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죄수는 이런저런 인계가 끝나자 임충을 데리고 온 차발과 함께 떠났다. 그들을 보낸 임충(林沖)은 보따리를 풀고 침상에 누웠다. 늙은 죄수가 피워 놓은 불기운이 거기까지 미쳤다. 임충(林沖)은 그 불이 사그라질까 봐 집 뒤에 있는 숯 더미에서 숯을 가져다 넣었다. 불이 다시 피어오르는 걸 보고 임충(林沖)은 다시 침상에 가 누웠다. 초가집 서까래며 기둥이 금세라도 쓰러질 듯 눈에 들어왔다. 거기다가 벽 틈으로 새어 들어온 바람이 어찌나 차가운지 몸이 떨려 견딜 수가 없었다.
"이런 집에서 어떻게 겨울을 난담? 눈이 멎기를 기다려 성안으로 한번 들어갔다 와야겠다. 미장이를 데려다 벽을 발라야지."
임충(林沖)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불가로 가서 불을 쬐었다. 가만히 웅크리고 앉아 있어 그런지 불을 쬐어도 화끈거릴 뿐 등허리가 시려 견디기 어려웠다.
"가만있자, 아까 늙은이가 여기서 두어 마장 가면 장터가 있다고 했지. 거기 가서 술이나 좀 사다 마셔야겠다."
이윽고 그런 생각을 한 임충(林沖)은 얼른 보따리에서 은자 몇 냥을 꺼냈다. 그리고 벽에 걸린 호리병을 내려 화창 끝에 꿴 뒤 방을 나섰다. 지폈던 불을 끄고 전립(氈笠)을 눌러쓴 채 밖으로 나와보니 이번에는 풀 더미가 못 미더웠다. 이에 임충(林沖)은 초료장의 대문을 닫아걸고 열쇠 꾸러미를 허리에 찼다. 대문을 나서니 사방은 벌써 눈 천지였다. 임충(林沖)은 된바람을 등에 지고 조심조심 동쪽으로 걸었다. 하늘 가득 쏟아지는 눈발이 부서진 백옥 가루가 날리는 듯했다. 눈 속을 한 마장쯤 걷다 보니 갈래 진 길이 나오고, 그 곁에 낡은 사당이 하나 있었다. 임충(林沖)은 그 사당을 보며 속으로 빌었다.
'천지신명이여, 저를 지키고 봐주소서. 뒷날 지전을 살라 은혜에 보답하겠나이다.'
그리고 다시 눈을 헤치며 나아가던 임충(林沖)은 오래잖아 집들이 옹기종기 모인 마을을 보았다. 임충(林沖)은 그중에서 주막 같은 집을 하나 골라 문을 두드렸다.
"손님, 어디서 오셨습니까?"
주인이 나와 임충을 훑어보며 물었다. 임충(林沖)은 화창에 꿰인 호리병을 흔들어 보였다.
"주인장, 이 호리병이 낯익지 않소?"
"저 위 초료장의 늙은이가 가지고 다니던 것 같군요."
호리병을 알아본 주인이 그렇게 대꾸했다. 임충(林沖)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내가 어디서 온 줄도 아시겠구려."
그러자 술집 주인이 반가워하는 표정으로 임충(林沖)을 안으로 끌어들였다.
"새로이 초료장을 지키게 되신 분이라니 잠깐 들어와 앉으십시오."
"날씨가 몹시 차니 한 석 잔은 마셔야 찬바람을 견뎌 낼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익힌 쇠고기를 싼다, 술을 데운다, 수선을 떨었다. 임충(林沖)도 이왕 술 생각이 나서 내려온 길이라 굳이 마다하지 않았다. 주인이 내준 고기와 술을 먹고 마신 뒤 이번에는 스스로 술과 고기를 청해 먹고 마시기 시작했다. 술이 어지간해진 임충(林沖)은 가져간 호리병 가득 다시 술을 사 넣고, 쇠고기 두 덩이도 싸게 했다. 주인이 그대로 하자 임충(林沖)은 은자를 꺼내 셈을 치른 뒤, 호리병은 올 때처럼 화창에 꿰어 어깨에 메고 쇠고기는 얼지 않게 가슴에 품었다.
"잘 있으슈."
임충(林沖)은 그 한마디를 남기고 주막을 나섰다. 초료장으로 돌아가자니 이번에는 된바람을 안고 가야 했다. 눈발은 갈수록 심해졌다. 그러나 술과 고기를 배불리 먹은 임충(林沖)은 추운 줄도 모르고 나는 듯 뛰어 초료장으로 돌아갔다.
