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제주부의 태수는 황안을 따라갔다가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도망쳐 온 군사로부터 황안(黃安)이 양산박의 호걸들에게 사로잡혔단 말을 듣자 깜짝 놀랐다. 하지만 놀랄 일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양산박(梁山泊)의 두령들이 영웅의 풍모가 있어 쳐 없애기 어려운 데다, 가는 물길은 어지럽고 포구는 복잡하여 여간해서는 가기조차 어렵다는 말을 듣자 태수는 절로 탄식부터 나왔다.
"먼저 하도(何濤)가 갔다가 군사를 몽땅 잃고 저만 혼자 살아서 돌아오더니 이제 또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리냐? 하도(何濤)는 두 귀가 잘려 집에서 치료하고 있으나 아직 다 낫지 못했고 데려간 오백 명은 한 사람도 살아 오지 못하지 않았느냐? 이번에는 단련사 황안(黃安)과 포도관이 가서 모두 사로잡혔단 말이냐? 황안(黃安)은 도적의 소굴에 갇혀 있고 군사는 수없이 꺾인 데다 그 도적들을 이길 방도조차 없다니 도대체 이 일을 어찌하면 좋으냐."
그렇게 중얼거리며 어찌할 줄 몰라 했다. 그때 다시 뜻밖의 전갈이 들어왔다.
"동문 쪽으로 신관 태수님이 오시는 중이라기에 달려와 아룁니다."
신관(新官)이 왔다면 자신의 태수 노릇도 끝이라는 말이었다. 그게 잘된 일인지 못된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너무 갑작스러우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태수(太守)는 황망히 동문으로 달려가 신관을 맞아들일 채비를 했다. 오래잖아 먼지가 자욱이 이는 가운데 신관 태수의 행렬이 동문에 이르렀다. 신관(新官)이 말에서 내리자 태수는 그를 정자 위로 맞아들여 예(禮)를 나누었다. 예가 끝나자 신관이 받아 온 문서를 구관 태수에게 보여 주었다. 구관 태수가 보니 틀림없이 조정에서 내려보낸 문서였다. 구관 태수는 그 문서에 따라 신관에게 부(府)안의 모든 공사를 인계했다. 도장과 문서며 창고 안의 물품과 관청의 재물 일체를 넘겨주다 보니 하루해가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 모든 인계 절차가 끝나자 신관 태수는 크게 잔치를 열어 떠나는 구관을 위로했다. 구관(舊官)은 한편으로는 말썽 많은 임지를 떠나게 되어 시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 갑작스러운 사임에 서운했다. 술자리 끝에 심술까지 곁들여 양산박 이야기를 꺼냈다. 귀가 잘려 돌아온 하도(何濤)며 아직도 사로잡혀 있는 황안(黃安)과 그들을 따라갔다가 죽은 군사들 이야기를 들은 신관(新官)은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겉으로는 말이 없어도 속으로는 자신을 그런 곳의 태수로 보낸 사람에게 원망이 자심(滋甚)했다.
'채 태사가 이 골치 아픈 일을 맡으라고 나를 이곳 태수로 천거했구나. 용맹한 장수도 없고 강한 군사도 없는 이 고을에서 무슨 수로 그토록 무서운 도적 떼를 잡아낸단 말인가. 만약 그 도적 떼가 성을 에워싸고 곡식이라도 내놓으라고 덤빈다면 어쩐단 말인가.'
하지만 한번 명을 받고 온 길이라 이제는 어찌할 수도 없었다. 구관 태수가 동경으로 돌아가 버리자 암담한 심경으로 살아날 궁리에 들어갔다. 새로 온 태수(太守)는 조정에 글을 올려 제주부를 지킬 만한 장수 한 명을 보내 달라 청하는 한편 군사를 모으고 말을 사들였다. 날래고 굳센 농군들과 재주 있고 꾀 많은 선비를 널리 모아들이고 말먹이 풀과 군량을 장만해 어떻게든 양산박의 호걸들을 잡아 볼 셈이었다.
태수(太守)는 또 중서성에도 글을 올려 필요할 때는 이웃 군(郡)의 도움도 얻을 수 있게 손을 써 두었다. 그리고 아울러 제주부에 속한 현(縣)에도 공문을 내려 자기 땅은 자기가 지키라 명해 놓고 보니 조금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태수의 그 같은 공문은 송강(宋江)이 압사로 있는 운성현에도 내려갔다. 고을을 굳게 지켜 양산박의 도적 떼를 막도록 하라는 공문을 받은 지현(知縣)은 곧 송강을 불러 각 마을에 그 뜻을 전하는 공문을 돌리게 하는 한편, 전보다 한층 방비를 엄하게 했다. 지현으로부터 공문을 받아 본 송강(宋江)은 조개의 패거리가 무사히 양산박으로 들어간 걸 다행으로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몹시 걱정이 되었다. 지현 앞을 물러 나오기 바쁘게 홀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조개(晁蓋)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너무 큰일을 저질렀구나. 생신강을 빼앗더니 공인을 죽이고, 관찰사 하도(何濤)의 귀를 자르는가 하면 그를 따라간 관군을 몰살시키고....... 거기다가 이번에는 황안(黃安)까지 사로잡아 산채에 가뒀다니 이제까지의 죄만으로도 구족(九族)이 몰살될 만하다. 비록 어찌할 수 없이 한 노릇이라도 이러다가 천에 하나 실수라도 있게 되면 어쩐단 말인가.'
송강(宋江)은 그같이 걱정했지만 당장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첩서후사(貼書後司) 장문원(張文遠)과 함께 지현이 시킨 대로 공문을 만들어 마을마다 돌리게 했다. 그런데 그날 송강(宋江)이 일을 마치고 현청을 나설 때였다. 현청 문에서 한 서른 발짝도 떼기 전에 누군가 등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압사(押司) 나리."
송강(宋江)이 고개를 돌려 보니 중매쟁이 왕씨 할멈이 한 늙은 여인네를 데리고 서 있다가 잘됐다는 듯 그녀에게 속살거렸다.
"당신이 인연이 있어 마침 송 압사 나리가 나온 거예요."
송강(宋江)이 그런 할멈에게 무뚝뚝하게 물었다.
"내게 무슨 할 말이 있으시오?"
