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달(魯達)이 안문현 성안으로 들어가 보니 저자는 시끌벅적하고 거리는 사람과 수레로 혼잡스럽기 짝이 없었다. 나라의 온갖 장사치들이 다 거기 모여 저마다의 상품을 늘어놓은 듯한 게 말이 현(縣)이지 번화하기는 주(州)나 군(郡)보다 더 했다. 그런 거리를 두리번거리며 가던 노달(魯達)은 네 갈래 진 길 어귀에 한 떼의 사람이 모여 웅성거리는 걸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한쪽 담벼락에 붙은 방문을 읽고 있는 듯했다. 노달(魯達)도 그 방문의 내용이 궁금했지만 글을 몰라 읽을 수가 없었다. 때마침 그중 한 유식한 사람이 노달처럼 글을 모르는 이들을 위해 큰 소리로 방을 읽어 주었다.
"대주 안문현은 태원부 지휘사의 명을 받들어 위주에서 정도(鄭屠)를 때려죽인 노달을 잡고자 한다. 노달(魯達)은 경략부의 제할로 있던 자로서, 누구든 노달을 감추어 주면 그와 같은 죄로 벌할 것이며, 노달을 붙들어 오거나 그 목을 가져오는 사람에게는 돈 일천 관의 상금을 준다."
거기까지 들은 노달(魯達)은 가슴이 덜컥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누군가 노달을 보고 큰 소리로 말했다.
"아니, 장형, 장형이 여기 웬일이오?"
그리고 노달(魯達)이 무어라고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그를 끌듯 사람들 속에서 데려나갔다. 노달이 끌려가면서 힐끗 보니 그는 다름 아닌 김 노인이었다. 위주의 술집에서 그들 부녀를 구해 줄 때 동경으로 가라 했기에 그리로 간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이곳에서 만나게 된 것이었다. 김 노인은 네 갈래 길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이르러서야 나직이 말했다.
"은인께서는 정말 간도 크십니다그려! 관청에서는 방문을 붙이고 일천 관의 상금을 걸어 나리를 잡으려고 하고 있는데, 바로 그 방문 아래서 천연스레 그걸 읽고 서 계시다니요. 만약 이 늙은이가 먼저 보지 못했다면 나리는 그 자리에서 여럿에게 붙들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 방문 끄트머리에는 나리의 나이며 생김새, 고향까지 다 적혀 있으니까요."
노달(魯達)이 놀라 가슴을 쓸며 김 노인과 헤어진 뒤의 일을 간략하게 일러 주었다.
"나는 영감에게 거짓말을 하게 되기 싫어 그날 바로 장원교로 갔더랬소. 정도(鄭屠) 그놈을 만나 영감 부녀의 일을 따져 보려 함이었소. 그런데 막상 만나 보니 놈이 더욱 미워져서 나도 모르게 주먹질 세 번으로 때려죽이게 되고 말았소. 그래서 이렇게 도망 다닌 지 이미 여러 날이 되나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구려. 그런데 그건 그렇고 영감은 또 어떻게 된 거요? 어째서 동경으로 돌아가지 않고 여기 계시게 되었소?"
"은인께서 구해 주신 뒤 저희 부녀는 수레 한 대를 빌려 동경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정도(鄭屠)가 뒤쫓아올 때 은인께서 때맞춰 다시 구해 주시지 않으면 되끌려가는 수가 있기에 그 길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막연히 북쪽 길로 달아나다가 옛적 동경에 살 때 가까이 지내던 이웃 사람을 만나 이곳으로 오게 된 것입니다. 그 사람은 얼마간 우리 부녀를 친척처럼 보살피더니 정도(鄭屠)가 맞아 죽었단 소리를 듣고는 딸아이 중매를 서 주었습니다. 바로 이 고을의 큰 부자인 조 원외(員外)란 이로, 그 덕에 이 늙은 것은 이제 먹는 것 입는 것 걱정 없이 이곳에서 편안하게 살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은인께서 구해 주신 덕택이랄 수 있지요. 제 딸도 항상 조 원외(員外)에게 저희 부녀를 구해 준 제할님의 크신 은혜를 말해 그도 은인을 잘 알고 있을 겝니다. 거기다가 조 원외(員外)는 창칼이나 막대 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늘상 은인을 만나 뵙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 집으로 가 며칠 머무르시면서 앞일을 의논해 보도록 하시지요."