"이런!"
초료장의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던 임충(林沖)은 자신도 모르게 그런 소리를 내지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임충(林沖)이 누웠던 초가집이 지붕에 쌓인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폭삭 주저앉고 만 까닭이었다. 하늘이 뜻이 밝아 착하고 의로운 사람의 목숨을 지켜준 것일까. 결과를 따져 보면 폭설이야말로 임충의 목숨을 구해 준 셈이지만, 그걸 알 리 없는 임충(林沖)은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이거 어떻게 한다?'
한동안 멍하니 서 있던 임충(林沖)은 화창에 꿰어 있던 호리병을 풀어 놓고 화창 끝으로 눈 속을 쑤셔 보았다. 혹시 마루방에 피웠던 불에 불씨가 남아 있다가 풀 더미에 옮아 붙을까 봐 걱정이 되어서였다. 전에 벽이 있던 곳을 부수고 몸을 반이나 디밀어 허물어진 마루방 속을 살폈으나 무엇이 타는 기미는 느껴지지 않았다. 눈이 녹아 불씨를 꺼 버린 듯했다. 임충(林沖)은 다시 손을 넣어 침상 위를 더듬어 보았다. 겨우 이불 한 자락이 잡혀 왔다. 임충(林沖)이 애써 이불을 꺼냈을 때는 이미 날이 깜깜하게 어두워져 있었다.
'불도 못 피우고, 오늘 밤을 어디서 잔다?'
이불자락을 안은 채 눈 속에 서서 그렇게 중얼거리던 임충(林沖)은 문득 조금 전 동네로 내려가다가 본 낡은 사당을 생각해 냈다.
'오늘 밤은 할 수 없이 거기 가서 자야겠구나. 내일 날이 밝은 뒤에 다시 궁리해 봐야겠다.'
임충(林沖)은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일어났다. 호리병을 다시 화창에 꿰어 메고 이불자락은 안은 채 나서는 어설픈 길이었지만 초료장 대문을 잠그는 것까지 잊지 않았다. 낡은 사당에 이른 임충(林沖)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문을 잠그려고 보니 문고리도 빗장도 없어 사당 곁에 있는 커다란 바윗덩이를 가져다가 문을 막았다. 도둑 같은 게 겁났다기보다는 바람에 문이 열리거나 산짐승이 들어오는 걸 막기 위함이었다. 사당 안 한쪽 벽면에는 가운데에 흙으로 빚어 금박을 입힌 산신(山神)이 앉아 있고, 양쪽에는 판관(判官) 하나와 소귀(小鬼)가 나뉘어 있었다. 방 한구석에는 수북이 쌓여 있는 지전 더미도 보였다. 그 밖에도 살펴본 바로는 가까운 곳에 인가가 있는 것 같지도 않고 따로이 사당 주인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임충(林沖)은 먼저 화창에 꿰어 메고 온 호리병을 내려놓고 지전 더미에 이불을 폈다. 이어 전립을 벗은 임충(林沖)은 몸에 묻은 눈을 턴 다음 적삼까지 벗었다. 적삼은 눈에 젖어 축축했다. 임충(林沖)은 전립과 적삼을 제상 위에 널어놓고 이불 있는 쪽으로 갔다. 그리고 이불을 끌어 몸에 두른 채 호리병에 든 식은 술을 천천히 마시기 시작했다. 품고 온 쇠고기를 안주 삼았음을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임충(林沖)이 한창 술병을 비워 대고 있는데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후두둑 탁탁탁, 하는 게 무언가 요란하게 타는 소리였다. 벌떡 몸을 일으킨 임충(林沖)은 사당 봉창으로 가 소리 나는 쪽을 살펴보았다. 놀랍게도 바로 초료장에 불이 나 활활 타고 있었다. 임충(林沖)은 얼른 화창을 꼬나 쥐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자신의 할일이 거기 쌓인 말먹이 풀을 지키는 것인 만큼 불을 끄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미처 문을 열기도 전에 부근에서 사람들이 무어라 주고받는 말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이상한 느낌이 든 임충(林沖)은 문 뒤에 숨어 엿들어 보았다. 세 사람쯤으로 짐작되는 발소리는 곧바로 사당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별말 없이 사당 앞에 이른 그들은 임충(林沖)이 뒤에 숨어 엿듣는 문을 밀었다. 임충(林沖)이 무거운 바윗덩이를 갖다 놓아 문은 두 번 세 번 밀어도 잘 열리지가 않았다. 그러자 세 사람은 사당 문을 열기를 단념하고 처마 밑에 앉아 타오르는 불을 바라보다가 그중 하나가 불쑥 말했다.
