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테르담의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가 토머스 모어에게 인사를 보냅니다
로테르담의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가 토머스 모어에게 인사를 보냅니다. 지난날 내가 이탈리아를 떠나 영국으로 향하던 때 꼼짝없이 말에 앉아 있어야 했던 시간을 내내 무식하고 어리석은 잡담으로 허송하지 않으려, 나는 수시로 우리들의 공동 과업에 관해 곰곰히 생각하는가 하면, 때로 여기 놓고 떠났던 지혜롭기 이를 데 없고 학식이 높은 친구들을 회상하였습니다.
친구들을 추억하는 가운데 누구보다 특히, 친애하는 모어 씨, 당신을 떠올렸습니다. 나와 당신이 한자리에 마주 앉아 서로 이야기를 나누던 때, 맹세하건대 그때가 내 생애 가장 달콤한 순간이었는바,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는 꼭 그때처럼 이렇게 추억속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무언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찾아야 했고, 그렇다고 진지한 대활르 하기에는 여건이 적절치 않아 보였기 때문에 장난삼아 우신예찬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팔라스가 그런 생각을 당신에게 불러 일으켰습니까?”라고 당신은 물을 것입니다. 우선 모어라는 당신 존함이 나로 하여금 이를 떠올리게 하였습니다. 당신 본인이야 어리석음과 거리가 멀고, 만인이 투표를 하더라도 당신은 어리석음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겠지만, 모어(More)라는 당신 이름은 우신(Moria)을 뜻하는 희랍어에 가깝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장난기 그득한 나의 천품을 당신이 크게 나무라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내가 틀리지 않는다면 학식을 갖춘 재치 넘치는 풍자에 크게 즐거워하며 당신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승에서 데모크리토스의 삶을 실천할 것이라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당신의 현덕에 비추어 당신은 대중과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기지 않을 만큼 산냥하고 친절하여 누구와도 잘 어울리는 것으로 보아, 실로 당신은 <사계절의 인물>다운 면모를 보여줄 수 있으며 그럴 수 있음에 기뻐할 것이라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 친구에 대한 소중한 추억으로 보잘것없으나마 나의 우신예찬 연설을 기꺼이 받아 주기 바랍니다. 더불어 이를 성심껏 지켜 주기 바랍니다. 이를 당신에게 헌정하는 바, 이 연설은 이제 나의 것이 아니라 당신의 것인 까닭입니다.
아마도 이 글을 비판하는 사람이 없지 않아, 일부는 교회 학자가 쓰기에는 너무 가볍다고 힐난하며, 일부는 점잖은 기독교인이 쓰기에는 너무도 신랄하다고 비난할 것입니다. 또 고성을 지르며 내가 구희극 혹은 루키아노스를 되살려 아무거나 가리지 않고 헐뜯는다고 질책할 것입니다. 하지만 글의 가벼움과 장난스러움을 불편해하는 사람들은 이런 유의 글이 나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앞서 위대한 작가들에 의해 거듭해서 쓰였다는 것을 생각하기 바랍니다.
호메로스는 수백 년 전에 <개구리와 생쥐의 전쟁>이라는 장난스러운 글을 지었으며, 베르길리우스는 <모기>와 <채소무침>을, 오비디우스는 <호두나무>라는 글을 지었습니다. 플뤼크라테스와 그이 비판자 이소크라테스는 부시리스를, 글라우콘은 불의(不義)를, 파보리누스는 테르시테스와 나흘거리 열병을, 쉬네시오스는 대머리를, 루키아노스는 파리와 걸식을 칭송하였습니다. 세네카는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신격 찬양문을, 플루타르코스는 그륄루스와 오쉿세우스의 대화를 , 루키아노스와 아풀레이우스는 당나귀를, 무명씨는 돼지 그루니우스 코로코타의 유언-성 히에로뉘무스 또한 이 책을 언급했습니다-을 지었습니다.
그러므로 정히 그렇게 여긴다면, 내가 도둑잡기 놀이를 한다거나, 혹은 이걸 더욱 바랄지도 모르겠는바, 내가 기다란 작대기로 말타기 장난질을 한다고 생각한다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인생 도처에서 온갖 장난에 빠져 살면서도 오로지 학문 세계에서만은 전혀 농담을 허용하지 않는 일은 불공정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더욱이 헛될 것 같은 일에서 진지한 것이 얻어지는 바에야 더욱 그러합니다. 어리석지 않은 독자라면 우스운 이야기에서 더 많은 이익을 얻지 않습니까? 알아듣기 어려운 휘황찬란한 논변에서보다 말입니다. 예를 들어 깁고 누빈 문장으로 수사학이나 철학을 칭송하는 논변이나, 혹은 왕후장상을 찬양하는 논변이나, 혹은 투르크 사람들에 대항하여 전쟁을 부추기는 논변에서보다 말입니다. 또 미래를 예언한다는 사람이나, 혹은 <염소 양털>에 관한 새로운 논란거리들을 찾아냈노라 하는 사람의 논변에서보다 말입니다. 사실 심각한 문제를 허투루 논의하는 것만큼 경솔한 일도 없으며, 하찮은 문제를 경박하게 보일 정도로 심각하게 강변하는 것만큼 우스운 일도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만일 자만심 때문에 나의 판단력이 흐려지지 않았다면 말하거니와, 남들은 나름대로 판단하겠지만, 전혀 어리석지 않게 어리석음을 칭송하였습니다.
더불어 신랄함에 대한 지적에 답변한다면, 사람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에 풍자를 곁들일 자유는 그런 재주를 가진 사람들에게 언제나 열려 있어 그것이 지나쳐 광기에 이르지만 않는다면 언제고 처벌받지 않습니다. 하여 나는 심각한 주제 이외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 오늘날 사람들의 취향에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상당수 종교인들이 앞뒤가 전도되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심각한 비방은 쉽게 참아 넘기면서 교황이나 군주에 대한 가벼운 농담에는 발끈하며, 자신들의 일용할 양식과 관련되었을 때는 그보다 더 화를 낸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묻거니와 사람들의 삶은 나무랐으되, 누구도 실명을 거론치 않았다면 그게 힐난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교화 내지 훈계가 아니겠습니까? 또한 묻거니와 수많은 명목을 들어 내가 나 자신을 꾸짖고있지 않습니까? 나아가 인간 종족 전체를 아울러 나무랐다면, 이는 개인이 아니라 인간 종족 전체의 잘못에 대한 지적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풍자에 개인이 다쳤다고 서슬 퍼렇게 덤비는 사람은 양심을 팔아먹은 자이거나 혹은 도둑이 제발 저린 격으로 뭔가 두려운 자입니다. 성 히에로뉘무스는 이보다 훨씬 자유롭고 신랄하게 글을 지었는바, 실명을 언급하는 일에 전혀 구애받지 않았습니다. 나는 실명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으며, 게다가 문체 또한 다소 눅였기에 선량한 독자라면 나의 의도가 남을 괴롭히는 데 있지 않고 오직 즐거움을 주는 데 있음을 알아차릴 것입니다. 나는 유베날리스처럼 그렇게 남들이 애써 감춘 악덕의 시궁창까지 들쑤셔 흙탕물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따져 보고자 한 것은 가소로운 것들이지 지저분한 것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태껏 불쾌감을 떨쳐 내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말하거니와, 이것만이라도 기억해 주기 바라오니, 우신에게 욕먹는 일은 좋은 일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화자로 삼은 우신은 우신다운 일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신 같은 훌륭한 변호사를 옆에 두고 이런 별론이 웬 말입니까? 당신은 하찮은 소송 사건일지라도 그것을 정성껏 변호해 줄 사람인 것을. 지극히 현명한 바보 씨, 건강하기를 비오니, 당신의 우신을 호의로써 변호해 주기 바랍니다.
시골에서, 1508년 6월 9일
1.
우신이 말한다
사람들이 나를 흔히 언급할 때마다, 내가 모르지 않는바, 어리석은 사람들에게조차 나는 사나운 말을 듣기 일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몸이야말로 내 주장하노니, 누구도 아닌 바로 이 몸이야말로 신들과 인간들을 즐겁게 하는 재주를 가진 유일한 존재입니다. 이를 충분히 입증하는 것은 내가 여기 운집한 여러분 앞에 연설하려고 등단하자 여러분 모두의 얼굴이 갑자기 뭔가 새롭고 흔하지 않은 기쁨으로 빛을 발하였으며, 그리하여 내가 사방에 둘러앉은 여러분의 면면을 보노라면 호메로스의 신들이 마시는 신주(神酒)와 더불어 모든 불행을 잊게 해주는 약에 취한 듯, 꼭 그렇게 나에게 시선을 집중하여, 꼭 그렇게 흥겹고 유쾌하게 환호하였다는 것입니다. 조금 전만 해도 마치 이제 막 트로포니오스의 암굴에서 되돌아 나온 사람들처럼 침통하게 시름하며 앉아 있더니 말입니다. 세상 이치대로 태양이 아름다운 금빛 얼굴로 대지를 내리쬐거나, 매서운 겨울을 보내고 다시 찾아온 봄이 따사로운 서풍으로 불어올 때면, 만물이 새로운 모습으로 새롭게 피어나고 싱그러움을 되찾는 것처럼, 꼭 그렇게 여러분의 표정은 내가 등장하자 달라졌습니다. 실로 위대한 연설가라도 오랜 시간 심사숙고하고 준비한 연설이라야 사람들 마음의 시름을 덜어 낼 수 있는 법이거늘, 나는 단지 등단하는 것만으로도 이를 성취하였던 것입니다.
우선 어쩐 일로 오늘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행색으로 내가 여러분 앞에 섰는지 말하고자 하오니, 여러분은 이 연사에게 귀를 기울여 주기 바랍니다. 물론 귀라 해도 교회 설교자들에게 기울이던 것이 아니라, 다만 장바닥 약장수들, 그들 광대들과 익살꾼들을 향해 세우곤 하던 귀 정도면 족할 것이며, 옛날 미다스 왕이 목동 신에게 기울였던 것이면 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선 것은 여러분 앞에서 잠시나마 교수 흉내를 내볼까 하는 뜻을 내가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쓸데없는 고민거리로 학생들을 괴롭히며 심하게는 여인네들의 집요한 말씨름을 전수하는 오늘날의 교수가 아니라, 그 옛날 ‘현자’라는 치욕스러운 명칭을 거부하며 다만 그저 궤변가이길 자처했던 연설가들을 흉내 내볼까 합니다. 이들의 관심은 예찬 연설로써 신들과 영웅들을 칭송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오늘 예찬 연설을, 헤라클레스에 대한 칭송도 아니요, 솔론에 대한 칭송도 아니요, 다만 나 자신인 우신에 대한 칭송을 듣게 될 것입니다.
나는 누군가 스스로를 칭송한다고 해서 이를 아주 어리석고 뻔뻔한 일이라고 말하는 현자 나부랭이들을 이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습니다. 그들이 정히 그렇게 보길 원한다면, 어리석은 일이라고 칩시다. 그래서 나한테 오히려 딱 어울리는 일입니다. 우신인 나 스스로 자화자찬의 나팔수가 되어 나자신을 노래하는 것만큼 내게 잘 어울리는 일이 또 있겠습니까? 과연 누가 있어 나 우신을 나 자신보다 잘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나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런 나의 행동이 귀족들과 교수들 가운데 천박한 무리들이 해 버릇하는 동일한 행동에 비하면 오히려 점잖다고 생각하는바, 저들은 염치가 비뚤어졌는지 아첨 잘하는 연설가나 혹은 허튼소리 잘하는 시인을 불러 돈으로 고용하여 자기들을 칭송하는 문장, 그래 봐야 말짱 거짓말이겠지만, 그런 문장을 듣습니다. 무모한 아부꾼들이 이들 형편없는 인간들을 신들과 나란히 세우며, 모든 덕목의 절대적인 귀감이다 치켜세우며, 까마귀에게 공작새 깃털을 입히며, 시커먼 이디오피아 사람을 하얗게 분칠하며, 심지어 파리를 코끼리로 만들 때면, 그럴 때면 그들은 짐짓 사양하는 체하면서 공작새처럼 깃털을 보이고 머리 볏을 세우고 있습니다. 적어도 듣는 사람 본인들은 자신들이 그런 것들과는 <완전 8도를 두 번 건너갈 만큼>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 텐데도 말입니다. 각설하고 나는 오래된 속담을 따르고자 합니다. 자기를 칭송해 줄 사람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스스로를 칭찬할 정당한 권리를 갖는다고 한 그 속담 말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인간들의 배은망덕입니다. 아니 차라리 아둔함이라 하겠습니다. 그들 모두는 나를 열심히 모시고 나의 은공을 기꺼워하면서도, 지난 수 세기 동안 달가운 연설을 마련하여 나 우신을 칭송하는 사람은 전혀 없었습니다. 부시리스나 팔라리스, 나흘거리 열병, 파리와 대머리, 그리고 여타 각종 해악들을 칭송하는 연설문을 쓰느라 밤잠을 설치며 등불을 밝히는 사람들은 없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아무튼 여러분은 나로부터 즉흥 연설을 듣게 될 것인바, 애써 꾸미지 않았으며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만큼 더 진솔한 연설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많은 천박한 연설가들은 자신의 연설 능력을 자랑하고자 하지만, 나는 그런 뜻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무려 30년을 공들인 데다가 적잖이 남들의 도움으로 완성된 연설문을 읽으면서도, 남들에게는 겨우 사흘만에 마치 장난삼아 썼다거나 혹은 즉석에서 받아적게 하여 완성하였다고 말하는 연설가들은 제 능력을 자랑하여 잔뜩 젠체하며 그와 같이 말합니다. 나로 말하자면 나는 늘 혀에 걸리는 대로 아무렇게나 말하는 것을 그저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행여 누군가가 기대할까 봐 말해 두거니와, 연설가 말짜들이 하는 것처럼 나 자신을 정의를 통해 설명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한 분류를 통해서는 더더욱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뜻이 널리 퍼져 있는 우신을 정의로써 어떤 한계 속에 가둔다거나, 혹은 세상 만물이 하나 되어 숭배하는 우신을 쪼개고 나눈다거나 하는 건 둘 다 불경한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정의 같은 것을 통해 봐야 겨우 나의 그림자 혹은 겉껍질만을 설명할 뿐인데,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여러분이 여러분의 눈으로 나를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바에야 더욱 그러합니다. 나는 여러분이 보는 바와 같이 이렇습니다. 실로 나는 복을 가져다주는 신으로 로마인들은 나르르 <스툴티티아(Stultitia)>, 희랍 사람들은 <모리아(Moria)>라고 불렀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정의와 분류로써 말해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사람들이 내 얼굴과 겉모습을 보고 내가 누구인지 잘 모른다거나, 혹은 누군가 나를 미네르바 혹은 지혜의 여신이라고 주장할 때에, 영혼을 가장 맑게 비추는 거울인 언어를 보태지 않고 나 자신을 보여 주는 것으로 충분히 반박하지 못한다면 말입니다. 나는 나를 전혀 눈치레로 치장하지 않으며, 가슴속 깊이 품고 있는 것과 반대되는 것으로 겉을 가장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에 가깝게 보여 줍니다. 그리하여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누구도 남의 눈을 속일 수 없으며, 제아무리 그들이 현자의 명함을 달고 있다고 해도, 황제의관을 걸친 원숭이들이나, 사자 가죽을 뒤집어쓴 당나귀들이 돌아다닐 때와 같이 쉽사리 본색이 드러납니다. 제아무리 감추려 해도, 말하자면 길게 뻗친 귀 때문에 미다스 왕의 정체가 발각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에게 커다란 치욕을 안기는 일에 내 이름을 마구잡이로 쓰는 등, 하늘에 맹세코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마저 나를 부끄러워합니다. 이들은 실제로 더없이 어리석으면서도 남들에게는 탈레스와 같이 위대한 철학자인 양합니다. 이들을 <개똥 박사>라고 부르는 것이 정당하지 않겠습니까?
이러고 보니 내가 이 부분분에서도 역시 오늘날의 연설가들과 비슷한 짓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이들은 거머리처럼 두 개의 혀를 가졌음을 보여줄 때 마치 신이라도 된 양 뻐기며, 라틴어 연설문 군데군데, 비록 그것이 있을 자리가 아닌데도, 희랍어 토막말들을 마치 장식처럼 엮어 넣을 수 있음을 대단한 일인 것처럼 떠들어 댑니다. 또한 이들은 외국어가 부족해지면, 낡아 빠진 책들에서 전혀 알지 못할 이런 낱말 네다섯 개를 오벼 내어 연설문에 엮어 넣습니다. 그럼에도 이를 이해하는 사람은 이해하는 자기 모습에 스스로 뿌듯해할 것이며, 정녕 이를 이해 못 하는 사람은 이해 못 하는 만큼 더욱 큰 경외심을 표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남들이 모르는 어려운 말을 할수록 더욱 큰 존경을 받으니, 이는 분명 우리네 어리석은 자들의 커다란 즐거움입니다. 한데 이보다 무모한 사람들은 남들에게 어려운 말도 자신은 거뜬히 이해한다는 것을 과시하려는 생각에 짐짓 못 알아들으면서도, 당나귀들이 귀를 흔들어 대듯 맞장구치며 큰 소리로 웃기도 합니다. 이것은 이 정도 해두겠습니다.
이제 본론을 시작하겠습니다. 아무튼 여러분은 내 이름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게 어떤 별칭을 덧붙여야 하겠습니까? ‘어리석은 자들’ 말고 달리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신이 신자들을 호명하는 데 이보다 더 나은 별명이 있겠습니까? 각설하고 내가 어떤 핏줄에서 생겨났는지가 여러분에게나 마찬가지로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으므로, 이에 나는 무사이 여신들의 도움을 받아 이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나의 아비는 카오스도 아니요, 오르쿠스도 아니요, 사투르누스도 아니요, 이아페토스도 아니요, 그런 쉬어 빠지고 늙수그레한 신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아닙니다. 내 아비는 ‘부유’인데, 물론 헤시오도스와 호메로스가 반대하고, 더 나아가 유피테르도 분노하겠지만, 이분이야말로 바로 인간들과 신들의 아버지입니다. 내 아비가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면, 예나 지금이나 신들이나 인간들이나 뒤죽박죽 모두가 뒤엉키고 맙니다. 내 아비는 자신의 뜻에 따라 전쟁, 평과, 국가, 의회, 재판, 민회, 결혼, 계약, 동맹, 법률, 예술, 축제, 엄숙, 벌써 숨이 턱까지 차올라 간단히 말하자면, 인간 만사 공적인 일이나 사적인 일이나 모든 일을 주재합니다. 내 아비의 재물이 없었다면 시인들이신성을 가졌다고 노래한 수많은 신국(神國)의 백성들은 고사하고, 좀 더 과감하게 말하자면, 선택받은 위대한 신들 마저 전혀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으며, 혹은 존재한다손 치더라도 결단코 찬밥이나 다름없는 형편없는 대접을 받아야 했을 지도 모릅니다. 만약 누군가 내 아비를 성나게 만든다면, 설령 팔라스일지라도 그에게 충분한 도움을 줄 수 없을 겁니다. 반대로 내 아비에게 재가를 받은 사람이라면 번개를 던지는 위대한 유피테르의 목에 밧줄을 걸 수도 있습니다. <나는 이러한 가문과 혈통에서 태어났음을 자랑으로 여긴다>. 그런데 유피테르가 성깔 있고 험상궂은 팔라스를 낳을 때처럼 그렇게 내 아비는 나를 제 머리에서 끄집어내지는 않았는바, 실은 매력적인 만큼 누구보다 명랑한 요정인 ‘청춘’으로부터 나를 얻었습니다. 내 아비는 저 유명한 절름발이 대장장이가 태어날 때처럼 지루한 결혼 침상에서 그녀와 결합한 것이 아니며, 이보다는 훨신 매력적인 일이었는바, 우리 호메로스의 말마따나 ‘사랑의 동침’ 가운데 결합하였습니다. 부유의 신이 나를 낳았으되, 여러분은 내 아비를 아리스토파네스가 그린 부유의 신과 혼동하지 말기 바랍니다. 내 아비는 당시 아리스토파네스의 부유처럼 이미 곧 관에 들어갈 만큼 기력은 쇠잔하고, 앞을 구분하지 못할 만큼 시력마저 미약해진 분이 아니었으며, 아직 여전히 흠잡을 데 없이 건장한 청년으로 열정에 달아 올랐답니다. 이는 내 어미 ‘청춘’때문이었으나, 물론 신들의 잔치에 참석하여 누구보다 많이 마셨고 어느 것보다 독하게 마신 신주(神酒) 탓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여러분이 내 출생 장소를 묻는다면 그것은 오늘날 특히 사람들이 어느 곳에서 첫울음을 터뜨렸느냐, 그 출생지에 따라 귀족 여부를 판가름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태어난 곳은 델로스 섬도 아니며,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도 아니며, 속이 빈 동굴도 아닙니다. 내가 태어난 곳은 행복의 섬입니다. 그곳에서는 씨앗을 뿌리지 않아도 밭을 갈지 않아도 모든 것들이 풍성하게 자랍니다. 행복의 섬에는 아무도 고생할 일이 없으며, 아무도 늙지 않으며, 누구도 병들지 않습니다. 섬의 들판에는 수선화, 접시꽃, 백합, 부채꽃, 혹은 누에콩, 혹은 이런 것들과 같이 별 볼일 없는 푸성귀 따위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대신 몰뤼, 파나케스, 네펜테스, 아마라코스, 암브로시아, 연꽃, 장미, 제비꽃, 히아퀸토스 등 아도니스의 정원에서 자라는 영험한 약초들이 가득 눈과 코를 동시에 사로잡습니다. 따라서 이런 경이로운 땅에서 태어난 나는 울음으로써 생애를 시작하지 않았으니, 태어나자마자 나는 어미를 향해 해맑게 웃었습니다.
나는 크로노스의 아드님이 염소를 유모로 두었던 것을 부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두명의 아리따운 요정들이 젖 먹여 나를 키웠으니 말입니다. 그들은 바쿠스의 딸 ‘만취’와 판의 딸 ‘무지’였습니다. 이 둘을 여러분은 나를 수행하는 일행들과 하인들 가운데서 볼 수 있습니다. 아랫것들의 이름을 여러분이 알고자 하신다면, 하늘에 맹세코 여러분은 오로지 희랍어만을 듣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쉽게 구분할 수 있는바, 눈썹을 치올리고 있는 아이는 ‘자아도취’입니다. 여기 눈웃음을 지으며 연방 손뼉을 치고 있는 아이를 여러분은 보실 터인데, 이 아이의 이름은 ‘아부’입니다. 여기 꾸벅거리며 반쯤 졸거 있는 아이는 ‘망각’이라고 불립니다. 여기 깍지를 끼고 양쪽 팔꿈치를 괴고 있는 아이는 ‘태만’입니다. 여기 장미꽃으로 다발을 엮어 두르고 온몸 여기저기에 향수를 바른 아이가 ‘환락’입니다. 여기 불안하게 눈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는 아이는 ‘경솔’이라고 부릅니다. 여기 피부에 윤기가 흐르고 혈색 좋은 몸뚱이를 가진 아이는 ‘음란 호색’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이렇듯 여러 계집 몸종들과 더불어 여러분은 두 명의 머슴들을 보실 수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를 ‘광란 축제’라고 부르며, 다른 하나를 ‘이사불성’이라고 부릅니다. 말하거니와, 이와 같은 하인들의 충실한 도움을 받아 나는 세상만사가 내 명령에 따르도록 만들고 있으며 심지어 군주들 또한 내게 복종하도록 만듭니다.
여러분은 방금 나를 낳은 부모, 나를 키운 양육자들 그리고 나를 따르는 일행들에 관해 들었습니다. 이제 감히 여신이라는 이름을 도용하는 것이 아니며 그럴만한 자격을 충분히 갖추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여러분이 귀를 기울여 들어 주시기 바라오니, 내가 얼마나 커다란 이익을 신들뿐만 아니라 인간들에게도 가져다주는지를, 그리고 얼마나 널리 내 신적 역량이 미치고 있는지를 말하고자 합니다. 혹자가 분명히 적어 놓은바, 죽을 운명의 인간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야말로 신이라는 증거일진대, 포도주 혹은 식량 또는 유사한 어떤 유용한 것들을 인간들에게 가져다 준 이들을 신들의 의회에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정당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만백성들에게 온갖 것들을 넉넉히 나누어 주는 내가, 그런 내가 어찌 모든 신들 가운데 최고신이라는 이름을 얻고 또 그렇게 여김을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선 생명보다 달콤하고 값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생명은 누구에게서 비롯된다 하겠습니까? 바로 나로부터입니다. 인간 종족을 혹은 생산하고 혹은 번성케 한 것은 강력한 아버지의 따님인 팔라스의 창도 아니며, 구름을 모으는 유피테르의 방패도 아닙니다. 실로 눈짓 하나로도 올림포스 전체를 벌벌 떨게 만드는 신들의 아버지이며 인간들의 왕이신 유피테르도, 그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틈틈이 행하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서 자식을 얻기 위해서는, 끝이 셋으로 갈라진 창 모양의 번개를 내려놓고, 매번 모든 신들을 기겁게 하는 티탄족의 근엄한 표정을 지우고, 배우들이 하는 것처럼 전혀 다른 표정의 가면으로 가엾게도 자신을 숨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편 스토아 철학자들은 자신들이 신에게 매우 가깝다고 주장합니다. 여러분은 세 배 혹은 네 배, 아니 원하신다면 6백 배나 지독한 스토아 철학자를 한 분 지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그분 또한, 염소들이 가진 것과 흡사하면서도 지혜의 상징이라 여겨지는 턱수염은 그대로 둘지라도, 자존심은 분명 꺾어야 할 것이며, 이마의 주름살은 펴야 할 것이며, 강철 같은 원칙은 접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잠시나마 바보스러운 미치광이 짓을 하지 않고서야, 요약하자면 나를 따르지 않고서야 도대체 어떻게 그런 철학자가 아비가 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에게 평소대로 터놓고 이야기하겠습니다. 나는 묻거니와 머리통, 얼굴 낯짝, 젖가슴, 손가락, 귓볼때기 등 이런 의젓한 사지 육신에서 신들이나 혹은 인간들이 생산되었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어리석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여 웃지 않고는 입에 담을 수 없는 신체 부위, 내 생각에는 아랫녘 샅이야말로 인간 종족의 산출지입니다. 이곳이야 말로 경건한 성지요, 세상 만물이 진실로 삶을 획득하는 샘일진대, 어찌 피타고라스의 사원소(四元素)에 비하겠습니까? 그러나 지혜로운 자들이 늘 하는 방식대로 먼저 결혼 생활의 불편함을 심사숙고하였다면, 아니 도대체 혼인의 재갈을 자발없이 덥석 입에 물 남자가 세상에 어디에 있겠습니까? 또 만약 출산이라는 위험천만한 노고를, 양육의 번거로움을 알았는지는 그만두고 최소한 짐작이라도 하였다면, 남자를 받아들일 여자가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생명이 결혼에서 비롯된다고 할 때, 이렇게 결혼은 나를 시중드는 여종 ‘경솔’에서 비롯된 것이니만큼, 결국 생명이 무엇보다 내게서 비롯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기 바랍니다. 또 출산을 일단 경험한 여자들이 새로이 이를 추구하는 것은 내 시종 ‘망각’이 능력을 발휘한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루크레티우스는 베누스 여신을 생명의 시작이라 떠들어 대지만, 정작 베누스 여신 본인도 내 조력이 보태어지지 않는다면 결코 자신의 역량을 십분 발휘할 수 없으며 그저 헛손질만을 할 것이라는 점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술에 취하고 웃음이 가득한 나의 놀이가 있었기에 이들은 말할 것도 없이, 저 잘난 맛에 취한 철학자들이며, 오늘날 이를 대신해서 사람들이 수도승이라고 부르는 자들이며, 자줏빛 관복을 걸친 군주들이며, 경건한 사제들과 그보다 세 번은 더 경건한 교황들도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심지어 시인들이 노래하는 신들 모두가, 넓은 품을 가진 올림포스 산마저도 그들 모두를 다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많은 신들이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이렇게 내가 생명의 씨앗이요 원천이며, 삶이 나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도 작은 것은 아니지만, 내가 입증하고자 하는 것은 실로 생명이 살아가면서 접하는 편리한 것들 모두가 하나도 남김없이 나의 업적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묻거니와, 여기 우리가 누리고 있는 삶은 어떠합니까? 삶에서 쾌락을 제거해 버린다면, 삶을 도대체 삶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박수를 보내 주니 하는 말입니다만, 나는 여러분 가운데 어느 누구도 쾌락 없는 삶이 가능하리라고 믿을 만큼 현명한, 아니 어리석은, 그러니까 내 뜻은, 현명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스토아 철학자들도 결코 쾌락을 멀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속마음을 감추고 짐짓 대중들이 보는 앞에서는 수많은 비난 욕설을 퍼부으며 쾌락을 산산이 부수어 버리지만, 결국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겁을 먹고 도망치고 나면 그들만 홀로 방해받지 않고 오랫동안 쾌락을 즐기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도 하늘에 맹세코 내게 동의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나 우신이 삶을 위해 마련한 청량제와도 같은 쾌락이 없다면, 인생 어떤 부분도 침울하지 않고, 지루하지 않고, 끔찍하지 않고, 무미건조하지 않고, 고생스럽지 않은 게 없다는 점을 말입니다. 이에 관한 증인으로 가장 적임자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을 바쳐도 모자랄 저 유명한 시인 소포클레스인 듯합니다. 그는 나에 관해 저토록 아름다운 찬사를 지었는바, “아무것도 모르고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관해 그럼 이제 하나하나 모든 것을 밝혀 봅시다.