그러자 왕씨 할멈은 곁에 있던 노파를 가리키며 송강에게 말했다.
"압사(押司) 나리께서 아시는지 모르지만 이 늙은네는 동경에서 온 집안의 사람이랍니다. 식구가 모두 셋인데 남편 되는 이는 성이 염(閻)씨고, 딸은 파석(婆惜)이라 합지요. 염씨는 살았을 적에 노래를 잘 불렀고, 그 딸도 아비에게 배워 노래를 썩 잘 부릅니다. 거기다가 딸 파석(婆惜)은 이제 나이 열여덟에 얼굴까지 곱구요. 이 세 식구는 산동에 있는 어떤 벼슬아치를 찾아왔으나 그 사람이 풍류를 좋아하지 않아 이곳 운성현까지 흘러오게 되었지요. 그런데 모진 병에 걸려 앓던 염씨(閻氏)가 간밤에 죽어 돈도 없고 의지할 사람도 없는 이 모녀가 매우 딱하게 되었습니다. 할 수 없게 된 이 늙은네는 나를 찾아와 어떻게 좀 주선해 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 장례도 못 치른 송장과 알몸뚱이 모녀를 선뜻 도와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무작정 길가로 나와 사람을 찾는 중에 마침 압사(押司) 나리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나리, 이들 모녀를 가엾게 여기시어 장례 치를 관이라도 하나 내리시지요."
평소에 송강(宋江)이 인정 많고 남 돕기를 좋아하는 걸 알고 하는 소리였다. 송강(宋江)도 그 딱한 사정을 그냥 못 본 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를 따라왔던 거로군. 알았소. 저기 저 술집에 가서 종이와 붓을 빌려야겠구려. 내 글 한 통을 써 줄 터이니 현 동쪽 진삼랑(陳三郞)의 가게로 가서 관을 얻어 쓰도록 하시오."
그렇게 선뜻 인심을 썼다. 하지만 장례라는 게 관만 있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게 퍼뜩 생각나서 다시 물었다.
"그런데 그 밖의 일에 쓸 돈은 있소?"
그 물음을 이번에는 염씨 할멈이 직접 받았다.
"압사(押司) 나리께 숨김없이 말씀드리겠습니다. 관도 마련하지 못한 터에 달리 무슨 돈이 있겠습니까?"
"그럼 내가 은자 열 냥을 더 드릴 터이니 그걸로 쓰도록 하시오."
송강(宋江)이 한 번 더 인정을 썼다. 염씨(閻氏) 노파가 고마워 어쩔 줄 모르며 연신 머리를 수그렸다.
"낳아 주신 부모님인들 이 은혜보다 더하겠습니까? 노새나 말이 되어서라도 반드시 크신 이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원 별말씀을. 재물이란 필요한 이가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송강(宋江)은 그 말과 함께 은자 열 냥을 꺼내 주고 가던 길을 갔다. 염씨(閻氏) 할멈은 그길로 진삼랑의 관 가게로 가서 관을 얻고 받은 돈으로 장례를 치렀다. 그러고도 남은 서너 냥 은자로는 그들 모녀가 돌아갈 여비로 삼을 셈이었다. 그 며칠 뒤의 일이었다. 다시 한번 송강에게 감사하러 송강의 집을 찾았던 염씨(閻氏) 할멈은 집 안에 여자가 없는 걸 보고 돌아가 왕씨 할멈에게 물었다.
"압사(押司) 나리 댁에는 여자가 통 보이지 않더군요. 나리는 처자가 없습니까?"
왕씨 할멈이 아는 대로 일러 주었다.
"송 압사의 집이 송가촌에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아내 되는 사람은 아직 못 봤어요. 현(縣)에서는 객점에서 홀로 지내면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에게 약이나 먹을 걸 나눠 주는 걸로 보아 장가를 들지 않은 것도 같군요. 내 딸이 얼굴이 고울 뿐 아니라 노래도 잘 부르고 우스갯소리도 잘하지요. 동경에 있을 때는 기방(妓房)에 나간 적도 있는데, 그때 기방을 다니던 사람치고 그 아이를 사랑스럽게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답니다. 상청행수(上廳行首, 관기의 우두머리)가 여러 번 그 애를 데려가려 했지만 제가 내주지 않았지요. 그러나 일이 이 지경이 되고 보니 이제는 거기라도 보내지 않을 수 없을 것 같군요. 그런데 오늘 송 압사(押司) 댁에 가 보니 처자가 없는 것 같았습니다. 압사(押司) 나리에게 내 딸이 어떠냐고 한번 물어봐 주지 않겠습니까? 지난날에 입은 은혜를 그렇게라도 갚고, 나리의 인척이 되어 왕래할 수 있다면 오죽 다행이겠어요?"
왕씨 할멈은 원래가 중매쟁이라 그 말을 듣자 다음 날 날이 새기 바쁘게 송강을 찾아갔다. 염씨 할멈이 한 말을 자세히 전해 들은 송강(宋江)은 처음에는 응하려 들지 않았다. 그가 관과 돈을 준 것은 가엾은 사람을 도운 것일 뿐, 여자를 사려 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씨 할멈이 서너 차례 더 찾아와 권하자 마침내는 송강(宋江)도 마음이 움직였다. 서쪽 동네의 방 하나를 얻고 살림살이를 갖춰 염파석의 모녀가 있게 했다. 물론 염파석(閻婆惜)의 머리에는 구슬 장식이 얹히고 몸에는 비단옷이 감겼다. 그 어미도 얼굴빛과 차림이 나아졌다. 모녀 모두가 송강(宋江)이 준 재물로 먹고 입기에 넉넉해진 것이었다.