"어떻습니까, 이 계책이?"
"관영(官營)과 차발(差撥) 두 분을 다시 봐야겠소. 정말 애쓰셨소이다. 경사(京師)로 돌아가면 태위께 말씀드려 두 분 모두께 높은 벼슬이 내리도록 하겠소."
"이번에는 장교두도 핑계를 대어 딸을 붙들고 앉아 있을 수 없을 것이오."
누군가가 이렇게 대꾸했다. 그러자 처음의 목소리가 아첨 섞어 말했다.
"임충(林沖)도 이번에는 우리 손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틀림없이 타 죽었을 겁니다. 이제 고아내(高衙內)님의 병은 나으실 테죠."
그 말을 또 다른 놈이 받았다.
"이제 장교두가 어쩌나 보자. 네댓 번이나 청을 해도 사위가 살아 있으니 안 된다고 했겠다. 장교두가 그렇게 기어이 뻗대니 고아내님의 병이 더 깊어질밖에..."
"태위께서 특히 나를 보내 두 분과 함께 이 일을 꾸미게 한 것도 그 때문이란 말이오. 이제 잘 마무리됐으니 기뻐하시겠지."
"제가 담 구멍으로 기어 들어가 여남은 곳에 불을 질렀습죠. 사방에 쌓인 게 마른 말먹이 풀 아닙니까?"
"거기 모두에 불이 붙었으니 제 놈이 어디로 도망가겠습니까?"
"벌써 다 타 불길이 시들해져 가는군."
"임충(林沖)이 설령 목숨을 건져 달아났다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대군이 쓸 말먹이 풀을 몽땅 태워 버렸으니 죽음을 면하기 어려운 죄 아닙니까?"
"이만 우리는 성안으로 돌아가지요."
"아니오, 다시 한번 살펴봅시다. 그놈의 뼈다귀라도 하나 주워야 경사(京師)로 돌아갈 수 있소."
"태위님과 아내께 그거라도 보여야 우리가 일을 잘 해치웠음을 믿어 주실 것이오."
저희끼리 찧고 까부는 걸 거기까지 듣자 임충(林沖)은 그들이 누구며 무슨 짓을 왜 했는지 훤히 알 수 있었다. 그들 중 하나는 차발(差撥)이고 다른 하나는 육겸(陸謙)이며 나머지는 부안(富安)이었다. 그리하여 그 셋은 그곳에 없는 관영(官營)과 짜고 임충을 죽이려 했음이 분명했다.
'하늘이 이 임충(林沖)을 어여삐 여겨 주셨구나. 만약 그 초가가 눈 때문에 무너지지 않았던들 나는 꼼짝없이 그 안에서 타 죽고 말았겠지.'
임충(林沖)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미움과 분노가 차가운 한(恨)처럼 가슴에 서리며 오히려 임충을 침착하게 했다. 임충(林沖)은 문을 막고 있던 바윗덩이를 가만히 한곳으로 밀쳐 냈다. 그리고 오른손으로는 화창을 들고 왼손으로는 사당 문을 열어젖히며 크게 외쳤다.
"이 못된 놈들, 꼼짝 마라!"
그 소리에 놀란 세 놈은 얼른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너무 놀라 몸이 굳었는지 제대로 움직이지를 못했다. 번쩍 창을 치켜든 임충(林沖)은 먼저 차발부터 찔러 넘겼다. 육겸(陸謙)이 비명을 내질렀다.
"살려 주시오. 한 번만 살려 주시오!"
그러나 몸이 굳은 사람처럼 손발조차 움직이지를 못했다. 나머지 한 놈 부안(富安)은 그래도 좀 나았다. 달아난답시고 여남은 발짝이나 뛸 줄 알았다. 하지만 뒤쫓아 간 임충(林沖)이 등짝에 창을 찔러 넣으니 구슬픈 비명 한마디로 거꾸러졌다. 임충(林沖)이 두 사람을 죽이고 악귀 같은 모습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보자 다급해진 육겸(陸謙)도 겨우 걸음을 떼어 달아났다. 그러나 서너 발짝을 옮기기도 전에 임충의 성난 목소리가 뒤쫓아 왔다.
"이 간사한 도적놈아, 어디로 달아나려느냐?"
