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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까레니나 3부

세르게이 아바노비치 꼬즈니셰프는 정신노동을 좀 쉬고 휴식을 취하고자, 통상 그랬듯이 해외로 나가서 원기를 회복하는 대신 5월 말에 시골의 동생 집으로 왔다. 그의 신념에 따르면 최고의 생활은 시골에서의 일상이었다. 바로 이 생활을 만끽하기 위해 그는 지금 동생 집으로 온 것이다. 꼰스딴찐 레빈은 무척이나 기뻤다. 더군다나 이번 여름에 니꼴라이 형이 올 거라는 기대는 이미 접은 터였다. 하지만 세르게이 이바노비치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에도 불구하고, 꼰스딴찐 레빈은 시골에서 형과 함께 지내는 게 불편했다. 시골을 대하는 형의 태도가 그에게는 거북하게 여겨졌으며, 심지어 불쾌하기까지 했다. 꼰스딴찐 레빈에게 시골은 생활의 터전, 즉 기쁨과 고통과 노동의 터전이었다. 반면 세르게이 이바노비치에게 시골은 노동으로부터의 휴식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효용을 자각하며 기꺼이 복용하는 퇴폐로부터의 해독제였다. 꼰스딴찐 레빈에게 시골은 의심할 바 없이 유용한 노동의 무대라는 점에서 좋은 것이었던 반면, 세르게이 이바노비치에게 시골은 거기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무엇보다도 좋았다. 게다가, 민중을 대하는 세르게이 이바노비치의 태도가 꼰스딴찐으로서는 다소 불쾌했다.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는 자신이 민중을 좋아하며 잘 안다고 말하곤 했다. 그는 농부들과 자주 대화를 나누면서도 위선을 떨거나 거드름을 피우는 일 없이 이야기를 잘 풀어가는 편이었는데, 매번 그러한 대화에서 민중에게 유리한 보편적인 결론들을 이끌어 냄으로써 자신이 민중을 잘 안다는 점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민중에 대한 그러한 태도가 꼰스딴찐 레빈에게는 마뜩잖았다. 꼰스딴찐 레빈에게 민중은 그저 공동 노동의 주된 참여자일 뿐이었다. 농부들에 대한 존경과, 그 스스로 말하듯 촌부였던 유모의 젖에서 빨아들인 게 분명한 농부들을 향한 피붙이와도 같은 애정에도 불구하고, 또 공동의 일에 함께 참여하는 사람으로서 때로는 그들의 힘과 온순함과 정의감에 매혹되다가도, 공동의 일에 있어 다른 자질들이 요구될 경우에는 그들의 무사태평과 방종, 음주벽과 거짓말에 아주 빈번하게 분노가 치밀기도 했다. 만일 그에게 민중을 사랑하느냐고 묻는다면, 꼰스딴찐 레빈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정말이지 알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 일반에 대해 그러하듯이, 그는 민중을 좋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했다. 물론 선량한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들을 싫어하기보다는 좋아했고, 따라서 민중에게 역시 그러했다. 그러나 민중을 특별한 그 무엇으로서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민중과 함께 살아왔고 그의 모든 이해관계가 민중과 얽혀 있었으며, 스스로 민중의 일부라고 여기는 사람으로서 자신과 민중에게서 그 어떠한 특별한 자질이나 결함을 발견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자신을 민중과 대립시키는 것 자체가 불가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주인이자 중재인, 그리고 중요하게 조언자로서(농부들은 그를 신뢰햇고, 그의 조언을 구하러 40베르스따가량 되는 거리를 걸어서 오곤 했다) 오래도록 농부들과 친밀한 관계를 이루어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민중들에 대해 그 어떤 명확한 견해도 갖고 있지 않았기에, 혹시 민중을 아느냐고 붇는다면 그는 민중을 사랑하느냐는 질문에서와 마찬가지로 대답하기가 난처했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 민중을 안다는 것은 사람을 안다고 하는 것과 똑같았다. 선량하고 흥미롭다고 여겨지는 농민들을 포함하여 온갖 부류의 사람들을 그는 늘 관찰하고 알려고 들었으며, 그들에게서 끊임없이 새로운 특징들을 발견하고 그들에 대한 기존의 생각을 바꾸어 새로운 견해를 정립하곤 했다.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는 그와 정반대였다. 시골 생활을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생활에 대한 대립물로서 좋아하고 예찬하듯이 그는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계급에 대한 대립물로서 민중들을 좋아했으며, 역시 매한가지로 민중을 사람들 일반에 대립되는 특정한 존재로 간주했다. 그의 체계적인 이성 속에는 민중적 삶의 일정한 형식이 구축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부분적으로 민중의 삶 자체에서 도출된 것이기도 했지만 대부분이 대립적 사고에서 이끌려 나온 것이었다. 그는 민중에 대한 자신의 견해와 그들에 대한 동정 어린 태도를 결코 바꾸려 들지 않았다.

민중에 대한 판단에 있어서 이견이 발생할 경우에는 늘 세르게이 이바노비치가 동생을 이겼으니, 그가 민중과 그들의 특징, 본성과 취향에 대한 일정한 개념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꼰스딴찐 레빈에게는 그 어떤 명료하고 항구적인 개념도 없었으므로 그러한 논쟁에서 언제나 자기모순을 드러내곤 했다.

세르게이 이바노비치에게 막냇동생은 (그의 프랑스어 표현에 따르면) '심성이 잘 닦인' 훌륭한 청년이었으나, 지성에 대해 말하자면 두뇌 회전이 빠르긴 하되 순간적인 인상에 사로잡히는 탓에 모순으로 가득 차 있는 청년이었다. 때때로 형으로서의 아량을 베풀어 동생에게 사물의 의미를 설명해 주곤 했지만, 논쟁에서는 그를 격파하는 게 너무 쉬워 별다른 만족을 얻을 수 없었다.

꼰스딴친 레빈은 형을 위대한 지성과 교양을 지닌 인간이자, 가장 고차원적인 의미에서 고상하며 공공선을 위해 일할 재능을 타고난 사람으로 여겼다. 그러나 나이를 먹으며 형을 더 가까이서 알아 갈수록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자신에겐 아예 존재하질 않는 그 공공선을 위한 활동 능력이 어쩌면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반대로 무언가의 결핍이라는 생각이 점점 더 자주 드는 것이었다. 선량하고 정직하며 고상한 열망과 취향의 결핍이 아닌 생명력의 결핍, 사람들이 '가슴'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 인간으로 하여금 상상할 수 있는 그 모든 무한한 삶의 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고 그것을 소망할 수 있게 만드는 어떤 갈망의 결핍이었다. 형을 알면 알수록 더 확실하게 드는 생각이 있었으니,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를 비롯하여 공공선을 위해 일하는 다른 수많은 활동가들은 가슴에서 우러나와 공공선에 애정을 쏟는 게 아니라, 그것이 좋은 일이라는 이성적인 판단이 들었기에 그 일에 종사한다는 것이었다. 세르게이 형이 공공선이라든가 영혼 불멸의 문제에 대해 체스 게임이나 신형 기계의 정교한 구조에 대한 관심만큼도 진심 어린 관심을 표하지 않는다는 점이 레빈으로 하여금 그러한 추정에 확신을 갖게 만들었다.

그것 말고도 꼰스딴친 레빈이 형과 함께 시골에 있는 게 불편한 까닭은 또 있었다. 농촌에서, 특히 여름이면 레빈은 하루 종일 농사일로 바쁜 데다가 할 일을 다 해내려면 기나긴 여름날이 부족할 지경인데,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는 그저 쉬기만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저술 작업에서 손을 놓고 휴식을 취하고 있을 지언정, 지적인 활동에 너무나 길들여져 있는 그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미려하고 간결한 형식으로 진술하기를 좋아했으며 누군가가 자신의 말을 들어 주기를 원했다. 그의 가장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청자는 동생이었기에, 형제간의 다정하고 소탈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꼰스딴친 레빈은 형을 혼자 두는 게 마음에 걸렸다.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는 햇볕 내리쬐는 풀밭에 드러눈운 채 일광욕을 하면서 한가롭게 수다 떨기를 좋아했다.

"넌 믿지 못할 게다." 그가 동생에게 말했다.

"이 소러시아적인 게으름이 나에게 얼마나 큰 즐거움인지 말이야. 마치 머릿속이 텅 빈 듯, 생각이라곤 한 톨도 없어진단다."

그러나 꼰스딴친 레빈은 형이 하는 얘기를 들으며 앉아 있기가 무료했다. 특히나 그가 없으면 농부들이 갈지도 않은 밭에 거름을 나를 테고, 곁에서 지켜보지 않으면 과연 그걸 또 어떻게 뿌려 버릴지 모를 일이었다. 혹은 쟁기의 앞날을 나사로 조이지도 않고 그대로 치워 버리고는, 쟁기란 건 도무지 실속 없는 물건이며 구식 쟁기가 낫다는 등 하고 떠들어 댈 게 뻔했다.

"무더위에 돌아다니는 건 이제 그만하지그러냐."

"아니, 잠시 사무소에 들러야 해서요." 이렇게 대꾸하고서도 레빈은 도망치듯 들판으로 달려갔다.

6월 초에 레빈의 유모이자 가정부인 아가피야 미할리로부브나가 소금에 갓 절인 버섯 단지를 지하 저장고로 가져가다가 미끄러져 넘어지는 바람에 손목을 접질리는 소고가 났다. 학부 과정을 갓 졸업한 젊고 수다스러운 지방 의사가 와서는 손을 진찰하더니 탈골은 아니라면서 습포를 대주었다. 점심 식사를 하고 가기로 한 그는 보아하니 저명한 세르게이 이바노비치 꼬즈니셰프와의 대화를 즐기는 눈치였으니, 사물에 대한 자신의 교양 있는 시각을 피력하고자 지방 행정의 조악한 현황에 관해 불만을 토로하면서 군()의 온갖 풍문들을 늘어놓는 것이었다.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는 그의 얘기를 주의 깊게 듣더니 이것저것 캐묻기 시작했다. 새로운 청자에 의해 고무된 그는 열을 내며 신나게 이야기를 늘어놓은 뒤 몇 가지 예리하고 묵직한 논평을 덧붙여 젊은 의사로부터 정중하게 그 진가를 인정받고는 동생 레빈이 익히 알고 있는, 활기를 띤 멋진 대화를 마친 뒤면 으레 솟아나는 예의 쾌활한 기분에 젖어 들었다. 의사가 떠나자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는 낚시 도구를 챙겨서 강으로 가고자 했다. 그는 낚시를 좋아했으며, 자신이 그렇게 바보 같은 소일거리를 좋아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마저 느끼는 듯했다.

마침 경작지와 목초지에 나가 봐야 했던 터라, 꼰스딴친 레빈은 형을 1인용 마차에 태워 데려다주겠다고 흔쾌히 나섰다.

해마다 반복되며 농민들의 온 힘을 불러 모으는 추수를 앞두고서 농사일에 짧은 휴식기가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곡물들은 풍작이었고, 이슬이 내리는 짧은 밤을 동반한 무덥고 쨍쨍한 여름날들이 이어졌다.

초원으로 가기 위해 두 형제는 숲을 지나가야만 했다.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는 가는 내내 나뭇잎이 무성한 숲의 아름다움에 탄성을 내지르며, 노란 턱잎들로 알록달록해진 채 꽃을 막 피우려는 보리수 고목의 그늘진 형상을 가리키거나 올해 돋아나 에메랄드처럼 빛나는 어린 나무의 떡잎들을 손짓하곤 했다. 꼰스딴친 레빈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 얘기하거나 듣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말은 오히려 눈에 보이는 것으로부터 아름다움을 앗아갔다. 그는 형의 말에 ', ' 하며 맞장구를 치고는 자기도 모르게 딴생각에 잠겼다. 숲을 다 지나왔을 때 레빈의 관심은 온통 언덕배기의 묵정밭의 풍경에 쏠려 있었다. 거기에선 풀들이 누르스름해져 가고 있었고, 거친 땅이 격자 모양으로 구획되어 있었으며, 거름 더미가 비스듬히 쌓여 있는 곳도 있었고, 갈아엎어진 데도 있었다. 들녘으로 수레가 줄지어 가고 있었다. 레빈은 수레를 세어 보고는 필요한 만큼 내왔다는 생각에 만족스러워졌다. 곧 초원이 논앞에 펼쳐지자 그의 생각은 풀베기로 옮겨 갔다. 건초를 수확할 때마다 그는 특별히 자신의 아픈 곳을 찌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초원에 다다르자 레빈은 말을 멈춰 세웠다.

빽빽한 나무숲의 풀 밑에 아침 이슬이 아직 남아 있었다.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는 발을 적시고 싶지 않아, 마차로 초원을 가로질러 종종 농어가 낚이는 버드나무 숲까지 데려가 달라고 했다. 풀이 짓밟히는 게 안타깝기 짝이 없었지만 꼰스딴친 레빈은 풀밭 속으로 마차를 끌고 갔다. 키 큰 풀들이 마차 바퀴와 말의 다리에 부드럽게 휘감겨서는 축축한 바큇살과 바퀴통에 풀씨를 묻혀 놓았다.

형은 버드나무 숲 아래 앉아 낚시 도구를 풀었고, 레빈은 말을 끌어다가 묶은 뒤 바람에도 꿈쩍 않는 광대한 회녹색 초원의 바다로 걸어 들어갔다. 물에 잠긴 풀밭에 들어서니 다 익어 벌어진 씨앗들을 매단 비단결 같은 풀들이 허리춤까지 올라왔다.

초원을 가로질러 길가로 나온 꼰스딴찐 레빈은 퉁퉁 부어오른 눈으로 분봉용 벌통을 나르는 노인과 마주쳤다.

"어찌 됐나? 잡았는가, 포미치?" 그가 물었다.

"말도 마십시오, 꼰스딴찐 드미뜨리치! 자기 것은 잘 간수해야 하는 데 말입니다. 이번에 도망친 게 벌써 두 번째랍니다......고맙게도 사람들이 쫓아가 줬지요. 나리의 밭을 갈다가요. 말을 풀어서 쫓아갔습죠........."

"그래, 자네 생각은 어떤가, 포미치. 풀베기를 해야 할까, 아님 좀 더 기다릴까?"

"무슨 그런 말씀을! 성 베드로 축일까지는 기다려야 한다는 게 저희 생각입니다. 나리께서는 늘 좀 일찍 풀베기를 하시는 편이죠? 참말이지, 하느님께서 좋은 풀들을 주실 겁니다. 가죽들은 너른 풀밭을 누빌 테고요."

"날씨는 어떨 것 같나?"

"그거야 하느님이 알아서 하시겠지만, 날씨도 아마 괜찮을 겁니다."

레빈은 형에게 다가갔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지만,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는 무료해하기는커녕 오히려 최상의 기분인 것 같았다. 레빈의 눈에는 의사와의 대화에 자극을 받아 이야기를 하고 싶어 안달하는 형의 속내가 빤히 보였다. 하지만 그는 어서 집으로 가 내일 풀을 벨 일꾼들을 고용하는 일을 처리하여 자신의 신경을 온통 사로잡고 있는 풀베기에 관한 망설임을 해결하고 싶을 뿐이었다.

"어때요, 그만 갈까요?" 그가 물었다.

"어딜 그리 서둘러? 좀 더 앉아 있어 보자고. 그런데 너 아주 흠뻑 젖었구나! 고기는 못 잡았지만, 그래도 참 좋구나. 어떤 취미든 자연과 함끼ㅔ라면 좋은 거지. 이 강철 빛깔의 물은 또 얼마나 멋지냐!"

형이 말했다.

"이 초원의 기슭은 언제나 나에게 수수께끼 하나를 상기시켜 준단다. 혹시 알고 있니? 풀들이 물에게 이렇게 말하지. '우리는 흔들릴 거예요, 흔들릴 거예요.'"

"그런 수수께끼는 모르겠는데요." 레빈이 시무룩하게 대꾸했다.

"저기 말이다, 실은 네 생각을 하고 있었단다." 세르게이 이바노비치가 말했다.

"그 의사가 내게 말했다시피, 이 군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더구나. 그 친구 꽤나 똘똘한 젊은이더군, 너한테 이미 얘기한 바 있고 지금 다시 말하는데, 네가 젬스뜨보에 나가지 않고 지방 행정에도 관여하지 않는 건 바람직하지 못해. 생각이 제대로 잡힌 사람들이 다 나가 버리면, 모든 일이 어찌 되어 갈지 알 게 뭐냐. 우리가 내는 세금은 봉급으로 다 나가는데 학교도, 간호장도, 산파도, 약국도 없으니 도대체가 아무것도 없잖느냐."

"저도 시도해 보긴 했잖습니까." 레빈이 마지못해 조용히 대꾸했다.

"할 수가 없는걸요! 뭐 어쩌겠어요!"

"아니, 왜 할 수가 없다는 거냐? 솔직히 이해할 수가 없구나. 무관심과 무능력일 리는 없고, 정말이지 단순히 게으름 때문인 거냐?"

"그도 저도 다 아닙니다. 애를 써봤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것 뿐이에요."

레빈은 형의 말에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강 건너 전답을 바라보던 중 무언가 거무스름한 게 그의 눈에 띄었는데, 그것이 말인지 말에 탄 영지 관리인인지 정확히 분간이 되지 않았다.

"도대체 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단 말이냐? 시도를 해봤지만 네 식대로는 해낼 수가 없었으니 그냥 굴복해 버리겠다는 거겠지. 너는 자존심도 없는 거냐?"

"자존심이라니요." 형의 말에 비위가 상한 레빈이 대꾸했다.

"이해가 안 가는군요. 대학에서 다른 학생들은 다 미적분을 이해하는데 나만 모른다고 한다면, 그런 건 자존심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이 경우는 달라요. 그 사업을 위해 특정한 능력을 갖출 필요가 있는지, 무엇보다도 그 모든 사업들이 아주 중요한 것인지 먼저 확신을 가져야 한다는 겁니다."

"무슨 소릴! 그럼 그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거냐?" 세르게이 이바노비치가 말했다. 그는 자신이 종사하는 일을 동생은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에, 특히 동생이 자신이 하는 말을 죄다 흘려듣는 것에 발끈했다.

"중요하게 여겨지질 않아요. 끌리지가 않는다고요. 대체 저보고 어쩌라고요....?" 레빈이 대답했다. 그는 저쪽에 보이는 게 영지 관리인임을 알아보았다. 밭갈이를 중단시키고 일군들을 보내려는 게 분명했다. 일꾼들이 쟁기를 엎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로 벌써 다 갈았단 말이야?' 그가 생각했다.

", 내 말 좀 들어 봐라." 잘생기고 지적인 얼굴을 찌푸리면서 형이 말했다.

"모든 일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괴짜처럼 순수한 사람이 되거나 허위를 싫어하는 건 좋단 말이지. 그런 건 나도 다 이해하니까. 하지만 네가 하는 말은, 의미가 없거나 아니면 아주 나쁜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 내가 단언하다시피, 네가 사랑하는 민중이....."

'나는 단언한 적 없어.' 꼰스딴찐 레빈은 생각했다.

".......아무 도움도 못 받고 죽어 가는데, 어떻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가 있지? 무식한 아낙들이 아이들을 혹사시키고 민중들은 무지몽매에 허덕이며 관리들의 횡포에 놀아나는데, 네 손에는 그들을 도울 수단이 주어져 있단 말이다. 그런데도 너는 그들을 도울 생각이 없다는 거 아니야. 왜냐하면 그건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리하여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는 동생을 딜레마에 빠뜨렸다.

"네가 할 수 있는 그 모든 일을 인지하지 못할 만큼 네가 미성숙한 건지, 아니면 그 일을 하느라고 너 자신의 안온함이나 허영심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건지 모르겠구나." 결국 형의 얘기는 이러했으니 말이다.

꼰스딴찐 레빈은 그냥 굴복하거나 자신에게 공적인 일에 대한 애정이 결여되어 있음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 점이 그 자신이 화를 돋우고 모욕감을 불러일으켰다.

"둘 다겠죠."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저에게는 그런 일이 가능한 것으로 여겨지질 않아요....."

"아니, ? 예산을 잘 분배해서 의료 지원을 해주는 게 불가능하단 말이냐?"

"제가 보기엔 불가능해요......4천 평방베르스따나 되는 우리 군에서, 그것도 쌓인 얼음에, 눈보라에, 농번기까지 고려하면, 전 지역에 걸쳐 의료 지원을 시행하는 건 저로서는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게다가 저는 본래 의술이라는 걸 신뢰하지 않아요."

"잠깐만, 그건 틀린 생각이다.....수천 가지 예를 들 수 있어.....그럼 학교는 어떠냐?"

"학교가 왜 필요합니까?"

"무슨 소릴 하는 거냐? 아니, 교육의 유용성을 의심하나는 거냐? 교육이 너에게 좋은 것이라면 다른 누구에게도 좋은 것 아니겠어?"

윤리적으로 궁지에 몰린듯한 마음에, 꼰스딴찐 레빈은 발끈하여 자신도 모르게 공공의 일에 무관심해진 주된 이유를 말해 버리고 말았다.

"어쩌면 그 모든 게 좋은 건지도 모르죠. 하지만 내가 전혀 이용하지 않을 진료소의 설립을 내가 왜 신경 써야 합니까? 학교도 마찬가지예요. 내 아이들을 보내지도 않을 테고, 농노들도 자신의 아이들을 보내기 싫어하는데 말입니다. 나는 아직도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야 하는지 확신이 안 섭니다."

상황을 바라보는 이 예기치 못한 관점에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는 일순 어안이 벙벙했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새로운 공격 작전을 수립했다.

그는 말없이 낚싯대 하나를 꺼내 다시 물속에 던진 다음 미소를 지으며 동생을 쳐다보았다.

", 한 번 보자꾸나......첫째, 진료소는 필요해. 오늘만 해도 아가피야 미하일로브나를 위해서 지방 의사를 불러오지 않았냐."

"유모의 손은 결국 비뚤어지고 말 거예요."

"그건 아직 모를 일이고....그다음으로 교육받은 농부나 일꾼은 너에게 더더욱 필요하고 소중할거다."

"아니요, 길 가는 아무한테나 물어보라죠." 꼰스딴찐 레빈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교육받은 일꾼이 훨씬 형편없어요. 길을 고치지도 못하질 않나, 다리를 세울라치면 도둑질이나 일삼죠."

"하지만....." 세르게이 이바노비치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반론을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끊임도 없이 이 얘기에서 저 얘기로 건너뛰고, 아무런 연관도 없이 새로운 논거를 자꾸 들이대서 도무지 무엇에 대꾸를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는 경우에는 특히 그랬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야. , 그럼 너는 교육이 민중에게 유익하다는 건 인정하느냐?"

"인정합니다." 레빈이 무심결에 대답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대답했음을 깨달았다. 교육의 유익함을 인정한다면 자신이 한 말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헛소리였음을 스스로 입증하는 셈이었다. 어떻게 해서 입증이 되는 건지는 몰랐지만, 분명히 논리적으로 입증이 되리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논증을 기다리고 있었다.

논거는 꼰스딴찐 레빈이 기대한 것보다 훨씬 간단하게 도출되었다.

"교육이 유익하다는 걸 인정한다면......" 세르게이 이바노비치가 말했다.

"너는 정직한 사람으로서 그러한 사업에 애정과 공감을 갖지 않을 수 없을 테고, 따라서 그 사업을 위해서 일하지 않을 수 없을 거다."

"하지만 저는 그 사업이 좋은 일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아요." 꼰스딴찐 레빈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방금 네가 말하기를......"

"요컨대 그 일이 좋지도 않을뿐더러 가능하지도 않다는 생각이에요."

"그건 노력해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거다."

"글쎄요, 그렇다고 치죠." 레빈은 이렇게 대답했지만, 속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렇다고 치자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무엇 때문에 그 일에 신경을 써야 하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보다.....속 얘기들은 웬만큼 털어놓은 것 같으니, 이제 저에게 철학적인 관점에서 설명을 좀 해주세요." 레빈이 말했다.

"여기서 왜 철학이 거론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구나." 레빈이 듣기에 세르게이 이바노비치의 이 말은 마치 동생이 철학을 논할 권리를 인정할 수 없다는 투로 들렸다. 레빈은 화가 치밀었다.

"왜 그런지 말씀드리죠!" 그가 핏대를 올리며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제 생각에 우리 활동의 원동력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행복입니다. 그런데 작금의 지방 자치 제도에서 귀족으로서 저는 스스로의 행복에 득이 될만한 것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도로는 더 나아지지 않았고, 더 나아질 수도 없어요. 말들은 저를 태우고 끔찍한 길로 다닙니다. 의사와 진료소도 저에게는 필요 없습니다. 치안 판사도 필요 없고요. 저는 단 한 번도 치안판사를 찾아간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학교도 저에게 필요 없을 뿐만 아니라, 이미 형님께 말씀드린 것처럼 해롭기까지 하지요. 저에게 있어 지방 자치 제도는 1제샤찌나당 18꼬베이까씩 납부하고 하고, 읍내에 출장을 다니며 빈대가 들끓는 곳에서 잠을 자게 하고, 온갖 빌어먹을 헛소리들을 듣게 하는 부역과 납세의 의무일 뿐이라고요. 개인적인 관심이라곤 전혀 생기지가 않는단 말입니다."

"잠깐만....." 세르게이 이바노비치가 웃으면서 동생의 말을 끊었다. .

"개인적인 관심이 우리로 하여금 농노 해방을 위해 일하도록 부추기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그 일을 해내지 않았느냐."

"아니요." 한층도 열을 올리며 꼰스딴찐이 말을 가로챘다.

"농노 해방은 라는 문젭니다. 거기에는 개인적인 이해관계가 개입되어 있었어요. 우리들을, 모든 선량한 사람들을 짓누르던 그 멍에를 벗어던지고 싶었던 겁니다. 하지만 지방 의회 의원 노릇을 한다는 건, 내가 살지도 않는 도시에 변소 청소부가 몇 명이 필요한지, 어떻게 파이프를 설치할지 따위를 논의하는 거란 말입니다. 배심원이 되어서 햄을 훔친 농부를 재판하고, 변호사와 검사가 떠들어 대는 온갖 쓸데없는 소리를 여섯 시간 동안이나 내리 듣고, 판사가 내 식솔인 바보 알료시까 노인에게 '피고는 햄을 훔친 사실을 인정하십니까?'라고 물어보면 바보 알료시까가 '?'하고 되묻는 소리나 듣는 거라고요."

꼰스딴찐 레빈은 이미 요지에서 벗어나 알료시까와 판사를 묘사하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그 모든 게 이야기의 주제와 관련이 된다고 여겨져서였다.

하지만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까 네가 하고 싶은 얘기가 뭐냐?"

"제가 말하가고 싶은 건 단지, 나와......내 이익과 관련된 권리라면 언제든지 전력을 다해서 지켜 낼 거라는 겁니다. 언젠가 헌병들이 우리 대학생들을 수색하고 우리의 편지를 검열했을 때, 나는 그 권리들을, 내 자유와 교육받을 권리를 전력을 다해 지킬 각오가 되어 있었죠. 병역의 의무라면, 내 아이와 형제들, 나 자신의 운명과 관련된 것이 납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4만 루블이나 되는 지방 예산을 어떻게 분배할지 판단허거나, 바도 알료시까를 재판하는 일 따위는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단 말입니다."

마치 봇물이 터지듯 꼰스딴찐 레빈은 이야기를 쏟아 냈다.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는 빙그레 웃었다.

"내일 네가 재판을 받는다고 치자. 그럼 뭐냐, 구식 형사 재판소에ㅅ 재판을 받는 게 더 낫다는 거냐?"

"제가 재판을 받는 일은 없을 겁니다. 나는 아무도 칼로 찌르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으니까요!"

그는 또다시 주제와 하등 관련이 없는 얘기로 건너뛰었다.

"우리나라의 제도와 그 온갖 것들이 성령 강림 축일에 장식하는 자작나무 같은 거라고요. 유럽에서 저절로 조성된 숲을 흉내 내려는 짓이죠. 나는 그 자작나무에 정성껏 물을 줄 수도, 그 효력을 믿을 수도 없습니다!"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는 어깨를 으쓱이며, 이 논쟁에서 엉뚱하게 자작나무 얘기가 튀어나온 게 어이가 없다는 뜻을 내비쳤다. 하지만 사실 그는 동생이 자작나무를 가지고 무슨 얘기를 하려고 했는지 곧바로 알아차린 터였다.

", 이런 식으로는 얘기가 안 되지 않겠니."

하지만 꼰스딴찐 레빈은 스스로 잘 알고 있는 자신의 결함, 즉 공공선에 대한 무관심을 변호하고 싶었기에 이야기를 계속했다.

"제 생각은....." 꼰스딴찐이 말했다.

"그 어떤 활동도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근거하지 않을 경우 내실이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이건 보편적 진리라고요. 철학적인 진리 말입니다."

마치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 자기에게도 철학을 논할 권리가 있음을 보여 주려는 듯 그는 '철학적'이라는 단어를 힘주어 되풀이했다.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는 다시 한번 빙그레 웃었다.

'이 아이에게도 자신의 기호를 뒷받침하는 나름의 철학이 있군.'

"철학에 관한 이야기는 좀 제쳐 놓자꾸나." 그가 말했다.

"시대를 막론하고 철학의 주요 과제는 바로 개인의 이익과 공공의 이익간의 필연적인 연관성을 찾는 것이지. 하지만 문제는 이게 아니고 중요한 건 너의 비유를 바로잡아야겠다는 거야. 장식하는 자작나무가 아니라, 심고 파종하는 자작나무가 문제인 게지. 그러니까 그것들은 신중하게 다뤄야 하는 법이다. 자신들의 제도에서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을 감지할 수 잇는 감각이 있으며, 그것들을 소중히 여기는 민족만이 역사적인 민족으로 평가받을 수 있고, 오직 그런 민족에게만 미래가 열리는 법이야."

이렇게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는 꼰스딴찐 레빈에게는 낯선 역사 철학적 영역으로 논점을 돌림으로써 동생의 관점이 부당하다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했다.

"그 일이 못마땅하다는 말에 대해 한마디 하자면, 미안하지만 그게 바로 우리 러시아인들의 게으름이자 오만함이야. 나는 네가 일시적으로 잘못 판단했으며 곧 괜찬하질 거라고 확신한다."

꼰스딴찐은 말이 없었다. 만신창이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이 말하고자 했던 바를 형이 이해하지 못했음을 감지했다. 왜 이해하지 못하는 건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명료하게 할 줄 몰라서일까, 아니면 형이 이해하려 들지 않거나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일까. 하지만 그는 그 문제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형에게 반박하는 대신 전혀 다른 문제, 즉 자신의 개인적인 일에 몰입했다.

", 그럼 이만 가죠."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는 마지막 낚싯줄을 감고 꼰스딴찐은 말고삐를 풀었다. 둘은 마차를 타고 출발했다.

 

형과 대화를 나누는 내내 레빈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개인적인 일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작년 어느 날 풀베기하는 걸 보러 갔던 레빈은 영지 관리인에게 화를 낸 후에 스스로를 진정시키는 자신만의 방법을 시도했다. , 농부의 낫을 가로채서 직접 풀베기에 나선 것이다.

그 일이 마음에 들었던 그는 그 뒤로도 몇 차례나 풀베기에 나섰다. 집 앞의 풀들을 전부 베어 냈고, 올해 들어서면서 농부들과 함께 며칠 동안 온종일 풀베기를 하리라는 계획을 봄부터 세워 둔 터였다. 그런데 형이 온 뒤로 레빈은 풀베기를 할지 말지 망설이게 되었다. 며칠씩 온종일 형을 혼자 두기가 미안하기도 했고, 그 일을 한다고 형이 자신을 비웃지나 않을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풀밭을 지나가면서 풀베기의 감회를 떠올리고는 다시 그 일을 하겠노라고 거의 마음을 굳힌 참이었다. 형과 핏대를 올리며 이야기를 나눈 뒤 그는 자신의 계획을 재차 상기했다.

'육체노동이 필요해. 안 그랬다간 내 성격은 완전히 못 쓰게 되고 말거야.' 그는 이렇게 생각하고는 형과 농부들이 보는 앞이라 거북할지라도 풀베기를 하리라 결심했다.

저녁 무렵 꼰스딴찐 레빈은 사무소로 가서 이런 저런 일들을 처리한 뒤, 내일 풀베기를 할 일꾼들을 불러 모으도록 마을마다 사람을 보냈다. 제일 넓고 무성한 깔리노프 초원의 풀을 벨 작정이었다.

"내 낫은 찌뜨에게 보내 주시게. 망치질을 해서 내일 가져오도록. 아마 풀베기를 하게 될 거요." 그가 얼굴을 붉히지 않으려 애쓰며 말했다.

영지 관리인이 웃으면서 대꾸했다.

"분부대로 합죠."

저녁때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 레빈은 형에게 말했다.

"이제 날씨가 완연해요. 내일 풀베기를 시작하려고요."

"내가 그 일을 무척이나 좋아하지." 세르게이 이바노비치가 말했다.

"저야말로 엄청나게 좋아해요. 간혹 가다 농부들이랑 같이 직접 풀을 베기도 했어요. 내일은 하루종일 풀을 벨 생각이에요."

세르게이 이바노비치가 고개를 들고는 흥미로운 눈초리로 동생을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냐? 농부들과 나란히 하루 종일 풀베기를 하겠다는 거야?"

", 기분이 아주 좋더라고요."

"신체 단련으로서는 훌륭하다만, 견뎌 내지 못할 것 같은데." 세르게이 이바노비치의 말투에서 조롱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해본 적이 있다니까요. 처음에는 힘들지만 나중에는 완전히 몰입하게 되죠. 농부들한테 뒤지지 않을 겁니다......"

"그것참, 대단하구나! 그런데 말이다, 농부들은 그걸 대체 어떻게 보겠냐? 십중팔구 귀족 나리가 이상하게 군다고 비웃을 텐데."

"아니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 건 생각할 겨를도 없을 만큼 즐거우면서도 고된 노동이니까요."

"그러면 농부들이랑 밥은 어떻게 먹을 작정이냐? 풀밭으로 라피트[남프랑스산 적포도주의 한 종류]를 나르기도 그렇고 구운 칠면ㄴ조는 또 오죽 거북하겠어."

"그렇게는 아니고, 일꾼들이 쉬는 시간에 잠시 집으로 오려고요."

다음 날 아침 꼰스딴찐 레빈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지만 영지 경영과 관련된 일들을 처리하느라 지체하게 되었다. 그가 풀베기 장소에 도착했을 때 일꾼들은 이미 두 번째 구역을 베고 있었다.

세로 언덕 위에 서자 저 아래 이미 풀이 베어져 나간 초원의 그늘진 곳이 보였다. 잿빛으로 색이 바래는 구역들이, 맨 처음 풀베기가 시작된 곳에 일꾼들이 벗어 둔 검은색 웃옷 더미들과 함께 눈에 들어왔다.

점점 가까이 다가가니 줄지어서 나아가는 농부들의 기다란 행렬이 레빈의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누구는 웃옷을 걸치고 누구는 셔츠만 입은 채 각기 다르게 낫질을 하고 있었다. 그 수를 세어 보니 마흔두 명이었다.

그들은 오래된 저수지가 있는 울퉁불퉁한 초원의 저지대를 따라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다. 레빈은 자기 집 일꾼 몇몇을 알아보았다. 옷자락이 아주 긴셔츠를 입고서 꼬부랑 허리로 낫질을 하는 예르밀 영감도 있었고, 매 구역에서 맹렬한 기세로 낫질을 하는, 마부로 일했던 나이 어린 청년 바시까도 있었다. 작은 몸집에 빼빼 마른, 레빈의 풀베기 스승인 찌뜨도 함께였다. 그는 허리를 숙이지 않은 채 선두에 서서, 마치 낫을 가지고 놀듯이 자신의 널따란 구역을 베어 나갔다.

말에서 내린 레빈은 길가에 고삐를 묶고 찌드 곁으로 갔다. 그러자 그가 덤불 숲에서 낫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준비해 두었습니다. 나리. 면도날처럼 저절로 베일 겁니다."

찌드가 웃으면서 모자를 벗고는 그에게 낫을 건넸다.

레빈은 낫을 들고서 날을 시험해 보았다. 자기 구역의 풀베기를 마친 일꾼들이 땀에 젖은 채 쾌활한 표정으로, 하나둘씩 길가로 나와서는 살짝 웃으며 나리와 인사를 나누었다. 그들은 그를 바라만 볼 뿐, 턱수염 없는 주름진 얼굴에 양가죽 외투를 입은 키 큰 노인이 앞으로 나와 레빈에게 말을 걸 때까지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정신 바짝 차리십시오, 나리. 일단 시작한 뒤에는 뒤처지시면 안 됩니다." 그가 이렇게 말하자 일꾼들 사이에서 참았던 웃음이 터졌다.

"뒤처지지 않도록 노력하겠네." 그가 대답을 하고는 찌뜨의 뒤에 서서 일을 시작할 시점을 기다렸다.

"정신 바짝 차리십시오." 노인이 되풀이해서 말했다.

찌뜨가 자리를 비켜 주자 레빈이 그의 뒤를 따랐다. 길가에 자라는 짧은 풀들을 베어야 했는데, 오랫동안 풀을 베지 않은 데다 자신을 향한 일꾼들의 시선에 당혹스러워진 터라 처음에 레빈은 힘껏 낫질을 했지만 영 형편없었다. 그러자 등 뒤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다.

"낫을 제대로 쥐질 못했어. 자루가 너무 높잖아. 저런, 저 허리 굽힌 품새 좀 보게."

"발뒤꿈치에 힘을 더 주십시오." 다른 이가 말했다.

"괜찮아, 익숙해시실 걸세." 노인이 말을 이었다.

"보게, 이제 제대로 나아가기 시작하셨잖은가.....넓은 구역을 택하면 지치기 십상이지만.....주인 나리시니 그럴 리 없지. 스스로를 위해 애쓰실거야! 아니 저런, 저 모양하고는! 내 동생 같았으면 저렇게 했다가는 등짝을 후려쳤을걸."

풀은 아주 부르럽게 잘려 나갔다. 레빈은 주변에서 들리는 얘기에 아무런 대꾸도 않고, 최대한 풀을 잘 베려고 애쓰며 찌뜨의 뒤를 따랐다. 둘은 1백 보쯤 나아갔다. 찌뜨는 지친 기색이라고는 전혀 없이 쉬지 않고 앞으로 향했다. 하지만 벌써 레빈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도 지쳐 버린 것이다.

마지막 힘으로 낫질을 하고 있다고 느낀 그는 찌뜨에게 그만 멈추자고 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찌뜨가 알아서 멈추더니 몸을 숙여 베인 풀을 몇 가닥 쥐고는 낫을 닦은 다음 날을 갈기 시작했다. 레빈은 기지개를 켠 뒤 크게 심호흡을 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뒤를 따르던 농부 역시 지친 모양인지 레빈이 있는 곳까지 다다르기도 전에 이내 멈춰 서서 낫을 갈기 시작했다. 찌뜨가 자신의 낫과 레빈의 낫을 다 갈고 난 뒤, 두 사람은 다시 풀베기를 시작했다.

두 번째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찌뜨는 끄떡도 없이 쉬지도 않고 매번 낫을 휘두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레빈은 뒤쳐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그의 뒤를 따랐지만, 점점 더 힘들고 괴로워지는 것이었다. 이어 온 힘이 완전히 바닥났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왔고, 바로 그때 찌뜨가 멈춰 서서 낫을 갈았다.

그렇게 그들은 첫 번째 구역을 다 해치웠다. 그 긴 구역이 레빈에게는 특히 힘들었다. 한 구역을 마치자 찌뜨는 낫을 어깨에 걸친 채 자신이 남긴 발자국을 따라 풀 벤 자리를 느린 걸음으로 되짚어 나섰고, 레빈도 똑같이 자신의 풀 벤 자리를 되짚어 걸었다. 그러고 있자니, 비록 땀이 비 오듯 흘러 콧잔등에서 방울져 떨어지고 등은 물에 흠뻑 젖은 듯 축축했지만 기분만은 더할 나위 없이 상쾌했다. 특히 기분이 좋은 건, 이제 끝까지 버텨 내리라는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의 기쁨에 흠집을 내는 단 한 가지 사실은 그의 구역이 제대로 베어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팔은 좀 덜 휘두르고 몸 전체를 더 움직여야겠어.' 재단한 듯 가지런히 잘려 나간 찌뜨의 구역과 산만하고 들쭉날쭉한 자신의 구역을 비교하면서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레빈의 눈치로는 첫 번째 구역에서 찌뜨가 특별히 속력을 냈는데, 이는 주인 나리를 시험해 볼 심산이었던 게 분명했다. 게다가 하필 맡은 구역이 긴 것도 사실이었다. 다음 구역들은 한결 수월했다. 어쨌거나 레빈으로서는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전력을 다해야 했지만 말이다.

농부들에게 뒤처지지 않고 일을 최대한 잘해 내겠다는 것 외에 레빈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들리는 건 단지 낫이 움직이는 소리요, 보이는 건 눈 앞에서 멀어져 가는 꼿꼿한 찌뜨의 모습과 활처럼 반원형으로 휜 풀 벤 자리, 천천히 물결치듯 기울어 가는 풀들, 낫 언저리의 꽃대들 그리고 휴식이 기다리고 있는 저 앞, 구역의 끝이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일하는 도중 그는 갑자기 땀에 젖어 후텁지근하던 어깨 부근이 상쾌하고 시원해지는 것을 느꼈다. 레빈은 낫을 가는 동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낮고 육중한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굵은 빗줄기가 쏟아졌다. 한 무리의 일꾼들이 상의를 벗어 둔 곳으로 달려가서는 옷을 주워입었다. 다른 이들은 레빈과 똑같이 빗줄기의 신선하고 상쾌함을 만끽하며 흥겹게 어깨를 움츠렸다.

한 구역, 또 한 구역씩 풀베기는 계속되었다. 풀이 잘 자랐거나 잘 못 자란 구역, 길거나 짧은 구역들을 차례차례 베어 나갔다. 레빈은 시간 감각을 완전히 상실하여 지금이 늦은 시각인지 이른 시각인지조차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에게는 이제 엄청난 쾌감을 안겨다 줄 모종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일하는 도중 자신이 뭘 하고 있는 건지 망각하는 순간들이 찾아오곤 했고, 그러면 일이 수월해졌다. 바로 그러한 순간에는 그의 구역도 찌뜨의 구역처럼 가지런하고 모양 좋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를 다시 상기하고서 더 잘해 보려고 애를 쓰기 시작하면, 바로 그때부터 일은 무지하게 힘들어지고 구역도 엉망이 되곤 했다.

한 구역을 더 마친 뒤, 그는 또다시 새 구역을 시작하려 했다. 그런데 찌뜨가 일을 멈추더니 노인에게 다가가 무언가 조용히 얘길 건넸다. 그러더니 두 사람은 해를 바라보았다.

'둘이서 무슨 얘길 하는 거지? 왜 새 구역을 시작하지 않는 거야?' 레빈은 생각했다. 그는 농부들이 거의 네 시간 동안 쉬지 않고 풀베기를 했으며, 이제 아침 식사를 할 시간이 되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아침을 드실 시간입니다, 나리." 노인이 말했다.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되었나? 그럼 아침을 먹도록 하지."

레빈은 찌뜨에게 낫을 건네고는, 웃옷을 벗어 놓은 쪽으로 빵을 꺼내러 가는 일꾼들과 함께 풀이 베여 나간 채 비에 살짝 젖어 있는 광활한 구역들을 가로질러 말을 매어 둔 곳으로 갔다. 그제야 그는 날씨를 예측하지 못한 바람에 건초를 빗물에 적셔 버렸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건초가 상하겠구먼."

"괜찮습니다, 나리. 본래 비 올 때 풀을 베고, 날 좋을 때 거두라지 않습니까!" 노인이 말했다.

레빈은 묶어 둔 말을 풀어 올라타고서 커피를 마시러 집으로 향했다.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는 막 잠자리에서 일어난 참이었다. 커피를 양껏 마신 레빈은 세르게이 이바노비치가 옷을 입고 식당으로 나오기도 전에 다시 풀베기 장소로 나갔다.

 

아침 식사를 마친 다음부터 레빈은 아까 있었던 그 자리 대신, 자기 곁으로 오라고 그를 불러 준 익살꾼 영감과 이번 여름 처음으로 풀베기에 나선 젊은 농부 사이에 서게 되었다. 젊은이는 지난가을에 장가든 새파란 청년이었다.

