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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1922~2004)

가나 마을에서

가면(假面)

가을 저녁의 시

갈대

갈대 섰는 풍경(風景)

강설(降雪)

강우

거리에 비 내리듯

거울

겟세마네에서

겨울꽃

경(瓊)이에게

계단

구름

구름과 장미

구르센카 언니에게

귀촉도(歸蜀途) 노래

그리움이 언제 어떻게 나에게로 왔던가

기(旗) 1

기(旗) 2

김종삼(金宗三)

꿈과 벼룩을 위한 듀에트

꽃밭에 든 거북

꽃을 위한 서시

꽃의 소묘

나르시스의 노래

나목(裸木)과 시(詩)

나비

나의 하나님

나타샤에게

낙일(落日)

내가 만난 이중섭

너무 무거우니까

너와 나

네가 가던 그 날은

네 모발

노괴녀

노새를 타고

누란(樓蘭)

눈물

능금

달개비꽃

두 개의 꽃잎

드미트리에게

딸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소냐에게

또 옴스크에서

또 윤회

라스코리니코프에게

리자 할머니

릴케의 장(章)

막달라 마리아

메르헨, 혹은 하이마트

면장

명일동 천사의 시

모른다고 한다

무구(無垢)한 그들의 죽음과 나의 고독(孤獨)

물망초

바다 사냥

바람

바위

밤의 시(詩)

봄 바다

봄이 와서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부재(不在)

분수(噴水)

비가(悲歌)

사모곡

산보(散步)길

산장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서풍부(西風賦)

소냐에게

소녀 네루리

소피아에게

수련별곡(水蓮別曲)

순명(順命)

숲에서

스비드리가이로프에게

시(詩)

아료샤에게

아무르 강 저쪽

아침에

앵오리

어둠에게 들려준 이야기

언덕에서

에반친 장군 영전에

여명

여자(女子)

역사

엽편 2제(葉篇 二題)

옴스크

와르와라

왕소군(王昭君)의 달

우박

유년시(幼年時)

윤회

의자를 위한 바리에떼

이반에게

이중섭(李仲燮)

인동(忍冬)잎

자리

잠언 둘

장공만리(長空萬里)

장미 그 순수한 모순

저녁

젓갈

제브시킨에게

조시마 장로 보시오

존경하는 스타브로긴 스승님께

죽은 네루리를 위하여

죽음

쥐오줌풀

차례

처서(處暑) 지나고

처용

처용단장(處容斷章)

처용삼장(處容三章)

천리향(千里香)

천사

청마의 헬맷

치혼

칸나

타령조(打令調)

통영읍(統營邑)

품을 줄이게

표트르 어르신께

하늘

하늘 수박

허리가 긴

혁명

흔적

H 베르호벤스키에게

k, 스승님께

1880년 페테르부르크

 

 

 

가나 마을에서

김춘수

 

노새는 죽어서 어디로 갔나

하늘은 너무 밝고 너무 가까이에 있다.

노고지리도

저녁에는 별들도 너무 가까이에 있다.

허파와 간에 작은 물방울을 달고

노새는 죽어서 어디로 갔나.

 

 

 

가면(假面)

김춘수

 

봄과 후박나무가 있는

사잇길을 문득 들어서면

지워버리고 지워버린

어둠,

그대 뒤통수가 보인다

어젯밤 꿈에 본

지리산 후박나무의

지워버리고 지워버린

어둠,

그대 뒤통수는 소리가 없다

옛날의 청동(靑銅) 귀고리 하나

사랑하라 사랑하라고 그대를 대신하여

오늘도 낮은 소리 내이며

바람에 가고 있을 뿐

 

 

 

가을 저녁의 시

김춘수

 

누가 죽어가나 보다

차마 다 감을 수 없는 눈

 

반만 뜬 채

이 저녁

누가 죽어 가는가 보다

살을 저미는 이 세상 외롬 속에서

물같이 흘러간 그 나날 속에서

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애터지게 부르면서 살아온

그 누가 죽어 가는가 보다

풀과 나무 그리고 산과 언덕

온 누리 위에 스며 번진

가을의 저 슬픈 눈을 보아라

정녕코 오늘 저녁을

비길 수 없이 정한 목숨이 하나

어디로 물같이 흘러가 버리는가 보다

 

 

 

갈대

김춘수

                 

1

너는 슬픔의 따님인가 부다.

너의 두 눈은 눈물에 어리어 너의 시야(視野)는 흐리고 어둡다.

너는 맹목(盲目)이다. 면(免)할 수 없는 이 영겁(永劫)의 박모(薄暮)를 전후좌우(前後左右)로 몸을 흔들어 천치(天痴)처럼 울고 섰는 너.

고개 다수굿이 오직 느낄 수 있는 것, 저 가슴에 파고드는 바람과 바다의 흐느낌이 있을 뿐

느낀다는 것. 그것은 또 하나 다른 눈.

눈물겨운 일이다.

 

2

어둡고 답답한 혼돈(混沌)을 열고 네가 탄생(誕生)하던 처음인 그날 우러러 한 눈은 하늘의 무한(無限)을 느끼고 굽어 한 눈은 끝없는 대지(大地)의 풍요(豊饒)를 보았다.

푸른 하늘의 무한(無限).

헤아릴 수 없는 대지(大地)의 풍요(豊饒).

 

그때부터였다. 하늘과 땅의 영원(永遠)히 잇닿을 수 없는 상극(相剋)의 그 들판에서 조그만 바람에도 전후좌우(前後左右)로 흔들리는 운명(運命)을 너는 지녔다.

 

황홀(恍惚)히 즐거운 창공(蒼空)에의 비상(飛翔).

끝없는 낭비(浪費)의 대지(大地)에의 못 박힘.

그러한 위치(位置)에서 면(免)할 수 없는 너는 하나의 자세(姿勢)를 가졌다.

오! 자세(姿勢)―기도(祈禱).

 

우리에게 영원(永遠)한 것은 오직 이것뿐이다.

 

 

 

갈대 섰는 풍경(風景)

김춘수

 

이 한밤에

푸른 달빛을 이고

어찌하여 저 들판이

저리도 울고 있는가

 

낮동안 그렇게도 쏘대던 바람이

어찌하여

저 들판에 와서는

또 저렇게도 슬피 우는가

 

알 수 없는 일이다

바다보다 고요하던 저 들판이

어찌하여 이 한밤에

서러운 짐승처럼 울고 있는가

 

 

 

강설(降雪)

김춘수

 

역사는 비껴 서지 않는다.

절대로, 그러나

눈이 저만치 찢어지고 턱이 두툼한

(그 왜 있잖나?)

그는 오지 않는다.

오지 않는 것이 오는 거다.

그는,

기다림이 겨울에도 망개알을 익게 하고

익은 망개알을 땅에 떨어뜨린다.

또 한 번 일러주랴.

역사는 비껴서지 않는다.

절대로, 땅에 떨어진

망개알을 겨울에도 썩게 한다.

썩게 하여 엄마가 아기를 낳듯 그렇게

땅을 우비고 땅을 우비게 한다.

그는 온다고 지금도 오고 있다고,

오지 않는 것이 오고 있는 거라고,

바라보면 멀리 통영

내 생가가 눈을 맞고 있다. 내 눈에

참 오랜만에 보인다.

기왓장 우는 소리.

 

 

 

강우

김춘수

 

조금 전까지 거기 있었는데

어디로 갔나,

밥상은 차려놓고 어디로 갔나,

넙치지지미 맵싸한 냄새가

코를 맵싸하게 하는데

어디로 갔나,

이 사람이 갑자기 왜 말이 없나,

내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온다.

내 목소리만 내 귀에 들린다.

이 사람이 어디 가서 잠시 누웠나,

옆구리 담괴가 다시 도졌나, 아니 아니

이번에는 그게 아닌가 보다.

한 뼘 두 뼘 어둠을 적시며 비가 온다.

혹시나 하고 나는 밖을 기웃거린다.

나는 풀이 죽는다.

빗발은 한 치 앞을 못 보게 한다.

왠지 느닷없이 그렇게 퍼붓는다.

지금은 어쩔 수 없다고,

 

 

 

거리에 비 내리듯

김춘수

 

거리에 비 내리듯

비 개인 다음의

하늘을 보라.

비 개인 다음의

꼬꼬리새 무릎을 보라. 발톱을 보라.

비 개인 다음의

네 입술

네 목젖의 얼룩을 보라.

면경(面鏡)알에 비치는

산과 내

비 개인 다음의 봄 바다는

언제나 어디로 떠나고 있다.

 

 

 

거울

김춘수

 

거울 속에도 바람이 분다.

강풍이다.

나무가 뽑히고 지붕이 날아가고

방축이 무너진다.

거울 속 깊이

바람은 드세게 몰아붙인다.

거울은 왜 뿌리가 뽑히지 않는가,

거울은 왜 말짱한가,

거울은 모든 것을 그대로 다 비춘다 하면서

거울은 이쪽을 빤히 보고 있다.

셰스토프가 말한

그것이 천사의 눈일까.

 

 

 

겟세마네에서

김춘수

 

꿀과 메뚜기만 먹던 스승,

허리에만 짐승 가죽 두르고

요단강(江)을 건너간 스승

라비여,

이제는 나의 때가 옵니다.

내일이면 사람들은 나를 침 뱉고

발로 차고 돌을 던집니다.

사람들은 내 손바닥에 못을 박고

내 옆구리를 창으로 찌릅니다.

라비여,

내일이면 나의 때가 옵니다.

베드로가 닭 울기 전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합니다.

볕에 굽히고 비에 젖어

쇳빛이 된 어깨를 하고

요단강(江)을 건너간 스승

라비여,

 

 

 

겨울꽃

김춘수

 

잎을 따고 가지를 친다.

하늘이 넓어진다.

살을 버리고 뼈를 깎는다.

뼈를 깎아서 뼈를 드러낸다.

바다를 다 적신 피 한 방울,

그것은 언제나 가고 있다.

넓어진 하늘로

드러난 뼛속의 드러난 뼛속으로

그것은 언제나 가고 있다.

 

 

 

경(瓊)이에게

김춘수

 

경이는 울고 있었다.

풀덤불 속으로

노란 꽃송이가 갸우뚱 내다보고 있었다.

 

그것뿐이다.

나는

경이가 누군지를 기억지 못한다.

 

구름이 일다

구름이 절로 사라지듯이

경이는 가 버렸다.

 

바람이 가지 끝에

울며 도는데

나는

경이가 누군지를 기억지 못한다.

 

경이,

너는 울고 있었다

풀덤불 속으로

노란 꽃송이가 갸우뚱 내다보고 있었다.

 

 

 

계단

김춘수

 

거기 중간쯤 어디서

귀뚜라미가 실솔이 되는 것을 보았다

부르르 수염이 떨고 있었다

그때가 물론 가을이다

끄트머리 계단 하나가 하늘에 가 있었다

 

 

 

구름 / 김춘수

 

구름은 딸기밭에 가서 딸기를 몇 개 따먹고 "아직 맛이 덜 들었군!"하는 얼굴을 한다.

구름은 흰 보자기를 펴더니, 양털 같기도 하고 무슨 헝겊쪽 같기도 한 그런 것들을 늘어놓고, 혼자서 히죽이 웃어 보기도 하고 혼자서 깔깔깔 웃어 보기도 하고……

어디로 갈까? 냇물로 내려가서 목욕이나 하고 화장이나 할까 보다. 저 뭐라는 높다란 나무 위에 올라가서 휘파람이나 불까 보다…… 그러나 구름은 딸기를 몇 개 더 따먹고 이런 청명한 날에 미안하지만 할 수 없다는 듯이, "아직 맛이 덜 들었군!"하는 얼굴을 한다.

 

 

 

구름과 장미    

김춘수

 

저마다 사람은 임을 가졌으나

임은 

구름과 장미되어 오는 것

 

눈뜨면

물 위에 구름을 담아 보곤

밤에 뜰 장미와

마주 않아 울었노니

 

참으로 뉘가 보았으랴?

하염없는 날일수록

하늘만 하였지만

임은

구름과 장미 되어 오는 것

 

 

 

구르센카 언니에게

김춘수

 

뼈대 굵은 아저씨가 와서

풀잎처럼 왠지

제물에 시들어갔어요.

내 샅은 너무 벙벙해서

뭐가 뭔지 나는 몰랐어요.

내 몸에 왜 그런 것이 있어야 하나, 하고

나는 내 슬픔을 보고 나서

내가 알고 있는 나는 내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나는 또 했어요.

간밤에는 꿈에 언니를 봤어요.

술 달린 하얀 털모자를 쓰고 썰매 타고

길을 떠나고 있었어요.

어딜 가느냐고 물었더니

그리움만 있고 남자는 없는 거기라고

입술 살짝 깨물며

언니는 말했어요.

 

개꽃 하나 벙긋 하는 날

소냐.

 

 

 

귀촉도(歸蜀途) 노래

김춘수

 

이렇게 많은 꽃을

꽃마다 이를 수는 없지 않은가

 

이야기야 많지만

오늘 갓피올 너에게만

일러두고 가련다

 

환히 트인 날은

먼 촉(蜀)나라의 변두리도

나는 볼 수가 있었다고

 

이야기야 많지만

너에게만

나는 일러두고 가련다

 

 

 

그리움이 언제 어떻게 나에게로 왔던가

김춘수

 

나의 다섯 살은

햇살이 빛나듯이 왔다.

나의 다섯 살은

꽃눈보라처럼 왔다.

꿈에

커다란 파초잎 하나가 기도하듯

나의 온 알몸을 감싸고 또 감싸주었다.

눈 뜨자

거기가 한려수도인 줄도 모르고

발 담그다 담그다 너무 간지러워서

나는 그만 남태평양까지 가버렸다.

이처럼

나의 나이 다섯 살 때

시인 라이나 마리아 릴케가 나에게로 왔다 갔다

 

 

 

기(旗) 1

김춘수

 

1

하늘의 푸른 중립지대(中立地帶)에서, 여기도 아니고 거기도 아닌 일상(日常)에서는 멀고 무한(無限)에서는 가까운 희박(稀薄)한 공기(空氣)의 숨가쁜 그 중립지대(中立地帶)에서, 노스달쟈의 손을 흔드는 손을 흔드는 너,

기(旗)삥대여,

 

2

다시 말하면 오! 깃(旗)대여 너는,

하늘과 바다가 입 맞추는, 영원(永遠)과 순간(瞬間)이 입맞추는 희귀(稀貴)한 공간(空間)의 그 위치(位置)에서 섰는 듯 쓰러진 하나의 입상(立像)!

 

 

 

기(旗) 2

김춘수

 

1

제일 용맹한 전사(戰士)의 손에 잡힌 너는 질타(叱咤)하고 명령(命令)하던 전장(戰場)에서의 너는

우리들 마지막 성(城)이었다.

기(旗)여,

우리들 처음인 출범(出帆)이었다.

돛대 위에서 항구(港口)의 하늘을 노래처럼 흔들던 기(旗)여,

 

펄떡이던 기(旗).

수지운 시늉으로 나부끼던 기(旗).

끝없는 하늘가에 저마다 올려 건 기(旗), 기(旗),

빛나는 천(阡)의 눈동자에 새겨진, 그것이 넘쳐 흐르는 물결이었다.

 

2

기(旗)를 위하여 훈장(勳章)도 없이 용맹하던 사람들도 쓰러져 갔다.

쓰러진 사람들을 불러 보아라.

가슴같이 부풀은 하늘의 저기, 그들 무명(無名)의 전사(戰士)들의 아름다운 이름을 불러 보아라.

 

지금은

저마다 가슴에 인(印) 찍어야 할 때,

아! 천구백이십육년(一九二六年), 노을빛으로 저물어 가는

알프스의 산령(山嶺)에서 외로이 쓰러져 간 릴케의 기(旗)여,

 

 

 

김종삼(金宗三)

김춘수

 

라산스카,

그가 불러본 이름이다.

배꼽이 솔방울을 낳는

몹쓸 병을

그는 한때 앓기도 했다.

사족(蛇足)이나마

한마디 할 말이 없을까 하고

눈에 띄는 대로 나는 얼른

발바닥만 한 낙엽

이라고 했더니

그는 이미 그 오솔길을 저녁 이내처럼 슬쩍

지나갔다고 한다.

친구가 사준 이탈리아제 키또 구두를 신고,

 

 

 

꿈과 벼룩을 위한 듀에트

김춘수

 

1 가을, 밝은 날

 

꿈속은 비어 있다.

껍질 속에 꿈이 있다.

백날을 해가 들지 않고

백날을 달이 뜨지 않았다.

껍질을 벗고 나오면

꿈은 빈자리에 소문만 남는다.

그 서운함

하늘만 한 가슴이 안아준다

저기 저

  

2 아득하구나

 

벼룩아

기억하고 있겠지,

온몸으로 네가 빤

내 피는 뜨뜻했다고,

아득하구나,

죽어서 이젠 풀매미가 된

너,

너는 또 기억하고 있겠지,

겨우내 널 숨겨준

등잔 밑 어둠,

어둠의 그

눈곱만한 온기(溫氣)를,

벼룩아

그게 얼마나

네 콧등을 새금하게 했는데,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꽃밭에 든 거북

김춘수 

 

거북이 한 마리 꽃 그늘에 엎드리고 있었다. 조금씩 조금씩 조심성 있게 모가지를 뻗는다. 사방(四方)을 두리번거린다. 그리곤 머리를 약간(若干) 옆으로 갸웃거린다. 마침내 머리는 어느 한자리에서 가만히 머문다. 우리가 무엇에 귀 기울일 때의 그 자세(姿勢)다. (어디서 무슨 소리가 들려오고 있는 것일까,)

이윽고 그의 모가지는 차츰차츰 위로 움직인다. 그의 모가지가 거의 수직(垂直)이 되었을 때, 그때 나는 이상한 것을 보았다. 있는 대로 뻗은 제 모가지를 뒤틀며 입을 벌리고, 그는 하늘을 향하여 무수히 도래질을 한다. 그동안 그의 전반신(前半身)은 무서은 저력(底力)으로 공중(空中)에 완전(完全)히 떠 있었다. (이것은 그의 울음이 아니었을까,)

다음 순간(瞬間), 그는 모가지를 소롯이 옴츠리고, 땅바닥에 다시 죽은 듯이 엎드렸다

 

 

 

꽃을 위한 서시

김춘수                              

 

나는 시방 위험(危險)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未知)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無名)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塔)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꽃의 소묘

김춘수

 

1

꽃이여 내가 입김으로

대낮에 불을 밝히면

환히 금빛으로 열리는 가장자리

빛깔이며 향기며 화분이며

나비며 나비며 축제의 날은

그러나 먼 추억으로서만 온다

나의 추억 위에는

꽃이여 네가 머금은

이슬의 한 방울이 떨어진다.

 

2

사랑의 불 속에서도

나는 외롭고 슬펐다

사랑도 없이 스스로를 불태우고도

죽지 않는 알몸으로 미소하는 꽃이여

눈부신 순금의 천(阡)의 눈이여

나는 싸늘하게 굳어서 돌이 되는데..