김 노인이 그렇게 대답하면서 다시 노달을 끌었다. 노달(魯達)도 굳이 마다할 까닭이 없어 김 노인을 따라나섰다. 김 노인은 거기서 반 리도 안 되는 곳의 어떤 집 앞에 이르더니 문에 쳐 둔 발을 걷고 들어서며 큰 소리로 말했다.
"얘야, 집에 있느냐? 은인께서 여기 오셨다."
그러자 그 딸은 짙은 화장에 비단옷 차림으로 달려 나와 노달을 맞았다.
"은인께서 저희를 구해 주시지 않았더라면 어찌 저희에게 오늘이 있겠습니까?"
노달(魯達)을 모셔 들여 방 안에 앉힌 뒤 여섯 번이나 절을 한 그 딸이 그렇게 감사를 올리며 다시 위층으로 오르기를 청했다. 그들 부녀가 너무도 극진하게 나오니 노달(魯達)은 오히려 쑥스러워졌다.
"그럴 것까지는 없소. 나는 곧 가 봐야 하오."
그렇게 짐짓 사양을 해 보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은인께서 이미 여기까지 오셨는데, 어떻게 그냥 보낼 수 있겠습니까?"
김 노인이 펄쩍 뛰듯 앞을 가로막고 노달의 보따리를 빼앗으며 등을 밀어 위층으로 모셔 갔다. 노달(魯達)이 못 이기는 척 따라가 자리를 잡고 앉자 김 노인이 딸에게 말했다.
"얘야, 네가 잠시 은인을 모시고 앉아 있거라. 나는 내려가 상을 차려야겠다."
"너무 요란스럽게 할 것은 없소이다. 형편대로 해 주시면 오히려 편하겠소."
노달이 다시 한번 겸양을 떨었다. 김 노인이 천만의 말씀이라는 듯 손까지 내저으며 말했다.
"제할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목숨을 바쳐도 오히려 모자랄 것입니다."
"까짓 시원찮은 밥 한 상 차리겠다는데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리고 딸아이를 노달 곁에 남아 있게 한 뒤 자신은 아래로 내려갔다.
주방에 들어간 김 노인은 부엌 일하는 계집아이에게 불을 피우게 하는 한편 새로 둔 심부름꾼을 불러 시켰다.
"너는 장으로 나가 물 좋은 생선과 연한 닭고기와 오리, 돼지고기 등 요리해서 맛날 게 있으면 모두 사 오너라. 과일도 굵고 잘 익은 놈으로 듬뿍 들이고."
뿐만 아니었다. 그사이를 기다리게 하는 게 마음 쓰여 우선 술과 채소만으로 한 상을 차려 위층으로 올리게 했다. 김 노인이 채소와 과자만 놓은 상 위에 술잔 셋을 벌여 놓는데 부엌 일하는 계집아이가 은주전자에 든 술과 국물을 받쳐 왔다.
"아직 제대로 마련이 안 됐으니 그동안에 목이나 축이십시오."
부녀가 번갈아 노달에게 술을 권하며 그렇게 말했다. 거기다가 김 노인이 다시 엎드려 절까지 하니, 노달(魯達)은 그 극진한 대접에 되레 마음이 편치 못했다.
"노인장이 너무 예(禮)를 심하게 차리시니 아무것도 한 게 없는 나는 차라리 죽을 맛이외다. 제발 이러지 마시오."
노달(魯達)이 그렇게 말했으나 김 노인의 정성은 조금도 줄어드는 것 같지 않았다.
"늙은이는 이곳에 이른 뒤로 줄곧 홍지(紅紙)와 향을 사르며 은인을 위해 절하고 빌었습니다. 그런데 은인께서 직접 오셨는데 어떻게 절을 올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눈물까지 글썽이니 노달(魯達)도 더는 어찌할 수 없었다.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시니 고맙기 그지없소. 노인장의 따뜻한 마음을 잊지 않으리다."
그러면서 흐뭇한 기분으로 술잔을 들었다.
세 사람이 권커니 잣거니 마시는 새에 날이 저물어 막 불을 밝히려 할 때였다. 갑자기 아래층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렸다. 노달(魯達)이 창을 열고 내려다보니 마당에 장정 스무남은 명이 휜 몽둥이를 들고 와 외쳐 댔다.
"잡아라, 어서 잡아 내려라!"
