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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지 81화

사내는 상투를 튼 맨머리에 두건도 쓰지 않았고, 올이 가는 짧은 베옷 적삼을 입고 세모꼴의 부들부채를 들고 있었다. 얼굴을 쳐들고 뒷짐을 진 채 팔자걸음으로 걸어왔다. 그는 어제 저자거리에서 유배 가는 자가 창봉 쓰는 자를 이겼다는 것을 듣고, 공단 형제가 그에게 무술을 배울까 봐 훼방 놓으려는 것이었다. 사내가 왕경을 꾸짖었다.

너는 죄수로서 어찌하여 도중에 길을 벗어나, 여기서 남의 집 자제를 속이고 있는 것이냐?”

왕경은 그가 공씨 친척인 줄 알고 감히 대답을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바로 동촌의 황달이었다. 아침에 선선할 때 공가촌 서쪽 끝에 사는 유대랑에게 노름빚을 받으려고 가는 길이었는데, 공단의 장원 안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그는 평소에 공단 형제를 우습게 여겼기 때문에 멋대로 안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공단은 황달을 보자 가슴 속에서 불길이 3천 길이나 치솟아, 도저히 참지 못하고 욕을 퍼부었다.

당나귀가 싸지른 씨팔놈아! 지난번에는 내 노름밑천을 뺏어먹더니, 오늘은 또 우리 집에 들어와서 사람을 업신여기는 거냐!”

황달도 크게 노하여 욕을 했다.

니 어미와 붙어먹을 놈아!”

황달은 부채를 내던지고 앞으로 달려들어 주먹으로 공단의 얼굴을 쳤다. 왕경은 두 사람이 욕을 주고받는 것을 보고 황달임을 눈치 채고, 다가가서 말리는 척하다가 목에 쓴 칼로 황달의 배를 후려쳤다. 황달은 배를 얻어맞고 두 다리가 허공으로 뜨면서 넘어져 일어나지 못했다.

그때 공단과 공정, 그리고 두 장객이 일제히 달려들어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기 시작했다. 황달은 등 · 가슴 · 어깨 · 옆구리 · · 얼굴 · 머리 · 팔다리 할 것 없이 주먹으로 맞고 발에 채여 성한 곳이라곤 단지 혀밖에 없었다. 네 사람이 달려들어 셀 수도 없이 두드려 패, 옷이 갈가리 찢어졌다. 황달은 그래도 입으로 소리쳤다.

잘 친다! 잘 쳐!”

황달은 옷이 다 찢겨 나가 알몸뚱이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꼴이 되었다. 압송관 손림과 하길이 몇 번이나 뜯어말려 공단 등은 겨우 손을 멈추었다. 황달은 반 죽도록 얻어맞아 땅바닥에 널브러져 숨만 헐떡이며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었다.

공단은 장객 서너 명을 불러, 황달을 동쪽으로 가는 길옆의 풀밭에 내던지게 하였다. 황달은 뙤약볕 아래에서 반나절이나 뻗어 있었다. 황달의 이웃 사람이 풀을 베러 나왔다가 우연히 황달을 발견하고, 집으로 데려다 주었다. 황달은 침상에 누운 채, 다른 사람을 시켜 고소장을 써서 신안현에 제출하게 하였다.

한편, 공단 등은 이른 아침부터 한 바탕 소란을 피운 다음, 장객을 불러 술과 음식을 내오게 하여 왕경과 함께 아침밥을 먹었다. 왕경이 말했다.

그놈이 반드시 원수를 갚으려고 소란을 일으킬 겁니다.”

공단이 말했다.

그 씨팔놈은 집안에 마누라 하나밖에 없습니다. 주변의 이웃들도 그놈의 완력에 억눌려 왔는데, 오늘 그 씨팔놈이 죽도록 얻어맞은 것을 보면 그놈을 위해 힘을 써 주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그놈이 뒈지면 장객을 하나 내보내 그놈의 목숨 값을 대신하게 하면, 소송을 한다 해도 할 말이 없을 겁니다. 만약 뒈지지 않으면, 단지 상호 치고받은 소송이 될 뿐입니다. 오늘 사부님 덕분에 원수를 갚았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술이나 드시면서 마음 놓고 계십시오. 그리고 저희 형제에게 창봉술을 가르쳐 주시면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공단은 다섯 냥짜리 은덩어리 두 개를 꺼내 두 공인에게 건네면서, 며칠만 봐달라고 요청했다. 손림과 하길은 돈을 받고 허락했다. 그날부터 열흘 정도 머물면서, 왕경은 창봉술을 공단 형제에게 전수하였다.

공인들이 재촉하고, 또 황달이 현청에 고소했다는 소식도 들려와서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공단은 섬주에 가서 쓰라고 백은 50냥을 왕경에게 주었다. 밤중에 일어나 행낭을 수습하여, 날이 밝기 전에 장원을 떠났다. 공단은 아우에게 은자를 주면서 왕경을 호송하라고 하였다.

네 사람은 며칠 후 섬주에 당도하였다. 손림과 하길은 왕경을 데리고 관아로 가서, 개봉부의 공문을 바쳤다. 부윤은 공문을 보고 왕경을 인수받은 다음, 회서를 써서 두 공인에게 주었다. 부윤은 왕경을 뇌성으로 보냈고, 공인들은 회서를 가지고 돌아갔다.

공정은 아는 사람을 찾아, 왕경 대신 관영과 차발을 비롯하여 아래위로 뇌물을 먹였다. 뇌성의 관영은 장세개란 자였는데, 공정에게 뇌물을 먹어 왕경의 칼을 벗겨 주고 살위봉도 때리지 않았다. 다른 곳으로 보내지도 않고 혼자 방을 쓸 수 있게 해주어, 왕경은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다.

어느덧 두 달이 흘러 가을이 되었다. 어느 날 왕경이 방안에 한가롭게 앉아 있는데, 한 군졸이 와서 말했다.

관영상공께서 부르시네.”

왕경이 군졸을 따라가 대청 아래에서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관영 장세개가 말했다.

네가 여기 온 지 한참 되었는데, 아직 너에게 일을 시킨 적이 없구나. 내가 진주에서 나오는 좋은 각궁(角弓)을 하나 사고 싶다. 진주는 동경 관할에 있고, 너는 동경 사람이니 필시 각궁의 값이나 진위(眞僞)를 잘 알 것 같구나.”

관영은 소매 속에서 종이 꾸러미 하나를 꺼내 왕경에게 주면서 말했다.

은자 2냥이다. 각궁을 하나 사 오너라.”

왕경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왕경은 은자를 받아 방으로 돌아왔다. 종이 꾸러미를 펼쳐 보니, 과연 눈처럼 하얀 은덩어리였다. 무게를 달아 보니, 서너 푼이 더 나갔다.왕경은 본영을 나가서 북쪽 거리에 있는 활과 화살을 파는 점포로 가서 17전을 주고 진짜 진주 각궁을 하나 샀다. 돌아와 보니, 장관영은 자리에 없었다. 왕경은 활을 집안 하인에게 건네주고, 3전의 은자는 자신이 챙겼다.

다음날, 장세개는 왕경을 불러 말했다.

네가 일을 잘하는구나. 어제 사온 각궁은 아주 좋았다.”

왕경이 말했다.

상공께서는 각궁을 불에 말리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알았다.”

그때부터 장세개는 매일 왕경에게 음식물을 사오는 일을 시켰다. 그런데 전날처럼 은자를 주지 않고, 장부를 하나 주면서 왕경이 매일 사온 물건들을 장부에 기록하게 하였다. 하지만 상인들이 왕경에게 외상을 줄 리가 없었다. 왕경은 할 수 없이 자기 돈으로 물건을 사서 관아에 들였다. 장세개는 물건이 좋으니 나쁘니 하면서 때리지 않으면 욕을 했다.

열흘이 지나자, 왕경은 장부를 내밀고 그동안에 쓴 돈을 받으려고 했지만, 장관영은 한 푼도 주지 않았다. 그렇게 한 달 정도가 지나면서, 장관영은 도리어 왕경을 매질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5대에서 시작하여 10, 20, 30대로 늘어나면서 한 달 동안 3백여 대를 맞았다. 왕경의 두 다리는 문드러졌고, 공단이 준 은자 50냥도 다 써 버리고 말았다.

어느 날 왕경은 본영 서쪽에 있는 무공(武功) 기념비 옆에서 여러 가지 약을 파는 장씨 의원의 점포에 매 맞은 상처에 바를 고약을 사러 갔다. 장의원이 왕경에게 고약을 붙여 주면서 말했다.

장관영의 처남 방대랑이 지난번에 여기 와서 고약을 사서 오른손목에 붙였는데, 그는 북망산 동쪽 저자거리에서 넘어졌다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 맞아서 다친 것 같았네.”

왕경이 그 말을 듣고 황망히 물었다.

소인이 영중에서는 어째서 그를 한 번도 못 봤을까요?”

그는 장관영의 작은마누라 동생으로 이름이 방원이고, 방부인은 장관영이 제일 총애하는 여인이네. 방대랑은 노름을 좋아하고 창봉도 잘 쓴다고 하네. 누님 덕에 살아가는데, 그 누님은 동생을 항상 잘 돌봐준다고 하네.”

왕경이 그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지난 날 측백나무 아래에서 손목을 때려 준 놈이 바로 방원이란 놈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장세개가 자신을 괴롭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왕경은 장의원을 작별하고 영중으로 돌아와 은밀히 관영의 심부름을 하는 아이를 불러, 술과 고기를 사 먹이고 돈도 몇 푼 쥐어주고서 방원에 대해 상세히 물어 보았다. 아이가 하는 말이 앞서 장의원이 한 말과 똑같았다. 그리고 아이는 몇 마디 덧붙여 말했다.

방원이 얼마 전에 북망산 동쪽 저자거리에서 맞고 돌아와, 관영상공께 원한을 갚아달라고 했어요. 아저씨가 지독한 매를 맞은 것도 그 때문인데, 매를 면하기 어려울 거예요.”

아이에게 자세히 물어본 왕경은 방으로 돌아와 탄식하며 말했다.

