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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1(卷一) : 사해(四海)는 하나가 되었건만

하남(河南) 양무현(陽武縣) 남쪽. 대하(大河)의 도도한 물줄기가 화북의 기름진 황토지대를 휘젓고 흐르다가 멀리 길을 바꾸어 사라지면서 남긴 넓은 퇴적층 모랫벌이 있었다. 세월의 비바람에 깎인 크고 작은 모래 언덕들이 마치 물결 같은 모양을 이루고 있다하여 사람들은 그곳을 박랑사(博浪沙)라 불렀다.

()제국의 수도 함양(咸陽)에서 시작해 함곡관(函谷關)을 빠져 나온 관도(官道)가 그 박랑사를 가로질렀다. 새로 통일된 대륙의 동서를 잇는 그 길은 낙양과 팽성(彭城)을 지나 북으로는 임치(臨淄), 남으로는 회계(會稽)에 이르렀다.

서력기원 전 218, 진 시황제(始皇帝) 294월 어느 날이었다. 늦은 봄 햇살에 점점 달아오르는 한 모래언덕 뒤에 몸을 감춘 두 사내가 이따금 고개를 들어 멀리 관도를 살펴보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젊었으나 생김과 차림은 그들이 함께 있는 것조차 이상하게 여겨질 만큼 서로 달랐다.

한 쪽은 크지 않은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와 잘 생긴 걸 넘어 예쁘다는 느낌을 줄만큼 희고 반듯한 얼굴이었다. 다른 쪽은 열자 가까운 키와 깍짓동 같은 몸피에다 살갗은 검붉고 눈코는 험상궂게 느껴질 만큼 억세 보였다. 차림도 마찬가지, 한쪽은 갖춰 입은 귀공자 차림인데 다른 쪽은 거동의 편의만을 헤아려 지은 듯한 검수(黔首=일반 백성)들의 거친 베옷이었다. 남장한 미녀 같이 잘 생긴 사내의 성은 장() 이름은 량() 자는 자방(子房)이었다. 하지만 그는 원래 희씨(姬氏)로서 그때로부터 꼭 십 이년 전에 망해버린 한()나라의 유서 깊은 가문의 자손이었다. 그의 조부 희개지(姬開地)는 한나라의 소후(昭侯) 선혜왕(宣惠王) 양애왕(襄哀王)때 재상을 지냈고, 그 아버지 희평(姬平)은 희왕 (釐王) 도혜왕(悼惠王)때 재상을 지냈다.

시황제가 한()을 멸망시키고 그 땅에 영천군(潁川郡)을 설치했을 때 량은 아직 나이가 많지 않아 벼슬길에 나가기 전이었다. 하지만 부조(父祖) 이대가 오세(五世)에 걸쳐 섬긴 한나라의 은덕으로 노복(奴僕)만도 3백 명이 될 만큼 그의 집안은 번성했다. 량은 그 한나라를 위해 원수 갚기를 맹세하고 그때부터 전 재산을 털어 진시황을 죽일 자객을 구했다. 그 무렵 아우가 죽었으나 자객을 구하는데 쓸 재물이 줄어드는 게 아까워 장례식조차 제대로 치러주지 못했을 만큼 량의 복수심은 치열했다.

때마침 동쪽 바닷가에 창해군(蒼海君)이라 불리는 이가 숨어살며 많은 역사(力士)를 기르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때부터 성을 장()으로 바꿔 자신을 감춘 장량은 천리를 걸어 창해군을 찾아보고 만금을 바치며 자신의 뜻을 밝혔다. 어떤 이는 그가 동이(東夷)의 군장(君長)이라 하지만 창해군은 아마도 외진 바닷가에 숨어 반진(反秦)의 세력을 키우고 있던 협객으로 보는 편이 옳을 듯하다. 장량의 말을 듣자 기꺼이 한 역사를 내놓았다.

좋소. 마침 내게는 백 이십 근 철퇴를 부젓가락 휘두르듯 하는 장사가 있소. 게다가 그에게도 진작부터 여정(呂政=원래 왕실의 성은 또는 을 썼으나 진시황을 미워하는 사람들은 그가 呂不違의 아들이란 뜻에서 씨로 봄)을 죽이고자 하는 뜻이 있었소. 반드시 공을 도와 망국(亡國)의 한을 풀어줄 것이오.”

그 장사가 바로 지금 장량 곁에 있는 사내였다. 하지만 장량은 목숨을 걸고 함께 엄청난 일을 꾸며 왔으면서도 그의 출신은 커녕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처음 소개를 받고 그 이름을 물었을 때 창해군은 무겁게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운 좋게 여정을 저격(狙擊)해 죽인다 해도 당분간 천하는 진()의 것으로 남아있고 그대들은 쫓기는 몸이 될 것이오. 장이(張耳)와 진여(陳餘)가 쫓기면서도 함께 하는 것이 비록 아름다워 보이나 그만큼 더 고단하고 힘들 것이오. 진작부터 깊이 사귀어 온 적이 없을 바에야 각기 나뉘어져 쫓기고 숨는 게 낫소. 그리고 그때는 서로를 알고 있어 득이 될 게 없소. 내 저 장사에게 공을 알리지 않을 테니 공도 굳이 저 사람을 알려고 하지 마시오.”

장이와 진여는 한()나라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망해버린 위()나라의 명사들로 젊어서부터 문경지교(刎頸之交)를 맺고 지내온 사이였다. 위나라를 멸망시킨 진나라는 뒤탈을 없애기 위해 장이에게 1000, 진여에게 500금의 상을 걸고 찾게 하였으나 함께 달아난 둘은 아직까지 잡히지 않고 숨어 있었다.

장량도 창해군의 말을 옳게 여겼다. 그로부터 몇 달 함께 시황제의 움직임을 살피다가 마침내 이 박랑사 길목에서 동쪽으로 순수(巡狩)를 나서는 시황제를 저격하기로 작정한 그날까지도 서로에 관해 묻기를 피해왔다. 하지만 이제 얼마 후면 각기 흩어져 쫓기게 되고, 어쩌면 다시는 살아서는 만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장량은 새삼 그 사내가 어떤 인물인지 궁금해졌다.

너무 늦는 것 같소.”

장량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사내를 슬며시 돌아보았다. 틈을 보아 그의 이름이라도 물어둘 작정이었다. 장량과 나란히 모래 언덕에 기대 관도(官道)를 내려다보고 있던 사내가 가만히 한 곳을 손가락질했다. 관도가 빠져 나오는 서쪽 구릉지대 쪽인데, 눈 여겨 살피니 아련히 먼지가 일고 있었다. 적지 않은 인마가 다가오고 있다는 기별과도 같았다.

긴장과 까닭 모를 조급함이 잠시 장량의 몸과 마음을 마비시켰다. 하지만 창해군에게서 얻어온 역사(蒼海力士)는 산악처럼 태연하기만 했다. 곁에 벗어두었던 길쭉한 상자를 말없이 끌어당겨 뚜껑을 열었다. 상자에서 나온 것은 길이 한 발에 어른의 팔뚝보다 굵은 쇠몽둥이(鐵椎)였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불시에 몸을 날려 치지 않으면 여정의 위사(衛士)들이 가로막아 일을 그르칠 수도 있소. 나는 저기 관도 바로 곁의 모래 언덕으로 옮겨 몸을 감추고 여정을 기다려야겠소.”

몸을 일으킨 역사가 철퇴를 가볍게 어깨에 매며 말했다. 장량도 얼른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역사가 그런 장량을 눈길로 주저앉히려는 듯이나 지긋이 쏘아보며 말했다.

선생은 이대로 계시오. 여기서 일을 살피시되 내가 손을 쓰고 난 뒤에는 성패(成敗)에 상관 말고 얼른 이 자리를 떠나시오. 불행히 내가 일을 그르쳐도 반드시 살아남아 여정(呂政)을 죽여주어야 하오.”

지금까지 소식을 염탐하고 일을 채비하고 꾀를 내는 일은 장량이 도맡아 왔다. 그런데 이제 갑자기 역할이 바뀌어버린 듯 역사 쪽에서 오히려 장량이 해야 할 바를 일러주고, 뒷일까지 당부하고 있었다. 그게 다시 장량을 혼란시켜 잠시 할 말을 잃고 있는 사이 역사는 묶여있는 자신의 말 쪽으로 성큼 성큼 다가가더니, 고삐를 풀어 안장에 감은 뒤에 철퇴로 가볍게 말 엉덩이를 쳤다. 말이 놀란 울음소리 내며 남쪽으로 내달았다.

(살아서 돌아갈 마음을 버렸구나)

그런 생각에 퍼뜩 정신이 든 장량이 소리 높여 역사를 불렀다.

대협(大俠). 대협. 잠깐 멈추시오!”

관도 쪽으로 휘적휘적 걸음을 옮겨놓고 있던 장사가 장량을 돌아보며 무겁고도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선생께서 무도한 진나라를 미워하고 여정을 죽여 망국의 한을 풀려고 하신다는 것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합니다. 선생도 나를 그 이상으로 아실 필요가 없습니다. 원래 자객은 누구에게도 얼굴과 이름이 알려져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서로 얼굴을 알아버렸으니 오히려 너무 많이 알게 된 셈입니다. 이제부터는 서로 얼굴마저 잊도록 애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곧장 관도 가로 걸어 나가 길가의 작은 모래 언덕 사이에 몸을 숨겼다. 그 태도가 어찌나 결연한지 장량은 말없이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원래 몸을 숨기고 있던 모래 언덕에 그대로 머물러 멀찌감치서 관도를 내려 보며 시황제의 노부(鹵簿=황제의 행차)가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서편 하늘의 먼지가 더욱 자옥해진 걸로 보아 그 사이에도 시황제의 행차는 쉬임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한곳에 웅크린 채 숨어 기다려야 하는 쪽으로서는 무한히 길고 더디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숨 막히는 듯한 긴장감으로 바싹바싹 타들어 가는 입안을 마른침으로 적시면서 기다리다 보니 불현듯 묵은 적개심이 되살아났다.

지금 장량이 목숨을 걸고 노리는 것은 진의 시황제 정()이었다. 그러나 불같은 분노와 함께 눈앞에 떠오르는 것은 시황제가 아니라 진의 연횡책에 놀아나던 옛 한()의 사대부들이었다.

(방금 원교근공(遠交近攻)의 칼날이 저희 나라의 목줄기를 겨누고 있는데도 소리높이 연횡(連橫)을 외쳐대던 눈먼 공경(公卿). 스스로 진나라의 개가 되어 짖고 있는 줄도 모르고 합종(合從)을 비웃던 대부(大夫) 원사(元士). 그대들은 지금 어디 있는가. 지금 천하가 앓고 있는 이 고통을, 이 억지스러운 혼일사해(混一四海)의 후유증을 그대들도 보고 있는가. 망해버린 조국을 애통히 여기며 키워가는 한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는가.)

전국(戰國)시대의 중국을 보면 서쪽으로 진()나라를 두고 동쪽에 연() () () () () () 여섯 나라가 세로로 늘어서 있는 형국이다. 강력하지만 야만스럽고 이질적인 진나라의 대두에 맞서 세로[]로 늘어선 여섯 나라가 힘을 합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합종책(合縱策)이고, 가로[]로 진나라와의 개별적 화친을 통해 안전도 보장받고 실리도 챙기자는 것이 연횡책(連橫策)이다. 이 중에서 한()을 가장 먼저 망하게 한 것은 무엇보다도 한이 가장 일찍부터 연횡책에 노출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말할 것도 없이 연횡책을 구상한 것은 출세욕에 눈먼 진나라 밖 여러 나라의 세객(說客)과 종횡가(縱橫家)들이었다. 그러나 그 정책은 처음부터 진()나라를 위한 것이었고 진나라에 의해 채택되었다. 연횡가들은 크게는 진나라에 들어가 재상이 되었고, 적으면 저희 나라에 앉은 채로 진의 간세(奸細) 노릇을 마다하지 않았다.

육국(六國) 중에서 한()이 가장 먼저 망하게 된 까닭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한이 화평과 실리를 앞세운 진()의 천하통일책 연횡론에 가장 먼저 휩쓸려 들어갔다는 점일 것이다. 한은 선혜왕 때 상국(相國) 공중치(公仲3)가 진과의 연횡을 주장한 이래로 망하는 날까지 연횡과 합종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물론 한나라의 연횡론자들 중에는 진나라와 손을 잡는 게 진정으로 자신의 나라를 지키는 길이라고 믿은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진 왕실 또한 황제(黃帝)의 자손임을 애써 우겼고, 그 백성들 또한 화하(華夏)의 한 핏줄기임을 내세우기도 했다. 더러는 현실적으로 진의 무력(武力)을 당할 길이 없어 위장된 굴복의 형식으로 연횡책을 고르기도 했다.

하지만 순수해서였든, 무지 때문이든 장량에게는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그의 아버지 희평(姬平)을 재상자리에서 내쫓아 젊은 나이에 피를 토하며 죽게 한 것도 그 연횡책이었으며, 한낱 진나라의 내사(內史)에게 나라가 망하고 왕이 사로잡히게 될 만큼 조국 한나라를 허약하게 만든 것도 바로 그 연횡책으로만 여겨졌다. 한이 육국(六國) 중에서 가장 먼저 망한 것은 지리적으로 진과 가장 가까웠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그 또한 원교근공(遠交近攻)’이라는, 진나라 식으로 악용된 연횡책의 결과가 아니었던가.

상념에 빠져 있는 사이에도 장량의 눈길은 시황제의 행렬이 다가오고 있는 관도(官道) 쪽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장량의 두 눈을 찔러오는 듯한 빛살이 있었다. 서북쪽 모래언덕[사구]을 돌아 나오는 갑사(甲士)들이 들고 있는 창검의 날이 뿜어내는 빛이었다. 시황제의 행차를 호위하는 시위대(侍衛隊)인 성싶었다.

그 시위대의 규모를 보면서 장량은 적지 않이 낙담했다. 시황제가 바로 진이며, 그의 순수(巡狩)는 곧 진 조정의 움직임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그렇게 많은 시위대가 따르고 있을 줄은 몰랐다. 당장 눈에 들어오는 머릿수만 해도 일려(一旅=500)는 되어 보였다. 모두 번쩍이는 갑옷으로 몸을 둘러쌌을 뿐만 아니라 선두에는 수십 필의 기마가 길을 열고 있었다. 행렬의 앞머리가 그 정도이면 모두 합쳐서는 얼마나 많은 인마가 시황제를 호위하고 있을지 가늠조차 서지 않았다.

시위대에 이어 몇 대의 속거(屬車)들이 굴러 나왔다. 황제의 행차에 필요한 물품들을 싣고, 걷게 할 수 없는 벼슬아치들과 시중꾼을 태운 수레들이었다. 간편하게 만든 일산(日傘)을 얹고 허리 높이에 이르는 난간을 둘렀을 뿐, 사방을 막지 않은 통상의 수레로 네 마리 말이 끌고 있었다.

속거의 행렬에 이어 다시 한 떼의 보병 갑사들이 창검을 번쩍이며 뒤따랐다. 역시 일려는 넘어 보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에워싸이듯 말로만 듣던 시황제의 온량거(轀輬車)가 모습을 드러냈다.

온량거는 뒷날의 제례용 수레[喪需車]처럼 지붕과 벽이 있고 창을 내어, 창문을 열면 시원하고 닫으면 따뜻하게 만들어진 수레였다. 바퀴가 넷에 폭이 넓고 금은과 깃털로 장식되어 있으며 여섯 마리 백마(白馬)가 끌었다. ()과 량(0)이라는 글자도 그 수레를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것으로서, 진시황이 직접 그 이름을 지었다는 말이 있었다. 그때는 진시황만이 타던 예외적인 수레였으나, 뒷날 한대(漢代)가 되면 훨씬 더 정교하게 개량되고 화려하게 치장되어 황실의 주된 의장(儀仗)용 수레가 된다.

온량거를 보자 장량의 가슴은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한나라의 연횡론자들에게 품었던 것과는 질을 달리하는, 구체적이고도 격렬한 미움과 원한 때문이었다.

(저기 내가 젊은 날을 다 바쳐 그의 목숨을 노려온 원수가 있다. 천하 백성을 모두 끌어내 짓이기고 쥐어짜는 폭군이 있다. 본시 자유롭게 태어난 이 세상 뭇 생령(生靈)을 법으로 얽고 창칼로 위협해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 같지 않은 삶으로 몰아가는 치우(蚩尤)의 화신이 다가오고 있다.)

장량은 자신도 모르게 장검을 끌어당겨 손잡이를 힘주어 잡았다. 그리고 뭔가를 해야할 것 같은 다급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때 퍼뜩 관도 가까운 모래 언덕 뒤로 뭔가가 희뜩희뜩 움직이는 게 보였다. 창해군에게서 빌려온 역사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마도 시황제를 저격하기에 보다 가까우면서도 몸을 감추기 좋은 곳으로 옮겨 앉는 듯했다.

그 사이에도 시황제의 온량거는 느릿느릿 창해역사가 몸을 감춘 모래언덕 쪽으로 다가왔다. 미력하나마 함께 달려 나가 도와야 하지 않을까-장량은 다시 그런 생각으로 마음이 흔들렸으나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이미 늦었을 뿐만 아니라 때에 따라서는 각기 나뉘어서 손을 쓰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었다. 장량은 그 자리에서 숨을 죽이고 엎드린 채 먼저 창해역사가 하는 양을 살펴보기로 했다.

오래잖아 온량거는 창해역사가 몸을 숨긴 모래언덕을 천천히 스쳐가듯 지나갔다. 갑자기 한소리 큰 외침이 우레처럼 터지면서 수레와 사람의 행렬이 잠시 멈칫하는 듯했다. 이어 창해역사의 거대한 몸집이 무슨 한 마리 크고 검은 새처럼 모래언덕에서 솟구치더니 곧바로 온량거를 덮쳤다. 두 손으로 굳게 잡은 굵은 쇠몽둥이가 그대로 그 몸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우지끈, -멀리 있는 장량의 귀에까지 마른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며 온량거의 지붕이 풀썩 내려앉는 게 보였다. 일격에 수레 전체가 그대로 내려앉은 듯했다. 수레가 그 모양이 났으면 안에 타고 있는 사람 또한 성할 리가 없었다.

맞혔다!”

장량은 놀라움과 감격에 아울러 몸을 떨며 자신도 모르게 나직이 외쳤다. 그런데 미처 그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눈에 들어온 뜻밖의 광경으로 그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또 한 대의 온량거가 서쪽 머지않은 모래언덕을 돌아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제서야 섬뜩한 기분으로 눈여겨 살펴보니 뒤따르는 온량거는 그 밖에도 몇 대 더 있었다.

흔히 사서(史書)에는 장량이 창해역사를 시켜 친 수레를 부거(副車)라 기록하고, 부거는 속거(屬車)와 같은 것으로 주()를 달아놓고 있다. 하지만 한관의(漢官儀)’에 따르면 부()여벌의혹은 다른이란 뜻이 있고, 어떤 때는 속거와 구분하여 천자의 어가(御駕) 앞뒤에 따로 딸리게 한 수레로 되어있다. 진시황이 여러 번 암살기도를 경험한 인물이고 보면, 창해역사가 친 부거는 단순히 행차를 따르던 속거 중 하나가 아니라, 처음부터 암살자들의 이목을 혼란시킬 목적으로 온량거와 모양을 똑같게 만들어 앞뒤에 따르게 한 부거 중 하나였던 것 같다.

장량이 아연해서 내려다보고 있는 사이 관도 위에서는 한바탕 처절한 도살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내려앉은 수레가 빈 것임을 알아차린 창해역사가 뒤따라오는 다른 온량거로 몸을 돌리려 할 때에야 잠시 마비된 듯 굳어있던 시위대가 꿈틀 움직였다. 이어 머지 않은 곳에서 달려온 기병들이 에워싸면서 창해역사의 분전(奮戰)은 보이지 않았으나, 거기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이 얼마나 치열한지는 멀리 떨어져 있는 장량에게도 느껴져 왔다.

에워싼 갑사들의 함성을 뚫고 들려오는 창해역사의 벽력같은 기합소리, 그리고 청동과 철기가 부딪는 소리. 가끔씩 창해역사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의 담이 비로 쓸리듯 쓸리는가 하면, 그의 쇠몽둥이에 얻어맞은 듯 말 위의 기장(騎將)들이 가랑잎처럼 굴러 떨어졌다. 200 걸음이 넘는 곳이지만 피비린내까지 풍겨오는 듯했다.

하지만 이내 창해역사의 기합소리는 점점 상처받은 짐승의 신음소리를 닮아가고 에워싼 갑사들의 함성은 사냥의 막바지에 들어선 몰이꾼들을 닮아갔다. 그러다가 갑자기 한소리 말 위의 갑사가 내지르는 기합소리가 들리더니 창해역사를 에워싼 원의 중심으로 바짝 다가간 갑사들의 마구잡이 창질이 한동안 이어졌다. 이미 저항이 끝난 창해역사의 주검을 짓이기고 있음에 틀림이 없었다.

기장 하나가 무어라 외치며 사람들을 헤치고 말을 몰아 창해역사가 에워싸여 있던 곳으로 다가가는 것을 보고서야 장량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다 끝났구나. 그는 죽었다. 그리고 우리는 실패했다. 이제 남아있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

늦은 대로 장량 자신이 장검을 뽑아들고 말에 올라 뛰어드는 걸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단기(單騎)지만 시황제가 타고 있는 것으로 가장 의심이 드는 세 번째 온량거를 덮쳐 창해역사가 못 다한 일을 다시 시도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창해역사 때문에 날카로운 경계에 들어간 시위 갑사들의 벽을 뚫고 진시황의 수레에 이른다는 것은 이미 틀린 일이었다. 열에 아홉 목숨만 헛되이 내놓는 일이 되고 말 것임에 분명했다. 거기다가 모래언덕을 내려가며 당부하던 창해역사의 목소리가 다시 장량의 무모한 격정을 가라앉혔다.

