집으로 향했다.

농장의 모습을 떠올린 것이 그녀를 꺼림칙하게 만들었다. 아이들의 모습을 떠올리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그때마다 농장이 되살아났다. 그녀는 자신의 기억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꺼림칙한 기억을 더 하려는 듯 포치에는 스위트홈 농장의 마지막 사나이였던 포올 디가 앉아 있었다.

"포올 디 아니에요?"

그는 일어서며 웃었다.

"그게 뭐야? 원래 맨발인 건 알지만."

그의 목소리는 격의 없이 싱그러웠다.

"저 쪽 숲길에서 발을 더럽혀서요. 풀물 때문에."

그는 쓴 것이라도 먹은 듯 얼굴을 찡그렸다.

"풀물 얘기는 듣기도 싫어. 그건 딱 질색이야."

세스는 스타킹을 말아서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자아, 들어가요."

"여기가 좋아, 세스, 시원하잖아."

그는 다시 주저앉으며 길 건너 초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18."

그녀가 중얼거렸다.

"18."

그가 되풀이했다.

"18년 동안 걸어 다녔지. 나도 당신처럼 해봐도 괜찮을까?"

그는 그녀의 발을 보면서 구두끈을 풀기 시작했다.

"발을 물에 담글래요? 대야에 물을 떠올께요."

"아니, 괜찮아. 발을 호강시킬 수는 없어. 이 발로 방랑을 계속해야 할 테니까."

"금방 떠나다니, 안 돼요, 포올. 당분간 묵어가세요."

"가더라도 베이비 색스의 얼굴을 보고 가야지. 그녀는 어디에 있지?"

"돌아가셨어요."

"정말? 언제?"

"벌써 8년이나 되었어요."

"오랫동안 아프셨나? 고생하지 않고 돌아가셨다면 좋을 텐데..."

세스는 고개를 저었다.

"눈이 녹듯 편안하게 돌아가셨어요. 살아있는 것이 워낙 괴로웠으니까요. 당신을 만나지 못하고 가시다니..."

"이곳에 들른 건 그녀 때문인가요?"

"베이비 색스를 만나는 것도 여기에 온 이유 가운데 하나지. 가장 큰 이유는 당신 때문이야. 솔직히 말해서 요즘은 가는 장소를 가리지 않아. 주저앉아도 쫓겨나지 않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가지."

"당신 건강은 좋아 보이네요."

"악마의 장난이지. 녀석은 내 마음이 나쁜 짓을 생각할 때면 겉모양은 근사하게 보이도록 해 준다니까."

세스는 미소 지었다. 이런 투의 얘기는 오히려 그들다운 것이었다. 내내 그런 식으로 그들은 지내왔다. 세스가 남편 할리를 맞기 전부터 스위트 홈 농장 사나이들은 그녀를 누이동생처럼 다정하게 놀려대곤 했다.

머리카락이 한층 길어지고 눈동자에는 뭔가 기다리는 듯한 표정이 담겨져 있었다. 그것만 빼놓으면 사나이의 모습은 켄터키에 있었을 때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복숭아씨 같은 피부에 곧게 뻗은 등줄기.

평소에는 무표정하지만 인정스러운 사나이였다. 그는 자기의 표정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었다. 그의 민감한 감정변화는 주위 사람을 놀라게 할 정도였다.

"그이의 일은 내가 묻지 않아도 되겠죠? 얘기할 것이 있다면 먼저 얘기해 주실 거죠?"

발밑으로 시선을 떨군 세스는 또다시 플라타나스 숲이 떠올랐다.

"물론이지, 말해주고말고. 그러나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구. 할리의 죽음을 빼놓고 말이야. 그 일만은 당신이 알 필요가 없겠지. 당신은 그가 아직도 이 세상에 살아 있다고 틀림없이 믿고 있을 테지?"

"아니요. 그이는 죽었을 거예요.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남아 있는 것은 그의 모습을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베이비 색스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지?"

사나이는 세스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며 물었다.

"어머니도 마찬가지죠. 어머니의 자식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죽었을 거예요. 한 사람 한 사람이 숨을 거둔 날이나 시간까지도 느꼈다고 우겨대셨죠."

"할리가 죽은 것은 언제라고 말했었지?"

"1855년이에요. 내가 아이를 낳은 날이라고 말씀하셨죠."

"그래서 그 아이를 낳았군. 무사히 출산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임신한 몸으로 도망을 쳤으니까."

그는 킬킬거리고 웃었다.

"다른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기다릴 여유가 없었죠."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무사히 아이를 낳으리라고 자신도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벨벳천을 사러 가던 그 아가씨를 만나지 않았다면 절대로 무사히 낳을 수가 없었을 것이었다.

"혼자 몸으로 낳았단 말이지?"

그는 세스가 대견하기도 했지만 불쾌하기도 했다.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이, 할리 자신조차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 불쾌했던 것이다.

"거의 혼자서 해냈죠. 하지만 전부 혼자서 해낸 것은 아녜요. 백인 처녀가 도와주었어요."

"그렇다면 그 처녀는 자기 자신을 도운 셈이군. 그 처녀에게 신의 축복이 있기를!"

"오늘 밤, 자고 가도 좋아요, 포올 디."

"마지못해서 하는 초대같이 들리는데."

세스는 어깨 너머로 닫혀있는 문을 힐끔 쳐다보았다.

"진심이에요. 집 안이 지저분한 것만 양해해 준다면 좋겠어요. 자아, 들어오세요. 식사를 준비할께요. 그동안 덴버와 얘기나 나누세요."

포올 디는 구두를 한데 묶어 어깨에 둘러맸다. 그녀의 뒤를 따라문으로 들어서는 순간 빨간빛의 동그라미가 흔들리고 있었다. 동그라미 속으로 발을 들여놓자 그 원은 그를 꼼짝 못 하게 묶었다.

"손님이 있었구만."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속삭였다.

"사라졌다가 나타났다가 하곤 해요."

세스가 대답했다.

"난처하군."

그는 문을 지나 포치로 되돌아갔다.

"저 악령은 도대체 뭐지?"

"악령이 아니라 그냥 슬퍼하고 있을 뿐이에요. 자아, 들어가요. 상관 말고 어서 쑥 들어가 버려요."

그는 다시 한번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한 손에는 구두와 스타킹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스커트를 쥔 채 젖어서 번들거리는 다리를 드러내놓고 있었다.

할리의 애인이었던 소녀 시절의 세스는 강철같은 의지가 담긴 눈동자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켄터키에 있을 때는 머리카락을 내놓고 다니는 것도 본 적이 없었다. 지금은 그때보다 18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전보다 더 부드러운 느낌을 풍겼다. 드러난 머리카락, 홍조를 띤 조용한 얼굴, 그 두 개의 홍조는 자비의 마음에서 눈알을 뽑아낸 가면처럼 연상되었다.

그녀는 매년 임신을 하고 있었다. 모닥불 옆에 앉아서 도망칠 생각이라고 털어놓았던 해에도 임신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낳은 아이들 중 세 명은 도망자들이 탄 짐마차에 맡겨놓았다. 그 짐마차는 강을 건널 흑인들의 포장마차와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강을 건넌 다음에는 신시내티 근처에 사는 할리의 어머니에게 맡길 예정이었다.

그 비좁은 오두막 안에서 옷자락이 타는 냄새가 날 만큼 불 가까이에 몸을 구부려도 그녀의 눈동자는 조금도 모닥불 빛을 반사하지 않았다. 그 눈은 들여다볼 수 없는 두 개의 우물 같았다. 그래서 포올 디는 그녀가 그에게 말을 하고 있는 사이에도 여자를 쳐다보지 않고 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그곳에 없었기 때문에 그가 대신 들어주는 것이었다.

스위트 홈 농장의 주인 가너 씨는 죽었고, 그의 부인은 목에 주먹만 한 혹이 나서 누구와도 얘기할 수 없었다. 그녀는 불 가까이로 몸을 깊숙이 구부리고 스위트 홈 농장의 마지막 사나이 포올 디에게 그녀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농장에는 여섯 명의 노예가 있었는데 그 중 세스만 여성이었다. 남편이 죽었을 때 드러난 부채를 갚으려고 가너 부인은 아이처럼 엉엉 울면서 포올 디의 형을 팔아버렸다.

그리고 그 후 집안의 재건을 위해 새로 들어온 사나이가 있었다. 그 사나이는 포올 형제들의 궁지와 기를 꺾었고, 세스의 눈동자로부터 반짝반짝 빛나는 강철도 뽑아내어 모닥불의 불빛도 반사하지 않는 공허한 우물을 남겼다.

그러나 이제 그녀의 눈동자는 다시 빛나고 있었다. 그 얼굴은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싸여 따뜻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녀에게 이끌려서 문지방을 넘어 흔들리고 있는 빛의 빨간 원형 속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그녀의 말 그대로 그것은 슬퍼하고 있었다. 그 빛을 벗어나자 그 슬픔이 파도처럼 온몸에 퍼져와 그는 소리 내어 울고 싶어졌다.

"편안하게 돌아가셨다고 당신이 말했지."

그는 그녀의 말을 되풀이했다.

"베이비 색스의 혼은 아니에요."

"그럼 누구의 혼이지?"

"내 딸이에요. 아들들과 함께 먼저 도망치게 했던 딸이죠."

"살아남지 않았나?"

"그래요. 도망칠 때 뱃속에 있던 아이만이 내게 남겨진 유일한 아이예요. 아들들도 모두 베이비 색스가 죽기 전에 집을 나가버렸죠."

포올 디는 조금 전에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왔던 장소를 바라보았다. 붉은빛은 사라지고 없었으나 그 뒤에 떠도는 공기 속에는 흐느낌 같은 기척이 있었다.

"남자는 한 명도 없는 거야? 당신 혼자서 이 집에 살고 있는거야?"

"나하고 덴버하고요."

"당신은 그래도 괜찮아?"

"나는 이대로 괜찮아요."

그가 미심쩍어하는 것을 보면서 그녀는 계속해서 말했다.

"시내의 식당에서 주방일을 하고 있어요. 남몰래 삯바느질도 조금씩 하고 있구요."

바느질이라는 말을 듣자 포올 디는 그녀가 첫날밤에 입은 드레스를 생각해내고 웃었다.

농장에 처음 왔을 때 세스는 열세 살이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강철과 같았다. 남편의 엉뚱한 뜻에 따라 베이비 색스를 떠나보낸 가너 부인에게 세스는 알맞은 선물이었다.

스위트 홈 농장의 다섯 명의 사내들은 새로 온 소녀를 그냥 내버려 두기로 하였다. 그들은 젊었기 때문에 여자가 없는 생활을 송아지로 대신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 강철같은 눈동자의 소녀만큼은 그냥 내버려 두기로 하였다. 그 대신 그녀 쪽에서 고르도록 했던 것이다.

세스가 그중 한 사내를 고르는 데는 일 년이 걸렸다. 밤마다 짚단 위에서 잠을 못 이루고 뒹굴면서 강간까지 꿈꾸며 욕망에 불탔던 시절의 그 사내들이 욕망을 억제한 것도 그들이 스위트홈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농장주들이 고개를 옆으로 흔들며 경고한 것도 가너 씨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 사내들은 가너 씨의 자랑거리였다.

"당신네가 갖고 있는 것들은 반쪽짜리들이야. 젊은 사람 반, 늙은 사람 반, 겁쟁이 반, 불평만 하는 반쪽짜리들이지. 그렇지만 우리 스위트 홈 농장의 내 검둥이들은 한 놈도 빠짐없이 한 사람 몫을 하지. 사나이를 사서 사나이로 키웠어. 모두를 말이야."

"말도 안 돼, 가너. 검둥이는 한 사람 몫을 할 수는 없다구."

가너 씨는 미소를 만면에 퍼뜨리며 대꾸하였다.

"당신이 겁을 주면 반쪽짜리 사나이가 되지. 그러나 당신 자신이 사나이라면 자기의 검둥이도 사나이이길 바랄 텐데..."

"나 같으면 자기 마누라 주위에 그런 한 사람 몫의 검둥이는 가만 두지 않을 걸세."

이 말이야말로 가너씨가 기다리던 반응이었다.

"나도 그렇지."

그는 말했다.

"나도 그렇긴 하다네."

하고 거듭 말하면서 이웃 사람의 의도를 깨달았다. 그러면 평소처럼 심한 말다툼이 벌어지고 때론 주먹이 오가기도 하였다. 그럴 때마다 가너 씨는 켄터키 토박이로서 사나이 대장부의 기상을 마음껏 발휘한 뒤에 멍투성이가 되어 의기양양해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에게는 자신의 검둥이를 한 사람 몫의 사나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의 배짱과 지혜까 있었던 것이다.

분명히 그들은 한 사람 몫의 사나이였다. 포올 디 가너, 포올 에프 가너, 포올 에이 가너, 할리 세스.

그들은 모두 이십 대였다. 여자가 없어 암소와 성교하면서도 늘 새로 온 소녀가 자기를 택해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가너 씨를 따라간 어머니 베이비 색스 대신에 사들인 소녀가 세스였다. 할리는 어머니를 사기 위해 일요일도 일을 하였다. 아마 그것이 세스가 할리를 선택한 이유일 것이다.

어머니를 깊이 사랑하는 스물 다섯 살의 사나이는 어머니의 앉아 있는 모습이 보고싶다는 그 이유만으로 5년 동안 안식일을 바쳤으므로 남편으로 삼기에는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소녀는 할리를 선택하고 결혼할 때 입기 위해 남몰래 드레스를 만들었던 것이다.

"잠시 여기에 머물면 어때요? 단 하루도 18년의 공백을 메꿀 수는 없다구요."

두 사람이 앉아 있는 밤의 희미한 빛 속에 흰 계단이 2층으로 뻗어 있었다. 포올 디는 계단의 흰 광택에 시선이 끌리는 것을 느꼈다. 온몸의 모든 감각이 계단 위의 공기에 요기가 감돌고 있음을 그에게 알리고 있었다.

뜻밖에도 그 공기 속에서 통통한 다갈색 피부의 인형과 같은 작은 소녀가 나타났다. 세스가 소녀를 보자 상냥하게 포올 디에게 말했다.

"딸 덴버예요. 덴버야, 이 분은 포올 디란다. 스위트 홈 농장에서 오신 분이야."

"안녕하세요, 아저씨!"

"가너라고 한단다. 얘야, 포올 디 가너야."

"너를 만나서 기쁘구나. 마지막으로 네 엄마를 보았을 때 너는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 있었지."

"아직도 잡아당기죠. 치마 밑으로 기어들어 가기도 하구요."

세스는 미소지었다.

덴버는 계단 맨 아래칸에 선 채 부끄러움을 느꼈다. 다른 사람이 그들의 식탁에 앉은 것은 아주 옛날 일이었다. 백인 목사, 신문기자 등이 동정에 가득찬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눈에는 혐오스러운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 후로, 그러니까 베이비 할머니가 죽기 훨씬 전부터 방문객은 전혀 없었다.

덴버가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던 어머니 세스는 과묵하고 여왕처럼 행동하던 여자였다. 그런데 지금의 그녀는 소녀 같은 표정과 행동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어머니는 결코 시선을 피한 적이 없는 여자였다.

시내 한복판에 있는 식당 앞에서 한 남자가 말굽에 밟혀 죽었을 때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고, 어미 돼지가 방금 낳은 새끼 돼지를 잡아먹었을 때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갓난애의 영혼이 개를 들어올려 벽에다 내동댕이쳐서 다리가 부러지고 눈이 튀어나올 만큼 다쳤을 때도 어머니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고통으로 미쳐 날뛰는 개를 치료하면서도 흔들리지 않던 그녀가 지금, 눈앞에서 발목을 포개고 앉아 흔들거리며 딸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마치 성숙한 딸의 몸을 차마 똑바로 볼 수 없다는 것처럼.

더구나 어머니도 남자도 구두를 신고 있지 않았다. 덴버는 처음에 약간 부끄러웠으나 이내 외로워졌다.

오빠도 할머니도 떠났다. 친구도 없었다. 만약 어머니가 자기에게 눈을 돌려만 줘도 그녀에게는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덴버는 차라리 갓난애의 유령이라도 나타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귀여운 아가씨로군."

포올 디는 말했다.

"멋있어. 아버지를 닮은 귀여운 얼굴이로군."

"우리 아버지를 아시나요?"

"물론이지. 잘 알고말고."

"정말이에요, 엄마?"

그녀는 어머니의 애정을 되찾으려는 충동을 억제하면서 물었다.

"물론 알고 있지. 아까 말했잖아. 포올 디는 스위트 홈 농장 사람이라고."

덴버는 계단 끝에 앉았다. 두 사람은 두 사람만의 친밀감에 젖어서 그녀의 아버지가 이 자리에 없는 것이 아무 관계도 없다는 듯한 말투로 대꾸하였다.

덴버의 아버지 할리는 할머니의 사랑하는 아들이었고, 아직 돌아오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남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눈앞에 앉아 있는 낯선 사나이의 행방불명된 친구로 되어 있었다.

또다시 덴버는 갓난애의 유령이 나와 주었으면 하고 바랬다. 갓난애의 분노는 그녀에게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전에는 그녀를 파김치가 되도록 괴롭히곤 했는데...

"이 집에는 유령이 있어요."

덴버가 그렇게 말하자 두 사람의 반응은 즉각 나타났다. 두 사람만의 분위기는 어느 새 사라지고 어머니는 발을 흔들며 소녀같은 태도로 변했고, 남자의 눈에는 스위트 홈 농장의 기억이 금세 사라졌다.

"그렇다고 하더군."

포올 디는 대답했다.

"하지만 슬퍼하고 있다면서? 네 엄마 말로는 심술궂지는 않다더구나."

"?"

덴버가 대답했다.

"심술궂지는 않아요. 하지만 슬퍼하고 있는 것도 아니에요."

"그러면 도대체 어떻다는 거지?"

"억눌리고 있어요. 외로움에 억눌리고 있죠."

"그 말이 맞나?"

포올 디는 세스를 보았다.

"글쎄요. 외로울까요? 화를 내고 있을지도 모르죠. 하루종일 우리와 함께 지내고 있으면서 외롭다니, 이해할 수 없군요."

"당신의 그 어떤 것을 유령이 원하고 있는 게 틀림없어."

세스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주 어린 갓난애인데요, ."

"그래도 나한테는 언니에요."

덴버가 끼어들었다.

"그리고 이 집에서 죽었어요."

포올 디는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스위트 홈 농장 뒤꼍에도 목없는 신부가 나타나곤 했지. 기억하고 있어. 세스? 항상 그곳 숲속을 헤매고 다녔잖아?"

"잊을 리가 있어요?"

"스위트 홈 농장을 도망쳐 나온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농장 얘기를 그만두지 못하는군요. 그렇게 사랑스러운 곳이라면 차라리 그곳에서 살지 그래요?"

"덴버, 손님에게 실례야."

포올 디는 웃었다.

"맞았어. 맞는 말이야, 세스. 그렇지만 그렇게 사랑스러운 곳은 아니었지."

그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우리들이 살던 곳이에요. 모두 함께 말이에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추억은 있는 거예요."

그녀는 약간 몸을 떨었다.

"덴버! 아궁이의 불 좀 쑤셔주련?"

"친구가 왔는데 식사 대접을 해야겠지."

"나 때문에 공연한 수고를 할 필요는 없어.

포올 디는 말했다.

"빵 굽는 게 수고랄 게 있어요? 채소는 식당에서 가져온 게 있구요. 민물송어는 싫어해요?"

"세스만 좋다면 나는 괜찮아."

덴버는 그 말에 또다시 외로움을 느끼며 아궁이에 땔나무를 난폭하게 쑤셔댔다.

"오늘 밤에 자고 가면 어때요, 가너 씨? 당신과 엄마는 밤새껏 스위트홈 얘기를 하면 될 텐데요."

세스는 성큼성큼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덴버의 목덜미를 휘어잡으려 했으나 덴버는 고개를 숙이고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니? 이런 태도를 취하다니... 처음 있는 일이구나."

"꾸짖지 마!"

포올 디가 끼어들었다.

"덴버는 나를 생전 처음 보니까 그럴 테지."

"처음 보는 사람에게 실례되는 태도를 취해서 되겠어요? 안그러니 덴버? 무슨 일이지? 왜 이러는 거야?"

덴버가 여전히 몸을 떨면서 훌쩍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더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9년동안 흘려본 적이 없던 눈물이 그녀의 풍만한 가슴을 적시고 있었다.

"이젠 싫어, 싫단 말이야."

"뭐야? 뭐가 싫다는 거지?"

"이 집에서는 더 이상 살 수가 없다구요. 아무도 우리에게 말조차 걸지 않아요. 아무도 찾아와 주지도 않구요. 남자애들은 나를 싫어해요. 여자애들도 마찬가지지만."

"알았다, 알았어. 울지 말아라."

"그건 무슨 소리지?"

포올 디가 물었다.

"집 때문이죠. 사람들이 이 집을 싫어해요."

"아니에요! 집 탓이 아니에요. 우리들 탓이에요! 어머니 탓이라구요!"

"덴버!"

"가만 있어, 세스. 유령이 나오는 집에서 산다는 것은 젊은 아가씨한테는 고통스러운 일일 거야. 마음이 편할 리가 없지."

"다른 일과 비교한다면 그래도 편한 편이죠."

"생각해봐, 세스. 나는 이래뵈도 어엿한 어른으로서 대부분의 일은 이 눈으로 직접 보고, 이 몸으로 체험해 왔어. 그런 내가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거라구. 이사 가는 것이 좋겠어. 집주인은 누구지?"

덴버의 어깨 너머로 세스는 포올 디를 노려보았다.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일 텐데요?"

"집주인이 못 나가게 하는 거야?"

"그래요."

"세스!"

"이사는 가지 않겠어요, 절대로.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이 아이의 머리가 약간 이상해졌는데도 괜찮다고 우겨대는 거야?"

집안에서 어떤 소리가 났다. 모두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을 때 세스가 말했다.

"내 집에는 유령이 살고, 나에게는 이렇게 끌어안을 수 있는 딸이 있어요. 이제 도망치는 것은 지긋지긋해요.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부터도 두 번 다시 도망치지는 않겠어요. 자아, 앉아서 우리와 식사를 하든가, 우리를 내버려 두고 이 집을 나가든가 마음대로 하세요."

세스는 덴버를 데리고 거실로 나갔다. 포올 디는 조끼 주머니에서 담배 주머니를 꺼내 담배 끝을 말기 시작했다. 담배 끝을 만지작거리면서 거실에서 세스가 덴버를 달래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세스는 거실에서 나와서 그의 시선을 피해 똑바로 걸어 부뚜막 앞의 작은 탁자로 갔다. 그는 그녀의 등뒤로 흩어진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마음껏 바라보았다.

세스는 혀끝으로 손가락에 침을 바르고는 이내 밀가루를 떼어내어 그릇에 담았다. 그리고 익숙한 솜씨로 빵 반죽을 했다.

"젖이 나왔었죠."

세스는 말했다.

"덴버가 뱃속에 있었지만 갓난아기였던 딸에게 먹일 젖은 나왔어요. 그 아이를 하워드나 버글러와 함께 먼저 도망치게 했을 때, 미처 젖을 떼지 않았었거든요."

이번에는 반죽 한 덩어리를 방망이로 밀어서 넓게 폈다.

"누구든 내 모습을 보기 훨씬 전부터 젖 냄새를 맡고 난 줄 알았죠. 그리고 나를 보면 내 옷이 젖으로 젖어 있는 것을 보았지요. 젖이 새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어요. 내가 알고 있던 것은 나의 어린 딸에게 젖을 주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뿐이었어요. 나를 대신해서 그 아이에게 젖을 줄 수 있는 여자는 없었어요. 짐마차에 타고 있던 여자들에게 말해 두었어요. 2, 3일 뒤에 따라붙었을 때에 그 아이가 나를 잊지 않도록 헝겊조각에 설탕물을 적신 것을 빨려 달라고 부탁해 두었지요. 나도 그곳에 도착하기로 되어 있었어요."

"남자라서 별로 아는 것이 없지만..."

조끼 주머니에 담배 주머니를 집어넣으면서 포올 디가 말했다.

"그래도 젖먹이가 어머니와 오래 떨어져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

"그렇다면 젖이 퉁퉁 불은 여자가 어떠한 심정으로 아이를 먼저 떠나보내는가도 알고 있겠네요?"

"나무 얘기를 시작하던 참이었어, 세스."

"내가 당신을 만난 뒤 그 어린 녀석들이 그곳에 들어와서 내 젖을 훔쳐갔어요. 나를 꼼짝 못 하게 하고 말이에요. 가너 부인에게 그 녀석들이 한 짓을 일러바쳤죠. 마님은 혹 때문에 말을 할 수가 없었지만 그분의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어요. 그 어린 녀석들은 내가 일러바친 것을 알았지요. '선생'이란 자가 녀석들 가운데 하나에게 시켜서 내 등을 석류처럼 갈라질 때까지 매를 치게 했어요. 살이 부풀어 오르자 등은 나무처럼 되었죠. 지금도 등에 그대로 남아 있어요."

"놈들은 당신을 소가죽 채찍으로 쳤소?"

"그리고 또 내 젖을 훔쳐 갔어요."

"놈들이 당신을 채찍으로 때렸단 말이야? 임신한 당신을?"

"그리고 내 젖을 훔쳤어요!"

보기좋게 부풀어 오른 빵 반죽이 접시 위에 여러 줄 놓여졌다. 세스는 젖은 손가락으로 다시 한번 부뚜막을 만져보았다. 오븐 뚜껑을 열고, 빵을 얹은 접시를 그 속에 밀어넣었다. 뜨거운 오븐 옆에서 몸을 일으키려고 했을 때 포올 디의 기척과 그의 양손을 유방 아래에서 느꼈다. 그의 뺨이 등 가까이에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으나 느낄 수는 없었다.

포올 디는 덴버가 아궁이의 불 앞에서 눈물을 떨어뜨려도 놀라지 않았다. 세스가 자기 젖을 도둑맞은 얘기를 한 뒤에 울어도 놀라지 않았다. 등 뒤에서 그녀의 유방을 감싸며 그는 그녀의 등에 뺨을 비벼댔다. 그러면서 그녀의 비탄의 뿌리를 피부로 느꼈졌다. 드레스의 쟈크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그러면서 세스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쟈크가 히프 근처로 내려가자 조각처럼 변해버린 그녀의 등이 드러났다.

"아아, 신이여! 너무나 애처롭습니다!"

하고 생각했으나 말로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조각 하나 하나에 자기의 입술을 갖다 댔다. 등의 피부는 벌써 몇 년째 무감각한 채였으므로 세스는 입술의 감촉을 조금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알고 있었던 것은 자신의 유방이 타인의 손 속에 맡겨졌다는 사실이었다.

바로 그 순간 세스는 갑자기 움직이는 것을 멈췄다. 등의 아픔을 느낄 수가 있을 것 같았다. 그녀가 무너지듯이 쓰러져도 스위트 홈 농장 최후의 사나이가 있으므로 안전하게 보호해 줄 것이다.

지금 포올 디는 유달리 다리를 떨고 있었다. 불안 탓으로 다리가 떨리는 것이 아니라 마루바닥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삐걱거리며 밀고 당기고 있는 마루는 진동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집 자체가 위아래로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세스는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황급히 옷을 입었다. 막 입기를 마치자 덴버가 거실에서 뛰어 들어왔다. 눈에는 공포가 담겨 있었고 입 가장자리에는 애매한 미소가 띠어 있었다.

"이 녀석아! 조용히 해!"

하마터면 넘어질 뻔한 포올 디가 중심을 잡으려고 손을 뻗으면서 외쳤다.

"이 집을 가만 내버려 둬! 썩 꺼져버려!"

탁자가 그를 향해서 돌진하자 그는 탁자의 다리를 움켜잡았다.

"덤빌 테면 덤벼봐! 이 놈아! 그녀는 네가 없어도 골칫거리가 너무나 많은 사람이야. 이젠 그만둬!"

진동은 서서히 약해지더니 마침내는 진정이 되었다. 그러나 포올 디는 아직도 탁자를 휙휙 휘둘러댔다. 땀을 흘리고 거칠게 숨을 쉬면서 그는 벽에 몸을 기댔다. 세스는 아직도 부뚜막에 웅크리고 앉아서 구두를 움켜쥔 채로 있었다. 세 사람은 마치 한 사람의 피곤한 인간처럼 똑같이 숨을 쉬었다.

또 하나의 다른 호흡도 세 사람과 마찬가지로 지쳐 있었다.

진동을 일으켰던 장본인은 물러갔다. 덴버는 비틀비틀 걸어서 부뚜막이 있는 곳으로 갔다. 오븐에서 빵이 담긴 접시를 꺼냈다. 젤리병이 늘어서 있는 찬장이 넘어져 있었다. 빵과 젤리를 계단까지 갖고 나가서 그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 두 사람은 2층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조금도 머뭇거림 없이 그녀를 아래층에 혼자 남겨두고 올라가 버렸다.

오빠들이 보고 싶었다. 버글러는 스물두 살, 하워드는 스물세 살이 되었을 것이다. 평온한 시절에는 두 사람 모두 오빠다운 예의를 발휘하여 그녀에게 베개를 모두 양보해 주었었다. 하지만 그녀가 생각하는 것은 오빠와 셋이서 유령과 맞서 싸울 때의 일이다. 오빠들과 나란히 흰 계단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었을 때는 무척 즐거웠다. 그렇게 앉아서 오빠들과 함께 유령을 없앨 방법을 의논하곤 했었다.

지금 어머니는 덴버에게 남겨진 단 한 사람의 놀이 상대를 쫓아내려는 자와 2층에 있는 것이다. 덴버는 빵을 한 조각 젤리에 묻혔다. 천천히 맛도 모르고 비참한 기분으로 그것을 입에 넣었다.

 

서두르지는 않았으나 주저하는 기색도 없이 세스와 포올 디는 흰 계단을 올라갔다. 세스와 함께 육체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현실에 포올 디는 압도되었다. 분에 넘치는 행운에 사로잡혀 포올 디는 과거 25년의 기억을 순간적으로 버렸다.

세스의 선택을 기다리는 동안 남자들은 밤만 되면 꿈에 그녀를 그리고 동틀 무렵에는 암소와 교배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여자가 바로 그 소녀인 것이다. 상처 자국에 입맞춤한 것만으로 집이 흔들린 것이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이 집의 일부를 산산조각 나도록 때려 부쉈다. 지금 그는 입맞춤 이상의 것을 하려는 참이다.

2층의 창문은 벽이 아니라 경사진 천장에 끼워져 있었다. 여자는 방으로 남자를 인도해 들어가면서도 미처 준비가 되어 있지않다고 생각했다. 욕망을 상기할 수는 있었지만 그 움직임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두 손에 남아 있는 것은 강한 압력과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는 서투른 손놀림이었다.

옷을 벗기도 전에 끝나버렸다. 벗으려다 만 모양새로 숨을 헐떡이며 두 사람은 나란히 누워 있었다.

남자가 여자를 꿈에 보고 애타게 연모하던 시절은 너무나도 길었으며 아주 먼 옛날이었다. 빼앗기는 인생을 살았기 때문에 여자에게는 남몰래 키워온 꿈 따위는 한 가지도 없었다. 이제 두 사람은 후회를 되풀이하며 부끄러워서 말조차 할 수 없었다.

세스는 똑바로 누워 얼굴을 그에게서 돌리고 있었다. 곁눈질로 포올 디는 붕 떠 있는 것 같은 여자의 유방을 보고 역겨움을 느꼈다. 좌우로 퍼져 납작하게 눌린 것 같은 젖가슴이었다. 조금 전에 아래층에서 가슴을 양손으로 감쌌던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잊어버리면 되는 것이다.

스위트 홈 농장은 그 고장에서 나무가 가장 많은 농장이었다. 자기가 고른 나무 밑에서 자주 앉아 있었다. 때로는 혼자서, 또는 할리나 다른 사람들과 앉아서 얘기하곤 했다. 그 가운데 가장 빈번하게 같이 앉아 있던 것은 식소우였다.

식소우는 그 무렵에는 온건했으며 아직도 영어로 말하고 있었다. 불꽃같이 빨간 혀를 가진 식소우는 밤 사이에 고구마를 구울 수 있는지 실험을 한 적이 있었다. 동료가 점심을 먹기 위해서 일을 중단하고 도착할 그 시간에 고구마가 따끈따끈하게 먹기좋게 구워지도록 했다.

또 식소우는 여자를 만나기 위해서 30마일이나 멀리 나가는 데 걸리는 시간을 분 단위로 계산한 일이 있었다. 토요일에 달이 어디쯤 있는지를 확인하고 달이 그 위치에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출발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자의 오두막에 그녀가 일요일의 예배에 나가기 전에 도착했다. 그리고 아침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즉각 귀로에 올라 월요일 아침의 작업 개시 신호에 늦지 않게 돌아왔다.

17시간을 걷고 겨우 1시간 앉아 있다가 돌아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또 17시간을 걸었다. 하레이와 포올 디는 하루종일 식소우의 일을 가너 씨에게 들키지 않도록 신경 썼다. 모두들 그날은 고구마건 감자건 한 개도 먹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날은 점심시간에 식소우가 내내 시체처럼 잤기 때문이다.

포올 디는 발 위에 걸려 있는 천장을 바라보며 머리밑에서 깍지를 끼었다. 한쪽 팔꿈치가 세스의 어깨를 스쳤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사나이가 셔츠를 입고 있는 것을 잊었던 것이다. 자기 쪽에서 그에게 벗을 틈도 주지 않았던 것이 생각났다. 그녀 역시 패티코트를 벗을 여유도 없었던 것이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만났을 때는 구두와 스타킹은 이미 손에 들고 있으면서 신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그녀의 젖은 맨발을 보고 자기도 벗어도 좋으냐고 묻고는 신은 벗었었다. 그리고 그녀가 부엌에 섰을 때 맨발인 그녀의 신을 벗겼던 것이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두 사람 모두 지금쯤은 완전히 벗고 있어야 정상이다.

어쨌든 남자는 남자인 것이다. 이건 시어머니인 베이비 색스의 입버릇이다. 남자라는 것은 여자들이 지고 있는 무거운 짐을 다소라도 자기들에게 들게 해 달라고 권하기를 원하지만 여자들이 가벼워진 몸을 느낄 사이도 없이 그들은 여자의 상처 자국이나 고난을 샅샅이 점검한다. 그것이 끝나면 그들은 이 남자가 아까 했던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그녀는 일어나서 계단을 내려와 산산이 부서진 가구의 파편을 긁어모아 원상태로 붙였다. 이 집에서 이사하면 될 것 아니냐고 남자는 여자에게 말했던 것이다. 마치 집 한 채가 블라우스나 재봉틀 같은 것밖에 안 되는 듯한 말투였다.

집이라는 것을 이 집 외에는 가져본 적이 없던 그녀였다. 바닥이 땅바닥 그대로였던 오두막에서 이 집으로 온 것이다. 자신의 신분을 잊고 일할 수 있도록 주인의 부엌 얼마쯤은 자기 것이라는 기분이 될 수 있게 애착을 가지고 자기의 일을 사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는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집 밖에 있는 억센 남자들에게 겁먹을 필요도 없었다. 소녀의 오두막 바로 옆에서 잠자고 있어도 결코 밤에 기어들어 오지 않았던 그 다섯 남자들! 소녀의 모습을 발견하면 낡은 모자에 살짝 손을 대고 가만히 보고 있을 뿐이었다.

정결한 행주에 베이컨과 빵을 싼 도시락을 밭에 있는 다섯 사람에게 갖다주러 가면 그들은 그것을 그녀의 손에서 결코 직접 받지 않았다. 뒤로 물러서서 소녀가 음식을 한 그루의 나무 밑둥에 놓고 사라지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것이든 그녀로부터 직접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기들이 먹고 있는 모습을 그녀에게 보이는 것도 싫어했다. 두 번인가 세 번 그녀가 곧바로 돌아가지 않은 적이 있었다. 덩쿨이 우거진 곳에 숨어 관찰했던 것이다.

그녀가 물러나자 그들은 완전히 딴 사람처럼 되었다. 그렇지 않은 것은 식소우뿐이었다. 식소우가 웃은 것은 한 번뿐, 그것도 이 세상을 뜨는 마지막 순간에 웃었던 것이다.

할리는 물론 남자들 중에서 가장 친절했다. 베이비 색스의 여덟 번째 아이로 막내둥이였다. 어머니를 농장에서 사들여 자유롭게 해주기 위해서 자기의 몸과 노동을 바쳤다. 하지만 결국은 할리도 보통 남자에 불과했다.

"남자는 어차피 남자인 거야."

베이비 색스는 말했다.

"그럼 아들은 뭐냐고? 글쎄, 아들이란 보통 사람이지."

그녀의 말에는 몇 겹의 의미가 숨겨져 있었다. 왜냐하면 베이비 색스는 일생동안 사람들이 체커의 말처럼 이리저리 움직여지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스 역시 똑같았다. 베이비 색스가 사랑한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그녀가 알고 있었던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도망치지 않고 죽지도 않았으면 모두 반드시 날품 임대로 보내진다.

그런 연유로 베이비 색스의 여덟 아이들은 여섯 명의 아버지가 있었다. 구역질 나는 인생이라고 그가 말하는 것도 당연했다. 할리를 가장 오랫동안 그녀의 슬하에 둘 수가 있었다. 두 딸이 영구치가 생기기도 전에 먼 곳으로 팔려 갔다는 사실을 믿어야 하는 불행을 할리가 메꾸어 주었다.

세 번째 아이를 자기 슬하에 두게 해준다는 조건으로 작업 감독과 4개월 동안 관계를 해야만 하는 비참함을 겪었다. 그러나 결국 갓난애는 이듬해 봄에 목재와 물물교환으로 거래되었다. 그녀를 임신시키지는 않겠다고 약속만 해놓고 감독은 임신하게 했다. 그 아이를 사랑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고 다른 아이까지도 그녀는 사랑하지 않으리라고 마음먹었다.

"신은 그렇게 하리라고 생각한 것을 반드시 빼앗아버린다."

그녀는 말했다. 그 말대로 신은 빼앗아 갔다. 그 뒤에 그녀에게 할리를 주었던 것이다. 할리는 그녀에게 자유를 주었으나 그때의 자유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했다.

세스는 6년간이나 결혼생활을 보내는 놀라운 행운을 누렸다. 그녀가 낳은 아이들은 같은 남자를 아버지로 가졌던 것이다. 스위트 홈 농장이 진짜 사랑스런 집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가 무모하게도 그 사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세스는 몸을 엎드리려고 하였으나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포올 디의 주의를 자신에게 돌리고 싶지 않았으므로 발목을 꼬기만 했다. 그래도 포올 디는 세스의 숨소리가 달라진 것도, 그녀가 몸을 움직인 것도 알아차렸다. 한 번 더 천천히 하려고 생각했으나 이내 욕망은 사라졌다.