벼슬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그 세도가 무섭구나! 지난 날 우연히 실언하여 그놈과 시비한 것이 문제였구나. 봉으로는 그놈을 이겼지만, 관영이 사랑하는 사람의 형제일 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그놈이 나를 이렇게 괴롭힌다면, 다른 곳으로 도망쳐서 달리 방법을 찾아야겠다.”

왕경은 몰래 거리로 나가 날카로운 칼을 하나 사서 몸에 감추어 예측하지 못한 일을 방비하고자 하였다. 그 후로 또 10여 일이 지났는데, 다행히 관영이 부르지 않아 매 맞은 상처도 어느 정도 낫게 되었다.

어느 날, 장관영이 또 왕경을 불러 비단 두 필을 사오라고 하였다. 왕경은 생각한 바가 있어 지체하지 않고 급히 점포에 가서 비단을 사 가지고 돌아왔다. 장관영은 대청에 앉아 있었다. 왕경이 비단을 바치자, 장세개는 비단 색깔이 안 좋다는 둥, 길이가 짧다는 둥, 꽃무늬가 구식이라는 둥 험을 잡다가 큰 소리로 왕경을 꾸짖었다.

이 간땡이가 부은 종놈아! 네놈은 죄수로서 본래 물을 긷거나 돌을 나르거나, 아니면 쇠사슬에 묶여 있어야 할 놈이다. 그런데 지금 심부름을 시키는 것은 너를 잘 봐 주려는 것인데, 도둑 근성이 뼈까지 밴 네놈은 그것도 모르는구나!”

욕을 먹은 왕경은 입을 다물고 아무 말 없이 꽂아 놓은 촛대처럼 서서, 머리를 조아리며 용서를 빌었다. 장세개가 소리쳤다.

매질은 잠시 멈추어 줄 테니, 빨리 가서 비단을 좋은 것으로 바꾸어 오너라. 저녁까지 돌아와서 보고하도록 해라. 만약 조금이라도 늦으면, 그때는 네놈 목숨도 끝장날 줄 알아라!”

왕경은 할 수 없이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전당포에 가서 돈 2관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비단 점포로 가서 돈을 더 얹어 좋은 비단으로 바꾸어 본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시간이 많이 걸려, 이미 등불을 켠 뒤여서 영문은 닫혀 있었다. 당직 군졸이 말했다.

캄캄한 밤에 누가 책임을 지고 자네를 안으로 들일 수 있겠는가?”

왕경이 말했다.

관영상공의 심부름을 갔다 오는 길이오.”

군졸은 왕경의 사정을 들어주지 않았다. 왕경은 남아 있던 돈을 군졸에게 주고서야 겨우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또 한 번 가로막히고 말았다. 비단을 들고 안채 문 앞에 이르자, 문지기가 말했다.

관영상공께서 큰 마님과 다투시고 뒤채의 작은 마님 방으로 가셨네. 큰 마님이 화가 잔뜩 나셨는데, 누가 감히 자네 말을 전하겠는가?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

왕경은 생각했다.

상공이 저녁까지 돌아와 보고하라고 했는데, 어째서 이렇게 나를 막는 것일까? 분명히 일부러 나를 해치려는 것이 틀림없다. 내일 그 지독한 매질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는가? 내 목숨이 그 씨팔놈 손에서 끝장나게 생겼네. 내가 저놈에게 3백 대를 맞았으니, 그때 한 대 맞은 보복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지난번에 공정에게서 많은 은자를 받고서도, 오늘 이렇게 안면을 바꾸고 나를 괴롭힌단 말인가!”

왕경은 어릴 적부터 악독한 놈이어서, 그를 낳아준 부모도 건드리지 못하는 놈이었다. 그 성질이 다시 살아나 혼자 말했다.

원한이 작으면 군자가 아니고, 독하지 않으면 대장부가 아니다. 일단 한번 시작하면 끝장을 내지 않으면 안 된다.”

왕경은 영중의 사람들이 모두 잠들 때까지 두어 시간을 기다렸다가, 살그머니 안채 뒤쪽으로 돌아가 담을 기어 넘어갔다. 조용히 뒷문 빗장을 열고 한쪽 구석에 숨었다. 희미한 별빛 아래에서 보니, 담장 안쪽 동편에 마구간이 있고, 서편에는 작은 집이 하나 있는데 측간이었다.

왕경은 마구간의 나무 울타리를 뜯어내 중문 담장에 기대놓고, 그걸 타고 담장을 기어 올라갔다. 담장 위에서 울타리를 끌어올려 안쪽으로 기대놓고 가만히 밑으로 내려왔다. 먼저 중문의 빗장을 열어놓고 울타리를 치워 놓았다.

안쪽에 또 담장이 있었는데, 담장 안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왕경은 담장 가까이 다가가서 바닥에 엎드려 귀를 기울여 자세히 들었다. 장세개의 목소리가 들리고, 또 한 여인과 다른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안에서 술을 마시면서 한담을 나누는 것 같았다.

왕경이 한동안 몰래 엿듣고 있었는데, 홀연 장세개의 말이 들렸다.

처남! 그놈이 내일 와서 보고하면, 그놈 목숨도 몽둥이 아래에서 끝장날 걸세.”

남자가 말했다.

그놈이 가진 돈도 이제 거의 다 써 버렸을 겁니다. 매형께서 이제 결단을 내리셔서, 이 좆같은 기분을 풀어 주십시오.”

장세개가 대답했다.

이제 내일 모레면, 자네 기분이 통쾌해질 걸세!”

여인이 말했다.

그만하면 충분하잖아! 넌 이제 그만 둬라!”

남자가 말했다.

누님은 그게 무슨 말씀이오? 누님은 상관하지 마시오!”

왕경은 담장 밖에서 세 사람이 주고받는 얘기를 듣고서 분명히 알게 되자, 가슴 속에서 분노의 불길이 3천 길이나 치솟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금강역사 같은 신력(神力)을 발휘하여 담장을 부수고 뛰어 들어가 모조리 죽여 버리지 못하는 것이 한이었다.

왕경이 더 이상 참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그때 장세개가 큰 소리로 하는 말이 들렸다.

얘야! 측간에 가게 등불을 밝혀라!”

왕경은 그 말을 듣고, 얼른 비수를 뽑아 들고 매화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웅크리고 있었다. 안에서 삐익하는 방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왕경이 어둠 속에서 보니 심부름 하던 아이가 등롱을 들고 앞서고, 뒤에 장세개가 팔자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어둠 속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고 앞만 보고 걸어가다가, 중문에 이르러 아이를 꾸짖었다.

이 조심성 없는 종놈아! 어째서 저녁에 빗장을 지르지 않았단 말이냐?”

아이가 문을 열자, 장세개는 중문을 나갔다. 왕경은 살그머니 그 뒤를 따라갔다. 장세개는 뒤에서 오는 발걸음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바로 그때 왕경은 오른손으로 비수를 빼들고 왼손은 다섯 손가락을 활짝 편 채 장세개에게 덤벼들었다. 순간 장세개는 오장육부가 모두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 비명을 질렀다.

도둑이야!”

하지만 미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왕경의 칼이 귀밑으로 들어와 목을 베어 버렸다. 장세개는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졌다. 아이는 비록 평소에 왕경과 친하기는 했지만, 왕경의 손에 번쩍번쩍 빛나는 비수를 들려 있고 눈앞에서 흉악한 짓을 저지르는 것을 보고 어찌 무섭지 않겠는가? 달아나려고 했지만 두 발이 땅에 못 박힌 듯 꼼짝 할 수가 없었고, 소리를 지르려고 해도 마치 벙어리가 된 듯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너무나 놀라서 그냥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장세개는 살아 보려고 버둥거렸는데, 왕경이 달려들어 등에 깊숙이 비수를 찔러 넣어 끝장을 내버리고 말았다. 방원은 방안에서 누나와 술을 마시고 있다가, 바깥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등불도 켜지 않고 급히 뛰어 나왔다. 왕경은 방안에서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고 등롱을 든 아이를 발로 걷어찼다. 아이가 등롱을 든 채로 넘어지면서 등롱이 꺼져 버렸다. 방원은 장세개가 아이를 때리는 줄 알고 소리쳤다.

매형! 아이는 왜 때리시오?”

그리고는 말리려고 앞으로 오는데, 왕경이 어둠 속에서 달려들어 방원의 옆구리를 비수로 찔렀다. 방원은 돼지 멱따는 소리를 지르며 땅바닥에 넘어졌다. 왕경은 넘어진 방원의 머리털 붙잡고 한칼에 목을 잘라 버렸다.

방씨는 바깥에서 흉한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급히 하녀를 불러 등불을 들려 함께 밖으로 나왔다. 왕경은 방씨가 나오는 것을 보고 달려들어 죽여 버리려고 했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괴이한 일이 일어났다! 왕경이 눈을 돌려 보니, 방씨의 등 뒤에 10여 명의 하인들이 손에 무기를 들고 고함을 지르면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왕경은 황급히 손발을 멈추고 몸을 돌려 뒷문을 열고 달려가 뒷담을 뛰어넘었다. 피 묻은 옷을 벗어 버리고 비수를 깨끗이 닦은 다음 몸에 감추었다. 그때 자정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왔다. 왕경은 거리에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 성벽 아래까지 당도했다. 섬주의 토성은 별로 높지도 않고 해자도 그리 깊지 않아, 왕경은 성벽을 넘어 달아났다.

한편, 장세개의 첩 방씨는 단지 등불을 든 두 하녀와 함께 나왔을 뿐, 원래 아무도 따라나온 사람이 없었다. 방씨가 나와 보니, 동생 방원의 머리가 피를 흘리면서 한쪽에 떨어져 있고 몸은 다른 한쪽에 있었다. 깜짝 놀란 방씨와 하녀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두 개골을 갈라서 얼음물 한 통을 쏟아 부은 것처럼 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벌벌 떨고 있던 방씨와 두 하녀가 허둥지둥 집안으로 달려가면서 소리를 지르자, 집안에서는 하인들이 바깥에서는 당직을 서던 군졸들이 횃불과 무기를 들고 뒷마당으로 달려왔다. 중문 밖에 장관영이 죽어 넘어져 있고, 아이가 쓰러져 입으로 피를 토하면서 버둥거리고 있는데 살아날 것 같지 않았다.