(그렇다. 죽는 일은 어렵지 않다. 우선 피하자. 여기서 달아나 다시 한 번 때를 기다려 보고, 그래도 진왕 여정(呂政)을 죽일 수 없으면 그때 죽어 홀로 살아남은 부끄러움을 씻으리라. 헛되이 죽는 것보다는 구차하지만 살아남아 그 한을 풀어주는 것이 오히려 그의 협의(俠義)에 보답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윽고 그렇게 스스로를 달랜 장량은 가만히 모래언덕을 내려갔다. 그리고 마른풀에 묶어두었던 말고삐를 풀고 훌쩍 말 등에 뛰어올랐다.

장량이 박차로 말 배를 차자 말은 외줄기 먼지를 보얗게 일으키며 남쪽으로 달렸다. 그 먼지 구름이 모래언덕 위로 피어올라 멀리 관도에서도 보였으나 창해역사의 갑작스러운 출현과 그 괴력에 놀란 시위갑사들은 그것을 수상히 여기며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은 이 창해역사의 얘기가 우리 설화에 남아있다는 점이다. 강원도 지방에 전승되는 창해역사 설화는 남대천을 떠내려가던 커다란 두레박에서 그를 건져냈다는 탄생설화까지 곁들여져 있다. 얼굴이 검고 힘이 장사여서 소문을 들은 장량이 강릉까지 와서 그를 데리고 갔으며, 진시황을 저격한 뒤에는 모래밭을 뚫고 삼십리나 달아나 사라졌다고 한다. 한편 아산에서 채록된 설화는 창해역사가 강원도 박가의 아들 삼형제 중에서 맏이였다고 되어 있다.

이는 아마도 창해역사의 신원이 뚜렷이 밝혀져 있지 않은 데다, 폭군 진시황을 친 쾌거인 만큼 민족정서에도 거슬리지 않아 우리 설화에 수용된 듯하다. ‘창해(滄海)’라는 말이 원래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말이고, 창해군(滄海君)이 동이(東夷)의 군장(君長)이었다는 설이 있는 것도 창해역사 설화가 생기는 데 한몫을 했을 것이다. 특히 고향과 성씨를 구체화한 아산의 설화는 청주 한씨(韓氏)와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한왕 유방이 대장군 한신의 군막에 이르니 경포의 진채를 뚫고 나간 것이 패왕과 강동병 8백 기()였음을 확인해 주는 것 외에 새로운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항우가 떠난 뒤에도 남아서 진채를 지키던 초나라 군사 2천 명이 마침내 항복해 왔다고 합니다.”

마침 장수들을 불러 모아놓고 있던 한신은 갑자기 들이닥친 한왕에게 군례를 올리기 바쁘게 그 일을 전했다. 그러자 한왕이 갑자기 사람이 달라진 듯 차고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을 모두 끌어내 목 베시오. 여태까지 항우를 따라다닌 자들이라면 우리 한나라의 백성으로 고쳐 부리기는 틀렸소.”

그리고 한왕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어리둥절해 있는 한신을 서슬 푸른 명으로 한 번 더 놀라게 하였다.

이제 남은 일이 항우를 잡는 것뿐이라면 과인이 그 마무리를 짓겠소. 먼저 대장군은 들으시오.”

() 한신 삼가 군명을 받들겠습니다.”

한신이 얼결에 머리를 조아리며 그렇게 받자 한왕이 미리 생각해 둔 것처럼 거침없이 말했다.

대장군은 항우가 사로잡히거나 그 목이 군전(軍前)에 이를 때까지는 대군을 유지하고 추격의 고삐를 늦추지 말라. 곧바로 삼군(三軍)을 진발시켜 회수 북쪽에서 항우를 잡을 수 있어야 한다.”

이어 한왕은 가장 발이 빠른 군사를 거느린 관영을 불렀다.

기장(騎將) 관영은 낭중(郎中) 기병 5천을 골라 뽑아 남쪽으로 항우를 뒤쫓는다. 항우를 사로잡거나 그 머리를 얻어 오는 자는 천금(千金)의 상을 내리고 만호후(萬戶侯)에 봉할 것이다. 공을 다툴 맹사(猛士)들을 뽑아 가되, 초나라에서 항복해 와서 항우의 얼굴을 익히 아는 자들을 데려가 만에 하나라도 어긋남이 없게 하라.”

그리고 관영을 재촉하여 패왕을 뒤쫓게 했다. 이에 관영은 낭중기(郎中騎) 양희(楊喜)와 왕예() 같은 용장에다가 기사마(騎司馬) 여마동(呂馬童)처럼 초군에서 항복해 와 패왕의 얼굴을 잘 아는 장수들을 데리고 5천 기병을 휘몰아 패왕의 자취를 따라갔다.

한편 그 새벽 한군의 에움을 빠져나온 패왕 항우는 한나절을 달려 대택향(大澤鄕)을 지난 뒤 회수가 작은 나루에 이르렀다. 패왕은 새벽부터 달려와 허기진 군사들에게 밥을 지어 먹게 하는 한편 회수를 건널 배를 찾아보게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강가를 뒤져도 작은 쪽배 한 척 찾아낼 수 없었다. 한 고기잡이 늙은이가 그 까닭을 일러주었다.

벌써 여러 날 전에 구강(九江)의 군사들이 배를 타고 몰려와 배들을 모두 회남(淮南)으로 끌고 가버렸습니다. 지금 회북(淮北) 나루에는 고기잡이할 배조차 없습니다.”

그 말을 듣고 다급해진 초나라 기마들은 회수를 따라 오르내리며 감추어 둔 배를 찾는다, 떼를 얽는다, 허둥거렸다. 그런데 어느새 관영의 기마대가 패왕의 자취를 밟아 그곳에 이르렀다. 하지만 초군에는 다행스럽게도 관영이 이끈 한나라 낭중 기병 5천이 모두 그곳에 이른 것은 아니었다.

놀라지 말라. 적은 얼마 되지 않는다. 한 싸움으로 모조리 때려잡자!”

몰려오는 한군 기마대가 잘해야 1천 기()를 크게 넘어 보이지 않자 패왕이 보검을 빼들고 앞서 달려가며 소리쳤다. 패왕을 따르는 8백기도 이미 저마다 악에 받쳐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매서운 투지로 내달으니 한군은 그 기세에 놀라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달아나 버렸다.

이제 됐다. 더는 적을 뒤쫓지 말고 배나 거두어들여라.”

추격해 오던 한군 기마대가 달아나는 걸 보고 패왕이 그렇게 소리쳐 군사를 거두었다. 하지만 구강(九江)의 군사들이 얼마나 모질게 인근 백성들을 닦달해 배를 치워 버렸는지 다시 한식경이나 더 회수(淮水) 가를 뒤져도 배다운 배는 나오지 않았다. 강 아래위 수십 리를 이 잡듯 훑어 찾아낸 것이 바닥이 뚫려 버려둔 듯한 거룻배 한 척과 쪽배 네댓 척뿐이었다.

급한 대로 거룻배를 고치니 그래도 사람과 말을 합쳐 여남은 기()가 탈 수 있고, 쪽배도 한두 기는 나를 수 있어 곧 한꺼번에 스무 기는 물을 건널 수 있게 되었다. 이에 패왕은 군사를 갈라 물을 건너기 시작했다. 하지만 회수같이 큰물을 노질로 건너야 하다 보니 오가는 것이 너무 더뎠다. 배들이 겨우 다섯 번이나 회수 남북을 오고갔을까, 갑자기 함성과 함께 다시 한나라 기마대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관영이 이끄는 본진으로, 한번 혼이 나봐서 그런지 5천기가 한 덩어리가 되어 밀려들었다.

겁내지 말라. 과인에게는 아직 보검과 오추마가 있다. 적이 백만이라도 두렵지 않다. 과인을 따르라!”

패왕이 다시 보검을 빼들고 앞장서며 그렇게 외쳤다. 어차피 회수를 등지고 있어 물러나 봤자 더 갈 곳이 없는 초나라 기병들이었다. 패왕의 외침에 따라 회수 북쪽에 남은 6백여 기가 한 덩어리가 되어 관영의 5천 기마대와 마주쳐갔다.

거의 열 배에 가까운 차이가 났으나 패왕을 앞세운 초군이 워낙 거세게 치고 드니 세력만 믿고 달려오던 한군은 금세 기가 꺾였다. 달려온 기세에 밀려 그대로 부딪치기는 해도 선두는 초군에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대로 두면 한군 전체가 조각조각 나 차례로 쓸려버리고 말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래도 가려 뽑은 낭중 기병 5천이 모두 온 데다 불같은 전투력을 자랑하는 맹장 관영이 그들을 이끌고 있었다. 처음에는 멈칫하며 밀렸으나 한군은 이내 전열을 가다듬고 열 배가 넘는 머릿수에 의지해 포위전을 펼치려 들었다. 초군을 두텁게 에워싼 뒤 여러 갈래 군사들을 차례로 내보내 천천히 그들의 기운을 빼고 세력을 지워가는 방식이었다.

그걸 알아본 패왕이 갑자기 칼을 들어 회수 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모두 물가로 물러나라. 적에게 에워싸여서는 아니 된다. 물을 등지고 반달 모양으로 진세를 벌여 배가 돌아올 때까지 버텨 보자!”

그리고 자신은 뒤에 남아 한군의 급한 추격으로 초군의 전열이 무너지는 것을 막았다. 오래잖아 초나라 기마대는 작은 포구를 삼면으로 에워싸듯 반원진(半圓陣)을 쳤다. 그때 마침 회수 남쪽 나루에 인마를 부려놓고 온 작고 초라한 선단(船團)이 그 포구로 돌아왔다. 패왕은 반원진을 굳게 지키면서 20여 기를 골라 다시 남쪽 물가로 태워 보냈다.

많지는 않아도 초군이 배를 구해 남쪽으로 건너는 것을 보자 관영도 급해졌다. 패왕이 이끈 기마대의 사나운 기세에 주춤해 물러선 낭중 기병들을 무섭게 다그쳐 600여 기()의 초군이 펼쳐 둔 작은 반원진을 들이쳤다.

이번에도 패왕이 앞장서 그 공격을 물리쳤다. 피를 뒤집어쓴 채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며 한나라 기병들을 찍어 넘기니 아무리 한군의 머릿수가 많다고 해도 어찌해 볼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반원진의 전면이 좁아 한의 대군이 힘을 쓰기도 나빴다.

모두 물러나라. 물러나 강한 활과 쇠뇌를 옮겨 오라.”

마침내 관영이 그렇게 외치며 군사들을 물렸다. 하지만 초군도 손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밀고 밀리는 가운데 죽거나 다쳐 100여 기나 줄어 있었다. 그때 다시 회수 남쪽에서 배가 올라왔다. 이번에는 남쪽 나루에서 찾아낸 것인지 배 몇 척이 불어나 있었다. 하지만 사공들과 함께 배를 끌고 온 이졸들의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남쪽 나루에 무슨 일이 있느냐?”

패왕이 그렇게 묻자 이졸 가운데 하나가 울상을 지으며 대답했다.

구강병(九江兵)이 나타났습니다. 처음에는 나루를 지키던 군사 수십 명뿐이었으나 그새 연락이 갔는지 점점 그 수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대로 두면 우리 모두가 회수를 건너도 저쪽에 배댈 곳이 없을까 걱정입니다.”

그 말을 들은 패왕은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거기까지 살아서 따라온 족제 항장(項壯)을 불러 말했다.

남쪽 나루에 구강병이 나타났다 한다. 내가 가서 그들을 쫓고 나루를 지키는 한편 큰 배들을 찾아 보내마. 너는 그때까지만 이 포구를 지키며 버텨 보아라.”

그리고는 서른 기를 골라 배를 나누어 타고 회수를 건너갔다.

패왕이 남쪽 나루에 이르렀을 때는 그새 수백 명으로 불어난 구강병들이 나루에 몰려 있는 100여 기 초나라 기마대를 향해 몰려들고 있을 때였다. 배에서 내린 패왕이 바로 오추마에 뛰어올라 우레 같은 고함소리와 함께 뛰쳐나갔다. 온몸에 아직 다 마르지도 않은 피를 함빡 뒤집어쓴 채 불이 철철 흐르는 듯한 두 눈을 부릅뜨며 다가드는 패왕은 그대로 지옥에서 뛰쳐나온 악귀(惡鬼) 같았다. 그 뒤를 기세가 오른 초나라 기마 100여 기가 짓밟아 가자 회수 나루를 지키던 구강 수졸(戍卒)들은 제대로 싸워 보지도 않고 달아나 버렸다.

구강병을 멀리 쫓아 버린 패왕은 다시 그 나루를 뒤져 감추어 둔 큰 배 몇 척을 더 찾아냈다. 그때까지 부리던 배들과 함께 좀 더 큰 선단을 이루어 북쪽 나루로 보냈다. 그런데 한식경도 안 돼 돌아온 사공과 이졸들이 울며 패왕에게 알렸다.

한군이 북쪽 나루의 우리 진채에 강한 활과 쇠뇌를 퍼부은 뒤에 돌진하여 남아 있던 우리 군사 대부분을 죽이거나 사로잡아 갔습니다. 저희들은 배를 나루에 대지도 못하고 물위에 떠 있다가, 헤엄을 잘 쳐 강물로 뛰어든 군사 수십 명만 건져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말에 패왕은 우미인의 주검조차 제대로 거두어 주지 못하고 해하의 진채를 떠날 때보다 더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다시 군사들이 벌써 저물어 오는 강물 위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쇠몽둥이를 둘러멘 자객이 문득 시황제가 타고 있는 온량거 쪽을 노려보며 다시 소리쳤다.

여정, 이 성() 셋 가진 놈아. 네 어디 숨었느냐? 어서 나와 이 철퇴를 받아라!”

하지만 장한 것은 그 같은 기세뿐이었다. 맹렬한 그의 반격에 잠시 멈칫했던 시위 갑사들이 다시 그를 에워싸고 머지않은 곳에서 기병(騎兵)들까지 달려와 가세하자 자객의 모습이 더는 보이지 않았다. 한동안 병기 부딪는 소리 사이로 비명과 신음소리만 들리더니 이윽고 모든 게 조용해졌다. 그러나 시황제는 불타는 듯한 자객의 눈동자가 아직도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듯한 느낌에 치를 떨었다.

폐하, 송구하옵니다. 불궤(不軌)를 도모한 자가 있어 잠시 어전이 소란하였습니다.”

오래잖아 기장(騎將)하나가 달려와 두려움 가득한 얼굴로 아뢰었다. 시황제는 얼른 마음을 가다듬었다. 황제는 놀라서는 안 된다. 아니, 놀랄 수 없다.

잡았느냐?”

상대가 자신의 희로(喜怒)를 쉬 짐작할 수 없게 나직하고도 무심한 목소리로 시황제가 물었다.

그렇사옵니다. 하오나 이미 목숨이 붙어있질 않습니다. 보시겠사옵니까?”

그렇다. 어서 끌고 오너라-시황제는 하마터면 그렇게 대답할 뻔했다. 감히 황제인 나를 저격하려 하다니. 하지만 시황제는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다듬었다. ()은 조짐(兆朕)이다. 함부로 가볍게 드러나는 게 아니다.

그자는 한낱 흉기(凶器)에 지나지 않는다. 반드시 뒤에서 시키고 부추긴 자가 따로 있을 것이다. 주변을 뒤져 보았느냐?”

황송하옵니다. 창황(蒼黃)하여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지금 곧 기병을 풀겠습니다.”

그 기장이 한층 더 움츠러든 어조로 그렇게 받고는 도망치듯 말머리를 돌리려 했다.

그만 두어라. 설령 동모(同謀)가 근처에 있었다 한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기야 하겠느냐?”

시황제가 여전히 희로를 짐작할 수 없는 어조로 그렇게 말려 놓고 조용히 덧붙였다.

부근에서 가장 큰 성읍이 어디냐?”

신정(新鄭)일 듯 하옵니다.”

그리로 가자. 짐의 행차를 신정으로 이끌라.”

시황제는 그 말과 함께 온량거의 창을 닫았다. 신정으로 가는 까닭은 자신의 내심에만 담아 두었다.

(저들이 여기서 나를 치기로 하였으면 반드시 그곳에서 마지막 채비를 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그곳 성문에 저 자의 시체를 걸어놓고 널리 물으면 반드시 저 자를 알아보는 자가 있을 것이다. 저자가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자에게는 천금을 상으로 내리고, 알면서도 숨기는 자는 삼족(三族)을 모두 죽이리라. 그렇게 하여 먼저 저 자를 아는 자부터 찾아내면 저 자를 부린 흉수(兇手)도 잡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시황제는 온량거 안의 와상(臥床)에 걸터앉으며 그동안 풀어두었던 장검을 다시 허리에 찼다.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바깥에서의 느낌은 태산 같은 무게와 고요함일 것이나, 시황제의 가슴 속에는 이미 음험한 분노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아직도 짐은 칼을 풀어놓고 쉬지 못한단 말이냐, 아직도 감히 짐을 노리는 쥐 같은 무리가 있다는 말이냐-치솟는 울화를 삭이지 못한 시황제가 천천히 장검을 뽑아들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잘 벼려진 보검의 시퍼런 칼날이 문득 오래 잊고 있었던 옛일을 떠오르게 했다. 9년 전 연()나라 태자 단()이 자객 형가(荊軻)를 보낸 일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일의 빌미가 된 단의 원망부터가 어이없고도 분통터지는 노릇이었다. 연나라가 단을 진나라 수도 함양에 인질로 보내온 것은 시황제가 열 셋의 나이로 진왕(秦王)이 된 지 열 다섯 해 뒤였다. 그 무렵 시황제는 마침내 상국 여불위(呂不韋)를 내몰고 한창 군주의 위엄을 세워나가고 있었다. 그런 시황제 앞에 갑자기 나타난 단은 한동안 난감하기 짝이 없는 존재였다.

단은 예전 조()나라에서 인질로 있을 때 시황제와 서로 친하였다 하나 시황제로서는 하도 어렸을 적 일이라 단의 얼굴조차 잘 기억나지 않았다. 부왕(父王) 장양왕(莊襄王)이 한때 조나라에 인질로 있었던 적이 있고, 시황제는 그때 한단(邯鄲)에서 태어났으나 누구와 사귈 만한 나이가 되기 전에 한단을 떠났다. 아마도 어린 날의 시황제와 친했다는 단의 기억은 같이 인질로 있던 부왕을 먼 빛으로 보며 느꼈던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정이 머릿속에 잘못 남은 것인 듯했다.

그런데도 단은 그 잘못된 기억에 의지해 한낱 인질로 끌려온 주제에 시황제를 오랜만에 만나는 옛 벗 대하듯 하니 그 앞에서는 도무지 군주의 영이 서지 않았다. 거기다가 두 번씩이나 남의 나라에 인질로 끌려 다니면서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그 미욱함이나 태평스러움도 시황제에게는 밉살맞기 그지없었다. 이에 몇 번인가 허약한 이웃나라에서 끌려온 인질로서 강대한 종주국의 군주를 대하는 예절을 엄하게 가르쳤더니, 그만 계집 같은 앙심을 품게 된 듯했다. 어느 날 밤 저희 나라로 몰래 도망치고 말았다.

진의 법도대로라면 마땅히 대군을 일으켜 연나라를 치고 그 불신(不信)의 죄를 물어야 하지만 시황제는 태자 단에게 인정을 두었다. 잠시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는데, 단쪽에서 오히려 먼저 일을 꾸몄다. 태부(太傅) 국무(鞠武)를 불러 진을 도모할 계책을 물었으나 국무가 장구한 합종(合縱)의 계책을 말하자 협객 전광(田光)의 무리와 어울렸다.

전광이 위나라 사람 형가(荊軻)를 소개하고 비밀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자, 태자 단은 형가를 먼저 극진히 대우해 그 마음을 산 뒤 그와 함께 시황제를 죽일 계책을 꾸몄다. 때마침 진나라 장수 번오기(樊於期)가 시황제에게 죄를 짓고 연나라로 도망쳐 오자 형가는 먼저 그를 달랬다. 반드시 시황제를 죽여 원수를 갚아 준다는 약속으로 번오기를 자결하게 만들고 그 목을 얻었다. 그리고 거기에다 다시 연나라의 기름진 땅 독항(督亢)의 지도를 보태 그 둘을 진나라에 바친다는 구실로 함양을 찾아왔다.

나중에 들은 말이지만, 형가가 부사(副使)격인 진무양(秦舞陽)과 함께 역수(易水)를 건너올 때 거기서 벌인 잔치는 자못 비장하면서도 성대했던 듯싶었다. 공 이루기를 비는 큰 제사에 이어 보내는 자와 떠나는 자가 술잔을 나누는데, 평소 형가와 가깝게 지내던 개백정 고점리(高漸離)는 축()이란 악기를 타고 형가는 구성진 노래를 불러 좌우를 울렸다고 한다.

하지만 시황제로서는 황금 1000근과 식읍(食邑) 1만호를 걸고 쫓던 번오기의 목을 형가가 가져온 데다 전부터 탐내오던 독항의 땅까지 연나라 스스로 바치겠다고 하니 반갑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그 무렵 총애하던 신하 몽가(蒙嘉)를 통해 접견을 청해온 것이라 더욱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날 형가와 함께 온 진무양이란 자는 아무래도 이상했다. 안색이 변한 채 벌벌 떠는 모습이 여느 사자 같지 않았다. 형가도 독항의 지도를 펴면서 본색을 드러냈다. 말아온 지도가 펼쳐지면서 두루말이 안에서 날카로운 비수 한 자루가 나오자 갑자기 왼손으로 진시황의 옷소매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비수를 거머쥐었다. 역시 나중에 들은 일이지만, 서부인(徐夫人)이란 이에게서 황금 100근을 주고 샀다는 그 비수에는 사람의 몸에 닿기만 해도 선 채로 목숨이 끊어진다는 독이 발라져 있었다.