그 소리에 얼이 빠진 육겸(陸謙)은 그대로 미끄러운 눈길 위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뒤쫓아 온 임충(林沖)이 창으로 땅을 찍고 발로 육겸의 가슴을 밟으며 꾸짖었다.
"이 모질고 독한 놈아, 네가 나와 무슨 원수진 일이 있기에 이렇도록 악착스레 해치려 하느냐? 옛말에 사람 죽인 건 용서할 수 있어도 그 악한 마음은 용서하기 어렵다더니, 네놈이 바로 그렇구나."
"제가 한 일이 아닙니다. 태위가 뽑아 보내니 아니 올 수가 없었습니다!"
한때는 친구 간이었다는 것도 잊었는지 육겸(陸謙)이 발발 떨며 그렇게 빌었다. 임충(林沖)은 그런 육겸이 더욱 미웠다.
"이 간사한 놈, 너와 나는 어릴 적부터 벗 삼아 지내 왔는데 이제 나를 해치려 들어? 뭐 네가 꾸민 일이 아니라구? 에잇, 나쁜 놈. 더러운 주둥아리 놀리지 말고 내 칼이나 받아라!"
그 한소리와 함께 육겸의 웃옷을 찢더니 염통이 있는 곳을 푹 쑤셨다. 육겸(陸謙)은 비명 한마디 제대로 못 지르고 가슴뿐만 아니라 온몸의 일곱 구멍으로 피를 쏟으며 숨을 거두었다. 임충(林沖)은 그래도 한이 안 풀려 육겸의 염통과 간을 도려냈다. 임충(林沖)은 피 묻은 육겸의 염통과 간을 손에 들고 머리를 돌려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때 쓰러져 있던 차발(差撥)이 엉금엉금 기어 달아나려는 게 눈에 들어왔다.
"너도 이 칼을 받아라!"
뒤쫓아 가 차발(差撥)을 붙든 임충(林沖)은 긴 말도 않고 그 목을 잘라 창끝에 꿰었다. 그리고 되돌아가 이미 죽은 육겸과 부안의 목까지 잘라 버렸다. 피 묻은 칼을 씻어 다시 품 안에 갈무리한 임충(林沖)은 셋의 목을 그들의 상투를 풀어 한 덩이로 묶었다. 그리고 사당 안으로 옮겨 산신상 앞 제상에 얹어 놓으니, 마치 산신(山神)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밝혀 달라고 빌기 위해 제물을 바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람을 셋씩이나 죽인 뒤라 일없이 현장에 어정거릴 수 없었다. 임충(林沖)은 곧 겉옷을 걸치고 전립을 썼다. 이어 호리병의 남은 술을 마저 마신 다음 창을 들고 사당을 나와 동쪽으로 걸었다. 한 서너 마장 걷기도 전에 가까운 마을 사람들이 물통이며 바가지 따위를 들고 몰려오는 게 보였다. 초료장의 불길을 보고 불을 끄러 달려온 것이었다.
"여러분들은 어서 가서 불을 끄시오. 나는 관청에 이 일을 얼른 알려야겠소."
임충(林沖)은 태연한 얼굴로 그렇게 말해 그들을 속이고 반대편으로 달아났다. 눈발은 한층 심하게 흩날렸다. 두어 경쯤 달리자 몸이 얼어 와 견딜 수 없게 된 임충(林沖)은 가만히 사방을 둘러보았다. 어딘지는 모르지만 초료장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인 듯했다. 어디 들어가 언 몸이라도 녹일 곳이 없나 싶어 임충(林沖)은 한층 더 세밀히 사방을 살폈다.
있었다. 앞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나무가 빽빽한 숲이 보이고 그 속에 작은 초가 한 채가 눈에 덮여 있는데, 그 봉창으로 빠안히 불빛이 새어 나왔다. 임충(林沖)은 이것저것 따져 볼 겨를도 없이 그 초가로 달려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 보니 한 늙은 일꾼을 가운데로 하고 젊은 일꾼 네댓 명이 빙 둘러앉아 불을 쬐고 있었다. 화덕에는 장작불이 한창 신나게 타오르는 중이었다.
"여러분께 엎드려 빕니다. 저는 노성의 감영에서 심부름꾼으로 일하는데 눈을 맞아 옷이 흠뻑 젖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얼어죽을 것 같아 염치 불고하고 들어왔으니 곁불이라도 좀 쬐고 가게 해 주십시오."
그들 앞으로 다가간 임충(林沖)은 한껏 공손하게 말했다. 일꾼 하나가 인심 좋게 받았다.
"그러시우. 불 쬐는 거야 안 될 게 뭐 있겠소."
