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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지 35화

그 길로 제집에 돌아간 서문경(西門慶)은 오래잖아 정말로 비상 한 봉지를 가지고 와 할멈을 주었다.

할멈은 곧 반금련을 불러 가만히 말했다.

"색시, 이건 비상(砒霜)인데 그걸 쓰는 방법을 일러 주지. 요즈음 무대(武大)가 색시에게 말도 잘 않는다니 갑자기 약을 지어 가면 의심할 거야. 먼저 마음을 돌린 척 돌봐 주며 그를 위해 약을 지어 올까를 슬며시 물어보라구. 만약 그가 약을 먹겠다면 가슴앓이 약 한 첩을 지은 뒤 이 비상(砒霜)을 섞는 거야. 무대(武大)가 약을 마시게 되면, 비상의 독이 몸에 돌아 위가 찢어지고 크게 고함을 지를 테니 무엇으로든 그를 덮어 그 소리를 이웃이 듣지 못하게 해야 돼."

"그다음 미리 한 솥 데워 둔 물을 헝겊에 적셔 그 시체를 닦아 내야 할 거야. 독이 퍼지면 몸의 일곱 구멍으로 피가 쏟아질 뿐만 아니라 입술을 깨물어 거기도 핏자국이 있을 테니. 그렇게 핏자국을 깨끗이 닦아 낸 뒤는 얼른 시체를 관에 넣으라구. 그리고 빨리 화장해 버린다면 어느 놈이 알 거야!"

반금련(潘金蓮)이 원래 독한 여자였는지, 색정에 눈이 뒤집혀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죄를 무서워하지 않기는 할멈이나 서문경과 다름이 없었다.

그래도 함께 몸을 섞고 산 남편을 독살할 일보다는 독살한 뒤의 처리부터 먼저 걱정했다.

"그게 좋기는 하지만 제가 워낙 힘이 약해서..... 일이 나고 시체를 잘 다뤄 낼 수 있을지 걱정이군요."

"그거야 어려울 거 없지. 필요하면 우리 집 벽을 두드리라구. 그러면 내가 달려가 색시를 거들어 주지."

할멈이 그렇게 반금련을 안심시켰다.

곁에 있던 서문경(西門慶)이 두 사람을 거들었다.

"둘이서 마음 써서 잘해 보라구. 내일 새벽까지는 소식 보내주게."

그러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왕씨 할멈은 비상을 부수어 고운 가루로 반금련에게 건네주었다.

그걸 받아 든 반금련은 그길로 할멈네 집을 나섰다.

반금련(潘金蓮)이 자기 집 위층으로 올라와 보니 무대(武大)는 가는 눈물을 흘리며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걸 보자 거짓 울음을 터뜨리며 침상가로 다가갔다.

울음소리에 정신이 든 무대(武大)가 알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네가 뭣 때문에 울어?"

그러나 반금련은 안 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짜내며 말했다.

"여보, 내가 잘못했어요. 그놈에게 속은 거예요. 그놈이 글쎄 당신을 걷어차 이 지경까지 만들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그런데...... 당신 좀 어떠세요? 한 군데 용한 의원이 있단 소리를 듣긴 들었는데, 약을 지어 와 봤자 당신이 의심하고 먹지 않을 것 같아 못 가고 있어요."

마음 착한 무대(武大)는 그게 저승사자의 꼬임이란 것도 모르고 계집의 거짓 눈물에 깜빡 넘어가고 말았다.

진정으로 자기를 위한 것이건 아우 무송이 두려워서건 계집의 마음이 돌아선 것만도 고맙게 여겨 부드럽게 대꾸했다.

"당신이 나를 낫게만 해 준다면 모두 잊어 주지. 무송이가 돌아와도 한마디 안 내비칠 거요. 그러니 어서 가서 약을 지어 나를 고쳐 주시오."

계집은 그 말에 속으로는 악귀 같은 웃음을 지으면서도 겉은 슬프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집을 나섰다.

그러나 직접 약을 지으러 가지 않고 왕씨 할멈의 집으로 찾아가 돈을 내밀었다.

할멈은 두말 않고 나가 가슴앓이 약 한 첩을 지어 주었다.

약을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온 반금련(潘金蓮)은 무대에게 전에 없이 사근사근하게 일러 주었다.

"이 약은 가슴앓이에 쓰는 것인데, 의원은 밤에 마시라구 했어요. 약을 마신 뒤 머리까지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땀을 내면 내일 아침에는 거뜬하게 일어날 수 있을 거예요."

"거참 잘됐군. 오늘 밤 내가 잠들었건 말건, 밤이 어지간하거든 나를 깨워 약을 마시게 해 주구려."

무대(武大)가 먹고 죽을 약인지도 모르고 오히려 계집에게 고마워하며 당부했다.

계집은 더욱 사근사근하게 나왔다.

"걱정 말고 주무세요. 내가 다 알아서 보살필게요."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계집은 먼저 큰 가마솥에 물을 데우고 거기에 헝겊 한 뭉치를 담가 놓았다.

계집이 일찌감치 물까지 끓여 놓고 밤이 깊기만을 기다리는데 이윽고 삼경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왔다.

계집은 먼저 비상을 잔 속에 집어넣은 뒤 끓인 물을 따로 받쳐 들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여보, 약 어디 있죠?"

계집이 무대를 깨우고 그렇게 묻자 무대(武大)가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리 밑 베개 근처에 있을 거야. 약을 마실 수 있게 당신이 손 봐 주구려."

그 말에 약봉지를 찾아낸 계집은 이미 비상 가루가 바닥에 깔려 있는 잔 위에 약봉지를 털어 넣었다.

그리고 거기에 끓인 물을 부은 뒤 은비녀를 꺼내 저었다.

은비녀가 당장 새까맣게 변한 건 정한 이치였지만 제 몸도 못 가누고 누운 무대(武大)가 그걸 알아볼 리 없었다.

약을 다 저은 계집이 왼손으로는 무대를 부축해 일으키고 오른손으로는 약을 들어 마시기 좋게 거들었다.

한 모금 마신 무대(武大)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여보, 이 약이 왜 이렇지? 정말 마시기 어렵네."