 

3

네 미소의 가장자리를

어떤 사랑스런 꿈도 침범할 수는 없다

금술 은술을 늘이운 머리에 칠보화관을 쓰고

그 아가씨도 신부가 되어 울며 떠났다

꽃이여 너는 아가씨들의 간을 쪼아 먹는다.

 

4

너의 미소는 마침내

갈 수 없는 하늘에 별이 되어 박힌다

멀고 먼 곳에서 너는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나의 추억 위에는 꽃이여

네가 머금은 이슬의 한 방울이 떨어진다

너를 향하여 나는 외로움과 슬픔을 던진다.

 

 

 

나르시스의 노래 - 샅바도르 달리의 그림에

김춘수

 

여기 섰노라.

흐르는 물가 한 송이 水仙되어 나는 섰노라.

 

구름이 가면 구름을 따르고,

나비가 날면 나비와 팔랑이며,

봄 가고 여름 가는 온가지 나의 양자를 물 위에 띄우며 섰으량이면,

 

뉘가 나를 울리기만 하여라.

내가 뉘를 울리기만 하여라.

 

(아름다웠노라

아름다웠노라)고,

 

바람 자고 바람이 다시 일기까지,

해 지고 별빛 다시 널리기까지,

한 오래기 감드는 어둠 속으로 아아라히 흐르는 흘러가는 물소리.....

 

(아름다웠노라

아름다웠노라)고,

 

하늘과 구름이 흘러가거늘,

나비와 새들이 흘러거거늘,

 

한 송이 수선(水仙)이라 섰으량이면,

한 오래기 감드는 어둠 속으로,

아아라히 흐르는 흘러가는 물소리.......

 

 

 

나목(裸木)과 시(詩)

김춘수

 

겨울하늘은 어떤 불가사의의 깊이에로 사라져가고,

있는 듯 없는 듯 무한은

무성하던 잎과 열매를 떨어뜨리고

무화과나무를 관체로 서게 하였는데,

그 예민한 가지 끝에

닿을 듯 닿을 듯 하는 것이

시일까

언어는 말을 잃고

잠자는 순간

무한은 미소하며 오는데

무성하던 잎과 열매는 역사의 사건으로 떨어져 가고,

그 예민한 가지 끝에

명멸하는

시일까.

 

 

 

나비

김춘수

 

나비는 가비야운 것이 美다.

나비가 앉으면 순간에 어떤 우울한 꽃도 환해지고 多彩(다채)로와진다. 變化(변화)를 일으킨다. 나비는 福音(복음)의 天使(천사)다. 일곱 번 그을어도 그을리지 않는 純金(순금)의 날개를 가졌다. 나비는 가장 가비야운 꽃잎보다도 가비야우면서 영원한 沈默(침묵)의 그 空間(공간)을 한가로이 날아간다. 나비는 新鮮(신선)하다.

 

 

 

나의 하느님

김춘수 

   

사랑하는 나의 하느님, 당신은

늙은 비애(悲哀)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詩人)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女子)의 마음 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느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어리디어린

순결(純潔)이다.

삼월(三月)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두빛 바람이다.

 

 

 

나타샤에게

김춘수

 

나타샤,

죄는

피와 살을 소금에 절인

그 어떤 젓갈이다.

7할이 소금이다.

페테르부르크는 보들레르의 시처럼 어디를 가도

나트륨의 냄새가 난다.

나도 한 번

마차 바퀴에 몸을 던져보니 알겠더라.

쾌락이 있다.*

몸을 팔고도 왜 소냐는

천사가 됐는가,

불빛이 그리워 우리는 지금

밤을 기다린다.

 

이승에서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건달

와르코프스키 공작.

 

*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지하 생활자의 수기」에 나오는 말.

 

 

 

낙일(落日)

김춘수

 

둑이 하나 무너지고 있다.

날마다 무너지고 있다.

무너져도 무너져도 다 무너지지 않는다.

나일강변(江邊)이나 한강변(漢江邊)에서

여자(女子)들은 따로따로 떨어져서 울고 있다.

어떤 눈물은

화류(樺榴)나무 아랫도리까지 적시고

어딘가 둑의 무너지는 부분으로 스민다.

 

 

 

내가 만난 이중섭

김춘수

 

광복동에서 만난 이중섭은

머리에 바다를 이고 있었다

동경에서 아내가 온다고

바다보다 짙한 빛깔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눈을 씻고 보아도

길 위에

발자국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 뒤에 나는 또

남포동 어느 찻집에서

이중섭을 보았다.

바다가 잘 보이는 창가에 앉아

진한 어둠이 깔린 바다를

그는 한뼘 한뼘 지우고 있었다

동경에서 아내는 오지 않는다고,

 

 

 

너무 무거우니까

김춘수

 

너무 무거우면 떨어뜨려야지

수다와 수사

수염과 수컷

수사 붙은 모든 것은 다

떨어뜨려야지

군살은 빼고, 지용의 시처럼

딴딴한 참살만 남게 해야지.

머뭇머뭇하다가도 거기서 행을 바꿔

말을 덜고 말을 달래듯

너무 무거우니까

보라,

이별도 슬픔도 다 솎아내고

겨울에

마지막 하나 남은

저 잎새.

 

 

 

너와 나

김춘수

 

맺을 수 없는 너였기에

잊을 수 없었고

 

잊을 수 없는 너였기에

괴로운 건 나였다.

 

그리운 건 너

괴로운 건 나.

 

서로 만나 사귀고 서로 헤어짐이

모든 사람의 일생이려니...

 

 

 

네가 가던 그 날은

김춘수

 

네가 가던 그 날은

나의 가슴이

가녀린 풀잎처럼 설레이었다

 

하늘은 그린 듯이 더욱 푸르고

네가 가던 그 날은

가을이 가지 끝에 울고 있었다

 

구름이 졸고 있는

산마루에

단풍잎 발갛게 타며 있었다

 

네가 가던 그 날은

나의 가슴이

부질없는 눈물에

젖어 있었다.

 

 

 

네 모발

김춘수

 

여름은 가고

네 모발을 생각한다.

가을이 와서 낙엽이 지면

네 모발은 바다를 건너

더욱 깊이 내 잠 속으로 오리라.

바람이 이제

어제의 제 그늘을 떠나고 있다.

분꽃 하나가 바람을 따라 흐르고 있다.

하늘 높이 눈을 뜨고 불리우며

흐르고 있다.

마침내 깊이깊이

이 세상의 분꽃 하나가

하늘에 묻히리라.

 

 

 

노괴녀

김춘수

 

페페좌가 설거지론을 불러주기 전에는

30대 노처녀는 다만

하나의 노처녀에 지나지 않았다

 

페페좌가 설거지론을 불러주었을 때,

노처녀는 나에게로 와서

노괴가 되었다

 

내가 노괴라고 불러준 것처럼

썩은 귤 상자론과 도축론 알맞는

도태남이라고 불러다오

노괴에게로 가서 나는

결혼 못 한(안 한) 도태남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퐁퐁남이 되기 싫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앞빠만 되고 싶다

 

 

 

노새를 타고

김춘수

 

기러기는 울지마,

기러기는 날면서 끼루룩 끼루룩 울지 마,

바람은 죽어서 마을을 하나 넘고 둘 넘어

가지 마, 멀리멀리 가지 마,

왜 이미 옛날에 그런 말을 했을까.

도요새는 울지 마,

달맞이꽃은 여름밤에만 피지 마,

언뜻언뜻 살아나는 풀무의 불꽃,

풀무의 파란 불꽃.

 

 

 

김춘수

 

어느 날, 70년 전의 어느 여름 저녁입니다. 어머니가 장독간에 간장을 뜨러 갑니다. 어머니의 치마 끝을 붙잡고 나도 아장아장 따라갑니다.

어머니가 어떤 동작을 하다가 무심코 고개를 들어 서쪽 하늘을 바라봅니다. 나도 무심코 어머니의 시선을 따라 서쪽 하늘을 쳐다봅니다. 그쪽은 온통 놀로 물들어 있습니다.

놀로 물든 하늘이 어머니의 볼을 적십니다. 어머니의 볼도 놀빛으로 불그스름 물들어갑니다. 나는 또 그런 어머니의 볼을 눈을 뚱그렇게 뜨고 하염없이 들여다봅니다. 그러자 내 눈의 꺼풀을 젖히고 예쁜 간장 종지를 든 어머니가 샤갈의 그림에서처럼 내 눈 안으로 선뜻 들어옵니다. 그 뒤로 어머니는 소식이 묘연합니다.

 

 

 

누란(樓蘭)

김춘수

 

과벽탄(戈壁灘)

고비는 오천리(五千里) 사방(四方)이 돌밭이다. 월씨(月氏)가 망(亡)할 때, 바람 기둥이 어디선가 돌들을 하늘로 날렸다. 돌들은 천년(千年)만에 하늘에서 모래가 되어 내리더니, 산 하나를 만들고 백년(百年)에 한 번씩 그들의 울음을 울었다. 옥문(玉門)을 벗어나면서 멀리멀리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장(玄奬)도 들었으리.

 

명사산(鳴沙山)

그 명사산(鳴沙山) 저쪽에는 십년(十年)에 한 번 비가 오고, 비가 오면 돌밭 여기저기 양파의 하얀 꽃이 핀다. 봄을 모르는 꽃. 삭운(朔雲) 백초련(白草連). 서기(西紀) 기원전(紀元前) 백이십년(百二十年). 호(胡)의 한 부족(部族)이 그 곳에 호(戶) 천 오백 칠십(千五百七十), 구(口) 만 사천백(萬四千百), 승병(勝兵) 이천 구백 이십갑(二千九百二十甲)의 작은 나라 하나를 세웠다. 언제 시들지도 모르는 양파의 하얀 꽃과 같은 나라

누란(樓蘭).

 

 

 

눈물

김춘수

 

남자와 여자의

아랫도리가 젖어있다

밤에 보는 오갈피나무

오갈피나무의 아랫도리가 젖어있다

맨발로 바다를 밟고 간 사람은

새가 되었다고 한다

발바닥만 젖어 있었다고 한다

 

 

 

능금

김춘수

 

1

그는 그리움에 산다.

그리움은 익어서

스스로도 견디기 어려운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그리움은 마침내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져 온다.

떨어져 와서 우리들 손 바닥에

눈부신 축제의

비할 바 없이 그윽한

여운을 새긴다.

 

2

이미 가 버린 그 날과

아직 오지 않은 그 날에 머문

이 아쉬운 자리에는

시시각각의 그의 충실만이

익어간다.

보라,

높고 맑은 곳에서

가을이 그에게

한결같은 애무의 눈짓을 보낸다.

 

3

놓칠 듯 놓칠 듯 숨 가쁘게

그의 꽃다운 미소를 따라가면은

세월도 알 수 없는 거기

푸르게만 고인

깊고 넓은 감정의 바다가 있다.

우리들 두 눈에

그득히 물결치는

시작도 끝도 없는

바다가 있다.

 

 

 

김춘수

1

간밤 섧게 울던 이무기,

오늘은 이승의 제일 고운 비늘 하나

바람 부는 서녘 하늘

가고 있다.

바람 부는 서녘 하늘 바라보면

개밥

순채

물달개비

우는 소리 아직도 들린다.

들린다.

 

 

2

늪을 지키고 섰는

저 수양버들에는

슬픈 이야기가 하나 있다

 

소금쟁이 같은 것, 물장군 같은 것

거머리 같은 것

개밥순채 물달개비 같은 것에도

저마다 하나씩

슬픈 이야기가 있다

 

산도 운다는

푸른 달밤이면

나는

그들의 혼령을 본다

 

갈대가 가늘게 몸을 흔들고

온 늪이 소리 없이 흐느끼는 것을

나는 본다

 

 

 

달개비꽃

김춘수

 

울고 가는 저 기러기는

알리라

하늘 위에 하늘이 있다

울지 않는 저 콩새는 알리라

누가 보냈을까

한밤에 숨어서 앙금앙금

눈뜨는

 

 

 

김춘수

 

돌이여,

그 캄캄한 어둠 속에 나를 잉태(孕胎)한

나의 어머니,

태어나올 나의 눈망울

나의 머리카락은 모두

당신의 오랜 꿈의

비밀(秘密)입니다.

아직은 나의 이름을

부르지 마십시오.

무겁게

겹도록 달이 차서

소리하면 당신의 일어설 그때까지

당신의 가장 눈부신 어둠 속에

나의 이름은

감추어 두십시오.

그 한번도 보지 못한 나를 위하여

어둠 속에 사라진 무수한 나……

돌이여,

꿈꾸는 돌이여,

 

 

 

두 개의 꽃잎

김춘수

 

해 질 무렵은

긴 회랑(廻廊)의 끝 아이들 발자국처럼

봄의 뜨락처럼

소리 없이 술렁이는

죽음 이쪽의 저무는 산허리,

늑골(肋骨)의 초록 비늘,

어제 죽고 내일 죽고

해 질 무렵은

오늘 하루 저무는 꽃잎의

그 아련함.

   *

세브린느,

오후 두 시에서 다섯 시 사이

네 샅은 열린다.

비가 내리고

비는 꽃잎을 적신다.

꽃잎은 시들지 않고 더욱 꽃 핀다.

- 이건 사랑과는 달라요.

세브린느,

네 추억은 너를 보지 못한다.

세브린느 세브린느,

부르는 소리 등 뒤로 흘리며

오후 다섯 시

네 샅은 시들고

사랑을 찾아

너는 비 개인 거리에 선다.

   *

너 보고 싶은 마음

안개 속에 있고 진흙 속에 있다.

희멀건 하늘에 있고

연못 바닥에 모로 누워 있다.

세브린느,

너 꽃잎으로 피었다 지면서

바람 부는 날 코피 쏟고

눈 감으면 또 아침과 만난다.

눈이 눈을 덮고 겨자씨를 덮는

그런 겨울 밤에

나는 죽는 꿈을 꾸었지만

죽음은 없고, 없는 것이 너무 좋아

갈잎에 듣는 이슬방울을

세브린느,

나는 그만 꿈에서 보고 만다.

 

 

 

드미트리에게

김춘수

 

즈메르자코프는

네 속에도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죽였다고

너는 외쳐댔다.

얼마나 후련했나,

그것이 역사다.

소냐와 같은 천사를 누가 낳았나,

구르센카, 그 화냥년은 또 누가 낳았나,

아료샤는 밤을 모른다.

해만 쫓는 삼사월 꽃밭이다.

저만치

얼룩암소가 새끼를 낳는다.

올해 겨울은 그 언저리에만

눈이 온다.

그것이 역사다.

너는 드미트리가 아닌가, 아직도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는

네 나날은 신명나는

배뱅이굿이다. 그리고

즈메르자코프,

그는 이제 네 속에서 죽고 멀지 않아

너는 구원된다.

 

변두리 작은 승원에서

조시마 장로.

 

 

 

딸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소냐에게

김춘수

 

오직 그것만이 방법인가 싶어

나는

대낮에 한길에서

달려오는 마차 바퀴에 몸을 던졌다.

그런데 웬걸

그건 한 청년의

넓적한 등이었다. 아니

보늬가 다 벗겨진

거긴 썰물 나간 허연 갯벌이었다.

어인 미물 하나 깡총 솟구쳐

내 면상에다 찔끔

오줌을 쌌다.

얼마나 놀랐을까,

그러나 그 청년

(라스코리니코프라고 하던가,)

인생의 비참 앞에 무릎을 꿇는다고 했다.

어쩜 좋으랴,

하느님은 왜 나를

꽃병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오늘은 네 어미 잠든 머리맡에서

밤을 꼬빡 새고 싶다.

 

지금은 곤드레만드레가 아닌, 그러나

진액 다 빠진 아비.

 

 

 

또 옴스크에서

김춘수

 

길 모퉁이

어느새

산타 마리아 나무도 없어진

거기,

바람이 코를 벤다. 누군가,

누구의

손목도 덮어줘라,

낙낙한 화장

올겨울에도

네 루바슈카는 따뜻하다고,

 

 

 

또 윤회

김춘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너는 가느다란 실핏줄이고

몽글몽글

태평양 바다 위에 뜬 너는

쪽빛 거품이다.

너는 또 현미경 너머 저만치

지는 해안메꽃이고

해 저무는 서쪽 하늘이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김춘수

 

아침 햇살이

라일락 꽃잎을 흥건히 적시고 있다

한 아이가 나비를 쫓는다

나비는 잡히지 않고

나비를 쫓는 그 아이의 손이

하늘의 저 투명한 깊이를 헤집고 있다

그대의 눈은 나의 거울이다

 

 

 

라스코리니코프에게

김춘수

 

자넨 소냐를 만나

무릎 꿇고 땅에 입맞췄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외돌토리다.

그때

우들우들 몸 떨리고

눈앞이 어둑어둑해지면서

나는 그만 거기 주저앉고 말았다.

내 머릿속에 있을 때는

그처럼이나 당당했던 그것이

즈메르자코프 그 녀석

그 바보 천치에게로 가서 그 모양으로

걸레가 되고 누더기가 되고 끝내는 왜 녀석의

똥창이 됐는가,

견딜 수가 없다.

어디를 바라고 나는 내 풀죽은

돌을 던져야 하나,

 

페테르부르크 우거에서

이반.

 

 

 

리자 할머니

김춘수

 

해거름

마당에 평상을 내놓고

평상에 걸터앉아 리자 할머니가

사모바르에 차 달이는 자기 옆모습을

저만치 곁눈질한다.

비가 오질 않아

티티새 깃이 꺼칠하다.

아무르 강 건너 고리고 족의 마을은

너무나 멀다.

꿈에 본 젊은

델스 우자라.*

 

* 연해주에 사는 고리도 족의 뛰어난 엽사

 

 

 

 

릴케의 장(章)

김춘수

 

세계의 무슨 화염에도 데이지 않는

천사들의 황금의 팔에 이끌리어

자라나는 신들

어떤 신은

입에서 코에서 눈에서

돋쳐 나는 암흑의 밤의 손톱으로

제 살을 핥아서 피를 내지만

살점에서 흐르는 피의 한 방울이

다른 신에 있어서는

다시없는 의미의 향료가 되는 것을

라이너 마리아 릴케

당신의 눈은 보고 있다.

천사들의 겨울에도

얼지 않는 손으로

나무에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을

패배와 살륙의 전장에서

한 개의 심장이 살아나는 것을

라이너 마리아 릴케

당신의 눈은 보고 있다.

하늘에서 죽음의 재는 떨어지는데

이제사 열리는 채롱의 문으로

믿음이 없는 새는

어떤 몸짓의 나래를 치며 날아야 하는가를

 

 

 

막달라 마리아

김춘수

 

너의 눈이 기적(奇蹟)을 보았다.

그날 새삼 애기처럼 잠이 들어, 꿈속에선 웃으며 웃으며, 무엇인지 모르는 팔을 벌렸다. 손가락 끝이 가늘게 떨리었다.

눈이 뜨니 귀도 뜨이다.

새 소리 바람 소리……아련히 아련히도 모습인 양 하늘은 멀어지고,

물결은 굽이굽이 바다처럼 스며드는 것은……

진정코 너의 귀가임을 들었도다.

