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사이 달이 떠 달빛이 동쪽 창문 가득해졌다. 그럭저럭 술이 얼큰해진 무송(武松)은 그때까지의 조심성을 모두 잃고 함부로 마셔 대기 시작했다.
그걸 살피던 장 도감이 이번에는 아끼는 수양딸을 불러냈다. 옥란이라는 아가씨로 원래는 노래를 부르던 여자였다.
"여기 다른 사람은 없고 내가 믿는 무(武) 도두뿐이다. 한가위 달을 보고 들을 만한 노래나 한 곡 돌려다오."
장 도감이 그렇게 말하자 옥란은 상아로 만든 박자판을 들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소동파의 '중추수조가(中秋水調歌)'였다.
'밝은 달 떠오르기 몇 번이던가
잔 잡고 푸른 하늘 우러러 묻노라......'
그렇게 시작한 노래가 끝나자, 옥란은 다시 상아 박자판을 내려놓고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절하며 복을 빌었다.
옥란이 한켠으로 물러서려는 걸 보고 장 도감이 다시 말했다.
"얘야, 네가 모두에게 술 한 잔씩 쳐라."
그러자 옥란은 술병을 들어 먼저 장 도감에게 따르고 이어 그 부인에게도 따른 뒤 무송에게로 다가갔다.
장 도감은 옥란에게 잔을 가득 채우라고 소리쳤다. 그에 따라 찰찰 넘치게 따라진 잔을 무송(武松)은 감히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마셨다.
무송(武松)이 술잔을 내리는 걸 보고 장 도감이 옥란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아이가 총명할 뿐 아니라 음률도 좀 알고 바느질 솜씨도 뛰어나다네. 자네가 싫지 않다면 며칠 안에 좋은 날을 골라 자네에게 시집을 보냈으면 하네."
정말 뜻밖의 소리였다. 무송(武松)이 일어나 두 번 절하며 사양의 말을 하였다.
"저를 어떻게 보아주셨는지 모르나 제가 어찌 감히 상공의 가족을 아내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너무 분에 넘치는 일입니다."
장 도감이 사람 좋은 양 껄껄 웃으며 다짐했다.
"내가 이미 내뱉은 말이니 반드시 자네에게 시집보내겠네. 자네야말로 이 약속을 잊지 말게."
무송으로서는 술맛이 아니 나려야 아니 날 수 없는 소리였다. 죄수의 몸으로 유배 온 노총각에게 아리땁고 총명한 아가씨를 안겨 주겠다니 그게 어찌 그냥 들어 넘길 소린가. 이에 흥이 오른 무송(武松)은 그날 밤 다시 큰 잔으로만 잇따라 열댓 잔을 더 받아 마셨다.
아무리 무송이라 해도 그쯤 되니 술이 아니 오를 수 없었다. 너무 취해 실수라도 할까봐 상공 내외에게 절하고 그 술자리에서 빠져나왔다.
주방에 이르러 무송(武松)은 다시 술과 밥을 더 먹고 제 방으로 돌아갔지만 영 잠이 오지 않았다. 옷을 벗고 머릿수건도 푼 채 뜰에 나와 달빛 아래서 봉 쓰기를 단련했다. 대여섯 차례 봉을 휘둘러 솜씨가 아직 무디어지지 않았음을 확인한 뒤 하늘을 쳐다보니 밤은 어느새 삼경이었다.
무송(武松)은 다시 제 방으로 들어가 벗은 몸으로 누웠다. 무송(武松)이 막 잠이 들려는데 문득 뒤뜰에서 한마디 찢어지는 듯한 외침이 들렸다.
"도둑이야!"
그 소리를 들은 무송(武松)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도감 어른께서 나를 이토록 아껴 주시는데 뒤뜰에 도둑이 들었다는 소리를 듣고 어찌 가서 잡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 생각으로 몽둥이 하나를 찾아 들고 얼른 뒤뜰로 뛰어들었다. 비명을 지른 것은 아까 술자리에서 노래하던 옥란이었다. 그녀는 무송을 보자 다급한 목소리로 한쪽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도둑이 뒤뜰 꽃밭 쪽으로 갔어요!"
그 소리를 들은 무송(武松)은 나는 듯 뒤뜰 꽃밭 있는 데로 달려갔다. 그러나 꽃밭을 한 바퀴 다 돌아도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무송(武松)은 다시 도둑을 찾아 다른 곳을 더듬어 보기로 했다. 그래서 무송이 막 몸을 돌리려는데 어둠 속에서 누가 의자로 무송을 후려쳤다. 술만 그렇게 취해 있지 않아도 허술히 당하지는 않았을 무송이었지만 그 판에서는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벌렁 자빠졌다.
그때 일고여덟 명의 군졸들이 우르르 달려들더니 쓰러져 있는 무송을 덮쳐 동아줄로 꽁꽁 묶으며 외쳤다.
"나야, 나라구."
무송(武松)이 급해서 연신 그렇게 소리쳤으나 그 군졸들은 들은 척도 않고 무송을 끌고 갔다. 무송(武松)이 그새 촛불이 훤히 밝혀진 대청 앞으로 끌려가자, 장 도감이 대청 높이 앉았다가 엄하게 물었다.
"도둑을 잡아 왔느냐?"
"예."
군졸들이 그런 대답과 함께 아무 설명 없이 무송을 장 도감 앞에 들이대었다.
무송(武松)이 억울해 소리쳤다.
"저는 도둑이 아닙니다. 무송입니다."
그때까지도 장 도감을 하늘 같은 은인으로만 믿고 있던 무송이었다. 한마디로 당장 자신을 풀어 줄 줄 알았으나 아니었다. 장 도감은 오히려 무송인 걸 보고 더욱 성이 나 얼굴까지 붉히며 꾸짖었다.