"그걸 먹고 몸만 낫는다면 마시기 어려운들 어때요? 자아, 그러지 말고 어서 마셔요."

계집이 그러면서 다시 잔을 입가에 대었다.

무대(武大)가 두 번째로 입을 벌리자 계집은 물을 것도 없이 그대로 약을 쏟아 넣었다.

그 바람에 약은 한 방울 남김없이 모두 무대의 목구멍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계집은 무대를 다시 침상에 뉘고 얼른 몸을 일으켜 침상에서 떨어졌다.

"여보, 그 약이 왜 이렇지? 약을 먹고 나니 뱃속이 찢어지는 듯 아프네."

"아이구, 아이구, 정말 못 견디겠구나!"

무대(武大)가 금세 배를 움켜잡으며 신음 소리를 냈다.

왕씨 할멈의 말이 퍼뜩 생각난 계집은 얼른 이불을 끌어 무대의 얼굴에 덮어 씌웠다.

무대(武大)가 이불 아래서 다시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아이구, 답답해!"

"의원이 당신에게 땀을 내랬어요. 곧 좋아질 테니 조금만 참아요."

계집이 그렇게 달랬다.

그래도 무대(武大)가 참지 못해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독한 계집이 그냥 두지 않았다.

숨넘어가기 전의 발악이 있을까 두려워 얼른 침상 위에 뛰어오르더니 무대를 올라타고 이불의 네 귀를 꾸욱 눌렀다.

무대(武大)는 이불 속에서 무언가 가는 비명을 지르며 한 차례 기침을 했다.

하지만 그것도 한순간이었다.

이어 무대(武大)는 찢어지는 듯한 배 속을 움켜잡은 채 몸을 비틀다가 이내 쓸쓸하고 고단한 삶을 마쳤다.

반금련(潘金蓮)은 깔고 앉은 무대의 몸에서 전혀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자 비로소 침상에서 내려와 이불을 젖혔다.

무대(武大)는 이를 악문 채 숨져 있었는데 눈, , 입 등 몸의 일곱 구멍에서 피가 줄줄이 흘러내렸다.

계집은 곧 아래층으로 내려가 왕씨 할멈 집과 맞닿은 벽을 두드렸다.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리던 할멈이 득달같이 달려왔다.

계집이 얼른 뒷문을 따 주자 할멈이 물었다.

"아직 안 끝났어?"

"끝이야 벌써 났지요. 그러나 손발에서 힘이 빠져 어찌해 볼 수가 없어요."

독한 계집은 약간 지친 얼굴로 그렇게 대답했다.

할멈이 그런 계집의 기운을 돋우어 주었다.

"어려운 일이 있다면 내가 도와주지. , 시작하자구!"

그러고는 소매를 걷더니 데워 둔 물 한 통과 적신 헝겊을 이층으로 날랐다.

무대를 덮어씌워 둔 이불을 젖힌 할멈은 먼저 무대의 앙다문 입술부터 닦았다.

이어 피가 흐르는 일곱 구멍도 깨끗이 닦은 할멈은 몸부림친 흔적까지 없앤 뒤 새 옷을 가져다 무대의 시신에 입혔다.

무대가 독살당한 흔적을 모두 없앤 두 사람은 무대의 시신을 아래층으로 옮겼다.

그리고 머리를 빗긴다, 두건을 묶는다, 신발을 신긴다 한창 법석을 떤 뒤에 흰 비단을 시체 위에 덮었다.

반금련(潘金蓮)이 소리 내어 울기 시작한 것은 위층까지 말끔히 치운 왕씨 할멈이 다시 샛문을 통해 제집으로 돌아간 뒤였다.

이웃 사람들을 깨워 무대의 죽음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원래 울음에는 세 가지가 있다.

눈물을 흘리면서 소리 내어 우는 것이 곡()이요, 눈물을 흘리되 소리가 없는 것이 읍()이며, 소리는 있되 눈물이 없는 게 호().

그런데 그날 밤 반금련(潘金蓮)이 동네 사람을 깨운 것은 바로 그 호였다.

아직 날이 밝기도 전에 서문경(西門慶)이 왕씨 할멈네 집을 찾아와 경과를 물었다.

할멈은 자신이 아는 대로 상세하게 무대의 죽음과 그때까지의 처리를 알려 주었다.

서문경(西門慶)이 은자를 꺼내 할멈에게 주며 관을 사 보내 주게 하고 아울러 반금련을 불러오게 했다.

달려온 계집이 대뜸 서문경에게 매달리며 턱없는 소리를 했다.

"이제 무대는 죽었어요. 당신에게로 가서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됐어요."

금방이라도 서문경의 옷자락을 붙잡고 따라나설 것 같은 말투였다.

서문경(西門慶)이 그런 계집을 달랬다.

"그런 소리를 꼭 해야 되나? 나두 잘 알고 있어."

그때 왕씨 할멈이 끼어들었다.

"아직 남은 일이 하나 있는데 어쩌면 그게 중요할 거유.

다름 아니라 무대의 시신을 살필 단두(團頭) 하구숙(何九叔) 얘긴데 그 사람이 여간 꼼꼼한 사람이 아니란 말씀이야. 만약 그 사람이 낌새를 알아차리고 염()하는 걸 허락지 않는다면 정말 큰일 아니겠우?"

할멈의 그 같은 걱정을 서문경(西門慶)이 다시 자신 있는 목소리로 덜어 주었다.

"그건 걱정 마시오. 내가 하구숙(何九叔)에게 이야기해 놓지.

그 사람은 내 말을 함부로 어기지 못할 거요."

"그럼 나리는 얼른 가서 그에게 일러 놓으시우. 늦어서는 안 되우!"

할멈이 갑자기 급해졌는지 그렇게 서문경을 재촉해 내보냈다.

날이 훤히 밝자 왕씨 할멈은 서문경이 준 돈으로 무대를 넣을 관을 사고, 향이며 초, 지전 따위 장례에 쓸 것들도 사왔다.

제상을 차리고 조등(弔燈)을 걸자 이웃에서 모두 조문을 왔다.