뒷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니, 도둑이 집 뒤로 들어온 것 같았다. 모두 뒷문 밖으로 나가서 불을 비춰 보니, 땅바닥에 비단 두 필이 버려져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왕경이 한 짓이라 짐작하고, 죄수들을 점검해 보니 왕경만 없었다.

영내에서 소동이 벌어지자, 주변의 이웃들도 모두 나와서 찾아보니, 뒷담 밖에 피 묻은 옷이 발견되어 자세히 살펴보니 역시 왕경의 것이었다. 사람들은 상의하여, 성문을 열기 전에 부윤에게 달려가 알리고 급히 수색을 시작했다.

부윤은 보고를 받고 크게 놀라, 속히 현위를 보내 죽은 사람을 검사하고 범인이 드나든 곳을 알아보게 하였다. 사람을 보내 네 성문을 굳게 닫게 하고, 군병들과 포졸들 그리고 마을 이장들을 모두 내보내 집집마다 수색하여 범인 왕경을 체포하게 하였다. 하지만 성문을 닫고 이틀 동안 소란을 피우면서 집집마다 다 뒤졌지만 끝내 왕경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부윤은 공문을 각처로 보내 집집마다 수색하여 범인을 잡으라고 하고, 왕경의 고향 · 나이 · 용모 · 복장 등을 상세히 적고 그림까지 그린 방을 내걸었다. 왕경이 있는 곳을 알리는 자에게는 상금 1천관을 줄 것이며, 만약 범인을 숨겨 숙식을 제공하는 자는 범인과 동일한 죄를 물을 것이라고 하였다.

한편, 왕경은 그날 밤 섬주성을 넘어간 다음 옷을 걷어붙이고 해자의 얕은 곳을 골라 건너서 맞은편 언덕으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비록 탈출하여 목숨은 부지했지만, 이제 어디로 가서 몸을 피할 것인가?”

때는 한겨울이 다가올 때여서, 나뭇잎도 모두 떨어지고 풀도 말라 버려서 별빛 아래에서도 길은 잘 보였다. 왕경은 그날 밤 서너 개의 소로를 지나 마침내 대로로 나가 황급히 내달렸다. 붉은 해가 떠올랐을 때에는 성에서부터 약 6~70리 멀어져 있었다.

남쪽을 향해 가다 보니, 앞에 인가가 조밀한 마을이 나타났다. 왕경은 자신에게 아직 1관의 돈이 남아 있음을 생각하고, 일단 마을에 들어가서 술과 음식을 사먹은 다음 어디로 갈지 생각해 보기로 했다.

잠시 후 마을에 당도했는데, 아직 이른 아침이어서 주점들이 문을 열지 않았는데 동쪽 거리의 한 집 처마 밑에 객점임을 알리는 등롱이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어젯밤에 문을 닫지 않은 탓인지 문도 반쯤 열려 있었다.

왕경이 그 집으로 가서 끼익소리를 내면서 문을 밀고 들어가자, 아직 세수도 하지 않고 머리도 빗지 않은 한 사람이 안에서 나왔다. 왕경이 보니, 이종사촌인 원장(院長) 범전이었다. 그는 어릴 적에 왕경의 부친을 따라 방주에서 장사를 해서 돈을 벌어 그곳에서 양원(兩院)의 압뢰절급이 되었다. 금년 봄 3월에 공무로 동경에 왔다가 왕경의 집에 며칠 묵은 적도 있었다.

왕경이 범전을 보고 소리쳤다.

형님!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범전이 말했다.

왕경 아우 아닌가!”

그런데 범전이 왕경의 몰골을 보니, 얼굴에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범전은 의심이 들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왕경은 주위에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형님은 이 아우를 좀 구해 주십시오!”

범전은 황망히 왕경을 부축해 일으키며 말했다.

자네가 진짜 왕경 아우인가?”

왕경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소리 내지 마십시오!”

범전이 눈치를 채고 왕경의 소매를 끌어 객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범전이 어젯밤 빌린 독방이었다. 범전이 조용히 물었다.

아우는 어쩌다 이 모양이 되었나?”

왕경은 범전의 귀에 대고 낮은 소리로, 유배 오게 된 일을 자세히 얘기하고 또 장세개가 원한을 갚기 위해 자신을 괴롭혀 어젯밤에 죽인 일을 다 말했다. 얘기를 듣고 범전은 크게 놀랐다. 잠시 주저하다가, 급히 세수하고 아침밥을 먹은 다음 방값과 밥값을 치렀다. 왕경을 자신을 따라다니는 군졸로 꾸며 객점을 떠나 방주를 향해 갔다.

길을 가면서 왕경은 범전에게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는지 물었다. 범전이 말했다.

우리 부윤이 섬주 부윤에게 서신을 갖다 주라고 해서 왔는데, 어제 회신을 받고 섬주를 떠나 저녁에 이곳에 당도하여 하룻밤을 묵은 거네. 아우가 섬주에 와 있었고, 또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은 몰랐네.”

범전은 왕경과 함께 밤에는 쉬고 아침부터 걸어서 몰래 방주에 당도하였다. 이틀이 지나자, 섬주에서 범인 왕경을 체포하라는 공문이 왔다. 범전은 두 손에 땀을 쥐고 집으로 돌아와 왕경에게 말했다.

성중은 몸을 숨길 곳이 못 되네. 성 밖의 정산보 동쪽에 몇 칸짜리 초가와 20여 무()의 밭을 작년에 내가 사 둔 것이 있네. 지금 장객 몇 명을 보내 경작시키고 있는데, 자네는 일단 그리로 가서 몸을 피하게, 며칠 있으면서 다시 생각해 보세.”

범전은 캄캄한 밤중에 왕경을 데리고 성을 나가, 정산보 동쪽의 초가에 숨어 있게 하였다. 그리고 왕경의 성명을 이덕으로 바꾸게 했다. 범전은 왕경의 얼굴에 새겨진 문신이 마음에 걸렸다. 그런데 다행히 예전에 건강에 갔다가 신의 안도전의 명성을 듣고 많은 예물을 주고 문신을 없애는 방법을 배운 적이 있었다. 왕경의 얼굴에 독한 약을 바른 후에 좋은 약을 써서 치료하여 붉은 살이 돋게 한 다음, 다시 금가루와 옥가루를 발라 치료하였다. 두 달 정도 지나자 문신이 모두 깨끗하게 사라졌다.

세월이 흘러 백여 일이 지나, 선화 원년 봄이 되었다. 관아에서 왕경을 체포하려던 일도 이미 용두사미(龍頭蛇尾)가 되어 흐지부지 되었다. 왕경은 얼굴에 문신도 없어져서 차츰 바깥나들이도 하게 되었다. 의복과 신발 등은 모두 범전이 마련해 주었다.

어느 날, 왕경이 방안에 앉아 있는데, 홀연 멀리서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왕경이 장객에게 물었다.

어디서 저렇게 떠드는 소리가 나는가?”

장객이 말했다.

이대관(李大官)께서는 모르시겠지만, 여기서 서쪽으로 1리쯤 가면 정산보 안에 단가장(段家莊)이 있습니다. 그 집 단씨 형제가 본주의 기생들을 불러 무대를 설치하고 노래를 부르게 하고 있습니다. 그 기생들은 서경에서 새로 왔는데, 용모와 재주가 빼어나다고 합니다. 그들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룬답니다. 대관인께서도 한 번 가 보시지요?”

왕경은 그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정산보로 갔다.

정산보는 5~6백 가호가 있는 마을이었는데, 무대는 보리밭 위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때 기생들은 아직 무대 위에 오르지 않았고, 무대 아래 사방에 3~40개의 탁자가 놓여 있는데 사람들이 둘러앉아 주사위 노름을 하고 있었다.

주사위로 하는 노름도 한 가지가 아니라, 육풍아(六風兒) · 오요자(五么子) · 화요모(火燎毛) · 주와아(朱窩兒) 등이 있었다. 20여 명이 땅에 웅크리고 앉아 동전 던지기도 하고 있었는데, 동전을 던져 하는 노름도 혼순아(渾純兒) · 삼배간(三背間) · 팔차아(八叉兒) 등이 있었다.

주사위를 던지는 곳에서는 를 외치거나 을 외치고, 동전을 던지는 곳에서는 글자를 외치거나 뒷면를 외치고 있었다. 혹은 웃기도 하고 혹은 욕하기도 하고, 혹은 진지하기도 하고 혹은 싸우기도 하였다. 노름에 진 자들은 옷을 벗어 놓기도 하고 두건이나 버선을 벗어 놓기도 했다. 본전을 찾기 위해 할 일도 내팽개치고 먹고 자는 것도 잊은 채 달려들지만, 끝내 다 잃고 마는 자도 있었다.

이긴 자는 의기양양하여 이쪽저쪽 기웃거리다가 상대를 찾아 다시 노름을 하는데, 전대나 호주머니 혹은 소매 속에 은전이 가득했다. 하지만 다 끝난 후에 셈을 해 보면 노름꾼이나 물주들이 다 가져가고 딴 돈은 얼마 없게 되었다.

노름판 광경은 그만 얘기하고, 시골 아낙네들을 살펴보자. 호미도 내팽개치고 채소밭에 물주는 것도 버려두고서 삼삼오오 무리를 이루어, 햇볕에 시커멓게 탄 얼굴을 쳐들고 누런 이빨을 드러낸 채 어리벙벙하게 서서 기생이 올라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똑같이 부모 밑에서 자랐을 것인데, 그 기생들은 어쩌면 그렇게도 예뻐서 사람들이 구경하러 몰려들었을까? 비단 인근 마을에서뿐만 아니라 성중에서도 사람들이 구경하러 와서, 푸르른 보리밭이 10여 무()나 짓밟혔다.

