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宋江)은 밤새 참은 화가 한꺼번에 치솟았으나 공연히 시끄러워지는 게 싫어 말없이 방을 나왔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송강의 발자국 소리에 잠이 깬 할멈이 침상에 누운 채 속 모르는 소리를 했다.
"압사 나리, 더 주무시고 날이 밝거든 가시우. 뭣 때문에 새벽부터 서두는 거유?"
송강(宋江)은 대꾸하기도 귀찮아 말없이 문을 열었다. 할멈이 그런 송강의 등 뒤에 대고 졸림 섞인 어조로 당부했다.
"나가시려거든 문이나 걸어주고 가시우."
이번에도 대꾸 없이 나왔으나 그 집을 벗어나니 그동안 참은 화가 한꺼번에 치솟는 듯했다. 송강(宋江)은 그 화를 삭이기 위해 뛰듯이 걸었다. 현청 앞에 이르자 희미한 등불이 하나 보였다. 다가가서 살펴보니 차나 보약 따위를 끓여 파는 왕공(王公)이란 늙은이가 거기 전을 별여 놓고 있었다. 그 늙은이도 송강을 알아보고 황망히 머리를 수그리며 말을 걸어왔다.
"압사 나리, 오늘은 일찍 나오셨군요."
"어제저녁 술을 좀 마셨더니 경고(更鼓, 시간을 알리는 북소리)를 잘못 들은 모양이오."
송강(宋江)이 그렇게 둘러댔다. 그러자 왕공(王公)이 권했다.
"간밤에 술을 잡수셨다면 술 깨는 데는 이진탕(二陳湯)이 좋으니 한 잔 드셔 보십시오."
"그것 좋지요."
송강(宋江)이 그런 대답과 함께 곁에 있는 조그만 의자에 앉았다. 송강이 기다리는 사이에 왕공(王公)은 이진탕 한 그릇을 끓여 냈다. 송강을 위해 특별히 뻑뻑하게 곤 것이었다. 송강(宋江)은 그 이진탕을 받아 단숨에 들이켰다. 정신이 조금 맑아지는 듯하면서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이 영감이 늘상 내게 탕약을 끓여 주면서도 돈을 받으려 들지 않아 언젠가 관(棺)감 한 벌을 사 주기로 약속한 적이 있지. 어제 조개(晁蓋)가 보낸 금덩이 중에 한 조각 얻은 걸 주머니에 넣어 두었는데 그걸 관(棺) 살 돈으로 줘야겠다.'
생각 끝에 그렇게 마음을 정한 송강(宋江)이 왕공에게 말했다.
"왕 영감, 내가 전에 관 살 돈을 주마 해 놓고 아직껏 드리지 못했구려. 오늘 마침 금 조각이 하나 있으니 그걸 관값으로 드리겠소. 진삼랑에게 가서 관감 한 벌을 사다가 댁에 갖다 두시구려."
"나리께서 언제나 이 늙은것을 보살펴 주시더니 이제는 죽은 뒤의 일까지 걱정해 주시는군요. 내가 이 세상에서 나리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한다면 죽은 뒤 노새나 말로라도 다시 태어나 그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감격한 왕공(王公)이 눈물까지 글썽이며 그렇게 감사해했다.
"원 별말씀을."
송강(宋江)은 그 말로 노인의 입을 막고 금조각을 꺼내기 위해 손을 주머니가 달려 있는 허리띠 쪽으로 가져갔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당연히 있어야 할 곳에 주머니가 없는 것이었다.
'아뿔사, 어젯밤 허리띠를 그 천한 계집년의 침상 난간에 걸쳐놓고 화난 김에 그냥 뛰쳐나오고 말았구나. 까짓 금 쪼가리야 대단할 것도 없지만 조개(晁蓋)가 보낸 편지가 그 안에 함께 들어 있어 걱정이다. 원래 유당 앞에서 태워 없애려 했으나 그와 이야기를 나누느라 미처 그러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 태우려 한 게 탈이다. 그 계집년은 곡본(曲本, 극본 또는 소설) 같은 걸 읽은 걸로 보아 글을 아는 것 같던데, 만일 그 편지를 읽게 된다면 정말로 큰일이다. 그걸로 반드시 나를 해치려 들 것이니 이 일을 어쩌면 좋으냐?'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송강(宋江)은 더 머뭇거릴 틈이 없었다. 벌떡 몸을 일으키며 왕공에게 말했다.
"영감, 이거 낯없게 되었소. 내가 금 조각이 든 주머니를 집에 두고 나왔구려. 가서 그걸 가져와 드리겠소."
"이 늙은것 때문에 일부러 돌아가 가져오실 건 없습니다. 내일 천천히 갖다주셔도 늦지 않습지요."
왕공(王公)은 남의 속도 모르고 느긋하게 송강을 말리려 들었다.
"아니오, 그 주머니에는 금 조각뿐만 아니라 다른 긴요한 것도 하나 들어 있소. 내 얼른 가서 가져오리다."
송강(宋江)은 그렇게 왕공을 뿌리치고 염파석의 집으로 나는 듯 달려갔다. 한편 염파석(閻婆惜)은 송강이 걷어차듯 문을 열고 집을 나간 뒤에야 침상에서 기어 나왔다.
'그 얼 빠지고 밸 없는 치 때문에 이 아가씨가 간밤 한숨도 자지 못했단 말씀이야. 제 놈이 거들떠보지 않는다고 누가 걱정이나 한대? 오히려 안 오면 더 좋은 게 제 놈인 줄도 모르고....'
그렇게 구시렁거리면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 머리 장식 풀고, 겉옷 벗고, 속옷 벗고 이제 한번 늘어지게 잘 셈이었다. 염파석(閻婆惜)이 벗은 치마를 침상에 걸쳐 두려고 할 때였다. 등불 환히 비치는 침상 난간에 무엇이 걸려 있었다. 자세히 보니 소강의 자줏빛 허리띠였다. 염파석(閻婆惜)은 생각했다.