영감은 상체를 꼿꼿하게 세우고 밭장다리로 널찍널찍하게 걸음을 옮기면서 정확하고 흔들림 없이 앞으로 나아갔는데, 겉보기에는 그저 걸으면서 두 팔을 흔드는 이상의 힘이 들어가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드높이 가지런하게 자란 풀밭 구역을 장난치듯 유유히 젖혀 나갔다. 마치 그가 아니라 예리한 낫이 저 혼자서 농익은 풀줄기를 쌩쌩 가르는 것 같았다.

레빈의 뒤에서는 젊은 미시까가 따라오고 있었다. 싱싱한 풀잎을 꼬아 머리를 묶은 잘생긴 그의 얼굴에는 열심을 다하는 표정이 역력했는데, 그러면서도 누군가 자기를 쳐다보면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이었다. 보아하니 죽으면 죽었지 힘들다는 소리는 절대로 안 하겠다는 기세였다.

레빈은 그들 사이에 섞여 앞으로 나아갔다. 풀베기가 절정에 다다랐을 때도 그는 그다지 힘든 줄 몰랐다. 비 오듯 흐르는 땀이 그의 몸을 서늘하게 식혀 주었고, 등과 머리와 걷어붙인 팔꿈치로 따갑게 내리쬐는 햇볕은 그의 노동을 한층 더 굳세고 완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뭘 하고 있는지 생각하지 않게 되는 무의식 상태가 점전 더 잦아졌다. 낫이 저 혼자 풀을 베었다. 참으로 행복한 순간이었다. 한결 더 유쾌한 순간이었으니, 풀베기 구역 끝자락이 잠겨 있는 강가에 다다랐을 때, 영감이 무성하게 자란 축축한 풀에 낫을 문지른 뒤 강물에 강철 날을 헹구고는 숫돌을 담는 양철통에 강물을 떠다가 레빈에게 마시라고 건네주었던 것이다.

", 내 끄바스[러시아인이 즐겨 마시는 전통 음료. 호밀로 만듯 엿기름에 물을 섞어 발효하여 만든다] 한번 맛보시지요! 맛이 썩 괜찮습니다!" 그가 눈을 찡긋하며 권했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레빈은 양철통의 논슨 향이 나고 풀잎이 둥둥 떠다니는 이 따뜻한 강물처럼 맛있는 음료를 마셔 본 적이 없었다. 이어서 행복하기 그지없는 느긋한 산책 시간이 되었다. 그동안에는 손에 낫을 든 채 흐르는 땀을 닦거나 가슴 한가득 심호흡을 하면서 풀베기꾼들의 기다란 행렬과 주변의 숲과 들판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두루 살펴볼 수 있었다.

자꾸자꾸 풀을 베어 갈수록 그는 더욱더 자주 무아지경의 순간을 맛보았다. 그 순간에는 두 팔이 낫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 낫 자체가 생명력 넘치는 그의 육신, 스스로를 자각하는 그 육신을 앞장서서 이끌었다. 그러면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듯이 아무런 생각 없이도 일이 저절로 정확하고 규칙적으로 되어 가는 것이었다. 최고로 행복한 순간이었다.

힘이 드는 것은 그러한 무의식적인 움칙임을 멈추고서 불룩 솟은 둔덕의 풀을 언제 깎아 내야 할지, 뽑아내지 못한 싱아를 언제 베어야 할지 생각해야 하는 순간뿐이었다. 영감은 그런 일을 쉽사리 해냈다. 둔덕이 나오면 그는 동작을 바꾸고 발뒤꿈치나 낫 끄트머리로 양쪽을 두드려서 흙더미를 무너뜨렸다. 그러면서도 눈앞에 펼쳐진 광경들을 두루 살피고 관찰하는 것이었다. 때로는 나무줄기를 뜯어서 먹거나 레빈에게 권하기도 하고, 낫 끄트머리로 나뭇가지를 쳐내기도 하고, 메추리 둥지를 들여다본 뒤 낫으로 건드려 암컷을 날려 보내기도 하고, 길바닥에 나타난 뱀을 잡아다가 마치 포크로 찍어 올리듯 낫으로 들어 올려 레빈에게 보여 주고는 저 멀리 내던지기도 했다.

레빈과 그의 뒤에 선 새파란 청년은 그런 식으로 동작을 바꾸기가 어려웠다. 두 사람은 잔뜩 긴장한 채 한 가지 동작만 되풀이하면서 일에 열중할 뿐, 동작을 바꾸거나 동시에 눈앞의 사물을 관찰할 여력이 없었다.

레빈은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다. 그에게 몇 시간 동안 풀베기를 했느냐고 물으면 아마도 반 시간쯤 했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벌써 점심 때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다시 새로운 구역에 들어섰을 때, 영감이 사방에서 농부들 쪽으로 다가오는 보일락 말락 한 계집아이들과 사내아이들을 향해 레빈의 주의를 돌렸다. 아이들은 키 큰 풀숲을 헤치고, 혹은 길을 따라서, 가녀린 두 팔을 길게 늘어뜨린 채 빵이 든 보따리와 천으로 마개를 틀어막은 끄바스 단지를 날라 오고 있었다.

"저것 좀 보십시오, 딱정벌레들이 기어 오고 있군요!" 영감이 아이들을 가리키며 소리치더니 손을 이마에 대고 태양을 바라보았다.

두 구역을 더 베고 나서 영감은 일손을 멈췄다.

", 나리, 점심을 드셔야죠!" 그가 딱 잘라 말했다. 강가에 다다른 일꾼들은 풀 벤 구역을 가로질러 웃옷을 벗어 둔 곳으로 갔다. 점심을 날라 온 아이들이 앉아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농부들은 군데군데 모여 앉았다. 먼 쪽에 있는 이들은 수레 밑에, 가까운 쪽 사람들은 풀을 던져 놓은 버들숲 아래 자리를 잡았다.

레빈도 농부들 곁에 가 앉았다. 그는 그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자주 나리 앞이라 꺼리는 기색들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농부들은 점심 먹을 채비를 했다. 어떤 이들은 얼굴과 손을 씻었고, 젊은이들은 강에서 멱을 감았다. 쉴 자리를 마련하여 빵을 싼 보따리를 풀고 끄바스 단지의 마개를 여는 이들도 있었다. 영감이 찻잔 속에 빵을 부수어 넣고 숟가락으로 짓이긴 다음 양철통에 담긴 물을 붓고서 빵을 더 치댔다. 그러고는 거기다 소금을 뿌린 후 동쪽을 향해 기도를 드렸다.

"나리, 제가 만든 빵죽 좀 드셔 보십시오." 그가 무릎으로 선 채 찻잔을 내밀었다.

빵죽이 어찌나 맛있는지 레빈은 점심을 먹으러 집에 갈 생각을 그만두었다. 그는 영감과 함께 점심을 먹고 나서 그의 집안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활기를 띤 채 영감의 일에 참견하는가 하면, 그가 관심을 가질 만한 자신의 일과 사정들도 죄다 들려주었다. 그에게는 영감이 형보다도 더 가깝게 느껴졌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다정함으로 인하여 레빈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영감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기도를 한 다음 버들숲 아래 풀을 베고 눕자, 레빈 역시 똑같이 따라 했다. 뙤약볕 속에서 파리와 딱정벌레가 끈덕지게 따라붙어 땀에 젖은 얼굴과 몸을 간질이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금세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깼을 때는 해가 반대편으로 기울어 관목숲 자락에 닿아 있었다. 영감은 이미 한참 전부터 앉아서 젊은이들의 낫을 갈아 주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본 레빈은 자기가 지금 어디에 있는 건지 금방 알아차리질 못했다. 그 정도로 사위가 변해 있었다. 광활한 초원이 말끔히 벌초되어 풀 향기를 머금은 채 기우는 저녁 빛을 받으며 새롭고 특별한 광채로 빛나고 있었다. 강변의 베어 낸 덤불들과 아까까지만 해도 눈에 띄지 않았으나 지금은 물굽이마다 강철처럼 반짝반짝 빛을 반사하는 강물, 움직이거나 몸을 일으키는 농부들, 아직 베지 않은 목초지에 서 있는 장대 같은 풀의 장벽, 이 모든 것이 완전히 새로웠다. 정신을 차린 레빈은 오늘 얼마나 풀을 베었고, 얼마나 더 할 수 있는지 헤아려 보기 시작했다.

마흔두 명의 일손치고는 굉장히 많은 일을 해치웠다. 부역 노동[농노제가 시행되던 당시 농민들이 지주를 위해 의무적으로 행하던 일]을 하던 시절에는 서른 자루의 낫으로 이틀에 걸쳐 베어 냈을 드넓은 초원을 벌써 전부 끝낸 것이다. 남아 있는 곳은 구석의 짧은 구역들뿐이었다. 하지만 레빈은 그날 최대한으로 풀베기를 하고 싶었기에 그처럼 빨리 저물어 가는 해가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피로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좀 더 빨리, 최대한 많은 일을 해내고 싶을 뿐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마시낀 골짜기까지 베는 게 어때?" 그가 영감에게 말했다.

"안 될 거 있나요, 해가 기울긴 했습니다만. 젊은 친구들한테 술값이라도 쥐여 주실 테죠?"

간식 시간에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아 몇몇이 담배를 피워 물었을 때, 영감은 <마시낀 골짜기를 벌초하면 보드까를 마시게 될 거다>하고 젊은 일꾼들에게 공언을 했다.

"까짓것, 못 벨 건 또 뭐람! 앞장서게, 찌뜨! 서둘러 해치우자고! 이따 밤에 배불리 먹으면 되지. 어서 가세!" 재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꾼들은 남은 빵을 마저 먹으면서 일을 개시하러 나섰다.

", 젊은이들, 정신 바짝 차리게!" 찌뜨가 이렇게 외치고는 달음질쳐 앞장을 섰다.

"어서 가세!" 영감이 찌뜨의 뒤를 쫓더니 금세 따라잡았다.

"내가 자넬 베어 버릴지도 몰라! 조심하라고!"

젊은이들도 노인네들도 앞을 다투다시피 풀을 베었다. 그러나 아무리 서둘러도 벤 풀의 모양새는 흥하지 않았고, 구역들은 여전히 말끔하며 시원하게 정리되어 갔다. 구석의 모퉁이는 5분 만에 해치웠다. 선두에 섰던 이들은 웃옷을 어깨에 걸치고는 길을 건너 마시낀 골짜기로 향했고, 마지막 남은 일꾼들은 마저 풀을 베었다.

그들이 양철통을 쩔렁대며 마시낀 골짜기의 숲이 우거진 계곡으로 들어섰을 때, 해는 이미 나무들 꼭대기로 넘어가고 있었다. 협곡 한가운데서는 풀이 허리춤까지 닿았고, 부드럽고 유연하며 널찍한 풀잎 사이로 숲속 곳곳에 오랑캐꽃이 알록달록하게 피어 있었다.

세로로 벨 것인지 가로로 벨 것인지 잠시 의논한 뒤, 역시 이름난 풀베기꾼으로 몸집이 거대하고 혈색이 가무잡잡한 농부 쁘로호르 예르밀린이 앞장을 섰다. 그는 앞장서서 한 구역을 가로지르며 풀을 베어 내더니 뒤돌아서서 다시 풀을 쳐나갔다. 그러자 모두가 그의 뒤편에 정렬하고는 골짜기를 따라 언덕 아래로, 혹은 언덕 위의 숲 가장자리로 풀을 베며 나아갔다. 숲 너머로 해가 넘어가고 벌써 이슬이 내려앉았다. 언덕 위에 있는 풀베기 일꾼들만이 아직 마지막 햇살을 받고 있을 뿐, 안개가 피어오르는 저지대와 그 건너편에서 이슬에 젖은 신선한 그늘 속에서 풀을 베어 나갔다. 풀베기는 이제 한창이었다.

쓱삭쓱삭 소리를 내며 잘려 나가서는 곧바로 향을 풍기는 풀들이 열을 지어 드높이 쌓여 갔다. 짧은 구역 안에 빽빽이 들어선 일꾼들은 사방에서 숫돌이 든 양철통을 쟁그렁거리거나 낫끼리 쨍쨍 부딪치는 소리, 혹은 숫돌로 쉭쉭 낫을 가는 소리를 내는가 하면, 서로를 재촉하면서 흥겹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레빈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젊은이와 영감 사이에서 풀을 베었다. 양가죽으로 된 짧은 외투를 입은 영감은 여전히 쾌활하고 익살스러웠으며, 자유롭게 몸을 눌렀다. 숲속 물이 오른 풀들 사이에서 부풀어 오른 자작나무 버섯들이 끊임없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낫에 잘려 나가곤 했다. 그러나 영감은 버섯을 발견할 때마다 허리를 굽혀 주워서는 품속에 집어넣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할망구한테 선물할 게 또 늘었구먼."

축축하고 가녀린 풀을 베기가 아무리 수월하다 해도 골짜기의 험한 비탈을 오르락내리락하기란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그 일에 있어서도 영감은 움직임에 구애를 받지 않았다. 그는 한결같이 낫을 휘두르며 커다란 짚신을 신은 두 발을 짧은 보폭으로 견고하게 옮기면서 험준한 벼랑을 천천히 올라갔다.

온몸이 후들거리고 셔츠 아래 늘어진 바지 자락마저 덜덜 떨려도 자신이 가는 길의 풀 한 포기, 버섯 한 송이도 놓치는 법이 없었으며 여전히 농부들이나 레빈과 함께 농담을 주고받는 것이었다. 그의 뒤를 따르던 레빈은 그냥 기어오르기도 힘든 험한 언덕을 낫까지 들고 오르다가는 틀림없이 넘어지고 말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러나 그는 올라갔고, 할 일을 해냈다. 어떤 외부의 힘이 자신을 움직이고 있음을 그는 느꼈다.

 

마시낀 골짜기의 풀을 베고 마지막 구역까지 일을 다 마무리한 뒤, 일꾼들은 웃옷을 입고서 흥겹게 집으로 향했다. 말에 올라탄 레빈은 농부들과 아쉬운 작별을 나누고는 집으로 출발했다. 언덕 위에서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저지대에서 피어오르는 안개 때문에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유쾌하고 걸쭉한 음성들과 호탕한 웃음소리, 낫이 부딪치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레빈이 땀에 젖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이마에 붙이고 검게 그을린 축축한 등과 가슴을 드러낸 채 신이 나서 떠들며 형의 방으로 들어왔을 때,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는 이미 한참 전에 식사를 마치고 자기 방에서 얼음이 든 레몬수를 마시며 방금 전 우편으로 온 신문과 잡지를 훑어보고 있었다.

"우리가 초원을 전부 베었어요! 아아, 기분이 너무 좋아요, 경이로울 지경이라고요! 형님은 어떻게 보내셨어요?" 레빈은 어제의 불쾌햇던 대화는 깡그리 잊은 채 형에게 말을 걸었다.

"맙소사! 네 몰골이 그게 뭐냐!"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는 동생을 보자마자 언짢은 눈길을 던지며 말했다.

"그 문, 문 좀 닫아라! 할 열 마리쯤 들어왔을 거다." 그가 소리를 질렀다.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는 파리를 도무지 견딜 수가 없어서 밤에만 자기 방의 창문을 열었고, 문은 언제나 꼼꼼히 닫아 두었다.

"하느님께 맹세코 한 마리도 안 들어왔어요. 들어왔다면 제가 잡을게요. 형님은 모르실걸요, 얼마나 짜릿한 쾌감이 느껴지는지 말이에요! 형님은 어떻게 지내셨냐니까요?"

"잘 지냈다. 그런데 정말로 하루 종일 풀베기를 한 거냐? 틀림없이 늑대처럼 배가 고프겠구나. 꾸지마가 너 먹으라고 온갖 것을 해놓았단다."

"아니요, 뭘 먹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거기서 먹었거든요. 가서 좀 씻을래요."

"그래, 어서 가보렴, 나도 나가마."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는 동생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가라니까, 어서 가."

그가 빙그레 웃으며 덧붙이고는 책을 챙기면서 자신도 나갈 채비를 했다. 그 역시 느닷없이 기분이 유쾌해져 동생과 떨어져 있기가 싫었다.

"그런데 비가 올 때는 어디 있었니?"

"비는 무슨 비요? 몇 방울 떨어지다 말던걸요. 금방 올께요. 그러니까 형님도 잘 지내셨다는 거죠? 아주 잘됐네요." 그러고서 레빈은 옷을 갈아입으러 갔다.

5분 뒤에 형제는 식당에서 다시 만났다. 허기가 느껴지지 않았던 레빈은 단지 꾸지마의 성의를 무시하지 않기 위해 식탁에 앉았지만, 막상 먹기 시작하니 음식이 너무나도 맛있었다.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는 미소 띤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 그래, 너에게 편지가 왔더구나." 그가 말했다.

"꾸지마, 아래층에 가서 좀 가져다주게. 문은 꼭 닫고."

편지는 오블론스끼가 뻬찌르부르끄에서 보낸 편지였다.

'돌리에게서 편지를 받았네. 아내는 예르구쇼보에 있는데, 왠지 일이 영 안 풀리는 것 같아. 부디 자네가 가서 조언 좀 해주게나. 자네는 뭐든 잘 알잖나. 자네를 보면 아내도 무척이나 반가워할 거야. 가련하게도 아내는 지금 완전히 혈혈단신이라네. 장모님은 다른 가족들과 함께 아직 외국에 계시거든.'

"거참 잘됐네! 꼭 가야겠어요." 레빈이 말했다.

"형님도 같이 가시죠. 참 좋은 분이거든요. 형님도 아시잖아요?"

"여기서 멀지 않은 곳이냐?"

"아마 30베르스따쯤 될걸요. 아니면 40베르스타 정도. 그래도 길이 아주 잘 닦였어요. 일사천리로 갈 수 있을 거예요."

"잘됐구나."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세르게이 이바노비치가 말했다.

동생의 모습이 그에게 곧장 즐거움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네 식욕이 아주 엄청나구나!" 접시 앞으로 고개를 수그린 레빈의 적갈색으로 그을린 얼굴과 목을 바라보면서 그가 말했다.

"정말 최고예요! 이런 생활 방식이 온갖 허튼 생각들을 떨쳐 버리는 데 얼마나 효과적인지 형님은 모를걸요. Arbeitskur(노동치료)라는 신개념을 만들어서 의학을 보강하고 싶다니까요."

"글쎄, 너한테는 별로 필요 없을 듯 싶은데."

"각종 신경성 질환 환자들한테는 도움이 될 거예요."

"그래, 한번 시험해 봐야겠구나. 나도 풀베기를 하는 곳에 너를 보러 가려 했어. 그런데 그놈의 더위를 견딜 수가 있어야 말이지. 숲까지 갔지만 더는 못가겠더라. 조금 앉아 있다가 숲을 지나 마을에 들렀는데, 거기서 네 유모를 만났다. 그래서 농민들이 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탐문해 보았지. 내가 이해한 바로는, 네가 그 일을 하는 걸 농민들은 그리 탐탁지 않아 하는 것 같아. 유모가 그러더구나, 지주 나리가 할 일이 아니라고. 내가 보기에, 농민들의 관념 속에는 그들 말마따나 '지주 나리의' 일이 아주 확고하게 정해져 있는 거야. 그래서 지주 나리가 그들의 관념 속에 이미 정해진 틀을 벗어나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지."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 일은 제 평생 경험해 본 적 없는 엄청난 희열을 안겨 주었어요. 게다가 나쁜 점이라곤 하나도 없잖아요. 안 그래요?" 레빈이 대꾸했다.

"농민들 마음에 안 들어도, 뭐 어쩌겠어요. 그렇다해도 제 생각에는 별문제 없는 것 같은데요, 그렇지 않나요?"

"대체로는 그렇지." 세르게이 이바노비치가 말을 이었다.

"보아하니, 오늘 하루가 만족스러운 것 같구나."

"아주 흡족해요. 초원을 몽땅 베었다니까요. 게다가 어떤 노인이랑 친해졌거든요! 얼마나 매력적인 영감인지 형은 상상도 못 할 거예요!"

"그래, 너는 너의 하루에 만족하는구나. 나 역시 마찬가지다. 첫째로, 체스의 수를 두 가지 풀었단다. 하나는 아주 흥미진진해. 졸을 가지고 풀었거든. 내가 보여주마. 그리고 어제 우리가 나눈 대화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어제 나눈 대화요?" 행복한 표정으로 실눈을 뜬 채 식후의 포만감에 숨을 헐떡이던 레빈이 어제 했던 얘기가 도대체 뭔지 전혀 기억이 안 난다는 투로 되물었다.

"어느 정도는 네가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이견은, 말하자면 이런 거지. 너는 사적인 관심이 활동의 원동력이라고 보는 반면, 나는 일정한 교육 수준에 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공공선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거다. 어쩌면 네가 옳을지도 모르지. 물질적인 이익이 걸려 있는 활도잉 더 바람직하다는 생각 말이다. 대체로 너의 성정은, 프랑스인들 말마따나 지나치게 prime-sautiere(충동적이야). 네가 원하는 것은 열정적이고 정력적으로 활동하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아니냐."

레빈은 형이 하는 말을 듣고는 있었지만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단지 자신이 이야기를 전혀 듣지 않고 있다는 걸 들킨만한 질문을 형이 하지나 않을까 염려될 뿐이었다.

"그런 얘기야, 이 친구야……" 세르게이 이바노비치가 동생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그럼요, 물론이죠, 여부가 있겠어요! 내 의견을 고집하지 않겠어요."

레빈은 아이처럼 미안해하는 듯한 웃음을 지으며 대꾸하고는 생각했다.

'대체 뭘 가지고 입씨름을 했더라? 틀림없이 나도 옳고, 형도 옳고, 모든 게 다 잘된 거야. 근데 사무소에 가서 일 처리를 해야겠는걸.' 그가 미소 띤 얼굴로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좀 거닐고 싶으면, 같이 가자꾸나." 그가 말했다. 생기와 활기가 넘치는 동생이랑 떨어져 있기가 싫었던 것이다.

"가자, 필요하면 사무소에도 들르고."

"아이고, 맙소사!" 갑자기 레빈이 세르게이 이바노비치가 깜짝 놀랄 정도로 크게 소리를 내질렀다.

"? 무슨 일인데?"

"아가피야 미하일로브나의 손은 좀 어때요?" 자기 머리를 툭툭 치면서 그가 말했다.

"유모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지 뭐예요?"

"훨씬 나아졌어."

"그렇군요, 아무튼 유모에게 가봐야겠어요. 형이 모자도 쓰기 전에 돌아올게요."

그러고서 레빈은 딸깍딸깍 발뒤축을 울리며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스쩨빤 아르까지치가 뻬쩨르부르끄로 온 까닭은, 관직에 있지 않은 사람들은 납득이 안 가겠지만 관직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자명하고도 당연한 임무, 그 일 없이는 직무 수행이 불가할 정도로 매우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바로 소속된 행정 부처에 자신의 존재를 상기시키는 일이었다. 그가 이 임무를 수행한답시고 집에 있던 돈을 몽땅 들고 나와 경마장이라든자 별장에서 즐겁고 유쾌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돌리는 가능한 한 지출을 줄이기 위해 아이들을 데리고 시골로 거처를 옮겼던 것이다. 그녀는 결혼 지참금으로 받은 예르구쇼보 시골 영지로 내려갔는데, 바로 올봄에 매각했던 숲이 있는 그 마을은 레빈의 뽀끄로프스꼬예 영지에서 50베르스따 거리에 있었다.

예르구쇼보의 크고 낡은 저택은 이미 오래전에 허물어졌고, 공작이 수리하고 증축한 곁채만이 남아 있었다. 여느 곁채들처럼 한쪽 옆은 출입할 때 다니는 가로수 길을 향해, 다른 쪽은 남쪽을 향해 세워져 있었는데, 20년 전 돌리가 아직 어린아이였을 때는 꽤 넓고 편리한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곳은 낡고 쇠락해 있었다. 스쩨빤 아르까지치가 봄에 숲을 팔러 다녀갔을 때, 돌리는 그에게 집을 좀 둘러보고 필요한 곳은 수리를 하도록 일러 달라고 당부했었다. 모든 죄 많은 남편들이 그러하듯, 스쩨빤 아르게지치는 아내의 편의에 몹시 신경을 씀년서 집을 손수 둘러보고 그가 판단하기에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해 놓았다. 그의 판단으로는 가구의 커버를 모조리 새로 갈아 씌우고, 커튼을 달고, 정원을 정돈하고, 연못에 조그만 다리를 놓고 꽃도 심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 외에 꼭 필요한 다른 수많은 사항들을 까맣게 잊었고, 그렇게 놓친 결함들이 이제 와서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를 괴롭혔다.

아무리 자상한 아버지이자 남편이 되고자 애를 써도 스쩨빤 아르게지치는 아내와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도무지 잊어버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에게는 독신자의 취향이 있었고, 오직 거기에만 적응이 되었다. 모스끄바로 돌아온 그는 모든 게 준비되었으며 집은 장난감 집처럼 아기자기해질 테니 어서 그리 가길 권하노라고 아내에게 자랑스레 큰소리를 쳤다. 아내가 시골로 떠나는 건 스쩨빤 아르게지치에게 모든 면에서 아주 반가운 일이었다. 아이들에게도 좋고, 지출도 줄어들고, 자신은 한결 자유로워지기 때문이었다.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여름 동안 시골로 가 있는 것이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불가피한 일이라 여겼는데, 특히 성홍열을 앓고 난 뒤 좀처럼 회복되지 않는 딸아이를 생각해서였다. 그다음으로는 그녀를 괴롭혀 온, 장작 장수와 생선 장수와 제화공에게 진 자잘한 외상 빚고 그로 인한 자잘한 모욕감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더군다나 시골로 떠나는 마음이 즐거웠던 건 한여름에 외국에서 돌아올 여동생 키티를 시골집으로 불러들이려는 바람 때문이었다. 마침 그녀에게 멱을 좀 감으라는 처방이 내려진 터라, 키티는 두 자매의 어릴 적 추억이 가득한 예르구쇼보에서 언니와 함께 여름을 지내는 것만큼 기쁜 일은 없을 거라고 온천장에서 편지를 써 보냈었다.

처음에 시골 생활은 돌리에게 무척이나 힘들었다. 어릴 적 시골에서 살았던 그녀는 시골 생활이란 도시에서 겪은 온갖 불쾌한 일들로부터의 탈출구이며, 비록 투박하긴 해도(이 점에 돌리는 쉽사리 적응했다) 경제적이며 편하다는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이나 다 있고, 모든 게 값싸고, 뭐든지 다 구할 수 있고, 아이들에게도 좋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주부로서 시골로 내려온 지금 그녀는 그 모든 게 자신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돌리와 아이들이 도착한 다음 날 소낙비가 쏟아졌는데, 밤이 되자 복도와 아이들 방에 빗물이 새는 바람에 아이들 침대를 응접실로 옮겨야 했다. 요리사도 없었다. 가축지기 아낙의 말에 따르면 암소 아홉 마리 중 어떤 놈은 새끼를 뱄고, 다른 놈은 처음으로 새끼를 낳았고, 또 다른 놈은 너무 늙었고, 나머지는 젖이 잘 안 나온다고 했다. 버터도, 심지어 아이들 먹일 우유마저 모자랐다. 달걀도 없었다. 암탉을 구할 수 없어서 다 늙어 보랏빛이 나는 질긴 수탉들을 굽거나 삶아 냈다. 바닥 청소를 할 아낙도 구하지 못했다. 다들 감자를 캐러 나갔다는 것이다. 마차를 타고 다닐 수도 없었으니, 하나밖에 없는 말이 어물쩡거리다가 소레의 끌채를 뜯고 뛰쳐나가 버린다고들 했다. 멱을 감을 만한 곳도 없었다. 강가는 가축들에게 짓밟혀 온통 더렵혀진 데다 길을 향해 훤히 트여 있었다. 가축들이 무너진 울타리를 넘나들며 정원으로 나다녔기 때문에 산책조차 다닐 수 없었다. 게다가 무시무시한 황소가 한 마리 있었는데, 요란하게 울부짖는 품새로 보아 까딱하다가는 그 뿔에 받힐 게 뻔했다. 옷을 넣을 만한 옷장도 없었다. 있는 것들은 문이 닫히지 않거나, 닫혀도 옆을 지나칠 때마다 저절로 열렸다. 무쇠 주전자나 항아리도 없었다. 빨래를 삶을 솥도, 하녀방에 다리미판조차 없었다.

평온과 휴식은커녕 끔찍한 재앙을 맞닥뜨린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절망에 빠졌다. 전력을 다하여 분주하게 돌아댜녔지만 돌파구가 없는 상황임을 절감했고, 매 순간 솟구치는 눈물을 참았다. 기병 조장 출신의 영지 관리인은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가 처한 재난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잘생기고 점잖은 외모 때문에 스쩨빤 아르게지치의 마음에 들어 문지기들 중 간택되어 소임을 맡게 된 그는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도저히 뭘 할 수가 없습니다. 추잡하기 짝이 없는 농민들이라서요." 그러고는 전혀 도와주지 않았다.

모든 상황이 절망적인 것 같았다. 그러나 다른 모든 집안과 마찬가지로, 오블론스끼 일가에도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아주 중요하고 쓸모 있는 인물이 한 명 있었으니, 다름 아닌 마뜨료나 필리모노브나였다. 그녀는 주인마님을 달래면서 수습이 될 거라고(이건 마뜨료나의 입버릇이었고, 마뜨베이는 그걸 흉내 내곤 했다) 단언하였으며, 서두르거나 전전긍긍하지 않고 알아서 일을 해나갔다.

그녀는 즉시 집사의 아내와 친해져서는 첫날부터 아카시아 나무 밑에서 집사와 그의 아내와 함께 차를 마시며 모든 일을 의논하기 시작했다. 그 아카시아 나무 밑에서 당장 마뜨료나 필리모노브나의 모임이 결성되었고, 집사의 아내와 촌장과 마을 서기로 구성된 그 모임을 통하여 생활의 어려움이 조금씩 해소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에는 실제로 모든 게 수습되었다. 지붕은 수리하고, 촌장의 대모를 요리사로 들이고, 암탉을 사 오고, 우유를 짜기 시작했으며, 정원에는 장대로 울을 쳤다. 목수가 와서 빨래용 홍두께를 만들었고, 옷장에도 문고리를 달아 더 이상 문이 저절로 열리지 않게 되었다. 군복용 나사를 씌운 다리미판이 안락의자의 팔걸이와 서랍장 사이에 놓였고, 하녀 방에서는 다리미질하는 냄새가 풍겼다.

", 이것 보세요! 늘 낙담만 하시더니만." 마뜨료나 필리모노브나가 다리미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심지어 짚으로 만든 바람막이로 욕장까지 만들었다. 릴리가 멱을 감을 수 있게 되면서, 비록 평온하진 않지만 편안한 시골 생활에 대한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의 바람이 부분적으로나마 실현되었다. 여섯 아이들을 거느린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에게 평온해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 아이가 병이 나면 다른 아이도 병이 나려 했고, 어느 아이에게는 뭔가가 부족했으며, 또 다른 아이는 성격이 비뚤어질 조짐을 보이는 등 온갖 일이 계속되었다. 가끔씩, 아주 가끔씩만 짧은 평정의 시간이 주어지곤 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분주함과 걱정거리들은 사실 다리아 알렉산드로브나가 누릴 수 잇는 유일한 행복이었다. 그게 없다면 홀로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편에 대한 생각에 빠져 있을 터였다. 아이가 병이 날지 몰라 걱정되거나 실제로 병치레를 하는 것, 아이들에게서 나쁜 성정의 조짐을 보는 슬픔이 어머니로서 아무리 괴로워도, 아이들 자체가 다시 자잘한 기쁨들로 그런 고통을 보상해 주곤 했다. 물론 그러한 기쁨들은 너무나도 자잘해서 모래 속의 사금처럼 눈에 잘 띄지도 않는 데다 힘들 때면 오직 고통만이, 모래알들만이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오로지 기쁨만, 오로지 사금만 보이는 좋은 순간들도 있었다.

이제 그녀는 시골의 호젓한 생활 속에서 점점 더 자주 그러한 기쁨을 자각하게 되었다 종종 아이들을 보면서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어머니로서 자식들을 지나치게 편애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설득시키고자 온갖 애를 쓰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여섯 아이들 모두가 제각각이며, 보기 드문 아이들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이들로 인해 그녀는 행복하고 뿌듯했다.

 

모든 것이 이미 어느 정도 자리 잡혀 있던 5월 말, 돌리는 어수선한 시골 생활을 불평했던 자신의 편지에 대한 남편의 답장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생각이 짧았던 점을 미안해하면서, 기회가 닿자마자 시골로 올 것을 약속한다고 적어 보냈다. 그러나 그런 기회는 도통 주어지질 않았고, 그리하여 6월 초가 되어서까지도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시골에서 혼자 지내고 있었다.

성 베드로 축일 주간이 시작되는 일요일에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아이들을 모두 성찬식에 참례 시키고자 아침 예배를 드리러 갔다. 여동생이나 어머니, 혹은 친구들과 마음속에 담아 둔 철학적인 얘기를 나눌 때마다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종교에 대한 자유로운 생각으로 상대를 종종 놀라게 하곤 했다. 그녀는 자신만의 기묘한 윤회의 믿음을 갖고 있었고, 교회의 교리에 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은 채 자신만의 믿음을 고수했다. 그러면서도 가정에서는 교회가 요구하는 모든 사항들을 엄격하게 실행에 옮겼다. 이는 단지 모범을 보이려는 겉치레가 아니라 그녀의 진심에서 우러난 행동이었다. 그러던 차에 1년가량 아이들이 성찬 예배를 드리지 않아 그녀는 몹시 불안해졌고, 마뜨료나 필리모노브나의 전폭적인 지지와 공감에 힘입어 이번 여름에는 그 일을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며칠 전에 미리 각각의 아이에게 무슨 옷을 입힐지 생각해 두었고, 그리하여 아이들 옷을 새로 짓거나 수선하고 세탁하였다. 솔기와 소매 주름은 넓히고, 단추를 달고, 리본을 준비해 놓았다. 그런데 따냐를 입히려고 가정 교사인 영국 여자에게 맡겼던 옷이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의 기분을 망쳐 놓았다. 영국 여자가 속주름을 엉뚱한 곳에 잡아 놓았을 뿐 아니라 소매를 너무 내어 다는 바람에 옷이 완전히 망가지고 말았던 것이다. 따냐에게 입혀보니 어깨 부분이 보기 민망할 지경이었다. 다행히 마뜨료나 필리모노브나가 삼각천을 덧대어 케이프를 만드는 방안을 고안해 낸 덕에 문제는 개선되었지만 영국 여자와는 거의 말다툼을 벌일 뻔했다. 어쨌든 다음 날 아침에는 모든 게 무사히 준비되었고, 9시경(신부님께는 그때까지 예배를 드리지 말고 기다려 달라고 부탁해 두었다) 곱게 차려입은 아이들이 현관 앞에 대기한 사륜마차 앞에서 즐겁고 환한 표정으로 어머니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달릴 생각은 안 하고 어물쩡대기만 하는 보론 대신에, 마뜨료나 필리모브나의 주선으로 집사의 말 부리를 마차에 맸다. 몸단장을 하느라 꾸물거리던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흰 모슬린 드레스 차림으로 마차를 타러 밖으로 나왔다.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꼼꼼하게 머리를 손질하고 옷을 차려입었다. 전에는 스스로 마음에 들 만큼 예뻐지기 위해 몸치장을 했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옷을 차려입기가 점점 더 싫어졌다. 자신이 얼마나 보기 싫게 변했는지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다시금 설레고 흡족한 마음으로 몸단장을 했다. 이제 그녀는 자기 자신이나 아름다움을 위해서가 아니라, 저 귀여운 아이들의 어머니로서 나쁜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옷을 차려입었다.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았을 때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만족스러웟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흔히들 무도회에서 예쁘게 보이고 싶어 하는 그런 종류의 아름다움이 아닌, 지금 염두에 두고 있는 목적에 잘 들어맞는 아름다움이었다.

교회에는 농부와 문지기들, 그리고 그들의 아낙들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사람들이 아이들과 자신의 모습에 감탄하는 것을 보았다. 혹은 본 것만 같았다. 맵시 있는 옷차림을 한 아이들은 어여뻤을 뿐만 아니라, 너무나 의젓하게 굴어서 사랑스러웠다. 사실 알료샤가 의젓하게 서 있질 못하고 자기 외투의 뒤쪽을 보려고 연신 뒤를 돌아보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유난히 귀여웠다. 따냐는 얌전히 서서 어른스럽게 동생들을 살폈다. 막내 릴리는 모든 것에 천진난만하게 놀라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릴리가 성찬 성사를 받으며 "Please, some more(조금만 더 주세요)라고 말햇을 땐 그 누구도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이들은 무언가 장엄한 일이 거행되었음을 느끼고는 무척이나 경건해졌다.

집안일은 다 잘 돌아갔다. 그러나 아침 식사 때 그리샤가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고, 더 나쁘게도 영국 여자의 말을 안 듣는 바람에 파이를 못 먹는 일이 생겼다. 날이 날이니만큼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벌을 내리지는 않았겠지만, 영국 여자의 처분을 지지해 주어야 했기에 '그리샤에게 파이는 없다'는 그녀의 결정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이 전반적인 기쁜 분위기에 살짝 흠집을 냈다.

그리샤는 니꼴렌까도 휘파람을 불었는데 걔한테는 왜 벌을 안 주느냐, 자기는 파이 때문에 우는게 아니며 그런 건 하등 상관없다. 다만 공정하지 못한 처사가 억울하다며 울어 댔다. 그 모습이 얼마나 서글펐는지,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가 그리샤를 용서해 주자고 의논할 작정으로 영국 여자에게 가던 참이었다. 그런데 홀을 지나던 순간 눈물이 솟구칠 만큼 가슴 벅찬 기쁨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을 목격한 그녀는 당장에 이 어린 죄인을 용서해주고 말았다.

벌을 받은 아이는 홀 구석의 창틀에 앉아 있었고, 그 옆에서 따냐가 접시를 든 채 서 있었다. 따냐가 인형에게 밥을 주려는 것처럼 자기 몫의 파이를 방으로 가지고 내려가게 허락해 달라고 영국 여자에게 부탁하고는, 핑계와는 달리 동생에게 가져다준 것이었다. 자기가 받은 벌이 불공평하다며 계속해서 우는 와중에도 동생은 누나가 가져온 파이를 먹으면서 흐느낌 사이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누나도 먹어, 같이 먹자.....같이."

처음에는 그리샤에 대한 연민이 작용했지만, 나중에는 자신이 선행을 베풀었다는 자각으로 인해 따냐의 두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따냐는 사양하지 않고 자기 몫의 파이을 먹었다.

어머니를 본 남매는 놀라서 겁을 먹었다가 그 얼굴을 눈여겨보고는, 자신들이 착한 일을 했다는 걸 깨닫고 곧 웃음을 터뜨렸다. 입안에 잔뜩 파이를 문채 웃음 띤 입술을 두 손으로 문지르는 바람에 환하게 웃는 온 얼굴이 눈물과 잼 범벅이 되었다.

"아이고! 새로 지은 흰옷을 어쩜 좋아! 따냐! 그리샤!"

어머니는 소리를 지르며 옷을 깨끗하게 닦으려고 애쓰면서도 두 눈에는 누물을 글썽인 채 행복하고 감동 어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이들의 새 옷을 벗기고 계집애들에게는 블라우스를, 사내애들에게는 낡은 재킷을 입히게 한 뒤(집사는 다시금 심란해지겠지만) 부리를 마차에 매라고 일렀다. 버섯을 따고 멱을 감으로 갈 요량이었다. 신이 난 아이들의 째질 듯한 비명이 방 안 가득 울려 퍼지더니 욕장으로 떠나기 직전까지 잦아들 줄 몰랐다.

광주리 한가득 버섯을 땄다. 릴리까지도 자작나무 버섯을 찾아냈다. 예전에는 미스 헐이 버섯을 찾아 일리에게 보여주곤 했는데, 이제는 저 혼자서 커다란 자작나무 버섯을 찾아낸 것이다. 모두가 기쁨의 환성을 질렀다.

"릴리가 버섯을 찾았어!"

그런 다음에는 강가로 가서 자작나무 아래 마차를 세워놓고 욕장으로 향했다. 마부 쩨렌찌는 파리를 쫓아내려고 꼬리를 흔드는 말을 나무에 묶고서 자작나무 그림자 아래 풀을 깔고 누운 채 잎담배를 피웠다. 잦아들 줄 모르는 아이들의 깔깔대는 소리가 욕장에서 그의 귓전까지 들려왔다.

아이들을 전부 살피고 장난치지 못하게 하는 일이 성가시긴 해도, 또 제각각 주인이 다른 그 모든 양말과 바지와 장화 켤레들을 혼동하지 않도록 기억하는 일, 그리고 그 모든 끈과 단추를 풀었다가 다시 묶고 채우는 일이 힘들긴 해도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 또한 늘 물놀이를 좋아했으며, 아이들에게도 이롭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을 전부 데리고서 함께 물놀이를 하는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은 그녀에게 없었다. 포동포동한 다리를 하나씩 쥐고서 양말을 당겨 신기고, 아이들의 손을 잡거나 자그마한 알몸뚱이들을 두 팔에 안은 채 물에 담그고, 때로는 신이 나서 때로는 겁에 질려 터져 나오는 비명 소리를 듣고, 커다란 눈망울에 기쁨과 두려움을 가득 담은 채 헐떡거리며 물장구를 치는 자신의 천사들을 바라보는 것은 정말이지 커다란 기쁨이었다.

아이들 절반쯤이 옷을 입었을 때, 곱게 차려입고 방풍나물과 등대풀을 캐러 가던 아낙들이 조심스레 길을 멈추었다. 마뜨료나 필리모노브나가 강물에 젖은 목욕 수건과 셔츠를 말려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한 아낙을 소리쳐 불렀고, 그 바람에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아낙들은 처음에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을 뿐 절문을 못 알아듣더니만 금세 거리낌 없이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었고, 곧 아이들을 아끼고 예뻐하는 진심 어린 모습으로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의 환심을 샀다.

"어머, 정말 미인이에요. 살빛이 설탕처럼 새하얗네." 한 아낙은 따냐를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조금 말랐구나....."

"그렇다네. 아팠거든."

"요것 좀 보게, 얘도 멱을 감았나 봐요." 다른 아낙이 젖먹이 아이를 보고 말했다.

"아니, 얘는 겨우 3개월 됐는걸."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가 자랑스레 말했다.

"세상에나!"

"자네도 아이들이 있나?"

"넷을 낳았는데 둘만 남았답니다. 사내아이랑 계집아이예요. 계집아이는 지난 사육제 때 젖을 뗐지요."

"몇 개월 됐는데?"

"두 살이나 됐어요."

"왜 그렇게 오랫동안 젖을 먹였나?"

"저희들 관습이죠. 재계를 세 번 지낼 때까지요....." [제께는 정교의 중요한 축일을 앞두고 몸과 마음을 경건하게 하기 위해 일정 기간 금식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2월에 있는 사육제 때 젖을 뗐다고 했으니, 사육제 전까지 세 번의 제계(각각 6, 811월에 시작되는 성 베드로 금식절, 성모 승천 금식절, 성탄 금식절)를 지내는 동안 아이에게 젖을 먹였다는 얘기다.]

뒤이어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로서는 가장 흥미로운 대화가 이어졌다. 출산할 때는 어땠느냐, 무슨 병을 앓았느냐, 남편은 어디서 일하느냐, 자주 오느냐 등등.

아낙들과 헤어지고 싶지 않을 정도로 이야기는 무척이나 재미있었고,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와 그들의 관심사는 완전히 일치했다. 무엇보다도 기분 좋았던 점은 자식들이 어쩌면 그리 많으며, 또 어쩌면 그리 다들 예쁘냐며 아낙들이 입을 모아 감탄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것이었다. 아낙들은 또한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를 한바탕 웃기기도 했는데, 영국 여자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그 웃음의 이유가 바로 자신이라는 점에 기분이 상했다. 젊은 아낙들 중 한 명이 맨 꼴찌로 옷을 입는 영국 여자를 힐끔거리며 쳐다보다가 그녀가 치마를 세 벌째 둘러 입자 마침내 참았던 말을 내뱉었던 것이다.