왕경은 한가롭게 한 바퀴 돌면서 구경을 하다 보니, 손이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무대 근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한 우람하고 건장한 사내가 두 손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걸상에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큰 얼굴에 눈은 둥그렇고, 어깨는 넓은데 허리는 가늘었다. 탁자 위에 5관의 돈이 쌓여 있고, 상자 하나와 주사위 여섯 개가 놓여 있었는데, 노름할 상대가 없는 것 같았다. 왕경은 생각했다.

내가 관아에 잡혀갔던 때부터 오늘까지 열 달이 넘도록 놀아본 적이 없네. 지난번에 범전 형님이 땔나무 사라고 준 은덩어리가 하나가 있으니, 이걸 밑천으로 저자와 주사위 노름을 한 번 해보자. 몇 관쯤 따 가지고 돌아가서 과일이나 사 먹어야지.”

왕경은 은덩어리를 꺼내 탁자 위에 던지며 사내에게 말했다.

주사위 한번 던져 봅시다!”

사내가 왕경을 보더니 말했다.

던져 보시죠!”

말이 미처 끝나기 전에, 한 사람이 앞쪽 탁자를 둘러싼 사람들을 비집고 나왔다. 덩치가 큰 것이 걸상에 앉아 있는 사내와 비슷했다. 그 사람이 왕경에게 말했다.

이보시오! 은덩어리로 판돈을 낼 수 있겠소? 내가 은덩이를 동전으로 바꿔줄 테니, 당신이 이기면 1관에 20문의 이자를 떼겠소.”

왕경이 말했다.

좋소!”

그 사람은 돈 2관을 내놓고서 1관에 20문씩 이자를 떼고서, 나머지를 왕경에게 건넸다. 왕경이 말했다.

좋아!”

왕경은 사내와 주와아 노름을 시작했다. 두세 판 놀았는데, 또 한 사람이 끼어들어 판돈을 댔다. 왕경은 동경에서 노름판에 굴러먹던 놈이라, 솜씨가 대단했다. 주사위를 던지는 것은 물론이요 교활한 속임수도 잘 써서 판돈을 쓸어갔다.

은덩어리를 동전으로 바꿔준 자는 소란한 틈을 타서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은덩어리를 거두어 슬그머니 사라졌다. 뒤에 끼어들었던 자도 왕경의 솜씨가 흉악한 것을 보고 판돈을 거두고, 사내 옆에서 구경만 했다.

왕경은 단숨에 2관을 따고 던질수록 높은 점수가 잘 나왔다. 사내는 본전을 찾으려고 성급하게 굴었지만 작은 점수밖에 나오지 않았다. 왕경이 9점 나올 때 사내는 겨우 8점에 그칠 뿐이었다.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아 5관을 모두 잃고 말았다.

왕경은 돈을 따자, 2관은 줄로 꿰어 은덩어리와 다시 바꾸려고 한쪽에 두고, 3관은 따로 꿰어 어깨에 메려고 하는데, 돈을 잃은 사내가 소리쳤다.

너는 돈을 가지고 어디로 가려고 하는 거냐? 그 돈은 방금 화로에서 나온 것이라, 뜨거워서 손을 델 걸?”

왕경이 노하여 말했다.

네가 나한테 잃어 놓고서 무슨 좆같은 방귀 뀌는 소리냐?”

사내가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면서 욕을 했다.

이 개새끼가 감히 어르신에게 욕을 해!”

왕경도 욕을 했다.

“x같은 촌놈아! 내가 네놈의 주먹을 무서워할 것 같으냐? 어디 나한테서 한번 뺏어 봐라!”

사내가 주먹을 치켜들고 왕경의 얼굴을 향해 날렸다. 왕경은 옆으로 슬쩍 피하면서 사내의 손을 잡고서 오른쪽 팔꿈치로 사내의 복부를 찌르면서 오른발로 사내의 왼쪽 다리를 걷어찼다. 사내는 힘은 셌지만 발길질에는 익숙하지 못해, 뒤로 벌렁 자빠지고 말았다. 둘러서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모두 웃어댔다.

사내가 일어나려고 버둥거리자, 왕경이 위에 올라타서 마구 두들겨 팼다. 그때 은덩어리를 동전으로 바꿔주었던 사내가 달려와서, 말리거나 돕지도 않고 다만 탁자 위에 있는 돈을 몽땅 쓸어 담아 달아났다. 왕경은 크게 노하여 땅바닥에 넘어진 사내를 버려두고, 돈을 훔쳐가는 놈을 뒤쫓았다. 그때 사람들 틈에서 한 여인이 나오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 무례하게 굴지 마라! 내가 여기 있다!”

왕경이 여인을 보니, 생김새가 괴상했다. 커다란 눈에 흉악한 빛이 번득이고, 거친 눈썹에는 살기가 어려 있었다. 허리와 사지가 꿈틀대는 모양이 예쁜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낯짝은 두꺼운데 연지분을 덕지덕지 바르고 있었다. 머리에는 이상한 모양의 비녀를 찌르고 두 손목에는 팔찌를 끼고 있었는데, 마치 돌절구에 장신구를 두른 것처럼 우스운 모양이었다. 바늘에 실을 어떻게 꿰는지는 모르고, 주먹질과 발길질이 장기인 것 같았다.

나이는 24~5세 정도 돼 보였다. 그녀는 겉에 입은 적삼을 벗어 둘둘 말아 탁자 위에 던졌다. 안에는 화살대처럼 소매가 짧고 앵무새처럼 푸른 색깔의 몸에 붙는 웃옷을 입었고, 아래에는 통이 넓은 자주색 명주 바지를 입고 있었다.

여인은 앞으로 걸어 나오면서 주먹을 쥐고 왕경에게 덤벼들었다. 왕경은 상대가 여인이고, 또 주먹질이 어설픈 것을 보고 놀려주려고 일부러 빠른 발길질은 사용하지 않고 주먹으로만 상대했다. 그것도 주먹을 내리고 가슴을 드러낸 채 좀 엉성한 자세를 취했다. 그렇게 하니 여인과 상대가 될 만했다.

그때 기생들이 무대 위에 올라가 연극을 시작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남녀가 싸우는 것이 더 재밌어서, 모두 그쪽으로 몰려가 두 사람을 둘러싸고 구경했다. 여인은 왕경이 단지 막기만 하는 것을 보고, 실력이 모자라서 그런 줄 알았다.

그녀는 빈틈을 노리다가 검은 호랑이가 상대의 가슴을 노리는 자세인 흑호투심세(黑虎偷心勢)’를 취하면서 왕경의 가슴을 찌르고 들어갔다. 왕경이 슬쩍 피하자, 여인의 주먹은 허공을 찔렀다. 그리고 미처 주먹을 거두기 전에 왕경에게 붙잡혀 넘어졌다. 여인이 넘어지면서 막 땅에 닿으려는 순간, 왕경이 손을 내밀어 그녀를 껴안았다. 그건 호랑이가 머리를 끌어안는 자세인 호포두(虎抱頭)’라는 기술이었다.

왕경이 여인에게 말했다.

옷을 더럽히면 안 되죠. 내가 넘어뜨렸다고 화내지 마시오. 그쪽이 먼저 나한테 덤벼든 거니까.”

여인은 조금도 부끄러워하거나 노하는 기색도 없이, 도리어 왕경을 칭찬했다.

와우! 멋진 솜씨네요!”

그때 돈을 잃고 얻어맞은 사내와 돈을 쓸어갔던 사내가 사람들을 헤치고 나와 함께 소리쳤다.

당나귀가 싸지른 개새끼가 간땡이도 크네! 감히 우리 누이를 넘어뜨려?”

왕경도 욕을 했다.

노름에 진 거북이 새끼 같은 병신들이 내 돈을 훔쳐가 놓고, 도리어 더러운 소리를 지껄이고 있네.”

왕경이 주먹을 들어 막 치려고 하는데, 한 사람이 사람들 틈에서 뛰쳐나오더니 사이를 가로막고 소리쳤다.

이대랑! 무례하게 굴지 마라! 단이(段二) 형과 단오(段五) 형도 손을 멈추시오! 모두 같은 땅위에 사는 사람들이니, 말로 좋게 해결할 수도 있지 않소!”

왕경이 보니, 바로 범전이었다. 세 사람이 손을 멈추자, 범전이 여인에게 말했다.

삼랑(三娘)! 안녕하시오?”

여인도 인사를 하고 물었다.

이대랑은 원장님 친척이신가요?”

범전이 말했다.

내 이종사촌이오.”

여인이 말했다.

대단한 솜씨예요!”

왕경이 범전에게 말했다.

저놈이 노름에 져서 돈을 잃고서는, 도리어 한패를 시켜 훔쳐갔습니다.”

범전이 웃으며 말했다.

그건 이 두 형제의 장사일세. 자네가 어쩌다가 장사를 망쳐 놓았는가?”

단이와 단오는 누이가 다친 데 없는지 살펴보았다. 여인이 단오에게 말했다.

범원장님의 얼굴을 봐서, 다투지 말자. 은덩어리는 이리 내놔!”

단오는 누나가 왕경을 칭찬하면서 말리는 것을 보고 말했다.

내가 졌소.”

단오는 은덩어리를 꺼내 누나인 삼랑에게 건넸다. 삼랑이 범전에게 은덩어리를 주면서 말했다.

은덩어리는 그대로이니, 가져가세요!”

말을 마치자 삼랑은 단이와 단오를 데리고 사람들을 헤치고 가버렸다. 범전도 왕경을 데리고 초가로 돌아왔다. 범전이 왕경을 나무라며 말했다.

내가 이모를 생각해서 어려움을 무릅쓰고 자네를 여기 머물게 하고, 혹 사면령이라도 내리면 자네를 위해 뭔가 해주려고 하는데, 자네는 어찌 성질을 참지 못하고 있는가!