'그 새까만 놈이 어지간히 화가 났던 모양이로구나. 허리띠까지 벗어 놓고 가다니.'
그러면서 그 허리띠를 집어 들자 거기 매여 있던 짧은 칼과 작은 주머니가 함께 딸려 나왔다. 염파석(閻婆惜)은 주머니가 유달리 묵직한 걸 이상히 여겨 주둥이를 연 뒤 탁자 위에 쏟아 보았다. 작은 금덩이 한 조각과 편지가 쏟아져 나왔다. 염파석(閻婆惜)은 먼저 금덩이부터 주워 보았다. 크지는 않아도 누런빛이 반짝이는 진짜 황금덩이였다.
"하늘이 나와 장삼랑에게 금을 내리셨구나. 이 며칠 장삼랑이 몹시 야위어 보이던데 이걸로 보신이나 시켜 줘야지."
금덩이를 챙겨 넣으며 그렇게 중얼거린 염파석(閻婆惜)은 다시 편지를 집어 들었다. 등불에 비춰가며 내용을 읽어 보니 놀랍게도 양산박의 우두머리 조개(晁蓋)가 써 보낸 것이 아닌가.
"옳지, 잘되었다. 마침 내가 장삼랑과 부부로 짝지어 살고 싶어 하는 걸 너희가 어떻게 알고 이 짓거리들이냐? 양산박의 도적떼와 한통속이 되어 금까지 백 냥씩 받아먹었구나. 기다려라, 이 새까맣고 못생긴 놈아, 이 아가씨가 네놈을 없애 줄 테다!"
신이 난 염파석(閻婆惜)은 그 편지와 금덩이를 함께 싸서 원래대로 주머니에 넣었다.
"네놈이 다섯 성인(聖人)을 데려온다 해도 이걸 돌려주나 봐라."
그러면서 한껏 들떠 혼잣말을 중얼거리는데 아래층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래층 침상에서 자고 있던 염씨 할멈이 소리쳐 물었다.
"누구요?"
"나요."
문을 들어선 사람이 그렇게 대답했다. 그게 송강이란 걸 알아들은 할멈은 침상에 누운 채 이죽거렸다.
"거봐요, 너무 이르지 않우? 내 말을 안 믿고 가시더니 결국은 돌아오고 마시는구랴."
그러나 송강(宋江)은 대꾸도 없이 이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염파석(閻婆惜)은 송강이 올라오는 소리를 듣고 얼른 허리띠와 칼과 주머니를 한데 둘둘말아 침상 위 이불 속에 감추었다. 그리고 깊이 잠든 사람처럼 코까지 골며 침상에 반듯이 누웠다. 방 안으로 뛰어든 송강(宋江)은 먼저 침상 난간으로 갔다. 거기서 칼과 주머니가 달린 허리띠를 찾았으나 그게 아직 남아 있을 리 없었다. 송강(宋江)은 당황했다. 간밤의 분함도 잊고 염파석을 흔들어 깨웠다.
"이봐, 지난날의 정분을 생각해서라도 제발 내 주머니를 돌려 줘."
그걸 감출 사람은 염파석밖에 없다고 본 송강(宋江)은 처음부터 사정조로 나왔다. 그러나 염파석(閻婆惜)은 깊이 잠든 척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급해진 송강(宋江)이 더욱 세게 그녀를 흔들었다.
"그러지 말고 내놔. 밝은 날 내 모든 걸 다 말해 줄 테니."
"잠 좀 자려는데 누가 이렇게 수선을 피우지?"
염파석(閻婆惜)이 그제야 겨우 깨어난 사람처럼 부스스 일어나며 그렇게 말했다. 그런 딴전에 짜증이 난 송강(宋江)이 퉁명스레 쏘아붙였다.
"난 줄 뻔히 알면서 왜 그러나?"
그러나 염파석(閻婆惜)이 발딱 몸을 일으키며 놀라듯 말했다.
"이 새카만 사람, 당신 방금 뭐라 했지?"
"내게 그 주머니를 돌려달라 하지 않았나? 내게 맡겨 놓았어? 무얼 내놓으라는 거야?"
염파석(閻婆惜)은 그래도 시치미를 뗐다. 송강(宋江)이 조금 목소리를 높였다.
"네 침상 난간에 걸어 두었던 거 말이야."
"아직 아무도 다녀간 사람이 없으니 치울 사람은 너밖에 없어! 별소릴 다 듣겠네.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염파석이 그렇게 뻗대자 송강(宋江)은 다시 약해졌다. 처음의 사정조로 돌아가 빌었다.
"어젯밤은 내가 잘못했네. 내일 당신에게 모두 이야기하고 잘못을 빌지. 우선 그 주머니나 내게 돌려줘. 장난은 이제 그만하고."
"누가 당신과 장난을 한다는 거예요? 나는 정말로 아무것도 치우지 않았어요. 당신은 처음에 옷도 벗지 않고 잠자리에 들지 않았나? 그런데 지금은 옷을 벗은 데다 이불까지 덮고 있지 않나? 이부자리를 펼 때 틀림없이 주워 두었을 거야."
송강(宋江)이 그렇게 차근차근 따지자 염파석(閻婆惜)도 더는 버틸 수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눈썹을 곤두세우고 눈을 치뜨며 표독스레 말했다.
"그래 내가 치웠다. 하지만 네게 돌려줄 순 없어. 관청에 나가는 어르신이니 어디 나를 한번 잡아가 도적년으로 일러바쳐 보시지."
"나는 도적질했다고 당신을 나무라는 게 아니야."
"나두 도적년 소릴 들을 일 한 적 없어!"
파석이 그렇게 나오자 송강(宋江)은 한층 더 당황스러워졌다. 다시 달래는 투로 돌아가 말했다.
"내가 그렇게 너희 모녀를 잘 돌봐 주지는 못했지만 그러지 마. 이만 그걸 내게 돌려주고 가게 해 줘. 나는 가서 일을 봐야 한단 말이야."