우선 인간이 살아갈 한뉘(?) 인생 가운데 그 초입이 모두에게 무엇보다 행복하고 무엇보다 소중한 때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젖먹이 아이들이 도대체 무엇을 가졌기에 우리는 아이들과 입맞추고 아이들을 얼싸안고 호의로써 돌보아 주는가 하면, 심지어 원수지간인 사람마저 유년기의 아이들에게는 도움을 사양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마도 사려 깊은 자연이 갓 태어난 아이들에게 정성들여 심어 준 천성인바, 순진무구함의 어리석음이 발산하는 매력 때문입니다. 이에 끌려 사람들은 즐거움이라는 보상만 받고도 양육의 고생을 잊으며 양육에서 비롯되는 서로 간의 애정을 칭송합니다. 유년기에 이어 다음으로 다가오는 소년기는 모든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환영을 받으며, 이를 모두가 얼마나 환한표정으로 기뻐하며, 얼마나 진심 어린 마음으로 격려하며, 얼마나 친절하게 도움의 손길을 내밉니까? 그렇다면 소년의 매력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물어봅시다. 내게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면 달리 어디겠습니까? 내 덕분으로 소년은 얼마나 덜 영악하며 그리하여 얼마나 덜 성가시게 합니까? ‘순식간에’라고 말해야 거짓말을 면할 터이니 말하자면, 순식간에 소년은 몸집과 기골이 장대해지고 세상사의 경험과 학습을 통해 성인 남자의 기색을 갖추기 시작하며, 이어 화려하던 영광은 시들고 힘차던 활기는 주저앉고 불타던 열정은 싸늘해지고 넘치던 매력은 사그라집니다. 하여 소년은 내게서 점점 멀어져 가고, 멀어져 갈수록 인생의 생기는 더욱 줄어드는데, 이리하여 ‘짓누르는 노경’에 이릅니다. 즉, 다른 사람들에게는 물론이려니와 자기 자신에게도 혐오감을 일으키는 고통스러운 노령에 다다릅니다. 내가 그와 같이 커다란 고통을 불쌍히 여겨 다시 한 번 인간을 돕지 않았다면, 참아 내기 어려운 노령을 인간들이 견뎌 내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신인들의 노래에 따르면 신들이 변신을 통해 죽어 가는 사람들을 돕곤 하였던 것처럼, 나도 꼭 그런 식으로 마침내 고니에 들어갈 지경에 이른 사람들을 가능한 한 유년기로 변신시켜 돌려보냅니다. 하여 이를 두고 사람들이 노년을 ‘제2의 유년기’라고 부르곤 합니다. 더불어 내가 쓰는 변신의 방법을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이것을 숨김없이 말하겠습니다. 나는 노인들을 내 시종 ‘망각’이 연원하는 샘-망각의 강은 행복의 섬에 위치한 샘에서 시작되며, 흔히 저승에 흐른다는 망각의 강은 겨우 작은 지천에 지나지 않습니다.-으로 데리고 가는데 이곳에 도착하여 노인들은, 망각의 샘물을 길게 한 모금 마실 때마다 조금씩 영혼에 가득하던 근심 걱정이 씻기면서, 다시 유년기의 모습을 되찾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말하는바, 노인들은 분별없는 소리를 하고, 어리석은 생각을 합니다. 분명 그러합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두고 ‘노인이 유년을 되찾았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분별없는 소리를 한다거나 혹은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 것 말고 무엇이 어린아이의 본질이겠습니까? 어린 나이의 지각이 없음이야말로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누군들 어른 같은 지각을 갖춘 어린아이를 괴물처럼 미워하며 저주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조숙하여 일찍 지각이 난 아이가 싫다”라는 속담 또한 대중적으로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또한 반대로 노인이 커다란 인생 경험을 얻은 데다가 여전히 그에 어울리는 판단력을 갖추고 있어 매사에 정확하고 날카롭게 따진다면, 누가 이런 노인네와 어울려 교제하려 들겠습니까?
내 생각에 아무튼 노인은 분별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지각이 없기 때문에 노인은 근심과 걱정에서 자유로울 수있습니다. 지각이 남아 있었다면 괴로워 고통받았을 텐데 말입니다. 때로 노인은 시름을 잊고 즐겁게 술을 마십니다. 정력이 넘치는 나이의 사람들도 감히 이겨 내지 못할 고단한 인생의 무게를 노인은 견뎌 냅니다. 노인은, 만약 아직 지각이 남아 있었다면 아파했을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마냥 즐겁게 플라우투스의 노인과 함께 저 세 글자로 돌아갑니다. 나아가 노인은 내 축복을 받은지라 마냥 행복하며, 친구들과 잘 어울리며, 기분좋게 사람들과 어울려 축제를 즐깁니다. 호메로스에서 아킬레우스는 듣기에 쓰디쓴 독설을 뱉어 냈던 반면, 네스토르의 입에서는 꿀보다 달콤한 연설이 흘러나왔으며, 역시 호메로스에서 노인들은 트로이야 성벽 위에 앉아 ‘백합처럼 아름다운’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입니다. 이런 점에 있어서 노인은 어린 아이를 능가한다 하겠으니, 어린아이는 사랑스럽기는 하되 아직 말을 하지 못하며 삶을 살아가는 데 각별한 활력이 되는 재잘거리는 즐거움을 나룰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에 덧붙여 말하거니와, 노인들은 어린아이들과도 잘 어울리며, 어린아이들은 노인들고 어울려 재미있어합니다. <신은 비슷한 사람들을 늘 하나로 묶어 놓는 법입니다>. 사실 노인들과 아이들은 얼마나 유사합니까? 그저 노인들은 얼굴에 주름이 좀 더 많고, 나이가 좀 더 많을 뿐입니다. 머리카락이 검지 않다는 것, 치아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것, 육신이 왜소하다는 것, 젖 먹기를 좋아한다는 것, 말을 더듬어 한다는 것, 재잘거리기를 좋아한다는 것, 어리석은 소리를 한다는 것, 자꾸 잊어버린다는 것, 생각에 앞뒤가 없다는 것 등, 한마디로 말한다면 모든 점에 있어서 노인과 어린아이는 동일합니다. 점차 고령에 가까워질수록 노인은 그만큼 유년에 더욱 가가워집니다. 그러므로 노인들은 어린아이들처럼 한편 삶의 고단함과 다른 편 죽음의 두려움 너머 이런 것들을 모두 잊고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자, 이제 원한다면 내가 행하는 이러한 호의적 변신과 여타 신들이 행하는 변신을 비교하도록 합시다. 감히 언급하기도 두려운 일이거니와 여타의 신들은 화가 났다 하면 평상시에는 대개 친절하고 호의적으로 대하던 사람들을 나무로, 새로, 매미로 심지어 뱀으로까지 바구어 버립니다.
그렇게 바꾸어 버리는 것이 한 사람의 인생을 망쳐 놓는 일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이에 반해 나는 한 사람을 그의 가장 풍요롭고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돌려놓습니다. 하여 사람들이 현명함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내내 나와 더불어 인생을 보내기만 한다면, 그들은 결코 노인이 아니며 오로지 영원한 유년을 즐기며 행복하게 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마도 철학 공부와 같은 심각하고 힘겨운 학문에 시달려 심각한 표정을 가진 사람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이들은 대개 아직 젊으믜 활개를 펼쳐 보기도 전에 벌써 늙어 버렸는데, 이는 냉철하고 진지한 사유 행위 등을 하느라 골머리를 썩이는 바람에 점차 호흡과 생명의 진액이 고갈되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나를 따르는 어리석은 자들은 토실토실 살이 올라 몸뚱이와 피부에는 윤기가 흐르며,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이 아카르나이아의 돼지처럼 지혜로운 자들과의 접촉이 없는 한 -물론 전혀 접촉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 대개 노년의 불편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인간 삶이 모든 면에서 행복할 수야 없는 노릇입니다.
흔히 사용되는 속담이 이에 대한 가볍게 볼 수 없는 증거인바, 우신은 도망치지 못하도록 젊음을 붙들며 동시에 달갑지 않은 노년을 멀리 두고 늦출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합니다. 브라반트 사람들에 관해서 사람들이 하는 말이 그르지 않은 것이, 다른 민족들에게는 세월이 현명함을 보태어 주는데 반해, 브라반트 사람들은 나이 들어 감에 따라 점점 더 미련해집니다. 따라서 삶에서 누구나 겪게 되는 일로 즐거움을 잃지 않으며, 노년의 고단함에 시달림을 받지 않는 데 있어이들을 따라올 만한 민족은 없습니다. 이들 브라반트 사람들과 지리적으로 가깝고 생활 모습에 있어서도 흡사한 사람들로 내 고향 홀란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나의 열렬한 추종자로서 이들에게 붙여진 별명이 이들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바에야, 이들을 <나의 홀란드 사람들>라는 말로 부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들은 그 별명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혹은 때로 이를 몹시 자랑스러워합니다.
어리석은 인간들이여, 메데아를, 키르케를, 베누스를, 아우로라를, 어디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청춘의 샘을 찾아 나선들, 그들이 여러분에게 청춘을 돌려줄 것 같습니까? 그것은 오로지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며, 나만이 해오던 일입니다. 멤논의 딸이 할아버지 티토노스의 청춘을 연장시켜 주었다는 신비의 진액은 내게 있습니다. 내가 보로 파온을 다시 젊게 만들어 사포와 뜨거운 사랑을 나누게 하였다는 베누스입니다. 내가 바로 사라진 청춘을 되돌려 줄 뿐만 아니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청춘을 찾아 준다는,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약초이며, 그런 주문이며, 그런 샘물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청춘만큼 좋은 것은 없으며 노년만큼 혐오스러운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면, 내 생각에 여러분은 그렇게 좋은 것을 되돌려 주고 그렇게 혐오스러운 것을 멀리 쫓아 주는 나에게 얼마나 커다란 신세를 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으리라 봅니다.
유한한 생명의 인간들과 관련해서는 이 정도로 하겠습니다. 이제 여러분, 하늘을 한번 훑어보겠습니다. 그리하여 나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 신들 가운데 과연 누가 고단하지 않고 조롱당하지 않을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으나, 만약 그런 신을 찾아내는 사람이 있다면, 하여 원한다면, 나의 이름을 걸고 나를 비난해도 좋습니다. 바쿠스 신은 왜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유년을 늘 과시하겠습니까? 그것은 그가 팔라스와는 일체 상관하지 않으며, 잔치와 춤과 합창과 놀이 등으로 진탕 놀며 흥취를 잃지 않고 평생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는 현자라고 불리길 원하지 않으며, 다만 장난과 농담으로 칭송받기를 좋아합니다. 그는 자신의 별호가 멍청이를 뜻하는 속담에 쓰여도 결코 화내지 않습니다. 그 속담이란 바로 <모뤼코스보다 못난 놈>입니다. ‘모뤼코스’라는 별호를 바쿠스에게 사람들이 붙이게 된 것은, 농부들이 즐거운 마음에 장난삼아 신전 입구에 세워진 바쿠스의 좌상을 막 수확한 포도와 무화과로 지저분하게 칠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또한 구희극에서 얼마나 많은 악담을 들어야 했습니까? 사람들은 말하길 “사타구니에서 태어났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어리석은 신이여”라고 하였답니다. 하지만 어리석고 어리석을 망정 언제나 행복하며, 언제나 청춘이며, 언제나 모든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쾌락을 줄 수 있다면야, 도대체 누가 그처럼 되길 마다하겠습니까? 도대체 어떤 사람이 모두에게 두려움을 가져다주는 음흉한 유피테르, 혹은 늙은이의 주책없는 소란으로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드는 판(Pan), 혹은 늘 대장간 일로 지저분하게 재를 뒤집어슨 불카누스, 혹은 고르곤이 새겨진 방패와 창을 들어 위협적인 모습으로 노려보고 있는 팔라스가 되길 원하겠습니까? 어찌하여 쿠피도는 항상 유년입니까? 왜냐하면 그는 헛소리하는 인물이며, 뭔가 제대로 된 것은 행하지도 생각하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찌하여 황금의 베누스는 언제나 변함없이 봄날의 자태입니까? 내 아비의 낯빛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때, 내 친척이 틀림없습니다. 호메로스도 그런 이유에서 ‘황금의 아프로디테’라고 여신을 이름 불렀습니다. 게다가 시인들 혹은 시인들에게 도전하는 조각가들의 말을 따르면. 베누스 여신은 계속해서 웃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로마 사람들이 플로라보다 크게 경배하는 여신이 있겠습니까? 여신 플로라는 모든 즐거움의 어머니입니다. 제아무리 엄격한 신들일지라도 그들의 삶을 호메로스와 여타 시인들에게 묻는다면, 그들 삶 전체가 어리석음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번개를 내리치는 유피테르가 즐기는 사랑의 놀음을 여러분이 익히 알고 있을진대, 다른 신들의 그런 행각은 언급해 무얼하겠습니까? 자신의 성별을 망각하고 줄기차게 사냥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하지 않던 여신 디아나도 엔뒤미온 때문에 시름하지 않았습니까?
사실 신들은 비난의 신 모모스로부터 예전에 자주 그러하였던 것처럼 요즘도 자신들의 처지에 관하여 잔소리를 좀 들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모모스에게 화가 난 신들이 미망의 여신 아테와 함께 모모스를 지상으로 내던져 버렸는바, 모모스가 그 알량한 지혜로서 신들의 환락을 못마땅하게 여겨 비난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추방당한 모모스는 인간들 가운데 누구에게서도 환대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모모스는 군주들의 왕궁에서도 자리 한 자락을 얻지 못하였으니, 거기에는 내 시종 가운데 하나인 아부가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인바, 아부와 모모스의 관계는 양과 늑대의 관계보다 멀다 하겠습니다. 이렇게 모모스가 축출되고 나자, 신들은 예전보다 훨씬 방탕하고 즐겁게 헛짓을 저지르게 되었으며, 이를 비난할 감독관이 전혀 없으므로 호메로스의 언어를 빌리자면 <편안한 삶을 누리게>되었던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로 만든 남근 신 프리아포스가 짖궃게 조롱하지 않은 것이 누구입니까? 메르쿠리우스가 자신의 특기인 도둑질과 속임수로 장난치지 않은 것은 무엇입니까? 심지어 불카누스마저도 신들의 잔치에 참여하여 우스개 장난을 행하는 데 익숙하여 때로는 쩔뚝거리며 돌아다니면서, 때로는 한심한 소리를, 때로는 우스운 소리를 지껄여 잔치의 좌중을 흥겹게 합니다. 사랑을 즐기는 노익장 실레노스는 코르닥스 춤을 즐기곤 하는데, 그 옆에서 플뤼페모스는 트레타넬로 춤을 추며, 또한 숲 속의 처녀들은 맨발로 춤을 춥니다. 염소를 닮은 사튀로스들은 아텔라나를 춥니다. 판(Pan)은 아무렇게나 질러 대는 노래로 모든 신들에게 웃음을 강요하는데, 넥타르에 촉촉이 젖어 들기 시작할 무렵부터는 신들은 무사이 여신들보다 더욱 그의 노래에 귀를 기울입니다. 진탕 거나하게 마신 신들이 술잔치에 이어 무엇을 하고자 할지 말해 무엇하겠습니다. 하늘에 맹세코 어찌나 어리석은 짓을 하는지, 내가 도저히 웃음을 참지 못할 지경입니다. 이쯤에서 이런 일들에 관해서는 하르포크라테스를 상기하여 침묵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쓸데없이 우리가 비난의 신 모모스조차 막지 못한 신들의 작태를 이야기하였다가 이를 코뤼키아의 신이 엿들어 버린다면 낭패가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천상에 거주하는 신들을 내버려 두고 호메로스의 모범에 따라 지상으로 내려가 볼 시간입니다. 여기서도 내가 나의 은총을 베풀지 않으면, 어떤 것도 결코 행복하거나 즐거울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여러분은 세상 만물의 어머니이며 인간 종족을 창조한 자연이 커다란 예지로써 세상 어디고 간에 어리석음을 양념으로 뿌려 두었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스토아의 정의에 따르면 지혜란 합리성에 따르는 것이며, 반대로 어리석음은 정념의 처결에 따르는 것인바, 유피테르는 인간들의 삶을 슬프고 심각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합리성보다는 정념을 더 많이 인간들에게 주지 않았습니까? 대략 정념과 합리성의 비율은 24대 1쯤 될 것입니다. 유패테르는 더욱이 합리성은 두개골의 한쪽 구석에 몰아넣은 반면, 정념은 온몸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도록 뿌려 두었습니다. 또 유피테르는 마치 매서운 폭군과 같은 정념 두 개를 홀몬의 합리성에 대립시켜 놓았습니다. 하나는 분노인바, 분노는 오장육부의 성채를 장악하고 있으며 더불어 생명의 원천인 심장을 휘어잡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정욕인바, 성기에 이르는 아랫도리 제국을 넓게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쌍둥이에 대항하여 합리성이 도대체 기를 펴지 못하는 것은 이미 많은 사람들의 삶이 충분히 입증해 주었습니다. 합리성은 자신에게 허락된 오로지 그것 하나를 목이 쉬도록 외치며 올바른 삶의 명제들을 선전하지만, 그럴 때면 쌍둥이 정념들은 더욱 요란스럽고 어지러운 목소리로 소리 지르며, 마침내 지칠 대로 지쳐 쓰러져 두 손을 들어 항복한 적장 합리성으로 하여금 스스로 제 목에 올가미를 걸게 만듭니다.
더 나아가 자연이 집안 경영을 주관할 과업을 사내들에게 주고, 그리하여 합리성을 약간이나마 남자에게 더 주어 남자가 사내 된 구실을 올바로 할 수 있도록 하였을 때, 다른 문제들에서도 그러하였지만 이 문제에 있어서도 나는 자연에게 조언을 하였으며, 나에게 딱 어울리는 조언을 하였습니다 나는 여자를 남자에게 덧붙여 주도록 말하였는바, 대체로 어리석고 바보스러우며 실로 웃음이 많으며 우스꽝스러운 동물을 남자에게 붙여 주어 집 안에서 함께 어울려 살며 여자의 어리석음으로 사내의 심각한 태도를 누그러드리고 풀어 줄 수 있도록 하자고 조언하였습니다. 플라톤은 여자를 어느 쪽에 두어야 할지, 이성적인 동물로 놓아야 할지 아니면 어리석은 동물로 놓아야 할지를 두고 망설였다고 하는데, 이는 플라톤이 여자라는 성별을 특징짓는 것으로 어리석음을 적시하고자 하였던 것을 뜻합니다. 만약 어떤 여자가 현명하다는 소리를 듣고자 한다면 그것은 두 배로 어리석은 짓입니다. 이는 마치 황소를 체력 단련실로 데려가는 일과 다르지 않으며, 사람들이 속담에 이르듯이 미네르바가 이를 거절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잘못을 두 배로 키우는 일인바, 타고난 천성을 속이는 것도 모자라 본성을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억지로 꾸며 놓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희랍 속담에 이르길, 원숭이에게 제아무리 제왕의 의복을 입힌들 원숭이는 변함없는 원숭이일 뿐이라 하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자는 변함없이 여자일 뿐이라, 다시 말해 여자에게 어떤 가면을 씌우든지 간에 변함없이 여자는 늘 어리석을 뿐입니다.
하지만 우신인 나 자신이 여자이면서도 어리석음을 여자들에게 부여하였다는 이유로 내게 화를 낼 만큼 여자들이 어리석지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올바른 길을 따라 사태를 정확히 따져 본다면, 여자들은 자신들이 많은 측면에서 남자들보다 즐겁게 사는 것이 모두 어리석음 덕분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우선 아름다운 몸매의 우아함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를 여자들은 세상 그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며 아름다운 몸매를 앞세워 세상 모든 독재자들을 상대로 독재자 노릇을 합니다. 여자들의 언제나 반주그레한 얼굴, 언제나 사분사분한 목소리, 곱고 해사한 속살은 흡사 영원한 유년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에 반해 남자들이 가진 노년의 징표라 할 우락부락한 생김새, 까스스하게 털로 뒤덮인 피부와 숲을 이루는 턱수염 등은 실로 지혜가 뿌려 놓은 폐해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다음으로 남자들을 최대한 즐겁게 하는 것을 여자들이 삶에서 추구하는 모든 것으로 삼은 것은 누구 때문입니까? 이런 이유가 아니라면, 그 모든 치장술들이며, 그 모든 화장법들이며, 그 모든 목욕 방법들이며, 그 모든 머리 손질법이며, 그 모든 향유들이며, 그 모든 향수들이며, 얼굴과 눈매와 피부를 매만지고 색칠하고 꾸며 내는 그 모든 기술들은 뭣 때문에 있겠습니까? 이때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사로잡히는 것은 어리석음이 아닌 다른 무슨 이유겠습니까? 남자들은 몸 달아 쾌락의 빵 부스러기 때문에 여자들에게 무엇이든지 약속합니다. 이렇게 여자들이 쾌락을 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여자들이 주는 쾌락을 만끽하기로 결심한 남자들이 그때마다 여자들과 어떤 허튼소리를 지껄이고 어떤 허튼수작을 감행하는지 이를 곰곰이 스스로 생각해본다면 누구도 이런 사실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리하여 여러분은 삶의 최초이자 최대의 쾌락이 누구로부터 시작되는지를 아셨습니다.
몰론 몇몇 사람들은, 특히 나이 든 노인네들은 여자를 밝히기보다는 술을 밝히는 경향이 있어 술잔치에 최고의 쾌락을 두는 경우도 있습니다. 과연 어떤 사람들은 여자가 참석하지 않는 술잔치가 즐거울 수 있다고 생각하나 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리석음이라는 양념이 없다면 술잔치는 결코 흥겨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든 아니면 그저 어리석은 척하는 사람이든 웃음을 돋워 줄 사람이 아무도 술잔치에 참석하지 않을 경우, 돈을 받고 잔치를 흥겹게 만들어 줄 어릿광대를 불러오거나 혹은 밥을 구걸하며 웃음을 파는 사람을 도모해야 합니다. 술자리의 말 한마디 없는 엄숙함과 지루함을 이들이 우스운, 즉 어리석은 재담으로 쫓아내도록 말입니다. 그 많은 맛난 후식들과 진수성찬과 산해진미로 밥통을 채운들, 만약 눈과 귀, 그리고 영혼이 한가득 웃음과 재담과 해학으로 배부르지 않다면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나는 이런 종류의 여흥을 양념으로 덧붙일 수 있는 유일무이한 설계자입니다. 술잔체에서 이제는 관례가 되어 버린 많은 것들, 그러니까 주사위로 술자리의 주인을 뽑는다든지, 골패를 던져 술 마실 사람을 정한다든지, 친구를 위해 건배를 청한다든지, 순번대로 돌아가며 장기를 자랑하며 마신다든지, 도음양을 걸고 노래하고 춤추고 연극을 한다든지 이런 모든 것들은 희랍의 일곱 현인들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며, 진실로 내가 인간 종족의 건강과 유익을 위해 마련해 준 것들입니다. 이런 종류의 모든 것들은, 그것들이 더 많은 어리석음을 갖고 있으면 있을수록 그만큼 인간들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것들입니다. 심각하고 지루한 삶을 과연 삶이라 부를 수 없을진대, 만약 오락거리들로 권태로움을 막아 내지 못한다면 삶은 우울하고 지루하게 끝나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이런 종류의 쾌락을 즐기지 않으며 다만 친구들과의 우애와 교제에서 쾌락을 얻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우정을 어떤 것보다 우선시하며 공기도 불도 물도 이보다 우선할 수 없을 만큼 필수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우정은 대단히 달가워 우정을 빼앗긴다면 마치 태양을 앗긴 것과 같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덧붙여 철학자들이 기꺼이 우정을 매우 훌륭한 것들 가운데 넣는 것을 근거로 들어, 아무튼 불가능한 일이 아닐 테니 말입니다. 우정은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라 주장합니다. 그래서 만약 내가 이런 대단히 훌륭한 것의 시작이요 끝이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나는 이를 증명하는 데 악어의 역설 혹은 가감의 역설, 뿔의 역설 등 이런 유의 논리적 궤변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며, 다만 속담에 이른바 미네르바는 쉬게 하고 손가락으로 이를 입증할 것입니다. 자, 그럼 증명하거니와, 친구들의 잘못을 모른 척하고 덮어 주고 감싸 주는 행위 혹은 탁월한 무능력을 대단히 큰 능력인 양 흠모하여 칭찬하는 착란 증세 등이 어리석음에 가깝다고 여러분은 생각지 않습니까? 어떤 이는 여자 친구의 사마귀에 입 맞추며, 어떤 이는 코맹맹이의 하그나를 사랑하며, 사팔눈의 아들을 아버지는 방울눈이라 두담두는 등 어떻습니까, 내가 주장하거니와, 이는 다른 무엇도 아닌 어리석음이 아닙니까? 세 번이고 네 번이고 반복해서 그것이 어리석음임을 외칩니다. 사람들을 엮어 주며, 엮인 사람들을 친구로 만들어 주는 것은 바로 이 어리석음입니다. 인간들에 관하여 말하자면, 인간들은 누구나 결점을 갖고 태어나며 아주 훌륭한 사람이라고 해도 고작 결점을 가장 적게 갖고 있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리하여 신과 같이 지혜로운 철학자들 사이에 우정은 전혀 형성되지 않거나 혹은 그저 냉랭하고 무덤덤한 우정이 맺어지며 그마저도 극히 소수의 사람들과(가슴에 손을 얹고 엄숙히 말하자면 누구와도 맺어지지 않는다고 말해야 합니다만) 맺어질 뿐입니다.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리석어 여러 가지 일에 있어 우매하게 처신하되, 우정은 서로 닮은 사람들 사이에서만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렇게 깐깐한 철학자 양반들 사이에서 어쩌다 우정의 마음이 생겨난다 하더라도, 어지간해서는 지속적이지도, 오래가지도 못합니다. 이는 이들이 마치 독수리 혹은 에피다우로스의 뱀과 같이 매섭게 친구들의 잘못을 찾아내어 준엄하고 신랄하게 꾸짖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의 잘못에는 참으로 눈이 어두워 자신의 등에 매달린 보따리는 전혀 보지 못하는 존재들이여! 인간은 이렇게 본성적으로 중대한 과오를 면치 못할 처지이며, 생각하고 바라는 것은 그렇게 서로 다르니 그렇게 다양한 오류들과 다채로운 잘못들과 각양각색의 실수들이 인간 삶에는 빠지지 않는 형편인데, 그런데도 누군가 아르고스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면 단 한 시간이나마 우정의 달콤함이 지속되겠습니까? 희랍 사람들이 만한 무던함, 우리가 이를 번역하자면 너그러움이나 어리석음이 없이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어떻습니까? 서로간의 끈끈한 친밀감을 생산하고 양육하는 쿠피도는 기실 눈이 어두워 앞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며, 따라서 그에게는 추한 것도 아름답게만 보이지 않습니까? 쿠피도는 또한 여러분을 자기와 똑같이 만들어 각자 제 것을 아끼게 하였으니, 마치 청춘의 젊은이가 꽃다운 제 애인을 보듯 꼬부랑 영감이 쭈그렁 할멈이 다 된 제 마누라에게 미치도록 열광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사방에서 벌어지고 있으며 웃음을 불러일으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우스운 일이야말로 인간 삶을 즐겁게 하며 인간 세상을 하나로 묶어 주는 힘입니다.
우정에 관해 이제까지 말했던 것은 오히려 결혼에 훨신 더 잘 들어맞습니다. 왜냐하면 결혼이란 모름지기 결코 나뉠 수 없는 결합에 다름 아니기 때문입니다. 불멸의 신이시어, 만약 애교와 희롱, 무지와 관용, 묵과 등 나를 추종하는 것들의 도움을 받아 남녀의 가정생활이 튼튼하게 지탱되지 않는다면, 이혼 혹은 심지어 이혼보다 더 지독한 일이 때로 발생하지 않겠습니까? 맙소사, 만약 처녀가 아리땁고 겉으로는 정숙해 보이지만 결혼하기 훨씬 전부터 어떻게 놀았는지를 알아챌 만큼 남편감이 현명하다면, 세상에 결혼이 얼마나 성립하겠습니까? 또 아내가 남편의 무지와 어리석음에 도움받아 많은 일들을 숨기지 못한다면, 과연 이미 이루어진 결혼일지라도 그것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겠습니까? 실로 이것이 어리석음의 덕택으로 얻어진 혜택일지니, 어리석음이 있어 남편에게 아내가 사랑스럽고 아내에게 남편이 반가운 것이며, 집 안은 조용해지고 가족의 유대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서방질하는 여편네가 눈물을 흘리면 이를 안아 주고 달래 주는 사내는 뻐꾸기 혹은 두견이라 부를까요, 뭐라고인들 아니 불리겠습니까만 아무튼 웃음거리가 됩니다. 이 정도로 모를 수 있다니! 하지만 참으로 행복한 일이 아닙니까? 사납게 끓어오르는 질투심에 이끌려 사내가 일을 쳐 모든 것이 엉망 비극이 되는 것보다 말입니다.
종합해 보자면, 어떤 사회나 어떤 생명의 결합도, 내가 없었다면 어떤 것도 즐겁거나 지속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서로에 대해 잘못 알고 있으며 때로 아첨에 속고, 때로 알고도 눈감아 주고, 때로 어리석으믜 꿀맛에 이끌리기도 하는 마당에, 만약 이럴 수 없었다면 인민은 군주와, 주인은 머슴과, 안주인은 계집종과, 학생은 선생과, 친구는 친구와, 남편은 아내와, 지주는 소작인과, 전우는 전우와, 동료는 동료와 오래가지 못하고 진작 파경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이 정도로 중요한 것들은 전부 언급된 것으로 여러분이 생각할 줄 압니다만, 이보다 훨신 중요한 것들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2.