"네놈이 죄수로 유배를 온 것은 원래가 도둑놈의 심보와 행실이 있어서였구나. 나는 그래도 네놈을 사람답게 만들려고 죄수 중에서 뽑아내 곁에서 일하게 했다."
그리고 제 김에 가빠진 숨을 추스르더니 다시 소리 높여갔다.
"내 아직 너에게 한 점 섭섭하게 한 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한자리에 앉게 하고 술까지 내렸다. 또 앞으로는 너에게 작으나마 벼슬까지 주려 했는데, 네놈이 어찌 내 집에서 이럴 수 있느냐?"
무송(武松)이 너무 기가 막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상공 어른, 저는 도둑이 아닙니다. 도둑을 잡으로 달려 나온 사람을 어찌 거꾸로 도둑으로 모십니까? 이 무송은 하늘 아래 떳떳한 장부로서 도둑질 같은 짓은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장 도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제 네놈의 말은 믿을 수가 없다. 여봐라, 저놈을 끌고 저놈의 거처로 가서 도둑질한 물건이 없는가를 살펴보아라."
그렇게 엄한 명을 내릴 뿐이었다.
군사들은 무송을 끌고 그의 방으로 가서 그가 장만한 버드나무 고리짝을 열어보았다. 위에는 옷가지가 덮여 있고, 아래에는 은으로 만든 술잔과 그릇들이 숨겨져 있었다. 은으로 쳐서 백이십 냥은 넘는 무게였다. 그걸 본 무송(武松)은 하도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힐 뿐 아니라 눈까지 아뜩했다. 비로소 자신이 함정에 빠져도 모진 함정에 빠진 걸 짐작했으나, 이미 모든 게 늦어 버린 뒤였다.
꼼짝없이 묶인 몸으로 그 장물들과 함께 대청으로 끌려갔다. 장 도감이 그 장물을 보고 한층 소리 높여 꾸짖었다.
"이 흉측한 도둑놈아, 네놈이 어찌 감히 이럴 수가 있단 말이냐? 장물이 너의 상자에서 나왔는데도 여전히 발뺌을 할 작정이더냐? 옛말에 이르기를 짐승은 기르기 쉬워도 사람은 기르기 어렵다더니, 네놈이 바로 그렇구나. 겉은 멀쩡한 놈이 속은 짐승 같다니! 이미 장물이 나왔으니 잔소리 마라."
그런 다음 장물은 따로 봉해 두게 하고 무송(武松)을 기밀방에 가두게 했다.
"이놈, 날이 밝은 뒤에도 그런 어거지를 쓰는가 보자."
그렇게 벼르는 장 도감에게서 얼마 전에 제 살이라도 베어줄 듯하던 인정은 찾아볼 길이 없었다. 무송(武松)은 큰 소리로 자신의 억울함을 나타냈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송이 알면 더욱 분통 터질 일은 그날 밤 장 도감이 주의 지부(知府)와 압사(押司) 공목(孔目)에게 한 일이었다. 장 도감은 사람을 보내 그 모두에게 무송이 한 짓을 알린 뒤 아래위 골고루 돈을 뿌려 무송을 꼼짝없이 도둑으로 몰게 하였다.
다음 날 날이 밝자 무송(武松)은 맹주부(孟州府)로 끌려갔다. 지부가 부청에 높이 앉아 있는 아래 즙포관찰(緝捕觀察)이 무송과 장물을 끌어다 놓았다. 장 도감의 집에서도 무송의 도둑질을 고소하는 문서와 함께 증인 설 사람들이 여럿 나왔다.
지부는 형리 옥리를 불러 무송을 문초할 기구를 차리게 했다. 무송(武松)이 입을 열어 자신의 억울함을 밝히려 했으나 지부는 호령부터 먼저 했다.
"원래 죄짓고 유배 온 놈이 도둑이 아니면 누가 도둑이겠느냐, 재물을 보자 엉큼한 마음이 일시에 인 거겠지. 이미 장물까지 나왔는데 무슨 헛소리냐? 여봐라, 저놈을 엄히 다루어 모든 걸 제 입으로 털어놓게 하라!"
그러자 형리들의 대나무 매가 비 오듯 무송의 몸에 떨어졌다. 매 아래 장사 없다고, 한나절 매타작을 당하고 나자, 무송(武松)도 더 배겨낼 재간이 없었다. 별수 없이 지부가 바라는 대로 죄를 뒤집어쓸 수밖에 없었다.
"이달 보름, 장 도감 댁에 은으로 된 그릇들이 많음을 보고, 일시에 훔칠 마음이 생겨 밤중에 들어가 훔쳤습니다."
대강 그런 조서를 무송의 입에서 받아 내자 지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다시 명령을 내렸다.
"저놈에게 칼을 씌워 감옥에 가두어라."
이에 옥리들이 달려들어 무송에게 큰 칼을 씌우고, 죽을죄를 지은 죄수들이 있는 감옥으로 끌고 갔다.
무송(武松)은 감옥으로 끌려가면서 비로소 모든 걸 짐작했다.
'장 도감 그놈이 나를 함정에 빠뜨렸구나. 만약 내가 이곳을 벗어나게만 된다면 어디 두고 보자!'
무송의 고초는 감옥에 떨어진 데 그치지 않았다. 옥졸들은 무송의 두 다리에 무거운 족쇄를 채우고 두 팔도 사슬로 얽어 움직이기조차 어렵게 만들었다.
한편 무송이 그 꼴이 났다는 소식은 시은의 귀에도 들어갔다. 시은(施恩)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아버지를 찾아가 의논했다. 관영(官營)이 한숨을 내쉬며 아들을 보고 말했다.