"내가 장삼랑하고 붙어먹었다고 욕할 때는 언제구? 그 사람은 너처럼 높은 자리에 있지는 않아도 칼 맞아 죽을 죄는 안 지었다. 너처럼 흉악한 도둑 떼와 내통은 안 했단 말이야."
염파석(閻婆惜)이 슬슬 마음속의 말을 꺼내 놓기 시작했다. 송강(宋江)은 계집이 장문원을 자신과 견주는 데 속이 뒤틀렸으나 형세가 그런 걸 따질 때가 못 되었다.
"여보게, 제발 소리 지르지 마. 이웃 사람이 들으면 큰일 난다구."
"남이 듣는 게 두려우면 그런 짓을 하지 말지. 그 편지는 내가 깊이 감춰 뒀으니 찾고 싶으면 세 가지 일을 들어줘야겠어. 그것만 들어주면 당장 내주고말고."
드디어 독한 계집이 속셈을 드러내는 셈이었다. 하지만 송강(宋江)은 반갑게 그 말을 받아들였다.
"그게 뭐냐? 말해 봐라. 세 가지가 아니라 서른 가지라도 네 말대로 하마."
"그렇게 쉬운 일도 아닌데."
"말만 해, 당장 그대로 할 테니."
그제야 계집이 눈을 차악 내리깔고 읊조리듯 말했다.
"첫째 너는 오늘로 나를 산 문서를 돌려줄 것, 그리고 다시 문서 하나를 써서 내가 장삼랑에게 시집가더라도 아무 소리 않을 것이라는 걸 밝힐 것."
여느 사람 같으면 그것만으로도 칼부림 날 소리였으나 송강(宋江)은 선뜻 들어주었다.
"좋다, 그대로 하지."
"둘째, 네가 사 준 것은 모두 내게 준다는 문서를 쓰고 다시 되찾을 생각을 버릴 것."
"그것도 그대로 따르지."
"셋째 번 일은 정말로 어려울걸."
두 가지 조건을 말한 염파석(閻婆惜)이 셋째 번을 말하기 전에 뜸을 들였다. 후끈 단 송강(宋江)이 급히 물었다.
"앞의 두 가지도 다 들어준댔는데 무슨 소린가? 뭣 때문에 이번 일은 어렵다는 거지?"
"그럼 말하지. 양산박의 우두머리 조개(晁蓋)에게서 받은 금 백 냥을 모두 내게 바칠 것. 그러면 너를 관청에 끌고 가는 대신 그 주머니를 돌려주마."
알고 보니 송강으로서는 정말로 들어주기 어려운 일이었다. 조개의 편지에는 그리 쓰여 있어도 송강(宋江)은 그 백 냥을 유당 편에 도로 보냈기 때문이다. 송강(宋江)이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앞의 두 가지는 들어줄 수 있다. 그러나 그 금은 조개(晁蓋)가 보내긴 했으나 내가 받지 않고 돌려보냈다. 만약 가지고만 있다면 두 손으로 갖다 바치지."
"그럴 줄 알았어. '관리는 돈맛, 파리는 피맛'이란 말도 있는데 그쪽에서 보내는 돈을 네가 안 받았단 말이지? 되지도 않는 소리 하지 마라. 고양이가 생선을 마다했다는 게 낫지. 염라대왕 앞에 불려 갔다가 돌아왔다는 혼백 봤어? 누굴 속이려 들어? 어서 그 백 냥을 내놓지 그래. 도둑 떼하고 한통속이 된 죄로 관가에 끌려가지 않으려거든 어서 그 금을 내놔!"
계집은 눈도 깜짝 안 하고 송강을 몰아세웠다. 염파석(閻婆惜)이 눈도 깜짝 안 하고 송강을 몰아세우자 송강(宋江)은 애가 타 빌 듯했다.
"너는 내가 거짓말하지 않는 사람이란 걸 잘 알지 않느냐? 정히 못 믿겠으면 내게 사흘만 말미를 다오. 그동안 집 안 살림살이를 팔아서라도 그 백 냥을 구해다 주마!"
그래도 계집은 차게 웃을 뿐 송강의 말을 믿어 주지 않았다.
"이 새카만 놈이 나를 어린아이 데려 놀듯 하려는 게야 뭐야? 네놈 말을 믿고 그 주머니와 편지를 돌려줬다가 사흘 뒤에 찾아가 그 금을 내놓으라 해 보지. 장례 치른 뒤에 관값 얻으러 가는 것보다 더할걸. 그러지 말고 지금 가져와. 돈과 물건을 맞바꾸잔 말이야."
"정말로 그 금을 갖고 있지 않다니까."
버선목이라 속을 뒤집어 보일 수도 없어 송강(宋江)이 답답한 나머지 소리쳤다. 염파석(閻婆惜)이 앙칼지게 그 말을 받았다.
"그래? 좋아, 그럼 내일 아침 관가에 가서도 그 금을 가지지 않았다고 하는가 보자!"
따지고 보면 염파석(閻婆惜)은 그날 죽으려고 혼이 씐 것이나 다름없었다. 서방질한 걸 공공연히 드러낸 것만으로 칼 맞을 소린데 없는 돈까지 내놓으라고 억지를 쓰니 제가 어찌 살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송강(宋江)은 염파석이 '관가'라는 말을 하자 참고 참았던 화가 일시에 터져 나왔다. 좋은 말로는 틀렸다 싶어 옷깃을 거머쥐며 눈을 부릅떴다.
"자, 내놓을 테냐, 안 내놓을 테냐?"
그렇게 무섭게 소리쳤으나 계집은 낯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네놈이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하지만 그냥은 죽어도 못 내놓겠다!"
"정말로 못 내놔?"
"그렇고말고, 백 번 물어도 못 돌려주는 건 못 돌려주는 거야. 꼭 돌려달라면 현청에 가서 돌려주지."