그런 그들 뒤에는 말 탄 한 명의 관원이 그들을 꾸짖었다.
"떠들지 마라! 도적이 달아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노달(魯達)은 깜짝 놀랐다. 어김없이 그들이 자신을 알아보고 잡으러 온 것이라 단정짓고 아래층으로 몸을 날리려 할 때였다. 김노인이 노달의 손을 끌어당기며 가만히 속삭였다.
"그냥 계십시오.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움직여도 늦지 않으실겁니다."
그리고 혼자 아래층으로 내려가 말 탄 관원에게로 갔다. 김노인이 그 관원의 귀에 대고 몇 마디 하기도 전에 그가 호쾌하게 웃더니 데려온 장정들을 모두 흩어지게 했다. 장정들이 모두 사라진 뒤에야 그 관원은 말에서 내려 집 안으로 들어왔다. 김노인이 노달을 불러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그 관원이 깊숙이 몸을 숙이며 말했다.
"백 번 이름을 듣는 것이 한 번 얼굴을 보는 것에 못 미친다더니 정말 그렇소이다. 소문으로 듣기보다 직접 만나니 더욱 우러러 뵈는구려. 의사(義士)께서는 이 하찮은 사람의 예를 받아 주시오."
노달(魯達)이 얼떨떨해서 김노인에게 물었다.
"저분은 뉘시오? 전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데 어떻게 내게 절을 하는 거요?"
"저 사람이 딸아이의 남편 되는 조원외(趙員外)올시다. 이 늙은 것이 남자를 끌어들여 딸아이와 함께 술을 마신단 말을 듣고 은인을 딸아이의 샛서방쯤으로 잘못 안 것입니다. 화난 김에 집안의 일꾼들을 모조리 데리고 달려왔으나 이 늙은이의 말을 듣고 방금 되돌려 보냈습니다."
그제야 노달(魯達)도 놀란 가슴을 쓸었다. 노달(魯達)이 조원외와 함께 위층으로 올라가 앉자 김노인이 다시 술상을 보아 왔다.
"윗자리에 앉으십시오."
조원외(趙員外)가 노달에게 윗자리를 권했다.
"제가 어떻게 감히..........."
노달(魯達)이 그렇게 사양하자 조원외가 한 번 더 권했다.
"제가 우러르는 마음에서 권하는 것이니 부디 사양하지 마십시오. 제할께서 대단한 호걸이란 소문을 여러 번 들었으나 뵈올 길이 없다가 이제 하늘이 이렇게 만나도록 해 주셨으니 이보다 더한 기쁨이 없습니다."
"나는 한낱 말썽꾼에 지나지 않는 데다 지금은 또 죽을죄를 지어 쫓기는 몸이외다. 너무 과분한 대접이 되면 오히려 내가 거북하오. 다만 한 가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조원외(趙員外)께서 궁한 이 몸을 모른다 않으시고 어디 있을 만한 거처나 한 군데 마련해 주시는 것이오. 그래서 빨리 이곳을 떠날 수 있다면 서로를 위해 좋은 일일 듯싶소."
노달(魯達)이 마지못한 듯 윗자리에 앉으며 그렇게 말했다. 조원외(趙員外)가 기꺼이 응낙했다.
"그 일이라면 염려 마십시오. 제가 마땅한 곳을 마련할 테니 오늘 밤은 술이나 실컷 마십시다."
그러면서 술잔을 돌렸다. 조원외(趙員外)는 노달에게 정도를 때려죽이게 된 경위를 묻고 그동안 쫓기면서 겪은 고생을 진심으로 위로해 주었다. 그리고 창 쓰기와 봉술 이야기로 건너가 흥겹게 떠들다 보니 어느새 밤이 깊어 있었다.
"고향 집인 양 여기고 편히 쉬십시오."
밤도 깊고 술도 어지간해지자 조원외(趙員外) 부부는 노달을 사랑으로 안내해 쉬게 하고 자기들도 침실로 돌아갔다.
다음 날 아침이 되었다. 조원외(趙員外)가 노달을 찾아보고 말했다.
"이곳은 제할께서 편히 숨어 계실 곳이 못 되는 듯싶습니다. 저희 장원으로 옮겨 지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 장원이 어디 있소?"
"여기서 한 십 리쯤 가면 칠보촌(七寶村)이란 곳이 있는데 그곳에 저희 장원이 있습니다."