"보아하니 장 단련이 장문신의 앙갚음을 장 도감에게 대신 맡긴 것 같구나. 그 모든 일은 장 도감이 무송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한 짓이고, 틀림없이 주부의 위아래 벼슬아치들에게 적잖은 뇌물을 뿌렸을 게야. 그의 돈을 먹었으니 하나같이 장 도감의 말만 믿으려 들 테고..... 하지만 큰일은 그들이 무송을 죽이려 드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죄는 죽을죄까지는 안 되지만, 옥리들을 구워삶아 두는 게 좋겠다. 그래야 그를 살릴 수 있다. 다른 일은 다시 또 의논하자."
시은(施恩)이 문득 한 가닥 밝은 기색을 보이며 그런 관영의 말을 받았다.
"마침 무송을 맡은 절급이 강(康)씨 성을 쓰는 사람으로 저와 아주 친합니다. 그에게 부탁해 보는 게 어떨는지요?"
"무송은 우리 때문에 잡혀 들어간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길이 있다면 지금 가서 그를 구해 주지 않고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느냐?"
관영이 그렇게 아들의 뜻에 찬성했다.
시은(施恩)은 은자 이백 냥을 마련해 곧장 강(康) 절급을 찾아갔다. 그러나 강 절급은 아직도 관청에서 돌아와 있지 않았다. 시은(施恩)은 그 가족에게 시켜 감옥에서 일하고 있는 강 절급에게 자신이 급히 찾는다는 말을 전하게 했다.
오래잖아 소식을 들은 강(康) 절급이 집으로 돌아왔다. 시은(施恩)은 그에게 무송의 일을 낱낱이 말하고 방도를 물었다. 듣고 난 강(康) 절급은 시은이 모르는 일까지 일러 주었다.
"바른대로 일러주면 이렇게 된 것이오. 이번 일은 모두 장 도감과 장 단련이 형제를 맺은 사이인 데서 꾸며진 거요. 지금 장문신(張門神)은 장 단련 집에 와 있으면서, 장 단련을 시켜 장 도감에게 무송을 처치해 달라고 부탁하게 한 거요."
"아마도 이 계책 또한 그가 말해 준 것일 게요. 그리고 관부는 아래위 할 것 없이 모두 장문신의 뇌물을 먹었고 나도 얼마만큼은 받았소."
"그 바람에 지부 이하 모두가 무송을 죽이려 하고 있으나 단 한 사람... 섭(葉) 공목이 말을 듣지 않아 그가 아직 살아 있는 거요. 섭(葉) 공목은 사람이 충직한 데다 의를 무겁게 여겨 죽을죄가 아닌 무송을 죽일 수 없다며 버티고 있소."
"그런데 이제 시(施) 형의 말을 듣고 나니 그냥 있을 수가 없구려. 나는 지금 돌아가서 그가 감옥에 있을 동안은 조금도 괴롭히지 않도록 해 보겠소."
"형은 얼른 섭(葉) 공목을 찾아가 되도록 빨리 판결을 내려 그를 이곳에서 내보내도록 하시오. 그러면 그는 살 수 있소."
시은(施恩)은 그런 강 절급이 고마워 가져간 은자 중에서 일백 냥을 내놓았다. 강(康) 절급은 아니 받으려 하다가 시은이 세 번 네 번 억지로 맡기자 겨우 은자를 거둬들였다.
강(康) 절급의 집을 나온 시은(施恩)은 곧 노영으로 돌아가 섭 공목을 아는 사람을 찾았다. 그리고 그를 통해 섭(葉) 공목에게 은자 일백 냥을 보내며 하루빨리 무송의 사안을 처결해 달라 당부했다.
섭(葉) 공목(孔目)은 그렇지 않아도 무송이 의기로운 호걸임을 알고 그를 구해 주려 애썼다. 그러나 섭(葉) 공목이 아무리 문서를 무송에게 유리하게 꾸며도 지부(知府)가 장 도감의 뇌물을 먹은 터라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오히려 지부(知府)는 무송의 죄가 도둑질뿐으로 법으로는 죽일 수 없자 처결에 질질 날짜를 끌면서 감옥 안에서 어떻게 그의 목숨을 빼앗을 궁리나 했다. 이에 섭(葉) 공목이 내심 안타깝게 여기고 있는데 다시 시은이 보낸 은자 일백 냥과 함께 무송이 모함에 빠진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더욱 무송을 동정하게 된 섭(葉) 공목은 무송의 문서를 서둘러 꾸미고 날만 차면 판결을 내릴 채비를 했다.
다음 날이었다. 시은(施恩)은 술과 안주를 푸짐히 장만한 뒤 강(康) 절급을 앞세우고 무송을 찾아갔다.
그때 이미 무송은 강 절급이 돌봐주어 손발에 채워졌던 족쇄는 풀려 있었다. 시은(施恩)은 은자 삼십 냥을 감옥 안의 높고 낮은 형리들에게 풀어 뇌물을 먹인 뒤 무송에게 술과 밥을 내놓았다.
"이번 일은 장 도감이 장문신을 대신해 앙갚음하려고 형님을 함정에 빠뜨린 것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이미 사람을 놓아 섭(葉) 공목과 통해 놓았고 그 사람도 형님을 좋게 보아 잘해 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기한이 차는 대로 판결을 내릴 것이니 그때 다시 의논하도록 하지요."
시은(施恩)이 무송의 귀에 대고 그렇게 말했다.
그때 이미 무송(武松)은 억울한 나머지 옥을 깨고 달아날 마음을 굳히고 있었으나, 그 말을 듣자 그런 마음을 버렸다. 시은(施恩)은 여러 가지로 무송을 위로하고 제집으로 돌아갔다.