시황제가 놀라 뿌리치자 소매가 뜯겨져 나갔다. 이어 장검을 뽑으려 하였으나 칼이 길어 얼른 뽑히지가 않았다. 이때 형가가 다시 비수를 들고 다가와 시황제는 기둥을 잡고 돌며 몸을 피했다. 진나라 법으로 신하들은 궁 안에서 한 치의 무기라도 지닐 수가 없었고, 시위하는 낭중(郎中)들은 병기를 지니고 있었으나 왕명이 없이는 전상(殿上)으로 오를 수가 없었다. 다만 신하 중에 하나가 급한 소리로 외칠 뿐이었다.

칼을, 칼을 메소서!”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든 시황제는 칼집을 등에 지듯 메고서야 겨우 칼을 뽑을 수가 있었다. 얼른 돌아서서 뒤쫓는 형가의 왼다리를 칼로 치자 형가가 쓰러진 채 비수를 던졌다. 다행히 비수는 빗나가 구리기둥에 꽂히고, 이제는 시황제가 손에 든 것 없는 형가를 쳐 여덟 군데나 상처를 입혔다. 그런데 돌이켜볼 때마다 섬뜩한 일은 그 다음에 있었다. 마침내 일이 글렀음을 알아차린 형가가 기둥에 기대앉아 웃으며 말했다.

내가 실패한 까닭은 옛적 노나라의 조말(曹沫)이 제환공(齊桓公)에게 그러하였듯 나 또한 진왕을 사로잡아 협박하여 연나라에 양보하는 약속을 받아내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를 알아준 태자의 은혜에 보답하려 했으나 오히려 여정을 죽일 틈만 잃고 말았으니, 이 또한 하늘의 뜻인가!”

그리고는 그때서야 밀려든 시위들의 칼날 아래 비명 한마디 내지 않고 죽어갔는데,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형가가 자신의 목숨만을 노렸다면 열에 아홉 그 뜻을 이루었으리라는 게 직접 그 일을 겪은 시황제의 확신에 가까운 추측이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더욱 치솟은 분노는 태자 단을 죽이고 연나라를 멸망시키고 난 여러 해 뒤까지도 가라앉지 않았다.

(그런데 육국을 모두 아우르고 시황제가 된 오늘까지 아직도 그런 쥐 같은 무리가 남았다니. 내 이번에 반드시 그 뒤를 캐어 천하에 밝히고 역도들을 엄히 벌하리라. 두 번 다시 나의 제국 안에서 감히 나를 노리는 무리가 없게 하리라!)

하지만 그 일은 뜻 같지가 못했다. 시황제는 신정(新鄭)에서 열흘이나 머물며 창해역사의 시체를 성문에 걸어놓고 그가 누군지를 물어보게 하였으나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또 전국에 유성마(流星馬)를 띄워 행실이 수상쩍은 자객들을 모조리 잡아들이게 하였으나 박랑사의 일과 연관된 자는 아무도 찾지 못했다.

이에 마침내 잔당(殘黨)을 잡기를 단념한 시황제는 수레를 몰아 동쪽으로 갔다. 먼저 지부산()에 올라 그 바위에 스스로를 치켜세우는 글을 새겨 상처받은 자존심을 달래고, 다시 동관(東觀)에 올라 또 송덕비를 크게 세움으로써 권력의 끝 모를 허영을 채웠다. 뒷날까지 두고두고 나쁜 본보기가 된 권력에 의한 자연훼손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산천의 바위를 함부로 깨고 후벼 파 돼먹지도 않은 제 공과 이름 새기기 좋아하는 자들의 못나고 허황됨이여. 그들은 일시의 권세를 믿고 자연과 산천이 모두 제 것인양 여겨 그것으로 자신들의 비뚤어진 권력욕을 치장하려 하나, 왜 모르는가. 그것들이야말로 그들의 허영과 오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어 길이 뒷사람의 비웃음을 살 것임을. 그 되잖은 자화자찬은 수천 년을 살아남아 그들이 사람과 하늘에 아울러 지은 죄를 증언할 것임을.

 

중국의 신화와 전설에서 삼황(三皇)으로 먼저 복희씨(伏犧氏)와 신농씨(神農氏)를 꼽는 것에는 누구도 별 이의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나머지 하나에 대해서는 논자와 근거에 따라 각기 다르다. 황제(黃帝)를 드는 이도 있고 수인씨(燧人氏)를 꼽기도 하며 여와(女蝸)나 축융(祝融)을 끌어오기도 한다.

오제(五帝)도 비슷하다. 전욱() 고양씨(高陽氏), 제곡() 고신씨(高辛氏), () 도당씨(陶唐氏) () 유우씨(有虞氏) 네 사람은 대개 일치하나 맨 앞에 놓이는 사람은 각기 다르다. 소호(少昊)를 오제의 앞머리에 두는가 하면 황제(黃帝)를 내세우는 이도 있다. 또 달리는 황제와 금천씨(金天氏)를 함께 넣어 오제가 아닌 육제(六帝)를 들기도 한다.

하지만 황제의 위치는 어떤 주장에서도 크게 보아서는 서로 통하는 데가 있다. 곧 삼황의 끝이거나 오제의 앞머리가 되어 전설과 신화시대의 끝 또는 역사시대의 시작을 상징하고 있다. 그 중 황제를 역사시대의 시작으로 보는 사람으로는 특히 사마천(司馬遷)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황제를 오제의 앞머리에 놓고, 첫 문장이 황제인[황제자...]<오제본기(五帝本紀)><사기(史記)>를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그 말미에는 그들이 모두 실재했던 인물임을 은근히 뒷받침하는 자신의 답사경험을 덧붙여 놓았다.

그뿐만 아니라, 사마천은 어디에 근거했는지 모르지만 황제를 시작으로 하는 고대 왕실의 계보를 세밀히 밝혀 오제로부터 하() () ()를 거쳐 진()에 이르기까지 모든 고대왕국들이 황제의 자손임을 밝히고 있다. 그의 <사기>에 따르면 한()나라 이전까지의 중국 고대사는 바로 황제와 그 자손들이 펼치는 세계가 된다.

황제의 성은 공손(公孫)이며 웅씨(熊氏) 혹은 헌원(軒轅)이라 불리었다. 소전국(少典國) 왕비 부보(附寶)의 아들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작은 부족이지만 족장 또는 제후 가문의 출신이었던 것 같다. 황제는 부보가 벌판에서 큰 번개에 싸인 북두칠성의 첫째별을 보고 잉태하여 스물넉 달 만에 태어났다고 한다.

때는 삼황의 마지막인 염제(炎帝) 신농씨가 이미 쇠약해진 뒤라 세상은 어지럽기 짝이 없었다. 황제는 창과 방패 등 무기를 쓰는 법을 익혀서 먼저 신농씨에게 반항하는 제후들을 정벌했다. 그리고 그 힘을 배경으로 제후들의 지지를 얻어 끝내는 염제까지도 제압하게 된 듯하다. 그러다가 강력한 제후였던 치우(蚩尤)의 반란을 탁록(鹿)의 들판에서 쳐부수고, 마침내는 염제 신농씨를 대신하는 천자가 되었다.

황제로 하여금 천하의 주인이 될 수 있게 한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강력한 군사적 지도력이었음은 그의 치세에 확대된 제국의 판도로도 잘 알 수 있다. 서북쪽 내륙지방에 치우쳐 있던 제국은 이제 동으로는 태산(泰山)을 거쳐 발해에 이르고, 서북으로는 오늘날의 감숙성 공동산(空洞山)에 이르렀다. 또 남으로는 하남성 웅산(熊山)을 아우르고 동남으로는 멀리 호남성 상산(常山)에까지 미쳤다.

하지만 뒷날의 통치자들에게 <이상화(理想化)된 과거>가 되고 황로학파(黃老學派)에게는 종교적인 외경(畏敬)까지 불러일으켰던 황제의 위대함은 천자가 된 뒤의 내치에 있었던 듯싶다. 제도를 정비하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여 고대 부족국가 연합에 가까웠던 나라의 면모를 일신시켰으며, 문화와 예절을 일으키고 학문을 장려하여 <사기>에 이런 구절이 남게 하였다.

(黃帝)는 천지사시의 운행 법칙에 순응하여 음양의 변화를 예측하였고, 산 자를 보살펴 기르고 죽은 자를 예절로 보내는 제도를 연구하였으며, 국가존망의 이치를 고찰하였다. 또한 때에 맞추어 갖가지 곡식과 초목을 심게 함으로써 그 덕화(德化)가 날짐승 들짐승과 벌레들에게까지 미쳤고, 해와 달과 별과 수파(水波) 토석(土石) 금옥(金玉)을 두루 살피어 모두가 백성에게 이익이 되게 하였다.”

황제는 서릉족(西陵族)의 딸 유조()를 정실로 삼아 두 아들을 얻었으니 큰 아들은 현효(), 곧 청양(靑陽)이며 둘째는 창의(昌意)이다. 또 아들 스물셋이 더 있었으나 황제가 죽은 뒤 수천 년 동안 천하는 적자(嫡子)인 그 두 아들의 후손에게로만 이어졌다.

오제 중에 두 번째인 전욱() 고양씨(高陽氏)는 황제의 둘째아들 창의가 촉산씨(蜀山氏)의 딸 창복(昌僕)을 아내로 맞아 얻은 아들이다. 황제가 죽자 제위에 올랐는데, 군사적 정복에 특히 업적을 남겨 그의 시대에 제국의 영토는 다시 한 번 크게 넓어진다. 북쪽으로는 지금의 하북성 북부와 요령성 남부인 유릉(幽陵)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벌써 지금의 베트남 북부지역인 교지(交趾)에 이른다. 서쪽으로는 고비사막인 유사(流砂)까지 나아가고, 동쪽으로는 동해바다 건너 반목(蟠木)이란 곳까지 세력이 미쳤다 한다.

전욱이 죽자 황제의 맏아들 현효의 손자인 고신(高辛)이 제위를 이었다. 이이가 곧 제곡()으로 황제에게는 증손자가 된다. 제곡은 내치(內治)에 밝으면서도 매우 문화적인 통치자였던 것 같다. 그의 모습은 온화했고, 덕품은 고상했으며, 행동은 천시(天時)에 맞았고 차림은 여느 사람들이나 다름없이 수수했다. 또 제곡은 대지에 물을 대 주는 사람처럼 은덕을 천하에 두루 공평하게 미쳤으므로 해와 달이 비치고 비바람이 이르는 곳이면 모두 그에게 복종하였다고 한다.

제곡은 진봉씨의 딸을 아내로 맞아 방훈(放勛)을 낳았고 또 추자씨(;)의 딸을 맞이하여 지()를 낳았다. 제곡이 세상을 떠난 뒤 먼저 왕위를 계승한 것은 나이가 방훈보다 위였던 지였다. 그러나 지가 제대로 정사를 돌보지 못해 왕위는 아우인 방훈에게로 돌아갔다. 그 방훈이 바로 요()임금 도당씨(陶唐氏)가 된다.

요는 하늘처럼 인자하고, 신처럼 지혜로웠으며, 사람들은 마치 태양에 의지하려는 것처럼 그에게 다가갔고, 만물을 촉촉히 적셔주는 비구름을 보듯이 그를 우러러보았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그의 시대에 이르러 다스림의 제도는 훨씬 정교해지고 예절과 문화는 한층 세련되었던 듯하다. 또 역법(曆法)을 정확하게 하고 네 절후(節侯)를 결정해 거기에 맞춰 농사를 짓게 함으로써 생산을 증대시켰다. 그의 치세가 태평성대의 딴 이름이 되고, 유가(儒家)가 그들의 이상을 처음 그에게 걸게 된 것은 결코 근거 없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요임금을 동양의 정치사에 길이 기억되게 한 것은 그가 채택한 선양(禪讓)이라고 하는 특이한 권력승계의 방식일 것이다. 요에게는 아들 단주(丹朱)가 있었으나 불초하여 천하를 넘겨주기에는 모자란다 여겼다.

단주만 이득을 보고 세상 모든 사람이 손해를 보게 되는 일은 할 수가 없다.”

요임금은 그렇게 말하며 따로 천하를 맡길 만한 어진 이를 구했다. 그때 사악(四嶽=사방의 제후들을 나누어 관장하는 원로대신들)이 입을 모아 추천한 이가 바로 순()임금 유우씨(有虞氏) 또는 우순(虞舜)이었다.

요임금이 순을 맞아들이고 그 사람됨을 시험한 과정은 유가들에 의해 각색되어 자세하고도 정감 있는 미담으로 전한다. 요임금은 두 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을 함께 순에게 시집보내 그가 하는 양을 살피고 또 아홉 아들을 보내 순을 섬기며 배우게 하였다. 그리고 이십 년에 걸친 단련과 시험 끝에 순을 하늘에 추천하고 은거하였다.

우순의 이름은 중화(重華)이고 기주(冀州) 사람이다. 이미 여러 대째 서민으로 살아가고 있었으나 그는 전욱의 자손으로 황제의 팔세손(八世孫)이었다.

오제(五帝) 중에서 그 삶이 가장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기록된 이는 순임금 유우씨일 것이다. 그는 농부로부터 어부 도공(陶工) 장인바치 등짐장사까지 두루 전전하며 어렵게 살았다. 그러나 어질고 슬기로워 스무 살에는 벌써 이웃이 모두 칭송하였고, 서른 살에는 사악(四嶽)이 요에게 그를 추천할 만큼 이름이 천하에 널리 알려졌다.

순임금을 당대 사람들뿐만 아니라 후세의 유가들까지도 이상적인 성군(聖君)으로 우러르게 한 덕목은 무엇보다도 효도와 우애였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은 그는 눈멀고 어리석은 아비와 심술 사나운 계모, 그리고 간악한 이복동생의 음모에 걸려 몇 번이나 목숨을 잃을 뻔했다. 하지만 슬기와 재치로 간신히 목숨을 건진 뒤에도 지극한 효도로 무도한 부모를 받들고 변함없는 우애로 완악한 아우를 감싸 사람들의 감탄과 칭송을 샀다.

겸손도 순임금을 성인으로 받드는 데 빼놓을 수 없는 덕목이었다. 순은 요임금이 은거한 지 스물여덟 해 만에 붕어하자 그 아들 단주에게 왕위를 양보하기 위해 남하(南河) 남쪽으로 피해 갔다. 그러나 제후들이나 백성들이 모두 단주를 버리고 그를 찾아오자 하는 수 없이 도성으로 돌아가 왕위에 올랐다.

순임금은 사람을 뽑아 쓰는 일에 오제 중 누구보다 공정하고 밝았다. 팔개(八愷=高陽氏 시대의 여덟 인재)와 팔원(八元= 高辛氏 시대의 여덟 인재)의 후예들을 모두 불러 썼고, () 고요(皐陶) () 후직(后稷) () 팽조(彭祖) () () () 등의 대신들에게는 각기 정한 직분을 나눠주었다. 순수(巡狩=5년마다 천자가 제후를 둘러보는 것)와 조회(朝會=순수가 없는 4년간 제후들이 천자를 찾아보는 일)의 법도를 정한 것도 순임금이었다.

하지만 순임금은 징벌 또한 엄격하였다. 먼저 교만 방자한 세력가들인 환두(=讙兜)와 공공(共工)을 남북으로 내쫓고, 반란을 일으킨 삼묘(三苗)와 치수(治水)를 그르친 곤()을 동서로 귀양 보내 천하를 복종시켰다. 또 황제의 자손으로 사악한 짓을 즐겨 한 혼돈(渾沌)과 금천씨(金天氏)의 자손으로 나쁜 말을 잘 꾸며대는 궁기(窮奇)와 전욱씨의 자손으로 미욱하면서도 완악한 도올(禱兀)과 신농씨의 자손으로 탐심이 많았던 도철(饕餮)을 멀리 변방으로 내쫓아 비록 명문가의 후손이라도 악인은 나라 안에 살 수 없게 하였다.

순임금은 서른 살에 요임금에게 등용되었으며, 쉰 살에는 요임금을 대신해 천하를 다스렸다. 쉰여덟에 요임금이 돌아가시자 그 아들 단주에게 왕위를 양보하려고 삼 년이나 도성을 피해 살았으나, 세상이 놓아주지 않자 예순한 살에 요임금을 이어 제위에 올랐다. 그리하여 문무와 예악에서 두루 빛나는 자취를 남겼는데, 즉위한 지 서른아홉 해 뒤 천하를 순수하다가 창오(蒼梧)의 들판에서 숨을 거두었다.

순임금에게는 상균(商均)이란 아들이 있었지만 또한 천하를 이어 받을 만한 재주가 못되었다. 이에 치수에 공이 많은 우()를 미리 하늘에 천거하여 후계자로 삼았다. 순임금이 죽은 뒤 우도 순임금이 단주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상균에게 제위를 양보하려 하였으나 제후들이 우에게로 몰려들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마침내 순임금을 이어 제위에 오르니 이로써 오제의 시대는 끝나고 하()나라가 열린다.

우임금의 아버지는 곤()이고 곤의 아버지는 제()인 전욱이다. 전욱의 아버지는 창의이고 창의의 아버지는 황제이니, 우임금은 곧 황제의 현손이 된다. 따라서 그의 즉위로 오제의 시대는 끝나지만 황제의 세계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임금의 이름은 문명(文命)이요 성()은 사(), ()는 하후(夏后)이다. 성은 가족계통에서 보다 큰 단위(대개 부족)이고 씨는 성 아래의 작은 단위(대개 씨족)인데, 뒷날에는 합쳐 하나로 된다. 우 임금의 성이 사()란 것은 오제(五帝)와 같은 혈통 곧 황제의 자손이란 뜻이며, 씨를 달리했다는 것은 그만큼 번성한 집안에 속했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우의 아버지는 곤()이요, 곤의 아버지는 전욱이니, 우는 황제의 현손(玄孫)에 지나지 않는데도 벌써 씨를 달리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임금 때 홍수가 하늘까지 차올라 산이 에워싸이고 언덕이 잠기자 백성들이 매우 걱정하고 두려워하였다. 요임금이 그 홍수를 잘 다스릴 사람을 찾자 여러 신하들과 사악(四嶽)이 아뢰었다.

()이면 저 물을 다스릴 수 있을 것입니다.”

곤은 명을 어기고 종족에게 해를 입힌 적이 있어 쓸 수가 없소.”

곤의 사람됨을 알고 있는 요임금은 그렇게 말했으나 사악이 굳이 권하였다.

곤보다 더 슬기로운 사람도 없으니 바라건대 시험 삼아 써보십시오.”

요임금도 달리 곤보다 나은 사람을 찾을 수 없어 사악의 말을 따랐다. 하지만 홍수는 9년 동안이나 계속되고 곤은 치수에 성공하지 못했다.

이때 요임금은 다시 자신의 뒤를 이을 인물을 찾다가, ()을 만나 그로 하여금 자신을 대신해 정사를 돌보게 했다. 요임금의 명을 받아 천하를 돌아본 순은 곤이 제 할 일을 못하였음을 보고 그를 우산(羽山)으로 내쫓아 거기서 죽게 했다. 그리고 곤의 아들 우()를 세워 그에게 치수사업을 잇게 했다.

아버지가 하던 일을 맡아 힘과 정성을 다한 우는 곧 요임금과 순의 신임을 받았다. 그러다가 순이 요임금을 이어 제위에 오른 뒤에는 사공(司空)으로서 제후와 백관의 으뜸이 되어 백성들을 거느리고 홍수를 다스리는 일을 맡게 되었다.

우는 매우 총명하고 의욕에 차 있었고 또한 부지런하였다. 너그럽고 인자하면서도 말에는 신용이 있어 부리는 자가 믿을 수 있었으며, 행동은 법도에 맞고 사리판단은 명쾌하여 제후와 백관들이 본받을 만하였다. 거기다가 아버지 곤이 실패하여 처벌된 일을 가슴아파하여 홍수를 다스리는데 잠시도 게을리 함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13년 동안이나 집을 나가 있으면서 어쩌다 자기 집 대문 앞을 지나게 되어도 감히 들어가 보지 못했다.

우는 몸소 산으로 올라가 말뚝을 세워 땅의 높낮이를 표시하고, 높은 산과 큰 내를 쟀다. 입고 먹는 것을 아끼어 귀신에게 정성을 다했으며, 누추한 집에 살면서 남긴 재물을 치수에 돌렸다. 뭍길은 수레를 타고 다녔고, 물길은 배를 탔으며, 진창길에서 썰매를 쓰고, 가파른 산은 쇠를 박은 신발로 올랐다. 왼손에는 수평과 먹줄을, 오른손에는 그림쇠와 곡척(曲尺)을 들고 계절을 살펴가며 천하를 정돈하였다.

저는 도산씨(塗山氏)의 딸을 아내로 맞아 혼인한 지 나흘만에 집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뒤 아들 계()가 태어나도 돌아보지 못하고 일에 매달려서야 겨우 천하의 물길을 바로 잡을 수 있었습니다.”

뒷날 우는 순임금에게 그렇게 겸손히 말했으나, 그의 골몰함은 겨드랑이의 털이 모두 떨어지고, 허벅지의 살이 다 빠질지경이었다고 한다.

우가 구주(九州)를 개척하니 기주(冀州) 연주() 청주(靑州) 서주(徐州) 양주(梁州) 형주 (荊州) 예주(豫州) 양주(揚州) 옹주(雍州) 아홉 고을이 뒷날의 모습으로 정리되었고, 구산(九山)을 열고 이으니 천하의 아홉 개 큰 산이 비로소 제자리를 잡았다. 견산(D) 호구산(壺口山) 지주산(砥柱山) 태행산(太行山) 서경산(西傾山 ) 웅이산(熊耳山) 파총산(C) 내방산(內方山) 문산(汶山)이 그 산들이다.