"고맙소이다. 그럼 그곳에서 신세를 지겠소."
노달(魯達)이 그렇게 말하자 조원외는 먼저 사람을 장원으로 보내 말 한 필을 끌어오게 했다. 한나절도 안 되어 말 한 필이 왔다. 조원외(趙員外)는 노달더러 말에 오르라 하고 짐은 머슴에게 지워 칠보촌으로 가게 했다. 노달(魯達)이 김노인 부녀와 작별하고 말 위에 오르니 조원외도 말에 올랐다. 노달과 조원외는 말 머리를 나란히 하고 이런저런 한가로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칠보촌으로 향했다. 얼마 안 되어 둘은 칠보촌의 장원 앞에 이르렀다. 조원외(趙員外)는 말에서 내린 노달의 손을 끌듯 초당으로 모셔 갔다. 주인과 손님이 자리를 정해 앉기 바쁘게 조원외(趙員外)가 일꾼들을 불러 말했다.
"양을 잡고 술을 걸러 이곳으로 내오너라. 내 오늘 귀한 손님을 맞았으니 다시 한번 취해야겠다."
그리고 그날도 밤늦도록 노달에게 술을 권하다가 사랑방으로 안내했다. 조원외(趙員外)의 정성스러운 대접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다음 날 또 술과 안주를 장만해 대접하니 노달(魯達)이 감격해 말했다.
"원외(員外)께서 이토록 나를 생각해 주시니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소."
"세상 모든 사람이 다 형제가 아니겠습니까? 보답이라니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조원외(趙員外)는 그렇게 노달의 입을 막고 한층 대접을 극진히 했다.
그럭저럭 그 장원에서 이레쯤을 지낸 뒤였다. 그날도 노달(魯達)과 조원외(趙員外)가 서원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김노인이 헐떡이며 뛰어 들어왔다. 김노인은 서원 안에 노달과 조원외 외에는 아무도 없는 걸 보고 대뜸 노달에게 말했다.
"늙은이가 걱정이 많아서 하는 소린지 모르겠습니다만 좋지 않은 일이 생겼습니다. 며칠 전 제가 은인을 청해 술을 마실 때 원외(員外)가 무얼 잘못 알고 장정들을 모아 온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날 원외는 제 말을 듣고 장정들을 흩어지게 했지만 아무래도 그게 잘못된 듯싶습니다. 의심이 생긴 장정들이 저희끼리 수군댄 말이 관청에 들어갔는지 어제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관원 몇이 저희 집 주위를 돌며 이것저것 캐묻더니 곧 이곳으로 은인을 잡으러 올 것 같은 눈치가 보입니다. 저들이 꼭 은인을 알아보았는지는 모르겠으나 만에 하나라도 일이 그릇되면 어찌하겠습니까? 차라리 일찍 무슨 수를 내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얼른 이곳을 떠나야겠소."
노달(魯達)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서둘렀다. 조원외(趙員外)가 그런 노달을 잡으며 말했다.
"제할님을 여기 잡아 두자니 닥쳐올 풍파가 두렵고, 그냥 보내자니 사람들이 비웃을 게 걱정됩니다. 그래서 제가 한 가지 궁리를 해냈는데 제할께서는 어떠실는지....... 편안하게 몸을 숨길 수는 있지만 제할님이 가시려 들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죽을죄를 짓고 쫓겨 다니는 몸입니다. 이 한 몸 편히 숨을 곳만 있다면 그게 어딘들 마다하겠습니까?"
노달(魯達)이 얼른 그렇게 받았다. 그제야 조원외(趙員外)가 망설이던 것을 털어놓았다.
"그러시다면 꼭 알맞은 곳을 한 군데 일러 드리겠습니다. 여기서 한 삼십 리쯤 가면 오대산이 있고, 그 위에는 문수원(文殊院)이라는 사찰이 있지요."
"문수보살을 모시는 도량으로, 스님이 한 오륙백 명 되며, 그 주지인 지진(智眞) 장로는 저와 형제같이 지냅니다. 조상 때부터 그 절에 많은 시주를 해 온 데다 지금은 거의 제가 낸 전곡으로 절이 유지되고 있는 까닭이지요. 저는 별써부터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그곳 스님 하나를 구워삶아 도첩(度䕈, 스님의 신분증명서) 한 장을 사 두었습니다. 또 제가 가까운 사람이 출가를 원해서라는 말만 해 두었기 때문에 그들은 오는 사람을 별로 의심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만약 제할께서 거기로 가 보시겠다면 제가 어찌해 볼 터이니 한번 생각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다만 가신다면 정말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어야 합니다."