이틀 뒤 시은(施恩)은 다시 밥과 술에 은자까지 듬뿍 지니고 감옥으로 찾아갔다. 강(康) 절급을 앞세워 무송에게 술과 밥을 대접하고, 옥리들에게 부스러기 은을 뿌리니 무송의 옥중 생활은 한층 편해졌다.
며칠 후 시은(施恩)은 또 한 번 무송을 찾았다. 이번에는 술과 밥에 새 옷까지 마련한 면회였다. 강(康) 절급을 내세워 옥 안으로 들어간 시은이 옥리들에게 인심 좋게 한턱을 쓰자, 술 밥뿐만 아니라 새 옷까지 그대로 무송에게 전해졌다. 그렇게 하여 감옥을 드나들기 쉬워지자, 시은(施恩)은 하루에도 몇 번씩 무송을 찾아갔다.
그러다 보니 장 단련의 사람들 눈에 아니 띌 수 없어 그 일은 곧장 단련의 귀에 들어갔다. 장 단련은 얼른 장 도감에게 달려가 그 일을 일렀다. 장 단련은 다시 지부에게 비단과 금을 보내고 그 일을 막아 달라 당부했다.
지부(知附)는 썩어 빠진 벼슬아치라 뇌물을 받자마자 장 도감이 바라는 대로 해 주었다. 사람을 감옥에 보내 일없는 사람이 드나드는 걸 잡아들이게 했다. 그걸 안 시은(施恩)은 두 번 다시 감옥으로 무송을 찾아갈 수 없었다.
그러나 강(康) 절급과 다른 옥리들이 잘해 주어 무송이 견디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시은(施恩)은 강 절급을 통해 무송의 소식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럭저럭 두 달이 흘러갔다. 섭(葉) 공목이 한껏 자초지종을 설명해 대니, 지부도 장 도감이 장 단련을 통해 장문신의 뇌물을 먹고 무송을 모함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으흠, 네놈이 뇌물을 먹고 나로 하여금 너를 위해 사람을 해치게 만들려고 해?'
그런 생각으로 그 뒤부터는 무송의 일에 별로 관여를 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미결 죄수를 가두어 둘 수 있는 기한인 육십 일이 차니 무송은 거기에 따라 처결을 받게 되었다.
감옥에서 끌려나간 무송(武松)은 목에 쓴 칼을 벗고 섭(葉) 공목이 읽어 주는 판결을 들었다. 도둑의 죄명은 그대로 인정되었으나 처벌은 척장(脊杖) 스무 대에 은주(恩州) 노성 유배로 비교적 가벼웠다.
물론 훔친 물건들은 모두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라는 명과 함께였다.
형리들은 무송의 등허리에 매 스무 대를 때린 뒤 얼굴에 금인(金印)을 뜨고 목에 일곱 근 반짜리 쇠테 두른 칼을 씌웠다. 이어 무송(武松)은 두 사람의 공인과 함께 정한 날까지 은주에 이르라는 명을 받고 맹주성을 떠났다.
등허리에 맞은 스무 대의 매가 결코 가벼운 것은 아니었으나 무송(武松)은 별로 다친 데 없이 떠날 수 있었다.
시은(施恩)이 여러 길로 돈을 뿌린 데다 섭(葉) 공목이 따로 보아주고 지부도 구태여 무송을 해치려 들지 않아 매질에 흉내만 낸 까닭이었다. 그래도 죄 없이 벌을 받게 된 무송(武松)은 화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으나 꾹 참고 매를 맞았다.
그리고 턱없이 큰 칼을 목에 쓴 채 맹주성을 나섰다. 무송(武松)이 두 공인과 함께 한 마장이나 걸었을까, 길가의 한 술집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던 시은이 나왔다.
"아우가 여기서 형님을 기다린 지 오랩니다."
시은(施恩)이 눈물 글썽이는 눈으로 말했다. 무송(武松)이 보니 어디를 어떻게 다쳤는지 시은은 머리를 허옇게 싸매고 있었다.
"이 며칠 안 보이더니 어쩌다 그런 꼴이 났는가?"
무송(武松)이 시은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형님에게 무엇을 속이겠습니까? 제가 형님을 더 찾아뵙지 못한 것은 제가 드나드는 걸 지부가 알고 사람을 보내 감옥 안을 감시하게 한 데다, 또 장 도감이 사람을 풀어 감옥 바깥을 지킨 까닭이었습니다. 저는 다만 강(康) 절급을 통해 형님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 뿐이었지요."
"그런데 보름 전의 일이었습니다. 아우가 쾌활림의 주점에 앉아 있는데 장문신(張門神)이 군졸 한 패거리를 데리고 나타나 덤비지 않겠습니까? 아우는 힘을 다해 맞섰지만, 또다시 놈에게 당해 이 꼴이 나고 말았습니다."
"술집이 송두리째 놈에게 넘어간 건 말할 것두 없고..... 그래서 다친 몸으로 집에 누워있는데 형님께서 은주로 귀양 가신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여기 새 옷 한 벌과 잘 구운 오리 두 마리가 있으니 가지고 가십시오."
처량한 목소리로 그렇데 대답한 시은(施恩)은 무송과 두 공인을 술집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두 공인은 달리 먹은 게 있는지 술집으로 따라 들어가기는커녕 소리부터 질렀다.
"무송 저놈은 도적놈이란 말이야. 우리들에게 네놈의 술을 얻어 먹으라구? 나중에 윗 나리들한테 무슨 소리를 듣게 하려구 이런 수작이야? 얻어맞기 싫거든 없어져!"