"에구머니나, 두르고, 또 두르고, 한없이 두르는구먼!"

그러자 모두가 폭소를 타뜨렸다.

 

머리에 두건을 두른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가 물놀이를 마친 젖은 머리의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채 집에 가기 위해 마차를 타려는데 마부가 말했다.

"어떤 나리께서 오시는데요. 아마도 뽀끄로프스꼬예의 나리 같습니다."

앞을 내다본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회색 모자에 회색 외투를 입고서 그들을 마중 나온 레빈의 낯익은 모습을 발견하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를 볼 때마다 그녀는 반가웠지만, 아낙들에게 온갖 찬사를 들은 지금은 특별히 더 그러했다. 과연 어떤 점에서 그녀가 훌륭한지를 레빈만큼 잘 알아줄 만한 사람은 그 누구도 없을 터였다.

그녀를 본 레빈은 언젠가 자신 또한 누릴 법한 가정생활의 한 장면을 눈앞에 맞닥뜨리는 것만 같았다.

"둥지 속 어미 닭이 따로 없군요.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어머, 정말 반가워요!" 그녀가 레빈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반갑다니요, 저한테는 연락도 하지 않으셨으면서. 우리 집에는 형님이 와 계십니다. 스찌바의 편지를 받고 여기 계시다는 걸 알았어요."

"스찌바한테서요?"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가 놀라서 되물었다.

", 여기로 오셨다면서 제가 와서 뭔가 도울 수 있지 않겠느냐고 썼더군요."

얘기를 꺼내자마자 레빈은 갑자기 당혹스러운 기색으로 말을 멈추고는, 보리수의 새순을 뜯어 입에 넣고 씹으면서 말없이 마차 곁을 걸어갔다. 남편이 해야 마땅할 일에 남의 도움을 받는다는 사실이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로서는 불쾌하리라 추측되어 당황한 것이었다. 실제로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자기 집안일에 남을 엮어 넣은 스쩨빤 아르까지치의 행동거지와 못마땅했으며, 레빈도 그 점을 이해하고 있음을 곧장 알아차렸다. 그렇게 민감하고 세심한 이해심 때문에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레빈을 좋아했다.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레빈이 말했다.

"얘긴즉슨 부인께서 저를 보고 싶어 하신다는 거죠. 그래서 저는 아주 기쁩니다. 당연히 부인 같은 도시의 안주인께는 이곳은 아주 척박할 테죠. 그러니 필요하시다면 제가 힘닿는 대로 도와 드리겠습니다."

"어머, 아니에요!" 돌리가 말했다.

"처음에는 불편했지만, 지금은 제 늙은 유모 덕분에 모든 게 아주 잘 해결되었어요." 그녀가 마뜨료나 필리모노브나를 가리켰다. 자기 얘기를 하는 걸 눈치챈 마뜨료나는 레빈을 향해 다정하고 환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 역시 레빈을 잘 알았고, 그가 막내 아가씨의 좋은 신랑감이라는 점도 아는 터라 혼사가 잘 성사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어서 마차에 타시지요, 저희가 이쪽으로 좁혀 앉을게요." 그녀가 레빈에게 말했다.

"아닙니다, 걸어가겠습니다. 누구 나랑 같이 말이랑 달리기 시합할 사람?"

아이들은 그를 잘 몰랐고 언제 보았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를 대하면서는 위선을 떠는 어른들을 대할 때 종종 보이곤 하는 이상한 수줍음과 혐오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 태도 때문에 아이들은 호되게 벌을 받기 일쑤였다. 위선은 어떤 일에서든 간에 가장 영리하고 통찰력 있는 사람일지라도 속일 수 잇는 법이다. 하지만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르는 아이라면, 아무리 교묘하게 눈속임을 할지언 정 위선만큼은 알아보고 외면하기 마련이다. 다른 결점이라면 몰라도 레빈에게 위선은 눈곱만치도 없었으며. 따라서 아이들은 어머니의 표정에 나타난 것과 똑같은 다정함을 드러냈다. 그의 제안에 손위 아이들 둘이 응하여 얼른 뛰어내려서는 유모나 미스 헐, 혹은 어머니와 함께할 때처럼 거리낌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릴리도 그에게 가겠다고 졸라서 어머니가 아이를 그에게 건네자, 레빈은 어깨 위에 릴리를 목마 태우고 아이와 함께 달려갔다.

"걱정 마세요, 걱정 마시라고요,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 그가 쾌활하게 웃으며 아이 어머니를 향해 말했다.

"애를 다치게 하거나 떨어뜨리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겁니다."

민첩하고 힘차면서도 조심스럽고 주의 깊으며 무척이나 긴장된 그의 동작에, 아이 어머니는 안심하고서 그에게 격려의 미소를 환하게 지어 보였다.

여기 시골에서, 아이들과 그리고 그에게 호감을 주는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와 함께 있자니 레빈은 종종 그러듯이 어린애처럼 쾌활한 기분에 젖어 들었다.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그의 그런 면을 특히 좋아했다. 그는 아이들과 함께 달리면서 체조를 가르쳐 주고, 형편없는 영어를 구사하여 미스 헐을 웃기는가 하면, 자신이 시골에서 하는 일들에 대해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에게 이야기해 주기도 했다.

점심 식사를 마친 뒤 레빈과 단둘이 발코니에 앉아 있던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가 키티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거 아세요? 키티가 이리로 와서 저와 함께 여름을 보낼 거예요."

"그렇습니까?" 그가 얼굴을 붉히며 대꾸했다. 그러고는 즉시 딴 얘기를 꺼내 화제를 돌렸다.

"그러니까, 암소 두 마리를 보내 드려야겠죠? 값을 지불하고 싶으시면, 한 달에 5루블만 내십시오. 지불하는 게 마음이 편하시다면 말이죠."

"고맙지만 괜찮아요. 이제 다 안정이 됐으니까요."

"그러면 제가 암소들을 살펴보지요. 허락하신다면 암소들 먹이는 법도 일러두겠습니다. 사실 모든 건 먹이에 달려 있거든요."

그러고서 레빈은 젖소란 여물을 우유로 가공하기 위한 기계라느니 하는 낙농 이론을 그녀에게 늘어놓았다. 오로지 화제를 돌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런 얘기를 하면서도 그는 키티에 관해 자세한 소식을 듣기를 열망했으며, 동시에 그 소식을 듣게 될까 봐 두려워했다. 그토록 어렵게 찾은 평정심이 그 소식으로 인해 흐트러질 것 같아서였다.

", 그런데 말이에요, 누군가 그런 걸 죄다 지켜봐야 할 텐데요, 대체 누가 그 일을 하죠?"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가 내키지 않는 듯 물었다.

그녀는 이제 마뜨료나 필리모노브나를 통해 집안일을 관리했으며, 그 상태에서 무엇도 바꾸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로서는 농사에 관한 레빈의 지식이 통 미덥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로서는 농사에 관한 레빈의 지식이 통 미덥지 않았다. 젖소가 우유를 만들기 위한 기계라는 견해도 의심스러웠다. 그런 생각은 농사일에 해만 끼칠 것 같았다. 그녀에겐 모든 일이 훨씬 단순했다. 마뜨료나 필리모노브나가 설명해 준 대로 암소 뻬뜨루하와 벨로빠하에게 꼴과 여물을 더 주고, 요리사가 부엌에서 나오는 음식 찌꺼기를 빼돌려 세탁부의 소한테 주지 못하게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건 분명했다. 그에 비해 곡분이나 건초 사료에 관한 레빈의 사변들을 미심쩍고 모호하게 들렸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키티 얘기를 하고 싶었다.

"키티가 고독과 평안보다 더 바라는 건 없다고 편지에 썼더라고요." 잠시 찾아든 침묵을 깨고 돌리가 말을 꺼냈다.

"그래, 좀 어떤가요, 건강은 좀 나아졌나요?" 레빈은 설레는 마음으로 물었다.

"천만다행으로 완전히 회복되었어요. 걔한테 폐 질환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더니만, 애초에 난 전혀 믿질 않았거든요."

"아아, 정말 다행입니다!" 레빈이 이렇게 말하고서 말없이 돌리의 얼굴을 쳐다보았을 때, 그녀는 그의 표정에서 애잔하면서도 맥빠진 무언가를 느꼈다.

", 그런데 말이죠, 꼰스딴친 레빈딴찐 드미뜨리치.."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가 특유의 선량하고도 약간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엇때문에 키티한테 화가 나신 거죠?"

"제가요? 저는 화나지 않았는데요."

"아니요, 화가 나셨잖아요. 그럼 왜 모스끄바에 계실 때 우리 집에도, 친정에도 들르지 않으셨나요?"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 .." 그가 귓볼까지 새빨개져서는 말했다.

"부인처럼 선량하신 분이 그 일에 공감을 못 하시다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다 알고 계시면서, 저를 안쓰럽게 여기시지 않다니요.."

"제가 뭘 알고 있는데요?"

"키티에게 청혼을 했다가 거절당한 것 말입니다." 레빈이 내뱉듯 말했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키티에게 품었던 그 모든 온화한 감정이 모욕에 대한 원한의 감정으로 변해 버렸다.

"어째서 제가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시죠?"

"모두가 알고 있으니까요."

"그것 보세요, 벌써 그것부터 잘못 생각하고 계시잖아요. 저는 그 일을 몰랐어요. 짐작하긴 했지만요."

"! 어쨌든 지금은 아시잖습니까."

"제가 아는 건 단지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뿐이에요. 그게 실제로 무슨 일이었는지는 키티로부터 도무지 알아낼 수가 없더군요. 무슨 일이 있었고, 그게 그 아이를 엄청나게 괴롭혔다는 게 제가 아는 전부죠. 그리고 키티는 나에게 그 일에 대해서는 결코 이야기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어요. 저한테 얘기하지 않았다면 그 누구한테도 안 한 거예요. 그런데 대체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얘기 좀 해주세요."

"무슨 일인지 말씀드렸잖습니까."

"언제요?"

"제가 마지막으로 댁에 들렀을 때죠."

"그렇다면 아시겠네요. 제 말은.."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가 말했다.

"그 아이가 너무나 불쌍하다는 거예요. 당신은 단지 자존심 때문에 힘들어하시지만."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래도.."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가 레빈의 말을 가로챘다.

"그래도 키티가, 그 가엾은 아이나 나는 너무너무 안됐어요. 이젠 모든 게 이해가 돼요."

",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죄송합니다만.."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안녕히 계십시오!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안 돼요, 잠시만요." 그녀가 그의 소매를 부여잡았다.

"잠시만 더 계셔주세요."

"제발 그 얘긴 하지 맙시다." 그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이미 마음 깊숙이 묻혀 버린 줄만 알았던 희망이 다시 꿈틀거리며 솟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제가 당신을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제가 지금처럼 당신을 알지 못했더라면……"

죽은 줄로만 알았던 감정이 점점 더 되살아나 솟구쳐 오르며 레빈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래요, 이제야 모든 걸 깨달았어요."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가 말을 이었다.

"당신은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당신들은, 자유로운 선택권이 주어진 남자들은 자신이 누구를 사랑하는지 언제나 분명하니까요. 하지만 여성만의, 처녀만의 부끄러움을 품고서 상대를 기다려야 하는 처지에 놓인 여자들은 먼발치에서만 당신네 남자들을 보고는 모든 걸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죠. 여자들에게는 종종 그런 느낌이 들곤 해요. 내가 누구를 사랑하는지 모르겠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거죠."

"그렇겠죠, 가슴에서 우러나오지 않으면……"

"아니요, 가슴에서 우러나오긴 한답니다. 하지만 생각 좀 해보세요. 당신네 남자들은 어느 처자를 마음에 점찍으면 그녀의 집을 들락거리고, 친밀한 사이가 되고, 맘에 드는 점이 있는지 없는지 살피고 기다리다가, 마침내 사랑한다는 확신이 생기면 청혼을 하잖아요……."

"글쎄요,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어쨌거나, 당신들은 청혼을 하잖아요. 사랑이 무르익거나, 아니면 점찍어 둔 두 처자 사이에서 저울질이 끝나면요. 그런데 정작 여자한테는 의사를 묻지 않아요. 다들 여자도 스스로 선택하길 바라지만, 여자는 선택할 수가 없어요. 그저 '' 혹은 '아니요'라고 대답만 할 수 있을 뿐이죠."

'그래, 나와 브론스끼 사이에서 선택한 거지.' 레빈은 생각했다. 그의 마음속에서 되살아났던 망령이 도로 사그라들어 이제는 그의 심장을 고통스럽게 짓눌렀다.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 ……" 그가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옷을 고르거나 뭔가를 사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사랑은 그런 게 아닙니다. 선택은 이미 이루어졌고, 그래서 오히려 잘된 거죠.그걸 되풀이할 수는 없습니다."

"어휴, 그저 자존심, 자존심뿐이군요!"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가 말했다. 여자들만 알고 있는 감정에 비하면 저급한 것이라며 경멸하는 투였다.

"당신이 청혼을 했을 때 마침 키티는 대답할 수 없는 처지였던 거예요. 그 애는 동요하고 있었어요. 당신과 브론스끼 사이에서 흔들렸던 거죠. 당시 브론스끼와는 매일 만났고, 당신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죠. 만약 좀 더 나이가 들었더라면, 그러니까 예를 들어 내가 그 애 입장이었더라면 흔들리는 일은 없었을 거예요. 나는 항상 그 사람이 싫었는데, 역시나 결국 그렇게 끝나고 말았죠."

레빈은 키티의 대답을 떠올렸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었다. '아뇨, 그럴 수는 없어요.'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 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저에 대한 부인의 신뢰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습니다만, 부인께서는 지금 잘못 판단하신 것 같습니다. 옳건 그르건 간에, 부인께서 그토록 경멸하시는 그 자존심이란 게 저로 하여금 까쩨리나 알렉산드로브나에 대한 온갖 상념을 결코 떠올릴 수 없게 만든단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완전히 불가능하게 만든다고요."

"하나만 말씀드릴게요. 잘 아시겠지만, 저는 지금 제가 자식처럼 사랑하는 동생에 대해 얘기하고 있어요. 제 말은 그 애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둥 그런 얘기가 아니라, 그때 그 애가 거절했다는 사실이 어떤 것도 입증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이해할 수가 없군요!" 레빈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며 말했다.

"지금 부인이 저를 얼마나 고통스럽게 하는지 모르시나요? 마치 부인의 아이가 죽었는데 사람들이 부인한테 대고 그 아이는 이러저러한 아이였다는 등, 어쩌면 살 수도 있었으며 그랬다면 그 아이 때문에 기뻤을 거라는 등, 그러는 것과 매한가지 아닙니까. 아이는 죽었어요, 죽었다고요. 죽었단 말입니다."

"당신 정말 우습군요." 레빈의 흥분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서글픈 조소를 띤 채 말을 이었다.

"그래, 이제 모든 게 이해가 되네요." 그녀가 우울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면 키티가 와도 우리 집에는 안 오시겠네요?"

", 안 올 겁니다. 물론 까쩨리나 알렉산드로브나를 피하지는 않을 거예요. 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제 존재로 인해 그녀가 불쾌해지는 일은 없도록 노력할 겁니다."

"당신 참, 너무나 우스워요."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가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는 부드러운 눈길로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좋아요, 그 일에 관해서는 얘기하지 않은 걸로 치자고요. 무슨 일이냐? 따냐?"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가 발코니로 들어선 딸에게 프랑스어로 물었다.

"내 삽 어디 있어요, 엄마?"

"엄마가 프랑스어로 말하잖니. 너도 그렇게 해보렴."

아이는 말하고 싶었지만, 삽을 프랑스어로 뭐라고 하는지 잊어버렸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귀띔을 해주고서 삽이 어디 있는지도 프랑스어로 일러 주었다. 그런 모습이 레빈은 못마땅했다.

아까까지와는 달리, 레빈에게는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의 집과 아이들에게서 풍기는 그 모든 것이 전혀 사랑스럽게 여겨지지 않았다.

'무엇 때문에 아이들과 프랑스어로 말하는 거지?' 그가 생각했다.

'이 얼마 부자연스럽게 위선적이냔 말이야! 아이들도 그걸 느끼고 있잖아. 프랑스어를 가르친다는 건 진실함을 저버리도록 만드는 거야.' 그는 속으로 자문자답했다.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가 이 문제를 수십 번이나 되풀이해서 생각했고, 여하튼 간에 진실함이 손상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식으로 아이들을 가르칠 수밖에 없다고 결론 내렸음을 그로서는 알 리가 없었다.

"어디 가시려고요? 좀 더 계세요."

레빈은 차를 다 마실 때까지 앉아 있었지만, 즐거운 기분을 완전히 사라진 뒤였다. 심지어 거북함까지 느껴졌다.

차를 마신 뒤 그는 현관으로 나가 말을 준비해 두라고 일렀다. 그런데 다시 자리로 돌아와 보니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가 낙담한 표정에 눈물을 글썽인 채 몹시 흥분한 모습이었다. 레빈이 밖으로 나간 사이에,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에게는 아이들로 인해 느꼈던 그 날의 모든 행복과 자부심을 단번에 무너뜨리는 끔찍한 일이 벌어졋다. 그리샤와 따냐가 서로 공을 갖겠다고 몸싸움을 벌인 것이다. 아이들 방에서 나는 고함 소리를 듣고서 냅다 달려간 그녀는 아이들의 무지막지한 행태와 맞닥뜨리고 말았다. 따냐는 그리샤의 머리칼을 움켜쥐고 있었고, 그리샤는 흉악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서 누나한테 마구잡이로 주먹질을 해대는 중이었다. 그 광경을 보았을 때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의 가슴에서는 무언가 내려앉았다. 마치 그녀의 삶에 암흑이 닥쳐온 것만 같았다.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겼던 자신의 아이들이 지극히 평범할 뿐 아니라, 심지어 불량하고 교양 없으며 난폭하고 야만적인 성향의 심술궂은 아이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제 다른 것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레빈에게 자신의 불행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낙담한 모습에 레빈은 이러한 싸움이 아무런 나쁜 점도 입증하지 않을뿐더러, 아이들이란 모두 다투기 마련이라며 그녀를 위로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 나는 거드름을 피우며 내 아이들과 프랑스어로 얘기하지 않을 거야. 내 아이들은 저렇게 되지 않을 거야. 아이들을 망치거나 몹쓸 인간으로 만들지만 않으면 돼. 그러면 아주 멋지게 자라겠지. 그래, 내 아이들은 저렇게 되지 않을 거야.'

그는 작별 인사를 건넨 뒤 떠났고, 그녀도 더 이상 그를 붙잡지 않았다.

 

7월 중순에 뽀끄로프스꼬예에서 20베르스따가량 떨어져 있는, 레빈의 누이가 소유한 마을의 촌장이 그곳 농사일과 풀베기의 경과를 아뢰고자 레빈을 찾아왔다. 누이네 영지의 주요 소득은 봄철에 물에 잠기는 목초지에서 나왔다. 예전에는 매년 농부들이 1제샤짜나당 20루블씩 내고 초원의 풀을 모두 베어 갔다. 이곳 농지 경영을 맡게 된 레빈은 풀베기를 할 목초지를 둘러본 뒤, 가치가 더 나간다는 걸 깨닫고서 1제샤찌나 당 25루블로 가격을 매겼다. 농부들은 그 가격에 응하지 않았고, 레빈이 우려한 대로 다른 구매자들마저 쫓아 버렸다. 그는 직접 그리로 가서 일부는 일꾼을 고용하여, 일부는 거둔 풀을 나누어 갖는다는 조건으로 초원의 풀을 모조리 베어 내도록 지시했다. 영지에 소속된 농부들이 온갖 수단을 써서 이 새로운 제도의 시행을 방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은 그대로 진행되어 첫해에만 목초지 대금으로 거의 두 배 가까운 수입을 올렸다. 재작년과 작년에도 농부들의 똑같은 반발이 계속되었지만, 건초 수확은 여전히 그 규칙대로 진행되었다. 올해에는 농부들이 목초지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수확을 배당받는 조건으로 풀을 전부 베기로 했다. 그리하여 지금 촌장이 와서 풀베기가 다 끝났으며, 비가 올까 염려되어 서기를 불러다가 그가 있는 자리에서 건초를 분배했다는 것, 또 주인 몫으로 열한 더미를 쌓아 두었음을 아뢰는 것이었다. 주요 목초지에서 거둔 건초가 얼마나 되냐는 질문에 대답하는 모양새가 애매한 데다가, 허락도 없이 건초를 분배한 촌장의 성급함과 전반적인 말투로 보아 이번 분배에 뭔가 석연찮은 점이 있음을 눈치챈 레빈은 직접 가서 확인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점심때쯤 마을에 도착하여 형의 옛 유모의 남편이자 자신과 친한 사이인 영감 집에 말을 맡겨 놓고서 양봉장으로 향했다. 벌치기 노인에게서 풀베기와 건초 수확에 관한 자세한 정황을 알아볼 요량이었다. 수다스러우면서도 풍모가 단정한 노인 빠르메니치는 레빈을 반갑게 맞이하면서 일의 현황을 낱낱이 보여 주고, 꿀벌들의 상태나 올해의 번성기에 관하여 자세하게 늘어놓았다. 하지만 레빈이 던진 풀베기에 관한 질문에는 우물쭈물하며 불분명하게 대답했기에 레빈의 짐작은 한층 확고해졌다. 그는 풀베기 장소로 가서 낟가리들을 살펴보앗다. 각 더미마다 쌓인 풀의 분량을 보니 수레 쉰 대분에 턱없이 모자랐다. 레빈은 농부들의 거짓 수작을 드러내기 위해, 당장에 건초를 실어 나를 수레들을 끌어와 낟가리 하나를 실어서 헛간으로 옮겨 보라고 지시했다. 그 더미에서는 겨우 서른두 대분의 건초가 나왔다. 처음엔 포동포동하던 풀이 낟가리 속에서 납작해졌다는 둥, 하느님께 맹세코 모든 건 공정했다는 등 촌장이 이렇게저렇게 우겨 댔지만, 레빈은 건초가 자기 허락도 없이 분배되었으며 따라서 수확량이 낟가리당 수레 쉰 대분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오랜 입씨름 끝에 농부들은 예의 낟가리 열한 개를 개당 쉰 대분이라고 쳐서 자신들의 배당으로 취하고, 지주 나리의 몫은 다시 할당하기로 하여 문제가 해결되었다. 이 협상과 낟가리의 분배는 한낮까지 계속되었다. 마지막 남은 건초가 분배되자 레빈은 남은 일을 서기더러 감독하라고 맡기고서 버드나무 막대로 표시해 둔 낟가리 위에 걸터앉아 농민들로 북적대는 초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앞에는 작은 늪지대 너머 강물이 굽이치는 곳에서 낭랑한 목소리로 즐겁게 재잘거리는 아낙들이 알록달록한 열을 이루며 나아갔고, 흩어진 건초들은 연둣빛 그루터기를 다라 구불구불한 잿빛 제방이 되어 순식간에 길게 뻗어 나갔다. 아낙네들 뒤편으로 갈퀴를 든 농부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널따랗고 높직한 건초 더미는 점차 부풀어 오르며 제방 위로 솟았다. 왼편에서는 이미 풀베기가 끝난 초원을 따라 수레들이 삐걱대며 나아가고 있었다. 갈퀴로 한 무더기씩 쓸어 낼 때마다 풀 더미가 하나둘씩 사라지고, 향기로운 건초가 말 엉덩이를 묵직하게 누르며 달구지 가득 쌓여갔다.

"수확하기에 참 좋은 날씨입니다요! 건초가 아주 풍성하겠는뎁쇼!" 레빈 옆에 걸터앉은 영감이 말했다.

"건초가 아니라 무슨 찻잎 같습니다! 새끼 오리가 뿌려진 알곡을 주워 먹듯이 집싸게 거두고 있구먼요. 점심때 이후로 절반은 족히 날랐지 싶습니다요." 그가 쌓여 올라가는 건초더미를 가리키며 덧붙였다.

"마지막 수레냐?" 수레의 앞자리에 서서 대마로 꼰 채찍 끝을 흔들며 곁을 지나는 젊은이를 보고 노인이 소리쳤다.

"마지막이에요, 아버지!" 젊은이가 말고삐를 당기며 외치더니 싱긋 웃으면서 수레에 앉아 역시 미소를 짓고 있는 홍안의 아낙을 돌아다보고는 이내 다시 말을 몰았다.

"저이는 누군가? 아들인가?" 레빈이 물었다.

"제 막내아들입죠." 정감 어린 미소를 지으며 영감이 대답했다.

"아주 견실한 청년이군!"

"괜찮은 녀석입니다."

"그래, 결혼은 했나?"

", 재작년 성 필립보 축일에 장가갔습죠."

"그래, 그럼 아이도 있겠구먼?"

"아이는요 무슨! 꼬박 1년은 아무것도 모르던데요. 부끄러움을 탔던 거죠." 영감이 말했다.

"저기, 저 건초 좀 보십쇼! 진짜 찻잎이 따로 없다니까요!" 그가 화제를 바꾸려고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레빈은 이반 빠르메노프와 그의 아내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들은 레빈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서 건초를 쌓아 올리고 있었다. 이반 쁘르메노프는 수레 위에 선 채 젊고 아름다운 아내가 처음에는 두 팔로 한 아름씩, 나중에는 갈퀴로 한 무더기씩 민첩하게 건네는 건초를 받아 고르게 펼치거나 두루 밟아 다졌다. 젊은 아낙은 힘도 별로 안 들이고 즐겁고 요령 있게 일을 했다. 굳어서 덩어리진 건초는 갈퀴로 단번에 잡히지가 않았다. 그녀는 우선 그것들을 가지런히 펼쳐 놓고 갈퀴를 꽂은 다음, 탄력 있고 재빠른 동작으로 체중을 모두 실어 빨간 가죽띠로 질끈 동여맨 허리를 굽혔다가 다시 몸을 곧게 폈다. 그러고는 앞치마 밑으로 불룩한 가슴을 쑥 내밀면서 두 손으로 능숙하게 갈퀴를 쥐고 건초 더미를 수레 위로 높이 던져 올리는 것이었다. 이반은 아내가 괜한 수고를 하지 않도록 하려는듯, 서둘러 두 팔을 활짝 벌려 건초 한 아름을 받아서는 수레 위에 가지런히 펴놓았다. 마지막 남은 건초를 쇠스랑으로 모아 건넨 아낙은 목덜미에 붙어 있던 건초 부스러기를 흔들어 털어 내고 볕에 그을지 않은 흰 이마 위로 살짝 비뚤어진 빨간 두건의 매무새를 바로잡은 뒤, 건초 더미를 묶기 위해 수레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 이반은 그녀에게 밧줄을 거는 법을 가르쳐 주다가 그녀가 무언가 대꾸를 하자 큰 소리로 껄껄 웃었다. 두 내외의 얼굴에는 얼마 전에 눈을 뜬, 젊고 힘찬 사랑의 표정이 역력했다.

 

건초 더미가 다 묶였다. 이반이 뛰어 내려와 순하고 살찐 말의 고삐를 쥐어 끌었다. 아낙은 건초 더미 위로 쇠스랑을 던져 올리고서 두 팔을 흔들며 활기찬 발걸음으로 한데 모여 원무를 추고 있는 아낙들 쪽으로 갔다. 이반은 길가로 나와서 다른 수레들과 함께 짐수레들의 대열에 끼어들었다. 어깨에 쇠스랑을 걸친 아낙들이 알록달록한 옷 색깔을 빛내며 쾌활하게 재잘대면서 수레들의 뒤를 따랐다. 어느 아낙이 거칠고 걸쭉한 목청을 뽑으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그녀가 한 소절을 다 부르자 거칠거나 가느다란, 쉰 종류는 족히 될 만큼 다양한 음성들이 일거에 같은 노래를 처음부터 의좋게 이어 불렀다.

아낙들이 노래를 부르며 자기 쪽으로 다가오자, 레빈은 마치 먹구름이 흥겹게 천둥을 울리며 몰려오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먹구름이 몰려와 레빈을 사로잡았고, 그가 기대고 있던 건초 더미와 다른 낟가리들과 수레들은 물론 저 멀리 들판으로 이어지는 초원 전체가, 그 모든 것이 환호성과 휘파람과 추임새가 뒤섞인 거칠고 명랑한 노래의 장단에 맞추어 들썩이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레빈은 그토록 건강한 쾌활함이 부러웠다. 삶의 기쁨을 그렇게 표현하는 일에 자신도 한몫 끼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에 그저 낟가리에 기댄 채 바라보거나 듣고만 있어야 했다. 농민들이 노랫소리와 더불어 시야와 귓전에서 사라지자 레빈은 자신의 고독과 육신의 무위, 이 세상을 향한 적대감에 잠겨 깊은 우수에 빠져들었다.

건초 때문에 그와 누구보다도 격렬하게 입씨름을 했던 이들 중 몇몇이, 그가 모욕을 주었거나 혹은 그를 속이려 했던 바로 그 농부들이 그를 향해 쾌활하게 목례를 건넸다. 보아하니 그들은 레빈에게 그 어떤 악의도 품고 있지 않으며, 품을 수도 없고, 그를 속이려 했던 것을 후회하기는커녕 기억조차 못 하는 기색이었다. 그 모든 것이 즐거운 공동 노동의 바다에 잠겨 버린 터였다. 하느님이 하루를 주셨고, 하느님이 원기를 주셨다. 하루와 원기가 노동에 바쳐졌으니, 그 자체가 포상이었다. 누구를 위한 노동인가? 어떻나 결실이 주어질 것인가? 그러한 것들은 부차적이고 하찮은 상념에 불과하다.

레빈은 종종 이러한 삶에 탄복하였고,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젊은 아내를 대하는 이반 쁘르메노프의 모습에 각별한 인상을 받은 그에게 처음으로, 이 괴롭고 무사안일하며 인위적인 개인적 삶을 청렴하고 멋진 공동 노동의 삶으로 바꾸는 것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그와 함께 앉아 있던 노인은 한참 전에 집으로 돌아갔다. 농민들도 전부 흩어지고 없었다. 가가운 곳에 사는 사람들은 집으로 갔고, 멀리서 온 사람들은 저녁을 먹으러 초원의 간이 숙소로 모여들었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은 레빈은 건초 더미에 드러누운 채 계속해서 주변을 보고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초원에서 숙영을 하려고 남은 사람들은 짧은 여름밤을 거의 뜬눈으로 지새웠다. 처음에는 저녁을 먹으며 유쾌하게 떠드는 소리와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더니 나중에는 또다시 노랫소리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긴 노동의 하루는 그들에게 즐거움 외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아침노을이 물들기 직전 사위가 고요해졌다. 들리는 건 오로지 늪에서 그칠 줄 모르는 개구리 울음소리와 초원에 피어오른 아침 안개 속에서 말들이 콧김을 내뿜는 소리뿐이었다. 정신을 차린 레빈은 건초 더미에서 몸을 일으켜 별들을 올려다보고서야 날이 샜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대체 뭘 할 건데? 어떻게 그걸 해낼 건데?' 그 짧은 밤 동안 수없이 고쳐 생각하고 느낀 온갖 감회를 분명하게 표현해 보려 애쓰며 그는 속으로 되뇌었다. 거듭 생각하고 느낀 모든 것은 세 가지 상념들로 나뉘었다. 첫째는 자신의 낡은 삶, 자신의 무용한 지식,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신의 교양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부정은 그에게 쉽고도 간단한 일이었고, 쾌감을 안겨 주는 일이었다. 다른 상념은 이제부터 그가 살아가고자 하는 삶과 관련한 것이었다. 그는 그 삶의 소박함과 정결함과 당위성을 분명하게 느꼈으며, 그토록 안절부절못하며 결핍을 절감했던 만족과 평온과 완덕(完德)을 그 속에서 찾게 되리라 확신했다. 그러나 낡은 삶에서 새로운 삶으로의 이행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하는 질문 위에서 세 번째 상념이 맴돌고 있었다. 그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떠오르는 것이 전혀 없었다.

'아내를 얻을까? 직업을 가질까? 뽀끄로프스꼬예를 버릴까? 땅을 살까? 조합에 가입할까? 농민 처자와 결혼을 할까? 대체 그걸 어떻게 해낼 거냐고!' 또다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해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하긴, 밤을 지새웠으니 명료하게 떠올릴 수가 없는 거야.' 그는 생각했다.

'나중에 해답을 찾아보자. 한 가지 분명한 건, 어젯밤에 내 운명이 결정되었다는 거다. 가정생활에 대한 예전의 꿈들은 모조리 헛된 망상일 뿐, 잘못된 거야. 이 모든 게 훨씬 더 단순하고 좋은걸..'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솜털 구름 사이의 은빛 조가비 같은 기이한 반점을 바라보며 그는 생각했다. 그것은 그의 머리 바로 위 하늘 한복판에 머물러 있었다.

'이 멋진 밤에 모든 것이 얼마나 매혹적인가! 어느새 이 조가비가 생겼을까? 조금 전에도 하늘을 보았는데, 그때는 그저 두 가닥의 흰 줄무늬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잖아. 그래, 삶에 대한 나의 관점도 바로 이렇게 무심결에 변해 버린 거야!'

그는 초원을 벗어나 큰길을 따라서 마을 쪽으로 걸었다. 바람이 일더니 날이 잿빛을 띠며 어두컴컴해졌다. 여느 때처럼 여명을 앞두고서 일순간 흐려진 것이다. 빛이 어둠을 완전히 제압하기 직전이었다.

레빈은 추위로 몸을 웅크린 채 땅을 내려다보며 걸음을 재촉했다.

'누구지? 누군가 마차를 타고 오고 있는데.' 방울 소리를 듣고서 그는 고개를 들었다. 그로부터 40보쯤 떨어진 곳, 그가 걷는 잔풀투성이 큰길의 맞은편에서 지붕에 송아지 가죽으로 만든 여행용 가방들을 얹은 사륜마차가 말 네 마리에 매여 달려오고 있었다. 둘씩 짝지은 말들은 궤도에서 벗어나 끌채 쪽으로 서로 바짝 달라붙어 있었지만, 숙련된 마부가 자리에 비스듬히 앉아 끌채를 궤도에 맞추어 지탱하는 덕분에 마차는 매끄럽게 나아갔다.

레빈은 단지 그 정도만 알아챘을 분 거기 누가 타고 있는지도 생각하지 않은 채 무심히 마차 안을 바라보았다.

마차 안 한구석에서는 노파가 졸고 있었고, 창가 쪽에는 방금 잠에서 깬 듯한 젊은 아가씨가 앉아서 양손으로 흰 머리쓰개의 끈을 붙잡고 있었다. 레빈에게는 낯선, 우아하고 복잡한 내면의 삶으로 충만하여 해맑은 얼굴로 명상에 잠긴 그녀의 시선은 레빈 너머 일출의 여명을 향해 있었다.

그 모습이 사라지려는 바로 그 순간, 꾸밈없는 두 눈동자가 그에게로 향했다. 그를 알아본 그녀의 얼굴에 놀라움과 반가움이 번졌다.

그가 잘못 볼 수는 없었다. 이 세상에 그런 눈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에게 있어 세상 전부와 삶의 의미를 하나로 집중시킬 수 있는 존재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것은 바로 키티였다. 레빈은 그녀가 기차역에서 예르구쇼보로 가는 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잠 못 든 지난밤 레빈을 설레게 했던 그 모든 것들, 그가 다짐했던 그 모든 결심이 일시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농민 처자와 결혼하려 했던 자신의 망상을 혐오스러운 심정으로 떠올렸다. 오로지 거기에, 빠른 속도로 멀어지면서 길의 반대편으로 건너가는 마차 속에, 최근 그를 그토록 모질게 괴롭혀 온 인생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가능성이 타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박을 내다보지 않았다. 마차 용수철의 삐꺽임도 이제 들리지 않았고 방울 소리만 아득했다. 개 짖는 소리로 짐작건대 마차는 마을을 벗어난 듯했다. 남은 건 황량한 들판과 저 앞의 마을, 그리고 모든 것으로부터 소외된 채 인적 없는 대로를 홀로 걷고 있는 고독한 레빈 자신뿐이었다.

그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가 넋을 잃고 바라보았던, 지난밤의 상념과 감정의 모든 흐름을 구현하였던 은빛 조가비를 다시 찾을 수 있었으면 싶었다. 그러나 하늘에 더 이상 은빛 조가비처럼 보이는 것은 없었다. 거기, 닿을 수 없는 창공에서는 벌써 신비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은빛 조가비는 흔적조차 없었지만, 점점 더 잘게 흩어져 가는 솜털 구름의 양탄자가 광활하고 고르게 펼쳐져 하늘의 절반을 덮고 있었다. 하늘은 담청색을 띠었고, 여전히 부드럽게 빛났다. 그러나 의문으로 가득한 그의 시선에는 여전히 닿을 수 없는 높이로 응답할 뿐이었다.

'그래.' 레빈은 생각했다.

'이 소박한 노동의 삶이 아무리 좋아도 그 생활로 돌아갈 수는 없어.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어.'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의 최측근들을 제외하고는, 외견상 그토록 냉정하고 이성적인 이 사람이 자신의 전반적인 기질과는 모순되는 한 가지 약점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어린아이나 여자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도무지 무심하게 보거나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눈물을 보면 그는 당혹스러워졌으며, 이내 완전히 분별력을 잃고 마는 것이었다. 그의 사무실 주임과 비서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여자 민원 의뢰인들에게는 일을 그르치고 싶지 않으면 절대로 울지 말라고 미리 경고해 두곤 했다. "그러면 그분은 화를 내면서 더 이상 당신의 얘기를 듣지 않을 겁니다." 그들은 그렇게 말했다. 실제로 그러한 경우, 눈물이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에게 불러일으킨 정신적 혼란은 갑작스러운 역정으로 나타나곤 했다.

"나는 아무것도 해줄 수도, 할 수도 없소! 어서 썩 물러가시오!" 보통 그는 이렇게 고함을 지르곤 했다.

경마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안나가 그에게 브론스끼와의 관계를 공표하고 뒤이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울음을 터뜨리자,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아내에 대해 치미는 노여움에도 불구하고, 눈물이 항상 그에게 불러일으키는 예의 정신적 혼란이 물밀듯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을 감지하고, 그 순간 자신의 감정 표현이 상황에 걸맞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한 그는 자기 안에서 생명의 온갖 현상이 발현되는 것을 억제하고자 안간힘을 썼으며, 따라서 꼼짝도 않은 채 그녀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 때문에 그의 얼굴에는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은 기괴한 표정이 드리웠고, 그런 그의 모습에 안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집에 도착하여 아내를 마차에서 내려 준 그는 자제력을 발휘하여 점잖게 그녀와 작별 인사를 나눈 뒤 그 자신에게 아무런 강제력도 지니지 않을 말을 내뱉었다. 내일 그녀에게 자신이 내린 결정을 알려 주겠다고 한 것이었다.

그가 품고 있던 최악의 의혹이 사실임을 확인해 준 아내의 말은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의 가슴에 가혹한 고통을 떠안겼고, 그녀의 눈물이 초래한 기이한 육체적 연민의 감정으로 인하여 그 아픔은 가일층 심해졌다. 그러나 혼자 마차에 남게 되자,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그러한 연민이나 최근 자신을 괴롭혀 온 의혹과 질투의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기분을 맛보며 스스로 놀라고 기뻐하기까지 했다.

그는 오래도록 앓던 이를 뽑은 듯한 심정이었다. 무서운 고통과 자신의 머리통보다도 큰 거대한 무언가가 턱으로부터 빠져나가는 느낌이 지나가면, 병자는 별안간 황홀감에 어안이 벙벙한 채 그토록 오랫동안 그의 삶에 해악을 끼치고 모든 주의력을 앗아 갔던 것이 더 이상은 존재하지 않음을, 그리하여 이제는 다시 살 수 있고 생각할 수 있으며 이것에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고 느끼는 법이다. 그러한 심정을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몸소 체험하고 있었다. 기괴하고 무서운 고통을 겪었지만, 이제 그것은 사라졌다. 그는 다시 살 수 있고, 아내 생각만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느꼈다.

'명예심도, 감정도, 신앙심도 없는 타락한 여자 같으니! 비록 그녀를 불쌍히 여기며 스스로를 속이려 들었지만, 나는 줄곧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목도하고 있었어.' 그는 이렇게 되뇌었다. 그러자 정말로 그 사실을 늘 보아 왔던 것만 같았다. 그는 지나온 삶의 세세한 대목들을 곰곰이 떠올려 보았다. 예전에는 나쁘지 않게 여겨지지 않던 것들이었건만, 이제는 그 하나하나가 아내가 줄곧 타락한 여자였음을 뚜렷하게 입증하고 있었다.

'내 삶을 그녀와 엮다니, 실수였어. 하지만 그 실수에 악의는 전혀 없었지. 따라서 내가 불행해질 수는 없어. 잘못한 건 내가 아니라 그녀니까.' 그는 생각했다.

'어쨌든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나에게 그녀는 이제 존재하지 않으니까..'

아내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아들에 대한 감정도 변해 버린 지금, 아내와 아들에게 닥쳐올 모든 일은 더 이상 그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가 이 순간 신경을 기울이는 단 한 가지는 어떻게 하면 가장 근사하고 가장 고상하며 자신한테 가장 편리한, 따라서 가장 정당한 방식으로, 그녀의 타락한 생활이 그에게 묻혀 놓은 더러운 진창을 털어 내고 사회생활을 계속 하면서 명예롭고 유익한 인생 행로를 나아갈 수 있는지의 문제였다.

'천박한 여자가 저지른 죄악 때문에 내가 불행해질 수는 없는 법. 나는 다만 그녀가 몰아세운 이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날 최상의 돌파구를 찾으면 되는 거야. 그리고 난 그것을 찾아낼 거다.' 그의 인상이 점점 더 험악하게 찌푸려졌다.

'이런 일을 겪는 게 내가 처음도 아니고 마지막도 아니야.'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의 머릿속에는 '아름다운 헬레네'[독일 출신 음악가 자크 오펜바흐가 작곡한 오페레타. 메넬라오스는 아내 헬레네에게 기만당하는 희극적인 인물로 등장한다]로 인해 모든 이들의 기억 속에 자리하게 된 메넬라오스를 비롯한 역사적인 예들은 말할 것도 없고, 동시대 사교계에서 아내가 부정을 저지른 온갖 실례들이 떠올랐다. <다리얄로프, 쁠따프스끼, 까리바노프 공작, 빠스꾸진. 백작, 드람..> '그래 드람도 그랬지.그렇게 성실하고 유능한 사람이 말이야..세묘노프, 차긴, 시고닌..설령 이 사람들에게 그 어떤 불합리한 조롱(redicule)이 퍼부어지고 있다 해도 나는 거기서 불행 말고는 어떤 것도 본 바가 없으며, 늘 그들을 동정해 왔어.'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속으로 이렇게 되뇌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그런 유의 불행을 그는 결코 동정한 적이 없을 뿐 아니라, 남편을 배신한 아내의 사례들을 접할수록 스스로를 더 높이 평가하곤 했던 것이다.

'누구한테나 닥칠 수 있는 불행이야. 그리고 그 불행이 나를 덮친 거다. 내가 할 일은 최상의 방법으로 이 상황을 타개하는 것뿐이야.' 그는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였던 사람들의 대처 방법을 하나하나 자세히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다리얄로프는 결투를 했지……'

결투는 특히 젊은 시절에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를 매혹시키곤 했는데, 이는 그가 육체적으로 소심한 사람이었고 그도 자신의 그러한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자신에게 겨누어진 권총을 떠올리기만 해도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평생 그 어떤 무기도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바로 그러한 공포로 인해 젊어서부터 그는 종종 결투를 상상해 보곤 했으며,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 수밖에 없는 상황에 스스로를 대입해 보기도 했다. 성공을 거두고 인생에서 확고한 기반을 닦은 뒤로 그러한 감정은 잊은 지 오래였지만, 그럼에도 감정의 습관이 다시 고개를 든 지금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자신의 소심함에 대한 두려움에 너무나 강하게 사로잡힌 나머지, 스스로도 결코 결투를 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결투에 관한 문제를 온갖 측면에서 두루 생각하고 가늠해 보는 것이었다.