'시커먼 송강(黑宋江)'이란 별명이 있을 만큼 못생기고 작은 송강으로서는 뜻 아니 한 염복(艶福)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바람에 그는 재물을 아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처음으로 마음까지도 흠뻑 염파석에게 빠져 지냈다. 밤마다 염파석을 찾아 운우(雲雨)의 정을 나누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차츰 염파석을 찾는 송강(宋江)의 발길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송강(宋江)은 본시 호걸로서 창봉 쓰는 법 익히기를 여자 어루기보다 더 좋아했다. 거기다가 염파석(閻婆惜)은 또 나이 열여덟 한창때라 못생긴 송강을 별로 탐탁하지 않게 여겨 절로 정이 뜨게 된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송강은 첩서후사(貼書後司) 장문원과 함께 염파석을 찾아가 술을 마시게 되었다. 장문원은 송강과 함께 일하는 압사로서 소장삼(小張三)이라고 불리는 자였다. 눈코가 또렷하며 흰 이에 붉은 입술로 생김이 반반한 데다 일찍부터 색주가를 드나들며 난봉을 피워 제법 계집깨나 후릴 줄 알았다. 거기다가 피리나 거문고도 잘 알아 다루지 못하는 게 없을 정도였다. 따지고 보면 염파석(閻婆惜)도 기생 노릇을 한 적이 있는 계집이라 풍류라면 남한테 뒤지지 않았다. 장문원을 보자마자 한눈에 반해 추파를 던졌다. 그런 쪽으로 이력이 붙은 장문원이 어찌 그런 염파석의 추파를 알아보지 못하겠는가. 게다가 원래부터 여자라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는 위인이라 정을 듬뿍 담은 눈길로 추파를 받았다. 그렇게 되고 나니 나머지는 누가 돕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염파석(閻婆惜)이 자기에게 마음을 두고 있다는 걸 안 장문원은 다음 날 곧 일을 시작했다. 송강(宋江)이 없는 줄 뻔히 알면서도 송강을 찾아왔다는 핑계로 염파석의 집을 찾았다. 염파석(閻婆惜) 또한 그만한 눈치가 없는 계집이 아니었다. 장문원의 속을 뻔히 알면서도 남편의 친구를 접대한다는 구실로 차를 내어 붙들었다. 아무도 없는 방 안에 음탕한 남녀가 단둘이 앉게 됐으니 그다음은 뻔했다. 몇 마디 흰수작도 잠시, 둘은 이내 벌거벗고 뒹굴게 되었다. 그 뒤 장문원과 염파석은 서로 간에 죽고 못 사는 사이가 되었다. 특히 염파석(閻婆惜)은 그대로 욕정의 불덩이가 되어 송강 따위는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 어쩌다 송강(宋江)이 찾아와도 공연한 시비로 속을 뒤집어 내쫓아 버리는 것이었다. 송강으로 보면 뜻 아니 한 염복(艶福)에 마(魔)가 끼어도 단단히 낀 셈이었다. 송강(宋江)은 원래가 담박한 호걸이라 여자를 별로 즐겨 하는 편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계집 쪽에서 도리질을 쳐 대니 더욱 정이 떨어져 절로 발길이 뜸해졌다. 보름이나 열흘에 한 번도 염파석을 찾아가지 않을 정도였다. 송강(宋江)의 발길이 뜸해지자 염파석과 장문원은 더욱 거리낄 게 없었다. 아교와 옻처럼 함께 엉겨 밤낮으로 지내니 마을 사람들 모두가 그 일을 알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소문은 돌고 돌아 송강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러나 송강(宋江)은 얼른 믿으려 들지 않았다. 한참을 생각해 보다 속으로 중얼거렸다.
'설령 그 소문이 참말이라도 어쩔 수 없지. 어차피 부모가 짝지어 준 배필은 아니니까. 제가 싫다면 그만이지 화는 내서 뭘 하나? 이제는 그 계집을 그만 찾아다녀야겠다.'
그러고는 몇 달이나 발길을 끊어 버렸다. 속이 탄 것은 염파석의 어미였다. 송강(宋江)이 베푼 은혜도 은혜려니와 그게 아니라도 장문원은 도무지 모녀가 기댈만한 사람 같지가 않았다. 어떻게든 다시 염파석과 송강을 붙여 보려고 사람을 보내 송강을 불렀다. 그러나 송강(宋江)은 그때마다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 저물 무렵 해 일을 마친 송강(宋江)은 현청을 나와 가까운 찻집으로 갔다. 그런데 차를 마시다 보니 그 찻집 앞으로 웬 몸집 큰 사내가 하나 지나가는 게 보였다. 흰 헝겊 벙거지를 쓰고 검푸른 옷을 입은 사내로 등에 커다란 짐을 졌는데 먼 길을 달려왔는지 땀을 비 오듯 쏟으며 현청 쪽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 사내를 수상히 여긴 송강은 얼른 찻집을 나와 그 사내를 뒤쫓았다. 한 스무남은 발짝쯤 뒤쫓았을 때 문득 그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송강을 알아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때 송강(宋江)도 그 사내의 얼굴을 보게 되었는데 왠지 눈에 익은 느낌이었다.
'어디서 보았을까?'
송강(宋江)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기억을 쥐어짜 보았으나 얼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때 사내가 다시 송강을 되돌아보았다. 한 번 더 얼굴을 보니 좀 알겠는지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찬찬히 송강의 얼굴을 살폈지만 아직도 자신이 없는지 감히 물어 오지는 못했다.
'거참, 괴상한 일이다. 저 사람이 뭣 때문에 자꾸 나를 돌아볼까?'
송강(宋江) 또한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함부로 물어보지는 못했다. 한참을 머뭇거리며 송강을 쳐다보던 사내가 갑자기 걸음을 옮기더니 길가 가게 주인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여보시오, 저기 오는 압사(押司)가 누구요?"
"저분은 송 압사요."
가게 주인이 그렇게 알려 주었다. 그러자 사내가 갑자기 송강 앞으로 달려오더니 공손히 물었다.
"압사 어른, 절 모르시겠습니까?"
"글쎄, 당신 낯이 좀 익은 듯은 하오만......."
송강(宋江)이 얼떨떨해 그렇게 대답했다. 사내가 송강 곁에 붙어서 소리를 죽였다.
"그럼, 걸으면서 이야기하시지요."
그러고는 힐끗 사람을 살피는 게 무언가 남이 들어서는 안 될 게 있는 사람 같았다. 눈치를 알아차린 송강(宋江)은 말없이 그를 따라 걸었다. 큰길을 벗어나 조용한 골목길로 들어서자 사내가 문득 한곳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저기 저 술집이 이야기하기에 좋을 듯합니다. 그리로 가시지요."