실은 상쾌한 기분이었다. 이 여자를 안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무사히 넘어간 것이다.

이 일은 식소우나 할 법한 일이다. 그가 30마일의 여자와의 밀회 준비를 했을 때와 상황이 같다. 그것을 실행하는 데에는 3개월이 걸렸고 길을 두 번 왕복하는 것이 필요했다. 30마일의 3분의 1까지 나와서 그가 알고 있는 장소까지 오도록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정확히 몇 시에 출발하면 되는지 괜찮으니까 와라 하는 신호는 이렇게, 위험하다 가까이 오지 마라 하는 신호는 저렇게 휘파람을 불어 신호로 들려주었다. 두 사람 모두 자기 자신의 볼 일로 어딘가 외출하는 일 따위는 허용되지 않았다. 30마일의 여자는 벌써 열네 살이어서 누구에게 배당될지 결정되어 있었다.

식소우가 도착해 보니 여자는 아직 와 있지 않았다. 휘파람을 불었으나 대답은 없었다. 그는 기다렸다. 그녀는 그래도 오지 않았다. 그녀의 신상이 걱정되고 무서워져서 그녀가 찾아올 방향으로 걸어갔다. 3, 4마일 가서 멈춰 섰다. 이런 식으로 계속 걸어 보았자 만날 가망이 없기 때문에 선 채로 방법을 생각했다.

뭔가 조짐이 없을까 하고 귀를 기울이니 훌쩍훌쩍 우는 소리가 한 번 났다. 소리가 난 곳으로 몸을 돌려 소리가 나기를 기다렸더니 또 들렸다. 얼떨결에 조심성도 없이 그는 여자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다. 그에 대답한 여자의 목소리는 생명 그 자체처럼 들렸다. 죽음과는 관계가 없는 소리였다.

"움직이지 말아!"

그는 외쳤다.

"내가 찾아낼 테니까 잘 들리게 숨을 쉬어."

그는 찾아냈다.

여자는 남자가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으로 믿고 울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들의 밀회 장소까지 가기에는 너무 늦었으므로 두 사람은 그 자리에 누웠다. 그 뒤에 남자는 여자의 종아리에 뱀이 문 상처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작은 상처를 냈다. 그렇게 해놓으면 작업장에 늦어도 그런 대로 변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자는 강을 따라 돌아가면 지름길이 된다고 말하면서 가는 길을 자세히 가르쳐 주고 여자를 배웅했다. 그가 큰길로 나왔을 때 하늘은 꽤 희부옇게 변했는데도 옷은 아직도 손에 든 채였다.

갑자기 구불구불한 길 저쪽에서 한 대의 짐마차가 나타나 그를 향해 돌진해 왔다. 마차를 몰던 남자가 눈을 부라리며 채찍을 쳐들었고 옆자리에 있던 여자는 얼굴을 감쌌다. 하지만 순간 식소우는 채찍 끝이 원를 그리며 그의 엉덩이에 맞고 풀어지기보다 먼저 숲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는 자초지종을 그만의 독특한 화술로 얘기해주어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울리고 웃겼다. 식소우는 밤이 되면 춤추러 숲으로 들어갔다. 혈관이 막히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사람 눈에 뜨이지 않게 혼자서 그는 춤을 추었다. 네 명의 남자들 가운데 춤추고 있는 그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래도 모두들 상상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있었던 것은 영어는 비전이 없다면서 식소우가 영어를 하는 것을 그만두어 버리기 이전의 일이었다.

세스의 얼굴은 남달리 매혹적이지는 않았다. 그를 쉴새 없이 경계시키고 그러면서도 가슴을 설레게 한 것은 세스의 눈동자였다. 그 눈동자가 없었다면 그녀의 얼굴을 허둥대지 않고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가 지금 하고 있는 것처럼 가만히 눈동자를 감은 채 있어 주기만 한다면 가능할 것이다. 아니, 그건 아니다. 반할 만한 그녀의 입이 있었다. 할리 녀석은 자기 마누라가 근사하다는 것을 전혀 몰랐던 것일까?

두 눈을 감은 채 세스는 얼굴에 남자의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 상대의 눈에 틀림없이 비치고 있을 자기의 여윈 얼굴이 그림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응시에 조소하는 기색은 전해지지 않았다.

할리와 헤어진 이래 자기를 이렇게 찬찬히 보아주는 남자는 없었다. 사랑스러운 듯이 보고 있는 것도 아니고, 정열을 담아 보고 있는 것도 아니다. 마치 옥수수 열매가 잘 여물었는지 살펴보는 것 같은 진지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할리는 남자라기보다 오빠에 가까웠다. 그가 보여준 자상함은 남자가 '이건 내 여자다'는 태도에서 나왔다기보다 가족의 안전을 지키려는 마음씨에서 나온 것 같았다. 몇 년 동안에 걸쳐 두 사람이 밝은 대낮에 서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일요일뿐이었다. 나머지 6일은 어둠 속에서 얘기하고 만졌다. 그리고 먹기도 했다.

그리고 할리가 찬찬히 살피듯이 세스를 바라보는 폼은 마치 밝은 햇빛 아래서 본 것을 그림자로밖에 볼 수 없는 나머지 6일을 위해 차곡차곡 챙기고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그에게는 거의 시간이 없었다. 낮에는 스위트 홈 농장에서의 정해진 일을 하고 끝난 뒤의 시간과 일요일의 오후는 어머니를 산 빚을 갚기 위해 일하고 있었다.

할리가 세스에게 아내가 되어 달라고 청했을 때 세스는 행복에 설레이면서 승낙했다. 그렇지만 그다음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서 생각에 잠겨버렸다. 농장의 여자는 그녀와 가너 부인뿐이었기 때문에 세스는 가너 부인에게 물어보았다.

"할리와 나는 결혼하고 싶어요."

"그렇다며?"

그녀는 미소 지었다.

"할리가 가너에게 보고했어. 너 벌써 임신했니?"

"아니에요."

"그럼 곧 그렇게 될 거야. 그런 것은 알고 있지?"

", 마님."

"할리는 상냥해. 틀림없이 네게 잘해 줄 게다."

"하지만 저희는 결혼하고 싶다고 말씀드리고 있는 거예요."

"넌 방금 그렇게 말했어. 그리고 난 좋다고 말했고."

"결혼식은 어떻게 되는 거죠?"

가너 부인은 주걱을 놓았다. 조금 소리 내어 웃으면서 세스의 머리에 손을 댔다.

"귀여운 녀석!"

하고 말했다. 그리고 그뿐이었다.

세스는 몰래 드레스를 짓고, 할리는 그녀의 오두막 벽의 못에다 자기 말의 고삐를 매었다. 그리고 흙바닥 위에 깐 짚단 위에서 세 번째 관계를 가졌다. 최초의 두 번은 작은 옥수수밭을 신방으로 삼았다. 옥수수는 사람도 가축도 먹을 수 있으므로 가너 씨가 다른 작물을 심지 않고 둔 밭이었다.

할리와 세스는 자기들의 모습은 충분히 감춰지리라고 믿고 있었다.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리 위에서는 옥수수 이삭이 흔들렸다. 그리고 그것이 모두의 눈에 띄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몰랐다.

세스는 자기와 할리의 미련한 짓을 생각하고 미소지었다. 까마귀마저 눈치채고 구경하러 왔던 것이다. 꼬고 있던 발목을 풀면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상대가 송아지에서 소녀로 바뀌었다고 해도 생각했던 것만큼 대단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포올 디는 생각했다. 할리가 생각했던 것만큼 대단한 변화가 아니다. 그녀의 거처를 버려두고 옥수수밭을 선택한 것은 세스를 놓친 다른 남자들에게 보여준 친절이었다. 할리가 세스를 위해서 사람 눈에 띄지 않는 장소를 물색한 결과가 동료들에게 자기들 모습을 드러내 보이고 말았던 것이다. 바람도 없는 날에 옥수수밭에 이는 잔물결을 아무도 놓치지 않았다. 할리를 뺀 나머지 사람들은 물을 머리서부터 끼얹고 있었다.

포올 디는 한숨을 쉬고 몸을 돌렸다. 세스도 그것을 기회로 위치를 바꿀 수가 있었다. 포올 디의 잔등을 보면서 그녀는 옥수수 대가 꺾여 할리의 등을 덮쳤던 일과, 자기가 쥐고 있었던 옥수수 껍질과 비단실 같은 수염도 생각했다. 그 비단 같은 수염의 감촉은 지금도 생생했다.

단단히 겹겹으로 싸인 껍질을 벗길 때마다 찌지직 벗겨지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그때마다 늘 옥수수가 아파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겉껍질이 한 장 벗겨 내려지면 나머지는 쉽게 벗겨져 내린다. 끝내는 나신이 된 옥수수 열매를 수줍은 듯 그에게 내맡겼다. 매끄럽게 흐트러진 수염은 정말 비단 같았다. ! 매끄럽고 야들야들하던 그 옥수수수염.

 

덴버의 비밀은 달콤한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코롱 향수의 존재를 알게 되기까지는 비밀 장소에 있는 어떤 향내 나는 풀초가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처음 한 병은 선물 받은 것이고 두 번째는 어머니 것을 몰래 갖고 나와 비밀의 숲속에 감추어 두었는데 얼어서 깨진 것이다. 겨울이 갑자기 와 그대로 8개월이나 묻혀 있었던 것이다.

남북전쟁 중에 미스 보드윈이라는 백인 여자가 집에 방문했다. 어머니와 덴버에게는 크리스마스용 향수를, 남자아이들에게는 오렌지, 할머니에게는 한 장의 따뜻한 숄을 갖다준 해였다. 죽은 사람이 많은 전쟁 얘기를 하면서도 미스 보드윈은 밝은 얼굴이었다.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고 목소리는 남자음성처럼 컸으며 몸은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덴버도 수풀 속에서 이렇게 좋은 향기를 내며 싱싱할 수가 있었다. 124번지에서 뒷길을 걸어가면 숲으로 차단된 좁은 들판이 있었다. 그 숲 건너편에는 강이 흐르고 있었다. 숲으로 들어가면 들판과 강의 중간에 크고 굵은 다섯 그루의 나무가 둥글게 심어져 있었다. 그 나무는 지상 4피트나 되었는데 가지를 뻗어 둥근 방을 이루고 있었다.

몸을 구부려 덴버는 그 둥근 방에 기다시피 하여 들어갔다. 안에 들어가면 넉넉히 등을 펴고 설 수 있었다.

처음에는 꼬마 계집애의 소꿉장난으로 시작되었으나 그녀의 희망이 바뀜에 따라 놀이도 바뀌었다. 목이 막힐 듯한 향기가 피어났다. 조용하기 때문에 혼자 있을 수 있었고, 절대로 남에게 들킬 염려가 없었다. 얼마 안 되어 이 장소는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중심지가 되었다. 그 비밀의 장소에서 상처받은 세계의 아픔으로부터 격리되면 덴버의 상상력은 활발히 나래를 펴는 것이다. 원하는 것이 차례차례 떠올랐는데 그것을 하나하나 채울 수가 있었다. 고독에 지쳐 있었으므로 이러한 상상력의 나래는 그녀에게 꼭 필요했던 것이다. 정말로 지쳐 있었다.

덴버는 창문을 통해 어머니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것은 보기 드문 일은 아니었다. 한 벌의 하얀 드레스가 어머니와 나란히 무릎을 꿇고 그 소매를 그녀의 허리에 감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덴버가 자기의 탄생 장면을 생각하게 된 것은 그 드레스의 소매 때문이었다. 그 드레스와 어머니의 모습은 사이좋은 성인 여자 두 사람이 나란히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한 사람(드레스 쪽)이 또 한 사람을 도와주고 있다.

창에서 떨어져 걷기 시작한 덴버는 어머니의 얘기를 떠올렸다. 그 집에는 입구가 하나밖에 없었으므로 뒤꼍에서 입구로 가려면 집 주위를 한 바퀴 돌아야 했다. 그리고 덴버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로 가기 위해서는 훨씬 먼 곳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울창하게 우거진 숲속에서 어머니는 혼자서 산 속을 헐떡이며 걸어갔다. 치료를 받았어야 했을 발로 세스는 기를 쓰면서 걷고 있었다. 그 발은 부어올라 발등의 모양도 알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더구나 발목에는 감각도 없었다. 발끝에 붙어 있는 것은 생살 덩어리이고 다섯 개의 발톱이 가리비 조개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래도 세스는 멈출 수가 없었다. 멈춰서면 작은 영양(羚羊)이 뿔로 그녀의 자궁을 찌르거나, 발굽으로 자궁을 할퀴기 때문이었다. 걷고 있는 동안에 영양은 풀을 뜯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임신 6개월의 몸으로 걸었다. 주전자 옆에서 교유기를 돌리면서 가만히 서 있어야 할 다리였다. 끈적거리며 쉰 냄새를 내는 젖이 옷 밖으로 새어나왔기 때문에 하루살이에서부터 메뚜기까지 온갖 작은 곤충이 몰려들었다. 언덕의 기슭에 당도했을 무렵에는 벌레를 쫓아버리는 일은 이미 오래전에 그만두었다. 머릿속에서 윙윙 울리는 소리는 멀리서 들리는 종소리처럼 여겨졌다.

젖꼭지와 작은 영양을 제외하고는 살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침내 옆으로 누웠다.

"아아, 이젠 더 이상 한 발짝도 앞으로 내딛지 못하겠구나."

세스는 뱃속에 있는 애한테 얘기했다.

죽음의 느낌이 있다면 이것이 바로 그랬다. 꽤 어렸을 때 스위트홈 농장에 오기 전에 자기 멋대로 만들어 낸 것이 기억 속에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자기가 태어난 장소에 대해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노래와 춤뿐이었다. 낳아준 어머니조차 기억에 없었다. 갓난애를 지키고 있던 여덟 살 된 아이가 손가락으로 가리켜준 적이 있었다. 그런데도 등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에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더 이상 세스는 아무 생각도 할수 없을 만큼 지쳐 있었다.

의식을 잃기 직전 어떤 사람의 인기척을 들었다. 세스는 반갑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다.

"거기 누가 있나요?"

떨리는 목소리로 가까스로 말했다.

나타난 것은 백인 여자애였다.

"어머나, 검둥이가 있네!"

그녀는 굉장히 놀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이름은 에미라고 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 쇠고기와 육수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팔은 사탕수수 줄기 같았고, 네다섯 명의 머리를 충분히 덮을 만큼 머리카락이 길었다. 둔하게 움직이는 눈은 무엇을 보든 간에 잽싸게 보는 일이 없었다. 반면 쉬지도 않고 재잘대기 때문에 얘기하면서 어떻게 숨을 쉬는지 이상할 정도였다. 그리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사탕수수 같은 팔은 쇠처럼 단단했다.

"당신은 내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무서운 모습을 하고 있군. 이런 산속에서 뭘하고 있는 거지?"

숲속에 웅크린 채 자기는 영락없는 뱀의 형상을 하고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뱀 같은 자세로 세스는 입을 열었으나 불쑥 나온 것은 진실이었다.

"도망치고 있어요."

세스의 말은 따끔거리며 아픈 혀 때문에 정확하지도 못했다.

"그 발로 도망치고 있다구? 저런 하느니 맙소사!"

그녀는 주저앉아 세스의 발을 빤히 훑어보았다.

"뭔가 갖고 있는 것 없어요? 먹을 것 같은 것."

"아니."

세스는 몸을 움직여 앉으려고 했으나 무리였다.

"배가 고파서 죽을 지경이에요."

소녀는 눈을 두리번거리며 자기 주위의 녹음을 살폈다.

"월귤나무 열매가 있지 않나 생각했는데... 그런 느낌이 들었거든. 그래서 이쪽으로 와본 거라구. 그런데 검둥이 여자를 만나다니! 놀랬어. 월귤이 있었더라도 새가 먹어 버렸겠지만, 당신은 월귤을 좋아해?"

"나 아기를 낳을 것 같아요, 아가씨."

에미는 세스를 보았다.

"그렇다는 건 식욕이 전혀 없다는 뜻인가요. 하지만 난 뭔가 입에 넣어야겠는데..."

다섯 손가락으로 머리를 빗어 내리며 그녀는 다시 한번 눈앞의 풍경을 즐겼다. 먹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납득하자 일어나서 가려고 했다. 그때 숲속에 외톨이로 남겨지게 된다고 생각하니 세스는 덜컥 겁이 났다.

"어디로 가요?"

그녀는 돌아보더니 갑자기 불이 켜진 듯이 눈을 반짝 빛내며 세스를 보았다.

"보스톤요. 벨벳을 사려구. 윌슨이라는 가게로. 사진을 보았는데 그곳에는 최고로 예쁜 벨벳이 있더군요. 내가 그걸 사면 가게 녀석들은 믿지 않겠지만 난 반드시 사고 말겠어요."

세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른 한 쪽 팔꿈치에 몸무게를 실었다.

"당신의 어머니는 당신이 벨벳을 사러 나온 것을 알고 있나요?"

소녀는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손으로 넘겼다.

"우리 엄마는 이 나라에 건너왔을 때의 배삯을 지불하는 대신 그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일했어요. 그리고서 내가 태어났고 그 뒤 곧 죽어버렸다구요. 그 사람들은 나더러 일해서 모두 갚으라고 말했어요. 나는 열심히 일했어요. 하지만 이젠 나를 위해 벨벳을 갖고 싶어요."

두 사람은 똑바로 얼굴을 마주 보지 않았다. 얼굴을 본다고 해도 똑바로 눈을 드러내 보지는 않았다. 그래도 두 사람은 실속없는 수다를 떨 듯이 극히 자연스럽게 얘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보스톤이라구요?"

세스가 말했다.

"먼가요?"

"무척요. 100마일, 더 될지도 모르지만."

"가까운 곳에도 벨벳은 있잖아요."

"보스톤 것과는 천양지차예요. 보스톤 것은 최고라구요. 내가 그 천으로 옷을 해 입으면 정말 멋있을 거예요. 이봐요, 벨벳을 만져본 적이 있어요?"

"아니요. 벨벳이라는 것은 만져본 적도 없어요."

목소리 탓인지 아니면 벨벳 탓인지 세스로서는 알 수 없었으나 백인 소녀가 얘기하는 동안 뱃속의 아기는 잠자고 있었다. 한 번도 발로 차지 않았기 때문에 행운이 오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본 적은 있나요?"

소녀는 물었다.

"틀림없이 본 일조차 없겠지."

"봤더라도 벨벳이라는 것을 몰랐을 거예요. 어떤 건가요? 벨벳이라는 것은."

에미는 세스의 얼굴 위에 자신의 두 눈을 끌고 다니듯이 느릿느릿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 무슨 이름으로 불리웠죠?"

스위트 농장에서 아무리 멀리 와있다고 해도 최초로 만난 사람에게 본명을 말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었다.

"루우."

세스는 대답했다.

"루우라고들 불러요."

"그럼 루우, 벨벳이라는 것은 말예요, 세계가 막 태어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거예요. 청결하고, 새롭고, 물론 맨질맨질하고. 내가 본 벨벳은 갈색이었어요. 하지만 보스톤에는 모든 색이 다 있어요. 카마인. 이건 빨강이란 뜻인데 벨벳 얘기를 할 때는 카마인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예요."

소녀는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그리고 보스톤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너무도 시간을 낭비해버렸다는 듯이,

"어서 가야지."

그녀는 중얼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숲속을 헤치고 걸어나가며 소녀는 세스에게 소리쳤다.

"이제부터는 어떻게 할 작정이에요? 거기 그렇게 뒹군 채 아기를 낳을 건가요?"

"일어설 수가 없어요."

세스가 대답했다.

"뭐라구요?"

소녀는 멈춰 서서 이쪽을 보고 다시 물었다.

"일어설 수가 없다고 말했어요."

에미는 팔로 코를 가로로 문지르고 나서 느릿느릿 세스가 누워 있는 곳으로 되돌아왔다.

"저쪽에 집이 있는데."

그녀는 말했다.

"집이요?"

"그래요, 그 앞을 지나왔거든요. 사람이 살고 있는 것 같은데 보통 집과는 다르지만 말예요. 비를 피하는 헛간 같은 집이에요."

"여기서 한참 가야 하나요?"

"헛간이라도 없는 것보다 낫겠죠. 여기서 밤을 새면 뱀에게 당하고 말 거예요."

"가고 싶으면 가요. 나는 걷기는 커녕 일어설 수조차 없으니까. 게다가 한심스럽게도 아가씨, 나는 기는 것마저도 할 수 없어요."

"할 수 있어요, 루우. 자아 어서 와요."

에미는 이렇게 말하더니 머리카락을 흔들며 오솔길을 향해 행진을 했다.

그래서 세스는 기고, 에미는 그녀를 따라 걸었다. 세스가 휴식이 필요할 때는 에미도 멈춰 서서 보스톤이나 벨벳, 그리고 맛있는 음식 얘기를 다시 계속했다. 헛간을 목표로 보기 흉한 포복 행진을 하는 동안 내내 뱃속의 아기는 단 한 번도 뛰지 않았다.

두 사람이 헛간에 다다랐을 때에는 옷은 닳고 벗겨져 있었다. 세스의 몸 가운데 상처 없이 성한 것은 머리를 감싼 천뿐이었다. 무릎은 피투성이었고 감각은 전혀 없었다. 가슴은 마치 두 개의 바늘꽂이 같았다.

벨벳과 보스톤과 맛있는 음식 얘기가 그녀를 무작정 나아가게 했던 것이다. 이대로 죽어서 6개월된 뱃속의 아이까지 죽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헛간에는 낙엽이 가득 쌓여 있었다. 에미는 그것을 긁어모아 세스의 이불로 삼았다. 다음에 그녀는 돌을 모아 그 돌을 낙엽으로 덮어 세스에게 발을 얹게 했다.

"너무 부어올라서 발을 잘라낸 여자를 알고 있는데..."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세스의 발목에 손바닥을 톱날처럼 놓더니 절단하는 시늉을 해보였다.

"쓰윽싹, 쓰윽싹, 쓰윽싹."

"나는 예전에는 몸이 예뻤어요. 물론 팔도. 비바강에서 고기를 잡으며 살았던 적이 있어요. 비바강의 메기는 영계처럼 맛있죠. 그래서 거기서 낚시질을 하고 있었는데 바로 가까이에 검둥이가 둥둥 떠 있었어요. 물에 빠진 시체는 좋아하지 않아. 당신은 어때? 당신 발을 보고 있으면 그때의 시체 생각이 나요. 꼭 당신과 똑같이 팅팅 부어 있었으니까."

그리고서 그녀는 마법을 썼다. 세스의 발 끝과 뒤꿈치를 들어 올렸다. 세스가 짜디짠 눈물을 흘리며 울 때까지 주물렀던 것이다.

"차츰 더 아파질걸요."

"죽은 것이 소생할 때는 무엇이든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니까."

 

그것은 어떤 경우든 진실이라고 덴버는 생각했다. 아마도 어머니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있던 그 하얀 드레스도 아픔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하면 갓난아기의 유령은 뭔가를 계획하고 있다는 얘기가 될지도 모른다.

덴버가 현관문을 열었을 때 세스는 거실을 나가는 중이었다.

"하얀 드레스가 어머니에게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어요."

덴버는 사실대로 말했다.

"하얀? 어쩌면 시트로 만든 내 드레스일지도... 자세히 얘기해 보렴."

"하이네크였어요. 등에 줄줄이 야릇한 단추가 붙어 있고."

"단추라구? 그럼 시트로 만든 드레스가 아니야. 입는 옷에 단추를 달아본 적이 없으니까."

"베이비 할머니는 어땠어요?"

세스는 고개를 저었다.

"할머니는 단추를 채우지 못하셨어. 구두 단추조차도 끼울 줄 모르셨거든. 그 밖에 무엇이 있었니?"

"뒤에 풍성한 것을 붙이고 있었어요. 앉으면 밑에 깔릴 정도가 되는 곳에."

"스커트에? 허리받이였을까? 허리받이가 붙은 드레스였니?"

"뭐라고 하는 건지는 모르지만."

"주름이 잡혀 있는 것 같았니? 허리보다 아래쪽에?"

"글쎄요..."

"부자집 귀부인의 드레스로군. 실크였니?"

", 면이었던 것 같아요."

"아마도 라일직물일 게다. 하얀 면의 라일 직물. 그것이 나에게 매달려 있었단 말이지? 어떤 식으로?"

"엄마와 똑같은 자세로요. 엄마와 똑같았어요. 엄마가 기도하고 있는 동안 내내 엄마 옆에 무릎을 꿇고 있었어요. 한쪽 팔을 엄마 허리에 감고."

", 이상하구나."

"무엇을 기도하고 있었어요, 엄마?"

"뭔가를 빈 것은 아냐. 나는 이젠 기도하지 않아, 말을 할 뿐이지."

"무슨 말을 했나요?"

"얘기해도 몰라, 이 꼬마 아가씨야."

"아녜요, 알아요."

"시간 얘기를 하고 있었던 거야. 시간을 믿는다는 것은 나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이야. 어떤 것은 자꾸자꾸 지나가 버리고, 어떤 것은 줄곧 그대로 멈춰 있어. 지나가지 않는 것은 내가 되풀이하여 생각하는 탓이라고 여겼어. 알겠니? 어떤 것은 깡그리 잊어버려. 하지만 절대로 잊지 않는 것도 있어. 바로 장소인 거야. 장소가 아직 거기에 있는 거라구. 집이 불에 타면 집은 사라지지만, 그 장소는 머물러 있는 거야. 더욱이 나의 되살아나는 추억 속에 머물 뿐만 아니라 현실로써 이 세상에 머물러 있는 거야. 그러니까 말이다. 설사 내가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도 이 세상에 남는다는 얘기야. 그것이 일어났던 장소에 그대로 존재하는 거라구."

"다른 사람 눈에도 그것이 보이나요?"

덴버가 물었다.

"물론 보이지. 물론 보이고말고. 보인다구. 어느 날 네가 길을 걷고 있으면 뭔가가 들리기도 하고 뭔가 일어나는 것이 보이기도 해. 생생하게 말이야. 그 장소는 현실 속에 머물러 있는 거야. 결코 지나가지 않아. 설사 농장 전체가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남기지 않고 사멸해도 한 번 일어나버린 자취나 모양은 여전히 거기에 있는 거야. 그뿐만 아니야. 만약 네가 그곳에 가서 사건이 일어난 장소에 서면 사건은 다시 일어나는 거야. 너에게도 현실이 되는 거지. 그곳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어.

그러니까 말이다 덴버, 절대로 그곳에 가면 안 되는 거야. 왜냐하면 완전히 끝난 일이라도 역시 그것은 영원히 그곳에 머물면서 너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 자식들을 한 명도 남김없이 그곳에서 데리고 나온 거야."

덴버는 손톱을 콕콕 찔렀다.

"만약 말이에요, 그것이 아직도 일어난 곳에 있으면서 기다리고 있다면 무엇이든 결코 죽지 않게 되겠네요."

세스는 덴버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어떤 것이든 결코 죽지 않는단다."

그녀는 단언했다.

"엄마는 일어났던 일을 아직껏 한 번도 얘기해 주지 않았어요. 얘기해 준 것은 놈들이 엄마를 채찍으로 때려서 엄마가 배부른 몸으로 도망쳐 나왔다는 것뿐. 그때의 아이가 나였다는 것하고."

"새로 온 사나이에 대한 것을 제외하면 얘기할 것이 없기 때문이야. 우리는 그 사나이를 '선생'이라고 불렀지. 선생은 몸집이 작은 남자였어. 키가 작았어. 1년 내내 칼라를 달고 있었어. 학교 선생님이었지. 자기 남편 누이동생의 배우자가 학식이 있고, 더욱이 가너 나리가 죽은 뒤 스위트 홈 농장에 오는 것을 응락해 주어서 마님은 안도하고 있다고 말했었어. 포올 에프가 팔렸지만 그래도 남은 남자들이 잘해 나갈 수 있었는데도 말이야. 할리가 말하던 대로였어. 마님은 농장에서 하나밖에 없는 백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는 얘기야. 그래서 그 선생이 오겠다고 승락했을 때 매우 만족스러운 것 같았어. 그 남자는 젊은 남자 두 사람을 데리고 왔지. 아들이었는지, 조카였는지 지금도 모르겠지만. 두 사람은 그 남자를 '온카' 라고 부르며 그야말로 예의바르게 행동했지. 세 사람 모두 예의바른 사람들이었어. 낮은 목소리로 얘기하고, 손수건을 꺼내 침을 뱉었지. 무슨 일을 하든 조심했어. 꽤 우수한 농부라고 할리가 말했었어. 가너 나리만큼은 몸이 건강하지 않았지만 머리 회전이 빨랐지. 그 남자는 내가 만든 잉크가 마음에 든다고 했어. 마님의 혼합법으로 만든 것이지만 내가 하는 혼합법을 더 마음에 들어했지. 밤이 되면 앉아서 자기 노트에 뭔가를 기입하기 때문에 잉크의 매끄러움이 그에게는 중요했지. 그것은 우리들에 관한 얘기를 쓴 노트였지만 우리들은 모두 그것을 금방 알 수는 없었어. 어디를 가든 노트를 갖고 다녔으며, 우리들이 하는 말은 하나부터 열까지 기록했던 거야."

세스는 입을 다물었다.

덴버는 어머니의 얘기는 이제 끝난 것이라고 판단했다. 두 눈이 천천히 깜박거리고 아랫입술이 천천히 윗입술을 덮으면 촛불의 불꽃이 꺼질 듯한 숨이 콧구멍에서 나왔다. 그것은 바로 세스가 이제 더 이상은 말하지 않겠다는 지점에 도달한 표시였다.

"저어, 갓난아기는 뭔가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 같은데요."

"어떤 계획?"

"몰라요. 하지만 엄마에게 매달려 있던 드레스는 뭔가를 의미하고 있을 거예요."

"그럴지도 모르지."

세스는 말했다.

"어쩌면 계획이 있을지도."

 

그 계획이 무엇이었는지 알기도 전에 영원히 그것을 지워버렸다. 테이블을 들어올려 큰 남자 목소리로 내쫓았다. 그때까지 덴버는 검둥이들이 자기들 집에 퍼붓는 비난이나 규탄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검둥이들은 유령이 배회하는 것은 사악한 것이 더욱 사악한 동료를 찾고 있는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들은 누구 한 사람도 마법에 걸리는 기쁨을 알지 못했다. 사건의 배후에 있는 비밀을 이것저것 추측하는 대신에 실제로 아는 기쁨을 몰랐다.

덴버의 오빠들은 비밀을 알고 있었으나 그것은 그들에게 두려움을 주었다. 베이비 할머니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할머니를 슬프게 했다.

그러나 유령은 이제 사라졌다. 연갈색 피부를 가진 남자의 등장으로 사라진 것이다. 덴버의 세계는 따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숲속의 비밀의 방은 예외였다.

그녀의 어머니에게는 비밀이 있었다. 결코 얘기하고 싶지 않은 과거와 반쯤 얘기하고 입을 다물고 마는 과거인 것이다. 하지만 덴버도 비밀을 갖고 있었다. 그녀의 비밀은 달콤한 향기가 났다.

포올 디가 올 때까지 세스는 하얀 드레스의 일을 거의 생각해보지도 않았으나 그의 모습을 보고 나서 덴버의 해석을 상기했다. 포올 디와 첫날밤을 보낸 이튿날 아침, 계획이라니 도대체 뭘까 하고 생각한 것만으로도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계획을 생각하는 것은 18년 동안 맛보지 못한 사치였다. 계획을 가진 적이 있는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그녀가 세운 계획은 스위트 홈에서 도망치기 위한 것이었다. 너무도 비참한 결과로 끝났기 때문에 그녀는 두 번 다시 다른 계획을 세워 인생에 도전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올 디 옆에서 잠이 깬 아침에 딸이 말한 이 말이 생각난 것이다. 세스는 덴버가 목격했다는 것에 대해 골몰했다. 또 그의 팔에 안겼을 때 마음을 열고 추억에 잠기고 싶다는 유혹에 사로잡힌 일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짓을 해도 괜찮을까?

그의 곁에 누워 그의 숨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생각을 정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살그머니 침대를 빠져나왔다.

혼자서 말하고 생각에 잠기는 곳은 대개 거실에서였다. 그런데 거기서 무릎을 꿇고 있으면 베이비 색스가 그토록 색채에 굶주리고 있었던 이유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퀼팅 이불의 무늬는 두 군데에 네모진 오렌지색이 있는 것 외에는 색다운 색이 없었다. 오렌지색은 도리어 색의 결핍을 알리고 있는 것 같았다.

방의 벽은 석판색, 바닥은 흑갈색, 목재 화장대는 그대로 나무색, 커튼은 흰색이다. 그리고 가장 눈에 띄는 물건은 철로 된 간이침대를 덮고 있는 퀼팅 이불이었는데, 그것은 청색, 흑색, 갈색, 그리고 회색 천으로 되어 있었다. 이 우울한 색채 속에서 두 장의 오렌지색 천은 요란하게 눈에 띄었다.

세스는 집의 색채가 빈약한 것뿐만 아니라 색채가 없어도 시어머니처럼 쓸쓸해 하지 않았던 것이 이상했다. 의식적으로 그런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세스의 기억에 가장 새로운 색은 갓난아기인 채 죽은 딸의 묘석에 있던 핑크의 반점이었으니까. 그 일이 있은 후 그녀는 시어머니처럼 색채에 민감해졌다.

매일 아침 동이 트면 요리 당번이 스프나 고기나 그 밖의 조리를 하고 있는 동안에 그녀는 후르츠파이를 굽고 감자요리와 모듬야채를 만들었다. 그런데도 빨간 사과와 노란 호박을 기억하고 있는 자기의 모습이 생각나지 않았다. 새벽녘마다 아침노을의 하늘을 보았는데도 그 색을 분간하거나 의식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어느 날 갓난아기의 선혈을 눈앞에서 본 것과, 분홍빛 묘석의 반점을 본 것이 색채를 마음에 새긴 마지막이었다. 124번지의 강렬한 감정이 충만해 있었기 때문에 세스는 뭔가가 결여되어 있어도 그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아들들의 모습을 찾아 꼼짝하지 않고 들판만 바라보던 때가 있었다. 창가에 서서 파리가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샅샅이 눈을 굴려 찾았던 것이다. 노상에 비친 구름의 그림자나 고삐를 끊고 도망쳐서 딸기를 먹고 있는 길 잃은 산양이 제각기 처음에는 하워드로 보였다가 나중에는 버글러로 보이기도 했다. 조금씩 그런 습관이 가라앉자 두 녀석의 열세 살 때의 얼굴은 완전히 희미해지고 갓난아기 때의 얼굴로 바뀌었다.

그녀가 꿈을 꿀 때에는 124번지를 떠나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헤매고 다닐 수 있었다. 아들들의 모습을 때때로 아름다운 숲속에서 보았다. 나뭇잎이 우거진 가운데 그들의 다리만 겨우 보이는 것이다. 때때로 두 녀석은 철로를 따라 웃으며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한 번도 그녀를 보아 주지 않았다.

잠이 깨자, 집이 몸 위로 덮쳐오는 것 같았다. 문이 보이고 문턱을 따라 과자가 한 줄로 놓여 있었다. 갓난아기였던 딸이 기어오르기를 좋아했던 흰 계단과 시어머니가 구두 고치는 작업장으로 쓰던 방에는 구두가 쌓여 있었다. 더 이상 물건이든 사람이든 들어갈 수 있는 틈이 없었다.

그런데 포올 디가 와서 집을 부수고 유령을 몰아내 딴 곳으로 보냈다. 그리고는 세스와 함께 있을 장소를 만들었던 것이다. 포올 디가 찾아온 다음 날 아침에, 이렇게 거실에서 무릎을 꿇고 있자니 좀 이상했다. 124번지가 실로 황량한 집임을 드러나게 했던 오렌지색 천에 눈길이 가서 세스의 기분이 흐트러졌다.

이렇게 된 것은 그의 탓이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여러 가지 감정이 급속도로 마음속에 부상해 왔다. 사물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되었다. 생기 없는 것은 그대로 생기 없이 보였다. 갑자기 포올 디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약간의 쌀, 약간의 콩

하지만 고기는 빈 탕

괴로운 일은 수월치 않아

마른 빵에는 기름이 없어

 

포올 디는 일어나서 어젯밤에 부순 가구를 고치며 노래부르고 있었다. 교도소의 농장과, 그 뒤에 남북전쟁에서 익힌 옛날 노래였다.

 

기차의 선로에 머리를 얹고

기차가 온다온다. 허둥대지 마라

그들의 몸뚱이가 돌이라면

두들겨 줄 텐데,

드디어는 그놈의 눈알들이

돌멩이처럼 쓸모 없어지고

5센트 주화

10센트 주화

돌을 부수고 시간을 부수어라

 

이런 노래는 가락이 잘 맞지 않았다. 집안의 잡일에 맞추어 노래하기에는 너무 거창해서 힘이 부치는 노래였다.

스위트 홈 농장의 나무 그늘에서 모두 함께 불렀던 '물 위의 폭풍'을 노래할 기분이 아니므로 허밍으로 흥얼대며 생각나는대로 가사 한 행을 넣고는 만족했다.

그는 한 여자와 3개월이라고 작정하면서도 2개월 이상 살면 괴로워졌다. 3개월이라는 것이 그가 한 곳에서 참을 수 있는 한도였다. 때가 되면 거침없이 나갈 수가 있었던 것이다. 델라웨어의 경험이 있고, 그전에는 조지아주 알프레드에서의 처참한 고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알프레드에 있었을 때에는 지하에서 잠자고, 돌을 깬다는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햇빛 속으로 기어 나왔었다.

그렇게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이 여자는 보통 집에 사는 보통 여자가 아니었다. 알프레드를 체험하고 나서는 머리를 쓰지 않았다. 오로지 걷고, 먹고, 잠자고, 웃는 데 소용되는 부분만을 조작하며 살아 왔다. 이것 외에도 일을 조금, 그리고 섹스를 조금만 할 수 있다면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 이상 바라면 할리의 얼굴과 웃고 있는 식소우의 얼굴을 싫어도 떠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땅 속에 묻힌 상자 속에서 떨고 있었던 일도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손에 해머를 쥐고 있으면 떨리지 않았으므로 돌산에서 노새 같이 일을 하고 지내는 시간이 고마웠다. 즉 그 상자는 그가 미치지 않아도 되게끔 정상적인 감각을 마비시켜 주었다.