'확실히 우리 사회는 (영국과는 달리) 아직도 너무 미개해서, 아주 많은 이들 -그중에는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각별히 존중하는 견해의 소유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 이 결투를 긍정적으로 바라본단 말이지. 하지만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까? 가령 내가 결투를 신청한다고 치자..'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계속해서 혼자 중얼거리며 결투를 신청한 뒤 보내게 될 밤과 자신에게 겨눠진 총을 생생하게 떠올리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고, 자신은 결코 그런 짓을 하지 않으리라는 걸 이내 깨달았다. '사람들이 내게 총 쏘는 법을 가르쳐 주고는 자리에 세우겠지. 그러면 나는 방아쇠를 당기고.' 그는 눈을 감은 채 생각을 이어 갔다.

'그리고 내가 그를 죽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거지.' 그러고서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이 어리석은 상념들을 몰아내고자 머리를 흔들었다.

'간통을 저지른 아내와 아들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는 일에 사람을 죽이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래 봐야 여전히 아내와의 관계를 어떻게 정리할 지 결단을 내려야 하겠지. 게다가 더 있을 법하고 확실한 점은, 내가 죽거나 다치리라는 것이야. 내가, 이 무고한 사람이 희생양이 되어 죽거나 다치다니, 그건 더 무의미하지 않은가. 그뿐만이 아니지. 내 편에서 결투를 신청하는 건 정당한 행동이 아니다. 친구들이 나를 결투에 절대로 내보내지 않으리라는 건 뻔한 사실 아닌가. 러시아가 필요로 하는, 뛰어난 행정가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도록 그냥 내버려 두지는 않을 테니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결국에는 사태가 결코 위험한 지경까지 가지 않으리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저 결투 신청을 통해 나 스스로를 거짓되게 포장하는 셈일 뿐이다. 정정당당하지 못하고 가식적인 행동인 데다 다른 이들이나 나 자신에 대한 기만이지. 결투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나에게서 그것을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 목표는 내 활동을 아무런 장애 없이 지속해 나가기 위해 필요한 나 자신의 평판을 보전하는 것이다.' 예전에도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에게 커다란 의의를 지녀 온 공직 활동이 지금은 특히나 중요하게 여겨졌다.

결투라는 사안을 심의하고 기각시킨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이혼으로 생각을 돌렸다. 그것은 그가 떠올린 남자들 몇몇이 선택한 또 다른 출구였다. 온갖 유명한 이혼 사례들(그가 익히 알고 있는 고위층 사교계에서 그런 건수들은 아주 많았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본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그러나 자신이 염두에 두고 있는 목적에 해당하는 경우를 단 하나도 찾지 못했다. 그 모든 경우에서 남편은 부정한 아내를 상대에게 그대로 넘겨주거나 팔아넘겼고, 그러면 잘못을 저질렀기에 결혼할 권리가 없는 아내는 새로운 반려자와 허울만 합법적인 날조된 결혼을 결행하곤 하였다. 자신의 경우, 죄지은 아내만 배척당하고 끝나는 합법적 이혼을 성사시키기란 불가능하다는 걸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알고 있었다. 그가 처한 삶의 복잡한 조건들은 아내의 죄상을 적발하기 위해 법이 요구하는 흉측한 증거들을 드러내는 일을 용납할 수 없을 것이었다. 다 알다시피, 이 세계의 우아함이 혹시라도 존재할지 모르는 그런 증거들의 활용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며, 설혹 활용한다 해도 결국 아내보다는 그 자신에 대한 여론을 망치게 될 것이었다.

이혼을 시도하다가는 그의 적들, 그리고 사교계에서 그의 높은 지위를 깎아내리고 비방하려는 자들에게 횡재를 안겨 줄 추악한 스캔들로 비화될 수 있었다. 이혼을 통해서는 주된 목표, 즉 혼란을 최소화하면서 자시느이 입지를 확고히 다지는 것이 불가능했다. 뿐만 아니라 이혼 과정에서, 심지어 이혼을 하려고 들자마자 아내는 남편과 관계를 끊고 자신의 정부와 살림을 차릴 게 뻔했다. 아내에 대한 완전한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의 마음속에는 그녀를 향한 한 가지 감정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아내가 아무런 장애 없이 브론스끼와 합쳐지는 게 영 싫은 마음이었다. 그렇게 되면 아내의 죄가 그녀에게 이롭게 작용하게 되는 셈이니 말이다. 이 생각이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의 화를 돋우었기에 그는 쓰라린 마음으로 신음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엉덩이를 들어 마차의 자리를 고쳐 앉은 뒤 추위에 민감한 빼빼 마른 두 다리를 부드러운 나사 천으로 감쌌다.

'형식적인 이혼 말고, 까리바노프와 빠스꾸진, 그리고 그 마음씨 착한 드람처럼 대처할 수도 있다. 즉 아내와 별거를 하는 거지.'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고서 생각을 이어 갔다. 그러나 이 조치 역시 치욕스럽기는 이혼과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중요한 것은 역시 형식적인 이혼과 똑같이 아내를 브론스끼의 품 안에 던져 주는 꼴이 된다는 점이다.

'아니야, 그건 있을 수 없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야!' 다리를 감싼 천을 다시 뒤집어 덮으며, 그는 생각했다.

'내가 불행해지는 일은 없을 거야. 그리고 그녀도, 그 작자도 행복해져서는 안 돼.'

아직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했을 때 그를 괴롭혔던 질투심은 아내의 실토로 인해 앓던 이가 빠질 때의 고통과 함께 사라져버리고, 이제 다른 것이 그 감정을 대체했다. 그것은 아내가 승승장구하지 못하기를, 지은 죄에 마땅한 응징을 당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스스로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자신의 안녕과 명예를 깨뜨린 대가로 그녀가 고통당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거듭하여 결투, 이혼, 별거의 조건들을 차례로 심의하고 다시 거듭하여 그것들을 기각한 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출구는 단 한 가지밖에 없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즉 벌어진 사태를 세상으로부터 은폐하고 그녀를 자기 곁에 붙잡아 둔 채,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둘의 관계를 끊어 놓는 것이었다. 역시 스스로는 인정하지 않았으나,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것이 아내를 응징하기 위한 조치라는 사실이었다.

'내가 내린 결정을 선포해야 해. 그녀가 가정에 초래한 이 난국에 대해 심사숙고한 결과, 양쪽 모두를 위해 그 어떤 해결책도 외견상 현재 상황을 유지(status quo)하는 것보다 나을 게 없으며, 나는 이에 동의하되 어디까지나 그녀 쪽에서 나의 뜻을 이행한다는 엄격한 조건하에서, 즉 정부와의 관계를 끊는다는 조건하에서만 그렇다고 말이다.' 최종적으로 이러한 결정이 승인되었을 때, 그것이 옮음을 확증해 주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생각이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오직 그러한 결정을 내릴 때에만 나는 종교에 합당하게 처신하게 된다.' 그는 생각했다.

'그러한 결정을 내릴 때에만 나는 죄지은 아내를 내치는 대신 그녀에게 개선의 여지를 주며, 아무리 괴로운 일일지언정 그녀의 개선과 구원을 위해 내 힘의 일부를 바칠 수 있게 되는 거다.' 자신이 아내에게 도덕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으며 그러한 모든 개선의 시도들이 결국 위선 외에는 아무런 성과도 내오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그토록 고통스러운 순간을 겪으면서도 종교에서 지침을 구할 생각은 결코 해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결정이 종교가 요구하는 바에 부합하게 된 듯 보이는 지금에 와서는 이 결정에 대해 종교의 재가를 받았다는 사실이 그에게 뿌듯한 만족감과 약간의 평온함마저 안겨 주는 것이었다. 자신이 그토록 중대한 인생사와 관련해서 종교의 규범에 어긋나게 처신했다고 그 누구도 말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니 내심 흐뭇하기까지 했다. 냉담함과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와중에도 그는 언제나 종교의 기치를 드높이 치켜들고 있었던 것이다. 보다 세세한 사항들을 곰곰이 따져 보던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심지어 왜 아내와의 관계가 예전과 다름없이 유지될 수 없는지조차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가 아내에게 예전과 같은 존경을 표할 리는 결코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형편없고 부정한 아내라는 이유로 자신이 고통을 겪으며 생활을 엉망으로 만들 이유는 전혀 없으며, 그런 일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래,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을 재정비하는 시간이 지나고 나면, 관계는 예전처럼 회복될 것이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되뇌었다.

'살다 보면 어느새 이러한 혼돈을 느끼지 못하게 되겠지. 그녀는 불행해져야만 한다. 그러나 나는 잘못한 게 없으니 불행해질 리 없다.'

 

뻬쩨르부르끄에 거의 당도했을 즈음,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그러한 결심을 굳혔을 뿐 아니라, 아내에게 보낼 편지까지 이미 머릿속에 써둔 참이었다. 수위실로 들어선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부처에서 가져온 서한과 서류들에 눈길을 돌리고는 자신의 서재로 가지고 오라고 일렀다.

"말은 풀어 놓고, 아무도 들이지 말게." 수위의 질문에 그는 기분이 양호한 상태임을 나타내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머금은 채 '들이지 말게'라는 말에 힘을 주어 대답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서재 안을 두 차례 가로지르고는 널찍한 책상 앞에 멈춰 섰다. 책상에는 앞서 들어왔던 시종이 켜놓은 양초 여섯 자루가 타고 있었다. 그는 손가락 마디마디를 한차례 꺾은 뒤 자리에 앉아서 필기구를 하나씩 챙겼다. 책상에 팔꿈치를 괴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곧이어 일필휘지로 편지를 써나가기 시작했다. 호칭은 생략한 채 프랑스어로, '당신'이라는 대명사를 사용하여 편지를 썼다. 러시아어라면 느껴졌을 냉담함이 프랑스어 대명사에는 드러나지 않았다.

 

"우리가 나눈 마지막 대화에서 그 대화의 주제에 대한 나의 결정을 통보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바 있소. 모든 것을 면밀하게 숙고한 끝에 그 약속을 이행하고자 지금 이 편지를 쓰는 것이오. 내 결정은 다음과 같소. 당신의 행실이 어떠했든 간에, 하느님의 권한으로 맺어진 우리의 인연을 끊어 낼 권리가 나에게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소. 부부 중 어느 한 사람의 변덕이나 독선, 혹은 범죄에 의해서조차 가정은 파괴되어서는 안 되며, 다라서 우리의 생활은 예전처럼 진행되어야 하오. 이는 나와 당신, 그리고 우리 아들을 위해서 필요 불가결한 사항이오. 나는 당신이 이 편지를 쓰게 된 동기를 제공한 것에 관하여 이미 후회했고 지금도 후회하고 있다고 믿으며, 우리 불화의 원인을 뿌리째 도려내고 과거는 잊고자 하는 나의 뜻에 호응해 주리라 확신하오. 그러지 않을 경우 당신과 당신의 아들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는 당신 자신이 예상할 수 있을 것이오. 이 모든 것에 관하여 개인적인 만남을 통해 보다 상세하게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라오. 별장 생활도 끝나 가니 가능한 한 빨리, 화요일 안에 뻬쩨르부르끄로 돌아오길 바라오. 이사에 필요한 모든 조치는 이미 취해 놓았소. 이러한 나의 청을 당신이 이행하느냐의 여부에 내가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을 명심하길 바라오."

A. 까레닌

추신: 각종 비용 처리에 드는 돈을 편지에 동봉하오.

 

편지를 쭉 훑어본 그는 그 내용이, 특히 돈을 동봉한 것을 상기시키는 대목이 만족스러웠다. 가혹한 표현도, 비난의 말도 없었으나 그렇다고 관대함이 담긴 것도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돌아오게끔 이끄는, 황금 다리와도 같은 명분이 제시된 것이었다. 그는 편지를 접어서 상아로 만든 크고 육중한 칼로 문지른 다음 돈과 함께 봉투에 넣은 뒤, 자신의 잘 정돈된 필기도구들을 대할 때면 늘 내면에서 솟아오르곤 하는 예의 뿌듯함을 느끼며 벨을 울렸다.

"파발꾼에게 전하게. 내일 별장에 있는 안나 아르까지예브나에게 전달 하도록." 지시를 내린 다음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겠습니다, 각하. 서재로 차를 내올까요?"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그러라고 이르고는 육중한 페이퍼 나이프를 손으로 놀리며 안락의자로 향했다. 의자 곁에는 등불과 막 읽기 시작한, 이구비움 판[이탈리아 움브리아 지방의 이구비움(오늘날의 구비오)에서 발굴된 동판.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전 1세기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1444년에 발굴되었다. 고대 이탈리아의 전례 의식에 관한 규정들이 움브리아 방언으로 기록되어 있다]에 관한 프랑스 서적이 놓여 있었다. 안락의자 위쪽에는 저명한 화가가 그린 안나의 초상화가 타원형의 금빛 액자에 담긴 채 걸려 있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그 그림을 힐끗 올려다보았다. 속을 꿰뚫어 볼 수 없는 눈동자가 두 사람이 담판을 지었던 저녁의 바로 그 마지막 순간처럼 그를 조롱하듯 뻔뻔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화가가 탁월하게 묘사한 머리 위의 검은 레이스와 검은 머리칼, 넷째 손가락에 보석 반지가 잔뜩 끼워진 희고 아름다운 손이 파렴치하고도 불손하게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를 자극했다. 한동안 초상화를 바라보던 그는 두 입슬이 '부르르' 소리를 낼 정도로 치를 떨면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서둘러 의자에 앉아서 책을 펼쳤다. 독서를 해보려 했지만, 아무리 해도 이전에 이구비움 판에 관해 느꼈던 왕성한 흥미를 돌이킬 수가 없었다. 그는 책을 보면서 딴생각을 했다. 아내에 관한 것이 아니라 얼마 전 그의 국정 활동 중 일어난 한 가지 복잡한 문제에 관한 생각으로, 요사이 그에게 업무상 중대한 이해가 걸린 사안이었다. 그는 지금 자신이 어느 때보다도 그 문제의 핵심을 간파하고 있으며,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자신의 입지를 더욱 드높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적들의 지위를 실추시키고 국가에 어마어마한 이익을 가져다줄 중대한 아이디어가 머릿속에 잉태되었음을 느꼈다(이는 자아도취에서 나온 생각이 아니었다). 하인이 차를 날라다 내려놓고 방을 나가자마자,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다가갔다. 일상 업무 서류들이 담긴 가방을 책상 한가운데로 밀어놓고는 득의 어린 미소를 살짝 머금은 채 그는 필통에서 연필을 꺼내 자신이 요청한 복잡한 문건을 숙독하였다. 그것은 목전에 놓인 문제에 관한 문건이었으니, 문제란 바로 이러한 것이었다. 정부 관료로서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지닌 특장점은 오직 그 자신에게 고유한 것이자 출세 가도를 달리는 모든 관료들이 지닌 독특한 성품으로서, 투철한 공명심과 자제력, 공정성, 자신감과 더불어 그의 입신양명을 가능케 한 것, 바로 관료주의적 허례허식에 대한 경멸과 문서 수신의 간소화, 가능한 한 실질적인 사안으로 곧장 접근하는 태도, 그리고 근검절약이었다. 그런데 그 유명한 62일 위원회에서 자라이스끄현 농경지의 관개 사업이 안건으로 상정되는 사태가 벌어졌다.[러시아 각지에서는 1873년 대기근을 겪은 뒤 수많은 관개 사업안이 기획되었다. 이 기획들은 그것의 실질적인 의의와는 무관하게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타낼 기회를 제공했고, 손쉽게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수단이 되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부처의 관할인 이 사안은 쓸데없는 예산 낭비와 관료주의적 업무 처리의 뚜렷한 사례였다. 이 사업의 당위성에 대해서는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도 잘 알고 있었다. 자라이스끄현의 농경지 관개 사업은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의 선임자의 선임자에 의해 착수되었는데, 사실상 엄청난 돈이 전적으로 무익하게 소모되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소모되고 있었다. 그 모든 과정이 아무런 성과도 가져오지 못하리라는 것은 자명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부임하자마자 곧바로 그러한 사태를 파악하고서 사업을 직권으로 처리하고자 했다. 그러나 자신의 입지가 아직 확고하지 않다고 느끼던 처음에는 그러한 일 처리에 아주 많은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으며 따라서 자신의 개입이 무모할 것임을 깨달았고, 이후로는 다른 일들에 골몰하느라 그 건에 관해서는 그저 잊고 있던 터였다. 모든 게 그렇듯이, 그 일 역시 타성에 의해 저절로 굴러가고 있었다(많은 사람들이 이 사업으로 먹고살았으며, 특히 도덕적 품성이 뛰어나고 음악적 교양이 풍부한 어느 가정이 그러했다. 그 집안의 모든 달들이 현악기를 연주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그 집안과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으며, 나이 든 딸들 중 하나가 결혼할 때에는 대부가 되어 주기도 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생각하기에, 적대적인 부처에서 이 사안을 들고 나선 것은 부당한 처사였다. 모든 부처에는 일종의 업무적 관례상 아무도 들먹이지 않는 그런 사안이 있게 마련이니 말이다. 이제 그에게 도전장이 던져진 이상, 그는 과감히 그것을 받아들여 자라이스그현 농경지 관개 담당 위원회의 업무 실적으로 조사하고 검토하기 위한 특별위원회의 선임을 요청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 대신 그는 상대쪽 인사들을 가만두지 않았다. 이민족의 정착에 관한 사안을 위임할 특별위원회도 선임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 사안은 62일 위원회에서 우연히 제기된 것인데,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이민족의 비참한 상황을 고려할 때 결코 미룰 수 없는 문제라며 적극적으로 지지한 것이다. 이는 위원회의 몇몇 부처 사이에서 논쟁의 빌미가 되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에게 적대적인 부처는 이민족들의 상황이 매우 양호하며, 의도된 개혁은 오히려 그들의 번영에 해를 끼칠 수 있다고, 혹시라도 열악한 점들이 있다 해도 그것은 법에 의해 내려진 조치들을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의 부처에서 시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지금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요청할 작정이었다. 첫째, 현장에서 이민족 현황을 조사할 새로운 위원회를 선임할 것. 둘째, 이민족의 상황이 위원회의 공식 자료들에 언급된 그대로라면, 그러한 암울한 상황의 원인을 정치적, 행정적, 경제적, 민속학적, 물질적, 종교적 관점에서 조사할 또 다른 새로운 학술위원회를 선임할 것. 셋째, 이민족이 처한 불리한 여건들을 예방하기 위해 최근 10년간 상대 부처에서 취한 조치들에 관한 보고를 요청할 것. 끝으로, 위원회에 입수된 1863125일 자 및 186467일 자 보고서 제17015호와 제18308호에 근거하여, 해당 부처는 어떤 연유로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법률 제00, 18조 및 36조의 부가 조항의 정신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처신을 하였는지에 대한 해명을 요구할 것. 이러한 생각의 요지를 신속하게 써 내려갈 대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의 얼굴에는 생기 어린 홍조가 감돌았다. 한 페이지를 가득 메운 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벨을 울리고는 사무실 주임에게 보낼 메모를 건넸다. 필요한 참고 자료의 송부를 요청하는 메모였다. 그런 다음 방 안을 한차례 가로지른 그는 또다시 초상화를 쳐다보고는 낯을 찌푸리더니 경멸 섞인 미소를 지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다시 이구비움 판에 관한 책을 읽으며 그에 대한 흥미를 되찾았고, 정각 112시에 침실로 향했다. 잠자리에 누워 아내와의 일을 떠올렸을 때, 이미 아까의 암울한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브론스끼가 상황이 절망적이라며 남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으라고 설득할 때마다 안나는 그에게 불같이 화를 내며 완강하게 반발했지만, 그럼에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자신의 처지가 거짓되고 부정하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또한 그러한 상황을 바꿀 수 있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다. 남편과 함께 경마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흥분한 나머지 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말았다. 그때 그녀는 극심한 고통을 느끼면서도 자신의 행동에 희열을 느꼈다. 남편이 자신을 남겨 두고 가버리자, 이제 모든 것이 분명해졌으며 적어도 거짓과 기만은 없을 테니 기쁘다고 스스로에게 말하기도 했다. 이제 상황이 의심할 바 없이 영원히 결정된 것만 같았다. 새로운 상황은 나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명확하게 결론지어질 테니, 이제 애매함이나 허위는 있을 수 없었다. 그 이야기를 입 밖에 냄으로써 자신과 남편에게 불러일으킨 고통은 모든 것이 매듭지어짐으로써 보상될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날 저녁 그녀는 브론스끼와 만났다.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서라도 그에게 남편과의 사이에서 벌어진 일에 관해서 이야기를 해야 했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눈을 떴을 때, 그녀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자신이 남편에게 한 말이었다. 어쩌자고 그렇게 기괴하고 무례한 말을 내뱉을 생각을 했는지, 지금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또한 그로 인해 초래될 결과가 어떠할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하게만 여겨졌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고,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아무런 말도 없이 떠나 버렸다. '브론스끼를 만났지만, 나는 그에게 말하지 않았어. 그가 떠나려는 순간 돌려세우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단념했지. 왜 그를 보자마자 그 얘기를 하지 않았는지 이상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야. 무엇 때문에 나는 말하고 싶으면서도 말하지 않았을까?' 이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그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무엇이 자신을 저지했는지를 깨달았다. 수치스러웠던 것이었다. 어제저녁까지만 해도 명확해졌다고 여겨지던 자신의 처지가 지금에 와서 보니 명확하지도 않을뿐더러 출구없이 막막해만 보였다. 전에는 생각해 본 적도 없던 치욕이 문득 두려워졌다. 남편이 벌일 일들을 더올리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생각들이 엄습해 왔다. 지금 막 관리인이 와서 그녀를 별장에서 쫓아내고 만천하에 자신의 치욕이 공표되는 광경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별장에서 쫓겨나면 어디로 가야 할지 스스로에게 물어도 답을 구할 수는 없었다.

브론스끼를 떠올려 보았으나, 그가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며 이미 부담스러워하기 시작했고, 자신 또한 그에게 스스로를 내줄 수 없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녀는 적대감에 사로잡혔다. 남편에게 했던 그말, 늘 상상 속에 되풀이했던 그 말을 마치 모든 사람들에게 털어놓은 것 같았고, 모든 이들이 그것을 들은 것만 같았다. 함께 살아온 식솔들의 눈을 마주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녀를 부를 엄두도 안 났고, 아들과 가정 교사를 보러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건 더더욱 못 할 짓이었다.

한참 전부터 그녀의 방문 앞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하녀가 마침내 자진해서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안나는 묻는 듯한 눈초리로 그녀의 눈을 쳐다보고는 당혹감에 얼굴을 붉혔다. 하녀는 벨이 울린 줄 알았다면서 방에 들어온 것을 사죄하며 드레스와 쪽지를 건네주었다. 쪽지는 벳시가 보낸 것으로, 오늘 아침 리자 메르깔로바와 슈톨츠 남작 부인이 각자의 추종자들은 깔루시스끼와 스뜨레모프 노인을 대동하고 크로케 게임을 하러 자기 집에 모이기로 한 일을 상기시키는 내용이었다. <풍속을 탐구하는 셈치고 보러 오세요. 기다릴게요>라며 그년느 쪽지를 끝맺었다.

쪽지를 읽은 안나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것도 필요 없어." 화장대에 놓인 목이 긴 병과 브러시를 제자리에 고쳐 놓고 있던 안누시까에게 그녀가 말했다.

"그만 가려무나. 곧 옷 입고 나갈 테니. 아무것도, 아무것도 필요 없어."

안누시까가 나갔지만 안나는 옷을 입으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와 두 팔을 늘어뜨린 채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간혹 어떤 몸짓ㅇ르 하거나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온몸을 떨다가도 다시 꼼짝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 하느님! 나의 하느님!"을 끊임없이 되뇌었다. 그러나 '나의''하느님'도 그녀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자라면서 체득한 종교를 결코 의심해 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 종교에서 도움을 구하려는 발상은 마치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에게서 도움을 구하려는 것만큼이나 그녀에게는 터무니없는 일로 여겨졌다. 지금 자기 삶의 모든 의미를 이루는 바로 그것을 버릴 때만이 종교의 도움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진작에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정신적 징후 앞에서 그녀는 괴로움뿐 아니라 두려움마저 느꼈다. 간혹 눈이 피로할 때 사물이 두 개로 갈라져 보이듯이 영혼 속의 모든 것이 양분되는 것만 같았다. 가끔씩은 자신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무엇을 바라는지 알 수가 없었다. 두려워하는 건지 욕망하는 건지, 그 대상이 과거의 일인지 미래의 일인지, 자신이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아, 지금 내가 뭐하는 거람!' 그녀는 머리 양쪽에 통증을 느끼고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양손으로 관자놀이 주변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채 짓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방 안을 거닐기 시작했다.

"커피가 준비되었고, 마드무아젤과 세료자 도련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되돌아온 안누시까가 아까와 똑같은 상태로 있는 안나를 맞닥뜨리고는 이렇게 아뢰었다.

"세료자? 세료자가 뭐 어떻다고?" 별안간 활기를 띠며 안나가 물었다. 아침나절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아들의 존재를 기억해 낸 것이었다.

"아마도 잘못을 빌고 계신 것 같아요." 안누시까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뭘 어쨌는데 잘못을 빌어?"

"구석방에 있던 복숭아 말씀인데요, 아마도 그것을 몰래 하나 드셨나 봐요."

방금 떠오른 아들 생각이 여태까지 처해 있던 막막한 상황으로부터 순식간에 안나를 끌어내 주었다. 그녀는 최근 몇 년 동안 자처해 온 역할, 다분히 과장되었으나 그래도 부분적으로는 진실한, 아들을 위해 살아가는 어머니의 역할을 상기해 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도 남편이나 브론스끼와 밀착된 입지로부터 독립된 왕국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흐뭇한 마음으로 실감했다. 그 왕국은 바로 아들이었다. 어떠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아들을 버릴 수는 없었다. 남편이 모욕을 주고 내쫓거나, 브론스끼가 냉담해지고 자신의 독립적인 삶을 지속한다 해도(순간 그녀는 또다시 치미는 울화와 원망을 품고서 그를 떠올렸다) 아들을 버릴 수는 없었다. 그녀에게는 삶의 목표가 있었다. 아들과의 관계를 보장받고 아들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행동을 취해야 했다. 아들을 빼앗기기 전에 어서 빨리, 최대한 빨리 결행해야 했다. 아들을 데리고 떠나는 것. 이것이 바로 그녀가 단행해야 할 유일한 일이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 고통스러운 처지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아들과 관련하여 결행해야 할 일과 아들을 데리고 즉시 어디론가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그녀의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녀는 재빨리 옷을 입고서 아래층으로 내려가 단호한 걸음걸이로 응접실에 들어섰다. 평소처럼 커피와 함께 세료자와 가정 교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온통 흰옷 차림의 세료자가 탁자 곁의 거울 아래서 등과 고개를 수그린 채 서 있었다. 안나가 익히 알고 있는, 아버지를 닮은 예의 긴장되고 주의 깊은 표정을 짓고서 자신이 꺾어 온 꽃들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가정 교사의 태도가 유달리 근엄했다. 세료자는 종종 그러듯이 ", 엄마!"하고 째질 듯이 소리를 지르더니 머뭇거리며 동작을 멈추었다. 꽃은 내던져 버리고 어머니에게 다가가 인사를 할지, 아니면 화관을 마저 만들어 가지고 갈지 망설이는 것이었다.

가정 교사는 인사를 하더니, 세료자가 저지른 일에 관하여 또박또박 장황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가정 교사를 데리고 가야 할지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야, 데리고 가지 않겠어.' 그녀는 결정을 내렸다.

'아들이랑 단둘이서 떠나겠어.'

"그래요, 참 못되게 굴었네요." 안나가 아들의 어깨를 부여잡더니, 엄하기는커녕 오히려 소심한 눈길로 바라보면서 입을 맞추었다. 그러한 어머니의 눈길에 아이는 당혹스러우면서도 기뻤다.

"아들이랑 둘만 있게 해 주세요."

그녀가 가정 교사에게 말하고는 아들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커피가 놓여 있는 탁자 앞에 앉았다.

"엄마! ..나는……그게…….." 복숭아 때문에 어떤 벌을 받게 될지, 어머니의 표정에서 가늠해 보려 애쓰며 소년은 더듬거렸다.

"세료자………" 가정 교사가 응접실을 나가자마자 그녀가 운을 뗐다.

"그건 나쁜 짓이야. 하지만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 거지…….? 넌 엄마를 사랑하지?"

눈물이 솟구쳐 오르는 게 느껴졌다.

'내가 과연 이 아이를 사랑하지 않ㅇ르 수 있을까?' 어리둥절해하면서도 환희에 찬 아들의 눈을 주시하며 그녀는 생각했다.

'이 아이가 과연 아버지와 한편이 되어 나를 응징하려 들까? 정말이지 나를 가엾이 여기지 않으려나?'

눈물은 이미 불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것을 감추기 위해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뛰쳐나가다시피 테라스로 향했다.

요 며칠 동안 뇌우가 몰아치더니 차갑고 청명한 날이 시작되었다. 선명한 햇살이 깨끗이 씻긴 잎사귀들을 향해 내리쬐는데도 불구하고 대기는 냉랭했다.

싸늘한 냉기로 인하여, 그리고 깨끗한 공기 속에서 새로운 위력을 발휘하며 그녈ㄹ 사로잡은 내면의 두려움으로 인하여 그녀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서 가보렴, 마리에트에게 가봐." 그녀는 뒤따라 나온 세료자에게 이르고는 테라스의 밀짚 깔개 위를 거닐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저들은 나를 용서하지 않을까? 이 모든 게 달리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까?' 그녀가 스스로에게 물었다.

안나는 걸음을 멈추고서 바람결에 흔들리는 백양나무 꼭대기를 바라보았다. 깨끗이 씻긴 잎사귀들이 차가운 햇살을 받아 선명하게 반짝였다. 저들은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이제는 모든 것들, 모든 이들이 저 하늘과 저 푸른 나무처럼 무자비해질 것임을 그녀는 깨달았다. 또다시 영혼 속에서 분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럴 것 없어, 생각할 필요가 없다니까.' 그녀는 생각했다.

'채비를 차려야 해. 언제, 어디로 가야 할까? 누구를 데리고 가지? 그래, 모스끄바로 가자, 야간열차를 타고. 안누시까랑 세료자랑, 꼭 필요한 물건들만 챙겨서. 하지만 그 전에 양쪽 모두에게 편지를 써야해.' 그녀는 황급히 집 안으로 들어가 서재의 책상 앞에 앉아 남편에게 편지를 썼다.

"그 일이 일어난 이상 더 이상 당신 집에 머무를 수가 없어요. 떠나겠어요. 아들을 데리고 가겠습니다. 나는 법에 관해서는 몰라요. 따라서 양친 중 누가 아들과 함께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들을 데려가렵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 없이는 살 수가 없으니까요. 넓은 아량을 베푸시어 아이를 나에게 주세요."

여기까지는 신속하게 술술 써 내려갔다. 그런데 남편한테서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아량을 호소해야 하고, 편지의 말미를 무언가 감동적인 구절로 끝맺어야 한다는 부담이 글쓰기를 중단시켰다.

"나의 잘못과 뉘우침에 대해선 언급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생각의 갈피를 잡지 못한 그녀는 또다시 펜을 멈추었다.

'그래, 아무것도 필요 없어.' 그녀는 이렇게 생각하고는 편지를 찢어 버린 뒤, 아량 운운하는 대목을 뺀 채 새로 써서 봉인했다.

또 다른 편지는 브론스끼에게 써야 했다.

"남편한테 모든 걸 얘기했어요." 이렇게 적고 나서 그녀는 기력이 빠져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건 너무나 거칠고 여성답지 못한 표현이었다.

'그다음엔 대체 뭐라고 쓴담?' 그녀의 얼굴이 또다시 수치심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브론스끼의 침착함을 떠올린 그녀는 이내 그에 대한 원망으로 첫 구절이 적힌 편지지를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아무것도 필요 없어.'

그녀는 이렇게 되뇌고는 압지첩을 내려놓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러고서 가정 교사와 식솔들에게 오늘 모스끄바로 갈 거라고 고한 다음, 곧바로 짐을 싸기 시작했다.

문지기와 정원사, 하인들이 별장의 방마다 돌아다니면서 짐을 날랐다. 장롱과 서랍장들은 활짝 열려 있었다. 노끈을 사러 상점에 두 차례나 다녀왔고, 바닥에는 신문지들이 굴러다녔다. 트렁크 두 개와 자루들, 꽁꽁 싸맨 담요들이 현관으로 내려졌다. 현관 앞에서는 사륜마차 한 대와 두 대의 짐마차가 대기 중이었다. 짐을 꾸리는 동안 불안감도 잊은 채 자기 방 책상 앞에서 여행 가방을 챙기고 있던 안나에게 안누시까가 오더니 마차 소리가 난다고 일러주었다. 창밖을 내다보니 출입문 앞에서 초인종을 울리고 있는 것은 바로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의 파발꾼이었다.

"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봐." 이렇게 이른 다음, 그녀는 안락의자에 앉아 두 손을 무릎 위에 얹고서 만반의 태세를 갖추었다. 하인이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의 서명이 적힌 두툼한 봉투를 대령했다.

"파발꾼에게 답신을 받아 오라는 명령을 내리셨다는데요." 그가 말했다.

"알겠네."

그녀는 대답하고 난 뒤 하인이 나가자마자 떨리는 손가락으로 봉투를 뜯었다. 그러자 종이띠로 묶인 빳빳한 지폐 다발이 떨어졌다. 그녀는 편지를 꺼내 맨 끝에서부터 읽어 나갔다. <이사에 필요한 모든 조치는 이미 취해 놓았소. 이러한 나의 청을 당신이 어떻게 이행하느냐의 여부에 내가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을 명심하길 바라오.> 이 구절을 읽은 그녀는 황급히 그 앞의 내용을 밑에서부터 훑어본 다음, 모두 읽고 나서 다시 한번 처음부터 읽어 내려갔다. 편지를 다 읽자 온 몸이 오싹했고, 예기치 않은 무시무시한 불행이 엄습해 오는 기분이었다.

아침나절에 그녀는 남편에게 죄다 털어놓은 것을 후회했고,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가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이 편지가 바로 그 말을 없었던 일로 치면서 그녀가 가정하고 희망했던 바를 선뜻 내주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 편지는 지금 그녀가 상상할 수 있는 그 무엇보다도 끔찍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가 옳아! 옳고 말고!' 그녀가 생각했다.

'물론이지, 그는 항상 옳아. 기독교인이잖아. 관대한 사람이야! 그리고 저열하고 추악한 인간이지! 그 사실은 나 말고는 아무도 모르고, 앞으로도 모를 나도 설명을 못하겠어. 사람들은 그러지, 경건하고 도덕적이고 정직하고 영리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내 본 것을 보지 않잖아. 지난 8년 동안 그가 얼마나 내 삶을 질식시켜 왔는지, 내 안에서 살아 숨 쉬던 모든 것들을 얼마나 짓눌러 왔는지를 그들은 모르잖아. 내가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살아 있는 여자라는 점을 단 한 반도 그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몰라. 그가 매사에 나를 모욕하고 자기만족을 맛보았다는 걸 아무도 모른다고. 나도 내 삶을 정당화할 길을 찾고자 온 힘을 다해서 애써 오지 않았겠어? 그를 사랑하려고, 이미 남편을 사랑할 수가 없게 되었을 때는 아들을 사랑하려고 노력하지 않았겠느냐고! 하지만 때가 되었고, 이제 깨달았어 더 이상 스스로를 속일 수 없다는 걸. 나는 살아있다는 걸, 내 탓이 아니라 하느님이 나를 이런 여자로, 사랑하면서 살아야 하는 여자로 만들었다는 걸. 그런데 대체 지금 이게 뭐냐고. 차라리 나를 죽이고 그이를 죽이지. 그러면 모든 걸 견뎌 내고, 모든 것을 용서할 텐데. 하지만 이건 아냐. 그는…….'

'그가 어떤 식으로 나올지, 어쩌자고 나는 짐작도 못 한 걸까? 그는 자신의 저열한 성정에 걸맞은 짓을 할 거야. 자신은 옳은 사람으로 남고, 이미 파멸해 버린 나를 더욱 흉악하고 비열하게 파멸시키겠지.'

<당신과 당신의 아들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는 당신 자신이 예상할 수 있을 것이오.> 그는 이 편지의 구절을 떠올렸다.

'이건 아들을 빼앗아 가겠다는 협박이야. 그들의 바보 같은 법에 따르면 가능한 일이겠지. 하지만, 그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내가 모를 턱이 있나? 그는 아들에 대한 나의 사랑을 믿지 않거나, 아니면 나의 그런 감정을 경멸하고 있는 거야(늘 비웃었든시 말이지). 그럼에도 그는 알고 있어. 내가 아들을 버리지 않으리라는 걸, 바릴 수 없다는 걸,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한다 해도 아들이 없다면 나에게 삶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다는 걸, 만일 아들을 버리고 그로부터 도망친다면 나는 가장 치욕스럽고 더러운 여자가 되리라는 걸. 바로 이 사실을 그는 알고 있고, 나한테 그럴 만한 배짱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는 거야.'

<우리의 생활은 예전처럼 진행되어야 하오.> 그녀는 편지의 또 다른 구절을 떠올렸다.

'그 생활은 예전에도 이미 고역이었고, 최근 들어서는 끔찍했어. 그렇다면 이제는 어찌 될까? 그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숨 쉬고 사랑한 것을 후회할 리 없다는 점도 잘 알지. 허위와 기만 외에는 이 상황으로부터 귀결될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거야. 그런데도 나를 계속해서 괴롭혀야만 하겠지. 나는 그를 알아! 마치 물속의 물고기처럼 그는 허위 속을 헤엄치며 쾌감을 느낀다고. 하지만 안 돼, 그에게 그런 쾌감을 안겨 주지 않겠어. 나를 휘감으려 드는 그 허위의 거미줄을 찢어 버리고 말겠어. 될 대로 되라지. 뭐든 허위와 기만보다는 나을 테니!'

'하지만 어떻게? 하느님, 나의 하느님! 나처럼 이렇게 불행한 여자가 언젠가 또 있었을까요……?'

'아니야, 찢어 버릴 테야. 찢어 버리겠어!' 그녀는 벌떡 일어나 눈물을 참으며 소리쳤다. 그러고서 그에게 또 한 통의 편지를 쓰기 위해 책상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느끼고 있었다. 이미 자신에겐 그 무엇도 찢어 버릴 힘이 없으며, 아무리 거짓되고 부정직해도 예전과 다름없는 이 상황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것을.

그녀는 책상에 앉았지만, 편지를 쓰는 대신 책상 위에 두 손으로 포개 놓고 그 위에 머리를 얹은 채 어린아이가 울듯이 가슴을 들썩이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고 확실하게 매듭짓겠다는 꿈이 영원히 깨어져 버렸다는 사실이 너무나 서글펐던 것이다. 모든 것이 예전 그대로 유지될 것이며, 심지어 예전보다 훨씬 더 나빠지리라는 것을 그녀는 예상할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누려 온 세상에서의 지위, 아침나절만 해도 비천하게 여겨졌던 자신의 입지가 실은 소중한 것임을, 또한 자신에겐 남편과 아들을 버리고 정부와 살림을 차린 여자의 치욕스러운 처지와 그것을 맞바꿀 만한 배짱이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아무리 애를 쓴다 한들 자신이 원래 생겨 먹은 것보다 더 강해질 수는 없는 법이다. 그녀는 결코 사랑할 자유를 맛보지 못할 것이었고, 삶을 함께 영위할 수 없는 저 자유분방한 외간 남자와의 추잡한 내연 관계를 위해 매 순간 탄로날지 모른다는 위협을 감수하며 남편을 기만하는 죄 많은 아내로 영원히 남게 될 것이었다. 일이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게다가 과연 어떻게 끝이 날지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그런 처지가 끔찍했다. 그래서 그녀는 벌 받은 어린아이처럼 주체를 못 하고 엉엉 울었던 것이다.

하인의 발소리에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는 얼굴을 가린 채 편지를 쓰는 척했다.

"파발꾼이 답신을 주시길 청하는데요." 그가 말했다.

"답신을? 알았네.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해줘." 안나가 말했다.

"다 되면 벨을 울리지."

'내가 무슨 말을 쓸 수 있겠어?' 그녀는 생각했다.

'나 혼자서 뭘 결정할 수 있겠어? 내가 아는 게 뭔데? 내가 원하는 게 뭐지?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 또다시 영혼이 분열되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그러한 느낌에 거듭 놀라며 스스로에 대한 상념에서 벗어나게 해줄 것만 같은, 막 머릿 속에 떠오른 행동의 구실을 덥석 낚아챘다.

'당장 알렉세이(그녀는 마음속으로 브론스끼를 그렇게 불렀다)를 만나야 해. 오직 그이만이 내가 해야 할 바를 말해 줄 수 있어. 벳시 집으로 가겠어. 어쩌면 거기서 그이를 볼 수 있을지 몰라.' 어제 벳시의 집에는 가지 않을 거라고 브론스끼에게 말했을 때, 그렇다면 자신도 안 가겠노라고 그가 대꾸했던 것을 까맣게 잊은 채 안나는 속으로 뇌까렸다. 그러고는 책상 앞으로 다가가 남편에게 <당신의 편지는 잘 받았습니다. A.>라고 쓴 뒤 벨을 울려서 하인에게 건네주었다.

"우린 떠나지 않을 거야." 방에 들어온 안누시까에게 그녀가 말했다.

"아예 안 가시는 건가요?"

"아니. 내일까지는 짐을 풀지 말고 마차도 그대로 둬. 곧 공작부인 댁으로 갈 거야."

"어떤 드레스를 준비할까요?"

 

뜨베르스까야 공작부인이 초청한 크로케 시합에는 두 명의 귀부인과 그들의 추종자들이 참여하기로 되어 있었다. 두 귀부인은 새롭게 결성된 뻬쩨르부르끄 사교계 그룹의 대표 주자들로, 무언가의 모방을 다시 모방하는 데 있어서 les sept merveilles du monde(세계 7대 불가사의)라 불릴 정도로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정말이지 사교계의 최상류 그룹에 속하는 부인들이었지만, 안나가 가담하던 모임에는 완전히 적대적이었다. 게다가 리자 메르깔로바의 숭배자인 스뜨레모프 노인은 뻬쩨르부르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사 중 한 사람이었는데 그는 직무상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의 적수이기도 한 터였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여 안나는 모임에 가지 않으려 했고, 뜨베르스까야 공작부인이 보낸 쪽지의 뉘앙스 역시 그러한 그녀의 거절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녀는 브론스끼를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거기 갈 마음을 먹었다.

안나는 다른 손님들보다 먼저 뜨베르스까야 공작부인의 집에 도착했다.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섰을 때, 시종보 비슷한 옷차림에 볼수염을 잘 다듬은 브론스끼의 하인 역시 안으로 들어서던 참이었다. 그는 문가에 멈춰 서서 챙 달린 모자를 벗고는 안나에게 길을 내주었다. 그를 보자마자 안나는 어제 브론스끼가 오지 않겠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해 냈다. 벳시에게 그러한 의사를 알리는 쪽지를 보내온 것이 틀림없었다.

문간방에서 웃옷을 벗는 동안 그녀는 'r'을 발음하는 소리마저 시종보 같은 그 하인이 누군가에게 쪽지를 건네며 "백작님께서 공작부인께 드리는 전갈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주인 나리는 어디 있느냐고 그에게 묻고 싶었다. 도로 집으로 가서 그에게 편지를 보내 자기한테 와달라고 하든지, 아니면 직접 그에게 가고 싶었다. 그러나 이것도 저것도, 그 무엇도 단행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미 그녀의 도착을 고하는 벨 소리가 울렸고, 뜨베르스까야 공작부인의 하인이 활짝 열린 문가에 비스듬히 선 채 그녀가 내실로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공작부인께서는 정원에 계십니다. 곧 아뢰겠습니다. 정원으로 가시겠습니까?" 옆방에 있던 다른 하인이 물었다.