궁금한 송강(宋江)은 이번에도 말없이 사내가 하자는 대로 따랐다. 술집으로 들어간 둘은 조용하고 외진 방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내는 차고 있던 칼을 풀고 지고 있던 봇짐을 벗어 탁자 아래에 놓더니 넙죽 송강 앞에 엎드려 절을 올렸다. 송강(宋江)이 놀라 급히 답례를 하며 물었다.
"당신은 누구시오? 성함은 어떻게 되오?"
그러자 사내가 공손히 되물었다.
"은인께서는 어찌하여 벌써 이 아우를 잊으셨습니까?"
"그럼 당신은 누구요? 정말로 낯은 익소만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구려."
송강(宋江)이 더욱 어리둥절해 그렇게 받았다. 그러자 사내가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혔다.
"저는 조 보정 댁에서 은인을 뵈온 적이 있습니다. 그때 은인께서 미리 오셔서 일러 주어 목숨을 구한 적발귀 유당(劉唐)입니다."
그제야 송강(宋江)도 그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반가움보다는 놀라움이 앞섰다.
"아니 이 사람, 정말로 간도 크군. 이렇게 공공연히 나돌아다니다니! 대체 무슨 일을 내려고 이러나?"
그렇게 나무라는 투로 말했다. 하지만 유당(劉唐)은 조금도 겁내거나 움츠러든 빛이 없었다.
"큰 은혜를 입었기로 죽음을 무릅쓰고 이렇게 달려와 작으나마 고마움의 뜻을 전하려 합니다."
"조 보정(晁 保正)께서는 안녕하신가? 함께 간 형제들도 아무 일 없고? 그래 자네는 누가 보냈나?"
유당이라는 걸 알자 갑자기 밀려든 궁금중에 송강(宋江)이 묻기 시작했다.
"조개(晁蓋) 형님은 은인께서 구해 주신 덕분에 양산박으로 들어가 첫째 두령이 되셨습니다. 오학구(吳學究)는 군사가 되고 공손승(公孫勝)은 병권을 맡았지요. 임충(林冲)이 들고 일어나 왕륜을 죽이자 원래 있던 두천과 송만 주귀는 우리 형제 일곱과 함께 양산박의 열한 두령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지금 산채에 있는 사람은 합쳐 칠백이 넘고 양식과 재물도 헬 수 없이 넉넉합니다. 그러나 형님의 은혜를 갚을 길이 없어 밤낮으로 걱정하다가 이번에 특히 저를 뽑아 보내신 것입니다. 우선 이 금 백 냥을 거두어 주십시오. 나중에 주귀(朱貴)가 다시 형님께 예물을 더 올릴 것입니다."
유당(劉唐)은 그런 대답과 함께 지고 온 봇짐을 풀었다. 안에서는 먼저 송강에게 보내는 편지가 나왔다. 송강(宋江)은 그걸 읽어 본 뒤 소매에서 주머니를 꺼내 그 안에 넣었다. 이에 유당(劉唐)은 다시 봇짐 속에서 금덩이를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송강(宋江)은 그 금덩이를 다시 봇짐 속에 말아 넣은 뒤 편지가 든 자신의 주머니 안 소매 속에 감추며 말했다.
"여보게, 그 금은 원래대로 싸게."
그리고 그렇게 못하겠다는 유당을 기어이 억눌러 봇짐을 되싸게 한 뒤에야 술집 주인을 불렀다.
"여기 좋은 술과 큼직하게 썬 고기를 내오시오. 채소와 과일도 내오고...."
술집 주인은 곧 송강이 시킨 대로 내왔다. 송강(宋江)과 유당(劉唐)은 곧 술잔을 나누기 시작했다. 권커니 잣거니 하다 보니 어느새 날이 저물어 왔다. 그곳에서 너무 취하는 것도 좋지 않은 일이다 싶어 둘은 술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유당(劉唐)이 다시 봇짐 속의 금덩이를 꺼내 송강에게 주려 했다. 송강(宋江)이 펄쩍 뛰며 손을 내저었다.
"여보게 아우, 내 말을 들어 보게. 자네들 일곱 형제가 산채에 든 지 얼마 안 되니 금은이 필요한 건 내가 아니라 그쪽이네. 나는 약간의 재산이 있어 살 만하고 주동(朱仝)에게도 금은을 보낼 필요는 없을 듯싶네. 그에게는 내가 자네들의 정을 전할 테니까 아우는 이만 돌아가게. 내 집으로 자네를 데려가는 게 대접이지만 혹시라도 자네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봐 그리 못해 정말 안됐네. 오늘 밤은 달이 밝을 터이니 아우는 빨리 산채로 돌아가는 게 좋아. 두령들에게는 내가 직접 찾아가 축하드리지 못함을 용서해 달라 이르게."
"아니 됩니다. 형님의 큰 은혜를 입고도 보답을 못해 괴로워하던 차라 보정(保正) 형님의 명이 여간 엄하지 않습니다. 오학구 군사(軍師)의 명령도 전날과 같지 않게 엄한데 제가 어찌 그냥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이대로 산채로 돌아가면 반드시 제가 크게 꾸지람을 받게 될 겁니다."
유당(劉唐)이 그렇게 사정조로 말했다. 송강(宋江)은 그 말을 듣고도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그렇게 엄한 분부를 받았다면 이렇게 하세. 내가 글 한 통을 써줄 테니 가지고 가서 보여 드리게나."
그러면서 기어이 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송강(宋江)이 그렇게 나오자 유당(劉唐)도 더는 어쩔 수가 없었다. 금을 다시 꾸려 봇짐에 싸고 송강이 글 써 주기를 기다렸다. 송강(宋江)은 술집 주인에게 종이와 붓을 빌려 양산박의 두령들에게 보내는 글을 썼다. 정은 고마우나 금은 받을 수 없다는 뜻을 담은 간곡한 편지였다. 그러는 사이 날이 저물었다. 송강의 편지를 받아 몸에 감추고 봇짐을 꾸려진 유당(劉唐)이 말했다.
"형님께서 글을 주셨으니 아우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리하게. 붙들지 못하는 내 마음을 알아주게."