반금련(潘金蓮)은 분칠한 얼굴을 소매로 가리고 소리 내어 헛울음을 울었다.

"남편께서 무슨 병으로 이리 급작스레 돌아가셨습니까?"

이웃 사람들이 그렇게 묻자 독한 계집은 짐짓 슬픈 표정을 지어 대답했다.

"가슴앓이로 드러눕더니 날이 갈수록 병이 심해지지 뭐예요. 영 나을 것 같지 않더니 간밤에 갑자기 숨을 거두었답니다."

그러고는 다시 꺼이꺼이 소리 내어 울었다.

이웃 사람들은 하나같이 무대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수상쩍었지만 아무도 함부로 묻지 못했다.

그저 듣기 좋은 소리로 반금련을 위로할 뿐이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소. 너무 괴로워하지 마시오."

그러자 계집도 천연스레 상주 노릇을 했다.

그런 이웃의 인정에 감사하고 이내 애고애고 거짓 울음을 뽑아냈다.

그사이 관을 들여놓은 왕씨 할멈은 단두 하구숙(何九叔)을 불렀다.

시신을 염하는 데 쓸 물건들을 모두 갖추고 스님들까지 불러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게 한 뒤였다.

오래잖아 하구숙의 졸개들이 먼저 왔다.

그러나 뒤늦게 온 하구숙(何九叔)은 무대네 집에 들어서기도 전에 이미 그 죽음에 대해 의심부터 품게 되었다. 도중의 일 때문이었다.

 

그날 아침 일찍 왕씨 할멈으로부터 청을 받은 하구숙(何九叔)은 졸개들을 먼저 보낸 뒤 천천히 자석가로 갔다.

그런데 그가 막 골목 어귀로 접어들 무렵 난데없이 서문경(西門慶)이 나타나 길을 막으며 말을 걸었다.

"여보게 구숙, 어딜 가나?"

"찐 떡 장수 무대가 죽었다기에 시신을 염()하러 가는 길입니다."

하구숙(何九叔)이 별생각 없이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서문경(西門慶)이 그의 옷깃을 끌듯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잠깐 할 이야기가 있네. 따라오게."

서문경(西門慶)이 하구숙을 데려간 곳은 거기서 멀지 않은 작은 술집이었다.

술집 안으로 들어간 서문경은 전에 없이 은근하게 나왔다.

"여보게 구숙, 여기 윗자리에 앉게."

"저 같은 게 어떻게 감히 나리와 마주 앉겠습니까?"

하구숙(何九叔)이 그렇게 사양을 하자 서문경은 한층 더 은근하게 말했다.

"별소리를. 그러지 말고 여기 앉게."

그리고 술집 주인에게 좋은 안주와 술을 청하는 것이었다.

심부름하는 아이가 술과 안주를 날라 오는 걸 보며 하구숙(何九叔)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이 여지껏 한 번도 내게 술을 산 적이 없는데 웬일일까?'

'오늘 이렇게 술을 사는 걸 보니 뭔가 내게 부탁이 있는 모양이로구나......'

서문경(西門慶)은 그런 하구숙에게 한동안 대단찮은 이야기로 술을 권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소매에서 은자 열 냥을 꺼내 탁자 위에 놓으며 말했다.

"구숙, 적다고 너무 언짢아 말게. 내일 따로이 더 사례함세."

"제가 나리를 위해 아무것도 해 준 일이 없는데 어떻게 나리의 돈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시키실 일이 있으면 그냥 시키십시오. 이 돈은 결코 받을 수 없습니다."

하구숙(何九叔)이 까닭 모르게 꺼림칙해 두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서문경(西門慶)은 억지로 쥐여 주듯 은자를 내밀었다.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받아 두라구. 당부할 게 있다니까."

"그럼 어서 말씀해 주십시오. 귀담아듣겠습니다."

하구숙(何九叔)이 여전히 은자를 거두려 하지 않으며 대꾸했다.

서문경(西門慶)이 힐끗 사방을 돌아본 뒤 나직이 말했다.

"다른 게 아니라 이제 자네가 갈 집에서 받아야 할 수고비 몇 푼을 미리 받는 거라 여기게. 무대의 시신을 염()할 때 모든 걸 잘 보살펴 주고 장막은 비단으로 둘러 주게. 다른 부탁은 더 않겠네."

", 그 일이었습니까? 그야 당연히 제가 할 일인데 어떻게 나리의 돈을 받겠습니까?"

하구숙(何九叔)은 여전히 사양했다.

그러자 서문경(西門慶)이 불량스러운 눈을 뚝 부릅떴다.

"자네가 정히 안 받겠다면 내 말을 들어주지 않겠단 뜻이군. 그리 생각해도 좋은가?"

서문경이 그렇게까지 나오자 하구숙(何九叔)은 찔끔했다.

그의 비위를 거슬렀다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하는 수 없이 은자를 거두었다.

서문경은 하구숙이 돈을 받아 넣는 걸 보고서야 낯을 폈다.

술을 몇 잔 더 권한 뒤 술값은 제 앞으로 달게 했다.

두 사람이 술집을 나설 무렵 서문경이 다시 굳은 얼굴로 다짐을 받았다.

"구숙, 이 일을 결코 입 밖에 내서는 안 되네. 그러면 훗날 다시 내 한턱 크게 쓰지."

그 말에 하구숙(何九叔)은 더욱 의심이 커졌다.

'이 일이 아주 괴상하구나. 나는 무대의 시신을 염하러 갈 뿐인데 이 사람이 왜 내게 이토록 많은 은자를 주나.'

'여기는 틀림없이 무슨 곡절이 있을 게다.'

그렇게 속으로 생각하며 무대네 집으로 갔다.

대문 앞에 이르니 먼저 가 있던 졸개들이 나와 맞았다.

"무대가 무슨 병으로 죽었다더냐?"

하구숙(何九叔)이 그렇게 묻자 졸개들이 들은 대로 대답했다.

"가슴앓이로 죽었답니다."

하구숙(何九叔)은 그 병 이름을 머릿속에 새긴 뒤 발을 걷고 안으로 들어갔다.