우는 또 약수(弱水) 흑수(黑水) 황하(黃河) 한수(漢水) 장강(長江) 제수(濟水) 회수(淮水) 위수(渭水) 낙수(洛水)에 제 갈 길을 열어주었다. 이른바 구천(九川)의 소통이다. 그리고 아홉 개의 큰 늪과 못[구택]에는 모두 제방을 높게 쌓으니 천하의 물이 함부로 넘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경기(京畿=천자의 직할지) 밖에 오복(五服=도성 둘레 매 5백 리마다 설치한 다섯 토지구획)을 설치하여 천자의 다스림이 사방 5천리에 미치게 하였으며, 내치(內治)에도 참여하여 고요(皐陶)나 익()에 못지않았다. 순임금은 그와 같은 우의 공을 높이 사 마침내는 그를 후계자로 정하였다.

70년이 지나 순임금이 죽자 우는 제위를 순임금의 아들 상균(商均)에게 사양하고자 양성(陽城)으로 피해갔다. 그러나 제후들이 모두 상균을 버리고 우를 찾아오자 하는 수 없이 도성으로 돌아와 천자가 되고, 나라 이름을 하후(夏后) 또는 하()라 하였다.

제위에 오른 우임금은 신하 중에 어진 고요(皐陶)를 하늘에 천거하여 후계자로 삼으려 하였으나 고요가 먼저 죽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다시 익()을 하늘에 천거하여 후계자로 삼고 그에게 정사를 맡겼다.

10년 뒤 우임금은 동쪽을 순시하다가 회계(會稽)에 이르러 숨을 거두었다. 우임금은 천하를 익에게 넘겨주었으나 익은 전례에 따라 우임금의 아들 계()에게 제위를 양보하고 기산(箕山) 남쪽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제후들이 익을 따라오지 않았다. 계가 현명한데다 익이 정사를 도맡은 지 오래되지 않아 천하의 신임을 받지 못한 탓이었다. 제후들이 모두 계를 찾아보고 말했다.

우리의 임금 하우씨(夏禹氏)의 아드님이십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계가 즉위하여 임금이 되니 이로써 하()나라는 오제(五帝) 시대와는 달리 선양(禪讓)이 아닌 세습(世襲)으로 대를 잇게 되었다.

하 왕조의 세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 수천 년 뒤 라마(羅馬=로마)제국에서 있었던 오현제(五賢帝)의 치세와 그 씁쓸한 종장이 떠오른다. 현명한 양자(養子)를 통해 이루어진 오현제 간의 권력승계는 그들 나름의 선양이었다. 그러나 안돈왕(安敦王=아우렐리우스 황제)에 이르러 어리석은 친자(親子)에게 제위를 세습시키면서 라마제국의 번성은 끝나고 만다. 충분히 윤색되어 있기는 하지만, 계의 세습 또한 중국고대사의 이상이 권력의 치욕으로 오염되어간 최초의 예는 아닐는지.

하지만 세습의 진상이야 어떠하건, 계 임금은 제후와 백성들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유호씨(有扈氏)가 맞서오자 감()땅에서 무찌르고 하나라의 위엄을 크게 떨쳤다. 그때 육군(六軍)의 장수들을 훈계하기 위해 지은 <감서(甘誓)>가 남아 전하는데, 적어도 과감한 군사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는 모자람이 없다.

<들어라. 여섯 갈래 군대를 거느리는 장수들이여. 유호씨가 무력을 믿고 오행(五行)의 규율을 업신여기며, 하늘과 땅과 사람의 도를 저버렸으므로 하늘이 그를 쳐 없애려 한다. 지금 나는 다만 하늘의 징벌을 공손히 집행할 뿐이다. 왼쪽의 병사가 왼쪽에서 공격하지 않고, 오른쪽의 병사가 오른쪽에서 공격하지 않는다면 이는 명을 어긴 것이다. 말을 부리는 병사가 말을 잘 몰지 않는다면 이는 또한 명을 어긴 것이다. 명에 복종한 자들은 조상의 사당에서 상을 줄 것이고, 명을 어긴 자는 지신(地神)의 사당에서 형벌을 내리고 그 자식들은 노예로 삼거나 죽일 것이다!>

계임금을 이어 태강(太康)이 즉위하였으나 덕성이나 지혜가 아니라 핏줄에 기대 얻은 임금자리라 당장 그 폐해가 드러났다. 태강은 사냥과 음악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다가 활 잘 쏘는 유궁씨(有窮氏)의 왕 예()에게 쫓겨나 다시는 임금자리로 돌아오지 못했다. 못난 형 때문에 고단하게 된 태강의 다섯 아우가 낙수(洛水) 가에서 부른 슬픈 노래[五子之歌]만 전해올 뿐이다.

<……오호라, 어느 날에 돌아갈 수 있으리요. 내 가슴에 품은 이 슬픔이여. 온 백성이 나를 원수로 여기니 내 장차 누구에게 의지할꼬. 답답하고 안타깝구나, 내 마음이여. 낯이 두터워 오히려 부끄러워라. 삼가 그 덕()을 가꾸지 못한 탓이거니, 비록 뉘우친들 어찌 돌이킬 수 있으리.>

()가 다시 나라꼴을 회복하는 것은 태강이 죽고 그 아우 중강(中康)이 제위에 오른 뒤가 된다. 중강임금은 세도가인 희씨(羲氏)와 화씨(和氏)를 정벌하여 위엄을 세우고, 아들 상()에게 임금자리를 넘긴다. 그 뒤로도 근()임금까지 여덟 대()를 하()나라는 그런 대로 볼만하게 이어갔다. 하지만 공갑(孔甲)이 제위에 오르자 하후씨(夏后氏)의 덕망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공갑임금은 귀신을 좋아하였으며 또한 매우 음란하였다. 용을 기른답시고 온갖 요란을 떨다가 유루(劉累)라는 신하로부터 버림받는 얘기가 나오는 걸로 미루어 보건대, 사치와 방자함이 진기한 초목과 짐승을 기르고 요사스러움을 섬기는 데까지 미쳤던 듯하다. 임금이 그리되면 나라가 어지러워질 것은 뻔한 이치, 그때부터 제후들이 등을 돌리자 하나라는 힘으로 제후들을 정벌하기 시작했다. 백성들도 잇따른 전쟁으로 괴로워졌다.

공갑임금이 죽고, ()와 발()을 거쳐 이계(履癸)가 왕위에 올랐다. 바로 하나라의 마지막 임금 걸왕(桀王)이다. 이때 천하의 민심은 이미 하나라를 떠났으나, 걸왕은 덕행에 힘쓰지 않고 더욱 창칼의 힘만으로 제후들과 백성들을 괴롭히며 큰소리 쳤다.

내가 천하를 다스림은 하늘에 해가 있는 것과 같다. 해가 없어진다면 모를까, 내가 망해 없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 말을 전해들은 백성들은 해를 흘금거리며 수군거렸다.

저 눔의 해는 언제 없어지려나. 저 해가 없어질 수 있다면 나도 함께 망해 없어져도 한이 없으련만.”

민심이 그렇게 떠나가니 뜻 있는 제후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제후들 중에 은족(殷族)의 우두머리 탕()이 가장 힘 있고 덕망이 높았다. 위협을 느낀 걸왕은 탕을 불러들여 하대(夏臺)에 가두었으나 무슨 변덕인지 얼마 뒤에 풀어주었다. 풀려난 탕은 더욱 덕을 쌓고 은의를 베풀어 천하 제후들을 자신에게로 끌어들인 뒤 마침내 걸왕을 공격하였다.

걸왕은 허()라는 곳에서 탕을 맞아 싸웠으나 크게 지고 말았다. 명조(鳴條)로 달아났다가 끝내는 남소(南巢)로 쫓겨나 죽었다. 살아있을 때 걸왕은 가끔씩 사람들에게 한탄하였다.

나는 그때 하대에서 탕을 죽였어야 했다. 그러지 못해 이 지경에 이른 게 원통하구나.”

그렇게 하여 하나라는 우 임금으로부터 열 일곱 대()만에 망하고 탕이 세운 상() 또는 은()나라가 열린다. 하지만 핏줄로 따지면 천하는 여전히 황제의 자손에게서 또 다른 황제의 자손에게로 옮아갔을 뿐이었다.

은족(殷族)의 시조인 설()은 제곡의 아들이요, 황제의 현손이다. 설은 당요(唐堯)에게 등용되었으며 우순(虞舜)에게서 상()땅을 봉지로 받았다. 설이 땅을 받을 때 자씨(子氏)라는 성을 따로 받았으나, 황제의 현손인 만큼 그의 후손 탕()이 세운 나라 또한 황제(黃帝)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설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소명(昭明)이 상()땅을 이어받았고, 다시 그 아들 상토(相土)로부터 열두 대()를 내려가 천을(天乙)이 임금 자리에 오르니 그가 바로 성탕(成湯)이다.

탕은 도읍을 박()으로 옮겨 나라를 정비하고 어진 재상 이윤(伊尹)을 얻어 힘을 길렀다.

이윤의 이름은 지()또는 아형(阿衡)인데, 일찍이 탕임금을 만나 큰 뜻을 펴보고자 하였으나 길이 없었다. 마침 유신씨(有莘氏)의 딸이 탕임금의 왕비가 되어 왕궁으로 들어갈 때 잉신(媵臣·귀족집안의 딸이 시집 갈 때 데려가는 노복)을 자청하여 솥과 도마를 메고 따라갔다. 그리고 왕궁의 조리사로 일하면서 음식의 맛에 비유하여 다스림을 일깨워 탕임금으로 하여금 왕도(王道)를 지키게 했다.

어떤 이는 탕임금이 사람을 시켜 숨어사는 이윤을 찾았고, 이윤은 오히려 다섯 번이나 마다하다가 겨우 그 뜻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또 이윤은 탕임금에게 등용되고 난 뒤에도 하나라 걸왕에게 불리어 간 적이 있으나, 걸왕이 포악하고 하나라가 썩었음을 보고 박으로 되돌아왔다고도 한다.

이윤의 보좌로 슬기와 힘을 갖추게 된 탕은 이웃 갈족의 우두머리[葛伯]가 하늘에 제사를 올리지 않음을 보고 군사를 내어 정벌하며 말했다.

맑은 물을 내려다보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듯이, 백성을 보면 그 나라가 제대로 다스려지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소.”

그러자 이윤이 말했다.

현명하십니다. 남의 훌륭한 말을 귀담아듣고 따른다면 도덕이 발전할 것입니다. 백성을 자식처럼 여긴다면 훌륭한 인재들이 모두 왕궁으로 몰려들 것입니다. 더욱 노력하십시오.”

한번은 탕임금이 교외로 나갔다가 사방에 그물을 치고 비는 사람을 만났다.

천하의 모든 것이 내 그물로 들어오게 하소서!”

어허, 한꺼번에 모든 걸 다 잡으려 하다니!”

탕임금이 그렇게 말하고는 삼면의 그물을 거두게 한 다음에 다시 이렇게 축원하게 하였다.

왼쪽으로 가고 싶은 것은 왼쪽으로 가게하고, 오른쪽으로 가고 싶은 것은 오른쪽으로 가게 하소서. 오직 이 말을 따르지 않는 것들만 내 그물로 들어오게 하소서!”

그 소문을 들은 제후들은 저마다 감탄해 마지않았다.

탕임금의 덕이 지극하시구나! 금수(禽獸)에까지 미쳤도다.”

그런데도 하나라 걸왕은 포악한 짓을 그치지 않고, 술과 여자에 빠져 지냈다. 견디다 못한 곤오씨(昆吾氏)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탕은 이윤과 함께 제후들을 이끌고 곤오씨를 정벌한 뒤에 다시 제후들과 백성을 보고 외쳤다.

하나라 걸왕은 백성을 쥐어짜고 나라의 재물을 함부로 퍼내어서, 백성이 맥 빠지고 게으르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서로 화목할 수 없게 만들었소. 그리하여 마침내는 해를 보며 저 해가 언제 지려는가? 내 차라리 너와 함께 없어지리라!’라고 탄식하는 지경에 이르렀소. 하왕조의 덕이 이같이 쇠했으니 내가 정벌하지 않을 수가 없소. 내가 하늘을 대신해 징벌하도록 도와준다면 그대들에게 큰 상을 내릴 것이오!”

그리고는 크게 군사를 일으켜 걸왕을 내쫓았다.

그 뒤 탕은 하()나라의 정령을 폐지하고 걸왕을 대신해 천자의 자리에 올랐다. ‘탕고(湯誥)’를 지어 제후들을 경계하였고, 역법(曆法)을 개정하였으며, 관복의 색깔을 바꾸어 흰 빛을 숭상하게 하였다.

탕임금이 죽자 외병제(外丙帝) 중임제(中壬帝)에 이어 태갑(太甲)이 제위에 올랐다. 태갑제가 포악하여 탕임금의 법령을 지키지 않고 국정을 문란케 하자 재상 이윤이 그를 내쫓고 3년이나 섭정하며 제후들의 조회를 받았다. 그러다가 태갑제가 뉘우치고 스스로 사람이 달라지자 다시 천자로 모셨는데, 이후 이윤이 남긴 그 같은 전례는 많은 찬탈자와 야심가들에게 악용된다.

태갑제 때 크게 흥성했던 은()나라는 그 스물한 번째 임금인 소을제(小乙帝) 때에 이르러 쇠약해졌다. 그 아들 무정제(武丁帝)가 즉위해 나라를 부흥시키고자 하였으나 곁에서 도와줄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부험(傅險)에서 길을 닦고 있던 죄수들 중에서 열()이란 사람을 찾아내 그의 보좌로 일시 나라를 바로 세웠다. 뒷날 부열(傅說)로 알려진 은()중흥의 공신이었다.

하지만 무정제가 죽은 뒤 은나라는 다시 내리막길을 걸었다. 다섯 대() 뒤 무을제(武乙帝)는 귀신을 놀리고 천신(天神)을 모욕하다가 천둥소리에 놀라 죽고, 태정제(太丁帝) 을제(乙帝)가 뒤를 이었으나 은나라의 운세를 돌려놓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을제의 아들 신()이 제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주왕(紂王)이라 불리는 신제(辛帝)이다.

시호를 짓는 법[諡法]에는 의로움과 선함을 해치는 것을 주()라 한다[殘義捐善曰紂]’고 되어 있다. 하지만 기록에 따르면 주왕은 여러 가지로 뛰어난 인물이었던 듯싶다. 그는 타고난 바탕이 총명하여 남의 충고가 필요하지 않았고 말솜씨가 좋아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꾸며대고 감출 수 있었다. 또 일 처리에 날렵해 아랫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되었고, 힘이 세어 맨손으로 사나운 짐승을 때려잡을 만했다.

그렇지만 제위에 올라 천하를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자 그 같은 뛰어남은 오히려 그에게 해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재주를 믿어 신하들을 얕보게 되었으며, 되잖은 허영으로 명성을 홀로 천하에 드높이려 했다. 남의 말을 듣지 않아 두려워할 줄 모르고, 스스로 변명할 줄 알다보니 못할 짓이 없었다.

먼저 주색에 빠져 나라를 어지럽혔는데, 달기()란 미녀를 총애하여 그의 말이면 무엇이든 들어주었고, 음란한 노래를 짓게 하고 추잡한 춤을 추게 해 풍속을 더럽혔다. 백성을 쥐어짜 녹대(鹿臺)란 큰 단을 돈으로 쌓았으며, 거교(鉅橋)란 큰 창고를 곡식으로 채웠다. 또 별궁(別宮) 정원에 술로 연못을 만들고 고기를 매단 나무를 빽빽이 세워 주지육림(酒池肉林)’이란 말을 뒷세상에 남겨주었다.

주가 그런 궁궐 안에다 악공들과 광대들을 불러 흥을 돋우게 하고, 벌거벗은 남자와 여자들로 하여금 밤낮으로 시시덕거리게 하니 나라에 정사란 게 제대로 펴질 리 없었다. 백성들의 원망이 높아지고, 거역하는 제후들이 늘어나자 주는 형벌을 모질게 해서 겁을 주려 했다. 기름을 칠한 구리기둥 아래 불을 피워놓고 죄수로 하여금 그 기둥 위를 걷게 해 떨어지면 타 죽게 하던 포락()이란 형벌이나 죄인의 살을 한 점 한 점 발라 죽이던 과()라는 형벌이 나온 게 그때였다고 한다.

그때 은나라의 삼공(三公)은 뒷날 서백(西伯)이 된 주후(周侯) ()과 구후(九侯), 악후()였다. 구후가 아름다운 딸을 주왕에게 바쳤으나 그 딸은 주왕의 음탕함을 싫어했다. 성난 주왕은 그녀를 죽이고, 아비인 구후까지 죽인 다음 포를 떠 소금에 절였다. 말리다 못한 악후가 성난 소리로 꾸짖자 주왕은 그도 죽여 포를 떴다.

두 사람이 참혹하게 죽은 일을 들은 주후 창은 탄식해 마지않았는데, 그걸 다시 누가 주왕에게 일러바쳤다. 주왕은 화를 내며 주후마저 잡아다가 유리()란 곳에 가두어 버렸다.

다행히도 주후 창에게는 굉요()와 산의생(散宜生) 같은 현명한 신하들이 여럿 있었다. 주왕이 좋아할 미녀와 좋은 말, 보배로운 구슬 따위를 구하여 바치고 저희 주군을 용서해 주기를 빌었다. 이에 마음이 풀어진 주왕은 창을 놓아주었다.

풀려난 주후 창은 다시 낙수(洛水) 서쪽의 땅을 주왕에게 바치며 포락의 형을 없이 해 줄 것을 빌었다. 그 충성을 갸륵히 여긴 주왕은 주후의 청을 들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궁시(弓矢)와 부월(斧鉞)을 내리며 주변 제후들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서방 제후들의 우두머리란 뜻의 서백(西伯)’이란 호칭은 그때 생겨났다.

몸을 굽히고 재물을 바쳐 믿음을 산 서백 창이 드러나지 않게 덕을 베풀고 힘을 길러가는 동안에도 주왕은 실정을 거듭했다. 아첨 잘 하고 제 뱃속 채우기에만 바쁜 비중(費中)이란 간신을 등용하여 백성들의 원망을 사고, 다른 사람을 헐뜯기 잘하는 오래(惡來)만 믿고 총애해 다른 제후들과 멀어졌다. 상용(商容)이란 어진 이가 있었으나 써주지 않았고, 왕자 비간(比干)이 간절한 충언을 올렸지만 들어주지 않았다.

그 사이에도 서백은 한편으로는 덕으로 이끌고 다른 한편으로는 힘으로 아울러 자신을 따르는 제후들을 늘여나갔다. 그 뒤 서백이 세상을 떠나고 무왕(武王)이 왕위에 오르자 민심은 한층 주()로 쏠렸다. 무왕이 동쪽을 정벌하여 맹진(盟津)에 이르렀을 때 부르지도 않은 제후들이 800명이나 몰려와 권했다.

지금 주왕의 악은 하늘에 닿았습니다. 그를 정벌하십시오.”

그러나 무왕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대들은 천명을 모르고 있소. 아직은 때가 아니오.”

그런데도 주왕은 갈수록 음란하고 포악해졌다. 은나라 말기의 세 어진 이[殷末三仁] 가운데 미자(微子)가 먼저 말려도 듣지 않는 주왕을 버리고 떠났다. 그러나 비간은 남아 거듭 주왕을 말리다가 마침내 그 분노를 샀다.

내가 들으니 성인의 염통에는 구멍이 일곱 개나 있다고 한다. 네가 홀로 어진 척 떠드는데 어디 네 염통에도 구멍이 일곱인가 보자.”

그러고는 비간을 죽여 염통을 꺼내 보았다. 나머지 한사람 기자(箕子)는 두려운 나머지 미친 척하며 남의 종살이를 하려 했지만 주왕은 그를 잡아 옥에 가두어 버렸다. 그러자 이미 나라꼴이 글렀다고 본 태사(太師)와 소사(小師)는 은나라의 제기(祭器)와 악기(樂器)를 싸들고 주나라로 달아나 버렸다.

마침내 때가 무르익었다고 본 무왕은 제후들을 거느리고 주왕을 치러 나섰다. 주왕도 군사를 일으켜 목야(牧野)에서 크게 싸웠으나 천명(天命)은 이미 은나라를 떠난 뒤였다. 갑자일(甲子日) 한 싸움에 여지없이 지고 성안으로 쫓겨 들어가 타는 불 속에 뛰어들어 죽었다. 무왕은 주왕의 목을 베어 큰 백기[大白旗]에 매달고, 달기도 찾아 처형했다.

-이렇게 황제(黃帝)의 자손이 세운 또 하나의 제국 은나라는 처음 왕조를 연 성탕(成湯)으로부터 서른 대() 만에 주나라 무왕에게 천하를 내주고 막을 내렸다.

()나라의 시조 후직(后稷)도 황제의 자손이다. 그의 어머니 강원(姜原)이 제곡의 정비(正妃)이니 은나라 시조인 설()과 마찬가지로 그 또한 황제의 현손이 된다. 하지만 강원이 거인의 발자국을 밟고 그를 임신했다는 탄생설화는 간적(簡狄)이 제비 알을 삼키고 설을 낳게 되었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계(父系)혈통에 대한 의혹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다.