단이와 단오는 아주 교활하고 사나운 놈들일세. 그리고 그 누이 단삼랑은 더 악독해서 사람들이 대충와(大蟲窩 ; 호랑이굴)라고 부른다네. 그녀의 유혹에 빠져 신세 망친 양가 자제들이 적지 않네. 그녀는 15세 때 어떤 늙은이에게 시집갔는데, 그 늙은이도 1년이 못 돼 그녀에게 시달려 죽었다네. 그녀는 자신의 힘만 믿고 단이 · 단오와 함께 바깥으로 다니면서 행패를 부리고 남의 돈을 빼앗는다네. 인근 마을에서는 저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네. 저들이 기생들을 불러온 것도, 사람들을 노름판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수작이야. 거기 펼쳐진 탁자들이 모두 올가미라네. 그런데 자네가 그곳에 가서 말썽을 일으키면 되겠는가! 만약 자네 정체가 탄로 나게 되면, 자네나 나나 큰 화를 당하게 될 것 아닌가?”

왕경은 범전의 말을 듣고,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범전이 일어나며 왕경에게 말했다.

나는 관아에 당직 서러 가야겠네. 내일 다시 오겠네.”

다음 날, 왕경이 세수를 막 했는데, 장객이 와서 말했다.

단태공이 대랑을 보러 왔습니다.”

왕경이 밖으로 나가 영접하고 보니, 주름이 많은 얼굴에 은빛 수염을 기른 노인이었다. 인사를 마치고 주객을 나누어 좌정하였다. 단태공이 왕경을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살펴보더니, 말했다.

과연 헌칠하군!”

그리고는 고향이 어딘지, 어떻게 해서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 범원장과는 어떤 사이인지, 결혼은 했는지 등등을 물었다. 왕경은 단태공의 질문이 뭔가 수상쩍어 거짓으로 얘기를 날조하여 대충 얼버무렸다.

저는 서경 사람인데, 부모도 모두 돌아가시고 아내도 죽었습니다. 범절급의 이종사촌인데, 지난해에 범절급이 공무로 서경에 왔다가, 제가 혼자 살면서 돌봐줄 사람도 없는 것을 보고 여기로 데려 왔습니다. 제가 권법과 봉술을 조금 알고 있어서 기회가 있으면 이곳에서 출세할 수 있을까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단태공은 왕경의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면서, 왕경의 사주팔자를 묻고서 돌아갔다.

왕경이 무슨 일일까 의심하고 있는데, 얼마 후에 또 한 사람이 사립문을 밀고 들어오면서 물었다.

범원장 계십니까? 당신이 이대랑이오?”

두 사람은 서로 바라보다가 깜짝 놀라며 각기 생각했다.

어디서 본 적이 있는데

인사를 마치고 물어보려고 하는데, 마침 범전이 돌아왔다. 세 사람이 좌정하고서, 범전이 말했다.

이선생은 무슨 일로 오셨소?”

왕경은 그 말을 듣고 문득 생각났다.

점쟁이 이조였구나.”

이조도 생각이 났다.

이 사람은 동경의 왕씨로서 내게 점을 친 적이 있었지.”

이조가 범전에게 말했다.

한동안 원장님을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친척 중에 이대랑이라는 사람이 있습니까?”

범전이 왕경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사람이 제 아우 이대랑입니다.”

왕경이 그 말을 받아서 말했다.

본래 성은 이가인데, 외가 성을 따라 왕가라고도 합니다.”

이조가 손뼉을 치고 웃으면서 말했다.

제 기억도 좋은 편이군요. 나는 왕씨로 알고 있었는데, 동경 개봉부에서 한번 만난 적이 있지요.”

왕경은 이조가 정확히 말하자,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이조가 왕경에게 말했다.

그때 헤어진 후에 저는 형남으로 갔다가, 이인(異人)을 만나 검술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사주팔자를 보고 운세를 점치는 사주학(四柱學)에 통달했던 서자평(徐子平)의 묘결(妙訣)도 배웠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저를 금검선생(金劍先生)이라 부릅니다. 근래에 방주에 와서 살게 되었는데, 이곳에 사람이 많이 모여 떠들썩하다는 것을 듣고 살길을 찾으러 왔습니다. 단씨 형제가 저의 검술을 알아보고 가르침을 청해서, 그 집에 머물고 있습니다. 좀 전에 단태공께서 돌아오셔서 당신 사주팔자를 주시면서 점을 쳐보라 하셨는데, 팔자가 어쩜 그렇게 좋습니까? 훗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해지실 겁니다. 바야흐로 서광이 비치고 경사가 생길 것입니다. 단삼랑과 단태공이 크게 기뻐하면서 대랑을 사위로 삼고자 하셔서, 오늘이 마침 길일이라 제가 중매를 서려고 왔습니다. 삼랑의 팔자도 남편을 출세시킬 운입니다. 궁합도 딱 맞아서 천생연분입니다. 두 분이 부부가 되면, 저도 술 한 잔 얻어먹어야겠습니다.”

범전은 이조의 말을 듣고서 한동안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단씨는 교활하고 사나운 자들인데, 만약 이 혼인을 승낙하지 않으면 무슨 해를 당할지 모르겠다. 일단 들어주는 수밖에 없다.”

범전이 이조에게 말했다.

그렇게 됐군요! 단태공과 삼랑의 좋은 뜻은 알겠습니다만, 이 아우가 부족해서 그 댁의 사위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이조가 말했다.

아이고! 원장님은 너무 겸손하십니다. 삼랑은 대랑을 칭찬하느라 입을 다물 줄 모르고 있습니다.”

범전이 말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제가 이번 혼인을 주도하겠습니다.”

범전은 5냥짜리 은덩어리를 꺼내 이조에게 건네면서 말했다.

시골집에 대접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작은 성의이니 차라도 사서 드십시오. 일이 성사되면 따로 사례하겠습니다.”

이조가 말했다.

뭘 이렇게까지

범전이 말했다.

별 말씀을! 하나만 더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아우의 성이 2개라는 것은 말씀하지 마십시오, 모든 일은 선생께 맡기겠습니다.”

이조는 일개 점쟁이인지라, 은자를 받자 아주 감사해 하며 범전과 왕경을 작별하고 단가장으로 돌아갔다. 이조는, 왕경의 성이 하나건 둘이건 상관없고 좋은 놈이든 나쁜 놈이든 상관없었다. 그저 두 사람을 맺어주고 술과 음식을 얻어먹고 돈만 챙기면 그만이었다. 게다가 단삼랑이 신랑감을 마음에 들어 하고, 평소에 집안의 모든 사람이 그녀를 두려워하여 비록 단태공이라 할지라도 그녀를 꺾지 못했으므로 혼사는 바로 진행되었다.

범전은 혼인 소문이 퍼져 무슨 일이 생길까 염려되어, 간소하게 치르자고 제안하였다. 단태공도 재물을 아끼는 사람인지라 좋아하면서, 바로 날을 잡아 혼례를 치르기로 했다. 그래서 그 달 22일로 날을 잡아, 양과 돼지를 잡고 물고기와 개구리를 잡아 잔치를 준비했다. 술과 고기를 차려놓고 친척들을 초청하여 술을 마시되, 풍악을 울리고 동방에 화촉을 밝히는 등의 번거로운 절차는 모두 생략하기로 했다.

범전은 왕경에게 새 옷을 해 입히고, 단가장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자신은 관아에 일이 있어 먼저 돌아갔다. 왕경과 단삼랑은 맞절을 하고 합환주를 마시는 등 간략한 혼례 절차를 마쳤다. 단태공은 초당에 술상을 차려놓고, 20여 명의 친척들과 두 아들, 새 사위와 중매인 이조 등과 함께 저녁까지 술을 마시다가 헤어졌다.

친척 중에 집이 가까운 사람들은 돌아가고, 집이 먼 사람들은 단가장에서 유숙했다. 단삼랑의 고모부 방한 부부, 이종사촌 구상의 가족, 단이의 처남 시준 부부 등이었는데, 세 남자는 바깥사랑채에서 자고, 세 여자와 아이들은 술과 음식을 가지고 왕경과 단삼랑의 방으로 가서 웃고 떠들며 술을 마시다가 자러 갔다. 계집종과 할멈이 신방으로 와서 침상에 이불을 펴고, 새신랑과 신부를 쉬게 한 다음 방문을 닫고 각자 잠자리로 돌아갔다.

단삼랑은 어릴 때부터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부끄러움이라는 걸 몰랐기 때문에, 신방에 들어오자마자 비녀를 뽑고 적삼을 벗었다. 왕경은 원래 부랑아인데다 관아에 잡혀 간 후 열 달이 넘도록 홀로 지내왔었다. 단삼랑의 큰 눈과 거친 눈썹이, 비록 교수나 우씨의 요염함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녀가 등잔 앞에서 허리띠를 풀고 하얀 젖가슴을 드러내자 음심이 발동하여 부인을 덥석 끌어안았다. 그러자 단삼랑이 왕경의 따귀를 한 대 올려붙이며 말했다.

귀찮게 굴지 마! 뭐가 그리 급해!”

하지만 둘은 침상 위에서 서로 끌어안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한 베개를 베고 운우의 정을 나누었다.

그날 밤 신방 밖에서는 방사를 엿보느라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들렸다. 방한 · 구상 · 시준의 젊은 아내들이 술을 한 잔 걸치고 뺨이 발그레한 채 잠자러 가지는 않고, 단이와 단오의 아내까지 깨워 가지고 신방을 몰래 훔쳐보고 있었던 것이다. 방안의 숨소리까지 자세히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왕경은 본래 방탕한 놈인지라 방중술(房中術)을 제법 알고 있어서, 바깥에서 아낙들이 엿보고 있는 걸 알면서도 온갖 기교를 부렸다. 방사가 농염한 지경에 이르자, 바깥의 아낙들은 자신의 속옷이 젖어드는지도 모르고 열심히 엿보고 있었다.

아낙들이 키득거리면서 서로 장난하고 있는데, 단이가 뛰어 들어오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어떡하면 좋아! 어떡해야 돼? 당신네들은 무슨 일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여기서 키득거리고 있는 거야!”

아낙들은 두 손의 땀을 닦으며 어리둥절해 했다. 단이가 또 고함을 질렀다.

삼랑아! 빨리 일어나! 네 침상이 화를 낳았다!”