송강(宋江)도 굳이 잡지 못하고 그렇게 작별을 받았다. 유당(劉唐)은 송강에게 네 번 절한 뒤 칼을 찾아 들고 주막을 나섰다. 송강(宋江)은 그런 유당을 골목 밖까지 배웅했다. 때는 팔월 중순이라 곧 둥근 달이 뚜렷이 떠올랐다. 송강(宋江)이 마지막으로 유당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부디 몸조심하고 다시는 이런 위험한 길을 오지 말게. 여기는 자네들을 잡으려고 풀어놓은 공인들이 많아서 더는 배웅도 못 하겠네. 여기서 이만 헤어지세."
이에 송강과 헤어진 유당(劉唐)은 달이 밝은 걸 다행으로 여기며 밤길을 되짚어 양산박으로 돌아갔다. 송강(宋江)은 아무런 일이 없었던 사람처럼 천천히 자기 집을 향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은근히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부디 우리를 본 공인이 없어야 할 텐데. 만약 그들 눈에 띄었다면 정말 큰일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조개(晁蓋)가 마침내는 산도둑으로 떨어지고 말았구나. 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이냐!'
그런데 미처 두 골목을 건너기도 전이었다. 누가 등 뒤에서 송강을 불렀다.
"압사(押司) 양반, 어디 갔다 오십니까? 요샌 통 얼굴을 볼 수가 없군요."
송강(宋江)이 놀라 돌아보니 바로 염파석의 어미였다. 염씨 할멈은 송강이 알은체를 하자 이번에는 은근히 원망까지 섞어 말을 이었다.
"여러 번 사람을 보내 뫼시기를 청했으나 지체 높으신 이라 뵙기가 어렵더군요. 천한 것이 할 말이 있어도 압사(押司)의 심기를 건드릴까 달리 어찌 못하다가 오늘 밤 다행히 뵙게 되었습니다. 함께 딸년을 보러 가지 않겠습니까?"
"오늘은 현청에 할 일이 바빠 그럴 수가 없소. 다음날 한번 찾으리다."
이미 정이 뜬 송강(宋江)이 무뚝뚝하게 받았다. 염씨 할멈이 물러나지 않고 다가와 한 번 더 간곡히 청했다.
"아니 되십니다. 딸년이 그토록 기다리는데 어찌 그리 매정하십니까? 한번 들렀다 가시지요."
그래도 송강(宋江)은 여전히 손을 내저을 뿐이었다.
"바빠서 그렇다니까요. 내일 다시 오지요."
"그러지 마시고 오늘 함께 가시지요."
염씨 할멈이 그 말과 함께 송강의 소매를 잡았다. 오늘은 꼭 송강을 데려가겠다고 결심하고 나선 사람 같았다.
"어떤 놈이 무슨 소리를 했는지 모릅니다만 정말로 너무하십니다그려. 반년이 되도록 딸년을 돌아보지도 않으시다니요. 다른 사람이 이러쿵저러쿵하는 소리 다 들어선 아니 되십니다. 압사(押司)께서 스스로 보고 들으신 대로 아셔얍지요. 요새 딸년은 압사께서 들으신 그 고약한 소문 때문에 걱정과 부끄러움으로 이 늙은이만 들볶아 댄답니다. 제발 저와 함께 가서 그 아이를 만나 주시우."
"이거 참, 오늘은 할 일이 남아 몸을 뺄 수가 없어요."
"공사, 공사 하시지만 날도 저물었는데 그거 안 했다고 지현께서 나리를 벌주시겠우?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에는 또 이런 기회가 없을 것이니 같이 갑시다. 제집에 가면 꼭 드릴 말씀이 있어 그러우."
송강(宋江)은 원래가 남 우는 소리에 약했다. 염씨 할멈이 그렇게까지 매달리자 더 뿌리치지 못했다.
"알았소. 이 손 놓으시오. 내 가리다."
그러면서 할멈과 함께 파석(婆惜)의 집으로 갔다. 하지만 집 앞에 이르자 송강(宋江)은 아무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는지 우뚝 발걸음을 멈추어 섰다. 다시 속이 탄 염씨 할멈이 손을 휘저어 가며 말했다.
"아니, 여기까지 오셔 놓고 들어가지 않을 작정이시우?"
그 바람에 송강(宋江)은 다시 집 안으로 끌려 들어갔으나 위층으로 올라가지는 않고 아래층에 놓인 탁자에 걸터앉았다. 염씨 할멈은 혹시 자신이 자리를 뜨면 송강(宋江)이 그대로 가 버릴까 봐 송강 곁에 앉은 채 위층을 향해 소리쳤다.
"얘야, 네가 마음속에 그리는 낭군께서 오셨다. 어서 내려오너라."
그때 염파석(閻婆惜)은 방 안에 홀로 불을 밝히고 앉아 장문원을 그리워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아래층에서 어머니가 '네 그리워하는 낭군'이 왔다는 소릴 지르자 그게 바로 장문원인 줄 알았다. 얼른 일어나 구름같이 헝크러진 머리를 쓸며 아래층을 향해 응석 섞어 소리쳤다.
"죽일 양반 같으니라구. 사람을 기다리다 말라 죽게 하려는 거예요? 어머니, 우선 그 사람 양 귀부터 떼어내 버리세요."
그러고는 나는 듯이 달려 내려가다가 작은 창문으로 먼저 아래층을 훔쳐보았다. 밝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것은 엉뚱하게도 송강이었다. 속이 상한 염파석(閻婆惜)은 그대로 몸을 돌려 위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한쪽에 미쳐 있으니 다른 한쪽은 더욱 꼴 보기 싫은 건 정한 이치였다. 염씨 할멈은 딸이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리다가 이내 위층으로 되돌아가는 발소리가 나자 마음이 급해졌다. 다시 목소리를 높여 딸을 불렀다.
"얘야, 네 낭군이 오셨는데 어서 내려오질 않고 어딜 가느냐?"
염파석(閻婆惜)이 침대에 걸터앉은 채 차갑게 맞받았다.
"그 사람 꼴도 보기 싫어요. 만나고 싶으면 자기가 이리 올라 오라세요. 거기 떠억 버티고 앉아 내가 맞으러 달려가길 기다리지 말고."
그러자 염씨 할멈은 송강(宋江)이 듣고 마음 상할까 걱정되어 얼른 딸을 대신해 변명하고 나섰다.