왕씨 할멈이 나와 하구숙을 반갑게 맞았다.

"어서 오슈, 단두 양반. 오래 기다렸우."

"급한 일이 좀 있어 끝내고 오려니 한발 늦었소."

하구숙이 대답하는데 무대의 아낙이 소복 차림에 거짓 울음을 울며 나왔다.

하구숙(何九叔)이 건성으로 그녀를 위로했다.

"너무 상심 마십시오. 남편께서는 죽어서도 좋은 곳으로 가셨을 겁니다."

"정말 어떻게 말해야 할지...... 생각잖은 가슴앓이로 며칠 만에 이렇게 숨을 거두고 말다니! 이제 저는 어쩌면 좋지요?"

계집이 눈물도 없는 눈을 가리며 슬픈 가락으로 앙큼을 떨었다.

그러나 하구숙(何九叔)은 한눈에 그게 진심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찬찬히 계집을 살피다가 속으로 가만히 중얼거렸다.

'내가 무대의 아낙에 대해 말만 들었지 알지는 못했는데 이제 보니 바로 이 여자로구나.'

'생긴 꼴이나 하는 짓거리로 보아 서문경이 준 은자 열 냥에는 반드시 까닭이 있겠다......'

하구숙(何九叔)은 그러면서 무대의 시신을 보러 갔다.

덮개를 걷은 뒤 흰 비단 천을 들추자 무대의 시신이 드러났다.

그런데 거기서 뜻 아니한 일이 벌어졌다.

검시를 하는 법도에 따라 먼저 무대의 두 눈을 까뒤집어 보던 하구숙(何九叔)이 갑자기 한마디 비명과 함께 뒤로 나자빠진 것이었다.

입으로 피를 토하는데, 손톱은 푸르고 입술은 자줏빛이며 얼굴은 누렇고 눈은 생기가 없는 게 예삿일이 아니었다.

놀란 아랫것들이 그런 하구숙을 부축했다.

왕씨 할멈이 아는 척을 하고 나섰다.

"저런, 시체에서 뿜어 나오는 나쁜 기운을 쐬었군. 빨리 찬물을 가져와!"

그리고 찬물이 오자 그걸 들이켜 하구숙에게 뿜어 댔다.

할멈이 두어 번이나 물을 뿜은 뒤에야 하구숙(何九叔)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할멈이 다시 하구숙의 아랫것들에게 시켰다.

"이 양반을 업고 댁으로 모셔 가 조리를 시키게."

그 말에 하구숙(何九叔)은 당장 자기 집으로 업혀 갔다.

집안 식구들이 모두 놀라며 하구숙을 맞아 방에다 뉘었다.

하구숙의 아낙이 그런 남편 곁에 앉아 소리 내어 넋두리를 했다.

"아이구, 여보, 웃으며 집을 나가시더니 어찌 이 꼴로 돌아오셨단 말이에요? 평소에는 그렇게 자주 시신을 보아도 아무렇지 않더니......"

하구숙(何九叔)은 그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멀뚱히 누워만 있었다.

그러다가 졸개들이 모두 집에서 나간 뒤에야 아낙을 보고 조용히 말했다.

"이봐, 너무 걱정 말라구. 내가 일부러 그런 거야."

"뭐라구요?"

하구숙의 아낙이 반갑고도 놀라워 눈물도 씻지 않고 그렇게 물었다. 그러다가 졸개들이 모두 집에서 나간 뒤에야 아낙을 보고 조용히 말했다.

"이봐, 너무 걱정 말라구. 내가 일부러 그런 거야."

"뭐라구요?"

하구숙의 아낙이 반갑고도 놀라워 눈물도 씻지 않고 그렇게 물었다. 하구숙(何九叔)이 멀쩡하게 일어나 앉으며 까닭을 설명했다.

"아까 내가 무대의 시신을 살피러 갈 때 말이야...., 현청 앞 골목에서 생약 장사 하는 서문경이가 기다리고 있지 않겠어? 그 사람이 나를 술집으로 끌고 가더니 한턱 잘 쏠뿐 아니라 은자까지 열 냥 쥐여 주더군. 무대의 시신을 염()할 때 수상쩍은 게 있더라도 덮어 달라는 거야.

그런데 무대의 집에 가보니 어땠는지 알아? 그 계집이 좋지 않은 계집이라 벌써 열에 여덟아홉 의심이 가더니, 시신을 벗겨 보니 역시 그랬어. 무대(武大)의 얼굴은 시커멓고 일곱 구멍마다 피를 쏟은 흔적이 있으며 입술에는 이를 악물다 난 이빨 자국이 있더란 말이야. 독약을 먹고 죽은 시신이 바로 그런 형상이지. 나는 원래 소리 내어 그 사실을 밝히려 했지만 갑자기 겁나는 게 있데. 서문경이 말이야.

그에게 미움을 받는다는 것은 벌집을 쑤시거나 전갈을 건드리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거든. 하지만 어물쩍 입관해 버리려 해도 또 켕기는 게 있더라구. 무대의 동생 말이야. 전에 경양강 고개에서 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잡은 무 도두가 바로 무대의 동생이 아닌가? 사람을 죽여도 눈 한번 깜짝 않을 그 사람인데 제 형이 그렇게 죽은 걸 알면 가만있겠어? 그래서 생각해 낸 게 내가 까무러친 척하는 거야."

그러자 아낙도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가 일전에 들으니, 뒷동네에 사는 교 노인 손자 운가(鄆哥)가 자석가의 찻집에서 무대를 도와 그 계집의 샛서방을 잡는다고 한바탕 난리를 쳤다더니 바로 그 일인 모양이군요. 함부로 이번 일을 다뤘다가는 정말 큰일 나겠어요. 당신 잘 빠져나왔어요.

이제 그 시신을 염()하는 일은 아랫사람들에게 떠넘겨 버리고 출상(出喪)이 언제인가만 알아 두세요. 만약 관을 집에 두고 무대의 아우 무송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린다면, 그때는 시신에 있는 흔적으로 무송(武松)이 다 알아서 하겠지요.

