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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지 71화

고태위는 제주성의 원수부에 앉아서 왕환 등의 절도사들을 불러 상의하여, 각로의 군마들은 영채를 뽑고 성안으로 들어와 갑옷을 입고 성안에 숨어 있게 하였다. 군사들은 성안에 줄지어 서서 대기하고, 성 위에는 깃발을 하나도 세우지 않았다. 단지 북문 위에만 천조(天詔)’라고 쓴 황기를 세웠다. 고구는 사신과 관원들을 거느리고 성 위로 올라가 송강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날 양산박에서는 먼저 몰우전 장청이 5백 척후병을 거느리고 제주성으로 와서 주변을 한 바퀴 돌고 북쪽으로 갔다. 잠시 후 신행태보 대종이 보행으로 성을 한 바퀴 돌고 갔다. 보고를 받은 고태위는 친히 백여 명의 종자를 데리고 성 위로 올라가 휘장을 치고 향탁자를 설치했다.

멀리 북쪽에서 송강의 군마가 다가오고 있었다. 앞에서는 징과 북을 울리고 갖가지 깃발을 휘날리면서, 여러 두령들이 기러기가 날개를 펼친 것 같은 대형을 이루어 다가왔다. 앞장선 송강·노준의·오용·공손승이 말 위에서 몸을 숙여 고태위에게 인사했다. 고태위는 사람을 시켜 소리치게 했다.

지금 조정에서는 너희들의 죄를 사면하고 초안하려고 하는데, 너희들은 어찌하여 갑옷을 입고 왔느냐?”

송강은 대종을 보내 성 아래에서 대답하게 하였다.

저희들은 아직 조정의 은택을 입지 못했고, 조서에 어떤 뜻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갑옷을 벗지 못하고 있는 것이니, 태위께서는 살펴주십시오. 성안의 백성들과 원로들을 불러 함께 조서를 들을 수 있게 해주시면, 갑옷을 벗겠습니다.”

고태위는 명을 내려 성안의 원로들과 백성들을 성 위로 불러오게 하였다. 잠시 후 많은 사람들이 성 위로 올라왔다. 송강 등은 성 위에 백성들이 가득한 것을 보고 비로소 말을 몰아 앞으로 나왔다. 북이 한 번 울리자, 두령들은 말에서 내렸다. 북이 두 번째 울리자, 보행으로 성 가까이까지 갔다. 뒤에서는 장교들이 말고삐를 잡고 화살이 미치지 못할 거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북이 세 번째 울리자, 두령들은 성 아래로 가서 두 손을 맞잡고 조서를 듣기 위해 대기하였다.

사신이 조서를 읽었다.

 

사람의 본심은 본래 두 가지가 아니며, 나라의 변치 않는 도리도 하나이다. 선한 일을 하면 양민이 되고, 악한 일을 하면 역적이 된다. 짐이 듣건대, 양산박에 무리가 모인 지 오래 되었는데, 선한 교화를 받지 못해 아직 양심을 회복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제 사신을 보내 조서를 내리니, 송강을 제외하고, 노준의 등 모든 인원들이 지은 죄를 사면해 주려고 한다.

우두머리 되는 자들은 경성으로 와서 은혜에 감사하고 협력하여 따르던 자들은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라. 오호라! 비와 이슬에 젖듯 은혜를 입어 나쁜 길에서 떠나 바른 마음으로 돌아갈 것이며, 더 이상 나쁜 짓을 저지르지 말고 옛것을 고쳐 새 뜻으로 살아가라! 이렇게 이르노니, 바르게 알아들을지라.

 

선화(宣和) 모년 모월 모일.

 

군사 오용은 송강을 제외하고라는 말을 듣자, 화영에게 눈짓을 하며 말했다.

장군도 들었소?”

조서 낭독이 끝나자, 화영이 소리쳤다.

우리 형님을 사면하지 않는다는데, 우리가 투항하면 뭐 하겠냐!”

활을 들어 조서를 낭독하던 사신을 향해 쏘면서 말했다.

화영의 신전(神箭)을 봐라!”

화살은 날아가 사신의 얼굴에 명중하였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급히 구해서 내려갔다. 성 아래의 두령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

성 위를 향해 마구 활을 쏘았다. 고태위는 화살을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때 성문이 열리면서 군마가 돌진해 나갔다. 송강의 군중에서 북소리가 울리자, 두령들은 일제히 말에 올라 달아나기 시작했다. 관군들이 추격하다가 5~6리쯤에서 되돌아갔다. 그때 뒤편에서 포성이 울리면서 동쪽에서는 이규가 보군을 이끌고 쳐들어오고, 서쪽에서는 호삼랑이 마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양로 군병이 하나로 합쳐 공세를 펼쳤다.

관군들은 매복이 있을까 두려워 급히 퇴각하는데, 송강의 전부대가 말을 돌려 땅을 말듯이 공격해 왔다. 삼면에서 협공하자, 관군은 크게 혼란해져 급하게 성으로 돌아갔는데 사상자가 아주 많았다. 송강은 더 이상 추격하지 않고 군대를 거두어 양산박으로 돌아갔다.

한편, 고태위는 제주성에서 다음과 같은 표문을 써서 조정에 아뢰었다.

송강 도적놈은 천자의 사신을 활로 쏘아 죽이고, 초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따로 밀서를 써서 채태사·동추밀·양태위에게 보냈다. 천자께 아뢰어 군량과 병력을 더 보충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한편, 채태사는 고태위의 밀서를 받고 조정으로 들어가 천자께 아뢰었다. 천자는 기쁘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이 도적들은 몇 번이나 조정을 모욕하고 대역죄를 범하는구나.”

즉시 칙령을 내려 여러 곳의 군마를 동원하여 고태위에게 보내라고 하였다. 양태위는 전황이 불리함을 알고 어영사에서 두 장수를 선발하였다. 그리고 용맹·호익·봉일·충의 네 영채에서 각각 정병 5백을 선발하여 두 장수를 따라가 고태위의 토벌을 돕게 하였다.

두 장수는 누구인가? 한 사람은 80 금군의 도교두이며 좌의위 친군지휘사 호가장군 구악이고, 또 한 사람은 80만 금군의 부교두이며 우의위 친군지휘사 거기장군 주앙이었다. 이 두 장수는 여러 번 대단한 공을 세워 이름이 천하에 알려졌으며, 무예에도 통달하여 그 위세가 경성을 진압하고 있었다. 또 고태위의 심복이기도 하였다.

두 장수는 떠나기에 앞서 채태사를 찾아갔다. 채태사가 그들에게 분부하였다.

조심하여 큰 공을 세우도록 하게. 그러면 반드시 중용하겠네.”

두 장수는 채태사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네 영채에서는 신체가 건장하고 산을 잘 오르고 물에도 익숙한 산동과 하북의 정예군사 2천 명을 선발하여 두 장수에게 주었다. 구악과 주앙은 관원들을 작별하고 양태위를 찾아가 아뢰었다.

내일 출발하겠습니다.”

양태위는 두 장수에게 각각 5필의 좋은 말을 하사하여 전투에 사용하도록 하였다. 두 장수는 양태위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각자 영채로 돌아가 출발 준비를 했다.