단 것 쓴 것 가릴 처지가 못 되는 노달(魯達)이 듣기에도 뜻밖인 소리였다. 노달은 얼른 속으로 생각해 보았다.
'지금 빨리 이곳을 떠나기는 해야겠는데 도무지 어디로 달아나야 할지를 모르겠구나...... 별수 있나, 이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해 보자.'
그렇게 마음을 정한 노달(魯達)이 대답했다.
"이미 원외(員外)께서 그렇게 손을 써 두셨다니 저도 팔자에 없는 화상(和尙) 노릇 한번 해 보지요. 모든 걸 원외의 뜻대로 따르겠소이다."
그런 결정이 나자 조원외(趙員外)는 그날 밤으로 노달이 떠날 채비를 갖춰 주었다. 노달 자신이 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절에 올릴 전곡과 예물까지 두루 마련해 짐을 쌌다.
다음 날 아침 조원외(趙員外)는 힘세고 믿을 만한 머슴들을 불러 짐을 지우고 노달과 함께 오대산으로 향했다. 한나절도 안 되어 산 아래에 이른 조원외(趙員外)와 노달(魯達)은 거기서부터 가마에 오르면서 머슴 하나를 먼저 절로 보내 자기들이 온 것을 알리게 했다. 일행이 절 앞에 이르니 절 살림을 맡아보는 도사(都寺)니 감사(監寺)니 하는 스님들이 마중을 나왔다. 가마에서 내린 조원외(趙員外)와 노달(魯達)은 산문(山門) 밖 정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래잖아 전갈을 받은 주지인 지진(智眞) 장로가 수좌(首座)며 시자(侍者)들을 거느리고 그곳까지 나와 그들을 맞았다. 조원외(趙員外)와 노달(魯達)이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자 지진 장로가 말했다.
"이곳까지 먼 길을 오시느라 애쓰셨소. 그래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시었소?"
조원외(趙員外)가 한층 공손하게 대답했다.
"작은 일이 있어 특별히 이렇게 찾아와 뵙습니다만..........."
"우선 안으로 드시지요. 차나 마시면서 천천히 말씀 나누도록 하십시다."
그 같은 주지의 청에 조원외(趙員外)가 앞장서고 노달(魯達)이 뒤따르는 형국으로 둘은 절 안으로 들어갔다. 방장실에 이르러 장로가 원외를 손님 자리에 앉히는 걸 보고 노달(魯達)은 아래 수좌(首座)가 앉는 의자로 갔다. 조원외(趙員外)가 그런 노달을 불러 귓속말로 깨우쳐 주었다.
"이제 당신은 출가해 스님이 될 몸인데 어떻게 감히 장로님과 마주 앉을 수 있겠습니까?"
"알겠소이다. 미처 깨닫지 못했소."
노달(魯達)은 그 말과 함께 조원외의 어깨 뒤에 붙어 섰다. 조원외 앞으로는 수좌니 지객(知客)이니 도사니 서기(書記)니 하는 스님들이 서열에 따라 동서로 나뉘어 서 있었다. 이때 장정들이 조원외(趙員外)가 준비해 온 예물을 풀어 방장실로 들이기 시작했다.
"원외께서는 무슨 까닭으로 또 이렇게 많은 예물을 준비해 오셨소? 이러시지 않아도 우리 절은 원외 같은 분들 덕분에 모든 게 넉넉하오."
"대단찮은 예물이라 그런 말씀을 듣기가 송구스럽습니다."
조원외(趙員外)가 그렇게 겸양의 인사를 했다. 도인(道人)과 행동(行童)들이 예물을 거둬 나간 뒤에 원외가 몸을 일으키며 지진(智眞) 장로에게 말했다.
"제가 큰스님을 찾아뵌 것은 제 친구 하나가 출가를 원하고 있어서입니다. 허락이 내린다면 이곳에서 큰스님 아래에 있게 해주고 싶습니다. 도첩이며 사부(詞簿)는 이미 갖췄으나 아직 머리를 깎지는 않았는데 성은 노씨이며 이름은 달이라고 합니다. 전에는 관내에서 군무를 보았지요."