특히 후직은 태어난 뒤의 설화로 미루어 보면 제곡의 혈통, 곧 황제의 자손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추측까지 든다. 강원이 갓난 후직을 길에 버렸더니 소와 말이 피해 지나가고, 깊은 숲 속에 버리니 난데없이 사람들이 몰려와 구했으며, 얼음 위에 던져 두었더니 날짐승들이 깃털로 덮어 주었다고 한다. 옛 기록에서는 어머니가 아들을 그렇게 버린 까닭을 별난 임신을 불길하게 여겨서라고 하나, 실은 수상쩍은 부계혈통이 준 부담이었던 듯하다. 후직의 이름이 기()인 것은 그렇게 버림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부모에게 거두어들여져 자란 후직은 농경에 능통하여 요임금 시절에 농사(農師)로 발탁되었다. 그때 붙여진 칭호가 후직이요, 받은 성은 희씨(姬氏), 땅은 태()였다. 후직은 당요(唐堯) 우순(虞舜) 하우(夏禹) 삼대에 걸쳐 농관(農官)으로 일하면서, 때맞춰 씨 뿌리고 거두는 일을 가르쳐 굶주린 백성들을 구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

후직이 죽자 아들 부줄(K)이 뒤를 이었다. 그러나 뒷날 하우씨의 자손들이 덕을 잃어 농관의 직책을 없애버리자 늙은 부줄은 일족을 이끌고 융적(戎狄)의 땅으로 달아났다. 그 뒤로 그 자손들은 오랑캐 땅에서 살게 되었으나, 황제의 핏줄은 역시 남달랐다. 부줄의 손자 공류(公劉)시절에 정교(政敎)가 크게 떨치기 시작하였고, 그 아들 경절(慶節)은 도읍을 빈()에 정해 주나라의 기초를 더욱 튼튼히 했다.

그로부터 일곱 대()가 지나 고공단보(古公亶父)란 영걸이 나타났다. 고공단보가 후직과 공류의 뜻을 이어 덕을 닦고 의를 행하자 온 나라 사람들이 그를 우러르고 받들었다. 그걸 시기한 훈육(熏育=뒷날의 흉노)과 융적이 싸움을 걸어오자 고공단보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양산(梁山)을 넘어 기산(岐山) 아래로 옮겨 살았다. 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늙은이를 부축하고 어린이를 업은 채 그를 뒤따랐다.

고공단보는 백성들의 몸에 밴 오랑캐의 습속을 고치게 하고, 오관(五官)과 유사(有司)를 두어 나라의 틀을 갖추었다. 또 집을 짓고 성곽을 쌓게 하였으며, 고을을 나누어 백성들이 살게 하였다. 그때 그가 힘들여 개척한 지방이 주원(周原)이었으므로 주()라고 하는 나라이름이 처음 나왔다.

고공단보에게는 정실에게서 난 세 아들이 있었는데, 맏이가 태백(太伯)이요, 둘째가 우중(虞仲)이며, 막내가 계력(季歷)이었다. 계력이 지임씨(摯任氏)의 딸인 태임(太任)을 맞아 아들 창()을 낳을 적에 그 조짐이 비상하였다. 붉은 새가 단서(丹書)를 물고 방안으로 날아들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나의 시절에 나라를 크게 일으킬 사람이 날 것이라 했는데, 바로 이 아이가 아닌가?”

고공단보가 기뻐하며 그렇게 말했다. 맏이 태백과 둘째 우중은 아버지가 조카 창으로 하여금 뒤를 잇게 하고 싶어함을 알자 함께 형만(荊蠻)의 땅으로 달아났다.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고 몸에는 문신을 하여 오랑캐 사이에 숨어 삶으로써 왕위가 창에게 돌아갈 수 있게 했다.

고공단보가 죽자 주나라의 왕위는 계력을 거쳐 창에게 전해졌다. 뒷날 문왕(文王)으로 추존 받게 되는 창은 후직과 공류, 고공단보의 업적을 이어받아 어진 정치를 베풀고 백성들을 사랑하였다. 밥 한 그릇 먹을 동안 세 번이나 입안의 것을 뱉어야 할정도로 어진 사람들을 맞아들이기에 정성을 다하니 천하의 재주 많고 덕 높은 선비들이 모두 창에게로 몰려들었다. 고죽국(孤竹國)에서 온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비롯하여 태전(太顚) 굉요() 산의생(散宜生) 육자() 신갑(辛甲) 같은 이들이 그랬다.

창의 세력이 나날이 불어가는 걸 본 숭후 호(崇侯 虎)가 은나라 주왕에게 모함했다.

제후들이 모두 창에게로 기울어지니 이는 결코 대왕께 좋은 일이 못됩니다.”

그 말을 들은 주왕은 창을 불러들여 유리()에 가두었다. 굉요를 비롯한 창의 신하들이 유신씨(有莘氏)의 미녀와 여융(驪戎)족의 문마(文馬=아름다운 준마), 유웅(有熊)족의 구사(九駟=아홉 대의 수레를 끌 수 있는 서른여섯 마리의 말)를 다른 여러 보석들과 함께 바치며 풀어주기를 빌었다.

미녀만으로도 창을 놓아 주기에 넉넉한데, 더하여 이렇게 많은 걸 바치다니!”

주왕이 기뻐 그렇게 말하며 창을 놓아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풀려난 뒤에는 땅까지 떼어 바치는 그를 서백(西伯)으로 높여 주변 제후국들을 정벌할 수 있는 권한까지 주었다.

그 뒤 서백은 한편으로는 덕을 베풀고 한편으로는 힘으로 주변을 아우르며 더욱 세력을 키워나갔다. 풍읍(豊邑)을 세워 기산 아래에서 그리로 옮겨 앉았고, 할아버지 고공단보를 태왕(太王)으로, 아버지인 계력(季歷)을 왕계(王季)로 높여 부르게 했다.

서백이 쉰 해를 다스리다 죽자 그 아들 발()이 대를 이으니 그가 무왕(武王)이다. 무왕은 강상(姜尙)을 군사(軍師)로 삼고, 아우 주공(周公) 소공(召公) 필공(畢公) 등을 써서 아버지 문왕의 위업을 더욱 크게 떨쳐 나갔다. 그 중에서도 강상은 봉함 받은 땅을 성으로 써서 여상(呂尙)이라고도 하고 또 달리는 태공망(太公望)이라 불리기도 하는 이로, 서백이 위수(渭水)가에서 얻은 인재였다. 특히 군사를 부리는 데 뛰어났는데, 무왕은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아버지처럼 받들어 사상보(師尙父)라 불렀다.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리던 무왕이 군사를 일으켜 주왕을 친 것은 왕위에 오른 지 열한 해 되던 때였다. 그해 2월 갑자일(甲子日) 동틀 무렵 싸움수레[戎車] 300대와 용사 3000, 갑사(甲士) 45000명을 이끌고 목야(牧野)의 들판에 이른 무왕은 군사들과 모여든 제후들에게 외쳤다.

옛말에 암탉은 새벽에 울지 않으니, 암탉이 새벽에 울면 집이 망한다고 하였소. 그런데 지금 은왕(殷王) ()는 오직 계집[妲己]의 말만 듣고 선조의 제사를 끊었으며 나라를 어지럽혔소. 또한 친히 해야 할 사람은 쓰지 않고 오히려 죄 짓고 도망쳐온 자들을 높이고 믿으니, 그들은 백성들을 모질게 대하고 나라에 온갖 못된 짓을 다 저질렀소. 지금 이 사람 발()은 그대들과 함께 다만 하늘의 징벌을 대신하려 하오.”

그러자 그를 따르기로 맹세한 제후들의 싸움수레만도 4000대나 되었다.

은나라 주왕은 무왕이 왔다는 말을 듣고 70만의 군대를 내어 막아보려 했다. 그러나 이미 민심이 떠났으니 군사들이 제대로 싸워줄 리 없었다. 무왕이 먼저 날랜 용사를 내어 싸움을 건 뒤에 대졸(大卒=부대단위. 대략 戎車 350대에 군사 3만 명 정도)을 몰아 들이치자 은나라의 군사들은 오히려 창칼을 저희 편에게 돌려 길을 열어주었다.

이에 일이 글렀음을 안 주왕은 성안으로 도망쳐 들어갔다가 보석이 박힌 옷을 뒤집어쓰고 스스로 불 속에 뛰어들어 죽었다. 달기와 다른 애첩들도 모두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뒤따라 성안으로 들어온 무왕은 그들의 시체를 목베어 크고 작은 기에 달게 한 뒤, 하늘에 성대한 제사를 올리고 은나라를 대신해 천하의 주인이 되었다.

무왕은 먼저 주왕의 학정과 악행를 모두 바로잡고, 다시 태공망과 주공을 비롯한 여러 공신과 형제들을 제후로 봉해 천하를 안정시켰다. 또 화산(華山) 남쪽에는 말을 놓아기르고 도림(桃林) 들판에는 소를 놓아기르게 하였으며, 무기를 거두어들이고 군사를 흩어 다시는 무기와 군사를 쓰는 일이 없을 것임을 널리 알렸다.

무왕이 병들어 죽고 어린 아들 송()이 뒤를 이어 성왕(成王)이 되자 주의 천하에 잠시 혼란이 일었다. 섭정을 맡게 된 주공(周公)의 두 아우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이 주왕의 아들 무경(武庚)을 꼬드겨 난을 일으킨 것이었다. 주공은 그 난을 진압하고 어린 성왕에게 변함없는 충성을 바쳐 주 제국의 기초를 굳건히 하였다.

성왕에 이어 강왕(康王) 소왕(昭王) 목왕(穆王)을 거쳐 공왕(共王)에 이를 때까지만 해도 주나라 왕실의 위엄은 그럭저럭 이어져갔다. 그러나 공왕의 뒤를 이은 의왕(懿王)때가 되면 벌써 왕실을 풍자하는 시가 씌어지고 있다. 이어 의왕의 아우가 찬탈하여 효왕(孝王)이 되었다가 다시 의왕의 아들이 이왕(夷王)에 올라 왕통을 바로잡지만, 곧 여왕()이 나타난다.

여왕은 욕심 많고 표독스러운 영이공(榮夷公)을 대신으로 쓰고, 실정(失政)과 악행을 비방하는 사람들을 잡아 죽여 백성들의 입을 막았다. 예량부(芮良夫)와 소공(召公) 같은 충신들이 말렸으나 듣지 않다가 마침내는 공화(共和)’란 특이한 사태를 맞이하게 된다.

공화는 여왕이 성난 백성들에게 쫓겨 체()땅에 숨어사는 14년 동안 소공과 주공(周公=성왕 때의 주공과는 다른 인물) 두 재상이 임금 없이 나라를 다스린 일을 말한다. 뒷날 공화국(共和國)이나 공화정(共和政)의 어원이 된 사건이다.

여왕이 죽고 소공의 집에서 자란 태자가 왕위에 올라 선왕(宣王)이 되지만 주 왕실의 운세는 별로 회복되지 못했다. 선왕은 내치에 어두울 뿐만 아니라 외정(外政)에도 서툴러 오랑캐인 강()과 싸우다가 크게 졌다. 그러고도 호구(戶口)를 헤아리는 일로 백성들을 괴롭히더니 아들 궁생(宮生)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죽었다.

궁생이 왕위에 올라 유왕(幽王)이 되었는데, 비록 나라까지 잃지는 않았지만 유왕은 하나라 걸왕(桀王)이나 은나라 주왕(紂王)에 못지않은 폭군으로 널리 이름을 얻었다. 지진이 일고 강물이 말라도 삼갈 줄 모르고, 괵석보(虢石父)란 간신을 무겁게 써서 백성들을 쥐어짜게 했다. 거기다가 포사()란 여인을 총애하여 나랏일을 더욱 그르쳤다.

포사가 잘 웃지 않자 유왕은 여러 가지로 그녀를 웃겨보려 했다. 한번은 적군이 오지 않는데도 봉화를 올리고 큰북을 두들기게 하였는데, 놀란 제후들이 모두 달려와 허탕을 치는 걸 보고 드디어 포사가 웃었다. 그러자 유왕은 기뻐하며 그 뒤로도 여러 차례 봉화를 올리고 큰북을 쳐 포사를 웃겼다.

포사가 백복(伯服)을 낳자 유왕은 신후(申侯)의 딸인 왕후와 태자 의구(宜臼)를 폐하고 포사를 왕후로 백복을 태자로 세웠다. 성난 신후는 증()나라 및 견융(犬戎)과 손잡고 유왕을 쳤다. 유왕은 급히 봉화를 올리고 큰북을 치게 하였으나 여러 번 속은 제후들은 아무도 달려오지 않았다. 마침내 여산(驪山) 아래에서 견융에게 잡혀 죽고 주 왕실의 재물은 모두 노략질 당했다.

원래 태자였던 의구가 옹립되어 왕위에 오르니 그가 평왕(平王)이다. 평왕은 견융을 피해 도성을 낙읍(洛邑)으로 옮기고 나라를 되일으켜 보려고 했으나 뜻 같지가 못했다. 제후들 가운데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아우르기 시작했고 대권은 세력 있는 방백(方伯)에게로 넘어갔다. 이른바 춘추(春秋)’시대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오제(五帝) 삼대(三代=夏 殷 周)를 이어온 황제의 세계도 서서히 저물어 갔다.

 

산의 남쪽을 양이라 하고[산남왈양], 또 물의 북쪽을 양이라 한다[水北曰陽]. 효공(孝公) 때부터 진()나라가 도성으로 삼은 땅은 구종산(N) 남쪽이요 위수(渭水) 북쪽이라, 둘 모두[]가 양()이 된다 해서 함양(咸陽)이라 불리었다.

시황제 30년 초가을. 그 함양성 동쪽으로 위수의 물을 끌어들이는 엄청난 공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성곽을 따라 깊고 넓은 물길을 파고 거기 물을 대 해자(垓字)로 삼기 위해서였다. 뒷날의 일이지만, 그 해자에는 난지(蘭池)란 고운 이름이 붙여지게 된다.

천하 서른여섯 군()에서 끌려온 수만 명의 일꾼들이 이제 막 모습을 갖춰가고 있는 물길 바닥과 양쪽 둑을 뒤덮다시피 하여 마무리를 서두르고 있었다. 위수가 얼기 전에 물을 끌어들일 수 있게 하라는 시황제의 엄명 때문이었다. 일꾼들도 해를 넘기기 전에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흙을 파는 사람, 돌을 깨는 사람, 파고 깬 것들을 실어내고 나르는 사람, 그리고 물이 굽이치게 될 모퉁이에 축대를 쌓는 사람-일꾼들은 저마다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도 진나라 병사들은 그들 사이를 휘젓고 다니면서 구실만 있으면 채찍이나 창대를 휘둘러댔다. 기한을 맞추라는 윗사람들의 재촉 때문이기도 했지만 승리자 혹은 정복자의 가학(加虐)심리도 한몫을 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런데 함양성 동문에서 머지않은 곳의 한 일터는 달랐다. 사수군(泗水郡) 패현(沛縣)에서 끌려온 일꾼들이 맡은 지역인데, 그들은 성곽을 따라 길게 파헤쳐진 물길을 몇 마장 잘라 자신들만의 영역이라도 확보한 것 같았다. 진나라 병사들은 별로 보이지 않는데도 차분하고도 흐트러짐 없이 일하는 게 주변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었다.

얼른 보면 그들은 각기 일을 나누어 받아 제 할 일만 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한발 떨어져서 보면 그들은 무언가를 중심 삼아 그걸 에워싸듯 일하고 있었다. 바로 패현에서도 특히 풍읍(豊邑)과 그 인근 마을에서 끌려온 사람들이 몰려 일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가만히 살피면 풍읍 쪽에서 온 사람들에게는 또 그들 나름의 중심이 있었다. 저마다 맡은 일에 바쁜 척하면서도 그들 한가운데 감춰주듯 에워싸고 있는 세 사람이 그랬다. 물길 바닥에 박힌 커다란 바위를 깨고 있는 이들이었는데, 하나같이 묘하게 사람의 눈길을 끄는 데가 있었다.

그들 셋 가운데 반은 벗은 몸을 땀으로 번질거리며 묵직한 쇠망치를 휘두르고 있는 사내는 키부터가 남보다 머리통 하나만큼은 더 컸다. 거기다가 우람한 몸피에 철사 같은 힘줄로 얽힌 굵은 팔다리라 한눈에 힘깨나 쓰는 장사임을 알아볼 만했다. 얼굴마저 험상궂어 근처에서 함께 일하고 있는 동향(同鄕)의 일꾼들도 공연히 주눅들어하는 표정들이었다.

바위틈에 정()을 대고 망치질을 기다리는 사내도 예사내기 같지가 않았다. 키는 그리 크지 않아도 다부진 몸매나 날카로운 눈빛이 벌써 농촌에서 끌려온 무지렁뱅이 일꾼은 아니었다. 끊임없이 사방을 살피는 품이 신분을 감추고 있는 관리나 무언가를 위해 숨어든 첩자 같은 느낌까지 주었다.

하지만 그 둘보다 더욱 사람의 눈길을 끄는 것은 두 손을 늘어뜨린 채 뻣뻣이 서서 다른 두 사람이 땀을 쏟으며 일하는 걸 멀거니 내려다보고만 있는 사내였다. 희고 부드러워 뵈는 살색이나 후리후리한 키도 그런 막일 판에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얼굴 생김은 더욱 그랬다. 시원하게 튀어나온 이마에 우뚝 솟은 콧날, 그리고 검고 긴 콧수염과 풍성한 구레나룻이 어울려 독특한 인상을 지어내었다. 어딘가 용의 머리를 연상시키는 데가 있어 뒷날 용안(龍顔)’이란 말이 생겨나게 만든 얼굴이었다. 거기다가 어깨 위에는 환하고 넉넉한 빛 같은 것이 떠돌아 그런 그의 모습에 이채(異彩)를 더했다.

별난 것은 그 세 사람의 생김만이 아니었다. 하는 짓이 또 곁에서 일하고 있는 다른 일꾼들과 너무 달라 그들을 남의 눈에 띄게 했다. 셋은 나이도 비슷해 보일 뿐더러, 같은 지방에서 끌려온 일꾼들이고, 방금 하고 있는 일도 분명 셋이서 함께 하기로 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어찌된 셈인지 그 중 두 사람만 번갈아 정과 망치를 휘두르며 땀 흘리고 있을 뿐, 나머지 하나는 처음부터 손에 흙 한번 묻히지 않고 멀뚱히 서서 두 사람이 일하는 걸 바라다보고만 있었다.

그런데 더욱 알 수 없는 일은 그렇게 빈둥거리고 있는 사내였다. 그에게는 땀 흘리는 두 사람에게 미안하다거나 멋쩍어 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자신은 그 따위 하찮고 천한 일과는 애초부터 무관한 사람이라는 것처럼 뒷짐을 진 채 구경만 하다가, 이따금 두 사람이 일하면서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싱긋 웃어주는 게 고작이었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무언가 송구스럽고 불편해 하는 것은 땀 흘리며 일하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그 중에서 정을 든 사내에게는 빈둥거리고 있는 그 사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서 있는 것조차 참고 보기 어려운 일 같았다. 바위 결을 살펴 정을 대면서도 틈틈이 우스갯소리로 구경하는 사내의 무료를 달래주다가 힐긋 주위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어이. 서 있기 고단할 텐데 저기 앉아 좀 쉬는 게 어때?”

그가 턱짓으로 가리킨 곳은 자신들이 깨고 있는 바위 한 모퉁이였다. 감시하는 진나라 병사가 자리를 뜬 걸 보고 권하는 말 같았다. 그런 그의 말투는 특별히 상대를 높이고 있지는 않았으나 태도는 몹시 은근하면서도 공손한 데가 있었다.

받들고 섬기는 품이 정성스럽기는 망치를 들고 일하던 사내 쪽이 훨씬 더했다. 쉬지 않고 휘두르던 망치를 문득 내려놓더니, 목에 걸치고 있던 베 수건을 풀어 바위 한쪽 반반한 곳에 깔았다. 그런 다음 생김과는 딴판인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때까지도 빈둥거리며 구경만 하고 있는 사내에게 권했다.

형님, 이리 와 앉으십시오.”

마치 지체 높은 대부(大夫)를 모시는 사인(舍人)과도 같았다. 그런데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은 두 사람으로부터 그런 대접을 받고 있는 상대편 사내였다. 분명 비슷한 처지인 듯한데도 당연하다는 듯 그런 그들의 받듦과 섬김을 받아들였다.

그럴까.”

하면서, 한번 사양하는 법도 없이 깔아놓은 수건 위에 앉았다.

염량(炎凉)이 없는 건지 둔감한 건지 모를 그 사내, 그가 바로 뒷날 한()제국 400년을 열고 고조(高祖)로 추앙받게 될 사람이다. 그의 성은 유(), 이름은 방()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기실 방이란 이름은 나중에 그가 천자가 된 후에야 지어지고 쓰였다.

따라서 그가 함양으로 부역을 간 그때는 아직 이름조차 없었다. 다만 관례(冠禮)때 받은 계()란 자()가 있었을 뿐인데, 그것도 막내라는 평소의 호칭을 문자로 바꾼 것에 지나지 않았다. 서른을 넘긴 그때까지도 그를 부르는 말은 유가네 막내라는 뜻의 유계(劉季)뿐이었던 셈이다.

그는 사수군 패현 풍읍(豊邑) 중양리(中陽里) 사람으로, 출신이 한미한 것은 부모의 이름으로 미루어 봐도 잘 알 수 있다. 그의 아버지는 사서(史書)에조차 태공(太公)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그만의 이름이 아니다. 태공이란 어르신’ ‘영감정도의 뜻으로 당시 나이든 남자에게 일반적으로 붙이던 존칭이었다.

어머니 유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사서에는 그게 이름처럼 나와 있으나, () 또한 할머니또는 할멈이란 뜻으로 나이든 여자에게 붙이던 민간의 존칭이었다. 따라서 태공이나 오를 이름으로 본다면 둘 다 좀 이상한 이름이 된다. 곧 유계의 아버지 이름은 유 어르신’, 어머니 이름은 유씨네 할머니가 되는 까닭이다.

옛 사람들에게는 기휘(忌諱)라 하여 존귀한 이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거나 적지 않는 관례가 있었다. 따라서 한()의 신하인 사마천이 고조(高祖)나 태상황(太上皇)의 이름을 함부로 적을 수가 없어 기록에서 빠진 것이란 설명이 있으나, 아무래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그들에게 이름이 있었다면 누구에겐가는 기억됐을 것이고, 그것은 다음 시대 사가(史家)들에 의해서라도 기록으로 정착했을 것이다.