다음 날, 군병들은 갑옷을 입고 출발 준비를 하여 모두 어영사 앞에서 대기하였다. 용맹과 호익의 영채에서 선발한 1천 명의 군사와 2천 필의 군마는 구악이 거느리고, 봉일과 충의의 영채에서 선발한 1천 명의 군사와 2천 필의 군마는 주앙이 거느렸다. 그리고 1천 보군도 둘로 나누어 두 장수를 따르게 하였다. 구악과 주앙은 아침에 군대를 이끌고 성을 나갔다. 양태위는 친히 성문 위에 올라가 바라보았다.

장병들이 모두 위엄이 있고 용맹해 보였는데, 그 중에서도 호가장군 구악의 모습은 더욱 늠름하였다. 구악이 말을 타고 좌대 인마를 거느리고 가는 것을 본 동경 백성들은 갈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 뒤를 따르는 우대 인마도 질서정연하였는데, 거기장군 주앙 역시 위용을 뽐내며 말을 타고 지나갔다. 두 장수는 성문에 당도하자 말에서 내려 양태위와 관원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동경을 떠나 제주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한편, 고태위는 제주에서 문참모와 상의하여, 증원군이 올 때까지 근처 산림에서 큰 나무를 벌채하고 부근 지방에서 배 만드는 장인들을 불러 모아 제주성 밖에서 전선을 건조하였다. 그리고 방을 내어 용감한 수군을 모집하였다.

그때 제주성 안의 객점에 섭춘이라는 나그네 하나가 묵고 있었다. 원래 사주 사람으로 배를 잘 만드는 사람이었는데, 산동으로 오면서 양산박을 지나다가 소두목에게 본전을 빼앗기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해 제주에서 떠돌고 있는 중이었다. 고태위가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어 양산박을 토벌하려 한다는 것을 듣고, 종이에 배 모양을 그려 가지고 고태위를 뵈러 갔다. 섭춘은 고태위에게 절한 다음 아뢰었다.

지난번에 상공께서 배를 타고 도적들을 토벌하려 가셨는데, 승전하지 못한 까닭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배들을 여기저기서 끌어 모아 돛이나 노를 사용하는 법이 일정하지 않고, 배 밑바닥이 뾰족하여 전투용으로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제 한 계책을 바치고자 합니다.

만약 저 도적들을 토벌하고자 하신다면, 반드시 큰 배 수백 척을 건조해야 합니다. 제일 큰 배는 대해추선이라고 하는데, 양쪽에 24개의 수차(水車)가 있고 수백 명을 태울 수 있습니다. 각 수차는 12명이 발로 밟아서 움직이고, 바깥은 대나무로 막아 화살을 피할 수 있게 합니다. 배 위에는 쇠뇌를 쏘는 누각을 세우고 차단막을 설치합니다. 진격할 때에는 이 누각에서 딱따기를 치면 24개의 수차를 일제히 밟으면 나는 듯이 달려 어떤 배도 당해낼 수 없으며, 적군을 만나게 되어 배 안에 숨겨둔 쇠뇌를 일제히 발사하면 어떤 걸로도 막지 못합니다.

두 번째 배는 소해추선이라고 하는데, 양쪽에 12개의 수차가 있고 백 명을 태울 수 있습니다. 전면과 후미에는 긴 못을 박고 양변에는 역시 쇠뇌를 쏘는 누각을 세우고 대나무로 차단막을 설치합니다. 이 배는 양산박의 좁은 물길에서 복병을 막아낼 수 있습니다. 이 계책에 따르면, 양산박의 도적은 손바닥에 침 뱉는 것처럼 쉽게 평정할 수 있습니다.”

고태위는 그 말을 듣고 또 도본을 보고서 크게 기뻐하였다. 술과 음식을 가져오게 하여 대접하고, 의복을 비롯한 상을 내렸다. 그리고 섭춘을 전선 건조의 총감독으로 임명하였다. 연일 밤낮으로 재촉하여 나무를 베어 기한 내에 제주로 바치게 하고, 각 지방 관아에도 전선 건조에 필요한 물품들을 바치라고 명하였다. 만약 기한을 이틀 넘기면 곤장 40대를 치고, 거기서 하루 더 늦을 때마다 곤장 40대가 추가되었으며, 닷새를 넘기면 군령에 의하여 참수하였다. 이렇게 핍박을 받은 수령들은 더욱 백성들을 재촉하였으니, 백성들의 원망은 많아지고 도망친 자들도 많았다.

 

우물 안 개구리가 하늘을 어찌 알랴.

고구가 거짓말에 속은 것이 안타깝도다.

끝내 해추선으로도 이기기는 어려우리.

헛되이 재물을 버리고 사람만 고생시키는구나.

 

한편, 각처에서 증원된 수군 등이 계속해서 제주에 도착하였으며, 고태위는 그들을 각 영채의 절도사들에게 배속시켰다. 어느 날, 문지기가 와서 보고했다.

조정에서 파견한 구악·주앙 두 장수가 당도하였습니다.”

고태위는 절도사들에게 명해 성을 나가 영접하게 하였다. 두 장수가 원수부에 당도하여 고태위에게 인사하자, 술과 음식을 내어 위로하고 군사들에게도 상을 내렸다. 두 장수가 군사를 이끌고 성을 나가 싸우겠다고 청하자, 고태위가 말했다.

두 분은 며칠만 기다려 주시오. 해추선이 완비되면 수륙으로 병진하여 일고(一鼓)에 도적들을 평정할 것이오.”

구악과 주앙이 아뢰었다.

양산박 도적놈들 정도는 저희들이 볼 때 아이들 장난일 뿐입니다. 태위께서는 마음 놓으십시오. 반드시 개선가를 부르며 동경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고구가 말했다.

두 장군께서 그 말대로만 해주신다면, 내가 천자께 아뢰어 반드시 중용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날 연회가 끝나자, 두 장수는 말을 타고 본채로 돌아가 군마를 주둔하고 명을 기다렸다.

한편, 송강은 여러 두령들과 제주성 아래에서 이라고 외치며 사람들을 죽이고서 양산박으로 돌아와서, 오용 등과 상의하며 말했다.

조정에서 두 번이나 초안했는데, 모두 사신을 해쳐서 죄악이 더욱 무거워졌소. 조정에서 필시 또 군마를 보낼 것이오.”

졸개들을 산 아래로 내려 보내 사정을 정탐하고 급히 돌아와 보고하게 하였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졸개들이 상세히 정탐하고 돌아와 보고했다.

고구가 근래에 수군을 모집하였는데, 섭춘이란 자를 총감독으로 임명하여 크고 작은 해추선 수백 척을 건조하고 있습니다. 동경에서 또 새로 두 명의 지휘사를 파견하여 싸움을 돕게 하였는데, 구악과 주앙이라고 합니다. 두 장수가 다 용맹하고, 또 각처에서 많은 증원군을 보내고 있습니다.”

송강이 오용과 상의하며 말했다.

그렇게 큰 배가 수면 위를 날면 어떻게 격파할 수 있겠소?”

오용이 웃으며 말했다.

뭘 두려워하십니까? 수군두령 몇 명만 보내면 해결할 수 있고, 육지에서의 교전은 또 우리에게 맹장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큰 배를 건조하려면 필시 수십 일이 걸릴 것이니, 아직 4~50일이 남아 있습니다. 먼저 몇몇 형제들을 보내 저들의 배 건조장을 한번 뒤집어놓은 다음에 천천히 대응하겠습니다.”

송강이 말했다.

그게 좋겠소. 고상조 시천과 금모견 단경주를 보냅시다.”