이에 임충(林沖)은 화덕 곁으로 가 그들 사이에 끼었다. 임충(林沖)은 불을 쬐어 몸을 녹이는 한편 젖은 옷을 벗어 말렸다. 그런데 옷이 거의 다 말라 갈 무렵 불 곁에 항아리가 하나 놓인게 임충의 눈에 들어왔다. 안에서 술 냄새가 풍기는 게 틀림없이 술독 같았다. 갑자기 술 생각이 난 임충(林沖)이 그들에게 말했다.
"제게 약간의 은자가 있습니다. 죄스럽지만 저 술을 좀 마실 수 없을까요?"
"우리는 매일 밤 서로 돌아가며 쌀 창고를 지키고 있소. 이제 밤은 사경에 날씨까지 매서워 여기 이 사람들이 마시기에도 모자랄 거요. 추위를 이기자면 술밖에 없으니 당신에게까지 나눠줄 게 없소. 그런 소리 마시오."
늙은 일꾼이 그런 말로 퉁명스럽게 거절했다. 그러나 이미 속이 동한 임충(林沖)은 술 생각을 억누를 길이 없어 한 번 더 사정했다.
"몇 잔쯤 떠내는 거야 어떻겠습니까? 언 속이라도 풀게 좀 나눠 주십시오."
"이 사람이 안 된다니까, 왜 이래?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시오."
늙은이가 한층 거칠게 받았다. 하지만 사람을 셋씩이나 죽인 광기가 아직 남은 것일까. 임충(林沖)은 안 될 줄 번연히 알면서도 술향내를 맡자 그냥 견딜 수가 없었다. 갑자기 사람이 달라진 듯 생떼로 나왔다.
"어쨌든 나는 좀 마셔야겠소."
그러자 불가에 있던 일꾼들이 한꺼번에 들고 일어나 임충(林沖)을 울러댔다.
"어어, 이 자식 봐라. 남은 저를 봐준다고 불을 쬐고 옷을 말리게 해 줬더니, 뭐라고? 이제는 술까지 내놓으라고? 어서 꺼져! 안꺼지면 네놈을 여기다 매달아 놓을 거야."
임충(林沖)이 기다렸다는 듯 벌컥 성을 내며 소리쳤다.
"이놈들이 영 뭘 모르는구나!"
그리고 들고 있던 창으로 불이 활활 타는 장작을 늙은이 얼굴 쪽으로 튕기고는 화덕까지 한 차례 휘저어 버렸다. 갑작스레 불벼락을 맞은 늙은이는 수염과 눈썹이 모두 타 버리고 방 안은 재와 연기와 불똥으로 난장판이 되었다. 젊은 일꾼들이 한꺼번에 몸을 일으켜 임충을 어찌해 보려 했지만 될 일이 아니었다. 창대를 몽둥이 삼아 드는 솜씨로 마구 두들겨 대니, 먼저 늙은이가 못 견뎌 달아나고 이어 젊은 일꾼들도 임충에게 한 대씩 얻어맞은 뒤 모조리 내빼 버렸다.
"모두 없어져 버렸군. 이제 이 어르신네가 어떻게 마시는가를 보여 주지."
임충(林沖)은 그들의 등 뒤에다 그렇게 씨부렁대고는 술독 곁에 앉았다. 어쩌면 초저녁에 마신 술기운이 눈 속을 달아나느라 속으로 졸아들었다가 따뜻한 불가에 앉자 갑자기 되살아난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임충(林沖)은 방구석에서 바가지 두 개를 찾아내 퍼마시다가 술독이 반이나 줄어든 뒤에야 몸을 일으켰다. 마음 같아서는 바닥을 보고 싶었지만, 달아난 일꾼들이 사람들이라도 모아 오면 큰일이다 싶어 그쯤에서 일어선 것이었다. 그래도 창만은 놓지 않고 문을 나서는데 벌써 발걸음이 여는 때 같지 못했다. 땅이 불쑥불쑥 치솟다가 움푹움푹 꺼지는 듯, 비틀비틀 흔들흔들 도무지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겨우 한 마장도 못 가 때마침 불어온 된바람에 떼밀리듯 산기슭 개울가에 처박혔다. 취한 중에도 임충(林沖)은 처음엔 어떻게 일어나 보려 했다. 하지만 대체로 몹시 취한 사람이 한번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기 어려운 법이다. 임충(林沖)도 몇 번 손발을 허우적거려 보다 그대로 눈 위에 드러누워 버렸다.