집에 다다를 때까지는 자기는 온갖 것을 다 보고 모든 것을 느꼈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이렇게 자기가 부숴버린 창틀을 다시 끼면서도 포올 디는 세스가 살아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의 기쁜 감정을 자신에게도 설명하지 못하고 있었다. 맨발인 채 손에는 구두와 스타킹을 들고 집 뒤쪽에서 홀연히 나타났던 것이다. 포올 디의 머리에 녹슬었던 부분이 기름을 친 자물쇠처럼 열렸다.

"이 근방에서 일을 찾아볼까 생각하고 있는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별로 일거리가 없어요. 강에서 하는 일이 대부분이니까. 그리고 돼지..."

"그렇지, 나는 강이나 바다에서 일한 적은 없지만 내 체중 정도면 뭐든지 맬 수 있어. 물론 돼지도 말이야."

"이곳 백인들은 켄터키보다 낫지만 악착같이 일하지 않으면 안 될 거예요."

"악착같이 일하느냐 일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고, 어디서 그렇게 하느냐가 문제야. 이 고장에서 악착같이 일해도 될까?"

"될까가 아니라 대환영이에요."

"당신의 딸 덴버 말인데,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아."

"왜 그런 말을 해요?"

"뭔가를 기대하는 분위기야. 뭔가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어. 그런데 그건 내가 아냐."

"그것이 도대체 뭔지 나도 모르겠어요."

"어쨌든 그녀는 내가 기다리는 사람이 오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걱정하지 말아요. 그 애는 마법에 보호받고 있어요. 태어날 때부터."

"그래?"

"그래요. 저 애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 리가 없어요. 그 증거로 내가 알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가 죽어서 자취를 감춰버렸지만 덴버는 달랐어요. 나의 덴버는 죽지도 사라지지도 않았어요. 덴버가 뱃속에 있을 때에도, 그 애는 산 속에서 백인 아가씨를 끌어내었어요. 그뿐 아니라 그 선생이 우리가 있는 장소를 알아내어 경찰을 데리고 총을 갖고 이곳을 덮쳤을 때도..."

"선생이 있는 곳를 알아냈다고?"

"시간이 한참 걸렸지만 알아냈어요."

"그런데 그놈은 당신들 모녀를 데리고 돌아가지 않았나?"

"천만에요. 그렇게 하게 내버려 둘 것 같아요? 나는 결코 돌아가지 않을 작정이었어요. 누가 누구를 찾아내든 문제가 아니었어요. 그곳으로 되돌아가는 대신에 감옥에 들어갔죠. 덴버는 낳은 지 얼마 안 되었으니까 나와 함께 있었어요. 감옥의 쥐가 뭐든지 다 갉아 먹었지만, 그 아이만은 갉아먹지 않았어요."

포올 디는 얼굴을 돌렸다. 그 뒤 얘기를 더 알고 싶었으나 감옥 얘기가 그의 마음을 조지아주 알프레드로 데려갔기 때문이다.

"못이 좀 필요한데, 이웃에서 빌려줄 사람이 있을까? 아니면 가게로 가는 게 좋을까?"

"가게로 가는 것이 좋을 거예요. 못 이외에도 필요한 것이 또 있을 거예요."

하룻밤이 지나자 두 사람은 부부처럼 얘기하고 있었다. 세스에게 있어 미래란 덮쳐오는 과거의 기억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 투쟁이었다.

포올 디가 그녀의 침대로 들어온 것도 보다 나은 인생을 위해서였다. 그와 함께 사는 미래를 생각했다.

 

은근히 들뜨는 마음에 당혹을 느끼면서, 세스는 거실로 가는 것을 피해서 덴버의 살피는 듯한 시선을 피했다. 걱정했던 대로 덴버는 서슴지 않고 두 사람을 방해했고 사흘째에는 포올 디에게 도대체 언제까지 우리 집에서 얼쩡거릴 생각이냐고 거리낌 없이 묻는 것이었다.

이 한마디는 그에게 깊은 상처를 주어 커피잔을 들고 있는 손이 떨릴 정도였다. 식탁에 놓으려던 컵은 마루로 떨어졌고 현관을 향해서 비스듬한 바닥 위를 굴러갔다.

"얼쩡거린다구?"

포올 디는 자신이 흘린 커피도, 떨어뜨린 잔도 쳐다보지 않았다.

"덴버! 도대체 너 왜 이러니?"

세스는 화가 나서라기보다는 당황하여 딸의 얼굴을 보았다.

포올 디는 턱수염을 긁었다.

"빨리 나가는 편이 좋을 것 같군."

"안돼요."

뜻하지 않은 큰 소리에 세스는 자기 자신도 놀랬다.

"어떻게 해야 할지는 포올 디 자신이 잘 알고 있을 거예요."

하고 덴버는 말했다.

"아무튼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세스는 딸에게 주의를 주었다.

"더군다나 너는 자신이 어떻게 해야 되는지도 모르고 있는 것 같구나. 네 얘기는 더 이상 한마디도 듣고 싶지 않아."

"그저 물었을 뿐인데...혹시..."

"조용히 해! 너나 여기서 빨리 나가거라. 어디 다른 곳으로 가 있으라구."

덴버는 자신의 접시를 들고서 식탁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떠나기 전에 이미 음식이 담겨져 있는 접시에 닭 등심살과 빵을 추가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포올 디는 몸을 구부려 파란 손수건으로 흘린 커피를 닦으려고 했다.

"내가 할께요."

세스는 솟구치듯 자리에서 일어나 아궁이 쪽으로 갔다. 아궁이의 뒤에는 크기도 재질도 제각기인 천 조각이 걸려 있었고 그것은 각각 조금씩 덜 마른 상태였다. 말없이 세스는 바닥을 닦았고 컵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새 커피를 부어서 조심스럽게 그의 앞에 놓았다. 포올 디는 컵의 가장자리를 만진 채 잠자코 있었다.

세스는 자신의 의자에 다시 앉았고 침묵이 계속되었다. 이대로 있고 싶지 않다면 그녀가 먼저 침묵을 깨야 하는 것이다.

"저런 식으로는 교육시키지 않았는데."

포올 디는 여전히 컵 가장자리를 만지작거렸다.

"그래서 저 아이의 태도에 당신이 기분을 상하셨듯이 나도 깜짝 놀랐어요."

포올 디는 세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그렇게 질문할 만한 일이 있었나?"

"일이요? 무슨 얘기죠?"

"그러니까, 내가 오기 전에 다른 남자와 이런 경험이 있냐 말이야."

세스는 양 주먹을 쥐어서 허리에 댔다.

"당신도 내 딸년 못지않게 삐뚤어져 있군요."

"무슨 얘기야, 세스."

"그래요, 말하겠어요. 말하구 말구요."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슨 얘긴지 알잖아."

"물론이에요. 그래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구요."

"이게 무슨 일이람."

그는 한탄했다.

"뭐라구요?"

세스의 목소리는 또다시 높아져 있었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냐고 말했어! 나는 저녁 식탁에 앉았을 뿐이야. 그것만으로 두 번이나 욕을 먹었어. 첫 번째는 이곳에 있다는 이유로, 두 번째는 도대체 왜 욕을 먹어야만 하는지 이유를 물었기 때문이야."

"저 애는 욕하지 않았어요."

"안 했어? 그건 욕처럼 들렸는데."

"그럼 욕으로 들으세요. 그 애를 대신해서 내가 사과하겠어요. 난 정말..."

"당신이 그런 일을 할 필요는 없어. 그러니까 대신 사과하는 일은 할 필요가 없다구. 그 애가 직접 해야하는 일이야."

"그렇다면 내가 그 애에게 그렇게 하도록 시키겠어요."

세스는 한숨을 쉬었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그 애의 질문이 당신의 마음에도 있는 일이냐는 거야."

"아아, 그건 틀렸어요. 아니에요, 포올 디, 당치도 않아요."

"그렇다면 그 애의 생각과 당신의 생각이 다르단 얘긴가? 그녀의 머릿속에 들은 것을 생각이라고 부른다면 말이야."

"미안하지만 그 애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하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아요. 내가 그 애를 야단칠 테니까 당신은 잠자코 계세요."

위험하다고 포올 디는 생각했다. 상당히 위험하다. 옛날에 노예였던 여자가 뭔가를 이렇게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더구나 끝까지 사랑하겠다고 결정한 것이 자신의 애라면 더욱 위험하다. 가장 현명한 방법은, 아주 조금만 사랑하는 일이라고 그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모든 일을 아주 조금만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녀석들이 사랑하는 자를 배신하거나 함정에 빠뜨리는 일이 있더라도 나중에 뭔가를 귀여워할 아주 작은 사랑이 남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왜지?"

그는 세스에게 물었다.

"왜 딸을 보호하려고 하는 거지? 대신 사과를 해야한다고 말이야? 덴버는 이제 성인이야."

"성인인지 어쩐 지는 몰라요. 성인이라는 말은 어머니한테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요, 아이는 아이에요. 자라나거나 나이를 먹는다고 성인이 되는 건가요? 성인이란 것이 뭐죠? 내게는 그런 말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요."

"성인이라는 것은 만약에 그 애가 상식 밖의 행동을 했을 때 그 책임을 스스로 져야만 한다는 거야. 1년 내내 당신이 보호하는 일 따위는 불가능해. 당신이 죽으면 어떻게 하겠어?"

"아무렇게도 되지 않아요! 살아 있는 동안에도 보호할 것이고 저 세상에 가서도 역시 보호할 테니까요."

"그래...? 그렇다면 할 말이 없군."

그는 말했다.

"그런 거예요, 포올 디. 더 이상은 잘 설명할 수 없지만 무엇인가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그래요, 이건 선택의 문제조차 될 수가 없어요."

"바로 그것이 중요해. 무척 중요해. 난 당신한테 선택해 달라는 부탁 따위는 하지 않았어. 아무한테도 그런 일은 요구하지 않겠어. 내가 생각한 것은 어쩌면 당신에게 나를 위한 장소가 조금은 있느냐는 거야."

"저 애는 나한테 선택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는 불가능해. 그녀한테 그렇게 가르쳐 주어야 해. 그 애를 제쳐 놓고 누군가를 선택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그녀와 함께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도 장소를 만들어 주는 일이라고 말해줘야지 옳아. 당신이 진정으로 그렇게 말하면 당신도 내 입에 재갈을 물리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거야. 나는 덴버의 마음에 상처를 입힐 생각도 없고 그 애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가능한 한 도울 생각이야. 하지만 무례한 행동을 취하는데도 나한테 잠자코 있으라고 명령할 수는 없어. 내가 이 집에 있기를 원한다면 내 입에 재갈을 물리지 말라구."

"아마 이대로 있는 편이 좋을 거예요."

"이대로라니, 어떤 식으로 말이지?"

"모두 함께 해나가는 거죠."

"난 마음속에는 들어가지 않아요."

"세스, 내가 당신과, 그리고 덴버와 함께 이 집에서 살게 되면 당신은 어디든지 마음대로 갈 수 있어. 날고 싶다면 날아도 좋아. 내가 받아줄 테니까 말이야. 당신이 떨어지기 전에 받아 주겠어. 당신의 발목을 단단히 잡아 주겠어.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도록 신경을 써 주겠어. 머무를 장소를 원해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니야. 머무를 곳 따위는 나한테는 전혀 필요없으니까.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걸으며 살아왔어. 이쪽 방향을 택한 후 7년 동안을 걸어 왔어. 이 땅을 빠짐없이 걸어서 돌아다녔어. 오하이오의 북쪽도 남쪽도 동쪽도 서쪽도. 지명도 없는 변경에도 갔지만 어디에도 오래 있지는 못했어. 하지만 여기에 도착해서 저 포치에 앉아 당신을 기다리고 있자니, 내가 오려던 곳은 이 장소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어. 오려고 했던 것은 당신이라는 사람이었어. 우리 둘이서 인생을 만들자."

"그런 것이 가능할지 모르겠군요."

"나한데 맡겨. 두고 봐. 하고 싶지 않다면 약속 따위는 안해도 좋아. 다만 보고만 있어 줘. 좋지?"

"좋아요."

"나한테 맡길 마음이 들었나?"

"글쎄요... 조금은요."

"조금이라구?"

그는 미소지었다.

"좋아. 시작하기 전에 우선 제안이 있어. 마을에 서커스가 온다구. 목요일은 흑인이 입장할 수 있는 날이고 다행히도 난 2달러를 가지고 있거든. 목요일은 바로 내일이야. 당신, 덴버하고 1페니도 남기지 말고 다 써버리자구. 자아, 의견은 어떠하신지?"

"안 돼요."

그녀의 입에서 나온 반응이었다.

"하루 휴가를 얻으면 보스는 뭐라고 말할까요?"

안된다고 말하면서도 이 사람의 얼굴을 보는 일은 실로 즐겁다고 생각했다.

목요일은 귀뚜라미가 시끄러울 정도로 울었다. 하늘은 완전히 푸르름을 빼앗겨서 오전 11시에는 완전히 하얗게 불타고 있었다. 세스는 이 더위에는 어울리지 않는 차림이었다. 하지만 이 날의 먼 나들이는 18년 만의 외출이었다. 축제 기분 속에서 얼굴을 마주할 기회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두터운 백색의 단벌 외출복을 입고 모자도 썼던 것이다. 일하러 나갈 때처럼 머리를 밴드로 묶은 모습을 존스나 엘라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씨받이를 사랑하던 백인 여성인 미스 보드윈으로부터 크리스마스 선물로 물려받은 옷이었다.

서커스를 보러 가는 데 외출복을 입을 필요를 느끼지 않았으므로 덴버와 포올 디는 더위를 세스만큼 느끼지 않았다. 덴버의 모자 끈은 걸을 때마다 등에 부딪혀서 흔들렸고 포올 디는 조끼의 단추를 풀은 채 상의를 입지 않았으며 셔츠의 양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리고 있었다. 세 사람은 손을 잡고 있지 않았으나 세 사람의 그림자는 손을 잡고 있었다.

아마도 그가 말한 대로 될 것이다. 인생을 만들어야지. 손을 잡은 자신들의 그림자를 바라보면서 세스는 교회라도 가는 듯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주위 사람들에게 그녀는 뽐내고 있었다. 이층집에서 살고 있으니까 당신들하고는 격이 달라, 당신들이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일을 해냈던 것이다. 연명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연명했으니까, 내가 과시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멋을 부리라고 지겹도록 말했는데 덴버가 고집스럽게 말을 듣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잘 되었다고 세스는 안도하고 있었다. 덴버는 이 일행을 즐겁게 만들기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 화가 난 얼굴로 외출하는 것을 승낙했을 뿐이다. 그녀의 태도는,

"자아, 마음대로 하세요. 날 행복하게 만들 거라면 해 보세요."

라고 얼굴에 씌어 있었다.

행복한 것은 포올 디였다.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한 사람도 남김없이 인사하고 말을 했다. 덴버가 이마의 땀을 닦거나 앉아서 구두끈을 다시 묶어도, 포올 디가 돌을 차거나 어머니의 어깨에 안긴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지려고 손을 내밀어도 세 사람의 그림자는 손을 맞잡고 있었다. 눈치를 채고 있었던 것은 세스뿐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이것을 좋은 징조라고 판단하고 보기를 중단했다. 앞으로의 인생, 그것이 틀림이 없다.

목재 하치장의 울타리를 따라 온통 만발한 장미가 시들어 가고 있었다. 나무꾼이 12년 전에 자신의 일터를 상쾌하고 기분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 심었던 것이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나무의 몸통을 절단해야만 하는 죄를 면해줄 어떤 일인가가 필요해서 심은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기세로 번식하리라고는 본인도 뜻밖이었다. 순식간에 뻗어나가 말뚝이나 기둥을 박은 울타리를 완전히 뒤덮어버렸다. 울타리는 가까운 들판에서부터 세워져 있었으나 들판에서는 집이 없는 사람들이 자고, 아이들이 뛰어다녔다.

그리고 1년에 한 번, 서커스 일행이 텐트를 쳤다. 죽음으로 다가서면 다가설수록 장미꽃은 더욱 불쾌한 냄새를 발산했고, 서커스 구경을 오는 사람들은 누구나가 이 냄새로부터 죽음의 향기를 연상했다. 불쾌한 냄새는 현기증과 갈증을 유발했으나 줄지어 텐트로 향하는 흑인들의 열의를 꺾지는 못했다.

어떤 사람은 풀이 우거진 길로 걷고, 어떤 사람은 먼지가 나는 길의 중앙을 걸으며 삐걱거리며 달리는 짐마차로부터 몸을 피했다. 모두가 포올 디처럼 기분이 좋았다. 그 좋은 기분을 죽어가는 장미의 냄새가 좌절시킬 수는 없었다. 망을 친 입구에 떠밀리듯 다가서면서도 모두의 얼굴은 불이 켜진 것처럼 밝아졌다.

멍청한 짓을 하고 있는 백인을 구경한다는 흥분으로 숨이 막혔다. 마술이 있고, 어릿광대가 있고, 머리가 없는 인간, 머리를 두 개나 가진 인간도 볼 수 있었고, 20피트의 꺽다리, 2피트의 난장이, 1톤의 뚱보, 온몸에 문신을 새긴 인간도 볼 수 있었고, 백인들이 유리를 먹거나, 불을 삼키거나, 리본을 입에서 뱉어내거나, 몸을 꼬아서 밧줄처럼 묶거나, 서로 겹쳐서 피라밋을 만들거나, 뱀과 장난을 치는 것 등 모든 것을 구경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광고지에 나왔으므로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소리를 내서 읽으면 문맹인 사람은 그것을 들었다. 어느 것을 보더라도 모두 속임수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흥미진진하여 물러날 줄을 몰랐다.

서커스의 호객꾼은 흑인이나 흑인 아이들을 난폭한 말투로 다뤘다. 그러나 당사자의 상의에 묻은 음식 찌꺼기나 바지의 찢어진 곳을 보면 그러한 욕지거리는 흑인들에게 상처를 줄 힘도 없음을 알 수 있었다.

아무튼 두번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재미있는 구경거리의 요금이라고 해야 싼 요금에 불과했다. 자신들을 구경거리로 여기고 있는 백인들의 모습을 자신들이 구경하는 대금이라고 친다면 2페니와 백인의 호객꾼이 퍼붓는 굴욕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한 탓에 서커스 그 자체는 수준이 없는 유치한 것이었다.

1톤이나 되는 여자는 그들을 향해서 침을 뱉었다. 그러나 몸집의 살이 방해가 되어 표적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대신에 그들은 그녀의 작은 눈에 떠오른 당황함을 마음껏 재미있어 했다. 아라비안나이트를 춤추는 댄서는 평소에는 15분의 춤을 3분 만에 끝냈다. 그러나 이것은 다음 순서인 '뱀의 마술사'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아이들을 크게 기쁘게 해주었다.

덴버는 어른용 손뜨게 구두를 신은 백인 소녀의 포장마차에서 박하사탕, 감초가 들어간 캔디, 페파민트, 레몬에이드를 샀다. 설탕의 달콤함으로 마음이 누그러졌고 오늘만은 그녀를 이상한 듯이 찬찬히 보지도 않았다. 아니, 실제로는 가끔 자기 이름을 부르며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그녀는 들뜬 기분이 되기도 했다. 포올 디는 그다지 나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사실 그에게는 독특한 무엇인가가 느껴졌다. 예를 들어 세 사람이 멈춰 서서 난장이가 춤추는 것을 보고 있던 때도 그랬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흑인들이 예술인들에게 쏟는 호기심의 눈길을 상냥하고 온화한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덴버가 이 사람들의 얼굴에서 본 적이 없는 표정이었다. 두세 명이 덴버의 어머니에게 인사하고 미소를 보이기도 했다. 누구나 분명히 포올 디가 즐거워하고 있는 모습에 빨려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거인이 난장이와 춤을 추었을 때는 무릎을 치면서 재미있어했다. 두 머리의 사내가 자신과 자신이 말했을 때에도 그랬다. 덴버가 원하는 것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사주었다. 원하지 않더라도 상당히 여러 가지의 것을 사주었다. 세스가 들어가기 싫어했던 텐트 속에도 놀리면서 집어넣었다. 먹고 싶지 않다고 말해도 사탕을 그녀의 입에 넣어 주었다.

포올 디는 두세 사람을 사귀었다. 그들에게 말을 걸어서 어떤 일을 찾을 수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세스는 자신에게 미소 짓는 사람들에게 미소로 대답했다. 덴버는 들뜬 몸을 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귀갓길에 오르자 이번에는 세 사람의 그림자는 그들 세 사람을 선도하듯이 움직이고 있었으나 역시 손을 맞잡고 있었다.

 

옷을 정장으로 차려입은 여인이 물속에서 솟구쳐 올라왔다. 건조한 강둑에 닿을락 말락 하는 동안에 뽕나무에 기대어 앉았다. 하루종일을 그곳에 앉은 채 고개를 힘없이 나무 기둥에 기대고 있었으므로 밀짚모자의 챙이 찢어졌다.

온몸이 아팠는데 그 중에서도 폐가 매우 아팠다. 흠뻑 젖은 채 간신히 숨을 쉬면서 그녀는 24시간 무거운 눈꺼풀과 계속해서 싸웠다. 한낮의 미풍은 옷을 말렸고, 밤바람은 거기에 가느다란 주름을 만들었다.

그녀가 물에서 나타나는 것을 목격한 사람도, 우연히 곁을 지나친 사람도 없었다. 지나쳤다 해도 다가가기 전에 한순간 망설였을지도 모른다. 흠뻑 젖어 있었기 때문도 아니고, 졸고 있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천식병 환자같은 기침을 하고 있어서도 아니다. 그런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도 미소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일어나 대사원처럼 우뚝 선 회양목 숲을 지나 들판에 도달했다. 그리고 석판색 집의 정원 끝까지 오는 데 꼬박 다음 날 오전까지 걸렸다. 또다시 매우 초췌하여 눈에 띄는 가까운 장소에 앉았다. 그것은 124번지의 현관 계단으로부터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던 그루터기였다.

그 무렵에는 전보다 편하게 눈을 감지 않고 있을 수 있었다. 잠시동안 눈을 뜨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녀의 목은 화사한 커피잔의 받치 접시 같은 굵기로 맥없이 떨궈진 채 턱이 옷깃의 레이스를 약간 스치고 있었다.

축하할 일도 없는데 샴페인을 마시는 여자들은 이런 모습이 되는 것이다. 챙이 꺾인 밀짚모자는 기울어져서 거의 벗겨져 있는 일도 흔하다. 남의 눈길은 아랑곳없다는 듯이 배를 만지거나 했고, 신발의 끈은 풀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런 여자들의 피부는 124번지 현관의 계단 옆에서 숨쉬고 있는 여자의 피부와는 잘 어울렸다. 이 여자의 피부는 새로 돋은 것 같은 피부였다. 손의 관절을 포함해서 한 가닥의 혈관도 튀어나온 것이 없고 매끄러웠다.

저녁이 가까워지면서 서커스는 끝났다. 흑인들은 운이 좋으면 짐마차에 편승하고 그렇지 않으면 걸어서 귀갓길에 올랐다. 태양이 정면으로 얼굴에 내리쬐고 있었으므로 데스, 덴버 그리고 포올 디는 길을 돌아서 집에 도착했다. 그러자 세 사람의 눈에 일시적으로 들어온 것은 검은 드레스였다. 그리고 그 밑에 나란히 끈이 풀린 구두도 보였다.

"저기."

덴버가 말했다.

"저게 뭐죠?"

그러자 바로 그 자리에서 왠지 설명이 되지는 않았지만 그 드레스의 주인공을 보려고 다가간 순간에 세스는 급히 소변을 보고자 했다.

"실례."

세스는 말하고 나서 124번지의 뒤꼍으로 갔다. 볼일을 보고 싶어서 이렇게까지 다급했던 적은 없었다. 아장아장 걷던 갓난아기 시절 이래로 처음이었다. 화장실에 당도할 때까지 참을 수가 없었다. 가는 도중에 스커트를 걷어 올려야만 했다. 오줌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마치 말처럼 생각되었다. 말보다도 덴버가 태어났을 당시 보트에 넘치던 물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너무나 많은 양이 나왔으므로 에미가

"참아요 루우, 이런 상태로 계속한다면 당신 때문에 주변이 온통 홍수가 되겠어요."

이렇게 말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양수막이 터진 자궁으로부터 용솟음치는 물을 멈추는 일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지금도 그때와 마찬가지로 멈출 수가 없었다. 포올 디가 그녀를 찾겠다는 생각을 할까봐 겁이 났다. 쭈그리고 앉아 보기에도 민망스러운 깊은 물구덩이를 만들고 있는 자신의 추잡한 꼴을 보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세스는 침착성까지 잃고 있었다. 오늘 보았던 서커스에서 구경용 인간을 한 사람 더 고용해주지 않을까 생각하기 시작할 무렵 가까스로 오줌은 멈추었다.

옷매무새를 고치고 현관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무도 없었다. 세 사람 모두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포올 디와 덴버가 낯선 여자 앞에 서서 그녀가 몇 잔이나 계속해서 물을 마시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목이 마르다는군."

포올 디가 말하면서 챙이 달린 모자를 벗었다.

"어지간히 목이 말랐던 모양이군."

여자는 얼룩이 있는 양철 컵으로 소리를 내며 물을 마셨다. 좀더 달라는 듯이 빈 컵을 내밀었다. 네 번이나 덴버는 그것에 가득 물을 채워주었다. 네 번 모두 그녀는 마치 사막이라도 건너온 듯한 기세로 마셔댔다. 턱에 작은 물방울이 매달려 있었으나 그것을 닦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 졸린 듯한 눈길로 세스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음식을 잘못 먹었나 하고 세스는 생각했다.

옷깃에는 고급 레이스가 달려 있었고 모자도 쓰고 있었다. 어른같은 복장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어려 보였다. 피부는 주근깨 하나 없이 깨끗했으나 다만 이마에 할퀸 것 같이 새로로 주름이 나 있었다. 어떻게 보면 머리카락처럼 생각될 정도로 가느다랗고 희미한 주름이었다. 갓난애기의 솜털 같아서 자라면 그녀의 모자 사이로 보이는 검고 풍부한 머리다발이 될지도 모른다.

"이 근처에 살아요?"

세스는 여자에게 물었다.

그녀는 아니라고 말하듯 고개를 흔들고는 몸을 구부려서 구두를 벗었다. 드레스를 무릎 근처까지 걷어 올리고는 스타킹을 굴리면서 내렸다. 스타킹이 완전히 구두 안으로 들어가 버리자 노출된 발은 스타킹을 내린 손과 똑같았다. 갓 태어난 아기의 피부 같았다.

분명히 지나가던 짐마차를 타고 왔을 거라고 세스는 생각했다. 아마도 담배나 사탕수수 재배로 지내는 생활보다는 뭔가 나은 생활을 찾아 돌아다니고 있는 웨스트 버지니아 근처에서 온 여자일지도 모른다. 세스는 몸을 구부려서 구두를 집었다.

"이름이 뭐지?"

포올 디가 물었다.

"비러브드."

그녀가 대답했다. 그 목소리의 톤은 매우 낮았다. 더구나 간신히 말하는 느낌이었으므로 듣고 있던 세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목소리가 처음에 먼저 들려왔고 나중에 이름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비러브드. 당신은 성씨를 사용할 때에 비러브드라고 하나?"

포올 디가 물었다.

"성씨요?"

그녀는 당혹한 표정을 보였다.

"아녜요."

하고 말하고는 모두가 알 수 있도록 지금 말한 이름의 철자를 천천히 말했다. 마치 알파벳의 일곱 문자가 그녀의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에 만들어지는 것처럼 말했다.

세스는 힘없이 신발을 떨구었다. 덴버는 앉았고 포올 디는 미소 지었다. 읽고 쓰지는 못하지만 자신의 이름 철자를 암기하고 있는 인간은 주의 깊고 또렷하게 발음했다.

이 여자도 그런 발음을 한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던 것이다. 여자에게 가족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려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젊은 흑인 여자가 정처 없이 헤매고 있다는 것은 파멸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4년 전 로체스터(뉴욕주 서부의 공업도시)에 있었을 때 14명의 여자아이를 인솔한 5명의 여자가 도착한 장면을 봤던 적이 있다. 그녀들 가족의 남자들은 한 명, 한 명 살해되었던 것이다. 그녀들이 가지고 있던 것은 데보어 거리에 사는 목사에게 가라고 지시되어있는 단 한 장의 종이쪽지뿐이었다.

남북전쟁이 끝난 지 이미 4, 5년이 지났다. 백인이든 흑인이든 아무도 그 일을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검둥이 무리를 떠난 부랑자가 스케넥크타디(뉴욕 동부의 공업 도시)에서 잭슨(미시간주 남부의 공업도시)에 이르기까지 뒷골목이나 들판길을 정처 없이 방랑하고 있었다. 망연자실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집요하게 포기하지 않고 그들은 서로가 찾는 상대방을 찾아낸다.

어떤 자는 자신들을 부양시킬 수 없는 가족으로부터 도망치는 참이었고, 어떤 자는 가족들에게로 도망치는 참이었다. 그 외에도 흉작으로부터, 죽은 육친으로부터, 생명의 위험으로부터, 주인이 바뀐 토지로부터 도망치는 참이었다.

버글러나 하워드보다 나이가 어린 소년도 있었다. 여자아이의 가족이 함께 모여서 이동하는 동안 다른 장소에서는 혼자 쫓기면서 짐승처럼 사냥을 당하고 있었다. 교통기관의 이용은 이미 금지당했다. 수배 전단에 쫓겨 거리를 헤매기도 했다. 지평선을 이용해 표식을 찾았고 서로 동료끼리 뭉쳐서 의지하였다. 서로 얼굴이 마주칠 때에나 인사를 한 번 나눌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토지에서 저 토지로 내몰리고 있는 슬픔을 자세히 말하는 일도 없고 묻지도 않았다.

백인의 일 따위를 입에 담는 것도 견디기 어려웠다. 그것은 누구나가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포올 디는 챙이 부러진 모자를 쓴 여자에게 어디서 어떻게 왔느냐고 억지로 물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선 당장 세 사람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던 의문은 도대체 그녀의 볼 일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이 커다란 의문을 두고 세 사람은 각각 다른 의문을 품고 있었다. 포올 디는 여자의 구두가 새것이라는 것이 의문이었다. 세스는 여자의 사랑스러운 이름에 크게 감명받았다. 묘석에 새겨 넣은 글자를 기억해내고 세스는 이 여자에 대해서 특별히 상냥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덴버는 떨고 있었다. 그녀는 이 졸린 듯한 미녀를 바라보며 좀더 많은 것을 알고 싶었다.

세스는 모자를 못에 걸고 상냥한 표정으로 여자를 보았다.

"예쁜 이름이군요. 비러브드라니. 모자를 벗으세요. 먹을 것을 만들겠어요. 우리는 신시내티 근처에서 서커스를 보고 돌아온 참이에요. 거기에 있는 것은 모두가 신기한 것들 뿐이었죠."

세스가 한참 환영의 말을 하고 있는 동안 비러브드는 똑바로 의자에 앉은 채 잠이 들어버렸다.

"아가씨, 아가씨."

포올 디는 살짝 그녀를 흔들었다.

"좀 눕고 싶은가?"

여자가 눈을 가까스로 뜨고는 그 부드러운 다리로 일어섰고 불안한 발놀림으로 천천히 거실을 향해 걸어갔다. 방에 들어서자 침대에 무너지듯 쓰러졌다. 덴버가 모자를 벗겼고 이불을 발치에 덮어 주었다. 잠든 여자는 증기기관차 같은 소리로 숨쉬고 있었다.

"위막성 후두염에 걸려 있는 것 같군."

문을 닫으면서 포올 디가 말했다.

"덴버, 열이 있는 것 같았어?"

"아뇨. 차가웠어요."

"그럼 열이 있겠구나. 열이 있으면 뜨거워지고 나서 차가워지거든."

"콜레라일 수도 있어."

포올 디가 말했다.

"그렇게 생각해요?"

"너무도 많은 물을 마셨잖아, 그건 확실한 징조야."

"병이 심한가 봐요."

"병에 걸린 것이 아니야!"

덴버가 소리치자 두 사람은 미소 지었다.

물을 마시기 위해 잠깐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는 일 외에 그녀는 4일 동안 잤다. 덴버가 옆에서 간호했다. 깊이 잠들어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괴로운 듯한 호흡에 귀를 기울였다. 비러브드는 따뜻한 애정과 그것을 독차지하지 못한 욕구불만의 상처를 숨기고 있는 듯했다.

더러워진 시트를 세탁하는 것은 세스가 레스토랑으로 일하러 나가고, 포올 디가 하역 일을 구하러 화물선 물색을 하러 나간 뒤였다. 합병증을 남기지 않고 열이 내리도록 기도하면서 속옷을 삶고 소독하였다. 정성을 들여 간호하느라고 식사하는 일도, 에레랄드 빛의 작은 방을 찾는 일도 잊고 있었다.

"비러브드?"

덴버는 속삭이듯 가끔 불렀다. 이름을 부르면 검은 눈동자가 희미하게 열렸다.

"나 여기 있어. 나 아직 여기에 있다구."

덴버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가끔 비러브드는 멍한 눈을 뜨고 오랫동안 말없이 입술을 핥고는 깊은 한숨을 쉬며 만사가 귀찮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덴버는 매우 당황했다.

"무슨 일이야?"

그녀는 물었다.

"답답해."

비러브드는 속삭였다.

"여긴 가슴이 막혀버릴 것 같아.

"일어나고 싶어?"

"그게 아니야."

줄칼을 가는 것 같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두터운 이불에서 오렌지빛 부분을 비러브드가 발견한 것은 3일 후였다. 덕택에 눈을 뜨고 있는 시간이 길어졌으므로 덴버는 기뻤다. 비러브드는 두 장의 빛바랜 오렌지색 천 조각에 완전히 마음을 사로잡힌 듯했다. 힘겹게 몸을 움직여서 팔을 고이고는 천 조각을 쓰다듬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런 행동조차 금세 지치게 했다. 그래서 덴버는 가장 화려한 이 부분이 시선에 들어오도록 이불을 고쳐 덮어 주었다.

덴버로서는 그때까지 경험하지 않았던 인내가 며칠 새 몸에 배어버렸다. 어머니가 간섭하지 않을 때는 상냥했으나 세스가 도우려고 하면 말벌처럼 화를 났다.

"저 아가씨는 오늘 뭣 좀 먹었니?"

세스가 물었다.

"콜레라는 먹으면 안 돼."

"콜레라라고 누가 그랬니?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잖아?"

"몰라요. 하지만 아무튼 아직 먹으면 안 된다니까요."

"콜레라에 걸린 사람은 계속해서 토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러니까 더더욱 먹으면 안 되잖아요?"

"하지만 말이다. 굶어 죽어도 안 되지 않겠니? 덴버."

"우리 좀 그냥 내버려 두세요, 엄마. 난 그녀를 돌보고 있다구요."

"그녀가 뭔가 말했니?"

"말하면 알려드릴께요."

세스는 딸의 얼굴을 보고는 그렇다, 이 아이는 계속 혼자였다, 하고 생각했다. 무척 외로웠던 것이다.

"히야보이는 어디로 갔을까?"

세스는 화제를 바꿀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물었다.

"그 개는 돌아오지 않아요."

덴버가 대답했다.

"어떻게 알지?"

"아무튼 알아요."

덴버는 접시에서 사각으로 자른 옥수수빵 한 조각을 집었다.

거실로 돌아가자 비러브드의 눈이 갑자기 크게 뜨였다. 덴버는 심장의 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처음으로 잠기운이 달아난 얼굴을 보았기 때문도 아니며, 그그 눈이 크고 검기 때문도 아니었다. 또한 흰자위가 너무 희어서도 아니었다. 그 두 개의 커다란 검은 눈을 깊숙이 들여다보았는데도 아무런 표정이 들어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뭘 좀 줄까?"

비러브드가 덴버가 가지고 있던 옥수수빵을 보았으므로 덴버는 그것을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든 환자가 쌩긋 웃었다. 덴버는 일단 안심했다. 무사히 집에 도착한 여행자처럼 긴장을 풀었다.

그때부터 매사에 비러브드의 비위를 맞출 때에는 설탕이 언제나 힘이 되었다.

그녀는 마치 단것을 먹기 위해 태어난 것 같았다. 벌꿀을 바른 밀랍은 물론 벌꿀, 설탕을 사이에 넣은 샌드위치, 깡통 속에서 딱딱하게 달라붙은 끈적끈적한 설탕, 레몬에이드, 그리고 세스가 레스토랑에서 가지고 오는 어떠한 종류의 디저트에도 맥을 못썼다. 사탕수수 줄기를 찌꺼기가 될 때까지 씹었다.

회복하고 있는 환자가 힘을 얻기 위해서 요구하는 것이라고 세스는 생각했다. 그렇지만 건강이 되돌아와도 요구는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갈 곳은 아무 데도 없는 것 같았다.

세 사람은 고열로 그녀의 동작이 둔해졌고 기억도 엷어지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나이는 열아홉이나 스무 살쯤 된 야윈 젊은 아가씨인데 뚱뚱한 노파처럼 가구를 붙잡고 움직였다. 머리를 목만으로 지탱하기에는 너무나도 무겁다는 모습으로 지팡이를 짚었다.

"저 아가씨를 이대로 먹여 살릴 생각인가? 앞으로 계속해서?"

포올 디는 약간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덴버는 저 아가씨를 좋아해요. 저 아가씨는 전혀 피해를 입히지도 않잖아요. 좀 더 나아질 때까지 기다려 보자고 생각했어요. 아직도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나고 있는 것 같구요."

"저 여자아이한테는 어딘가 이상한 면이 있어."

포올 디는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이상하다니요? 어떤 식으로요?"

"병자처럼 행동하고 병자 같은 목소리를 내지만 병자로는 보이지 않아. 혈색도 좋고 눈도 반짝거리고 암소 같은 힘도 있어."

"힘은 없어요. 뭔가에 의지하지 않으면 거의 걸을 수도 없다구요."

"바로 그거야. 걸을 수 없어. 그런데 그 아가씨가 한 손으로 긴 의자를 들어 올리는 것을 봤다구."

"설마요."

"나와 다툴 문제가 아니야. 덴버한테 물어보면 될 거야. 덴버는 그때 그 아가씨하고 함께 있었으니까."

"덴버! 잠깐 이리 와 보렴."

덴버는 현관을 청소하던 손을 멈추고 창문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포올 디가 너와 함께 비러브드가 한 손으로 긴 의자를 들어 올리는 것을 봤다는데, 정말이니?"

길고 짙은 눈썹 때문에 덴버의 눈은 실제보다 훨씬 어수선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처럼 시선을 포올 디에게 고정시키고 있어도 눈의 표정으로는 진의를 알아내기는 상당히 어려웠다.

"아니오."

그녀는 대답했다.