사마천 또한 그 투철한 기록의 습벽으로 미루어, 그들에게 이름이 있었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기록해 남겼을 사람이다. 실제로도 기휘의 관례 때문에 이름을 잃어버린 제왕이나 귀인(貴人)은 없다. 따라서 태공과 유오에게는 원래부터 이름이 없었다고 보는 편이 옳을 듯하고, 이는 그들의 신분이 미천했음을 아울러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곁들여 말하자면 이름이 없는 것은 유계의 형들도 마찬가지다. 어떤 기록은 그 맏형의 이름을 유백(劉伯), 둘째형은 유중(劉仲)이라고 하나, 이 또한 그들의 이름은 아닌 듯하다. ‘유가네 맏이’ ‘유가네 둘째란 호칭을 문자로 바꾼 것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유계(劉季), 곧 뒷날의 한고조 유방의 탄생설화는 그 한미(寒微)한 출신에 비해 자못 거창하다. 교룡(蛟龍) 혹은 적제(赤帝)의 아들이라는 암시를 주는 설정인데, 유계는 오히려 그 설정을 한 신념으로까지 끌어올려 일생 무슨 휘황하고 신비스러운 후광(後光)처럼 활용한다. 그 대략의 줄거리는 이러하다.

그 시절 풍읍은 못과 늪이 많은 지대였다. 한번은 들일을 나갔던 어머니 유오가 큰 못 가에서 쉬다가 깜박 잠이 들고 말았다. 그런데 그 꿈속에서 스스로 적제라고 하는 천신(天神)을 만나 정을 통하게 되었다. 그때 맑던 하늘에서 천둥이 울고 번개가 번쩍이더니 갑자기 사방이 컴컴해졌다.

함께 들에 나와 있던 태공은 쉬러간 아내 유오가 돌아오지 않을 뿐더러 갑자기 천둥이 울고 번개까지 치자 몹시 놀랐다. 하던 일을 내버려두고 아내에게로 달려가 보니 벌건 교룡(蛟龍)이 아내의 몸 위에 올라가 있었다. 그 뒤 유오가 임신하여 낳은 것이 유계라고 한다.

이 설화를 해석하는 데는 먼저 천신과 교룡을 두고 두 가지 태도가 나누어진다. 첫 번째는 천신과 교룡은 존재하였으며, 유오는 정말로 그런 초자연적인 존재와 교접하였다고 믿는 쪽이다. 그때, 곧 지금으로부터 2천 몇 백 년 전의 중국은 아직도 신화와 전설의 잔영이 남아있던 시절로서 신들은 산이나 못, 바다 어디에나 존재했고 용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유오는 그 이전의 여러 위대한 제왕들을 낳은 여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런 신 또는 용과 교접하여 비상한 일을 하게 될 아들을 얻었다고 본다.

두 번째는 신이나 용 같은 그런 초월적 또는 초자연적 존재는 없으며, 무언가 사람 사이에 있었던 별난 일이 그렇게 신화적으로 윤색되었을 것이라 보는 쪽이다. ()과 속(), ()과 유()를 달리하는 존재들 사이의 교접을 믿지 않는 이들의 태도인데, 가만히 살피면 그들 사이에서도 이 설화를 해석하는 태도는 다시 두 가지로 나뉜다.

존귀한 것을 부수거나 흠집 내기 좋아하는[능범존귀] 이들의 속되고 야박한 해석은 유오와 교접한 교룡을 당시 부근의 소택지(沼澤地)에 숨어살던 범법자나 부랑자들로 본다. 그들 혹은 그들 중의 하나가 들일을 나온 농부의 아낙 유오를 겁탈했고, 태공은 힘에 눌렸거나 머릿수에 밀려 아내를 지켜주지 못했다. 그 뒤 태공은 그 일을 괴로워하는 아내를 위로하고 아울러 무력한 자신을 변명하기 위해 천신(天神)과 교룡(蛟龍)을 끌어들였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남겨진 기록들을 조금만 주의 깊게 훑어보면 그런 주장에서는 중국사에 대한 분별없는 악의나 천박한 안목 밖에 확인할 게 없다. 고조(高祖) 유방의 부계혈통을 그렇게 추정함으로써 중국사의 한 황금기를 연 한()제국의 위엄과 품격을 은연중에 떨어뜨리고, 그 시대 사람들의 윤리의식을 터무니없이 얕봄으로써 그 역사까지 폄하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그것을 위해 대륙문화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과 주관적 해석을 억지스레 조합한 것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 어떤 기록에도 그 불행한 사건의 후유증으로 짐작되는 구절은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그 교룡이 실재하는 인간이면 태공은 중국 사람에게 매우 모욕적인 욕설 다이뤼모즈(帶綠帽子)’ 우리말로 곧 오쟁이 진 남편이 된다. 아무리 유교화(儒敎化)하기 이전이고, 또 성적으로 분방한 남방지역에서의 일이라 해도, 남자의 본성까지 달라지지는 않는다. 많건 적건 그 일은 태공의 의식에 상처를 남겼을 것이며, 그 상처는 그때 생겨난 의붓자식 유계나 결과적으로 부정을 저지른 것이나 다름없게 된 아내 유오에게 미쳤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태공이 막내 유계를 차별해 기른 흔적은 없고, 특별히 유오를 구박한 일도 없는 듯하다.

하기야 뒷날 유계가 커서도 생업에 종사하지 않고 저잣거리로 나가 빈둥거릴 때는 태공도 잔소리깨나 한 듯 하다. 그러나 부자 사이의 친자관계(親子關係)가 의심받을 정도로 심한 것은 아니었다. 유계에게 아무런 원망이 남아 있지 않을 뿐더러 나중에 황제가 되어서는 그 일로 태공과 이런 농담을 나누기까지 한다.

전에 아버님께서는 늘상 내가 재주 없어서 생업을 꾸려가지 못할 것이며 둘째 형[劉仲]처럼 노력하지도 않는다고 꾸짖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어떻습니까? 내가 이룬 업적이 둘째형에 견주어 모자랍니까?”

오히려 가족관계에서 풀리지 않는 응어리를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면 맏형 유백(劉伯)의 아들들을 대하는 유계의 태도이다. 나중에 천하를 얻은 그는 형제의 아들들을 모두 제후(諸侯)에 봉했지만 유백의 아들만은 못 본 체했다. 하지만 까닭을 캐보면 그것은 순전히 맏형수에 대한 감정 때문이었다.

아직 백수건달로 떠돌던 시절의 어느 날 유계는 대여섯 명의 벗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 맏형수에게 식사를 청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아무 대꾸 없이 주걱으로 솥바닥을 긁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는 것으로 거절을 대신했다. 그러나 벗들이 돌아가고 난 뒤에 유계가 솥뚜껑을 열어보니 안에는 열 명은 먹을 만한 밥이 남아있었다. 결국 유계가 유백의 아들을 써주지 않은 것은 그 어머니 되는 맏형수가 싫어서였지, 부계혈통이 다른 형제 사이에 맺힐 법한 응어리 탓은 아니었다.

거기다가 한고조가 만년에 보인 효성은 유별난 데마저 있다. 황제가 닷새에 한번씩 태공의 처소를 찾아 문안을 올리자 신하들이 천자의 위엄을 들어 말렸다.

하늘에는 해가 오직 하나 뿐이며, 땅에는 두 명의 임금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집안에서는 자식이 되지만 천하 모든 백성에게는 임금이 되시며. 태공께서는 사사로이는 폐하의 아버님이시지만 천하로 보면 또한 폐하의 신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임금이 신하를 배알하러 갈 수가 있습니까?”

그러자 황제는 태상황(太上皇)이란 그때까지 없던 칭호를 지어 태공에게 올리고 계속해서 그 처소로 문안을 다녔다. 그와 같은 한고조와 태공 어느 쪽에서 의붓아버지와 씨 다른 아들 사이의 어두운 그늘을 찾아볼 수 있는가.

따라서 유오의 몸 위에 있었던 교룡을 도둑놈이나 떠돌이 거지로 만들 때 생기는 그러한 난점 때문에 다른 해석이 생겨났다. 설정이 소박하다 못해 유치한 구석까지 있지만, 이 탄생설화 자체를 만만찮은 정치적 야망과 배려가 깔린 상징조작으로 보는 게 그렇다. 누군가 당시에 널리 통용되던 세계해석 체계를 빌려 유계의 삶에 심상치 않은 예감을 품도록 일련의 신화를 꾸며냈다는 주장이다.

사람들은 대개 그게 태공이 아닌가 의심한다. 비록 한고조의 일생을 관통하는 신화를 총체적으로 짜낼 능력은 없었지만, 적어도 처음 구상한 사람은 태공으로 보는 편이 온당할 것 같다. 다시 말해, 교룡 이야기는 늦게 본 막내아들에게 신분상승의 비원(悲願)을 건 태공이 아들의 생김과 신체적 특징을 살펴 치밀하게 구성한 신화의 첫머리라는 뜻이다.

유계의 얼굴이 용을 닮았다는 것도 그렇지만, 그 몸에 있었다는 점의 숫자인 일흔 둘[七十二]도 아무렇게나 지어진 숫자가 아니다. 얼치기 방술사(方術士)에게서 들은 것인지, 태공 자신의 음양가(陰陽家)적 교양인지 알 수 없으나, 그것은 136십일을 다섯으로 나눈 수이자 나중에 유계가 자신의 명운(命運)으로 주장한 오행(五行)의 토()를 나타내는 수이기도 하다.

또 유계는 뒷날 자신을 적제(赤帝) 혹은 적룡(赤龍)의 아들이라고 하여 붉은 색[]을 숭상하였다. 그것은 바로 토()의 색깔로서 왕조의 흥망을 따질 때 펼치는 당시 음양가들의 이론과 너무도 잘 맞아 떨어진다. ()나라는 문공(文公)때부터 금덕(金德)을 지닌 백제(白帝)를 제사하였으므로, 화덕(火德)을 지닌 적제(赤帝)의 아들에게 멸망당하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오행(五行)에서 불은 쇠를 이긴다[火克金].

유계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알려진 게 많지 않다. 하지만 농부로 자란 손위 형들과는 다소간 다른 성장 과정을 겪었던 듯하다. 먼저 마흔이 가깝도록 건달로 살아갔다는 것은 유계가 농사일을 배우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또 뒷날 시험을 보아 하찮지만 정장(亭長) 벼슬이라도 한 걸 보면 많건 적건 글을 배웠음을 알 수 있다. 둘 다 당시 중양리 같은 시골 농투성이 아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유계의 인격형성에 있어서도 태공의 감추어진 조탁(彫琢)이 있었던 듯하다. <사기(史記)>는 유계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사람됨이 어질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했으며 탁 트인 마음에 언제나 넓은 도량을 가지고 있었다. 평소 원대한 포부를 품어 상민(常民)의 생업에 얽매이려고 하지 않았다.”

<한서(漢書)>를 비롯한 다른 기록들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거기서 말하는 미덕들 또한 정성들인 조장이나 격려 없이 절로 길러질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그 격려와 조장 역시 대개 아버지 태공으로부터 왔다고 보는 편이 옳다. 그리고 그 밑바닥에는 태공이 안간힘을 다 써 남몰래 확보해준 정신적인 여유와 생업으로부터의 자유가 있었을 것이다. 태공은 마흔이 가깝도록 빈둥거리는 막내를 집에 붙여두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그 처자까지도 거두어 보살펴 주고 있다.

다 자란 뒤의 유계는 중양리를 떠나 풍읍이나 패현 저잣거리로 나가서 놀았다. 아버지와 형들을 거들어 농사일을 하지 않을 바에야 중양리는 그가 날을 보내기에 좋은 곳이 못되었다. 거기다가 중양리는 한갓진 농촌이라 말을 섞고 뜻을 나눌 사람이 흔치 않았다.

풍읍도 성벽으로 둘러싸인 제법 큰 거리지만, 유계가 주로 세월을 보내는 곳은 패현 저잣거리였다. 아마도 부근에서 그래도 정치라는 것이 이뤄지는 현청(縣廳)이 거기 있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무얼 보았는지 이내 유계는 관리라면 현령(縣令)부터 서리(胥吏)까지 모두 우습게보았다.

유계가 처음 패현 저잣거리를 어슬렁거리자 먼저 자리 잡고 있던 장돌뱅이나 건달들은 인근 시골 촌놈들에게 늘 그래왔듯 텃세를 부리려들었다. 하지만 유계가 그들 때문에 무슨 호된 곤욕을 치른 것 같지는 않다. 그보다는 오히려 그의 신비한 친화력(親和力)이 강조된 전설이나 기록이 많다.

어떤 이는 그 친화력의 근원을 용을 닮았다는 유계의 얼굴 모습에서 찾고 있다. 모질게 마음을 다잡고 시비를 걸었던 왈패도 한번 그 맺힌 데 없이 넉넉한 얼굴을 대하기만 하면 일시에 모든 맥이 풀려버리기라도 한 듯 적의와 투지를 잃고 말았다고 한다. 그 대신 까닭 모를 푸근함에 이끌리어 되레 유계가 불러주기를 기다리며 그 주위를 맴돌게 되기 일쑤였다.

따라서 뒷날 패현에서는 유계의 나타남 자체가 이미 하나의 작은 사건이 되었다. 그가 성안 거리로 들어서면 구석구석에서 나타난 사람들이 하나둘씩 그 곁에 붙어 짧은 골목길 하나 지나는데도 대여섯으로 불어났다. 그리고 그가 어디에 자리잡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면 급히 해야 할 일이 없는 건달들은 모두 그리로 몰려들어 와글거렸다.

얼른 보면 위험하고 불온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사람 사이의 끌어당김과 쏠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유계는 학식이 많은 것도 아니고 말주변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패거리를 짓고 힘쓰기를 좋아해 소란을 일으키는 법도 없었다. 그저 어디건 자리 잡게 되는 곳에 한껏 편안한 자세로 앉는다. 그리고 따라온 이들이 저희끼리 둘러앉아 하는 양을 알 듯 말 듯한 미소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워낙 종사하는 생업이 없고, 아버지인 태공 또한 그런 놀자판까지 뒤를 댈 만큼 넉넉하지는 못해 유계는 늘 빈털터리일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이끌려 몰려드는 건달들도 그보다 형편이 크게 낫지는 못했다. 다만 유계가 좋아 있는 것 없는 것 긁어 나오기는 했지만 가진 것은 모두가 거기서 거기였다.

그런 건달들이 주머니를 털어 하는 술추렴이랬자 끝이 뻔했고, 알고 지내는 저잣거리 사람들이나 하급 현리(縣吏)들 신세를 지는 것도 한 두 번이었다. 이도 저도 다 막히면 마지막으로 유계는 왕씨네 할머니[M]나 무씨 아주머니[武負]네 술집으로 가 외상술을 마셨다. 그리고 취하면 술집 한구석에 아무렇게나 드러누워 잠을 잤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일은 유계가 그렇게 자고 있으면 그 몸 위에 용이 나타나 휘감듯 어른거리는 것이었다. 어떤 때는 유계 자신이 한 마리 용이 되어 드러누워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와서 외상술을 마시는 날은 그 집의 술이 평소보다 몇 배나 더 팔렸다. 따라서 그런 일들을 신기하게 여긴 그 두 술집에서는 연말이 되면 외상장부를 찢어버리고 밀린 술값을 받지 않았다.

유계(劉季)가 태평스레 바위에 걸터앉아 쉬고 있는 동안에도 나머지 두 사람은 부지런히 돌 깨는 일을 했다. 마치 유계의 몫까지 해놓겠다는 듯이나 열심이었다. 그런데 잠시 자리를 비웠던 진나라 병사가 돌아오면서 일이 터졌다.

뭔가? 거기 앉아 있는 저 벗겨 놓은 삼대 같은 놈은.”

일꾼들을 몰아대고 다잡는 게 제 일인 그 병사는 바위 위에 태연히 걸터앉아 쉬고 있는 유계를 보자 눈에 쌍심지를 켰다. 채찍으로 써오던 밧줄을 단단히 감아쥐며 유계에게로 달려왔다.

여느 일꾼이라면 사납기로 이름난 진나라 병사가, 그것도 표독스럽고 잔인하기까지 한 노역장 감시병이 성난 얼굴로 달려오는데 겁부터 먹었을 것이다. 유계에게도 어쩌면 고약하게 되었다는 느낌 정도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반응은 답답할 만큼 느렸다. 얼른 바위에서 내려와 일하는 척이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그렇지를 못하고, 여전히 바위에 앉은 채 야릇한 웃음만 흘리고 있었다.

그래도 저 초()나라 원숭이 놈이.”

성마른 진나라 병사가 더 참지 못하고 채찍부터 날렸다. 그때 정을 들고 있던 사내가 갑자기 손을 뻗어 날아오는 채찍을 잡았다.

그는 성이 노()요 이름은 관()이라 하였는데 유계와 같이 풍읍(豊邑) 중양리(中陽里) 사람이었다. 태공과 한마을에 살며 남달리 친했던 그의 아버지는 기이하게도 태공이 유계를 얻은 것과 같은 날 같은 시에 그를 낳았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 일을 신기하게 여기며 술과 양고기를 가지고 와서 두 집의 경사를 축하해 주었다.

노관은 유계와 함께 자라며 글도 같이 배우고 놀기도 함께 했다. 하지만 동갑내기인데도 어렸을 때부터 벌써 유계를 형이나 손윗사람 떠받들 듯하는 게 이미 여느 동무 사이는 아니었다. 태사공(太史公=사마천)의 비유처럼 파리가 준마의 꼬리에 붙어 천리를 가듯이유계란 사내를 따라 천하를 휩쓸고 왕후[연왕 장안후]가 되어 후세에까지 이름을 떨치게 될 운명을 그는 그때 이미 예감했던 것일까.

나중에 다 자란 유계가 중양리를 벗어나자 노관도 그를 따라나섰다. 함께 가까운 풍읍을 어슬렁거리다가 다시 패현 성안으로 옮겨가 그 저잣거리를 헤맸다. 왕씨네 할머니나 무씨(武氏) 아주머니 술집에 들러 외상술을 얻어 마실 때도 유계와 함께했다.

하지만 노관이 유계와 함께하는 것은 벗으로서 동행보다는 졸개로서 수행이나 호위에 가까웠다. 언제나 유계로부터 한 발자국쯤 떨어져서 걸으며 때맞춰 시중을 들었고, 사방을 살펴 가릴 것을 가리고 피해야 할 것을 피했다. 그러다가 궂은일이나 위태로운 때를 만나면 스스로 유계를 대신해 나서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유계의 신화(神話)가 중양리나 풍읍뿐만 아니라 패현 성내에까지 두루 알려지게 된 것도 많은 부분 노관의 과장과 전파에 힘입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유계의 얼굴이 용을 닮았다고 하지만 누가 용을 보았는가. 그래서 얼른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서슴없이 유계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라. 저 얼굴이 바로 용의 얼굴이다!”

유계가 용을 닮은 것이 아니라 용이란 모름지기 유계와 같이 생겨야 한다는 말 같았다.

유계의 왼쪽 허벅지에 나 있다는 일흔 두개의 점도 그렇다. 어떤 것까지 점으로 치느냐에 따라 그 수는 일흔보다 많기도 하고 적기도 했다. 여름날 유계가 겉옷을 걷어붙이고 앉으면 할 일 없는 건달들이 그 곁에 붙어 헤아려보지만 그 숫자를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노관이 한 마디로 잘라 말했다.

일흔 두 개다! 1360 일을 다섯[五行]으로 나눈 바로 그 숫자다.”

유계가 잠잘 때 어른거린다는 용의 이야기도 노관의 윤색일 가능성이 크다. 유계의 특이한 용모와 술 취해 잠들었을 때의 별난 몸짓이 어우러져 우연히 만들어낸 순간적인 인상을 노관이 과장하여 퍼뜨린 것은 아닌지. 왕씨네 할머니나 무씨 아주머니는 오히려 그런 노관에게 넘어가 자신들은 믿지도 않는 소문을 더욱 그럴싸하게 윤색한 것은 아닌지.

유계가 외상술을 먹는 날은 술집의 매상이 평소보다 몇 배나 올랐다는 말이 나게 한 것도 노관의 솜씨였을 것이다. 유계가 마시는 동안 슬며시 패현 저잣거리로 나간 그는 평소 그들을 따르는 건달들을 모조리 끌어 모았으리라. 그리고 그들을 몰고 와서 퍼마시게 함으로써 유계의 외상술 때문에 나빠진 왕씨네 할머니나 무씨 아주머니의 기분을 풀어주었음에 틀림이 없다.

언젠가 한번은 유계가 무언가 죄를 저질러 숲 속에 숨은 적이 있었다. 그때 이미 유계는 패현 유협(遊俠)세계의 우두머리처럼 되어 따르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고생스러운 도망길이어선지 아무도 함께 가주지 않았다. 오직 노관만이 그를 따라가 죄가 풀릴 때까지 정성을 다해 섬기고 보살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유계에게는 싫어도 함양으로 부역을 나와야 할 까닭이 있었지만, 노관은 순전히 유계를 따라나섰다. 전처럼 그를 보살피고 지켜주기 위함이었다. 유계가 함양으로 부역을 나오게 된 경위는 이랬다.

비록 한 푼 없는 건달로 패현 저잣거리를 떠돌아다니고는 있었지만 품은 뜻이 커서인지 유계의 눈은 턱없이 높았다. 현청(縣廳)에서 일하는 구실아치[吏屬]들이나 아전바치[胥吏]들뿐만 아니라 진()조정에서 내려보낸 현령까지도 우습게 여겼다. 하지만 무엇 때문인지 시간이 나면 관아를 어슬렁거리며 그래도 배짱이 맞는 이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현령은 그런 유계를 싫어했지만 관원들 중에는 패현 저잣거리의 건달들 못지않게 그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았다. 현청의 마구간에서 막일을 하다가 낮은 아전바치로 일하게 된 하후영(夏候)이란 젊은이도 그랬다. 뒷날 한()제국에서 여음후(汝陰侯)에까지 오를 운명이 어떤 예감으로 작용한 것인지, 그 또한 유계라면 하던 일을 제쳐놓고 달려 나올 만큼 우러르며 따랐다.