시은(施恩)은 말로 해선 안 될 것 같아 품 안에서 은자를 꺼내 두 공인에게 열 냥씩 나눠 주었다. 공인 놈들도 그 은자까지는 마다하지 않았으나, 뻣뻣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사정은 조금도 봐주지 않고 어서 떠나기만을 재촉할 뿐이었다.
시은(施恩)이 하는 수 없이 술 두 사발을 얻어 와 무송에게 선 채로 마시게 했다. 그리고 옷 보따리는 허리에 묶어 주고 구운 오리는 목에 쓴 칼에 걸어 주며 귀엣말로 일러 주었다.
"옷 보따리 속에는 은 부스러기가 한 뭉치 들어 있습니다. 노자로 쓰십시오. 또 삼베 신도 두 켤레 들어 있으니 걷다가 필요할 때 쓰십시오. 하지만 아무래도 조심할 것은 저 두 공인 놈 같습니다. 결코 좋은 뜻을 품은 놈들 같지는 않으니 부디 세밀히 살펴 낭패가 없도록 하십시오."
"자네 말이 아니더라도 내 이미 알고 있네. 이까짓 두 놈쯤은 겁날 게 없으니 아우는 돌아가 몸조리나 잘하게. 내 다 알아서 할테니 부디 마음 놓고 가게."
무송(武松)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시은을 안심시켰다. 시은(施恩)은 그런 무송에게 절을 올린 뒤 울며 돌아갔다.
무송(武松)은 그사이도 못참아 눈을 부라리며 재촉하는 두 공인 놈과 함께 다시 걷기 시작했다. 몇 리 가기도 전에 두 공인 놈이 머리를 기웃거리며 수군거렸다.
"어째 그 두 사람이 보이지 않지?"
보아하니 누구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무송(武松)은 그 소리를 듣고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잘들 놀아 봐라. 어느 놈이 오는지는 모르지만 나를 어쩌는지 두고 보자!'
그리고 목에 쓴 칼에 함께 묶여 있는 오른손 대신 풀려 있는 왼손으로 구운 오리를 꺼내 먹기 시작했다. 두 공인 놈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였다.
다시 한 네댓 마장 가는 사이에 오리 한 마리를 다 먹어 치운 무송(武松)은 오른쪽 안에 있던 나머지 한 마리마저 왼손으로 끌어내렸다. 그것마저 오래잖아 먹어 치우니 무송(武松)은 결국 오 리도 가기 전에 구운 오리 두 마리를 다 먹어 치운 셈이었다.
그럭저럭 성을 떠난 지 십 리가 다 되어 갈 무렵이었다. 문득 앞쪽에서 박도(朴刀)를 찬 사내들이 기다리고 있는 게 보였다. 그들은 무송이 두 공인에게 끌려오는 걸 기다려 살핀 뒤 걸음을 빨리해 앞질러 갔다.
그러나 무송(武松)은 그들이 두 공인과 무언가 뜻있는 눈길을 주고받는 걸 놓치지 않았다. 그걸 알아본 무송(武松)은 그놈들의 속셈이 짐작되면서 벌써 화가 가슴께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억지로 화를 누르고 아무것도 모르는 양 태연히 걷기만 했다.
다시 한 몇 리를 가니 눈앞에 넓은 강나루가 나타났다. 사방에 눈에 띄는 게 별로 없는 나루와 넓은 강이었다.
다섯 사람은 그 나루 곁 널판 다리를 지나게 되었는데, 그 다리에는 '비운포(飛雲浦)'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저 이름은 어느 곳을 가리키는 거요?"
무송(武松)이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두 공인에게 물었다. 두 공인 놈이 공연히 목청을 돋우어 쏘아붙였다.
"너는 눈깔도 없어? 저기 다리 곁에 비운포란 팻말이 붙은 것도 안 뵈느냐?"
그러나 무송(武松)은 별로 성내는 기색도 없이 또 엉뚱한 수작을 부렸다.
"나 여기서 오줌 좀 누었으면 좋겠소."
그러고는 대답을 기다릴 것도 없이 성큼성큼 다리 쪽으로 다가갔다. 그 행동이 너무 느닷없어 공인들이 멀거니 보고 있는 사이에 무송(武松)은 어느새 칼 든 사내들 곁으로 다가가 있었다.
"떨어져라!"
무송(武松)이 갑자기 그렇게 소리치며 칼을 든 두 사내 중 하나의 가슴팍을 걷어차 다리 아래 물속으로 떨어뜨렸다. 나머지 하나가 놀라 몸을 돌렸으나 그도 먼젓번 사내와 크게 다르지 못했다. 다시 무송의 발길질을 받고 다리 아래로 떨어졌다.
그제야 두 공인 놈은 몹시 놀랐다. 무송의 무서운 발길질에 대항할 엄두도 못 내보고 달아나기에 바빴다.
"어딜 가느냐?"
무송(武松)이 그렇게 소리치며 목에 쓴 칼을 양손으로 잡고 한번 용을 썼다.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일곱 근 반짜리 큰 칼이 부서져 두 쪽이 났다. 무송(武松)은 그걸 강물에 내던지고 달아나는 두 공인을 쫓았다.
무송이 지푸라기 걷어 내듯 목에 쓴 칼을 뜯어내는 걸 달아나면서 본 두 공인 놈은 놀라 나자빠질 지경이었다. 오금이 저려 제대로 닫지도 못하는데 어느새 따라온 무송의 주먹이 한 놈의 등짝을 으스러뜨려 놓았다.