한편 임충에게 쫓겨 갔던 일꾼들은 그새 사람을 스무남은 명이나 모아 임충을 잡으러 돌아왔다. 저마다 창과 몽둥이를 꼬나들고 임충(林沖)이 차지하고 있던 오두막을 덮쳐 보았으나 벌써 임충은 거기 없었다. 이에 사람들은 집 밖을 살펴보았다. 쌓인 눈 때문에 임충의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 발자국을 따라 뒤를 쫓던 사람들은 한 마장도 못 가 눈밭 위에 드러누운 임충을 찾아냈다. 사람들은 그런 임충(林沖)을 한바탕 흠씬 두들겨 깨운 뒤에 밧줄로 꽁꽁 묶어 어디론가 끌고 갔다. 날이 훤해 오는 오경 무렵이었다. 한참 뒤에 그들이 걸음을 멈춘 곳은 어떤 장원 앞이었다. 집 안에서 머슴 하나가 나오더니 임충을 끌고 온 사람들에게 말했다.
"나리께서 아직 일어나지 않으셨으니 그놈은 문루에 매달아 놓게."
그 소리에 사람들은 임충(林沖)을 문루에 매달아 버렸다. 오래잖아 날이 밝고 임충도 술에서 깨어났다. 흐릿한 눈길로 사방을 살펴보니 번듯한 장원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그 높은 문루에 자신이 매달려 있는 것이었다.
"어느 놈이 나를 여기다 매달았느냐?"
임충(林沖)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몸을 버둥거렸다. 그 소리를 들은 머슴 하나가 몽둥이를 꼬나들고 꾸짖었다.
"저놈이 아직도 큰 소리냐?"
그러자 임충에게 수염을 그을린 늙은 일꾼이 나타나 그 머슴놈을 부추겼다.
"입 섞어 말할 것도 없네. 몇 대 두들겨 주둥아리나 닫게 하고 나리께서 깨기나 기다리세. 그때 추달(推撻)하면 되네."
그러자 거기 있던 일꾼들이 우르르 덤벼 임충을 개 패듯 때렸다. 임충(林沖)은 어떻게 맞서 보려 해도 워낙 꽁꽁 매달린 몸이라 길이 없었다. 그저 성한 입으로만 소리소리 지르는 길뿐이었다.
"이놈들아, 네놈들이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그때 누군가가 여럿에게 큰 소리로 알렸다.
"나리께서 나오신다!"
그 소리를 듣고 임충(林沖)도 그쪽을 보았다. 어떤 사람이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걸어 나오더니 여럿에게 물었다.
"너희들이 때리는 자는 누구인가?"
"간밤에 잡은 쌀도둑놈이올시다."
일꾼들이 입을 모아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벼슬아치 복색을 한 사내가 임충(林沖)을 찬찬히 살피다가 갑자기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여봐라, 이 무슨 무엄한 짓이냐?"
그리고 몸소 달려가 임충을 풀어 내린 뒤 물었다.
"교두께서 어쩌시다가 여기 매달리게 되었습니까?"
그걸 본 일꾼들은 어마 뜨거라 싶었다. 주인 나리가 그토록 공손히 대하는 사람을 몽둥이찜질에 매달기까지 했으니 기가 찼다. 감히 그 자리에 서 있을 생각을 못하고 머리를 싸쥔채 흩어져 버렸다. 일꾼들에게 맞아 제정신이 아니던 임충(林沖)도 그제야 겨우 눈길을 모아 그 사내를 보았다. 그 사내는 다름 아닌 소선풍 시진(柴進)이었다. 끌려온 곳이 바로 시진의 장원이었던 것이다.
"대관인(大官人), 나를 살려 주시오."
추운 새벽에 밧줄로 꽁꽁 묶인 채 문루 높이 매달려 시달린 끝이라 임충(林沖)이 저도 몰래 처량한 소리를 내었다. 그런 임충의 몸에 묶인 밧줄을 풀어 주며 시진(柴進)이 알 수 없다는 듯 다시 물었다.
"교두께서는 어떻게 여길 왔다가 촌것들에게 이 욕을 당하셨소?"
"그걸 어찌 한마디로 이야기하겠소."
임충(林沖)이 그렇게 대꾸하자 시진은 긴 이야기를 기다리지 않고 임충을 안으로 끌었다. 추위에 얼고 얻어맞아 말이 아닌 임충의 몰골을 보고 예사 아닌 뒷사정을 짐작한 까닭이었다. 집 안에 들어가 마주 보고 앉기 바쁘게 임충(林沖)이 그간의 기막힌 사연을 낱낱이 일러 주었다. 초료장의 불을 중심으로 육겸과 부안이 꾸민 수작이며, 그들을 죽여 원한을 푼 것까지 남김없이 털어놓은 것이었다.