그런데 한 달포 전의 어느 날이었다. 그날따라 유계가 칼을 차고 현청에 놀러와 하후영을 만나서도 칼과 검술이 주된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얘기 끝에 새로 익힌 검술을 장난처럼 펼쳐 보이다가 유계가 휘두른 칼에 하후영이 그만 크게 다치고 말았다.

아전바치도 관리라 현령은 자신이 부리는 하후영이 칼에 베였다는 말을 듣자 몹시 화를 냈다. 하후영을 끌어오게 해 범인을 캐묻는 한편 전부터 유계와 가깝게 지내온 옥리(獄吏) 조참(曹參)을 불러 얼른 범인을 찾아내라는 엄명을 내렸다. 다행히 하후영이 굳게 입을 다물어 누가 그랬는지 바로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 일을 본 사람이 있어 조만간에 알려지게 되어 있었다.

애가 타게 된 것은 옥리 조참뿐이 아니었다. 그 못지않게 유계를 흠모해온 패현의 공조리(功曹吏) 소하(蕭何)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유계를 도울 길이 없을까 머리를 쥐어짜고 있을 때 마침 날아든 것이 난지(蘭池)를 파기 위한 일꾼을 함양으로 뽑아 보내라는 공문이었다. 그걸 본 소하가 가만히 유계에게 권했다.

유형(劉兄). 패현 역도(役徒=노역인부)들의 도두(徒頭=인부 우두머리)로 세워드릴 테니 잠시 피하는 셈치고 함양에나 다녀오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몸이야 고단하시겠지만 그것만이 이번 어려움을 면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설령 하후영이 못 견뎌내고 바로 털어놓는다 해도 이미 멀리 부역 나간 사람을 어찌하겠습니까? 추위가 오기 전에 공사가 끝난다 하니 넉넉잡아 몇 달만 참으시면 될 것입니다. 만일 공사가 끝나지 않는다 해도 내 반드시 교대(交代)를 보내 유형을 모셔오도록 하겠습니다.”

유계도 뾰족한 수가 없어 소하의 말을 따르기로 하였다. 그래서 함양으로 떠나게 되자 제일 먼저 노관이 따라나섰다. 제 차례도 아닌데 소하에게 청을 넣어 남이 모두 싫다하는 부역 길에 오른 것이었다.

어엇, 이 작은 원숭이 놈이 죽고 싶어 환장을 했나?”

노관에게 채찍을 붙잡힌 진나라 병사가 목덜미가 시뻘게지며 소리쳤다. 금세라도 허리에 차고 있는 청동 장검을 뺄 것 같은 기세였다. 그때 망치를 휘두르고 있던 덩치 큰 사내가 산악처럼 가로막으며 끼어들었다.

한번만 봐주쇼. 우리 형님이 편찮으셔서 잠시 앉아 쉬시게 한 것이오. 게다가 형님은 우리들의 도두(徒頭)외다.”

그러는 사내는 성이 번()씨요 이름을 쾌()라 하였다. 역시 패현 사람으로 힘이 장사이고 다른 무예에도 밝은 것으로 소문나 있었다. 번쾌는 성안에서 개백정[犬屠殺]을 업으로 삼았으나 본시 천민은 아니었다. 육국(六國)이 차례로 망해가는 혼란의 시대에 근거지를 잃고 떠돌아다니다가 패현 저잣거리에 숨어 살게 된 명가(名家)의 후예였다고 한다.

유계보다 몇 살 어린 번쾌는 패현 저잣거리를 휘젓고 다니는 유계를 진작부터 형님으로 모셔왔다. 하지만 그 지방에 남아있는 전설로 미루어 그들의 만남이 한눈에 서로를 알아보고 맺어진 그런 감동적인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지금도 패현 인근에서는 개고기를 손으로 찢어먹는 습속이 있는데, 이는 빈털터리 건달 시절의 한고조(漢高祖) 유계에게서 유래된 것이라는 말이 있다. 아직 깊이 사귀기 전 돈도 내지 않고 개고기를 썰어 먹어대는 유계가 밉살맞아 번쾌가 칼을 감춰버리자 유계는 손으로 찢어먹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게 구경하는 건달들에게는 또 멋으로 보여 그 다음에는 모든 건달들이 손으로 개고기를 찢어먹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번쾌는 곧 유계에게서 무엇을 보았는지 스스로 아우 되기를 청하며 그 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유계가 패현에 나타났다는 소리만 들으면 맨 먼저 달려 나가 노관과 함께 좌우에 갈라섰다. 그때부터는 누구보다 충실한 유계의 주먹이었다. 실제로 번쾌는 틈만 나면 바위 같은 주먹을 흔들면서 세상을 향해 을러댔다.

누구든 우리 형님을 건드리면 그 구족(九族)을 찾아 모조리 가루를 내어놓을 것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번쾌는 먼저 하후영을 다치게 한 사람이 유계란 것을 아는 자들을 주먹으로 겁을 주어 입부터 막았다. 그러다가 유계가 끝내 함양으로 간다는 말을 듣자 번쾌는 두말없이 개백정질을 거두고 따라나섰다. 노관이 따라간다고 하지만 그는 노관의 보잘것없는 완력과 지나친 약삭빠름을 아울러 믿지 못했다.

너는 또 뭐야? 뭣이 어쨌다구?”

진나라 병사가 번쾌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그때 노관에게 한 끝이 잡힌 채찍을 놓은 그의 오른손은 벌써 장검을 반이나 빼들고 있었다. 육국(六國)의 쇠로 만든 장검[철검]과 맞부딪혀서도 밀린 적이 없다는 진나라의 청동검이었다. 노관만 해도 만만찮아 보였는데 억세고 험상궂어 보이는 번쾌까지 편들고 나서자 심상찮은 느낌이 든 것 같았다.

아직 천하가 통일된 지 오래지 않아 다른 육국 사람들에 대한 진나라 병사들의 태도에는 승리자나 정복자의 위세가 살아있었다. 거기다가 강화된 진의 법령은 그들에게 집행자로서의 실권까지 얹어주었다. 시황제의 이름으로 부여된 노역의 의무를 거부하는 인부쯤은 얼마든지 목벨 수 있었다.

이것들이 죽고 싶어 환장을 했나. 여기가 어디라고……

그러면서 눈을 부라리는 진나라 병사가 믿는 것은 바로 진나라의 법령과 자신의 칼이었다. 그렇지만 번쾌에게는 그런 진나라 병사를 겁내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우리는 일하러 왔고 이제껏 열심히 일 해왔소. 형님이 편찮으셔서 못하는 만큼 우리가 더 일하면 될 거 아니오?”

질그릇 깨지는 듯한 소리로 맞받는 그 눈길이 여간 험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자 먼저 가로막고 나섰던 노관이 난처한 낯빛이 되었다. 빼앗은 형국이 된 채찍을 가만히 바위 위에 내려놓은 뒤 맞서있는 진나라 병사와 번쾌를 번갈아 보며 뭔가 생각에 잠긴 눈치였다.

잠시 기묘한 대치가 벌어졌다. 진나라 병사는 금세라도 칼을 빼 칠 듯한 표정으로 노려보고, 번쾌 역시 나도 빈손은 아니라는 듯이 망치 자루를 슬그머니 힘주어 잡으며 그 눈길을 맞받았다. 두 사람의 눈길이 부딪혀 불똥을 튀기는 듯했다.

끝내 참지 못한 진나라 병사가 칼을 빼서 번쾌를 후려쳤다. 번쾌가 기다렸다는 듯 망치를 휘둘러 칼을 쳐냈다. 어찌나 세게 쳐냈던지 간신히 칼을 잡고 있는 진나라 병사의 몸이 심하게 휘청거렸다. 칼과 망치가 부딪는 모진 쇳소리에 둘레의 일꾼들이 모두 일손을 놓고 그들 쪽을 쳐다보았다.

거기다가 노관도 더는 보고만 있는 자세가 아니었다. 갑자기 유계를 가로막으며 번쾌를 편들어 덤빌 듯한 기세였다. 가까운 곳에 저희 편이 없는 데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보고 있는 일꾼들까지 유계를 편드는 듯 보였던지 진나라 병사 쪽이 먼저 기세가 꺾였다. 뺐던 칼을 도로 칼집에 꽂아 넣으면서 이를 악물었다.

좋다. 너희들이 이젠 떼를 지어 우리 진나라와 황제 폐하께 맞서려 드는구나. 내 반드시 장군께 아뢰어 너희 세 놈을 한 구덩이에 산 채로 묻어주겠다.”

말은 그래도 뭔가 감당 못할 기세에 밀려 물러나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때 얼른 정신을 차린 노관이 평소의 약삭빠름을 되찾았다. 가만히 그 병사의 옷깃을 잡으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이러십니까, 나으리. 저희가 어찌 감히 나라에 맞서겠습니까? 불찰이 있었더라도 너그럽게 보아주십시오.”

그러면서 한 손으로는 품안에서 꺼낸 작은 은덩이를 병사에게 쥐어주었다. 하지만 그 병사는 성난 표정을 풀지 않았다. 차갑게 노관의 손을 뿌리치고 자리를 뜨려 했다. 그때까지도 바위 위에 느긋이 앉아 있던 유계가 그리 높지 않은 목소리로 그 병사를 불렀다.

이보시오.”

성난 눈길로 돌아보던 병사가 그런 유계에게서 무엇을 보았는지 갑자기 굳은 듯 멈추어 섰다. 유계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그런 진나라 병사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고향 동무들과 멀리서 부역을 나오긴 했소만, 몸에 익지 않은 일이라 어찌 해볼 수가 없구려. 그래도 이 동무들이 힘을 다해 나라 일을 크게 그르치진 않았을 것이오. 너무 성내지 마시오.”

그러고는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번쾌에게 내밀었다.

이걸 저 사람에게 전해주게. 이번에 떠나올 때 소하(蕭何)가 준 것이네.”

아니, 형님 이걸 모두……

타고난 무골(武骨)이기는 하지만 그 몇 년 저잣거리에서 개백정 노릇을 하는 동안에 셈에도 밝아진 번쾌가 주저하면서 물었다. 패현을 떠나올 때 유계와 알고 지내던 다른 현리(縣吏)들은 전별금으로 3백 전()을 주었으나 소하만은 5백 전을 내놓았다. 유계는 그걸 따로 싸서 품에 넣어 다니고 있었던 모양인데, 이제 그 적지 않은 돈을 선뜻 내놓은 것이었다.

소하가 이럴 때 쓰라고 준 것이다. 어서 주어라.”

그 말에 번쾌가 마지못해 전대를 그 병사에게 내밀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일은 그 병사에게 일어난 갑작스러운 변화였다.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이나 선선히 번쾌가 내미는 것을 받은 뒤 공손히 유계를 올려 보았다. 돈이면 귀신도 부린다[有錢用神] 했던가, 얼른 보기에는 뇌물의 힘 같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한참이나 유계를 바라보던 병사가 스스로 그 앞에 다가가더니 받은 전대를 공손히 올려 바치듯 되돌려 주었다.

내가 아마도 귀인(貴人)을 알아보지 못했던 듯하오. 도두(徒頭)라 하셨던가요? 일꾼들을 데리고 오신 분이라면 꼭 몸소 일하지 않아도 되오. 다만……

마치 유계의 아랫사람이나 된 듯 말투부터 공손하기가 그지없었다. 알 수 없기는 유계도 마찬가지였다. 기다렸다는 듯 전대를 넙죽 받아 다시 품에 넣으며 물었다.

다만, 뭐요?”

황제폐하께서 순시를 오신다는 전갈이 있으셨오. 그때는 일어나셔서 일꾼들을 독려하시는 척이라도 해주셨으면 하오.”

시황제께서 친히 여기까지 나오신다?”

그렇소. 이 공사는 수도 함양성의 해자(垓字)가 되는 것이라 황제폐하께서 그 어떤 일보다도 중히 여기시오. 이곳은 처음이지만, 황제폐하께서 노역장에 나오신 것은 이번 여름에만도 세 번이나 됩니다.”

그랬었소? 거 참, 볼 만하였겠소. 그래, 오늘은 틀림없이 이곳에 오신다고 하오?”

유계는 조금 전의 일은 까맣게 잊은 사람처럼 기대에 차서 물었다. 꼭 무슨 큰 구경거리를 두고 들떠 기다리는 어린아이 같은 데가 있었다.

그런 것 같소. 우리도 장졸을 가리지 않고 모두 제자리를 지키라는 엄명이 내려왔소.”

그런데 미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물길 바깥쪽 양쪽 둑 위로 보얗게 먼지를 날리며 기마 몇 필이 달려 나왔다. 검은 영기(令旗)를 앞세운 것으로 보아 급한 전갈을 가지고 달려온 파발마 같았다. 말고삐를 당겨 멈춰선 소교(小校)가 큰 소리로 외쳤다.

모두 들어라. 잠시 후에는 황제폐하의 행차가 이르실 것이다. 노역을 감독하는 사졸(士卒)들은 역도(役徒)들이 일터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역도들은 각기 하던 일에 전심하여 터럭만큼도 어지러움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 함부로 자리를 뜨거나 소란을 피워 목을 잃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일꾼들 중에는 그곳으로 끌려오기 전 고향에서 이미 시황제의 순수(巡狩)를 구경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먼 빛으로나마 시황제를 보게 되는 게 처음이었다. 모두 일손을 멈추고 도성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 멀지 않은 곳까지 벌써 부연 먼지가 하늘을 가린 게 황제의 행차가 가까웠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임금이 나다닐 땐 사(=25백 명)가 따르고 경()이 나다닐 때는 여(=5백 명)가 따른다. 천자의 순수에는 규모가 정해져 있지 않았으나, 순수가 아니라 도성 밖 행차에 지나지 않아서인지 그 날 시황제를 따르는 군사는 사()를 크게 넘을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의장(儀仗)은 여느 순수 때보다 훨씬 더 호화스러웠다.

진나라의 빛깔인 검은 바탕에 금실로 용을 수놓은 깃발을 앞세운 기마대에 이어 번쩍이는 창검에 온 몸을 철갑으로 두른 보졸(步卒)의 행진이 따랐다. 다시 갖은 색깔의 현란한 깃발을 든 의장대가 시황제가 들어있는 행렬의 앞머리를 장식하고, 그 뒤를 백관(百官)과 궁녀며 내시들이 화려한 차림으로 에워싸 황제의 위엄을 드높였다.

그 한가운데서 느릿느릿 다가오는 게 말로만 듣던 온량거(0)였다. 여덟마리 말이 끄는 큰 수레인데다 지붕이 있고 사방이 장엄하게 채색되어 멀리서 보기에는 작은 누각이 옮겨오는 듯했다.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순수가 아니어서인지, 속거(屬車)는 많지 않았다. 특히 시황제가 탄 온량거와 같은 모양을 한 부거(副車)는 한 대도 따르게 하지 않았다.

일꾼들뿐만 아니라 감독하던 진나라 병사들까지도 절대권력이 연출하는 그 화려하고도 장엄한 광경에 잠시 넋을 놓았다. 시황제의 행차가 그들 곁을 지나갈 때는 손발이 굳어버린 듯 절로 일손을 멈추고 서서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데 시황제의 행차가 패현(沛縣)에서 온 일꾼들이 맡은 구역을 지날 때였다. 갑자기 온량거의 창문이 열리더니 한 얼굴이 보였다. 무얼 생각하고 있는 지 도통 알 수 없는, 무표정하면서도 음침하고 거만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 눈길에는 묘한 위엄 같은 게 있어 누구도 오래 맞받지 못했다.

어지간한 노관이나 번쾌까지도 그때만은 질린 듯 굳은 얼굴로 시황제의 행차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하지만 유계만은 달랐다. 진작부터 부럽기 짝이 없는 눈길로 바라보다가 곁엣 사람이 모두 들을 만큼 큰소리로 한탄했다.

아아, 대장부란 마땅히 저래야 하는데!”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노관이 놀라 사방을 돌아보다가 유계의 소매를 끌며 귓속말로 나무랐다.

어이, 그게 무슨 소리야? 진나라 놈들이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그래도 유계는 태연하기만 했다. 빙긋이 웃으며 노관의 말을 받았다.

왕후장상(王侯將相)이 어찌 반드시 하늘이 낸 것이랴.”

그 말은 나중 여러 해 뒤 진섭(陳涉)이 처음 진나라에 반기(叛旗)를 들고 장초(張楚)를 열 때 한 말로 되어 있으나 실은 그때 이미 민간에 널리 퍼져 있었다. 하늘의 아들[天子], 황제(黃帝)의 자손만이 제위(帝位)를 이어오던 시대는 끝난 지 오래였다.

 

천하가 진()의 이름 아래 하나가 되기 전 초()나라는 다른 육국(六國)에 비해 특히 이질성(異質性)이 두드러졌다. 다른 나라가 대강(大江) 이북에 자리 잡은 반면, ()와 월()을 아우른 초나라는 강남에 자리 잡고 있었고, 북방의 나라들이 황토의 들판을 기마(騎馬)로 내닫는 만큼이나 초나라는 곳곳에 널린 호수와 하천에서의 물질에 능했다. 농사와 주식(主食)도 달라 강북의 육국이 밀 보리농사를 많이 짓고 가루음식을 주식으로 하는데 비해, 초나라는 벼농사를 주로 하고 쌀밥으로 끼니를 삼았다.

종족과 언어가 다르고 문화도 달랐다. 북방은 한족과 그 언어를 중심으로 <시경(시경)>의 문화를 이룬데 비해, 초나라는 형만(荊蠻)이라고 부르던 남만(南蠻)의 갈래와 그 언어를 바탕으로 한 <초사(楚辭)>의 문화가 있었다. 아름답고 매혹적인 초나라의 춤도 남방문화의 특색을 이룰 만했으며, 애절한 오나라의 노래[吳歌]는 나중에 중국시가의 한 형식으로 자리 잡기도 했다.

사람들의 성격도 쉽게 구별할 수 있을 만큼 달랐다. 북방의 다른 나라 사람들이 느긋하면서도 다소간 음모적인데 비해, 초나라 사람들은 직정적(直情的)이고 맹렬하며 쉽게 분기(奮起)했다. 하지만 그만큼 감성적이고 여린 데가 있어, 한번 사기가 상하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리는 약점도 있었다.

()의 시황제는 그런 초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땅에 초군(楚郡)을 두었다가 뒤에 다시 남군(南郡) 구강(九江) 회계(會稽) 세 군()으로 나누었다. 그 중에서도 회계군은 월()나라의 옛 땅인 회계산에서 이름을 따온 군이지만, 치소(治所)는 오()나라의 옛 땅인 오중(吳中)에 두고 있었다.

그들 간의 요란스러운 쟁투로 <오월동주(吳越同舟)><와신상담(臥薪嘗膽)> 같은 유명한 고사 성어를 남긴 오와 월은 원래 오패(五覇)의 하나로 드는 이가 있을 정도로 강성한 나라들이었다. 그러나 오나라는 월왕 구천(句踐)에 의해 춘추시대에 이미 없어졌고, 그때 오나라를 아우른 월나라도 오래잖아 시들어 그 왕 무강(無疆)이 초() 위왕과 싸우다 죽은 뒤에는 초나라의 속국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시황제의 통일 뒤 회계군은 당연히 초나라의 옛 땅으로 여겨졌다.

그 회계군 오중 땅에 항량(項梁)이란 장년의 사내가 있었다. 예닐곱 해 전 항적(項籍)이란 조카 하나만 데리고 숨어들 듯 흘러든 이였다. 하지만 처음 나타날 때 그들의 행색에서 내비치던 고단함이나 외로움과는 달리, 그는 곧 오중 사람들의 믿음과 정을 사 그들 속에 깊이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그걸 바탕삼아 보이지 않는 힘을 길러 그 무렵은 진나라 조정에서 내려온 관리들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오중 거리를 주무르고 있었다.

항량은 특별히 기골이 장대하고 용맹스러워 뵈지는 않았으나 사람들의 믿음을 사기에는 넉넉할 만큼 탄탄하면서도 단정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배우지 못한 이들이 의지할 만한 학식을 지녔으면서도 너그럽고 따뜻한 인품은 쉽게 정감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오중 사람들이 가슴으로 그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한 것은 그 혈통이었다.

항씨(項氏)는 옛 초나라의 이름난 장군가(將軍家)로서, 일찍이 항() 땅의 제후로 봉해졌기 때문에 성을 항씨로 쓰고 있었다. 대대로 초나라를 위해 걸출한 장수를 배출해왔는데, 특히 초나라 최후의 명장(名將) 항연(項燕)은 모든 초나라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항연은 하상(下相) 사람으로 초 효열왕(孝烈王) 때 장군이 되어 기우는 나라의 마지막 버팀목 노릇을 했다. 그가 훌륭한 장수였다는 점에서도 대개의 기록이 일치한다. 하지만 그 마지막 왕 부추(負芻=荊王)와의 관계는 <사기><자치통감>이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자치통감>에는 진나라 장수 왕전()이 먼저 항연이 이끄는 초군(楚軍)을 격파하고 그를 죽인 뒤, 다시 이듬해 초나라로 쳐들어가 그 왕 부추를 사로잡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사기>에는 부추가 먼저 사로잡힌 뒤 항연이 왕족 창평군(昌平君)을 초왕으로 세우고 회남에서 군사를 일으킨 것으로 나와 있다. 그리하여 초나라 재건을 위해 왕전과 싸우다가 왕전이 창평군을 잡아 죽이자 그도 자살했다고 한다.