그 소리에 더욱 화가 난 송강(宋江)은 염파석 곁으로 다가가 이불을 확 걷어 젖혔다. 계집이 거기 감춰져 있던 물건을 가슴에 꼭 껴안았다. 그런 계집의 가슴 앞으로 애타게 찾던 허리띠 한끝이 보였다.
"여기 있었구나!"
뜻밖으로 찾던 물건이 쉽게 나오자 송강(宋江)이 그렇게 소리치며 양손으로 뺏으려 했다. 하지만 염파석(閻婆惜)이 호락호락 내줄 리 만무했다. 송강(宋江)이 힘을 다해 덤벼도 꼭 끌어안은 채 내놓지를 않았다. 송강(宋江)은 한편으로 계집의 팔을 벌리고 한편으로는 허리를 감아쥐며 잡아당겼다. 아무래도 남자의 힘을 못 당했던지 허리띠에 묶여 있던 칼이 먼저 튀어나왔다. 송강(宋江)은 급한 대로 그 칼을 잡았다. 그러자 그걸 본 계집이 제명을 재촉하려는지 소리를 빽 내질렀다.
"아이쿠, 저 새카만 놈이 사람 죽이려는구나!"
그 소리가 그때껏 편지를 돌려받을 생각뿐이던 송강(宋江)의 머릿속에 딴 생각을 불러들였다.
'그렇다. 이 천한 계집을 아예 죽여 버리자!'
그러잖아도 화가 머리끝까지 솟아 있던 송강(宋江)은 한번 마음이 정해지자 망설이지 않았다. 계집이 두 번째 소리를 내지르기도 전에 송강의 칼이 먼저 번쩍했다. 왼손으로 계집의 몸을 누르고 오른손으로는 칼을 들어 그 목을 찔러 버렸다. 목에 칼을 맞은 계집은 붉은 피를 샘솟듯 흘리며 몸을 푸들거렸다. 송강(宋江)은 계집이 살아나면 정말로 큰일이다 싶어 한 번 더 칼질을 한 뒤 아예 그 목을 잘라 버렸다. 어질다는 소리를 듣던 그도 모진 계집에게 걸려 몰리다 보니 끔찍한 살인자가 되고 만 것이었다. 계집의 목을 침상에 던진 송강(宋江)은 곧 주머니를 뒤져 말썽이 된 그 편지를 찾아냈다. 그리고 등불에 그걸 살라 버린 뒤 허리띠를 두르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염씨 할멈은 아래층에서 송강과 제 딸이 다투는 소리를 들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다가 딸이 '새카만 놈이 사람 죽인다.'는 고함을 지르자 비로소 심상찮은 느낌이 들었다. 얼른 일어나 옷을 꿰고 층계 쪽으로 달려갔다. 할멈이 위층으로 올라가 보니 송강(宋江)이 굳은 얼굴로 딸의 방을 나오고 있었다.
"두 사람이 무슨 일로 그리 다투셨우?"
"당신의 딸이 하두 못되게 굴기에 그만 죽여 버렸소."
송강(宋江)이 남의 이야기하듯 대답했다. 하도 참말 같지가 않아 할멈이 웃으며 받았다.
"그랬우? 원래 압사 나리의 눈길에 사나운 기운이 있는 데다 술까지 취했으니 사람을 죽일 만도 하지. 허지만 늙은 사람을 너무 놀리지는 마시우."
"믿기지 않거든 방으로 가 보시오. 내가 정말로 죽였소!"
송강(宋江)은 여전히 정색을 하고 그렇게 말했다.
"아무렴 그럴 리야......"
노파가 중얼거리며 방문을 열어 보았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방 안은 피바다가 되고 침상 위에는 딸의 잘린 목이 뒹굴고 있었다.
"아이쿠, 이게 어찌 된 일이우? 도무지 어쩌려구 이랬소?"
노파가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
"나도 뼈다귀 있는 사내놈이오. 평생 일 저질러 놓고 달아나 본 적은 없어. 할멈이 하자는 대로 하리다."
송강(宋江)이 조용히 말했다. 송강을 힐끗 본 할멈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딸 죽인 데 대한 원망보다는 넋두리부터 먼저 했다.
"그 천한 년이야 못된 짓을 했으니 압사께서 죽이셨대도 어쩔 수 없지만, 이제 나는 어쩌누? 이 늙은것을 누가 돌봐 준다누..."
"그건 걱정 마시오. 그거라면 내가 약간의 재물이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소. 남은 살림살이가 궁색하지 않게 돌봐 드리리다."
할멈이 한바탕 행악이라도 하고 덤빌 줄 알았던 송강(宋江)이 얼른 그렇게 받았다. 할멈이 또 딸 죽은 어미 같지 않은 소리를 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오죽 좋겠습니까. 정말로 고맙습니다. 압사 나리. 그런데 딸년이 죽어 지금 침상에 자빠져 있는데 그건 어떻게 치우시렵니까?"
"그거야 어렵잖지요. 내가 진삼랑에게 가서 관 한 벌을 보내거든 할멈이 시체를 거둬 넣으시구려. 오작행인에게는 내 따로 부탁을 해 놓겠소. 그리고 일이 끝나면 할멈에게도 다시 은자 열 냥을 보낼 테니 그걸루 뒤치다꺼리를 해 보도록 하시오."
뜻밖으로 일이 잘 풀리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송강의 목소리가 절로 떨렸다. 할멈이 다시 천연덕스레 말했다.
"그렇담 아직 날이 밝기 전에 관을 구해야 하지 않겠우? 그래야 이웃이 보기 전에 시체를 관에 넣어 버릴 수 있을 테니 말이오."
"그럼 종이와 붓을 가져오시오. 내 진삼랑에게 관을 주라는 글을 써 주겠소. 그러면 할멈이 가지고 가서 관을 얻어 오시오."
"쪽지를 쓰고 어쩌고 하는 게 되레 어지럽지 않겠우? 나리께서 직접 가셔서 빨리 관을 가져와야 마무리가 질 텐데...."
송강(宋江)은 그때까지도 노파의 능청에 속고 있었다.