"형은 어찌 그리도 운명이 기구하오? 하지만 오늘은 하늘이 잠시 도운 듯하니 마음 놓으시오. 이곳은 아우의 장원 중에 하나인 동장(東莊)이오. 여기서 때를 기다리며 다시 앞일을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다 듣고 난 시진(柴進)이 안됐다는 듯 그렇게 임충을 안심시키고 머슴을 불러 일렀다.
"가서 옷 한 벌을 내오너라."
그리고 머슴이 새 옷을 내오자 임충에게 갈아입게 한 뒤 따뜻한 방에 쉬게 했다. 끼니마다 나오는 술과 밥이 큰손님 모시듯 극진하기도 전과 다름이 없었다. 그 바람에 임충(林沖)은 시진의 동장에서 대엿새를 다리 뻗고 잘 쉬었다.
한편 창주 노성은 임충의 일로 발칵 뒤집히다시피 했다. 임충(林沖)이 차발과 육겸, 부안 세 사람을 죽인 뒤 대군초료장에 불을 지르고 달아났다는 소리를 들은 관영(官營)은 곧 그 일을 창주 대윤(大尹)에게 알렸다. 대윤은 깜짝 놀라 곳곳에 공문을 내려 임충(林沖)의 죄를 알리는 한편 사람을 풀어 임충을 잡아들이게 했다. 시골 마을 저잣거리 할 것 없이 사람이 지날 만한 길목은 어김없이 임충의 얼굴을 그린 종이쪽지가 나붙고, 그 아래는 그를 잡아 오는 사람에게 삼천 관의 상금을 내린다는 공고가 따랐다. 그렇게 되자 창주 경내는 벌집을 쑤셔 놓은 것처럼 요란스러워졌다. 시진의 동장에 숨어 있는 임충에게도 그 같은 소식은 곧 전해 왔다. 그걸 들은 임충(林沖)은 하루하루가 바늘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그대로는 견딜 수 없어 마침 동장으로 돌아온 시진을 잡고 말했다.
"대관인께서 저를 이곳에 못 있게 해서가 아니라 관청의 추적이 두려워 한 말씀 올립니다. 만약 관청의 손길이 이곳까지 미치는 날이면 대관인께서는 반드시 이 하찮은 아우의 일에 연루돼 좋지 않은 일을 겪게 될 것입니다. 이왕 대관인께서 임충(林沖)을 의로 돌보시어 재물을 아끼지 않으셨으니 염치없는 대로 다시 청합니다. 따로 제가 갈 만한 곳을 알아보시고 저로 하여금 그곳으로 옮겨 가 숨을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다행히 죽지 않고 이 한목숨을 건지게 된다면 뒷날 대관인을 위해 개나 말의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이미 형께서 떠나시기로 하셨다니 제가 한군데 갈 만한 곳을 일러 드리겠습니다. 편지 한 통을 써 드릴 테니 그리로 가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시진(柴進)도 이미 알아본 게 있는 듯 임충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물었다.
"만약 대관인께서 주선해 주시어 이 한목숨 건질 수 있다면 어딘들 마다하겠습니까? 어딘지 일러만 주십시오."
"그곳은 산동 제주에 있는 물가 마을로 양산박(梁山泊)이라 불리는 곳입니다. 둘레가 팔백 리가 되는 산 가운데는 완자성(宛子城)과 요아와(蓼兒洼)란 곳이 있는데 지금은 세 호걸이 거기다 산채를 열고 있지요. 우두머리는 왕륜(王倫)이란 이고, 둘째는 두천(杜遷), 셋째는 송만(宋萬)이란 사람입니다. 세 호걸은 칠팔백의 졸개를 거느리고 있는데 그들 중에는 몹쓸 죄를 짓고 그리로 도망가 숨어 사는 이들도 많지요. 마침 그 세 호걸이 모두 저와 교분이 두터우니 제 편지를 가지고 그리로 가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시진의 말을 들은 임충(林沖)은 귀가 번쩍 틔었다. 자신도 모르게 들떠 대답했다.
"정말로 그런 곳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시진(柴進)은 그리 밝은 얼굴이 아니었다.
"지금 창주에는 거리마다 형을 잡으라는 방문이 붙어 있고, 관청에서는 또 양산박(梁山泊) 쪽으로 가는 길목에 군관을 둘씩 내보내 오가는 사람을 살피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형은 반드시 그 길목을 지나야만 하니......"