불확실하고 애매한 입장은 집에서와 마찬가지였다. 아니, 손쓸 방도가 없었고, 브론스끼도 볼 수 없으며, 여기 자신의 성향과는 영 안 맞는 낯선 모임에 남아 있어야 했으니 상황은 더 좋지 않은 셈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화장과 몸치장은 그녀에게 잘 어울렸고, 그녀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이제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아주 익숙한 무사태평의 분위기가 성대하게 조성되어 있었기에 마음은 집에서보다 한층 가벼웠다. 무엇을 해야 할지 궁리할 필요가 없었다. 모든 게 저절로 되어 갔으니까. 안으로 들어서자 벳시가 온통 흰색으로 치장한 모습에 놀랄 만큼 우아한 자태로 그녀를 맞이했다. 안나는 언제나처럼 미소를 지어 보였다. 뜨베르스까야 공작부인은 뚜시께비치와 친척 아가씨를 대동하고 왔는데, 시골에 있는 그녀의 부모는 딸이 저명한 공작부인의 집에서 여름을 보낸다는 사실을 몹시 흐뭇하게 여기고 있었다.

벳시가 곧바로 눈치챈바, 안나에게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난 게 틀림없었다.

"잠을 잘 못 잤어요." 맞은편에서 브론스끼의 전갈을 가져온 것으로 짐작되는 하인이 걸어오는 모습을 힐끗 쳐다보며 안나가 말했다.

"와주셔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벳시가 말했다.

"좀 피곤해서 손님들이 오시기 전에 차를 한잔 마시려던 참이었어요. , 저쪽으로 가보시죠." 그러고는 뚜시께비치를 향해 말했다.

"저기 잔디를 깎아 놓은 곳에서 크로케 시합을 할 만한지 마샤와 함께 살펴봐 주시면 좋겠어요. 우리는 그사이 차를 마시면서 허물없는 얘기를 좀 나눌께요. We will have a cosy chat(편안하게 수다나 떨려고요), 그렇죠?" 벳시는 미소 띤 얼굴로 양산을 든 안나의 손을 꼭 잡았다.

"안 그래도 저는 여기 오래 머물 수가 없어요. 브레제 노부인을 찾아뵈어야 하거든요. 너무 오랫동안 약속해 온 거라서요." 안나가 말했다. 거짓말은 그녀의 성정과 거리가 멀었지만, 이제 사교계에서는 거짓말이 편하고 자연스러워졌을 뿐만 아니라 쾌감까지 안겨 주곤 했다.

1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그 말을 자신이 왜 했는지, 그녀는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브론스끼가 오지 않을 테니 어떻게든 그를 만날 방도를 찾아보려면 일단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궁리 끝에 나온 말이었다. 하지만 찾아가 봐야 할 다른 수많은 사람들도 있는데 왜 하필이면 그 늙은 여관(女官)을 언급했는지,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나중에 밝혀진바, 브론스끼와 만날 수 있는 절묘한 방도로서 이보다 더 좋은 수를 생각해 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안 돼요, 절대로 보내 주지 않겠어요." 벳시가 안나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며 대꾸했다.

"정말이지 내가 당신을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기분이 상했을 거예요. 우리 집 모임이 당신의 명예를 훼손할까 봐 염려하고 있는 거잖아요. 작은 응접실로 우리가 마실 차를 내주게." 하인을 대할 때면 늘 그러듯이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녀가 말했다. 그러고는 하인에게서 건네받은 쪽지를 읽었다.

"알렉세이가 우리한테 공수표를 날렸군요." 그녀가 프랑스어로 말했다.

"못 온다고 하네요."

브론스끼가 안나에게 크로케 시합 파트너 이상의 어떤 다른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추호도 생각해 본 적이 없으며, 생각할 수도 없다는 듯 자연스럽고 범상한 말투였다.

 

안나 역시 벳시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그녀가 자기 앞에서 브론스끼에 관해 말하는 것을 들을 때면 순간적으로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고 확신하곤 했다.

", 그렇군요!" 안나는 그 일에 별 관심이 없다는 듯 무심하게 대꾸하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어떻게 당신의 사교 모임이 누군가의 명예를 훼손할 수가 있겠어요?" 모든 여자들한테 그렇듯이 그런 유의 말장난, 그런 식의 비밀 감추기에 안나는 굉장한 매력을 느꼈다. 감춰야 할 불가피성도 감추려는 목적도 아닌, 은폐 과정 자체가 그녀를 매혹했다.

"나는 교황보다 더한 가톨릭 신자가 될 수 없어요." 그녀가 말을 이었다.

"스뜨레모프나 리자 메르깔로바 말이에요, 그분들은 사교계의 최고 엘리트잖아요. 게다가 어디서나 환영받지요. 나도(그녀는 ''라는 말에 특히 힘을 주었다) 엄격하고 편협하게 굴었던 적은 결코 없어요. 그저 시간이 없었을 뿐이죠."

"아마도 스뜨레모프와 대면하고 싶지 않으신 거겠죠? 그분이 위원회에서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랑 설전을 벌이는 건 신경 쓰지 말아요. 우리와는 상관없잖아요. 그분은 사교계에서 가장 친절한 분이시고, 내가 아는 것은 오직 그런 모습뿐이에요. 그리고 열정적인 크로케 선수죠. 이제 곧 알게 될 거예요. 라자에게 흠뻑 빠진 늙은이라는 우스꽝스러운 처지에도 불구하고, 그 우스운 궁지에서 그분이 어떻게 빠져나오는지 지켜봐야 한다니까요! 정말 사랑스러운 분이에요. , 사포 슈톨츠를 모르시나요? 완전히 새로운 분위기를 선보이는 분인데."

이런 얘기들을 줄줄 늘어놓는 사이 벳시의 쾌활하고 총명한 눈빛을 본 안나는 그녀가 자신의 상황을 부분적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무언가 궁리하고 있음을 감지했다 그들은 작은 응접실에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알렉세이에게 편지를 써야겠네요." 그러고서 벳시는 책상에 앉아 편지를 몇 줄 적어 봉투에 넣었다.

"식사하러 오라고 적었어요. 귀부인 한 분이 식사 시간에 남자 파트너 없이 혼자 있게 되었다고요. 더 생각해 보세요. 꼭 가셔야겠는지. 미안하지만 잠시 다녀올게요. 편지를 봉해서 좀 보내 주세요." 그녀가 문을 나서며 말했다.

"하인들에게 일러둘 게 있어서요."

안나는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벳시의 편지를 들고 책상으로 가서는 읽지도 않고 그 밑에 추가로 써넣었다.

'당신을 꼭 만나야 해요. 브레제 부인 댁 정원으로 와 주세요. 6시에 그리로 가겠어요.' 그러고서 편지를 봉하자, 벳시가 돌아와 안나가 보는 앞에서 편지를 급사에게 건넸다.

찻상에 받쳐 작고 서늘한 응접실로 날라 온 차를 마시는 동안 정말로 두 여인 사이에는 손님들이 오기 전까지 뜨베르스까야 공작부인이 약속했던 cosy chat(편안한 수다)이 오갔다. 그들은 곧 도착할 손님들의 흉을 보았는데, 리자 메르깔로바에 간한 대목에서 이야기가 한참 이어졌다.

"그분은 참 사랑스럽고 늘 호감이 가요." 안나가 말했다.

"틀림없이 그분을 좋아하게 될 거예요. 그분은 당신을 흠모하고 있거든요. 어제 경마가 끝난 뒤 우리 집에 와서는 당신을 못 만났다며 실의에 잠기더군요. 그녀가 그러는데, 당신보고 진짜 소설 속의 여주인공이래요. 만일 자기가 남자였다면 당신 때문에 수천 번은 바보 같은 짓을 저질렀을 거라면서요. 스뜨레모프는 당신이 정말 남자들을 그렇게 만들고 있다고 거들더군요."

", 그런데 말씀 좀 해주세요. 전 정말이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어서요." 잠시 침묵하던 안나는 지금 묻는 게 실없는 소리가 아닌, 다른 어떤 것보다 자신에게 중요하다는 점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어조로 말했다.

"미식가라고 불리는 깔루시스끼 공작과 그녀는 대체 어떤 관계인지, 좀 알려주세요. 저는 그분들을 만난 적이 별로 없어서요. 도대체 어떤 관계죠?"

벳시가 눈웃음을 지으며 안나를 주의 깊게 응시했다.

"새로운 방식이죠." 그녀가 말했다.

"그들은 그 방식을 택했어요. 머리쓰개를 방앗간 너머로 내던져 버렸다니까요. [프랑스 속담으로, 사회의 통념을 무시하는 여성의 행동을 뜻한다] 하지만 그것을 내던지는 데도 방식이라는 게 있는 법이죠."

"그렇군요. 그런데, 그녀와 깔루시스끼의 관계가 도대체 어떤 건데요?"

벳시가 느닷없이 깔깔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그렇게 웃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먀흐까야 공작부인의 전문 분야를 넘보시는 군요. 무서운 아이들이 던질 법한 질문이에요." 그러더니 벳시는 참고 싶지만 끝내 자제하지 못하겠다는 듯, 좀처럼 웃지 않는 사람들이 웃을 때처럼 전염성 강한 웃음을 다시 터뜨렸다.

"당사자들에게 물어보세요." 그녀가 웃음 때문에 고인 눈물을 글썽이며 덧붙였다.

"이런, 비웃으시는군요." 안나 또한 무심결에 전염된 웃음을 띤 채 말했다.

"하지만 저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더라고요. 거기서 남편의 역할이 이해가 안 돼요."

"남편요? 리자 메르깔로바의 남편은 담요를 들고 그녀를 쫓아다니며 언제나 시중들 채비를 하고 있죠. 그들 사이에서 그 이상 무슨 일이 더 일어나는지 아무도 알려고 들지도 않아요. 보세요, 훌륭한 사교계에서는 몸치장의 자잘한 부분들에 대해 언급도 하지 않고 심지어 생각조차 하지 않잖아요. 이 경우 역시 마찬가지죠."

"롤란다끼 축연에는 가실 건가요?" 화제를 바꾸려고 안나가 물었다.

"안 갈 생각이에요." 벳시가 벗에게는 눈길을 주지 않은 채, 자그맣고 투명한 찻잔에 조심스레 향기로운 차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러고서 찻잔을 안나에게 밀어 놓더니 옥수수 잎으로 말아 만든 궐련을 꺼내 은제 담뱃대에 꽂아 피우기 시작했다.

", 정말이지, 나는 참 행복한 입장에 놓여 있답니다." 그녀가 찻잔을 손에 쥐고는 웃음기 가신 목소리로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당신을 이해하고, 리자 역시 이해해요. 리자-그이는 뭐가 좋고 나쁜지 모르는 아이 같은 순진한 성정을 지녔죠. 적어도 그녀가 아주 젊었던 시절에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세상 물정 모르는 게 자신한테 어울린다는 걸 잘 알고 있어요. 아마 이제는 일부러 이해하려 들지 않을걸요." 벳시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뭐 어쨌거나, 그 편이 그녀한테 어울리는 건 사실이니까요. 생각해 보세요. 똑같은 사물이라도 비극적으로 바라보며 그 때문에 괴로워할 수 있지만 단순하게, 심지어 유쾌하게 바라볼 수도 있는 거잖아요. 당신은 사물을 너무 비극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나 자신을 알듯이 남들을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안나가 생각에 잠겨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남들보다 못할까요, 아니면 더 나을까요? 제 생각에는 못났지만요."

"무서운 아이네, 무서운 아이!" 벳시가 거듭 말했다.

"저기 손님들이 오셨군요."

발소리와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여자의 음성과 웃음소리도 들려왔다. 그 뒤로 기다리던 손님들, 사포 슈톨츠와 건강한 기색이 넘치는 젊은 청년 바시까가 들어왔다. 피가 흥건한 소고기와 송로 과자, 그리고 부르고뉴산 포도주로 이루어진 식사가 큰 보탬이 되엇을 것이다. 바시까는 귀부인들에게 목례를 하고 그들을 쳐다보았지만, 단지 한순간뿐이었다. 사포를 따라 응접실로 들어간 그는 마치 묶여 있기라도 한 양 그녀의 뒤만 쫓으며 응접실을 돌아다녔다. 반짝이는 두 눈은 금방이라도 집어삼킬 듯 그녀에게서 떠날 줄 몰랐다. 사포 슈톨츠는 검은 눈동자를 지닌 금발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굽이 엄청나게 높은 구두를 신고 잰걸음으로 들어와서는 남자들처럼 귀부인들의 손을 굳세게 잡으며 악수를 나눴다.

이 새로운 저명인사를 처음으로 만난 안나는 그녀의 미모와 과격한 몸치장, 행동거지의 대범함에 충격을 받았다. 자기 머리카락과 남의 머리카락이 섞인 은은한 금빛 머리채를 단처럼 높이 쌓아 올렸는데, 그 크기가 앞부분이 심하게 노출된 채 매끈하게 돌출된 아름다운 가슴과 맞먹었다. 앞으로 걸어나가는 동작은 또 어찌나 저돌적인지 매 걸음마다 드레스 아래로 무릎과 허벅지의 윤곽이 드러날 정도였다. 그리하여 자연스레, 상반신은 심하게 노출되고 뒤와 아래쪽은 꽁꽁 감춰져 있는 그녀의 저 자그맣고 늘씬한 진짜 육체는 대체 저 흔들리는 머리채의 산 뒤쪽 그 어디에서 끝나는 걸까, 하는 의문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벳시는 서둘러 그녀에게 안나를 소개했다.

"생각해 보세요. 세상에, 우리가 병사 두 명을 거의 치어 죽일 뻔했지 뭐예요." 그녀가 눈을 찡긋하더니 미소를 머금고, 한쪽으로 심하게 쏠려 있던 치맛자락을 뒤로 휙 넘기며 이야기를 꺼냈다.

"바시가와 마차를 타고 가던 길에.., 두 분은 초면이시죠." 그녀는 성을 부르면서 청년을 소개하고는, 초면인 여성 앞에서 바시가라고 그의 이름을 부른 실수에 얼굴을 붉히며 소리 내어 웃었다.

바시까는 안나에게 거듭 목례를 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장 사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내기에서 지셨습니다. 우리가 먼저 도착했잖아요. 계산을 하시죠." 그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사포는 한층 쾌활하게 웃었다.

"지금은 말고요." 그녀가 말했다.

"상관없습니다. 나중에 받죠."

"좋아요, 좋아. , !" 그녀가 갑자기 안주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제가 칠칠치 못하게도..잊고 있었네요. 손님을 모시고 왔어요. 여기 계십니다."

사포가 데려왔으면서도 잊고 있었다던 이 예기치 못한 손님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두 귀부인 모두 일어서서 맞이해야 할 만큼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는 사포의 새로운 추종자로, 최근 바시까처럼 그녀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기 시작한 참이었다.

곧이어 깔루시스끼 공작과 리자 메르깔로바가 스뜨레모프와 함께 도착했다. 리자 메르깔로바는 동양적인 둥그스름한 얼굴형에 사람들이 입을 모아 얘기하듯 매혹적이고 오묘한 눈을 지녔으며 몸집이 여윈 갈색 머리 여인이었다. 어두운 빛깔로 단장한 모습(안나는 곧바로 그것을 알아차리고 높이 평가했다)이 그녀의 미모에 너무나 잘 어울렸다. 사포가 박력 있으면서도 단정한 반면, 리자는 부드러우면서도 방종한 면이 있었다.

그러나 안나의 취향으로는 리자가 훨씬 더 매력적이었다. 벳시는 그녀가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 흉내를 낸다는 식으로 안나에게 말했지만, 직접 모습을 보자 안나는 그 말이 사실이 아님을 느꼈다. 말 그대로 철없고 방종했지만 사랑스럽고 온순한 여자였다. 사실 그녀의 품행은 사포의 그것과 똑같았다. 사포가 그러듯이 그녀에게도 역시 매달린 듯 뒤를 쫓아다니며 두 눈으로 집어삼킬 듯 바라보는 두 명의 추종자가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은 청년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노인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그녀 자신을 둘러싼 것들보다 더 고결한 무언가가 있었다. 유리 사이에서 빛나는 진짜 금강석의 광휘가 느껴졌다. 그 광휘는 그녀의 매혹적이고 참으로 오묘한 눈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나른하면서 동시에 열정적인, 검은 윤곽으로 에워사인 두 눈의 시선은 완벽한 순수함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 눈을 바라본 사람들마다 그녀의 모든 것을 알아 버린 듯 느꼈으며, 그러고 나면 그녀를 사랑하지 않ㅇ르 수가 없었다. 안나를 보자마자 그녀의 얼굴은 온통 기쁨의 미소로 환하게 빛났다.

"아아, 뵙게 돼서 정말 기뻐요!" 안나에게 다가서며 그녀가 말했다.

"어제 경마장에서 당신이 계신 곳으로 막 가려던 참이었는데, 그만 가버리셨더군요. 바로 어제 당신을 너무나 만나고 싶었거든요. 정말이지 그 일은 너무나 끔찍했어요, 그렇지 않나요?" 그녀가 자신의 모든 영혼을 열어 보이는 듯한 눈길로 안나를 바라보았다.

", 저도 그 일로 그토록 흥분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 안나가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바로 그때 사람들이 정원으로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는 안 갈래요." 리자가 미소를 띤 채 안나 곁에 다가앉으며 말했다.

"당신도 안 가실 거죠? 크로케 시합이 대체 무슨 대수람!"

"아니요, 전 좋아해요" 안나가 대꾸했다.

"아니, 어떻게 하면 그렇게 지루해지지 않을 수가 있죠? 당신을 보니 기분이 즐거워지네요. 당신은 생기가 넘치는 반면, 나는 권태로울 따름이에요."

"권태롭다니요? 뻬찌르부르끄에서 제일 흥겨운 모임에 속해 있으시면서요."

"우리 모임 성원이 아닌 분들이라면 어쩌면 더욱 권태로울지 모르죠. 하지만 우리는, 아마도 나는 즐겁지 않아요. 너무너무 지루해요……"

사포는 궐련에 불을 붙이더니 두 청년들과 함께 정원으로 나갔고, 벳시와 스뜨레모프는 그대로 남아 차를 마셨다.

"지루하다니요?" 벳시가 대꾸했다.

"사포가 그러는데, 어제 댁에서 아주 즐거웠다면서요."

"어휴, 얼마나 심심했는지 몰라요!" 리자 메르깔로바가 말했다.

"경마가 끝난 뒤 모두들 우리 집으로 갔어요. 그 나물에 그 밥이었죠! 허구한 날 그게 그거라고요! 저녁 내내 소파에 파묻혀 있었답니다. 즐거울 게 뭐가 있겠어요? 대체 어떻게 하면 지루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녀가 또다시 안나에게로 몸을 돌렸다.

"당신은 참 눈여겨볼 만해요. 당신을 보고 있으면 느껴져요. 행복한 여자일 수도 있고, 불행한 여자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지루해하지 않는구나..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좀 가르쳐 주세요."

"딱히 하는 건 전혀 없어요." 집요한 질문에 안나가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그거야말로 가장 좋은 방법이로군요." 스뜨레모프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스뜨레모프는 반백의 사나이임에도 여전히 혈기 왕성했고, 얼굴은 아주 못생겼지만 개성 있고 총기가 넘쳤다. 리자 메르깔로바는 그의 처조카였는데, 그는 여가 시간을 몽땅 그녀와 함께 보내고 있었다. 직무에 있어서는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의 적수였지만, 막상 안나 까레니나 부인을 대면하자 그는 적수의 아내인 그녀에게 현명한 사교계 인사로서 유달리 친절하게 대하려고 애를 썼다.

"전혀 하는 게 없다……" 그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말을 이어받았다.

"최상의 방도입니다. 나도 오래전부터 말하곤 했죠." 그가 리자 메르깔로바를 향해서 말했다.

 

"지루하지 않으려면, 지루할 거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불면증이 두렵다면 잠이 안 올가 봐 걱정 하지 말라는 것과 같은 이치랍니다. 안나 아르까지예브나는 바로 이점을 일러 주신 겁니다."

"제가 그런 얘길 한 거라면 무척 기쁠 텐데요. 왜냐하면 그건 옳은 지적일 뿐 아니라 진실이니까요." 안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것보다, 어째서 잠이 안 오고 지루할 수밖에 없는 건지, 그 이유를 좀 얘기해 주세요."

"잠을 자려면 일을 해야 하듯이, 즐거워지기 위해서도 역시 일을 해야만 합니다."

"내 노동이 아무에게도 필요치 않은데 왜 일을 하겠어요? 짐짓 하는 척 흉내만 내는 건 할 줄도 모르고, 하고 싶지도 않아요."

"구제불능이로군요." 그녀를 보지도 않은 채 스뜨레모프가 대꾸하더니 다시 안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나와 만나는 일이 드물었기에 그는 범속한 얘기 말고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언제쯤 뻬쩨르부르끄로 옮겨 갈 건지, 리지야 이바노브나 이바노브나가 얼마나 그녀를 좋아하는지 따위의 그렇고 그런 얘기를 주워섬기는 그의 표정에서 그녀가 자신을 좋은 사람이라 여기기를, 또 그녀에 대한 존경심과 심지어는 그 이상을 전하고자 하는 진심이 훤히 드러났다.

뚜시께비치가 들어오더니 다들 크로케 경기에 참여할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노라고 알렸다.

"안 돼요, 제발 가지 마세요." 안나가 떠나려 하자 리자 메르깔로바는 애원하듯 매달렸다. 스뜨레모프도 거들었다.

"너무나 대조적인데요." 그가 말했다.

"이 모임에 있다가 브레데 노부인한테 가시다니요. 게다가 결국 그분에게 당신은 남의 흉이나 볼 기회가 되어 줄 게 뻔합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와는 다른, 험담과는 정반대인 아주 선량한 감정들만을 일깨우게 될 거예요."

안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저 현명한 사내의 아첨 섞인 말과 리자 메르깔로바가 보여 준 아이처럼 순수한 호감, 그리고 이 익숙한 사교계의 분위기. 그 모든 것이 참으로 안락한 반면, 저쪽에서는 너무나 괴로운 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여기 더 남아 있을까, 그 괴로운 담판의 순간을 늦춰 볼까 싶어 순간적으로 망설였다. 하지만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할 경우 닥쳐올 집안의 사태와 생각만 해도 무서운 그 모습, 양손으로 머리칼을 움켜쥐었던 그 순간이 자신의 몸짓을 떠올린 그녀는 작별 인사를 하고 그곳을 떠났다.

 

겉보기에는 경박한 사교계의 삶을 영위하고 있었지만, 사실 브론스끼는 무질서를 몹시 혐오하는 인간이었다. 아직 젊었던 육군 유견 학교 시절, 그는 절박한 상황에 몰려 돈을 빌리려다가 거절당하는 모욕을 경험한 일이 있었다. 그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스스로를 그러한 상황에 놓이게 한 적이 없었다.

때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1년에 다섯 번쯤 그는 주변 상황을 고려하여 자신의 모든 일들이 질서 정연하게 돌아가도록 방구석에 처박힌 채 신변을 정리하곤 했다. 그 일을 그는 결산 혹은 faire le lessive(세탁)라고 불렀다.

경주를 마친 다음 날 늦잠을 자고 일어난 브론스끼는 면도도 목욕도 하지 않고, 여름 제복 차림으로 책상에 돈과 청구서와 편지들을 펼쳐 놓은 채 작업에 착수했다. 뻬뜨리쯔끼는 잠에서 깨어나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동료를 보자 방해하지 않으려고 조용히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 경우 대체로 그가 예민해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을 둘러싼 복잡한 상황들을 세세한 부분까지 파악하다 보면 누구나 무심결에 그러한 사정들과 그것을 이해하는 어려움이 오로지 자신에게만 개인적으로 우연히 일어나는 특별한 일이라 전제하기 마련으로,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로 저마다의 복잡한 사정에 둘러싸여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는 법이다. 브론스끼 역시 그러했다. 그 역시 오만함과 나름의 근거를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이 만일 자신과 같은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면 이미 오래전에 궁지에 몰려 비행을 저질렀으리라 여겼다. 한편 궁지에 몰리지 않기 위해서는 바로 지금 자신의 상황을 명확하게 정리해 두어야 한다는 점을 그는 늘 생각했다.

가장 손쉬운 까닭에 첫 번째로 착수한 일은 금전적인 문제였다. 갚아야 할 빚의 액수를 예의 자잘한 필체로 편지지에 적은 다음 합산해 보니 17천 루블하고도 계산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빼놓은 몇 백 루블이 되었다. 가진 돈과 은행 잔고의 액수를 합산한 그는 수중에 남은 돈이 18백 루블에 불과하며, 새해까지 수입이 들어올 가망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부채 목록을 다시 셈한 뒤 브론스끼는 그것을 세 부류로 나누어 옮겨 적었다. 첫 번째 부류에 속하는 것들은 당장 갚아야 할 빚과 적어도 청구받는 즉시 지불할 수 있도록 돈을 마련해 놓아야 하는 항목들이었다. 그런 부채들은 4천 루블가량 되었다. 말값 15백 루블 그리고 자신이 동석한 자리에서 사기 카드 도박꾼에게 돈을 잃은 젊은 친구 베네프스끼에 대한 보증금 25백 루블이었다. 당시 브론스끼는 곧바로 돈을 내주려고 했지만(그땐 그만한 돈이 있었다), 베네프스끼와 야시빈은 게임을 하지도 않은 브론스끼가 아니라 자기들이 지불해야 한다며 고집을 피웠다. 그 뜻이야 갸륵하지만, 단지 구두로 베네프스끼으 보증을 서는 정도로만 가담했을지라도, 이 더러운 사기 행각과 관련해서는 사기꾼에게 돈을 던져 주고 그와 어떤 말도 섞지 않기 위해 예의 25백 루블을 수중에 갖고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브론스끼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 첫 번째 항목에 대해서는 4천 루블이 필요했다. 두 번째 항목에 속한 돈은 8천 루블이었고, 비교적 덜 중요한 건들이 거기 해당되었다. 대부분 경주와 관련된 빛으로 말 귀리와 건초 납품업자, 영국인 조련사, 마구 제조업자 등등에게 지불해야 할 돈이었다. 이 부채와 관련해서도 완전히 마음을 놓으려면. 2천 루블가량은 지불해야만 했다. 마지막 항목은 상점과 호텔, 재봉사에게 갚아야 하는 빚들로서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건들이었다. 따라서 최소한 6천 루블이 필요했는데, 당장 융통할 수 있는 돈이라곤 18백 루블밖에 없는 것이었다. 다들 브론스끼의 재산이 연간 10만 루블은 될 것이라고 짐작했는데, 사실 그만한 수입이 있는 사람에게야 그 정도의 부채는 골칫거리가 될 수 없는 법이지만 문제는 그가 그 10만 루블이라는 돈을 쥐어 본 적조차 전혀 없다는 사실이었다. 연간 10만에서 20만 루블에 달하는 수입을 올리는 부친의 막대한 유산은 형제들에게 아직 분배되지 않은 터였다. 게다가 형이 엄청난 빚을 진 채 재산이라곤 한 푼도 없는 제까브리스뜨의 딸인 바랴 치르꼬바 공작 영애와 결혼했을 때, 알렉세이는 자기 몫으로 연간 25천 루블만 할당하고 아버지의 영지에서 나오는 나머지 수입을 모두 형에게 양보했다. 당시 그는 결혼하기 전까지는 그 돈으로 충분할 뿐만 아니라, 사실 자신이 결혼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형에게 장담했었다. 가장 돈이 많이 드는 연대를 지휘하던 중 갓 결혼을 하게 된 형은 그러한 선물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재산을 따로 소유하던 모친이 이 25천 루블과는 별도로 알렉세이에게 매년 2만 루블가량을 줬는데, 그는 그 돈을 생활비로 남김없이 써버리곤 했다. 그러던 중 그가 내연 관계를 맺고서 모스끄바를 떠나 버린 일 때문에 아들과 언쟁을 벌인 모친이 최근 들어 송금을 중단해 버린 것이었다. 이미 45천 루블로 생활하는 데 익숙해 있던 브론스끼로서는 올해 25천 루블만 받게 되자 곤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 난국에서 벗어나겠다고 어머니에게 돈을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그 전날 받은 모친의 편지는 특히 그의 화를 돋우었으니, 자신은 아들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지만 그것은 훌륭한 사회 전체에 폐를 끼치는 삶을 위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교계와 공직에서의 입신출세를 위한 것임을 암시하는 내용이었다. 아들을 매수하고자 하는 모친의 바람은 그에게 깊은 모욕감을 안겨 주었고, 모친에 대한 마음을 더욱 냉담하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전에 형에게 내뱉은 그 관대한 말을 취소할 수도 없었다. 지금 까레니나 부인과의 관계에서 가능한 몇 가지 경우의 수를 어렴풋하게 예견해 볼 때 당시의 관대한 말은 경솔한 발언이었으며 독신인 자신에게도 10만 루블이 필요할 수 있다는 것을 절감하면서도, 그는 그 말을 물릴 수가 없었다. 저 상냥하고 멋진 형수 바랴가, 기회가 닿을 때마다 자신은 시동생의 관대한 처사를 기억하고 있으며 이를 높이 평가한다는 것을 상기시키곤 했던 사실만 떠올려 봐도 이미 저질러진 일을 되돌릴 수 없다는 점을 깨닫기엔 충분했다. 여성을 때리거나, 도둑질을 하거나, 거짓말을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일을 되돌리는 것 역시 불가능했다. 그가 할 수 있으며,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은 딱 한 가지뿐이었다. 브론스끼는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그 수를 택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우선 고리대금업자에게 1만 루블을 빌리기로 했다. 그 일에 어려울 것은 전혀 없었다. 또 전반적으로 지출을 줄이며 경주마들을 처분해야 했다. 결정을 내린 즉시 그는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말을 사겠다는 제안을 전했던 롤란다끼에게 쪽지를 썼다. 그런 다음 영국인 조련사와 고리대금업자를 불러오도록 사람을 보내고, 수중에 있는 돈을 청구서의 액수에 맞춰 나누었다. 모든 일을 마치고서 그는 어머니에게 냉담하고 신랄한 답장을 썼다. 그런 다음, 지갑에서 안나가 보낸 쪽지 세 장을 꺼내어 재차 읽고는 불에 태운 뒤, 그녀와 어제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해야 하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그 모든 일들에 확실하게 규정하는 규범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브론스끼의 생활은 특별히 행복했다. 규범집은 아주 좁은 분야의 조건들만 포괄하였으되, 그 대신 확실했다. 브론스끼는 한순간도 그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으며, 해야 할 일을 실행하는 데 있어서 망설인 적도 없었다. 규범은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었다. 가령 사기꾼에게는 돈을 갚아야 하지만 재봉사에게는 갚을 필요가 없다든지, 남자들에게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지만 여자들에게는 해도 된다든지, 그 누구도 속여서는 안 되지만 상대가 남편이라면 가능하다든지, 모욕하는 일을 용서해서는 안 되지만 내가 모욕할 수는 있다든지 등등. 이 모든 규범들은 불합리하고 온당치 못할 수는 있을지언정 확실한 것들이었고, 그것들을 이행하면서 브론스끼는 안정을 찾을 뿐 아니라 고개를 높이 쳐들고 다닐 수 있었다. 다만 최근 들어 안나와 관련해서는 자신의 규범이 모든 조건들을 완벽하게 규정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미래에 닥칠 온갖 곤경과 불확실한 상황들이 머릿속에 그려졌지만, 이미 그 속에서 자신을 이끌어 줄 실마리를 찾을 수는 없었다.

안나와 그의 남편을 대하는 지금의 태도는 그에게 있어 단순하고 명확했다. 그러한 태도는 그가 지침으로 삼는 규범 속에 분명하게 규정되어 있었다.

그녀는 정숙한 여자로서 그에게 사랑을 바쳤으며, 그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러니 그의 입장에서 그녀는 합법적인 아내와 똑같이, 어쩌면 그보다 더 존중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여자였다. 감히 말이나 암시로써 그녀를 모욕하거나 한 여성이 기대할 법한 존경을 표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그 전에 자신의 손모가지를 잘라 버려야 마땅했다.

사교계에 대한 태도 역시 분명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일을 알아채거나 수상하게 여길 수도 있지만, 그 누구도 감히 발설해서는 안 된다. 그러지 않을 경우, 그는 발설한 자들에게 입단속을 단단히 시키고 사랑하는 여자의(실은 존재하지도 않는) 명예를 존중하게끔 종용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남편에 대한 태도는 그 무엇보다도 확실했다. 안나가 브론스끼를 사랑한 순간부터 그는 그녀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절대적인 것이라 여겼다. 그녀의 남편은 그저 쓸모없고 거추장스러운 인물일 뿐이었다. 그가 불쌍한 처지에 놓였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뭘 어쩌겠는가? 남편이 행사할 단 하나의 권리를 꼽자면 그것은 두 손에 무기를 쥐고서 결투를 신청하는 것이었으며, 브론스끼는 처음부터 그에 응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최근 그녀와의 사이에 새로운 내밀한 관계가 형성되었고, 그 관계의 애매함이 브론스끼를 당혹케 했다. 어제서야 그녀는 임신 사실을 알려 왔다. 그는 그 소식과 그녀가 기대하는 바가 자신의 생활 지침으로 삼아 온 규범집에 전혀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녀가 자신의 상태를 고백했던 순간, 그는 정말로 당황한 나머지 속마음이 시키는 대로 그녀에게 남편을 버리라고 말해 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곱씹어 보니 그러지 않는 편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이건 졸렬한 짓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내심 두려움을 느꼈지만 말이다.

<남편을 버리라고 했다면, 그건 나와 함께 살자는 뜻이다. 나는 그럴 준비가 되어 있는가? 수중에 돈이라곤 없는데 어떻게 당장 그녀를 데리고 떠난단 말인가? 설사 어찌어찌 여건을 마련한다 해도..군 복무 중인 내가 어떻게 떠나겠는가? 그런 말을 한 이상 그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요컨대, 돈을 구하고 전역을 해야 한다.>

이윽고 그는 생각에 잠겼다. 전역과 관련된 문제는 오직 그만이 알고 있는 또 다른 은밀한 문제로 그를 이끌었다. 그것은 아주 중요하면서도 비밀스러운, 그의 삶 전체의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였다.

입신출세는 유년 시절과 청년 시절부터 품어 온 그의 오랜 야망이었다. 스스로는 인정하지 않으려 했지만, 사실 출세에 대한 그의 동경이 무척이나 강렬했기에 지금 그 욕망은 사랑의 감정과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사교계와 공직에서의 첫 행보는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2년 전 그는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독립성을 과시하고 승진하려는 욕심으로, 자신에게 들어온 어느 보직에 대한 제안을 거절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값어치가 더 치솟길 바랐지만 이는 지나친 만용으로 판명되었고, 결국 그는 본래의 자리에 눌러앉게 되었다. 그렇게 그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스스로에게 독립적인 인간이라는 지위를 부여하게 되었고, 매우 세련되고 영리하게 처신하면서 그러한 지위를 영위해 나갔다. 나는 아무에게도 유감이 없고, 누구에게 모욕당한 적도 없으며, 내 기분은 양호하니 조용히 혼자 내버려 두기를 바랄 뿐이라는 식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작년에 모스끄바로 온 다음부터 그는 줄곧 기분이 좋지 않았다.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예의 독립적인 입지라는 것은 이미 밋밋해지기 시작했고, 많은 이들이 그에 대해서는 정직하고 선량한 사내가 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토록 요란한 추문을 불러일으키며 모두의 이목을 끌었던 까레니나 부인과의 관계가 새로운 빛을 더해 주면서 그의 내면을 갉아먹던 출세욕이라는 벌레를 일시적으로 잠재웠지만, 일주일 전 그 벌레가 새롭게 활기를 띠면서 다시 깨어나고 말았다. 어린 시절부터의 친구 세르뿌호프스꼬이 때문이었다. 그는 브론스끼와 출신 배경과 재력이 비슷했으며, 육군 유년 학교 동기이자 졸업 기수도 같았고, 학업이나 체력, 장난기는 물론 출세욕을 놓고도 그와 경쟁하곤 했다. 그런 세르뿌호프스꼬이가, 그 연배의 젊은 장군으로서는 매우 드물게 두 계급 승진과 무공 훈장을 수여받고는 며칠 전 웅앙아시ㅇ에서 돌아온 것이었다.

그가 뻬쩨르부르끄에 도착하자마자 사람들은 마치 그가 새롭게 떠오르는 일등성이라도 되는 양 그에 대해 떠들어 댔다. 브론스끼와 동갑이자 동기생인 그는 장군으로서 국정 운영에 영향을 미칠 만한 보직에 임명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반면에 브론스끼는, 비록 독립적이고 나름 화려하며 매력적인 여인의 사랑까지 받고 있다 해도, 그저 원하는 만큼 자의에 따라 행동할 권한을 부여받은 일개 기병 대위에 불과했다. '물론 나는 세르뿌호프스꼬이를 질투하지 않으며, 질투할 수도 없어. 그러나 그의 진급은 내게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걸, 나 같은 사람의 출세는 순식간에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걸 보여 준다. 3년 전만 해도 그는 나와 똑같은 처지가 아니었던가. 전역을 한다는 건, 스스로 내 배를 완전히 불태워 버리는 셈이나 마찬가지야. 하지만 현직에 남아 있는다면 그 무엇도 잃을 게 없지. 게다가 그녀도 자신의 처지를 바꾸고 싶지 않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무엇보다 나에게는 그녀의 사랑이 있으니 세르뿌호프스꼬이를 부러워할 이유가 없어.' 그는 느긋하게 책상에서 일어나 콧수염을 꼬면서 방 안을 거닐었다. 그의 두 눈이 유난히 반짝였다. 입장을 정리하고 나면 늘 찾아오곤 하는, 확고하고 안정적이며 쾌적한 기분이 느껴졌다. 방금 전 계산을 마쳤을 때처럼 모든 것이 깔끔하고 명백했다. 그는 면도를 하고 냉수욕을 한 뒤 옷을 입고서 집을 나섰다.

 

"자네를 데리러 왔네. 오늘은 그 세탁이라는 게 아주 오래 걸렸군." 뻬드리쯔끼가 말했다.

"그래, 다 끝났는가?"

"끝났어." 브론스끼가 눈웃음을 짓고는 콧수염을 비비 꼬면서 조심스레 대답했다. 마치 일이 잘 정리된 직후에는 뭐든 지나치게 과감하고 성급한 행동이 자칫 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듯한 태도였다.

"자네, 그 일을 마치고 나면 꼭 사우나에서 막 나온 것 같다니까." 뻬뜨리쯔끼가 말했다.

"그리쯔까(모두가 연대장을 이렇게 불렀다)한테서 오는 길인데, 다들 자네를 기다리고 있어."

브론스끼는 딴생각을 하느라 잠시 아무런 대꾸도 없이 동료를 바라보았다.

", 그럼 이건 그 댁에서 울리는 음악인가?" 귓전에 들려오는 익숙한 금관 악기의 폴카 연주와 왈츠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가 물었다.

"무슨 축하 연회라도 열리는 모양이군."

"세르뿌호프쓰꼬이가 왔어."

"아하!" 브론스끼가 말했다.

"몰랐네."

그의 눈에 어린 미소가 한층 더 환하게 빛났다.

사랑으로 인해 자신은 행복하다고 스스로 단정하고, 사랑을 위해 공명심을 희생하기로 한 이상(적어도 그런 배역을 떠맡기로 한 이상) 브론스끼는 세르뿌호프스꼬이에게 질투심을 느껴서는 안 되며, 연대를 방문한 그가 제일 전저 자기를 보러 오지 않은 것에 대해 유감스러워해서도 안 되었다. 세르뿌호프스꼬이는 좋은 친구였고, 그런 친구가 잘된 것이 기뻤다.

"그것 참 반가운 일이군."

연대장 제민은 지주의 커다란 저택에 살고 있었다. 아래층의 널찍한 발코니에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뜰에서 브론스끼의 눈에 가장 먼저 띈 것은 보드까가 담긴 나무통 옆에 서 있는 여름 제복 차림의 가수들과 장교들에게 에워싸인 연대장의 건강하고 쾌활한 모습이었다. 그는 지금 연주되는 오펜바흐의 카드리유를 큰 소리로 따라 부르며 발코니의 첫 번째 계단에 올라서더니 옆에 서 있던 병사들에게 손을 흔들며 무언가 지시를 내렸다. 일군의 병사들과 기병조장, 그리고 하사관 몇몇이 브론스끼와 함께 발코니로 다가갔다. 탁자로 되돌아간 연대장은 술잔을 들고서 다시 현관 계단으로 나와 건배사를 외쳤다.

"우리의 옛 동료이자 용맹스러운 장군인 세르뿌호프스꼬이 공작의 건강을 위하여, 만세!"

연대장의 뒤편에서 한 손에 술잔을 든 세르뿌호프스꼬이가 미소를 띤 채 등장했다.

"자네는 점점 더 젊어지는군. 본다렌꼬." 그가 바로 앞에 서 있는 기병조장에게 말했다. 체격이 건장하고 뺨이 불그레한 그는 두 번째 임기를 보내고 있었다.

브론스끼는 지난 3년간 세르뿌호프스꼬이를 보지 못했다. 구레나룻을 기른 그는 한층 어른스러워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늘씬했으며, 잘생긴 외모보다는 얼굴 표정과 몸가짐의 온화함과 고상함이 인상적이었다. 브론스끼가 눈치챈 한 가지 달라진 점은 성공한 사람, 그리고 모두에게서 성공을 인정받고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의 얼굴에 깃드는 고요하고 안정적인 광채였다. 그 자신이 그러한 광채를 잘 알고 있었기에 세르뿌호프스꼬이의 얼굴에서도 그것을 곧바로 알아차렸던 것이다.

계단을 내려가던 세르뿌호프스꼬이가 브론스끼를 알아보았다 반가움의 미소가 그의 얼굴에 환하게 번졌다. 그는 고개를 살짝 치올리고 잔을 들어 보이며 브론스끼에게 환영을 표하고는, 벌써부터 두 팔을 뻗은 채 입을 맞추려 드는 기병조장에게 먼저 가봐야 한다는 시늉을 했다.

"그래, 자네 왔구먼!" 연대장이 브론스끼에게 소리쳤다.

"야시빈이 그러던데, 자네 기분이 울적하다고."

세르뿌호프스꼬이는 젊은 기병조장의 축축하고 생기 있는 입술에 입을 맞춘 뒤, 손수건으로 입을 닦으며 브론스끼에게로 다가갔다.

"정말 반갑네!" 그가 브론스끼의 손을 잡고는 끌어다 옆에 세우며 말했다.

"저 친구를 잘 보필하게." 연대장은 브론스끼를 가리키며 야시빈에게 지시한 뒤 병사들이 있는 아래편으로 내려갔다.

"어제는 왜 경마장에 오질 않았나? 거기서 자넬 만나겠거니 생각했는데." 브론스끼가 세르뿌호프스꼬이를 유심히 살펴보며 말했다.

"갔었는데 늦었지 뭔가. 내 불찰일세." 그가 대답하고는 부관을 향해 말했다.

"내가 주는 거라 하고 이 돈을 병사들에 공평하게 나눠 주게."

그러더니 서둘러 지갑에서 지폐로 3백 루블을 꺼내며 얼굴을 약간 붉혔다.

"브론스끼, 뭘 좀 먹든가 마시지 않겠나?" 야시빈이 물었다.

"어이, 여기 백작님께 먹을 것 좀 가져다주지! , 이걸 마시게."

연대장의 거처에서 벌어진 떠들석한 주연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다들 폭음을 하고는 세르뿌호프스꼬이를 들어 올려 헹가래를 쳤다. 그다음으로 연대장을 헹가래 쳤고, 연대장은 자청하여 가수들 앞에서 뻬뜨리쯔끼와 함께 춤을 추기도 했다. 그러고서 기운이 빠진 그가 정원의 벤치에 앉아 야시빈에게 러시아가 프로이센보다 우월함을, 특히 기병대의 공격력에 있어서 우월하다는 점을 논증해 보이기 시작하는 바람에 주연은 잠잠해졌다. 집 안으로 들어간 세르뿌호프스꼬이는 손을 씻으려고 세면실에 갔다가 거기서 물을 끼얹고 있는 브론스끼를 발견했다. 브론스끼는 제복을 벗은 채 털이 수북한 불그레한 목덜미를 세면대의 물줄기 아래 들이밀고 목과 머리를 문질러 씻었다. 다 씻고 나서, 그는 세르뿌호프스꼬이 곁에 다가와 앉았다. 소파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 사이에서는 둘에게는 모두 흥미진진한 대화가 시작되었다.

"자네에 대해서는 아내를 통해서 전부 들었다네." 세르뿌호프스꼬이가 말했다.