단삼랑은 한창 기분이 좋다가, 단이를 나무라며 침상에 누운 채 말했다.

밤중에 무슨 일이 있길래, 그렇게 놀라는 거요?”

단이가 또 고함을 쳤다.

불길이 이미 털에 붙었다! 생사를 알 수 없는 일이야!”

왕경은 심중에 대충 짚이는 것이 있어 아내에게 옷을 입게 하고 함께 방을 나갔다. 아낙들은 모두 머리를 싸안고 흩어졌다. 왕경이 방문을 나가자, 단이가 멱살을 잡고 초당으로 끌고 갔다. 범전도 거기 있었는데, ‘아이고신음하면서 마치 뜨거운 철판 위의 개미처럼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뒤이어 단태공 · 단오 · 단삼랑도 모두 당도했다.

신안현 공가촌 동쪽에 사는 황달이 상처가 다 낫자, 왕경의 종적을 탐지하여 어제 저녁 방주에 와서 부윤에게 알렸던 것이다. 부윤 장고행은 공문을 내고, 도두로 하여금 토병들을 이끌고 가서 범인 왕경을 붙잡아 오게 하였다. 아울러 범인을 숨겨준 범전과 단씨 일가도 모두 잡아들이게 하였다.

범전은 방주의 설공목과 친한 사이여서, 설공목이 은밀히 먼저 소식을 전해 주었다. 범전은 가족도 내버리고 연기가 꺼지듯 이리로 달려와 소리쳤다.

이제 곧 관병이 들이닥칠 겁니다! 모두 관아에 붙잡혀 갈 겁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빠질 듯하며 가슴을 두드렸다. 마치 닭이 알을 품고 있는 둥지가 뒤집어진 듯,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왕경을 욕하기도 하고 삼랑을 나무라기도 했다. 그렇게 한창 시끌벅적하고 있을 때 초당 밖의 동쪽 사랑채에서 금검선생 이조가 나와 말했다.

여러분이 화를 면하고 싶으면 제 말을 들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일제히 앞으로 나아가 둘러싸고 묻자, 이조가 말했다.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삼십육계 달아나는 것이 상책입니다!”

어디로 달아난단 말이오?”

여기서 서쪽으로 20리 밖에 방산이 있소

거기는 강도들이 출몰하는 곳이오.”

이조가 웃으며 말했다.

여러분은 참으로 딱하시오! 당신들이 이제 착한 사람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소?”

그게 무슨 소리요?”

방산의 산채 주인 요립은 저와 잘 아는 사이입니다. 그의 수하에는 5~6백 명의 졸개가 있는데, 관병도 그를 체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체해서는 안 되니, 빨리 귀중품만 챙겨서 모두 그곳으로 가서 입당합시다. 그래야만 큰 화를 피할 수 있습니다.”

방한 등 여섯 남녀는 나중에 친척으로서 연루되는 것도 두렵고 또 왕경과 단삼랑이 꼬드기자 어쩔 수 없이 따르기로 하였다. 장원에서 값나는 것만 이것저것 챙기고 횃불 3~40개를 밝혔다.

왕경 · 단삼랑 · 단이 · 단오 · 방한 · 구상 · 시준 · 이조 · 범전 9명은 옷매무새를 단단히 하고, 허리에 요도를 차고 손에 박도를 들었다. 장객들을 불러 모아, 따라가기를 원하는 40여 명도 모두 무기를 들고 옷을 단단히 묶도록 하였다.

왕경 · 이조 · 범전이 앞장서고, 방한 · 구상 · 시준이 여자들을 보호하면서 가운데를 지켰다. 다행히 다섯 여자들이 모두 전족을 하지 않아 남자처럼 걸을 수 있었다. 단삼랑 · 단이 · 단오가 뒤를 맡았다. 장원 앞뒤에 불을 붙이고 함성을 지르며, 무기를 들고 서쪽을 향하여 달려갔다.

이웃과 인근 마을 사람들은 평소에도 단가 사람들을 호랑이처럼 두려워했기 때문에, 오늘 그들이 횃불을 밝혀 들고 무기를 들고 나서자 모두 문을 닫고 아무도 감히 나서서 가로막지 못했다.

왕경 등은 4~50리를 가다가, 황달과 함께 자신들을 잡으러 오는 토병들을 만났다. 앞장섰던 도두는 왕경의 칼에 두 토막이 나 버렸다. 이조와 단삼랑 등이 일제히 돌격하여 토병을 죽이고 흩어 버렸다. 황달도 왕경에게 죽음을 당했다.

왕경 일행이 방산 산채 아래 이르렀을 때는 이미 새벽이 되었다. 이조는 자신이 먼저 산으로 올라가 요립에게 호소하여 사람들을 산으로 끌어올려 입당하기로 하였다.

그때 산채에서 순시하던 졸개들이 산 아래에서 횃불이 어지럽게 다가오는 것을 보고, 즉시 두목에게 가서 보고하였다. 요립은 관병이 온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는 평소에도 관병을 우습게 여겼기 때문에 황망히 일어나 갑옷을 입고 쟁을 들었다. 졸개들을 점검하여 산채 문을 열고 관병을 막으러 산을 내려갔다.

왕경은 산 위에서 횃불이 켜지고 많은 사람들이 내려오는 것을 보고, 준비를 했다. 요립은 산에서 내려와 많은 남녀들이 있는 것을 보고, 관병은 아니란 것을 알았다. 요립이 쟁을 들고 소리쳤다.

너희 좆같은 연놈들은 어찌하여 우리 산채를 놀라게 하는 거냐? 감히 이 태세신(太歲神)을 건드려 화를 자초하느냐?”

이조가 앞으로 나아가 몸을 굽히고 말했다.

대왕! 아우 이조입니다.”

그리고는 왕경이 죄를 지은 일에서부터 관영을 죽인 일과 또 지금 관병들을 죽이고 온 일 등을 자세히 얘기했다. 요립은 이조가 애기한 왕경의 일을 듣고, 또 단가 형제가 그를 돕는 것을 보고 생각했다.

나는 혼자뿐인데, 후일 저놈에게 도리어 제압당할지도 모른다.”

요립은 안면을 바꾸고 이조에게 말했다.

이곳은 협소해서 당신들을 받아들이기 어렵소.”

왕경은 그 말을 듣고 생각했다.

산채에는 주인이라고는 저놈 하나밖에 없으니, 먼저 저놈만 제거하면 나머지 졸개들이야 무슨 근심거리이겠는가?”

왕경은 박도를 들고 곧장 요립에게 달려들었다. 요립도 노하여 쟁을 들고 맞섰다. 단삼랑은 왕경이 실수할까 염려되어 박도를 들고 왕경을 도우러 나갔다. 세 사람이 10여 합을 싸운 끝에,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쓰러졌다.

왕경과 단삼랑은 요립과 10여 합을 싸웠는데, 왕경이 요립의 빈틈을 노리고 박도로 찔렀다. 요립이 넘어지자 단삼랑이 달려들어 한칼에 끝장을 내고 말았다. 반평생을 강도로 살아온 요립의 인생이 일장춘몽(一場春夢)이 되고 말았다!

왕경이 박도를 쳐들고 소리쳤다.

나를 따르지 않는 자는 요립처럼 될 것이다!”

요립이 죽는 것을 본 졸개들은, 아무도 항거하지 않고 모두 무기를 버리고 땅에 엎드려 절을 했다. 왕경이 무리를 이끌고 산에 올라가 산채에 당도하니, 그때 비로소 동방이 밝아왔다. 이 산의 사면에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석실들이 많은데, 마치 방처럼 생겼기 때문에 방산(房山)으로 불렸고, 방주 관할이었다.

왕경은 가족들을 안정시키고, 졸개들을 점검하고 산채의 식량과 금은보화 등을 조사했다. 그리고 소와 말을 잡아 졸개들에게 상을 내리고 술을 마련하여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자축했다. 사람들은 왕경을 산채 주인으로 추대하였다. 한편으로는 무기를 만들고, 한편으로는 졸개들을 훈련시켜 관군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한편, 그날 밤 방주에서 왕경 일행을 잡으라고 보냈던 도두와 토병들 가운데 살아서 도망친 자들이 돌아가 부윤 장고행에게 말했다.

왕경 등이 미리 알고서 관병에 대항하여, 도두와 신고자 황달이 죽었습니다. 그 나쁜 놈들은 서쪽으로 달아났습니다.”

장고행은 크게 놀랐다. 다음 날 아침 토병들을 점검해 보니, 죽은 자가 30여 명이고, 다친 자가 40여 명이었다. 장고행은 즉시 본주를 지키는 군관과 의논하여, 포도관군과 감영 군사들을 보내 체포하게 하였다. 하지만 강도들이 흉맹하여 관병들은 또 패하고 말았다.

방산의 산채는 날이 갈수록 졸개들이 늘어갔고, 왕경 등은 산을 내려가 민가를 약탈했다. 장고행은 도적의 세력이 창궐하는 것을 보고, 한편으로는 공문을 각 현으로 보내 자신의 경계를 잘 지키는 동시에 병력을 내어 도적을 체포하는 일에 협력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방주를 지키는 병마도감 호유위와 도적을 토벌할 일을 상의하였다.

호유위는 영중의 군병을 점검하고 날을 택해 도적을 토벌하러 가기로 하였는데, 홀연 두 군영의 군사들이 난동을 부렸다. 두 달 동안 급료도 받지 못하고 군량미도 제대로 공급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지경이 되었으니, 어떻게 도적과 싸울 수 있겠는가?

장고행은 변고가 일어났다는 것을 듣고, 할 수 없이 한 달 치 급료와 군량미를 먼저 지급하였다. 하지만 그건 도리어 군사들을 더 격노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 일을 담당한 자가 평소에 군사들을 잘 보살피지 않다가, 군사들이 소동을 일으킨 다음에야 비로소 지급했기 때문에 도리어 군사들의 마음을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평소와 마찬가지로 또 중간에 떼먹었기 때문에 쌓였던 불만이 한꺼번에 터지게 된 것이었다. 화가 난 군사들은 한꺼번에 감정이 폭발하여 호유의를 죽여 버렸다.