다른 한 놈도 성하지 못했다. 무송(武松)이 물가에 떨어진 칼을 주워 몇 번 휘두르자, 그도 이미 산목숨이 아니었다. 그사이 무송의 발길질로 물에 떨어졌던 두 놈이 허우적거리며 물 밖으로 기어 나왔다. 무송(武松)은 그중의 한 놈을 베어 넘긴 뒤 달아나는 다른 한 놈을 뒤쫓아가 멱살을 잡았다.
"이놈, 바른대로 말해라, 그러면 목숨만을 살려 주마."
무송(武松)이 그렇게 소리치자 그놈은 더 자세한 걸 물을 필요도 없이 술술 불어댔다.
"저희들은 장문신의 제자들입니다. 스승님이 장 단련과 짜고 이번에 저희들을 보낸 것입니다. 두 공인과 함께 알맞은 곳을 골라 당신을 죽이라고요."
"너희 스승 장문신(張門神)은 지금 어디 있느냐?"
무송(武松)은 아무런 감정을 내비치지 않고 다시 그렇게 물었다. 살아날 가망이 있다 싶었던지 이번에도 놈은 아무런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제가 떠날 무렵에는 장 단련과 함께 장 도감 댁 뒤뜰 원앙루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저희들이 소식을 알려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러자 무송(武松)이 갑자기 차갑게 내뱉었다.
"으음, 그랬었구나. 하지만 너를 살려 둘 수는 없다!"
이어 칼빛이 번쩍하더니 나머지 한 놈마저 놀란 넋이 되고 말았다.
무송(武松)은 그마저 죽인 뒤 그의 허리에 짜여 있던 칼을 끌러 자신의 허리에 찼다. 그리고 네 놈 중에 아직 덜 죽은 것 같은 두놈에게 칼질을 해 숨통을 완전히 끊어 놓은 뒤, 홀로 생각했다.
'비록 이 네 놈을 죽이기는 했지만, 이걸로는 안되겠다.'
'장 도감, 장 단련, 장문신 이 세 놈을 죽이지 않고 어찌 이 분이 풀리겠느냐!'
그러면서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가 칼을 들고 일어났다. 형을 위해 복수의 악귀가 되었던 무송(武松)은 이번에는 자신을 위해 복수의 악귀가 된 셈이었다. 무송은 그 길로 마치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맹주성을 향해 달렸다.
장 단련의 제자가 일러 준 대로라면 그가 죽이고자 하는 세 사람은 마침 한곳에 몰려 있을 것이었다. 이미 네 사람씩이나 죽여 이제 다시는 저잣거리의 양민으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된 그로서는 당연한 선택인지도 몰랐다.
무송(武松)이 성안으로 들어섰을 때는 날이 어둑해질 무렵이었다. 장도감의 집으로 달려간 무송은 뒤뜰 꽃밭의 담 밖에 있는 마구간 곁에 몸을 숨겼다. 무송(武松)이 가만히 귀를 기울이며 동정을 엿보니, 마굿간 지기들은 모두 집 안에 처박혔는지 아무도 나와 보는 놈이 없었다. 그러다가 한참 뒤에야 마부 하나가 등을 들고나와 마구간 안으로 들어가더니 문을 닫아걸었다.
무송(武松)은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밤이 깊어지기만을 기다렸다. 이윽고 시각을 알리는 북소리가 일경 넉 점을 쳤다. 그러자 그 마부는 말먹이 풀 쪽을 한번 살펴본 뒤 등을 한곳에 걸고 잠자리를 폈다. 그가 침상에 이불을 편 뒤 옷을 벗고 눕는 걸 보고 무송(武松)은 슬그머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을 열려다 잘못해 삐걱 소리를 내고 말았다.
"이 어르신네가 이제 막 잠들려는 참인데 어떤 놈이냐? 내 옷을 훔쳐 가기에는 아직 너무 이른 걸 몰라?"
마부는 좀도둑이라도 든 줄 알고 그렇게 소리쳤다.
들킨 걸 안 무송(武松)은 그를 섣불리 해치우려다 놈이 악이라도 써서 다른 사람들을 불러들일까 두려웠다.
그를 가까이 끌어들인 뒤 끽소릴 낼 틈을 주지 않고 해치우려고 꾀를 썼다. 박도를 문가에 세워 둔 무송(武松)은 허리에 찼던 짧은 칼을 손에 든 채 좀 더 소리 나게 문을 흔들었다.
마부는 완연한 사람의 기척에 더 누워 있지 못했다. 옷도 제대로 안 걸친 벌거숭이로 침상에서 일어나더니 몽둥이 하나를 찾아 들고 달려 나왔다. 마부가 문을 열기를 기다려 무송(武松)이 갑자기 들이닥치며 그의 멱살을 잡았다. 놀라 고함을 지르려던 그가 등불에 번쩍이는 무송의 칼을 보고 놀라 기어드는 소리로 빌었다.
"목숨만 살려 주십쇼!"
"내가 누군 줄 알겠느냐?"
무송(武松)이 그렇게 나직이 묻자 마부는 비로소 무송을 알아보았다.
"아이구 형님, 제게 이러지 마십시오. 그저 한목숨 살려만 주신다면 무엇이든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럼 바른대로 말해라. 장 도감은 지금 어디 있느냐?"
무송(武松)이 여전히 목소리를 낮춰 묻자 마부가 벌벌 떨며 말했다.
"장 단련, 장문신과 셋이서 오늘 하루 종일 술을 마셨습니다. 지금도 원앙루에서 퍼마시고 있을 겁니다."
"그게 정말이냐?"
"제가 거짓말을 한다면 이 자리에서 벼락을 맞아도 싸지요!"