"본 적 없어요."

포올 디의 얼굴이 어두워졌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뭔가 해결의 실마리가 있더라도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빗물이 필사적으로 소나무 잎에 매달렸다. 비러브드는 세스로부터 눈을 떼지 않았다. 웅크리고 앉아 난로의 조절판을 흔들기도 했다. 작은 나뭇가지를 꺾어 불쏘시개를 만들고 있는 동안에도 비러브드는 세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친구처럼 비러브드는 세스가 있는 방에서 어정대고 있었으며 나가라고 말하지 않는 한 결코 나가지 않았다. 심지어 세스 곁에 있고 싶어서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서둘러 일어났다.

일터에 나가기 전에 아침 식사로 핫케이크를 구으려고 아래층에 내려가면 이미 부엌에서 세스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램프의 불빛에 비춰진 부뚜막에서 피어오르는 불빛 위에 두 사람의 그림자는 천장에서 서로 부딪히고 교차되었다. 세스가 귀가하는 두 시가 되면 비러브드는 창가에 모습을 드러냈다. 현관에 서 있는 때도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주차장, 주차장의 계단, 도로로 나가는 작은 길, 그리고 도로...

마침내는 멀리까지 나가 세스를 맞이하고 함께 돌아오곤 하였다. 그리고 오후가 되면 세스가 돌아오지 않을까 봐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세스는 비러브드가 공공연히 말없이 붙어다니는 데 대해 너그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이러한 존경과 사랑을 친딸이 보여준다면 꼴사나울 정도로 의타심이 강한 아이로 키웠다는 생각에 소름이 끼쳤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기묘한 구석이 있기는 해도 이 귀여운 손님이 붙어 다니는 것은 선생님을 좋아하는 학생이 그를 기쁘게 해주듯이 세스를 기쁘게 해 주었다.

해가 점점 빨리 졌으므로 일찍부터 램프에 불을 붙여야 할 계절이 되었다. 세스는 아직 어두울 때 일터로 나갔으며 포올 디는 어두워져야만 돌아왔다. 어둡고 싸늘한 어느 날 밤, 세스는 노란 스웨덴 무청을 넷으로 잘라 스튜로 만들기 위해 불에 얹어 놓았다. 덴버에게 4리터 반쯤의 콩을 건네주며 콩을 골라 밤새 물에 담그어 두라고 시키고는 잠시 쉬려고 의자에 앉았다.

부뚜막의 열기로 졸음이 왔고, 비러브드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을 때는 잠의 심연 속으로 빠져들어 있을 때였다. 깃털이 와 닿는 감촉이었지만 욕망이 서려 있었다. 세스는 흠칫 움직였고 돌아다 보았다. 자기 어깨에 놓여졌던 비러브드의 부드럽고 여린 손과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는 동안에 세스가 본 비러브드의 절망은 끝없이 깊은 것 같았다. 뭔가 간절히 소원하는 기색이 간신히 억제되어 있었다. 세스는 비러브드의 손가락을 달래듯이 가볍게 두드리며 덴버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녀는 콩을 고르느라 여념이 없었다.

"당신의 다이아몬드는 어디에 있나요?"

비러브드는 탐색하듯 세스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다이아몬드? 내가 다이아몬드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있어?"

"당신 귀에 매달려 있었어요."

"그랬다면 좋겠지. 옛날에 수정 귀걸이를 가져본 적은 있었지만. 옛날에 있던 주인마님 선물이었지."

"가르쳐 줘요."

얼굴에 행복스러운 미소를 띠우면서 비러브드는 말했다.

"당신의 다이아몬드에 대해 내게 가르쳐 줘요."

그것이 비러브드의 굶주림을 채워 주는 한 방법이 되었다. 덴버가 달콤한 음식물이 비러브드를 몹시 기쁘게 해주는 것을 발견해 그것에 의지한 것과 마찬가지로, 세스는 이야기를 해주면 비러브드가 깊은 만족감을 느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나간 인생의 얘기를 할 적마다 고통이 되살아나곤 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은 비러브드를 기쁘게 해준 것만큼 세스를 슬프게 했다.

생각나는 사건이란 사건들은 고통에 찌들어 있어 돌이켜보기 싫은 것들이었다. 그렇다고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녀도 베이비 색스도 과거의 인생에 대해 입에 담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라는 생각이 일치되어 있었다. 덴버가 알고 싶어 물어 오면 세스는 극히 간단하게 대답해주거나, 빙 돌려서 끝나지 않는 꿈과 같은 얘기를 해주곤 했었다. 포올 디는 그녀와 같은 농장에서 지낸 세월이 있어서인지 어느 정도 냉정하게 얘기할 수 있는 상대였다. 그러나 그와 얘기하고 있을 때도 아픔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귀걸이 얘기를 시작하니 세스는 자기가 얘기하고 싶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아마도 비러브드가 실제의 사건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든지, 아니면 얘기를 듣고 싶다는 그녀의 갈망 탓일 것이다. 하여튼 얘기한다는 것은 뜻하지 않은 즐거움을 주었다.

콩을 고르는 소리와 스웨덴 무청이 삶아지는 냄새 속에서 세스는 옛날 자기 귀에 달고 있던 수정 귀걸이를 설명해 나갔다.

"일하고 있던 집의 주인마님이 내가 결혼했을 때 주었단다. 나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옥수수 껍질이 채워진 매트 위를 좁혀 한 사람의 장소를 비우는 것이 결혼의 의미라니, 난 싫었어. 그것도 자기의 요강을 들고 상대의 오두막에 간다는 것이 말이야. 뭔가 어떤 의식이 있을 줄 알았어. 예를 들면 춤이라든가, 패랭이꽃 한 송이를 머리에 꽂는다든가."

세스는 미소 지었다.

"결혼식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지만 옷장에 걸려 있던 가너 부인의 웨딩드레스를 본 적이 있어. 그리고 부인이 결혼식 광경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을 들었어. 가너 부인의 결혼식처럼 나도 해보고 싶었어. 음식물들을 장만해서 나와 할리와 스위트 홈 농장의 사나이들 모두가 모여 앉아 보통 때와는 색다른 음식을 먹는 잔치를 말이야. 그런데도 실제로는 아무런 행사의 예정도 없었지. 그 사람들은 우리들이 부부가 되는 것은 상관없다고 했어. 그것이 결혼이었고 그것으로 끝이었어.

하지만 말이야, 나는 적어도 일할 때 입고 있던 동냥 주머니 같은 옷과는 다른 드레스를 입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어. 그래서 헝겊을 훔쳐 놀라운 드레스를 만들었지. 지어서 입은 후에는 다시 하나하나 떼어내어 원상태로 돌려놔야 했지. 할리는 끈기 있게 내가 드레스를 완성 시킬 때까지 기다려주었어. 그래서 결국 난 신부가 되었어. 드레스라고는 상상할 수없을 만큼 뒤죽박죽인 드레스를 입었던 거야. 어쨌든 가너 부인은 그 드레스를 입은 나를 보았을 것이 틀림없어. 내 딴에는 감쪽같이 속여 넘겼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내가 한 일을 모두 알고 있었어. 우리들의 첫날밤 일도. 그러니까, 옥수수밭으로 할리와 함께 들어갔던 것을 말이야."

"다음날, 가너 부인은 손가락으로 따라오라는 신호를 하고는 나를 2층에 있는 부인의 침실로 데리고 갔지. 상자를 열고 수정 귀걸이 한 쌍을 꺼내면서 나와 할리의 행복을 기원한다고 하셨단다."

"엄마가 귀걸이를 한 것은 본 적이 없어요."

덴버가 말했다.

"그 귀걸이, 지금은 어디 있죠?"

"없어졌어."

세스가 대답했다.

"오래 전에 없어졌단다."

그리고 그녀는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 기회까지 얘기를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세 사람이 나란히 비에 흠뻑 젖은 시트와 패티코트를 안고 집으로 뛰어들었다. 숨을 할딱이며 세 사람은 걷어온 세탁물을 의자나 테이블 위에 널어놓았다. 비러브드는 양동이의 물을 퍼마시며 세스가 수건으로 덴버의 머리를 닦아주고 있는 것을 지켜보았다.

"세 가닥으로 땋은 머리를 풀어야 하지 않겠니?"

세스가 물었다.

", 내일요."

덴버는 몸을 웅크렸다.

"오늘은 언제나 이곳에 있지만 내일은 없지."

세스는 말했다.

"아파서 그래요."

덴버가 말했다.

"매일 밤 빗어. 그럼 아프지 않을 테니까."

"아파."

"당신의 것이었던 여자, 그녀는 당신의 머리카락을 한 번도 빗겨준 적이 없었나요?"

비러브드가 물었다.

세스와 덴버는 얼굴을 들어 비러브드를 쳐다보았다. 4주일이 되었어도 어머니와 딸은 아직 비러브드의 목소리에 익숙하질 못했다.

"당신의 것이었던 여자, 그녀는 당신의 머리카락을 한 번도 빗겨준 적이 없나요?"

라고 비러브드의 질문은 분명히 세스에게 향해진 질문이었다.

"나의 것이었던 여자? 네가 말하는 것은 나의 어머니? 비록 빗겨준 일이 있었다고 해도 기억하고 있지 않아. 그 여인이 밭에 나가 있는 것을 두세 번, 잉크를 만들고 있는 것을 한 번 보았을 뿐이니까. 아침에 내가 잠에서 깨어날 쯤에는 그분은 다른 여인들과 함께 작업을 하고 있었지, 달빛이 밝을 때는 그 사람들은 달빛 아래서도 일했어. 월요일에는 나무토막처럼 쓰러져 정신없이 잤어. 그런 다음에는 그녀는 밭으로 돌아갔으므로 나는 수유를 담당하고 있는 다른 여자의 젖을 빨았지.

그렇기 때문에 네 질문에 대한 대답은 노우야. 머리를 빗겨준 적은 없었다고 생각해. 그녀는 나의 머리를 한 번도 빗겨준 적이 없으며 다른 것 역시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어. 밤에도 같은 오두막에서 자는 것조차 하지 않았어.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해준 것이 있었지. 나를 안아올려 오두막 뒤로 데려갔었지. 그곳에서 자기의 드레스 앞자락을 열어젖히고 한쪽 젖을 들어올려 그 밑을 가리켰지. 앙상한 갈비뼈 위에 원이 쳐진 십자의 문신이 있었어. 그 문신이 엄마라는 표시라고 했어.

"표시가 있는 사람은 이제는 엄마 혼자뿐이란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죽었어. 나의 신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네가 나의 얼굴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해도 이 표시로 네 엄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거야!"

몹시 두려웠어. 그래서 나도 뭔가 중요한 것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어. 그래서 생각나는 대로 그대로 입에 담았지. '그런데 엄마는 어떻게 우리들을 분간할 수 있지? 우리들에게도 이 표시를 그려줘.'라고."

세스는 싱긋 웃었다.

"그려줬나요?"

덴버가 물었다.

"따귀를 얻어맞았어."

"왜요?"

"그때는 그 이유를 몰랐지. 내 몸에 표시를 찍히고 나서 겨우 알았지."

"그 분은 어떻게 되었나요?"

"나무에 목이 매달려 돌아가셨어. 끈을 끊어 시체를 나무에서 내렸을 때는 아무도 그녀에게 있는 십자의 표시를 분간할 수가 없었어. 특히 나로서는 알 수 없었지. 잘 살펴보았지만 말이야."

세스는 빗에 엉겨 붙은 머리카락을 뽑아서 불 속에 던져버렸다. 역겨운 냄새가 그녀들을 몹시 화나게 했다.

", 냄새!"

그녀는 말하고 갑자기 일어섰으므로 덴버의 머리카락에 꽂혀 있던 빗이 바닥에 떨어졌다.

세스는 한 의자로 성큼성큼 걸어 나가 시트를 집어 들었다.

알고 있다는 사실마저 완전히 잊고 있던 어떤 기억이 새삼 자꾸만 되살아나고 있었으므로 양손을 가지고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왜 그놈들은 엄마의 어머니 목을 매달았죠?"

덴버가 물었다. 덴버는 자기 엄마의 어머니에 관한 그 어떤 얘기건 귀에 들은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베이비 색스가 그녀가 알고 있는 유일한 할머니였다.

"그것은 끝내 알 수 없었어. 그때 목이 매달린 사람이 많았었지."

그녀는 대답했으며 덜 마른 세탁물을 접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선명하게 되살아난 기억은 난이라고 불리우고 있던 여자의 모습이었다. 난은 세스의 손을 붙들어 그녀가 표시를 찾아내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시체 더미에서 거칠게 떼어냈다. 난은 세스가 제일 잘 알고 있던 인간으로 하루 종일 가까이에 있으면서 갓난아기들에게 젖을 주었고 취사를 담당하고 있는 여인이었다. 팔은 하나뿐이었다. 다른 팔은 팔꿈치 아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여자는 주위 사람과는 다른 말을 썼다.

당시에는 세스도 이해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녀를 흉내 내는 말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노래하고 있는 장면이나 춤추고 있는 장면, 그리고 많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스위트 홈 농장에서의 기억이 너무나 적은 것은 서로 다른 말 때문이라고 세스는 믿고 있었다. 난이 그녀에게 가르쳐준 것은 난이 그것을 얘기하는 데 사용한 말과 더불어 잊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어머니가 사용하던 것과 같은 언어지만 전혀 되살아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전하고자 하는 본질은 잊혀지지 않았다.

축축한 하얀 시트를 가슴에 안고 풀어지지 않았던 암호 속에서 세스는 의미를 되새기고 있었다.

밤이었다. 난이 온전한 팔로 세스를 끌어안고 나무등걸 같은 다른 한쪽 팔을 휘두르고 있었다.

"잘 들어. 너에게 말해 둘 것이 있으니까 정신 차려서 잘 들어, 세스야."

그렇게 말한 다음 난은 얘기해 주었던 것이다. 그녀는 세스에게 세스의 어머니와 난은 함께 바다 저쪽에서 왔다고 가르쳐 주었다.

두 사람 모두 몇 번씩이나 선원에게 강간당했다고도 했다.

"너의 어머니는 너 이외의 아이는 모두 버리고 말았어. 선원의 씨로 태어난 아이는 모두 섬에 버렸지. 그밖에 좀더 많은 백인에게서 잉태한 아이도 역시 전부 버렸지. 이름도 붙이지 않고 버렸던 거야. 너에게는 까만 피부의 사나이 이름을 붙여주었지. 너의 어머니는 그 사나이의 몸에 팔을 돌렸어. 다른 사내에게는 절대 팔을 돌리지 않았지. 결단코 팔을 돌려 끌어안지 않았단 말이다. 너에게 얘기해 두는 거야. 아직 어리지만 잘 들어둬라 세스야."

꼬마 계집애 때 세스는 이 얘기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성숙한 여자가 되고 나서부터 그녀는 화를 내곤 했지만 무엇에 대해 화를 내고 있는지 자기 자신도 확실치 않았다. 베이비 색스가 아기의 탄생을 강하게 소원했으므로 그것이 머릿속에서 큰 파도처럼 부숴졌다. 물보라가 흩어진 후의 정적 속에서 세스는 부뚜막 옆에 앉아 있는 두 소녀를 보았다. 머리가 조금 모자라는 것 같은 식객과 신경질적이고 자주 쓸쓸해 하는 자기의 딸. 두 사람 모두 작고 훨씬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포올 디가 이제 곧 돌아올 거야."

세스가 말했다.

덴버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눈앞에서 어머니가 빨래를 개면서도 우두커니 선 채 정신을 잃고 생각에 잠겨 있는 1분 동안 덴버는 이를 악물고 빨리 이 상태가 지나가 버리도록 빌고 있었다. 덴버는 어머니가 말해주는 수많은 이야기 중에서 자기와 관련 없는 것은 싫었던 것이다.

덴버가 자진해서 물어 보는 것이 에미의 일뿐인 것은 그 때문이었다. 물론 에미 이외의 얘기도 빛나고 활기에 넘친 세계였다. 그러나 그곳에 자기가 없었다는 이유로 그녀는 그 세계를 미워했다. 희망은 전혀 없었지만 비러브드에게도 미워해 주기를 바랬다. 비러브드는 뭔가 우스꽝스러운 질문을 해서 세스에게 얘기를 하게 하려고 모든 기회를 이용했다. 덴버도 이 소녀가 탐욕스러울 만큼 세스의 얘기를 듣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 덴버는 그 이상의 것에 관해서도 알게 되었다. 비러브드의 질문이다.

"당신의 다이아몬드는 어디에 있죠?"

"당신의 것이었던 여인, 그녀는 당신의 머리를 한 번도 빗겨준 적이 없나요?"

그리고 가장 수수께끼 같은 것은 당신의 귀걸이 얘기를 해달라는 말이다.

비러브드는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비러브드에게서는 광채가 나고 있어서 포올 디로서는 그것이 제일 불쾌했다. 여자라는 것은 가냘픈 덩굴이 힘있게 뻗어나가기 전의 딸기 묘종처럼 변해간다. 우선 묘종의 녹색 광택이 변화한다. 그리고는 실처럼 덩굴이 나오고 꽃봉오리가 얼굴을 내민다. 하얀 꽃잎이 시들고 박하색의 열매가 머리를 내밀 시기에는 잎의 광택은 금박을 씌운 듯 단단하고 밀납처럼 된다.

비러브드는 그것처럼 보였다. 마치 금박을 씌운 것처럼 매끄럽게 빛나고 있었다.

저녁에 집에 돌아와 세 여인이 나란히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을 때는 비러브드의 요염함이 더욱 돋보였다. 그는 덴버와 세스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 이상했다. 어쩌면 알아차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포올 디는 비러브드가 자신의 개성을 의식하고 있는지 알려고 주의깊게 관찰했지만 그녀는 마치 그가 없는 듯이 행동했다. 직접 묻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 일도 종종 있었다. 5주일씩이나 함께 살았지만 그녀의 특성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였다.

네 사람은 포올 디가 124번지에 도착하던 날에 망가진 테이블을 둘러싸고 있었다. 수리한 다리는 망가지기 전보다 단단해 보였다. 양배추는 완전히 없어졌고 네 사람의 접시 위에는 훈제 돼지고기를 먹고 난 뼈가 모아져 작은 더미를 이루고 있었다.

"너에게는 형제자매도 없니?"

포올 디가 비러브드에게 말을 시켰다.

비러브드는 자기 스푼을 가지고 만지작거릴 뿐 그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난 외톨이에요."

"이곳에 왔을 때 너는 무엇을 찾고 있었지?"

그는 덧붙여 물었다.

"누가 이 집을 가르쳐 주었어?"

"그 여자가 이 집에 대해 얘기해 주었어요. 다리가 있는 곳에 있을 때 그 여자가 내게 가르쳐 주었어요."

"옛날에 틀림없이 알고 지낸 누구일 거예요."

세스가 말했다.

"어떻게 찾아왔지? 누가 데려다주었어?"

포올 디는 세스와 덴버가 숨을 죽이고 긴장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어쨌든 끝까지 따져 묻기로 결심했다.

"누가 너를 이곳에 데려왔는지 나는 묻고 있는 거야."

"여기까지 걸어왔어요."

그녀가 말했다.

"길고 긴 길을. 아무도 나를 데려오지 않았어요.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어요."

"너는 새 구두를 신고 있었어. 그렇게 오랫동안 걸었으면서 어떻게 네 구두가 그렇게 새 것이지?"

"포올 디, 비러브드를 괴롭히지 말아요."

"알고 싶어."

나이프 자루를 지휘봉처럼 들고 포올 디는 말했다.

"난 구두는 벗을 수 없어! 옷을 벗을래! 구두끈도 풀을래!"

비러브드가 소리를 지르며 소름 끼치는 적의에 찬 시선을 그에게 던졌으므로 덴버가 그녀에게 손을 살며시 대었다.

"내가 가르쳐줄께."

덴버가 끼어들었다.

"구두끈 매는 방법을 말이야."

그리고 비러브드로부터 그 답례로 미소를 받았다.

커다란 은빛 고기가 꽁지를 붙들린 순간 미끄러지듯 도망쳐버린 감촉을 포올 디는 맛보았다. 이 여인의 광채에 싸인 요염함이 그에게 향해진 것이 아니라면 대체 상대가 누구란 말인가? 딱히 누구라고 할 상대도 없는데 불이 켜진 것처럼 갑자기 반짝였다. 다만 그저 막연히 자신을 봐 달라고나 하는 듯한 이렇게 요염한 여자를 여지껏 본 적이 없었다. 그의 경험으로는 빛은 반드시 비춰져야 할 초점이 있을 때 나타난다.

30마일의 여인이 그러했다. 그와 함께 도랑 속에 숨어 기다리고 있는 동안은 생기를 잃고 있었지만, 식소우가 도착하면 반짝이는 별이 되었다. 이 일로 자신이 판단을 그르친 기억은 없었다. 그가 세스의 젖은 다리를 본 순간 빛은 세스로부터 흘렀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날 두 팔로 그녀를 감싸고 그 등에 대고 속삭이는 대담성은 결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과거 20년 동안에 만난 온갖 흑인과 비교해보면 분명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집도 없고 친척도 없는 소녀 비러브드는 뭔가 색달랐다. 남북전쟁이 한창이었을 때 혹은 전쟁 전에, 굶주리고 육친과 사별한 흑인들을 그는 똑똑히 보아 왔다.

이 흑인들은 그가 해 온 것처럼 굴에 숨어 부엉이와 먹을 것을 서로 다투었다. 그가 했듯이 낮에는 숲에서 잤으며 밤에는 걸었다. 또는 퇴비 속에 숨어들기도 하고 우물에 뛰어들어 감시인이나 기습해 오는 부랑자들을 피해야만 했다. 한 번은 14세 정도의 흑인을 만난 적이 있었다. 이 소년은 숲속에서 혼자 살고 있었는데 다른 장소에서 지낸 일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자기의 갓난애인 줄 알고 머리가 모자라는 흑인 여인이 오리를 훔치다가 유치장에 들어와 목을 매다는 것도 보았다.

비러브드는 그러한 흑인들과 달랐다. 그녀의 요염함, 그녀의 새 구두, 모두 그를 동요시켰다. 아마 그의 존재가 그녀를 동요시키지 않았던 탓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적당한 시기를 가늠한 것 같은 일의 사정 탓인지도 모른다. 세스와 그가 다툰 일을 화해하고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 나가 마치 가족처럼 즐겼던 바로 그 날, 이 여자는 모습을 나타내어 이 집안의 식객이 되었다. 그날 덴버는 포올 디에 대해 마음을 고쳐먹었다.

세스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에게는 장기간의 일자리가 발견된 것 같았고 124번지는 망령에서 해방되었다. 인생다운 인생의 징조가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원망스럽게도 병이 든 가엾은 떠돌이 여인을 돌보아 주었더니, 병이 완전히 나은 후에도 단 한 발짝도 나가려 하지 않는 것이다.

포올 디는 비러브드가 나가기를 원했지만 세스가 그녀를 이 집에 들어오게 했다. 자기의 집도 아닌 집에서 내쫓을 수는 없었다. 유령을 때려눕힐 수는 있었어도 무력한 흑인 소녀를 쿠 클락스 클란의 패거리들이 설치고 다니는 곳으로 쫓아내는 것은 얘기가 전혀 다른 것이다. 미친 듯이 검은 피에 굶주려 마치 피가 없이는 살아갈 수 없기라도 하듯이 쿠 클락스 클란(KKK)은 오하이오 강을 자기 것처럼 헤엄치며 돌아다녔다.

식탁에 앉아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대싸리의 줄기를 이쑤시개 대신 씹으면서 포올 디는 그녀의 신원을 규명해 보자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거리의 흑인과 상의하여 그녀의 진짜 집을 찾아내자고.

그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비러브드는 먹던 푸딩 속의 건포도 하나가 목에 걸렸다. 의자에서 떨어져 목을 잡고 데굴데굴 뒹굴었다. 덴버와 세스는 비러브드의 손을 그녀의 목에서 떼어놓고 세스는 그녀의 등을 두드렸다.

비러브드는 엎드려서 먹은 것을 토해내고 괴로움에 허덕였다. 발작이 진정되고 덴버가 오물을 닦아 내자 비러브드는 말했다.

"이젠 자겠어요."

"내 방으로 가자."

덴버가 말했다.

"그곳이라면 너를 잘 돌봐줄 수 있으니까."

그 이상 적절한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비러브드에게 자기 방을 같이 쓰자고 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혼자 궁리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러브드가 또 병이 도지지나 않을지, 감은 채 눈을 뜨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에 자기 방으로 오면 항상 불안했다.

비러브드가 이 집에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담장 저편으로 슬그머니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고 계속 불길한 상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덴버의 방이라면 두 사람은 좀더 마음 편하게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소녀들이 방으로 가자 세스는 식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물이 가득 담긴 통 옆에 접시를 쌓아 올렸다.

"그 아가씨의 무엇이 당신을 그렇게 초조하게 만들었죠?"

포올 디는 얼굴을 찡그리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덴버에게는 하고 싶은 말을 각자 말하고 있었지만, 그 아가씨에게까지 그렇게 할 필요가 있을까요?"

세스가 물었다.

"나는 어째서 두 사람이 그렇게 착 달라붙어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그녀가 왜 당신에게 매달리는지는 분명하지만 왜 당신이 그녀에게 매달리는지는 나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아."

세스는 접시에서 손을 떼고 그를 향해 고쳐 앉았다.

"누가 누구에게 매달렸다는 것이 그렇게 마음에 걸리는 일인가요? 그 아가씨를 먹여주는 것은 조금도 고생스럽지 않아요. 레스토랑에서 조금 여분으로 더 가져오는 것뿐이니까요. 그리고 그 아가씨는 덴버의 좋은 친구가 되어주고 있어요. 당신도 그것을 알고 있다고 믿어요."

"그런데 당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것은 뭐죠?"

"분명하게 규명할 수가 없어. 우리 집에 어울리지 않는 뭔가가 있는 느낌이야."

"그럼 이렇게 느껴줄 수는 없을까요? 잘 수 있는 침대가 있고, 그곳에는 누군가가 있다. 그 누군가는 침대에서 잘 만한 값어치가 있기 위해서 매일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생각한다. 그걸 느껴보면 돼요."

"그런 것은 나도 알고 있어 세스. 어제 갓 태어난 것도 아니고, 그리고 나는 여지껏 한 번도 여자를 학대한 적이 없어."

"그러면 이 세상에는 제대로 된 사나이가 한 사람은 있는 거로군요."

세스는 대답했다.

"두 사람이 아닐까?"

"아니, 두 사람은 아니에요."

"할리는 당신에게 대체 무슨 짓을 했지? 할리는 당신 편이었어. 그는 결코 당신을 내버려둔 채 돌보지 않을 사람이 아니야."

"나를 버리지 않았다면, 그럼 할리가 버린 것은 무엇이었죠?"

"잘 알지는 못하지만 도망친 것은 당신으로부터가 아니야. 그건 사실이야."

"그러면 그 사람은 그것보다 더 나쁜 짓을 했어요. 그 사람은 아이들을 내버리고 갔으니까."

"내버렸는지 어떤지 당신은 모르잖아."

"그 사람은 온다고 약속한 장소에 없었어요."

"그는 그곳에 있었어."

"그렇다면 왜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죠? 왜 내가 아이들을 떠나보내고 뒤에 남아 그 사람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죠?"

"지붕 밑에서 나올 수가 없었어."

"지붕 밑? 어디의 지붕 밑?"

"당신 머리 위의 건초장. 곡간 안에."

시간이 마치 정지된 것 같았다. 세스는 테이블로 당겨 앉았다.

"그이를 보았나요?"

"보았어."

"그이가 당신에게 얘기했나요?"

"당신이 내게 얘기해 주었어."

"무엇을?"

"내가 이 집에 들어온 날에, 당신은 그 녀석들이 당신의 젖을 훔쳤다고 말했어. 무엇이 할리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나는 도통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었을 거야. 내가 알 수 있었던 것은 뭔가가 그를 미치게 했다고 하는 것뿐이었어. 몇 년이나 계속해서 토요일과 일요일에도 게다가 밤에까지 일해도 까딱도 하지 않던 사나이였어.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느 날 곡간에서 일어난 일을 보고 나뭇가지가 똑 부러진 모양으로 못쓰게 되었지."

"그 사람이 보았단 말이에요?"

세스는 자기의 팔꿈치를 붙잡고 있었다.

"보았어. 보았을 것이 틀림없어."

"그이는 그 어린애들이 그런 짓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도 놈들이 삶을 계속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는 말이군요? 그 사람이 보았단 말이에요?"

"잠깐 기다려! 사나이란 도끼가 아니야. 아침부터 밤까지 쉴새없이 내리쳐 잘라내거나 부숴버리는 도끼가 아니야. 사나이를 굴복시키는 것이 있어. 마음속에 들어가 쪼개버릴 수 없는 것이..."

세스는 램프의 불빛을 받으면서 왔다 갔다 하며 걷고 있었다.

"지하 조직의 사람은 일요일까지라고 했어요. 놈들은 내 젖을 훔쳤어요. 그런데 그 사람은 그것을 보았으면서 내려오지 않았다구요? 일요일은 왔지만 그 사람은 오지 않았어요. 월요일이 되었어도 할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어요. 그 사람은 죽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오지 않은 것이라고 믿고 있었어요. 그로부터 18년이나 지난 후에 당신이 이곳에 찾아와 당신도 모르니까, 그 사람이 죽었다고는 말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이 좀더 나은 생활 방식을 찾았나 보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 사람이 어딘가 가까이에 있었다면 내가 있는 곳으로 오지 않았더라도 베이비 색스는 당연히 만나러 왔을 거예요. 하지만 그 사람이 보고 있었다는 것은 몰랐어요."

"그렇다고 해도 이제 새삼스럽게 그것으로 사정이 뭐가 변하지?"

"만약 그 사람이 지금도 살아 있고 또한 그것을 보았다면 내가 살고 있는 집의 문지방을 절대로 넘어서려고 하지는 않을 거예요. 할리는 그런 것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 일이 그를 미치게 했어, 세스."

포올 디는 눈을 들어 올려 그녀의 얼굴을 주시하며 한숨을 쉬었다.

"당신도 모두 알아두는 편이 좋겠지. 내가 최후로 보았을 때 그는 우유 교유기 옆에 앉아 있었지. 그 사나이는 얼굴에 온통 버터를 바르고 있었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그것이 고마웠었다. 대개는 귀로 들은 것이 즉각 상상이 되어 눈앞에 보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포올 디가 말한 것을 마음에 그릴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조심 조심 그녀는 질문했다.

"그 사람은 뭐라고 했죠?"

"아무 말도."

"한 마디도?"

"한 마디도."

"그 사람에게 얘기를 걸었어요? 그 사람에게 아무 말도 말하지 않았어요? 뭔가 말했겠죠!"

"말할 수 없었어 세스. 어떻게 된 거냐고...말할 수 없었어.

"왜요!"

"내 입 속에는 재갈이 물려 있었지."

세스는 현관문을 열고 주차장의 계단에 걸터앉았다. 태양이 뜨지 않은 하루는 저물고 있었지만 저편 멀리 초원에 서 있는 나무들은 아직 분간할 수가 있었다. 반란만 일으키고 있는 뇌에 마음을 맡기고 있으면서도 머리를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

왜 뇌는 아무것도 거부하지 않는 것인가? 비참도 후회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원망스러운 광경도 거부하지 않는다. 탐욕스러운 아이들처럼 뇌는 닥치는 대로 거머쥐었다.

나의 뇌는 이끼가 낀 것 같은 이빨을 가진 두 사람의 일로 속이 메스꺼울 정도로 가득 차 있었다. 한 사람은 나의 젖을 빨고, 또한 사람은 나를 꼼짝 못 하게 눌렀다. 책을 읽을 수 있는 선생이 관찰하며 기입하고 있었다. 지금도 그 광경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있다. 아아, 싫어. 그 장면에 자기 남편을 덧붙이다니. 그 사람이 건초장에서 가만히 보고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광경을 그 사람은 내려다 보고 있었어. 게다가 놈들을 제지하지도 않고.

포올 디가 그 사람을 보았어도 입에 재갈이 물려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을 구하는 것도 위로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포올 디가 나에게 얘기할 것은 아직 많이 남았을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알고 싶지도 않았고 억지로 생각해 내고 싶지도 않다. 달리해야 할 알이 있기 때문이다. 내일의 걱정, 덴버의 일, 비러브드의 일, 사랑의 일, 노후의 일, 질병 걱정 등등.

그러나 그녀의 뇌는 미래의 일에 흥미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과거를 이미 잔뜩 집어넣고 있어서 내일의 계획을 세우기는커녕 내일을 상상하는 여유마저 남겨 놓지 않은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미치고 말았다. 그녀만 어떻게 미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의 뇌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정지했다. 할리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음이 틀림없다. 나도 그렇게 되었더라면 훨씬 편했을 텐데. 할리와 둘이서 우유 교유기 곁에 웅크리고 앉아 티끌만한 걱정도 없이 굳어버린 버터를 서로의 얼굴에 비벼대고 있었더라면...

하지만 그녀의 세 아이들은 담요 밑에 숨어 설탕물을 적신 헝겊을 깨물면서 오하이오를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버터놀이를 하고 있다고 해서 현실이 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포올 디가 안에서 나와 그녀의 어깨에 손을 댔다.

"당신에게 얘기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나도 들을 생각은 없었어요."

"지워버릴 수는 없어도 깊이 파고들지 않을 수는 있어."

이 사람은 나에게 얘기를 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 사람에게 얼마나 괴로웠겠느냐고 묻기를 기다리고 있다. 혀가 굴욕적인 취급을 당했던 일, 무쇠로 짓눌려 침을 뱉고 싶어도 뱉을 수 없고 괴로운 나머지 소리를 친 것 등 내가 묻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한 것에 관해서는 그의 얘기를 듣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스위트 홈 농장에 오기 전에 있었던 곳에서 여러 번 목격했던 것이다. 재갈을 물린 거구의 사나이, 애처로운 소녀, 입술이 뒤로 당겨진 순간 눈 속에서 분출되는 사나운 표정을.

세스는 얼굴을 들어 포올 디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뭔가 흔적이 남겨져 있지 않나 하고 주의깊게 보면서 말했다.

"재갈을 물리면 그 후엔 훨씬 사나운 얼굴 표정을 짓게 되었죠.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놈들이 흑인에게 재갈을 사용했다고 해도 아무런 효험이 없었을 거예요. 재갈을 물리면 이제까지 없었던 사나움을 한층 더 지니게 되었으니까요. 당신은 아무리 보아도 그 흔적이 보이지 않는군요. 당신의 눈매에는 사나운 기색이란 조금도 없어요."

"붙이는 방법도 있지만 제거하는 방법도 있는 거야. 어느 쪽이 더 심한지 나는 아직 명확히 알지 못해."

그는 그녀의 옆에 앉았다. 세스는 그를 보았다. 태양이 나오지 않은 하루의 잔광 속에서 적동색으로 골격이 뚜렷이 드러나 있는 긴장된 그 얼굴은 그녀의 마음을 위로해주고 안정시켜 주었다.

"그 일에 대해 내게 얘기하고 싶어요?"

그녀는 물었다.

"모르겠어. 이제까지 한 번도 얘기한 적이 없으니까. 아무에게도. 노래로 만들어 부르긴 했지만. 타인에게는 한 번도 얘기한 적이 없어."

"얘기해 봐요. 듣고 있을 수 있으니까."

"아마 당신은 들을 수 있겠지, 허나 내가 말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 왜냐하면 내게 타격을 준 것은 재갈 그 자체가 아니야. 그게 아니었어."

"그럼 무엇이었죠?"

세스가 물었다.

"그 수탉 녀석. 놈이 앞을 지나갈 때 나의 모습을 지긋이 내려보고 있던 놈의 태도를 본 거야."

세스는 미소 짓고 있었다.

"그 소나무의?"

"그래."

포올 디도 덩달아 웃었다.

"그 나무에는 다섯 마리가 앉아 있었지. 그리고 암탉은 적어도 50마리는 있었어."

"미스터도?"

"곧바로 눈에 보이지는 않았어. 하지만 채 스무 발짝도 걷지 않았을 때 놈의 모습도 보였어. 그곳에 있던 울타리 말뚝에서 내려와 통 위에 앉았어."

"미스터는 그 통을 좋아했죠."

세스는 얘기를 멈출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랬었지. 옥좌같이 말이야. 그놈을 껍질에서 꺼내준 것은 나였어. 내가 없었더라면 놈은 죽어버렸을지 몰라. 암탉은 갓 부화된 병아리들을 뒤에 거느리고 재빠르게 가버렸어. 그 달걀 한 개만이 남아 있었지. 텅 빈 것처럼 보였지만 조금 기다리고 있자 움직이는 기척을 알 수 있었지. 그래서 가볍게 두드려 달걀을 깨어주었더니 미스터가 출생한 거야. 그 짓궂은 것이 크게 자라 온 뜰의 생물을 망쳐버리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었지."

"그 수탉은 언제나 밉상이었어요."

세스는 말했다.

"그래. 그놈은 어디를 보아도 미운 놈이었어. 게다가 잔혹하고 근성도 나빴지. 구부정한 다리를 사용해 뒤뚱뒤뚱 걷고 있었지. 그놈의 볏은 나의 손바닥만큼이나 커졌고 게다가 매우 빨강색이었지. 그런 놈이 통 위에 올라앉아 높은 곳에서 구경하듯 나를 응시하고 있었어. 맹세해도 좋지만 놈은 히죽 웃었어. 내 머리는 바로 조금 전에 보았던 할리의 비참한 모습으로 가득 차 있었고, 할리를 보기 전에는 식소우의 일로 가득차 있었어. 하지만 그 수탉의 모습을 보았을 때, 나 역시 같은 신세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 등 뒤로 손목을 묶여 재갈을 물고 있는 몰골, 이것이 스위트 홈 농장의 마지막 사나이의 몰골이었어. 그놈은 자유스러운 신세같이 보였지. 나 같은 것보다 훌륭하게 보였어. 자기 혼자서는 껍질을 깨고 밖으로 나올 수도 없었던 주제였지만 이렇게 의연해졌는데, 이 나라는 사람은..."

포올 디는 말을 멈추고 오른손으로 왼손을 비틀었다.

"미스터 그놈은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며 계속 존재할 것을 허락받았지. 비록 당신이 놈을 요리했다 해도 당신은 미스터란 이름의 수탉을 요리한 것으로 되는 거야. 그런데 살건 죽건 나에게는 두 번 다시 포올로 되돌아갈 방도가 없었어. '선생'이 나를 바꾸어버렸어. 나는 뭔가 다른 것이 되어 있었어. 또한 그 다른 것이란 닭보다도 하찮은 것이야."

세스는 한 손을 그의 무릎에 얹고 비벼댔다.