장고행은 형세가 좋지 않음을 보고 인신(印信)만 챙겨서 도망치고 말았다. 성중에 주인이 없어지자, 무뢰한들이 반란을 일으킨 군사들에 부화뇌동하여 양민들의 집에 불을 지르고 약탈을 자행했다.

왕경은 성중에 변란이 일어난 것을 알고, 그 틈에 졸개들을 이끌고 방주성을 공격하였다. 그러자 반란을 일으킨 군사들과 온갖 오합지졸들이 왕경을 따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왕경은 방주를 점거하여 근거지로 삼고 뜻을 얻게 되었다. 장고행은 끝내 도망치지 못하고 도적들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왕경은 방주의 창고에 있는 돈과 식량을 털어, 이조 · 단이 · 단오를 방산 산채 및 각처로 보내 말을 사들이고 군사들을 모집하게 하였다. 그리고 말 사료와 군량을 장만하기 위해 멀고 가까운 고을들을 모두 약탈하였다. 할 일 없이 빈둥거리던 무뢰한과 범죄자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그때 황달의 밀고로 가산을 탕진해 버린 공단과 공정도 왕경을 찾아와 입당하였다.

인근 주현(州縣)들은 자신의 성을 지키기만 할 뿐, 아무도 감히 군마를 동원해 도적을 토벌할 생각을 못했다. 왕경은 두 달 만에 2만여 명을 모아, 인근의 상진현 · 죽산현 · 운향현 등 세 성을 점거하였다.

인근 주현에서 조정에 보고하자, 조정에서는 도리어 각 지방의 군사를 동원하여 도적을 토벌하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당시의 관병들은 군량도 부족하고 훈련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병사들은 장수를 두려워하지 않고, 장수들은 병사들을 알지 못했다. 도적의 기세가 흉맹하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에, 도적이 쳐들어온다는 말만 들어도 병사들은 겁을 먹었고 백성들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도적과 마주치면 장군들은 겁을 먹었고 군사들은 나약했다.

그에 비해 왕경의 무리들은 모두 목숨을 내놓고 달려들었으므로, 관군은 도적을 만나기만 하면 모조리 쓰러지고 말았다. 왕경의 세력은 더욱 커져 또 남풍부를 점거하였다.

동경에서 보낸 장수들은 채경이나 동관에게 뇌물을 먹이지 않으면 양전이나 고구에게 뇌물을 먹인 자들이었다. 채경 등은 뇌물을 받기만 하면 장수가 될 자들이 어리석거나 겁 많은 자라도 상관하지 않았다. 그리고 장수들은 본전을 찾기 위해 멋대로 군량을 잘라먹고, 양민을 죽이고서는 도적을 잡은 공인 양 꾸미기도 했다. 병사들이 민가를 약탈해도 내버려두었으므로, 지방이 소란해지고 양민이 핍박을 받아 도리어 도적을 따르는 형편이 되었다.

이때부터 도적의 세력은 점점 더 커져서 병력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조는 본래 형남 사람이었기 때문에 점쟁이로 꾸미고 형남성으로 들어가 은밀히 악당들을 규합하여 안에서 내응하여, 왕경은 형남성도 점거하였다. 왕경은 이조를 군사(軍師)에 임명하고, 스스로 초왕(楚王)이라고 칭하였다. 그러자 강 위의 도적들과 산 위의 강도들이 모두 와서 복종하였다. 3~4년 만에 왕경은 송나라의 여섯 개 군주(軍州)를 차지하였다.

마침내 왕경은 남풍성에 궁궐을 짓고 연호를 정하였다. 송나라 조정의 관제를 본떠, 문무백관을 임명하였다. 이조는 군사도승상(軍師都丞相), 방한은 추밀(樞密), 단이는 호국통군대장(護國統軍大將), 단오는 보국통군도독(輔國統軍都督), 범전은 전수(殿帥), 공단은 선무사(宣撫使)에 임명하였다. 공정은 전운사(轉運使)에 임명하여 돈과 곡식의 출납을 관장하게 하고, 구상은 어영사(御營使)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단삼랑을 왕비로 세웠다. 선화 원년에 난을 일으켜 선화 5년 봄에 이런 일이 이루어졌다.

그때 송강 등은 하북에서 전호를 토벌하면서, 호관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을 때였다. 회서의 왕경은 또 운안군과 완주를 격파하여 모두 8개 군주(軍州)를 점거하게 되었다. 남풍 · 형남 · 산남 · 운안 · 안덕 · 동천 · 완주 · 서경이었는데, 거기에 속한 현은 모두 86개였다. 왕경은 또 운안에 행궁을 세우고 시준을 유수관(留守官)으로 임명하여 운안군을 지키게 하였다.

왕경이 유민 등을 시켜 완주를 침략하였을 때, 완주는 동경에 가까운 곳이었으므로 채경 등은 더 이상 천자를 속이지 못하고 사실을 아뢰었다. 도군황제는 채유와 동관에게 왕경을 토벌하고 완주를 구원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하지만 채유와 동관은 군대를 제대로 다스리지도 못했고 병사들에게 포학하기만 하여 병사들의 마음이 흐트러져 있었다. 그래서 유민에게 대패를 당하고 완주는 함락되었다. 동경은 공포에 떨었다.

채유와 동관은 벌이 두려워 오로지 천자를 속이기만 급급하였다. 그 사이에 적장 유민과 노성 등은 채유와 동관을 이긴 기세를 몰아 노주와 양주를 포위하였다. 송강 등이 하북을 평정하고 회군하다가 다시 회서를 토벌하라는 조서를 받은 것이 바로 그 무렵이었다.

참으로 앉은 자리가 따뜻해질 겨를도 없고, 말이 발굽을 멈출 새도 없었다. 송강은 20여 만 대군을 거느리고 남쪽을 향하여 출발했다. 황하를 건너자, 조정에서 또 공문이 내려와 재촉하였다. 진안무와 송강의 병마는 빨리 가서 노주와 양주를 구원하라는 내용이었다.

송강 등은 더위를 무릅쓰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속현과 사수를 거쳐 양적주 경계에 이르렀다. 가는 동안 백성을 추호도 범하지 않았음을 물론이다. 도적들은 송강의 병마가 당도한 것을 듣고, 노주와 양주 2곳의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그때 장청 · 경영 · 섭청은 전호가 처형되는 것을 보고 나서, 송강이 왕경을 토벌하는 것을 도우라는 조칙을 받들어 동경을 떠나 영창주에 도착한 지 보름이 지나고 있었다. 송선봉의 병력이 당도했다는 소식을 듣고, 세 사람은 나아가 영접하였다. 인사를 마친 다음 천자의 은혜로 관작 받은 일을 자세히 얘기했다. 송강을 비롯한 두령들이 모두 칭찬해 마지않았다. 송강은 장청에게 군중에서 명령을 대기하라고 하였다.

송강은 진안무 · 후참모 · 나무유 등을 청하여 양적성에 머물게 하고, 자신의 대군은 성에 들어오기 불편하여 방성산 숲속 녹음이 짙은 곳에 주둔하여 더위를 피하게 하였다. 그리고 군사들이 천리를 걸어오느라 더위 먹고 지친 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안도전으로 하여금 약을 지어 치료하게 하였다. 또 말들도 선선한 곳에서 쉬게 하고, 황보단으로 하여금 말들을 보살펴주게 하였다.

오용이 말했다.

대군이 숲속에 주둔하고 있는데, 적들이 화공을 할까 염려됩니다.”

송강이 말했다.

적들이 화공을 하기를 바라고 있소.”

송강은 군사들을 보내 높은 언덕 나무 그늘 아래에 대나무와 띠풀로 작은 망루를 만들게 하였다. 그러자 하북의 항장 교도청이 그 의도를 알아차리고 송강에게 아뢰었다.

제가 선봉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으니, 오늘 작은 공이라도 세우고자 합니다.”

송강은 크게 기뻐하며, 은밀히 교도청에게 계책을 일러주어 언덕 위의 망루로 보냈다. 송강은 군사들 가운데 강건한 자 3만을 선발하여, 장청과 경영으로 하여금 1만을 거느리고 동쪽 산기슭으로 가서 매복하게 하고, 손안과 변상으로 하여금 1만을 거느리고 서쪽 산기슭으로 가서 매복하게 하였다. 아군 중군에서 굉천포 터지는 소리가 들리면 일제히 뛰어나오라고 하였다. 군량과 마초는 산 남쪽의 평지에 쌓아놓고, 이응과 시진으로 하여금 5천 군사를 거느리고 지키게 하였다.

송강이 배정을 끝내자, 공손승이 말했다.

형님의 계책이 아주 묘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더위에 지치고 군사들이 먼 길을 오느라 피로하고 병이 나 있어서, 만약 적군의 정예병이 돌격해 오면 아군이 비록 10배나 많다 하더라도 승전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빈도가 작은 술법을 부려 더위를 없애고 인마가 시원하도록 만들겠습니다. 그러면 자연히 힘이 나겠지요.”

말을 마치자, 공손승은 검을 짚고 술법을 부리기 시작했다. 발로는 괴강(魁罡) 두 글자를 밟고, 왼손으로는 뇌인(雷印)을 짓고, 오른손으로는 검결(劍訣)을 짚었다. 정신을 집중하여 동남방을 향해 기운을 내뿜고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잠깐 사이에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짙은 구름이 산봉우리에서부터 몰려나와 방성산 전체를 뒤덮어 20여 만의 인마가 모두 선선한 바람을 쐬면서 기분이 상쾌해졌다.

하지만 방성산 바깥은 여전히 쇠붙이를 녹일 정도의 뜨거운 해가 내리쬐고 있어, 매미들만 시끄럽게 울어댈 뿐 새들은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 송강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면서 공손승의 신통한 도술을 칭찬하였다. 그렇게 6~7일 지나면서, 또 안도전이 군사들을 치료하고 황보단이 말들을 보살펴주어 사람과 말이 모두 점점 강건해졌다.