그리고 장청과 손신을 나무 끌고 오는 인부로 꾸며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배 건조장으로 들어가게 하고, 고대수와 손이랑은 밥 짓는 아낙네로 꾸며 다른 아낙네들에게 섞여 들어가게 해서 시천과 단경주를 돕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몰우전 장청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가서 접응하게 함으로써 만전을 기하게 하겠습니다.”

임무를 부여받은 두령들을 각각 산을 내려갔다.

한편, 고태위는 배 건조를 밤낮으로 재촉하며 매일 백성들을 붙잡아 와서 일을 시켰다. 제주의 동쪽 일대는 모두 배 건조장이 되어 버렸다. 대해추선 백 척을 건조하느라 인부 수천 명이 북적거렸는데, 사나운 군사들이 칼을 뽑아 들고 인부들을 위협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재촉하였다.

시천은 단경주와 함께 건조장에 당도하여 말했다.

손신과 장청 부부가 건조장에 방화하는 걸 보고서, 우리가 거기로 가면 우리의 실력을 드러낼 수가 없지. 우리는 여기 숨어 있다가, 건조장에 불이 나면 성문 근처로 가자고. 불이 나면 필시 군사들이 불을 끄러 나올 것이니, 그 틈에 성으로 들어가서 나는 성루에 불을 지를 테니 자네는 서쪽 초료장에 불을 지르게. 그래서 서로 구원하지 못하게 하면, 아마 적잖이 놀라게 되겠지.”

두 사람은 몰래 약속하고, 인화물을 몸에 지니고서 각자 적당한 곳을 찾아 숨었다.

한편, 장청과 손신이 제주성 아래에 와서 보니, 4~5백 명의 인부들이 나무를 끌어 건조장 안으로 옮기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 틈에 섞여들어 나무를 끌고 건조장으로 숨어들었다. 그곳에는 약 2백 명의 군인들이 허리에 요도를 차고 손에는 곤봉을 들고서 인부들을 때리면서 나무를 건조장으로 옮기게 하고 있었다. 건조장 주위는 목책으로 둘러쳐 있고, 앞뒤에 2~3백 칸쯤 되는 초가집이 있는데 바로 배를 만드는 곳이었다.

장청과 손신이 안으로 들어가 보니, 수천 명의 장인들이 한쪽에서는 나무를 켜고 다른 쪽에서는 배에 못을 박고 또 다른 쪽에서는 배에 칠을 하고 있었다. 장인들과 인부들이 어지럽게 북적거리고 있는데,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두 사람이 대나무 울이 둘러쳐 있는 밥 짓는 곳으로 가서 몸을 숨겼는데, 손이랑과 고대수가 허름한 옷차림으로 밥통을 들고 다른 아낙네들을 따라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날이 점점 어두워져 달빛이 환하게 빛났는데, 장인들 태반은 아직도 공정을 마치지 못하여 강제 노역을 당하고 있었다. 10시쯤 되었을 때, 손신과 장청은 건조장 왼쪽에 불을 지르고 손이랑과 고대수는 건조장 오른쪽에 불을 질렀다. 양쪽에서 불길이 일어나자 초가는 금새 화염에 휩싸여 불길이 치솟았다. 건조장 안에 있던 인부들과 장인들이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목책을 뽑아 버리고 각자 달아났다.

고태위는 자고 있다가 보고를 받았다.

배 건조장에 불이 났습니다!”

고태위는 황급히 일어나 관군을 성 밖으로 내보내 불을 끄게 하였다. 구악과 주앙은 각각 본부군병을 이끌고 불을 끄러 성을 나갔다. 그런데 그들이 성을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성루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보고를 받은 고태위는 친히 말에 올라 군사를 거느리고 불을 끄기 위해 성 위로 올라갔다. 그때 또 보고가 들어왔다.

서쪽 초료장에도 불이 났습니다!”

여기저기서 불길이 마구 치솟아 대낮같았다. 구악과 주앙은 군사를 이끌고 먼저 서쪽 초료장으로 불을 끄러 갔는데, 북소리가 땅을 울리고 함성이 하늘을 진동하였다. 몰우전 장청이 5백 기병을 거느리고 그곳에 매복해 있다가, 구악과 주앙이 불을 끄러 나오는 것을 보고 바로 공격한 것이었다. 구악·주앙의 군마와 마주치자 장청이 크게 소리쳤다.

양산박 호걸이 모두 여기 있다!”

구악이 크게 노하여 말을 박차고 칼을 휘두르며 곧장 장청에게 달려들었다. 장청도 긴 쟁을 들고 맞붙었는데, 3합이 되지 않아 말을 돌려 달아났다. 구악은 공로를 세우려는 마음에 뒤를 추격하며 소리쳤다.

반적은 달아나지 마라!”

장청은 쟁을 안장에 꽂고 몰래 비단주머니에서 돌을 꺼내 손에 쥐었다. 구악이 접근해 오자 몸을 돌리면서 손을 들고 외쳤다.

받아라!”

날아간 돌은 구악의 얼굴에 명중하였다. 구악이 말에서 떨어지자, 주앙과 몇 명의 아장들이 구하러 달려갔다. 주앙이 장청과 교전하는 동안 아장들이 구악을 구하여 말에 태워 돌아갔다. 장청은 주앙과 몇 합 싸우다가 말을 돌려 달아났다. 주앙은 추격하지 않았다. 장청이 다시 돌아왔는데, 왕환·서경·양온·이종길의 4로 군마가 당도하였다. 장청은 5백 기병을 손짓해 불러 오던 길로 되돌아갔다. 관군들은 복병이 있을까 두려워 감히 추격하지 못하고 군병을 거두어 돌아가 불을 껐다. 세 군데의 불이 모두 꺼질 때쯤 하늘이 밝아왔다.

고태위는 사람을 보내 구악의 상처가 어떤지 살펴보고 오게 하였다. 장청이 던진 돌이 입에 정통으로 맞아 이빨이 네 개 부러지고 코와 입술도 모두 터져 있었다. 고태위는 의원을 보내 치료해 주었다. 구악이 중상을 입은 것을 본 고태위는 양산박에 대한 원한이 골수에 맺혔다. 한편으로 섭춘을 불러 배 건조를 서두르라고 재촉하고, 다른 한편으로 절도사들에게 명하여 건조장 주위에 목책을 두르고 철통같이 방비하게 하였다.

한편, 장청과 손신 부부 네 사람은 임무를 완수하여 모두 기뻐하였고, 시천과 단경주도 돌아왔다. 여섯 사람은 자신들의 부하들을 만나 함께 양산박으로 돌아갔다. 충의당으로 가서 방화한 일을 얘기하자, 송강은 크게 기뻐하며 여섯 사람을 위해 연회를 열었다. 그 후로도 항상 사람을 보내 정탐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배가 완성되어 갈 무렵 겨울이 찾아왔는데, 그 해에는 기온이 따뜻했다. 고태위는 그것이 하늘의 도움이라 여기며 마음속으로 기뻐하였다. 섭춘이 배가 완성되었다고 보고하자, 고태위는 수군들을 재촉하여 배 위에서 훈련을 시켰다. 크고 작은 해추선들이 연이어 물에 진수되고, 사방팔방에서 모집한 수군이 약 1만 명이 되었다. 그 가운데 절반은 배에서 수차 밟는 법을 배우고, 나머지 절반은 쇠뇌 쏘는 법을 배웠다. 20일 지나지 않아 모든 연습이 완료되어, 섭춘은 고태위를 청하여 점검하라고 하였다.