또 그 전에 출상한대도 시신을 땅에 묻는다면 걱정할 건 없어요. 아직 시신이 남아 있으니까 무송(武松)이 의심나면 파 보고 알 거 아녜요.

하지만 화장을 하겠다면 그냥 계셔서는 안 될 거예요. 그렇게 서둘러 화장을 하는 데는 까닭이 있을 테니, 당신은 화장터에 가서 남몰래 뼛조각 몇 개를 주워 두세요. 그리고 서문경에게서 받은 은자 열 냥과 함께 싸 두었다가 필요할 때 증거로 쓸 수 있도록 하는 거예요.

만약 무송(武松)이 돌아와 별 눈치를 못 채고 이번 일이 그냥 넘어간다면 우리도 입다물고 말지요. 그때는 서문경을 봐준 게 될 뿐 아니라 더 얻어 먹을 것까지 있으니 그 아니 좋아요? 그러나 무송(武松)이 눈치채고 덤비면 그 증거를 내주어 당신은 빠지고......"

어찌 보면 남편인 하구숙보다 더 생각이 깊고 치밀한 여자였다. 하구숙(何九叔)이 흐뭇해 아내를 치켜세웠다.

"집안에 어진 아내가 있으면 모든 게 잘된다더니 정말 그렇군. 임자 말대로 하지.“

그러고는 부리는 졸개들을 불러 말했다.

"나는 나쁜 기운을 쐬어 가지 못하겠으니 너희들이나 가서 무대의 시신을 염()하도록 해라. 다만 언제 출상(出喪)하는지는 알아 와야 한다. 그 밖에 거기서 나오는 돈이 있거든 너희들끼리 나눠 쓰고 내게 돌아오는 베필도 여기 가져올 건 없다."

그 말을 들은 졸개들은 좋다구나 무대네 집으로 가 시신을 염()하고 입관했다.

"그 집 여편네가 말하기를, 출상(出喪)은 사흘 뒤고 장례는 성 밖에서 화장으로 치른답니다."

얼마 뒤 돌아온 졸개들이 하구숙에게 그렇게 알려 주었다. 그들이 돌아가기를 기다려 하구숙(何九叔)이 그 아낙에게 말했다.

"임자 말이 옳았네. 장례 날에는 화장터에 가서 무대의 뼈를 몇 조각 주워 놓아야지."

한편 왕씨 할멈은 반금련을 도와 그날 밤으로 무대의 시신을 입관했다. 별일 없이 관 뚜껑을 덮고 나니 그걸로 벌써 모든 게 다 끝난 기분이었다.

둘째 날은 스님 셋을 모셔다 하루 종일 불경을 외게 했다. 이웃이 보기에는 제법 정성을 다해 죽은 이를 위하는 것 같았다.

드디어 셋째 날이 되었다. 아침 일찍 상여꾼들이 몰려와 상여를 메자 이웃들이 거리로 나와 가엾은 무대의 저승길을 눈물로 배웅해 주었다. 무대의 계집은 상복에 거짓 눈물로 상여를 따라나섰다. 상여가 성 밖 화장터에 이르자 계집은 일꾼들을 재촉해 무대의 시신을 사르게 했다.

그때 하구숙(何九叔)이 지전 몇 장을 들고 화장터로 왔다. 무대의 명복을 빌어 준다는 핑계였다. 그의 속셈을 알 리 없는 왕씨 할멈과 반금련이 의심 없이 맞았다.

"몸이 나았다니 정말 다행이우."

왕씨 할멈이 그런 소리까지 했지만 그래도 하구숙(何九叔)은 마음이 놓이지 않아 핑계를 한층 더 그럴듯하게 꾸몄다.

"전에 무 대랑(武 大郞)에게서 찐 떡 한 접시를 사고 돈을 주지 않은 게 있어서.....이렇게 지전이라도 살라 가신 분의 명복을 빌어 주러 왔습니다."

그 말에 넘어간 왕씨 할멈은 반금련을 대신해 감사까지 했다.

"이 양반이 정말 지성이구랴. 상주는 아니지만 고맙소."

하구숙(何九叔)은 할멈과 반금련이 자신을 의심하는 눈치가 없자 가만히 그들 곁에서 화장을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화장의 불길이 사그라들자 지전을 가지고 잿더미 근처로 다가갔다. 하구숙(何九叔)이 지전을 사르는 걸 보고 할멈과 계집은 다시 고마운 뜻을 나타냈다.

"단두 양반 같은 이도 드물 거유. 집에 돌아가서 대접이라도 해야지. 고마워서 원...."

"아닙니다. 제가 여기 온 것은 끝마무리라도 어떻게 도와 드리려구요. 할머니와 아주머니는 이제 그만 돌아가십쇼. 이웃에서 문상 온 사람도 많을 텐데 빈소에 계시면서 접대를 하셔야지요. 여기 일은 제가 알아서 다 마무리 짓고 가겠습니다."

하구숙(何九叔)이 태연히 두 사람에게 그렇게 권했다. 그러잖아도 더 있고 싶지 않던 두 사람은 그 말을 듣고 바쁘게 집으로 돌아갔다.

하구숙(何九叔)은 두 사람이 멀리 간 걸 확인한 뒤 잿더미를 헤쳐 무대의 뼛조각 몇 개를 주웠다. 뼈는 비상의 독기가 서려 거무스름했다. 하구숙(何九叔)은 얼른 그 뼈를 품에 감추고 화장의 나머지 과정을 정중히 치렀다. 무대의 뼛가루까지 땅에 묻히자 따라왔던 이웃들도 하나 둘 흩어져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온 하구숙(何九叔)은 그 뼛조각을 종이에 싸고, 화장한 날짜와 임자의 이름을 적었다. 그리고 그것과 서문경에게서 받은 은자 열 냥을 함께 꾸린 뒤 방안 깊숙이 치워 두었다. 말할 것도 없이, 무송(武松)이 돌아와 일이 터지면 무송에게 내어 주고 자신은 거기서 빠져나오기 위함이었다.

한편 집으로 돌아온 반금련(潘金蓮)은 아래층에다 빈소를 차리고 거기에 무대의 위패를 얹어 놓았다.