그럼 묻겠습니다. 스스로를 혐오하는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스스로와 갈라선 사람이 다른 사람과 화합할 수 있겠습니까? 스스로에게도 힘겹고 까다로운 사람이 누군가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겠습니까? 내 생각하거니와, 우신보다 어리석은 사람이라면 모를까, 어느 누구도 가능하다고 대답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제외한다면, 스스로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스스로를 하찮게 여기고 스스로를 증오하는 자를 참아 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런 악덕을 인간들에게 심어준 것은 다름 아닌 자연, 만물의 어머니가 아니라 적지 않은 점에서 만물의 계모라고 할 자연입니다. 특히 남들보다 지혜로운 이들의 마음속에 그것을 심어 놓아, 이들은 스스로의 처지에 깊은 유감을 갖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을 부러워합니다. 이로 인해 결국 인생의 찬란한 아름다움 등 자연의 선물들마저 파괴되어 소멸되기에 이릅니다. 불멸의 신들로부터 아름다움이라는 선물을 받은들, 자기혐오의 해악에 찌든 사람에게 그것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비관에 곪아 터진 애늙은이에게 청춘은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나의 자매라고 불리거나나를 대신하기에 합당할 자아도취가 돕지 않는다면, 누가 삶에 부여된 온갖 재능 가운데, 혹은 혼자서 혹은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무슨 일인들 품위를 -품위는 예의범절을 넘어 모든 행위의 요체입니다- 갖추어 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줄기차게 자아도취는 어디서나 나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자기만족이나 자화자찬만큼 어리석은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또한 반대로 스스로에게 불만을 품고 행한 일이 어찌 아름답고, 어찌 호감을 얻고, 어찌 볼썽사납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자아도취라는 삶의 양념을 제거한다면, 연설가는 곧 지루하기 짝이 없는 연설을 행할 것이며, 음악가는 재미없는 곡을 연주할 것이며, 배우는 온갖 연기에도 불구하고 쫓겨날 것이며, 시인은 제아무리 좋은 시를 쓰더라도 조롱받을 것이며, 화가는 제 그림으로 업신여김을 당할 것이며, 의사는 제 처방으로 굶어 죽을 것입니다. 결국 모두 니레우스가 아니라 테르시테스로, 파온이 아니라 네스토르로, 미네르바가 아니라 돼지로, 달변의 인물이 아니라 말 못하는 어린아이로, 세련된 신사가 아니라 촌스러운 농부로 보이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스스로에게 반하고 스스로 우쭐하여 자신을 내세우는 행동은 남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전적으로 필연적이라 하겠습니다.
한편 행복이 대개 지금 그대로가 유지되길 바라는 데 있다고 할 때, 내 자매 자아도취는 이를 아주 간단하게 성취하였는바, 누구도 제 생김새에, 타고난 재능에, 자기가 속한 혈통에, 자기가 놓인 처지에, 자기에게 익숙한 관습에 불만을 갖지 않으며, 누구나 제 나라를 사랑하여, 아일랜드 사람이 이탈리아 사람과, 트라키아 사람이 아테네 사람과, 스퀴튀아 사람 사람이 풍요로운 섬나라 사람과 기꺼이 조국을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만물의 변화무쌍한 조화 가운데 모든 것을 여일하게 만들어 놓았으니, 이 얼마나 위대한 자연의 보살핌입니까! 하여 자연은 인간들에게 내주는 선물들 가운데 약간은 덜어 내고, 덜어 낸 자리에 자아도취를 조금씩 보태어 놓았던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선물 중에서 가장 큰 선물이라는 분명한 사실을 굳이 말로 옮기는 내가 어리석을 따름입니다.
분명히 말하거니와, 나를 통하지 않고는 어떤 위대한 과업도 성취되지 않으며, 내가 나서지 않는다면 어떤 위대한 기술도 만들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칭송이란 칭송은 모두 받는 업적들의 씨앗이자 원천은 전쟁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이러한 갈등의 결과 양편 모두에게 언제나 이익보다는 불이익이 더 많이 생기지만, 그럼에도 뭔지는 모르겠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전쟁을 감행하는 것보다 어리석은 일이 또 있겠습니까? 그런즉, 전쟁에 빠져드는 사람들은 마치 메가라 사람들처럼 ‘어리석음’에 이끌린 것입니다. 양편에 중무장한 병사들이 줄지어 서고 거친 함성이 울리고 전투 나팔이 찢어지게 울어 댈 때에, 학문에 열중하느라 탈진하여 혈색은 창백하고 생명만 간신히 붙어 있는 현자들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몸집이 크고 살집이 단단하여 과감함은 넘치도록 갖고 있으며 생각은 찾아볼 수 없는 자들이 필요할 따름입니다. 혹시 아르킬로코스의 충고대로 적들이 눈앞에 나타나자 방패를 버리고 달아났던 데모스테네스를 병사로 꼽기를 선호한다면 모를까. 현명하기 이를 데 없는 연설가였으되, 제구실 못하는 병사였던 그를 아무도 병사로 뽑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르길 전쟁에서는 사태 판단이 매우 중요하다고 합니다. 나도 동의하는바, 장군에게 판단력은 중요합니다. 그렇더라도 그것조차 전쟁과 관련된 것일 뿐, 철학자의 지혜는 아닙니다. 그와 상관없는 비렁뱅이, 뚜쟁이, 불한당, 날강도, 무지렁이, 얼간이, 빈털터리 등과 같은 밑바닥 하류 인생들이 그 대단한 일을 수행하는 것이지, 등잔불을 밝힌 현자가 아닙니다. 철학자들이 일상행활 전반에 걸쳐 얼마나 쓸모없는 인물들인지, 아폴론의 신탁에 따르면 유일한 현자였던 소크라테스 본인이 이를 증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상당히 잘못된 판단에 따라, 뭔지는 모르겠으나 대중적으로 무언가를 수행하고자 시도하였고, 그로 인해 모든 사람들로부터 조롱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 남자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용한 판단을 한 것이 없지 않은바, 현자라는 이름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에 대하여 아폴론의 생각을 반박하였다는 점과, 현자는 정치를 멀리해야 한다고 충고한 점입니다. 이왕지사 충고를 하려거든 차라리, 사람다운 대접을 받고자 하는 이는 지혜를 멀리해야 한다고 했어야 합니다. 아무튼 그로 하여금 독배를 마시도록 만든 것은 오로지 지혜가 아닙니까? 그가 구름과 이데아에 관해 철학을 하고, 벼룩의 뒷다리를 측정하고, 각다귀의 목소리를 연구하였지만, 사회생활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한데 스승이 목숨을 걸고 위태로운 변론을 펼치던 순간에 제자 플라톤이 옆에 있었습니다. 이 대단한 변호사 양반은 청중의 야유에 충격을 먹고는 문장을 채 반토막도 제대로 입 밖에 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테오프라스토스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이 사람은 회합에 나가면 입을 다물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 모양이 마치 늑대를 맞닥뜨린 사람 같았다고 하니, 이런 사람이 전쟁터에서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아 줄 수 있겠습니까? 이소크라테스는 타고난 소심증 때문에 감히 입 한 번 벙끗하지도 못했습니다. 로마 수사학의 아버지인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늘 흉해 보일 정도로 소심하고 마치 어린아이와 같이 벌벌 떨면서 연설을 시작하곤 했습니다. 이를 두고 파비우스 퀸틸리아누스는 그것이 닥쳐올지도 모를 위험을 인지한 현명한 연설가의 특징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가 해석한 것이 진실이라고 할 때, 그렇다면 지혜는 분명 일을 도모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임을 그가 고백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벌거벗은 언어로 싸워야만 할 때조차 그렇게 두려움에 얼이 나갈 지경이라면 사태를 무기로 처리할 경우에 이런 사람들을 데리고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말해도 사람들은 플라톤의 -신들이 용서하시길- 비범한 주장을 거듭해서 언급하는바, 철학자가 군림하거나 군주가 철학하는 도시 국가는 행복 도시랍니다. 하지만 역사가들에게 물어본다면 국가에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해악을 끼친 정치가들은 오히려 철학에 몰두하고 문학에 골몰하여 정권을 휘두른 자들이었습니다. 카토 집단 사람들이 이에 대한 충분한 증거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 집안의 한 사람은 정신 나간 포고문으로 국가의 안녕에 위해를 초래하였으며, 또 한 사람은 로마 공화정의 자유를 지켜 낸다고 지혜를 짜내더니 지혜가 지나쳤던지 결국 자유를 철저하게 파괴했습니다. 이들에게 덧붙여 브루투스, 카시우스, 그라쿠스 형제, 그리고 키케로도 로마 공화정에 끼친 폐해로 말할 것 같으면 데모스테네스가 아테네 민주정에 끼친 것 못지않습니다. 나아가 마르쿠스 아울렐리우스 안토니우스가 좋은 통치자였다고 할 때 -그는 철학자였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인기 없는 어려운 존재였으며, 그런 이유에서 사실 좋은 통치자라고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튼 훌륭한 통치자였다고 치고 말하자면 - 그 자신은 어질게 국사를 보았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못난 아들에게 정권을 물려줌으로써 국가에 위험을 초래하였습니다. 언제든 이런 종류의 인물들은 늘 있기 마련인지라, 본인들은 지혜 탐구에 헌신하지만 그 외의 다른 일들에서는, 특히 자식들을 얻는 일에서는 매우 커다란 불행을 겪습니다. 내 생각하기에 이는 자연이 앞날을 내다보고는 지혜라는 불행이 인간들 사이에 더 이상 퍼져 나가지 못하게끔 조화를 부린 것입니다. 키케로에게 형편없는 아들이 있었음은 널리 알려진 바이며, 지혜로운 소크라테스의 아이들은 ‘아비보다는 어미를 닮았다’고 말해지는데 이를 두고 누군가 전혀 터무니 없는 말을 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인바, 그의 아이들은 어리석기 짝이 없었다고 합니다.
칠현금을 손에 든 당나귀 같은 철학자들이 막중국사만 맡는다면 그나마 참아 줄 것이나, 그들이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그렇게까지 무능한 데야 봐줄 수가 없습니다. 철학자를 식사에 초대할라치면, 그는 무거운 침묵 혹은 알아듣지 못할 어려운 질문 공세로 잔치를 망쳐 버립니다. 또 합장 가무단의 연주에 초대하면, 철학자는 마치 낙타가 춤추는 꼬락서니를 합니다. 또 국가적 축제에 초대하면, 예의 심각한 표정으로 백성들의 즐거움을 방해하며 치켜뜬 눈을 어쩌지 못해 현자 카토처럼 극장에 쫓겨나게 될 것입니다. 또 대화에 끼워 줄라치면 그는 갑자기 속담에 나오는 늑대처럼 모두의 말문을 막아 버립니다. 무언가를 구매한다든지, 서로 계약을 맺는다든지, 간단히 말해 일상 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일들 가운데 무언가를 처리하려고 할 때, 여러분은 철학자가 인간 구실을 못 하는 작대기 바보 천치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저 자신을 위해서도 조국을 위해서도 제 식구들을 위해서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이니, 그는 공동체의 일이라고는 전혀 할 줄 모르는 데다가 한술 더 떠 대중의 의견 및 시중의 관습과도 멀고도 먼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럴진대 생활 방식에 있어서나 생각에 있어서나 이렇게 다를 바에야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합니다. 뭇사람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에 어리석음으로 가득하지 않으며, 어리석음에 의하지 않으며, 어리석을 자들과 함께 행해지지 않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만약 어떤 사람이 이런 세상과 맞서고자 한다면, 내 간청하는 바이니, 제발 티몬 처럼 세상과 이별하고 광야로 떠나가 홀로 자신의 지혜를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제시했던 문제로 돌아와 묻거니와, 바위나 참나무처럼 모질던 야만의 인류가 버젓한 국가를 이룬 것은 감언의 유혹 말고 달리 어떤 것이겠습니까? 암피온과 오르페우스의 키타라는 바로 이런 감언의 유혹을 의미합니다. 무엇이 극단으로 치닫던 로마 인민을 달래 국가적 화합으로 이끌었습니까? 철학적 연설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몸통과 팔다리에 관한 우스꽝스럽고 어리석은 우화가 이루어낸 성과입니다. 테미스토클레스도 민란에 대하여 여우와 고슴도치 우화를 들려줌으로써 효과를 보았다고 합니다. 지혜로운 자의 어떤 말인들 세르토리우스가 만들어 낸 사슴 이야기, 스파르타의 입법자가 지어낸 두 마리 개 이야기, 세르토리우스가 제시한 말총을 뽑는 이야기 등이 이룩한 성과를 얻어 낼 수 있겠습니까? 미노스나 누마 왕이 꾸며 낸 이야기들로 어리석은 백성을 다스렸다는 것은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어리석은 이야기에 이끌려 무지막지하고 거센 짐승이라 할 인민들이 움직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반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법률 혹은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에 이끌려 세워진 국가가 있기나 합니까?
도데체 무엇이 데키우스 집안 사람들로 하여금 신들에게 스스로를 봉헌하도록 만들었습니까? 무엇이 퀸투스 쿠르티우스로 하여금 깊이 팬 수렁으로 몸을 던지도록 설득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세이레네 가운데 가장 달콤한 명예욕입니다. 그런데도 명예욕은 헛된 것이라고 비난하는 현자들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공직에 출마하되 인민들에게 속 빈 약속을 남발하고 호의를 얻고자 무상으로 곡물을 분배하며, 우매한 대중들의 환호를 좇되 청중들의 함성에 즐거워하며, 승리의 개선식을 거행하되 마치 기념품처럼 스스로를 인민들에게 보여주며 광장에 조각상이 되어 서 있는 일보다 어리석은 일은 무엇이냐고 현자들은 힐난합니다. 또 이런 어리석음에 덧붙여 현자들은, 위대한 사람들의 성과 이름을 차용하는 일에서부터, 신적인 명예를 하찮은 인간에게 부여하는 일과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독재자를 신의 반열에 올려놓고자 펼치는 국가적 제전을 언급합니다. 그들은 이런 어리석은 일들의 가소로움을 입증하는 데 데모크리토스 하나로 부족하다고 조롱합니다. 누가 이를 부정하겠습니까? 하지만 용맹한 영웅들의 업적, 비범한 문장가들의 수많은 글들을 통해 극찬되었던 업적은 바로 이런 것들로부터 탄생합니다. 이런 어리석음이 국가들을 탄생시켰으며, 어리석음을 통해 제국과 괸리의 종교와 의회와 법원 등이 유지되어 왔으므로, 한마디로 인간 세상 모든 일들은 전적으로 어리석음의 독무대라 하겠습니다.
공예에 관해 이야기를 하거니와, 재능을 쏟아부어 후손들에게 물려줄 다양한 분야를 이룩하도록 사람들을 부추긴 것은 명성에 대한 굶주림 이외에 달리 무엇이겠습니까? 진정 어리석다 할 이들은 숱한 날들을 지새우며 비지땀을 흘리면서도, 이것이 모르긴 몰라도 어떤 것보다 헛되고 헛된 명서을 얻음으로써 보상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와 같이 커다란 어리석음에 힘입어 생활에 편리한 것들을 얻었습니다. 가장 재미있는 것은 여러분이 이렇게 일에 쏟은 타인의 광기를 먹고 산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하여 용기와 근면이 내게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입증하였으니, 이제 신중한 처신 또한 내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밝히면 어떨까 합니다. 혹자는 그것이 불과 물을 서로 섞는 일이라며 비아냥거립니다. 하지만 나는 이를 성공적으로 입증할 수 있다고 봅니다. 다만 여러분이 앞서 그랬던 것처럼 진지하게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준다면 말입니다.
먼저 신중한 처신은 밝은 세상 물정에 기초합니다. 그럼 다음 둘 중에 어느 쪽에 이런 명예로운 이름이 잘 어울리겠습니까? 소심함 때문에 혹은 영혼의 유약함 때문에 아무것도 감행하지 않는 현자이겠습니까, 아니면 애초에 갖지 않은 겸손함에 구애받지 않고 미처 생각하지 못한 위험에 방해받지 않으며 아무 일에나 덤벼드는 어리석음이겠습니까? 현자는 선현들의 책 속으로 도피하여 그곳에서 세상에 물들지 않은 지혜를 익힙니다. 어리석은 자는 세상일에 뛰어들어 가까이에서 겪으며 모험을 감행하며 이로써 -내 생각이 틀리지 않는다면 - 신중한 처신 방법을 얻습니다. 이 점을 호메로스도 비록 장님이지만 알아보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어리석은 자는 겪은 후에 깨닫는다’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사태를 파악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두 가지 것이 있습니다. 영혼에 구름을 드리우는 소심함과, 위험이 나타났을 때 일에 뛰어드는 것을 막아서는 두려움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어리석음은 이런 것들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소심하지 않음과 아무 일이나 감행함이 얼마나 많은 여러 가지 유익을 가져다주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한편 사람들은 세상 물정을 익혀 처신의 신중함을 스스로가 갖추길 원합니다만 여러분, 부디 들으십시오. 그런 신중함을 얻었다고 자처하는 자들이 얼마나 이것으로부터 멀리 있습니까? 무엇보다 알키비아데스가 실레노스에 대하여 말했던 것처럼 인간사 모든 일들은 서로 너무나 다른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습니다. 하여 첫눈에 보기에는 죽어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생명이 움트고 있는가 하면, 반대로 생명인가 싶더니 죽음인 경우도 있습니다. 아름다움인가 싶더니 흉물이며, 부유한가 싶더니 지독한 가난뱅이입니다. 지청구를 듣기 십상이다 싶더니 칭찬을 받으며, 학문을 익혔는가 싶더니 무학무식한 자입니다. 용맹하고 강건한가 싶더니 허약하고 졸렬합니다. 도량이 넓고 사람됨이 장하다 싶더니 더럽고 야박하고 인색한 자입니다. 밝고 쾌활한 듯 보이나 이내 어둡고 심각합니다. 번영하는가 싶으나 이내 역풍에 내몰립니다. 친구라고 여겼으나 적으로 돌아오며, 유익하다 여겼으나 해를 끼칩니다. 짧게 말하자면 실레노스 상자를 열어보면 겉보기와는 전혀 다른 면모가 나타납니다. 이를 내가 지나치게 철학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속담에 이르듯이 미네르바는 쉬게 하고, 쉽게 말해 보겠습니다. 군주가 풍요로우며 나라의 주인이라는 것을 누가 부정하겠습니까? 하지만 실제 정신적 풍요는 전혀 알지 못하여 무엇에도 만족할 줄 모르니, 그는 아마도 누구보다 가난한 사람일 것입니다. 더군다나 온갖 돈 욕심에 끌려다니니 그는 비루한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 하겠습니다. 동일한 여타의 예들을 열거하며 따져 볼 수도 있겠으나,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봅니다. 무슨 주장을 하려는 것이냐 묻는다면, 우리가 무슨 주장을 하려는 것인지 여러분은 좀 더 들어보기 바랍니다. 관객들 앞에서 배우의 타고난 민낯을 밝혀낸답시고 무대에 올라와 한참 연기를 하고 있는 배우들에게서 연극 가면을 벗겨 내려고 시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연극을 모두 망쳐버리는 사람이며, 이런 미치광이 같은 사람을 관객 모두가 돌을 던져 내쫓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갑자기 사태의 새로운 국면이 드러나 무대 위의 여인이 남자였음이 밝혀지고, 무대 위의 청년이 노인이었음이 밝혀지고, 전에는 임금이었으나 이제는 다마 같은 노예로 밝혀지고, 앞서 신이었으나 이제 인간으로 밝혀지면 어떻겠습니까? 이렇게 환영이 제거되면 연극은 통째로 무너질 수밖에 없는바, 관객들의 눈을 사로잡았던 것은 다름 아닌 환영과 화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삶은 한낱 연극이 아니겠습니까? 그리하여 각자는 가면을 쓰고 무대로 나가 연출자가 퇴장을 지시할 때까지 자기가 맡은 배역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연출자가 다른 의상을 갈아입고 무대로 나가도록 명하면, 과거 자줏빛 용포를 입고 군주를 연기하던 배우도 이제는 남루한 옷을 걸친 노예를 연기합니다. 이렇게 세상만사는 일체 환영이려니와, 인생 연극은 그렇게밖에 달리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자가 현자랍시고 하늘로부터 떨어져 모두가 마치 신처럼, 주인처럼 떠받드는 누군가를 가리켜 그가 짐승의 법도에 따라 욕정의 지배를 받고 있으므로 그를 인간 축에 넎을 수 없으며, 욕정을 주인삼아 온갖 추잡한 주인에게 복종하고 있으므로 비루하기 짝이 없는 노예일 뿐이라고 외친다면 어떻겠습니까? 또 세상을 떠난 아비를 잃고 슬퍼하는 누군가를 지목하여, 이승에서의 삶은 오히려 죽음일 뿐이었으며 아비의 삶은 이제부터 시작된 것이므로 이를 두고 슬퍼하는 자를 조롱하라 주장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자기 집안의 혈통을 떠벌리는 누군가를 지목하여, 그가 덕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고 덕이야말로 고귀함의 유일한 원천이므로 오히려 비천하고 상스러운 놈이라고 부르리라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여타의 일들에서도 이런 식으로 그가 말한다면,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를 얼빠진 광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시대와 불화하는 지혜보다 어리석은 것은 없으며, 세태를 거스르는 처신보다 신중하지 못한 것이 없습니다. 오늘의 세태에 스스로를 맞추지 못하고 세상일에 관심을 갖지 않으며 ‘마시든지 떠나든지’라는 주연의 법도에 아랑곳하지 않는 아둔패기는 연극을 두고 연극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반대로 신중하게 처신하는 자는 인간에게 허용된 것 이상을 알고자 하지 않으며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러하듯이 짐짓 눈감아 주고 정중하게 속아 주는 척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사람들의 말마따나, 나 우신에게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를 주장하노니, 저마다 인생 연극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3.
불멸의 신들이시어, 다음을 계속해서 말해야 하겠습니까? 이처럼 커다란 문제에 있어 내심 어쩌면 차라리 헬리콘산의 무사이 여신 들을 모셔오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은 것은, 시인들이 종종 실로 허무맹랑한 일들을 노래할 때에 무사이 여신들을 청하곤 하기 때문입니다. 유피테르의 따님들이여, 나 우신이 길잡이로 나서지 않는다면 누구도 저 위대한 지혜에,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는바 지고 지복의 산성에 들지 못함을 내 말하노니 잠시 곁에 있어 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모든 정열이 어리석음에 기초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것이 어리석은 자와 지혜로운 자를 구별하는 기준이 되는 고로 전자는 정열의 지배를 받으며, 후자는 이성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리하여 스토아학파는 모든 격정을 질병인 양 현자에게서 떼어 놓습니다. 사실 정열은 교육자로서 사람을 지혜의 문턱으로 나아가도록 보살피고, 덕의 수많은 실천에 있어 올바른 행동을 권고하며 박차와 채찍처럼 채근하는데도 말입니다. 그리하여 남들보다 갑절이나 스토아주의자였던 세네카는 실로 용맹하게 소리치며 모든 격정을 현자에게서 벗겨 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사람이라 할 수 없는바 차라리 새로운 신적 존재라고 불러야 마땅할 현자를,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언제고 존재하지 않을 존재를 창조해냈습니다. 보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실로 그는 사람 꼴을 하였으되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며 모든 인간적 감정이 결여된 대리석 조각을 현자라고 내세울 것입니다. 원한다면 물론 스토아학파는 자신들이 창조한 현자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원한다면 연적(戀敵)을 두지 않고 그를 독차지하며 그와 함께 플라톤의 국가에서 혹은 원한다면 이데아 세계에서 혹은 탄탈로스의 정원에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 가운데 이런 종류의 사람을 마치 괴물이나 요괴와 같이 여겨 도망하고 피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든 자연의 감성에 귀를 막고, 감정이 전무하여 사랑이나 연민에 전혀 동요하지 않으며 단단한 차돌 혹은 파로스 섬의 바위처럼 서 있고, 어떤 실수도 저지르지 않으며 어떤 잘못도 범하지 않고, 마치 륑케우스 처럼 어떤 것도 놓치지 않으며 모든 것을 빈틈없이 포착하여 어떤 것도 용서하지 않고, 스스로 자족하여 저 홀로 만족하며 저 홀로 건전하며 저 홀로 군주이며 자유인인바, 한마디로 모든 것에 있어 저 홀로의 생각에 따라 저 홀로일뿐이니 전혀 친구를 갖지도 저 자신이 친구가 되지도 않고, 심지어 신들조차 무시하기 일쑤이며 인간 세상의 모든 일들을 병들었다 비난하고 조롱하는사람을 말입니다. 따라서 저들이 주장하는 완벽한 절대 현자는 짐승 같은 존재일 것입니다. 묻거니와 만일 이를 투표에 부친다면, 어느 나라에서 이런 짐승같은 관리를 선출하며, 어떤 군대가 그런 장군을 선택하겠습니까? 어느 여인이 이런 사내를 남편으로 섬기며, 어떤 손님이 이런 자와 동석하여 잔치를 즐기며, 어떤 노예가 이런 성격의 주인을 모시겠습니까? 이와 반대로 누구든 어리석고 어리석은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을 선출하지 않겠습니까? 저 스스로 어리석은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다스릴 줄 알고, 다른 한편으로 자신과 닮은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할 요량으로 그들의 말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을 말입니다. 아내에게 상냥하고 친구들에게 다정하며, 달가운 손님이자 쉽게 사귈 수 있는 식탁의 벗이며, 궁극적으로 세상만사 여기저기에 참섭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말입니다. 현자라는 신물 나는 것들에 대해서는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나머지 다른 유익한 것으로 말을 돌리고자 합니다.
만약 누군가 하늘 높은 전망대에서 인생을 내려다본다고 한다면 -시인들은 유피테르가 그렇게 한다고들 합니다만 - 아무튼 인간 삶이 얼마나 많은 재앙들로 피폐하고 가련한지, 출생은 얼마나 불결한지, 양육은 얼마나 힘겨운지, 소년은 얼마나 많은 불의에 노출되어 있는지, 청년은 얼마나 많은 노고를 겪어야 하는지, 노년은 얼마나 고단하며, 죽음을 얼마나 엄연한 운명인지, 하여 인생을 살아가는 내내 얼마나 많은 질병들이 떼를 지어 덤벼들며, 얼마나 많은 불운들이 위협하며, 얼마나 많은 재난들이 닥치는지를 알게 될 것이며, 경험하는 일이라고는 오로지 지독하게 쓰디쓴 시련뿐임을 보게 될 것입니다. 또한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르는 악행들인바 착취, 감금, 조롱, 능욕, 고문, 흉계, 기만, 비난, 무고, 사기 등을 볼 것입니다. 나로서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며 마치 ‘모래밭에서 모래알을 셈’하는 꼴입니다. 도대체 인간들은 어떤 업보를 쌓았기에 이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이며, 신들 가운데 누가 분노하였기에 인간들을 이런 고통가운데 태어나게 만들었습니까? 이 문제를 지금 이 자리에서 길게 논할 것은 아닙니다. 아무튼 이런 인생의 형편을 곰곰이 생각해본 사람들이라면, 가히 가여운 예이겠으나 밀레토스의 처녀들이 과연 자살할 만했겠다고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삶의 힘겨움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들은 대개 누구였습니까? 이는 지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디오게네스, 크세노크라테스, 카토 집안, 카시우스 집안과 브루투스 집안은 말할 것도 없고, 굳이 죽으려하지 않았다면 영생 불사할 수도 있었을 키론이 끼어 있기에 말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사람들이 지혜롭게 되면 장차 어떤 일이 벌어질 지를 충분히 예측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향후 진흙이 필요할 것이며, 제2의 프로메테우스가 흙을 빚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나 우신은 부분적으로 무지와 더불어, 또는 일부 아둔함을 통해, 경우에 따라서는 고통의 망각에 힘입어, 때로 행복의 희망을 빌미로, 그러니까 온갖 쾌락들로 꿀을 발라 가며 이런 엄청난 고난 가운데 인생이 목숨을 스스로 끊지 않고 살아가도록 돕고 있습니다. 운명의 여신들이 물레를 더 이상 돌리지 않으며 세상이 인생들을 버렸을 때, 그리하여 이 세상에 머물 하등의 이유가 남지 않았을 때조차 이 몸은 그들이 살아가도록 돕는 것입니다. 누구도 인생의 고단함을 느끼지 못하도록 만들어 주면서 말입니다.