그날, 고태위는 여러 절도사들과 군관 우두머리들을 거느리고 배를 보러 갔다. 해추선 3백 척이 물 위에 떠 있었는데, 그 가운데 10여 척을 선발해서 시범을 보였다. 깃발을 두루 꽂고 징과 북을 울리고 딱따기를 치자, 양쪽의 수차를 일제히 밟아서 돌리니 배가 바람처럼 빨리 달리기 시작했다. 고태위는 그걸 보고 마음속으로 크게 기뻐하였다. 이렇게 빠른 배를 도적놈들이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이번 전투는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금은과 비단을 섭춘에게 상으로 주고, 장인과 인부들에게도 여비를 지급하여 집으로 돌려보냈다.

다음 날, 고구는 관리들에게 명하여 검은 소, 백마, 돼지, 양을 잡게 하고, 금은과 지전을 함께 차려놓고 수신(水神)에게 제사를 지냈다. 제사상이 차려지자, 장수들이 고태위를 청하여 향을 피우게 하였다. 구악은 상처가 다 나았는데, 원한이 골수에 맺혀 장청을 사로잡아 원수를 갚으려고 하였다. 구악은 주앙 및 여러 절도사들과 함께 말에 올라 고태위를 따라 선착장으로 가서, 고구를 따라 수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제사가 끝나고 장수들이 고구에게 경하를 드리자, 고구는 경성에서 데리고 온 노래하고 춤추는 기녀들을 모두 배에 태워 풍악을 울리며 연회를 열었다. 수군들에게 수차를 밟게 하자 배는 나는 듯이 수면 위를 달렸다. 배 위에서는 풍악을 울리고 노래하고 춤추면서 밤늦게까지 놀다가 배 안에서 잠을 잤다.

그다음 날에도 또 연회를 열어 술을 마셨다. 그렇게 사흘 동안 놀기만 하느라 전투할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놀고 있는데 보고가 들어왔다.

양산박 도적들이 시 한 수를 제주성 토지묘 앞에 붙여 놓았는데, 어떤 사람이 떼어 왔습니다.”

 

건달이던 고구가 때를 만나 삼군을 거느리고 물 위에서 놀고 있네.

해추선 만 척이 있다 한들

양산박에 들어오면 모두 끝장나리라.

 

고태위를 시를 보고 크게 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양산박을 토벌하고자 하였다.

도적놈들을 모조리 죽이지 않으면, 맹세코 회군하지 않을 것이다!”

문참모가 간했다.

태위께서는 천둥 같은 노여움을 잠시 식히십시오. 생각건대 저 미친 도적놈들이 두려워서 이런 악한 말로 우리를 놀라게 하려는 것일 뿐 큰일은 아닙니다. 며칠 더 쉬면서 수륙 군마를 정비하여 진격해도 늦지 않습니다. 지금은 한겨울인데도 날씨가 따뜻하니, 이는 천자의 홍복이고 원수의 호랑이 같은 위세입니다.”

고구는 그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성안으로 들어가 군사 일으킬 일을 상의하였다. 육로에서는 주앙과 왕환이 함께 대군을 거느리고 진격하면서 수군과 접응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항원진과 장개는 군마 1만을 거느리고 곧장 양산박 앞의 큰길을 가로막고 공격하기로 하였다.

원래 양산박은 예로부터 사면팔방이 넓은 호수로 둘러싸여 있고 갈대가 무성하고 연무가 짙게 끼는 곳이었는데, 근래에 송공명이 산 앞으로 큰길을 새로 만들었다. 고태위는 마군을 먼저 보내 그 길 입구를 가로막으려고 한 것이었다. 그 외에 문참모·구악·서경·매전·왕문덕·양온·이종길 및 장사 왕근과 배를 만든 섭춘, 그리고 수행하는 아장들과 대소 장교 등은 모두 고태위를 따라 배를 타고 진격하기로 하였다.

문참모가 간했다.

원수께서는 마군을 감독하시면서 육로로 진격하시고, 친히 수로로 나아가 험지로 들어가지 마십시오.”

고태위가 말했다.

괜찮소! 지난번 두 차례 싸움에서는 적당한 인재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인마와 배를 잃었었소. 하지만 이번에는 좋은 배도 있는데, 내가 친히 감독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저 도적놈들을 잡을 수 있겠소? 이번에야말로 도적놈들과 결사전을 벌일 것이니, 당신은 여러 말 마시오!”

문참모는 감히 다시 입을 열지 못하고, 고태위를 뒤따라 배에 올랐다. 고구는 대해추선 30척을 구악·서경·매전에게 주어 선봉이 되게 하였다. 소해추선 30척은 양온에게 주어 왕근·섭춘과 함께 길을 열도록 하였다. 선두에 선 배에는 붉은 깃발 두 개를 세웠는데, ‘바다와 강을 뒤엎고 거센 물결 헤치며 나아가 도적을 무찔러 나라를 안정시킨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고태위와 문참모는 노래하고 춤추는 기녀들을 데리고 중군의 대오를 거느렸다. 4~50척의 대해추선 위에서는 푸른 깃발과 수자기(帥字旗), 황월백모, 붉은 깃발과 검은 산개 등이 펄럭이고 있었다. 그 뒤를 따르는 배에는 왕문덕과 이종길이 뒤를 받치고 있었다.

때는 11월 중순이었다. 마군이 명을 받아 먼저 출발하고, 수군 선봉 구악·서경·매전도 선두에서 출발하여 구름이 날고 안개가 깔리듯 양산박을 향하여 나아갔다.

한편, 송강과 오용은 이미 모든 것을 자세히 알고서 미리 모든 준비를 해놓고 관군의 배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관군의 세 선봉은 배를 재촉해 와서, 소해추선은 양쪽의 작은 나루에 대기시키고 대해추선은 호수 가운데로 계속 나아갔다. 장수들과 병사들은 이리저리 살피느라 눈은 게처럼 비뚤어지고 목은 학처럼 길어졌다. 오직 앞만 바라보며 서서히 양산박 깊은 곳으로 들어가자, 멀리서 한 떼의 배들이 나타났다.

배마다 14~5명이 타고 있는데, 모두 갑옷을 입고 가운데에는 두령이 한 명씩 앉아 있었다. 맨 앞의 배 세 척에는 각각 백기가 꽂혀 있는데, 깃발에는 양산박 완씨삼웅이라고 쓰여 있었다. 중간에는 완소이, 왼쪽에는 완소오, 오른쪽에는 완소칠이었다. 멀리서 볼 때에는 빛이 번쩍번쩍 하는 것이 모두 갑옷을 입은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금박과 은박을 옷에 붙였을 뿐이었다. 관군의 세 선봉은 그걸 보고 화포와 불화살을 일제히 쏘게 하였다. 완씨 삼형제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가까이 다가오더니 화살이 닿을 거리에 이르자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구악 등 세 선봉은 빈 배 세 척만 빼앗아 다시 나아갔다. 3리를 채 못 갔는데 세 척의 쾌속선이 바람을 가르며 달려왔다. 맨 앞의 배에는 10여 명이 타고 있는데, 모두 몸에 울긋불긋한 칠을 하고 머리는 풀어헤친 채 휘파람을 불며 나는 듯이 다가왔다. 양쪽의 두 배에는 각각 5~6명이 타고 있는데, 역시 몸에는 붉은 색과 푸른 색을 칠했다. 중앙은 옥번간 맹강, 왼쪽은 출동교 동위, 오른쪽은 번강신 동맹이었다. 선봉인 구악이 또 화포와 불화살로 공격하게 하자, 그들도 함성을 지르면서 배를 버리고 일제히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또 빈 배 세 척을 빼앗아 3리쯤 나아갔는데, 또 수면 위에 중간 크기의 배 세 척이 오고 있었다. 배마다 네 개의 노가 있어 8명이 저었으며, 10여 명의 졸개들이 타고 있었다. 배에는 붉은 깃발이 꽂혀 있고 뱃머리에는 두령이 하나 앉아 있는데, 깃발에 수군두령 혼강룡 이준이라고 쓰여 있었다. 왼쪽 배 위에도 한 두령이 손에 철쟁을 쥐고 앉아 있는데, 푸른 깃발에 수군두령 선화아 장횡이라고 쓰여 있었다. 왼쪽 배에도 한 호걸이 서 있는데, 웃통을 벗고 맨다리를 드러낸 채 허리에는 끌을 몇 개 꽂았고 손에는 쇠망치를 들고 있었다. 검은 깃발에 수군두령 낭리백조 장순이라고 쓰여 있었다.