"내 아내와 자주 본다니 잘됐지 뭔가."

"내 형수인 바랴와 친한 사이잖나. 그 두 분은 내가 기분 좋게 만날 수 있는 뻬쩨르부르끄의 유일한 여성들이지." 브론스끼가 웃으면서 대꾸했다. 그가 웃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어질 대화의 주제를 예견하였기 때문으로, 그것은 그에게 기분 좋은 주제였다.

"유일하다고?" 세르뿌호프스꼬이도 웃으면서 되물었다.

"그래, 부인한테서만 자네 소식을 들은 건 아니지만 말이야." 브론스끼가 근엄한 표정으로 친구의 암시를 제지하며 말했다.

"자네가 성공을 거두어 무척이나 기쁘지만, 조금도 놀랍지는 않았네. 나는 그 이상의 것을 기대했었거든."

세르뿌호프스꼬이는 미소를 지었다. 자신에 대한 그러한 견해가 기분 좋게 들렸던 게 분명했다. 게다가 그로서도 굳이 그런 심정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네와는 반대로 내가 스스로에게 기대한 건 그 이하였지. 하지만 나 역시 기쁘다네, 아주 기뻐. 나는 야심이 강한 사람이고, 그건 내 약점이지. 나도 인정해."

"성공하지 못했더라면 그걸 인정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군." 브론스끼가 말했다.

"그건 아닐세." 세르뿌호프스꼬이는 거듭 미소를 지었다.

"성공하지 않는 삶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까지 말하지는 않겠네만, 아마도 지루할 테지. 물론 내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어. 어쨌든 내가 선택한 이 활동 영역에 걸맞는 약간의 능력이 나한테 있는 것 같고, 내 손에는 권력이 주어져 있네. 어떤 권력이든 간에 그게 내게 있다면, 내가 익히 아는 자들의 수중에 있는 것보다 나을 거라고 나는 생각해." 그는 성공에 대한 자긍심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그래서 그것에 가까워질수록 나는 더더욱 만족스럽다네."

"자네의 경우는 그렇겠지. 그러나 모두가 그런 건 아닐 거야. 나도 한때 똑같은 생각을 했지만, 지금 이렇게 지내고 있잖나. 오직 그것만을 위해서 살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지." 브론스끼가 말했다.

"그렇지! 바로 그거야!" 세르뿌호프스꼬이가 웃으면서 말했다.

"자네에 관해서, 자네가 그 일을 거절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얘기를 하던 참이었는데……물론 나도 자네 결정에 동의하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요령이라는 게 있는 법이잖아. 자네의 행동 자체는 옳았을지 몰라도, 그 방식은 그리 옳지 않았어."

"이미 저질러진 일은 저질러진 것이고, 자네도 알겠지만 나는 내가 한 일에 대해 결코 왈가왕부하지 않아. 게다가 지금 아주 잘 지내고 있거든."

"잘 지내는 것도 그저 순간 아닌가. 자네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할 걸세. 자네 형님에게라면 이런 얘기는 꺼내지도 않아. 그분도 우리 연대장님처럼 사람 좋은 분이지. , 저기 계시는군!" 그가 '만세'하고 외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말ㅇ르 이었다.

"저분이야 즐겁겠지만, 자네는 저런 것에 만족하지 못할걸."

"만족한다는 얘기는 아니네."

"그건 그렇고, 그 문제만은 아니야. 자네 같은 사람이 필요하단 말일세."

"누구에게 말인가?"

"누구냐고? 바로 우리 사회지. 러시아에는 사람들이 필요하고, 당이 필요하네. 그게 없으면 배가 산으로 가게 될 거야."

"그러니까 무슨 당 말인가?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에게 대항하는 베르쩨네프의 당 얘긴가?"

"아니." 세르뿌호프스꼬이는 얼굴을 찌푸렸다. 자신이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품고 있다는 오해를 받은 것에 기분이 상한 것이다.

"Tout ca est une blague(그런 건 죄다 헛소리야). 그런 얘긴 늘 있어 왔고, 앞으로도 있을 테지. 공산주의자들 따윈 존재하지도 않아. 하지만 간교한 자들은 늘 해롭고 위험한 당을 날조해 내야 하는 법이지. 오래된 수법일세. 내 말은 그런 게 아니라, 자네나 나처럼 독립적인 사람들의 권력을 지지하는 당이 필요하다는 얘길세."

"하지만 어째서?" 브론스끼는 몇몇 권력자를 거명했다.

"그들은 독립적인 사람들이 아니란 말인가?"

"그들에게는 타고난 재정적 독립성도 없고, 명성도 없으며, 우리처럼 태생적으로 태양과 가까운 사람들도 아니니까. 그들은 돈이나 감언이설로 매수할 수 있어. 자기 하나 살겠다고 어떤 노선을 고안해 내야 하는 사람들이지. 그들은 사태를 악화시키는 사상이나 노선을 표방하곤 하네. 자신들조차 믿지 않는 것을 말이야. 그 모든 게 관사와 봉급을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 그들이 쥔 패를 들여다보면, cela n'est pas plus fin que ca(딱히 간교한 것도 없다네). 그래, 어쩌면 내가 그들보다 더 어리석고 형편없을지도 모르지. 왜 내가 그들보다 모자랄 수밖에 없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하지만 단언컨대, 자네와 나한테는 한 가지 중요하고 우월한 면모가 있네. 그것은 매수하기가 어렵다는 점이지. 그런 사람들이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거야."

브론스끼는 주의 깊게 듣고 있었지만, 그의 주목을 끈 건 이야기의 내용보다도 사안에 대한 세르뿌호프스꼬이의 태도였다. 그는 그 세계에서 이미 호불호의 확고한 입장을 가지고 권력과 맞붙어 싸울 궁리를 하는 반면, 브론스끼에게 직무상 간심사는 그저 기병 연대의 일뿐이었다. 세르뿌호프스꼬이가 유력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사태와 관련된 면밀한 고민과 사물을 이해하는 뛰어난 능력, 그리고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 보기 드문 탁월한 지력과 언변 덕분이라는 사실을 그는 깨달았다. 그리고 부끄럽지만, 그러한 친구가 부러웠다.

"여하튼 간에 그런 일을 하기에는 나에게 한 가지 중요한 것이 결여되어 있다네." 브론스끼가 대답했다.

"권력에 대한 욕망 말일세. 한때는 있었지만, 사라지고 말았지."

"안됐지만, 그건 거짓말이야." 미소를 머금은 채 세르뿌호프스꼬이가 대꾸했다.

"아니, 진실이라네, 정말이라니까……!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네." 솔직하게 말하고자 브론스끼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래, 지금 그렇다면, 문제는 달라지지. 그 지금이라는 게 영원한 것은 아니니까."

", 그럴지도 모르지."

"그럴지도 모른다.."세르뿌호프스꼬이는 자신이 그의 손내를 알아맞혔다는 듯 말을 이었다.

"장담하건대, 틀림없이 그럴 거야. 그렇기 때문에 자네를 꼭 만나고 싶었네. 자네는 응당 해야 할 바대로 처신했어. 하지만 같은 걸 계속 반복해서는 안 되는 법이지. 나는 단지 자네에게 carte blanch(백지 위임장)을 청하는 바이네. 자네를 비호하려는 건 아니지만..그렇다고 내가 자네를 비호해선 안 될 이유는 또 뭐가 있겠나? 자네는 그토록 여러 번 나를 비호해 주었는데 말이야! 나는 우리의 우정이 그 이상으로 고결한 것이기를 바라네." 그러고서 그는 여인처럼 상냥하게 미소를 띠며 덧붙였다.

", 나에게 carte blanche(백지 위임장)을 주게나. 연대에서 나오란 말일세. 그러면, 남몰래 자네를 끌어 주겠네."

"하지만 이보게, 나는 아무것도 필요 없단 말일세." 브론스끼가 말했다.

"모든 것이 그저 본래대로라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세르뿌호프스꼬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브론스끼 앞에 마주 섰다.

"모든 것이 본래대로면 족하단 말이지.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겠네. 하지만 내 말 좀 들어 봐. 우리는 동갑내기야. 아마도 숫자로만 따지자면 자네가 나보다 더 여자를 많이 알겠지." 이제 자신이 브론스기의 약점을 조심스럽게 살살 건드릴 테니 너무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세르뿌호프스꼬이의 미소와 태도는 말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기혼자이고, (누군가 말했듯이) 사랑하는 아내 하나만 알고 나면 1천 명의 여자들과 사귀는 것보다 뭇 여성들에 대해 더 잘 알게 된다네."

"곧 가겠네!" 방 안을 들여다보며 두 사람에게 연대장의 부름을 전하는 어느 장교에게 브론스끼가 소리쳐 대답했다.

브론스끼는 이제 세르뿌호프스꼬이가 하려는 말을 끝까지 다 들어 보고 싶어졌다.

", 내 생각을 말해 보겠네. 여자들이란 남자의 활동에 있어서 중요한 걸림돌이야. 여자를 사랑하면서 무슨 일을 하기란 어렵단 말이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아주 편리한 한 가지 방법이 존재하네. 바로 결혼이네. 이걸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비유를 즐기는 세르뿌호프스꼬이가 말했다.

"가만, 가만있어봐! 그래, fardeau(무거운 짐)을 나르면서 양손으로 무언가를 하려면, 그게 등에 단단히 매여 있어야 하지 않겠나. 그게 바로 결혼이지. 결혼한 뒤로 나는 그 점을 실감했네. 갑자기 내 양손이 홀가분해졌지 뭔가. 하지만 결혼하지 않는다면, '무거운 짐'을 끌고 가야만 하네. 그러면 두 손이 부자유스러워 아무것도 할 수가 없거든. 마잔꼬프와 끄루뽀프를 보게나. 그 친구들은 여자 때문에 자신의 출셋길을 망쳤어."

"정말 멋진 여자들이었지!" 두 남자가 관계를 맺었던 프랑스 여인과 여배우를 떠올리며 브론스끼가 말했다.

"사회적으로 여자의 입지가 공고할수록 상황은 더 안 좋아지는 법이야. 그것은 '무거운짐'을 두 손으로 끌고 가는 게 아니라, 남에게서 잡아채 오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자네는 사랑을 해 본 적이 전혀 없군." 브론스끼가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안나를 떠올리며 조용히 물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가 한 말을 기억하게나. 그리고 한 가지 더 지적하자면, 여자들은 언제나 남자들보다 물질적이라네. 우리는 사랑을 가지고 무언가 위대한 일을 해내지만, 그들은 언제나 terre-a-terre(세속적이야)."

"이제 곧 가네!" 방에 들어온 하인을 향해 그가 다시금 말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 달리 하인은 두 사람을 재촉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그는 브론스끼에게 건넬 쪽지를 가지고 있었다.

"뜨베르스까야 공작부인 댁에서 전갈을 보내셨습니다."

편지의 봉인을 뜯어낸 브론스끼가 갑자기 얼굴을 붉혔다.

"머리가 아파서 이만 집에 가봐야겠네."

"그럼 잘 가게나. '백지 위임장'은 주는 거지?"

"나중에 얘기하자고. 뻬쩨르부르끄에 들러서 자네를 찾아가겠네."

 

시간은 벌써 5시를 지나고 있었다. 브론스끼는 서둘러서 제때 당도하도록, 그리고 누구나 다 알아볼 만한 자신의 말을 타지 않고자, 야시빈의 삯마차에 올라타서 최대한 빨리 가달라고 일렀다. 낡은 4인승 사륜마차의 실내는 널찍했다. 구석 자리에 앉은 그는 앞좌석에 발을 뻗어 올린 채 생각에 잠겼다.

주변 정리를 할 때의 또렷했던 정신에 대한 어렴풋한 느낌, 자신을 요긴한 인물로 여기는 세르뿌호프스꼬이의 우정과 입발림에 대한 흐릿한 기억, 무엇보다도 밀회에 대한 기대감 -이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져 생각의 희열이라는 전반적인 인상으로 모아졌다. 이는 무심코 웃음이 나올 정도로 강렬한 것이었다. 그는 두 발을 내려놓고는 한쪽 다리를 다른 쪽 무릎 위에 올린 뒤 한 손으로 잡고서, 어제 낙마할 때 타박상을 입었던 탄력 있는 장딴지를 매만졌다. 그러고는 몸을 뒤로 젖힌 채 몇 차례 가슴 한가득 심호흡을 하였다.

'좋아, 아주 좋아!' 전에도 종종 자신의 육체를 아주 기분 좋게 느껴보곤 했지만, 그가 지금처럼 자기 자신과 자기 육신을 사랑했던 적은 없었다. 힘센 다리에서 가벼운 통증을 느끼는 게 썩 좋았고, 심호흡을 할 때 움직이는 가슴 근육의 느낌도 흐뭇했다. 안나에게는 그토록 절망적으로 다가왔던 화창하고 서늘한 8월의 날시가 그에게는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듯, 냉수를 끼얹어 달아오른 얼굴과 목을 상쾌하게 해주었다. 공기 중에 풍기는 콧수염의 포마드 향기가 유달리 기분 좋게 느껴졌다. 마차의 창밖으로 보이는 것들, 이 시원하고 깨끗한 공기 속에 부유하는 모든 것들이 저 창백한 석양 속에서 자신처럼 신선하고 쾌활하며 강인하게 여겨졌다. 저무는 태양 빛에 반짝이는 지붕들도, 건물 담장과 모퉁이의 또렷한 윤곽들도, 간간이 마주치는 행인과 마차의 형상들도, 나무와 풀과 고랑이 곧게 파인 감자밭의 고요한 녹음도, 집과 나무와 관목들, 그리고 감자밭 고랑에 드리운 비스듬한 그림자들도 그러했다. 그 모든 것이 방금 완성되어 래커 칠을 마친 한 폭의 근사한 풍경화처럼 아름다웠다.

"어서 가세, 어서!" 그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마부에게 이르고는 주머니에서 3루블짜리 지폐를 꺼내서 돌아보는 마부의 손에 쥐여 주었다. 마부의 손이 초롱불가에서 무언가를 매만지는가 싶더니 날카로운 채찍 소리가 들려왔고, 마차는 평평한 대로를 따라 빠른 속도로 달음질쳤다.

'이 행복 말고는 아무것도, 아무것도 필요 없어.' 창문 사이에 매달린 종의 상아 방울을 바라보며, 그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모습 그대로의 안나를 마음속에 그렸다.

'갈수록 더욱더 그녀를 사랑하게 되는걸. , 여기가 브레데 부인 댁 관용 별장의 정원이로군. 그녀는 대체 어디 있는 걸까? 어디에? 어쩌다가? 왜 밀회 장소를 여기로 정했으며, 어째서 뱃시의 편지에다 적어 보냈을까?' 그제야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이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는 오솔길에 다다르기 전에 마부에게 마차를 세우도록 이르고는 달리는 마차에서 뛰어내려 별정으로 이어진 오솔길에 들어섰다. 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때 오른쪽으로 돌아보자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얼굴이 베일로 가려져 있었지만, 그의 기쁨 어린 시선은 오직 그녀만의 특이한 걸음걸이와 어깨선과 고갯짓을 포착할 수 있었다. 즉시 그의 온몸에 전류가 흘렀다. 새롭게 활력을 얻은 그는 두 다리의 탄력적인 움직임에서부터 숨 쉬는 순간 폐의 움직임에 이르기까지 자기 자신을 실감했다. 무언가 그의 입술을 간질이는 것만 같았다.

브론스끼와 마주 선 그녀는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내가 불러서 화난 건 아니죠? 당신을 꼭 만나야만 했어요." 그녀가 말했다. 베일 안쪽으로 보이는 진지하고 근엄한 입술 모양이 곧바로 그의 기분을 바꿔 놓았다.

"화가 나다뇨? 그런데, 어쩌다가 이리로 오게 된 겁니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그녀가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으며 말했다.

"가요, 당신과 할 얘기가 있어요."

그는 깨달았다. 무슨 일이 생겼으며, 이 밀회는 즐겁지 못할 것이었다. 그녀와 있을 때면 그의 의지는 사라지곤 했다. 그녀가 불안해하는 원인은 모르지만, 이미 똑같은 불안이 자신에게 전해지는 것을 그는 무심결에 느꼈다.

"대체 무슨 일인가요?" 팔꿈치로 그녀의 손을 꼭 조인 채, 얼굴 표정에서 그녀의 생각을 읽으려 애쓰면서 그가 물었다.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으며 말없이 몇 발짝을 옮기더니 갑자기 멈춰 섰다.

"어제는 말하지 않았는데……" 무거운 숨을 빠르게 내쉬며 그녀가 운을 뗐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에게 모든 것을 고했어요..더 이상 그의 아내가 될 수 없다고요..모든 것을 털어놓았어요."

안나의 말을 듣는 동안 브론스끼는 그녀의 괴로움을 덜어 주고 싶다는 듯 자기도 모르게 그녀 쪽으로 온몸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야기를 마치자마자, 그는 갑자기 몸을 곧추세우고는 오만하고 딱딱한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그래요, 그래. 그게 훨씬 나아요. 천배는 낫습니다! 얼마나 힘들었을지 잘 알아요." 그가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듣지 않은 채 브론스기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의 생각을 읽고 있었다. 얼굴에 나타난 그 표정이 그에게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 때문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 턱이 없었다. 그것은 바로 이제 결투는 불가피하다는 생각이었다. 결투에 대해서 결코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안나로서는 순간적으로 떠오른 그 딱딱한 표정을 달리 해석하였다.

남편의 편지를 받은 뒤로 그녀는 이미 마음속 깊은 곳에서 모든 것이 예전대로 유지될 것이며,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지 않은 채 아들을 버리고 정부와 합칠 만한 배짱이 자신에게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뜨베르스까야 공작부인의 집에서 보낸 아침이 그러한 점을 한층 더 확고하게 인지시켜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만남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중요했다. 이 만남이 자신의 처지를 변화시키고, 자신을 구원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만일 소식을 들은 그가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고도 열정적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나와 함께 도망치자'고 말한다면, 그녀는 아들을 버리고 그와 함께 떠날 참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기대했던 일은 일어낭지 않았다. ㅇ히려 그는 무언가로 인해 기분이 상한 것만 같았다.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요. 일이 저절로 그렇게 되어 버린 거니까요." 그녀가 초조하게 말했다. "그리고 여기.." 그녀는 장갑 속에서 남편이 보낸 편지를 꺼냈다.

"그래, 알아요, 이해해요." 그는 편지를 손에 쥐었지만 읽지는 않고 그녀를 진정시키려 애썼다.

"내가 바라는 건 단 하나, 당신에게 요구하는 건 단 하나뿐이에요. 바로 당신의 행복에 나의 인생을 바칠 수 있도록 이 상황에서 벗어나라는 겁니다."

"대체 왜 그런 말을 하는 건가요?" 그녀가 물었다.

"내가 그걸 의심할 리가 있겠어요? 만일 그랬다면"

"저게 누구죠?" 순간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두 명의 귀부인을 가리키며 브론스끼가 말했다.

"우리를 알지도 몰라요." 그는 그녀를 끌고 황급히 옆길로 향했다.

"아아,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그녀의 입술이 떨렸다. 베일 안에서 알 수 없는 악의에 찬 두 눈이 그를 노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문제는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그걸 의심할 수는 없다고요. 하지만 자, 여기 그이가 나에게 보낸 편지예요. 읽어 봐요." 그녀는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편지를 읽으면서 브론스끼는 그녀와 남편 사이에 벌어진 파탄의 소식을 처음 접한 순간처럼, 자신도 모르게 모욕당한 남편과 자신과의 관계가 불러일으키는 자연스러운 감정에 다시금 휩사였다. 그의 편지를 손에 쥔 지금, 그는 분명 오늘 혹은 내일 집으로 날아들 결투장과 실제 결투의 모습을 은연중에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있었다. 결투의 순간 그는 바로 지금처럼 극도로 냉혹하고 오만한 표정으로 허공을 향해 총을 쏜 뒤, 모욕 당한 남편의 총알받이가 되어 서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득 아까 세르뿌호프스꼬이가 했던 말과 아침나절에 떠오른 생각, 즉 스스로를 얽매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그의 머릿속을 스쳐 갔다.

편지를 다 읽은 뒤 그는 그녀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시선에서 결연함이라곤 엿보이지 않았다. 순간 안나는 브론스끼가 이미 이런 사태를 예상하고 있었다는 걸 눈치챘다. 무슨 말을 하건, 그는 자신의 생각을 다 털어놓지 않을 터였다. 그녀는 자신의 마지막 희망이 꺾여 버렸음을 깨달았다. 고대하던 바와는 전혀 다른 결과였다.

"그이가 어떤 사람인지 이제 똑똑히 알겠죠?"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그이는.."

"안됐지만, 일이 이렇게 된 것이 나로서는 오히려 기쁘군요." 그가 말을 가로챘다.

", 내 얘기를 끝까지 들어 줘요." 자신의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 설명할 시간을 달라고 애원하는 듯한 눈초리로 그가 덧붙였다.

"내가 기뻐하는 까닭은, 결코 그분이 제안했듯이 상황을 지금 이대로 둘 수는 없기 때문이죠."

"왜 그렇다는 거죠?" 안나가 솟구치는 눈물을 억누르며 말했다. 이제 그가 하는 말에 그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않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운명이 이미 결정되었다고 느끼고 있었다.

브론스끼는 결코 피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이 결투 이후로는 지금과 같은 상황이 지속될 수 없으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정작 입에서 나온 것은 다른 얘기였다.

"이대로 지속될 수는 없어요. 나는 당신이 이제 그를 버렸으면 해요. 내가 바라는건." 그가 곤혹스러워하며 얼굴을 붉혔다.

"내가 우리의 삶을 심사숙고해서 꾸려 나가도록 허락해 달라는 겁니다. 내일."

그가 얘기를 본격적으로 꺼내려 했지만 안나는 그가 끝까지 말하도록 두지 않았다.

"그럼 아들은요?: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그이가 뭐라고 썼는지 봤잖아요! 아들을 버려야 한다잖아요.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고요."

"제발 생각 좀 해봐요. 뭐가 더 나은가요? 아들을 버리는 건가요, 아니면 이런 굴욕적인 상태를 계속 끌고 가는 건가요?"

"누구한테 굴욕적인 데요?"

"모두에게요,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당신한테요."

"굴욕적이라.그런 말 마세요. 그런 말은 나에게 아무 의미도 없어요."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 순간 그가 말하는 것이 거짓이 아니기를 바랐다. 그녀에게 남은 거라곤 그의 사랑뿐이었으며, 그녀 또한 그를 사랑하고 싶었다.

"당신을 사랑하게 된 그 날부터 모든 게, 모든 게 변했다는 걸 알아줘요. 나에겐 단 하나, 당신의 사랑밖에 없어요. 당신의 사랑이 나의 것이기만 한다면, 나는 나 자신을 아주 고귀한 존재로 여기고 그 무엇도 나에게 굴욕감을 안겨 줄 수 없다고 확신하게 돼요. 심지어 내 처지에 자긍심마저 느끼게 되죠. 왜냐하면……그러니까……" 무엇 때문에 자긍심을 느끼는지는 끝내 말하지 못했다. 수치심과 절망감에 솟구치는 눈물로 인해 목이 메었던 것이다. 그녀는 하던 말을 멈추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 역시 무언가가 목구멍에서 북받쳐 오르고 콧속이 찌르르한 느낌이 들었다. 생전 처음으로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무엇이 그토록 심금을 울리는지, 명확하게 꼬집어 말할 수는 없었다. 그저 그녀가 불쌍했고, 자신은 그녀를 도울 수는 없다는 느낌이었다. 그와 더불어 그녀의 불행이 자기 탓이며, 무언가 나쁜 짓을 저질렀음을 인식했던 것이다.

"정말이지 이혼은 불가능한가요?" 그가 힘없이 묻자, 그녀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정말로 아들을 데리고서 그의 곁을 떠날 수는 없는 겁니까?"

"그래요, 모든 건 그이에게 달렸어요. 이제 난 그이한테 가봐야 해요."

그녀가 건조한 음성으로 말했다. 모든 게 예전 그대로 남게 되리라는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화요일에 뻬쩨르부르끄로 갈 겁니다. 그때 전부 결정되겠죠."

"그래요."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이 문제는 더 이상 거론하지 말기로 해요."

아까 멀리 보내면서 브레데 부인 댁 정원의 철제 울타리 쪽으로 오라고 일러두었던 사륜마차가 다가오고 있었다. 안나는 브론스끼와 작별 인사를 나눈 뒤 집으로 향했다.

 

월요일에 62일 위원회의 정례 회의가 열렸다. 회의장으로 들어선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여느 때처럼 위원들 및 위원장과 인사를 나눈 뒤 지정된 자리에 앉아 앞에 놓인 서류 위에 두 손을 얹었다. 서류들 중에는 그에게 필요한 참고 자료와 함께 그가 제출하려는 청원서의 초안도 끼워져 있었다. 사실 그러한 자료들은 그에게 필요 없었다. 그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으며, 자신이 발언할 내용을 다시 되짚어 볼 필요성조차 느끼지 않았다. 때가 되어 무심한 표정을 지으려 갖은 애를 쓰는 적수의 얼굴이 눈앞에 나타나면, 지금 준비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훌륭한 연설이 저절로 쏟아져 나올 터였다. 각각의 단어 하나하나가 의미를 지닐 만큼 자신의 발언 내용이 중대하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보고를 들으면서 그는 겉보기엔 악의 없고 천진무구한 기색을 띠었다. 앞에 놓인 서류이 양쪽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리는 길고 유연한 손가락과 핏줄이 도드라진 하얀 손등, 피곤한 표정으로 고개를 약간 기울인 그의 모습을 보면서, 무시무시한 소요를 불러일으키고 의원들로 하여금 장내 질서를 준수하라고 부르짖게 만들 엄청난 발언이 이제 곧 저 입에서 쏟아져 나오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보고가 끝나자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예의 조용하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이주민 정착 사업에 관하여 몇 가지 의견을 피력하겠노라고 공표했다. 모두가 그를 주목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헛기침을 한 다음 자신의 적수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연설을 할 때면 언제나 그러듯이 자기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인물 -위원회에서 아무런 정견도 가지지 않는 몸집이 작고 조용한 노인이었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의견을 개진하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법률의 문제에 다다르자 그의 적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반론을 펴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허를 찔린 스뜨레모프가 자신의 무고함을 강변하기 시작하여 장내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러나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결국 승리의 개가를 울렸다. 그의 제안이 채택되었으며, 세 개의 새로운 위원회가 구성된 것이다. 다음 날 뻬쩨르부르끄의 어느 유명한 회합에서는 온통 그날의 회의에 대한 얘기들만 오갔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거둔 성공은 그가 기대했던 것보다도 컸다.

이튿날 아침, 즉 화요일에 잠에서 깨어난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흡족한 마음으로 어제의 승리를 떠올렸다. 사무실 주임이 아첨을 떨며 어제의 회의에 대한 입소문을 전해 주자, 그는 태연한 척하려 애썼지만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사무실 주임과 업무를 보는 동안,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바로 오늘이 자신이 지정해 놓은 안나 아르까지예브나의 도착 날짜인 화요일이라는 사실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따라서 하인이 들어와 그녀가 왔다고 했을 때 그는 놀라움과 충격으로 불쾌해졌다.

안나는 이른 아침에 뻬쩨르부르끄에 당도했다. 그녀가 전보로 그에게 요청한 대로 미리 사륜마차를 보냈었기에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도 그녀의 도착 시점을 짐작할 수 있었을 텐데, 집에 왔을 때도 그는 밖으로 나와 맞아 주지 않았다. 그가 아직 서재에 있으며 사무실 주임과 얘기 중이라고 하인이 그녀에게 아뢰었다. 그녀는 잘 도착했다고 알리라고 이르고는 방으로 가서 물건들을 정리하며 남편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한 시간이 흘러도 그는 오지 않았다. 그녀는 식당으로 가서 집안일을 지시하는 척 일부러 큰 소리로 떠들며 남편이 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주임을 배웅하러 문가로 나왔다 들어가는 소리가 난 뒤에도 그는 오지 않았다. 남편이 곧 여느 때와 같이 집무실로 출근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그 전에 그를 만나 둘의 관계를 매듭짓고 싶었다.

거실을 한차례 거닌 뒤, 그녀는 단호하게 남편의 서재로 향했다. 방 안에 들어서니 그는 출근을 위한 제복 차림으로 작은 탁자 앞에 팔꿈치를 괴고 앉아 눈앞의 허공을 음울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남편이 자신을 보기 전에 먼저 그의 모습을 본 그녀는, 그가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아내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그만두었다. 별안간 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안나로서는 처음 보는 남편의 모습이었다. 이윽고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안나의 눈이 아니라 그보다 좀 더 높은 곳, 이마와 머리채를 바라보며 그녀에게 다가가서는 손을 잡으며 자리에 앉으라고 청했다.

"당신이 와서 매우 기쁘군." 옆자리에 앉으며 그가 말했다. 뭔가 얘기하고 싶으면서도 갈피를 못 잡는 기색이 역력했다. 몇 차례 말을 꺼내려다가 결국 입을 다물곤 했다. 안나 또한 이 만남에 대비하여 남편을 경멸하고 비난하는 연습까지 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고, 심지어 안쓰러운 마음까지 들었다. 그렇게 꽤나 오랫동안 침묵이 지속되었다. "세료자는 건강한가?" 그가 질문을 던지더니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덧붙였다.

"오늘 저녁 식사 땐 집에 못 올 거요. 이제 나가봐야겠소."

"모스끄바로 떠나려고 했어요." 그녀가 말했다.

"됐소. 집으로 오기를 정말, 정말 잘한 거요." 한마디하고 나서 그는 다시 침묵했다.

먼저 이야기를 꺼내기에는 남편이 요령부득임을 알아채고, 그녀는 자기 쪽에서 먼저 시작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 자신의 머리채만 응시하는 남편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안나는 눈을 내리깔기는커녕 그를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

"나는 죄를 지은 여자예요. 못된 여자죠. 하지만 그때 당신에게 그런 말을 하던 나와 예전의 나, 그리고 지금의 나는 똑같아요. 그러니까 나는 하나도 달라질 수 없다는 말을 하러 온 거예요."

"당신에게 그런 건 묻지 않았소." 갑자기 증오가 서린 눈빛으로 결연하게 그녀를 응시하며 그가 내뱉었다.

"그러리라 예측은 했지." 분노에 자극을 받아 타고난 능력을 다시 완전히 체득한 게 분명했다. 날카롭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그는 말을 이어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 당신에게 말했고, 편지에도 쓴 것처럼, 그리고 지금 다시 반복하건데, 그러한 사실을 알아야 할 이유가 내겐 없소. 그런 건 무시하겠다는 말이오. 모든 아내들이 당신처럼 그렇게 '유쾌한' 소식을 서둘러 남편에게 전할 만큼 친절하진 않겠지."

그는 '유쾌한'이라는 단어에 특히 힘을 주었다.

"세상이 그 일을 알게 되기 전까지, 그래서 내 이름이 더럽혀지기 전까지는 그 일을 무시할 작정이오. 따라서 한 가지만 경고하는데, 우리의 관계는 늘 있던 그대로 현상 유지가 되어야 하오. 다만 당신이 당신 자신을 '위태롭게 할' 경우에는 나는 스스로의 명예를 지키고자 반드시 조치를 취할 것이오."

"그렇지만 우리의 관계는 예전처럼 될 수는 없는걸요." 안나가 놀란 눈으로 남편을 쳐다보며 겁먹은 듯 대꾸했다.

다시금 남편의 예의 그 침착한 거동을 보고 유치하되 자극적인 조롱조의 음성을 듣자 그녀의 마음속에 조금 전 자리 잡았던 연민의 감정은 그에 대한 혐오감으로 말끔히 지워져 버렸고, 이제는 그저 두려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일이 어찌 되든 그녀는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싶었다.

"나는 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어요. 내가 이렇게.." 그녀가 운을 떼려 했다.

그는 악의 어린 냉소를 지었다.

"응당 당신이 선택한 종류의 삶이 당신의 관념 속에도 반영되겠지. 그것을 나는 존경하는 만큼 경멸하기도 하오. 둘 다지……과거 당신의 관념을 존경하고, 지금 당신의 관념을 경멸하오……그러니까 당신이 내 말에 부여한 그러한 해석은 내 견해와는 아주 거리가 먼 것이오."

안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하지만 나는 이해할 수가 없소." 그가 열을 올리며 말했다.

"당신처럼 독립적인 인간이 자신의 부정함을 남편에게 직접 공표하고, 그런 행실이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건 전혀 모르면서, 어찌 남편에 대한 아내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을 비난받을 일로 여긴단 말이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나한테서 대체 뭘 원하세요?"

"내가 원하는 건 여기서 그 인간과 마주치지 않는 것, 당신이 사교계나 하인들로부터 비난받지 않도록 처신하는 것..그리고 당신이 그 작자와 만나지 않는 것이오. 이게 많은 요구는 아닐 테지. 그 대가로 당신은 아내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서도 정숙한 아내에게 주어지는 모든 권리를 누리게 될 것이오. 내가 하려던 얘긴 이게 다요. 이제 나가 봐야겠소. 식사는 집에서 하지 않을 거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안나 또한 일어섰다. 그는 말없이 목례를 하고서 그녀를 내보냈다.

 

레빈이 건초 더미 위에서 지새운 밤은 헛되지 않았다. 그가 지금껏 일궈 온 농사일이 꺼림칙하게 여겨졌을 뿐 아니라 그에 대한 모든 흥미가 사라져 버렸다. 엄청난 풍작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올해처럼 농민들과의 관계에 실패를 거듭하고 불화가 잦았던 적이 없었다고, 적어도 그는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실패와 적대적 관계의 원인을 그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노동을 하며 그 매력을 맛보면서 농부들과 친밀해지고, 그들과 그들의 생활을 부러워하며 그러한 생활 속으로 투신하고 싶어진 것, 그리고 그날 밤 한갓 공상이 아닌 버젓한 계획으로서 그러한 소망의 구체적인 방법을 구상했던 ㄷ것, 이 모든 것이 농사일에 대한 그의 시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기에 그는 이제 농사일에 대해 예전과 같은 흥미를 느낄 수가 없었으며, 모든 문제의 밑바탕에 깔려 있던 일꾼들과의 불편한 관계 또한 직시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빠바 같은 우량종 암소들, 거름을 뿌리고 쟁기질한 땅, 버드나무 가지로 울타리를 친 아홉 구역의 평지, 90제샤찌나에 걸쳐서 깊게 갈아엎은 거름, 이랑 파종기 등, 이 모든 것이 그 자신에 의해서, 혹은 그에게 공감하는 동료들에 의해 이루어졌더라면 얼마나 멋졌겠는가. 그러나 이제 그는 분명하게 깨달았다(노동자를 농업의 주된 요소로 보는 그의 저술 작업이 이 점에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지금까지 그가 해온 농사일이라는 것은 단지 그와 일꾼들 사이의 잔혹하고 끈질긴 투쟁일 뿐이었으며 그 싸움의 한편, 즉 그의 편에는 모든 것을 이상적이라 여겨지는 기준에 맞추어 개조하고자 하는 열렬한 지향이, 다른 편에는 사물들의 자연스러운 질서가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이 투쟁 속에서 그가 깨달은 바는, 한쪽 편에서 아무리 집요하게 힘을 쏟는다 해도 다른 편에서 무위와 무계획으로 일관하는 한, 농사일은 주인 없이 굴러가고 훌륭한 농기구와 가축과 토지는 무용지물이 될 뿐이라는 사실이었다. 중요한 것은 일에 쏟은 정력이 헛수고로 돌아갔을 뿐 아니라, 그가 해온 농사일의 의미가 스스로에게 분명해진 지금에 와서는 정력을 쏟아부었던 목표 자체가 완전히 무가치한 것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본질적으로 그것은 무엇을 위한 투쟁이었던가? 그는 단 한 푼이라도 이익을 내려고 분투한 반면(안 그럴 수가 없는 것이, 노력을 덜 쏟으면 노동자들에게 지불할 돈이 모자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농부들은 평온하고 쾌적하게, 즉 몸에 밴 대로 일하기를 고집했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노동자들 각자가 최대한의 성과를 내고, 키와 써레와 탈곡기를 망가뜨리지 않고, 각자 자신이 하는 일을 꼼꼼히 살피도록 주의를 잃지 않은 것이었다. 반면에 노동자들은 최대한 쾌적하게, 쉬어가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걱정 근심 없이, 마음 편하게, 아무 생각 없이 일하고자 했다. 올여름 레빈은 모든 과정에서 그 사실을 절감했다. 파종에 도움이 안 되는 잡초와 쑥이 무성한 질 나쁜 초지를 골라 건초용 토끼풀을 베어 오도록 사람들을 보낸 일이 있었다. 그러자 농부들은 양질의 종자용 초지를 줄줄이 베어 놓고는 감독관이 그렇게 시켰다고 변명을 하면서, 그래도 건초는 아주 잘될 거라며 그를 위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이 그렇게 된 건 그쪽이 풀을 베기에 더 수월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건초를 털어 말리도록 건조기를 보냈을 때는 일을 시작하자마자 이미 망가뜨리고 말았는데, 건조기가 휘두르는 날개 밑 운전석에 멀거니 앉아 있는 게 지루했기 때문이다. 그래 놓고는 말하기를, “걱정 마십쇼, 아낙네들이 끝내주게 털어 낼 것입니다라는 것이었다. 재익들도 쓸모라곤 없었으니, 치켜 올라간 쟁기날을 도무지 낮출 생각을 못 하는 농부들이 무리하게 그것을 휘저어 말듫을 괴롭히고 땅은 못쓰게 만들더니 레빈더러는 걱정할 것이 없다고 했다.

말들은 밀밭에 방치되었는데, 어는 한 사람도 야간에 보초를 서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지 말라고 일렀음에도 일꾼들은 교대로 보초를 서더니 하루 종일 일을 한 반까가 결국 잠들어 버렸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답시고 한다는 말이 뜻대로 처분하시라는 것이었다. 세 마리의 우량종 새끼 암소를 잘못 먹여서 병이 들게 만든 적도 있었는데, 물터도 마련해 주지 않고 새로 자란 토끼풀밭에 풍어놓은 탓이었다. 그러고는 토끼풀 때문에 송아지들이 부어올랐다는 건 절대로 인정하려 들지 않은 채, 그를 안심시킬 요량으로 이웃집에서는 112마리를 사흘씩이나 풀어놓았다는 얘기를 늘어놓았다. 이 모든 사건은 누군가 레빈과 그의 농사일에 악감정을 품은 탓에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레빈도 잘 알고 있는 바, 다들 그를 좋아했고 순박한 나리라고 여겼다(그것은 대단한 찬사였다). 일이 그렇게 된 건 그저 그들이 즐겁고 마음 편하게 일하고 싶었기 때문이며, 레빈의 관심사가 그들에게는 낯설고 납득할 수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정당한 이익에 어쩔 수 없이 반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레빈은 농사일에 대한 스스로의 태도에 불만을 느끼던 터였다. 그는 보트에 물이 차는 것을 알면서도 구멍을 찾으려 들지 않았고, 어쩌면 의도적으로 자기 자신을 기만하고 잇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제는 스스로를 속일 수 없었다. 지금껏 꾸려 온 농사일에 흥미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혐오감마저 들었으며, 따라서 더 이상은 그 일을 해나갈 수가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 키티 셰르바쯔까야가 30베르스따 덜어진 것에 와 있었다.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오블론스까야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녀는 레빈더러 자기네 집으로 와달라고 청했었다. 여동생에게 다시 청혼하러 오라는 얘기였는데, 그러면서 넌지시 동생이 이제 그의 청혼을 받아들일 거라는 눈치를 주는 것이었다. 키티 셰르바쯔까야와 우연히 마주쳤을 때 레빈 또한 그녀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끝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그녀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 오블론스까야의 집으로 찾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에게 청혼을 하고 그녀가 그를 거절한 사건이 두 사람 사이에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을 쌓아 놓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스스로 원했던 사람의 아내가 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그녀더러 내 아내가 되어 달라고 할 수는 없어.’ 그는 생각했고, 그러한 생각이 그로하여금 그녀를 냉담하고 적대적으로 대하도록 만들어버렸다.

원망의 감정 없이는 도저히 이야기를 나눌 수 없을 거야. 악의 없이 그녀를 쳐다볼 수는 없단 말이다. 그렇다면 그녀 쪽에서도 당연히 나를 더욱 증오할 수밖에 없겠지. 게다가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한테서 그런 말을 들은 마당에 내가 어떻게 거길 찾아가겠어? 과연 내가 그녀에게서 들은 얘기를 모르는 체할 수 있겠어? 넓은 아량으로 찾아가서 그녀를 용서하고 자비를 베푼다고? 그녀 앞에서 용서를 베풀고 내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인정해 주는 배역을 연기한단 말이지!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도대체 왜 나한테 그 얘기를 한 걸까? 그녀를 우연히 만난다면야, 그땐 모든 게 저절로 굴러가겠지. 하지만 지금은 불가능해, 불가능하다고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그에게 키티가 사용할 여성용 안장을 빌려달라는 전갈을 보내기까지 했다. ‘댁에 여성용 안장을 갖고 계사면서요? 바라건대, 직접 가져다주셨으면 합니다.’

그런 식의 언행을 레빈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토록 영리하고 섬세한 여자가 자기 동생을 그런 식으로 멸시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열 통이나 편지는 썼다가 모두 찢어 버렸다. 그러고는 아무런 답신도 없이 안장만 보냈다. 가겠노라고 쓰는 건 절대로 안 될 일이었는데, 왜냐하면 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갈 수 없다고, 혹은 출타할 예정이라고 쓰는 건 더더욱 안 될 말이었다. 그는 무언가 부끄러운 짓을 저지르고 있다는 자괴감을 안고서 답신 없이 안장만 보낸 다음, 이튿날 싫증이 난 농사일을 모조리 영지 관리인에게 떠넘기고는 멀리 떨어진 군에 사는 친구 스비챠시스끼의 집으로 향했다. 그의 집 근처에는 도요새가 서식하는 근사한 늪지가 있었는데, 얼마 전 그가 자기 집에 와서 머물다 가겠다는 오랜 약속을 지키라고 편지를 보내왔던 것이다. 수로프스끼군의 도요새 늪지는 오래전부터 레빈의 마음을 끌었지만, 그는 매번 농사일 때문에 여행을 미루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기쁜 마음으로 떠날 수 있었다. 이웃해 있는 셰르바쯔끼 일가의 여인들로부터, 무엇보다도 농사일로부터 벗어나 그 어떤 슬픔 속에서도 최고의 위안을 안겨 주는 것, 바로 사냥을 하러 그는 떠났다.

수로프스끼군까지는 철로도, 역마차 길도 없었기에 레빈은 자신의 말들이 모는 유개 여행 마차를 타고 갔다.

절반쯤 이르렀을 때, 그는 말에게 꼴을 먹이고자 어느 부유한 농가에 잠시 머물렀다. 양쪽 뺨에 새치가 돋고 붉은 턱수염이 더부룩한 혈색 좋은 대머리 노인이 대문을 활짝 열고는 문기둥을 꼭 잡은 채 삼두마차를 들여보내 주었다. 노인은 볕에 그을린 구식 쟁기들이 놓인 깨끗하게 정돈된 너른 마당 한 켠의 처마 밑 자리를 마부에게 안내하고는 레빈에게 농가로 들기를 청했다. 정갈하게 차려입고 맨발에 덧신을 신은 젊은 아낙이 허리를 굽힌 채 처마 밑의 바닥을 닦고 있었다. 그녀는 레빈을 뒤따라 들어온 개를 보고서는 놀라 소리를 질렀지만, 곧바로 개가 물지 않을 것임을 알아채고는 놀란 게 부끄럽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소매를 걷어 올린 손으로 레빈에게 농가의 출입문을 가리킨 그녀는 다시금 허리를 숙여 새빨개진 얼굴을 감춘 채 바닥 닦는 일을 계속했다.

"사모바르를 내올까요?"

"그래 주면 좋겠소."