 

임이 부활(復活)하시는 날, 못 박힌 팔목에사 눈물은 구슬지어 빛났으되,

너도 가슴에 못을 박고, 이어 목숨이 다하는 오롯한 순간 마낭 울며 울며 울리며 예수를 지니도다

 

 

 

메르헨, 혹은 하이마트

김춘수

 

하룻밤에 꿈을 세 번이나 꾼다.

첫 번째 꿈에 나는 소년이 된다.

탱자나무 울이 있고

샛노란 죽도화가 핀 길을 간다.

저만치 한 소녀가 간다.

가도가도 우리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두 번째 꿈에서는

시집와서 일 년이 된 아내가

첫 아이를 낳고

하늘하늘 어디로 날아갈 듯

얼굴이 새로 피어난다.

세 번째 꿈에 나는 또 길을 간다.

탱자나무 울이 있고 샛노란 죽도화가 피어 있는

그 길이다. 그때처럼

저만치 가고 있는 한 소녀가

갑자기 얼굴을 돌린다. 육십 년 전

아내의 얼굴과 조용히 포개진다.

 

 

 

면장

김춘수

 

옥양목 두루마기에 단장이 썩 어울리는

한 면장은

외가 쪽으로 가까운 형님뻘 되는

육순 형님 면장은

정자나무 그늘에서

땅따먹기에 정신이 없는 조무래기들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며

니 커서 머 할끼고 물으시곤 하시는 게

취미시다

종수 생수 홍기... 우리 일곱 명 중

여섯 명이나 대통령이 되겠다는 것인데

이러다가는 나라에 대통령이

너무 많을 것만 같아 나는 모기소리

만한 목소리로 간신히 면장을 지원했다

 

 

 

명일동 천사의 시

김춘수

 

앵초꽃 핀 봄날 아침 홀연

어디론가 가버렸다.

비쭈기나무가 그늘을 치는

돌벤치 위

그가 놓고 간 두 쪽의 희디흰 날개를 본다.

가고나서

더욱 가까이 다가 온다.

길을 가면 저만치

그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들리고

날개도 없이 얼굴 지운.

 

 

 

모른다고 한다 

김춘수

 

산은 모른다고 한다

물은

모른다 모른다고 한다

 

속잎 파릇파릇 돋아나는 날

모른다고 한다

내가 기다리고 있는 것을

내가 이처럼 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산은 모른다고 한다

물은

모른다 모른다고 한다

 

 

 

김춘수

 

술에 마약(麻藥)을 풀어

어둠으로 흘리지 마라.

아픔을 눈 감기지 말고

피를 잠 재우지 마라.

살을 찢고 뼈를 부수어

너희가 낸 길을 너희가 가라.

맨발로 가라.

숨 끊이는 내 숨소리

너희가 들었으니

엘리엘리나마사막다니

나마사막다니

시편(詩篇)의 남은 귀절은 너희가 잇고,

술에 마약(麻藥)을 풀어

아픔을 어둠으로 흘리지 마라.

살을 찢고 뼈를 부수어

너희가 낸 길을 너희가 가라.

맨발로 가라. 찔리며 가라.

 

 

 

무구(無垢)한 그들의 죽음과 나의 고독(孤獨)

김춘수

 

1

스스로도 모르는

어떤 그날에

죄(罪)는 지었습니까?

 

우러러도 우러러도 보이지 않는

치솟은 그 절정(絶頂)에서

누가 그들을 던졌습니까?

 

그때부텁니다

무수한 아픔들이

커다란 하나의 아픔이 되어

번져간 것은―

 

2

어찌 아픔은

견딜 수 있습니까?

 

어찌 치욕(恥辱)은

견딜 수 있습니까?

 

죄(罪)지은 기억(記憶)없는 무구(無垢)한 손들이

스스로의 손바닥에 하나의

장엄(莊嚴)한 우주(宇宙)를 세웠습니다

 

3

그러나

꽃들은 괴로웠습니다

 

그 우주(宇宙)의 질서(秩序) 속에서

모든 것은 동결(凍結)되어

죽어갔습니다

 

4

죽어가는 그들의 눈이

나를 우러러보았을 때는

 

내가 그들에게

나의 옷과 밥과 잠자리를

바친 뒤였습니다

 

내가 그들을 위하여

나의 땀과 눈물과 피를

흘린 뒤였습니다

 

5

그러나

그들의 몸짓과 그들의 음성과

그들의 모든 무구(無垢)의 거짓이 떠난 다음의

나의 외로움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수정(水晶)알처럼 투명(透明)한

순수(純粹)해진 나에게의 공포(恐怖)를

나는 알고 있습니다

 

내가 죽어가는 그들을 위하여

무수한 우주(宇宙) 곁에

또 하나의 우주(宇宙)를 세우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물망초

김춘수

 

부르면 대답할 듯한

손을 흔들면 내려올 듯도 한

그러면서도 아득히 먼

그대의 모습

하늘의 별일까요.

 

꽃피고 바람 잔 우리들의 그 날

날 잊지 마셔요.

그 음성 오늘 따라

더욱 가까이에 들리네

들리네

 

 

 

바다 사냥

김춘수

 

너무 낮게 뜬 놀이

자꾸 발바닥에 깔린다.

놀을 밟고 가는 듯한 경인가도(京仁街道)

키 큰 양버들.

소사(素砂) 가까운 중국반점(中國飯店)에서

옛 동창(同窓)을 만난다.

캡을 쓴 형사(刑事)가 둘이

저만치 도보(徒步)로 가고 있고

그들을 보내면서

그새 짙은 귤빛이 된

바다,

바라보면 옛 동창(同窓)은

한 마리 가을너새가 되어

울고 있고,

 

 

 

바람

김춘수

 

자목련이 흔들린다

바람이 왔나 보다

바람이 왔기에

자목련이 흔들리는가 보다

작년 이맘때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자목련까지는 길어 너무 멀어

이제 막 왔나 보다

저렇게 자목련을 흔드는 것이

바람이구나

왠지 자목련은

조금 울상이 된다.

비죽비죽 입술을 비죽인다.

 

 

 

바위

김춘수

 

바위는 몹시 심심하였다. 어느 날, (그것은 우연(偶然)이었을까,) 바위는 제 손으로 제 몸에 가느다란 금을 한 가닥 그어 보았다. 오, 얼마나 몸저리는 일순(一瞬)이었을까, 바위는 열심(熱心)히 제 몸에 무늬를 수(繡)놓게 되었던 것이다. 점점점 번져 가는 희열(喜悅)의 물살 위에 바위는 둥둥 떴다. 마침내 바위는 제 몸에 무늬를 수(繡)놓고 있는 것이 제 자신(自身)인 것을 까마득히 잊어 버렸다.

바위는 모르고 있지만, 그때부터다. 내가 그의 얼굴에 고요한 미소(微笑)를 보게 된 것은……[바위야 왜 너는 움직이지 않니,] 이렇게 물어보아도 이제 바위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밤의 시(詩)

김춘수

 

왜 저것들은 소리가 없는가

집이며 나무며 산(山)이며 바다며

왜 저것들은 죄(罪)지은 듯 소리가 없는가

바람이 죽고 물소리가 가고 별이 못 박힌 뒤에는 나뿐이다

어디를 봐도 광대무변한 이 천지간에 숨 쉬는 것은 나 혼자뿐이다.

나는 목메인 듯 누를 불러볼 수도 없다

부르면 눈물이 작은 호수(湖水)만큼 쏟아질 것만 같다

- 이 시간(時間) 집과 나무와 산(山)과 바다와 나는 왜 이렇게도 약(弱)하고 가난한가

밤이여 나보다도 외로운 눈을 가진 밤이여

 

 

 

김춘수

 

A

강아지 귀밑털에 나비가 앉아 본다

실낱같은 바람이 활활 감아들고

히히이 한 울음 모가지를 뽑아 보니

구름은 내려와

산허리에 늘어졌다

 

타는 아지랑이 그 바닥은

새 푸른 잔디밭이 아리아리

꿈속같이 멀어라

 

B

복사꽃 그늘에 서면

내 귀는 새보얀 등불을 켠다

 

풀밭에 배암이 눈 뜨는 소리

논두렁에 민들레가 숨 쉬는 소리

 

복사꽃 새보얀 등불을 켠다

 

C

어디서 목련(木蓮) 봉오리 터지는 소리

왼종일 그 소리

뜰에 그득하다

아무것도 없어도 뜰은

소리 하나로

고운 봄을 맞이한다

 

 

 

봄 바다

김춘수

 

毛髮(모발)을 날리며 오랜만에

바다를 바라고 섰다.

눈보라도 걷히고

저 멀리 물거품 속에서

제일 아름다운 人間(인간)의 女子(여자)가

誕生(탄생)하는 것을 본다.

 

 

 

봄이 와서

김춘수

 

1

연필향 허리까지

땅거미가 와 있다.

바람이 어디론가 떠나고 있다.

골목 위 하늘 한켠

낮달 하나 사그라지고 있다.

 

 

2

꼬부라진 샛길을 빠져나와

또 하나 꼬부라진 샛길을 따라가면

뜻밖에도

타작마당만한 공지가 나오고

넝마더미가 널려 있고

그런 곳에

장다리꽃 너댓 송이 피어 있더라.

늙은 산이 하나

낮달을 안고 누워 있고

눈썹이 없는 아이가 눈썹이 없는 아이를

울리고 있더라.

언제까지나 울리고 있더라.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김춘수

 

다뉴브강에 살얼음이 지는 동구(東歐)의 첫겨울

가로수 잎이 하나둘 떨어져 뒹구는 황혼 무렵

느닷없이 날아온 수발의 쏘련제(製) 탄환은

땅바닥에

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뜨렸다.

순간,

바숴진 네 두부(頭部)는 소스라쳐 삼십보(三十步) 상공으로 튀었다.

두부(頭部)를 잃은 목통에서는 피가

네 낯익은 거리의 포도(鋪道)를 적시며 흘렀다.

-너는 열세 살이라고 그랬다.

네 죽음에서는 한 송이 꽃도

흰 깃의 한 마리 비둘기도 날지 않았다.

네 죽음을 보듬고 부다페스트의 밤은

목놓아 울 수도 없었다.

죽어서 한결 가비여운 네 영혼은

감시의 일만(一萬)의 눈초리도 미칠 수 없는

다뉴브강 푸른 물결 위에 와서

오히려 죽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소리 높이 울었다.

다뉴브강은 맑고 잔잔한 흐름일까,

요한슈트라우스의 그대로의 선율일까,

음악에도 없고 세계지도에도 이름이 없는

한강의 모래 사장(沙場)의 말없는 모래알을 움켜쥐고

왜 열세 살 난 한국의 소녀는 영문도 모르고 죽어 갔을까,

죽어 갔을까, 악마는 등 뒤에서 웃고 있었는데

한국의 열세 살은 잡히는 것 하나도 없는

두 손을 허공에 저으며 죽어 갔을까,

부다페스트의 소녀여, 네가 한 행동은

네 혼자 한 것 같지가 않다.

한강에서의 소녀의 죽음도

동포의 가슴에는 짙은 빛깔의 아픔으로 젖어든다.

기억의 분(憤)한 강물은 오늘도 내일도

동포의 눈시울에 흐를 것인가,

흐를 것인가, 영웅들은 쓰러지고 두 달의 항쟁 끝에

너를 겨눈 같은 총뿌리 앞에

네 아저씨와 네 오빠가 무릎을 꾼 지금,

인류의 양심에서 흐를 것인가,

마음 약한 베드로가 닭 울기 전 세 번이나 부인한 지금,

십자가에 못 박힌 한 사람은

불면의 밤, 왜 모든 기억을 나에게 강요하는가.

나는 스물두 살이었다.

대학생이었다.

일본 동경 세다기야서 감방에 불령 선인으로 수감되어 있었다.

어느 날, 내 목구멍에서

창자를 비비 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머니, 난 살고 싶어요.>

난생처음 들어보는 그 소리는 까마득한 어디서,

내 것이 아니면서, 내 것이면서……

나는 콩크리트 바닥에 머리를 부딪고

북받쳐 오르는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누가 나를 우롱하였을까.

나의 치욕은 살고 싶다는 데에서부터 시작되었을까.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내던진 죽음은

죽음에 떠는 동포의 치욕에서 역으로 싹튼 것일까.

싹은 비정의 수목들에서보다 치욕의 푸른 멍으로부터

자유를 찾는 소녀의 뜨거운 피 속에서 움튼다.

싹은 또한 인간의 비굴 속에 생생한 이마아쥬로 움트며 위협하고

한밤에 불면(不眠)의 담담한 꽃을 피운다.

인간은 쓰러지고 또 일어설 것이다.

그리고 또 쓰러질 것이다. 그칠 날이 없을 것이다.

악마의 총탄에 딸을 잃은 부다페스트의 양친과 함께

인간은 존재의 깊이에서 전율하며 통곡할 것이다.

다뉴브강에 살얼음이 지는 동구의 첫겨울

가로수 잎이 하나 둘 떨어져 딩구는 황혼 무렵

느닷없이 날아온 수 발의 소련제 탄환은

땅 바닥에 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뜨렸다.

부다페스트의 소녀여.

 

 

 

부재(不在)

김춘수

 

어쩌다 바람이라도 와 흔들면

울타리는

슬픈 소리로 울었다.

 

맨드라미 나팔꽃 봉숭아 같은 것

철마다 피곤

소리없이 져 버렸다.

 

차운 한겨울에도

외롭게 햇살은

청석(靑石) 섬돌 위에서

낮잠을 졸다 갔다.

 

할 일 없이 세월(歲月)은 흘러만 가고

꿈결같이 사람들은

살다 죽었다.

 

 

 

분수(噴水)

김춘수

 

발돋움하는 발돋움하는 너의 자세는 왜

이렇게 

두 쪽으로 갈라져서 떨어져야 하는가.

 

그리움으로 하여

왜 너는 이렇게

산산이 부서져서 흩어져야 하는가.

 

모든 것을 바치고도

왜 나중에는

이 찢어지는 아픔만을

가져야 하는가.

 

네가 네 스스로에 보내는

이별의 

이 안타까운 눈짓만을 가져야 하는가.

 

왜 너는

다른 것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떨어져서 부서진 무수한 네가

왜 이런

선연(鮮然)한 무지개로

다시 솟아야만 하는가.

 

 

 

비가(悲歌)

김춘수

 

제1번

여보, 하는 소리에는

서열이 없다

서열보다 더 아련하고 더 그윽한

구애가 있다. 조심조심

나는 발을 디딘다. 아니

발을 놓는다

왠일일가 하늘이 모자를 벗고

물끄럼 말끄럼 나를 본다.

눈이 부신 듯

나를 본다. 새삼

엊그제의 일인 듯이 그렇게

나를 본다.

오지랖에 귀를 묻고

누가 들을라,

사람들은 다 가고 그 소리 울려오는

여보, 하는 그 소리

그 소리 들으면 어디서

낯선 천사 한 분이 나에게로 오는 듯한,

 

 

제2번

아내라는 말에는

소금기가 있다. 보들레르의 시에서처럼

나트리움과 젓갈 냄새가 난다.

쥐오줌풀에 밤이슬이 맺해듯

이 세상 어디서나

꽃은 피고 꽃은 진다. 그리고

간혹 쇠파이프 하나가 소리를 낸다.

길을 가면 내 등 뒤에서

난데없이 소리를 낸다. 간혹

그 소리 겨울밤 내 귀에 하염없다.

그리고 또 그다음

마른 나무에 새 한 마리 앉았다 간다.

너무 서운하다.

 

 

제3번

산 밑에 마을이 있다

마을에서 연기가 난다

산 밑에 마을이 있다

마을에는 개울이 있고 개울에는

외나무다리가 있다

한밤에도 소리 내며 개울은 제 혼자

어디론가 가고 있다. 어디로 가는가,

역사가 발을 멈추고 네 그 걸음걸이가

춤이 될 때까지

 

 

제4번

미닫이, 그

창호지에 비치는 눈발을 우리는

보고 있었다

어디서 바다가 보채고

네 발은 따뜻하고

네 젖무덤에서는 구구구 구

비둘기 우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그때 이미 너는

나를 떠날 차비를 하고 있었다.

달이 지고 아침이 와서

바다가 또 한 번 되게 보챘다.

다른 몸짓으로,

 

아랫목에 다소곳이

목이 긴

어느새 너는 버선, 아니 양말 한짝 벗어놓고,

(아직도 그따위!)

 

 

제5번

조고각하(照顧脚下)

길을 가면 발밑에 맨홀이 있다

들여다보고 들여다봐도

맨홀 저쪽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너는

보이지 않는 쥐라기의 새와 함께

맨홀 저쪽에 있다.

 

길을 가다 자칫

맨홀 키대로 발이 빠진다. 멋모르고

누가 뚜껑을 닫자 그때

나도 이미 아쉬운 듯 맨홀 저쪽으로

가고 있었다. 거무튀튀, 아니

희끄무레,

(믿기지 않아라,

누구 나이 겨우 40에

귀신이 보인다고 했는데,)

 

 

제6번

H2O는 화학용어,

수소와 산소로 분해된다.

다섯 살 나던 해

주님 생일날 아침 나는

교회의 첨탑을 보았다.

거꾸로 매달린

종이 천사를 보았다.

천사의 하얀 날개를 보고

천사의 오동통한 허벅지를 보았다.

 

한참 뒤 어느 날 꿈에 나는

교과서 밖으로 나온 H2O를 보았다.

수소와 산소

그들이 하나가 되는 것을 보았다.

잘생긴 악기 같았다.

모자를 벗고 나는

누군가에게 절을 했다.

나는 그때

열다섯 살,

중학 2학년생이었다.

 

 

제7번

운다는 것은 때로

울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가 차다.

(그렇게나 울어쌓다 뚝하고 뀌뚜리도 소식이 없다.)

하늘이 나에게로 내려오지 못하고

왜 밤마다 엉거주춤 저러고 있나,

잠든 내 머리맡을

밤새 누가왔다갔다 한다.

무슨 할 말이 있는 듯,

 

 

제8번

지아비 지어미 되어

우리가 함께 지낸 쉰다섯 해,

엊그제 같다.

 

어떤 겨울은 눈이 한 번도 오지 않아

강아지가 몸을 사리고

봄이 와도

보리 잎이 고개를 들지 않았다.

어떤 겨울은 또

눈이 너무 자주 너무 많이 와서

자전거도 버리고 다칠세라

우리는 눈 높이로 길을 냈다.

그러나 그까짓

어인 추럭 한 대가 짓이기고 갔다.

무슨 낯으로 이듬해는 또

봄에 은싸라기 같은 싸락눈이 내렸노,

환히 동백꽃도 벙그는데

지금 보니 그 뒤쪽은

캄캄한 어둠이다.

 

 

제9번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마라,

머리에 붉은 띠 동여매고

(필승(必勝)이라 새긴)

혼자서도 데모한다.

바다에도 길을 내겠다고 바쿠닌의

무정부주의처럼 바다를 구둣발로 밟고 가겠다고,

지금 막 탱자나무 울을 휘젖고 간

그가 바로 길인지도 모르게는데

누가 바람이라고 한다.