이런 놀랄 것도 없는 나의 능력 덕분에 여러분은 네스토르의 나이에 이른 노인들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그 정도 연령에 이른 노인들에게는 인간다운 면모가 싹 사라지고 없는바, 언어 능력은 떨어지고 사고 능력에도 이상이 생기고 치아는 빠져나가고 머리는 백발이거나 번들하여, 아리스토파네스는 노인네들을 묘사하여 이르되, 냄새나고 구부정하고 볼품없고 쭈글쭈글하고 번대머리에 입은 합죽대며, 고자나 진배없다 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로 인해 노인네들은 아직까지 쾌락을 추구하며 청춘을 구가합니다. 머리를 염색하기도 하고 남의 머리카락을 덧써 대머리를 숨기기도 하고 아마도 돼지에게서 빌려 온 틀니를 끼우기도 하고, 젊은 처자에 빠져 가련하게도 사라을 앓으며 어리석은 연애질에 있어 여느 젊은이를 능가합니다. 이제 관에 들어갈 지경이 된 산송장 같은 노인네도 지참금을 불문하고 셋서방을 용인할망정 -이는 흔히 있는 일이며 심지어 때로 자랑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어리고 어여쁜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이곤 합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재미난 일은 오랜 노년으로 죽음을 바라보며 송장이 무덤에서 다시 나왔다 할 만큼 흉물스러운 할망구들이 노상 입에다 “빛이여, 안녕”을 달고 다닌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보태어 희랍말로 ‘카프룬’이라고 하는바 발정 난 암캐처럼 걸근대는 일, 대단한 화대를 지불하고 청년 파온을 끌어들이는 일, 연지 곤지를 얼굴에 찍어 바르며 거울 앞에 붙어 있는 일, 치부의 음모를 뽑아 정리하며 말라 붙어 볼품없는 유방을 드러내는 일, 감탕질로 늘어진 성욕을 부추기는 일, 술 마시며 이팔청춘 처녀들에 끼어 춤을 추는 일, 사랑의 편지를 쓰는 일 등을 펼칩니다. 이 모든 일은 모두로부터 가소롭다 조롱을 당하며 보시다시피 어리석음의 소치인바, 그녀들은 저 혼자 좋아 즐거워하며 지극한 쾌감을 만끽하며 전진에 온통 꿀을 바른 듯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전적으로 나 우신의 덕분으로 그녀들은 행복해합니다. 행여 모든 것들이 지극히 웃기는 꼬락서니라고 여겨진다면, 그녀들이 이런 어리석음 가운데 삶을 달갑게 보내는 것이 좋겠는지 아니면 속담에 이르듯 목을 맬 대들보를 찾는 게 낫겠는지 고민해 보기 바랍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이런 일들을 불명예스러운 수치라고 하겠지만, 나 우신의 추종자들에게는 하등 문제될 것이 없는바, 이들은 이를 전혀 치욕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설령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전혀 이에 괘념치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돌멩이가 날아와 머리를 때린다면 이는 나쁜 일입니다. 하지만 비난, 욕설, 모욕, 비방 등은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달렸습니다. 전혀 나쁜 일로 여기지 않는다면 그 모두가 대수롭지 않을 수 있습니다. 스스로가 자신을 박수로써 격려한다면 만백성이 야유를 보낸다 한들 그게 무슨 아픔이겠습니까? 아무튼 이런 일을 가능케 하는 것은 오로지 나 우신의 성취라 하겠습니다.
이쯤 되면 철학자들이 들고일어날 것이라 나는 생각합니다. 어리석음을 부여잡고 깨닫지 못한 채 잘못 알고 속으며 무지 가운데 살아가는 것, 그런 것은 불행한 일이라고 철학자들은 말하지만 인간이란 원래 그런 존재입니다. 철학자들이 왜 이것을 불행이라고 부르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태어나 그렇게 양육되고 그렇게 가르쳐졌으니 이것은 모두에게 공통된 처지입니다. 새처럼 날지 못하기 때문에, 여타 가축들처럼 네 발로 걷지 못하기 때문에, 황소처럼 뿔로 무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류가 불행하다고 말한다면 모를까, 어떤 것도 자신의 본성을 따른다 하여 불행하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식의 논리라면, 아름답긴 하지만 문법을 모르며 과자를 즐길 수 없기 때문에 말은 불행하다, 씨름을 즐길 수 없기 때문에 황소는 불행하다 해야 할 것입니다. 말의 입장에서 문법을 모른다고 해서 전혀 불행할 것이 없는 것처럼, 인간의 입장에서 어리석음은 하등 불행일 수 없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천품인 까닭입니다.
그런데도 입씨름에 달통한 철학자들은 주작부언, 인간에게는 특별히 학문적 능력이 주어졌으며, 이에 힘입어 자연이 부여하지 않은 것일지라도 쟁취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자연이 모기는 물론이려니와 들풀과 들꽃을 만들면서는 정신을 바짝 차렸건만, 유독 인간을 만들 차례에는 졸다 실수하여 결국 인간에게 학문이 필요하게 되었다는 식으로, 그들은 마치 를 사태의 진상인 양 설레발을 칩니다. 하지만 학문은 인류에게 분노한 신 테우트에 의해 만들어져 결국 인간들에게 끔찍한 파멸을 초래하였을 뿐 행복에 기여한 바가 없는 물건이며,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어떤 현명한 왕이 솜씨 있게도 글자의 발명에 반대하였듯이, 행복을 위해 발명되었다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을 이루는 데 방해가 되는 물건에 지나지 않습니다. 학문은 인간 삶을 좀먹는 여러 병폐들 가운데 하나인데, 인간에게 온갖 해악을 초래한 못된 정령들이 또한 학문을 창출하였는바, 못된 정령을 가리키는 희랍어 ‘다이몬’은 원래 ‘현자’를 의미합니다. 어떤 학문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다만 자연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던 시절, 그 소박했던 때를 황금시대라 하겠습니다. 모두가 같은 언어를 사용하며 의사소통 말고는 언어로 달리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던 때에 도대체 문법학이 왜 필요했겠습니까? 서로 의견을 달리하여 다툴 일이 없던 그때에 도대체 논리학이 무슨 소용이있었겠습니까? 누구도 타인과 협상을 벌일 문제가 없던 때에 수사학은 무슨 아랑곳이며, 진정 부도덕이 존재해야 이를 다스릴 선량한 법률이 생겨나는 법이거늘 하물며 법학은 있었겠습니까? 당시 사람들은 경건하였기로 불경한 호기심에 이끌려 자연의 비밀을, 천문의 조화와 운동과 영향을, 사물의 숨겨진 원리를 찾아낼 엄두도 내지 않았으며, 필멸의 인간이 주제에 걸맞지 않게 현명해지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늘 저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묻는 탐구의 광기가 아직 마음속에 자리잡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서서히 황금시대의 순수함이 사라져 감에 따라 내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못된 정령들이 학문을 만들어 냈으나, 처음에는 학문 분야는 소수였고, 소수만이 이를 배웠을 뿐입니다. 그런데 바뷜로니아 사람들의 점성술과 희랍 사람들의 백해무익한 경박함이 이를 6백여 개로 늘려 인생이 짊어질 십자가의 형벌만을 보태어 놓았습니다. 실제 문법 하나만으로도 인간에게 형극의 고통을 끊임없이 가하는 데는 충분하고도 넘치는 데 말입니다.
아무튼 이런 학문들 가운데 그래도 가능한 한 대중적인 상식에 접근한 것일수록, 그러니까 어리석음에 가까운 것일수록 더 큰 가치를 인정받습니다. 하여 신학자들은 밥벌이가 없어 굶주리며, 과학자들은 추위에 떨며, 천문학자들은 남우세를 받으며, 논리학자들은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는 상황에 오로지 의사만이 만군(萬軍)의 가치를 누립니다. 의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무식하고 무모하며 경솔할수록 명성이 높으며 훈장을 단 고관대작들에게 큼직한 상을 받습니다. 오늘날 어중이떠중이 아무나 펼쳐 보이는 의학이란 수사학과 다를 바 없는 아첨술의 하위 분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의사 다음 자리는 법률가들에게 주어져 있습니다만, 어찌 보면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도 남습니다. 법률가라는 직업은, 철학자들이 대개 이구동성으로 조롱하는 것처럼, 이런 말을 내 입에 올리긴 싫지만, 멍청한 당나귀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당나귀들의 처결에 따라 크고 작은 문제들이 결정되고 그에 따라 그들의 재산이 점차 자라납니다. 그사이 신과 관련된 온갖 문서들을 샅샅이 파고들어 꼼꼼히 읽어보는 신학자는 콩을 쪼개 먹으며 벼룩과 이를 상대로 생사를 건 전쟁을 치러야 하는데 말입니다.
이렇게 어리석음과의 천연성이 큰 학문일수록 그만큼 만고에 복되고 복되다고 하니, 따라서 일체 학문과 거래를 끊고 다만 자연이 이끄는 대로 따르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인간이 주제넘게 그 경계를 범하는 경우라면 모를까, 자연은 모든 면에서 결코 부족함이 없습니다. 자연은 위장을 싫어하며, 일체 학문적 위해를 입지 않은 자연 그대로가 훨씬 더 행복합니다. 그렇다면 묻거니와, 여러분은 학문이라는 것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자연 이외의 어떤 것도 따르지 않는 동물들이 나머지 다른 동물들보다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신체적으로 모든 감각들이 전혀 주어진 것은 아니지만 꿀벌은 누구보다 행복하고 놀라운 삶을 살지 않습니까? 어떤 건축가가 있어 이들이 만들어 놓은 것과 유사한 건물을 세울 수 있으며, 어떤 철학자가 있어 이들이 이룩한 국가를 건설할 수 있습니까? 반대로 말은 인간적 정서에 가까워지며 인간들의 공동생활에 익숙해졌기에 인간들이 겪는 재앙을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종종 창피를 당하는바, 경주에 참여해서는 ‘늘어진 배를 질질 끌고’ 전투에 참여해서는 승리를 찾아 헤매다 크게 상처를 입고 쓰러져 말 탄 사람과 함께 ‘입으로 대지를 깨물게’ 됩니다. 늑대 이빨을 한 재갈, 가시 돋은 박차, 감옥과 같은 마구간, 가죽 채찍, 작대기, 고삐, 마부 등 말이 사나운 인간을 흉내 내어 무참히 적들에게 복수하려다가 스스로 뒤집어쓴 굴종의 비극을 내가 일일이 언급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무엇보다 바람직한 삶은 파리와 새의 삶이라 하겠습니다. 이들은 인간이 놓은 덫에 걸리지 않는 한 짦은 삶이나마 오로지 자연에 따라 살아갑니다. 새장에 갇혀 인간들의 언어와 소리를 배우게 된 새가 타고난 빛나는 목소리를 잃게 되는 것은 놀라울 것도 없습니다. 어떤 경우든지 자연이 창조한 것은 학문적 가공이 꾸며 놓은 것보다는 모든 측면에서 행복합니다.
이런 뜻에서 수탉의 몸으로 환생한 피타고라스는 최고의 찬사를 누릴 만 합니다. 그는 철학자, 사내, 아낙네, 임금, 평민, 물고기, 말, 개구리 심지어 해면 등 온갖 모습으로 환생을 두루 경험하고 나서, 인간보다 불행한 동물을 없노라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유인즉 여타의 동물들은 자연이 부여한 한계에 만족하고 있는 반면, 인간만은 유별나게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려고 애쓰기 때문이랍니다. 그래서 피타고라스는 인간이 된다면 많은 측면에서 배우고 힘 있는 자보다는 차라리 그렇지 않은 사람이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또한 ‘꾀가 많은’ 오디세우스보다 훨씬 더 현명했던 그륄루스는 차라리 돼지우리에서 꿀꿀거리며 지내길 원했으며 그래서 오디세우스 곁에서 수많은 고생을 감당하길 거부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의견들에 대하여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의 아비인 호메로스도 다른 견해를 갖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는 때로 모든 인간들을 가련하다고 지칭하였으며, 특히 현자의 모범인 오디세우스조차 호메로스는 불운한 자라고 호명하였습니다. 이는 어찌 된 영문입니까? 이는 오디세우스가 꾀가 많고 재주가 뛰어났으며 팔라스 여신에 버금가는 지혜를 가졌으며, 하여 자연의 가르침에서 아주 멀리 벗어나 지나치게 현명한 탓이라 하겠습니다.
지혜를 찾아 골몰하는 자들은 인간들 가운데 행복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실로 두 배나 어리석은 것입니다. 우선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며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조건을 망각하고 불멸의 신들이 누리는 삶을 추구하며 신들에게 덤볐던 거인족처럼 학문의 힘으로 만든 기계로써 자연에 덤벼들어 전쟁을 벌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야생 짐승의 천성인 어리석음을 될 수 있는 한 흉내 내며 결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려 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럼에도 가장 덜 불행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럼 이제 이를 스토아학파의 삼단 논법을 동원해서가 아니라 단지 무식한 예를 하나 들어 증명해 보일까 합니다. 신에게 맹세코 말하거니와, 흔히 멍청이, 바보, 얼간이, 천치 등 내 보기에는 무척 아름다운 호칭들로 이름 불리는 이들은 무엇보다 행복한 존재들입니다. 일견 내가 어리석고 불합리한 주장을 펼치는 듯 보이겠지만, 이것이야 말라고 무엇보다 진리에 가까운 진리입니다.
우선 이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으며, 고로 유피테르에게 맹세코 적지 않은 고통에서 해방된 사람들입니다.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귀신 이야기에 두려워하지 않으며 두억시니나 야차에도 겁을 먹지 않습니다. 목전에 다가온 불행에 두려워 떨지 않으며, 장차 다가올 행복에 들떠 나대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우리 삶에 찌들어 있는 수천 가지 근심 걱정들에 바동거리지 않습니다. 창피한 줄도 모르고, 두려운 줄도 모르며, 야심이나 질투를 모르며, 욕심도 부리지 않습니다. 미욱한 판단력을 보건대 차라리 들에 사는 뭇짐승에 가까우며, 신학자들은 이들이 책임을 묻고 죄를 따질 만한 짓을 하지 않았다 하였습니다. 어리석은 현자여, 당신의 영혼이 전전반측 밤낮으로 사념에 시달릴 적이면 나를 생각할 것이며, 당신이 겪은 온갖 불행들을 한자리에 모을지니 이로써 마침내 당신은 내가 나의 어리석은 종자들에게서 얼마나 많은 고통을 덜어냈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덧붙여 말하거니와 내 종자들은 늘 스스로 즐거워하며 장난치며 노래하며 웃을 뿐 아니라 어딜 가나 모든 이들에게 유쾌함과 흥겨움과 즐거움과 웃음을 선사합니다. 이들은 마치 인간사의 지루함을 신명 나게 풀어 주도록 베풀어진 신들의 선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각자 여러 가지로 타인에 대해 감정을 갖기 마련이지만 누구나 하나 같은 것은 이들을 제 식구인 양 생각하며 기다리며 대접하며 총애하며 보호하며, 필요한 경우에 후원하며, 무엇을 말하든 행하든 벌하지 않고 용서한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누구도 이들에게 상해를 입히려 하지 않으며 심지어 사나운 짐승들조차 이들의 순진무구함을 본능적으로 알아채고 이들을 괴롭히지 않습니다. 실로 이들은 신들의, 특히 나의 충복들인고로 이들 모두가 주변으로부터 그와 같은 명예를 누리는 것은 정당하다고 하겠습니다.
한편 이들은 위대한 군주들로부터도 아낌을 받습니다. 어떤 군주들은 이들이 없으면 식사를 거르기도 하고, 행차에 나서지도 않으며 전혀 혹은 한시도 견디지 못합니다. 적잖이 군주들은 바보들을 너무도 총애하는 나머지 심각한 표정의 현자들보다 귀하게 여깁니다. 후자는 체면 유지상 어쩔 수 없이 옆에 두지만 말입니다. 어찌 군주들이 바보들을 선호하는지, 그 이유는 이론의 여지가 없이 명백하며 그다지 놀랄 것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현자들이 군주들에게 오로지 심각한 것만을 말해 버릇하고, 주저하는 기색 없이 함부로 제 학식을 과신하여 쓰라린 진실을 군주의 여린 귀에 기회가 닿을 때마다 박아 넣으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어릿광대들은 군주들이 언제나 듣기 원하는 것, 농담과 웃음과 폭소와 유흥만을 제공합니다. 또 하나 여러분은 알아야 하는바, 바보들이 제공하는 무시할 수 없는 선물이 있는바, 유일하게 그들만이 순진하게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진실보다 칭송받을 만한 것은 무엇입니까? 플라톤에서 알키비아데스가 속담을 인용하여 술과 어린아이에게 진실을 할당하였지만, 이런 칭송 모두는 마땅히 내가 가져가야 합니다. 이에 대해 에우리피데스의 유명한 언명을 증거로 제시하는 바, 그는 ‘사람이 어리석으니 말하는 것이 어리석다’고 노래하였습니다. 즉 어리석은 사람은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 얼굴에 드러내며, 말로 표현합니다. 하지만 현자들의 혀는 두 개인지라, 에우리피데스가 이를 잘 상기시켜 주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로는 진실을 이야기하며, 다른 하나로는 그때마다 편리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현자들은 흰색도 검다 말하며, 차다 했다가 같은 입으로 금세 뜨겁다 바꾸며, 진심은 가슴속 깊이 숨겨둔 채 거짓부렁을 지어내곤 합니다. 그러므로 군주는 커다란 행복들 가운데 산다고들 하지만, 진실을 말해 줄 사람들 없고 아첨꾼들만을 친구로 가진 군주는 가장 불행한 자라고 할 것입니다.
혹자는 군주들의 귀는 진실을 두려워한다고 주장합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군주들은 현자들을 피하는데, 그들 중에 즐거운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말하기에 서슴지 않을 만큼 자유분방한 자가 행여 끼어 있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런 주장이 일면 그르다할 수 없는 것이, 사실 군주들이 진실을 기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내 어리석은 종자들은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여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말하며 소리 높여 아우성을 지르지만 군주들은 오히려 이를 즐겁게 듣습니다. 만일 똑같은 소리가 현자의 입술을 넘어 나왔다면 이는 목숨을 잃을 일이지만, 바보의 입술을 넘은 경우에는 불가사의한 즐거움을 동반합니다. 왜냐하면 진실은 본래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때 듣는 사람이 마음 상하지 않도록 접근해야 하는데, 이런 능력은 신들께서 오로지 내 어리석은 종자들에게만 허락하였습니다.
아마도 이런 능력 덕분에 바보들은 여인네들에게 값진 즐거움을 제공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타고나길 여인네들은 시시하고 객쩍은 소리에도 즐거워합니다. 그리하여 그녀들은 바보들과 동침하며 때로는 크게 걱정할 일을 잉태하기도 하지만 이마저도 그저 가볍고 즐거운 경험으로 치부해 버리는바, 제가 벌여 놓은 말썽을 감쪽같이 가무리는 데 능수능란한 재주를 타고난 것이 암컷입니다.
다시 바보들의 행복을 얘기하자면 그들은 재미나게 인생을 살고 나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심지어는 자각조차 없이 엘뤼시움의 땅으로 곧바로 떠나갑니다. 그들은 그곳에 와서 계속해서 유쾌한 장난으로 편안하게 쉬고 있는 경건한 영혼들을 즐겁게 합니다.
그럼 여기서 현자의 운명과 바보의 운명을 비교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현자의 표본을 상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현자는 유년 시절과 사춘기를 내내 학문을 익히는 데 쏟아부었을 것이며, 인생의 가장 달콤한 시기마저 밤을 새워 노심초사 진력을 다해 학업에 헌납하였을 것이며, 그 외 인생 모든 부분에서 낙숫물만큼의 쾌락도 맛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늘 가난하고 궁핍하고 쓸쓸하고 우울했을 것이며, 자신에 대한 엄격하고 가혹하며 남들에게 신랄하고 잔혹했을 것이며, 창백하고 수척하고 몸은 쇠약하고 눈은 침침하여 조로(早老)에 조백(早白)하고 조졸(早卒) 또한 면치 못했을 겁입니다. 결코 한 번도 제대로 살았다 할 수 없는 인생인 것을 죽는다 한들 다를 게 무엇이겠습니까? 이게 현자의 탁월한 초상입니다.
이에 ‘스토아 철학자 개구리들’이 내게 다시 한번 개굴거립니다. 그러면서 무엇보다 가련한 것이 광기로다 개굴개굴 소리칩니다. 그런데 어리석음 가운데 가장 뛰어난 어리석음은 사실 광기에 가까우며, 차라리 광기 그 자체라 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정신머리가 어수선한 것과 미친 것을 어찌 다르다 하겠습니까? 스토아 개구리들의 주장은 심하게 길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럼 자, 이들의 삼단 논법을 무사히 여신들의 도움을 받아 분쇄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름 꽤 정교하게 논의를 전개하긴 했지만, 플라톤에서 소크라테스가 베누스 여신과 쿠피도를 둘로 나눈 것처럼, 이들 논리주의 개구리들도 제정신이었다면 광기를 다른 광기와 구별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모든 광기가 그 자체로서 재앙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랬다면 호라티우스는 ‘아니면 사랑스러운 광기가 나를 속이는가?’라고 노래하지 않았을 것이며, 플라톤도 예언자 시인들의 광기를 삶에 절실히 필요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을 것이며, 무녀는 아이네아스의 과업을 미친 짓이라 부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참으로 광기는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저승에서 온 복수의 여신들이 뱀을 풀어 전해 주는 것으로 전쟁의 욕망, 채워지지 않는 황금의 갈증, 추악하고 저주스러운 애욕, 부친 살해, 근친 상간, 신전 약탈 등과 같은 역병을 인간 영혼에 불어넣을 때마다 혹은 복수의 여신들이 양심에 시달리는 죄인을 공포와 귀신 아가리로 위협할 때마다 인간에게 생겨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확신하건대 나 우신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며 모두가 이를 얻지 못해 안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신의 유쾌한 망상이 가슴 졸이는 근심을 모두 치워 버리고, 마음을 온통 온갖 쾌락으로 뒤범벅 도색해 놓을 때 생겨납니다. 키케로는 아티쿠스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러한 정신적 망상을 신이 주시는 선물이라 하며 갈구하였는바, 이로써 제아무리 큰 불행일지라도 극복할 수 있었던 때문입니다. 예전 아르고스의 귀족은 정신적 망상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미쳐서 실제 아무런 공연도 행해지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위대한 비극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고 믿으며 하루 종일 혼자 텅 빈 극장에 앉아 웃으며, 박수치며, 즐거워했다고 합니다. 그는 나머지 일상생활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였으며, 친구들에게는 따뜻하고 ‘아내에게 친절하고, 술독의 봉인이 뜯긴 걸 봐도 성내지 않고 노예들에게 기꺼이 용서를 베풀’사람이었습니다. 이처럼 친족들의 도움으로 약을 먹고 병증을 몰아내고 회복되어 제정신을 찾았을 때 가로되, “여보게들, 댄네들은 나를 살린 것이 아니라, 죽인 것이네. 나의 즐거움을 없애고, 내 영혼의 감미로운 오류를 앗아 버렸다네”라고 하였답니다. 이 사람의 말은 백번 옳습니다. 이렇게 유쾌하고 행복한 광기를 나쁜 것이라 말하고 물약을 먹여 내몰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친족들이 실로 잘못 생각한 것이며 차라리 그가 아니라 친족들을 박새풀 즙으로 치료했어야 할 것입니다.
또 지각의 오류와 정신의 오류를 모두 광기라고 이름해야 할지, 나는 아직 이를 확정 짓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눈이 어두워 노새를 당나귀로 잘못 본다거나, 엉터리 시구를 마치 대단한 명작처럼 칭찬한다고 할 때 이를 광기로 간주할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지각은 물론이고 정신의 오류가 평균보다 오래 지속될 경우에는, 이를 두고 내게 비롯된 광기에 근접하였다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나귀가 우는 꼴을 볼 때마다 놀라운 합창곡을 듣노라고 생각한다거나, 또는 가난뱅이 천출이면서 마치 스스로를 뤼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라고 자처할 경우입니다. 그런데 이를 다시 세분하면, 흔히 무엇보다 본인들에게는 물론 미치지 않은 목격자들에게도 즐거움과 적지 않은 유쾌함을 주는 정신적 오류가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광기는 대중이 생각하는 것보다 넓게 분포합니다. 이를 또다시 구분하면, 광기는 서로 즐거워하며 서로에게 쾌락을 번갈아 선사한다고 할 때, 드물지 않게 여러분도 목도하였겠지만, 더 큰 정신적 오류를 가진 사람이 더 작은 정신적 오류를 가진 사람을 조롱하며, 더욱 다양한 광기를 여럿 지닌 사람일수록 더욱 행복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 우신은 이것이 나로부터 비롯되는 광기라고 판단하는바, 줄기차게 한 세월 현명하게 살며 결코 어떤 광기도 보이지 않는 사람이 인류를 통틀어 과연 하나도 없을 정도로 이런 광기는 광범위하게 퍼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다시 분할하여 내게서 비롯된 광기를 구별하는 차이는 이렇습니다. 호박을 보고 여자라고 믿는 사람들은 이런 광기를 가졌다는데, 이는 일부 특정인들에게 나타납니다. 하지만 서방질에 이력이 안 아내를 두고도 그녀가 페넬로페보다 정숙하다고 맹세하며 행복한 미망에 빠져 스스로를 더욱 대견해하는 사람을 두고 이런 광기를 가졌다 하지 않는 것은 대부분의 남편들에게 이런 일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류에는 들짐승들을 사냥하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들을 물리치며, 소름 끼치는 사냥의 뿔피리 소리를 들을 때면 그리고 사냥개들의 짖어 대는 소리를 들을 때면 믿을 수 없을 만큼 커다란 행복을 느낀다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속합니다. 내 생각에 이들은 심지어 개들의 배설물에서 조차 계피 향기가 난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이어 사냥한 짐승을 해체하는 일에는 또 얼마나 즐거워하겠습니까? 평민들도 황소나 양을 해체할 수 있습니다만, 들짐승을 도살하는 것은 귀족이 아니고서는 불경한 일입니다. 저기 모자를 벗어 놓고 무릎을 꿇은 채 들짐승 해체 전용으로 만들어진 칼을 들고(아무 칼이나 들이대는 짓은 불경한 일입니다) 특별한 자세로 특별한 부위를 특별한 순서대로 경건히 자르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주변에 침묵을 지키며 둘러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수천 번이나 이미 보아 온 광경을 마치 신기하고 신성한 일을 보는 것처럼 쳐다보고 있습니다. 게다가 해체된 들짐승의 살점 한 조각이나 맛볼 수 있도록 허락되기라도 하면 마치 자신이 귀족적 신분에 적잖이 다가선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들짐승을 맹렬히 사냥하고 잡아먹는 일을 통해 얻는 것은 고작 스스로를 들짐승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성과일 뿐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럼으로써 자신들이 왕처럼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또 이들과 매우 유사한 사람들로 건축에 대한 물리지 않는 욕구를 불태우는 건설족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둥근 것을 네모반듯하게 바꾸었다가 다시 네모반듯한 것은 둥글게 바꾸어 놓기를 반복합니다. 이들의 욕망은 도무지 끝을 모르고 적당한 타협을 알지 못하여, 마침내 거주할 공간이나 먹고살 음식물이 전혀 남지 않는 극단적인 궁핍에 처할 때까지 이를 추구합니다. 그런들 어떠합니까? 그저 몇 년 아주 즐겁게 보냈으면 그만이지 않습니까?
내 보기에는 이들에 버금가는 사람들로, 새롭고 경이로운 기술로써 사물의 본질을 바꾸려고 애쓰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사물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제5원소를 찾아 산과 바다를 헤매고 돌아다닙니다. 이들은 달콤한 희망을 먹고 살며 마침내 자신들을 속이고 자신들에게 달가운 속임수를 제공할 무언가를 놀라운 재능으로 생각해 내어, 제아무리 커다란 노고와 비용을 지불할지라도 이를 마다하지 않으며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마침내 자그마한 화로에조차 불을 넣을 수 없는 지경이 될 때까지 멈추지 않습니다. 그들은 희망의 꿈을 꾸길 포기하지 않으며 주변 사람들마저 그들과 똑같은 행복을 꿈꾸도록 만들기 위해 진력을 다합니다. 마침내 모든 희망이 사라져 버릴 때조차도 그들에게는 하나의 문장이 남아 커다란 위안으로 제공합니다. ‘위대한 일이라면 시도해 보았다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이렇게 이들은 그저 위대한 일을 성취하기에는 덧없이 부족하기만 했던 인생의 짧음을 원망할 뿐입니다.
또한 노름꾼들도 위와 같은 부류에 속해야 한다는 것에 나는 전혀 의문을 갖지 않습니다. 이들은 노름에 고약하게 중독되어 골패가 굴러가는 소리를 들으면 듣자마자 심장이 춤을 추며 꿍꽝거리니, 이들을 바라보면, 그 어리석음에 실소를 금할 수 없습니다. 이들은 한판 크게 딸 것이라는 희망에 속아 가진 재산 일체를 도박의 암초에 처박고 난파 지경에 이르니, 이것은 말레아 암초만큼 가공할 것인바 배는 깨어지고 몸은 벌거벗겨져 패가망신 간신히 목숨만 구합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남들에게 우스운 꼴을 당하지 않기 위해, 돈을 따 간 노름판의 승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거짓말로 둘러댑니다. 늙어서 이제는 거의 눈도 보이지 않으면서도 기어코 돋보기를 잡고서라도 노름을 하겠다는데 어찌 하겠습니까? 마침내 나이와 함께 정당하게 찾아온 관절염이 관절을 망가뜨렸음에도 자기 대신 주사위를 노름판에 던질 머슴을 품삯을 주고 고용한다는데 또한 어찌하겠습니까? 이때까지 노름은 어리석은 장난이지만, 대개 그러하듯 격노로 변질되고 실성의 단계에 이르면 나 우신이 관장하는 영역을 벗어나게 됩니다.
또 우리들과 같은 부류에 속한다고 전혀 의심할 수 없는 인간 유형들이 있는바, 이들은 놀랍고 기이한 사건 사고를 이야기하거나 듣기를 즐기는 자들입니다. 귀신, 원혼, 도깨비, 망령 등 이런 유의 수천 가지 괴상망측한 이야기를 아무리 많이 들어도 이들은 만족을 모릅니다. 이들은 어떤 얘기든 진실에서 멀리 떨어질수록 더 기꺼이 진실이라 믿으며, 귓구멍을 살살 간질이는 달콤한 쾌락을 더욱 강렬하게 느낍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사실 지루한 시간을 때우는 데 놀라운 효험을 가졌을 뿐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밥벌이가 되기도 하는바, 특히 사제들과 설교자들에게 그러합니다.