손까지 홰홰 내젓는 것으로 보아 거짓말은 아닌 듯했다. 그러나 어쨌든 무송(武松)은 그를 살려 둘 처지가 못 되었다. 묶어 두고 간다 해도 만에 하나 그가 풀고 나오는 날이면 복수는커녕 무송 자신의 목숨마저 위태로워질 판이었다. 거기다가 무송(武松)은 이미 네 사람이나 죽이고 온 뒤였다. 살기가 발동해 걷잡을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구나. 너를 살려 둘 수는 없다."
무송(武松)은 그 한마디와 함께 칼을 들어 가엾은 마부를 찔러 죽였다. 마부의 시체를 으슥한 곳으로 차 던진 무송은 칼을 칼집에 꽂은 뒤 시은에게서 받은 옷 보따리를 풀었다.
그 안에서 비단으로 지은 옷 한 벌과 삼베 짚신이 나왔다. 무송(武松)은 헌 옷을 벗어 던지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띠를 단단히 맨 뒤 칼은 허리에 차고 은덩이는 전대에 넣었다.
마구간을 나서던 무송(武松)은 문득 등불을 끄고 오지 않았음을 떠올렸다. 가만히 돌아가 등불을 불어 끄고 박도를 잡은 채 문을 나와 담벼락 쪽으로 붙었다.
마침 그날 밤은 달이 아주 밝았다. 무송(武松)은 훌쩍 몸을 날려 담을 넘고 뒤뜰로 들어갔다. 쪽문 하나를 지난 무송(武松)은 다시 중문을 열고 집 안쪽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한 군데 불빛이 환한 곳이 있어 무송은 그리로 가 보았다.
그곳은 부엌이었다. 머리를 쪽 찐 계집종 둘이 주전자에 무얼 끓이면서 푸념을 했다.
"하루 종일 퍼마셔 놓고 잘 생각도 않는군. 이제 또 차를 끓여내라니! 손님인지 뭔지 그 두 사람 모두 염치도 좋지. 그만큼 취했으면 내려와 잘 만도 한데 무슨 이야기들을 하겠다고....."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한동안 불평을 쏟아 냈다.
거듭 사람을 죽여 이미 눈이 뒤집힌 무송에게는 그 계집종들도 모두 못된 장 도감과 한패로만 보였다. 허리에 피 묻은 칼을 꺼내 들기 바쁘게 부엌문을 열고 뛰어 들어가 한 계집종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단칼에 찔러 죽였다. 다른 한 계집종은 그 끔찍한 꼴을 보고 달아나려 했으나 발등에 못이라도 박혔는지 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소리를 지르려 해도 입이 열리지 않아 그저 넋을 놓고 보고만 있는데 다시 무송(武松)이 달려와 한칼에 죽여 버렸다.
무송(武松)은 두 계집종의 시체를 부뚜막 쪽으로 끌어 놓고 부엌간의 등불도 꺼 버렸다. 밖은 여전히 달빛이 환해 걷기에는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 무송(武松)은 그 달빛에 의지해 한발 한발 안으로 들어갔다.
장 도감의 집에서 거처한 적이 있는 무송이라 집 안의 지리에는 훤했다. 남의 눈에 안 뜨이는 샛길로 해서 곧 원앙루 층계 아래에 이를 수 있었다. 무송(武松)은 손발을 조용히 움직여 누각 위로 올라갔다. 워낙 하루 종일 계속된 술자리라 그런지 시중들던 하인들도 어디론가 가 버려 무송(武松)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누각에 오를 수가 있었다.
무송(武松)이 층계 곁에 숨어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니 누각 위에서 장 단련과 장문신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장 도감에게 칭송을 보낸 뒤 아첨 섞어 말했다.
"상공 덕분에 제 원수를 갚게 되었으니 반드시 그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형제 같은 장 단련의 낯을 보지 않았다면 어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겠나. 자네 재물이 좀 축나기는 했겠지만 일은 아주 잘된 셈이지. 보낸 아이들이 오래잖아 손을 쓸 것이니 무송 제 놈이 무슨 수로 살아나겠는가. 비운포에서 그놈을 죽이라 시켜 둔 만큼 내일 아침에는 좋은 소식이 올 걸세."
장 도감이 거드름 섞어 그렇게 말을 받았다. 장 단련도 한몫 거들었다.
"그 네 명이서 그놈 하나야 어찌 못하겠습니까? 무송의 목숨이 몇 개라도 살기는 어려울 겝니다. 제가 제자들을 보내면서 놈을 죽이는 대로 돌아와 알리라고 일러두었습지요."
장문신(張門神)이 신이 나 그렇게 맞장구를 쳤다.
그들의 수작을 듣자 무송의 가슴속에서는 무명업화(無明業火, 불같이 성낸 마음이나 깨우치지 못한 데서 오는 나쁜 마음)가 삼천 길이나 치솟았다. 무송(武松)은 더 참지 못하고 칼을 빼 들며 안으로 뛰어들었다.
촛대 서넛이 켜진 데다 한 줄기 달빛까지 스며들어 누각 안은 대낮같이 밝았다.
술잔이며 안주 접시가 즐비한 탁자를 앞에 놓고 의자에 앉았던 장문신(張門神)이 먼저 무송을 보고 깜짝 놀랐다. 허파나 염통뿐만 아니라 오장육부가 모두 허공에 뜬 듯 아뜩해하다가 막 몸을 일으키려는데 벌써 무송의 칼이 날아들었다. 한(恨)에 찬 무송의 칼은 장문신을 베고도 힘이 남아 의자까지 쪼개놓았다.
무송(武松)은 다시 몸을 돌려 장 도감을 향했다. 막 걸음을 떼어 달아나려던 장 도감도 무송의 칼을 맞고 누각 마룻바닥에 쓰러졌다.