"호오, 군문(軍門)에 있던 사람이 어인 일로?"
지진(智眞) 장로가 가만히 물었다. 조원외(趙員外)가 얼른 둘러댔다.
"진세(塵世)의 어려움과 쓰라림을 홀연 깨달아 속된 인연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고 합니다. 바라건대 장로께서는 부처님의 대자대비하심을 본받아 그를 거둬 주시고, 이 조 아무개의 낯을 보아서라도 그가 한 스님이 되어 해탈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십시오. 거기 필요한 모든 것은 제가 마땅히 마련해 올리겠습니다. 장로님의 허락이 있으면 실로 그보다 더한 다행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자 지진(智眞) 장로는 별로 꺼리는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인연이 이 늙은 중의 산문을 빛내 줄 것이라면 어려울 것도 없지요. 너무 걱정 마시고 차나 드시지요."
그리고 행동(行童)에게 차를 내오라 재촉할 뿐이었다. 차를 마신 뒤 장로는 여러 스님들을 불러 노달을 맞아들이는데 대한 의견을 묻는 한편 감사(監寺)와 도사(都寺)에게는 잿밥을 짓게 했다. 장로 앞을 물러난 수좌(首座)와 여러 스님들은 자기들끼리 몰려 의논했다.
"그 사람 생김을 보니 출가할 위인은 아닌 듯하오. 두 눈에 사납고 흉한 빛이 가득했소."
수좌(首座)가 그렇게 말하자 다른 스님들도 뜻이 같은지 입을 모아 말했다.
"지객 스님, 스님이 가셔서 손님들을 객실로 불러내도록 하시지요. 그동안 저희들이 장로님께 이 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에 지객(知客) 스님은 손님을 모시는 척 조원외와 노달을 객실로 데려갔다. 방장실에 장로만 남자 수좌를 비롯한 나머지 스님들이 몰려가 말했다.
"출가하겠다는 그 사람을 보니 생김새가 험악하고 얼굴이 흉악해 보이니 그를 받아들여서는 아니 될 듯합니다. 뒷날 저희 산문에 화가 미칠까 두렵습니다."
그 말에 장로도 별로 밝지 못한 낯빛이 되어 말했다.
"그는 조원외께서 형제보다 더하게 아끼는 사람이다. 조원외(趙員外)의 낯을 보아서라도 어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겠느냐? 너희들은 의심이 나더라도 내가 한번 알아볼 때까지 기다려라."
그렇게 스님들을 달래 놓고는 문득 향 한 줌을 사르면서 선(禪)할 때 앉는 의자에 앉았다. 여럿이 보는 앞에서 염불을 외며 곧장 선정(禪定)에 들어갔던 장로가 잠시 후에 다시 깨어나 말했다.
"아무래도 그를 받아들여야겠다. 그 사람은 위로 천성에 응해 심지가 곧고 굳세다. 비록 지금은 흉하고 모진 형상에다 기구한 명운을 타서 쫓기고 있으나 나중에는 모든 게 깨끗해질 것이다. 증과(證果, 수행으로 이룬 경지)가 비범하니 너희들은 모두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 내 말을 반드시 새겨듣고 그가 불문에 드는 것을 막지 말라."
입정(入定) 중에 무엇을 보았는지 장로가 그렇게 말하자 스님들도 어쩌는 수가 없었다.
"큰스님께서 그렇게 그 사람을 싸고 도시니 저희로서는 명에 따르는 길뿐입니다. 옳지 않다고 말리지도 않겠거니와 그에게 무얼 하지 말라고 권하지도 않겠습니다."
수좌 스님의 그 같은 말을 끝으로 모두 조용히 물러났다. 지진(智眞) 장로는 빨리 잿밥을 내라 이르고, 조원외와 노달을 불러 함께 여느 때처럼 재(齋)를 올렸다.
조원외(趙員外)는 장로가 노달을 받아들이겠단 말을 하자, 데리고 간 머슴들에게 은자를 주어 스님들이 신는 신과 입는 옷과 걸치는 가사(架裟)와 지니는 불구(佛具) 일체를 갖춰 오게 했다. 하루도 안 되어 그 모든 게 갖춰졌다.