양산박 두령 한 사람이 큰소리로 외쳤다.

배를 여기까지 보내줘서 고맙소!”

관군의 세 선봉이 그 말을 듣고 외쳤다.

화살을 쏴라!”

화살이 날아가자, 세 척의 배에 타고 있던 양산박 무리들이 모두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때는 늦겨울이어서 관군들 가운데 헤엄을 잘 치는 수군들도 감히 물속에 뛰어들지는 못했다. 관군들이 주저하고 있는데, 양산박 정상에서 호포가 연이어 터졌다. 그러자 사방팔방의 갈대숲 속에서 1천 척이 넘는 작은 배들이 마치 메뚜기 떼처럼 몰려나오는데, 배마다 서너 명씩 타고 있었고 선창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었다.

대해추선으로 작은 배들을 들이받으려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수차를 밟았지만, 물속에 있는 부분에 무엇이 끼었는지 움직이지 않았다. 누각에서 화살을 쏘았지만, 작은 배에 타고 있는 자들은 머리 위를 판자로 막아 놓아 소용이 없었다. 작은 배들이 점점 다가오더니, 한 두령이 갈고리를 던져 대해추선의 키를 걸어 당기고, 또 한 두령은 대해추선에 뛰어올라 수차를 밟는 관군들을 칼로 베기 시작했다. 그리고 뒤를 이어 양산박 군사 5~60명이 관군의 배에 뛰어올라 공격했다. 관군은 후퇴하려고 했지만 뒤편이 막혀 급히 후퇴할 수도 없었다. 앞쪽 관선에서 혼전이 벌어지고 있는 사이에 뒤쪽 관선에서도 함성이 크게 일어났다.

고태위는 문참모와 함께 중군 배 위에서 함성이 어지럽게 일어나는 것을 듣고 급히 배를 돌려 언덕으로 올라가려고 했다. 그때 갈대숲 속에서 북소리가 크게 일어났는데, 선창에 있던 군사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배 밑바닥에 물이 샌다!”

배 밑바닥에서 물이 콸콸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고태위가 탄 배뿐만 아니라 앞뒤의 모든 관선들이 물속으로 점점 가라앉아 가고 있었다. 사방에서는 양산박의 작은 배들이 관선을 향해 마치 개미 떼처럼 몰려들고 있었다. 고태위의 배는 새로 만든 배인데, 왜 물이 샜을까? 그것은 장순이 물이 익숙한 수군들을 데리고 관선 밑바닥에 끌로 구멍을 뚫었기 때문이었다.

고태위는 배의 누각으로 올라가서 뒤편 배들을 향해 구원해 달라고 소리쳤다. 그때 물속에서 한 사람이 불쑥 솟아오르더니 배 위로 올라와 말했다.

태위님! 제가 구해 드리겠습니다.”

고구가 보니,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가 누각으로 올라오더니 한 손으로는 고태위의 두건을 잡고 또 한 손으로는 허리띠를 붙잡으며 소리 질렀다.

가라!”

그는 고태위를 물속으로 집어던져 버렸다. 위세가 대단하던 중군원수가 물속에 첨벙 빠져 버리고 말았다! 그때 작은 배 두 척이 나는 듯이 달려와 고태위를 건져 올렸다. 그 사람은 바로 낭리백조 장순이었으니, 그가 물속에서 사람을 사로잡는 것은 항아리 속에 든 자라를 잡아내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앞쪽 배에 있던 구악은 관군의 진세가 어지러워진 것을 보고 급히 달아날 궁리를 하고 있었는데, 양산박 수군들 가운데서 한 명이 뛰어나와 미처 방어할 새도 없이 한칼에 구악을 베어 물속으로 빠뜨렸다. 그는 바로 금표자 양림이었다. 서경과 매전은 선봉 구악이 죽는 것을 보고 양림에게 달려들었다. 그때 또 양산박 수군들 가운데서 네 명의 두령이 뛰쳐나왔다. 백면낭군 정천수, 병대충 설영, 타호장 이충, 조도귀 조정이었다. 네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자 서경은 당해내지 못하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뜻밖에 물속에 한 사람이 이미 기다리고 있다가, 서경을 사로잡아 버렸다. 설영은 쟁으로 매전의 허벅지를 찔러 쓰러뜨렸다. 원래 여덟 명의 두령이 수군을 돕기 위해 투입되었는데, 그 중 셋은 앞쪽 배에 타고 있었으니 청안호 이운, 금전표자 탕륭, 귀검아 두흥이었다. 절도사들은 설혹 머리가 셋이고 팔이 여섯 개라고 해도 어찌해 볼 수가 없었다.

양산박의 송강과 노준의도 각자 수로와 육로로 진공했다. 송강은 수로를 맡고, 노준의는 육로를 맡았다. 수로에서는 이미 전승을 거두었다. 노준의가 장수들과 군마를 거느리고 산 앞의 대로로 돌격해 가자, 주앙과 왕환이 나와 대적하였다. 주앙이 노준의를 보고 앞으로 나서며 큰소리로 꾸짖었다.

반적아! 나를 알아보겠느냐?”

노준의가 소리쳤다.

무명 소장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알지 못하는구나!”

노준의가 쟁을 들고 말을 박차고 나가 곧장 주앙에게 달려들자, 주앙도 큰 도끼를 휘두르며 말을 몰고 나와 대적하였다. 산 앞의 대로에서 두 장수가 교전한 지 20여 합이 되었지만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때 관군의 후대에서 함성이 일어났다. 양산박의 대규모 군마가 산 앞의 양쪽 숲속에 매복해 있다가 함성을 지르면서 사방에서 돌격해 나온 것이었다.

동남쪽에서는 관승과 진명이, 서북쪽에서는 임충과 호연작이 네 방면에서 일제히 공격하였다. 항원진과 장개는 막을 수가 없어서 길을 뚫고 달아나기에 급급했다. 주앙과 왕환도 더 이상 싸울 마음이 없어져 쟁과 도끼를 끌면서 길을 뚫고 달아나 제주성 안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한편, 수로를 맡고 있던 송강은 고태위를 사로잡았다는 말을 듣고 급히 대종을 시켜 명을 전해 관군들을 죽이지 말라고 하였다. 중군의 대해추선에 있던 문참모와 노래하고 춤추는 기녀들과 시종들도 모두 사로잡혔다. 송강은 징을 울려 군사를 거두어 산채로 돌아갔다.