한편, 완주를 지키는 적장 유민은 도적 중에서 제법 모략이 있는 자여서 유지백(劉智伯)이라 불렸다. 그는 송강의 병마가 더위를 피하느라 산림이 우거진 곳에 주둔하고 있는 것을 탐지하고서, 부하들에게 말했다.

송강의 무리는 끝내 물가에 살던 도적에 지나지 않아, 병법을 알지 못하는구나. 그래서 큰일을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제 내가 작은 계책을 시행하여 저 20만 군마의 절반을 구워 버리겠다!”

유민은 즉시 명을 내려 날랜 군사 5천을 선발하여, 각기 불화살 · 화포 · 횃불 등을 준비하게 하였다. 그리고 전차(戰車) 2천 대를 준비하여 갈대와 마른 장작, 그리고 유황과 염초 등의 인화물을 가득 싣게 하였다. 그리고 전차 한 대마다 네 사람이 밀게 하였다.

때는 7월 중순으로 이제 초가을이 시작될 때였다. 유민은 노성 · 정첩 · 구맹 · 고잠 등 4명의 부장과 철기 1만을 거느리고, 사람들은 가벼운 갑옷을 입고 말들은 방울을 떼고서 전차 뒤를 따라 접응하기로 하였다. 유민은 편장 한철과 반택 등을 남겨 성을 지키게 하였다.

유민 등은 해가 질 무렵 성을 나갔는데, 마침 남풍이 크게 불었다. 유민은 크게 기뻐하면서 말했다.

송강의 무리는 패할 수밖에 없다!”

적병들은 자정쯤에 방성산 남쪽 2리 지점에 당도하였는데, 홀연 안개가 산골짜기를 가득 덮었다. 유민이 말했다.

하늘이 나의 성공을 돕는구나!”

유민은 군사들에게 뒤에서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면서 위세를 돕게 하고, 5천 군사로 하여금 산림을 향해 불화살과 화포를 쏘고 횃불을 던져 불을 지르게 하였다. 구맹과 필승은 전차를 밀고 온 군사들을 재촉하여, 전차에 불을 붙여 산기슭 아래 군량을 쌓아둔 곳으로 내려 보내게 하였다. 적병들이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가다가, 홀연 모두 비명을 질렀다.

아이고! 아이고!”

참으로 괴상한 일이 일어났다. 남풍이 세차게 불다가, 삽시간에 북풍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그리고 산 위에서 벽력같은 소리가 났다. 교도청이 바람 방향을 바꾸어 불을 되돌리는 술법을 써서 적병이 쏜 불화살과 화포를 모두 남쪽의 적군 진영으로 날려 보냈다. 마치 천만 마리 금빛 뱀과 화룡(火龍)이 화염을 따라 적병을 덮치는 것 같았다. 적병들은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하고 불을 뒤집어썼다.

그때 송선봉이 능진으로 하여금 호포를 터뜨리게 하였다. 포탄이 하늘로 올라가 터지자, 동쪽에서는 장청과 경영이, 서쪽에서는 손안과 변상이 병력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적병은 대패하였다. 노성은 손안의 한칼에 두 동강이 났고, 정첩은 경영의 돌에 맞아 말에서 떨어졌는데 장청의 쟁에 다시 찔려 끝장났다. 고잠은 변상의 쟁에 찔려 죽었고, 구맹은 난전 속에서 죽었다.

23천의 인마가 태반은 불에 타 죽거나 창칼에 죽고 나머지는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쳤다. 2천 대의 수레도 모두 불에 타 버렸다. 유민은 겨우 3~4백 명의 패잔병만 데리고 완주성으로 달아났다. 송군은 땔나무나 건초 하나 태우지 않고 한 명의 군졸도 잃지 않고서, 획득한 말과 갑옷이 무수하였다.

장청과 손안 등은 승전하고 영채로 돌아와 공을 바쳤다. 손안은 노성의 수급을 바쳤고, 장청과 경영은 정첩의 수급을 바쳤으며, 변상은 고잠의 수급을 바쳤다. 송강은 각각 상을 내렸다. 교도청의 공을 첫째로 기록하게 하고, 장청 · 경영 · 손안 · 변상의 공을 둘째로 기록하게 하였다.

오용이 말했다.

형님의 묘산이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을 겁니다. 하지만 완주는 산과 강이 두르고 있고 들판이 기름져서 육해(陸海)라 불리는 곳입니다. 만약 도적들이 장병을 보강하여 지키게 되면 급히 이기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시원한 바람이 더위를 몰아내고 이슬이 내려 선선해지고 있으니, 인마가 모두 강건해졌습니다. 아군이 위세를 크게 떨치고 성중의 적군은 약해진 틈을 타서 빨리 공격하면 반드시 이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병력을 남북으로 나누어 적의 구원병이 오는 것을 막으면서 공격해야만 합니다.”

송강은 오용의 의견에 찬성하고, 명을 내려 관승 · 진명 · 양지 · 황신 · 손립 · 선찬 · 학사문 · 진달 · 양춘 · 주통으로 하여금 3만 병마를 이끌고 완주성 동쪽에 주둔하여 남쪽으로부터 오는 적의 구원병을 막게 하고, 임충 · 호연작 · 동평 · 삭초 · 한도 · 팽기 · 단정규 · 위정국 · 구붕 · 등비로 하여금 3만 병마를 이끌고 완주성 서쪽에 주둔하여 북쪽에서는 오는 적의 구원병을 막게 하였다. 장수들은 명을 받고 군마를 점검하여 떠났다.

그때 손안 등 하북의 항장 17명이 일제히 아뢰었다.

선봉께서 저희들을 거두어주시고 예로써 대우해 주신 것에 저희들은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저희들이 앞장서서 성을 공격함으로써 두터운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고자 합니다.”

송강은 청을 허락하고, 장청과 경영으로 하여금 손안 등 17명의 장수와 군마 5만을 거느리고 선봉이 되게 하였다. 17명의 장수는 손안 · 마령 · 변상 · 산사기 · 당빈 · 문중용 · 최야 · 김정 · 황월 · 매옥 · 김정 · 필승 · 반신 · 양방 · 풍승 · 호피 · 섭청이었다. 장청은 명을 받고, 장수들과 군병을 거느리고 완주를 향해 진격하였다.

송강도 노준의 · 오용 등과 함께 나머지 장수들과 대군을 거느리고 영채를 뽑고 방성산을 떠나 남쪽으로 진격하여, 완주에서 10리 떨어진 곳에 하채하였다. 이운 · 탕륭 · 도종왕에게 공성(攻城) 기구를 만들어 장청을 비롯한 선봉부대에 보내게 하였다. 장청 등은 완주성을 물샐 틈 없이 포위하였다.

한편, 완주성을 지키는 적장 유민은 그날 밤 송강의 계략에 빠져 겨우 목숨만 건져 성으로 돌아갔다. 유민은 왕경이 있는 남풍으로 사람을 보내 보고하는 한편, 인근 고을에 공문을 보내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송군에게 성이 포위되어 있어 오늘은 굳게 지키기만 하고, 구원병이 오면 그때 출격하려고 하였다.

송군은 연이어 6~7일 동안 공격하였지만, 성벽이 견고하여 함락하지 못하였다. 완주성 북쪽의 여주를 지키는 적장 장수(張壽)가 구원병 2만을 거느리고 왔는데, 임충 등의 공격을 받고 장수는 죽고 나머지 편장들과 군사들은 모두 궤멸되어 도망쳤다. 같은 날, 또 완주성 남쪽의 안창현 · 의양현에서도 구원병이 왔는데, 관승 등에게 공격당해 대패하고 적장 백인과 장이는 사로잡혀 송강의 영채로 끌려가 참수되었다. 그 외에도 죽음을 당하거나 사로잡힌 자들이 아주 많았다.

그때 이운 등은 공성 기구를 다 만들었다. 손안과 마령 등은 동심협력하여 군사들로 하여금 흙주머니를 성의 사면에 쌓게 하였다. 또 용감하고 날랜 군사들을 선발하여 비교(飛橋)를 이용하여 해자를 뛰어넘고 흙주머니를 밟고 성벽을 올라가게 하였다. 군사들은 용맹을 떨쳐 일제히 성 위로 올라가 유민을 사로잡고 나머지 편장 20여 명을 죽었다. 죽은 군사가 5천여 명이고, 항복한 자는 만여 명이었다.

송강은 대군을 거느리고 입성하여, 유민을 참수하여 효시하고 방을 내붙여 백성을 안정시켰다. 관승 · 임충 · 장청 및 손안 등의 공로를 차례로 기록하게 하고, 사람을 양적주의 진안무에게 보내 승첩을 보고하는 한편 완주로 와서 지켜줄 것을 청하였다. 진안무는 보고를 받고 크게 기뻐하며 즉시 후참모 · 나무유와 함께 완주로 왔다. 송강 등은 성을 나가 영접하였다. 진안무는 송강의 공을 칭찬하였다.

송강은 완주에서 군무를 처리하느라 10여 일을 보냈다. 때는 8월 초순이 되어 더위가 차츰 물러갔다. 송강이 오용에게 말했다.

이제 어느 성을 취하는 것이 좋겠소?”

오용이 말했다.

여기서 남쪽으로 가면 산남군이 있습니다. 남으로는 호상에 이르고 북으로는 관락에 잇닿아 초촉(楚蜀)의 목줄기와 같은 곳입니다. 이 성을 먼저 취하게 되면, 적의 세력을 갈라놓을 수 있습니다.”

군사의 말이 내 뜻과 같소,”

화영 · 임충 · 선찬 · 학사문 · 여방 · 곽성을 남겨 병마 5만을 거느리고 진안무 등을 보좌하게 하여 완주를 지키게 하였다. 진안무는 성수서생 소양도 남기게 하였다.

송강은 명을 내려, 수군두령 이준 등 8명은 수군의 선척들을 이끌고 필수를 거쳐 산남성의 북쪽 한강에 모이라고 하였다. 송강은 육군을 세 부대로 나누어 진안무를 작별하고 군마 15만을 거느리고 완주를 떠나 산남군으로 진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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