지진(智眞) 장로는 좋은 날 좋은 시(時)를 골라 종과 북을 울리게 하고 경내의 모든 스님들을 법당으로 모았다. 몸을 깨끗이 한 오륙 백 명의 스님들이 모두 가사를 걸치고 법좌 아래 줄지어서 합장을 했다. 조원외(趙員外)가 은자를 꺼내 옷값, 향값으로 부처님 앞에 받쳐 올리고 절을 했다. 아무개를 불문에 받아들인다는 선소(宣疏)가 읽혀지자 행동이 노달을 법좌 아래로 이끌고 나왔다. 노달의 머리에서 두건이 벗겨지고 가위질부터 시작되었다. 머리칼을 물로 축여 가며 대강 깎고 나자 다음은 칼로 미는 차례였다. 그 일에 익숙한 스님이 날카로운 칼로 노달의 짧아진 머리칼을 밀고 나가니 잠깐 동안에 노달의 머리는 희게 여문 박같이 되었다. 이윽고 칼이 노달의 보기 좋은 구레나룻에 닿았을 때였다. 노달(魯達)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이건 남겨 두시오. 내가 좋아하는 수염이외다."
그 말을 들은 스님들은 모두 웃음을 참지 못했다. 지진(智眞) 장로가 법좌 위에 앉았다가 큰 소리로 외쳤다.
"대중은 들어라!"
그게 자신을 향해 소리치는 것임을 안 노달(魯達)이 찔끔했는데 장로가 다시 염불처럼 이어 말했다.
"한 치의 터럭도 남겨 놓지 않아야 육근(六根)이 두루 깨끗해지는 법, 너에게서 터럭을 벗기는 것은 네 몸을 깨끗이 하고자 함이니라."
그리고 머리를 밀던 스님을 향해 다시 엄하게 소리쳤다.
"무얼 하는고? 터럭 한 올 남기지 말고 모두 밀어 버려라!"
그러자 그 스님이 다가와 노달의 수염까지 깨끗이 밀어 버렸다. 노달의 수염까지 깨끗이 밀어 버린 후 수좌(首座)가 노달의 도첩을 법좌로 올리며 불명(佛名)을 내리기를 청했다. 지진(智眞) 장로는 이름 자리가 비어 있는 도첩을 잡고 게(偈)를 외듯 소리쳤다.
"신령스러운 빛 한 줄기 천금에 값하도다. 불법이 크고 넓으니 지심(智深)이란 이름을 내린다."
장로는 노달에게 불명(佛名)을 내린 뒤 도첩을 법좌 아래로 되돌려 주었다. 서기 일을 보는 스님이 받아 도첩 앞머리에 노지심(魯智深)이라 써넣었다. 그다음 장로는 노달에게 가사와 법의를 내리고 그 자리에서 입게 했다. 잠깐 사이에 노달이란 호걸은 노지심(魯智深)이란 스님으로 바뀌고 말았다. 감사(監寺) 스님이 노지심을 지진 장로 앞으로 데려가자 장로는 손을 노지심의 정수리에 대고 수기(受記)를 주었다.
"첫째로는 부처님의 본성에 의지할 것이요, 둘째로는 바른 법(正法)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요, 셋째로는 사우(師友), 동도(同道)를 공경할 것이니 이를 바로 삼귀(三歸)라 이른다. 오계(五戒)는 첫째가 살생하지 말 것이며, 둘째가 도둑질하지 말 것이며, 셋째가 음란하지 말 것이며, 넷째가 술을 탐내지 말 것이며, 다섯째가 망령된 말을 하지 말 것이다."
하지만 노지심(魯智深)에게는 쇠귀에 경 읽기나 다름없었다. 할 수 있다(能), 못한다(否)를 밝히는 글자도 몰라 속세에서 쓰던 말로 대꾸했다.
"내 꼭 기억하도록 하겠소이다."
이에 모든 스님이 참지 못해 웃음을 터뜨렸다. 수기가 내려진 뒤 조원외(趙員外)는 따로 스님들을 운당(雲堂)으로 모아 앉히고 노달을 위해 향을 사르며 재를 올렸다. 그리고 절 안의 크고 작은 일을 맡아 하는 스님들에게 각기 예물을 나눠 주며 노지심을 당부했다. 그 밖에 조원외(趙員外)는 노지심을 데리고 절 안의 모든 사형, 사제들을 찾아보게 하니 그날 밤은 그런 일들로 바쁘게 지나갔다.