농가는 널찍했고, 네덜란드식 벽난로와 칸막이가 놓여 있었다. 성상 아래쪽으로 색색으로 당초 무늬가 그려진 탁자와 긴 의자와 두 개의 등받이 의자가, 출입문 옆에는 그릇장이 보였다. 창의 덧문들은 닫힌 채였고, 파리도 별로 없었다. 방이 어찌나 깨끗한지, 레빈은 길바닥에서 마구 달리고 물웅덩이에서 멱을 감았던 라스까가 흙발로 바닥을 더럽힐까 염려되어 녀석에게 문가의 구석진 자리를 지정해 주었다. 그는 농가를 둘러본 후 뒤꼍으로 나갔다. 덧신을 신은 단아한 외모의 젊은 아낙이 두레박에 매달린 빈 물통을 흔들며 그를 앞질러 우물가로 달려갔다.

"잘한다, 아가야!" 노인이 그녀를 향해 즐겁게 소리치고는 레빈에게 다가왔다.

", 그러니까 나리, 니꼴라이 이바노비치 스비야시스끼 댁으로 가시는 길이라고요? 그 댁 분들도 저희 집에 들르시곤 하지요." 노인이 현관 난간에 팔꿈치를 괴고는 수다스럽게 말을 건넸다.

노인이 스비야시스끼와의 친분에 대해 한창 이야기하는 도중 또다시 대문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들에서 일하던 일꾼들이 구식 쟁기와 써레를 끌고서 마당으로 들어섰다. 쟁기와 써레는 살이 찌고 덩치가 커다란 말들에 매여 있었다. 틀림없이 집안 식솔들 같았다. 둘은 젊은 축이었는데, 사라사 셔츠에 챙이 좁은 모자를 썼고, 인부 한 사람은 노인, 다른 한 사람은 젊은 청년이었다. 현관에 있던 노인이 내려가더니 말에게 다가가서 멍에를 풀기 시작했다.

"뭘 경작하였소?" 레빈이 그에게 물었다.

"감자밭을 갈았습죠. 저희도 땅뙈기를 갖고 있거든요. , 페도뜨, 거세한 말들은 밖에 내놓지 말고 구유로 데려가거라, 다른 말은 우리가 맬테니."

", 아버지, 파종기 보습을 갖다 달라고 했는데요, 가져왔나요?" 키가 크고 덩치 좋은 청년이 물었다. 노인의 아들인 성싶었다.

"그게.썰매 안에 있다." 노인이 풀어 놓은 고삐를 둥글게 말아서 바닥에 내던지며 대답했다.

"점심 먹을 동안 정리해 놓으렴."

예의 단아하게 생긴 젊은 아낙이 가득 찬 물통을 매고 오느라 어깨를 잔뜩 늘어뜨린 채 집 안으로 들어섰다. 어디선가 또 다른 아낙들이 나타났다. 젊고 예쁘장한 처자들과 못생긴 중년 여인네들, 늙은 아낙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혹은 아이 없이 나와 있었다.

사모바르의 연통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말들을 다 거둔 일꾼들과 식솔들은. 점심을 먹으러 갔다. 레빈도 마차에서 음식을 가져와 노인더러 함께 차를 마시자고 청했다.

"별말씀을요, 저희는 벌써 마셨습니다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노인은 레빈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는 기색이었다.

"정 그러시다면 함께 들지요."

차를 마시는 동안 레빈은 노인이 일구는 농사일에 대해 전부 알게 되었다. 그는 10년 전에 여지주로부터 120제샤찌나의 땅을 임차했다가 작년에 그 땅을 매입하고 이웃의 지주에게 3백 제샤찌나를 추가로 임차하였다. 토질이 제일 안 좋은 약간의 땅은 소작을 주고, 40제샤찌나 가량의 밭을 가족들과 두 명의 고용 인부들과 함께 경작하고 있었다. 노인은 농사일이 신통치 않다고 푸념을 늘어놨지만, 레빈은 그것이 그냥 하는 말일뿐 실은 그의 일이 번창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만일 농사가 잘 안되었더라면 1제샤찌나당 105루블씩이나 주고 땅을 사지도 않았을뿐더러 세 아들과 조카를 장가보내지도 못했을 것이고, 불이 난 뒤로 집을 두 번이나, 그것도 점점 더 근사하게 다시 짓지도 못했을 터였다. 푸념을 하면서도 자신의 부()와 자식들과 조카와 며느리들은 물론 말과 암소들, 그리고 무엇보다 농사일을 전부 관장한다는 사실을 자랑스레 여기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노인은 새로운 방식의 도입을 꺼려하지 않는 사람 같았다. 그는 감자를 많이 심었는데, 레빈이 마차를 타고 지나가며 보았던 그의 감자밭에는 벌써 꽃이 지고 열매가 맺혀 있었다. 레빈의 감자밭은 이제 막 꽃을 피우는 참이었는데 말이다. 노인은 그가 '플루끄'라고 부르는, 지주한테서 빌린 신식 쟁기로 감자밭을 일구고 있었다. 그는 밀도 심었다. 호밀밭에 김을 매면서 솎아 낸 호밀로 말을 먹였다는 사소한 대목이 레빈을 특히 놀라게 했다. 그 훌륭한 사료가 헛되이 버려지는 것을 보면서 레빈은 얼마나 그것들을 모으고 싶어 했던가. 하지만 그 일은 매번 불가능했다. 그런데 이 농부는 그 일을 해냈을 뿐 아니라 이 사료를 입이 마르도록 예찬하는 것이었다.

"젊고 팔팔한 처자들을 뒀다 뭐하나요? 낟가리들을 길가에 내놓게 하면 짐마차가 와서 나르는 거죠."

"그런데 우리 지주들은 늘 일꾼들과 티격태격한단 말이오." 레빈이 노인에게 찻잔을 건네면서 말했다.

"고맙습니다." 노인은 인사를 하고 찻잔을 받았지만, 먹다 남은 설탕 조각을 가리키며 새 설탕은 사양했다.

"일꾼들이랑 무슨 일을 도모하겠습니까? 하나같이 일을 망칠 뿐이죠. 스비야시스끼 댁만 해도 그렇습니다. 저희도 잘 압니다만, 그 땅이 얼마나 기가 막힌지요. 양귀비씨처럼 새까만 게 말입니다. 그런데도 수확은 신통치 않습니다. 그게 죄다 부주의한 탓입니다."

"하지만 당신도 일꾼들을 부리지 않소?"

"저희들 일이야 농부들 일입죠. 저희는 하나부터 열까지 저희 손으로 합니다. 일꾼들이 일솜씨가 서투르면 당장 내친다고요. 그러고는 식구들끼리 일궈 나가는 겁니다."

"아버님, 피노겐이 타르를 가져다 달래는데요." 덧신을 신은 아낙이 집 안으로 들어와 말했다.

"그럼 나리, 저는 이만!"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레빈에게 천천히 성호를 그으며 감사 인사를 하고서 밖으로 나갔다.

마부를 부르러 굴뚝 없는 곁채로 들어간 레빈은 집안 남자들이 모두 식탁에 둘러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다. 아낙들은 선 채로 시중을 들고 있었다. 젊고 건장한 아들이 입안 가득 메밀죽을 문 채 무언가 우스운 얘기를 하자 모두들 껄껄대며 웃었는데, 양배추 수프를 그릇에 따르던 덧신 신은 아낙이 특히 즐거워했다.

아마 덧신을 신은 아낙의 단아한 얼굴이 농가의 정갈함을 한층 더 고조시킨 탓이기도 했겠지만, 레빈이 받은 인상은 도무지 떨쳐 버릴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것이었다. 노인의 집을 떠나 스비야시스끼에게로 가는 중에도 그는 내내 이 농가를 떠올렸다 어쩐지 이 집의 인상 가운데 무언가가 그에게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기를 요구하는 것만 같았다.

 

스비야시스끼는 군의 귀족단장이었다. 그는 레빈보다 다섯 살 위였고, 결혼한 지도 오래되었다. 젊은 처제가 그의 집에서 함께 살고 있었는데, 그녀는 레빈에게 큰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레빈은 스비야시스끼와 그의 아내가 이 처녀를 자신에게 시집보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잘 아는 터였다. 그 누구에게도 결코 말하지 않을 작정이었지만, 소위 신랑감이라는 청년들이 으레 그러듯이 그는 의심할 바 없이 확실하게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또한 그는 비록 그 자신이 결혼하길 원하며 어느 모로 보나 대단히 매력적인 그 아가씨라면 틀림없이 훌륭한 아내가 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그녀와 결혼할 리는 만무하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설사 키티 셰르바쯔까야를 사랑하지 않았다 해도, 그녀와 결혼한다는 것은 하늘을 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정은 그가 스바야시스끼의 영지로 여행을 떠나며 만끽하고자 했던 쾌감을 망쳐 놓고 말았다.

사냥하러 오라는 스비야시스끼의 편지를 받고서 레빈은 곧바로 그 정황을 떠올렸지만, 자신에 대한 스바야시스끼의 계획은 그저 아무런 그거 없는 혼자만의 억측에 불과했기에 어쨌거나 떠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혹시 그 아가씨와 잘 맞는지, 자기 자신을 시험해 보고자 하는 바람도 있었다. 스비야시스끼의 가정생활은 그지없이 단란했으며, 그가 생각하기에 가장 바람직한 유형의 젬스뜨보 활동가인 스비야시스끼 자신 또한 레빈에게는 대단히 흥미로운 사람이었다.

스비야시스끼는 레빈에게 늘 불가사의하게 여겨지는 그런 부류 중 하나였다. 그리 독창적이지는 않지만 대단히 논리 정연하게 자기 완결적으로 개진되는 사고에 반해, 지나치게 확고부동하고 일률적인 생활은 그 자체로 거의 언제나 사고와 모순되는 별도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그런 사람들 말이다. 스비야시스끼는 지나치게 자유주의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귀족 계층을 경멸했고, 소심해서 표현을 안 할 뿐 대다수의 귀족들은 마음속으로 농노제를 지지한다고 여겼다. 그에게 러시아는 터키처럼 이미 몰락한 나라이며, 정부 역시 그 활동을 진지하게 비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는 공직에 복무했고, 모범적인 귀족단장이었으며, 외출할 때면 언제나 휘장을 달고 붉은 테를 두른 제모를 착용하곤 했다. 인간다운 삶이란 오직 외국에서만 가능하다며 틈만 나면 해외로 나가 지내면서도, 한편으로는 러시아에서 매우 복잡하고 개량된 형태의 농사일을 벌였고, 러시아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뭐든지 엄청난 관심을 가지고 주시할 뿐 아니라 모든 사안들을 훤히 꿰고 있었다. 러시아 농부들은 발달 단계상 원숭이에서 인간으로 진화해 가는 과도기에 놓여 있다고 보면서도, 지방 의회 선거철이면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농부들과 악수를 나누고 그들의 의견을 경청하였다. 그는 귀신이고 죽음이고 뭐고 아무것도 믿지 않았지만, 성직자들의 생활 개선과 교구 축소 문제에 극도로 신경을 썼으며 자신이 사는 마을에 교회를 존속시키기 위해서 무척이나 애를 썼다.

여성 문제에 있어서 그는 여성의 완전한 자유, 특히 일할 권리를 극단적으로 지지하는 축에 속했다. 그러나 막상 자신은 아이도 없이 아내와 함께, 모두가 감탄할 정도로 우애 넘치는 가정생활을 영위하며, '어떻게 하면 시간을 더 즐겁게 보낼 수 있을까'라는 남편과의 공통된 관심사 외에는 아내가 그 어떤 일도 하지 않고 할 수도 없게끔 유도했다.

만일 레빈이 사람들을 최대한 좋은 쪽으로 이해하려 드는 습관을 가지고 있지 않았더라면, 스비야시스끼의 성품은 그에게 어떤 곤란이나 의문도 제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속으로 '바보 아니면 허접쓰레기'라고 말했을 테고, 그것으로 모든 게 명확해졌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를 가리켜 결코 '바보'라고 할 수는 없었으니, 왜냐하면 스비야시스끼는 의심할 바 없이 매우 영리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학식이 풍부했고, 그러면서도 유달리 소박하고 겸손했기 때문이다. 아마 그가 모르는 분야란 없을 테지만 그는 꼭 필요한 경우에만 자신의 학식을 드러냈다. 더군다나 스비야시스끼를 허접쓰레기라고 볼 수 없는 이유는, 그가 의심할 나위 없이 정직하고 선량하며 총명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주변 사람들 모두가 높이 평가하는 일을 즐겁고 활기차게, 지속적으로 해나갔다. 게다가 그 어떤 나쁜 짓도 결코 의도적으로는 저지르지 않았으며, 저지를 수도 없는 사람임이 틀림없었다.

레빈은 그를 이해하고자 애썼지만 결국 이해할 수 없었고, 오묘한 수수께끼를 대하듯이 그와 그의 삶을 바라보곤 했다.

서로 친밀한 사이였으므로 그에게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묻고 그의 인생관을 맨 밑바탕까지 알아내고자 했으나 번번이 허탕을 치곤 했다. 레빈은 자신이 스비야시스끼의 지성이라는, 모두에게 개방된 접견실의 출입문 안쪽으로 침입하려 할 때마다 그가 살짝 당황하는 것을 알아챘다. 레빈이 자신을 간파할까 봐 두려워하는 듯 그의 눈빛에는 당혹스러워하는 내심이 알 듯 말 듯 내비쳤고, 그렇게 그는 정답고 쾌활한 투로 침입에 저항하곤 하는 것이었다.

농사일에 환멸을 맛본 지금, 레빈은 스비야시스끼의 집에서 머물게 된 것이 특히 반가웠다. 스스로에게는 물론 그 모든 것에 만족스러워하는 이 행복한 원앙과 그들의 안락한 보금자리가 그에게 그저 유쾌한 기분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은 말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자신의 생활이 이토록 불만족스러운 이때, 스비야시스끼에게서 삶을 그토록 명료하고 확고하며 유쾌하게 만들어 주는 비밀을 알아내고 싶기도 했다. 더하여 스비야시스끼의 집에서는 이웃의 지주들도 만나게 되리라는 걸 레빈은 잘 알고 있었으니, 마침 그는 곡물의 수확이나 일꾼들의 고용 등 농사일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싶고, 듣고도 싶던 터였다. 레빈도 잘 알다시피 그런 유의 대화는 어쩐지 아주 저급한 것으로 치부되곤 했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더없이 중요하게만 여겨졌다. '농노제하에서나 영국에서는 어쩌면 그런 게 중요하지 않았을지도 몰라. 양쪽 모두 조건 자체가 고정적이었으니까. 하지만 모든 것이 급변하고 새롭게 조성되어 가는 지금의 러시아에서 그러한 조건들이 어떻게 안착될 것이냐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야.'

사냥은 레빈이 기대했던 것보다 신통치 않았다. 늪지가 바짝 말라 도요새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루 종일 헤매다가 겨우 세 마리만 잡아 왔다. 그렇지만 사냥에서 돌아올 때면 늘 그러듯이 왕성한 식욕과 그지없이 상쾌한 기분, 그리고 강도 높은 육체적 움직임이 언제나 동반하는 각성된 정신 상태를 느낄 수 있었다. 사냥터에서 아무런 생각도 없다고 느껴질 때마다. 레빈에게는 노인과 그 가족들이 또다시 떠오르곤 했다. 그러한 인상은 그의 주의를 끌 뿐만 아니라, 마치 그와 관련된 무언가를 해결하기를 그에게 요구하는 것만 같았다.

저녁때 후견에 관한 용무로 찾아온 두 지주와 동석하여 함께 차를 마시는 동안, 레빈이 기대했던 예의 흥미진진한 대화가 시작되었다.

레빈은 티 테이블에서 안주인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던 탓에, 그녀와 또 그 맞은편에 앉은 그녀의 여동생과도 이야기를 나눌 수밖에 없었다. 안주인은 얼굴이 둥그스름하고 키가 작은 금발의 여인으로, 온 얼굴에 보조개와 미소를 환하게 띠고 있었다. 그녀를 통해 레빈은 그녀의 남편이 내놓은 중대한 수수께끼의 해답을 캐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자리가 너무나도 거북하여 도무지 자유롭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가 그토록 거북했던 까닭은 안주인의 여동생이 가슴팍이 사다리꼴로 깊이 파인 옷을 입고 하얀 젖가슴을 드러낸 채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자신 때문에 일부러 그 드레스를 고른 것 같았다. 그녀의 젖가슴이 무척이나 새하앴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너무나 하얬던 바로 그 탓에, 이 깊숙한 사다리꼴이 레빈에게 생각의 자유를 앗아가 버렸다. 틀림없이, 혹은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레빈은 자신을 염두에 두고 그녀가 그렇게 가슴팍을 드러냈으리라 짐작했으며, 자신한테는 그 부분을 쳐다볼 권리가 없다고 여겼기에 그쪽을 보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그렇게 가슴 부분이 파였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죄책감이 들었다. 마치 자신이 누군가를 기만하고 있으며 무언가를 해명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정말로 그것을 해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는 쉴 새 없이 얼굴을 붉힌 채 좌불안석이었던 것이다. 그의 거북함은 어여쁜 여동생에게도 전달되었지만, 안주인은 눈치를 못 챘는지 동생을 짐짓 대화에 끌어들이곤 했다.

"그러니까, 그 말씀은……"안주인이 시작된 대화를 이어 갔다. "저희 남편이 러시아적인 것 일체에 관심이 없다는 거로군요. 하지만 정반대예요. 그이가 외국에서 즐겁게 지내는 건 사실이지만 여기서만큼은 아니랍니다. 여기서 그이는 자신의 고유한 영역에 머문다고 느끼죠. 그이가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만큼 그이는 온갖 일에 대한 관심을 타고났어요. , 저희 학교에 안 가보셨지요?"

"본 적은 있습니다만..담쟁이로 뒤덮인 건물 말씀이지요?"

", 거긴 나스짜가 담당하고 있어요." 그녀가 동생을 가리켰다.

"직접 가르치시나요?" 레빈은 그녀의 가슴팍을 외면하려 애쓰며 물었지만 어느 쪽으로 시선을 돌리더라도 그 부분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 제가 직접 가르쳤고 지금도 가르치고 있지만, 따로 훌륭한 여교사도 있어요. 체조 수업도 개설했고요."

", 고맙습니다만 차는 이제 그만 마시겠습니다." 레빈은 얼굴을 붉히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례를 범하고 있다고 느꼈지만 더 이상은 대화를 지속할 수가 없었다. "아주 흥미로운 얘기가 들려서 말이죠." 이렇게 덧붙이고서 그는 주인과 두 명의 지주가 앉아 있는 탁자의 반대편 끄트머리로 다가갔다. 스비야시스끼는 탁자 쪽을 향해 비스듬히 앉은 채 팔꿈치를 괸 한쪽 손으로 찻잔을 돌렸고, 다른 손으로는 턱수염을 한아름 쥐고서 냄새라도 맡으려는 듯 코에 가져가곤 하였다. 검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콧수염이 희끗희끗한 지주가 열을 올리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의 말에서 무언가 재미난 점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지주는 농민들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레빈이 보기에 스비야시스끼는 지주의 불평에 대해 그가 하는 말의 의미를 모조리 뒤엎을 만한 답변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처한 입장 때문에 입 밖에 내지 못한 채 상대의 우스꽝스러운 장광설을 나름 흥미롭게 듣고 있는 게 분명했다.

희끗한 콧수염을 기른 지주는 완고한 농노제 지지자이며 시골 토박이이자 열성적인 영지 경영자임이 틀림없었다. 레빈은 그의 옷차림, 즉 어색해 보이는 후줄근한 구식 프록코트에서도, 미간을 찌푸린 총기 어린 눈에서도, 유창한 러시아어와 연륜이 묻어나는 명령조의 말투에서도, 약지에 낡은 결혼반지 하나만 낀 커다랗고 아름다우며 햇볕에 그을린 손의 단호한 동작에서도 그러한 징후를 발견할 수 있었다.

"공을 많이 들였는데 말이지..일궈 놓은 걸 버리는 게 아깝지만 않다면야 모든 걸 단념하고 내다 팔아 버린 뒤, 니꼴라이 이바니치처럼 '헬레네'나 감상할 텐데." 총기 넘치는 늙수그레한 얼굴에 환한 웃음을 지은 채 지주가 말했다.

"그래도 버리지는 않으시잖습니까." 니꼴라이 이바노비치 스비야시스끼가 말했다.

"그러니까 이득이 남는다는 얘기지요."

"이득이라면 오로지 집에서 생활하는 것뿐이지. 돈 주고 산 것도 아니고, 빌린 것도 아닌 내 집 말이오. 그나저나, 여전히 농민들이 계몽되길 바라고들 있겠지. 하지만 참말이지, 허구한날 술타령에 방탕이나 일삼잖소! 모든 게 재분배된 뒤로는 소 한마리, 말 한 마리 없소. 다들 굶어 죽게 생겼는데, 어디 한번 데려다가 일꾼으로 고용해 보시오. 농사일을 망쳐 놓을 기회만 노릴걸. 심지어 치안 판사한테까지 찾아갈 테지."

"그러면 어르신도 치안 판사한테 가서 고소하시면 되잖습니까." 스비야시스끼가 반문했다.

"내가 고소를 한다고? 대체 뭣 때문에 그런 짓을 한단 말이오! 그런 얘기라도 돌아봐요. 고소를 했다가 큰코다치는 게지! 얼마 전에는 공장에서 선금만 챙기고는 냅다 도망갔던 일이 있었잖소. 치안 판사가 뭘 했겠소? 무죄 판결이나 내리겠지. 그나마 면 재판소나 촌장들 손으로 처리하니 일이 굴러가는 거라오. 그치들은 옛날식으로 호되게 매질을 하거든, 그거라도 없으면 다 버리는 수밖에! 그러고는 세상 저편으로 줄행랑을 치는 거야!"

지주는 스비야시스끼의 약을 올리고 있는 게 분명했는데, 스비야시스끼는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즐기는 기색이었다.

", 보십시오, 저희들은 그런 방식을 취하지 않고도 농사일을 꾸려 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가 웃으면서 말했다.

"저와 레빈, 그리고 저분도요."

그는 또 다른 지주를 가리켰다.

"그래, 미하일 뻬뜨로비치 댁에서도 일이 잘되어 가고 있긴 하지. 한데 어떻게 해서 그런지 한번 물어보시겠소? 그게 과연 합리적인 경영이냔 말이오." '합리적인'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며 지주가 으스대듯 말했다.

"우리 집 농사는 소박합니다." 미하일 뻬뜨로비치가 말했다.

"하느님께 감사할 따름이지요. 내 일이야 가을철에 인두세를 낼 돈을 미리 마련해 두는 게 전부니까요. 그럼 농부들이 찾아와서는 주인님, 나리, 살려주십시오, 하며 난리를 칩니다! 이웃 사람들이라는 게 죄다 농부들이니 항시 가엾단 말이지요. 그러니 세금의 3분의 1을 빌려주는 겁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하는 거죠. "모두들 내가 도와준 걸 잊지 말고, 필요할 때 자네들도 나를 도와주게. 귀리를 파종하거나, 풀을 베거나, 추수할 때 말일세." 그러면서 두당 얼마씩이라고 말해 두는 겁니다. 개중에는 역시나 양심 없는 작자들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암 그렇고말고요."

오래전부터 이 가부장적인 방식을 익히 알고 있던 레빈은 스비야시스끼와 눈짓을 주고받은 뒤 미하일 뻬뜨로비치의 말을 끊고서 다시금 희끗한 콧수염을 기른 지주에게 말을 걸었다.

"어르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이제 농사일을 어떻게 해나가야 할까요?"

"미하일 뻬뜨로비치처럼 할 수도 있겠지. 아니면 수확을 농부들과 절반씩 나누거나 농부들에게 임대를 줄 수도 있겠고. 가능한 방법이지만, 그렇게 되면 국가의 전체적인 부는 소멸하고 말 것이오. 농노제하에서는 경영을 잘했을 땐 우리 영지에서 아홉 배의 수확을 거두어들였는데, 반반씩 나눴을 경우엔 세 배의 수확만 거두었거든. 농노 해방이 러시아를 망쳐 놓은 게지!"

스비야시스끼는 미소를 머금은 눈으로 레빈을 쳐다보았고, 심지어는 살짝 비웃는 티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레빈은 노인의 말을 우습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스비야시스끼를 이해하는 이상으로 지주를 이해하고 있었다. 뒤이어 지주가 왜 농노 해방이 러시아를 몰락하게 만들었는지를 입증하기 위해 늘어놓은 대부분의 얘기들 또한 타당하게 들렸고, 참신하고 반박하기 어려운 견해로 여겨지기까지 했다. 지주는 자신만의 고유한 생각을 피력한 게 분명했으니, 이는 흔치 않은 경우였다. 이는 한가한 두뇌에 무언가 소일거리를 제공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된 생각이 아니었다. 고독한 시골에 처박혀 오랜 세월에 걸쳐 일궈 온 삶의 조건으로부터 자연스레 우러나온 것이자, 여러 방면에서 심사숙고해 온 결과였다.

"문제는 모든 진보가 오로지 권력에 의해서만 실현된다는 점이오." 자신도 나름의 식자임을 내보이려는 듯 그가 말했다. "뾰뜨르, 예까쩨리나, 알렉산드르의 개혁을 들어 봅시다. 유럽 역사도 마찬가지요. 더군다나 농사일의 관행에 있어서는 말할 것도 없지. 감자만 해도 그렇소. 강압에 의해 우리나라에 들여왔잖소. 쟁기로 경작하는 것도 원래부터 그랬던 건 아니지. 그것도 밖에서 들여왔으니. 아마도 공후령 시절이었을 텐데, 강제로 도입한 게 분명할 거요. 현대에 들어 우리 지주들은 농노제하에서 영농법을 부단히 개량하여 농사를 지어 왔소. 건조기, , 거름 달구지, 그 밖의 농기구들, 그 모든 것을 우리 힘으로 들여왔단 말이오. 농부들은 처음엔 반대하다가도 결국에는 우리를 따라 하곤 했지. 그런데 농노제가 폐지도니 지금 우리는 그 힘을, 권력을 박탈당했소. 농업이 높은 수준에 도달한 시점에서 이제 가장 야만적이고 원시적인 상태로 곤두박질칠 수밖에 없게 됐단 말이오. 내 생각은 그렇소."

"아니, 어째서 그렇습니까? 그것이 합리적인 일이라면 노동자를 고용해서 경영하실 수도 있을 텐데요." 스비야시스끼가 말했다.

"권력이 없잖소. 내가 누구를 데리고 경영을 한단 말이오? 한번 물어봅시다."

'바로 그거야! 노동력. 농업의 주된 요소.' 순간 레빈은 이런 생각에 잠겼다.

"노동자들이 있잖습니까."

"노동자들은 일을 잘하려 들질 않고, 좋은 농기구로 일하기도 싫어한단 말이오. 우리나라 노동자가 알고 있는 건 딱 하나뿐이라오. 돼지처럼 잔뜩 마시고 취하는 거지. 술에 취해서는 당신이 내준 모든 것을 망가뜨리는 거요. 말한테는 물을 너무 많이 먹이고, 좋은 마구는 잡아 떼버리질 않나, 철제 바퀴까지 뜯어다가 팔아 술을 마시고, 망가뜨릴 작정으로 탈곡기에 바퀴 연결축을 쑤셔 넣고, 자기네들식이 아닌 건 뭐든지 싫다 이거요. 바로 그때문에 농업의 전반적인 수준이 내려앉아 버렸소. 토지는 버려진 채 잡초만 무성하고, 아니면 농부들한테 쪼개서 불하해 버렸으니, 1백만 섬이 나던 곳에서 수십만 섬밖에는 소출이 안 날수밖에. 전체적인 부가 줄어들었소. 같은 일을 한다고 쳐도 이런 점을 고려하면……"

이윽고 그는 언급된 곤경들을 피할 수 있는, 자신만의 독특한 농노 해방 구상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얘기에는 별 관심이 없었기에, 레빈은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맨 처음 화제로 돌아가 스비야시스끼가 자신의 진지한 견해를 털어놓도록 부추길 심산으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농업의 수준이 저하되고 있다는 것, 우리와 노동자들의 관계가 지금과 같다면 합리적이고 유리한 경영을 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 이는 전적으로 타당한 지적 아닌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네." 스비야시스끼가 당장에 진지한 어조로 반박했다.

"내가 보기에, 우리는 농사를 제대로 경영할 줄 모르네. 그리고 농노제하에서 우리가 일궈 온 농업은 그리 수준이 높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저급하다네. 우리한테는 농기계도, 훌륭한 농업용 가축도, 제대로된 영농법도 없으며, 심지어 우리는 계산도 제대로 할 줄 모르네. 지주들한테 한번 물어보게나. 뭐가 이롭고, 뭐가 불리한지도 모를 테니."

"이탈리아식 부기로구먼." 지주가 비아냥거렸다.

"그 식으로 하면 아무리 셈을 해도 모든 게 다 엉망이 돼버리고, 이득이라고는 하나도 안 남는 법이지."

"어째서 엉망이 돼버린단 말입니까? 허접한 고물 탈곡기나 어르신네의 그 러시아 탈곡기[말이 밟아서 돌리는 탈곡기]는 망가질지 모르지만, 우리 증기식 탈곡기는 끄덕없습니다. 말은 또 어떻습니까? 꼬리를 잡아끌어야 겨우 움직이는 고삐 풀린 잡종이니 죄다 엉망이 되겠지요. 페르슈롱[프랑스 페르슈 지방의 말]이나 하다못해 비쭈끄[돈강 지류인 비쭈끄강 유역에서 나는 말의 종자. 덩치가 크고 힘이 세서 주로 무거운 짐을 나르는 데 쓰인다]라도 데려와 보십시오. 그러면 망칠 리는 없을 겁니다. 요는 그겁니다. 우리는 농업의 수준을 더 높이 끌어올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어디서 그런 여유가 생기겠소, 니꼴라이 이바니치! 당신네야 형편이 넉넉하겠지만, 나는 큰아들을 대학에 보내고, 작은아들들은 중학교에서 가르쳐야 하오. 그러니 페르슈롱을 살 여력이 없단 말이오."

"그런 경우를 위해 은행이 있는 것이죠."

"곡식 한 톨까지 다 경매에 내놓게? 천만에, 사양하겠소!"

"농업의 수준을 더 향상시켜야 하고, 그럴 수 있다는 의견에 나는 동의하지 않네." 레빈이 말했다.

"지금껏 그 일을 해왔고 자금도 있지만, 나 아무 성과도 내지 못했지. 은행은 누구 좋으라고 있는 건지 모르겠고, 적어도 농사일에는 돈을 아낌없이 썼는데, 죄다 밑지는 장사였단 말이네. 가축도 손해를 보고, 기계도 손해를 봤지."

"거참, 옳은 말씀이오." 콧수염을 기른 지주가 만족에 겨운 듯 웃음을 지으며 맞장구를 쳤다.

"나뿐만이 아니야." 레빈이 말을 이었다.

"합리적으로 농사를 경영하는 여러 지주들의 입장에서 하는 얘기일세. 드물게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손해를 보고 있어. 어디, 얘기 좀 해보게. 자네의 경우 수익이 남는가?" 이렇게 묻자마자 레빈은 순간적으로 스비야시스끼의 눈에서 당황한 기색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감지했다. 바로 그 지성의 접견실로 들어가려 할 때마다 엿보이곤 하던 기색이었다.

사실, 레빈의 입장에서도 그 질문은 그리 떳떳한 것이 못 되었다. 차를 마시는 동안 안주인이 그에게 전해 준 바로는, 올여름 그가 모스끄바에서 불러온 부기에 능한 독일인이 5백 루블을 받고 영지 경영의 회계 정산을 해주었는데, 3천 루블 남짓 적자가 났음이 밝혀졌다는 것이었다. 그녀로서는 정확히 기억할 수 없지만, 아무튼 독일인은 4분의 1 꼬베이까까지 계산해 냈다고 했다.

스비야시스끼 영지의 수익이 도마에 오르자, 이 귀족단장과 이웃 지주의 영지 수익이야 빤하다는 투로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적자일지도 모르지." 스비야시스끼가 대답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무능한 경영주거나, 혹은 내가 지대의 비중을 늘리는 데 투자한다는 사실만을 말해 줄 뿐이네."

"오호라, 지대라니!" 레빈이 불쾌한 어조로 소리쳤다.

"유럽에는 지대가 존재하겠지. 거기서는 개간 사업 덕분에 토질이 좋아졌으니까.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개간 탓에 오히려 토양이 더 나빠지고 있네. , 비료도 업이 연속으로 경장을 해서 땅이 척박해지고 있단 말이지. 그러니 지대라는 게 있을 턱이 없네."

"지대가 있을 턱이 없다니? 그건 법으로 정해진 건데."

"그러니까 법은 딴 세상 얘기라는 걸세. 지대는 우리한테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못할뿐더러, 반대로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야. 어디 한번 설명해 보게. 지대론이라는 게 어떻게."

"여러분, 요구르트 좀 드시겠습니까? 마샤, 요구르트나 산딸기 좀 내와요." 그가 아내에게 말했다.

"올해는 산딸기가 아주 늦도록 열리더군요."

그러더니 스비야시스끼는 아주 유쾌한 기분으로 일어나서 자리에서 물러났다. 레빈으로서는 이제 막 얘기가 시작된 참인데, 그는 이미 대화가 끝났다고 짐작했던 것이다.

말 상대를 잃은 레빈은 지주와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 가면서, 모든 어려움이 러시아 노동자의 습성을 알려고 들지 않은 데서 비롯된다는 점을 입증하고자 했다. 하지만 외따로 떨어져 자기식으로만 사고하는 사람들이 그러듯이, 지주는 남을 이해하는 데 둔했고 자기 생각에만 집착했다. 그는 러시아의 농부들이란 돼지 같은 놈들이며 추잡한 짓을 일삼는다면서, 그들을 그런 짓거리에서 끄집어내려면 권력이 필요한데 그것이 없으니 필요한 것은 단지 몽둥이뿐이라고 고집했다. 그런데 우리가 자유주의자들이 되는 바람에 1천 년이 넘도록 이어져 온 몽둥이를 그 무슨 변호사라든가 금고형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그 결과 씀로없고 악취 풍기는 농부들한테 양질의 수프를 먹이고, 몇 평방미터의 공기를 배당해 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레빈이 본래의 문제로 말머리를 돌릴 요량으로 물었다. "작업을 생산적인 것으로 만들어 주는 관계, 노동력과 그러한 관계를 찾는 게 어째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러시아 농민들에 한해서는, 몽둥이 없이 그런 관계란 절대 있을 수 없소! 권력이 없으니까." 지주가 대답했다.

"대체 어떤 새로운 조건이 모색될 수 있다는 건가?" 요구르트를 다 먹은 뒤 궐련에 불을 붙이고 논객들 곁으로 다시 다가오던 스비야시스끼가 말문을 열었다.

"노동력과 가능한 모든 관계는 이미 규명되고 연구되었네. 야만의 잔재인 연대 보증 체제로 움직이는 원시 공동체는 저절로 소멸되었고, 농노제는 폐지되었으며, 남은 것은 자유로운 노동이란 말일세. 그리고 그 형태는 이미 결정되어 마련돼 있으니 그것을 수용해야만 하네. 머슴, 품팔이, 소작농..이들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는 거라고."

"하지만 유럽은 그런 형태에 불만을 품고 있네."

"그래서 새로운 것을 찾고 있지. 그리고 틀림없이 찾아낼 걸세."

"내 말이 바로 그 얘기라니까." 레빈이 대꾸했다.

"왜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찾을 수 없다는 건가?"

"왜냐고? 철로를 놓는 기술이 이미 나와 있는데 그걸 또다시 궁리해 내봤자 매한가지 아닌가. 그것들은 이미 다 나와 있고, 고안되어 있단 말일세."

"하지만 그게 우리한테는 안 맞다면? 부조리하다면?"

그 순간 레빈은 스비야시스끼의 눈에서 예의 당황한 낌새를 다시 포착했다.

"그러니깐 얘긴즉슨, 유럽에서 찾던 바로 그것을 우리가 찾아냈다면서 모자를 던져 올리며 우쭐대겠다는 거지! 나도 그런 건 잘 알고 있네. 그런데 자네, 미안하지만, 노동력을 조직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유럽에서 실행된 것들ㅇ르 다 알고 있는 건가?"

"아니, 잘 모르네."

"그 문제에 관해서는 현재 유럽 최고의 지성들이 연구하고 있다네 슐체델리치 학파라든가.그다음으로는 가장 자유주의적인 라살레 학파의 노동 문제에 대한 저 방대한 강령적 문헌들하며..뮐하우젠 기구며.자네도 잘 알겠지만, 이런 것들은 이미 기정사실 아닌가."

"대충은 파악하고 있지만, 아주 어렴풋하게 알 뿐이야."

"아니, 그저 말만 그렇지, 자네는 이 모든 것을 나 못지않게 잘 알고 있는 게 분명해. 물론 사회학 교수는 아니지만, 나도 이 문제에는 관심을 갖고 있네. 자네도 관심이 있다면 한번 연구해 보게."

"그런데 그것들이 결국 어찌 되었나?"

"난 이만 실례하겠소.."

지주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스비야시스끼는 자신만의 지적 접견실의 배후를 들여다보려는 레빈의 그 불쾌한 버릇을 저지시키고는 손님들을 배웅하러 나섰다.

 

부인들과 함께 보내는 그 날 저녁 시간은 레빈에게 견딜 수 없이 지루했다. 지금 절감하고 있는 농사에 대한 불만이 자신만의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라 러시아 농업이 처한 전반적인 조건이며, 노동자들이 어디서 일을 하든 그들을 오는 길에 보았던 농가의 사람들처럼 조직해 내는 일이 한갓 꿈이 아닌,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라는 생각이 그 어느 때보다는 그를 흥분시켰다. 더욱이 그 과제는 해결이 가능해 보였으며, 따라서 이를 위해 노력해야 할 것만 같았다.

부인들과 밤 인사를 나누면서 내일 종일토록 머물며 말을. 타고 근처 국유림에 있는 흥미로운 절벽을 구경하러 다녀오기로 약속한 레빈은, 잠자리에 들기에 앞서 스비야시스끼가 권한 노동 문제에 관한 책을 가지러 그의 서재에 들렀다. 스비야시스끼의 널찍한 서재에는 사방이 책장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테이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하나는 방 한가운데 자리한 큼직한 책상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둥근 탁자였는데, 거기 놓인 램프 주변에 각종 ㅗ이국 잦ㅂ지와 신문의 최근 호들이 별 모양으로 늘어서 있었다. 책상 옆에 있는 서랍장에는 세목별로 금빛 라벨이 달려 있었다.

스비야시스끼는 책들을 꺼내 들고서 흔들의자에 앉았다.

"뭘 보고 있나?" 그가 둥근 탁자 앞에 서서 잡지들을 뒤적이고 있는 레빈에게 물었다.

", 그래, 거기 아주 흥미로운 논문이 실려 있지." 레빈이 들고 있는 잡지에 관해 한마디 하더니 그는 쾌활한 말투로 덧붙였다.

"결론적으로 말이야, 폴란드 분할의 책임자는 프리드리히가 아니라는 거야. 사실인즉슨.."

그는 특유의 명쾌한 언변으로 새롭고도 매우 중요하며 흥미로운 이 발견에 관하여 짤막하게 소개했다. 지금 레빈은 무엇보다도 농사일에 관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그래도 주인의 이야기를 듣고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저 인간 속에는 대체 뭐가 들어앉아 있는 걸까? 도대체 왜 폴란드의 분할이 흥미롭다는 거지?" 스비야시스끼가 이야기를 마치자, 레빈은 저도 모르게 물었다.

"그래서 뭐가 어찌 됐다는 건가?" 하지만 아무런 결론도 없었다. 단지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었다는 점'이 흥미롭다는 얘기뿐이었다. 그러나 스비야시스끼는 그것이 자신에게 왜 흥미로운지를 설명하지 않았으며,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말이지, 나는 그 성마른 지주가 흥미롭더군." 레빈이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영리한 분이던데, 옳은 말씀을 많이 하시더라고."

"에잇, 됐네, 이 사람아! 다 그렇고 그렇듯이, 완고하고 음융한 농노제 지지자라니까."

"자넨 바로 그런 사람들을 선도하는 귀족단장 아닌가?"

"그래, 하지만 그들을 다른 쪽으로 선도할 따름이지." 스비야시스끼가 웃으면서 대꾸했다.

"내 흥미를 끄는 건 이런 점이네." 레빈이 말했다.

"그분이 옳게 지적하셨듯이, 우리나라 농업은, 요컨대 합리적인 영농이 제대로 되질 않고, 그 조용한 지주의 경우처럼 지극히 단순한 고리대금업 같은 농사가 이루어진다는 거지. 이게 과연 누구 탓이겠나?"

"몰론 우리 자신 탓이지. 그리고 말이야, 경영이 제대로 안 되고 있다는 건 사실이 아니네. 바실치꼬프의 사업은 잘 되고 있어."

"그건 공장이고……"

"그런데 자네는 뭐가 그리 놀랍다는 건지, 아무래도 이해가 안 가는구먼. 농민들은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발전 수준이 저급해서, 낯선 거라면 뭐든 저항할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하네. 유럽에서 합리적인 경영이 이루어지는 이유는 농민들이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지. 요컨대, 우리나라 농민들을 교육시켜야 한다는 걸세. 그게 해답의 전부야."

"하지만 어떻게 농민들을 교육시킨단 말인가?"

"농민들을 교육시키려면 세 가지가 필요하지. 그것 첫째도 학교, 둘째도 학교, 셋째도 학교라네."

"하지만 방금 농민들의 물질적 발전 수준이 저급하다고 말하잖았나. 그런 상황에서 학교가 무슨 도움이 되겠나?"

"이보게, 환자에게 조언하는 내용의 그 우스갯소리가 떠오르는 구먼. '설사약을 복용해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먹었는데 더 나빠졌습니다.' '거머리를 써보십시오.' '써봤는데 더 나빠졌습니다.' 자네와 나 또한 그런 식이란 말일세. 내가 정치 경제학을 거론하면 자네는 더 나쁘다고 하고, 사회주의를 얘기하면 더 나쁘다고 하고, 교육을 언급하면 더 나쁘다고 하잖나."

"아니, 학교가 대체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그들에게 다른 종류의 욕구를 일깨워 주지."

"바로 그 점을 나는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네." 레빈이 열을 올렸다. "도대체 학교가 어떤 식으로 농민들이 자기네 물질적 상황을 개선하는 데 도움을 준단 말인가? 학교가 그들에게 새로운 욕구를 일깨워 준다고? 그건 더 나쁘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그런 욕구를 만족시킬 능력이 없으니까. 덧셈이나 뻴셈, 교리 문답 같은 지식이 그들의 물질적인 상황을 개선시키는 데 어떤 식으로 보탬이 된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 그저께 저녁에 젖먹이를 안고 가는 아낙과 마주쳤는데, 내가 어딜 가는 길이냐고 묻자 이렇게 말하더군. '무당한테 다녀오는 길입니다, 아이한테 울음병이 들어앉았거든요. 고치려고 데리고 다닌답니다.' 그래서 다시 물었지, 무당이 어떻게 고치더냐고. 그랬더니 '닭장으로 데려다가 홰에 앉혀 놓고는 뭔가 중얼거리던데요.' 하더군."

"그것 보라고, 자네 입으로 말하고 있잖나!" 스비야시스끼가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울음병을 고치겠다고 닭장에 데리고 다니지 않게 하려면, 그러러면.."

"에잇, 그게 아니라니까!" 레빈이 짜증스럽다는 투로 말을 끊었다.

"그 치료법이야말로 내가 보기엔 학교를 통해서 농민들을 고치려 드는 것과 유사하단 말이네. 농민들은 가난하고 무식하다고. 아이가 우니까 무당이 울음병이 들어앉았다고 확신하듯이, 그건 우리에게 명백한 사실이야. 울음병을 고치는 데 홰에 앉은 닭들이 어떤 소용이 있는 건지 도통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난과 무지라는 불행에서 벗어나는 데 학교가 어떻게 도움이 된다는 건지 나는 이해가 안 간다는 거네. 고쳐야 할 것은 가난하게 된 원인, 바로 그건데 말이지."

"글쎄, 그 점에 있어서 자네는 적어도 자네가 그토록 좋아하는 스펜서의 견해와 일치하는군. 그 또한 말하길, 교육은 막대한 부와 생활의 편의, 그리고 잦은 목욕의 결과이지. 읽고 셈하는 능력의 결과는 아니라고."