"그도 그렇겠군."
그러면서 별 의심 없이 할멈과 함께 집을 나섰다. 할멈은 방안에 문고리를 걸고도 모자라는지 대문까지 잠근 뒤 송강을 따라나섰다. 송강과 할멈이 현청 앞에 이르렀을 때까지도 아직 날이 밝지 않아 현청 문은 굳게 닫긴 채였다. 할멈의 속셈을 알 리 없는 송강(宋江)은 별생각 없이 현청 앞을 지나가려 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막 현청 문 왼편에 이르렀을 때였다. 염씨 할멈이 갑자기 송강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지면서 찢어지는 듯한 소리로 외쳐 댔다.
"사람 죽인 놈이 여기 있소!"
그 갑작스러운 변화에 송강(宋江)은 잠시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러다가 겨우 입을 열어 할멈을 말렸다.
"이거 왜 이러시오. 제발 소리 좀 지르지 마시오!"
그러면서 할멈의 입을 막으려는데 현청 안에 있던 공인 몇이 우르르 달려 나왔다. 살인자가 있다는 말에 달려 나오기는 했으나 공인들이 보니 염씨 할멈이 붙들고 있는 것은 송강이었다. 송강(宋江)이 결코 그럴 사람이 아님을 잘 알고 있는 그들은 할멈을 윽박질렀다.
"이 할망구가 미쳤나? 압사님은 그럴 분이 아니야. 할 이야기가 있으면 좋은 말로 하라구."
"저놈이 바로 사람 죽인 놈이다. 나하고 함께 현청 안으로 잡아들여라!"
할멈이 눈이 뒤집혀 악을 썼다. 그러나 송강(宋江)이 워낙 사람이 좋아 아랫사람 윗사람 할 것 없이 우러르고 아끼는 터라, 공인들은 그 말을 듣고도 감히 송강을 잡아들일 엄두를 못 냈다. 오히려 노파의 말을 못 믿어 하며 그 손아귀에서 송강을 풀어 주려 했다. 바로 그때 당우아(唐牛兒)가 씻은 술지게미가 든 쟁반을 들고 현청 앞으로 왔다. 아침 장사를 하려는 참이었다. 그런데 염씨 할멈이 송강의 옷자락을 틀어잡고 악을 쓰는 걸 보자 간밤에 할멈에게 당한 일이 떠올라 화가 불쑥 치밀었다. 얼른 쟁반을 탕약 장수 왕공의 의자 위에 놓아 두고 그쪽으로 달려갔다.
"이 빈대 같은 할망구야, 압사님을 틀어잡고 무슨 못된 짓이냐?"
당우아(唐牛兒)가 대뜸 할멈을 보고 소리쳤다. 할멈이 마주 악을 썼다.
"당가 이놈, 네놈이 이 사람 죽인 놈을 뺏어 갈 작정이냐? 아서라, 그러다간 네놈도 살아남지 못할 게다."
그 말에 당우아(唐牛兒)는 더욱 화가 났다. 간밤에도 사람을 얕봐 마구잡이로 해 대더니 또 그런다 싶자 더 참지 못했다. 다섯 손가락을 다 편 채 힘껏 노파의 뺨을 후려갈겼다. 성난 남정네가 힘을 다해 후린 손에 뺨을 맞으니 늙은 할멈이 무슨 수로 버티겠는가. 하늘 가득 별이 들어차는 것 같아 송강의 옷자락을 놓으며 폭삭 주저앉았다. 송강(宋江)은 그 틈을 타 구경꾼을 헤치고 어디론가 달아나 버렸다.
"송강 저놈이 내 딸을 죽였는데 네놈이 감히 빼돌려? 이놈, 너 죽고 나 죽자!"
다시 정신을 차린 할멈이 이번에는 당우아의 옷자락을 잡고 나동그라지며 악을 썼다. 그 소리를 듣자 당우아(唐牛兒)도 번쩍 정신이 났다. 장문원과 염파석의 일을 잘 알고 있는 그라 송강(宋江)이 그럴수도 있다 싶자 갑자기 자신이 없어졌다.
"내가 그걸 어찌 안단 말이냐?"
그렇게 맞고함을 질러도 당황한 빛이 뚜렷했다. 할멈이 이번에는 공인들을 돌아보며 표독스레 소리쳤다.
"이보시오, 어서 사람 죽인 놈을 잡아 주시오. 그러잖으면 당신들도 모두 한패란 소릴 들을 거요!"
이번에는 공인들도 가만있을 수 없었다. 송강이야 낯을 보아 함부로 나설 수 없었지만 당우아 따위라면 달랐다. 거기다가 할멈이 계속해 악을 써 대는 것도 공연히 그래 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서넛이 나서 하나는 노파를 끌고 가고 나머지는 당우(唐牛兒)아를 묶었다. 공인들이 당우아와 노파를 데리고 현청 안으로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지현(知縣)이 달려왔다. 손바닥만한 고을이라 벌서 지현의 귀에도 살인 났단 말이 들어간 것이었다.
"살인이 났다니 어찌 된 일이냐?"
공인들에게 끌려 나온 당우아와 염씨 할멈을 향해 지현(知縣)이 물었다. 염씨 할멈이 갑자기 슬픔에 복받친 듯 눈물 콧물 섞어 애절하게 주워섬겼다.
"이 늙은것에게는 성이 염가인 파석(婆惜)이란 딸년이 있었습니다. 딸년은 송 압사의 계집 노릇을 했사온데 어젯밤 둘은 제집에서 술을 마셨습지요. 그때 저 당우아(唐牛兒)란 놈이 찾아와 행패를 부리기에 욕해 내쫓은 적이 있습니다. 어지간히 소란스러워 이웃 사람들도 모두 알고 있을 겝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새벽같이 나간 송강 그놈이 불쑥 돌아와 제 딸년을 죽여 버렸지 뭡니까? 이 늙은것은 분을 참고 좋은 말로 그놈을 구슬려 이곳 현청까지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 놈의 옷자락을 잡은 채 공인들에게 고발을 하고 있는데 저 당우아(唐牛兒)란 놈이 다시 나타나 사람의 뺨을 치고 송강을 빼돌렸습니다. 지현(知縣) 나리, 부디 사람 죽인 놈을 잡아 원통하게 죽은 제 딸년의 한을 풀어 주십시오."