그렇게 중얼거리듯 말하다가 겨우 낯을 펴 한마디 덧붙였다.
"하지만 다시 계획을 세워 봐야지요. 반드시 형을 보내 드리도록 하겠소."
"만약 대관인의 은혜를 입어 이곳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죽어도 그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갑자기 다급해진 임충(林沖)이 그렇게 시진에게 매달렸다. 오래잖아 시진(柴進)은 임충을 창주 경내에서 빼낼 궁리를 끝낸 뒤 곧 실천에 들어갔다. 먼저 머슴 하나를 부른 시진(柴進)은 임충이 가지고 갈 보따리를 주며 말했다.
"너는 이걸 지고 관문 밖에 나가서 우리가 갈 때까지 기다려라."
이어 시진(柴進)은 떠들썩한 사냥 채비에 들어갔다. 말을 스무 필이나 끌어내고 그걸 탄 일꾼들에게는 모두 활과 화살을 메게 했다. 매를 어깨에 앉히고 사냥개까지 한 떼 풀어 앞서게 한 데다 깃발까지 이것저것 매다니 누가 봐도 요란한 사냥 행차였다. 임충(林沖)도 사냥꾼처럼 꾸미고 그들 가운데 섞여 말에 올랐다. 시진의 뜻이 대강 짐작되기는 했지만 불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시진(柴進)은 무얼 믿는지 당당하기만 했다. 일행이 창주를 빠져나가는 관문에 이르자 정말로 군관 두 사람이 졸개를 거느리고 지키다가 시진을 알아보고 달려 나왔다. 두 사람 모두 군관이 되기 전에는 시진의 장원을 드나들며 신세깨나 진 사람들이었다.
"나리, 오늘은 어딜 가십니까? 무척 즐거워 보이십니다."
군관 중 하나가 몸을 굽실대며 시진에게 물었다. 시진(柴進)이 대답 대신 능청스레 되물었다.
"아니, 두 분은 무슨 일로 여기 나와 계시오?"
"창주 대윤(大尹)께서 공문과 범죄인의 얼굴 그림을 보내 임충이란 놈을 잡으라기에 이렇게 나와 길목을 지키고 있습니다. 지나가는 나그네며 장사치까지 일일이 살펴 죄인이 관문 밖으로 달아나는 것을 막으려 함입지요."
군관이 곧이곧대로 일러 주었다. 시진(柴進)이 한술 더 떠 너털웃음까지 치며 말했다.
"우리 패거리에 바로 그 임충(林沖)이 끼어 있는데, 모르시겠소?"
그 말에 임충(林沖)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나 그걸 시진의 우스갯소리로만 들은 군관은 영문도 모르고 따라 웃었다.
"대관인은 법도에 밝으신 분인데 그런 자를 끼고 밖으로 나갈 리 있겠습니까? 우스갯소리는 그만하시고 어서 말에나 오르시지요."
그러자 시진(柴進)은 한층 소리 높여 껄껄거리며 군관의 말을 받았다.
"그럼, 믿으니까 그냥 지나가란 말입니까? 거 좋지. 들짐승이라도 몇 마리 잡으면 돌아오는 길에 나눠 드리지."
그러고는 태연스레 말에 올랐다. 일행도 그런 시진을 따라 별일 없이 관문을 빠져나갔다. 임충(林沖)도 그 가운데 끼어 있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일행이 한 사오 리쯤 가니 먼저 시진의 장원을 빠져나간 머슴이 보따리를 지고 기다리고 있었다. 시진(柴進)은 임충을 불러 말에서 내리게 하고 말했다.
"먼저 그 사냥꾼 옷을 벗고 원래의 옷으로 갈아입으십시오. 칼도 한 자루 준비했으니 가져 가시고..."
그러나 시진(柴進)의 준비는 그뿐이 아니었다. 붉은 끈을 단 전립에 노자와 먹을 게 두둑한 보따리까지 내놓았다. 임충(林沖)은 시진의 그 같은 인정과 의리에 감격해 엎드려 절하며 작별을 했다. 그길로 일행을 몰아 정말로 사냥을 나선 시진(柴進)은 그날 해 질 무렵 해서야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시진(柴進)이 나눠 준 들짐승 몇 마리에 눈길이 뺏긴 두 군관은 일행에서 사람이 하나 줄어든 것도 모르고 의심 없이 시진 일행을 관문 안으로 들여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