포올 디는 이제 얘기의 시작에 들어섰을 뿐이다. 세스의 손가락이 살며시 안심시키듯이 그의 무릎을 건드리며 얘기를 그만두게 했을 때 그가 얘기하고 있던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만두는 것이 좋다. 더 이상 얘기하면 두 사람 모두 돌이킬 수 없는 장소에까지 몰리고 말지도 모른다. 얘기의 나머지는 처음에 있었던 곳에 거두어 두면 되는 것이다.

세스는 돌처럼 굳은 무릎의 윤곽을 누르고는 비벼댔다. 그의 무릎을 비비는 것이 그녀 자신을 진정시키고 있듯이, 그도 진정시켜 주기를 바랬다. 레스토랑에서 빵을 반죽하고 있을 때처럼 손을 계속 움직였다. 되살아나려는 과거를 쫓아버리려는 듯.

하루의 어려운 시간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가장 적합한 작업이었다.

 

2층에서는 비러브드가 춤을 추고 있었다. 덴버는 침대에 앉아 싱글거리면서 반주를 넣고 있었다.

이렇게 행복해 보이는 비러브드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설탕을 기분 좋게 빤다거나 덴버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들을 때면 그녀의 입술이 웃으며 옆으로 벌어지는 것은 전에도 보았었다. 어머니가 말하는 옛날이야기에 비러브드가 도취되어 듣고 있을 때는 그녀의 피부에서 따뜻한 만족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쾌활해진 것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비러브드가 바닥에 쓰러져 눈을 부라리며 목을 잡고 구른 지 10분도 채 못되었다. 몇 초 정도 덴버의 침대에 누웠을 뿐 이제는 다시 일어나 춤을 추고 있는 것이다.

"어디서 춤을 배웠어?"

덴버는 그녀에게 물었다.

"아무 데서도 배우지 않았어. 이것 좀 봐."

비러브드는 두 주먹을 허리에 대고 맨발로 스킵을 시작했다. 덴버는 웃었다.

"이번에는 네 차례야. 자아, 이리 와. 너도 춤을 춰야지."

그녀의 까만 스커트가 크게 좌우로 나풀거렸다.

침대에서 일어서면서 덴버는 전신이 얼음같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자기의 몸이 마치 한 송이 눈처럼 차갑고 가벼워져 공중에 떠올라버렸다.

비러브드는 한 손으로 덴버의 손을 잡고 또 한 손을 그녀의 어깨에 얹었다. 두 사람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빙글빙글 작은 방을 돌면서 덴버가 요란스럽게 웃었던 것은 몸에 중량감이 없고 얼음처럼 차가운 감촉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감염되듯이 비러브드도 이끌려서 웃었다. 두 소녀는 까불고 장난치며 앞으로 뒤로, 계속 흔들다 마침내는 녹초가 되어 바닥에 주저앉았다.

호흡이 안정될 때까지 비러브드는 침대 가장자리에 머리를 위로 하여 기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덴버에게는 비러브드가 잠자기 전 옷을 벗을 때 항상 보였던 그것의 끝이 보였다. 거기에 똑바로 시선을 박은 채 덴버는 속삭이듯이 물었다.

"왜 너는 자신을 비러브드라고 부르고 있지?"

비러브드가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는 내 이름이 비러브드야."

덴버는 몸을 움직여 조금 더 비러브드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곳은 어떤 곳이지? 네가 전에 있었던 곳은? 내게 말해 줄 수 없겠어?"

"어두워."

비러브드가 대답했다.

", 그 장소에서 작아. , 이렇게."

그녀는 침대에서 머리를 일으키고 모로 누우며 몸을 둥글게 움츠렸다. 덴버는 손으로 입술을 가렸다.

"추웠어?"

비러브드는 점점 더 몸을 움츠리며 고개를 저었다.

"더워. 거기에서 마시는 공기는 아무것도 없어. 그리고 움직이는 장소도 전혀 없어."

"누군가를 만났어?"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어. 죽은 자도 있어."

"예수님을 만났어? 베이비 색스는?"

"몰라. 이름을 모르니까."

그녀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가르쳐 줘. 어떻게 해서 여기에 왔는지?"

", 기다린다. 그리고 나, 다리 위로 왔어. 어두울 때나 밝을 때도 거기에 계속 있었어. 긴 시간이었어."

"그동안 계속 다리 위에 있었어?"

"아니. 다리는 나중. 내가 밖에 나왔을 때."

"왜 다시 돌아왔지?"

비러브드는 생끗 웃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려고."

"어머니? 세스의 얼굴을 보려고?"

"그래, 세스."

덴버는 조금 기분이 상했다. 비러브드의 돌아온 이유가 자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모욕을 당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우린 시냇가 옆에서 함께 놀았었는데 기억하지 못하지?"

", 다리 위에 있었어."

비러브드는 말했다.

"내가 다리 위에 있는 것. 너 보았니?"

"아냐, 시냇가 옆이야. 뒤쪽 숲속의 물이야."

", 물속에 있었어. 거기서 그 여자의 다이아몬드를 봤어. 만져도 보았어."

"왜 그곳에 갇혀 있었지?"

"그 여자가 나를 두고 갔어. 나를 외톨이로 내버려 두고."

비러브드가 대답했다. 눈을 들어 덴버의 눈과 마주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덴버는 침을 삼키고 나서 말했다.

"가지 말아. , 우리를 놔두고 나가지는 않겠지?"

"물론. 결코 나가지 않아. 여기가 내 집인걸."

덴버는 책상다리를 하고 있다가 갑자기 몸을 앞으로 쑥 내밀어 비러브드의 손목을 잡았다.

"그녀에게 말해서는 안 돼. 어머니에게 네가 누구인지 알리면 안 돼. 부탁이야, 그럴 수 있겠지?"

"나에게 명령하지 말아. 절대로, 절대로 나에게 명령 따위는 하지 말아."

"하지만 나는 네 편이야, 비러브드."

"목적은 그녀. 그녀가 내가 필요로 하고 있는 여자. 너는 없어져도 되지만 그녀는 반드시 내 것으로 만들어야만 해."

비러브드의 눈동자는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까지 커졌고, 새벽녘의 먼 밤하늘같이 새까맣다.

", 너에게 아무 짓도 안 했어. 너를 상처입힌 일 따위는 없어. 남을 상처입힌 적은 한 번도 없다구."

"나도 그런데."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지?"

"여기에서 계속 있을 거야. 이 집의 것인 걸."

"나도 이 집의 것이야."

"그러면 있으면 돼. 하지만 절대로 명령은 하지 말아. 절대로, 그건 하지마."

"우리들 조금 전에는 둘이서 사이좋게 춤추고 있었어. 자아, 춤추자."

"추고 싶지 않아."

비러브드는 일어나서 침대에 엎드렸다. 이대로 비러브드를 잃고 견디기 어려운 외로움 속에 남겨질 것 같은 공포가 엄습해왔다. 그것을 쫓아내려고 애쓰며 가까스로 덴버의 호흡은 평정을 찾았다.

"얘기해."

비러브드가 말을 꺼냈다.

"세스가 배 안에서 너를 낳았을 때의 일을 나에게 얘기해 줘."

"어머니는 내게 한 번도 모두 얘기해준 적이 없어."

덴버가 말했다.

"얘기하라니까."

덴버는 침대로 올라가 팔짱을 꼈다. 서커스에서 돌아오자 비러브드가 앞마당의 그루터기에 앉아 있던 그 날 이후, 덴버는 한 번도 나무숲의 작은방에 가지 않았다. 이 궁지에 몰린 순간까지 자기가 거기에 들리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숲속에서의 모든 것을 지금은 이 언니뻘 되는 소녀가 충분히 메꾸어 주었다. 격하게 고동치는 심장, 꿈을 꾸는 듯한 기분, 놀이 상대, 위험, 아름다움 등을 맛보게 해주었다.

덴버는 두 번이나 침을 꿀꺽 삼키고 이야기를 시작할 태세를 갖추었다. 어릴 때부터 단편적으로 들어왔던 이야기로 비러브드를 붙잡는 망 만들기에 착수했다.

"그녀는 아름다운 손을 갖고 있었다고 어머니는 말했어. 백인 소녀였는데 마르고 가는 팔을 하고 있었지만 아름다운 손을 갖고 있었어. 그걸 금방 알 수 있었다고 어머니는 말했어. 다섯 명의 머리를 덮을 수 있을 정도의 머리카락과 예쁜 손을 갖고 있었다고. 그 손을 보고 어머니는 그녀라면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대. 어머니와 내가 강을 건널 수 있도록 해 주겠다고 말했을 때 어머니가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은 그 소녀의 입 탓이었어. 백인으로 판단할 수 있는 단서 따위는 아무것도 없다고 어머니는 말했어. 언제 어떤 식으로 덮쳐올지 모른다는 거야.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다르니까. 그래도 입을 보면 입모양으로 알 수 있을 때가 있대. 그 소녀는 아주 입이 길었지만 입 주위에는 조금도 심술궂은 면이 없었다고 했어. 그 소녀는 어머니를 그 외양간까지 데리고 가서 발을 주물러 주었어. 그러니까 그게 하나의 증거일 거야. 그래서 어머니는 그 소녀가 자기를 밀고 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었어. 도망가는 노예를 건네주면 돈을 받을 수 있어. 그런데도 이 소녀가 다른 무엇보다도 돈을 바라고 있지 않다는 것을 어머니는 믿을 수 있었어. 정말이지 그 소녀가 말하는 것은 벨벳을 사는 이야기뿐이라는 것을 알고부터는 더욱 더 말이야."

"벨벳이라는 것이 뭔데?"

"천의 이름이야. 털이 길고 부드러운 천."

"계속해."

"어쨌든 그 소녀는 어머니의 발을 주물러 다시 살 수 있게 해 주었어. 그랬는데 어머니가 소리를 내어 울었다고 했어. 굉장히 아팠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발이 되살아난 덕분에 어머니는 무사히 강을 건너 베이비 색스 할머니가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 그리고나서..."

"그게 누구야?"

"지금 방금 말했잖아. 우리 할머니야."

"세스의 어머니?"

"아니, 우리 아버지의 어머니."

"알았어, 계속해."

"베이비 색스 할머니가 있는 곳에서 다른 모든 사람들도 기다리고 있었어. 우리 오빠들, 그리고...갓난애였던 계집애. 그러니까 어머니는 그곳에 도착하기 위해서 모든 고통을 견디어 내야만 했어."

덴버는 이야기하는 것을 중단하고 한숨을 쉬었다. 거기부터가 이야기 중에서도 덴버가 가장 좋아하는 대목이었다. 왜냐하면 전부 그녀 자신에 관한 얘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그 부분을 제일 싫어하기도 했다. 그것은 이 이야기를 들으면 어딘가에 지불이 덜 된 상태의 계산서가 있어서 그것을 지불해야만 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에게 지불하면 되는지, 어떤 형태로 지불해야 하는지 분명히 지명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렇게 말하고 비러브드의 흥미를 띤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이야기를 흡수하고 사물의 색과 크기를 알려고 하는 갈망을 드러내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덴버는 자기가 말하고 있는 이야기를 귀로 들을 뿐만 아니라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여기에 있는 것은 19세의 노예 소녀로 그녀보다 한 살 위였다. 지금 멀리 떨어진 땅에 있는 아이들에게 가려고 어두운 숲속을 걷고 있다. 그녀는 지쳐 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외톨이이고 게다가 체내에서 보호해 주어야만 하는 갓난아기가 또 한 명 있다.

 

어쩌면 등 뒤에서는 개가 바싹 쫓아오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 총을 가진 사람도 따라올 것이다. 그녀는 검은 피부 때문에 밤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낮이 되면 모든 소리가 총성이나 추적자의 소리로 들려버린다.

덴버는 지금 그것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덴버가 소상하게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비러브드는 점점 더 기뻐했다. 덴버는 어머니와 할머니가 말해주었던 이야기에 피를 통하게 했다. 그리고나서 고동도 치게 하여 듣는 사람의 질문을 기다렸다. 사랑하는 상대를 반주로 즐기고 있는 여인같이 덴버는 비러브드의 흥미를 충족시켜 주고 있었다.

비러브드가 잘 때 옆에 있고 싶어 했기 때문에, 오렌지 빛의 두 개의 얼룩이 있는 칙칙한 누비이불은 두 사람이 있는 덴버의 방에 있었다. 이불은 풀내음을 발산하고 손과 같은 감촉을 주었다.

덴버는 말하고 비러브드는 열심히 들었다.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 실제로 존재했던 광경을 창조하기 위해서 두 사람은 최선을 다했다. 세스 한 사람이 그것을 기억하는 두뇌를 갖고, 그 후에 그것을 의미 있는 형태로 정돈하는 시간을 살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때에 일어났던 일은 세스만이 알고 있는 일이었다. 에미의 목소리의 울림, 밤에는 기온이 갑자기 하강하고 낮에는 덥고 갑자기 안개가 자욱해지는 기후 변화...

세스는 이 백인 소녀에게 얼마나 무모하게 행동했나. 그 무모함은 결사적인 가운데에서 생겼고, 에미의 눈매와 그녀의 부드러운 마음씨가 나타난 입가에서 용기를 부여받은 탓이었다.

"이런 산속을 걸어 다닐 용무가 당신에게는 없을 텐데요, 아가씨."

"이봐, 지금 누구보고 말하고 있는 거야? 정신 차리라구. 너보다 볼 일은 많이 있어. 놈들은 너를 붙잡아 네 목을 댕강 잘라버릴 거야. 아무도 나를 쫓아오고 있지는 않지만 누군가가 너를 뒤쫓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구."

에미는 자기 손가락으로 노예 여자의 발바닥을 꽉 눌렀다.

"그건 누구 애지?"

세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는군요. 하느님 맙소사!"

에미는 한숨을 쉬고 머리를 저었다.

"아파?"

"약간."

"그것 괜찮군. 아프면 아플수록 더욱 좋으니까. 통증 없이는 아무것도 낫지 않지. 알고 있어? 그런데 왜 꼼지락거리는 거지?"

세스는 양 팔꿈치를 대고 몸을 들어 올렸다. 장시간 누워 있었기 때문에 견갑골 사이에서 딱딱함을 느꼈다. 양발을 달구는 듯한 불로 인한 열로 땀을 흘렸다.

"등이 아파서."

"등이? 자아, 이쪽을 향해서 좀 보여보라구."

구토가 날 만큼 대단한 노력 끝에 세스는 방향을 바꿔 오른쪽 옆구리를 밑으로 가게 했다. 에미는 드레스 뒤를 열어 보고는

"도와주세요, 예수님!"

하고 외쳤다. 그렇게 예수의 이름을 부른 뒤에 에미는 잠시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에 상당히 지독한 상처인 것이 분명하다고 세스는 추측했다. 등에서 숨결이 들려오고 있었는데도 백인 소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스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엎드려 눕지도 똑바로 눕지도 못하고 그대로 모로 누워만 있었다. 그러자니 비명이 나왔다. 에미가 몽유병자 같은 목소리로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건 나무야, 루우, 벚나무. 이것은 줄기고 이 부분에서 있는 것은 가지야. 가지가 아주 많이 있어. 잎사귀도 있네...똑같애. 그리고 꽃도 피어 있어. 작고 귀여운 벚꽃이야. 네 등에는 나무 한 그루가 통째로 자라고 꽃이 한창이야. 신의 뜻이려니 하고 생각해버려. 나도 채찍으로 맞은 적이 있지만 이처럼 맞았던 기억은 없어. 바티씨의 채찍도 꽤 지독했어. 놈은 정면으로 노려보지 말라며 마구 때렸어. 거짓말이 아니야. 한 번 그놈을 정면으로 노려봐 주었더니, 부지깽이를 번쩍 올려 나를 향해 던져버렸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안 것 같아."

세스가 신음을 하자 에미는 깊은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이렇게 하는 편이 낫지? 하느님, 정말 곧 죽을 것 같군요. 알고 있겠지만 너는 여기서 죽을 거야. 도망치지 못할거야. 내가 마침 발견해서 숲속에서 죽지 않게 되었으니까. 나를 만든 하느님에게 감사드려. 안그랬으면 뱀에게 물렸든지 곰에게 먹혀버렸을지 몰라. 루우가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는 너의 등 뒤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말이야. 하하하. 누가 그 나무를 심었는지 모르지만 그 녀석의 무시무시함은 굉장해. 내가 네가 아니라 다행이군. 이 꽃은 떠뜨려 버리는 편이 좋을지도 몰라. 이 고름을 짜내버리자. 어떻게 생각해? 하느님은 무엇을 계획하고 계실까 하고 생각해버려. 너는 꽤 나쁜 짓을 저지른 것이 분명해. 지금은 어디로도 도망치는 것이 아니야."

조금 떨어진 덤불 속에서 거미집을 찾으면서 에미가 콧노래를 부르는 것이 세스에게 들려왔다. 에미가 오두막을 나간 순간 갓난애가 뻗대기 시작했기 때문에, 콧노래를 듣는 것에 신경을 집중시켰다. 좋은 질문이야, 세스는 생각하고 있었다. 하느님은 무슨 일을 계획하고 있는 것일까?

에미가 드레스 뒤를 연 채로 놔두었기 때문에 바람이 등을 때려 통증을 약간 완화시켰다. 통증이 누그러져서 '후유'하고 한숨을 쉬자 그때까지 느끼지 못했던 혀의 미약한 통증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에미는 두 손바닥에 가득 거미집을 얹어서 돌아왔다. 거미집에 걸린 벌레를 깨끗이 떼어내어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하는 것 같다고 말하면서 실을 등에 얼기설기 쳐갔다.

"우리가 있던 곳으로 찾아 왔던 검둥이 여자애가 있었어. 그녀는 아무것도 몰랐어. 바티 부인의 바느질을 했지. 하지만 말을 두 개 붙이는 것도 거의 못해. 너와 똑같이 아무것도 몰라. 너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 결국 죽어버릴 거야. 그럴 수밖에 없어. 나는 달라. 나는 보스톤에 가서 벨벳을 살 거야. 카민색의 벨벳을. , 벨벳이 뭔지 모르지? 이렇게 모르는 채 죽어가는 거야. 분명히 햇님을 얼굴에 쬐며 잠자는 일도 두 번 다시 없을 거야. 나는 두 번 정도 있을 테지만 말이야. 얼굴에 태양빛을 쬐며 잠자는 것은 최고로 편안하고 기분 좋은 일이지. 두 번 그렇게 잤었어. 한 번은 개구장이 때였는데 그때는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어. 두 번째는 말야, 짐수레 뒤에서 또 잠들어 버렸는데 그사이에 닭장에서 닭이 모두 도망쳐버렸어. 바티 씨에게 볼기를 채찍으로 맞았어. 켄터키는 살 곳이 못 돼. 보스톤에서 살아야지. 우리 어머니가 바티 씨의 손으로 넘어가기 전에 있었던 곳이야. 조 네이슨은 바티 씨가 우리 아빠라고 말했지만 나는 안 믿어. 어떻게 생각하지?"

세스는 그녀에게 바티 씨가 그녀의 아버지라니 믿을 수 없다고 말해주었다.

"너는 너의 아빠가 누구인지 알고 있니?"

"아니."

세스가 대답했다.

"나도 몰라. 알고 있는 것은 그 녀석은 아니라는 것뿐이야."

그렇게 말하고 치료를 끝낸 그녀는 일어나서 오두막을 휘젓고 돌아다녔다. 그리고 그녀는 노래를 시작했다.

 

분주한 낮이, 완전히 저물어

나의 지친 사랑스런 자식은

살짝 부드럽게 흔들흔들 움직인다.

밤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고

계곡에서는 귀뚜라미

귀뚤귀뚤 귀뚜르르...

영혼이 모이는 초록의 근원에서

여왕님의 주위를

요정들이 빙글빙글 춤을 춘다.

안개로 희뿌연한 하늘에서 찾아오는,

자귀나무 눈의 귀부인

 

갑자기 에미가 몸을 흔들며 누비듯이 걸어 다니던 걸음을 멈추고 주저앉았다. 뼈와 가죽만 앙상한 양팔로 감싸듯이 무릎에 둘렀다. 그녀의 그 예쁜 손에는 양 팔꿈치가 쑥 들어가 있었다.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던 눈은 정지하여 한 곳에 응시했다.

"지금 것은 우리 어머니의 노래야. 어머니에게 배운 거야."

 

밭을 벗어나 안개를 빠져나가

황혼이 지나 돌아오는 것은

조용하고 따뜻한 우리의 난로 곁

부드럽고 낮은 노랫소리에

흔들리는 요람, 흔들흔들

시계가 왠지 나른하고 쉰 소리로

오늘도 지나갔다고 알리고 있네

흔들리는 달빛 밑에서

장난감도 자고 있네

나의 지친 갓난아기도 자고 있네

찾아오는 자귀나무 눈의 귀부인

그분은 다정하게 손을 내민다네

나의 사랑스런 갓난아기에게

하얀 그 손은 베일같이

곱슬머리에 퍼져

실크 방울 하나씩

귀엽다, 귀엽다 하고

어루만지고 있는 듯이

그 손은 눈꺼풀을 덮는다.

시원스레 뜬 갈색 눈을

쓰다듬어 내린다.

온화하게 달래고 상냥하게

찾아오는 자귀나무 눈의 귀부인

 

노래가 끝나자 에미는 조용히 앉아 있었다. 마지막 한 절을 다시 한번 반복한 후, 일어나 오두막을 나가자 조금 떨어진 곳까지 걸어가 물푸레나무에 기댔다. 그녀가 다시 돌아왔을 때 태양은 눈 아래의 분지로 내려갔다. 두 사람은 태양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 있었고 켄터키 하늘의 파란 빛 속에 있었다.

"아직 안 죽었어, 루우?"

"아니, 아직요."

"걸어야 해. 오늘 밤만 살아 넘기면 앞으로도 계속 오랫동안 살 수 있어."

에미는 더욱 편하게 해주기 위해서 낙엽을 다시 깔고 무릎을 꿇고는 퉁퉁 부어오른 세스의 발을 다시 주물렀다.

"또 한 번, 본격적으로 잘 비벼볼게. 입을 열지 마. 입을 다문 채로 있어야 해."

혀를 깨물지 않도록 주의하며 세스는 입술을 단단히 깨물고 그 예쁜 손이 열심히 주물러주는 대로 몸을 맡기고 있었다. 그것이 끝나자 에미는 오두막의 끝으로 가서 주저앉아 머리를 땋았다.

"밤사이에 내가 있는 데서 죽으면 곤란하니까 말야. 듣고 있어? 너의 보기 흉한 검은 얼굴에 원망스러움이 비치는 건 보고 싶지 않아. 정말 죽을 때는 어딘가 내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냉큼 떠나줘, 듣고 있어?"

"듣고 있어요."

세스가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그렇게 할게요."

살아서 이 세상에서 눈을 뜰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세스는 일어났다. 에미가 고름이 흐르는 등을 점검하고 있는 동안에 몸이 경직되어 떨고 있었다.

"심하군."

에미는 말했다.

"하지만 너는 벗어났어. 이곳에 와 주세요, 예수님. 루우는 벗어났습니다. 이것도 내 덕택이야. 나는 병이 난 생물을 잘 치료해. 걸을 수 있을 것 같애?"

"어떻게든지 소변을 보지 않으면..."

"그 발로 걸을 수 있는지 시험해 보자구."

똑바로는 걸을 수 없었지만 그런대로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세스는 처음에는 에미를, 다음에 어린나무를 의지하여 발을 질질 끌고 나아갔다.

"내가 해냈어. 나는 병이 난 생물을 훌륭하게 치료한다구, 그렇지?"

"정말 그래요."

세스가 말했다.

"당신에게는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어요."

"우리는 이 산에서 내려가야만 해. 자아, 이리 와. 내가 너를 강까지 데리고 가줄게. 거기라면 너에게 상황이 좋을 거야. 나는 말이야, 도로로 나갈 생각이야. 거기에서 일직선으로 가서 보스톤으로 갈 거야. 너의 드레스에 눌러붙어 있는 것은 뭐지?"

"젖이에요."

"완전히 만신창이로군."

세스는 자기 배를 내려다보며 손을 대어 보았다. 태동이 없었다. 그녀는 밤사이에 죽지 않았지만 갓난아기는 죽어 버렸던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이렇게 서 있을 여유따위는 없었다. 수영으로 강을 건너서라도 이 젖을 살아 있는 갓난아기에게 물려 주어야만 한다.

"배가 줄었어?"

에미가 물었다.

"꾸물거리고 있을 수가 없어요."

"자아, 진정해. 서두르다가는 일을 그르치게 되니까. 구두가 필요하겠지? 좋은 것이 생각났어!"

에미가 말한 그대로였다. 그녀는 세스의 숄에서 천을 두 줄 뜯어 내어 그 천에 낙엽을 깔았다. 그리고 나서 그것을 세스의 발에 둘러 묶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쉴새없이 계속 지껄였다.

"이봐, 몇 살이지 루우? 나는 피를 보게 된 지 4년이 되었지만, 누구의 아이도 임신하지 않았어. 젖이 흘러나오는 그런 처지는 죽어도 되지 않겠어. 기어코..."

", 알고 있어요."

세스가 말했다.

"당신은 보스톤에 갈 거니까요."

정오에 두 사람은 그것을 보았다. 곧 그것이 들리는 곳까지 찾아왔다. 해가 기울 무렵, 마시고 싶으면 그것을 퍼서 목을 축일 수 있었다. 세스를 밀항시켜 줄 배도 없었지만 도망한 노예를 기꺼이 태워 줄 사공도 없었다. 한 척 훔칠 수 있는 작은 배를 발견했을 때 하늘에는 네 개의 별이 보였다. 작은 배에는 한 개의 노, 무수한 구멍, 새집이 두 개 붙어 있었다.

", 저기야 루우. 예수님이 너를 지켜보고 있어."

세스는 1마일 폭의 새까만 물을 주시하고 있었다. 수백 마일 앞의 미시시피강을 향해 나아가는 흐름에 거슬러서, 작은 배를 타고 노 하나로 저어 올라가야만 하는 검은 물이었다. 강물을 보자 자기 집에 도착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갓난아기가 죽어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강에 다가간 순간, 체내의 물이 흘러나와 강물과 합류했다. 거듭해서 덮쳐오는 진통은 세스의 등을 활같이 휘게 했다.

"왜 그렇게 하고 있지?"

에미가 말했다.

"병신은 아니잖아? 그런 흉내는 그만둬. 그만두라고 했어, 루우, 이런 바보 천치 같으니라구. 루우! 루우!"

세스는 배안 이외에 갈 수 있는 장소는 생각할 수 없었다. 진통이 끝나고 평온이 오기를 기다렸다. 다시 무릎을 대고 기어서 배 안에 몸을 넣었다. 배는 그녀의 무게로 흔들리고, 다시금 몸을 찢는 듯한 진통으로 숨이 막힌 순간에 낙엽 주머니로 감싼 작은 배의 벤치에 얹고 간신히 버틸 수 있었다. 에미의 재촉 때문에 여름의 별하늘 아래에서 헐떡이면서 좌우의 배 가장자리에 발을 걸었다. 그 찢어지는 듯한 진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태아는 걸려 있었다. 얼굴을 위로 하고 어머니의 피 속에 빠져 있었다. 에미는 예수에게 탄원하는 것은 그만두고 예수의 아버지를 욕하기 시작했다.

"밀어내!"

에미가 격한 소리로 외쳤다.

"끌어당겨."

세스가 속삭였다.

그러자 그 강한 손이 네 번째 활약을 시작했다. 잡아당겨 도와주는 것은 결코 이른 것이 아니었다. 구멍을 발견하고는 도처에서 스며든 강물이 세스의 허리까지 차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미가 갓난아기의 머리를 세게 잡아당기며 악전고투하고 있는 동안 세스는 한 팔을 뒤로 뻗어 밧줄을 꽉 잡고 있었다. 갑자기 세스의 몸이 휘고 탯줄이 힘차게 튀어나왔다. 순간 갓난아기가 '응애 응애' 하고 소리를 냈다. 갓난아기의 배에서 20인치의 탯줄이 축 늘어졌다. 에미는 자기 스커트로 갓난아기를 감싸고 강둑으로 기어 올라갔다.

강둑에서 여름 저녁의 냉기에 감싸여 은청색의 빛줄기 아래에서 두 여자는 필사적인 노력을 했다. 서로 다시 이 세상에서 얼굴을 마주치는 일은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강둑에서 여름 밤, 푸른 양치식물에 둘러싸여 두 사람은 함께 뭔가를 훌륭하게 해낸 것이다. 도망한 노예를 감시하는 순시자가 마침 지나갔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 버려진 두 인간, 법에 보호받지 못하고 도망친 두 사람이 입고 있던 누더기옷을 벗어 10분 전에 태어난 갓난아기를 싸고 있는 장면을 보고 킥킥 웃었을 것이다. 하지만 순시인도 지나가지 않았고 목사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둑 밑에서 강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듯한 물소리를 내고 있었다. 작업 중인 두 사람을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훌륭하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날이 밝자 에미는 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위험한 강가에서 한낮에 붙잡히는 것은 절대로 싫다고 했다. 강에서 손과 얼굴을 씻고 멀거니 서서, 누더기에 싸여 세스의 가슴에 동여매인 갓난아기를 내려다 보았다.

"이 애는 나를 알지 못할 거야. , 이 애에게 가르쳐 주겠어? 누가 이 애를 이 세상에 나오게 했는지를 말이야?"

에미는 턱을 들고 태양이 뜰 주변을 멀리 바라보았다.

"이 애에게 가르쳐 줘. 그렇게 해주겠지? 그건 미스 에미 덴버였다고 말이야, 보스톤의."

세스는 그렇게 하리라고 생각하면서 자기가 잠으로 빠져가는 것을 느꼈다. 잠의 늪으로 깊이 들어가기 직전에 생각했다.

'예쁜 이름이야. 덴버, 정말 예뻐.'

 

모든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시기가 찾아왔다. 포올 디가 찾아와 주차장 계단에 앉을 때까지 세스는 거실에서 속삭이는 소리로 말하며 겨우겨우 살아오고 있었다. 더욱이 자기를 응징하는 유령에게도 시달려야 했다. 꿈속에서는 몸의 일부분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하워드와 버글러의 갓난아기 때의 얼굴을 새로이 떠올려 두 사람의 모습과 형체를 완전히 이 세상에 붙잡아 둔 것이다. 남편의 존재도 그러했다. 그림자같이 몰래 이 세상의 어딘가에 붙잡아 두었다. 지금은 버터 프레스와 착유기 사이에 떠오른 할리의 얼굴이 점점 더 크게 눈앞에 다가와 그녀의 머리는 욱신거렸다.

자기의 목덜미를 주물러 풀어주던 시어머니인 베이비 색스의 손가락이 그리웠다.

"무기를 놓는 거야, 세스. 칼과 방패를 놓아. 내려놓아. 싸우는 것은 이제 생각하지 말아. 모든 불행을 내려놓고 끝내는 거야. 칼과 방패를."

시어머니는 주무르면서 항상 이렇게 말해주었다. 그러면 맥을 누르는 손가락의 감촉과 조용히 타이르는 듯한 소리에 그녀는 무기를 놓는 것이었다. 비참, 후회, 유한 등에 사용했던 자위의 무거운 칼날을 놓을 수 있었다.

베이비 색스의 손가락과 목소리를 접촉하지 않고 지낸 9년은 너무도 괴로운 세월이었다. 게다가 거실에서 중얼거리는 것만으로는 평안을 얻을 수 없었다. 신이 창조한 가운데에서도 가장 마음이 다정한 남자가 필요했었다. 아치를 세우든가 조의를 꿰매야만 한다. 뭔가 진혼제를 행하는 것이 절실했다. 세스는 베이비 색스가 태양을 받으며 춤추었던 숲속의 '개척지'로 가기로 결심했다.

124번지의 주인이 유령의 장난감이 되어 마음을 폐쇄하고 숨어서 틀어박히기 전, 이 집은 베이비 색스가 사랑을, 경고를, 음식물을 주고 꾸짖거나 위로해주는 소리로 그득했던 집이었다. 하나가 아닌 두 개의 냄비가 부글부글 끓고 있던 집, 램프가 밤새도록 켜져 있던 집이었다. 여행자는 이 집에서 피로를 풀 수 있었다. 모든 소식은 이 집에 남겨졌다. 소식을 받을 필요가 있는 사람은 가까운 시일 내에 반드시 이 집에 들리기 때문이었다. 이야기는 작은 소리로 요점만 전달되었다. 베이비 색스가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알고 있는 양에 따라 틀리다. 좋은 것은 너무 많이 알기 전에 그만두는 것을 아는 것이다."

베이비 색스는 이렇게 말했다.

신생아를 가슴에 동여매고 세스가 짐수레에서 내려, 맨 처음 시어머니인 베이비 색스의 양팔에 안긴 것은 그 무렵 124번지의 앞이었다. 시어머니는 이미 신시내티에 와 있었던 것이다. 노예의 생활은 그녀의 다리를, 등을, 머리를, 손을, 간장을, 자궁을, 그리고 혀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시어머니는 생계를 잇는 수단으로는 마음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속히 그 마음을 쓰기 시작했다.

자기의 이름 앞에 어떤 경칭을 붙여 불리우는 것도 승락하지 않았다. 베이비 색스는 교회를 갖지 않은 설교사가 되었다. 여러 곳의 설교단에 서서 그녀의 커다란 마음을 여는 설교를 했다. 겨울과 가을에는 아프리카 매더디스트교회, 침례파, 성스런 사람들의 모임, 선별된 사람들의 모임에 방문했다. 초대받지도 않았고 성직자로서 임명도 받지 않았지만, 그녀는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커다란 마음의 고동을 메아리치게 했다.

따뜻한 계절이 돌아오자, 베이비 색스는 걸을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흑인 남녀 아이를 거느리고 그녀의 커다란 마음을 '개간지'로 갖고 갔다. 숲속에 널찍하게 개간된 장소는 무슨 목적으로 개간되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매주 토요일 오후에는 사람들이 숲속의 개간지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옆면이 평평해진 거대한 바위 위에 몸을 안정시키고, 베이비 색스는 머리를 떨구고 무언의 상태로 기도했다. 그녀를 따라왔던 사람들은 숲속에서 그녀를 지켜보았다. 그녀가 지팡이를 놓으면 준비가 다 되었다는 표시라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아이들은 나와라!"

그 말에 따라 아이들은 숲속에서 그녀를 향해 뛰어나왔다.

"어머니에게 웃음소리를 들려주렴."

그녀가 아이들에게 명령하는 소리가 숲으로 울려퍼졌다. 어른들은 쳐다보며 미소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남자들은 나와라."

그녀가 소리쳤다. 남자들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숲속에서 한 사람씩 걸어 나왔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네가 춤추는 것을 보여줘."

그녀가 명령하자, 남자들의 발밑에서 땅에 사는 생물이 흔들렸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여자들을 자기 옆으로 불러 모았다.

"울어라."

그녀는 명령했다.

"산자를 위해 그리고 죽은 자를 위해서 통곡하라."

그러자 눈도 가리지 않고 여자들은 거리낌 없이 통곡하기 시작했다.

그런 식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웃는 아이들, 춤추는 남자들, 우는 여자들, 그리고 모든 것이 융화되었다. 여자들은 우는 것을 멈추고 춤을 추었다. 남자들은 주저앉아 울었다. 아이들은 춤추고 여자들은 웃고 아이들은 울었다. 마침내는 녹초가 되어 전원이 땀으로 젖어 숨을 헐떡이며 제각기 '개간지'에서 뒹굴었다. 이윽고 생겨난 정적 속에서 베이비 색스는 이 사람들에게 그녀의 위대하고 커다란 마음을 바쳤다.

베이비 색스는 이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생활을 정결하게 하라든가, 두 번 다시 죄를 짓지 말라는 등의 말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이 이 세상에서 축복받은 온화한 사람이라든가, 신의 영광을 볼 만한 마음이 청결한 자라든가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또한 베이비 색스는 이 사람들에게 그들이 손에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은총은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은총인 것이라고 설교했다.

"이곳에서는."

그녀는 말했다.

"여기, 이 장소에서는 우리는 살아 있는 몸, 울고 웃을 수 있는 몸, 맨발로 풀을 밟고 춤추는 살아 있는 몸, 그것을 사랑하라. 실컷 사랑하라. 저곳 그 사람들은 여러분의 모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 사람들은 여러분의 몸을 경멸하고 있다. 그 사람들은 여러분의 눈을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하기는커녕 빼내 버리고 싶어 한다.

여러분의 그 피부도 사랑하고 있지 않다. 저곳 그 사람들은 그 피부에 채찍을 대는 것이다. 게다가, ! 나의 동포여! 그 사람들은 여러분의 손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 손을 그 사람들은 혹사시키고 결박하여 묶고 도끼로 잘라내기도 한다. 여러분의 손을 사랑하라! 사랑하라! 손을 들어 거기에 입 맞추라. 그 손으로 다른 사람을 만져라. 그 손을 마주쳐 보라. 그 손으로 당신의 얼굴을 어루만져라. 그 사람들은 그 얼굴도 사랑하지 않으니까. 당신이야말로 그 얼굴을 사랑해야만 한다. 그 사람들은 여러분의 입이 찢어져 있는 것을 보고도 다시 그것을 찢는다. 그 입으로 여러분이 말하는 것에 그 사람들은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는다.

그 입에서 나오는 여러분의 비명을 그 사람들은 듣지 않는다. 여러분의 몸을 보양하기 위해서 입에 넣는 것을 그 사람들은 빼앗고 대신에 여러분에게 빵 종류를 준다. 그렇다, 그 사람들은 여러분의 입을 사랑하지 않는다. 여러분이 그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이 여기서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살아 있는 몸의 의미인 것이다. ! 나의 동포여! 숲의 밖에서는 줄이 감겨져 있지 않은 여러분의 목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여러분의 목을 사랑하라. 그리고 그 사람들이 돼지 먹이로 내던져주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는 여러분의 심장, 여러분의 그것을 사랑해야 한다. 심장의 고동을, 고동하고 있는 심장, 그것도 사랑해야 한다. 눈과 발보다도 사랑해야 한다. 앞으로 자유의 공기를 들이마실 폐보다도 더욱, 생명을 품는 자궁보다도, 생명을 주는 성기보다도 사랑하라. 들어라. 동포여! 심장을 더더욱 사랑하라. 왜냐하면 그것은 가장 귀한 보물이니까."

이렇게 설교를 끝내고 그녀는 일어났다. 모두가 입을 열어 그녀를 위해 노래했다. 길게 꼬리를 끄는 선율이 흐르고 마침내 4부 합창은 깊이 사랑받은 사람들의 살아 있는 몸에 어울리는 완벽함에 도달했다.