할멈의 말에 지현(知縣)은 잠시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무슨 생각에선지 대뜸 당우아를 보고 덮어씌우듯 말했다.
"네놈이 감히 살인 죄인을 빼내 갔느냐?"
겁먹은 당우아(唐牛兒)가 두 손을 홰홰 내저으며 발뺌을 했다.
"저는 무엇이 어떻게 된 건지 아무것도 모르옵니다. 다만 어제 저녁 술 마시는 송강을 찾아갔다가 저 할멈에게 쫓겨난 적은 있습지요. 그랬다가 오늘 아침 현청 앞에 술지게미를 팔러 나왔는데 저 할멈이 압사 나리의 옷자락을 잡고 악을 써 대는 걸 봤습죠. 할멈이 그러는 게 옳지 않아 보여 말리는 중에 압사 나리가 달아났으나, 그분이 저 할멈의 딸을 죽였는지 아닌지는 전혀 몰랐습니다."
"이놈, 거짓말 마라. 송강(宋江)은 군자로서 성실하기 그지없는 사람인데 어찌 사람을 죽였겠느냐? 이번 살인 사건은 틀림없이 네놈이 저질렀을 것이다. 이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지현(知縣)이 소리쳐 공인들을 불렀다. 당우아를 범인으로 지목해 문서를 꾸미게 하려 함이었다. 그 일을 맡아 처리할 압사가 바로 장문원이었다. 장문원은 염씨 할멈으로부터 송강이 제 딸 죽인 이야기를 들은 뒤에 다시 여러 사람 증언을 더해 소장을 쓰는 한편 사람을 할멈의 집으로 보내 염파석의 시체를 살피게 했다. 시체를 살피러 간 공인이 염씨 할멈의 집에 가서 보니 시체는 몸과 목이 따로 떨어져 있고 방 안에 흥건히 고였던 피는 이미 굳어 있었다. 방바닥에 칼이 하나 떨어져 있는데 여러 가지로 미루어 그 칼로 파석(婆惜)을 죽인 듯했다. 살피기를 마친 공인은 사람들을 불러 시체를 관에 담고 가까운 절로 옮기게 했다. 그러는 동안에 송강이 범인이란 게 점점 뚜렷해지고 있었으나, 그를 좋아하던 지현(知縣)은 어떻게든 구해 주고 싶었다. 당우아에게 죄를 덮어씌웠으면 하는 바람에 두 번 세 번 엄하게 문초를 했다.
"저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릅니다."
억울한 당우아가 그렇게 뻗댔으나 지현(知縣)은 들은 척도 안 했다.
"그렇다면 어제저녁에는 왜 그 집엘 갔더냐? 네놈이 관련된 게 틀림없다."
그렇게 당우아를 범인으로 몰아갔다. 당우아(唐牛兒)가 한층 억울해 목청을 높였다.
"저는 다만 술이나 한잔 얻어 마시려고....."
"닥쳐라! 저놈이 거짓말을 하는구나. 여봐라, 저놈이 바른말을 할 때까지 몹시 쳐라."
지현(知縣)은 이제 더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우격다짐으로 나왔다. 지현의 명에 따라 공인들의 매질이 시작되었다. 곤장 서른 대를 넘기기 바쁘게 매를 못 이긴 당우아(唐牛兒)가 지현이 바란 대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지현(知縣)도 당우아가 아무것도 모름을 잘 알았으나 오직 송강을 구해 주고 싶은 마음에서 일을 계속 한쪽으로만 몰아갔다. 당우아(唐牛兒)가 매에 못 이겨 한 소리들을 그대로 적어 소장을 만든 뒤 그 목에 큰 칼을 씌워 감옥에 내렸다. 모든 조사를 마친 장문원이 돌아온 것은 일이 대강 당우아를 범인으로 삼는 쪽으로 돌아간 뒤였다. 장문원이 그동안 알아 온 것을 지현에게 고해 올렸다.
"아무래도 당우아(唐牛兒)의 짓으로 보기엔 어려울 듯싶습니다. 살인 현장에 칼이 하나 떨어져 있었는데 송강의 것이었습니다. 그를 잡아다가 당우아와 대질시켜 봐야 모든 걸 알 수 있겠습니다."
지현(知縣)은 어떻게든 그런 장문원의 입을 막아 보려 했다. 그러나 정분이 나서 오가던 계집을 잃은 장문원이라 지현의 속셈을 알고도 굽히지 않았다. 두 번 말해서 안 들어주면 세 번 말하고 세 번 말해서 안 들어주면 네 번 말했다. 마침내 견디다 못한 지현(知縣)이 송강을 잡아들이란 분부를 했다. 그러나 송강(宋江)은 이미 어디로 달아났는지 알 길이 없고 잡으러 간 공인은 송강의 이웃만 뒤지다 빈손으로 돌아왔다.
"범인 송강(宋江)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때 장문원이 지현 곁에 있다가 다시 나섰다.
"송강(宋江)은 달아났다고 하나 그 아비 송 태공과 아우 송청이 아직 송가촌에 살고 있습니다. 그들을 잡아다 송강이 간 곳을 물어보면 될 것입니다."