"제 못난 것이 압사(押司)를 기다리다가 단단히 토라진 모양입니다. 성난 김에 못할 소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부디 압사께서 좋게 들어 주시오."
그리고 송강의 옷깃을 끌었다. 송강(宋江)은 할멈의 말을 반도 믿지 않았으나 끄는 손길을 차마 뿌리치지 못했다. 마지못해 위층으로 끌려 올라갔다. 송강(宋江)이 위층으로 올라오자 염씨 할멈은 송강을 곁방 의자에 앉혀 놓고 먼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염파석(閻婆惜)은 한껏 속이 틀어져 제 침상에 앉아 있었다.
"얘야, 압사께서 여기 오셨다. 그런데 아무리 성났기로 그 무슨 말투냐? 나는 오히려 그분이 안으로 들지 않을까 겁이 났다. 오늘 이곳까지 모셔 오는 데도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니? 어서 일어나 맞아들이지 못해?"
염파석(閻婆惜)이 그런 어미의 말에 매몰차게 쏘아붙였다.
"그런 사람을 뭣 땜에 끌고 왔어요? 오기 싫음 오지 말래지. 제가 안 오는데 내가 어쩌란 말이에요?"
그 말을 들은 송강(宋江)은 아무 소리 않고 일어나 나가려 했다. 그 기척을 느낀 염씨 할멈은 억지로 딸을 끌고 나와 송강과 마주 앉혔다.
"낭군과 마주 앉아 보기나 해라. 할 말이 없으면 안 하면 됐지 성낼 건 뭐냐?"
그러나 억지로 마주 앉혀도 소용이 없었다. 송강(宋江)은 아무 소리 않고 머리만 수그리고 있고 염파석(閻婆惜)도 표정 없이 싸늘하게 굳어 있을 뿐이었다. 보다 못한 할멈이 수선을 떨고 일어났다.
"마침 내게 좋은 술 한 병이 있으니 안주 곁들여 내오마. 그걸 마시며 압사 나리와 이야기나 나누어라. 잠시만 모시고 있으면 내 얼른 술상을 봐 오마."
염씨 할멈이 나가는 걸 보며 송강(宋江)은 속으로 괴롭게 중얼거렸다.
'저 할멈에게 붙들렸으니 꼼짝없구나. 어디 사람을 가게 해 주어야지. 그렇지만 아래층으로 내려가면 그때 슬며시 뒤따라 나가 내빼야겠다.'
하지만 평생 눈치만 보고 살았는지 염씨 할멈은 송강이 달아날 기색인 걸 얼른 알아차렸다. 방은 나가면서 바깥에서 단단하게 문고리를 걸어 버렸다.
'귀신같은 할멈이구나. 속을 들여다보듯 하니 할 수 없지....'
송강(宋江)은 그런 생각으로 쓰게 입맛을 다시며 앉아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간 할멈은 먼저 안줏감을 냄비에 넣고 불을 지핀 뒤 은자 몇 냥을 꺼내 들고 부리나케 골목으로 달려 나갔다. 싱싱한 과일과 생선에다 닭고기를 사고, 돌아오는 길에는 술까지 한 병 구했다. 서둘러 술상을 차린 염씨 할멈이 다시 방 안으로 들어오니 딸년과 송강(宋江)은 나갈 때 모양 그대로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할멈이 다시 너스레를 떨었다.
"얘야, 어서 일어나 한잔 치려무나."
그러나 염파석(閻婆惜)은 차갑기만 했다.
"두 분이나 실컷 마시세요. 나는 술이고 뭐고 딱 귀찮으니까."
그렇게 쏘아붙였다. 염씨 할멈은 그래도 좋은 소리로 딸을 달랬다.
"얘야, 네 성미는 어릴 적부터 잘 안다마는 그러는 게 아니다. 어서 한잔 따르려무나."
"싫어요. 따르지 않으면 어쩌겠어요? 끝내 따르지 않으면 칼로 목이라도 칠 건가요?"
염파석(閻婆惜)이 더욱 독을 뿜으며 그렇게 받았다. 그러나 염씨 할멈은 민망한 웃음으로 무어라 우물우물 딸을 나무라더니 손수 잔을 들어 송강에게 권했다. 송강(宋江)이 마지못해 그 술잔을 받자 할멈이 다시 히죽 웃으며 말했다.
"압사 나리, 저 아이를 너무 나무라지 마시우. 내일이면 괜찮아질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리께서 여기 오시는 걸 못마땅히 여겨 이러니저러니 어지러운 소리를 해 대지만 그걸 다 말이라고 들어서는 안 되우. 자, 술이나 들어요."
그리고 석 잔이나 거듭 따르다가 다시 생각난 듯 딸에게 말했다.
"얘야, 어린애처럼 그러지 말고 너도 한잔해 보려무나."
"사람을 본 척도 않는데, 싫어요. 나 배불러요."
염파석(閻婆惜)이 여전히 쌀쌀하게 받았다. 할멈이 끈덕지게 딸을 달랬다.
"그러는 게 아니다. 얘야, 그리던 낭군이 내리는 술이니 한잔 받아라."
염파석(閻婆惜)은 속으로 가만히 생각했다.
'내 마음에는 오직 장문원뿐이니 정말로 귀찮고 싫구나. 그러나 술을 잔뜩 먹여 취하게 해 놓지 않으면 이따가 잠자리에서 나를 지분거릴 테니 받아 주는 척하자.'
그리고 어미가 주는 잔을 받아 반쯤 비웠다. 염씨 할멈이 신이 나서 떠들었다.
"저 아이가 토라진 것도 있지만 원래가 두어 잔이면 곯아떨어질 만큼 술에 약하다오. 자, 나리나 많이 들고 취하시우."
그러면서 자꾸 권하는 바람에 송강(宋江)은 다시 네댓 잔을 더 받아 마셨다. 할멈은 술이 다 되자 아래층으로 내려가 술을 더 데워왔다. 할멈이 다시 돌아와 보니 어찌 된 셈인지 딸은 마음을 돌려 술잔을 들고 있었다. 할멈은 됐다 싶어 아래위층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술이 다 됐으면 술을 가져오고 안주가 모자라면 안주를 내왔다. 그리고 자신도 공연히 기분이 좋아 틈틈이 큰 잔으로 따라 마셨다. 그러다 보니 먼저 취한 것은 염씨 할멈이었다. 나중에는 취해 위층을 오르는 데 거의 기다시피 했다. 하지만 함께 술을 마신다 해서 송강(宋江)과 염파석(閻婆惜)의 사이가 풀어진 것은 아니었다. 송강(宋江)은 여전히 머리를 숙인 채 말이 없었고, 염파석(閻婆惜)은 딴전을 보며 치맛자락만 비틀고 있었다. 보다 못한 할멈이 끼어들었다.