이들과 아주 가까운 사람들로 어리석지만 재미있는 미신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바, 만약 폴뤼페무스와 같은 거인 성자 크리스토포루스의 나무 조각상이나 어떤 그림을 보면 그날은 죽지 않는다는 소리를 믿으며, 만약 성녀 바르바라의 조각상에 경배를 올리며 정해진 주문을 외우면 전쟁에서 무사히 돌아올 수 있다는 소리를 믿으며, 만약 성자 에라스무스에게 정해진 기일 동안 정해진 밀랍초를 정해진 기도문과 함께 바치면 머지않아 부자가 될 것이라는 소리를 믿습니다. 또 마치 제2의 히폴뤼토스를 만들어 내는 것처럼 성자 게오르기우스를 제2의 헤라클레스로 만들어 놓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성자 게오르기우스의 말을 마구와 패물로 경건하게 장식할 뿐만 아니라 새롭게 마련한 작은 예물을 가져다 바치며 은총을 기원합니다. 또한 이들은 성자 게오르기우스가 쓴 청동투구에 걸고 맹세를 하는 것을 진정 군주다운 맹세라 여깁니다.
그럼 면죄부라는 거짓 물건을 받아 들고 스스로를 격하게 위무하는 이들은 어떻습니까? 이들은 연옥에서 보내야 할 기간을 물시계로 정확하게 몇 세기, 몇 년, 몇 달, 몇 날, 몇 시간 단위까지 수학 공식에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계산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무슨 마법의 주문과 기도문 -이런 것들을 성직에 있는 사기꾼들이 재미 삼아 혹은 돈벌이를 위해 생각해 냈습니다-을 달달 외우며 재산, 명예, 쾌락, 풍요, 무궁한 건강, 장수, 정력이 넘치는 노년을 스스로에게 기원합니다. 더불어 이들은 마침내는 천상에서 예수님 옆자리까지 소원하는데 물론 그 자리엔 최대한 나중에 가기를 바라는 즉, 악착같이 매달려도 도저히 떠나지 않을 수 없을 때까지 현세의 쾌락을 누리다가 곧바로 천국의 쾌락을 누리길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장사꾼 혹은 군인 혹은 법률가 등은 수많은 약탈로 얻은 재산을 한 푼이나마 지출함으로써 그들이 평생 저지를 레르나 늪처럼 깊은 죄악을 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거짓 증언, 방탕, 폭음, 결투, 살인, 사기, 배신, 반역 등이 매매 증서 한 장이면 소멸되며, 이렇게 소멸됨으로써 정결케 되었으니 다시 범죄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그들은 믿습니다.
그럼 성경 <시편>의 저 유명한 일곱 행을 매일 반복해서 읽으면 자신에게 그보다 더할 수 없는 구원의 행복이 도래할 것이라 믿는 사람들은 얼마나 어리석은, 아니 얼마나 행복한 것입니까? 영리하지 못하고 실없는 악마가 성자 베르나두스를 재미 삼아 골려 주려다가 불행히도 제 꾀에 넘어가 이 마법의 시행을 알려 주었다고 전합니다. 이는 우신인 나마저도 얼굴이 붉어질 만큼 부끄러운 어리석음이라 하겠는데, 어리석은 대중은 물론이고 종교에 관해 강론하는 사람들마저 이를 믿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으로 이 또한 거의 같은 경우인바, 각 지역마다 나름대로 신앙하는 성자를 두며, 성자들에게는 나름대로 고유한 영역이 할애되며, 나름대로 고유한 성인 축일이 할당됩니다. 그리하여 어떤 성자는 치통을 낫게 해주며, 어떤 성자는 출산을 수호하며, 어떤 성자는 도둑맞은 물건을 되돌려 주며, 어떤 성자는 난파 직전의 배에 구원의 빛으로 나타나며, 어떤 성자는 가축 때를 지키는 등 각각의 성자들이 여러 일들과 관련하여 그러합니다. 성자들을 모두 열거하기에는 너무 길겠기에 이만 줄입니다만, 어떤 성자는 혼자서 여러 가지 일들을 돌보기도 합니다. 특히 성(聖)처녀 성모 마리아가 그러한바, 몽매한 대중들은 그녀의 아드님에게보다 오히려 그녀에게 더 많은 힘을 부여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성자들로부터 소망하는 것은 전부 나 우신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여느 교회의 벽과 천장을 온통 채우고 있는 감사의 글들을 살펴보건대, 여러분은 그 가운데 어리석음을 쫓아 주었다거나 새털만큼이나 좀 더 현명하게 해주어 감사핟는 말을 적은 쪽지를 본 적이 있습니까? 어떤 이는 난파하였으나 무사히 헤엄쳐 나왔음을, 어떤 이는 적들의 칼에 찔렸으나 살아남았음을 감사합니다. 어떤 이는 다른 사람들은 계속 싸우고 있을 때 자신은 용감하게 그리고 다행히도 도망했다 하고, 어떤 이는 십자가에 처형될 위기에 놓였으나 도둑놈들을 수호하는 성자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여 더럽게 넘치는 풍요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의 짐을 계속해서 덜어 줄 수 있게 되었다 합니다. 어떤 이는 옥사를 깨고 도망쳤다. 합니다. 어떤 이는 의사들이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열병을 털고 일어났다 하고, 어떤 이는 준비하는 일에 시간과 돈을 들인 아내에게는 슬픈 일이지만 독약을 마셨으나 해가 되지 않고 오히려 체증을 해소하는 데 약이 되었다 합니다. 어떤 이는 마차 전복 사고에서 말들을 무사히 건졌다하고, 어던 이는 집이 무너졌으나 살아남았다 합니다. 어떤 이는 본서방에게 걸렸으나 도망쳤다 합니다. 이렇게 누구도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게 해주어 감사하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온갖 것들로부터 도망쳤음에 감사하지만 나 우신에게서 벗어났음을 감사하는 사람은 없은즉, 어리석은 것만큼 달가운 것은 없다 하겠습니다. 어쩌다 내가 이런 미신의 바다에 이르게 된 것입니까!
내게 1백 개의 혀와 1백 개의 입이 있고
무쇠의 목소리가 한들, 모든 형태의 어리석음을,
어리석음의 모든 이름을 열거할 수 없을 것이네.
아무튼 기독교인들은 하나같이 이런 어리석은 행동들이 차고 넘치는 삶을 내내 살아가고 있으나, 성직자들은 이로부터 무언가 이문이 생긴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어리석음을 기꺼이 허락하며 심지어 조장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와중에 똑똑한 체하는 자가 미움을 사게끔 무언가 사태의 진실을 떠들어 대며 "바르게 살면 사후의 고통은 없을지니, 돈으로 할 것이 아니라 네가 만약 악행을 고백하고, 눈물로 참회하며, 불철주야 기도하며 금식하고 생활 방식을 완전히 바꾼다면 죄가 사해질 것이다. 또한 그리하여 네가 성자의 삶을 따라 살아가면 성자는 네게 기뻐할 것이다"라고 말할 때, 내 이르노니, 이런 말 혹은 이런 종류의 말을 현자랍시고 지껄일 때, 중생들의 영혼은 얼마나 행복에서 멀어져 얼마나 큰 두려움에 떨게 되겠습니까?
그럼 다음으로 또 같은 광기에 속하는 무리로 살아생전 어떤 상여를 타고 갈지를 부지런하게도 정해 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얼마나 많은 횃불잡이를, 얼마나 많은 상복 행렬을, 얼마나 많은 소리꾼을, 얼마나 많은 곡꾼들을 들일 것인지를 일일이 정하는데, 마치 죽어서도 자신들이 장례식 광경을 지각할 수 있는 것처럼, 혹은 그리하여 장례식이 성대하게 치러지지 않으면 망자일망정 망신을 당할 것처럼, 막 선출된 조영관(造營官)이 국가 축제 혹은 잔치를 준비하면서 그러하듯 못지않은 열성을 보입니다.
바쁘게 가야 하지만, 그럼에도 침묵으로 그냥 지나쳐 버릴 수 없는 무리가 있으니, 이들은 밑바닥 막일꾼들과 전혀 다르지 않으면서도 공허한 귀족 호칭에 스스로 기뻐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집안이 아이네아스에 혹은 브루투스에 혹은 아륵투루스에 이른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조상들의 조각상과 초상화를 여기저기에 전시합니다. 이들은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등 고래의 조상들을 이름까지 하나하나 외웁니다. 하지만 이들 자신은 벙어리 조각상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오히려 이들이 세워 놓은 조각들이나 초상들보다 한참 뒤떨어진다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달콤한 자아도취의 도움으로 행복한 삶을 영위합니다. 한편 이런 들짐승 같은 무리들을 마치 신처럼 떠받드는,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아도취는 실로 놀라울 만큼 다양하게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있으므로, 마치 매우 드문 일인 것처럼 이런저런 예를 들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 어떤 이는 원숭이보다 못생겼으면서 스스로를 마치 니레우스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는 걸음쇠로 그린 동그라미 안에 작대기 세 개를 그려 넣고는 바로 스스로를 에우클레이데스라고 자처합니다. 또 어떤 이는 '뤼라를 가진 당나귀'처럼, 아니 그보다 더 심하게 암탉을 물어뜯는 수탉 같은 소리를 내면서도 자신이 제2의 헤르모게네스라고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보다 훨씬 더 재미있는 종류의 어리석음으로, 자기 하인들이 가진 재주를 마치 자기의 재주인 양 자랑하고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세네카의 편지에 등장하는 두 배로 행복했던 부자가 바로 그런 사람일 텐데, 이 사람은 무언가 재담을 지어내어야 할 때면 이름을 불러 줄 하인들을 가까이 대령하였으며, 또 살아 있는 것이 기적이라 할 약골 주제에 주먹다짐이라도 벌어질 경우 이를 마다하지 않은 것을 이를 대비하여 집안에 우락부락한 힘 좋은 하인들을 여럿 두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예술가들의 자아도취에 관해서 말을 보탤 것이 있겠습니까만, 이들로 말하자면 모두 가운데 가장 독특한 종류의 자아도취에 빠진 자들입니다. 여러분은 이들 가운데 예술적 재능에 있어 남들에게 뒤진다는 것을 인정하느니 차라리 물려받은 땅을 포기하겠다는 자들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특히 배우, 가수, 변사와 시인에게서 두드러지며, 이들은 능력이 뒤떨어지고 변변치 않을수록 더욱 오만하게 굴며, 더욱 큰소리치며 자신을 떠벌립니다. '그 입에 그 나물'이라 하였던가, 내가 주장하다시피 사람들 대다수는 나 우신에 중독되어 있기 때문에 형편없는 것일수록 더 많은 추종자들이 들끓는 것이며, 그리하여 제일 볼품없는 제주가 제일 큰 군중을 끌어들이게 됩니다. 그런즉 서툴수록 남들에게 더 많은 경배를 받는 현실에서, 기예에 서툴면서도 저 스스로 이에 만족하지 누가 굳이 재능을 올바로 갈고닦고자 하겠습니까? 더욱이 올바른 도야는 우선 무엇보다 오랜 수고를 요구하여 염증을 느끼게 하고 두려움을 키우며, 결국에는 이해하는 소수만을 즐겁게 할 뿐이니 누가 이를 배우려 하겠습니까?
그런데 나는 자연이 인간 개개인에게 자아도취를 갖도록 한 것 말고도 민족과 국가 하나하나에게도 일종의 자아도취를 심어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하여 브리타니아 사람들은 여타 민족들보다 용모에 있어서나 음악에 있어서나 혹은 정결한 음식에 있어서 탁월하다고 주장하며, 칼레도니아 사람들은 귀족적 혈통이나 왕족 혈통에 있어 그리고 논쟁술에 있어 자신만만하며, 갈리아 사람들은 예의범절의 세련됨을 내세우며, 파리 시민들은 신학에서의 성과가 다른 누구도 아닌 오로지 자신들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뻐깁니다. 이탈리아는 문학과 수사학이 자기네 것들이라 권리를 주장하며 이런 권리를 들어 인류 가운데 자신들만이 유일하게 야만의 태를 벗었다고 외치며 스스로 매우 대견해하고 있습니다. 이런 행복으로 치면 로마 시민들이 제일 앞에 설 것인바, 이들은 고대 로마의 영광을 아직도 달콤한 꿈처럼 즐기고 있습니다. 베네치아 시민들은 스스로가 명문 귀족의 혈통을 이었다는 생각에 행복해합니다. 희랍인들은 여러 학문을 만들어 낸 장본인들이며 아직도 옛 학문적 영웅들의 명성이 자신들에게 남아 있다고 주장합니다. 투르크 사람들을 포함하여 실로 그 주변에 거주하는 야만인들조차 종교가 잔실에게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며, 기독교인들은 다만 미신에 매달린 사람들이라고 조롱합니다. 그리고 이들보다 훨씬 웃기는 유대인들은 아직도 여전히 자신들의 구세주를 기다리고 있으며 모세를 오늘날까지 질기게 떠받들고 있습니다. 히스파니아 사람들은 전쟁술의 탁월함을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으며 게르마니아 사람들은 자신들이 몸집이 큰 것과 마법에 밝음을 내세웁니다. 내 생각에 여러분도 아시리라 믿으니 일일이 열거하지는 않겠으나, 이 세상 여기저기에 개인들에게나 민족들에게나 하나같이 자아도취가 만연해 있습니다. 그런데 자아도취에게는 아부라는 동생이 있습니다.
자아도취는 자기 자신을 어루만지는 것에 다름 아니며,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것을 해주는 경우에 이것을 '아부'라 합니다. 오늘날 아부를 좋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지만, 그래도 아부는 사태 자체보다는 언어에 현혹되는 사람들 사이에서 여전히 힘을 발휘합니다. 사람들은 아부와 진실함이 서로 모순되기 때문에 도저히 가까울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말 못 하는 짐승들을 예로 살펴보자면 그런 것도 아닙니다. 개처럼 착 달라붙으면서도 진실한 짐승은 또 어디 있습니까? 다람쥐처럼 알랑거리며 사람에게 진실한 동물은 또 무엇입니까? 설마 포학한 사자들이나 야성의 호랑이들 혹은 거친 표범들이 인간 삶에 더욱 유익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테니 말입니다. 물론 전적으로 해악을 끼치는 아부도 있는바, 이로써 몇몇 악의적인 냉소주의자들은 상대방을 파멸로 이끌기 위해 가련한 사람들을 유인합니다. 하지만 나 우신을 따르는 아부는 호의적이며 선량하며, 아부와 반대되는 직언, 혹은 호라티우스의 말처럼 우악스럽고 신랄하고 귀 따가운 사설보다는 훨씬 덕에 가깝다 하겠습니다. 이런 아부는 낙담한 영혼을 일으켜 세우며, 어둡고 우울한 사람들에게 활기를 주며, 풀 죽어 늘어진 몸에 자극을주며, 멍청하게 넋이 나간 인간을 일깨우며, 병에 지친 육신에 고통을 덜어 주며, 감사납고 매몰찬 인사를 나긋나긋하게 녹이며, 사랑을 맺어 주며 맺어 준 사랑을 붙잡아 둡니다. 또 어린 학생들이 책을 붙잡고 공부하도록 부추기며, 노년을 는실난실 들뜨게 하며, 송덕을 가장하여 심사 불편이 없게 군주들을 훈계하여 가르칩니다. 정리하면 아부는 누구나 스스로에게 흡족하고 기뻐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인바, 이는 행복의 한 부분 혹은 행복의 요체라 하겠습니다. '노새끼리 서로 가려운 데를 긁어 주는 것'보다 제격인 일이 있겠습니까? 아부가 모든 존경하는 웅변술의 큰 부분을 차지하며, 의학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며 문학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주장하지 못할까마는, 아무튼 아부는 인간 삶 전체를 달콤하게 하는 꿀이며, 살맛을 북돋는 양념입니다.
사람들은 거짓에 속는 것이 불행한 일이라 합니다만, 실은 거짓에 속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불행입니다. 인간 행복이 사태의 진상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엄청난 착각입니다. 행복은 허상에 달렸습니다. 인간 만사는 변화무쌍하고 황홀난측하여, 철학자들 가운데 가장 덜 오만하다 할 나의 아카데미아 학파 사람들이 옳게 판단하였던바, 무엇 하나 제대로 분명한 사태를 파악하기란 아예 무망한 일이며, 설혹 무언가 사태의 실마리가 엿보였다 한들 이는 드물지 않게 즐거운 인생에 오히려 성가실 뿐입니다. 더군다나 인간의 영혼은 진상보다는 차라리 거짓에 끌리기 쉽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 이에 대한 명백한 증거를 요구한다치면, 교회의 설교 시간을 보기 바랍니다. 설교자가 심각한 말씀을 전하려고 하면, 사람들은 모두 꾸벅거리며, 하품하며 싫증을 냅니다. 사제의 사설-아니 설교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내가 실수했습니다-에 흔히 있는 일인바 꾸부랑할망구의 옛날 이야기가 피어오르면, 사람들은 모두 눈을 번쩍 뜨고 허리를 펴며 입을 벌립니다. 심지어 성인이 이야기를 술술 재미 지게 풀어내거나 솔깃하게 지어낸다면, 이에 대한 예로 여러분은 게오르기우스 혹은 크리스토포루스 혹은 바르바라 등의 성인을 떠올리 수 있을 터인데, 사람들은 이 성자를 베드로 혹은 바오로 혹은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경건하게 경배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것은 지금 말길에서 벗어나는 것이니 이쯤 합시다.
그러니 행복은 얼마나 적은 비용으로 가능합니까? 사태의 진실을 파악해야 한다면 이것은 대단한 수고를 지불해야 하는 일이며, 문법과 같이 하찮은 일조차도 값싼 것은 없습니다만, 거짓은 제일 쉬운 일인바 가진 허상만큼 혹은 가진 허상보다 훨씬 큰 행복에 이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소금에 절여 삭힌 고기를 먹으며, 어지간한 사람도 그 역겨운 냄새를 견딜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마치 천상의 음식이라고 생각한다면, 내가 묻거니와 이 사람의 행복은 무엇에 달린 것입니까? 반대로 어떤 사람이 별미라할 상어 알젓을 메스꺼워한다면, 이 사람의 행복은 무엇에 달린 것입니까? 또 만일 무지막지하게 못생긴 아내를 보면서 마치 베누스 여신과 경합을 벌일 만큼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남편이 있다면 이는 진실로 아름다운 아내를 가진 것과 진배없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만일 주홍과 노랑으로 아무렇게나 그려 놓은 그림을 쳐다보며 경탄을 금치 못하여 아펠레스 혹은 제욱시스의 그림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실제 저 유명한 화가들의 위대한 그림을 비싼 돈을 치르고 구입하여 그림 감상에서 그저 엇비슷한 쾌락을 얻는 사람보다 훨씬 행복하다고 할 것입니다. 나는 나와 같은 이름을 쓰는 이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새로 얻은 부인에게 선물로 인조보석을 선물하면서 청산유수와 같은 말솜씨를 발휘하여 그 보석이 천연의 진품 보석이며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귀한 것이라고 믿게 만들었습니다. 내 묻거니와, 그런 보석으로 눈과 영혼을 충분히 배부르게 먹이고, 가짜 보석을 마치 굉장한 보물인양 감추고 아낀다면 가자든 진짜든 여인에게는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남편은 아내의 착각을 이용하여 비용을 아꼈으며, 많은 돈을 주고 사들인 선물로 아내를 감동시킬 때와 마찬가지로 아내를 자신에게 붙들어 두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습니다. 또한 플라톤의 동굴에 묶여 있는 사람들이 온갖 다양한 사물의 그림자와 모상에 경탄을 금치 못하며, 진상이 무엇인지 알기를 원하지 않고 지금 그대로 만족한다고 할 때, 동굴로부터 탈출하여 세상 온갖 사물들의 진상을 알게 된 현자와 이들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다고 여러분은 생각합니까? 루키아노스가 이야기한 부자 뮈킬로스가 만일 영원히 황금의 꿈을 꿀 수 있었다면, 그는 결코 다른 행복을 바라지 않았을 것입니다.
행복을 얻는 데 차이가 전혀 없으며,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나는 차라리 허상에 빠진 어리석은 쪽을 선택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먼저 허상을 선택한 경우가 훨씬 비용이 들지 않는 것이 분명한즉,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믿어 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허상의 억견은 대다수의 사람들과 함께 나눈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소유이든지 함께 누릴 사람들이 없다면 하나도 즐거울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나 지혜는 설령 있다 한들 매우 소수에게만 국한되어 있음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수백 년 동안 희랍인들을 현자로 다만 일곱 명을 헤아리고 있을 뿐입니다. 물론 칠현인을 자세히 파고 들면 -아니면 내 목숨을 내놓겠는바 - 그들 가운데는 2분의 1현자가 끼어 있으며, 혹은 그들 가운데 3분의 1정도만 현인인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4.
바쿠스에 대한 칭송들 가운데 첫 번째는 영혼의 고통을 가볍게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짧은 시간 동안인데, 그것은 당신이 잠에 빠져 술을 더 이상 못하게 되자마자, 속담에 이르듯 백마가 끄는 사두마차를 타고 영혼의 고통은 되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하여 내가 베푸는 은덕은 얼마나 크고 지속적입니까? 나 우신은 일종의 명정 상태를 정신 속에 영원무궁토록 유지하여 즐거움과 행복과 희열을 맛보게 하며, 조금도 골치아픈 근심을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나는 이런 나의 선물을 인간들 모두가 받아 가도록 허락하였는바, 다른 신들은 제 선물을 어떤 이에게는 허락하지만 다른 이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걱정을 덜어 주고 풍요로운 희망을 갖도록 하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포도주가 아무 데서나 생산되는 것은 아니며, 베누스 여신의 선물인 아름다운 육체는 다만 소수에게만 허락되었습니다. 메르쿠리우스의 선물인 언변은 그보다 더 적은 사람들에게만 주어졌으며, 헤라클레스가 도우사 부를 얻는 것도 많은 사람은 아니며, 호메로스의 유피테르가 모두에게 왕권을 허락한 것도 아닙니다. 마보로스는 전쟁 중에 어느 편도 들지 않으며, 아폴론의 세발솥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하고 돌아옵니다. 사투르누스의 아들은 심심치 않게 벼락을 던지며, 포에부스는 때로 창을 던져 역병을 퍼뜨립니다. 하계의 유피테르 플루토, 미망의 여신, 복수의 여신과 학질의 여신 등, 신이라기보다 살인마들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볼 때 모든 사람들에게 동등하게 은혜를 골고루 나누어 주는 신은 나 우신이 유일하다 하겠습니다. 나는 누군가의 기도를 듣고서야 움직이는 그런 신이 아니며, 제례에서 무언가를 빠뜨렸다고 해서 이에 대한 속죄를 요구하는 신도 아닙니다. 다른 모든 신들은 초대하면서 나를 빼놓고 희생 제물의 잔치에 참여하지 못했다고 해서 천지를 뒤집어 요란을 부리지도 않습니다. 다른 신들은 이런 일에 있어 참으로 비위를 맞추기 어려운 존재들인지라, 차라리 이런 신들을 섬기지 않고 무시해 버리는 것이 안전하고 이로운 일이라고 생각될 정도입니다. 인간들 가운데도 적잖이 이런 사람들을 볼 수 있는데, 까다롭고 걸핏하면 마음 상하기 십상인 존재들인지라, 이들과 가까이 벗하기보다는 차라리 모르쇠 외면하는 편이 낫습니다.
사람들은 말하길, 나 우신에게 희생제를 바치거나 신전을 세운 사례를 찾아볼 수 없다고 합니다. 진작 말한 것처럼 나도 이렇게까지 내게 고마움을 표사지 않는 것이 기가 막힐 뿐입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일에 대해서도 괘념치 않으며 그저 좋게 넘어갑니다. 더군다나 나는 그런 보답을 원하지도 않습니다. 나에게는 유향이며, 제사 음식이며, 염소 혹은 돼지를 요구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너나 없이 나를 몹시도 떠받들고 있으며, 심지어 사제들까지도 그러한 바에야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인간의 피로 제사를 받는다 하는 디아나 여신을 내가 부러워하겠습니까? 나는 내가 가장 경건하게 숭배받는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마음속에 나를 가득 채우고 있으며, 전통 관습 가운데 나를 각인시키고 있으며, 삶에 나를 반영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기독교인들도 성자들을 이렇게까지 마음을 다해 모시지는 않습니다. 성처녀 성모 마리아에게 어마어마하게 많은 기독교인들이 촛불을 바칩니다. 하기야 그것도 다만 촛불이 필요하지 않는 대낮에만 그리할 뿐입니다만, 그에 비해 그 삶의 고결함과 소박함, 하느님을 향한 지고한 사랑을 따르려고 노력하는 이는 거의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이며 하늘에 계신 분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인데 불구하고 말입니다. 게다가 내가 어찌 신전을 요구하겠습니까? 세상 모든 곳이 어디 하나를 예외로 하지 않고 나의 신전이나 진배없으며, 내가 틀리지 않는다면, 제일 아름다운 신전입니다. 인간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나 우신에게 교리를 전수받은 사제가 있기 마련입니다. 또한 나는 돌로 조각하거나 물감으로 색칠한 성물을 나에 대한 경배에 쓰도록 요구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어리석은 자들이나 투미한 자들은 정작 신들이 아니라 그런 신상(神像)에 대고 경배를 올리는데, 결국 신들을 대리하는 물건에 의해 정작 신들이 구축(驅逐)을 면치 못하는 것이 우리네 현실입니다. 나의 조각상으로 말하자면, 좋든 싫든 나를 대신하는 살아 움직이는 조각상들이 세상 사람 수만큼 있는 셈입니다. 하여 이런 이유에서 나는 여타 신들을 부러워하지 않는데, 그들은 세상 한구석에서 각자의 땅에서만, 그것도 정해진 축일 동안만 경배를 받습니다. 예를 들어 로도스 섬에서는 포에부스 아폴론을, 퀴프로스 섬에서는 베누스 여신을 아르고스에서는 유노 여신을, 아테네에서는 미네르바 여신을, 올림포스에서는 유피테르를, 타렌툼에서는 넵투누스를, 람사코스에서 프리아포스를 모십니다. 반면 나에게는 이 세상 모든 곳에서 값진 제물을 하루도 빠짐없이 바칩니다.
나의 이런 주장이 누군가에게는 진실되기보다 황당무계한 억지처럼 보이지 않을까 저어되는바, 나는 잠시나마 인간들의 삶을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사람마다 신분이 고귀하거나 미천하거나 간에 상관없이 하나같이 나를 크나크게 모시며 중요하게 여기고 있음이 분명해질 것입니다.