그러는 그도 나처럼 따로 어디다

길을 하나 내겠다고 한다.

이러다 온 세상이 길이되면 어쩌나,

길은 하나뿐이라는데

까치는 제일 높은 밤나무 하나를 골라

집을 짓는다. 누가 말하기를 그 언저리에도

명주실 같은 고불탕한 길이 있다고,

현미경으로 보면 보인다고, 그렇다면

누가 제 발등에다

길을 하나 아니 낸다고 할 수 있을까,

 

 

제10번

광하문 네거리처럼

잘 보이는 길이 있고 눈 감아도

보이지 않는 길이 있다.

어둠의 저쪽

밝음의 저쪽

그들이 길이 아니라면

왜 하늘로 하늘로

누가 새들을 가게 하나.

 

 

제11번

덫에 걸린 몸,

(누구나 다 그렇다.)

살아서는 새가 되고 싶어 했다.

 

블라인드를 걷어보니

아침인데 벌써 새 한 마리

사철나무 열매를 쪼고 있다

어디서 왔니,

한 번 더 물어봐도

대답이 없다. 이리로

고개 돌릴 때 보니 그에게는

귀가 없다.

귀가 없는 새,

여기서도 잘 보인다. 그

없는 귀가, 어느새

하늘에 둥 뜬,

 

 

제12번

 

1.

우나무노는 카다로니아어로

시를 쓴다

카다로니아어로 절대로

절을 짓지 않는다.

우나무노는 코로 냄새를 맡고

입으로 밥을 먹는다.

우나무노는 카다로니아어로

시를 쓴다

우나무노에게 카다로니아어는

그가 늘 먹는 노랑내 나는 양고기스튜와 같다.

 

2.

5500m 상공(上空),

비행기는 구름바다를 가고 있다.

내 눈의 그늘이 걷히고 네 얼굴이

새로 태어난다.

 

 

제13번

밤은 발이 없다. 밤은

어디로 한 발짝도 가지 못한다.

가로등은 불 켜고 하염없이 기다린다.

술 끊고 머리 빗고 오고 있는 사람,

밤은 발이 없다. 밤은

어디로 한 발짝도 가지 못한다.

날이 새기 전 새벽 세시나 네시쯤

깜박하고 가로등의 불이 가면 어쩌나,

술 끊고 머리 빗고 오고 있는

그 사람,

 

 

제14번 - 봄

눈을 가늘게 뜨고

어머니는 보고 있다. 과자를 보면

아이는 아이가 된다. 그러나

어머니의 눈에는

아지랑이가 보이지 않는다.

아물아물 끝내

단서를 잡지 못한다.

동구밖 어디서는 뜻밖에도 하늘 한 귀가

눈치 보며 설금설금 길을 내고 있다. 누굴

오래오래 기다리고 있나 보다. 벌써

죽도화가 샛노랗다.

 

 

 

제15번

왠지 바다로 가서 발을 담근다.

발톱에 스미는 바다물이 짜디짜다.

왠지 해 뜨면 또 바다로 간다.

슬픔을 달래는 손바닥이 둘

마주 보며 웃고 있다.

멀어져가는 발소리 하나가 아득히

다가온다.

그쪽에는 또 언제나

벙어리로 태어난 눈이 큰 바다가 있다.

조금 갸우뚱,

 

 

제16번

우리는 꿈에 물새가 된다.

닷센군도 어느 섬에 가서

알을 까고 집을 짓고

한철을 난다. 남태평양의 하얀

물거품으로 눈을 씻고

팔뚝만 한 새우를 잡아먹는다.

 

우리는 꿈에 뒤뜰의 배롱나무가 된다

아침에 꽃을 피우고

낮에 그늘을 치고

저녁에 열매(?)를 맺고

밤에는 따뜻한 눈을 맞는다.

계절은 어느새 겨울이다.

 

우리는 꿈에 딱정벌레가 된다.

딱정벌레는 딱정벌레의 걸음을 걷고

딱정벌레의 사랑을 한다.

딱정벌레는 등가죽이 반들한

입이 좁쌀만한

예쁜 딱정벌레를 낳는다.

 

잠들면 왜 우리는 꿈을 꾸나,

처음 듣는 이름의 낯선 누가

우리의 부끄러운 꿈을 훔쳐본다.

 

 

제17번

불국사 뒤뜰 언덕배기

가맣게 탄 망개알, 가을이

그 언저리에 머문다.

강아지 한 마리 본체만체, 그러나

그의 덩덜미에도 가을이 잠시

머문다. 돌아보니

대낮에 철새 한 무리

울고 간다.

그쪽에는 그 옛날

모래 위에 서 있다

모래에 쓸린

호(戶) 천오백칠십의

누란(樓蘭)이란 나라가 있었다.

십 년에 한 번 비가 오면 지금도

양파의 하얀 꽃이 피는,

 

 

제18번

공자가 인(仁)을 말하고

노자가 천지불인(天地不仁)을 말할 대

개가 달 보고 짖어대고

지구가 돌고 도는 것을 보고 있을 때

밤 아홉 시 뉴스 시간에

KBS 화면에

 

모택동이 평등을 말하고, 한참 뒤에

허유(虛有)선생이 자유를 말할 때도

한 아이가 언제나 울고 있다.

엄마 배고파,

 

 

제19번

단풍나무 새잎에 내리는 이슬비처럼

이슬비 되어 부른다

이슬비는 이슬비의 소리를 내면서

머지않아 봄이 온다고,

 

지금 이슬비가 단풍나무 새잎을 적시고

당을 적시고

멀리멀리 바다 하나를 가라앉힌다.

그쪽은 그쪽

망자(亡者)들이 사는 곳,

 

 

제20번

하늘에는 눈물이 없다. 하늘에는

구름이 있고 바람이 있고

비가 오고 눈이 내린다.

하늘에는 고래가 없고

우산오이풀이 없다.

하늘에는 우주의 그림자인

마이너스 우주가 있다. 하늘에는 밤마다

억만 개의 별이 뜬다.

사람이 살지 않아 하늘에는

눈물이 없다

 

 

제21번

눈물은

송화가루 날리는

보릿고개 이쪽에 있다.

아프리카 우간다에 가면 있다.

인도에도 있고

아프가니스탄 난민촌에 가면

할머니와 아이들의 눈에도

있다.

눈물은 어느날 길모퉁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한 번 다시

날개를 달기 위하여 눈물은

꿈을 꾼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눈물의 고향은

하늘에 있다.

눈물은 멀고먼 하늘에서 왔다.

이처럼 멀리까지

왜 왔을까,

 

 

제22번

지금 꼭 사랑하고 싶은데

사랑하고 싶은데

너는 내 곁에 없다

 

사랑은 동아줄을 타고

너를 찾아

하늘로 간다

 

하늘 위에는

가도가도 하늘이 있고

억만 개의 별이 있고

너는 없다.

 

네 그림자도 없고

발자국도 없다

이제야 알겠구나

그것이 사랑인 것을

 

 

제23번

아 소리를 내며

나뭇잎이 떨어졌다.

생각보다 너무 높다고 아니 생각보다

너무 낮다고,

나뭇잎을 밟고 갈 발은

해가 지고 첫 별과 함께 왔다.

눈에는 보이지 않고

그 발소리 가늘고 긴 네

손가락 같았다. 지금

여든 한 살에 낙하(落下), 나는 떨어진다.

어디로 멀리 가고 있다. 아니

아주 가까운 어딘 듯

가슴이 두근두근 잠도 오지 않는다.

나를 끌어당기는 누군가의 인력(人力), 보일 듯 보일 듯

보이지 않는다.

가늘고 긴 네 손가락 같은

가고 있는 은은한 내 발소리가 들린다.

 

 

제24번

네가 가버린 자리

사람들은 흔적이라고 한다

자국이라고도 얼룩이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새가 앉았다 간 자리

바람이 왜 저렇게도 흔들리는가.

모기가 앉았다 간 자리

왜 깐깐하게 좁쌀만큼 피가 맺히는가,

네 가버린 자리

너는 너를 새로 태어나게 한다.

여름이 와서

대낮인데 달이 뜨고

해가 발을 떼지 않고 있을 때 그때

어리석어라

사람들은 새삼 깨닫는다.

 

 

제25번

꿈에 갈매기 하늘빛을 보고

꿈에 샛노란 제비붓꽃을 본다. 나는

얼굴이 환해진다.

나에게는 길몽(吉夢)이다

그것은 내 혼자만의 생각이지만

내 혼자만의 생각은 나에게는 귀엽고

사랑스럽다. 아끼고 싶다.

설흔 여덟평이나 되는 아파트 거실 二人用 소파에

나는 혼자 앉아 있다. 멍하니

한나절을 그렇게 보낸다.

아주 드물게 소리도 없이 누가 몰래 곁에 와서 앉아 준다

누가 초인종만 누르고 그냥 가버리기도 한다.

나는 혼자서 생각한다. 그들이 누구일까,

생각하다 생각하다 하루해가 저문다.

어쩌나,

나는 개도 아니고 하느님도 아니다.

나는 이승의 하루를

네 혼자만의 생각을 품에 안고

다만 사람으로 살고 싶다. 이런 생각이

때로는 왜 나를 슬프게 할까,

 

 

제26번

나는 바다가 될 수 있을까,

나는 하늘이 될 수 있을까,

될 수도 있다고 한다.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한다.

마음이 어디에 있나,

내 작은 가슴 속에

내 작은 마음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작은 가슴 속의

그 작은 마음이 어찌

그 큰 바다를 다 담을 수가 있을까,

그 큰 하늘이 다 담길까,

그것도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한다.

그렇다면

내 작은 가슴 속의 내 작은 마음에는

어떤 날치가

어떤 고지새가 살게 될까,

궁금하구나, 정말

궁금하구나,

 

 

제27번

너는 아프다고 쉽게 말하지만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너는

딱이 짚어내지 못한다.

아픔이 너에게

뭐라고 말을 하던가,

아픔이 너를 알아보던가,

아픔은 바보고 천치고, 게다가

눈먼 장님일는지도 모른다. 물론

아픔은 제가 누구인지 모를는지 모른다.

아픔은

어느 날 길거리를 가다가 문득 생각난

어쩌면 그 새침데기

하느님의 한 분일는지도 모른다

 

 

제28번

내 살이 네 살에 닿고 싶어 한다.

나는 시방 그런 수렁에 빠져 있다.

수렁은 밑도 없고 끝도 없다.

가도 가도 나는 네가 그립기만 하다.

나는 네가 얼마만큼 그리운가,

이를테면 내 살이 네 살을 비집고 들어가

네 살을 비비고 문지르고 후벼파고 싶은

꼭 한번 그러고 싶을

그만큼,

 

 

제32번

송사리 떼가

개천을 누비고 있다

송사리는 떼단위로

몰려갔다 몰려왔다 한다

잠도 떼 단위로 자고 떼 단위로 잠을 깬다

송사리에게는 아라는 것이 없다

너무 작아

있다 해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송사리는 혼자서 태어나고 혼자서 죽는다

송사리 떼가

개천을 누비고 있다.

개천에 자기 그림자를 만든다.

자기 그림자를 만들어놓고

송사리 떼는 어디로 갔나

보자기만 한 그림자 하나가 이리저리

개천을 누비고 있다

 

 

제33번

태극기가 바람에 나부낍니다.

바람이 태극기를 나부끼게 합니다.

바람은

태극기를 나부끼게 합니다.

만세 만세 부르며 삼일(三一)운동이

태극기를 바람에 나부끼게 합니다

태극기가 바람에 나부낍니다

따라가다 따라가다

아이들은 돌을 차고 넘어집니다.

아이들이 다시 한번 넘어졌다 일어섭니다.

태극기가 바람에 나부낍니다

 

 

제34번

프랑스에서는 달팽이를

에스카르고라고 한다.

프랑스에서는

베베(BB)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예쁜 여배우도

주먹만한 에스카르고를 입맛을 다셔가며

맛있게 먹는다.

계절은 여름이다.

한국에서는 달팽이는 댓잎에 앉아

바람에 흔들린다.

그네를 타고 있는 듯,

안창마루에서 뒷창마루 너머로

한 아낙이 숨 죽이며

하염없이 바라본다.

석학 레비스트로스도 이 사실을 까마아득 모르고 있었는 듯하다.

 

 

제37번

너는 이제 투명체다.

너무 훤해서 보이지 않는다.

눈이 멀어진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것은

산도 아니고 바다도 아니다.

너는 벌써

 

억 만년 저 쪽에 가 있다.

무슨 수로

무슨 날개를 달고 나는

 

너를 따라잡을 수 있을까,

언제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까,

주먹만 한 침묵 하나가

 

날마다 날마다 고막을 때린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것은

가도 가도 그대로의 허허벌판이다.

밤도 없고 낮도 없다.

 

 

 

사모곡

김춘수

 

주신 사랑이 적은 듯 싶어도 나 삽니다.

주신 말씀이 적은 듯 싶어도 나 삽니다.

오밤중에 전기불 꺼지듯 나 삽니다.

하느님

나는 꼭 하나만 가질래요.

세상 것 모두 눈 감을래요.

하느님

나는 꼭 그 사람만 가질래요.

산엔 돌치는 징소리 내가슴에 너 부르는 징소리.

솔밭이 여긴데 솔향기에 젖는데

솔밭도 나도 다 두고 넌 어디쯤서 길 잃었니.

나도 바람이더면 아무대나 갈껄

그대 가는 곳 어디라도 갈껄

내가 물이라면 아무대나 스밀껄

그대 몸 속 마알간 피에라도 스밀걸

 

 

 

산보(散步)길

김춘수 

 

어떤 늙은이가 내 뒤를 바짝 달라붙는다. 돌아보니 조막만 한 다 으그러진 내 그림자다. 늦여름 지는 해가 혼신의 힘을 다해 뒤에서 받쳐주고 있다.

 

 

 

산장

김춘수

 

구름이 날아와

유리창에서 부숴지면

바람은

꼬리를 흔들며 웃었다.

 

때론

멧새도 날아와 울어 주고

볕살 바른 언덕에는 왼종일

빨간 꽃도 피곤 하였다.

 

구름과 바람 꽃과 새

이들의 고운 인연만이 흘렀고

日月에는 아무런 괴면도 없었는데

 

담장이 덩굴랑 부덕부덕 기어오르고

밤만 새면 넘어보는 쪽빛 하늘이여

느티나무 그늘에서 움메에 송아지가 부른다.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는 삼월(三月)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는 정맥(靜脈)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는 정맥(靜脈)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수만(數千數萬)의 날개를 날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삼월(三月)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 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서풍부(西風賦)

김춘수

 

너도 아니고 그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데...

꽃인 듯 눈물인 듯 어쩌면 이야기인 듯

 

누가 그런 얼굴을 하고

간다 지나간다. 환한 햇빛 속을 손을 흔들며.....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데,

온통 풀 냄새를 널어놓고 복사꽃을 울려놓고 복사꽃을 울려만 놓고

환한 햇빛 속을 꽃인 듯 눈물인 듯 어쩌면 이야기인 듯

누가 그런 얼굴을 하고

 

 

 

소녀 네루리

김춘수

 

심호흡을 하면

가슴이 뻐근해요.

까치밥나무를 보면

거기 달린

녹백색 꽃들을 보면 자꾸

기침이 나요.

아버지 와르코프스키 공작이 저만치

눈으로 제 키를 재고 있어요.

얼마나 컸나 하고,

아버지가 눈으로

제 목덜미를 문지르고 있어요.

왠지 자꾸 기침이 나요. 모발을 날리며

혼자서 전 어디로 멀리 가야 할까 봐요.

오늘이나 내일쯤,

 

 

 

소냐에게

김춘수

 

가도가도 2월은

2월이다.

제철인가 하여

풀꽃 하나 봉오리를 맺다가

움찔한다.

한번 꿈틀 하다가도

제물에 까무러치는

옴스크는 그런 도시다.

지난해 가을에는 낙엽 한 잎

내 발등에 떨어져

내 발을 절게 했다.

누가 제 몸을 가볍다 하는가.

내 친구 세스토프가 말하더라.

천사는 온 몸이 눈인데

온 몸으로 나를 보는

내가 바로 천사라고.

오늘 아침에는 멧송장개구리 한 마리가

눈을 떴다.

무릎 끓고

리자 할머니처럼 나도 또 한번

입 맞췄다.

소태같은 땅, 쓰디쓰다.

시방도 어디서 온몸으로 나를 보는

내 눈인 너.

달이 진다,

그럼.

 

1671년 2월 아직도 간간히 눈보라치는 옴스크에서

라스코리니코프.

 

 

 

소피야에게

김춘수

 

꽃은 자불고 있다.

아무도 깨우지 못한다.

그의 노동은 이제 다 끝났다.

가을이 온다고 누가

볼가 강의 허리를 동강내고

우랄 산맥의 늑골을 뽑아

소금에 절인다.

꿈이 아닌데

소피야,

네 눈이 그처럼 아름답듯이

그런 천사도 있었나 하고

나는 생각에 잠긴다.

꿈이 아닌다

왜 내 눈에 그런 것이 보일까

하는 생각도 하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낯선 길을 너무 멀리 왔다. 사람들은 나를

백치라고 한다.

 

1875년* 늦여름 시골 어느 객사에서

무이시킨 공작

 

*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미성년』이 나온 해.

 

 

 

수련별곡(水蓮別曲)

김춘수

 

바람이 분다.

그대는 또 가야 하리

그대를 데리고 가는 바람은

어느땐가 다시 한 번

낙화(落花)하는 그대를 내 곁에 데리고 오리,

그대 이승에서

꼭 한 번 죽어야 한다면

죽음이 그대 눈시울을

검은 손바닥으로 꼭 한 번

남김없이 덮어야 한다면

살아서 그대 이고 받든

가도 가도 끝이 없던 그대 이승의 하늘,

그 떫디떫던 눈웃음을 누가 가지리오?

 

 

 

순명(順命)

김춘수

 

처서 지나고 땅에서 서늘한 기운이 돌게 되면 고목 나무줄기나

바위의 검붉은 살갗 같은 데에 하늘하늘 허물을 벗어놓고

매미는 어디론가 가버린다.

 

가을이 되어 수세미가 누렇게 물들어 가고 있다.

그런 수세미의 허리에 잠자리가 한 마리 붙어 있다.

 

가서 기척을 해봐도 대꾸가 없다. 멀거니 눈을 뜬 채로다.

날개 한 짝이 사그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내 손이 그의 몸에 닿자 긴 꼬리의 중간쯤이

소리도 없이 무너져 내린다.

 

 

 

숲에서

김춘수

 

이리로 오너라 단둘이 먼 산울림을 들어보자 추우면 나무 꺾어 이글대는

가슴에 불을 붙여주마 산을 뛰고 산 뛰고 저마다 가슴에 불꽃이 뛰면

산꿩이고 할미 새고 소스라져 달아난다

이리와 배암떼는 흙과 바위 틈에 굴을 파고 숨는다 이리로 오너라 비가

오면 비 맞고 바람불면 바람을 마시고 천둥이며 번갯불 사납게 흐린 날엔

밀빛 젖가슴 호탕스리 두드려보자

아득히 가버린 萬年! 머루먹고 살았단다 다래랑 먹고 견뎠단다 ...