그래도 지현(知縣)은 장문원의 말을 따라 주지 않았다. 어쨌든 당우아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송강의 일은 늑장을 부리다 나중에 적당히 죄에서 풀어 주려 했다. 안 되겠다 싶어진 장문원은 염씨 할멈을 앞세웠다. 할멈에게 고소장을 써 주고 스스로 지현 앞에 나가 송강을 잡아 달라고 조르게 했다. 딸을 잃은 할멈이 직접 이를 악물고 덤비자 지현(知縣)도 더는 일을 끌지 못했다. 별수 없이 공문을 내려 송 태공과 송청을 잡아들이게 했다. 공교롭게도 그 일을 맡게 된 게 주동(朱仝)과 뇌횡(雷橫) 두 사람이었다. 그들은 지현의 공문을 받자 병졸 수십 명을 데리고 송가촌으로 달려갔다. 주동(朱仝)과 뇌횡(雷橫)이 왔다는 소리를 들은 송 태공은 놀라 달려 나와 그들을 맞아들였다. 둘은 송 태공을 보자 죄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어르신네, 너무 서운하게 여기지는 마십시오. 위에서 보내니 아니 올 수 없었습니다. 그래, 아드님 되는 송 압사는 어디 있습니까?"
그러자 송 태공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다.
"두 분 도두께서 오셨소만, 그 불측한 자식놈과 나는 벌써 남이 된 지 오래외다."
"여기 전임 지현께서 손수 써 주신 문서가 있소."
"송강(宋江)은 이미 삼 년 전에 호적을 파내 가고 이 늙은이와 함께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뒤로는 집구석이라고 한번 고개조차 디민 적이 없소."
주동(朱仝)과 뇌횡(雷橫)이 듣기에는 이상하면서도 반가운 소리였다. 이상한 것은 효도와 우애로 이름난 송강이 부친에게 그토록 불측한 것이요, 반가운 일은 어쨌든 송 태공 부자가 송강의 일에 연루되지 않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일껏 거기까지 왔다가 송 태공의 말 한마디만 듣고 그냥 돌아설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부자간이 남남이 되었다는 그 문서를 좀 보여 주십시오. 또 집 안도 한번 뒤져 봐야겠습니다. 그래야 저희들도 돌아가 아뢰기가 좋을 듯합니다."
주동(朱仝)이 그렇게 말하며 군사들로 하여금 송 태공의 집을 에워싸게 한 뒤 뇌횡에게 소리쳤다.
"내가 앞문을 지킬 테니 뇌 도두, 자네가 들어가 한번 뒤져 보게."
뇌횡(雷橫)이 별로 마다하는 기색 없이 그 말을 따랐다. 성큼성큼 장원 안으로 들어가 앞뒤를 대충대충 살피고는 돌아 나와 말했다.
"정말로 안에는 없는 듯합니다."
그러는 뇌횡의 말끝에는 이만 하고 돌아가자는 눈치가 뚜렷했다. 평소 우러르는 송강의 가족을 더 괴롭히지 않으려는 뜻에서였다. 송강과 친하기로는 주동 또한 뇌횡 못지않았으나 그날따라 유난스레 깐깐함을 보였다.
"그래도 나는 마음이 놓이지 않는걸. 뇌 도두, 자네가 이 사람들하고 바깥을 지키게. 내가 한번 자세하게 안을 살펴보고 옴세."
주동(朱仝)이 그 말과 함께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무엇이 켕기는지 송 태공이 막고 나섰다.
"이 늙은이도 법도를 아는 사람이외다. 어찌 죄인을 감히 집안에 감추겠소."
그러나 주동(朱仝)은 물러설 기색이 아니었다.
"이번 사건은 사람의 목숨이 끊긴 큰일입니다. 저희도 어쩔 수 없이 이러는 것이니 너무 괴이쩍게 여기지 마십시오."
그러면서 걸음을 옮겨 놓았다. 송 태공도 할 수 없는 지 한숨과 함께 물러났다.
"그럼 찬찬히 살펴보시구려."
"뇌 도두, 자네는 어르신네 주변을 잘 살피고, 아무도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도록 하게."
주동(朱仝)은 한 번 더 뇌횡에게 그런 당부를 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뜰을 가로지른 주동(朱仝)은 바로 불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무얼 잘 알고 있는 사람처럼 불상 앞 제단을 한쪽으로 밀치자 바닥에는 넓은 송판이 깔려 있었다. 주동(朱仝)은 다시 그 송판을 들췄다. 그 아래 어두운 땅굴 어귀에는 무슨 줄이 하나 늘어져 있었다. 주동이 그 줄을 잡아당기자 방울 소리가 나며 멀리 달아나고 없다던 송강(宋江)이 땅굴 속에서 가만히 고개를 내밀었다. 송강(宋江)은 방울 소리를 낸 게 주동인 걸 보고 놀라 어쩔 줄 몰라 했다. 주동(朱仝)이 부드러운 소리로 송강을 안심시켰다.
"공명 형님, 제가 이렇게 찾아온 데 놀라지 마십시오. 전에 왜 형님께서 항상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우리 사이가 가까울수록 서로 속이는 게 있어서는 안 된다고. 그리고 형님댁 불당 안에는 숨기 좋은 땅굴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위에는 삼세불(三世佛)이 놓여 있고, 입구는 판자로 막았는데 제단을 얹어 놓아 다른 사람은 찾기 어려운 까닭에 급할 때는 숨을 만하다고 말입니다."
그래 놓고 송강이 한숨을 돌리는 눈치를 보며 다시 이었다.
"이번에 지현(知縣)이 저와 뇌횡(雷橫)을 보내 형님을 잡아오라니 어찌합니까. 상공께서도 형님의 본심이 착하고 밝음을 아시고 어떻게 덮어 보려 했습니다. 하지만 장문원과 염씨 할멈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덤비니 어쩔 수 없어 저희 둘을 이곳으로 보낸 겁니다. 나는 뇌횡(雷橫)이 눈치 없이 정말로 형님을 잡으려 들까 두려워 바깥만 뒤지게 하고 따돌렸습니다. 저는 그 틈을 타 형님과 이야기라도 좀 나누려 왔습니다. 그렇지만 공명 형님, 이곳이 비록 숨기에 좋다 하나 오래 있을 곳은 못 됩니다. 만약 다른 사람이 알고 현청에 일러바치기라도 한다면 그 일을 어찌하겠습니까?"