'망부무대랑지위(亡夫武大郞之位)'라고 번듯하게 쓴 위패를 세워 놓으니 제법 그럴듯했다. 게다가 그 앞에는 유리 등잔을 걸고 뒤에는 불경 베낀 것이며 명복을 비는 부적, 지전 따위를 늘어놓자 초상집으로는 완연히 모습을 갖추었다.

하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건 또 딴판이었다. 이제는 아무것도 거리낌 없는 반금련(潘金蓮)은 서문경을 만나러 왕씨 할멈네 찻집으로 가는 구차한 짓은 그만두었다. 서문경을 바로 집으로 불러들여 자기 손으로 죽인 무대의 위패가 있는 바로 위층에서 질펀하게 어울렸다.

전에 왕씨 할멈네 방을 빌려 뒹굴 때처럼 아슬아슬한 재미는 적었지만, 제집에서 마음 놓고 엉켜 헐떡이는 것도 그런대로 또 괜찮은 맛이 있었다. 밤낮 가릴 것 없고, 오가는 시각 따질 것 없이 붙고 싶으면 붙고 자고 싶으면 자니 세상이 온통 저희 둘만을 위해 있는가도 싶었다.

말할 것도 없이 이웃치고 그들 남녀의 일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또한 누구도 그 일을 가지고 맞대 놓고 그들 남녀를 욕하는 사람은 없었다. 서문경이 워낙 못된 개망나니인 데다 재산과 세력까지 있어 그를 건드렸다가는 그 어떤 욕을 당할지 몰라서였다.

그 바람에 서문경과 반금련은 그것이 그들의 영혼뿐만 아니라 종당에는 몸까지 살라 버릴 업화(業火)가 될 줄도 모르고, 꺼질 줄 모르는 음욕(淫慾)의 불길에 거듭거듭 스스로를 살라 갔다. 어쩌면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가련한 치정(癡情)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옛말에 기쁨 끝에는 슬픔이 오고 괴로움 끝에는 즐거움이 온다더니, 서문경과 반금련에게도 마침내는 끝장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사이 사십여 일이 지나 무송(武松)이 되돌아온 일이 그랬다. 지현의 심부름으로 예물 실은 수레와 문안 편지를 지키며 동경으로 간 무송(武松)은 탈 없이 일을 끝내고 생각보다 빨리 양곡현으로 돌아왔다. 가고 오고 걸린 날이 그럭저럭 두 달을 넘어서 계절은 그사이 겨울에서 이른 봄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런데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은 돌아오는 무송의 느낌이었다. 억울하게 죽은 형의 넋이 하소연이라도 하는 것인지 양곡현에 가까워질수록 무송(武松)은 마음이 불안하고 몸놀림도 까닭 없이 헷갈렸다. 형이 갑자기 가엾기 그지없고 보고 싶어지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무송(武松)은 양곡현으로 들어와서도 마음 같아서는 형에게 먼저 달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는 현청에서 일보는 도두(都頭)라 현청의 일이 먼저일 수밖에 없었다. 돌아오는 길로 지현을 찾아보고 동경에서 받아 온 답서를 올렸다.

지현(知縣)은 무송이 준 답서를 반갑게 읽었다. 자기가 보낸 예물은 모두 가야 할 곳에 갔는지 편지들이 하나같이 기쁨과 고마움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에 지현(知縣)은 무송에게 큼직한 은덩이 하나를 상으로 내리고 술과 밥으로 잘 대접해 보냈다.

현청을 나온 무송(武松)은 땀에 절은 옷과 해진 신발을 갈기 바쁘게 형의 집이 있는 자석가로 달려갔다.

무송(武松)이 돌아오는 걸 보자 무대의 이웃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서문경과 반금련의 일에다 무대의 죽음에 대해서까지 어렴풋이 알고 있는 사람들은 저희끼리 수군거렸다.

"이번에는 무슨 큰일 나겠군. 저 사람이 돌아왔으니 곱게 넘어가지는 않을걸. 반드시 일이 나도 크게 터질 거야."

그러나 영문을 알 리 없는 무송(武松)은 내처 달려 형의 집으로 갔다. 무송(武松)이 문을 열고 발을 젖히자 먼저 방 안에 높다랗게 차려진 위패가 눈에 들어왔다. 무송이 읽어 보니, '망부대랑지위'란 일곱 자가 쓰여 있었다. 그러나 무송(武松)은 아무래도 알 수가 없어 두 눈을 크게 부릅뜨고 중얼거렸다.

"내 눈에 헛게 보이는가.......“

그러다가 갑자기 큰 소리로 안에다 대고 말했다.

"형수님, 제가 돌아왔습니다."

그때 반금련(潘金蓮)은 서문경과 함께 위층에서 한참 신나게 엉켜 있는 중이었다. 서문경(西門慶)은 아래층에서 나는 무송의 목소리를 듣자 놀란 나머지 오줌까지 질금거리며 뒷문으로 내뺐다.

왕씨 할멈의 집으로 이어진 쪽문이었다. 반금련(潘金蓮)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우선 무송(武松)이 위층으로 뛰어 올라 오는 것이라도 막고 보자 싶어 목소리부터 먼저 내려보냈다.

"도련님, 조금만 거기 앉아 계세요. 제가 곧 내려갈게요."

원래 남편을 독살한 게 바로 그 계집이니 무슨 슬픔이 있어 상복을 입었겠는가. 매일 기름 바른 머리와 분칠한 얼굴에 고운 색옷을 차려입고 서문경과 어울려 즐기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송이 들이닥쳤으니, 그대로 내려갔다간 단번에 자신이 한 짓을 눈치 채일 판이었다. 반금련(潘金蓮)은 황급히 얼굴의 분칠을 지우고 머리에 꽂았던 비녀를 뽑아 던졌다. 머리에 바른 기름을 닦아 쑥대머리가 되게 한 뒤 붉은 저고리와 수놓은 치마를 벗어 던지고 상복을 걸쳤다.