송강·오용·공손승 등이 충의당에 앉아 있으니, 장순이 물을 뚝뚝 흘리면서 고구를 끌고 왔다. 송강은 고구를 보자마자 황망히 당 아래로 내려가 부축하고, 새 비단옷을 가져오게 하여 갈아입게 하고 당상으로 청하여 정면에 좌정하게 하였다. 송강은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고 절하며 말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고구는 황망히 답례하였다. 송강은 오용과 공손승을 불러 고구에게 절하고 자리에 앉게 하였다. 그리고 연청을 불러 명을 전하게 하였다.

지금부터 사람을 죽이는 자는 군령에 의거하여 무거운 벌을 내릴 것이다!”

명을 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두령들이 사로잡은 관군들을 끌고 왔다. 동위·동맹은 서경을, 이준과 장횡은 왕문덕을, 양웅과 석수는 양온을, 삼완은 이종길을, 정천수 · 설영 · 이충 · 조정은 매전을 끌고 왔다. 양림은 구악의 수급을, 이운 · 탕륭 · 두흥은 섭춘과 왕근의 수급을 바쳤다. 해진·해보는 문참모와 기녀 및 시종들을 끌고 왔다. 관군 가운데서 살아서 달아난 자는 주앙 · 왕환 · 항원진 · 장개 네 사람뿐이었다.

송강은 사로잡혀 온 사람들을 모두 새 옷으로 갈아입히고 충의당으로 불러 올려 잘 대접했다. 사로잡혀 온 군사들은 모두 제주로 돌려보내고, 따로 좋은 배 한 척을 마련하여 기녀들과 시종들이 기거하게 하였다.

송강은 소와 말을 잡아 연회를 크게 열었다. 한편으로는 군사들에게 상을 내리고, 또 한편으로는 풍악을 울리며 대소 두령들을 모아 고태위와 상견하게 하였다. 예를 마치고 송강이 술잔을 들어 올리자, 오용과 공손승이 술병을 들었고 노준의 외 여러 두령들이 시립하였다. 송강이 말했다.

얼굴에 문신을 새긴 하찮은 아전이 어찌 감히 조정에 반역하겠습니까? 어쩌다가 죄가 쌓여 이렇게까지 되었을 뿐입니다. 두 번이나 천자께서 은혜를 베푸셨지만 중간에 일을 왜곡한 간사한 자들이 있어 제대로 받지 못하였습니다. 바라건대 태위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깊은 구덩이에 빠진 저희들을 구원해 하늘의 밝은 해를 바라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리하면 그 은혜를 각골명심(刻骨銘心)하여 죽음으로 보답할 것을 맹세합니다.”

고구가 여러 호걸들을 살펴보니,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대단한 영웅들이었다. 그 가운데서 임충과 양지가 노한 눈으로 노려보면서 금방이라고 발작할 것 같은 기색을 띠고 있는 것을 보고, 십분 겁을 먹고서 말했다.

송공명과 그대들은 마음 놓으시오! 내가 조정으로 돌아가면 반드시 다시 천자께 상주하여, 대사면의 관대한 은혜를 내리고 초안하여 상과 관직을 내리도록 청하겠소. 의사(義士)들이 모두 조정의 봉록을 받는 좋은 신하가 될 수 있을 것이오.”

송강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태위에게 감사의 절을 올렸다. 그날의 연회는 격식을 갖춘 질서정연한 연회였다. 대소 두령들이 돌아가면서 고태위에게 은근히 술잔을 권하였다. 고태위는 크게 취하여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풀어져서 말했다.

내가 어릴 때 씨름을 배워 천하에 적수가 없었다.”

노준의도 취했는데, 고태위가 천하에 적수가 없다.’고 한 말이 아니꼬워 연청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내 아우도 씨름을 잘 하는데, 대악의 씨름대회에 세 번이나 나갔지만 천하에 적수가 없었습니다.”

고구는 벌떡 일어나서 옷을 벗고 연청에게 씨름을 요청하였다. 여러 두령들은 송강이 고구를 조정의 태위로서 공경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송강이 하라는 대로 하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않게 고구가 연청에게 씨름을 청하자 고구의 위세를 꺾어놓으려고 모두 일어나서 권했다.

좋습니다! 좋아요! 어디 씨름 구경 한 번 합시다!”

두령들이 모두 떠들썩하게 충의당 아래로 내려가자, 송강도 역시 취하여 말리지 않았다. 두 사람이 옷을 벗고 뜰에 내려서자, 송강은 푹신한 이불을 깔게 하였다. 두 사람은 이불 위에서 서로 마주보고 자세를 잡았다. 고구가 먼저 덤벼들었는데, 연청이 손을 쓰는가 싶더니 고구를 붙잡아 이불 위에 내동댕이쳤다. 고구는 그대로 뻗어버려 한동안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연청이 사용한 기술은 수명박(守命撲)’이라는 것이었다.

송강과 노준의는 황망히 고구를 부축해 일으키고, 다시 옷을 입혀주고서 웃으며 말했다.

태위께서 취하셔서 씨름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겁니다. 용서하십시오!”

고구는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다시 자리에 앉아 밤늦도록 술을 마시다가 후당으로 들어가 쉬었다.

다음 날 송강은 다시 연회를 열어 고태위의 놀란 가슴을 진정시켜 주었다. 고구가 송강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가려 하자, 송강이 말했다.

저희들이 귀인을 이곳에 머물게 한 것은 결코 다른 마음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만약 속임수가 있다면 천벌을 받을 것입니다.”

고구가 말했다.

의사들께서 고구를 경성으로 돌려보내 주시면, 천자께 아뢰어 의사들을 초안하고 중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다시 번복한다면 천지 사이에 용납되지 못하고 창칼이나 화살에 죽음을 당할 것입니다!”

송강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숙이며 감사했다. 고구가 또 말했다.

의사께서 고구의 말을 믿지 못하시면, 장수들을 이곳에 남겨두겠습니다.”

송강이 말했다.

태위께서는 귀인이시니 어찌 신의를 잃으시겠습니까? 굳이 장수들을 구류할 필요가 없습니다. 말이 준비되는 대로 모두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렇게까지 해주신다니, 후의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럼,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송강은 억지로 만류하여 다시 큰 연회를 열고, 지난 일을 얘기하고 앞날의 일을 논하면서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다가 헤어졌다.

사흘째 되는 날, 고태위가 산을 내려가겠다고 하자 송강도 더 이상 만류하지 않고 송별연을 열었다. 금은과 비단, 천금의 돈을 전별의 예물로 내놓았고, 여러 절도사와 그 아래 사람들에게도 따로 작별 선물을 주었다. 고태위는 거절하지 못하고 모두 받았다. 이별주를 마시는 동안에 송강이 다시 초안에 대해 말을 꺼내자, 고구가 말했다.

의사께서는 세심한 사람 하나를 저에게 딸려 보내시지요. 제가 직접 그를 인도하여 천자를 알현하게 하고, 양산박의 속마음을 상주하게 함으로써 조칙이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송강은 오직 한마음으로 초안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오용과 상의하여 성수서생 소양을 고태위에게 딸려 보내기로 하였다. 오용이 다시 말했다.

철규자 악화도 함께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고태위가 말했다.