송강(宋江)은 그 말에 다시 낯빛이 흐려졌다.
"나도 생각은 해 봤소만 그렇게까지는............ 주(朱) 형이 이렇게 빈틈없이 돌봐 주시지 않았다면 여기 엎드려 있다가 꼼짝없이 묶일 뻔했소!"
"지나친 말씀입니다. 그런데 형님께서 이곳을 떠나신다면 갈만한 곳은 있으십니까?"
주동이 다시 그렇게 묻자 송강(宋江)이 한숨 섞어 대답했다.
"내가 몸을 숨길 만한 곳으로 생각해 본 것은 세 군데요."
"첫 번째는 창주 횡해군에 있는 소선풍 시진(柴進)의 장원이요, 두 번째는 청주 청풍채의 소이광 화영(花榮)이 있는 곳입니다. 세 번째는 백호산의 공 태공(太公)의 장원이오. 특히 공 태공은 모두성이라 불리는 공명(孔明)과 독화성 공량(孔亮)이란 아들이 있는데 여러 번 우리 현(縣)에 다녀간 적이 있소. 그러나 나로서는 그 세 군데 중에 어디로 가야 할지 마음이 영 정해지지 않는구려. 정말로 어디가 가장 나은지 알 수가 없소."
"어디든 형님께서 생각해서 결정하시되 오늘 밤 안으로 떠나시는 게 좋겠습니다. 공연히 꾸물거리다가 일을 그르쳐서는 아니됩니다."
듣고 난 주동(朱仝)이 그렇게 서둘기를 재촉했다. 송강(宋江)도 그렇게 마음을 굳힌 듯 뒷일을 당부했다.
"관청의 아래위 사람을 구슬리는 일은 모두 주 형에게 맡기겠소. 재물을 뿌릴 일이 있거든 거리끼지 말고 내 집에 와서 가져가시오."
"그건 걱정 마십시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형님은 형님 길 떠나실 일이나 걱정하십시오."
주동(朱仝)이 그 말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송강(宋江)은 그런 주동에게 감사하고 다시 땅굴 속으로 들어갔다. 주동(朱仝)은 땅굴 입구를 널빤지로 막은 뒤 처음처럼 제단을 끌어다 그 위에 얹었다. 그래 놓고 나니 감쪽같은 불당이었다. 주동은 그래도 이상한 게 없나 다시 한번 살핀 뒤 불당을 나왔다. 그리고 건성으로 집 안을 둘러본 뒤 밖으로 나가며 남이 다 들을 만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말로 안에는 아무도 없군."
뿐만이 아니었다. 태연한 얼굴로 뇌횡에게 다가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여보게 뇌(雷) 도두, 우리 아무래도 송 태공을 모시고 가야 하지 않을까."
말이 모신다는 거지 잡아가자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 말을 들은 뇌횡(雷橫)은 홀로 생각했다.
'주동 저 사람이 송강과 가장 가깝게 지냈는데, 오히려 제가 나서서 송 태공을 잡아가자고 해? 다시 그런 소릴 하면 그냥 두지 않겠다.'
그러나 주동(朱仝)은 그런 뇌횡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뇌횡과 군사들을 불러 안으로 들어갔다. 송 태공이 겁먹은 얼굴로 술을 내어 여럿을 대접하려 했다. 주동(朱仝)은 그 술상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무뚝뚝하게 말했다.
"술상은 그만두십시오. 어르신께서는 아무래도 넷째 아드님과 함께 현청에 나가 보셔야겠습니다."
그때 뇌횡(雷橫)이 곁에서 물었다.
"넷째 송청은 어디 갔습니까?"
"이 늙은 게 가까운 마을에 심부름을 보내 집 안에 없습니다."
송 태공이 그렇게 대답하며 그새 찾아 둔 문서를 내보였다.
"여기 송강 그놈이 삼 년 전 아비와 부모 자식의 인연을 끊고 집을 나설 때 쓴 문서가 있습니다. 한번 살펴보십시오."
"그래도 같이 가셔야겠습니다. 저희는 지현(知縣)의 명을 받들어 어르신네 부자분을 모시러 왔으니 하실 말씀이 있으면 현청에 가셔서 하십시오."
주동이 여전히 인정머리 없게 우겼다. 참다못한 뇌횡(雷橫)이 은근히 결기 어린 목소리로 주동에게 말했다.
"주(朱) 도두님, 내 말 좀 들으시우. 송 압사가 죄를 지었다고는 하지만 거기에는 반드시 까닭이 있을 거요. 더구나 아직 죽을죄를 지은 걸로 결정이 난 것도 아닌데 너무 그러지 마시오. 어르신네께서 증거 삼을 만한 문서까지 있다니 살펴보고 전날 송 압사와의 정분을 보아서라도 그냥 돌아갑시다. 그 문서나 가져다 지현께 보여 드리고 말씀이나 잘 드리면 되지 않겠소?"
평소의 공손함이 반나마 없어진 말투였다. 그러는 뇌횡의 속마음을 모를 리 없는 주동(朱仝)은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내가 인정머리 없이 말하는 것도 저 사람이 혹시나 나를 의심할까 해서였다. 이제 이만하면 되겠구나.'
그렇다면 더는 송 태공을 괴롭힐 필요가 없었다.
"아우가 그렇게 말하니 따르기로 함세. 나도 뭐 원래가 이리 각박한 사람은 아니잖는가?"
주동(朱仝)이 그렇게 말하자 먼저 송 태공이 고맙다는 말을 했다.
"두 분께서 이 늙은 걸 불쌍히 보아주시니 무어라 감사해야 될지 모르겠소."
그리고 두 사람과 마흔 명의 군사들을 모두 술상에 앉게 해 대접했다. 송 태공은 다시 은자까지 스무 냥을 내놓았으나 주동과 뇌횡은 받지 않았다. 송 태공과 송강이 부자 관계를 끊은 지 오래임을 증거하는 문서만 받아 술과 밥에 배부른 군사들을 데리고 현청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