그리고 대강 지아비 잃은 청상 같은 모습이 이뤄지자 소리소리 흐느끼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형수님, 잠시만 울음을 거두십시오. 도대체 형님께서 언제 돌아가셨습니까?"

"무슨 병이었고, 누구의 약을 먹었습니까?"

무송(武松)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 듯 반금련을 잡고 급하게 물었다. 반금련(潘金蓮)은 한편으로는 슬피 곡을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사설 늘어놓듯 대답했다.

"형님은 도련님이 떠나시고 한 열흘 지나서부터 앓아누웠어요. 가슴이 몹시 아프다며 눕더니....팔구 일 앓다가 그만 돌아가시더군요. 점을 쳐서 귀신에게 물어봐도 소용이 없었고, 의원을 불러와도 효험이 없었어요...홀로 남은 나는 어쩌라고......"

그때쯤 해서 이웃집 왕씨 할멈도 무송이 돌아온 걸 알았다. 반금련이 서툰 소리를 해 꼬리라도 밟힐까 겁났던지 한달음에 건너왔다. 왕씨 할멈이 집 안으로 들어서는데 무송(武松)이 여전히 못 믿겠다는 듯 물어 왔다.

"형님은 일찍이 그런 병이 없었는데, 어떻게 가슴앓이로 이렇게 쉽게 죽었단 말이오?"

"이보시우, 무 도두, 하늘의 풍운은 예측할 수 없고, 사람의 화복도 눈 깜짝할 사이라 하지 않우? 누가 죽고 사는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겠우?"

할멈이 반금련을 대신해 그렇게 눙치며 받았다. 반금련(潘金蓮)이 냉큼 그 말을 받았다.

"정말 저 할머니가 아니었더라면 어떻게 됐을지.... 나 혼자서 어쩔 줄 몰라 있는데 할머니가 나서서 도와주셔서 얼마나 고마웠는지요...."

"형님은 어디에 묻히셨습니까?"

"나 혼자서 어디다 묻어야 할지 몰라 하다가 사흘 만에 화장해 버렸어요."

반금련(潘金蓮)이 다시 눈도 한번 깜박 않고 무송의 물음에 대답했다. 무송(武松)이 별 표정 없이 또 물었다.

"돌아가신 지는 며칠이나 됐습니까?"

"이틀 뒤면 사십구일이 됩니다."

그러자 무송(武松)은 더 묻지 않고 한동안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갑자기 방을 나갔다. 뛰듯이 현청으로 돌아온 무송(武松)은 흰옷을 찾아 갈아입더니 한줄기 삼베 띠를 허리에 둘러 상복을 갖췄다. 이어 날카로운 칼 한 자루와 은자 약간을 몸에 갈무리하고 부리는 병졸을 불렀다.

"너는 요 앞에 가서 쌀국수와 양념, , , 지전 등 장례에 쓸 물건을 사 오너라."

그리고 병졸이 시킨 대로 해 오자 무송은 곧 그것들을 가지고 형의 집으로 갔다. 무송(武松)이 문을 두드리자 반금련이 나와 문을 열어 주었다.

무송은 데려간 졸개들에게 가져간 제수들을 조리하게 했다. 준비가 갖춰지자 무송(武松)은 제상 위에 촛불을 밝히고 마련된 제물을 차렸다. 밤 이경이 되자 무송(武松)은 형의 위패 앞에 엎드려 절하며 말했다.

"형님의 넋은 아직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니 아우의 말을 들으십시오. 살아 계실 적에도 연약하더니 돌아가신 뒤까지 분명하지 못하시군요. 만약 형님께서 남에게 원통한 죽임을 당하셨다면 꿈속에서라도 나타나 제게 일러 주십시오. 그러면 이 아우가 반드시 형님의 원수를 갚아 드리겠습니다."

그런 다음 술을 따르고 지전을 태우더니 목을 놓아 울었다. 그의 기원이나 맹세를 곁에서 들은 이웃은 저도 몰래 온몸이 오싹해졌다. 반금련(潘金蓮)도 겁나기는 마찬가지라 거짓 울음으로 스스로를 감추었다.

무송(武松)은 젯밥과 제주를 병졸들과 나눠 마신 뒤 돗자리 두 장을 문간에 펴게 하고 거기 누워 잠을 청했다.

반금련(潘金蓮)도 무송이 아래층에 눕는 걸 보고 불안한 대로 위층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형의 위패 앞이라 그런지 무송은 삼경이 되어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몸을 뒤척이며 옆의 병졸들을 보니 벌써 코를 골며 자는 게 꼭 죽은 사람 같았다.

무송(武松)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형의 위패 앞으로 갔다. 위패 앞에 켜져 있는 유리 등잔의 불이 바람도 없는데 깜박이고 있었다. 멀리서 삼경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리자 무송(武松)은 자신도 모르게 탄식했다.

"우리 형님은 살아 계실 때도 약해 빠졌더니 돌아가신 뒤에도 흐리멍텅하구나."

무언가 형의 넋이 나타나 일러 주기를 기대했으나 삼경이 지났으니 이제 틀렸다 싶어 한 소리였다.

그때였다. 미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위패 쪽에서 한 줄기 찬바람이 일더니 갑자기 정신이 아뜩해졌다.

등불이 모두 빛을 잃고 지전이 날리는 게 어지간한 무송까지도 등줄기가 서늘하게 만들었다. 무송(武松)은 온몸의 털이 올올이 곤두서는 듯한 느낌으로 찬바람이 이는 곳을 바라보았다.

제상 앞으로 어떤 사람이 불쑥 나타나 나지막이 울부짖었다.

"아우야, 나는 정말로 억울하게 죽었다......."

그러나 뒷말을 잘 알아듣지 못한 무송(武松)이 그에게 다가가 물어보려는데 홀연 찬기운이 걷히며 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 사람이 형인지 아닌지조차 잘 알 수가 없었다. 잠이 확 달아난 무송(武松)은 그 꿈 같기도 하고 생시 같기도 한 광경을 되살리려는 듯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방 안은 좀 전과 다름없고, 병사들은 코를 골며 자고 있을 뿐이었다.

무송(武松)은 처음 헛것을 보았나 싶었으나 곧 생각을 바꾸었다.