"스펜서와 의견이 일치했다니, 무척 기쁘기도 하고 반대로 기분이 나쁘기도 하군. 내가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건 단지 이런 거야. 학교는 도움이 안 된다, 도움이 되는 건 농민들이 더 부유해지고 여가를 더 누릴 수 있게 해주는 경제적인 구조다, 학교는 그다음이야."

"하지만 유럽 전역에서 학교는 필수적인 기관이라네."

"그런데 말이지, 이 문제에 있어서 자네는 스펜서의 견해에 동의하는 건가?" 레빈이 물었다.

순간 스비야시스끼의 눈에서 놀라는 기색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는 이내 웃으면서 말머리를 돌렸다.

"그것 참, 그 울음병 얘기는 정말 기가 막히는군! 정말로 직접 그 얘기를 들었단 말인가?"

레빈은 이 인물에게서 삶과 사상 간의 연관 관계른 아무래도 찾아낼 수 없으리라는 걸 깨달았다. 자신의 사고가 무엇으로 귀결되든 아무 상관도 없을 게 분명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사고의 과정일 뿐이었다. 그러다 사고가 교착 상태에 빠지면 불쾌해지고, 바로 그래서 무언가 즐겁고 유쾌한 화젯거리로 말머리를 돌림으로써 그런 상황을 회피하는 것이었다.

오는 길에 만난 농부의 기억을 비롯하여, 그날 받은 모든 인상들이 레빈을 몹시 흥분케 했다. 오로지 사교의 쓰임새로만 사상을 붙잡고 있으며 레빈에게는 숨겨진, 모종의 다른 삶의 토대를 갖고 있는, 동시에 자신과는 무관한 사상들로 여론을 주도하는 무수한 사람들과 한통속인 저 다정한 스비야시스끼. 삶 속에서 힘겹게 얻어 낸 사상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정당하지만, 계급 전체, 그것도 러시아에서 가장 훌륭한 계급에 대한 악의에 있어서는 부당한 저 악에 받친 지주. 자신의 활동에 대한 개인적인 불만과 그 모든 것을 바로잡을 수 있으리라 어렴풋한 희망 -이 모든 것이 내면의 불안과 머지않은 해결에 대한 기대감 속에서 하나로 합쳐졌다.

배정된 방에 혼자 남은 레빈은, 몸을 움직일 때마다 갑작스럽게 팔과 다리가 출렁이는 스프링 매트에 누운 채 오래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비록 스비야시스끼가 나름의 현명한 얘기를 많이 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나눈 그 어떤 대화도 레빈의 흥미를 끌지는 못했다. 반면에 지주의 논리는 검토해 볼 필요가 있었다 레빈은 무심결에 그가 했던 말들 전부를 떠올리면서 머릿속으로 자신이 대꾸했던 말을 바로잡았다.

'그래, 그분에게 이렇게 말했어야 했어. 어르신은 우리나라의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는 이유가 농부들이 개량이라면 뭐든 싫어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그들의 권력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개량이 없이는 농사가 전혀 안 된다면 어르신 말씀이 옳습니다만, 농사일은 이루어져 가고 있지요. 바로 여기 오는 길에 만난 그 노인의 집에서처럼 농부들이 자신의 습성에 따라 일을 하는 곳에서는 그렇습니다. 농사에 대한 어르신과 제가 갖고 있는 전반적인 불만은, 우리들 아니면 농부들이 잘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합니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노동력의 본성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은 채 자기 식대로 혹은 유럽식으로 밀어붙여 왔습니다. 노동력이란 것을 이상적인 노동 '능력'이 아니라, 고유한 본능을 지닌 '러시아의 농부'라고 인정해 봅시다. 그리고 그것에 맞춰서 농사일을 조작해 봅시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바로 이렇게 말했어야 했는데 - 댁의 농사일이 그 노인의 집에서처럼 이루어지고, 농부들로 하여금 일의 성과에 흥미를 갖게 만드는 방법과 농부들도 인정하는 개량의 절충점을 찾았다고 말입니다. 그러면 토양을 피폐하게 하는 일 없이 예전과는 달리 두 배, 세 배의 수확을 거둘 겁니다. 그걸 반으로 나눠서 절반은 노동자들에게 건네주십시오. 어르신께 남을 이득은 더 클 것이고, 노동자들도 더 많이 얻게 될 것입니다. 일이 그렇게 되게끔 하려면 영농의 수준은 낮추되 일의 성과에 대한 노동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켜 줘야 합니다. 어떻게 이 일을 해낼 것인가, 그것은 세부적인 문제입니다. 하지만 그 일이 가능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러한 생각으로 레빈은 흥분에 잠겼다. 자신의 생각을 실행에 옮기기 위한 세부적인 사항들을 곰곰이 따져 보느라 그는 밤새 자는 둥 마는 둥 했다. 이튿날 떠날 예정이 아니었지만, 그는 아침 일찍 집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뿐만 아니라 가슴팍이 깊이 파인 드레스를 입은 그 아가씨가, 그의 마음속에 마치 자신이 몹쓸 짓을 저지른 것 같은 수치심과 회한 비슷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중요한 건, 지체 없이 떠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가을 파종에 앞서서 늦지 않게 농부들에게 새로운 방안을 제시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새로운 기반 위에서 파종을 할 수가 있었다. 그는 예전의 농사 방식을 모조리 바꿔 버리기로 작성했다.

레빈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일에는 수많은 어려움이 수반되었다. 그러나 레빈은 전력을 다했으며, 바라던 만큼은 아니지만 스스로를 속이는 일 없이, 노력할 가치가 있다고 믿을 수 있을 만큼은 성과를 얻었다. 주된 난관 중 하나는, 농사가 이미 진행 중인 터라 일을 모두 중단시키고 처음부터 시작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도중에 기계를 수리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날 저녁 집에 당도하자마자 그는 영지 관리인에게 자신의 계획을 전했다. 지금까지 해온 일은 죄다 엉터리에다 득이 될 게 없었다고 언급하는 대목에서 영지 관리인은 대놓고 흡족해하며 동의를 표했다. 오래전부터 자신이 그렇게 말해 왔지만, 사람들이 도통 자기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모든 사업에 마치 공동 출자자처럼 농부들과 함께 참여하겠다는 레빈의 안에 대해서는 몹시 침울한 표정만 지을 분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곧바로 내일은 남은 호밀 곡단을 나르고 일꾼들을 보내 두벌갈이를 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그의 품으로 보아, 아직은 그 얘길 꺼낼 때가 아닌 것 같다고 레빈은 생각했다.

농부들에게 이야기를 꺼내고 새로운 토지 임대 조건에 대한 제안을 하면서 그는 똑같은 난관에 부딪혔다. 즉 그날그날의 주어진 일을 처리하기에 바쁜 농부들로서는 새로운 농사 방식이 득이 되는지 아닌지 깊이 생각해 볼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순진한 농부인 가축지기 이반은 가축을 쳐서 소득을 내는 일에 가족들과 함께 참여해 보라는 레빈의 제안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그 사업안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레빈이 예상 소득에 관해 설명하자, 그의 얼굴에 불안한 표정이 일면서 얘기를 끝까지 들을 수 없다는 는 듯한 유감의 빛이 번져 갔다. 그러고는 쇠스랑을 들고 외양간의 건초를 치워야 한다느니, 물을 부어야 한다느니, 두엄을 치워야 한다느니 하면서 무언가 당장 해야 할 일들ㅇ르 서둘러 떠올리는 것이었다.

또 다른 난관은 자기네들의 고혈을 짜내어 최대한의 이득을 챙기는 것 말고는 지주의 목적이 딴 데 있을 리가 없다는, 농부들의 가실 줄 모르는 불신이었다. 그들의 지주의 진짜 목적은 (가가 뭐라고 말하는 간에) 언제나 그가 말하지 않은 대목 속에 감춰져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또한 그들 자신도 자기네 의사를 표명할 때 많은 말을 하지만 진짜 목직이 무엇인지는 결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레빈은 그 성마른 지주가 옳았다는 것을 절감했는데) 농부들은 어떤 합의를 하든 새로운 영농 기법의 도입과 새로운 농기구의 사용을 강요당하지 않는 것을 변치 않는 첫 번째 조건으로 내세웠다. 신식 쟁기가 더 잘 갈리고, 속경구(速耕具)가 더 효율적이라는 사실에 동의하면서도, 이도 저도 다 사용해서는 안 되는 수백 수천 가지 이유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레빈으로서는 영농의 수준을 낮춰야 한다고 확신하면서도 명백하게 이득을 볼 수 있는 개량 농법을 포기해야만 하는 게 안타까웠다. 그러나 그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는 뜻한 바를 달성해 냈으며, 가을 무렵에는 일이 제 궤도에 올랐다. 아니면 적어도 그에게는 그렇게 여겨졌다.

처음에 레빈은 새로운 협력 관계를 바탕으로 농사일을 전부 농부들과 일꾼들 그리고 영지 관리인에게 넘기고자 했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금세 깨닫고서 일을 분담하기로 결정했다. 축사, 과수원, 채소밭, 풀베기, 몇 개의 구역으로 나뉜 경작지가 각각의 종목을 이루도록 했다. 레빈이 보기에 사업 계획을 가장 잘 이해한 순진한 가축지기 이반은 자기 가족들을 주된 구성원으로 하여 협동조합을 꾸리고는 축사의 주주가 되었다. 멀리 떨어져 8년 동안 휴경지로 방치되어 있던 들판은 영리한 목수 표도르 레주노프의 도움으로 여섯 가구가 새로운 집단 경작의 원칙하에 도맡기로 했다. 농부 슈라예프는 같은 조건하에 채소밭을 모두 임차 했다. 나머지는 아직 예전 방식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지만, 이 세 가지 종목이 새로운 체계의 시작이었으며, 레빈은 온 신경을 거기에 쏟았다.

사실 축사의 일은 그때까지 전보다 나아진 게 없었다. 이반은 암소를 찬 데 둬야 사료가 덜 들고 발효 크림이 소득을 올리는 데 더 유리하다고 주장하며 암소들을 따뜻한 곳에 두거나 버터를 생산하는 일에 강하게 반발했다. 또한 자신이 받는 돈이 급료가 아니라 소득의 지분을 선불로 당겨 받는 것이라는 사실에 일말의 관심도 두지 않은 채 전처럼 급료를 요구했다.

표도르 레주노프의 조합은 시간이 촉박하다는 변명을 늘어놓으며 파종 전에 신식 쟁기로 두벌갈이를 하기로 한 합의 내용을 이행하지 않았다. 이 조합의 농부들은 새로운 원칙대로 일을 하기로 약속해 놓고도 주어진 땅을 공유지라고 부르는 대신 빈타작 땅이라고 불렀으며, 조합의 농부들도 레주노프 자신도 "지대를 받으시지요, 그러면 나리도 좀 더 안심이 되시고, 저희도 맘이 편할 텐데 말입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온갖 구실을 대며 그 땅에 짓기로 약속한 축사와 곳간 건축을 계속해서 미루더니 결국 겨울이 올 때까지 늦추었다.

슈라예프도 자신이 임차한 채소밭을 농부들에게 잘게 쪼개서 소작을 주려고 했다. 그는 밭을 임차할 때의 계약 조건을 완전히, 그것도 고의로 왜곡시켜 이해한 게 분명했다.

농부들과 대화하고 새로운 사업의 온갖 이점에 관하여 설명하는 과정에서 레빈이 종종 느낀 바는, 농부들이 그의 얘기를 건성으로 흘려들을 뿐이며 그가 뭐라고 말을 하든 절대로 속아 넘어가지 않겠노라는 확고한 생각을 품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점을 그는 농부들 중에서 가장 영리한 레주노프와 얘기를 나눴을 때 특히 절감했다. 레빈에 대한 조소를 뚜렷하게 내비치는 장난기와 누군가 속아 넘어간다 해도 그건 레주노프 자신은 절대로 아닐 거라는 굳은 확신을 그의 눈에서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모든 난관에도 불구하고 레빈은 일이 진척되고 있다고, 철저하게 계산하고 계획을 밀고 나아가 앞으로 새로운 체계가 가져다줄 이익을 농부들에게 입증해 보일 거라고, 그때 가서는 농사일이 저절로 굴러갈 거라고 생각했다.

그해 여름 꼬박 그러한 일들과 더불어 손수 처리해야 할 나머지 농사일, 그리고 서재에서의 저술 작업에 전념하느라 그는 사냥도 거의 나가지 않았다. 8월 말에야 레빈은 안장을 돌려주러 온 하인을 통해 오블론스끼 일가가 모스끄바로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리아 알렉산드로브나의 편지에 답신을 보내지 않은 것, 수치심으로 얼굴을 붉히지 않고는 결코 떠올릴 수 없는 그 무지막지한 무례함으로 인해 그 집안으로 갈 수 있는 배를 제 손으로 불태우고 말았으며, 따라서 이제는 그곳에 결코 발을. 디딜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작별 인사도 하지 않고 떠남으로써 그는 스비야시스끼에게도 똑같은 일을 저질렀다. 하지만 그에게도 역시 다시는 찾아가지 않을 터였다. 이제 그런 일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새로운 체계 속에서 돌아가는 농사일만이, 평생 그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을 정도로 그의 온 신경을 사로잡고 있었다. 그는 스비야시스끼가 빌려준 책들을 모조리 읽으며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들을 발췌하고 그 문제에 대한 정치 경제학 서적과 사회주의 서적들을 독파했는데, 예상했던 대로 자신이 착수한 사업과 관련된 대목들은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가령 그가 처음으로 엄청난 열의를 갖고 연구했던 밀의 저술 같은 정치 경제학 서적들 속에서도, 매 순간 현재 골몰하고 있는 문제들의 해결책을 찾고자 했지만 결국에는 유럽의 농업 현황에서 도출된 내용들만을 발견하곤 했다. 러시아에는 적용할 수 없는 그러한 내용들이 어째서 일반적인 법칙이 되어야 하는지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똑같은 점이 사회주의 관련 서적에서도 발견되었다. 아직 대학생이던 시절에나 심취했던 응용 불가능한 근사한 환상 아니면 러시아의 농업과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 유럽이 처한 정황의 개선안이나 수정안들뿐이었다. 정치 경제학은 유럽의 부를 발전시켜 왔으며 현재도 발전시키고 있는 법칙이 보편타당하고 의심할 바 없는 법칙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반면 사회주의적 교의는 그러한 법칙에 따른 발전은 파멸에 이르고 말 거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어느 쪽도 레빈과 모든 러시아의 농부들 및 지주들이 공공의 부를 위해 최대한 생산성을 발휘하려면 수백만의 일손들과 땅을 가지고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해답은커녕 일말의 암시조차 제시해 주지 않았다.

이와 관련된 책들을 모두 독파한 그는, 일에 착수한 이상 그동안 여러 문제들에 있어서 자신이 종종 겪었던 경우가 이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일어나지 않도록 가을에는 외국으로 나가 현장에서 직접 탐구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상대방의 생각을 이해하고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항상 갑자기 이렇게 말하곤 했다. "카우프만은? 존스는? 뒤부아는? 미첼리는? 아직 안 읽으셨군. 읽어 보시게나. 그들이 그 문제를 연구했으니까."

그는 이제 카우프만과 미첼리가 자신에게 아무것도 얘기해 줄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깨닫고 있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그 자신이 알고 있었다. 러시아는 훌륭한 땅과 훌륭한 노동자들을 갖고 있다는 것, 어떤 경우에는 길에서 만난 그 농부의 사례처럼 노동자와 토지가 많은 것을 생산해 내기도 한다는 것, 그러나 유럽식으로 자본이 투입되는 대부분의 경우에는 생산량이 적다는 것, 그리고 그런 일이 발생하는 이유는 오직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고유한 방식으로만 일하려 들며 그런 방식으로만 일을 잘하기 때문인데, 그들의 저항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항구적인 것으로 바로 그들 자신, 농민들의 영혼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도 그는 알고 있었다. 주인 없는 광대한 땅에 의식적으로 거주하고 그것을 개간해야 할 소명을 지닌 러시아 농민들은 그 땅을 다 점유할 때까지 그 소명을 이행하는 데 필요한 기술들을 고수할 것이며, 그러한 기술들은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듯이 형편없는 것이 아니라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을 이론적으로는 자신의 저술을 통해서, 실제적으로는 농사일을 통해서 입증해 보이고 싶었다.

 

9월 말에 조합에서 맡은 땅에 축사를 짓는 데 필요한 목재를 날라 왔고, 우유로 만든 버터를 팔아 남은 이득을 분배했다. 농사일은 실질적으로 아주 잘 진척되고 있었으며, 적어도 레빈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한편 그는 모든 일을 이론적으로 규명해 내고, 또한 그 자신이 희망하는 바 정치 경제학에 있어서 일대 전기를 마련할 뿐만 아니라 그 학문 자체를 폐기해 버리고 농민과 토지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학문의 기초를 정립해 낼 저술 작업을 완료하고자 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외국으로 나가 이 문제와 관련하여 그곳에서 진행되는 모든 것들을 현장에서 고찰하고, 거기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이 필수적인 사항이 아니라는 점을 확실하게 입증할 근거들을 찾기만 하면 될 터였다. 레빈은 수금을 한 뒤 외국으로 갈 마음으로 밀의 출하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들에 남아 있던 곡식들과 감자를 거두기가 여의치 않게 되어 밀의 출하를 비롯한 모든 일이 중단되고 말았다. 길은 발을 뺄 수 없을 정도로 진창이 되었고 방앗간 두 곳이 물에 휩쓸려 떠내려갔으며, 날씨는 점점 더 나빠졌다.

930일에는 아침부터 해가 비치기에 레빈은 날이 갤 거라 생각하여 서슴없이 떠날 채비에 나섰다. 밀을 부대에 담으라고 이르고는, 영지 관리인을 상인에게 보내 돈을 빌려 오게 했다. 그리고 그 자신은 출발에 앞서서 마지막으로 지시를 내리고자 영지를 두루 돌아다녔다.

일을 다 마친 저녁 무렵, 레빈은 외투를 타고 목 뒤나 장화목으로 흘러 들어온 물줄기에 흠뻑 젖은 모습으로, 그럼에도 생기 넘치고 기분 좋은 상태로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이 되자 날씨는 악화되었다. 물에 푹 젖어 두 뒤와 머리를 흔들어 대던 말은 세차게 내리치는 싸락눈을 맞으며 옆으로 비스듬히 달렸다. 반면에 방한용 두건을 쓴 덕에 그런대로 괜찮았던 레빈은 주변의 풍경을 흥겹게 둘러보았다. 마차 바퀴를 따라 흐르는 탁한 물줄기, 잎을 떨군 나뭇가지마다 매달려 있는 물방울들, 나무다리 널판 위에 녹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싸락눈의 흰 얼룩, 헐벗은 나무 주위로 두터운 층을 이루며 쌓인 아직든 도톰하고 즙이 많은 느릅나무 잎사귀 등이 눈에 들어왔다. 주변의 자연이 어두침침함에도 그는 유달리 정신이 맑아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농부들과 나누었던 대화가 그들을 새로운 관계에 익숙해지기 시작했음을 알려 주었던 것이다. 몸을 말리려고 잠시 찾아갔던 문지기 노인 역시 레빈의 계획에 찬성하는 기색이 역력했고, 가축 구매 조합에 가입하겠다고 먼저 나서기까지 했다.

'목표를 향해 부단히 전진하는 수밖에 없어. 그러면 원하던 바를 달성하게 될 거야.' 레빈은 생각했다. '고생하면서 일하는 건 그럴 만한 까닭이 있기 때문이야. 이건 나 개인만이 아니라 공공의 복지에 관한 문제가 걸린 일이야. 농업 전체가, 보다 중요하게는 농민 전체의 입지가 완전히 바뀌어야 해. 빈곤 대신 공공의 부와 만족이, 적의 대신 이해의 연계와 조화가 이루어져야 해. 한마디로 혁명이지. 무혈의 혁명, 가장 위대한 혁명이 처음에는 우리 군의 작은 구역 안에서, 그다음에는 현에서, 그리고 러시아에서, 마침내 전 세계에서 전개되는 거야. 왜냐하면 온당한 사상은 결실이 없을 수가 없으니까. 그래, 이게 바로 일할 이유가 되는 목표인 거야. 그리고 이게 바로 나라는 것, 검은 넥타이를 매고 무도회에 갔다가 세르바쯔까야 양에게 거절을 당했으며, 스스로에게 안쓰럽고 보잘것없는 이 사람이 바로 꼬스짜 레빈이라는 것 - 이 사실이 증명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 확신컨대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1790. 미국의 정치가. 톨스토이는 그의 일기를 매우 높이 평가했다.] 또한 스스로를 하찮게 여겼으며, 자신의 전부를 돌이켜 보면서 스스로를 신뢰하지 않았을 거야. 그러나 그건 아무런 의미도 없어. 그리고 그에게도 자신의 계획을 믿고 얘기할 자신만의 아가피야 미하일로브나가 있었을 테지.'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레빈은 어두워져서야 집에 당도했다.

상인에게 갔었던 영지 관리인은 밀 판매 금액의 일부를 받아 왔다. 문지기와의 계약도 성사되었고, 관리인이 도중에 본 바로는 온 들판마다 곡식이 널려 있으며, 따라서 거두지 못한 자기네의 160가마는 다른 집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저녁 식사를 마친 뒤 레빈은 평소처럼 안락의자에 앉아 책을 읽으면서, 목전에 다가온 저술과 관련된 여행에 관해서 계속 생각했다. 오늘 그에게는 자기 사업의 모든 의미가 유달리 또렷하게 떠올랐고, 사상의 본질을 표현하는 일련의 구문들이 머릿속에 저절로 작성되어 가고 있었다. '이걸 적어 두어야겠군.' 그는 생각했다. '전에는 불필요하다고 여겼던 짦은 서물은 이걸로 작성할 수 있을 거야.' 그는 책상으로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그의 발치에 엎드려 있던 라스까가 기지개를 켜고는 마찬가지로 벌떡 일어나서 마치 어디로 가냐고 묻는 듯이 그를 살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적을 틈이 없었는데, 왜냐하면 그때 조합장들이 그에게서 지시 사항을 전달받기 위해 집으로 찾아왔기 때문이다. 레빈은 그들을 만나러 현관으로 나갔다.

지시 사항을 전달한 뒤, 즉 이튿날 해야 할 일들을 죄다 일러 주고 그에게 용무가 있어 찾아온 농부들과의 면담을 모두 마친 뒤, 레빈은 서재로 가서 저술 작업에 착수했다. 라스까는 책상 밑에 엎드렸고, 아가피야 미하일로브나는 손뜨개질 중이던 양말을 쥔 채 자기 자리에 편안한 자세로 앉았다.

얼마간 글을 쓰던 레빈의 머릿속에 갑자기 키티가, 그녀의 거절과 그녀와의 마지막 만남이 너무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서재를 서성이기 시작했다.

얼마간 글을 쓰던 레빈의 머릿속에 갑자기 키티가, 그녀의 거절과 그녀와의 만남이 너무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서재를 서성이기 시작했다.

"아니, 그리 무료해하실 게 뭐 있어요." 아가피야 미하일로브나가 그에게 말했다. "왜 집 안에 틀어박혀 계세요? 온천이라도 다녀오시면 좋으련만. 돈도 많이 모으셨는데요."

"내일모레 떠날 거야, 아가피야 미하일로브나. 하던 일은 마쳐야 하니까."

"일은 무슨 일이랍니까! 농부들한테 그만큼 잘해 주셨으면 된 거죠! 사람들이 말하기를, 당신네 나리는 황제 폐하께 총애를 받을 거랍니다. 거참 벌스럽단 말이죠. 왜 나리께서는 그토록 농부들을 배려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들을 배려하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그러는 거라고."

아가피야 미하일로브나는 레빈의 영농 계획을 그 세부적인 사항까지 모두 다 알고 있었다. 레빈이 그녀에게 자신의 생각을 자세히 설명하고, 종종 그녀와 논쟁하면서 그녀의 견해에 반박하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자신에게 해준 모든 얘기를 영 다른 쪽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본래 사람은 자기 자신의 영혼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하는 법이죠." 그녀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빠르펜 제니시치를 보세요. 무식한 사람이었지만 모두가 바라 마지않는 편안한 죽음을 맞이했잖아요." 그녀는 얼마 전에 죽은 머습에 관해 이야기했다. "성찬식도 베풀어주고, 도유식도 해주고요."

"그런 얘기가 아니란 말일세." 그가 말했다. "내 말은, 나는 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일한다는 거야. 농부들이 일을 더 잘하면 나한테 더 이로우니까."

"나리께서 어떻게 하시든, 일꾼이 게으름뱅이면 모든 일이 굼뜨고 서투를 수밖에요. 양심이 있다면 일을 할 테고, 그렇지 않다면 아무것도 안 하겠지요."

"아니, 유모도 자기 입으로 말하지 않았나, 이반이 축사를 더 잘 관리하게 됐다고."

"제가 한 말씀만 드리지요." 아가피야 미하일로브나가 대답했다. 어쩌다가 내뱉는 말이 아니라 확고하고 논리 정연한 생각에서 비롯된 이야기임이 분명했다.

"나리는 결혼을 하셔야만 합니다. , 그렇고말고요!"

방금 전까지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바를 아가피야 미하일로브나가 꼭 집어내는 바람에 그는 대단히 불쾌했고, 자존심이 몹시 상했다. 레빈은 얼굴을 찌푸리고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자리에 앉아 조금 전까지 생각했던 자기 사업의 의를 모두 돌이켜 보면서 다시 책을 스기 시작했다. 다만 가끔씩 정적 속에서 들려오는 아가피야 미하일로브나의 뜨개바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곤 했으며,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이 떠오를 때마다 또다시 인상을 지푸리곤 했다.

9시가 되자 종소리와 함께 진창길에서 마차가 삐그덕거리며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 나리께 손님이 오셨군요. 이제 무료하시지는 않겠어요." 아가피야 미하일로브나가 이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레빈이 그녀를 앞질러 갔다. 일이 손에 잘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어떤 손님이든, 손님이 왔다는 사실 자체가 그는 반가웠다.

레빈이 계단을 절반쯤 내려갔을 때, 현관 쪽에서 귀에 익은 기침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자신의 발소리 때문에 분명치가 않았기에, 그는 내심 자신이 잘못 들었기를 바랐다. 그런데 곧이어 예의 기다랗고 뼈만 앙상한 낯익은 형상이 보이자 이미 스스로를 속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그는 자신이 잘못 보았기를, 모피 외투를 벗으면서 기침을 내뱉는 이 키다리 사내가 니꼴라이 형이 아니기를 바라고 있었다.

레빈은 형을 사랑했다. 그러나 그와 함게 있는 것은 언제나 고통스러웠다. 게다가 하필이면 지금, 머릿속에 떠오른 상념과 아가피야 미하일로브나의 지적으로 정신이 산란하고 착잡한 이 시점에 형과 곧 마주해야 한다는 건 특히 더 곤혹스럽게 여겨졌다. 쾌활하고 건강하고 낯선 인물, 바라건대 맑은 정신을 되돌려 줄 손님 대신에, 자신을 훤히 꿰뚫어 보고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 묻어 둔 사상들을 일깨우며 그것을 모조리 쏟아 내게 만드는 형과 조우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런 추악한 감정을 품는 자기 자신에게 화를 내면서 레빈은 현관으로 내달았다. 형을 가까이서 보자마자 조금 전의 개인적인 환멸은 곧바로 사라지고 연민의 감정이 그를 사로잡았다. 예전에 니꼴라이 형의 수척한 몸과 짙은 병색이 얼마나 끔찍했든 간에, 지금 그는 더욱더 수척하고 더욱더 기력이 쇠한 모습이었다. 흡사 가죽을 뒤집어쓴 해골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현관에 선 채, 경련이 이는 기다랗고 야윈 목에서 목도리를 벗겨내며 안쓰럽고도 기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 겸허하고 온순한 미소를 본 순간, 레빈은 목구멍이 콱 막히는 것만 같았다.

", 이렇게 내가 너를 찾아왔구나." 니꼴라이는 쉰 목소리로 말하며 한순간도 동생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오고 싶었지만 늘 건강이 안 좋았단다. 하지만 지금은 아주 괜찮아졌어." 커다랗고 빼빼 마른 손으로 턱수염을 문지르면서 그가 말했다.

", , 그러셨군요!" 레빈이 대답했다. 그러고서는 입을 맞추다가, 형의 몸이 얼마나 메말랐는지를 입술로 느끼고 기이하게 빛나는 형의 커다란 눈동자를 가까이서 본 그는 한층 더 두려운 감정에 휩싸였다.

그보다 몇 주 전 레빈은 형제들 간에 분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던 유산의 일부를 처분한 결과 형이 그의 몫으로 대략 2천 루블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을 편지로 전했었다.

니꼴라이는 바로 그 돈을 받으러 왔노라고, 더 중요하게는 고향집에 머무르며 흙을 만지면서 곧 개시할 활동을 위해 고대의 용사처럼 힘을 비축하고자 왔노라고 말했다 등이 엄청나게 굽고 예의 큰 키 때문에 더 충격적으로 보일만큼 여위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동작은 언제나처럼 재빠르고 돌발적이었다. 레빈은 그런 형을 서재로 안내했다.

형은 전에 없이 공을 들여 옷을 갈아입더니 곧고 듬성듬성한 머리칼을 빗고서 웃음 띤 얼굴로 위층으로 올라갔다.

형은 레빈이 종종 추억하는 어린 시절의 모습처럼 다정하고 쾌활했다. 심지어 아무런 악의도 없이 세르게이 이바노비치의 얘기를 꺼내기도 했다. 아가피야 미하일로브나와는 농담을 주고받고 그녀에게 나이 든 하인들의 근황을 묻기도 했다. 빠르펜 제니시치의 소식은 그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얼굴에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본래의 기분으로 돌아왔다.

", 워낙에 늙긴 했지." 그가 이렇게 말하고는 화제를 바꾸었다. "네 집에 두 달 정도 머물다가 모스끄바로 갈 작정이다. 너도 알다시피, 마흐꼬프가 일자리를 주선해 주기로 약속했거든. 공직에서 근무하게 될 거다. 이제 내 삶을 완전히 다르게 구려 갈 작정이야." 그가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말이다. 그 여자는 내쫓았다." "마리야 니꼴라예브나 말인가요? 아니, 도대체 무엇 때문에요?"

"아아, 정말이지 몹쓸 여자야! 하한테 수도 없이 나쁜 짓들을 저질렀지." 그러나 그는 그 불쾌한 짓이 무엇인지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차 맛이 싱겁다는 이유로, 무엇보다 그녀가 자신을 환자 돌보듯 대했기 때문에 내쫓았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이제 생활을 완전히 바꿔 버리고 싶구나. 여느 사람들처럼 나도 물론 어리석은 짓들을 저질렀지만, 재산은 맨 마지막 문제다. 그쯤은 아깝지 않아. 건강만 바랄 뿐이지. 그런데 다행히도, 건강이 조금 회복되었단다."

레빈은 형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뭐라 대꾸할지 생각해 보았지만 도무지 떠오르는 게 없었다. 니꼴라이 역시 똑같은 심정인 게 분명했다. 그는 동생의 사업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었다. 레빈은 자기 얘기를 하게 되어 기뻤는데, 꾸며 대지 않고 얘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계획과 활동을 형에게 들려주었다.

형은 듣고는 있었지만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두 사람은 너무나도 가깝고 친근한 사이였기에, 아주 미세한 움직임이나 목소리의 음색 따위가 말로 할 수 있는 그 모든 것보다 그들에게는 더 많은 것을 전달해 주었다.

지금 두 사람에게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으니, 나머지 모든 것들을 압도하고 있는 그 생각은 바로 니꼴라이의 병환과 임박한 죽음에 관한 것이었다. 어느 쪽도 감히 그 문제를 입 밖에 내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그 한 가지에 관해 함구하는 한, 둘이서 무슨 말을 하건 그것은 모두 거짓이었다. 레빈은 밤이 깊어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었다는 게 그토록 기뻤던 적이 없었다. 그 아무리 낯선 사람과의 만남이나 공식적인 회합의 자리라 해도, 그가 오늘처럼 부자연스럽고 위선적이었던 적은 없었다. 그러한 부자연스러움을 의식하거나 뉘우치는 것 모두 그를 더욱더 부자연스럽게 만들 뿐이었다. 죽어 가는 형 때문에 울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도, 정작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형의 얘기를 들어주고 지지해 주어야만 했던 것이다.

집 안이 눅눅하고 방 하나에만 난방을 땐 터였기에 레빈은 형을 자신의 침실에 칸막이를 치고서 재우기로 했다.

잠자리에 누운 형은 잠이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알 수 없었으나, 병자가 으레 그러하듯 몸을 뒤척이거나 기침을 하곤 했다. 기침을 해서 가래를 뱉을 수가 없을 때면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때로 무거운 숨을 몰아쉬며 "아이고, 하느님!"이라고 내뱉기도 했다. 가래 때문에 숨이 막히면 짜증을 내면서 "아이고! 빌어먹을!"이라고 뇌까렸다. 그 소리를 듣느라 레빈은 한참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가지각색의 상념들이 떠올랐지만, 그 모든 상념들의 종착점은 오직 하나 - 죽음이었다.

죽음, 모든 것의 끝인 죽음이 처음으로 그에게 거역할 수 없는 힘으로 다가왔다. 비몽사몽간에 신음하면서 버릇대로 무심결에 '하느님' 혹은 '빌어먹을'을 뇌까리는 이 사랑하는 형에게 깃든 죽음은 예전에 생각햇던 것처럼 그렇게 멀리 있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그 자신 속에 깃들어 있음을 그는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이 아니라면 내일, 내일이 아니라면 30년 뒤, 결국 이도 저도 다 마찬가지 아닌가? 이 불가피한 죽음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는 그것을 모를 뿐만 아니라,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조차 없었다. 심지어 그에 대해 생각할 능력도 용기도 없었다.

'나는 일하고 있고, 무언가를 해내고 싶다. 하지만 그러면서 모든 게 결국은 끝난다는 걸, 죽음이라는 걸 잊고 있었어.'

그는 침대 안에 앉아 어둠 속에서 무릎을 끌어안고 몸을 웅크린 채 긴장과 함께 숨을 죽이고서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생각을 집중할수록 분명해지는 것은 한 가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었다. 바로 자신이 삶에 있어서 하나의 작은 조건을 잊고 있었다는 것 - , 죽음이 닥쳐와 모든 게 끝나리라는 사실, 따라서 아무것도 시작할 가치가 없고 어찌해도 이를 해결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으며, 지금에서야 그것을 통찰했다는 점이었다. 그렇다, 정말 끔찍하지만, 사실이 그러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살아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무엇을 해야 한단 말인가?' 레빈은 절박한 심정으로 자문했다. 그는 촛불을 켜고 조심스레 일어나 거울로 다가가서 자신의 얼굴과 머리칼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관자놀이에 새치가 보였다. 입을 벌리니 어금니가 상하기 시작한 것이 눈에 띄었다. 근육질의 팔뚝을 걷어 보았다. 힘이 넘쳤다. 그러나 저쪽에서 얼마 남지 않은 폐로 숨을 쉬고 있는 니꼴렌까도 전에는 건강한 신체를 갖고 있었다. 그 순간, 어릴 적에 형과 함께 잠자리에 들어 표도르 보그다니치가 문밖으로 나가기만을 기다렸다가 서로에게 베개를 던지면서 자지러지게 웃던 기억이 느닷없이 떠올랐다. 표도로 보그다니치에 대한 두려움조차도 그처럼 끓어넘치던 삶의 행복감을 멈추지는 못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저 일그러진 텅 빈 가슴……그리고 스스로에게 무슨 일이, 왜 생길지 전혀 모르는 나는…….'

"콜록! 콜록! 에잇, 빌어먹을! 왜 그리 안 자고 뒤척이는 거냐?" 형이 그에게 소리쳤다.

"글쎄, 모르겠어요. 불면증인가 봐요."

"나는 잘 잤다. 이제는 식은땀도 안 흘리지 뭐냐. , 이것 봐라 셔츠 좀 만져 보라니까. 땀에 안 젖었잖니?"

레빈은 셔츠를 만져 보고는 칸막이 너머로 촛불을 껐다. 그러나 여전히 한참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가 조금 풀리자마자, 죽음이라는 새롭고도 불가해한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형은 죽어 가고 있어. 어쩌면 봄이 오기 전에 죽을지도 몰라. 그런데 뭘 어떻게 도와준단 말인가? 내가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지? 죽음에 대해서 내가 뭘 알고 있는데? 그것이 있다는 것조차 잊고 있었는데.'

 

지나치게 겸손하고 공손해서 함께 지내기가 거북한 사람은, 머지않아 지나치게 까다롭고 편벽하게 굴어서 견디기 힘들어지기 마련이라는 생각을 레빈은 오래전부터 품어 왔다. 그런데 그러한 일이 형과의 사이에서도 일어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실제로, 니꼴라이 형의 온순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이튿날 아침부터 짜증을 내기 시작했고, 동생의 가장 아픈 곳을 건드리면서 집요하게 트집을 잡았다.

레빈 또한 자신에게도 잘못이 있다고 느꼈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가 없었다. 만일 그 두 사람이 가식 없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 즉 오로지 생각하고 느낀 것만을 말하게 된다면, 아마 서로의 눈을 노려보면서 꼰스딴친 레빈딴찐은 '형은 죽을 거라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두려워, 두렵다고, 두렵단 말이야!'라고만 대답했으리라. 그렇게 진심 어린 말을 내뱉고 나서 두 사람은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살 수는 없는 법이다. 따라서 꼰스딴친 레빈딴찐은 평생 시도해 보았지만 결국에는 할 수 없었던 것, 그가 보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잘하고 있으며 그들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그것을 해보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그는 생각하지도 않은 것을 말하려고 애를 썼고, 결국 그것은 허위에 불과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절감했다. 형은 바로 그 점을 알아차리고는 화를 내는 것이었다.

사흘째 되던 날 니꼴라이는 동생을 부추겨 그의 계획을 다시 말하게 하더니, 그를 비난하고 나아가 공산주의와 연결시키면서 고의적으로 조롱하기 시작했다.

"너는 남의 사상을 도용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왜곡하고, 가당치도 않은 것에 적용하려 들고 있어."

"분명히 말하지만, 이 일은 공산주의와 아무런 공통점이 없어요. 그들은 사유 재산, 자본, 유산 상속의 정당성을 부정하지만 나는 그러한 주요 '자극제'(레빈은 이런 단어를 쓰는 게 거슬렸지만, 자신의 일에 몰두해 온 이래 무심결에 자꾸만 외래어를 사용하게 된 터였다)를 부정하지 않아요. 다만 노동을 조직화하려는 것뿐입니다."

"바로 그게 문제라니까. 너는 남의 사상을 가져다가 그것의 원동력이 되는 것을 모조리 잘라버리고는, 그게 무언가 새로운 것인 양 믿게 만들려 든단 말이다." 니꼴라이가 넥타이를 두른 목을 신경질적으로 씰룩거리며 말했다.

"아니, 그건 내 사상과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니까요."

"거기에는……" 악의에 찬 눈동자를 번득이며 비웃음을 띤 채 니꼴라이가 대꾸했다. "적어도 거기에는, 이를테면 기하학적 내력이랄까, 명료함과 확실성 같은 게 있지. 아마도 그건 유토피아겠지. 하지만 가령 일체의 과거의 것들을 tabula rasa(백지)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면, 즉 사유 재산도 없고, 가족도 없다면, 그러면 노동이 정비될 거다. 하지만 너에게는 아무것도"

"도대체 왜 분간을 못 하는 겁니까? 나는 결코 공산주의자인 적이 없단 말입니다."

"나는 그런 적이 있었지. 난 그게 시기상조긴 하지만 합리적이고 장래성이 있다고 본다. 초기의 그리스도교가 그랬던 것처럼."

"내 생각은 다만 노동력을 자연 과학적 관점에서 고찰해야 한다는 겁니다. 즉 그것을 연구하고 그것의 본성을 인정하고, 그래서."

"그건 전혀 소용없는 짓이야. 그 힘은 자신의 발전 정도에 따라서 일정한 활동 형태를 스스로 찾기 마련이니까. 처음에는 세상에 노예들 천지였고, 그다음엔 널린 게 metayers(소작인들)였지. 우리나라에는 병작농도 있고 소작농도 있고 날품팔이도 있다. 그런데 네가 찾는 건 대체 뭐냐?"

이 말을 들은 레빈은 갑자기 발끈했다.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것이 진실일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자신은 공산주의와 다른 형식들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고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그런 것이 가능할 리는 없다고 말이다.

"내가 찾는 것은 나 자신이나 노동자 모두에게 있어서 생산적으로 노동을 할 수 있는 방안입니다." 그가 열을 올리며 대답했다.

"내가 정립하고 싶은 것은.."

"너는 아무것도 정립하고 싶어 하지 않아. 그저 일평생 그랬던 것처럼 유별나게 굴고 싶은 거지. 네가 단순히 농부들을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이상을 갖고 그러는 거라면서 과시하고 싶은 거라고."

"그래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날 좀 내버려 두세요!" 왼쪽 뺨의 근육이 주체할 수 없이 떨리는 것을 느끼며. 레빈이 대꾸했다.

"너는 확신을 품은 적도 없고, 지금도 확신하고 있지 않아. 단지 스스로의 자존심을 달래고 싶을 뿐이지."

"그래요, 아주 훌륭해요. 그러니 이제 나를 좀 내버려 두란 말입니다!"

"그래 널 놓아주마! 이미 한참 전에 그랬어야 했어. 너우 어서 지옥으로 꺼져 버려! 내가 여길 온 게 후회막급이다!"

나중에 레빈이 아무리 형을 진정시키려고 해도, 니꼴라이는 아무 말도 들으려 하지 않은 채 떠나는 것이 훨씬 낫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형에게 이제 삼이란 견딜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음을 꼰스딴친 레빈은 깨달았다.

꼰스딴친이 다시 형에게 가서 자기 때문에 기분이 상했다면 용서해 달라고 겸연쩍게 사과를 했을 때 이미 니꼴라이는 떠날 채비를 다 마친 뒤였다.

"참으로 너그러우시군!" 형은 이렇게 내뱉더니 씩 웃었다.

"네가 옳기를 원한다면, 내가 그걸 만족시켜 줄 수도 있지. 그래, 너는 옳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떠나련다."

출발하기 직전에 니꼴라이는 동생과 입을 맞추고는 기묘하게 진지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도 나를 나쁘게 생각하진 말아다오, 꼬스짜!" 순간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는 그가 진심으로 내뱉은 유일한 말이었다. 레빈은 이 말 속에 '알다시피, 내 상태가 안 좋아. 어쩌면 우리는 더 이상 못 만날지도 모른다'는 뜻이 담겨 있음을 알아챘다. 이를 감지한 레빈의 눈에서 눈물이 솟구쳤다. 그는 형에게 다시 한번 입을 맞추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고, 뭐라 말해야 할지도 몰랐다.

형이 떠난 지 사흘째 되던 날 레빈은 외국 여행길에 올랐다. 기차간에서 레빈은 키티의 사촌인 셰르바쯔끼를 만났는데, 그는 레빈의 몹시 침울한 모습에 크게 놀랐다.

"자네 무슨 일 있나?" 셰르바쯔끼가 그에게 물었다.

"아니, 아무 일 없네. 그저 세상에 즐거운 일이 별로 없을 뿐이야."

"별로 없긴? 뮐루즈 같은 데 말고 나랑 같이 파리에나 가세. 세상이 얼마나 즐거운지 보게 될 테니!"

"아닐세, 나는 이미 끝났네. 죽을 때가 다 됐어."

"무슨 그런 농담을!" 셰르바쯔끼가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이제 막 시작할 준비가 됐는데 말이야."

"그래, 나 역시 얼마 전까지 그렇게 생각했었네. 하지만 지금은 내가 곧 죽을 거라는 걸 알아."

레빈은 최근에 떠올린 솔직한 생각을 털어놓았다. 그에게는 만사가 죽음으로, 혹은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만큼 더 자신이 시작한 일에도 신경이 쓰였다. 죽음이 오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삶을 마저 살아 내야만 했다. 어둠이 그의 모든 것을 덮어 버리고 있었지만, 다름 아닌 그 어둠으로 인하여 그는 그 속에서 자신을 이끌어 주는 유일한 끈이 바로 자신의 일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따라서 그는 있는 힘을 다해 그것을 붙잡고 거기에 매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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