세스는 지금 그 장소에 가고 싶었다. 잠시나마 먼 옛날의 노래소리가 남기고 갔던 공간에 귀를 기울이고 싶었다. 가능한 일이라면 지금 나의 칼과 방패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죽은 시어머니로부터 조언을 받고 싶었다. 베이비 색스가 행동으로 자기의 말을 배반한 지 9년이나 지난 지금, 놀랍게도 세스는 그녀의 도움을 바라고 있었다. 자기의 위대한 마음을 포기하고 희망을 모두 버렸다. 가끔 색채를 탐내며 기분이 흥분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병들어 침대에 눕게 된 시어머니에게.

"내가 손에 넣었던 것, 내가 꿈에 보았던 것을 모두 빼앗아버렸던 것은 그 하얀 색을 한 족속이야."

하고 시어머니는 말했었다.

"게다가 내 마음의 실까지 끊어버렸어. 이 세상에는 불행 따위는 없어. 단지 백인이 있을 뿐이지."

124번지는 문을 닫고 집에 씌운 유령의 한을 견디었다. 이제 밤새도록 켜놓는 램프도 없지만, 이웃 사람들의 모습도 사라졌다. 저녁 식사 후 소리를 낮춘 담화도 들을 수 없었다. 손님의 신발을 신고 노는 아이들도, 그것을 지켜보는 어른들도 없었다. 베이비 색스는 자기는 여지껏 거짓을 전해왔다고 생각했다. 은총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햇빛을 쬐며 '개간지'에서 춤추어도 현실을 바꿀 수는 없는 것이라고. 며느리가 도착한 지 28일 후에 그녀의 신앙, 그녀의 상상력, 그녀의 위대하고 넓은 마음은 붕괴되기 시작했다.

그래도 세스가 밖으로 나가 할리의 영을 애도하자고 결정한 곳은 '개간지'였다. 빛이 바뀌어 버리기 전에 초록이 우거진 축복받은 시기에 가자고 결정했던 것이다. 기억 속에서 그 장소는 식물의 풋풋한 열기와 나무 열매의 썩기 시작한 냄새가 안개같이 자욱하게 끼고 있었다.

숄을 걸치고 덴버와 비러브드에게 그렇게 하도록 시켰다. 세 사람은 모두 어느 일요일에 점심때가 되어 나갔다. 세스가 앞장서고 딸들은 종종걸음으로 뒤따르고 있었다. 주위에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었다.

숲에 도착하자 세스는 안으로 들어가는 샛길을 금방 찾았다. 이제는 교회 사람들이 개최하는 신앙 부활 집회가 정기적으로 그곳에서 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음식이 쌓인 테이블과 밴조까지 있는 천막을 친 대규모 집회였다. 옛날의 샛길은 밟아서 다져졌기 때문에 폭넓게 되어 있었다. 밑의 풀숲에 똑똑 침엽수 열매를 떨어뜨리고 있는 나무들이 옛날 그대로의 아치를 만들고 있었다. 세스는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베이비 색스의 붕괴를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자기를 책망했다. 몇 번 베이비 색스가 부정해도 세스는 124번지의 한은 자기가 집 수레에서 내린 순간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두 딸을 데리고 떡갈나무와 서양 침엽수가 빛나는 초록의 긴 길을 걸었다. 세스는 오하이오 강둑에서 온몸에 진흙을 붙인 모습으로 잠을 깨었을 때 흘리고 있었던 것과 흡사한 땀을 흘렸다.

에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세스는 혼자였고 비록 쇠약해 있었지만 어쨌든 목숨은 붙어 있었다. 또한 갓난아기도 살아 있었다. 강 아래쪽으로 걸어가 반짝반짝 빛나는 수면을 응시하고 서 있었다. 얼마 안 있어 대형 보트가 미끌어지듯이 들어왔는데 그곳에 보이는 사람의 모습이 백인인지 아닌지는 구별할 수가 없었다. 열 때문에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 열로 갓난아기를 차게 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하느님께 감사드렸다. 대형의 보트가 떠나자 비틀비틀 계속 걸었다. 걷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낚시줄을 드리우고 있는 세 명의 흑인이 있었다. 두 명은 소년이고 한 명은 나이가 위인 남자였다. 멈춰 서서 그들이 말을 걸기를 기다렸다. 소년 가운데 한 명이 손가락을 가리키자 남자는 어깨너머로 뒤를 돌아 그녀를 보았다. 재빨리 흘낏 보았다. 상대에게 필요한 것을 일순간에 보고 알았던 것이다.

잠시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윽고 남자가 말했다.

"건너가려고?"

"."

세스가 대답했다.

"당신이 가는 것을 누군가 알고 있어?"

"."

그는 다시 그녀에게 눈길을 주고 지면에 불쑥 튀어나온 바위를 향해 끄덕였다. 세스는 그 바위까지 걸어가 앉았다. 바위는 태양의 열을 흡수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녀의 몸이 훨씬 더 뜨거웠다. 움직이지 못할 만큼 지쳐 있었기 때문에 몸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앉은 채로 잠이 들었던 것이다. 눈을 뜨자 조금 전의 남자가 김이 나는 뱀장어 튀김을 양손에 들고 있었다. 팔을 뻗는 것조차 귀찮았기 때문에 입에 넣는 동작 따위는 도저히 무리였다. 그녀는 남자에게 물을 청하자 남자는 물병에 강물을 퍼서 주었다. 세스는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마셔버리고는 더 달라고 부탁했다.

머리가 경종을 울리듯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멀리 여기까지 와서 고생만 하고 강의 한쪽에서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땀이 흐르는 그녀의 얼굴을 주의 깊게 주시하고 나서 소년 한 명을 가까이 불렀다.

"그 윗도리를 벗어라."

그는 소년에게 명령했다.

"?"

"들었을 텐데."

소년은 윗도리를 훌렁 벗고는,

"어떻게 하죠? 나는 뭘 입어요?"

하고 울상을 지었다.

사나이는 세스의 가슴에서 갓난아기를 풀어 소년이 벗은 상의로 감싸고 양소매를 앞으로 묶었다.

"나는 무얼 입으면 되죠?"

사나이는 한숨을 쉬고 잠시 말없이 있다가는 이렇게 말했다.

"되돌려 받고 싶으면 직접 아기한테 입힌 것을 벗겨봐. 갓난아기를 맨몸으로 풀 속에 눕히고 너는 윗도리를 입는 거야. 만일 네가 그렇게 하고 싶다면 그대로 어딘가로 꺼져버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말아라."

소년은 눈을 내리깔고 상대 옆으로 되돌아갔다. 한 손에 뱀장어를 들고 발밑에 갓난아기를 놓은 채, 세스는 바싹 마른 입을 하고 땀을 흘리면서 꾸벅꾸벅 졸았다. 저녁이 찾아왔다. 사나이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녀의 예상을 뒤엎고 그들은 상류를 향해 배를 저었다. 에미가 발견한 보트보다도 훨씬 상류로 갔던 것이다. 그 남자는 대형의 보트를 홱 돌려 탄환 같은 기세로 오하이오 강을 건넜다. 강둑에 도착하자 그는 세스가 급경사의 둑을 올라가는 것을 도와주었다. 윗도리를 벗은 소년은 갓난아기를 안아 옮겼다. 남자는 세스를 풀숲의 외양간으로 안내했는데, 그 바닥은 평평하고 단단했다.

"여기서 기다려. 금방 누군가가 와줄 거야. 꼼짝하지 말아. 놈들에게 발각되면 큰일이니까."

"고맙습니다."

세스가 말했다.

"똑똑히 기억할 수 있도록 이름을 가르쳐 주셨으면 합니다."

"이름은 스탭 페이드야. 갓난아기를 똑똑히 보고 있어. 괜찮을 거야."

"."

대답은 했지만 듣고 있지 않았다. 몇 시간후, 기척은 없었지만 느낄 수는 있었다. 바로 옆에 여자가 한 명 서 있었다. 키가 작은 젊은 여자였다. 거친 마 주머니를 손에 들고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조금 전에 신호는 보았지만."

그녀는 말했다.

"더 이상 빨리 올 수는 없었어."

"신호요?"

"강을 건넌 사람이 있으면 스탭은 사용하지 않게 된 돼지우리를 열어 두지. 어린아이가 있으면 말뚝에 하얀 헝겁을 묶고."

여자는 무릎을 꿇고 주머니를 비웠다.

"나는 에라라고 해."

그렇게 말하고는 울 담요와 면담요, 군고구마 두 개와 남자용 신발을 한 켤레 자루 속에서 꺼냈다.

"내 남편은 존이라고 하는데, 저쪽에 좀 떨어진 곳에서 기다리고 있어. 너는 어디로 가는 거지?"

세스는 여자에게 베이비 색스에 관한 것과 거기에 세 명의 아이를 먼저 보내두었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에라는 잠자코 들으면서 갓난아기의 배꼽 주위를 가늘게 찢은 천으로 감았다. 이름도 대지 않았고 입 밖에도 내지 않았지만, 이 여자가 남기고 온 가족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이 여자는 남자용 신발에서 모래를 흔들어 털고 세스의 발을 구두 안에 밀어 넣으려고 했다. 아무리 애써도 발은 들어가지 않았다. 아이들의 소식을 알고 있는지 캐물을 용기도 나지 않은 채, 세스는 소년의 윗도리를 입었다.

"모두들 무사히 도착해 있어."

에라가 가르쳐 주었다.

"스탭이 그 그룹의 몇 사람인가를 건네주었어. 블루스톤에 두고 왔어. 그다지 멀지 않아."

감사의 마음이 가슴에 넘쳐흘러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고구마 껍질을 벗겨 먹다가 토하고, 무언으로 기도하면서 다시 먹었다.

"모두들 너를 보면 기뻐할 거야."

에라는 말했다.

"이 애는 언제 태어났지?"

"어제요."

턱의 땀을 닦으면서 세스는 대답했다.

"이 애도 무사히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는데."

에라는 울 담요에서 보이는 더러워진 조그만 얼굴을 찬찬히 보고 나서 고개를 저었다.

"말하기 어렵지만."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말야, 묻는다면 말하지. '아무것도 사랑하지 말아'라고."

그리고 자기가 분명히 말한 말의 가시를 누그러뜨리듯이 세스를 향해 미소지었다.

"이 애기, 혼자 났어?"

"아뇨, 백인 아가씨가 도와주었어요."

"자아, 당장 출발하는 것이 좋겠군."

베이비 색스는 며느리의 입에 입을 맞추고 지금은 아이들을 만날 수 없다고 했다.

"아이들은 자고 있어."

그녀는 말했다. 게다가 한밤중에 아이들을 깨워 보이기에는 세스의 모습이 너무나도 끔찍했다. 시어머니는 신생아를 받아 보닛을 쓴 젊은 여자에게 건네 주었다. 건네 줄 때 어머니의 오줌으로 적실 때까지는 갓난아기의 눈을 씻으면 안 된다고 덧붙여 말했다.

"소리를 내어 울었니?"

베이비는 물었다.

"아주 조금요."

"시간은 충분해. 우선은 애 엄마가 기운을 차리도록 해 줘야지."

베이비는 세스를 거실로 데리고 가서 알콜 램프의 빛을 의지하여 얼굴부터 시작하여 세스의 몸을 조금씩 씻어 갔다. 그리고 나서 대야에서 새 물이 끓는 동안, 세스 앞에 앉아 회색 무명옷을 기웠다. 세스는 선잠이 들어 있었는데 손과 발이 씻기우는 기척에 잠이 깨었다. 한 군데가 씻기울 때마다 베이비는 세스를 누비이불로 덮었다. 그리고 새 물을 불에 올려놓았다. 시트를 찢어 회색의 무명을 기우면서도 시어머니는 갓난아기를 치료했다. 다리 치료를 끝내자 베이비는 세스의 발을 보고는 그것을 살짝 닦았다. 그리고 형태조차 모르게 되어 있는 발 치료에 들어갔다.

"이렇게 하면 느끼냐?"

"느껴요? 뭘요?"

"됐어, 살짝 서 봐."

그녀는 세스를 휠체어까지 껴안듯이 데리고 가서 그녀의 양다리를 염수가 들어있는 물통에 담그었다. 아침이 될 때까지 세스는 발을 염수에 담근 채 앉아 있었다. 유두에 붙은 딱지를 베이비는 기름으로 풀고 나서 씻어냈다. 새벽녘에는 울음소리를 내지 않는 갓난아기가 잠을 깨서 어머니의 젖을 먹였다.

"이 아이의 용태가 나빠지지 않도록 하느님께 기도해라."

베이비는 말했다.

"젖을 다 먹이면 나를 부르거라."

막 나가려던 베이비의 눈에 침대 시트에 붙은 뭔가 검은 것이 언뜻 들어왔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고 갓난아이를 들여다보고 있는 며느리의 등에 눈길을 보냈다. 세스의 어깨를 덮은 모포에 장미꽃이 핀 것처럼 피가 배어 있었다. 베이비는 한 손으로 자기 입을 가렸다.

수유가 끝나고 나자 아이는 잠들었다. 나이 많은 여자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만개한 등에 기름을 바르고 두 겹으로 접은 천을 새로 꿰매 만든 옷 안쪽에 핀으로 고정시켰다.

아직 현실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졸음이 가시지 않은 아들들과 기기 시작한 딸아이가 방으로 들어왔을 때는 현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침대에 누워 있던 세스는 아이들과 마침내 한 덩어리가 되어 달라붙었다. 어린 계집애는 투명한 침을 세스의 얼굴에 묻히고 세스의 환성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눈을 계속 깜박거렸다. 버글러와 하워드는 서로 네가 먼저 대어 보라고 미루면서 어머니의 보기 흉한 발을 장난감으로 삼았다.

세스는 아이들에게 키스했다. 목덜미에, 머리 꼭대기에, 손바닥 한가운데에 입 맞추었다.

"아빠는 안 와요?"

이 말에 세스는 우뚝 입맞춤을 멈추었다.

세스는 울지 않았다. 곧 돌아올 거라고 말해주고 싱끗 웃어 보였다. 전날 밤에 시어머니가 꿰매기 시작한 회색 드레스를 입기 위해서, 세스가 시어머니에게 아들들을 방에서 내보내도 된다고 알렸던 것은 시간이 꽤 지난 후였다. 겨우 기기 시작한 아이를 양팔에 안고 흔들었다.

베이비 색스가 들어와 두 사람을 보고 웃었다. 세스에게 이 작은 계집애가 강하고 영리하다고 이야기했다. 이야기가 끝나자 시어머니는 몸을 구부려 세스가 입고 있던 누더기를 긁어모았다.

"놔둘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구나."

베이비 색스는 말했다.

세스는 눈을 들었다.

"잠깐만요. 패티코트의 단 속에 꿰매어져 있는 것이 아직 있는지 살펴봐 주세요."

베이비 색스가 더럽고 구겨진 천을 손가락으로 조금씩 훑었다. 작은 돌 같은 감촉을 느꼈다. 그녀는 세스에게 내밀어 보였다.

"결혼 축하품이에요."

"받는 김에 신랑도 갖추었다면 훌륭했을 걸."

시어머니는 지그시 자기 손을 응시했다.

"그 애의 신상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니?"

"모르겠어요."

세스가 대답했다.

"그이는 자기가 만나자고 했던 장소에 나오지 않았어요. 그런데 전 출발해야만 했어요. 더 이상은 기다릴 수가 없었어요."

세스는 젖을 빨고 있는 딸의 졸린 듯한 눈동자를 보고 나서, 베이비 색스의 얼굴을 보았다.

"그이는 무사히 도망쳐 올 거예요. 내가 올 수 있었으니까 할리도 물론 올 수 있을 거예요."

"자아, 이것을 지녀라. 이 돌이 그 애가 오는 길을 비추어 줄 거다."

아들은 죽은 거라고 확신하고, 그녀는 두 개의 돌을 세스에게 건네주었다.

"귀에 구멍을 뚫어야겠어요."

"내가 뚫어 주지."

베이비 색스가 말했다.

"뚫어도 괜찮을 만큼 몸이 회복된 후에 말이다."

색스는 귀걸이를 반짝반짝 흔들며 기어다니고 있는 아기를 달랬다. 계집애는 몇 번이나 계속 손을 뻗어 귀걸이를 잡으려고 했다.

 

'개간지'에 도착하자 세스는 베이비가 옛날 설교할 때 올라갔던 바위를 발견했다. 그래서 가지에서 늘어진 알맹이를 떨어뜨릴 만큼 컸던 외침을 떠올렸다. 베이비 색스의 타오르는 마음에 격려받아 모인 흑인은 생명의 전부를 풀어 놓았던 것이다.

세스는 28일간 누구의 노예가 아닌 생활을 체험했다. 몸이 나날이 치유되어 편안하고 성실한 말을 할 수 있었다. 친구도 생겨 40, 아니 50명의 검둥이의 이름을 알았다.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습관을 갖고 있는지도 알았다. 그때까지 어디서 지냈는가, 어떤 일을 하고 있었는가를 알았다. 자기 자신의 기쁨과 즐거움을 이 사람들과 함께 느끼는 것을 체험했다. 그렇게 하자 살아가는 것이 즐거워졌다. 어떤 사람은 그녀에게 알파벳을 가르쳐 주었다.

이런 식으로 하여 그녀는 남편 할리를 기다리는 나날을 극복했다. 조금씩 124번지와 '개간지'에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그녀도 자신을 주장했다. 자기의 몸을 자유롭게 하는 것과 자유로워진 몸이 자기의 것이라는 자각은 대단한 것이었다.

지금 세스는 베이비 색스가 앉았던 바위에 앉고, 덴버와 비러브드는 숲속에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할리가 현관문을 노크하는 날은 절대로 오지 않을 것라고 세스는 생각했다.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은 괴로웠다. 손가락만이라도...

시어머니의 손가락을 목덜미에 느끼게 해 준다면 나는 무거운 짐을 내리고 이 막다른 길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세스가 머리를 늘어뜨리자 소원에 응하듯이 손가락이 닿았다. 옛날보다 가벼웠는데 깃털로 어루만지는 정도의 감촉밖에 없었지만 틀림없이 애무해 주는 손가락이었다. 그 손가락이 움직이기 쉽도록 세스는 약간 긴장을 풀었다. 있는지 없는지 느끼지 못할 가벼운 감촉이었고, 주무른다기보다 손가락이 입맞추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손가락의 동작이 고마웠다.

베이비 색스가 먼 피안의 세계에서 보내주는 사랑은 세스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어느 사랑에도 뒤지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세스의 마음에 원기를 부여했다. 게다가 장래를 기대하는 기분으로까지 이끌어 주었다.

포올 디가 자기의 인생에 뭔가를 첨가해 주고 있다는 것을 세스는 알고 있었다. 마음의 지주로 삼고 싶었다. 그런데도 지금 그는 지주로 삼는 것 이상의 것을 보태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을 찢는 새로운 몇 개의 광경이 되살아났다. 할리의 소식이 단절된 채 텅 비어 있던 뇌의 틈, 그때까지는 정확한 정보가 결여된 채였다. 이 뇌의 틈이 새로운 슬픔으로 채워지고 여기에 덧붙여 앞으로 몇 가지의 슬픔이 찾아올지 예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124번지에 활기가 넘쳐 있었던 무렵 세스에게는 사방에서 와주는 여자친구들과 남자친구들이 생기고 한탄을 함께 나누었다. 그런데 지금 그것이 모두 사라져 버린 것이다. 갓난아기의 유령이 집을 점령하고 있는 동안에는 모두들 찾아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도 부당한 취급을 받는 자의 특유의 완고함으로, 그들을 대했다.

하지만 지금은 한탄을 함께 나누어 주는 인간이 있었다. 게다가 그는 그녀의 집의 문지방을 넘은 그 날에 갓난아기의 유령을 내쫓았던 것이다. 그 이후로 유령은 자취도 보이지 않았다. 고마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 대신에 그는 다른 망령을 불러들였다. 버터와 굳은 우유를 칠한 할리의 얼굴, 재갈을 악물은 포올 디의 입, 포올 디가 마음만 먹는다면 그 밖에도 무슨 말을 할지 신이 아닌 다음에야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목덜미에 대고 있는 손가락은 아까보다 더 한층 힘이 가해지고 있었다. 양 엄지손가락을 목덜미에 놓고 나머지 손가락은 좌우의 목줄기를 눌렀다. 더욱 세게, 움직이면서 작은 원을 그리고, 손가락은 천천히 목을 돌아 숨통에 접근했다. 목을 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세스는 공포에 사로잡히기보다 정말로 놀랐다.

아무튼 베이비 색스의 손가락이 숨이 막힐 정도로 조르는 것이었다. 앉아 있던 바위에서 굴러떨어지면서 세스는 실제로는 거기에 없는 손에 할퀴었다. 덴버와 비러브드가 급히 뛰어왔을 때, 세스의 발은 공중을 차며 발버둥 치고 있었다.

"엄마! 엄마!"

덴버가 소리쳤다.

손가락은 떨어졌는데 세스는 몇 번이나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간신히 바로 옆에 있는 딸의 얼굴과 바로 위에 떠돌고 있는 비러브드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괜찮아요?"

"누군가가 목을 졸랐어."

세스는 말했다.

"누가요?"

세스는 목을 어루만지며 힘겹게 일어났다.

"베이비 할머니라고 생각해. 그냥 옛날에 했던 것 같이 목을 어루만져 달라고 부탁했을 뿐이야. 그런데 매우 기분 좋게 만져주다가 갑자기 이상해졌어."

"할머니였다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어요, 어머니. 베이비 할머니는 아니에요."

"옆에서 날 일으켜주렴."

"봐요."

비러브드가 세스의 목을 가리키고 있었다.

"? 뭐가 붙어 있니?"

세스가 물었다.

"멍이 들어 있어요."

덴버가 말했다.

"목에?"

"여기에."

비러브드는 손을 뻗어서 반점에 댔다. 반점은 세스의 목의 피부색보다 짙어지기 시작했다. 반점에 대고 있던 비러브드의 손가락은 놀랄 정도로 섬뜩했다.

"그런 것 해 봤자 소용없어요."

하고 덴버가 말했지만, 비러브드는 앞으로 몸을 쑥 내밀어 손으로 피부를 쓰다듬고 있었다.

세스는 신음하듯 소리를 내었다. 소녀의 손가락은 그토록 차갑고 익숙한 것이었다. 세스의 고난으로 살아온 생활의 긴장이 완화되고 약간 방비가 늦추어졌다. 그러자 서커스를 보러 갈 때 그림자 속에서 언뜻 본 행복의 환영이 실현 가능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포올 디가 가져다준 소식과 아직 그가 자기만의 가슴에 담고 있는 정보에 세스가 묵살당하기 전의 이야기이다.

세스의 소원은 어쨌든 계속 사는 것이었다. 유령이 사는 집에서 딸과 단 둘이서 모든 것을 어떻게든 처리해 왔다. 왜 이제 와서 유령 대신 포올 디가 있는데, 그녀는 꺾으려 하고 있는 것일까? 왜 두려워진 걸까? 124번지에 유령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일도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남편 할리의 신상에 일어난 일을 암시받은 것만으로 불안해진 것이다.

버러브드의 손가락에는 천국의 감촉이 숨겨 있었다. 그 손가락으로 어루만져 호흡이 보통 상태로 되자 고민은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세스가 찾으려고 여기까지 찾아왔던 평안이 몸속으로 스르르 스며들어 왔다.

세 여자는 개간지의 한가운데 베이비 할머니가 아꼈던 바위 밑에 있었다. 한 사람은 앉아 있고 그 앞에 두 사람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앉아 있는 여자는 여자의 부드러운 손에 목을 맡기고 있었다.

덴버는 두 여자의 얼굴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비러브드는 자기의 엄지손가락의 동작에 주의 깊게 응시하고 있었다. 아마 그 효과에 만족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몸을 구부려 세스의 턱 밑 부드러운 피부에 입술을 대었다.

덴버도 세스도 저항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둘 다 잠시 동안 그대로 있었다. 입맞춤을 하는 입술의 기분 좋음은 사랑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세스가 비러브드의 머리카락을 잡고 격하게 그녀로부터 몸을 떼었다.

"이런 짓을 하는 것은 갓난애뿐이야."

험악한 어조로 비러브드에게 말했다. 그것은 소녀의 숨이 신선한 젖냄새와 너무 똑같았기 때문이라고 세스는 나중에 생각했다.

세스는 덴버의 얼굴을 보고, 재빨리 일어났다.

"자아, 일어 서."

세스는 손을 흔들어 소녀들을 일으켜 세웠다.

개간지를 떠날 때도 찾아왔을 때와 똑같은 배열로 걸었다. 세스가 선두에 서고 소녀들이 조금 떨어져서 그 뒤를 따랐다.

세스의 마음은 동요되고 있었으나 그것은 입맞춤을 받은 탓만은 아니었다. 입맞춤을 받기 전에, 비러브드가 고통을 어루만지고 있는 손가락과 목을 꽉 죄어오기 전에 그녀를 진정시키고 위로해주었던 자의 손가락의 뭔가를 생각하게 했다. 그런데 지금 그것이 기억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한 가지 있었다. 처음에 생각했듯이 베이비 색스가 그녀를 질식시켰던 것은 아니었다. 덴버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듬성듬성한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 속을 걷고 있는 동안에 머리는 명쾌해져 갔다.

한순간 혼란되었던 것은 18년간이나 저세상에서 뻗어주는 손의 감촉이 있는 집에서 지내왔던 탓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목덜미를 눌렀던 두 개의 엄지손가락은 집에 넘치던 그 감촉과 흡사했다. 아마 유령이 도망갔던 곳은 그곳이었을 것이다. 포올 디에게 124번지에서 추방당한 후, 아마도 개간지에서 유령은 원기를 회복한 것 같다.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라고 세스는 생각했다.

자기가 왜 덴버와 비러브드를 데리고 갔었는지는 그것으로 분명해졌다. 보호받고 싶다는 막연한 바램이 작용하여 충동적으로 데리고 갔던 것 같다. 결국 소녀들이 세스를 구한 것이다. 비러브드의 감촉이 갓난아기의 유령과 너무 비슷하다고 하는 의혹은 사라져버렸다. 의혹은 어차피 아주 작은 동요를 일으켰을 뿐이었다.

세스에게는 포올 디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가 그녀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든 그녀는 그를 필요로 했다. 할리를 제사 지내는 것보다도 이 일을 분명히 구명하기 위해서 개간지까지 찾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것을 분명히 알았다. 그렇다, 부뚜막 앞에서 그가 따뜻하게 그녀를 감싸 안았을 때 알았어야 했다. 뭔가 기다리고 있는 듯한 그의 눈, 인간미 넘치는 박력, 그녀를 알아주는 그의 마음이 세스를 기다릴 수 있게 했다. 언젠가 말할 수 있는 시기가 올 것이다. 그는 입에 물린 재갈에 관한 것을, 그녀는 죽은 아이에 대한 것을 털어 놓게 될 것이다.

그녀는 집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날이 저물어 아까보다 서늘해진 녹색길을 앞질러 가면서 세스는 이 두 소녀가 자매같다고 생각했다. 세스는 덴버를 이해하고 있었다. 고독이 덴버를 비밀스럽게 만들었다. 자기의 감정을 밖으로 노출시키지 않고 스스로 모든 일을 결정했다. 몇 년 동안 유령과 함께 생활해온 탓일 것이다.

그런데 비러브드에 대해서 그녀는 전혀 몰랐다. 단지 이 소녀가 자신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지 기꺼이 해 준다는 것과 덴버와 함께 시간 보내기를 좋아한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 이유를 세스는 이제야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감정을 얘기하고 있다. 한 사람이 주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격이라면 또 한 사람은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포올 디를 위해서 만들고 싶은 저녁 식사가 있었다. 마음이 부드러운 남자와 힘찬 기분으로 새로운 생활을 하기 위한 저녁 식사인 것이다.

마음은 집에 도착하기 전부터 벌써 부엌에 가 있었다. 머릿속은 식탁에 준비할 음식물로 가득 찼기 때문에 목욕통 속에 앉아 있는 포올 디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세스는 그에게 미소를 보냈다.

"여름도 다 끝난 것 같군요."

그녀는 말했다.

"이쪽으로 와."

"안 돼요, 아이들이 곧 뒤따라 들어올 거예요."

"발소리가 안 들리는데?"

"저녁 준비해야 해요, 포올 디."

"나도야."

그는 일어나 그녀를 팔로 껴안고 못 가게 했다.

"뭘 만들 건데?"

"옥수수를 살짝 볶은 것은 어때요?"

"좋지."

비러브드가 입구에서 들어왔다. 당연히 발소리가 들렸을 텐데 두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숨소리와 중얼거리는 소리를 비러브드는 분명히 들었다. 한 발을 내딛자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싶어졌다. 지금까지 세스는 매우 가까운 존재였다. 세스가 나가 있는 긴 시간을 비러브드는 참을 수 있었다. 가까이에 있으면서 포올 디와 나란히 자고 있는 밤까지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너무했다. 비러브드가 지금까지 만족하도록 자신을 길들여 왔던 낮시간까지 세스의 사랑을 빼앗길 수는 없었다. 더이상 자신에 대한 관심을 감소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세스의 관심의 대상은 주로 그 남자다.

비러브드는 몸을 획 돌려 집을 나갔다. 덴버는 아직 안 돌아와 있었다. 돌아와 어딘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비러브드는 덴버를 찾으러 나갔다. 숲속을 빠져나와 강까지 달렀다. 강가에 서서 물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주시했다. 그런데 덴버의 얼굴이 그녀의 옆에 비쳤다. 두 사람은 물속의 서로의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건 네 짓이야. 난 봤어."

덴버는 말했다.

"?"

"너의 얼굴이 보였어. 네가 어머니를 질식시켰어."

"내가 한 짓이 아니야."

"나에게 어머니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했으면서!"

"나는 그녀의 목을 고쳐 주었어."

"목을 조른 후일 거야."

"나는 목에 키스했어. 절대로 목을 조르지 않았어. 그것은 쇠고리가 목을 졸랐던 거야."

"너를 봤단 말이야."

덴버는 비러브드의 한쪽 팔을 잡았다.

"정신 차려, !"

비러브드는 그녀의 팔을 뿌리치고 숲의 변두리를 향해 달렸다.

홀로 남겨진 덴버는 어쩌면 정말 자기의 착각이었는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세스가 바위 위에 앉아 있는 동안에 그녀와 비러브드는 숲속에서 있었으니까. 덴버는 개간지가 옛날에 베이비 할머니가 설교했던 장소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무렵 그녀는 갓난아기였다. 자기가 그 장소에 온 적이 있었다고 해도 그것을 기억해낼 수는 없었다. 오직 기억나는 곳은 124번지와 그 뒤쪽의 초원이었다.

그 옛날 어머니와 할머니가 잠시 쉬고 있는데 덴버는 124번지를 몰래 빠져나왔었다. 다른 아이들이 매일 다니고 있는 집을 찾아서 걷기 시작했다. 그 집을 찾았을 때, 기가 죽어 현관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창문으로 몰래 들여다보았다. 레이디 존스는 딱딱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몇 명의 아이들이 책상다리를 하고 그녀 앞에 앉아 있었다. 레이디 존스는 한 권의 책을 손에 들고 있었고 아이들은 석판을 들고 있었다. 레이디 존스는 뭔가 말하고 있었지만 목소리가 너무 작아 덴버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이들은 그녀가 말하면 그것을 복창하고 있었다.

다섯 번째 덴버가 그곳에 갔을 때 레이디 존스가 그녀를 발견하고 말했다.

"현관으로 들어오렴, 이것은 구경거리가 아니란다."

이렇게 해서 덴버는 같은 연령의 아이들과 함께 1년 동안 산수를 배웠다. 그녀는 7살이 되어 있었는데 오후의 이 두 시간은 귀중한 경험이 되었다. 스스로 그렇게 했던 자기의 행동이 어머니와 오빠들을 기쁘게 했었다.

한 달에 5센트짜리 한 닢으로 레이디 존스는 백인들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일을 시도한 것이다.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없는 흑인 아이들을 자택의 작은 응접실에 모이게 했었다.

덴버는 매일 아침 빠뜨리지 않고 연습하여 오후에는 반드시 모인 아이들 가운데서 눈을 끌었었다. 너무 기쁜 나머지 아이들로부터 소외당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 일등자리를 끝나게 했던 것은 넬슨 로드였다. 덴버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 똑똑한 소년이었다. 그런데 그 오후의 즐거운 공부를 다시 할 수 없게 만들어버린 질문을 덴버에게 던졌던 것이다. 그가 질문을 했을 때 그냥 웃어넘겨도 되었고, 그 애를 때려 눕혀도 되었을 것이다. 소년의 얼굴과 목소리에는 심술궂음이 없었다. 호기심뿐이었다. 그러나 덴버는 두 번 다시 그곳에 가지 않았다.

이틀째 날 세스가 왜 안 가냐고 물었다. 덴버는 대답하지 않았다. 너무나 두려웠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넬슨 로드의 질문을 전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에 대하여 뭔가 소름끼치는 감정이 솟구쳐 올랐다. 베이비 색스가 죽은 후에야 덴버는 오빠들이 집을 나가버린 일을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오빠들의 가출을 유령의 탓으로만 돌리는 어머니의 의견에 찬성하지 않았다. 만일 유령의 탓이라고 한다면 왜 더 빨리 나가지 않았던 것일까? 하지만 넬슨 로드의 말이 진짜라면 오빠들이 집을 나간 것이 납득이 갔다.

넬슨 로드의 일이 있기 전에는 덴버는 유령의 기괴한 장난에 흥미를 갖고 있지 않았다. 눈앞에서 유령이 장난을 쳐도 어머니와 할머니가 있었기 때문에 무관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유령은 그녀를 초조하게 만들기 시작하여 그 못된 장난으로 지치게 만들었다. 다른 아이들을 따라 레이디 존스의 집에 갔었던 것은 그 무렵이었다. 그 일이 있고부터 유령이 덴버를 대신하여 그녀가 처리하지 못하는 분노, 사랑, 그리고 공포를 저지해 주었다. 용기를 내어 넬슨 로드가 질문한 대답을 찾았을 때, 그녀에게는 세스의 대답도 베이비 할머니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 후 전혀 귀가 들리지 않게 되었었다.

2년 동안 침묵 속에서 살며 소리 하나 듣지 못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계단을 올라가는데 귀청이 터질 듯한 굉음이 들렸다. 베이비 색스는 히야보이가 모르는 장소로 뛰어들다가 난 소리라고 생각했다. 세스는 아들들이 가지고 놀고 있던 고무공이 계단을 튀면서 난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 멍청한 개가 미쳐버린 것 아니니?"

베이비 색스가 큰 소리로 물었다.

"개는 주차장에 있어요."

세스가 대답했다.

"똑똑히 봤어요."

"그럼, 지금 난 소리는 뭐냐?"

세스는 난로의 뚜껑을 닫고 흰 계단을 보았다. 그런데 그 꼭대기에서 덴버의 모습을 보았다.

"그 아기가 2층까지 올라가려 하고 있어요."

"뭐라고?"

"갓난아기요. 그 아기가 기어 다니고 있는 소리가 안 들렸어요?"

베이비 색스와 세스는 서로의 얼굴만 쳐다볼 뿐 아무 말을 못했다.

덴버의 청력이 되돌아왔다.

그녀가 차마 들을 수 없었던 대답에 청력을 잃고 그녀의 죽은 언니가 계단을 올라가려고 하는 소리에 다시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124번지 사람들의 운명이 전환기에 당도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마침내 저주는 시작되어 유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형제를 차례차례로 내쫓았고 베이비 색스는 지쳐서 자리에 드러눕게 만들었다. 숨을 거두기 전에 베이비 색스는 세스와 덴버에게 노예로서의 60년과 자유인으로서 10년간을 얘기해 주었다.

"이 세상에 백인의 존재 이외에 불운은 존재하지 않는다. 놈들은 끝이라는 것을 몰라."

이렇게 말하고 그녀는 침대로 되돌아가 누비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리고 곧 세스와 덴버는 갓난아기의 유령을 불러내어 납득시키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큰 소리로 위협하려면 남자인 포올 디의 힘이 필요했다. 하지만 서커스를 구경시켜 주었어도 덴버는 이 남자보다 갓난아기의 유령이 더 좋았다. 왜냐하면 모두에게는 누군가가 있는데, 자신에게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령의 놀이상대까지 포올 디가 없애자 외로움이 물밀듯이 몰려왔다. 그래서 비러브드의 검은 드레스와 끈이 풀어진 신발을 보았을 때는 속으로 감사했었다. 비러브드가 어떤 마력을 갖고 있다고 해도 그녀는 틀림없이 덴버의 것이었다.

초록의 우거짐 속에서 비러브드가 제정신으로 어머니를 목 졸라 죽이려고 결심했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 생각을 지을 수 없었다. 살인, 넬슨 로드가 말했었다.

"네 어머니는 살인을 했기 때문에 감옥에 들어갔었던 거니? 그때 너도 같이 들어갔었니?"

오랫동안 세스에게 제1의 질문을 물을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은 제 2의 질문 때문이었다. 어둠 속에서 자기들 외에 부스럭대며 돌아다니는 뭔가 생물이 있었다. 대답을 듣기 전에 청력을 잃고, 날이 새면 오로지 갓난아기의 기척을 기다리며 그밖의 모든 것으로부터 숨어버렸던 것이다. 포올 디가 올 때까지의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비러브드가 부활해 주었기 때문에 포올 디가 초래했던 불안도 없어졌다.

바로 앞 물가에서 덴버는 비러브드의 모습을 알아차렸다. 맨발로 물속에 서서 장딴지 위까지 검은 스커트를 걷어 올리고 있었는데 아름다운 머리를 숙이고 뭔가에 넋을 잃고 있었다.

다시 고인 눈물 때문에 눈을 깜박거리면서 덴버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신발을 벗고 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 비러브드와 나란히 섰다. 비러브드가 도취되어 있는 것에 시선을 옮겼다.

한 마리의 거북이가 아장아장 나와 방향을 바꾸어 물 위로 기어 올라갔다. 약간 뒤늦게 또 한 마리의 거북이가 같은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비러브드는 걷어 올리고 있던 스커트 자락을 떨어뜨렸다. 스커트는 몸 부위에 퍼지면서 물에 잠겼다.