하지만 삶을 모두 살펴보는 것은 너무 길어질 테니, 여타의 삶을 쉽게 미루어 짐작게 할 만한 대표적인 삶만을 가려 살펴볼 것입니다. 따라서 두말이 필요 없이 나 우신에게 속한다는 것이 분명한 대중과 천민을 살펴볼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이들에게는 어리석음의 갖은 양태가 차고 넘치며, 날이면 날마다 새로운 양태를 새롭게 추가하는지라, 데모크리토스가 천 명이 있더라도 이에 하나씩 맡아 웃어 주기에도 모자랄 판이며, 계속해서 한 명씩 데모크리토스를 거듭하여 추가로 부를 지경입니다. 말해도 믿지 않을 수 있지만, 어리석은 인간들이 이렇게 매일매일 그 많은 조롱거리와 그 많은 장난거리와 그 많은 우스개들을 신들에게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신들은 오전 시간에는 입만 아픈 안건과 청원을 듣는 데 정신을 차리고 할애하지만, 나머지 시간은 신주를 마시고 한껏 취하여 진지한 일은 어느 것 하나 돌보지 않으려 하며, 다만 하늘 가장 놓은 곳에 올라앉아 몸을 앞으로 숙여 인간들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지켜봅니다. 신들에게 이보다 즐거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불멸의 신이여, 어리석은 중생들이 펼치는 이 얼마나 다채로운 소동이며, 이 무슨 연극이란 말입니까! 나 또한 연극을 감상하는 신들에 적잖이 가담하곤 합니다. 누구든 젊은 여인을 죽을 만큼 사랑하는데, 여인이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을수록 절망 가운데 사랑은 더욱 거세집니다. 누구는 안사람이 아니라 결혼 지참금을 아내로 들입니다. 누구는 제 마누라에게 몸을 팔아 오도록 시킵니다. 누구는 의처증에 시달리며 아르고스처럼 아내를 감시합니다. 누구는 장례식에, 맙소사, 심지어 장례식 장면을 공연하는 흡사 배우와 같은 사람들을 고용하여 참으로 어리석은 짓을 행하고 말합니다. 누구는 의붓어미의 무덤에서 울고 있습니다. 누구는 긁어모을 수 있는 만큼 긁어모다 그것을 죄다 밥통에 밀어넣습니다만, 이내 곧 또다시 엄청난 허기를 느낍니다. 누구는 잠자고 빈둥대는 것에서 무엇보다 큰 행복을 느낍니다. 누구는 남들에게 닥친 일에는 부지런히 참섭하며 오지랖을 부리지만, 정작 제 일에는 무관심합니다. 누구는 남들에게 돌리거나 빚낸 돈을 가지고 부자로 살며 곧 파산할 망정 제가 부자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는 상속자를 부자로 만들기 위해서인지 모르겠으나 자린고비 삶에서 행복을 찾습니다. 누구는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는 조그만 이익을 찾아 온 바다를 누비고 다니며, 백만금을 주고도 다시 찾을 수 없는 생명을 파도와 폭풍에 맡깁니다. 누구는 전쟁을 감행하여 거대한 부를 획득하려고만 하고 고향에서 한가롭게 살아는 데 재미를 붙이지 못합니다. 자식 없는 할아범들을 붙잡으면 얼마나 손쉽게 한재산을 챙길 수 있겠느냐고 판단하는 여인이 있습니다. 그보다는 할망구들의 비위를 맞추어 행복하게 만들면 동일한 목적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내들도 있습니다. 양쪽 모두 결국 자기들이 낚아 보려는 노인네들에게 반대로 보기 좋게 배신을 당할 경우, 이는 구경꾼으로 나선 신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지저분하고 어리석은 것은 장사꾼의 무리입내다. 왜냐하면 이들은 모두 가운데 제일 지저분한 일을, 그것도 제일 지저분한 방식으로 행하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일상으로 거짓말을 하며, 거짓 맹세를 하며, 도둑질을 하며, 사기를 치며, 농간을 부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제 손가락 마디마다 금반지를 둘렸으니, 자신들이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탁월한 사람들이라고 뻐기고 다닙니다. 사제들 가운데 장사꾼에게 경배를 바치며 이들은 존경받을 만한 사람들이라고 공개적으로 외치는 형제들이 없지 않은바, 이는 이들이 더럽게 벌어들인 재물 가운데 일부나마 얻어 쓸까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합니다. 또 어디선가 여러분은 이른바 피타고라스 학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모든 것이 모두의 공유재산이라고 생각하는지라, 지키는 사람이 없는 물건을 길에서 발견하면 태연히 이를 챙겨 가면서 마치 당연한 재산을 얻는 양 합니다. 누구는 기도만으로 벌써 부자이며, 행복한 꿈만으로 벌써 충분히 행복을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는 집에서 쫄쫄 굶을지언정 집밖에서 부자로 대접받으면 즐거워합니다. 누구는 부지런히 자신이 소유한 것은 무엇이든 흥청망청 탕진해 버리는가 하면, 누구는 경건한 것이든 불경한 것이든 악착같이 쌓아 둡니다. 누구는 공직 선거에 나선 후보자가 되어 여기저기 돌아다니는가 하면, 누구는 제집 방구석에 즐거이 틀어밖혀 나오지 않습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송사를 끊임없이 이어가며 여기저기서 다툼의 소지를 찾아내는데 결국 재판을 질질 끄는 재판관은 물론이고 재판에 참여하는 변호사만 부자로 만들어줍니다. 누구는 늘 세상 뒤집는 일에만 매달리며, 누구는 되지 않게 거대한 야심을 좇아갑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예루살렘, 로마 혹은 성자 야고보를 찾아 아내와 자식들을 내팽개치고 떠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여러분이 만일 수많은 인간 군상들이 펼치는 소동극을 달나라에서-지난날 메니포스 처럼 말입니다- 내려다볼 수 있다면, 여러분은 파리 혹은 각다귀 떼 같은 인간들이 자기들끼리 서로 투그리고 싸우고 배신하고 약탈하고 놀아나고 몸을 섞고 태어나고 늙고 죽는 꼴을 보게 될 것입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커다란 격랑과 엄청난 비극을 이렇게 하찮은 동물이, 그것도 짧은 인생을 살 뿐인 존재가 만들어 내다니, 작은 전쟁 혹은 역병의 회오리바람에 수천수만의 생명이 목숨을 잃고 죽어 가는 일은 다반사입니다.
그런데 내가 대중의 어리석음과 광증을 형태별로 계속해서 늘어놓는다면, 어떤 데모크리토스가 있어 박장대소 조롱한다 해도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을 만큼 어리석은 일이 될 테니, 이쯤에서 정리하고 이제 사람들 사이에서는 지혜롭다는 평가를 들으며 이른바 지혜의 황금 가지를 찾고 있는 자들에게 눈을 돌려 볼까 합니다.
우선 고전어 문법을 다루는 학교 선생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누구보다 끔찍하고 비참한 존재들이며, 만일 내가 그들의 저주받은 직업에 뭔가 달콤한 어리석음을 곁들이지 않았다면 신들에게까지 버림받을 주제들입니다. 사람들은 학교 선생들이 희랍 격언시에서 언급된 것처럼 다섯 가지 재앙에 의해 다섯 번의 저주를 받았다고 하지만, 어디 그뿐입니까, 실은 6백 가지 저주를 받았습니다. 즉 늘 궁핍하며 너저분한 이들 선생들은 학생 떼거지들과 함께 학교에서 -내가 학교라고 칭했습니다만, 사실 ‘생각 소매점’ 혹은 더 정확하게 ‘학생 바수는 방앗간’과 ‘학생 형장’이라고 하겠습니다.- 아이들이 치는 사고에 몸은 고달프며, 아이들 떠드는 소리에 귀는 멍하고, 아이들의 악취와 오물에 코는 문드러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은공으로 이들은 스스로를 인간 가운데 최고의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조막만 한 어린것들은 성난 표정과 화난 목소리로 겁줄 수 있다는 것과, 가여운 것들을 회초리와 몽둥이와 가죽 채찍으로 치고 패고 조지며, 마치 쿠마의 당나귀처럼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분노를 표출할 수 있다는 것에 선생들은 즐거워합니다. 온갖 지저분한 꼴을 깔끔한 우아함이라고 생각하며, 악취 나는 오물에서 박하 향을 맡으며, 처참한 노예 생활을 왕의 권세를 누린다고 여겨 이를 팔라리스 혹은 디오뉘시오스의 권력과도 맞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또한 이들을 더욱 기쁘게 하는 것은 자신들이 도보적인 학식을 갖추었다는 믿음입니다. 대부분 이들은 정신 나간 헛소리를 아이들의 머리 속에 쑤셔 박으면서도, 팔라이몬과 도나투스를 깔보며 자신들만 못하다고 믿습니다. 이렇게 스스로 그러하다고 믿고 있는 바를, 어떤 감언이설로 그렇게 놀라운 일을 이루어 내는지 알 수 없으나, 이들은 어리석고 어리석은 학부모들에게도 믿도록 만듭니다. 이에 덧붙여 이들이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이들 가운데 누군가가 앙키세스의 어미 이름 등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단어들을, 예를 들어 아가리꾼, 도두각질, 도모 같은 단어들을 낡고 오래된 책에서 찾아낸다거나, 혹은 오래된 비석에서 닳아 보이지 않는 글씨 조각을 읽어 냈을 때입니다. 유피테르여! 이들은 얼마나 의기양양하며, 얼마나 시끄럽게 개선 행진을 하며, 얼마나 떠벌린 자화자찬을 합니까! 마치 아프리카를 정복한 모양새며 바빌론에 입성하는 위세입니다. 또한 이들이 재미있는 것은, 썰렁하기 이를 데 없는 무미건조한 시조를 읊조릴 때에도 이를 칭송하는 자들이 늘 있기에 이들은 마치 자신들의 가슴속에 베르길리우스의 영혼이 환생하였다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재미를 더하는 것은 이들이 서로 동형 보복의 원리에 따라 칭찬과 경탄을 혹은 혹평을 주고받을 때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단어 하나를 놓치고 실수하기라도 하면, 그런데 이것을 옆에 있던 다른 사람이 우연히 집어내기라도 하면, 맙소사 얼마나 끔찍한 비극이 펼쳐지며, 얼마나 소름 끼치는 난투극이 전개 되며, 얼마나 잔인한 말싸움이 벌어지며, 얼마나 악의에 찬 악담 욕설이 오가는지! 내가 한마디라도 거짓을 고했다면 학교 선생들이 한꺼번에 나를 욕해도 좋습니다.
나는 만물박사 팔방미인 하나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희랍어, 라틴어, 수학, 철학과 의학 등 이런 것들에 있어 제왕 위치에 올라 있습니다. 벌써 60세에 이르렀는데, 지난 20년 이상을 다른 학문들은 버려두고 오로지 문법에 매진하여 스스로를 고문하고 쥐어짜고 있습니다. 그는 살아생전 여태껏 누구도 충분히 밝혀 놓지 못한 희랍어와 라틴어 여덟 가지 품사 구분을 확립할 수 있다면 여한이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 접속사를 품사적으로 부사의 하나로 분류할 수 있는가 등 문법에 관한 문제는 전쟁을 방불하게 하는 논쟁의 대상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문법 선생들의 숫자만큼 많은 문법 책들이 존재하며, 혹은 그 이상의 문법 책이 존재할 지도 모르는 것이, 내 친구인 알두스는 혼자서 벌써 다섯 권 이상의 문법 책을 출판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만물박사께서는 그것이 아무렇게나 혹은 제멋대로 만들어진 문법 책일지라도 어느 것 하나 소홀히 간과하지 않으며, 그 누구의 것이건, 그것이 제아무리 엉터리가 문법 분야에서 이룬 일일지라도, 그것을 꼼꼼히 살피거나 샅샅이 검토하지 않는 법은 없습니다. 그는 행여 누가 자신이 노리는 영광의 자리를 앞서 차지하지는 않을까, 행여 지난 수십 년의 노고가 공염불이 되지 않을까 두려운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를 광기라고 하겠습니까, 아니면 어리석음이라고 하겠습니까? 나로서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모든 동물 중에서 가장 가련한 우리의 문법 선생을 행복하게, 자신의 삶을 페르시아 왕들의 삶과 일체 맞바꿀 생각을 하지 못할 만큼 행복하게 만들어 준 것이 나의 은공임을 인정해 주기만 한다면, 아무래도 좋습니다.
다음으로 시인들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분명 나 우신에게 속하는 무리들입니다만 내게 크게 빚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속담에도 이르듯이 워낙 자유로운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하는 일은 전혀 쓸모 없고 실없는 이야기를 가지고 어리석은 자들의 귀를 간질이는 일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아무튼 시인들은 이런 이야기를 통해 스스로에게 불멸과, 신들에 버금가는 영원한 삶을 약속하는 한편 다른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것을 보장하고 돌아다닙니다. 이들과 특히 많이 어울려 다니는 것으로 자기도취와 아부가 있으며, 인간 종족들 가운데 이들보다 시종여일 변함없이 나를 모시는 자들은 없습니다.
다음으로 수사학자들이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철학자들과 공모하여 같이 어울려 다닙니다만, 이들이 나 우신에게 속한다는 것을 다른 많은 것들로 증명할 수 있는 가운데 특히, 많은 헛소리들은 물론이고 참으로 대단한 우스개 이론을 전개하였다는 점을 들어 증명할 수 있습니다. 우스개의 한 종류가 어리석음이라는 것을 <헤렌니우스에게 주는 수사학>을 저술한 수사학자가 주장하였습니다. 또 수사학에 있어 최고 권위자라 할 퀸틸리아누스가 우스개를 <일리아스>보다 길게 주석한 것이 이를 증명합니다. 이들이 어리석음을 크게 치는 것은, 종종 정교한 논리로도 반박할 수 없는 사태를 웃음 하나로 격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스개를 말함으로써 청중의 박장대소를 유도하는 공로, 그것도 매우 기교 넘치게 그렇게 하는 공로를 나 우신 말고 누구에게 돌리겠습니까?
다음으로 시인들과 한 부류에 속하는 자들로 책을 출판하여 불멸의 명성을 얻고자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 모두 내게 굉장히 많이 신세 진 부류인데, 특히 순전 헛소리를 천연덕스럽게 종이 위에 그려 놓는 글쟁이들이 그러합니다. 이와 달리 오로지 소수의 학자들만이 알아들을 주장을 현학적으로 휘갈기며 페르시우스와 라엘리우스가 이를 판단해 주길 바라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내 보기에 이들 학자들은 오히려 행복하기보다 불쌍하게 여겨야 할 존재들입니다. 이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을 고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덧대고 바꾸고 치우고, 또다시 가져다 돌이키고 두들기고 친구들에게 보여 주고, 또 9년을 묻어 두지만 결코 스스로도 흡족한 결과를 얻지 못합니다. 그나마 얻는 보잘것없는 보상은 칭찬 몇 마디, 그것도 몇몇 소수의 칭찬일 뿐인데도 불구하고 이를 얻기 위해 이들이 지새운 밤은 그 얼마며, 모든 것 가운데 가장 달콤한 잠을 설친 세월이 그 얼마며, 흘린 땀은 그 얼마며, 산고의 진통은 그 얼마입니까? 그러는 사이에 육신은 병들고 청춘은 찌들어 앞을 보지 못할 정도로 눈은 침침해지고, 쾌락은 멀리했건만 가난과 질투심에 시달리다 노년은 때 이르게 찾아오니, 요절은 물론이고 그에 못지 않은 것들이 이들에게 들이닥칩니다. 이 모든 불행 가운데 학자들은 단 한 명일지라도 자신을 인정해 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을 보상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들과 달리 나 우신에게 빚진 글쟁이들은 기괴한 헛소리를 더없이 즐겁게 나불거립니다. 결코 밤잠을 설치는 일 없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종이에 휘갈기며, 나중에는 꿈에서 본 것까지 그대로 글자로 옮기되, 종이 말고는 비용과 수고를 들이는 일이 없습니다. 허섭스레기 같은 글을 마구잡이로 되도록 많이 지껄일수록 그것이 더욱 많은 사람들, 다시 말해 어리석고 무지한 대중들에게 모두 인정받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학자가 읽을지는 모르겠으나 세 명의 학자들이 이를 읽고 비난한들 이들에게는 대단한 일도 아닙니다. 그런 소수의 현자들이 도대체 그들에게 칭송 칭찬을 아끼지 않는 대중들에 비해 무슨 값어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들보다 좀 더 영악한 부류는 타인의 작품을 마치 자신의 역작처럼 출판하는 자들입니다. 타인의 크나큰 수고와 고통으로 탄생된 영광을 몇 마디 단어를 바꾸어 스스로에게 가져다 붙이는 자들은 이런 짓에 이력이 붙어, 장차 제아무리 삼엄한 비판과 비난을 받더라도 발각될 때까지는 얼마 동안이나마 그것으로 덕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담대합니다.
대중의 칭송을 들을 때, 군중에 둘러싸여 “저분이 대단한 그분이다!”라고 지목받을 때, 서점에 자신의 저서가 앞에 전시될 때, 책머리마다 마법사 같은 이국적인 자신의 이름이 적힐 때, 저 글쟁이들이 어찌나 스스로 대견해하는지 그것은 볼만한 구경거리입니다. 하늘에 맹세코 이들에게 이름 몇 자 말고 달리 볼 것은 없습니다. 못 배운 사람들도 취향이 제각각인 법, 이들도 넓고 넓은 세상을 고려할 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름, 이름 좋다고 칭찬받은 일은 더더욱 없는 이름을 찾아 멋대로 씁니다. 그런 이유에서 이들은 드물지 않게 고대의 서적을 참고하여 이름을 만들어 내거나 거기서 이름을 따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텔레마코스를, 어떤 사람들은 스테넬로스 혹은 라에르테스를, 또 다른 사람들은 폴뤼크라테스를, 또는 트라쉬마코스를 이름으로 선호합니다. 그런데 정작 도서명에는 <얼렁뚱땅>이나 <돌대가리>라거나, 철학자들이 하는 식으로 <알파> 혹은 <베타> 등으로 아무렇게나 이름 붙이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이들 글쟁이들의 행태 가운데 제일 웃기는 것은 서로 편지나 시나 칭송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번갈아 치켜세우는 일인바, 어리석은 자들이 어리석은 자들을, 무식한 자들이 무식한 자들을 칭송하는 꼴입니다. 이쪽이 저쪽을 두고 ‘알카이오스’라고 부르면, 저쪽도 이쪽을 두고 ‘칼리마코스’라고 매깁니다. 저쪽이 이쪽을 두고 키케로에 앞선다 하면, 이쪽은 저쪽더러 플라톤이 울고 가겠다 말합니다. 일부는 일부러 맞서 싸울 적수를 만드는데, 이렇게 경쟁을 벌일수록 명성 또한 커지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군중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의견이 갈리면’, 각각의 군중을 이끌고 멋진 전과라며 승리를 구가하고, 각자 제가 이겼다 개선식을 거행하면서 말입니다. 물론 현자들은 이를 아주 어리석은 일이라 조롱할 것이고, 누구도 이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나 우신의 은공으로 즐거운 삶을 영위하니, 자신의 무공이 스키피오 집안이 거둔 전승과도 비교할 수 없다고 여길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를 비웃고 커다란 정신적 쾌락을 만끽하며 이들의 광기를 비난하는 학자들조차도 사실은 내게 적잖이 빚을 지고 있습니다. 배은망덕한 사람들이면 모를까 이는 누구도 결코 부정할 수 없는 명명백백한 사실입니다.
다음으로 변호사들이 있는데, 이들은 내게 신세 진 부류들 가운데 제일 앞자리를 요구하며 누구도 자신들과 나란히 앉기를 꺼려 합니다. 자신들이 시쉬포스의 바위를 굴리는 자들인바 6백여 개의 법조문도 단숨에 외워 내는 독보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많은 법조문들이 어디에 적용되는 것인지에는 무관심한 채, 다만 난해한 단어에 난해한 단어를 더하고, 의견에 의견을 보태며, 결국 법학이 모든 학문 가운데 제일 어렵다는 인상을 심어 주려 합니다. 이들은 그것이 어려운 과제일수록 자신들에게 영광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에 덧붙여 논리학자 내지 궤변론자가 있습니다. 이들은 도도나의 청동 솥보다 더 수다스러운 자들로서, 한 명이 능히 스무 명의 말 많기로 유명한 여자들을 한꺼번에 대적할 수 있을 정도로 수다스럽습니다. 그저 말만 많고 그악스럽게 싸우려 들지만 않는다면 행복할 것인데, 이들은 염소 털로 양모를 만들 수 있는지를 놓고 목숨을 걸고 끈질기게 싸우며, 싸움에 이기려고만 할 뿐 진실은 아예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자아도취에 빠져 이들은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삼단논법으로 무장하고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무슨 주제건, 상대가 누구든 덤벼듭니다. 게다가 끈덕지기로는 스텐토르가 대적하더라도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이들의 아류로 턱수염과 외투로 존경받는 철학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만이 현자입네 위세를 떨며 다른 사람들은 그림자인 양 여깁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마치 우주 만물의 건축가라고 할 자연을 모시던 비서인 양 혹은 신들의 회의에 참석했다가 우리를 방문한 것인 양, 수없이 많은 세계를 재구성하고, 태양과 달과 별들과 행성들의 크기를 손가락 혹은 실오리로 측량하고, 천둥 번개나 폭풍이나 일식 등 설명하기 어려운 자연 현상의 원인을 들려주는 데 전혀 주저함이 없는 이들의 광기는 실로 재미있을 따름입니다. 하지만 자연은 이들과 이들의 억측을 대단히 조롱하는바, 왜냐하면 무엇이 하나 분명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충분한 논거로서, 이들이 서로 각각의 사태에 대하여 벌이는 끝없는 시시비비 말다툼을 제시하는 바입니다. 완전히 아는 것도 아니면서 마치 모든 것을 다 아는 양 행동하며, 혹은 대개 눈이 침침해 앞을 보지 못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정신이 정처 없이 왔다 갔다 하기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스스로의 무지를 깨닫지 못하며 때로 웅덩이나 돌부리를 피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보편 형상이니, 보편 개념이니, 개별 형상이니, 제1 질료니, 실체성이니, 개별성이니, 형식성이니 하는 추상적인 것들을 자신들은 알고 있다고 주장합니다만, 내 생각에는 이런 것들은 륑케우스 조차도 알아보기 어려운 그런 오묘한 것들입니다. 이들은 또한 대중들을 천박하다며 깔보는 바, 삼각형이나 사각형이나 원 등 수학 도형을 가지고, 또 이런 것들에 유사한 것들을 거듭 끌어들이고 미로와도 같은 도형들을 섞어 놓으며, 더군다나 유식한 문자들을 전장의 병사들처럼 앞세워 한 줄씩 열을 맞추어 진군시킴으로써 문외한인 대중들을 깜깜절벽으로 몰아붙입니다. 이들 가운데 어찌 별자리를 보고 미래를 읽어 낸다 주장하는 자가 없겠으며, 무언가 훨씬 더 놀라운 것을 약속하지 않은 자가 없겠습니까? 아무튼 이들은 이런 말을 믿어 줄 사람을 또한 찾아내니 행복하다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교회 학자들은 조용히 지나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카마리나 늪 혹은 족제비싸리 같은 그런 존재들은 건드리지 않는 편이 이득입니다. 이들은 거만하기 이를 데 없으며 매우 성마른 부류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들을 잘못 건드리면 이들은 6백 개의 논변을 가지고 떼거리로 달려들어 내가 말실수를 했다고 승복할 때까지 공격할 것이고, 내가 주장을 꺾지 않으면 내내 완악하게도 나를 이단자로 몰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누군가 자신들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이런 방식의 날벼락으로 사람을 겁주곤 합니다.
그런데 교회 학자들처럼 내가 베푼 은덕에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또 없을 것입니다. 이들은 간과할 수 없는 항목에 있어 내게 크게 빚지고 있는바, 우선 자아도취가 그것입니다. 이 덕분에 이들은 마치 자신들이 천국에 살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여,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며 다른 중생들을 흙바닥을 기는 짐승처럼 대단하게도 불쌍히 여깁니다. 다음 현학적 정의, 결론, 부수적 결론, 확증과 함축 등이 그것인데 이런 것들로 군대를 엮어 스스로를 옹호합니다. 이로써 이들에게는 수많은 피난처가 마련된 셈인바, 제아무리 불카누스의 올가미를 던진다 한들 테네도스의 양날 도끼보다 수월하게 그물코를 자르고 빠져나갈 묘책으로 이들은 개념 구분법을 손에 쥐게 됩니다. 이들은 그때그때 개념들을 만들어 내며 개념들은 풍성하게 샘솟아 납니다. 그 밖에도 이들은 오묘한 교리를 제멋대로 설명합니다. 어떤 원리에 따라 세계가 창조되고 구분되었으며, 어떤 경로를 따라 죄인의 얼룩이 그 후손들에게까지 남게 되었으며, 어떤 방식과 어떤 크기와 얼마 동안의 시간으로 처녀 몸의 자궁에서 그리스도가 분리되었으며, 주님과 한 몸이 되는 성체 성사의 사건은 침실 없이 어떻게 가능하였느냐 등을 말합니다. 이런 문제들은 이미 닳고 닳은 것들이고, 자칭 위대하고 계몽된 교회 학자들에게 어울릴 만한, 이들을 장차 잠에서 깨어나게 할 만한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탄생의 정확한 순간은 언제였는가, 그리스도는 아버지가 여럿이었는가, 또 가능한 문제인지 모르겠으나, 하나님 아버지는 아드님을 미워하였는가, 신은 여성, 악령, 당나귀, 호박, 부싯돌로 변신할 수 있는가, 만약 할 수 있다면 호박이 산상 설교를 행하고, 기적을 보이고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있는가 등의 문제입니다. 또 그리스도의 몸이 십자가에 못 박혀 잇던 바로 그 순간에 만약 베드로가 성별(聖別)되었다면 과연 어떻게 성별된 것인가, 또 그리스도는 동시에 인간이었는가, 또 몸이 다시 사는 부활 이후 사람들에게 먹고 마시는 것이 허용될 것인가 등의 문제인데, 벌써부터 이들은 장래의 굶주림과 갈증을 대비하여 많은 것들을 비축해 두고 있습니다.
이상의 문제보다 훨씬 더 오묘한 문제들이 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개념, 관계, 운동, 형식, 실체, 개별 등 이런 것들은 도저히 누구도, 깊은 어둠을 뚫고 존재하지도 않는 물건을 찾아낼 수 있는 륑케우스라면 모를까, 눈이 있어도 알 수 없는 문제들입니다. 여기에 교회 학자들의 금언들을 덧붙일 수 있는바, 이것들은 어찌나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 말 안 되는 소리로 유명한 스토아학파의 신탁조차도 이에 비하면 쉽고 평범해 보일 정도입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주일에 가난한 자의 신발을 고쳐 주는 일은 1천 명의 사람을 죽인 것보다 더 큰 죄라고 가르칩니다. 또 한마디 제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 차라리 온 세상이 속담처럼 음식과 의복과 함께 소멸하도록 놓아두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가르칩니다. 또 이렇게 미묘하고 섬세한 스콜라주의자들이 있습니다. 하여 실재론자들과 유명론자들, 토마스주의자들과 알베르투스주의자들, 오캄주의자들과 스코투스주의자들 등의 구덩이에서 빠져나오기가 아마도 여러분에게는 미로에서 빠져나오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모든 파벌들을 열거한 것도 아니고, 그 가운데 몇몇 특정 파벌만을 열거했을 뿐인데도 말입니다.
이들 교회 학자들의 파벌에서 논의되는 문제들은 어찌나 복잡하고 어찌나 난해한지, 만약 새롭게 등장한 이 교회 학자들과 설전을 벌어야 한다면 사도들조차도 또 하나의 성령이 필요할지도 모를 일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믿음을 몸소 보여 주었으며,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라고 설명함으로써 믿음을 저 교회 학자들과 달리 쉽게 정의하였습니다. 또 사도는 사랑을 몸소 보여 주었으며,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13장에서는 사랑을 간명히 말하되, 변증법적 원리에 따라 전혀 나누거나 쪼개지 않았습니다. 또 사도들은 경건하게 성체 성사를 성별하였으되, 성체 성사의 연원이나 목적, 성체 변화 등의 문제, 어떻게 동일한 몸이 두 장소에 있을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몸이 하늘에 있을 때와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와 성사에 참여할 때가 어떻게 다른가, 크기가 시간적 연속 가운데 구분된다고 할 때 성체 변화는 성사의 어느 시점에 실현되는가 등의 문제를 따지지 않았으며, 설령 따져 물었다 한들 내 생각에는 스코투스주의자들이 찧고 빻는 것처럼 그렇게 첨예한 대답을 주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사도들은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친을 알고 있었으되, 그들 가운데 누구도 오늘날 우리네 교회 학자들처럼 철학적으로 시시콜콜 어떻게 성모 마리아가 아담의 원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는가를 증명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열쇠를 받았는데, 열쇠를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으실 분으로부터 그는 열쇠를 받았으며, 베드로가 학식이 있었는지 내가 알 도리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과연 학식이 없는 자가 어떻게 분간의 열쇠를 가질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그는 첨예하게 따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세례를 주었으되 세례의 형상인, 질료인, 운동인, 목적인을 묻지도 않았으며, 사도들은 성사적 인호(印號) 가운데 소멸하는지 불변하는지를 전혀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예배하였으되, 오로지 성령을 두고 예배하였으니,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말을 오로지 따른 것입니다. 그렇다면 벽에 숯으로 그려 놓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에 만약 두 손가락이 펴져 있고 머리카락이 길게 늘어지고 머리 뒤에 후광에 세 개의 표식이 있으면 이런 그림에 대하여, 그리스도께 예배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계시가 사도들에게 내려진 것은 아닌가 봅니다. 이런 복잡하고 난해한 문제를 도대체 누가, 아리스토텔레스와 스코투스의 책에 묻혀 36년을 내내 공부하지 않고서 알 수 있겠습니까? 또 사도들은 은총을 거듭해서 가르쳤으되, 결코 이를 구분하여 도움의 은총과 생명의 은총으로 나누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성사(聖事)를 독려하였으되, 그것이 성사를 행하는 사람에 달렸는지, 아니면 성사 범절에 달렸는지에 관해서는 따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사도들은 자비를 거듭해서 가르쳤으되, 타고난 자비심과 얻어진 자비심을 나누지 않았으며, 이것이 우연적이냐 아니냐를 묻지 않았으며, 이것이 본질적인지 비본질적인지, 창조된 것인지 아닌지도 따지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죄짓는 것을 금하였으되, 내 목숨을 걸고 맹세하노니, 사도들은 우리가 죄라고 부르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신학적으로 정의할 줄 몰랐습니다. 이런 것은 스코투스주의자들의 정신에 따라 철저하게 배우고 나서야 가능한 일일 겁니다. 나는 믿거니와 사도 바오로는 -우리는 사도 바오로 한 명의 학식으로 다른 사제들 모두를 대표할 수 있습니다 - 난해한 질문들과 논쟁들과 계보들과, 바오로의 용어를 빌리자면 ‘설전’이 도를 지나칠 경우, 이를 결코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사도 바오로 당시의 논쟁과 설전은 오늘날 크뤼시포스의 난해함보다 더 심하게 난해하고 어려운 논쟁에 비하면, 다만 촌스럽고 평범한 것이었을 텐데도 말입니다.