'형님의 죽음에는 틀림없이 석연찮은 데가 있었다. 형님은 내게 알려 주려 왔으나 내 거센 신기(神氣)가 형님의 넋을 흩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날이 밝기만을 기다렸다. 날이 밝는 대로 석연찮은 곳을 한번 더듬어 볼 작정이었다.

날이 훤히 밝자 병졸들이 일어나 아침밥을 준비했다. 무송(武松)도 별 내색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세수를 했다. 얼마 안 되어 반금련도 위층에서 내려왔다.

"도련님, 간밤에 어려움은 없으셨는지요?"

그녀가 살피는 눈길로 묻자 무송(武松)이 애써 덤덤한 표정을 지으며 받았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형수님, 형님은 무슨 병으로 돌아가셨습니까?"

"도련님, 벌써 잊으셨어요? 어제 저녁 가슴앓이로 돌아가셨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반금련이 불안함을 감추며 그렇게 대꾸했다. 무송(武松)이 별로 개의치 않고 다시 물었다.

"약은 누구의 것을 드셨습니까?"

"약봉지가 저기 있으니 살펴보세요."

"관은 누가 사다 주었습니까?"

"옆집 왕씨 할머니가 사다 주셨어요."

"시신은 누가 수습했습니까?"

"우리 현()의 단두 하구숙(何九叔)이란 분이예요. 그분이 모든 걸 맡아 처리했어요."

계속되는 무송의 물음이 꽤나 날카로웠으나 워낙 독한 계집이라 반금련은 별로 허둥대지 않았다. 무송(武松)도 자신이 형의 죽음을 수상쩍게 여기는 게 계집에게 알려져 좋을 것은 없다 싶었다. 그쯤에서 대강 말을 그쳤다.

"그랬군요. 그럼 현청에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그리고 병졸들과 함께 집을 나왔다. 자석가를 벗어나기 바쁘게 무송(武松)이 병졸들에게 물었다.

"너희 중 단두 하구숙(何九叔)을 아는 사람이 있느냐?"

"도두님, 벌써 잊으셨습니까? 도두님께서도 전에 그와 함께 일하신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 집은 사자가(狮子街) 골목 안에 있습니다."

병졸 중에 하나가 그렇게 일러 주었다.

"그럼 그 집까지 좀 데려다 다오."

무송(武松)이 얼른 그 병졸에게 말했다. 병졸은 어려울 것 없다는 듯 무송을 하구숙의 집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무송(武松)은 그 병졸을 집앞에서 돌려보내고 홀로 하구숙의 대문을 두드렸다.

"하구숙, 집에 있나?"

하구숙(何九叔)은 이제 막 잠자리에서 일어나 있던 참이었다. 자기를 찾는 목소리가 무송임을 알자 겁에 질려 손발부터 떨려 왔다. 두건도 제대로 쓰지 못한 채 벽장 속에 감춰 두었던 보따리를 급히 꺼냈다. 무대의 뼛조각과 서문경이 준 은자가 들어 있는 보따리였다. 하구숙(何九叔)은 그 보따리를 찾아 쥐고서야 문 앞으로 가서 무송을 맞아들였다.

"도두께선 언제 돌아오셨습니까?"

하구숙의 그 같은 물음에 무송(武松)이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어제 돌아왔소. 그런데 물을 말이 있어 찾아왔으니 아는 대로 일러 주시면 고맙겠소. 같이 갑시다."

"그야 어렵잖지요. 하지만 이왕 저희 집에 오셨으니 차라도 한 잔 하고 가십시오."

하구숙(何九叔)이 그렇게 권해 보았으나 무송은 굳은 얼굴을 풀지 않았다.

"그럴 것 없소. 마신 걸루 여길 테니 함께 가기나 합시다."

이에 하구숙(何九叔)은 아무 소리 못하고 무송을 따라나섰다. 무송(武松)이 하구숙을 데려간 곳은 골목 밖의 작은 술집이었다. 무송이 술 두 각을 시키는 걸 보고 하구숙(何九叔)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저는 여태껏 한 번도 도두님과 술자리를 같이한 적이 없는데, 어찌 이렇게 한자리에 앉을 수 있겠습니까?"

"잠깐만 앉아 있으시오."

무송(武松)이 까닭을 안 밝히고 표정으로 겁만 주어 하구숙을 제자리에 도로 앉혔다. 그사이 술집 주인이 술을 가져다 두 사람의 잔에 따랐다. 무송(武松)은 입 한번 열지 않고 술잔만 비웠다. 그러잖아도 겁을 먹고 있던 하구숙(何九叔)은 무송이 말없이 잔만 비우자 더욱 겁이 났다. 몸이 절로 떨리고 식은땀이 비죽비죽 솟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몇 잔을 거듭 비운 뒤였다.

무송(武松)이 문득 품 안에서 날카로운 칼 한 자루를 꺼내 탁자에 꽂았다. 술을 따르던 술집 주인이 놀라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하구숙(何九叔)은 얼굴이 누렇게 뜬 채 숨도 제대로 못 내쉬고 있었다. 어느새 양 소매를 걷어붙인 무송(武松)이 칼을 뽑아 칼끝으로 그런 하구숙을 겨누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비록 하찮은 건달이지만, 원한에는 그 원한을 일게 한 자가 있으며 빚에는 빚을 준 놈이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너는 쓸데없이 놀라거나 겁내지 말고 바른대로만 말하라. 네가 우리 형님의 죽음에 대해 아는 대로 자세히만 일러 준다면 너는 건드리지 않겠다. 그런데도 너를 다치게 하면 나는 호걸이 아니다. 하지만 만약 네가 한마디라도 거짓을 말한다면 네 가슴과 등에는 수백 개의 맞창이 날 줄 알아라. 이건 결코 그냥 해 보는 소리가 아니야. , 어서 말해 봐. 형님의 마지막 모습이 어떠했지?"

하구숙을 불러낼 때와는 말투까지 달라져 있었다. 말을 마친 무송(武松)은 팔짱을 낀 채 호랑이 같은 눈으로 하구숙을 쏘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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