짓푸른 바닷내 치밀어들고 한 가닥 내다보는

보오얀 하늘 ......이리로 오너라 머루 같은 눈알니가 보고 싶기도 하다

단 둘이 먼 산울림을 들어보자 추우면 나무 꺾어 이글대는 가슴에 불을

붙여주마

 

 

 

스비드리가이로프에게

김춘수

 

산타 마리아는 어디 있지,

아니 아니

산타 마리아는 지명이 아니지,

나 어릴 때 우리 외할머니는

구기자나무를 괴좆나무라고 했는데

일 년 내내 눈이 내리는

옴스크에 가면

젊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옥살이를 한

유명한 감옥이 있고

그 옆댕이 어디

늙은 산타 마리아 나무가 한 그루 산피에트르 사원처럼

눈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네.

꽃눈 두엇 달고,

 

라일락꽃이 만발한 5월 아침

문득 생각이 나서

제브시킨.

 

 

 

시(詩)

김춘수

 

동체(胴體)에서 떨어져 나간 새의 날개가

보이지 않는 어둠을 혼자서 날고

한 사나이의 무거운 발자국이 지구(地球)를 밟고 갈

허물어진 세계(世界)의 안쪽에서 우는

가을 벌레를 말하라.

아니

바다의 순결(純潔)했던 부분을 말하고

베고니아 꽃잎에 듣는

아침 햇살을 말하라.

아니

그을음과 굴뚝을 말하고

겨울 습기(濕氣)와

한강변(漢江邊)의 두더지를 말하라.

동체(胴體)에서 떨어져 나간 새의 날개가

보이지 않는 어둠을 혼자서 날고

한 사나이의 무거운 발자국이

지구(地球)를 밟고 갈 때

 

 

 

아료샤에게

김춘수

 

즈메르자코프가 목을 매단 그날도

사타구니에 그처럼 큰 불알을 차고

머리에 금술 단 예쁜 벙거지 쓰고

아들 손에 목 배틀린

바람든 푸석한 무 같은

아버지 죽음이 생각났다.

우습기만 했다.

하느님이 없는 나에게 나를 보는

네 눈이 너무 커 보인다.

하늘이 그득 담겼다.

겨울에

네 목을 따뜻하게 하고

네 목에 맵시를 내주는

하느님은 네 목의 목도리다.

라고 말하려다 어쩐지 나는 그만

무안해진다.

내 꼬투리는 그만 정도가 고작이다.

네 발로 차 버려라.

풋볼인 듯 저쪽 골로 차 버려라.

 

1881년* 세모

작은형 이반.

 

* 1880년에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나왔다.

 

 

 

아무르 강 저쪽

김춘수

 

아무르 강 건너면

시베리아,

시베리아에도 봄은 올까,

들개들이 컹컹대며 마을까지 내려오고

시로미꽃이 봉오리를 맺다가

움찔 할까,

야윈 하늘 보고

아직은 제철이 아니라고,

시베리아에 오는 봄은

키프차크 초원을 달리는

몽고 말 뒤꿈치처럼 아련하다.

산새가 언제 알을 품고

마디풀이 언제

땅을 우빌까,

 

 

 

아침에

김춘수

 

크고 꺼칠한 손이

햇서리 내린 밀감(蜜柑)나무의

밀감(蜜柑)을 따고 있었다.

밀감(蜜柑)밭이 있는

탱자나무울 저쪽의 언덕길을

바다를 바라고

한 마리 살찐 망아지가 달리고 있었다.

 

 

 

앵오리

김춘수

 

우리 고향 통영에서는

잠자리를 앵오리라고 한다.

부채를 부치라고 하고 고추를

고치라고 한다.

우리 고향 통영에서는

통영을 토영이라고 한다.

팔을 폴이라고 하고 팥을

폴이라고 한다.

코를 케라고 한다.

우리 고향 통영에서는

멍게를 우렁싱이라고 하고 똥구멍을

미자발이라고 한다.

우리 외할머니께서는

통영을 퇴영이라고 하셨고 동경을

딩경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까치는 까치라고 하셨고 까치는

깩 깩 운다고 하셨다. 그러나

남망산은

난망산이라고 하셨다.

우리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

내 또래 외삼촌이

오매 오매 하고 우는 것을 나는 보았다.

 

 

 

어둠에게 들려준 이야기*

김춘수

 

불가 강에 발 담그고

립스틱 짙게 칠하고

가랑이 어디가 까무러치는 소리로

그러나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백오십 년 전에도 벌써

구르센카, 그 화냥년은 깔깔거리고 있었다.

고 한다.

 

* 릴케의 기행 소설 「하느님 이야기」에 나오는 에피소드.

 

 

 

언덕에서

김춘수

 

(한 송이는 바다로 흐르고 한 송이는 바다로 흘러가고)

이상한 말을 하고

사람들은 이 언덕을 넘어갔었다.

 

낯설은 새들이 울음 울며는

銀杏나무 잎사귀선 짜디짠 갯내가 코를 찔렀다.

 

(한 송이는 바다로 흐르고 한 송이는 바다로 흘러가고)

아는 사람은 다 이 언덕을 넘어갔는데

 

지금도 너는

하나 둘 꼽아가며

꽃밭에 물을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에반친 장군 영전에

김춘수

 

따로따로 우리는

누워서 잠을 잡니다.

나무들은 숲이 되어 하나가 되어

서서 잠을 잡니다.

해가 서쪽으로 졌습니다.

장군께서 또 오시게 되면

해가 동쪽으로 지게 하세요.

한 번 다시 크림 전쟁을 일으키세요.

세바스토포리를 도로 찾으세요.

이번에는

사람은 한 사람도 죽이지 마세요.

다치게도 마세요.

 

 

 

여명

김춘수

 

맺은 이슬 위에

아찔아찔 피어나는 것

밤새 슬픈 풀벌레의 입술 적시고

폴폴 널리는 꽃가루

 

슬슬(瑟瑟)한 산기슭을

돌돌

개울물 흐르고

송아지 목덜미를 간질거리며

자수정 보얀 하늘 밀고 오는 것

 

보리 이랑 밀 이랑

누렁누렁 이랑 사이

꼬리치며 물결치며

기어 오는 것.

 

 

 

여자(女子)

김춘수

 

푸르고 푸른 줄 알았단다

푸르고 푸른 것이 그치면

복사꽃 외얏꽃 냉이꽃

향기로운 꽃밭인 줄 알았단다

바다!

바다!

 

구슬 같은 눈물이 희기 시작한다

두 손을 흔들어 사모친 이름을 불러 보면

물결이 더욱 하늘처럼 영롱(玲瓏)하다

물결은 가슴 밖을 하늘처럼 넘쳐 흐른다

 

바람이 흔들면

거문고 일곱 줄 은실이 하늘마저 울린다

 

 

 

역사

김춘수

 

구름은 딸기 밭에 가서 딸기를 몇 따 먹고

흰 보자기를 펴더니

양털 같기도 하고 무슨 헝겉쪽 같기도 한

그런 것들을 풀어놓고

히죽이 웃어보기도 하고 혼자서 깔깔깔 웃어보기도 하고

목욕이나 할까 화장이나 할까 하며

제가 진짜 구름이나 될 듯이

멀리 우스리 강으로 내려간다.

 

무릎 꿇고 요즘도

땅에 입 맞추는 리자 할머니는

올해 나이 몇 살이나 됐을까.

 

 

 

엽편 2제(葉篇 二題)

김춘수

 

 

미수(眉壽) 지난 이무기는 죽어서

용이 되어 하늘로 가고

놋쇠 항아리 하나

물먹고 가라앉았다. 지금

개밥 순채 물달개비 따위

서로 삿대질도 하고 정도 나누는

그 위아래,

 

 

 

그가 그려준 산은

짙은 옻빛이다.

그런 산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데

볼 때마다 지긋이 내 어깨를 누른다.

없는 것의 무게다.

죄를 짓고

 

간이 크다는 것은

간이 바람맞았다는 그 뜻이다.

우스리강을 건너면서 라스코리니코프는

새삼 깨닫는다.

강을 다 건너자

으루나무숲을 눈보라가 휘몰아친다.

온산을 울렸는데도 겨우

들쥐가 한 마리 죽어 있다.

죽음 곁에는 아무도 없다.

죽음은 제 혼자 울다가 바람이 되어

제 혼자 어디론가 가버린다.

시베리아는 너무 넓고 너무 춥다고

라스코리니코프는 새삼

깨닫는다.

눈 위에 철새들이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너무 寞寞하고

발이 너무 시리다고,

 

 

 

옴스크

김춘수

 

뿌리는 하늘에 있고

꽃도 하늘에 있다.

루바슈카는 따뜻한가,

사람들은 일 년 내내 햇볕 쨍쨍한

(어디쯤에 있는가),

겨울을 바라며 가고 있다.

 

 

 

와르와라

김춘수

 

어둠이 어둠을 낳았다.

순산이었다.

페테르부르크를 호주머니에 넣고

우리는

기차를 타고 있는 기분이었다.

별은 너무 멀어

으루나무 숲을 한쪽만 조금 보여주었다.

어둠은 갓 낳은 어둠을 시켜

우리 비밀을

날이 새도록 숨겨주었다. 1846년*

페테르부르크를 몽땅 다 훔친,

 

*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가난한 사람들」이 나온 해.

 

 

 

왕소군(王昭君)의 달

김춘수

 

잡목림(雜木林) 너머 양파들의 하얀 꽃 자갈밭을 지나 황토(黃土) 진흙의 나직한 언덕을 지나면 조랑말의 눈이 두 개 흑하(黑河)를 건너 번국(番國)을 지나면 노(老)선우(單于)의 턱수염에 달린 고드름 고드름 따다가 고드름 따다가 입에 넣으면 잡목림(雜木林) 너머 양파들의 하얀 꽃 자갈밭을 지나 늪으로 빠지는 황사(黃砂)빛 하늘 머나먼 하늘,

 

 

 

우박

김춘수

 

구르센사,

백 번을 불러봐도

너, 희대의 화냥년,

웬일일까,

잠긴 하늘에서 오늘 밤은

동고비새 똥 같은 뭉클한 우박

하나 둘

네 발등에 떨어지는구나, 네 발등에

하나둘, 뚫리지 않는

구멍을 뚫는구나,

 

 

 

유년시(幼年時)

김춘수

 

1

호주 아이가

한국의 참외를 먹고 있다.

호주 선교사네 집에는

호주에서 가지고 온 뜰이 있고

뜰 위에는

그네들만의 여름하늘이 따로 또 있는데

 

길을 오면서

행주치마를 두른 천사를 본다.

 

 

2

누군가의

돌멩이를 쥔 주먹이 어디선가

나를 노리고 있다.

꿈속에서도 부들부들 몸을 떨면서

한껏 노리고 있다.

은전 두 개를 다 털어

나는 용서를 빈다.

 

 

3

그 해의

늦은 눈이 내리고 있다.

눈은 산다화를 적시고 있다.

산다화는

어항 속의 금붕어처럼

입을 벌리고 있다.

산다화의

명주실 같은 늑골이

수없이 드러나 있다.

 

 

 

윤회

김춘수

 

아콘카와 산*의 염소처럼

얼마나 많이 걸었으면

보라,

펑퍼짐 내려앉은 구두 한 켤레

그 콧등, 이제

높새가 불고 밤이 와서

들쥐들 눈이 퍼렇게 불을 켠다.

언제 보았나, 다시

보일 듯 보일 듯

너는 무슨 흔적일까,

조금 전에도 누가 낙엽을 밟고 간,

 

1871년 10월 30일

 

* 남미 최고의 산.

 

 

 

 

의자를 위한 바리에떼

김춘수

 

누가 나를 부른다.

돌아보면 너무나 아득하다.

내 키만 한 수렁이 있고

그 언저리는 언제나 봄이다.

게가 한 마리 거품을 물고 있고

키 큰 오동나무가 아물아물 꼭대기에 하늘빛 꽃을 달고 있다.

낮달이 나를 자꾸 따라온다.

나를 누가 기다리고 있다고.

 

 

 

이반에게

김춘수

 

알고 보니

즈메르자코프는 한갓

콧물이더라.

그 녀석 고뿔을 몹시 앓았나 보다.

갈잎들이 술렁인다.

날이 샌다.

아침마다 높새가 와서

내 등을 긁어준다.

이제 내 등은 막막하지 않다.

시로미꽃이 피고

그 곁에

노루가 와서 웅그린다.

가끔 아직도

옆구리가 뜨끔뜨끔한다.

그 두더지 녀석 예까지 따라왔나 보다.

철새들이 가고 있다.

마디풀과 함께 여치와 함께

여름이 또 온다.

아버지는 <내>가 죽였다.

그 말 한 마디가 하고 싶어서

날마다 나는 즈메르자코프를

침 뱉고 발로 차고 또 침 뱉고 발로 차고 했나 보다.

 

시베리아 남쪽 오지에서

형 드미트리.

 

 

 

이중섭(李仲燮)

김춘수

 

1

씨암탉은 씨암탉,

울지 않는다.

네 잎 토끼풀 없고

바람만 분다.

바람아 불어라, 서귀포(西歸浦)의 바람아

봄 서귀포(西歸浦)에서 이 세상의

제일 큰 쇠불알을 흔들어라

바람아,

 

 

2

아내는 두 번이나

마굿간에서 아이를 낳고

지금 아내의 모발(毛髮)은 구름 위에 있다.

봄은 가고

바람은 평양(平壤)에서도 동경(東京)에서도

불어오지 않는다.

바람은 울면서 지금

서귀포(西歸浦)의 남쪽을 불고 있다.

서귀포(西歸浦)의 남쪽

아내가 두고 간 바다,

게 한 마리 눈물 흘리며, 마굿간에서 난

두 아이를 달래고 있다.

 

 

3

바람아 불어라.

서귀포(西歸浦)에는 바다가 없다.

남쪽으로 쏠리는

끝없는 갈대밭과 강아지풀과

바람아 네가 있을 뿐

서귀포는 바다가 없다

아내가 두고 간

부러진 두 팔과 멍든 발톱과

바람아 네가 있을 뿐

가도 가도 서귀포에는

바다가 없다

바람아 불어라

 

 

4

저무는 하늘

동짓달 서리 묻은 하늘을

아내의 신발 신고

저승으로 가는 까마귀,

까마귀는

남포동 어디선가 그만

까욱 하고 한 번만 울어 버린다

오륙도를 바라고 아이들은 돌팔매질을 한다

저무는 바다,

돌 하나 멀리멀리

아내의 머리 위 떨어지거라

 

 

5

충무시(忠武市) 동호동(東湖洞)

눈이 내린다.

옛날에 옛날에 하고 아내는 마냥

입술이 젖는다.

키 작은 아내의 넋은

키 작은 사철나무 어깨 위에 내린다.

밤에도 운다.

한려수도(閑麗水道) 남망산(南望山),

소리 내어 아침마다 아내는 가고

충무시(忠武市) 동호동(東湖洞)

눈이 내린다.

 

 

 

인동(忍冬)잎

김춘수

 

눈 속에서 초겨울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다.

서울 근교(近郊)에서는 보지 못한

꽁지가 하얀 작은 새가

그것을 쪼아먹고 있다.

월동(越冬)하는 인동(忍冬)잎의 빛깔이

이루지 못한 인간(人間)의 꿈보다도

더욱 슬프다

 

 

 

자리

김춘수

 

흑해가 있던 자리

흑해 바닷가

촘스키 할아버지 오두막이 있던 자리

촘스키 할아버지 오두막 저쪽에 푸릇푸릇

밀밭이 있던 자리

밀밭에 땅거미 내린 자리

땅거미 저쪽에

산수유나무가 있던 자리

산수유나무의 노란 꽃이 있던 자리

산수유나무의 빨간 열매가 있던 자리

참새 두 마리 앉았다 간 자리

 

 

 

잠언 둘

김춘수

 

햇볕에

거북이 등의 가느다란

위태위태한 갈라짐이

변두리 돌각담의 자기 증명이듯

너무 잘 뚫린

아 하고 입 턱 벌린

표트르 카라마조프의 똥구멍은

속앓이 설사의 자기 증명이니라,

 

 

 

장공만리(長空萬里)

김춘수

 

터널을 벗어난 기차가

꼬리 잘린 기적소리를 낸다.

한 번 더 낸다.

먼저 쓰고 목뼈 부러진 어떤 파랭이꽃

되 안됐다는 듯

말끄러미 나를 본다. 거기가

그런 길섶이다.

누가 죽었나,

두건 쓰고 상여 메고

개미들이 부산하다. 하늘

드높은 곳에

앙꼬빵 소 같은 누가 두고 갔나

구름 한 점. 그새

너무 너무 새큼해진

 

 

 

장미 그 순수한 모순

김춘수

 

장미는 시들지 않는다

다만 눈을 감고 있다.

 

바다 밑에도 하늘 위에도 있는 시간

발에 채이는

지천으로 많은 시간

장미는 시간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고 있다.

 

언제 뜰까 눈을

시간이 어디론가 제가 갈 데로

다 가고 나면 그때

장미는 눈을 뜨며

시들어 갈까...

 

 

 

저녁

김춘수

 

구르센카 곁에 윗니 빠진 늙은 개가 엎드리고 있다.

잠만 잔다.

소냐 곁에는 어린 남매가 마주 보며 떼꾼한 눈알을 굴리고 있다.

배가 고프다고.

리자 할머니가 얕게 깔린 서쪽 야윈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젓갈

김춘수

 

언젠가 김동리(金東里) 씨에게

내 고향 젓갈을 권했더니

한입 입에 넣어보고는

심각한 맛!이라고 했다.

썩어 가는 어물(魚物)을

그 창자를

소금은 나트리움의 짜디짠

연옥(煉獄)이 되게 하지만

보라, 이젠

네 이마 위 천국이 없고

네 발아래 지옥도 없다.

앙리 미쇼의 시를 읽으며 나는 가끔

비공(鼻孔) 깊숙이 스미는

뭔가 탕 쳐버린 듯한 소금의

씁씁한 그 냄새를 맡고

그 맛을 본다.

 

 

 

김춘수

 

외로운 밤이면

자꾸만 별을 보았지.

더 외로운 밤이면

찬란한 유성이 되고 싶었지.

그토록 그리움에

곱게곱게 불타오르다간

그대 심장 가장 깊은 곳에

흐르는 별빛처럼

포옥 묻히고 싶었지.

 

 

 

제브시킨에게

김춘수

 

손끝만 달아도 온몸이 뒤틀린다.

S자 형으로,

그것은 전류이지만

그것은 또 열이기도 하고, 눈먼

빛이기도 하다.

코앞이 아찔하더니

멀리 바다가 보인다.

타타르 해협,

양태 한 마리 헤엄쳐 간다.

기억하라,

나는 언제나 외톨이고 페테르부르크는 지금

한여름이고 대낮이고

리비도는 염치가 없다.

돈도 없다.

 

변두리 우거에서

스비드리가로프.

 

 

 

조시마 장로 보시오

김춘수

 

드미트리 그 녀석에게

그 계집은 줄 수 없소.