"아니, 두 사람이 모두 흙으로 빚어 놓은 사람들인가? 마주 앉았으면서도 말 한마디 없으니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이봐요. 압사 나리, 사내가 어찌 그러우? 술잔만 들고 앉았지 말구 뭐라 이야기 좀 하시우."
이에 송강(宋江)은 할 수 없이 무어라 입을 열어 보려 했으나 도무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염파석(閻婆惜)은 그게 더 아니꼬웠다.
'너는 나를 거들떠도 안 보는데 나보구 웃으며 맞으라구? 어림도 없다. 내가 그러는가 봐라.'
속으로 그렇게 말하면서 입을 앙다물었다. 그러자 취한 할멈이 나서 둘을 붙여 준답시고 횡설수설 떠들기 시작했다. 이 사람 흉, 저 사람 추키기에 자질구레한 세상일까지 끌어내 혼자서만 떠들어 대는 것이었다.
그때 운성현에는 술지게미 장사를 하는 당이가(唐二哥)란 자가 있었다. 당우아(唐牛兒)란 별명으로 더 많이 알려진 그는 벌이가 시원찮으면 거리에 나와 남의 도움으로 살아가는데, 그 때문에 자주 송강의 덕을 입었다. 현(縣) 내에 무슨 일이 있으면 송강에게 달려가 알려 주고 돈푼이나 얻어 쓰는 식이지만 워낙 송강이 잘 대해 주어 그가 시키는 일이라면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당우아(唐牛兒)가 그날 밤 노름을 하다가 가진 돈을 몽땅 잃고 말았다. 빈털터리가 된 당우아는 늘 그렇듯 송강을 찾아 현청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현청에는 말할 것도 없고 거처 방까지 가 보아도 송강을 찾을 길이 없었다. 당우아(唐牛兒)가 동네방네 돌아다니는 걸 보고 누군가가 물었다.
"여보게, 당우아. 도대체 누구를 찾아 그리 바쁘게 뛰어다니나? 급하신 일이 있어 어떤 어르신을 찾고 있습니다."
"그 어르신이 누구인가?"
"송 압사 나립죠. 어디 가셨는지 통 알 수 없습니다요."
당우아(唐牛兒)가 그렇게 대답하자 그 사람이 알려 주었다.
"송 압사라면 염씨 할멈과 함께 가는 걸 봤네."
그 말을 들은 당우아(唐牛兒)가 중얼거렸다.
"그랬군. 염파석 그 도둑 같은 년이 장문원이 놈과 죽네 사네 붙어먹으면서 우리 나리만 속였겠다. 그러다가 소문을 들은 나리가 가지 않으니 이번에는 늙은것이 나서서 나리를 데려갔구나. 제 딸년과 나리를 다시 붙여 나리의 등골을 빼먹으려는 수작이겠지. 얼른 그리로 가서 돈도 좀 빌리고 술도 한잔 얻어 걸쳐야겠다."
그러고는 그길로 염파석의 집으로 향했다. 당우아(唐牛兒)가 향한 염파석의 집은 불이 환히 켜진 채 문이 열려 있었다. 안으로 들어간 당우아(唐牛兒)는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붙어서서 잠시 귀를 기울여 보았다. 송강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염씨 할멈의 혀 꼬부라진 말과 웃음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당우아(唐牛兒)는 살금살금 위층으로 올라가 문틈으로 방 안을 살펴보았다. 송강(宋江)과 염파석(閻婆惜)은 굳은 얼굴로 술잔을 들고 앉았고 취한 할멈만 콩팔칠팔 떠들고 있었다. 송강(宋江)이 별로 마음 내켜 앉은 자리가 아니란 게 한눈에 보이는 광경이었다. 당우아(唐牛兒)가 잘됐다 싶어 벌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당우아가 들어서는 걸 보고 송강(宋江)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됐다. 저 녀석이 왔으니 이 자리를 빠져나갈 수 있겠구나.'
눈치 빠른 당우아(唐牛兒)는 송강의 표정만 보고도 속마음을 대강 읽었다. 자신의 헤아림이 틀리지 않은 걸 기뻐하며 송강에게 말했다.
"남은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찾았는데 나리께서는 여기서 편히 술잔이나 기울이고 계셨군요."
"왜, 현청에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겼느냐?"
송강(宋江)이 넌지시 눈짓까지 하며 당우아에게 물었다.
"압사 나리, 벌써 그 일을 잊으셨습니까? 지현(知縣)께서는 나리가 아직껏 그 일을 마치지 않았다고 현청에서 찾고 계십니다. 벌써 공인을 네댓이나 풀어 나리를 찾아오라고 성화하셨습니다만 어디 계신지 알 수가 있어야지요. 지금 지현(知縣)께서 몹시 화를 내고 계시니 어서 가 보도록 하십시오."
당우아(唐牛兒)가 그렇게 능청을 떨었다. 송강(宋江)이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털고 일어섰다.
"일이 그렇게 급하다면 가 봐야겠구나."
그때 염씨 할멈이 송강을 막아서며 말했다.
"압사(押司) 나리,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그리고 당우아 네놈도 어지간하다. 도사 앞에서 요령을 흔들어도 분수가 있지. 이 늙은것을 속이려고 해? 지현(知縣)은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가 마님과 술을 즐기고 계신데, 뭐 일이 있어 현청에서 화를 내며 기다리고 있다구? 귀신을 속여도 이 늙은것은 못 속인다!"
"정말로 지현(知縣)께서는 급한 일이 있어 압사 나리를 기다리고 있단 말이오. 내가 뭣 땜에 헛소리를 하겠소?"
당우아(唐牛兒)가 얼른 그렇게 받아넘겼다. 할멈이 더욱 시퍼렇게 대들었다.