 

미스터의 눈이 닿지 않는 곳까지 끌려가서 당했다. 히쭉히쭉 웃고 있는 수탉 우두머리의 눈에서 벗어나자 포올 디는 떨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이 보아 알 수 있는 떨림은 아니었다. '형제' 나무를 마지막으로 보려고 고개를 돌렸을 때도, 놈들이 발목에 쇠고랑을 채웠을 때도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떨리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18일 후에 그 참호를 봤을 때도 역시 그랬다. 길이 천 피트의 참호는 깊이 5피트, 5피트로 그 안에 무수한 상자가 끼워져 있었다. 무릎 관절 부위에 채워져 있는 철격자는 새장처럼 위로 들어올려야 열렸다. 열리면 삼면이 벽으로 지붕은 목재 토막과 적토로 만들어져 있었다. 2피트의 적토가 머리 위에 얹혀져 있었다. 눈앞은 3피트 폭의 도랑으로 움직이는 생물이 숙소라는 이름이 붙은 무덤에서 함께 거처하는 것이 공공연히 허용되어져 있었다.

그 외에 45명이 있었다. 이곳에 보내진 것은 '선생'이 그를 브랜디 와인이라는 사내에게 팔았는데 그가 이 사내를 죽이려고 했었기 때문이다. 브랜디 와인은 그를 다른 10명과 함께 염처럼 엮어 켄터키를 벗어나 버지니아로 데려가는 도중이었다. 무슨 이유로 그를 죽이려 했었는지 자신도 분명히 알지 못했다. 다만 할리, 식소우, 포올 에이, 포올 에프 그리고 미스터가 원인이라는 점은 알고 있었다.

그날 밤, 족쇄를 채우기 위해 앞으로 내민 손목과 다리에 쇠사슬이 연결되어졌을 때는 몸이 굳어져 있었다. 그러나 감방문이 덜컹하고 내려지자 손은 명령받기를 거부해버렸다. 제멋대로 따로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손의 움직임을 멈추게 할 수가 없었다. 기적과 같이 두 개의 손이 명령에 따른 것은 밤이 지나고 해머를 잡았을 때였다.

46명 전원이 총성에 의해 눈을 떴다. 세 명의 백인이 하나씩 감방문의 자물쇠를 열면서 도랑을 따라 걸어갔다. 상자 안에서 발을 내딛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마지막 자물쇠가 벗겨지자 세 사람은 돌아와 하나씩 철격자를 끌어올렸다. 그러자 한 사람씩 흑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루라도 이곳에서 지낸 사람이라면 총머리로 찔리기 전에 나섰을 것이다. 포올 디 같은 신참자는 찔리고 나서 앞으로 나섰다.

46명 전원이 일렬로 도랑에 늘어서자 또 한 발 총성이 울려 시상으로 올라가라는 신호를 했다. 지상으로 올라서자 조지아주에서 손으로 직접 만든 천 피트의 쇠사슬이 길게 뻗어 있었다. 전원이 허리를 굽히고 대기했다. 선두에 선 사나이가 쇠사슬의 가장자리를 쳐들어 그것을 자신의 고랑에 연결된 고리에 끼웠다. 그리고 나서 몸을 일으켜 쇠사슬 끝을 옆의 죄수에게 넘겨주면 그 죄수도 같은 동작을 되풀이했다. 아무도 옆의 사나이에게 말을 거는 일은 없었다. 말을 사용해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할 말이 있으면 눈으로 알려야만 했다.

"오늘 아침은 도와주게, 몸이 아주 안 좋아."

"내가 알아서 해주지. 신참이군. 정신 차려!"

쇠사슬 연결이 끝나자 그들은 무릎을 꿇었다. 무릎을 꿇고는 모두들 간수의 일시적인 변덕을 기다리고 있었다. 간수는 모두 세 사람이었다.

"아침밥은 어때? 아침밥이 먹고 싶나? 검둥아?"

", 나으리."

"배가 고프냐? 검둥아."

", 나으리."

"이거나 먹어라."

포올 디는 때때로 동료들이 죽는 것을 보았다.

볼 때마다 포올 디는 구역질을 느꼈으나 나오는 것은 전혀 없었다. 이것을 바라보고 있던 간수는 총으로 그의 어깨를 세게 쳤다.

"하이이이이!"

이것이 흑인이 매일 아침 낼 수 있는 최초의 소리로 쇠사슬 맨끝에 있는 흑인은 이 소리에 몸과 마음을 다했다.

"하이이이이이"

이 사나이가 어떻게 이 자비의 외침을 발할 시기를 아는지 포올 디는 알 수 없었다. 모두들 그를 '하이맨'으로 부르고 있었다. 포올 디는 처음으로 간수들이 신호할 때를 정하고 그들에게 명령하고 있는 것이라고 느꼈다. 신호를 들으면 죄수들은 몸을 일으켜 쇠고랑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를 반주로 앞으로 걸어 나갔다.

죄수들이 들판을 넘어 숲을 빠져나가자 그 막다른 곳은 아름다운 장석의 산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도착하자 포올 디의 양손은 미쳐 날뛰어 파도를 일으켰다. 손에는 커다란 해머를 쥐고 하이맨의 지휘에 따라 사나이들은 끝까지 견디었다. 그들은 노랫가락을 알아듣지 못하도록 발음을 바꾸어 하나의 음이 두 가지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노래했다.

그들은 친하게 지냈던 여자를 노래했으며 자신들의 어린 시절을 노래했다.

그리고 노래하면서 해머로 두들겨 부수었다. 죄수들은 한 사람의 감독을 몇 차례 되풀이하여 완전히 죽여버렸다. 어떤 것보다도 더욱 죄수들은 자신들에게 기대를 걸게 하는 '인생'이라고 불리우는 그 바람둥이 여자를 살해했다. 이 바람둥이 여자가 죽는다면 가까스로 그들도 편안해질 수 있는 것이다. 모두들 순조롭게 지내온 사나이들이었다. 그들은 여지껏 모든 사물을 자극하려는 듯한 이 여자의 포옹으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쳤다.

누군가가 서둘러 도망하려 한다면 전원 46명이 한 사람도 남김없이 하나로 묶여져 있는 쇠사슬이 당겨진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살해되는지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사나이라면 자신의 목숨을 위험한 처지에 빠뜨린다 하더라도 동료들의 목숨까지 말려들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눈은 말하고 있었다.

"조심해. 내 곁에 있어줘."

86일이 지나자 살인은 완료되었다. '인생'은 숨이 끊어졌다. 포올 디는 이 인생이라는 여자에게서 울음 소리가 끊일 때까지 그녀의 엉덩이를 하루도 빠짐없이 두드렸다. 살인이 끝나자 양손의 떨림도 가라앉았다. 마침내 인생은 자빠져서 숨이 끊어졌다.

비가 내렸다. 바람도 불지 않고 5일간 계속해서 내렸다. 사나이들은 일을 할 수 없었다. 쇠사슬 연결 작업은 완만해졌으며 아침 식사의 관행도 없어졌다. 그리고 빨랐던 발걸음은 느릿느릿 끄는 듯한 보행으로 질척거리는 흙 위를 걸어갔다.

비가 그치든지, 그렇지 않으면 조금 수그러들 때까지 전원은 참호의 상자 안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조지아주에서 가장 잘 만들어진 쇠사슬이 46개의 쇠고랑에 연결되어져 있었다. 상자 안에서 사나이들은 도랑의 수량이 불어나는 소리를 들으며 늪에서 사는 살무사를 조심해야만 했다. 그들은 흙탕물에 잠겨 있었으며 그 속에서 잠을 잤고 그 안에서 방뇨했다. 그리고 몇 줄기의 흙탕물이 지붕 널판지 사이를 타고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잠시 후에 생각할 틈도 없이 누군가가 쇠고랑을 세차게 잡아당겼던 것이다. 한 번으로 끝났으나 다리가 휘감겨 진흙 속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그리고 직감적으로 알아차린 순간, 양쪽 손을 사용해 옆에 있는 사나이도 알 수 있도록 왼쪽으로 뻗어 있는 쇠사슬을 세게 잡아당겼다. 물은 발목을 넘어 널판지까지 뒤덮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참호가 무너져서 진흙이 격자 밑과 틈새로 비집고 들어왔다. 진흙은 넓적다리 높이까지 차올랐으며 그는 격자에 달라붙어 웅크리고 있었다. 그런데 또 한 번 당기는 신호가 왼쪽에서 왔다. 진흙 속을 전해져 온 탓으로 처음에 온 신호보다 둔한 느낌이었다. 신호는 쇠사슬 연결 작업의 요령으로 시작되었으나 차이점은 쇠사슬에 담겨진 힘이었다.

하이맨부터 한 사람씩 차례대로 흙탕물 속을 눈을 감은 채 손으로 더듬어 기어갔다. 방향을 모르는 사람이 있어도 양 옆에 묶여진 사나이들이 무질서하게 움직이는 쇠사슬의 느낌으로 따라갔다. 한 사람이 실패하면 전원이 실패하는 것이다. 하이맨이 구출의 열쇠였다. 그들은 그 쇠사슬을 사용하여 무사하게 전원이 지상으로 나올 수 있었다.

당시의 조지아주는 앨라바마주와 미시시피주 전체를 덮고 있어 경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만일 주 경계가 있었다 하더라도 아무런 차이도 없었을 것이었다. 이 사정을 알고 있었다면 죄수들은 알프레드와 그 아름다운 장석의 산을 피했을 것이다. 더욱이 사반나 조지아주 대서양 연안 도시도 피하여 브루릿지 산맥을 내려오는 강을 따라 시아일랜드 제도로 향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몰랐던 것이다.

그들은 낮에는 나무숲에 몸을 숨기고 밤에는 비가 자신들의 모습을 감추어 주었다. 사람들이 집 밖으로 나오지 않기를 기도하면서 높은 토지로 기어 올라갔다. 주인의 저택에서 떨어진 곳에 오두막이 한 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발견된 것은 병에 걸린 체로키족의 야영장이었다.

그들은 수많은 동포의 죽음을 희생하면서도 굴복하지 않고, 강제로 오클라호마로 이주됨에 따라 도망 생활을 택한 인디언들이었다. 지금 그들 사이에는 천연두가 만연하고 있다. 지금 이 사람들이 걸려 있는 병은 그들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약탈의 시대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있는 힘을 다하여 서로를 감쌌다. 건강한 사람은 몇 마일이나 떨어진 곳으로 먼저 보내졌다. 병에 걸려 있는 사람은 목숨을 운명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조지아주 알프레드에서 도망쳐 온 죄수들은 체로키족이 야영해 있는 주위에서 반원을 그리고 앉았다. 몇 시간인가 지나자 드디어 한 여자가 자신의 집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밤이 왔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새벽이 되어서야 피부 한 쪽이 온통 보라빛 종기로 뒤덮인 두 사나이가 다가왔다. 일순간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다. 이윽고 하이맨이 한쪽 손을 쳐들어 보였으나 쇠사슬을 바라보고 이내 사라졌다. 두 사람이 다시 돌아왔을 때는 손에 조그만 도끼를 가득 품고 있었다. 두 사람의 뒤에는 두 아이가 식어버린 옥수수죽을 들고 왔다.

"버팔로 맨"

체로키족은 죄수들을 이렇게 부르고 옥수수죽을 떠먹이며 그들에게 천천히 말을 걸었다. 조지아주 알프레드에서 도망쳐 온 사나이들은 아무도 그들이 경고해준 병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랬으므로 46명 전원이 그곳에 남아 휴식을 취하고 다음 행동을 했다.

포온 디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는 동료 죄수가 아는 체하며 몇 군데 강 이름과 주 이름을 들먹이는 것을 들었다. 또한 인디언들이 이 세상의 시작과 종말의 모습을 상세히 설명하는 것을 들었다. 이 체로키족은 자기들이 알고 있는 다른 버팔로 맨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하이맨은 동료 죄수의 말을 듣고는 그렇게 행동을 개시하자고 했다. 하이맨과 행동을 함께 하고 싶다고 몇 사람이 말했다. 출발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대로 남기를 희망하는 사람도 있었다.

몇 주일이 지나자 포올 디가 유일하게 남아 있는 버팔로 맨이 되어 있었다. 더욱이 아무런 계획도 가지지 못한 채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라곤 냄새를 맡고 쫓아오는 개의 무리뿐이었다. 빗속에서 도망쳤기 때문에 그럴 염려는 조금도 없다고 하이맨이 말해주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었다. 외톨이가 된 포올 디는 자신의 무지를 인식하고 북부로 가려면 어떻게 가야 되는지를 물었다. 자유의 북부, 환영의 손을 내밀고 기다리고 있는 자비에 넘친 북부.

"저쪽이오."

질문을 받은 체로키는 손가락질을 했다.

"나무에 핀 꽃을 따라가면 되지요. 꽃이 나아가는 방향으로 당신도 가시오. 나무에 꽃이 없어지면 당신이 가고자 하는 곳에 다다른 것이오."

그래서 포올 디는 꽃이 한창인 복숭아 나무 쪽으로 달렸다. 계속 꽃만 보고 미친 듯이 달리다가 사과밭에 도착했다. 당도한 사과밭은 델라웨어 주였다.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은 베틀에서 베를 짜고 있는 부인이었다. 부인이 갖다준 소시지를 포올 디는 다 먹어 치우고 곧바로 곯아 떨어졌다. 여자는 포올 디를 자신의 조카 이름으로 부르면서 시라큐즈에서 온 조카라고 고집을 부렸다. 18개월이 지나 그는 또다시 꽃의 모습을 찾아 눈을 굴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124번지에 당도했던 것이다.

 

그녀는 그를 내쫓았다. 포올 디가 아기의 유령을 쫓아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를 내쫓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자신의 의지대로 나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어떻게 해야 될지 몰랐다. 어디까지나 그는 이치에 들어맞는 절차에 의해 124번지에서 내쫓기고 있었다.

시작은 극히 간단했다. 어느 날 저녁 식사가 끝난 후에 그는 난로 옆에 있는 흔들의자에 앉아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러 계단을 내려오는 세스의 발자국 소리에 눈이 떠졌다.

"어디로 나간 줄 알았어요."

"이 의자에 앉은 채 하룻밤을 잠들 수 있다니 믿어지지 않는군."

그녀는 웃었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깨워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깨웠지요. 세 번 불렀어요. 하지만 밤중이라 곧 그만두었어요."

등이 굳어져 똑바로 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는 일어섰다.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았다. 더욱 이상한 것은 기분까지 상쾌했다.

다음 날 밤, 그는 또 흔들의자에서 똑같이 잤다. 그리고 또 그 다음 날에도. 거의 매일 세스를 안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다. 비러브드의 요염함으로 머리가 멍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저녁식사 후 그녀와 함께 눕는 것을 일과로 삼고 있었다. 그런데도 무언가의 구실과 이유를 찾아내서는 밤의 긴 시간을 흔들의자에서 보냈던 것이다. 어느 날 밤 세스와의 일을 끝내고 2층에서 내려와 흔들의자에 앉았다. 그런데 갑자기 이곳에 있고 싶지 않다는 기분이 들었다. 다시 2층으로 가기도 싫었거니와 어떻게든 혼자 있고 싶어서 베이비 색스의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노부인이 숨을 거둔 침대 위에서 잠이 들어버렸다.

이렇게 해서 베이비 색스의 방은 그의 방이 되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금방 있고 싶지 않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여자의 집이 드디어 사나이를 속박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가슴이 답답하고 화가 날 때는 속으로 삼킨 채 한 곳을 집중하여 바라본다. 이러한 증상을 포올 디는 몇 차례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124번지에 도착하기 전에 델라웨어 주의 베를 짜는 여자의 집에서도 겪었던 일이었다. 그는 그때마다 자기가 집을 혐오하는 발작은 그 집에 살고 있는 여자가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집에서의 증상은 살고 있는 여자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그는 이 여자를 날마다 조금씩 사랑하게 되었다. 야채를 다루는 그녀의 손놀림, 바느질을 마치고 이빨로 실을 끊을 때의 입언저리, 자신의 딸들을 보호하기 위해 핏발어린 눈의 표정 등을 나날이 깊게 사랑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이번의 증상에는 어딘가 다른 곳으로 떠나고 싶다는 갈망도 없었다. 단지 2층에서도 흔들의자에서도 그리고 지금은 베이비 색스의 침대에서도 편히 잠들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창고에 있는 방으로 갔다. 그러나 곧 창고의 방에서 또다시 헛간으로 방을 옮겼다. 이러한 이동이 자신의 의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이 헛간에서였다. 안채와 떨어진 헛간에서 몸을 새우처림 구부려 돼지 기름이 들은 깡통에 눈길을 집중시키면서 깨달았던 것이다.

오하이오에서의 사계절은 극장에서 관람하는 영화와 흡사했다. 포올 디가 124번지의 안채에서 헛간으로 밀려났을 때는 여름의 자취는 사라지고 가을이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포올 디는 몸의 밑과 위를 신문지로 포개어 어느 정도 모포의 온기를 느끼려고 했다. 그러나 마음에 걸리는 것은 추위가 아니라 동쪽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이곳에 무슨 용건이 있지? 무슨 일로 왔어?"

"당신은 나를 가져야만 해요. 내 이름을 불러 주세요."

비러브드가 스커트를 말아 올리고 이쪽을 향해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나 포올 디는 달빛을 받아 은빛으로 빛나고 있는 돼지 기름통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조용히 타일렀다.

"좋은 사람들이 너를 집에 있게 하면서 귀여워해 주고 있잖니. 너 역시 그것에 보답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야. 세스는 너를 사랑하고 있어. 진짜 딸 못지 않게 말이야. 너 역시 알고 있을 텐데."

그가 말을 끝내자 비러브드는 말아 올렸던 스커트를 내리고 멍한 눈길로 그들 바라보았다. 한 걸음 더 그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그 여자는, 내가 그 여자를 사랑하고 있는 것만큼 나를 사랑해주지 않아요. 나는 그 여자만을 사랑하고 있는데도 말이에요."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이곳에 들어온 거지?"

"내 몸 안에 당신을 받아들이고 싶어요."

"빨리 네 방으로 돌아가 자도록 해."

"저와 관계를 가져야 해요. 그리고 나서 내 이름을 불러 주어야만 해요."

시선을 돼지 기름통에 고정시킨 채로 있는 한 그는 무사했다.

"제발 나의 이름을 불러 줘요."

"싫어."

"부탁이에요, 불러 보세요. 불러 주면 나가겠어요."

"비러브드."

결국 이름을 불러 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나가지 않았다. 여자는 더욱 가까이 그에게로 다가와 목을 끌어안았다. 그런데 속삭이는 듯한 소리를 포올 디는 듣지 못했다. 겨우 정신을 차린 것은 이미 여자의 몸 안에 들어갔을 때였다. 그리고 자신이 계속해서 중얼거림을 되풀이하는 걸 알았다. 처음에는 낮은 음성이었지만 점점 커진 목소리는 덴버를 깨우게 하는 데 충분했다.

 

이전의 배고픔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행스럽게도 그것은 충분히 배를 든든하게 하는 음식물이었다. 비러브드는 덴버를 곧잘 뚫어지게 보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이미 다은 곳에 맴돌고 있다는 것을 덴버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가끔 덴버가 예상하지도 않았던 순간에 비러브드는 주먹 위에 뺨을 올려놓고 물끄러미 덴버를 주시하는 적이 있었다.

찌르는 듯한 시선을 한몸에 받는다는 것은 황홀한 경험이었다. 덴버는 아무런 부족함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 부족을 느끼고 항상 무엇인가를 바라고 있었던 쪽은 비러브드였다. 그녀의 부족이 무엇인가 안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덴버는 버러브드가 바라고 있는 것을 기꺼이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너는 한 번도 엄마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니? 백인은 어떤 사람들이었어? 한 사람도 기억하지 못하니?"

비러브드는 자신의 모친인 것 같던 여자를 한 사람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여자한테서 강제로 떨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대답한 적이 있었다. 그 밖에 그녀가 몇 차례고 되풀이해서 말한 것은 다리에 관해서였다. 다리 위에 서서 아래를 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백인 남자를 한 사람 알고 있었다고 했다.

세스는 이러한 사실에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 드레스는 어디서 났지? 또 그 신발은?"

비러브드는 얻은 것이라고 말했다.

"누구한테서?"

그녀는 초조한 듯이 손등을 긁으며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대꾸했다. 세스는 비러브드가 누군가 백인 남자의 여자로서 갇혀진 채 지내다가 다리까지 도망쳤을 것이라고 덴버에게 말했다.

덴버는 세스의 추측을 믿지 않았으며 말참견도 하지 않았다. 눈만 내리깔고 있을 뿐 헛간의 일을 한 마디도 내뱉지 않았다. 자신이 태어난 이후, 항상 놀이 상대가 되어 주고 있었던 아기 유령이 눈에 보이는 모습이 되어 돌아온 것이라고 덴버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잠깐 동안이라도 비러브드가 자신을 주시해 주면 감사의 기분으로 가득차는 것이었다. 눈길이 거두어져도 한동안은 그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그러나 비러브드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도 호기심을 드러내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억지로 캐어 묻는다면 그대가 바라는 것을 알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덴버는 비러브드에게 어떻게 해서 엄마가 옛날에 가지고 있었던 귀걸이의 일을 알았는지를 묻지 않았다. 그리고 밤이면 밤마다 헛간으로 나가는 이유도 묻지 않았다.

비러브드의 가슴 속에는 불길이 끊임없이 타고 있어 자질구레한 이야기로는 꺼지지 않았다.

그동안 덴버는 여지껏 지내온 얘기를 비러브드에게 하나도 빠짐없이 설명해 주어야만 했다.

그녀의 주의를 끌기 위해 오빠들의 얼굴 생김새부터 그들이 가르쳐 준 놀이에 이르기까지 자세하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유령과 함께 보낸 세월과 두 사람이 집을 나가게 된 원인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지금 두 사람은 집 밖에 있었으므로 몹시 추웠다. 눈은 딱딱한 돌덩이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덴버는 지금 막 레이디 존스가 학생들에게 가르쳐 주었던 숫자 세는 노래를 부르고 났다. 그리고 얼어버린 내의와 타올을 건조대에서 거두어 비러브드의 팔에 올려놓았다. 두 사람은 뺨을 에이는 듯한 추위에 쫓겨 집으로 들어갔다. 얼어붙은 의복은 천천히 녹아서 다리미질하기는 알맞았다.

덴버는 항상 소녀의 흥미를 끌기 위해 이리저리 궁리하고 있었다. 덴버는 전략가가 되어 세스가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시간까지 비러브드를 자신의 곁에 있게 하는 방법을 강구해야만 하는 것이다.

세스의 귀가 시간이 되면 비러브드는 창가를 어슬렁거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조금씩 현관을 나서 도로 근처까지 걸어 나간다. 덴버는 요사이 눈에 띄게 변했다. 전에는 게으름을 피우며 불평을 늘어놓던 일도 요즈음은 스스로 알아서 비러브드와 함께 일을 척척 해치운다.

그렇게 바쁘게 움직이지 않으면 비러브드는 혼자 방에 틀어박혀 멍하니 생각에 잠기든가 입을 꾹 다물고 불쾌한 표정을 지어버린다. 그러므로 비러브드가 덴버를 주시해 줄 가망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밤이 되면 그 무엇을 해도 소용없었다. 세스가 집에 있을 동안은 비러브드의 눈은 세스에게서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덴버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되면 불안했다. 세스와 함께 있지 않으면 그녀는 일어나서 포올 디가 잠들고 있는 헛간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소리도 내지 않고 울지도 모르고 죽은 듯이 곯아떨어질지도 모른다. 그녀의 숨소리는 사탕과 같은 달콤한 향내가 난다. 잠이 들면 덴버는 비러브드 쪽으로 몸을 돌려 그 달콤한 숨결을 느낄 수 있도록 들이마시곤 했다.

사과술이 담긴 항아리는 냉장창고에 있는데 덴버는 혼자서도 거뜬히 그것을 들 수 있었다. 그런데도 비러브드에게 도움을 청했다. 항아리는 단단한 체다치즈와 나란히 있었다. 토방 한가운데에는 짚단이 깔려 있었다. 그 위에 신문지로 덮혀 있었고 발 언저리에는 모포가 한 장 놓여 있었다. 이미 눈까지 내려 본격적인 겨울인데도 이 짚단 위에서 이미 한 달 가까이나 잠자고 있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밝은 대낮인데도 이 냉장창고는 별개였다. 지붕과 벽 사이로 햇빛이 두세 줄기 들어왔지만 어두컴컴했다.

문이 소리를 내며 닫혔다. 덴버는 비러브드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두워서 알 수가 없었다.

"어디에 있니? 비러브드."

"여기."

"어디?"

"찾아봐."

덴버는 오른손을 쑥 내밀고 한 걸음씩 발을 내디뎠다. 비틀거리며 짚으로 만든 요 위에 자빠졌다. 덴버가 또 말한다.

"그만둬! 어디 있는 거야?"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목이 마르다고 한 것은 너잖아. 사과술이 마시고 싶지 않은 거니?"

덴버의 목소리에는 달래는 듯한 어조가 배어 있었다. 그래도 비러브드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덴버는 공포를 느끼고 싶지 않아 쓰러져 있던 신문지 속에서 애쓰며 일어섰다. 손을 내민 모습으로 천천히 입구를 찾아 걸었다. 문에는 빗장도 손잡이도 없었다. 철사로 만든 고리가 못에 걸려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문을 밀어서 열으니 차가운 햇빛이 쏟아져 내렸다. 처음에 두 사람이 들어왔을 때와 똑같았다. 다만 비러브드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만 빼놓고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비러브드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견디기 힘들었다.

창고 안에 다시 발을 들여놓자 문이 이내 ''소리를 내며 닫혔다. 짚으로 만든 요에 발이 걸리면서 손을 뻗어 치즈와 비스듬해진 선반을 만졌다. 그런데 비틀거려도 의식이 없었다. 자신의 몸이 어디에서 끝나는 것인지, 어느 부분이 팔이며 다리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마치 얼음의 혼처럼, 어둠 속을 부유하면서 이리저리 부딪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덴버는 이러한 느낌이 너무도 싫었다. 그래서 흐느끼면서 띄엄띄엄 애원했다.

"싫어. 돌아가 버리면 싫어."

포올 디가 124번지에 찾아와 덴버가 부뚜막 앞에서 울고 있었던 때보다 지금이 더욱 비참했다. 그때는 자기 자신이 가여워서 울었고 지금은 그 자신이 사라져버렸으므로 울고 있는 것이다. 이 비참함에 비하면 죽음 역시 식사를 한 번 거를 정도의 고통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덴버는 자신의 몸이 점점 가늘어져 용해되어 없어지는 것을 느꼈다.

발자국 소리 하나도 들리지 않았으나 바로 옆에 비러브드가 돌아와 있었다. 분명히 덴버가 봤을 때는 아무도 없었던 장소에 서 있었다. 게다가 미소를 띠고.

덴버는 비러브드의 스커트 자락을 움켜쥐었다.

"틀림없이 가버린 줄 알았어. 너는 돌아가 버린 것이라고 생각했다니까."

비러브드는 미소 지었다.

"그곳은 싫어. 여기가 내가 있을 장소야."

짚으로 만든 요 위에 앉아 웃음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젖혀 빛줄기를 응시했다.

덴버는 비러브드의 스커트를 잡고 놓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비러브드가 갑자가 일어섰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 거지?"

덴버가 물었다.

"."

비러브드는 빛이 새어 나오는 틈을 가리켰다.

"뭔데? 내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덴버는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 끝을 바라보았다.

비러브드는 손을 내렸다.

", 이런 모습을 하고 있어."

덴버는 비러브드가 몸을 구부려 새우같이 둥근 모습이 되어 흔드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비러브드의 눈은 공허했고 신음소리는 거의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희미했다.

"괜찮니? 비러브드."

비러브드의 눈은 무엇인가를 응시했다.

"저기에, 그 여자의 얼굴이."

덴버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어둠만 있을 뿐이었다.

"누구 얼굴? 어디에?"

"나야. 저것은 나야."

그녀는 또다시 미소 짓고 있었다.

 

스위트홈 농장의 사나이 가운데 마지막 생존자는 그들의 사나이다움을 인정했고 믿었다.

켄터키주의 모든 흑인 중에서 자신과 네 명만 사나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어른이 되었다. 가너의 잘못을 고치기는커녕 그는 오히려 가너가 시키는 대로 떠들고 다니면서 격려받고 있었다. 작업의 방법을 고안하거나 개량해야 될 곳이 발견되면 일일이 가너의 허가를 받지 않더라도 자신의 생각대로 할 수가 있었다. 말이나 아내를 고를 수 있었고 원한다면 읽고 쓰는 것을 배우는 일조차 허용되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읽고 쓰기를 배우려고 하지 않았다. 자신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일은 아무것도 기록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나이다움의 근거는 분별 있는 백인이 그들을 사나이라고 부르며 일의 방법을 결정할 특진을 부여했기 때문일까?

아니다.

그들과 가너와의 관계는 진실과 신뢰로 연결되어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너는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게다가 그들이 하는 말에는 가치가 있어서 등한시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노예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 주인으로서의 위엄이나 권위를 상실하는 일이 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것과는 다른 현실을 가르쳐 주었던 것이 '선생'이었다.

그 사나이들은 스위트 홈 농장에 있을 때만 스위트 홈 농장의 사나이로 통용되었던 것이다. 농장에서 바깥세상으로 나오게 되면 인류의 불법 침입자였다. 아무리 울며 떠들어도 그 목소리를 인간의 언어로 들어주지 않았다. 육신만 사람이었지 거세당한 소나 말과 마찬가지였다.

포올 디가 지금까지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선생'이 틀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그의 확신은 흔들렸다. 그를 부끄럽게 만들고 어쩌면 '선생'쪽이 옳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은 성욕이 아니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그녀가 바라는 장소로 행해지게 되는 것에 저항할 힘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저녁이 되면 세스가 있는 흰 계단을 오를 수가 없었고 필사적으로 저항했는데도 한 곳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방금 숨을 거둔 짐승의 고기를 어그적어그적 이빨을 세우고서 먹어치웠던 그가 말이다.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사나이라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포올 디는 자신의 발을 생각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아직은 말을 할 수 있었으므로 지난 3주일간의 일을 세스에게 고백하려고 생각했다. 그녀의 레스토랑 뒷문까지 가서 그는 기다렸다.

한기가 느껴져서 포올 디는 양손을 입 가까이로 모았다. 음식 찌꺼기를 기다리며 주방 바깥에서 어슬렁거리던 네 마리의 개가 그를 응시했다.

이윽고 뒷문이 열렸다. 한쪽 팔에 음식 찌꺼기가 담긴 남비를 껴안고서 세스가 나타났다. 그의 모습을 확인한 그녀의 얼굴에는 기쁨과 놀라움이 담겨져 있었다. 포올 디도 미소를 지으려고 했으나 얼굴이 추위로 경직되어 있었으므로 잘 안되었다.

"어머나! 마중을 나오다니. 포올 디 덕분에 젊은 아가씨가 된 것 같군요. 그 누구한테도 이런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없었어요. 조심하세요. 의지하게 될지도 몰라요."

개들은 음식이 충분했으므로 싸울 필요가 없었다. 세스는 가장 큰 뼈부터 땅바닥으로 던지기 시작했다. 이어서 남비에 있던 음식 찌꺼기를 모두 개그릇에 쏟아부었다.

"이 남비를 씻어야 해요. 금방 올께요."

그는 주방으로 돌아가는 세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바람을 막으려고 깃을 세우며 나왔다.

"일이 빨리 끝난 건가요? 아니면..."

"일찍 나왔어."

"무슨 일이 있었어요?"

"그냥."

그는 말하고서 입술을 핥았다.

"일이 줄어든 것은 아니죠."

"아니, 그게 아니야. 일은 충분히 있어. 단지..."

"?"

"세스, 앞으로 내가 하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나빠질 거야."

그 말을 듣고서 세스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보았다. 바람은 세스의 얼굴을 채찍처럼 두드렸다. 그래도 세스는 눈길을 피하지 않고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녀의 기대하는 듯한 표정은 사라지고 가련함이 엿보였다. 바람 속에서도 눈을 감지 않는 이 여자에게 포올 디는 차마 그 사실을 고백할 수가 없었다.

"말해 보세요, 포올 디. 내 기분은 상관하지 말고요."

"아기를 낳아줘, 세스.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해주지 않겠어?"

포올 디는 마음에도 없었던 얘기를 하고 말았다.

"그걸 부탁하려고 여기까지 왔어요? 당신은 이상한 사람이군요. 당신의 말이 맞아요. 기분 좋은 얘기는 아니군요. 그런 고생을 또다시 처음부터 되풀이하기에는 내가 너무 나이를 먹었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녀는 포올 디의 손을 잡았다.

"생각 좀 해봐."

그는 세스의 손가락 끝을 자신의 뺨에 대었다. 웃으면서 그녀는 손가락을 뺐다.

골목을 나와서 거리로 들어서자 두 사람은 장난을 중단했다. 바람은 아까보다 조용해졌으나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건물의 입구나 상점 앞에 기대어 있는 사람들은 없었다.

포올 디는 결심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었는 어린 여자애 따위가 나의 결심을 깰 수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젖비린내 나는 여자애가 자신을 의심하게 만들거나, 애원시키거나, 고백시키는 일 따위가 가능할 리가 없다. 그렇다, 나는 괜찮은 것이다. 그는 세스의 어깨에 팔을 돌려 힘껏 껴안았다. 그녀는 고개를 그의 가슴에 기댔다. 일순간 두 사람은 멈추어서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 통행인이 옆을 지나가도 신경쓰지 않았다. 조금씩 소리도 없이 갑자기 하늘의 선물인 듯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송이가 크게 떨어졌다. 눈은 언제나 그를 놀라게 했다. 어쩌면 이렇게 조용히 내릴까, 비와는 달리 비밀스럽게 내리니까.

"달리자."

그는 말했다.

"당신이나 뛰세요. 난 하루종일 계속 서 있었다구요."

"난 어디에 있었는데? 계속 앉아 있었는 줄 알아?"

그는 그녀의 팔을 잡아끌며 달리려고 했다.

"하지 마세요! 하지 말라니까요! 달릴 수 있는 다리가 아니에요."

"그럼 그 다리를 나한테 맡겨버려."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녀를 등에 업고 하얗게 된 길을 달렸다. 결국 숨이 차서 그는 멈추었다. 그녀는 너무 웃어서 몸에 힘이 모두 빠져버렸다.

"당신한테는 분명히 아기가 필요하군요. 눈 속에서 함께 놀아 줄 상대가 말이에요."

포올 디는 활짝 웃었다.

"정말로 시험해 보고 싶어. 그럴 마음을 가진 상대방이 필요하지만 말이야."

"그렇겠죠."

네 시경이 되어 124번지까지는 반 마일 정도 남아 있었다. 두 사람에게 표류하듯 다가오는 인기척이 있었다. 그것은 과거 사 개월간 세스를 마중 오던 인기척과 똑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으므로 그녀의 모습을 가까이 보고서야 깜짝 놀랐다.

비러브드의 안중에 포올 디는 없었다. 오로지 세스만을 탐색하고 있다. 코트도 입지 않고 머리도 노출된 채 손에는 긴 숄을 꼭 쥐고 있었다. 양손을 뻗어서 비러브드는 숄을 세스의 몸에 감으려고 했다.

"어머나! 아무것도 입지 않고 여기까지 나오다니, 제정신이니?"

그렇게 말하고 포올 디의 옆에서 한 걸음 내딛고는 숄로 비러브드의 머리와 어깨를 감싸주었다.

"좀더 현명하게 생각해야지."

하고 말하면서 왼팔로 비러브드를 안았다.

눈이 쌓여서 이미 딱딱해져 있었다. 포올 디는 비러브드가 나타나기 전까지 세스와의 일이 얼음처럼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두 여자의 뒤에서 1야드 정도 떨어져 걸으면서 집에 도착할 때까지 오장육부에 꽂히는 분노와 싸웠다. 램프의 불빛에 반사되어 창문에 비친 덴버의 모습을 보았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그런데 넌 누구 편이지?"

세스는 아무런 의심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단번에 모든 것을 해결해 주었다.

"오늘 밤부터 이제 다른 곳에서 자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죠? 포올 디."

그는 그녀에게 미소 지었다.

"2층으로 오세요. 당신의 방이니까요."

그녀는 말했다.

포올 디는 지금 세스한테 감사의 마음을 느꼈었다. 벼랑 위에서 가볍게 올려져서 안전한 평지에 내려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세스의 침대에 있으면 예사스럽지 않은 두 명의 젊은 여자들의 존재에도 무뎌질 수 있었다. 세스가 자신의 의지를 뚜렷하게 표현해 주는 한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물 모양이 된 그의 팔에 안겨서 세스는 아이를 낳아달라고 부탁했을 때의 포올 디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웃으면서 그의 손을 잡기는 했지만 그의 말은 그녀를 겁나게 만들었다. 다시 한번 아이를 낳을 생각을 하니 끔직했던 것이다.

도대체 왜 그는 아이를 낳아주기를 원하는 걸까? 그녀에게 매달리기 위해서? 여기를 지나갔다는 표식을 원해서? 이 사나이는 가는 곳곳마다 아이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18년이나 방랑 생활을 했으니까. 세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다. 이 사나이는 덴버와 비러브드가 원망스러운 것이다. 그렇다. 그것이 분명하다. 어쩌면 딸들을 돌보는 시간조차 자신을 위해 할애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에 원망스러울지도 모르는 것이다. 네 사람은 아무튼 가족의 형태를 만들고 있는데 역시 그는 가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세스는 한숨을 쉬고 그의 가슴에 손을 대었다. 아이를 낳는 일이 잘못되었다는 결론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그에 대한 좋지 않은 억측을 떠올리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는 약간 창피함을 느꼈다.

 

덴버는 설거지를 마치고 나서 비러브드를 바라보았다. 그 애는 엄마와 포올 디가 이 방에서 나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계속 손가락을 입에 물고 있었다.

"엄마는 그 사람과 여기서 같이 지내고 싶은 거야."

덴버의 말에도 비러브드는 손가락을 입에서 빼지 않은 채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내보낼 거야."

"그 사람이 나가버리면 엄마가 널 혼내줄 걸."

그 순간 비러브드는 입 안에서 어금니 하나를 빼냈다.

", 안 아프니?"

덴버가 놀라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비러브드는 태연하게 빼낸 이를 들여다 보면서 생각하는 것이었다. 언젠가는 손과 팔이 빠져나갈 것이고 그다음에는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는 등 자신의 몸이 한 조각씩 떨어져 나갈 것이고 어느 순간에는 그 조각들조차 뿔뿔이 흩어져버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그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건 분명히 사랑니일 거야."

덴버는 안스러운 듯이 비러브드를 바라보았다.

"아프지 않아?"

"아파."

"그런데 왜 울지 않니?"

"?"

"왜 울지 않느냐구?"

그러자 비러브드는 울기 시작했다. 손금 없는 평평한 손에 하얀 이를 올려놓고 그 애는 계속 울어댔다. 엄마와 포올 디가 욕조에 같이 있을 때도 이렇게 울고 싶었다.