줄 생각도 없거니와

방법이 없소.

구르센카 그 계집은 너무도 잘 알고 있소.

제 넋을 달래고 어르고

나른하게 하고 잠들게 하는

나는 늙은 궁노루

내 배꼽 밑에는 향낭이 있소.

그렇소.

냄새를 맡고

가끔 내 꿈속까지 나를 찾아온다오.

드미트리 그 녀석은 몰라요.

너무 몰라요.

거기가 바로 그 <특수> >間인데

샅만 눈에 띄지

괄호 안에 뭐가 있는지는 깜깜 모르고 있소.

어림도 없소.

어찌하면 좋겠는지 알려주시오.

표트르 카라마조프.

 

 

 

존경하는 스타브로긴 스승님께

김춘수

 

불에 달군 인두로

옆주리를 지져봅니다.

칼로 손톱을 따고

발톱을 따봅니다.

얼마나 견딜까,

저는 저의 상상력의 키를 재봅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그것은

바벨탑의 형이상학,

저는 흔듭니다

무너져라 무너져라 하고

무너질 때까지,

그러나 어느 한 시인에게 했듯이

늦봄의 퍼런 가시 하나가

저를 찌릅니다. 마침내 저를 죽입니다.

그게 현실입니다.

7할이 물로 된 형이하의 몸뚱어리

이 창피를 어찌 하오리까

스승님,

 

자살 직전에

미욱한 제자 키리로프 올림.

 

 

 

죽은 네루리를 위하여

김춘수

 

네루리*가 죽었다.

열여섯 살

너는 갈매나무의

갈맷빛 눈을 하고 있었다.

심호흡을 하면

가슴이 뻐근하다 하더니

숨 헐떡이며

먼 길 가긴 갔구나.

봄이 또 와서

보라,

저 우산오이풀꽃

귀밑을 붉힌다.

헤어지기 위하여 우리 만남이 있었다면

네루리,

너는 죽고

나는 이제 누구에게도 내 이름 밝히지 않으리,

 

*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학대받은 사람들」에 나오는 와르코프스키 동작의 숨겨둔 딸. 미모의 소녀로 요절한다.

 

 

 

죽음

김춘수

 

1

죽음은 갈 것이다.

어딘가 거기

초록(草綠)의 샘터에

빛 뿌리며 서있는 황금(黃金)의 나무……

 

죽음은 갈 것이다.

바람도 나무도 잠든

고요한 한밤에

죽음이 가고 있는 경허한 발소리를

너는 들을 것이다.

 

2

죽음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

가을 어느 날

네가 걷고 있는 잎진 가로수(街路樹)곁을

돌아오는 죽음의

풋풋하고 의젓한 무명(無名)의 그 얼굴……

죽음은 너를 향하여

미지(未知)의 손을 흔들 것이다.

 

죽음은

네 속에서 다시

숨 쉬며 자라 갈 것이다.

 

 

 

쥐오줌풀

김춘수

 

하느님,

나보다 먼저 가신 하느님,

오늘 해질녘

다시 한번 눈 떴다 눈 감는

하느님,

저만치 신발 두짝 가지런히 벗어놓고

어쩌노 멱감은 까치처럼

맨발로 울고 가신

하느님, 그

하느님

 

 

 

집 

김춘수

 

1

무엇으로도 다스릴 수 없는 아버지는 나이 들수록 더욱 소나무처럼 정정히 혼자서만 무성(茂盛)해가고, 그 절대(絶對)한 그늘 밑에서 어머니의 야윈 가슴은 더욱 곤충의 날개처럼 엷어만 갔다

 

2

모란이 지고 나면 작약이 피고, 작약 이울 무렵이면 낮에는 아니 핀다던 파아란 처녀꽃을 볼 수 있었다. 그 신록이 푸른 잎을 펴어 놓은 마당가에서 나는 어머니를 닮아 가슴이 엷은 소년이 되어 갔다

 

3

아버지는 장가간 지 다섯 해 만에 나를 낳았다

나는 할머니의 귀여운 첫 손주였다

스물 난 새파란 소년과수로 춘향이의 정절을 고스란히 지켜온 할머니는 나의 마음까지도 약하고 가늘게만 기루워 주셨다.

 

4

그 집에는 우물이 있었다.

우물 속에는 언제 보아도 곱게 개인 계절의 하늘이 떨어져 있었다.

언덕에 탱자꽃이 하아얗게 피어 있던 어느 날 나는 거기서 처음으로 그리움을 배웠다.

나에게는 왜 누님이 없는가? 그것은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 없는 내가 다 크도록까지 내 혼자의 속에서만 간직해온 나의 단 하나의 아쉬움이었다.

 

5

무엇이 귀한 것인가도 모르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서 한사코 어딘지 달아나고 싶은 반역(反逆)에로 시뻘겋게 충혈한 곱지 못한 눈매를 가진, 나는 차차 청년이 되어 갔다.

 

 

 

차례

김춘수

 

추석입니다.

할머니,

홍시 하나 드리고 싶어요.

서리 내릴 날은 아직도 멀었지만,

기러기 올 날은 아직도 멀었지만,

살아 생전에 따뜻했던 무릎,

크고 잘 익은

홍시 하나 드리고 싶어요.

용둣골 수박,

수박을 드리고 싶어요.

수박 살에

소금을 조금 발라 드렸으면 해요.

그러나 그 뜨거웠던 여름은 가고,

할머니,

어젯밤에는 달이

앞이마에 서늘하고 훤한

가르마를 내고 있었어요,

오십 년 전 그날처럼.

 

 

 

처서(處暑)지나고

김춘수

 

處暑(처서) 지나고

저녁에 가랑비가 내린다.

泰山木(태산목) 커다란 나뭇잎이 젖는다.

멀리 갔다가 혼자서 돌아오는

메아리처럼

한 번 멎었다가 가랑비는

한밤에 또 내린다.

泰山木(태산목) 커다란 나뭇잎이

새로 한 번 젖는다.

새벽녘에는 할 수 없이

귀뚜라미 무릎도 젖는다.

 

 

 

처용

김춘수

 

인간들 속에서

인간들에 밟히며

잠을 깬다.

숲속에서 바다가 잠을 깨듯이

젊고 튼튼한 상수리나무가

서 있는 것을 본다.

남의 속도 모르는 새들이

금빛 깃을 치고 있다.

 

 

 

처용단장(處容斷章)

김춘수 

 

제1부 눈, 바다, 산다화(山茶花)

 

1

바다가 왼종일

생쥐 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

이따금

바람은 한려수도에서 불어오고

느릅나무 어린 잎들이

가늘게 몸을 흔들 곤 하였다.

 

날이 저물자

내 늑골과 늑골 사이

홈을 파고

거머리가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베꼬니아의

붉고 붉은 꽃잎이 지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다시 또 아침이 오고

바다가 또 한 번

생쥐 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

뚝 뚝 뚝, 천의 사과알이

하늘로 깊숙이 떨어지고 있었다.

 

가을이 가고 또 밤이 와서

잠자는 내 어깨 위

그해의 새눈이 내리고 있었다.

어둠의 한쪽이 조금 열리고

개동백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었다.

잠을 자면서도 나는

내리는 그

희디흰 눈발을 보고 있었다.

 

2

3월에도 눈이 오고 있었다.

눈은

라일락의 새순을 적시고

피어나는 산다화를 적시고 있었다.

미처 벗지 못한 겨울 털옷 속의

일찍 눈을 뜨는 남쪽 바다,

그날 밤 잠들기 전에

 

물개의 수컷이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3월에 오는 눈은 송이가 크고

깊은 수렁에서처럼

피어나는 산다화의 보얀 목덜미를 적시고 있었다.

 

 

3

벽이 걸어오고 있었다.

늙은 홰나무가 걸어오고 있었다.

한밤에 눈을 뜨고 보면

호주 선교사네 집

회랑의 벽에 걸린 청동시계가

겨울도 다 갔는데

검고 긴 망토를 입고 걸어오고 있었다.

내 곁에는

바다가 잠을 자고 있었다.

잠자는 바다를 보면

바다는 또 제 품에

숭어 새끼를 한 마리 잠재우고 있었다.

 

다시 또 잠을 자기 위하여 나는

검고 긴

한밤의 망토 속으로 들어가곤 하였다.

바다를 품에 안고

한 마리 숭어새끼와 함께 나는

다시 도 잠이 들곤 하였다.

 

혼주 선교사네 집에는

호주에서 가지고 온 해와 바람이

따로 또 있었다.

탱자나무 울 사이로

겨울에 죽도화가 피어 있었다.

주님 생일날 밤에는

눈이 내리고

내 눈썹과 눈썹 사이 보이지 않는 하늘을

나비가 날고 있었다.

한 마리 두 마리,

 

 

4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가 가라앉고

바다가 있던 자리에

군함이 한 척 닻을 내리고 있었다.

여름에 본 물새는

죽어 있었다.

물새는 죽은 다음에도 울고 있었다.

한결 어른이 된 소리로 울고 있었다.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없는 해안선을

한 사나이가 이리로 오고 있었다.

한쪽 손에 죽은 바다를 들고 있었다.

 

 

5

아침에 내린

복동이의 눈과 수동이의 눈은 두 마리의 금송아지가 되어

하늘로 갔다가

해 질 무렵

저희 아버지의 외발 달구지에 실려

금간 쇠방울 소리를 내며

돌아오곤 하였다.

한밤에 내린

복동이의 눈과 수동이의 눈은 또

잠자는 내 닫힌 눈꺼풀을

차운 물로 적시고 또 적시다가

동이 트기 전

저희 아버지의 외발 달구지에 실려

금간 쇠방울 소리를 내며 돌아가곤 하였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은 아침을 뭉개고

바다를 뭉개고 있었다.

먼저 핀 산다화 한송이가

시들고 있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이들이 서넛 둘러앉아

불을 지피고 있었다.

아이들의 목덜미에도 불 속으로도

눈이 내리고 있었다.

 

 

6

모과(木瓜)나무 그늘로

느린 햇발의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지는 석양(夕陽)을 받은

적은 비탈 위

구기자(枸杞子) 몇 알이 올리브빛으로 타고 있었다.

금붕어의 지느러미를 쉬게 하는

어항(魚缸)에는 크낙한 바다가

저물고 있었다.

Vou 하고 뱃고동이 두 번 울었다.

모과(木瓜)나무 그늘로

느린 햇발의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장난감 분수(噴水)의 물보라가

솟았다간

하얗게 쓰러지곤 하였다.

 

 

7

새장에는 새똥 냄새도 오히려 향긋한

저녁이 오고 있었다.

잡혀온 산새의 눈은

꿈을 꾸고 있었다.

눈 속에서 눈을 먹고 겨울에 익는 열매

붉은 열매,

봄은 한 잎 두 잎 벚꽃이 지고 있었다.

입에 바람개비를 물고 한 아이가

비 개인 해안통(海岸通)을 달리고 있었다.

한 계집아이는 고운 목소리로

산토끼 토끼야를 부르면서

잡목림(雜木林) 너머 보리밭 위에 깔린

노을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8

내 손바닥에 고인 바다,

그때의 어리디어린 바다는 밤이었다.

새끼 무수리가 처음의 깃을 치고 있었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오는 동안

바다는 많이 자라서

허리까지 가슴까지 내 살을 적시고

내 살에 테 굵은 얼룩을 지우곤 하였다.

바다에 젖은

바다의 새하얀 모래톱을 달릴 때

즐겁고도 슬픈 빛나는 노래를

나는 혼자서만 부르고 있었다.

여름이 다한 어느 날이던가 나는

커다란 해바라기가 한 송이

다 자란 바다의 가장 살찐 곳에 떨어져

점점점 바다를 덮는 것을 보았다.

 

 

9

팔다리가 뽑힌 게가 한 마리

길게 파인 수렁을 가고 있었다.

길게 파인 수렁의 개나리꽃 그늘을

우스꽝스런 몸짓으로 가고 있었다.

등에 업힌 듯한 그

두 개의 눈이 한없이 무겁게만 보였다.

 

 

10

은종이의 천사(天使)는

울고 있었다.

누가 코밑수염을 달아 주었기 때문이다.

제가 우는 눈물의 무게로

한쪽 어깨가 조금 기울고 있었다.

조금 기운 천사(天使)의

어깨 너머로

얼룩암소가 아이를 낳고 있었다.

아이를 낳으면서

얼룩암소도 새벽까지 울고 있었다.

그해 겨울은 눈이

그 언저리에만 오고 있었다.

 

 

11

울지 말자,

산다화(山茶花)가 바다로 지고 있었다.

꽃잎 하나로 바다는 가리워지고

바다는 비로소

밝은 날의 제 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발가벗은 바다를 바라보면

겨울도 아니고 봄도 아닌

설청(雪晴)의 하늘 깊이

울지 말자,

산다화(山茶花)가 바다로 지고 있었다.

 

 

12

겨울이 다 가도록 운동장(運動場)의

짧고 실한 장의자(長椅子)의 다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겨울이 다 가도록

아이들의 목덜미는 모두

눈에 덮인 가파른 비탈이었다.

산토끼의 바보,

무르팍에 피를 조금 흘리고 그때

너는 거짓말처럼 죽어 있었다.

봄이 와서

바람은 또 한번 한려수도(閑麗水道)에서 불어오고

겨울에 죽은 네 무르팍의 피를

바다가 씻어 주고 있었다.

산토끼의 바보,

너는 죽어 바다로 가서

밝은 날 햇살 퍼지는

내 조그마한 눈웃음이 되고 있었다.

 

 

13

봄은 가고

그득히 비어 있던 풀밭 위 여름,

네 잎 토끼풀 하나,

상수리나무 잎들의

바다가 조금씩 채우고 있었다.

언제나 거기서부터 먼저

느린 햇발의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탱자나무 울이 있었고

탱자나무 가시에 찔린

서(西)녘 하늘이 내 옆구리에

아프디아픈 새 발톱의 피를 흘리고 있었다.

 

 

제2부 들리는 소리

 

서시(序詩)

 

울고 간 새와

울지 않는 새가

만나고 있다.

구름 위 어디선가 만나고 있다.

기쁜 노래 부르던

눈물 한 방울,

모든 새의 혓바닥을 적시고 있다.

 

 

1

돌려다오,

불이 앗아간 것, 하늘이 앗아간 것, 개미와 말똥이 앗아간 것,

여자가 앗아가고 남자가 앗아간 것.

앗아간 것을 돌려다오.

불을 돌려다오. 하늘을 돌려다오. 개미와 말똥을 돌려다오.

여자를 돌려주고 남자를 돌려주오.

쟁반 위에 별을 돌여다오.

돌려다오 

 

 

2

구름 발바닥을 보여다오.

풀 발바닥을 보여다오.

그대가 바람이라면 보여다오.

별 겨드랑이를 보여다오.

별 겨드랑이의 하얀 눈을 보여다오.

 

 

3

살려다오.

북 치는 어린 곰을 살려다오.

북을 살려다오.

오늘 하루만이라도 살려다오.

눈이 멎을 때까지라도 살려다오.

눈이 멎은 뒤에 죽여다오.

북 치는 어린 곰을 살려다오.

북을 살려다오.

 

 

4

애꾸눈이는 울어다오.

성한 한 눈으로 울어다오.

달나라에 달이 없고

인형이 탈장하고

말이 자라서 사전이 되고

기중기가 올라갔다 내려오고 올라갔다 내려오고

올라갔다 내려온다고

애꾸눈이가 애꾸눈이라고

울어다오. 성한 눈으로 울어다오.

 

 

5

불러다오.

멕시코는 어디 있는가,

사바다는 사바다, 멕시코는 어디 있는가,

사바다 누이는 어디 있는가,

말더듬이 일자무식 사바다는 사바다

멕시코는 어디 있는가,

사바다 누이는 어디 있는가,

불러다오.

멕시코 옥수수는 어디 있는가,

 

 

6

앉아다오.

손바닥에 앉아다오.

손등에 앉아다오.

내리는 눈잔등에 여치 한 마리, 여치 두 마리,

앉아다오.

*

봄을 지나 여름을 지나

개울을 지나

늙은 가재가 사는 개울을 지나,

살구꽃 지는 마을을 지나

소쩍새와 銀魚(은어)가 사는 마을을 지나,

봄을 지나 여름을 지나

개울을 지나,

 

 

7

새야 파랑새야,

울어다오.

로비비아 꽃 필 때에 울어다오.

녹두남에 꽃 필 때에 울어다오.

바람아 하늬바람아.

울어다오, 머리 풀고 다리 뻗고

3분 10초만 울어다오.

울어다오

*

키 큰 해바라기

네 잎 토끼풀 없고

코피

바람 바다 반딧불

모발 또 모발 발 바람

가느다란 갈라짐

 

 

8

잊어다오.

어제는 노을이 죽고

오늘은 애기메꽃이 핀다.

잊어다오. 늪에 빠진

그대의 아미,

휘파람새의 짧은 휘파람,

*

물 아래 물 아래 가던 새,

본다.

호밀밭에 떨군

나귀의 눈물.

딱나무 다 젖고

뭇별들이 젖는다.

지렁이가 울고

네가래풀이 운다.

개밥 순채,

물달개비가 운다.

하늘가재가 하늘에서 운다.

갠 날에도 울고 흐린 날에도 운다.

 

 

제3부 메아리

 

1

릴케의 비가(悲歌)를 읽는 동안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나더라는 일본의 어느 시인이 쓴 글을 읽은 일이 있다. 나도 릴케의 비가를 10번까지 다 읽어봤지만 어렵기만 하고 눈물은 나지 않았다. 일본어 번역으로 읽어서 그런가 하고 일본인 그 시인에게 당신은 독일어로 읽었는가고 물어보고 싶었으나 주소를 몰라 물어보지 못했다. 50년 전의 일이다. 엊그저께는 어떤 잡지를 뒤지다가 미국의 어느 문학 이론가가 모든 글 읽기는 다 오독이다라고 한 글을 보고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조금 뒤에 나는 한 번 다시 눈을 번쩍 떴다. 오독이란 무엇일까 하고

 

,표나 .표가 먼저 오는 수도 있다.

,誤(오). 讀(독)

 

그의 눈물과 나의 눈물은 그래서

같지 않다

내가 보는 그의 눈물은

저녁에 지는 하얀 얼룩처럼

거짓말 같기만 하다. 혹은

도마 위에 놓인 참새 늑골에 붙은

(내가 먹을) 보얀 살점처럼.

 

2

봄이던가 여름이던가

어느 날

햇살은 비쭈기나무, 아니

쥐오줌풀에 가 앉았다.

호야 옛날에 죽은 내 친구야.

내가 부르면 새다리처럼 가는 다리

날개는 접고, 낮인데도

밤에 보는 듯

그는 어느새 다 늙은

땅두릅나무였다.

 

3

꿈이던가, 

여순 감옥에서

단재 선생을 뵈었다.

땅 밑인데도

들창 곁에 벚나무가 한 그루

조선 사람은 무정부주의자가 되어야 하네

되어야 하네 하시며

울고 계셨다.

단재 선생의 눈물은

발을 따뜻하게 해주고 발을

시리게도 했다

인왕산이 보이고

하늘이 등꽃빛이라고도 하셨다.