두 사람 모두 비명조차 제대로 못 질러 보고 쓰러졌으나 장 단련은 달랐다. 원래가 무관 출신인 그는 비록 술에 취했어도 기운이 남아 있었다. 두 사람이 눈앞에서 죽고, 그 자신도 달리 달아날 길이 없다 싶자, 막판에 몰린 쥐가 고양이에게 덤비듯 의자를 들고 무송에게 맞서려 했다.
무송(武松)은 의자를 휘두르며 덤비는 장 단련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밀고 들며 한칼을 내질렀다.
장 단련이 설령 술에 취하지 않았다 한들 무송의 칼 솜씨를 어떻게 당해 낼 수 있겠는가.
무송의 칼에 찔려 뒤로 벌렁 자빠졌다. 무송(武松)은 그런 장 단련을 덮쳐 한칼로 그 목을 베어 버렸다.
그때 아직 숨이 붙어 있던 장문신(張門神)이 몸을 일으켰다. 무송(武松)은 그런 장문신을 발길로 차 넘기고 목을 싹둑 잘라 버렸다. 그리고 다시 몸을 돌려 장 도감의 목도 베어 버린 뒤 방 안을 둘러보았다.
탁자 위에는 그들이 먹다 남은 술과 고기가 즐비했다. 무송(武松)은 큰 잔에 따라져 있는 술을 단숨에 비운 뒤 잇따라 서너 잔을 더 퍼마셨다.
그러고 나니 정신이 좀 가라앉는 듯했다.
무송(武松)은 시체의 옷을 한 조각 베어 내어 피에 적신 뒤 흰 회벽 위에다 크게 썼다.
'살인자 타호무송야(殺人者 打虎武松也, 이 사람들을 죽인 사람은 호랑이를 때려잡은 무송이다)'
그리고 탁자 위의 그릇 중에서 금은으로 된 것만 몇 개를 챙긴 뒤, 누각을 내려가려 했다.
그때 누각 아래서 어떤 여자가 큰 소리로 누구에겐가 시켰다.
"누각 위의 나리들이 몹시 취하신 모양이다. 가서 두 분을 부축해 드려라."
무송이 그들 셋을 죽이는 동안의 시끄러운 소리를 그들 셋이 취해서 뒤엉킨 것쯤으로 여긴 듯했다.
그 말에 이어 곧 두 사람이 누각 계단을 올라왔다.
무송(武松)이 계단 뒤에서 살펴보니 누각으로 들어오는 두 놈이 다 알 만한 놈들이었다. 전에 무송이 억울한 누명을 쓸 때 무송을 잡아 묶은 게 바로 놈들이었기 때문이다. 무송(武松)은 어두운 곳에 몸을 숨기고 두 놈이 지나가게 버려 두었다.
누각 안으로 들어간 두 놈은 세 사람이 피투성이로 죽어 나자빠진 걸 보자 놀란 나머지 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고 서로 뻔히 쳐다보기만 했다. 쪼개진 머리통에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한 꼴이었다.
그러다가 겨우 정신을 차려 막 달아나려는데 등 뒤에서 무송(武松)이 나타나 한 놈을 찔러 죽였다.
살아남은 한 놈은 맞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대로 무릎을 꿇으며 살려 주기만을 빌었다.
"네놈도 살려 둘 수 없다!"
무송(武松)은 한마디와 함께 그놈마저 끌어다 죽여 버렸다. 그 두 놈이 쏟는 피가 보태지자 누각 안은 그대로 피바다였다. 무송(武松)이 즐비하게 나자빠진 시체들을 보며 피 맛을 본 악귀처럼 중얼거렸다.
"하나나 둘이나 마찬가지지. 백 놈을 죽인다 해도 내 한 목숨 내놓으면 그만 아니냐!"
그리고 칼을 든 채 누각을 내려갔다.
"누각 위에 무슨 놀라운 일이 있더냐? 왜 그리 시끄러웠지?"
장 도감의 아낙이 무송을 알아보지 못하고 물었다. 그러다가 전에 못 본 몸집 큰 사내가 다가오는 걸 보고 조금 의심되는 눈길로 소리쳤다.
"너는 누구냐?"
하지만 무송(武松)은 대답 대신 칼을 내질렀다.
여자가 외마디 소리와 함께 쓰러지자 무송은 다시 칼을 들어 그 목을 내리쳤다. 그러나 어찌 된 셈인지 목이 잘리지 않았다. 이상해진 무송(武松)은 칼을 들어 달빛 아래 살펴보았다. 사람을 많이 죽여 칼날이 형편없이 문드러져 있었다.
"이걸로는 목을 자를 수가 없겠구나."
무송(武松)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칼을 내던지고 부엌으로 들어가 거기 세워 두었던 박도를 가지고 왔다.
무송(武松)이 다시 누각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이번에는 창기 옥란이가 두 계집종을 데리고 등불을 밝혀 든 채 그리로 왔다가 마님이 피투성이로 죽어 나자빠진 걸 보고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를 냈다.
"에그머니! 이게 뭐야?"
그녀 또한 장 도감이 무송에게 올가미를 씌울 때 도구로 쓰인 터라 무송은 용서할 수 없었다. 한칼로 가슴을 찔러 죽이고 따라오던 두 계집종마저 죽여 버렸다.
피비린내에 머리가 돈 무송(武松)은 다시 앞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에 있던 여자 셋이 무송의 칼에 모두 놀란 넋이 되고 말았다.
"이제 좀 속이 풀리는구나. 그만하고 달아나야겠다!"
집 안까지 피로 휩쓴 뒤에야 제정신을 되찾은 무송(武松)은 칼을 칼집에 꽂고 마구간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거기 풀어 놓았던 전대를 챙긴 뒤 원앙루에서 가져온 은그릇들을 보따리에 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