이층으로 올라간 엄마와 포올 디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밖에서는 눈이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

쌓인 눈 위로 눈은 계속해서 쌓여 갔다. 눈이 눈을 덮고 있었다.

 

베이비 색스는 그녀의 아들 할리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빌었다. 그러나 아이들만 무사히 도착했을 뿐 세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애들은 그녀의 손자들이었고 그래서 그녀는 그나마 일가의 대를 이을 수 있음을 감사했다.

사내아이가 둘이었고 막 기기 시작한 갓난 여자애가 한 명이었다.

얼마 후 세스는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나타났다. 그렇지만 아들 할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세스의 탈출을 도와준 스탭이 먼저 축하연을 준비했다. 그는 양동이를 들고 산딸기를 따기 위해 육 마일이나 걸어갔다. 미끌미끌한 강둑에서 미끄러지기도 하고 가시덤불에 찔려 가면서도 그는 딸기를 조심스럽게 따서 양동이에 담았다.

그가 124번지로 돌아왔을 때 베이비 색스는 웃음을 조심스럽게 터뜨리고 말았다. 그의 옷은 걸레처럼 너덜너덜했고 가시에 찔린 손등에는 피딱지가 붙어 있었다.

웃음소리에 놀란 사람들이 몰려나왔고 강철 같았던 건장한 사내가 그 꼴로 서 있는 것을 보고는 한바탕 웃어댔다.

모든 흑인들의 탈출을 위해 용감하게 싸워 왔던 그가 겨우 산딸기 두 양동이에 참패를 당했다고 생각하니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스탭은 쑥스러워 고개를 숙이고는 딸기 한 알을 채 일 개월도 되지 않은 덴버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그러자 여자들이 놀라 소리를 질렀다.

"안 돼요."

"설사를 한다고요."

결국 베이비 색스가 스탭을 뒤켠으로 내몰아 몸을 씻게 했다. 베이비 색스는 그때 이 정도의 딸기라면 파티를 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파티가 시작된 것이다.

그녀는 네 개 정도의 파이를 만들 작정이었고, 엘라와 존을 부르기로 마음먹었다.

세스는 세스대로 닭 두 마리를 식탁에 올릴 준비를 했고, 스탭은 농어와 메기를 잡으러 갔다.

갓난아기 덴버는 재미있다는 듯이 눈망울을 이리저리 굴렸다.

124번지는 밤이 깊도록 즐거운 웃음소리를 토해내고 있었다.

다음날 스탭은 눈을 뜨자마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베이비 색스는 언제나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알았고 실천에 옮겼으며, 모든 이들에게 조언을 하고 병자를 치료해주며 누구든지 차별 없이 대하고 사랑해주었다.

그런데 이제는 두 양동이의 딸기로 많은 파이를 만들어, 온 마을의 흑인들과 나눠 먹었고 또한 칠면조와 신선한 크림 등도 모두 배불리 먹을 수 있게 했던 것이다.

이런 일은 성경에서만 가능한 일이라고 스탭은 여겼다.

열 살짜리 백인 아이로부터 채찍질을 당해 보지도 않았고 노예의 신분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착한 주인의 도움을 받아 자유인이 되었고 그 주인의 도움을 받아 남들보다 쉽게 이곳에 도착했다.

더구나 124번지에 있는 그녀의 집은 이층인데 우물까지 달려 있었다.

달콤한 잠에서 깨어난 사람들은 간밤에 과식했던 탓에 소다를 먹는 등 일대 소동을 일으켰다.

베이비 색스는 옥수수죽을 끓이면서 불길한 낌새를 느꼈다. 그 후로 그녀는 여러 차례 이러한 낌새를 느끼곤 했다.

한낮에 밭에서 괭이질을 하다가도 그 낌새를 느꼈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펴 보았다. 뒤쪽으로 얼마 떨어진 곳에 세스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세스는 등의 상처를 빨리 낫게 하기 위하여 등에 기름을 묻힌 플란넬을 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갓난아기가 자고 있는 바구니가 보였다.

베이비 색스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파랗고 맑았다. 어느 곳에도 죽음의 그림자 따위는 드리워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기분 나쁜 낌새는 여전히 예리하게 그녀를 자극했다.

베이비 색스는 강이 가깝고 양지바른 쪽에 일궈 놓았던 옥수수밭을 바라보기도 했다. 그녀는 계속해서 괭이질을 했고 등을 펼 때마다 그 불길한 낌새를 느껴야 했다.

그리고 순간 그녀는 그 낌새가 무엇인지를 알아차렸다. 간밤에 도가 지나칠 정도로 부산을 떨었고, 지나치게 흥청댔으므로 이웃이 화가 난 것이다.

베이비는 눈을 감았다. 그들이 옳은 것이다. 그런데 그 이웃들의 비난 뒤로 또 다른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듯했다. 그것은 자꾸만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확인할 수 없는 불길한 무언가가.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괭이질을 계속했다. 도대체 무엇일까?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검은 그림자의 실체는 무엇인가. 아직도 그녀가 상처받아야 할 일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할리의 죽음? 아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녀는 아들의 죽음을 대비해 마음을 단단히 먹었기 때문에 그보다는 그녀가 마지막으로 낳았던 아이를 기억해냈다.

그 애를 낳았을 때 산고 속에서 힐끔 보았을 뿐, 그 후로 성장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아이. 변화한 모습을 마음속에 그려 보려고 그녀는 너무도 애를 써 왔다.

할리가 열 살 되던 해 그녀는 허리가 아프다는 이유로 헐값으로 팔려 갔다. 두 모자를 산 가너 씨는 켄터키주에 스위트 홈이라는 농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곳에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전과는 달리 아무도 그녀를 때리거나 욕하는 일이 없었다. 그녀가 미끄러져서 들고 가던 달걀을 다 깨뜨렸어도 '이 검둥이년! 이게 무슨 짓이야!'라고 화를 내는 사람도 없었다.

그 농장은 그녀가 이전에 전전하던 농장에 비하면 작은 곳이었다. 가너 씨 부부와 네 명의 젊은 일꾼만이 있었다. 젊은 네 명의 일꾼 중 세 명이 '포올'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가너 씨 부부는 베이비 색스를 밭에서 일하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할리를 포함한 젊은이들이 밭일을 해 나갔다.

부인과 베이비는 함께 요리를 했고 다리미질을 하며 가축들에게 먹이를 나누어 주었다. 그녀에게는 너무도 편한 일들이었다. 허리는 계속 아파왔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나 할리는 4년 동안 주의깊게 그녀를 관찰했고 가엾은 어머니를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치를 각오를 가지고 있었다. 착한 아들 할리는 죽을힘을 다해 일을 했었고 이제는 손자들을 그녀에게 안겨 준 것이다.

그녀가 불길한 징조를 느끼고 나서 옛일을 기억하고 있는 동안 뒤 쪽에서 손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는 진정으로 '자기 자신'이 되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 그녀는 슬프기 짝이 없다.

자신이 낳은 아이가 어디에 매장이 되어 있는지, 혹은 살아 있으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는 것이 슬프기도 하지만 그녀 자신에 대한 것보다 그 애들에게 대한 것을 많이 알고 있었다.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위한 노력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노래를 부른 적이 있을까? 나는 예뻤을까? 이웃에는 좋은 친구였나? 아이들과 헤어지지 않았다면 좋은 어머니가 될 수 있었을까? 등등.

가너의 집에서 그녀는 편한 생활을 하면서도 늘 '여긴 전보다는 괜찮지만 내 인생은 여전히 비참해'라고 중얼거렸다.

가너 부인은 일꾼들의 말에도 귀를 기울였고 필요한 상식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또한 가너 씨는 노예들을 종마처럼 부리지도 않았다.

베이비 색스는 한편으로는 안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불안하기도 했다. 가너 씨가 만약 그들에게 짝을 골라주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가능한한 말을 적게 하며 살았다.

가너 부인은 이러한 베이비 색스가 답답하기도 했지만 유능한 일꾼임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가너 씨는 할리의 청을 받아들여 그녀가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을 돕기도 했다. 그 대신 할리는 쓰러질 때까지 일해준다는 조건이었다.

베이비 색스는 가슴이 너무도 저려 왔다. 예순이 넘었고 절름발이인 자신이 자유의 몸이 된다 한들 무엇하겠는가?

자유의 땅에 발을 내딛는 순간까지도 그녀는 그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자유로운 공기를 한 번 마시고 나니 세계에서 이보다 더 훌륭한 것은 없을 것이라 여겨졌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그녀는 그녀 자신을 알지 못한 것이다. 그녀는 두 손을 들어 쳐다보았다.

'이 것이 나의 손이다.'

가슴속에서 뭔가가 둥둥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심장의 고동 소리였다. 처음 든는 소리였다. 이제서야 그녀는 자신의 심장이 뛰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가너 씨가 뒤에서 그녀를 바라보고는 빙그레 웃었다.

그녀는 계속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내 심장이 뛰고 있어요."

"두려워할 것 없어, 제니."

웃음소리가 더 커질 것 같아 베이비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지금부터는 내가 소개해준 사람들이 너를 도와줄 거다. 남매인데 스코틀랜드 출신이지. 나와는 이십 년 넘게 사귀어 왔다."

베이비는 가너 씨의 말을 들으면서 오랫동안 궁금해왔던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가너 씨, 당신은 왜 저를 제니라고 부르죠."

"너의 명찰에 그렇게 쓰여 있었는데 그게 네 이름이 아니었나? 그럼 무어라 부르지?"

"아무렇게나요."

가너 씨는 어찌나 웃었든지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널 케롤라이나에서 데리고 왔을 때 위트로는 널 제니라고 부르고 있었고 양도 증명서에도 제니 위트로라고 씌어 있었다. 그 남자가 널 제니라고 부르질 않았단 말이냐?"

"아니에요. 불렀다고 해도 전 듣지 못했을 거예요."

"뭐라 불렀어야 대답을 했을까?"

"뭐라 부르든 언제나 대답했어요. 하지만 색스라는 남편의 성을 가지고 있죠."

"결혼을 했었나, 제니?"

"결혼이 아니라 결혼 같은 거죠."

"그 남편은 어디에 있나?"

"몰라요."

"그가 할리의 아비인가?"

"아니에요."

"그렇다면 왜 할리를 색스라 부르지? 할리의 양도 증명서에도 너와 마찬가지로 위트로가 씌어 있던데."

"위트로는 저를 제니라 부르지 않았고 실은 베이비라 불렀죠."

"아냐. 내가 너라면 제니 위트로로 불리길 원할 거야. 베이비 색스라는 이름은 해방된 니그로답지가 않으니까 말야."

그럴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베이비 색스라는 이름은 그녀가 남편이라 부르던 남자의 유일한 유품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구두 만드는 법도 가르쳐 주었고 어느 날엔가 기회가 닿으면 함께 도망치기로 약속도 했었다. 실제로 기회가 왔었는데 둘이 함께 도망친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그 혼자만이 도망을 쳤다. 그 후로는 전혀 소식을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그가 성공리에 탈출했으리라 믿고 있었다.

베이비는 그를 만나기 위해서라도 '색스'로 불리워져야만 했다.

처음 도시로 나왔을 때 그녀는 숨이 멈출 정도로 놀라고 있었다. 거리에 북적대는 많은 사람과 커다란 마차를 보니 케롤라이나에서 보았던 것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여긴 운하가 있어. 모든 물건들을 배로 실어 나르는 곳이야. 그리고 모든 것들이 척척 만들어지지. 철근, 단추, , 책 등 네가 원하는 것 모두를 만들고 있단다."

가너 씨가 소개해준다던 보드윈 남매는 도시의 중심부에 살고 있었다. 가너 씨는 마차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 여기야."

베이비는 옷 꾸러미를 집어 들고 간신히 마차에서 내려섰다. 이미 가너 씨가 현관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녀가 현관문을 열었을 때 흑인 소녀가 그를 안내해 주었다. 간신히 의자에 앉자, 그 소녀가 물었다.

"뭐라도 좀 드시겠어요, 부인."

"아니에요. 물만 조금 마셨으면 좋겠군요."

소녀는 컵 가득 물을 따라와서는 상냥하게 말을 건넸다.

"제이니에요. 잘 부탁드려요."

베이비 색스는 물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마시고는 손으로 입가를 닦았다.

"베이비 색스예요."

"만나서 반갑군요. 여기는 오래 계실 건가요?"

"글쎄. 아직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가너 씨가 절 도와주실 거예요. 이제 전 자유의 몸이거든요."

"그랬군요."

제이니는 살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가족은 이 근처에 사나 보죠?"

". 모두 블루스톤에 살고 있어요."

"좋겠군요. 내 가족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죠."

잠시 슬픈 표정을 짓고 있던 베이비 색스는 갑자기 두려움이 밀려오는 걸 느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아이들을 찾기 위한 방법은 무엇인지 암담하기만 했다.

제이니는 우유를 데워서 옥수수빵과 함께 들고와 몇 번이나 권했다. 그제서야 베이비 색스는 배가 많이 고프다는 걸 깨달았다.

"마음대로 먹어도 되나요?"

"걱정 말고 잡수세요."

"이 집에 또 누가 살고 있나요?"

"아니, 저 혼자 있어요. 우드라프라는 분이 있는데 일주일에 세 번 정도 들리곤 해요."

"혹시, 이 집 주인이 가정부 구하는 집을 알고 있었으면 좋겠어요."

"물어 볼께요. ! , 도살장에서 사람을 구한다고 하던데."

"어떤 일인데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고기를 마음대로 얻을 수 있고 시간당 25센트래요."

베이비 색스는 돈이라는 말에 감격해서 얼른 그 도살장의 위치를 물었다. 그때 대답을 듣기도 전에 보드윈 남매와 가너 씨가 들어섰다.

그 남매는 실제로 많이 닮아 있었고 눈같은 백발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얼굴이 젊어 보였다.

"뭐 좀 먹을 것을 드렸니?"

남자가 물었다.

", 주인님."

"일어서지 않아도 되요, 제니."

이번에는 여자가 베이비에게 말했다.

보드윈 남매는 베이비에게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고, 그녀는 도살장 얘기를 했다. 그러자 남자는 그곳에서 일하기에는 베이비가 너무 늙었다고 걱정해 주었다.

", 그녀는 구두 만드는 기술이 뛰어나요."

가너 씨가 갑자기 생각난 듯이 말하자 두 남매는 놀라는 눈치였다.

"누구에게 배웠죠?"

"같이 있던 노예에게서 배웠어요."

"부츠도 만들 수 있나요. 아니면 수선 정도만 할 수 있나요?"

"아무거나 다 할 수 있습니다."

여동생과 베이비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끼어들었다.

"그 정도면 얼마든지 돈을 벌 수 있겠군. 하지만 다른 일도 좀 없을까?"

"세탁물을 맡으면 어떨까요?"

"그렇게 하겠어요."

"1파운드당 25센트가 어떻겠소?"

"좋아요. 하지만 어디서 그 일을 할 수가 있을까요?"

", 그건 염려하지 않아도 돼, 제니. 이 훌륭한 분들이 너를 위해서 집을 한 채 마련해 두셨단다."

가너 씨는 자신도 기쁘다는 듯이 들떠서 그 집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그 집은 두 남매의 조부모가 이 마을로 이사 오기 전에 가지고 있던 것이었다. 최근까지도 흑인 다세대 주택으로 빌려주고 있었는데 모두 오하이오로 떠났기 때문에 비어 있다는 거였다. 혼자 살기에는 너무 넓을 거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베이비 색스는 도살장에 대한 미련은 가시지 않았지만 이 결정에 동의했다.

여동생은 가너 씨가 들려준 제니의 요리 솜씨 자랑을 듣고는 만족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사양하지 말고 얘기하세요. 난 노예제도를 절대 찬성할 수 없어요. 설령 가너 씨가 그 실천자라 해도요."

"제니, 이 두 분께 말좀 해드려. 내 농장에 오기 전에 그만한 대우를 받은 적이 있는지 말야."

"아니에요. 그만한 곳이 없었답니다."

"내 농장인 스위트 홈에는 얼마나 있었지?"

"십 년 정도요."

"배가 고팠던 적이 있었나?"

"없었습니다, 주인님."

"추위에 떨었던 일은?"

"없었습니다."

"난 할리의 청을 받아들여 너를 자유인으로 만들어 주었다. 맞나?"

"."

고분고분 대답을 하면서 베이비는 이 자가 할리를 죽을 때까지 일을 시킬 것을 생각하니 화가 나기도 했다.

얘기를 다 마치고 나자 백인 세 사람은 밖으로 나갔다.

"저녁 준비를 해야겠어요."

"내가 도와줄께."

우드라프가 베이비를 마차에 태우고 채찍을 가했을 때는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우드라프는 수염을 잔뜩 기른 젊은이로 수염 밑으로 화상의 흉터가 가리워져 있었다.

"이곳 태생인가요?"

베이비 색스가 그에게 물었다.

"아니, 버지니아요. 여기 온 지 이 년이 됐죠."

"그랬군요."

"지금 가고 있는 그 집은 아주 좋은 집이랍니다. 예전에는 아이들이 18명이나 되는 목사가 살고 있었죠."

"그런데 그들은 어디로 갔죠."

"일리노이로 갔어요. 그곳에는 상당히 많은 신도들이 있다나 봐요."

"여기에 교회가 있나요? 교회를 가본 지가 하도 오래돼서 아마 하느님께서 절 잊었을 거예요."

"그럼, 잘됐군요. 파이크 목사를 찾아가 보세요."

"그분은 글을 잘 쓸 수 있겠죠?"

"그야 물론이죠."

"난 아이들을 찾아야 한답니다."

그 후로 베이비 색스는 파이크 목사의 도움을 받아 아이들의 소식을 수소문했지만 절망적이고 슬픈 소식만 들려올 뿐이어서 더이상의 노력을 포기했다.

이 년 간 그녀는 세탁을 하고 구두를 고치고 야채밭을 일구고 통조림을 만드는 등의 일을 했다.

그러던 중 할리가 아내를 얻었고 아이도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 와중에서 베이비 색스는 혼자서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해 나갔다.

지금 베이비 색스는 야채밭에 서서 불길한 어떤 낌새를 느끼기 시작했고, 서서히 그것은 현실화되어 가고 있었다.

 

불길한 느낌을 주는 네 사람이 말을 타고 블루스톤에 들이닥쳤다. 블루스톤은 너무도 조용했기 때문에 그들은 이미 늦었다고 생각했다. 세 사람이 말에서 내렸고 한 사람은 안장에 앉은 채로 총을 겨누고 집 주위를 샅샅이 살폈다.

도망자들은 단숨에 달려와서 어딘가에서 웅크린 채 숨을 죽이고 있을 것이다. 예컨대 마룻바닥이나 식품 저장실, 또 굴뚝같은 곳에 숨는다. 가끔은 싱크대 안이나 건초더미 속에서도 발견된다.

이들은 일단 잡히고 나면 저항하지 않는다. 발버둥 쳐봐도 소용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을 잡으러 온 사람들도 함부로 그들을 죽이지는 않는다. 산 채로 잡아가서 주인에게 돌려줘야 하고 검둥이를 죽여 봤자 아무 이득도 없는 것이다.

그때 예닐곱 명의 흑인이 124번지를 향하여 오고 있는 게 보였다. 총을 가진 사나이들은 그들에게 멈추라고 소리쳤다. 그들 중 한 명은 집안을 엿보고 있었는데 목표물을 찾았는지 손가락으로 뒤뜰을 가리켰다. 그러나 둘씩 나뉘어져 각각 다른 쪽에서 집 뒤로 나아갔다.

뒤뜰에는 나이가 들고 실성한 듯이 보이는 검둥이 한 명이 도끼를 들고 서 있었다. 모자에는 꽃을 꽂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여자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총을 가진 사람들이 달려들어 그녀에게서 도끼를 빼앗았다. 그런 다음 그들은 다시 오두막으로 돌아왔다.

오두막 안에는 한 손으로는 피투성이의 아이를 가슴에 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 젖먹이 아이의 발꿈치를 만지며 서 있는 흑인 여인과 톱밥과 흙에 범벅이 되어 피를 흘리는 두 사내아이가 있었다.

여인은 그 침입자들에게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그녀가 자기가 안고 있는 갓난애를 벽에 내동댕이치려 하자 흑인 남자가 얼른 그 애를 나꿔챘다.

그 꼴을 보고 있노라니 도저히 이 검둥이들을 산 채로 데려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고양이처럼 울부짖고 있는 그 사내로부터 아이를 빼앗을 수도 있었지만 그 애를 데리고 갔을 때 누가 키워야 할지 몰랐고 실성한 듯한 여자 또한 데리고 갈 가치가 없어 보였다.

그중 한 명은 실성한 여자에게서 젖을 먹고 자란 자였다.

그들은 경악에 찬 눈초리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이 보안관에게 물었다.

"왜 저 여자는 이런 짓을 했을까요?"

보안관이 돌아다보며 다른 세 명에게 말했다.

"당신들은 모두 철수하는 편이 좋겠소. 이제 내 일만 남은 것 같으니까 말이오."

그러자 '선생'이라 불리우는 자가 들고 있던 모자로 허벅지를 탁 치면서 퉤퉤 하고 침을 뱉었다. 나머지 두 명과 함께 뒷걸음질을 치면서 물러났다.

세 명의 사내는 모자에 꽃을 꽂고 있는 여인네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들은 도망친 여자 노예를 태워 갈 노새를 떼어버린 뒤 태양을 머리에 이고 서둘러 돌아갔다.

그 소굴에 혼자 남아 있던 보안관은 정말이지 밖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사내의 팔에 안긴 아이가 잠이 들어 새근거리는 소리를 빼고는 모두 얼어붙은 듯이 조용해졌다.

"당신은 연행한다. 얌전히 따라와라, 그러면 너를 포박하지 않겠다."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보안관이 참다못해 그녀의 손을 묶으려고 할 때 뒤에 웬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 그림자는 모자에 꽃을 꽂은 여인네였다.

 

베이비 색스는 바닥에 나뒹굴어져 있는 아이들이 살아 있는지 확인해 보았다. 그때 흑인 사내가 세스에게 다가가 말했다.

"세스, 내가 안고 있는 아이를 받아 줘."

그녀는 갓난애를 한 번 쳐다본 뒤 신음소리를 냈다.

보안관은 마차를 부르기 위해 햇빛 속의 거리로 나갔다.

베이비 색스는 사내애들을 씻어 주면서 용서해 달라고 계속 속삭였다. 그리고 나서 세스의 상처를 치료하고 있을 때 스탭은 갓난애가 젖을 먹을 시간이 되었음을 알았다.

"막내에게 젖을 물려라."

세스는 안고 있던 이미 죽어버린 아이를 놓지 않은 채 갓난애에게 손을 뻗었다. 베이비 색스가 그것을 보자 소리쳤다.

"한 명씩 젖을 먹여야지."

베이비 색스는 두 아이를 바꾸었다. 일단 죽은 아이를 거실로 옮겨 놓은 다음, 세스가 피가 얼룩진 젖꼭지를 그대로 아이에게 물리는 것을 보고는 주먹으로 힘껏 탁자를 내리쳤다.

"더러운 것을 닦아 내고 젖을 먹여라."

두 사람은 한동안 말다툼을 했다. 그들은 둘 다 그 갓난애를 생각해서 싸웠다. 드디어 베이비 색스가 피 웅덩이에 미끄러져 버리자 싸움이 끝이 났다. 베이비 색스가 진 것이다. 그래서 갓난아이 덴버는 언니의 피와 함께 엄마의 젖을 먹게 되었다.

밖에서는 이륜마차를 끌고 돌아온 보안관의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 소동을 지켜보려는 군중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덴버를 안은 세스의 모습이 군중들 앞에 나타났다. 그녀가 마차에 오르자 쪽빛 하늘을 등지고 앉은 그녀의 옆얼굴이 티 없이 맑아 보였다.

마차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여 서쪽으로 향해 나아갔다.

군중들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베이비 색스는 마차를 쫓아가며 안된다고 소리쳤다. 그러나 눈 깜짝할 사이에 마차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대신에 사륜 마차가 덜컹거리며 다가와서 그녀 앞에 섰다. 빨강 머리 소년과 노랑머리 소녀가 그 마차에서 뛰어 내려 사람들은 헤집고 달려왔다.

"엄마가 이 구두를 수요일까지 고쳐 달래, 베이비."

사내아이로부터 구두를 받아들고 나서는 그녀는 계속 중얼거렸다.

"용서해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보안관이 이끄는 이륜마차가 블루스톤 거리를 지나가고 있었다. 마차 안에는 피얼룩이 빳빳하게 말라붙은 옷을 입고 앉아 있는 세스의 모습이 마치 수의에 싸인 시체처럼 보였다.

 

돼지가 운반 도로에서 마구 울부짖었다. 오늘도 하루 종일 포올 디와 스탭을 포함한 스무 명의 사내들이 돼지들을 배에서 육지로 끌어 내렸고 다시 차로 몰아갔다. 이 차로 돼지들은 도살장으로 실려 가는 것이다.

밀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서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세인트루이스나 시카고 등에서는 돈육 사업에 파고들었다. 그래서 겨울 동안에 떠돌이들은 쉽게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포올 디는 아주 훌륭한 일꾼이었다. 그는 일을 마치고 나서 손이 닿는 곳은 모두 돼지똥을 닦아냈다고 생각했는데도 장화에 똥이 조금 남아 있었다. 집에 돌아가기 위해서 포올 디는 대개 장화를 창고 한쪽에 벗어두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뒤 운동화를 신는다.

돼지가 우글대는 곳에서 백 야드쯤 떨어진 어느 창고 뒤에 두 사내가 서 있었다.

스탭은 포올 디에게 신문 한 장을 내밀었다. 그곳에는 세스와 꼭 닮은 여자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입은 닮아 있지 않았다.

"이건 그녀의 입이 아냐."

포올 디는 스탭의 손에서 신문지를 나꿔챘다. 글자는 봐도 소용이 없었기 때문에 그림만 보면서 연신 입이 아니라고 중얼거렸다.

신문에 검둥이의 얼굴이 실리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들은 그 신문을 본 순간 뭔지 모를 불안이 솟아올랐다.

검둥이가 피살됐다거나 사기를 당했다고 해도 신문에 실릴 수는 없었다. 이런 일들은 기사거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인들의 관심을 끌 만한 흑인의 기사라니 얼마나 진귀한 것일까?

입은 세스와 다르게 생겼지만 거의 세스를 닮은 이 여자는 누구일까? 세스에게도 이 여자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갸우뚱하는 버릇이 있었으며 그러한 버릇이 때로는 사랑스럽게 보일 때도 있었다.

"당신은 내가 그녀를 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을 잊었나 보군."

포올 디가 말했다.

"켄터키에 있을 때부터였지. 그녀가 결혼을 하기 전부터야. 자신 있게 말하는데 이것은 그녀의 입과는 달라, 닮았을지는 모르지만 말야."

스탭은 더 이상 말도 하지 않고 포올 디가 읽지 못하는 활자를 읽어 나갔다. 스탭은 기사를 다 읽고 난 뒤 18년 전의 사건을 기억해냈다. 베이비 색스와 자신이 뭔가 막연한 불안을 느끼고 있을 때 영리한 젊은 노예는 이미 어떤 불길한 방문을 알아차렸고 오두막으로 달려가 아이를 살해한 것이다.

 

"내가 이 집에 도착했을 때 그 애는 이미 기어 다니고 있었어요. 그래서 계단에서 구르지나 않을까 항상 신경을 써야 했죠. 그때는 지금보다 걸음마를 배우는 시기가 늦었답니다. 그리고 9개월이 될 때까지도 하워드는 머리를 꼿꼿하게 세우지 못했조. 베이비 색스는 음식 탓이라고 했어요. 그 애는 모유만 먹고 있었거든요."

얘기를 하면서 세스는 계속 온 방을 빙빙 돌면서 왔다 갔다 했다.

포올 디는 소파에 앉아 그녀가 방안을 천천히 돌고 있는 걸 지켜보았다. 때때로 그녀는 양손을 등 뒤로 맞잡기도 하고 양귀를 쥐거나, 입을 막기도 했고 팔짱을 끼기도 했다.

"프리스 할머니를 기억하세요? 가너 씨는 제가 아이를 낳을 때마다 남자들을 시켜 그녀를 데려오게 했잖아요. 전 그분을 만나고 싶었어요. 제겐 아무도 의논할 사람이 없었거든요. 그 애는 기어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계단을 몹시 좋아했어요. 그래서 계단에 페인트칠을 했죠."

세스는 그때의 일을 회상하며 미소지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한숨을 내쉬고는 계속해서 방을 빙빙 돌았다.

포올 디는 현기증을 느꼈다. 처음에는 그녀가 자기 주위를 빙빙 돌았기 때문이라고 느꼈으나 알고 보니 그녀의 목소리로 인한 것이었다. 그녀가 말하는 것을 토막으로밖에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드디어 그는 구겨진 종이를 앞으로 내밀었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그는 속으로 다른 흑인의 얼굴을 실어야 하는 건데 잘못해서 세스의 얼굴이 실린 거라고 농담을 할까 했다. 그래서 그녀가 웃음을 터뜨리면 그는 덩달아서 '놀랬지?' 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그러면 그녀는 낄낄대면서 '스탭의 머리가 돌았나 봐요. 완전히 돌았어요' 라고 말할 것이라고.

그러나 그녀는 그 종잇조각을 신중하게 쳐다본 다음 그를 내려다보았다. 포올 디는 그때까지도 미소를 머금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세스는 그 미소를 본 순간 베이비 색스에게도 비밀로 해두었던 사실을 얘기해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 미소뿐만 아니라 그의 눈에 사랑이 가득차 보였기 때문이다. 마치 순진한 망아지의 눈 같기도 하고 어린이의 눈빛 같기도 했다. 자기의 사랑을 상대방이 받아 주지 않더라도 괜찮다는 의미처럼 보이기도 했다.

세스는 고작 75개의 활자밖에 읽을 수 없어 그 의미를 잘 알 수 없었으나 자신의 설명이 더 설득력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위트 홈이 어떤 곳이었는지는 새삼스레 당신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그러나 제가 그곳에서 도망쳤을 때의 사정은 당신도 모르실 테니 얘길 하겠어요."

그녀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곰곰이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난 해냈어요. 자식들도 한 명도 빠짐없이 도망치게 했다구요. 그것도 할리의 도움 없이 말예요. 제가 직접 결정했고 실행한 거예요. 그렇게 혼자 스스로 해본 일은 처음이었어요. 우리들은 이곳까지 도망쳐 왔어요 그 애들을 난 것도 저였고 또 도망치게 한 것도 저였어요. 우연히 그렇게 된 건 아니라구요. 물론 도움은 받았지만 제가 한 일이었어요. 그리고 그때 저는 이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어찌나 좋았던지, 정말 살아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이곳에 온 다음에 저는 그애들을 더욱 사랑해줬어요. 포올, 저는 양팔을 벌려 그 애들 전부를 안을 수 있었어요. 켄터키에서는 그 애들을 '내 자식'으로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제대로 사랑을 줄 수가 없었던 거예요. 그런데 처음 이곳에 도착해 보니 정말로 사랑하고픈 사람이 없었어요. 알겠어요? 포올."

포올 디는 세스가 자기한테서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말없이 앉아 있었지만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통렬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조지아주에서 지내면서 그는 비둘기의 웃음소리조차 들을 권리가 없었고, 모든 것들은 백인들만의 소유이자 권리였다. 그들은 총을 가지고 있었고 그중에는 어린 소년들도 끼어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한 놈도 남김없이 나뭇가지 꺾듯 꺾어버릴 수도 있었으나 총을 위안으로 삼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에는 오히려 연민을 느껴야 했다.

사랑도 몰래 숨어서 나누었다. 그들은 하늘의 별 중에서 유난히 빛나는 것을 골라 각각 자신의 별이라 이름지었다. 잠을 잘 때는 연인이 바라볼 수 있게 머리를 높이 올려놓고 잤고, 새벽녘에는 사슬에 발을 매인 사람들 사이로 하늘에서 반짝이는 연인의 별을 수줍게 훔쳐보았다.

그 이상으로 사랑을 나눌 수가 없었다. 눈에 띄게 되면 그들의 몸은 두 동강이 나곤 했으니까.

포올 디는 세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충분히 알고도 남았다. 사랑하고 싶은 것을 사랑할 수 있는 장소. 즉 욕망을 가지는 데 허가가 필요치 않은 장소야말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세스는 말하고자 하는 요점에서 벗어나 자꾸만 새로운 것들을 이야기했다.

"가너 부인이 준 헝겊이 있었어요. 옥양목이었는데 줄무늬가 있었고 그 무늬 사이로 작은 꽃들이 흩어져 있는 것이요. 그것으로는 머릿수건밖에는 만들 수가 없었죠. 하지만 전 그것으로 딸에게 원피스를 만들어 주고 싶었어요. 줄곧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지냈어요. 꼭 만들어 주려고 했는데 그것을 놔두고 왔지 뭐예요. 얼마나 바보 같은지. 이곳에 도착한 후로는 베이비 색스가 가지고 있던 천으로 별로 맘에 들지 않는 옷을 지어줄 수밖에 없었고요."

"포올, 제가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를 알게된 즐거움 때문이에요. 그때 저는 그런 기븜을 헛되게 할 수가 없었던 거예요. 내 아이들이 누군가로부터 감시당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게 견딜 수가 었었어요. 결코 그렇게 내버려 둘 순 없었다구요."

이렇게 말하면서 세스는 사건의 요점을 꼬집어서 얘기할 수가 없음을 알았다. 자신이 아무리 진실을 이야기하더라도 상대방이 알아듣지 못한다면 거듭해서 얘기를 해줘도 소용이 었는 것이다.

진실은 단순하여 우물에 매달린 밧줄과 같이 길게 계속되는 기록은 아니다.

단순한 것이다. , 야채밭에 쪼그리고 앉아 있을 때 말발굽 소리를 들었고 '선생'이란 자의 모자가 보였다. 순간 벌새의 날개짓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뾰족한 부리로 목과 머리를 쪼아대기 시작했다. 얼굴로 피가 흘러내렸고 그녀는 오로지 '싫다'라는 말이 가슴에서 밀려 나올 뿐이었다.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서 달렸다. 자기의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아름다운 분신들을 한손으로는 밀고 다른 한 손으로는 끌어안고서 아무도 이 아이들에게 해를 입힐 수 없는 저편으로 가려고 발버둥 쳤다. 그래 저편 어디엔가 세상 밖으로 간다면 모두 안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벌새의 날개짓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세스의 주위를 빙빙 돌면서 말을 하다가 멈춰서서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124번지가 연락소처럼 되어 사람들이 뻔질나게 드나들고 있을 때는 앞뜰에 목책이 둘러쳐져 있었고 빗장이 달린 문이 었었다. 그 시절을 회상하고 있었다.

어느날 백인 소년들이 몰려와 목책을 쓰러뜨리고 말뚝을 뽑아 문을 부쉈다. 124번지는 황량한 모습으로 변해버렸다. 그때 세스는 그들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세스는 유치장에서 돌아왔을 때 목책이 없어진 것을 처음으로 보았다. 그것이 오히려 그녀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지난날 놈들이 타고 온 말을 그곳에 매어 두었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선생'이란 자의 팔 안에서 갓난아기는 헐떡거리다가 숨을 거두었다.

"저는 그놈이 그 애에게 손도 못 대게 했어요."

옛날 그 목책이 있던 근처를 바라보면서 세스는 말을 이었다.

"애들을 모아 안전한 장소로 숨겼어요."

포올 디는 머릿속이 술렁거렸지만 그녀가 '안전'이라는 말을 특히 강조하는 것을 놓치지 않고 들었다. 문득 이 여인이 바라는 곳이 124번지에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이 집에 첫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 그는 이 집을 안전하게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실행하기 시작했다.

그가 찾아오기 전에 세스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렇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달리 살길이 없었으므로 124번지를 무력하게 내버려 둔 것이라고. 남편도, 자식들도, 시어머니도 죽어 없어진 뒤 정신이 약간 이상한 딸애 하나와 임시방편으로 이 집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할리의 연인이었고 쏠 듯이 매서운 눈매을 가졌던 스위트 홈 농장의 한 여자 노예는 할리와 마찬가지로 온순하고 수줍음을 잘 타고, 일밖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였다.

그런데 124번지에 있는 세스는 뭔가 좀 특별해 보였다. 그녀는 집안에 유령이 있다 하여도 상관하지 않는 그런 여인이었다.

그 여인도 다른 여인처럼 사랑을 이야기했고, 애기의 옷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다간 그녀는 가슴을 도려내는 충격을 주는 것이었다.

이곳에서 본 세스는 아주 낯선 사람이 되어 분별력조차 갖고 있지 않았다.

돌연 포올 디는 스탭이 알려주고자 노렸했던 것을 이해할 수 있을 듯했다. 세스가 범한 행동보다도 중대한 것은 그녀가 자기의 권리라고 주장하는 것들이 도리에 어긋난다는 사실이었다.

"당신의 사랑은 너무 짙어."

오랜만에 입을 연 포올 디는 말을 끊고 그녀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걸 느꼈다.

"너무 짙다고요?"

그녀는 무심결에 이 말을 뱉고는 옛날 베이비 색스가 큰 쇠뭉치로 침엽수의 열매를 떨어뜨리던 '개간지'의 일을 회상했다.

"사랑을 하려면 짙게 해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안하는 게 나아요."

"그래, 하지만 사랑은 아무것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어. 그렇지 않아?"

"그렇지 않아요, 사랑은 도움을 주었어요."

"어떤 식으로? 딸애 한 명은 죽었고, 한 명은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아? 사랑이 어떤 식으로 도움을 주었다는 거지?"

"아이들은 스위트 홈에서는 살고 있지 않아요. '선생'이란 자가 그 애들을 잡아 갈 수가 없었던 거예요."

"그것보다 더 나쁜 일이 있을지도 모르지 않소."

"미래의 일을 예측할 수는 없는 일예요. 눈앞의 것을 보고 내가 두렵다고 느끼는 것으로부터 아이들을 지키는 것이 내가 할 일이에요. 난 그렇게 했어요."

"길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뭔가 다른 길이..."

"어떤?"

순간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나중에 포올 디는 자기가 어째서 그런 말을 했을까 후회했다.

포올 디는 곧 모자를 쓰지는 않았다. 이런 식으로 나가버리면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게 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는 모자를 만지작거리며 망설이고 있었다. 결국 일어서서 계단을 올려다보았다. 맨발로 그곳에 서 있는 세스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천천히 문으로 나와 늦게 돌아올 테니까 먼저 저녁을 먹으라고 일러두고 모자를 썼다.

세스는 그의 말을 듣고 친절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가 "안녕"이라고 말했다면 그녀는 견디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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