"개방귀 같은 수작 마라. 내가 늙어도 두 눈은 유리같이 맑단 말이다. 아까 나리가 네놈에게 눈짓하는 걸 다 보았는데 그런 헛소리를 해? 네놈이 압사(押司) 나리를 우리 집에 모셔 오지는 못할망정 와 계신 분을 그런 수작으로 빼돌리려 들어? 옛말에, 살인은 용서할 수 있어도 정분을 끊는 일은 용서하기 어렵다는 게 있다. 이놈, 어디 견뎌 봐라!"
그러고는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당우아에게 덤벼들었다. 늙은 아낙네가 힘을 다해 차고 때리니 당우아(唐牛兒)는 속수무책이었다. 멍청해서 맞고 차이다가 아래층으로 끌려 내려갔다.
"이 할멈이 사람을 쳐!"
아래층에 끌려 내려가서야 당우아(唐牛兒)가 겨우 그렇게 버텨 보았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할멈이 더욱 목청을 높였다.
"남의 밥그릇을 차는 놈은 부모 처자 죽이는 놈과 다를 바 없다는 소리를 너는 못 들었느냐? 목청 높여 어쩔래? 도적놈 맞듯 정말로 한번 맞아 볼 테냐?"
"그럼 어디 한번 때려 보슈."
당우아(唐牛兒)도 성난 김에 지지 않고 맞고함을 질렀다. 술에 취한 노파는 한번 망설이는 법도 없이 다섯 손가락을 펴 당우아의 뺨을 후린 뒤에 문밖으로 밀쳐 버렸다. 당우아(唐牛兒)는 얼결에 밀려 문밖으로 나왔다. 염씨 할멈은 그런 당우아가 다시 뛰어들 틈을 주지 않고 문을 쾅 닫더니 빗장을 질러 버렸다. 화가 난 당우아(唐牛兒)가 문밖에서 소리소리 욕을 퍼부었다.
"이 빈대 같은 할망구야. 내가 송 압사 나리의 낯을 보아주지 않는다면 네 집구석은 가루가 났을 거다! 불알 두 쪽 찬 놈이 한쪽뿐인 계집년들보다 훨씬 세다는 걸 가르쳐 줬을 거란 말이다. 어디 두고 보자. 내가 네년을 죽이지 못한다면 내 성이 당(唐)가가 아니다!"
그리고 가슴까지 쳐 가며 욕을 퍼부었으나 안에서 대꾸가 없자 제풀에 맥이 빠져 가 버렸다. 그런 당우아의 욕설쯤은 한쪽 귀로 들어 다른 쪽 귀로 흘려 버리면서 위층으로 돌아간 할멈이 송강과 제 딸을 보고 너스레를 떨었다.
"압사(押司) 나리, 늙은 것을 너무 꾸짖지 마시오. 다 나리를 무겁게 생각해서 그런 거라오. 그리고 얘야, 너도 어서 잔을 비워라. 두 사람이 못 본 지 오래라 어서 잠자리에 들고 싶을 테니 이만 술상을 치워야지."
그리고 다시 송강에게 술 두 잔을 더 권하더니 술상을 치우기 시작했다. 할멈이 아래층으로 내려간 뒤 송강(宋江)은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저 계집과 장문원의 일은 남의 말을 다 믿을 수가 없지. 내 눈으로 보지 못했으니.... 거기다가 이젠 밤도 깊었으니 하는 수 없이 여기서 자고 가야겠구나. 함께 자면서 저 계집이 내게 어떻게 대하는가 보자.'
그렇게 마음먹고 있는데 할멈이 다시 올라와 둘에게 권했다.
"밤도 깊었으니 이제 자도록 하지."
"우리 일에 간섭하지 말고 가서 주무시기나 하세요!"
염파석(閻婆惜)이 날선 목소리로 어미의 말을 그렇게 받았다. 그러나 할멈은 송강(宋江)과 염파석(閻婆惜)을 한방에 몰아넣은 것만으로도 됐다 싶었던지 비죽비죽 웃음까지 흘리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압사 나리, 편히 쉬시우. 오늘 밤 재미 많이 보구 내일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도록 하시우."
할멈이 나가자 방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송강(宋江)은 자리에 앉은 채 염파석이 하는 양을 가만히 살폈다. 염파석(閻婆惜)은 이미 밤이 깊었건만 옷도 안 벗고 침상으로 가더니 벽을 보고 누워 버렸다.
'저 천한 계집년이 나를 본 척도 않고 저만 자는구나. 오늘 쓸데없이 그 할멈의 말에 홀려 쓴 술만 마시고 이 무슨 꼴이냐. 하지만 할 수 없지. 밤이 깊었으니 여기서 그냥 자고 가는 수밖에.'
염파석이 하는 양을 보고 그렇게 마음을 정한 송강(宋江)도 곧 잠잘 채비를 했다. 겉옷을 대강 벗어 옷걸이에 건 송강(宋江)은 다시 허리에 두른 띠를 풀었다. 그 띠에는 몸에 지니는 짧은 칼과 문서를 넣는 주머니가 달려 있었다. 송강(宋江)은 그 띠를 침상 난간에 걸고 버선을 벗은 뒤 침상 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염파석 곁에 가기 싫어 그녀의 다리께에 쪼그리고 누웠다. 한 반경쯤 지났을 때 염파석(閻婆惜)이 차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송강의 빙충맞음을 비웃는 건지 더욱 정을 떼기 위한 수단인지는 알 수 없지만 결코 좋은 뜻은 아닌 듯했다. 한때는 살을 섞고 지내던 계집에게서 그 같은 푸대접을 당하니 아무리 송강이라 해도 잠이 올 리 없었다. 즐거운 밤은 짧고 외롭고 슬픈 밤은 긴 법이라 삼경, 사경을 뜬눈으로 지새우자니 마셨던 술이 오히려 깼다. 오경이 되자 마침내 못 견딘 송강(宋江)이 몸을 일으켰다. 찬물에 세수를 한 뒤 옷을 걸치고 방을 나서자니 절로 욕이 나왔다.
"천해 빠진 계집년이 예의도 모르는구나."
그러자 역시 잠들지 않고 있던 염파석(閻婆惜)이 홱 돌아보며 차게 맞받았다.
"창피한 것도 모르는 주제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