다음 날 조원외(趙員外)는 그곳에서의 모든 일이 끝났다 싶자 돌아갈 채비를 차렸다. 장로가 더 머물기를 권했으나 그럴 처지가 못 되었다. 새벽 재(齋)가 끝나는 대로 산문을 나서니 여러 스님이 거기까지 배웅을 나왔다. 조원외(趙員外)는 그들과 헤어지기에 앞서 합장하며 한 번 더 노지심을 부탁했다.
"장로님은 위에 계시고 여러 스님들은 그 아래서 일하시되 부처님의 대자대비를 따르시기는 매한가지라 믿습니다. 제 아우 지심(智深)은 우직하고 예의를 제대로 모릅니다. 말이 거칠고 절 안의 여러 규칙들을 어기는 일이 잦을 것이나, 바라건대 여러 스님께서는 이 조 아무개의 낯을 보아서라도 그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일이라면 원외(員外)께서는 마음 놓으시오. 이 늙은 중이 그를 가르쳐, 염불 독경하고 참선에 힘쓰도록 만들어 보겠소이다."
지진(智眞) 장로가 여럿을 대신해 조원외를 안심시켰다. 조원외(趙員外)가 감격해 말했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뒷날 반드시 그 보답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럿 가운데 섞인 노지심을 불러내 귓속말로 다시 한번 당부했다.
"자아, 이제부터는 전과 같이 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일에 스스로 반성하고 경계하며 결코 자신을 크게 여기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다시 보기 어렵게 될 것입니다."
"원외(員外)께서 하신 말씀 반드시 기억하겠소이다. 앞으로 모든 일을 그 말씀에 따라 행하겠소."
그동안 조원외(趙員外)가 보여 준 따뜻한 정에 노지심(魯智深)이 전에 없이 공손하게 다짐했다. 그 말에 다소 마음을 놓은 조원외(趙員外)는 지진 장로와 여러 스님께 작별하고 산을 내려갔다. 노지심이 타고 왔던 빈 가마와 예물을 담아 온 빈 상자를 메고 진 머슴들이 그런 원외를 뒤따랐다. 장로와 스님들은 모두 절로 되돌아갔다.
그리하여 팔자에도 없는 노지심(魯智深)의 어려운 중노릇은 시작되었다. 생전 처음, 그것도 하룻밤 새 갑자기 하게 된 중노릇이니 싸움질로 잔뼈가 굵은 노지심에게 수월할 리가 없었다. 그날 조원외를 작별하고 절 안으로 돌아와서부터 당장 그랬다. 간밤 늦도록 잠을 설쳐서인지 졸음이 온 노지심은 선불장(選佛場) 안의 선상(禪床)에 벌렁 드러누웠다. 선불장을 돌보는 스님들이 그걸 보고 깜짝 놀라 달려와 노지심을 일으키며 나무랐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미 출가해 불문에 들었으면 앉아서 선(禪)이나 하실 일이지 이 무슨 짓입니까?"
그러나 노지심(魯智深)은 들은 척도 안 했다.
"내가 잠 좀 자겠다는데 무슨 간섭인가?"
오히려 눈을 부라리며 그렇게 맞받았다. 한 스님이 어이없어 한마디 했다.
"좋구나, 참 잘한다!"
그러자 노지심(魯智深)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으르렁댔다.
"뭐라구? 내가 단잠을 자려는데 '잘한다.'라?"
"바로 그런 괴로움을 이겨 내야 하는 거란 말이외다!"
다른 스님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노지심(魯智深)은 오히려 그를 비웃었다.
"남은 단잠을 즐기는데 그게 바로 괴로움이라니? 헛소리 말고 꺼져!"
그렇게 상소리를 해 대니 스님들로서는 어찌해 볼 길이 없었다. 노지심(魯智深)은 그들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나가는 걸 보고 선상(禪床)에 도로 누워 드렁드렁 코를 골았다. 다음 날 선방을 지키던 두 스님은 노지심의 그 같은 무례함을 일러바치러 장로를 찾아가려 했다. 그걸 안 수좌(首座) 스님이 그 둘을 말렸다.
"장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사람은 뒷날 크게 깨우쳐 우리가 오히려 미치지 못한다 하지 않으셨는가? 그렇게 감싸고 도시는 판이니 가 봤자 소용없을 것이네. 그 사람이 하는 대로 놓아두는 게 좋을 걸세."
이 두 사람은 장로를 찾아가기를 그만두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