의사께서 이렇게 믿어 주시니, 문참모를 신의의 표시로 이곳에 남겨 두도록 하겠습니다.”

송강은 크게 기뻐하였다.

나흘째 되는 날, 송강은 오용 등 20여 명의 두령들과 함께 금사탄까지 내려가 고태위와 절도사들을 전송하였다. 송강은 산채로 돌아가 오로지 초안 소식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고태위 일행은 제주를 향해 가면서 먼저 사람을 보내 알렸다. 제주에서는 주앙·왕환·항원진·장개와 태수 장숙야 등이 성을 나와 영접하였다. 고태위는 성으로 들어가 며칠 동안 머물면서 군마를 수습하고, 절도사들은 각자 병사들을 데리고 돌아가 쉬면서 명령을 기다리라고 하였다. 고태위는 조앙과 아장들, 그리고 소양과 악화를 데리고 동경을 향해 떠났다.

양산박 두령들이 모여 상의하고 있는데, 송강이 말했다.

고구를 돌려보내긴 했는데, 진실을 알 수가 없네.”

오용이 웃으며 말했다.

제가 그 자의 상을 보니, 벌 같은 눈매에 뱀 같은 얼굴로서 은혜를 잊어버리는 인간인 것 같습니다. 그는 많은 군마를 잃고 조정의 많은 군량을 허비하고서 경성으로 돌아갔으니, 필시 병을 핑계대고 집에서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천자에게는 두루뭉술하게 아뢰고 장병들을 잠시 쉬게 하고, 소양과 악화는 자기 부중에 연금해 둘 겁니다. 초안을 기다리는 것은 헛되이 피로하기만 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오? 초안은 그렇다 치고, 두 사람만 잃게 생겼소.”

형님께서는 다시 약삭빠른 사람을 둘 뽑아서, 금은보화를 가지고 경성으로 가서 소식을 정탐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여기저기 뇌물을 써서 우리의 뜻을 천자께 알릴 수 있게 되면, 고태위도 더 이상 숨길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게 상책입니다.”

연청이 벌떡 일어나 말했다.

지난번에 동경을 소란스럽게 했을 때 제가 이사사의 집에 들어가 일을 꾀하려 했었는데, 생각지도 않게 한바탕 소란을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이사사도 이미 어느 정도 눈치를 챘을 것입니다. 이사사는 천자의 총애를 받는 사람이라, 관가의 의심을 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녀는 필시 천자에게 폐하께서 이곳에 몰래 드나드시는 것을 양산박에서도 알고 일부러 놀라게 하려고 그런 짓을 했을 것입니다.’라고 아뢰었을 겁니다. 이번에 제가 금은보화를 가지고 가서, 이사사로 하여금 베겟머리 송사를 벌이게 하는 것이 제일 빠른 길입니다. 제가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하겠습니다.”

송강이 말했다.

아우가 이번에는 가는 것은 너무 위험해!”

대종이 말했다.

저도 함께 가서 돕겠습니다.”

신기군사 주무가 말했다.

형님께서 지난번에 화주를 치실 때 숙태위에게 은혜를 베푼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는 착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라, 그로 하여금 천자에게 상주하게 하면 일이 순조롭게 될 것입니다.”

송강은 문득 구천현녀가 말한 숙을 만나 거듭 기뻐한다.’는 구절이 떠올랐다. 구천현녀가 말한 이 곧 숙태위임을 안 송강은, 문참모를 충의당으로 불러 물었다.

상공께서는 태위 숙원경을 잘 아십니까?”

문환장이 말했다.

그는 저와 동창이며 친구입니다. 지금 천자 곁에서 촌보도 떨어지지 않고 모시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매우 인자하고 관후하여 사람을 대할 때 언제나 온화한 기운으로 대합니다.”

상공께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고태위가 동경으로 돌아가서 필시 초안에 대해서 천자께 상주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숙태위는 지난 날 화주에서 분향할 때 저와 한 번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사람을 보내 그분의 도움을 빌려 우리의 사정을 천자께 아뢰고자 합니다.”

장군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제가 서신을 써서 숙태위에게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송강은 크게 기뻐하면서 지필묵을 가져오게 하였다. 한편으로 좋은 향을 피우고 현녀가 준 천서를 꺼내 허공을 향해 기도한 다음 점괘를 보니 대길의 조짐이었다. 대종과 연청을 전송하는 술자리를 마련하고, 금은보화를 큰 상자 두 개에 담고 문환장이 써준 서신을 몸에 감추게 하였다. 개봉부의 관인이 찍힌 공문을 가지고 두 사람은 공인으로 변장하여, 산채를 내려가 금사탄을 건너 동경을 향하여 떠났다.

대종은 손에 우산을 들고 등에는 상자를 짊어졌고, 연청은 손에 곤봉을 들고 등에 상자를 짊어졌다. 도중에 배고프면 밥을 먹고 목마르면 물을 마시면서, 밤에는 쉬고 새벽에 일어나 열심히 걸었다. 며칠 만에 동경에 도착한 두 사람은 만수문으로 갔다. 성문을 지키는 군사들이 가로막자, 연청이 상자를 내려놓고 시골 사투리로 말했다.

뭣 땜시 날 막는 거여?”

군사가 말했다.

전수부에서 명을 내렸다. 양산박의 잡놈들이 성안으로 들어올지 모르므로, 각 성문에서는 외지에서 오는 사람들을 철저히 검문하라고 하였다.”

연청이 웃으며 말했다.

당신네도 공인인데, 같은 공인끼리 뭔 검문이래? 우리 둘은 개봉부에 늘 볼일이 있어 이 문만 수만 번 출입했는데, 뭔 검문을 또 한다고 그러셔? 그러다가 진짜 양산박 놈들이 오면 눈 벌겋게 뜨고서 그냥 지나가게 두려고?”

연청은 품속에서 가짜 공문을 꺼내 군사의 얼굴 앞에 흔들면서 말했다.

이거 보슈! 이게 개봉부 공문 아니오?”

감문관이 그 말을 듣고 소리쳤다.

개봉부 공문이 있다는데 왜 붙잡고 있냐? 빨리 들여보내라!”

연청은 공문을 접어 다시 품속에 넣고 상자를 짊어지고 성안으로 들어갔다. 대종도 웃으며 따라 들어갔다. 두 사람은 개봉부 근처에서 객점을 찾아 들어가 쉬었다.

다음 날, 연청이 베적삼으로 갈아입고 허리띠를 매고 두건을 삐딱하게 쓰니, 제법 한량 같았다. 상자에서 금은보화 한 꾸러미를 꺼내고는 대종에게 말했다.

형님! 저는 오늘 이사사 집에 가서 일을 꾸며 보겠습니다. 혹시 일이 잘못되면, 형님은 빨리 산채로 돌아가십시오.”

연청은 곧장 이사사의 집으로 갔다. 문 앞에 이르러보니, 휘어지고 조각된 난간과 푸른 창에 붉은 창틀은 예전과 같았는데, 전보다 더 멋있게 수리되어 있었다. 연청이 대나무 발을 걷고 안으로 들어가니, 색다른 향기가 진하게 풍겨왔다. 객실에 들어가서 둘러보니, 사방에 유명한 사람들의 서화가 걸려 있고, 계단 밑에는 2~30개의 화분이 놓여 있는데 푸른 소나무와 괴석이 심어져 있었다. 의자는 모두 꽃무늬를 새긴 향나무로 만들어져 있고, 침상에는 비단 이불이 펼쳐져 있었다.