그럼에도 이들 교회 학자들은 매우 점잖은 축에 든다 하겠습니다. 사도들이 남긴 증언들이 좀 거칠고 그다지 학자풍의 솜씨가 아니라는 이유로 이들을 비난하지 않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대신 이들은 사도들의 글을 편리하게 해석하면서 부분적으로 옛글에 명예를 덧붙이며 부분적으로 사도들의 이름을 드높입니다. 사도들이 그들의 스승으로부터 일언반구도 듣지 못했던 것들에 관해 사도들에게 학자연한 것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공정하지 못한 일이겠는바, 거친 글이 크뤼소스토모스, 바실레이오스, 히에로뉘무스에서 보이기라도 하면 거기에다 ‘수용불가’라는 딱지를 붙이고도 남을 교회 학자들이 말입니다. 사도들도 이교도 철학자들과, 천성이 완고하기로는 둘도 없는 유대 신학자들을 돌려세운바, 이는 오로지 사도들의 실천하는 삶에 나타난 이적과 기적의 힘이었습니다. 결코 삼단 논법의 힘이 아니었으니, 당시 스코투스의 <임의 문제 토론집>이 있지도 않았으며, 있었다 한들 따라가지도 못할 만큼 난해한 글을 가지고는 아무도 회심케 하지 못했을 겁니다. 오늘날 이교도 혹은 이단자들은 그런 난해한 글에 회심치 않으니, 다만 이를 이해하기에는 둔한 사람들이거나, 이를 조롱할 만큼 뻔뻔한 사람들이거나, 혹은 마치 마법사가 비슷한 능력의 마법사와 맞붙고, 검투사가 엇비슷한 실력의 검투사와 맞붙는 것처럼, 하여 페넬로페가 베틀에 천을 짰다가 풀었다 하는 것처럼 매번 제자리를 맴돌며 대등한 싸움을 벌일 수 있을 만큼 비슷한 궤변에 익숙한 사람들만이 꼬여 드는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전쟁을 벌이고 있는 미련스러운 군대를 대신하여, 고함치는 스코투스주의자들과 완고한 오캄주의자들과 불굴의 알베르투스주의자들을 하나로 묶어 현명한 교회 학자들의 군단을 만들어 투르크족과 사라센족을 대항하도록 파견한다면, 나는 기독교인들이 그간의 모든 전쟁 가운데 가장 훌륭한 전쟁을, 이전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승리를 목격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학자들이 가진 발군의 말재주는 냉정한 사람마저 격앙케 할 것이며, 지독한 혓바닥은 무던한 사람마저 격분케 할 것이며, 칠흑 같은 논리는 밝은 눈마저도 가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든 것을 말하는 내가 여러분들에게 조롱하는 것처럼 보일 테지만, 이는 놀랄 일도 못 됩니다. 교회 학자들 가운데서도 좀 더 많이 배운 이들은 사실 자신들이 생각하기에도 사소한 저들의 신학적 세밀함에 역겨움을 느끼고 있으며, 또 예배를 드리기보다는 설명을 앞세우며 더러운 입으로 논증하고, 이교도의 세속적 논리로 변론하고, 오만불손하게 정의하고, 신학의 성스러운 위엄을 건방지고 지저분한 어휘와 문장으로 손상시키는 행위를 마치 성물 절도와 같은 종류의 극악한 불경으로 간주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교회 학자들은 스스로의 모습에 취하여 스스로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내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콤하기 그지없는 제 노래에 취하여, 복음서나 바오로의 서신을 읽는 것은 고사하고 들출 여유조차 없습니다. 이들은 따지고 물으며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지만, 스스로는 교회 전체를 자신들이 떠받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인들이 말하는 아틀라스가 어깨 위에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것처럼 자신들이 삼단 논법의 기둥으로 교회 전체를 지탱하였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교회가 무너졌을 것이라고 이들은 믿습니다. 이들이 말씀의 비밀을 마치 밀랍처럼 이렇게 주물렀다가 또 저렇게 멋대로 주무르며 얼마나 행복해하는지 여러분은 아십니까? 심지어 이들은 자신들이 얻어내고 겨우 몇몇 교회 학자들이 날인한 견해를 솔론의 법률과 교황의 교령보다 앞세웁니다. 또 일들은 마치 자신들이 풍기 감찰관이라도 된 양, 자신들의 견해에 분명하게든 혹은 암시적이든 정확히 부합하지 않는 주장은 취소하도록 강요하며, 마치 신탁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이 “이 주장은 거짓이다, 이는 전혀 존중할 가치가 없다. 이는 이교도의 냄새가 난다. 이는 사악한 헛소리다”라고 선포합니다. 그리하여 세례도 복음서도 바오로도 베드로도 성자 히에로뉘무스와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위대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 토마스 아퀴나스마저, 이들 교회 학자들이 동의하지 않으면, 단 한 명도 기독교인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그만큼 이들의 판단 기준은 까다롭고 엄격합니다. 지혜로운 교회 학자들이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감히 “너는 요강 냄새가 난다”나 “요강은 냄새 난다”에서, 혹은 “그릇들이 끓는다”나 “그릇이 끓다”에서 각각의 경우 양쪽 문장이 공히 문법적으로 정확하다고 말하는 자는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도대체 누가 생각이나 했겟습니까? 교회 학자들이 이런 오류들을 커다랗게 인가 도장을 찍어 출판하였기에 망정이지, 만약 이런 오류들의 어두운 그림자로부터 교회를 해방시켰겠습니까? 이런 오류를 지적할 때에 이들은 참으로 행복해합니다. 또 하계에서 마치 수십 년간 지내기라도 한 것처럼 지옥의 일들을 시시콜콜 아주 정확하게 묘사할 때는 어떠합니까? 또 자신드르이 판단에 따라 새로운 천구를 하나 덧붙일 때는 어떠합니까? 이들은 천상의 영혼들이 편리하게 산책하고 만찬을 벌이는가 하면 심지어 공놀이를 할 천구가 없어서는 안 된다며 제일 넓고 아름다운 천구를 하나 더 가져다 붙였습니다. 또한 수천 가지 이런 종류의 쓸데없는 것들로 교회 학자들의 머리는 부풀어 오르고 가득 메워져 있어, 내 생각하기에 이에 비하면 유피테르가 팔라스 아테네를 낳을 무렵 머리가 터질 정도로 크게 부풀어 올라 불카누스의 도끼를 찾을 때는 오히려 대수롭지 않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학자들이 머리에 수많은 끈으로 장식한 모자를 부지런히 눌러쓰고 공개 토론장에 모습을 나타낼 때에 여러분은 놀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의 머리는 터져 버릴지도 모릅니다.
우신인 나조차도 가끔 실소를 금할 수 없을 때가 있으니, 그것은 거칠고 구역질 나는 언어를 잘 구사할수록 그많큼 더욱 위대한 신학자가 된다고 교회 학자들이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또 말더듬이나 겨우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말을 토막토막 지껄이며 대중이 이해하지 못하는 소리를 하면서도, 이것이 자신들의 심오한 학식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에게 문법 규칙에 따르라고 강요한다면, 이들은 이것이 성서적 존엄에서 벗어나는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문법적으로 엉터리 말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오로지 이들 교회 학자들에게만 허락되었다면 이는 이들의 놀라운 위엄이겠지만, 실로 이는 길거리의 장사치들과 이들이 공유하는 바입니다. 또 사람들이 이들을 ‘교수님(madister noster)’이라고 부르며 경건하게 인사를 붙일 때마다 이들은 자신들이 신들에 버금가는 인물이라도 되는 양 우쭐하는데, 이들은 이 호칭에 유대 사람들의 ‘야훼’란 뜻이 담겨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MAGISTER NOSTER’라고 대문자로 적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불경이라고 주장합니다. 앞뒤를 바꾸어 ‘NOSTER MAGISTER’라고 행여 적기라도 한다면, 이것 하나로 ‘교수’라는 호칭의 신학자적 존엄을 한꺼번에 훼손하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상 교회 학자들의 행복에 맞먹는 인물들이 있는바, 은수사(隱修士) 혹은 수도승이라 불리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호칭부터가 잘못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수도 생활과 상당히 거리가 멀기 때문이며, 세상 도처를 이들만큼 싸돌아다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여러모로 내가 돕지 않았다면, 아마도 이들은 누구보다 불쌍한 종자들이 되었으리라 나는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이들 모두를 어찌나 싫어하고 기피하는지, 우연히 이들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날은 재수 옴 붙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이들은 자아도취에 빠져 스스로가 대단한 줄 압니다. 우선 이들은 무학무식에 글자를 전혀 읽을 줄 모르는 것이 최고의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이들은 찬송가를 부를 때면 이를 다만 번호 붙은 대로 따라 욀뿐 전혀 음미하고 이해하려 들지 않는 당나귀들로서 그저 멱따는 소리로 교회당을 채우면 성자들이 마냥 즐거워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들 가운데 몇몇은 불결한 걸인 생활을 탁발 수행입네 크게 팔아 먹고사는바, 남들 집 앞에서 큰소리치며 빵을 구걸하며 심지어 찾아가는 여관마다, 얻어 타는 마차마다, 얹혀 가는 나룻배마다 어디서나 소란을 피웁니다. 정작 걸인들은 이들 때문에 적잖은 손해를 입습니다. 하여 이들 지극히 유쾌한 자들은 이런 방식으로 불결하고 무식하고 촌스럽고 뻔뻔스럽게 행동하면서도 제 딴에는 사도들의 삶을 우리에게 재현해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더욱 재미있는 것은 이들이 이런 모든 것들을 마치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수학적 원리를 적용하듯 규율에 따라 행한다는 사실입니다. 신발 끈의 매듭 수, 각 수도복의 색깔, 각 소도복의 형태 차별, 허리띠의 소재와 한 가닥의 너비, 웃옷에 달린 쓰개의 형태와 크기, 삭발 기준 손가락 몇 마디까지, 수면 단위 몇 시간까지 정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평등이 신체적, 정신적 차이가 아주 큰 상황에서 얼마나 불평등한 조치인지를 도대체 누가 모르겠습니까? 이런 하찮고 자질구레한 규율들로 이들 쓸모없는 자들은 스스로를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는 한편, 서로가 서로를 비방하여 남이 조금이라도 달리 염색된 옷을 입는다거나 조금이라도 더 어두운 색깔의 옷을 입었다는 이유로, 스스로 사도의 은총을 선포한다고 떠들던 이들이 끔찍한 비극을 초래합니다. 하여 여러분은 아주 엄격한 수사들을 만나 볼 수 있을 텐데, 겉에 킬리키아 모직 옷을 입고 안에는 밀레토스 면직 옷을 고집하는 독실한 수사가 있습니다. 또 어떤 수사는 돈을 만지는 것을 마치 바꽃 독약처럼 기피하면서도 포도주와 여자는 대단히 절제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들은 모두가 보기에 놀라운 열정으로 서로 다른 생활 규칙을 따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서로 다르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닐까 합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커다란 기쁨을 주는 것은 이들 각자가 나름대로 사용하는 별칭입니다. 이들 스스로를 ‘허리띠를 졸라맨 수사’라고 부르는 한편, 자기들끼리 편을 먹고 콜레트회, 작은 형제회, 미니모회, 불리스타회 등으로 갈라섰습니다. 또 베네딕토회, 베르나르도회, 브리지다회, 아우구스티노 은수사회, 귈리엘미트회, 야고보회 등이 있는데, 이들은 공히 기독교도라고 불리길 원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행하는 것이 겨우 나름대로 제정한 의례들과 인간적인 사소한 규칙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를 커다란 공헌으로 여겨 이에 합당한 보상으로 천국 하나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장차 그날에 그리스도는 다른 모든 것들을 버려두고 오로지 하나,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였는지를 물으실 텐데, 이를 이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수사는 온갖 종류의 생선으로 가득 찬 아랫배를 보여 줄 것입니다. 어던 이는 1백 편의 찬송가를 쏟아 낼 것이며, 어떤 이는 무수히 많은 금식 기도 날짜를 - 물론 매번 아침 식사는 배가 터질 만큼 든든히 먹었으면서 - 계산할 것입니다. 어떤 이는 일곱 척의 배에 나누어 실어도 모자랄 만큼 많은 예배 절차들을 한가득 내세울 것입니다. 어떤 이는 예순 평생 단 한 번도 돈을 손에 -물론 손가락을 감싼 주교 장갑으로였으니 틀리다고 할 수 없는바 - 대지 않았다고 떠벌릴 것입니다. 어떤 이는 뱃사람들마저 걸치려 하지 하지 않을 만큼 때 타고 지저분한 쓰개 모자를 가져올 것입니다. 어떤 이는 자신이 마치 해면처럼 한 장소에 붙어 50년 이상을 살았음을 상기시킬 것입니다. 어떤 이는 맹렬한 찬송으로 쉬어 버린 목소리를 내세울 것이며, 어떤 이는 남을 만나지 않고 홀로 고행하여 정신이 혼미함을, 어떤 이는 오랜 침묵 수행으로 혀가 마비되었음을 자랑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끝날 줄 모르는 이러한 자아도취들을 가록막으며 물어 말하실 것입니다. “이들 새로운 유대인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나는 오로지 나의 율법으로 삼은 단 하나의 계율을 알고 있는바, 이에 관해서는 어느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과거 나는 비유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명명백백히 아버지의 왕국을 약속하였다. 이는 머리에 쓴 쓰개로도 아니요, 노래하는 찬송으로도 아니요, 실천한 금욕으로도 아니며, 이는 오로지 믿음과 사랑의 의무를 다함으로만이 가능한 것이라. 나는 자신의 과업을 지나치게 알아 달라 내세우는 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니 나보다도 경건하게 보이길 원하는 자들은 떠나되, 원한다면 아브락사스의 하늘에 거하라. 나의 가르침을 따르기보다는 저들의 하찮은 계율들을 우선시한다면, 저들에게 새로운 천국을 건설해 달라고 하라.” 이런 말씀을 이들 수사들이 듣는다면, 그리고 그리스도가 뱃사람이나 마부들을 이들보다 높이 사는 것을 본다면, 여러분은 이들이 어떤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볼 것이라 생각합니까?
이렇게 이들이 자기도취에 빠져 행복해하는 것은 나 우신의 도움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도 이들을 우습게 보지 못합니다. 이들이 국가 권력과는 멀리 떨어져 있고 더군다나 구걸에 가까운 생활을 하지만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모든 사람들의 모든 비밀을 소위 고해 성사라고 부르는 일을 통해 손에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비밀을 세상에 알리는 것은 불경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술을 마시다가 유쾌한 이야기로 좌중을 흥겹게 만들고자 할 때는, 이름은 언급하지 않으며 다만 모두의 추측에 맡겨 둔 채, 이를 발설하길 마다치 않습니다. 이들 말벌들은 누군가 행여 건드리기라도 하면, 대중 설교 가운데 제대로 이를 앙갚음하는데, 넌지시 말을 돌려 가며 원수 된 자의 일을, 누군지를 짐작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알 수 있도록 말해 버립니다. 이들은 여러분이 자신들 입에 무언가 먹이를 던져 줄 때까지 멈추지 않고 짖어 댑니다.
어떤 희극 배우가, 어떤 장돌뱅이 약장수가 대중 설교에서 연설 강연할 때의 이들보다 보기에 더 재미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들은 아주 우스꽝스럽게 그러나 딴에는 자랑스러워하며 연설술에 관해 수사학 선생들이 남겨 준 가르침을 흉내 냅니다. 불멸의 신이시여, 이들이 취하는 몸짓, 이들이 그때그때 바꾸는 목소리, 이들의 낮게 깔아 토하는 저음, 손짓 발짓하는 몸동작, 연이어 이렇게 저렇게 바뀌는 얼굴 표정, 고함을 동반한 이 모든 것들을 굽어살피소서. 설교를 잘하는 기술 혹은 뭐랄까, 숨겨 둔 비결은 형제로부터 형제로 전수되며 이어집니다. 내가 이런 비결을 전수받는 것은 불경한 일인지라 전수받지 못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추측으로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짐작하고 있습니다.
설교 첫 부분에서 이들은 기원의 문구로부터 설교를 시작합니다. 이것은 이들이 시인들로부터 도입한 것입니다. 두 번째 부분에서 이들은, 가령 사랑을 이야기하고자 할 때마다 나일강으로부터 서두를 꺼냅니다. 혹은 십자가의 신비를 설명하고자 할 때마다 바빌론의 용 벨로부터 기꺼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혹은 금식에 관하여 논하고자 할 때마다 열두 황도로부터 이야기의 단초를 발견합니다. 혹은 신앙에 관해 언급하고자 할 때마다 한참 동안 원의 면적 구하는 방법을 설명합니다. 나는 한번 어떤 대단히 어리석은 -잘못 말했습니다. ‘대단히 현명한’이라고 말하려 했습니다 - 분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열광하는 설교 가운데 삼위일체의 신비를 설명하고자 하였으며, 자신의 범상치 않은 학설을 제시하여 교회 학자들의 귀를 만족시키기 위해 전혀 새로운 방법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는 자모와 음절과 문장을 말하고, 이어 명사와 동사의 일치를 논하고 형용사와 명사의 일치를 논하였습니다. 하여 사람들이 이를 보고 놀라며 대부분이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며 ‘냄새나는 이 모든 것들은 도대체 무슨 아랑곳이람?’이라고 호라티우스의 문구를 말합니다. 마침내 그는 결론에 이르러, 문법의 기초 상식에도 벌써 삼위일체의 모상이 완벽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어떤 수학자도 이보다 명백하게 이를 모래판 위에 그려 증명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설교를 준비하는 데 위대하고 위대한 이 신학자는 지난 여덟 달 꼬박 열정을 쏟았으며 그 결과 오늘에 이르러 두더지보다 더 시력이 약화된 바, 아마도 안광의 정력이 온통 사유에 소모되었나 봅니다. 그는 시력을 잃을 정도로 일한 것을 후회하지 않으며 오히려 적은 대가를 지불하고 영광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잠깐 나는 여든 살 먹은 현역 교회 학자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스코투스가 이 사람의 몸의 빌려 다시 태어난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입니다. 그는 ‘예수’라는 이름에 담긴 신비를 해명하고자 하였으며,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게 이 단어에 숨겨진 것, 그러니까 예수에 관한 무언가를 드러내 보여 주었습니다. ‘예수(Jesus)’라는 단어는 세 가지 격변화형만을 갖고 있는 바 이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상징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합니다. 주격 ‘예수(Jesus)’는 <s>로 끝나고 목적격 ‘예수를(Jesum)’은 <m>로 끝나고, 여타의 격들은 ‘예수의(Jesu)’이며 이는 <u>로 끝나고 있는바, 이는 말로 차마 표현할 수 없는 신비를 간직하고 있는데, 세 글자는 각각 ‘정상(summum)’, ‘중간(medium)’, ‘말미(ultimum)’’을 나타낸다 말합니다. 여기에 또한 더욱 심오한 신비가 숨겨져 있다 합니다. 수학적 원리에 따라 ‘예수(Jesus)’는 가운데 <s>를 ‘제5 음보의 휴지 마디’로 하여 앞뒤가 같은 크기로 정확하게 이등분된다는 것입니다. 또 그는 이 글자를 유대 문자로는 ‘*’라고 적는데 이를 ‘쉰(syn)’이라고 소리 내는바, 이는 스코틀랜드 방언에서 ‘죄악’을 뜻하며 이로 미루어 볼 때 예수는 세상의 죄악을 모두 청산한 분임이 명백하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새로운 서두에 모두가 놀라 입을 크게 벌리며, 특히 교회 학자들은 과거 니오베가 겪었던 것과 같은 운명을 겪습니다. 나에게도 무화과나무로 깎은 남근 신 프리아포스가 카니디아와 사가나의 밤중 제사를 목격하였을 때 그에게 생겼던 일과 흡사한 일이 생겼습니다. 이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 결코 희랍인 데모스테네스 혹은 로마인 키케로가 이런 식으로 말머리를 꺼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희대의 두 연설가들은 이렇게 사태의 본질과는 무관한 것으로 시작하는 서두는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였으며, 자연을 스승 삼아 독학한 돼지치기들조차도 그와 같이 말을 시작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학들께서는 자신들이 사용하는 서론 방법, 그들 나름대로는 ‘예비적 변죽’이라는 것이 자신들을 위대한 연설가로 만들어 줄 것이라고 믿으며 연설 주제와는 절대 무관한 것으로 말머리를 꺼내는데, 청중들은 이에 당황하여 혼자 속으로 중얼거립니다. “저놈은 대체 어디로 가는 중이냐?”
서두에 이어 세 번째로 본론 서술에서는 복음서의 일부를 달음박질치듯 그리고 다만 부수적인 것처럼 슬쩍 지나칩니다. 정작 다루어야 할 핵심인데도 말입니다. 네 번째 부분에서는 가면을 바꿔쓰고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논의된 바 없는’ 신학자풍의 문제를 제시하게 합니다. 이것이 이들 나름대로의 연설 비법에 해당한다고 이들은 믿습니다. 이 부분에서 특히 이들의 신학자적 자부심이 한껏 드러나는데, 이들은 청중에게 존엄박사, 엄밀 박사, 극엄밀 박사, 거룩 박사, 순진 박사, 숭고 박사, 무류 박사 등 듣기에 그럴듯한 호칭들을 들먹입니다. 이어 삼단 논법, 대전제, 소전제, 결론, 부가 결론, 추정 등 그 밖에도 많은 스콜라 철학의 개념들을 알아듣지도 못하는 대중들 앞에서 언급합니다. 이제 제5막이 이어지는데, 여기서 배우는 자신의 최고 연기를 보여 주는바, 이들은 <역사 보감> 혹은 <로마사>에서 어리석고 무지한 이야기를 청중 앞에 끄집어내어 그것을 우의적으로, 비유적으로, 영적으로 해석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이들은, 호라티우스가 ‘사람 머리에’로 시작되는 작품을 쓰면서 만들어 낸 그런 괴물도 감히 따라갈 수 없는 자신들의 키메라를 하나 완성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누구로부터 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설교의 시작은 차분하고 가능한 한 작은 목소리로 말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하여 시작 부분에서는 스스로도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게 말을 하는바, 이를 두고 아무도 못 알아먹을 소리를 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또 이들은 때로 청중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해 고함 소리를 사용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꾹꾹 누른 목소리로 설교를 하다가 갑자기 굳이 필요하지도 않은 부분에서까지 미친 듯 포효하는 목소리를 냅니다. 언성을 높이는 것은 전혀 불필요한바, 누군가 이런 자들에게는 그런 광기를 치료할 박새풀이 필요하다고 선언할지도 모릅니다. 또한 이들은 어디서 들었는지 설교를 진행해 가면서 점차 열을 내야 한다고 믿습니다. 하여 각 부분별로 보면, 서두는 차분하게 끌어가며, 이어 사안 자체는 전혀 열을 낼 필요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목청이 터져라 소리 지르며, 숨이 턱까지 차올라 마지막에는 숨이 멎은 듯 갑자기 막을 내립니다.
이들은 수사학자들로부터 웃음에 관해 배웠으며, 하여 농담을 일부 설교 가운데 뿌려 보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친애하는 아프로디테여, 이 얼마나 많은 기막힌 재미이며 이 얼마나 어이없는 적재적소입니까! 실로 영락없이 ‘당나귀가 뤼라를 치는 꼴’입니다. 신랄한 풍자를 한다지만 결국 상대를 상처 입혔다기보다 오히려 간질였다고 해야 옳을 판입니다. 직설적으로 말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이보다 더한 아부는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모든 행동을 종합해 보건대, 이들은 이들보다 훨씬 말재주가 뛰어난 시장 바닥의 떠돌이 약장수에게서 설교를 배운 것이 틀림없다고 여러분은 맹세할 것입니다. 이들의 연설술과 약장수의 연설술은 사실 누가 누구에게서 배웠다고 말할 수 없을 만큼,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서 배웠다고 말해야 할 만큼 서로 닮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튼 이들도 나 우신의 놀라운 수고 덕분에 그들의 말을 원조 데모스테네스와 키케로의 연설처럼 들어 줄 청중을 확보하였습니다. 이들이 청중의 귀를 즐겁게 해주려고 할 때에 청중 가운데는 특히 장사꾼들과 여인네들이 많은데, 이들은 장사꾼들을 애무함으로써 장사꾼들이 더럽게 벌어들인 재산에서 조금이나마 콩고물이 떨어지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여인네들이 이들이 좋아하는 이유는 다종다양합니다만, 그중에서도 제일은 남편들에게 화가 나는 일이 있을 때 이들에게 그것을 실컷 배설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수사들의 부류가 어느 정도 나 우신에게 신세를 지고 있는지, 이들이 예배에 있어서 우습지도 않은 헛소리들과 고함으로 일종의 독재 권력을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행사하는지를 여러분은 보았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바로오와 안토니오라고 믿습니다. 이제 나는 이렇게 내가 베푼 은공을 모른 체하는 배은망덕한 배우 나부랭이들, 경건함을 가장하는 불경한 위선자들에 관해서는 그만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5.
이제는 군주들과 궁정 귀족들에 관해 몇 가지 언급하겠습니다. 이들은 타고난 혈통에 어울린다 싶게 탁 터놓고 솔직 담백하게 나 우신을 숭배합니다. 콩알 반쪽만큼이라도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들의 삶을 무엇보다 시답지 못한 것으로 기피할 것입니다. 군주의 자리에 앉는 것으로 인해 어깨에 엄청나게 커다란 짐을 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라면 모두가, 배신과 부친 살해를 저지르면서까지 권력을 얻으려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군주의 자리란 곧 사적인 것이 아닌 공적인 업무를 수행함이며, 국가의 공익 이외에는 어느 것도 생각하지 않음이며, 법률의 제정자이며 실행자로서 법률에서 손톱만치도 벗어나지 않음이여, 법률의 제정자이며 실행자로서 법률에서 손톱만치도 벗어나지 않음이며, 모든 공직자들과 행정관들을 청렴결백하게끔 이뜰어 감이며, 행운의 별처럼 도덕적 탁월함으로 인민에게 커다란 안녕을 가져다줄 수도 있고 불운의 행성처럼 심각한 불행을 가져다줄 수 있는 자로서 만인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자리이며, 필부의 과오처럼 그의 잘못을 장차 아무도 모르게 깊이 숨길 수 없는 자리이며, 아주 조금이나마 정직함을 잃으면 그 결과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에게 회복 불가능한 역병을 초래하는 자리이며, 군주의 운명에 동반하는 많은 것들이 그를 정의로부터 끌어내릴 것이기 때문에 설령 속임수에 의해서라도 쾌락과 방종과 아첨과 사치 등에 빠지지 않도록 더욱 노력하고 더욱 염려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마지막으로 반역과 원한과 전쟁과 폭력은 말고라도 제아무리 사소한 잘못일지라도 죗값을 치르게 하시며 행사한 권력만큼 이를 더욱 엄중히 따져 물으실 왕 중 왕을 항상 두려워해야 할 자리가 군주의 자리입니까. 내 말하노니, 이런 것들과 이런 종류의 많은 것들을 생각하면 -물론 이를 생각할 수 있을 만큼 현명하다면 말이지만 - 군주 된 자는 결코 잠과 식사를 즐겁고 유쾌하게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군주들은 나 우신의 도움을 받아 모든 근심 걱정을 신들에게 맡겨 두고 염려와 고민을 치워 둔 채, 영혼에 불쾌감이 들지 않도록 듣기 좋은 말만을 하는 자들에게 귀를 기울입니다. 이들은 열심히 사냥하고, 명마를 사육하고, 행정과 군인 요직을 판매하고, 백성들의 주머니를 털어 자신의 금고를 채울 새로운 방법을 매일매일 고안하고, 제아무리 불공정한 일일지라도 명목을 바꾸어 공정하게 포장하는 것으로 자신들이 군주의 본분을 충실하게 수행하였다고 믿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백성들의 마음을 제 편으로 얻기 위해 백성들에게 아첨하는 데도 힘을 기울입니다. 여러분, 한번 그려보기 바랍니다. 법률적 지식은 전무하고, 공공의 이익에 반하는 흡사 적대자이고, 개인적인 이익만을 추구하고, 쾌락에 흠뻑 젖어 학문과 자유와 진리를 혐오하고, 국가의 안녕은 전혀 생각하지 않으며 오로지 모든 것을 자신의 욕망과 편리에 따라 측정하는 인간들을 말입니다. 더불어 이들이, 모든 덕목을 하나로 묶어 상징하는 황금 목걸이를 걸고 있으며, 모든 영웅적 용기에 있어 어느 누구도 따라 올 수 없음을 뜻하는 진귀한 보석 왕관을 쓰고 있으며, 정의와 어느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공정을 상징하는 왕홀을 쥐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국가에 대한 극진한 헌신을 뜻하는 자줏빛 용포를 입고 있는 모습을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오늘날 군주들이 이런 장식물들에 비추어 자신들의 삶을 돌아본다면, 내 생각에 이들은 스스로 부끄러워하며 행여 익살스러운 해설자가 나타나 이런 모든 비극적 의복을 조롱하지 않을까 염려할 것입니다.
그럼 궁정 귀족들은 어떻습니까? 이들 대부분은 더할 수 없을 만큼 알랑거리며 비굴하고 어리석고 천박합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자신들이 모든 일에 있어 제일 앞서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다만 한 가지 겸손을 보이며 양보하는 것이 있는바, 금붙이며 보석들이며 자줏빛 관복 등 덕과 지혜를 상징하는 장신구들로 몸을 휘감은 반면 정작 덕과 지혜의 연마 자체는 남들에게 양보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군주를 ‘주인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지위가 주어졌음에, 군주에게 몇 마디 인사를 건넬 수 있음에, 군주를 부르며 ‘근엄하시고 존엄하시고 위대하신’ 등의 굉장한 호칭을 줄줄이 엮어 넣을 줄 앎에, 이런 낯간지러운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행함에, 이런 아부를 멋들어지게 해냄에 즐거워합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궁정 귀족 된 자들이 갖추어야 할 기술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들의 삶을 좀 더 가까이에서 자세히 살펴본다면, 여러분은 이들이 진정한 파이아케스 사람들 혹은 페넬로페의 청혼자들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자세한 것은 나보다 메아리의 여신이 더 잘 전달해 줄 것입니다. 이들은 벌건 대낮까지 잠을 자는데, 사제들을 고용하여 침대 옆에 대기시켜 놓았다가 침대에 누운 채로 재빠르게 예배를 마치고 나서 곧 조반을 먹는데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곧 점심 식사가 이어집니다. 그러고는 주사위 놀이, 장기 놀이, 점치기, 어릿광대, 익살꾼, 매춘부, 색정 희롱, 음담패설 등이 이어집니다. 그사이 한두 번의 간식이 있습니다. 다시 이어 저녁 식사, 그리고 술잔치가 유피테르에게 맹세코 한 판 이상 벌어집니다. 이런 방식으로 이들은 이런 삶에 물리지도 않는지 몇 시간, 몇 날, 몇 달, 몇 년, 몇백 년이고 이렇게 살아갑니다. 나 우신조차도 때로 이들이 허풍 허세를 칠 때면 역겨움을 느낄 정도인바, 귀족 여인들은 하나같이 모두 치맛자락을 남들보다 길게 늘어뜨릴수록 더욱 신적으로 보인다고 믿는가 하면, 귀족 사내들은 남들보다 그들이 모시는 유피테르와 가까운 사이로 보일 수 있도록 다른 사람들을 팔꿈치로 밀쳐 내며, 목에 걸고 있는 목걸이가 남들보다 무거울수록 더욱 스스로 대견해합니다. 그래 봐야 결국 돈 자랑에 힘자랑밖에 안 되는데도 말입니다.