나는 그때 세다가야서

감방에 있었다.

땅 밑인데도

들창 곁에 벚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벚나무는 가을이라 잎이 지고 있었다.

나도 단재 선생처럼 한 번

울어보고 싶었지만, 내 눈에는 아직

인왕산도 등꽃빛 하늘도

보이지가 않았다.

 

4

길은 동강 나 있었다.

소설 속에 불쑥 나온 언어 단편처럼,

눈썹이 없는 아이가 눈썹이 없는 아이를

울리고 있었다. 언제까지나

아침에 죽고

저녁에는 눈을 뜨는 별들처럼

동강 난 길은 언제쯤

다시 살아날까,

어느 날은

살 오른 숭어새끼

온몸으로 바다를 박차고

솟아올랐지만, 그의 눈에는

그해의 첫눈이 오고 있었다.

잡목림 너머

가고 있는 늙은 들쥐와

남천의 작은 꽃이

젖고 있었다. 새봄인데

아주 아주 낡은 투로 말이다.

 

5

요코하마 헌병대 가지빛 검붉은 벽돌담을 끼고 달아나던 요코하마 헌병대 헌병군 조모에게 나를 넘겨주고 달아나던 박승줄로 박살 나게 하고 목도(木刀)로 박살 나게 하고 욕조에서 기(氣)를 절(絶)하게 하고 달아나던 창씨(創氏)한 일본성(姓)을 등에 짊어지고 숨이 차서 쉼표도 못 찍고 띄어쓰기도 까먹고 달아나던 식민지 반도 출신 고학생 헌병 보야스다모의 뒤통수에 박힌 눈 개라고 부르는 인간의 두 개의 문 가엾어라 어느 쪽도 동공이 없는

 

6

외할머니는 統營(통영)을

퇴영이라 하셨다.

오늘은 뉘더라

얼굴이 하나 지워지고 있다.

눈썹 밑에 눈이 없고

눈 밑에 코가 없고

입은 옆으로 비스듬히 돌아앉아 있다.

외할머니는 퇴영은 통영이 아니랄까봐

오늘은 아침부터 물새가 울고

セタガヤ署 감방은 (나를 달랜다고)

들창 곁에 欲知(욕지) 앞바다만 한 바다를 하나

띄우고 있다.

 

7

統營(통영)은 봄이다.

엉겅퀴풀이 자주빛 꽃을 여러 개나 달고

艅艎山(여황산)* 기슭에 있다.

혼자 있지 않다.

뾰족지붕, 그리고

언제나 열려 있는 현관문

아치형의 안쪽에

호주 선교사네 흔들의자 크고 실한

해는 한 뼘 비켜 서고, 그런데

마당 한쪽에 웬일일까 남새밭이 있고

세조 때의 僉知中樞府事(첨지중추부사)처럼 생긴

눈이 부리부리한 젊은 토종닭이 한 마리,

ヨコハマ(요코하마)헌병대 겨울 감방에서

나는 깜박 꿈을 꾼 모양이다.

뒤꼭지의 꼭두서니 빨간 그 볏,

 

* 통영읍 서북쪽에 있는 산

 

8

저녁은

일모(日暮)라고도 한다.

일모는

내가 누군가의 눈에 눈물을 본

갑골문자의 그때부터

저녁을 닦아내고 닦아내는

하얀

얼룩이 되곤 한다.

저녁에 어스름 어둠 곁에 서면

나무 하나가 머리 빗고

불 켜인 그쪽으로 다가간다.

세다가야서 감방에서 내가 본

크나큰 나의 일모였ㄷ. 그것은

하늘을 다 덮는.

 

9

한 발짝 저쪽으로 발을 떼면

거기가 곧 죽음이라지만

죽음한테서는

역한 냄새가 난다.

나이 겨우 스물둘, 너무 억울해서

나는 갓 태어난 별처럼

지상의 키 작은 아저씨

귀쌈을 치며 치며

울었다.

한밤에는 도 한 번 함박눈이 내리고

마을을 지나 나에게로 몰래

왔다 간 사람은 아무 데도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10

알은

언제 부화할까.

나의 서기 1943년은

손목에 쇠고랑이 차인 채

해가 지자

관부(關釜) 연락선에 태워졌다.

나를 삼킨 현해탄,

부산 수상서(水上署)에서 나는

넋이나마 목을 놓아 울었건만

세상은

개도 나를 모른다고 했다.

 

11

호야, 네 숨이 멎던 그날은 시베리아로 가는 티티새의 무리가 하늘을 가맣게 덮고 있었다. 그때가 봄이던가 여름이던가, 비쭈기나무, 아니 죽어서 어느새 꽃 핀 쥐오줌풀에 가 앉은 너는 (나더러) 누군가 나를 데리러와서 나를 찾아낼 때까지 꼭꼭 숨어서 얼굴 가리고 네잎 토끼풀처럼 망국의 왕세자처럼 그렇게 살아라 했다.

 

지금은 닫힌 눈꺼풀

그 틈새로

네 눈물의 젖은 속눈썹이 조금 보인다.

 

12

인카네이션, 그들은

육화(肉化)라고 하지만

하느님이 없는 나에게ㅐ는

몸뚱어리도 없다는 것일까.

나이 겨우 스물둘인데

내 앞에는

늙은 산이 하나

대낮에 낮달을 안고

누워 있다.

어릴 때는 귀로 듣고

커서는 책으로도 읽은

천사,

그네는 끝내 제 살을 나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맨발로 바다를 밟고 간 사람은

새가 되었다지만

그의 젖은 발바닥을 나는 아직 한 번도

본 일이 없다.

 

13

갓 태어난 바다

갓 태어난 북신리(北新里)의 하늘을

작은 제 겨드랑이에 끼고

그날 아침 목성에서 날아온

새 한 마리,

새 한 마리 앞에 섰다 뒤에 섰다

외가 가던

장다리꽃 피어 있던

미나리아제비꽃 피어 있던

너무 깊어 해 저물던

논둑길, 아무도 모르리라.

그 길이 내 길이었음을,

죽어서도 그 길이 나만의 내 길이었음을.

 

14

총을 메고 사내들은

멀리 떠나가고

얼굴에서 화장을 지우고

여자들은 하루하루 목덜미가

야위어갔다.

천황폐하와

나라를 위해서라고 했지만

천황폐하와

나라가 없는 나는

꿈에 나온

조막만 한 왜떡 한쪽에

밤마다

혼을 팔고 있었다.

누구도 용서해주고 싶지 않았다.

들창 밖으로 날아간 새는

해가 지고 밤이 와도

돌아와 주지 않았고

가도 가도 내 발은

세다가야서 감방

천길 땅 밑에 있었다.

 

15

옛날에 소월 김정식이라던가

그런 시인이 있어

어제도 오늘도 아니 잊고

먼 후일 그때에 잊었다고 했다는데

정말일까,

사각의 네 개의 모가

떨어지는

눈물의

아프디 아픈 그 관모(冠毛)를

호야, 죽어서도 너는

잊을 수가 있을까

 

16

하늘에 입이 없듯이

몰도래야,

네 입은

입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이슬만 받아 먹고 이슬똥만 누는

물도래야,

너느 날 네 입이

들판 하나를 몽땅 먹어치운다 해도

답답하구나.

엊그저께 갑자기 네 입은 나처럼

울대를 잃었구나.

말을 못하는구나.

 

17

남의 집을

누가 울타리를 걷어차고 구둣발로

짓밟는다.

남의 넋은

내 발의 고린내라는 말이

있다고는 하지만

걷어차이고 짓밟히는 것은

남의 뼈 남의 살인데

누가 어디서

소리 죽이고 이 갈며

울고 있다.

 

18

네 꿈을 나는

훔쳐볼 수가 없다.

아름다울 프랑스말

아날로지.

30년대 말의 어느 날

긴자에서 봤던가, 영화의 포스터

‘악마는 순수하다’고,

육체는 모양이 없고

영혼은 잠자고 싶어 하던 그때,

이름도 모르는 나무의

길게 늘어진 가지 하나가

내 쪽으로 부러지고

어둠과 함께 갑자기

저녁이 왔다.

그 많은 나뭇잎 중에서

왜 하필 어느 하나만이 그때

그런 소리를 냈을까.

올빼미도 눈을 감는

슬픈 밤이 오고 있다고,

네 꿈을 네가

훔쳐볼 수 없듯이

악마는 순수하듯이

프랑스말 아날로지는 언제나 그대로

아름다운데,

 

19

꿈은 참 희안하다.

 

어디선가 멧종다리가 한 마리

할 말이 있는 듯 날아왔다.

말은 하지 않고 어디론가 또

날아갔다.

한 아이는 오뉴월 풋고추 같은

남근만 하나 달랑 달고

개울을 지나 또 하나

개울을 지나 자갈밭에 양파의

하얀 꽃이 피는

선비족의 어느 머나먼 마을로

가고 있었다.

 

20

‘세르팡’은 배암이지만

배암의 프랑스말이지만

한때의 나의 ‘이브’였다.

‘세르팡’을 겨드랑이에 끼고

꿈을 잃은 식민지의 젊은이처럼

남의 나라 거리에서 나는 왠지

눈물이 글썽했다.

모든 것이

전쟁까지가

모난 괄호 안에 들어가고 있었다.

마르크스와 자본론까지가,

30년대도 다 저물어가면서

나에게 때아닌 세기말이 와서

나는 그때

밤잠도 설치며

쉐스토프를 읽고 있었다.

- ‘허무로부터의 창조’

 

21
오마 오마

울옴마야

니 케가 멧자덩가

니 폴이 멧자덩가

니 당군 소풀짐치 눈이 하나

뽈락젓에 또 하나

세미물에 발 씻고

오마 오마

울옴마야

신 신고 가랏

박석고개 해 따갑따앗

 

호야,

서기 1930년인가 31년에도

네가 부른 노래.

 

22

대낮에 갑자기

해가 지고, 그때

나는 신나게 신나게 시들고 있었다.

비가 멎고

릴라꽃 같은

비에 젖은 달이 뜨자

나는 죽고

그날 빰

살을 감추는 별 혹은 석류꽃 그늘에

눈 뜨는 그네,

 

23

무엇이 그렇게도 미안한지

21년 하고도 일곱 달

볕이 드는 쪽으로는 한 발짝도

발을 떼지 않는다.

그네

베라 피그넬의 뒷덜미에

오늘은

진한 은회색의

진눈깨비가 내린다. 배고픈 듯

한 번 더 미안한 듯,

 

24

시로미꽃 꽃바람이

표트르 알레크세비치 크로포트킨의 얼굴을

한 번 다시 보여준다.

소태처럼 쓰디 쓰다.

서기 1921년 봄

모스크바 근교에서 마지막 잎을 떨군

시로미꽃

*

견분(犬糞)도 석양을 받아

모과빛을 내는

센 강변,

구부정한 허리를 하고

피에르 요셉 푸르동이 가고 있다.

고래가 알을 까고, 고래가 깐

알은 moral과 immoral을

까지 않는 그런 시대에 프랑스말로 우아하게

그는 ‘Qu’est-ce que la propriètè?‘라고 말한다.

서기 1872년

인터 하그대회에서

마르크스의 덫에 걸린

미카일 알렉산드로비치 바쿠닌,

그는 그 뒤로 (창핗해서 그럴까?)

아예 소식이 없다.

*

날이 새면 가리라던

날은 새지 않고, 어인 하늘을

이승의 달무리만

가고 있던 서기 1923년 어느 늦가을 밤의

금자문자(金子文子 ).

작은 손과 작은 발

작은 죽음만 가지고도

사랑할 수 있었을까

흑도외(黑濤會)의 박열(朴烈)을,

 

25

반딧불 하나

열(熱)없이

내 손바닥에서 사그라져 간

순하디 순한 그해 여름

나는 죽고, 그때

갓 태어난 그네, 날마다 밤마다

오늘도 그네는

보지 못한

나를 운다.

 

26

무슨 말을 해도 괜찮아요.

오늘은 하느님이 없으니까, 어인

사다새 긴 부리를 조금 분질러놓고

태풍이 막 지나갔어요.

하여간 와(臥)라는 글자가 잘 어울리는 여기는

남쪽 나직한 소읍이에요. 와구(臥久)라고 해요.

우체통이 있고

(우체통은 왜 붉은색이라야 했을까.)

나귀가 한 마리 쭈삣

귀를 세우고 있네요.

길섶에도 오늘 아침

솜 같은 구름 같은 풀꽃들이 피고,

이데올로기는 이제 곧 끝날 거라고

누가 그러네요.

서기 1941년

타향살이 몇 해던가, 목이 쉰

고복수(高福受), 그러나

살다 보면 좋은 일도 있을 것 같은

오늘은

긴 편지를 쓰고 싶어요.

 

27

시몬 시몽

あとめのみうろみ

글쎄 그때

우리말에는 적당한 말이

없었다네.

그해 봄에는 또

타타르해협을 나비가 한 마리

날아갔다고도 하네, 그리고

니시와키 준사부로(西脇俊三郎), 늙은 귀를 쭈뼛

한 번 다시 세웠지. 그의

시칠리아의 파이프에는 [벌써] 가을의 소리가 난다. 고,

 

28

줄글로띄워쓰기와구두점을무시하고동사를명사보다앞에놓고잭슨·프록을앞질러포스트모더니즘으로존·케이시를앞질러소리내지않는악기처럼미국의한병사가갖다준내쓸개한쪽서럽고도서럽던

서기 1945년 8월 15일

 

29

아 다르지 않고

어 다르지 않은 대련(大連) 감옥의

기왓장에 떨어진

빗소리.

어디가 다른가, 한양에서 듣던

빗소리. 조선사람은

무정부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선생께서 들으신

빗소리.

서기 1932년, 그로부터 10년 뒤에

나도 듣게 된

세다가야서 감방의 기왓장에 떨어진

아득하고 아득했던 겨울

빗소리.

 

30

일로 와 어서 와

앵초 하나가 앵초 하나를

손짓하고 있었다.

사내녀석이 눈매가

너무 곱던

(그래서 일찍 죽은) 라몬 나바로.

나이 스물들인데

무정부주의자가 되지 못한 나는

그날

오지 않는 저녁이 오지 않는 저녁의 그늘이 되어주고 있는 것을 보고 있었다.

말의 장난처럼, 글쎄

말의 장난처럼,

 

31

태초에

무정부주의가 있었다. 무정부주의는

발이 없다.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바쿠닌은 입이 크고

크로포트킨은 수염이 아름답다. 가을에는

모과빛이 난다.

시베리아 오지에는 일년 내내

눈이 오고

예예족(芮芮族)의 마을은 너무 멀다.

죽은 늑대의 목뼈가

부러져 있다.

모든 것 다 잊으라고 눈이

쉬지 않고 온다.

 

32

다섯 살 때 나는

천사란 말을 처음 들었다.

내 귀는

봄 바다가 모래톱을 적시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열다섯 살 때 나는

프롤레타리아란 말을

처음 들었다.

명문 중학에 다니는 것이

왠지 미안했다.

모자를 벗고 길을 걸었다.

리비도란 말을 처음 들은 것은

그 이듬해다.

봄에는 수학여행을 갔다.

봉천(奉天)에서 수랍(水蠟) 같은 하얀

양귀비꽃을 봤다. 거기가

만몽백화점(滿蒙百貨店)이던가.

 

33

탱자나무 울 사이

죽도화가 지고

뚜우 하고 뱃고동이 운다.

된장을 엷게 풀어 저녁에는

시락국을 끓인다.

*

서기 1943년 가을

총을 메고

벗은 서주(徐州)로 가고,

긴 꼬리를 달고 그의 그림자도

총을 메고 서주로 가고,

오늘은 황해에서

높새가 분다.

 

34

아쿠다카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의 ‘鼻(비)’에 나오는 화상(和尙)의 코는 해학적이다. 너무 길다. 수세미 외처럼 눈 밑에 대롱대롱 매달린 꼴이다. 코가 그래 가지고는 얼굴에 위엄이 서겠는가?

어느 날, 한 관리가 아침 식사를 막 하려는데, 수프에서 이상한 고기덩이가 하나 나왔다. 사람의 코다. 어디서 많이 본 듯도 하다. 옳지, 7등관인가 8등관인가 하는 그자, 자기 부하인 그 자의 코가 분명하다. 그자의 코가 왜 여기 와 있는가? 코는 짧고 뭉툭하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다는 투다. 예리한 날로 단번에 싹둑 잘라낸 흔적이 역력하다. 제 손으로 그랬을까? 하여간에 그 코는 고골리의 ‘코’에 나오는 그 코다. 그 코는 은밀한 어떤 메시지가 아닐까?

 

내 선친께서는

20년대에 이미 당신의 코 밑에

찰리 채플린 수염을 달고 계셨다.

콧구멍의 위생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하셨지만

그 말씀은

어떤 구실인 듯도 했다.

어떤 때는 코믹하게도 보였고

어떤 때는 또

화가 머리 끝까지 나 있는 듯이도 보였다.

히쿠치라는 일인 치과의사네 집 뜰에는

키 작은 비파나무가 있었다.

아픈 이를 뽑고 나니 비파 열매가 왠지

더욱 작게 보였다.

알고 보니 히쿠지 의사도 코 밑에

찰리 채플린 수염을 달고 있었다.

박열이 죽이려던 일황 히로히토는

162cm의 키에 체중 45kg

고양이등을 하고 있었다.

그도 코 밑에

찰리 채플린 수염을 달고 있었다.

서기 1947년이던가 48년에

염에 흰 것들이 섞이는구나.

이제는 밀어버려야지. 라고

내 선친께서 혼자 하시는 말씀을

나는 아주 서운하게 듣곤 했지만

그 말씀도 결국은

어떤 구실인 듯했다.

 

35

게걸들어 눈두덩에 뿔이 난 아기 도깨비에게

 

닷새만 더 참았다가

동짓날 밤에 니 혼자 살짝 온!

풀죽은 풀죽이고

샐심도 니 나의 시 배는 더 줄게.

내년 봄엔 난리만 끝나믄

육지 앞바다 민어만 한 이뿐

고래도 한 마리 잡아줄게.

 

그랬는데, 서기 1944년 그해 동짓날 밤에 그는 오지 않았다. 내 말이 믿기지 않았던 모양이다. 특히 그 전반부의 후반이, (사투리가 심해서 그 부분을 알아듣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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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새장의 문을 닫고 새의 날개짓을

생각했다. 그것이 곧

내 몫의 자유다.

모난 것으로 할까 둥근 것으로 할까

쭈뼛하니 귀가 선 서양 것으로 할까, 하고

내가 들어갈 괄호의 맵시를

생각했다. 그것이 곧

내 몫의 자유다.

괄호 안은 어두웠다.

불을 켜면

그 언저리만 훤하고 조금은

따뜻했다.

서기 1945년 5월,

나에게도 뿔이 있어

세워보고 또 세워보고 했지만

부러지지 않았다. 내 뿔에는

뼈가 없었다.