연청이 가볍게 헛기침을 하자 하녀가 나와서 연청을 보더니 안으로 들어가 알렸다. 이사사의 어미인 이마마가 나와서 연청을 보더니 깜짝 놀라며 말했다.

네가 어찌 또 왔느냐?”

연청이 말했다.

낭자 좀 나오라고 하십시오. 제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지난번에 우리 집을 연루시켜 방이 무너졌다. 할 말이 있으면 해 봐라.”

낭자께서 나오시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사사가 창 뒤에서 듣고 있다가 나타났다. 연청이 이사사를 보니, 여전히 아름다웠다. 얼굴은 새벽이슬을 머금은 해당화 같고, 허리는 봄바람에 하늘거리는 수양버들 같았다. 낙원에 사는 신선과 같고 달나라 궁전에 사는 선녀보다 아름다운 것 같았다. 이사사가 치맛자락을 끌며 살포시 걸음을 옮겨 객실로 들어서자, 연청은 벌떡 일어났다. 금은보화가 든 꾸러미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먼저 이마마에게 네 번 절을 한 다음 이사사에게 두 번 절했다.

이사사가 겸양하며 말했다.

절하지 마세요! 제가 나이가 어리니 절을 받을 수 없습니다.”

연청이 절을 하고 일어나 말했다.

지난번에 놀라서 저희들은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사사가 말했다.

속이지 마세요. 손님이 처음에는 이름이 장한이고 산동의 장사꾼이라고 했는데, 떠날 때 한바탕 소란을 피웠지요. 제가 폐하께 잘 둘러대지 않았더라면 온 집안이 화를 만났을 겁니다. 그리고 그때 한 분이 남겨 놓은 시에 줄지어 나는 기러기 행렬 쳐다보며 사면 소식 기다릴 뿐이라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제가 그때 의문이 들어 막 여쭤 보려고 했었는데, 생각지도 않게 천자께서 오시고 또 한바탕 소동이 나서 여쭤 보지 못했습니다. 오늘 마침 이렇게 오셨으니, 제 심중의 의문을 풀어 주세요. 조금도 숨기지 말고 사실대로 말씀해 주세요. 만약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으면, 저도 결코 그냥 있지 않을 겁니다!”

연청이 말했다.

제가 사실대로 속내를 말씀드릴 테니, 매화처럼 아름다우신 낭자께서는 놀라지 마십시오. 지난번에 왔던 사람 가운데 피부가 검고 키가 작으며 윗자리에 앉았던 사람이 호보의 송강입니다. 그리고 둘째 자리에 앉았던 얼굴이 희고 준수하며 세 갈래 수염이 난 사람은 시세종의 적파자손인 소선풍 시진입니다. 공인 차림으로 앞에 서 있던 사람은 신행태보 대종이고, 문 앞에서 양태위를 두들겨 팬 사람은 흑선풍 이규입니다. 저는 북경 대명부 사람으로, 사람들이 모두 저를 낭자 연청이라 부릅니다. 당초에 우리 형님이 동경에 와서 낭자를 만나보고 싶어 해서, 제가 장한이라고 속이고 이 댁에 들어와 일을 꾸민 겁니다. 우리 형님이 낭자의 존안을 뵙고자 한 것은, 웃음을 사서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낭자께서 천자를 만나고 있음을 오래 전부터 들었기 때문에, 직접 천자를 뵙고 속마음을 호소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하늘을 대신해 도를 행하며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마음을 천자께 아뢰어 초안을 받게 된다면, 수많은 생명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은혜를 입게 된다면, 낭자께서는 양산박 수만 인의 은인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간신들이 천자께 아첨하여 권세를 휘두르면서 어진 사람의 길을 가로막아 아랫사람의 뜻이 천자께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가닥 길을 찾으려 하다가, 생각지도 않게 낭자를 놀라게 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 형님이 죄송한 마음으로 사소한 예물을 보냈으니, 웃으며 받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연청이 꾸러미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펼치니, 모두 금은보화와 값진 그릇들이었다. 이마마는 재물을 탐하는 사람이라, 기뻐하면서 황망히 하녀를 불러 재물을 수습하게 하였다. 그리고 연청을 안쪽의 작은 방으로 안내하여 좋은 음식과 차를 내어 은근히 접대하였다.

원래 이사사의 집은 황제가 불시에 찾아오는 곳이기 때문에 왕손이나 공자, 부호의 자제라 할지라도 감히 차 한 잔 얻어 마실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술과 안주까지 잘 차려놓고 이사사가 직접 대접하였다. 연청이 말했다.

저는 죽어 마땅한 자인데, 어찌 감히 매화처럼 아리따우신 낭자와 마주보고 앉을 수 있겠습니까?”

이사사가 말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양산박 의사(義士)들의 큰 이름은 오래 전부터 들었습니다. 단지 중간에 이어줄 좋은 사람이 없어서 그처럼 물가에 숨어 계신 것 아닙니까?”

지난번에 진태위가 초안하러 왔을 때에는, 조서에 우리를 위무하는 말을 한 마디도 없고 어주도 시골 막걸리로 바꿔치기 해놓았습니다. 초안한다는 조서가 두 번째 내려왔을 때에는, 중요한 구절을 고의로 잘못 읽었습니다. ‘송강을 제외하고, 노준의 등 대소 인원들의 죄악을 사면한다.’고 읽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또 귀순하지 못했습니다.

동추밀이 군사를 이끌고 왔을 때, 우리에게 두 번 패하고 갑옷 한 조각도 제대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고태위가 천하의 백성을 노역시켜 배를 만들어 쳐들어왔지만, 세 번 패전하고 인마의 태반을 잃었습니다. 고태위는 사로잡혀 산으로 끌려 왔는데, 우리 형님이 죽이지 않고 잘 대접하여 경성으로 돌려보내 주었습니다. 생포된 관군들도 모두 놓아주었습니다.

고태위는 양산박에 있을 때 맹세하기를, 조정으로 돌아가면 천자께 상주하여 초안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양산박의 두 사람을 데리고 왔지요. 한 사람은 수재인 소양이고, 또 한 사람은 노래 잘하는 악화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을 자기 집안에 가두어 두고서 바깥에 나가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많은 장병들을 잃었기 때문에 천자를 속이고 있는 것이지요.”

저들이 많은 전비와 군량을 허비하고 장병들을 잃었으니, 어찌 감히 천자께 사실대로 아뢸 수 있겠어요? 이제 제가 모두 알았으니, 우선 술이나 몇 잔 하면서 따로 상의하도록 해요.”

저는 천성이 본래 술을 마시지 못합니다.”

풍상(風霜)을 겪으면서 멀리서 오셨는데, 이제 몇 잔 술로 회포나 푸시지요.”

연청은 거절하기 어려워 한 잔, 두 잔 마시며 이사사를 상대해 주었다. 원래 이사사는 세상 풍진을 다 겪은 기녀이며, 정이 물처럼 흐르는 사람이었다. 연청이 인물도 좋고 말도 잘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끌렸다. 술을 마시는 동안에 은근히 유혹하는 말을 비치다가, 몇 잔 마신 후에는 한두 마디 도발을 하기도 했다. 연청은 본래 영리한 사람인데, 어찌 모르겠는가? 하지만 호걸로서 가슴 속에 품은 뜻이 있고, 형님의 큰일을 그르칠 수 없었기 때문에 유혹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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