궁정 귀족들의 모습에 열심으로 도전하는 혹은 거의 능가하는 자들로 교황들과 추기경들과 주교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외관을 가까이 자세히 살펴볼 것 같으면 이렇습니다. 줄무늬 장식이 있고 눈처럼 흰 것이 인상적인 복장은 한 점의 과오가 없는 삶을 의미하며, 쌍으로 모자 뿔을 세우고 그 꼭지에 매듭 하나를 매어 둔 주교관은 이를테면 구약과 신약에 대한 공히 절대적인 지식을 상징하며, 손을 두루 감싸고 있는 주교 장갑은 인간 세속 어떤 일에도 손대지 않으며 오로지 성사만을 주관하는 정결함을 나타내며, 지팡이는 그들에게 맡겨진 양 떼를 지극한 정성으로 돌보며 깨어 있음을 가리키며, 앞에 내세운 십자가는 분명코 모든 인간적 욕망을 이겨 냇음을 웅변합니다. 만약 이들 가운데 누군가가 자신의 복장과 기구가 갖는 이런 의미들을 음미해 보았다면, 내 말하노니, 그의 삶은 온통 두려움과 불안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이들은 스스로의 만족에만 매달려 매사 즐겁게 지내고 있습니다. 나머지 모든 과업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혹은 거느린 수사들에게 혹은 소위 보좌 사제들에게 맡겨 둔 상태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가진 호칭 가운데 ‘주교’가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의식하지 못하며, 주교란 수고하고 돌보고 간수하는 자임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돈을 긁어모으는 일에 관하여 그들은 ‘주교직’을 아주 정확히 수행하는바, ‘눈먼 파수를 보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추기경들도 자신들이 사도들의 자리를 이어받았으며, 자신들에게 그들의 선구자이신 사도들과 동일한 것이 요구되며, 자신들이 영적 재산의 주인이 아니라 다만 관리자로서 장차 이에 관해 엄정한 감사를 받을 것임을 고려하였다면, 그렇게 차려입고 잠시나마 심사숙고하였다면, 다음과 같이 물었다면 어떠했겠습니까? ‘눈처럼 흰 복장은 무엇을 의미하지? 지극하고 숭고한 결백함을 아닐까? 안에 입은 자줏빛 주교복은 무엇을 의미하지? 하나님을 향한 불꽃 같은 사랑은 아닐까? 밖에 걸친 풍성하게 주름 잡혀 흘러내려 존귀하신 주교를 태운 노새 전체를 다 덮고도 남을 만큼 품이 넓은 외투는, 아니면 어쩜 낙타 한 마리쯤은 충분히 덮고도 남을 만큼 큰 외투는 어떤가? 가르치며, 북돋으며, 위로하며, 야단치며, 훈계하며, 전쟁을 중단시키며, 오만한 군주들과 싸우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위해 재산뿐만 아니라 피라도 기꺼이 희생하여 지극히 큰 사랑을 만인에게 골고루 베풀며 모두를 감싸는 것을 의미하지 않겠는가? 가난하게 살았던 사도들을 대신하는 자들에게 도대체 재산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렇게 그들이 한 번이라도 고려하였다면, 내 말하노니, 추기경들은 지금 그들이 차지한 자리에 머물지 않고 이를 기꺼이 버렸을 것이며 옛날 사도들이 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세상을 염려하고 근심하며 평생을 보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교황들이 예수와 동일한 삶을 살아가고자 노력하였다면, 다시 말해 청빈과 고난과 가르침과 십자가와 생명의 희생을 닮고자 하였다면, 하다못해 교황 내지 사제라는 성스러운 호칭을 고민하였다면, 이는 누구보다 근심과 염려가 가득한 자리일 것입니다. 이럴진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교황 자리를 사려는 자는 누구이며, 일단 사고 나서도 칼과 독약과 온갖 폭력으로 이를 보존하려는 자는 누구입니까? 만약 교황들이 직분에 대한 현명한 깨달음을 얻는다면 이들은 누리던 엄청난 행복을 잃고 걱정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현명한 깨달음이라고 했습니까? 깨달음까지는 필요 없고, 다만 예수 그리스도가 말한 소금 알갱이 하나면, 그들은 많던 재물, 많던 명예, 많던 권력, 많던 전리품, 많던 의식, 많던 면책, 많던 세금, 많던 면죄부, 많던 말과 당나귀와 호위병들, 많던 쾌락들을 잃게 될 것입니다. 이런 몇 단어들로, 여러분은 내가 얼마나 많은 밀거래를, 얼마나 많은 장사를, 얼마나 많은 상품의 바다를 담아내고 싶었는지를 알기 바랍니다. 이런 것들이 사라지고 대신 철야와 금식과 눈물과 설교와 강론과 연구와 탄식 등 수천 가지 고행들이 교황들을 기다릴 것입니다. 여기서 잊고 넘어갈 수 없는바, 수많은 서기들과 수많은 필경사들과 수많은 공증인들과 수많은 변호사들과 수많은 교구 검사들과 수많은 비서들과 수많은 노새꾼들과 수많은 마부들과 수많은 주방장들과 수많은 포주들, 좀 더 부드러운 단어를 선택하려고 하였는바, 행여 귀에 거슬리지 않을까 저어됩니다만, 통틀어 한마디로 한다면 인간 떼거지, 로마 교황청의 관직을 더럽히는 -아니, 말실수 - 드날리는 군상들은 결국 굶주리게 될 것입니다. 하기야 이들을 생각한다면, 교회의 최고 수장들이 진정한 세상의 빛이 되어 지팡이와 바랑을 맨 목자의 삶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비인간적이며 몰인정하고 더 나아가 저주스러운 일입니다.
오늘날 교황들은 수고스러운 것들은 베드로와 바오로에게 맡겨 두고 넘쳐 나는 여가를 즐기며, 빛나고 즐거운 일을 맡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나 우신 덕분에 인간 종족들 가운데 어느 누구보다 여유롭게 살아가며 근심이라고는 전혀 없으며, 다만 신비스러운 흡사 무대 의상을 걸치고 예배를 거행하며 복된 자, 존경스러운 자, 신성한 자라는 칭호를 휘두르며 축복과 저주로 파수꾼의 일을 수행하기만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충족시킬 것이라 믿습니다. 기적을 행하는 것은 낡고 진부하며 오늘날에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며, 대중을 교화시키는 것은 힘겨운 일이며, 성서를 해석하는 일은 학교에서나 할 일이며, 기도를 올리는 일은 한가한 일이며, 눈물을 흘리는 일은 미욱한 여인들의 일이며, 가난을 실천하는 것은 역겨운 일이며, 남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은 위대한 왕들에게조차 지복의 발바닥에 입 맞추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자신들로서는 치욕스럽고 가당치 않은 일이며, 죽는 것도 끔찍한 일인데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만부당한 치욕이라 교황들은 생각합니다.
이들의 유일한 무기는 바오로가 경계하였던바 달콤하고 비위에 맞는 말이며 또한 이들이 후하기 이를 데 없이 베푸는 성무 면직, 성무 집행 정지, 제1차 제명 및 제2차 제명, 파문, 사람들의 영혼을 고갯짓 한 번으로 지옥에 보내 버릴 수 있는 무시무시하고 벼락같은 파문자들의 초상 전시 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성스러운 사제들과 대리자들이 할 본분은 악마에게 충동 받아 베드로의 유산을 들어먹고 탕진하는 자들을 무엇보다 매섭게 나무라는 일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복음에 따르면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하였거늘, 교황들은 이와 달리 토지와 도시와 세금과 통행료와 권력을 베드로의 유산이라 부릅니다. 하여 교황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불태우며 칼과 불로써 기독교인들의 엄청난 유혈 사태를 불사하는바, 이렇게 하는 것이 사도들이 하였던 것처럼 용감하게 소위 타락한 적들을 척결하여 그리스도의 신부(新婦)된 교회를 지키는 것이라 믿습니다. 하지만 사실 교회의 가장 무섭고 지독한 적은, 그리스도가 세상에서 잊히도록 침묵으로 방치하며, 장사치의 볍률로 그리스도를 결박하며, 억지 해석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역병 같은 삶으로 그리스도를 살해하는 불경한 교황들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피로 세워졌으며, 피로 굳건해졌으며, 피로 성장하였으며, 이렇게 자신의 방법으로 그의 백성들을 지키고자 하였던 예수 그리스도가 돌아가셨으니 이제는 자신들이 칼을 들어야 할 것처럼 교황들은 전쟁을 불사합니다. 전쟁은 끔찍하기가 짐승이 아닌 인간에게는 어울리지 않으며, 시인들이 말하는 바 복수의 여신들이 보낸 것이라 할 만큼 미친 짓이며, 세상을 한꺼번에 휩쓸어 가는 역병처럼 치명적이며, 흉악무도한 날강도들이 제일 잘 수행하곤 하는 무법한 일이며, 그리스도와는 무관한 불경한 일인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들은 다른 것들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오로지 전쟁을 수행합니다. 이 가운데 여러분은 백발이 성성한 교황들조차 청춘의 열정과 힘을 과시하는 것을, 엄청난 비용에 괘념치 않는 것을, 역경과 고난에 지치지 않는 것을, 국법과 종교와 평화와 인간 만사가 모조리 뒤죽박죽 엉망이 되는 것에도 굴하지 않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들 옆에서 학식을 갖춘 아첨꾼들은 명백한 광기를 열정과 경건과 용기라고 부르며, 어떤 사람이 치명적인 칼을 뽑아 형제의 복부를 찌르면서도 그리스도의 크나큰 사랑과 기독교인이 따라야 할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부터 조금도 벗어나지 않을 수 있는 놀라운 방법을 찾아내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에 있어 게르마니아의 주교들이 선례를 제공한 것인지, 아니면 그보다는 차라리 그들도 선례를 따른 것인지 아직까지 나는 확신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게르마니아의 주교들은 공공연히, 관복을 벗어 놓고 심지어 축도는 물론이고 그런 모든 종류의 예배 의식까지 생략한 채, 페르시아의 태수 노릇을 하는바, 이들은 전쟁터의 최전방 이외의 장소에서 자신의 영혼을 하느님에게 바치는 것은 비겁함이며 주교의 직분에 어울리지 않는 태도라고 판단합니다.
그리고 사제들의 무리도 자신들이 주교들의 이런 성덕에 뒤처지는 것을 불경이라 여겨, 십일조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병사처럼 칼을 들고, 창을 잡고, 돌을 던지며 온갖 무기들을 갖고 참전합니다. 또한 개중 눈 밝은 자들은 옛 문서를 뒤져 백성들을 위협하여 십일조 이상을 쟁취하기 위한 문구를 찾아냅니다. 반면 그 외에 여기저기서 발견되는바 그들이 백성들에게 제시해야만 하는 많은 다른 의무들은 그들의 안중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깔끔하게 밀어 낸 머리카락도 이들에게, 모름지기 사제란 이 세상의 모든 욕망을 버려야 하며 오로지 천국의 일만을 명상해야 할 존재임을 알려 주지 못합니다. 하지만 마냥 즐거운 이 이 인간들은 박약한 기도를 중얼거리는 것으로 스스로 행 ㅑ할 의무를 정당하게 다했노라 믿습니다. 그들의 귀에 대고 크게 소리쳐도 스스로도 알아듣거나 이해하지 못할 그런 기도를, 나 우신조차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바 어느 신(神)도 듣거나 혹은 알아들을 수 없을 그런 기도를 말입니다.
사제들 모두가 수익을 올리는 데 밤낮을 가리지 않으며, 그와 관련된 법률에 정통하다는 점에서, 그들은 세속인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또 커다란 부담을 져야 할 경우 이를, 마치 공을 다른 사람에게 받아서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할 때처럼 영리하게 다른 사람에게 전하가는 것을 공통점으로 들 수 있습니다. 세속 군주들은 흔히 국가를 다스릴 과업을 비서들에게 떠맡기고, 다시 비서들은 비서의 비서들에게 하청을 주는 것처럼, 사제들은 ‘사양지심’(辭讓之心)을 발휘하여 긍휼의 과업을 모두 백성들에게 양보합니다. 그러면 백성들은 이를 다시, 자신들이 교회와 무관하고 세례 서원을 행하지 않은 듯 ‘교회 식구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맡깁니다. 교회 식구들 가운데, 그리스도가 아니라 세속에 헌신하기로 맹세나 한 듯 자신들을 ‘재속 사제’라고 부르는 자들은 다시 이를 ‘수도원 사제’들에게 굴려 보냅니다. 수도회 사제들은 이를 다시 수도승들에게, 다시 유연 수도승은 강직 수도승에게, 다시 모두는 탁발 수도승에게, 다시 탁발 수도승은 이를 카르투시오 수도회의 은수자들에게 맡깁니다. 하여 오로지 카르투시오 수도회 은수자들에게서 긍휼은 은밀히 간직되어 있는바, 어찌나 잘 감추어져 있는지 여간해서는 보이지 않을 정도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황들은 예배를 통해 금전을 부지런히 모으는 데 바바 사도의 막중한 과업은 주교들에게 이양하며, 주교들은 사제들에게 이양하고, 사제들은 부제들에게, 부제들은 탁발하는 형제들에게 이양합니다. 그럼 탁발 수도승들은 이를 다시 양털을 깎는 목자들에게 전가합니다.
이상 내 연설의 목적은 칭송이라면 모를까, 교황들과 사제들의 삶을 들추어내어 풍자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내가 훌륭한 군주들을 욕보이거나 악한 군주들을 칭송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나는 나 우신을 받아들이고 나 우신을 가까이 하지 않으면 인간들 가운데 누구도 행복하게 살 수 없음을 밝혀내기 위해 이를 약간 살펴보았을 따름입니다.
람누스에 모셔진 여신이 인간사의 행불행을 다스리매 나 우신과 뜻을 같이하여, 현자들을 언제나 적대시하며 어리석어 졸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늘 좋은 일만을 가져다주는 것은 어찌 된 것입니까? 여러분은 티모테오스를 알고 있을 텐데, 그의 별명을 들어 보았을 것이며 속담에 ‘잠든 사람의 망태가 낚시를 한다’는 말이나 ‘부엉이가 날개짓한다’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반대로 현자들에 대해서는 ‘넉 달 만에 태어났다’라든지 ‘세야누스의 준마’나 ‘톨로사의 황금’이란 말을 들어 보셨을 겁니다. 자칫 나를 따르는 에라스무스의 책을 내가 표절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6.
요점으로 돌아가, 운명의 여신은 생각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며, 무모한 사람들을 사랑하며,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말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반면 지혜는 사람을 소심하게 만드는바, 결국 지혜로운 사람들이 가난과 기아와 헛된 희망 가운데 천대받으며 각광은 고사하고 관심조차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을 여러분은 보았을 겁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자들은 돈을 굴리며, 국가의 통솔에 참여하여 손쉽게 모든 면에서 성공을 구가합니다. 만일 군주들의 마음을 얻어 금은보화로 치장한 흡사 신들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행복이라면, 이런 면에 있어 지혜만큼 쓸모없는 것이 무엇이며, 지혜로운 자들 가운데 머무는 것보다 더한 저주는 무엇입니까? 부를 획득하고자 할 때, 만일 자본가가 지혜를 따르고 억견을 배척한다면, 거짓말을 하면서 얼굴을 붉힌다면, 사기와 고리대금에 대해 현자의 양심으로 작으나마 가책을 느낀다면 어떻게 재산을 긁어모을 수 있겠습니까? 만일 누군가가 교회의 위엄과 재산을 얻고자 한다면, 이런 데는 당나귀나 물소가 현자보다 빠르게 도달할 것입니다. 만일 쾌락을 원한다면 말하거니와, 여인들은 -지금까지 이야기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바 - 아주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반하기 마련이며 현자들은 마치 전갈을 피하듯 두려워하며 도망칩니다. 마지막으로 지금보다 조금 더 즐겁게 그리고 행복하게 살려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주변에서 지혜는 최우선적으로 제거해야 할 것이며 무엇이든 동물적인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교황들이나, 군주들이나, 재판관들이나, 행정관들이나, 친구들이나, 적들이나, 지위가 높은 자들이나, 지위가 낮은 자들이나 할 것 없이 여러분이 고개를 돌리는 곳 어디에서나 돈은 막강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현자들은 돈을 조롱하고 있으니, 이런 자들을 치워 버리는 데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나 우신의 칭송거리로 말하자면 끝은 없으며 한계는 무량하다 하겠습니만, 연설은 무릇 언젠가는 끝나야 할 것입니다. 하여 이제 말을 마치고자 합니다. 하지만 연설을 끝맺기 전에 잠시 위대한 작가들을 여러분에게 소개할까 합니다. 이들은 그들의 글솜씨와 실천을 통해 나 우신을 빛나게 하였는바, 이들을 소개하는 것은 나 우신이 어리석게도 그저 나 잘난 맛에 취해 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혹은 까다로운 자들이 내가 아무것도 입증하지 못했다고 고발하지 않도록 만들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들로써 내 주장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그저 말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선 널리 사람들이 인정하는 격언에 이르길, “진짜가 없는 곳에서 진짜를 가장한 것이 최고다”하였고, 어린아이들에게 “적당한 때에 어리석음을 가장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지혜다”가 올바른 것으로 가르쳐지고 있는바, 여러분은 벌써 이로써 나 우신이 얼마나 훌륭한지를 짐작할 텐데, 나 우신을 가장한 거짓 그림자 내지 모방물조차도 그와 같은 커다란 칭송을 현자들로부터 받고 있으니 말입니다. 또한 이보다 훨씬 분명하게, 포동포동 살진 에피쿠로스와 돼지가 표방한바, ‘잠깐 동안’이라는 제한이 붙긴 했어도 “어리석음을 지혜에 섞으라” 명하였습니다. 곧이어 “때로 어리석음도 즐거운 일이다”라고도 하였습니다. 또 호라티우스는 다른 곳에서 “차라리 나는 넋 나가고 못 배운 시인으로 보이며 형편없는 시를 즐겨도 이를 아예 깨닫지 못하길!”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시인 호메로스에서 여러 방면에서 텔레마코스를 칭송하며 그를 ‘어리석다’고 하였으며, ‘어리석다’라는 단어를 비극 시인들은 순진무구의 뜻을 담아 기꺼이 어린아이들과 소년들에게 별명으로 사용하곤 하였습니다. <일리아스>라는 성스러운 서사시를 ‘어리석은 군주들과 백성들의 뜨거운 열정’말고 달리 무엇이라 정의하겠습니까? 또한 ‘전체가 어리석음으로 가득하다’는 키케로의 말은 나에 대한 절대적인 칭찬이라 하겠는바, 대저 좋은 것일수록 널리 퍼져 있으며 그만큼 빛난다 하였던 격언에 비추어 보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도들에게는 어쩌면 이런 작가들이 신통치 않게 느껴질지 모르겠는바, 이제 나 우신을 칭송하였던 증거를 가능하다면 성서적 증언들에서 찾아보거나 혹은 학자풍으로 논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ㅏ. 먼저 교회 학자들에게 양해를 구하는바, 그들이 내게 이를 허락해 주었으면 합니다. 다음으로 이런 험난한 과제를 시작하게 되었기에 하는 말인데, 무사히 여신들을 헬리콘산으로부터 여기까지 길고 긴 여정을 감당하시라 불러 모시는 것도 불경스러운 일이려니와, 더군다나 무사이 여신들과는 무관한 일이므로, 또 이왕 교회 학자 시늉을 내기로 하여 고행의 가시밭길을 걸어야 하므로 어쩌면 차라리 스코투스의 영혼을 소르본 대학으로부터 불러 내 가슴속에 들어가게 하는 편이 좀 더 합당한 일일지 모르겠습니다. 잠시 그러고 나서 신경질적이며 고슴도치보다 가시가 많은 그를 그가 원하는 곳 아무 데로나 보내거나 혹은 ‘까마귀밥’이 되도록 버려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다른 사람의 얼굴을 하고 교회 학자의 옷을 입는 것을 허락하기 바랍니다. 하지만 그래도 두려운 것은, 내가 신학과 관련된 많은 것을 제시하는 것을 보고 내가 나를 따르는 신학 박사들의 은밀한 비밀을 표절하였다고 행여 누군가 나를 절도범으로 고발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과히 놀라운 것도 아닌 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학식들은 가깝게 지내던 교회 학자들로부터 내가 주워들은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무화과나무로 깎은 남근상 프리아포스도 신학 박사들이 읽는 소리를 듣고 희랍어를 외웠다 하며, 루키아노스가 말한 수탉도 오랫동안 사람들과 함께 지내다 보니 사람들의 대화를 모두 이해하게 되었다 하지 않습니까?
그럼 양해를 받았다 치고 본론으로 가겠습니다. <코헬렛>의 첫머리에 이르길, “어리석음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하였습니다. 여기서 헤아릴 수 없다 하였으니, 이는 인간 족속 모두를 포섭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극소수는 예외를 둘 수 있지만 나로서는 언제 누가 이런 예외적 인간을 만났을까 싶습니다. 또한 이보다 더욱 분명하게 <예레미야서>에 말하되 “사람은 누구나 그 지식으로 인하여 어리석다”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지혜를 오로지 하나님에게 돌렸으며, 인간 일체에게는 어리석음을 남겨 두었던 것입니다. 그는 또한 이에 조금 앞서 “인간은 제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어찌하여 당신은 인간으로 하여금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고 하였습니까, 예레미야여? 예레미야는 대답하여 말하되, 놀라울 것도 없는 바 인간은 지혜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 할 것입니다. 다시 <코헬렛>으로 돌아와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를 보면서 여러분은 무엇을 느낍니까? 이 말은 결국 내 방식대로 말하자면 인간 삶은 다만 어리석음의 연극이라는 것인데, 이로써 코헬렛은 매우 정당하게 여러 번 언급되어 마땅한 키케로의 말, 다시 언급하면 “전체가 어리석음으로 가득하다”에 찬성표를 보태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지혜로운 <집회서>의 저자는 “미련한 자는 달처럼 변하나, 경건한 이의 말은 태양처럼 항상 지혜롭다” 하였습니다. 흔히 달은 인간을 가리키고, 모든 빛의 원천인 태양은 하나님을 가리키는바, 이로써 그는 인간 종족은 모두 어리석으며, 오로지 지혜롭다는 이름은 하나님에게만 가능하다고한 뜻을 표현하였습니다. 이 말에 찬동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몸소, 복음서에 기록된바, 오로지 하나님을 제외하고 누구도 선하지 않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선하다는 것은 지혜롭다는 것이며, 지혜롭지 않다는 것은 어리석다는 것이므로, 결론적으로 스토아적 논리에 따라 모든 인간은 필연적으로 어리석음에 포섭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 솔로몬은 <잠언> 15장에서 “어리석음은 어리석은 자에게 즐거움이다”혀였는데 이는 다름 아니라 어리석음이 없다면 인간은 결코 달콤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와 동일한 뜻을 전하는 것으로 “지혜가 많으면 걱정도 많고 지식을 늘리면 근심도 늘기 때문이다”하였습니다. 이 말을 한 설교자는 다시 7장에서 대단한 고백을 합니다. “지혜로운 이들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고, 어리석은 자들의 마음은 잔칫집에 있다”하여 이 설교자는 지혜를 터득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생각하며, 나 우신을 또한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이 전혀 믿기지 않는다면, 이 설교자가 직접 기록한 말을 들어 보기 바랍니다. “나는 지혜와 지식, 우둔과 우매를 깨치려고 마음을 쏟았다”. 여기서 말의 순서에 주목해야 하는데 어리석음을 마지막에 언급함으로써 어리석음을 칭송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설교자 코헬렛이 이렇게 기록한 것은 교회 서열에 따른 것인데, 위엄에 있어 최고 어른이 제일 마지막에 등장하는 것이 교회 서열이니, 이런 부분에서 나는 복음서의 가르침을 떠올립니다.
<집회서>의 저자는 분명하게 44장에서 어리석음이 지혜로움보다 빛난다 하였으니 이를 인용으로 입증하지 않고, 나의 문답 유도에 맞추어 플라톤의 작품에서 소크라테스와 함께 문답식 토론을 벌이는 사람들이 흔히 그러하였듯, 여러분이 알맞은 대답을 하는 방식으로 이를 설득해 보고자 합니다. 사람들이 흔히 숨겨 두는 물건은 세상에서 보기 드물고 값진 물건입니까, 아니면 흔하고 값싼 물건입니까? 여러분, 왜 침묵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모르는 척 외면해도 희랍인들이 널리 사용한 격언이 여러분을 대신하여 대답하고 있습니다. “물동이는 문밖에”라는 속담인데, 이를 논거로 인정하지 않으실까 봐 말씀드리자면, 나를 따르는 박사들이 신처럼 모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격언을 언급하였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구도 금은보화를 길가에 버려둘 만큼 어리석지 않습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귀중한 보석들은 아주 깊숙이 땅을 파고, 이것으로도 부족하여 철옹성으로 보호막을 둘러 만든 굉장히 비밀스러운 장소에 숨길 것이며, 지저분한 쓰레기는 밖에 둘 것입니다. 귀하고 소중한 것은 감추고, 천하고 지저분한 것은 밖에 버려둘 것인바, 이를 미루어 지혜를 은폐하기보다는 어리석음은 감추라고 하셨으니, 지혜는 어리석음보다 값어치가 헐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여러분에게 <집회서>의 증언을 전하자면 “어리석음을 감추는 사람이 자기 지혜를 감추는 사람보다 낫다”.
성경에서는 영혼의 정결함을 어리석은 자에게 두었는데, 지혜로운 자는 누구도 자기에게 견줄 만하지 못하다고 믿는다 하였습니다. 하여 나는 코헬렛이 10장에 기록한 바를 알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길을 걸으면서도 지각이 모자라서 만나는 사람마다 바보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들을 자신과 동등하게 놓고 스스로를 높이지 않는 사람들이 없는 세상에서, 모두에게 자신의 명예를 같이 나누려고 하는 것은 정결함의 매우 훌륭한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예루살렘의 임금 또한 이런 호칭을 부끄러워하지 않아 <잠언> 30장에 “정녕 나는 여느 사람보다 멍청하였고”라고 하였습니다. 만백성을 가르친 선생 바울은 <고린도서>에서 기꺼이는 아니지만 아무튼 스스로에게 어리석다는 별칭을 붙였습니다. “나는 훨신 더 어리석게 말합니다”라고 하였는바, 그는 어리석음에 있어 남에게 뒤처지는 것을 창피스러운 일로 생각한듯합니다.
저기 희랍어를 좀 안다는 인문학자들이 내게 야유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까마귀들 혹은 오늘날의 교회 학자들을 눈멀게 만들고 있는데, 마치 연막 같은 주해서들을 다른 사람들에 유포시킴으로써 말입니다. 이들 무리 가운데 우두머리는 아니더라도 제2인자는 되는 자가 바로 나의 시종 에라스무스입니다. 나는 칭찬을 위해 이 이름을 여러 번 언급하였습니다. 그들이 저기서 이렇게 악을 쓰고 있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우신다운 인용이라 하겠다. 사도의 생각은 댁이 꿈꾸고 있는 것과는 천양지차다. 바울은 자신이 남들보다 어리석게 보이려고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다. 바울이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입니까? 나도 그러합니다’라고 했던 것은, 이런 일에 스스로를 떠벌리는 거짓 사도들과 자신을 짐짓 동등하게 놓은 것이며, 하지만 이어 바로 ‘나는 훨씬 더 그러하다’라고 고쳐 말함으로써,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 자신이 여타 사도들과 같은 일을 하고 있으나, 다른 한편 거짓 사도들보다 자신이 월등함을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진실을 알림에 있어 아무튼 잘난 체하는 발언으로 다른 사람들의 귀를 거스르지 않도록 바울은 ‘어리석은 내가 말하노니’라는 말로서 어리석음을 가장했을 뿐이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고 진실을 말할 수 있는 특권은 오로지 어리석은 자들에게 주어져 있음을 바울이 알았기 때문이다.”
바울이 이런 발언으로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를 따지는 일은 그렇다면 저기 희랍의 인문학자들에게 맡겨 두겠습니다. 나는 덩치 크고 풍성하고 무게 있고 대중에게 인정받는 교회 학자들을 따르겠습니다. 대부분의 박사들도 이들을 추종하여 제우스에게 맹세코 기꺼이 아무렇게나 해석하길 원하기 때문이며, 희랍 문헌학자들처럼 희랍어와 라틴어와 히브리어 등 외국어 3종을 배워 정확히 알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