괄호 안에서 나서 괄호 안에서

자랐기 때문일까 달팽이처럼,

 

 

 

처용삼장(處容三章)

김춘수 

 

1

그대는 발을 좀 삐었지만

하이힐의 뒷굽이 비칠하는 순간

그대 순결(純潔)은

형(型)이 좀 틀어지긴 하였지만

그러나 그래도

그대는 나의 노래 나의 춤이다.

 

2

유월(六月)에 실종한 그대

칠월(七月)에 산다화(山茶花)가 피고 눈이 내리고,

난로(煖爐) 위에서

주전자(酒煎子)의 물이 끓고 있다.

서촌(西村) 마을의 바람받이 서북(西北)쪽 늙은 홰나무,

맨발로 달려간 그날로부터 그대는

내 발가락의 티눈이다.

 

3

바람이 인다. 나뭇잎이 흔들린다.

바람은 바다에서 온다.

생선 가게의 납새미 도다리도

시원한 눈을 뜬다.

그대는 나의 지느러미 나의 바다다.

바다에 물구나무 선 아침하늘,

아직은 나의 순결(純潔)이다.

 

 

 

천리향(千里香)

김춘수

 

꽃망울 하나가 가라앉는다.

얼음장을 깨고 깊이깊이

가라앉는다.

어둠이 물살을 그쪽으로 몰아 붙인다.

섣달에 홍역(紅疫)처럼 돋아난

꽃망울,

저녁에는 함박눈이 내린다.

마을을 지나

잡목림(雜木林) 너머 왔다 간 사람은

아무데도 발자국을 남기지 못한다.

 

 

 

천사

김춘수

 

그것은 처음에는 한 줄기의 빛과 같았으나 그 빛은

열 발짝 앞의 느릅나무 잎에 가 앉더니 갑자기

수만 수천만의 빛줄기로 흩어져서는 삽시간에 바다를

덮고 멀리 한려수도로 까지 뻗어가고 말더라.

그 뒤로 내 눈에는 늘 아지랑이가 끼어 있었고,

내 귀는 봄 바다가 기슭을 치고 있는 그런 소리를

자주자주 듣게 되더라.

 

 

 

청마(靑馬)의 헬멧

김춘수

 

해방 직후, 솜 입힌 불쌈만 차고 낮잠을 자는 청마의 머리맡에

어언 헬멧 하나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언젠가는 복막염 수술을 받고 누웠는 청마를 문병하고 나오는데 어인

헬멧 하나가 따라 나와 나를 자꾸 뒤돌아보게 했다

엊그저께는 꿈에 또 어인 헬멧 하나가 사하라 사막을 어쩌자고

떼굴떼굴 혼자서 굴러가고 있었다

바퀴도 없이.

 

 

 

치혼

김춘수

 

아흔 살 난 마슬로바 할머니가 말합니다.

자식을 낳아

하나둘 키워보면

불이 얼마나 따뜻한가를 알게 된다고.

그런데

루바슈카만 걸치고 겨울 밤

우스리 강을 건너는 그분의

야윈 그림자를

시인 릴케가 보았다고 합니다.*

승정님,

승정님의 넓고 넓은 가슴에

씨를 뿌리는 일은

겨레의 몫입니다.

아시겠지만 이 땅에는

교회의 종소리에도 아낙들 물동이에도

식탁보를 젖히면 거기에도

천사가 있습니다. 서열에는 끼지 않은

천사가 있습니다.

 

슬라부 겨레의 내일을 굳게 믿는

샤토프 올림.

 

* 릴케의 기행 소설 「하느님 이야기」에 나온다.

 

 

 

칸나

김춘수

 

하늘이 밍밍하다.

눈썹이 없다.

낯 가리고 대낮에 반음 소리내던

까만 겉눈섭도 젖은 눈시울도 이젠

없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까치가 다 쪼아먹고

하늘에는 눈이 없다.

없는 것이 너무 많은 하늘이

남의 집 울타리에 하릴없이

다리 하나를 걸치고 있다.

 

 

 

타령조(打令調) 

김춘수

 

1

사랑이여, 너는

어둠의 변두리를 돌고 돌다가

새벽녘에사

그리운 그이의

겨우 콧잔등이나 입 언저리를 발견(發見)하고

먼동이 틀 때까지 눈이 밝아 오다가

눈이 밝아 오다가, 이른 아침에

파이프나 입에 물고

어슬렁어슬렁 집을 나간 그이가

밤, 자정(子正)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는다면

어둠의 변두리를 돌고 돌다가

먼동이 틀 때까지 사랑이여, 너는

얼마만큼 달아서 병(病)이 되는가,

병(病)이 되며는

무당(巫堂)을 불러다 굿을 하는가,

넋이야 넋이로다 넋반에 담고

타고동동(打鼓冬冬) 타고동동(打鼓冬冬) 구슬채찍 휘두르며

역귀신(役鬼神)하는가,

아니면, 모가지에 칼을 쓴 춘향(春香)이처럼

머리칼 열 발이나 풀어뜨리고

저승의 산하(山河)나 바라보는가,

사랑이여, 너는

어둠의 변두리를 돌고 돌다가……

 

2

머나먼 홍모인(紅毛人)의 도시

비엔나로 갈까나,

프로이드 박사를 찾아갈까나,

뱀이 눈 뜨는

꽃 피는 내 땅의 삼월 초순에

내 사랑은

서해로 갈까나 동해로 갈까나,

용의 아들

나후라(羅吼羅) 처용(處容) 아빌 찾아갈까나,

엘리엘리나마사박다니

나마사박다니, 내 사랑은

먼지가 되었는가 티끌이 되었는가,

굴러가는 역사의

차바퀴를 더럽히는 지린내가 되었는가

구린내가 되었는가,

썩어서 과목(果木)들의 거름이나 된다면

내 사랑은

뱀이 눈 뜨는

꽃 피는 내 땅의 삼월 초순에,

 

3

지귀(志鬼)야,

네 살과 피는

호젓이 혼자서 타지 못할까,

환장한 네가 종로(鍾路)를 가면

남녀노소의 구둣발에 차일 뿐이다.

금팔찌 한 개를 벗어주고

선덕여왕께서 떠나신 뒤에

지귀야,

네 살과 피는 삭발(削髮)을 하고

호젓이 혼자서 타지 못할까,

환장한 네가 종로를 가면

남녀노소의 구둣발에 차일 뿐이다.

때마침 내리는

밤과 비에 젖을 뿐이다.

-오한(惡寒)이 들고 신열이 날 것이다.

지귀야,

 

4

빠스깔 쁘띠의 헤어스타일을 하고

이촌(二寸) 오분(五分) 높이의 하이힐을 신고 당신은

지금 어디를 간다고 가고 있는가,

플라타너스에는 미풍이 있고

미풍에 나부끼는

색색가지 빛깔의 뉴스가 있고

비둘기 똥도 두어 곳 떨어져 있는

한여름 그러한 네거리를

가슴을 펴고 활개를 치며

당신은 가려거든 가거라,

장마 뒤 땡볕에 얼굴을 굽히며

잘생긴 콧등에 썬글라스도 멋지게 얹고

가슴을 펴고 활개를 치며

당신은 가려거든 가거라,

가려거든 가거라, 산에서 날아온

산비둘기다.

천둥이 울고 간 다음날 아침의

당신은 칠월달 나팔꽃이다.

빠스깔 쁘띠의 헤어스타일을 하고

이촌 오분 높이의 하이힐을 신고 당신은

지금 어디를 간다고 가고 있는가.

 

5

쓸개 빠진 녀석의 쓸개 빠진 사랑을 보았나,

녀석도 참

나중에는 제 불알을 따서

새끼들을 먹였지,

애비의 불알 먹는 새끼들을 보았나,

그래서 녀석의 새끼들은

간(肝)이 곪았지,

불알 먹었다. 불알 먹었다.

불쌍한 울아부지 불알 먹었다.

그래서 녀석의 새끼들은

뿔이 돋쳤지,

눈두덩에 뿔이 돋친 귀신(鬼神)이 됐지,

쓸개 빠진 녀석의 쓸개 빠진 사랑을 보았나,

녀석도 참

나중에는 오뉴월 구름으로 흐르다가

입춘 가까운 눈발로도 쓸리다가

히히 히히 히

쓸개 빠진 녀석은 쓸개 빠진 웃음을

웃을 뿐이지,

 

7

시무룩한 내 영혼의 언저리에

툭 하고 하늘에서

사과알 한 개가 떨어진다.

가을은 마음씨가 헤프기도 하여라.

땀 흘려 여름 내내 익혀온 것을

아낌없이 주는구나.

혼자서 먹기에는 부끄러운 以上으로

나는 정말 처치곤란이구나.

누구에게 줄꼬,

받아든 한 알의 사과를

사랑이여,

나는 또 누구에게 줄꼬,

마음씨가 옹색해서

삼시 세 끼를 내 먹다 남은 찌꺼기

비릿한 것의

비릿한 그 오장육부 말고는

너에게 준 것이라곤 나는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 허구한 날 손가락 끝이 떨리기만 하고

나는 너에게

가을에 사과 알 한 개를 주지 못했다.

받아든 한 알의 사과를

사랑이여,

나는 또 누구에게 줄꼬.

 

8

등골뼈와 등골뼈를 맞대고

당신과 내가 돌아누우면

아테네 사람 플라톤이 생각난다.

잃어버린 유년, 잃어버린 사금파리 한쪽을 찾아서

당신과 나는 어느 이데아 어느 에로스의 들창문을

기웃거려야 하나,

보이지 않는 것의 깊이와 함께

보이지 않는 것의 무게와 함께

육신의 밤과 정신의 밤을 허우적거리다가

결국은 돌아와서 당신과 나는

한 시간이나 두 시간 피곤한 잠이나마

잠을 자야 하지 않을까,

당신과 내가 돌아누우면

등골뼈와 등골뼈를 가르는

오열과도 같고, 잃어버린 하늘

잃어버린 바다와 잃어버린 작년의 여름과도 같은

용기가 있다면 그것을 참고 견뎌야 하나

참고 견뎌야 하나, 결국은 돌아와서

한 시간이나 두 시간 내 품에

꾸겨져서 부끄러운 얼굴을 묻고

피곤한 잠을 당신이 잠들 때

 

 

 

9

재떨이에 던져진 꽁초

멋대로 나동그라진 꽁초,

흰 자윌 드러내고

천정을 치떠보는 꽁초,

지그시 눈을 감고

필터를 깨물던

타고 있던 그때가 멋이었구나.

멋이었구나, 거리로 나서자

밤과 낮의 뒤통수에

퐁 불구멍을 내 주던

그때가 그래도 멋이었구나.

재떨이에 던져진 꽁초

멋대로 나동그라진 꽁초

흰 자윌 드러내고

천정을 치떠보는 꽁초는

필터 가까운 한 부분이

아직 한 번도 타지 못한 그 부분이

이젠 좀 분하고 억울할 따름이라네.

 

10

이세반도(伊勢半島)에서 온 오토미

네 말을 빌리면

지형이

태평양을 바라고 기어가는 거북이 모양인 밀감밭에서

밀감은 따지 않고

바다에만 먼눈을 팔다가 일터를 쫓겨난 오토미

빠 쿠로네꼬의 여급이 된지

채 열흘이 안 되는 오토미

오토미의 손등은 나이보다 늙고 꺼칠했지만

오토미의 볼과 이마는 이세반도의 밀감밭의

밝은 밀감빛이었다고 할까

나이 열다섯만 되면 마음이 익는다는

이세반도에서 온 열아홉 살 오토미의 눈에는

그 커단 눈에는

태평양보다는 훨씬 적지만

바다가 너울거리고 있었다

오토미, 너는 모를 것이다

그로부터 일 년 뒤

세다가야 등화 관제한 하숙방에서

시도 못 쓰고 있는 나를

한국인 헌병보가 와서 붙들어 갔다

오토미, 참 희한한 일도 있다

어젯밤 꿈에

이십 년 전 네가 날 찾아왔더구나

슬픔을 모르는 네 커단 두 눈에는

태평양보다는 훨씬 적지만

바다가 여전히 너울거리고 있었다

 

11

페넬로프,

춘하추동(春夏秋冬) 자라는 그대 음모(陰毛)

의 아마존강(江) 유역(流域)에서

나는 길을 잃고,

그대 스물네 개의 늑골(肋骨)에서

아담보다도 하나 많은

스물네 개의 그대 어둠이 밀려오는

을지로(乙支路) 어디서

나는 또 길을 잃고,

목이 타서

십 오 원짜리 레몬 쥬스로 목을 축이며

나움 가보의 사진판(寫眞版)이 걸린

삼층(三層) 다방(茶房)에서

유연(悠然)히 한때

남산(南山)을 마주보는 자세(姿勢)로 있다가

십 오 원짜리 레몬 쥬스로 목을 축이며

문득

스물일곱 살의 이상(李箱)을 생각하다가

생각하다가, 무엇일까

기중기(起重機)가 쇠줄을 타는 듯한

끼이끼이 끼꺽 하는

소리를 들으며, 생각 속에서

나는 또다시 길을 잃고 헤매느니라

페넬로프,

 

12

어머니,

미지(未知)의 산하(山河)를

너울거리는 봄바다의 수소(水素)이온

의 어머니,

춘하추동(春夏秋冬) 자라는

당신의 음모(陰毛)

의 아마존강(江) 유역(流域)에서

오늘 밤

눈에 불을 켜고 암흑(暗黑)으로 투신(投身)한 악어(鰐魚)는

악어(鰐魚)는 내일 아침 꽃 필

수련화(水蓮花) 꽃잎

의 달님 같은 어머니,

미지(未知)의 산하(山河)를

너울거리는 봄바다의 산소(酸素)이온

의 어머니,

 

 

 

표토르 어르신께

김춘수

 

소냐가 꿈에 절 봤대요.

어딘가 멀리 길을 떠나고 있었대요.

어딜 가느냐고 물었더니

그리움만 있고 남자는 없는 거기라고

입술 살짝 깨물더래요.

어르신,

어르신은 돈에 인색하고 나이도 많지만

어르신은 살진 궁노루,

어르신 배꼽 밑엔 향낭이 있잖아요. 넋을 잠재우는

말하자면 어르신껜 남자만 있고

그리움은 없지만

저에겐 그게 더 좋아요.

소냐에게 한 소린 괜한 소리예요.

그건 꿈이니까요.

 

겉 못 잡고 넋이 떠도는

(거리의 여자) 구르센카 드림.

 

 

 

통영읍(統營邑)

김춘수

 

도깨비불을 보았다.

긴 꼬리를 단

가오리 모양을 하고 있었다.

비석고개,

낮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뜨음했다.

시구문에는 유약국이 살았다.

그 집 둘째가 청마 유 치환,

행이불언(行而不言)이라

밤을 새워 말술을 푸되

산군처럼 그는 말이 없고

서느렇던 이마,

해저(海低)터널 너머

해핑이로 가는 신작로 그 어디 길섶

푸르스름 패랭이꽃, 그리고

윤 이상,

각혈한 그의 핏자국이 한참까지

지워지지 않았다.

늘 보는 바다

바다가 그날은 왜 그랬을까,

뺨 부비며 나를 달래고

또 달래고 했다.

그날 발진티푸스를 앓고

나는 온몸이 한창 벌집처럼 달아 있었다.

 

 

 

 

품을 줄이게

김춘수

 

뻔한 소리 하지 말게

차라리 우물 보고 숭늉 달라고 하게

뭉개고 으깨고 짓이기는 그런

떡 치는 짓거리는 이제 그만 두게

훌쩍 뛰어넘게

모르는 척

시치미 딱 떼게

한여름 대낮의 산그늘처럼

품을 줄이게

시(詩)는 침묵으로 가는 울림이요

그 자국이니까.

 

 

 

하늘

김춘수

 

언제나 하늘은 거기 있는 듯

언제나 하늘은 흘러가던 것

 

아쉬운 그대로

저 봄풀처럼 살자고

밤에도 낮에도 나를 달래던

그 너희들의 모양도

 

풀잎에 바람이 닿듯이

고요히 소리도 내지 않고

나의 가슴을 어루만지던

그 너희들의 모양도

 

구름이 가듯이

노을이 가듯이

언제나 저렇게 흘러가던 것

 

 

 

하늘 수박

김춘수

 

바보야, 우찌 살꼬

바보야,

하늘 수박은 올리브빛이야, 바보야

바람이 자는가 자는가 하더니

눈이 내린다 바보야,

우찌 살고 바보야

하늘 수박은 한여름이다. 바보야,

올리브 열매는 내년 가을이다 바보야,

우찌 살꼬 바보야,

이 바보야

 

 

 

허리가 긴

김춘수

 

등이 휘도록 죄를 짊어지고

라스코리니코프는 시베리아로 가고,

죄를 씻는다고 드미트리도

짧은 허리를 추스르며 시베리아로 갔다.

가고 싶은 시베리아, 그러나

나 누루무치와 내 동생 우루무치는

허리가 긴 족속, 죄를 짓고도

아무르강을 건너지 못하다.

다리가 짧아,

 

 

 

혁명

김춘수

 

얼룩,

세상은 하얗게 얼룩이 지고

무릎이 시다.

발 아래 올해의 분꽃은 지고

소리도 없다.

꿀밤 먹은 멧돼지처럼

너는 너 혼자 너무 멀리 달아났구나,

베르호벤스키, 너

넙치눈이,

 

 

 

흔적

김춘수

 

망석이 어디 갔나

망석이 없으니 마당이 없다

마당이 없으니 삽사리가 없다

삽사리가 없으니

삽사리가 짖어대면

달이 없다

망석이 어디 갔나

 

 

 

H 베르호벤스키에게

김춘수

 

샤토프는 네가 죽이지 않았다.

죽일 수도 없었다.

샤토프는 너로부터

너무 멀리 가 있었다.

샤토프는 말하자면 공자 다음가는

�q이다.

너는 겨우 네 발등에다

불을 놨을 뿐이다.

너는 개똥을 수집, 약을 쑨다 했지만

개똥은 개똥이다. 온 거리에

구린내만 분분하다.

너는 타고난 넙치눈이,

나를 보지 못한다.

말해 줄까,

날개에 산홋빛 발톱을 단

archaeopteryx라고 하는

나는 쥐라기의 새, 유라시안들은 나를 악령이라고도 한다.

내가 누군지 알고 싶어

거웃 한 올 채 나지 않은

나는

내 누이를 범했다. 그

산홋빛 발톱으로,

 

흑해 바닷가 별장에서

스타브로긴 백작.

 

 

 

k, 스승님께

김춘수

 

죽음은 형이상학입니다.

형이상학은 형이상학으로 흔듭니다만

죽음을 단 1분도 더 견디지 못합니다.

심장이 터집니다.

저의 심장은 생화학입니다.

수소가 7할이나 됩니다.

억울합니다.

 

키리로프 다시 올림, 이제

죽음이 주검으로 보입니다.

 

 

 

1880년 페테르부르크

김춘수

 

낮에 이반이 길바닥에다

힝 하고 코를 풀면

밤에는 잠 속에서 즈메르자코프가

뿌드득 이를 간다.

하느님은 그렇다 치고

알렉산드르 2세는 배알도 없나,

세상의 허구한 낮과 밤을

저들 둘이가 저희 맘대로 왜

주무르고 휘젓고 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