이치로 보아서는 근 천년이나 뒤에 쓰여진 <자치통감>을 믿어야 할 것이나, 다른 여러 문헌에 나타나 있는 당시 초나라 유민들의 감정으로 미루어보아서는 <사기>의 기록에 더 믿음이 간다. 왜냐하면 초나라 부흥운동과 실패가 자아내는 비장감이 아니고서는 항연을 향한 초나라 사람들의 흔치 않은 흠모와 미련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은 지 10년이 지난 뒤에도 항연은 여전히 어딘가 숨어살며 초나라의 부흥을 도모하고 있는 것으로 얘기되고 있었으며, 초나라 유민들의 저항의지를 자극하는 상징적 존재로 기능했다.

단 석 집이 남아있어도 진()을 망하게 하는 자는 반드시 초나라의 유민(遺民)일 것이다.”

진나라에 의해 천하가 통일된 뒤 은밀히 세상에 떠돈 말 중에는 그런 것이 있었다. 아마도 그 말은 초나라가 다른 육국에 비해 특히 이질적이었던 것과 회왕(懷王)의 비극 때문에 나왔을 것이다.

진 소왕(昭王)은 동맹을 맺자고 속여 초나라 회왕을 무관(武關)으로 끌어들이고 군사를 매복시켜 사로잡았다. 그리고 함양으로 끌고 온갖 위협과 모욕을 주다가 시체가 된 뒤에야 초나라에 돌려보냄으로써 그때까지 진나라와 의연히 맞서오던 초나라를 크게 혼란시킨다. 그리하여 초나라는 갑작스레 임금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스스로 지키기에도 급급한 약소국으로 전락했다가 마침내는 진나라 장수 왕전()에게 멸망당하고 만다.

하지만 진나라가 반드시 초나라의 잔여세력에게 망하리라는 말은 또한 항연의 초나라 부흥운동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멸망당한 육국 중에서 임금을 다시 세우고 진나라에 맞선 최초의 나라와 인물은 초나라요, 항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항량은 바로 그 항연의 아들이었다. 조국을 위해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어딘가에 숨어 조국의 부흥을 도모하고 있다는 영웅의 아들 - 그것만으로도 항량은 오중 사람들의 존중을 받기에 넉넉하였다. 거기에다가 다시 은밀한 소문으로 떠도는 그 망명의 이유는 더욱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초나라의 마지막 숨통이 끊어지던 그해 끝내 싸움에 진 항연의 자살이 전해지자 하상(下相)에 있는 그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수백을 헤아리던 노비와 식객(食客)들은 진병(秦兵)들의 보복이 두려워 달아나고, 더부살이하던 피붙이들도 슬금슬금 흩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항연의 아들 삼형제는 대를 이은 명가(名家)의 자제다웠다.

맏이 항백(項伯)은 어질면서도 생각이 깊었고, 가운데 항숙(項叔)은 기골이 장대하고 용맹이 뛰어났다. 막내 항량(項梁)은 아비 항연을 닮아 지략이 있고 결단이 빨랐다. 떠나는 이들에게 재물을 아끼지 않고 나눠준 그들 삼형제는 끝까지 남아 함께 죽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밀고 드는 진나라에 마지막 저항을 했다.

항씨 삼형제와 그들을 따르는 족당(族黨) 식객들은 먼저 조국을 망하게 한 내부의 적부터 쓸어버리기 시작했다. 하상 일대에서 전부터 연횡책을 내걸고 진나라의 간세(奸細)노릇을 해온 매국노들과 진주해오는 진병(秦兵)을 스스로 나아가 웃음으로 맞아들이는 비굴하고 간교한 무리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때로는 정복자로서의 횡포를 부리는 진병들도 타격의 대상으로 삼았다.

하지만 상대도 맥없이 목을 내놓지는 않아 그같은 항씨 삼형제의 매국노 처단은 곧 조직적인 반격을 받았다. 한동안 싸움은 작지만 치열한 내전의 형태로 진행되다가, 진나라의 대군이 밀려들면서 쫓기는 것은 오히려 그들 삼형제가 되었다. 어느 날 밤 진병과 그 앞잡이들의 반격을 받아 항숙을 비롯한 많은 일족과 식객들이 죽고, 남은 사람도 서로의 생사를 모르는 체 기약 없이 흩어져 달아났다.

항량은 그때 맏형 항백과 헤어진 뒤 가운데형의 한점 혈육 항적(項籍)만을 간신히 구해내 함께 하상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진병을 앞세운 채 그들을 뒤쫓는 원수들을 피해 여기저기 떠돌다가 오중까지 흘러든 것이었다. 하지만 오래잖아 소문으로 뒤따라 내려온 하상에서의 일들은 그의 남다른 혈통 못지않게 오중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시황제 26년을 앞뒤한 일이었다.

(벌써 일곱 해가 지났는가. 아니면 여덟 해.)

오중 성 밖의 한적한 장원 사랑채에서 때 아닌 회상에 빠져 있던 항량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사창(紗窓)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어느새 봄이 짙어져 뜰 안 이곳저곳에 봄꽃이 환히 피어있었다. 더는 뒤쫓는 사람이 없다 싶자 조카 항적과 함께 살기 위해 사들인 장원인데 뜰이 제법 볼만했다.

그러고 보면 급하게 쫓기면서도 용케 지니고 온 재물 또한 그들 아재비와 조카가 위엄을 잃지 않고 오중에 뿌리를 내리는데 한몫을 크게 했을 것이다. 항량의 빈틈없는 성격은 진작부터 여러 대에 걸친 문벌 항씨가의 재산을 갈무리하기 쉬운 보화로 바꾸어 하상 여러 곳에 나누어 감춰두게 했다. 그러다가 어쩔 수 없이 쫓기게 되자 그것들 중에 일부를 거두어 망명길에 올랐다.

(그런데 저게 무얼까?)

꽤 넓은 뜰 안을 돌아보던 눈을 날카롭게 찔러오는 한줄기 빛이 있어 항량이 눈길을 그곳으로 돌렸다. 뜰 한구석 한적한 나무 그늘 저쪽이었다. 무언가 흰 장막 같은 것이 펼쳐져 있다가 이내 걷혔다. 그 안에서 드러난 것을 보니 한 자루 장검을 들고 있는 청년이었다.

(()로구나. 우가 칼을 익히고 있었구나.)

()는 조카 항적(項籍)이 몇 해 전에 늦은 관례를 치르면서 받은 자()였다. 항량은 문득 한없는 자애의 눈길로 항우를 살펴보았다.

항량에게 항우는 죽은 가운데형이 남긴 한 점 혈육인 동시에 초나라에서도 알아주던 자신의 가문, 하상(下相) 항씨의 유일한 후사(後嗣)이기도 했다. 큰형 백(=항백)은 생사를 알 수 없고, 나이 쉰이 가까운 항량 자신은 그때까지 소생이 없었다. 쫓기는 몸이라 예를 갖춰 아내를 맞기 어려웠을 뿐더러, 몇몇 정을 붙여 몸을 섞은 여인이 있어도 어찌된 셈인지 태기(胎氣)를 호소하는 일은 없었다.

(그렇다면 조금 전에 내가 본 흰 장막은 저 아이가 펼친 검기(劍氣)였단 말인가. 벌써 저 아이의 검술이 그 경지에 이르렀단 말인가.)

한참이나 항우를 먼빛으로 바라보고 있던 항량이 문득 몸을 일으키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제는 계부(季父)로서가 아니라 한 무사로서 흥미가 인 듯하였다.

장군가의 자제답게 항량도 어려서부터 무예를 익혔다. 당연히 성취도 있어 유협(遊俠)들 사이에서도 무예 때문에 업신여김을 당하지는 않았고, 난군(亂軍) 속에 떨어져도 몸을 가릴 만큼은 되었다. 하지만 방금 본 검기(劍氣)는 그런 항량에게도 눈부셨다.

가만히 문을 열고나선 항량은 짐짓 발소리를 죽이며 뜰을 가로질러 항우에게로 갔다. 조카의 무예수련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뜻이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몰래 조카의 성취를 가늠해 두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떨기나무와 굵은 나무등걸에 몸을 감추어가며 다가가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항우는 칼끝을 땅바닥 쪽으로 늘어뜨린 채 거칠어진 숨을 고르고 있었다. 여덟 자 키에 우람한 몸매와 순진해 뵈면서도 위엄 서린 얼굴이었다. 당시의 자[]는 약간 짧아, 여덟 자라 해봤자 뒷날로 치면 여섯 자 남짓이었으나, 그 키만으로도 일반적으로 왜소한 초나라 사람들에 견주면 산악(山嶽) 같다 할만 했다. 그 늠름하고 환한 항우의 모습이 다시 항량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짓게 했다.

그 사이 한숨을 돌린 항우는 장검을 칼집에 거두더니, 나무 등걸에 기대 세워두었던 창을 집어 들었다. 긴 자루 끝에 쌍날이 달려 베기와 찌르기를 겸할 수 있는 창으로, 날은 진과(秦戈)와 달리 쇠로 벼려져 있었다. 자루도 철갑을 씌워 여느 창보다는 몇 배나 무거워 보였다.

항우는 계부(季父)가 숨어서 보고 있음을 알기나 하듯 창을 들어 천천히 창법을 펼쳐 보였다. 처음에는 단병접전(短兵接戰)에서의 창법이었는데 찌르고 베는 기세가 사납고 매섭기 그지없었다. 다음은 여럿과의 차륜전(車輪戰) 형태인데 대여섯 군데에서 번갈아 치고 드는 적을 받아내는 동작이 여간 엄밀하지 않았다.

마지막이 대병(大兵)속의 혼전을 헤쳐 나가는 창법이었다. 사방팔방, 상하좌우에서 베고 찔러오는 창칼을 퉁겨내며 맞받아 베고 찌르는 것인데, 시간이 흐를수록 창날의 속도는 빨라졌다. 그러다가 어느 때가 되자 다시 항우의 몸은 창대가 짓는 그늘과 창날이 내뿜는 빛의 장막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놀랍구나. 어느새 이 아이의 솜씨가 이토록 휘황하게 어우러졌단 말이냐.)

항량은 그렇게 감탄하며 문득 항우가 처음 무예를 배우기 시작한 날을 떠올렸다.

몇 년 전 항량이 처음 항우에게 가르친 것은 글이었다. 비록 어려서부터 떠돌아다니며 숨어살았지만 태어난 가문 덕분인지 항우는 그때도 초나라의 서법(書法) 정도는 대강 알고 있었다. 그러나 천하를 아우른 시황제가 문자를 하나로 통일하자 항우는 문맹이나 다름없이 되어버렸다. 이에 항량은 다시 진의 서체인 전서(篆書)를 배우게 했던 것인데, 결과는 뜻 같지가 못했다.

끝엣 아버님[季父], 문자란 자기 이름만 쓸 줄 알면 넉넉한 것입니다. 도필리(刀筆吏=문서를 맡은 관리)로 일생을 살고자하지 않을 바에야 무엇 때문에 그 많은 문자를 다 익힌답니까?”

어느 날 항우는 그렇게 말하며 책을 덮더니 다시는 펴려 하지 않았다. 항우의 고집을 잘 알고 있는 항량이라 억지로 글을 가르치려 들지는 않았다. 한동안 항우를 살피다가 슬며시 권해 보았다.

그럼 칼 쓰기를 배워 보겠느냐? ()란 대장부가 마땅히 본업으로 삼을 만한 것이니라.”

항우는 그 새로운 권유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처음 얼마간은 항량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돈 들여 불러들인 무예의 달인(達人)들로부터 새로운 무예 초식(招式)을 전수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반복단련에 싫증이 났는지 곧 검술에 시들한 태도를 보였다.

우리 초나라가 진에게 망한 것은 결코 문()이 뒤져서가 아니었다. 사람의 목을 잘라오는 것을 그 어떤 공보다 으뜸으로 삼는 저들의 상무(尙武)에 진 것이었다. 너는 진병의 칼날 아래 피를 뿜고 쓰러진 부조(父祖) 이대의 한을 잊지 말라!”

항량은 항우가 무예 익히기를 게을리 할 때마다 그렇게 다그쳤으나, 항우는 왠지 불만한 기색을 숨기려 들지 않았다.

()라는 게 손목과 팔로 창검을 익히는 것만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항량은 그 말이 자신의 게으름을 감추기 위한 핑계로만 받아들였는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닌 듯했다. 그 몇 년 항우는 무예에 온 힘을 쏟아 상당한 성취를 이루었고, 이제는 그 성취를 바탕 삼아 보다 높고 새로운 경지로 나아가기를 바라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어르신[大人], 주인 어르신.”

갑자기 누가 등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항량이 얼른 돌아보았다. 늙은 청지기가 아전바치[郡吏]하나를 데리고 저만치 서 있었다.

(또 무슨 일인가. 이번에는 몇 명이나 긁어모아야 하나.)

아전바치를 알아본 순간 항량은 짜증부터 났다. 대낮부터 사람을 보낸 것으로 보아 회계수(會稽守=회계 태수. 太守란 관명은 漢代부터 쓰인다)가 또 군역(軍役)이나 요역()에 끌고 갈 사람을 졸라댈 작정인 듯했다. 하지만 당장은 조카에게 자신이 엿보고 있었음을 들키게 된 게 더욱 짜증났다.

무슨 일이냐?”

관아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그제야 항량도 군에서 나온 관리를 알은체하며 그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공조리(工曹吏)께서 어인 일로 또 오시었소?”

그러면서 흘긋 항우 쪽을 보니 항우는 어느새 창을 거두어 짙은 나무그늘로 사라지고 있었다. 성난 듯한 그 뒷모습에서 좋건 나쁘건 자신을 쉽게 남 앞에 드러내지 않으려는 조카의 자존망대(自尊妄大)한 습성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군수(郡守)께서 나으리를 찾으십니다.”

항량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군리가 공연히 주눅든 얼굴로 대답했다.

(이번에는 뭔가 가운데서 절충하기 어려운 일을 떠넘기려는 모양이구나.)

항량은 문득 군수 은통(殷通)의 의뭉스러운 얼굴을 떠올리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발등에 떨어진 불이 다급하다보니 조카의 일은 잠시 잊을 수밖에 없었다.

통일 뒤 이런저런 토목공사로 진() 조정은 천하 서른여섯 군()에서 적지 않은 사람을 인부로 데려갔다. 그러다가 시황제 32년 연나라의 방술사 노생(盧生)이 동해에서 참위(讖緯)의 글귀를 얻어오면서 한층 더 많은 사람을 끌고 가게 되었다.

<진나라를 망하게 할 자는 호이다[亡秦者胡]>란 구절을 본 시황제는 호()를 말 그대로 오랑캐, 그것도 북쪽 흉노(匈奴)로 해석했다. 그해 바로 장군 몽염(蒙恬)으로 하여금 군사 30만을 일으켜 흉노를 치게 했고, 이듬해부터는 곳곳에 요새를 쌓아 쫓겨난 그들이 다시 돌아올 수 없게 했다. 또 그 이듬해부터는 천하에서 널리 일꾼들을 끌어내 흉노를 막을 장성(長城)을 쌓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니 천하의 군현(郡縣)이 모두 군사와 인부를 대기 위해 진땀을 빼야 했다. 병사로 나가든 역도(役徒)로 떠나든 돌아오기를 기약하기 어려운 길이라, 백성들은 누구도 선뜻 떠나려 하지 않았다. 일거리가 많은 진나라 도성이나 흉노와의 싸움터뿐만 아니라 장성을 쌓을 요해처(要害處)가 모두 서북의 멀고 험한 땅에 몰려 있는 데다, 도달해야 할 날은 엄하게 정해져 있어도 돌아갈 날은 정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조정에서 보내라는 사람의 머릿수를 맞춰 대기가 군현마다 여간 힘들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회계군(會稽郡)은 특히 더했다. 땅 자체가 진나라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뿐더러, 그 어느 지역보다 반진(反秦)의 감정으로 불온한 초나라의 고토(故土)였다. 무리하게 백성을 끌어내다가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누군가 진나라 조정에서 내려 보낸 관리와 오중의 토착민 사이를 중재하고 조정할 사람이 꼭 필요했다.

시황제가 보낸 진() 회계 군수 은통은 몇 년 전부터 그 일을 항량에게 맡기고 있었다. 항량이 초나라의 명문자제라는 풍문이라던가, 어딘가 반역의 냄새를 풍기는 그의 감춰진 전력이 께름칙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우선 급한 것은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오중 백성들의 불만을 어루만지기 위해서는 그들로부터 믿음과 사랑을 받는 항량을 내세워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

항량도 기꺼이 그 일을 떠맡아왔다. 당장 진나라를 뒤엎고 초나라를 되일으켜 세울 수 없을 바에야, 적당한 양보를 얻어내고 진나라에 순응하는 것이 오중 사람들을 지키는 길이었다. 은통과의 담판에서 군역(軍役)을 부역으로 바꾸고 보낼 사람의 머릿수를 원래보다 줄인 뒤, 다시 오중의 부로(父老)들을 모아 줄어든 부담을 받아들이도록 달래는 것이 대개 그가 하는 중재와 조정의 내용이었다.

항량이 관아에 이르러보니 은통은 객청(客廳)에서 홀로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에는 무슨 두꺼운 가죽이라도 덮어쓴 듯 속내를 짐작할 길 없던 그의 크고 무표정한 얼굴이 그날따라 어둡게 굳어있는 걸로 보아 예사 아닌 어려움이 있는 것 같았다.

항씨(項氏) 아우님.”

차 한잔 다 비우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은통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항량을 불렀다. 언제부터인가 은통은 항량보다 몇 살 손위임을 내세워 항량을 아우로 부르면서 친분과 신임을 과장하고 있었다.

점점 고약한 공문들이 내려오고 있네. 아마도 우리 황제께서는 천하 백성들을 모조리 끌어다가 싸움터가 아니면 일터에 밀어 넣을 작정인가 보이.”

그럴 때의 은통은 시황제의 권위를 대신하여 내려온 삼엄한 관리가 아니라 정말로 같은 고장에 함께 사는 형 같은 데가 있었다. 항량도 걱정스러움을 과장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조정에서 장성을 쌓을 역도(役徒) 1만에, 남월(南越=이때의 남월은 桂林 象郡 南海를 가리킴)에 수()자리로 보낼 1만을 한꺼번에 내라는군. 이 형은 그저 아뜩할 뿐이네. 항량. 어쩌면 좋겠나?”

한창 때의 회계군이 22만 호(). 이제는 전란으로 죽고 여기저기 끌려가 20만 호에 훨씬 못 미치니, 진나라 조정이 원하는 2만을 내려면 집집마다 다시 장정을 한 명 넘게 내야 한다. 더구나 작년 재작년에 이미 집집마다 하나 꼴로 역도를 끌고 가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도 보내지 않고 그냥 버틸 수는 없을 것이다-항량은 속으로 가만히 오중(吳中)땅이 더 낼 수 있는 머릿수를 가늠해보았다.

그 일이라면 이젠 저도 어찌해 볼 수 없습니다. 작년 함양(咸陽)에 일꾼 만 명을 낼 때도 이미 젊은이들만으로는 모자라 머리 허연 늙은이들까지 나서지 않았습니까?”

이윽고 마음속의 선을 정한 항량이 먼저 그렇게 운을 떼어 은통의 속을 떠보았다. 은통이 능청을 떨었다.

나도 알고 있네. 하지만 어쩌겠나? 늙은 이 한 몸 벼슬과 목을 내놓는 일이야 어렵지 않지만, 뒤이어 밀어닥칠 조정의 대군은 또 어떻게 하나? 황제께서는 반드시 우리 회계에 반역의 죄를 물으실 터인즉.”

가장 회계군 사람들을 생각하는 척하면서 하는 위협이었다. 하지만 진나라의 엄한 법령이나 점점 더 자기도취에 깊이 빠져 들어가는 시황제의 가혹한 결정들을 돌이켜 보면, 그저 말로만 해보는 위협은 결코 아니었다. 그 한 예가 그해 온 천하를 흉흉하게 한 책 불사르기[분서] 소동이었다.

옛 제나라 땅 사람인 박사(博士) 순우월(淳于越)이 군현제(郡縣制)에 왕족들끼리 서로를 지켜주는 기능이 없음을 걱정하며, 옛 봉건제(封建制)의 부활을 주장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승상 이사(李斯)가 글로 이렇게 아뢰었다.

<오제(五帝)의 다스림이 서로 중복되지 않고, () () () 삼대가 서로 이어받음 없이 각자의 방식으로 천하를 다스린 것은 서로를 반대해서가 아니라 시대가 변하여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제 폐하께서 대업을 창시하시어 만세의 공덕을 세우셨으니, 어리석은 유생들로서는 진실로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순우월이 말한 것은 삼대(三代)의 일이니 어찌 반드시 본받아야할 일이겠습니까.

이전에는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으므로 높은 관직과 후한 봉록으로 떠도는 선비들을 불러들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천하가 안정되어 법령이 통일되었으며, 백성들은 집안에서 농공(農工)에 힘쓰고 선비들은 법령과 형률(刑律)을 배우고 있습니다. 다만 유생(儒生)의 무리들만 지금의 것을 배우지 않고 옛 것만을 배워 지금의 세상을 그르다 헐뜯으며 백성들을 미혹되게 하고 있습니다.

이에 승상인 이사는 감히 아뢰옵니다. 옛날에는 천하가 혼란스러워 어느 누구도 천하를 통일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제후들이 서로 군사를 일으키고 하는 말마다 옛것을 내세워 지금을 헐뜯고, 허망한 것을 늘어놓아 실질적인 것을 어지럽혔습니다. 또 저마다 사사로이 배운 것만을 높이 치켜세움으로써 천자의 조정에서 세운 제도를 비난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황제께서 천하를 통일하시어 흑백을 가리고, 모든 것은 지존(至尊) 한 분에 의해 결정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사사로이 배운 것으로 조정의 법령과 교화를 비난하고, 법령을 들어도 자신의 학문으로 그 법령을 따질 뿐이며, 조정에 들어와서는 마음속으로 비난하고, 조정을 나가서는 길거리에서 의논하는 일이 잦습니다. 임금에게 자신을 과시하여 명예를 얻으려 하고, 기이하고 별난 주장을 내세워 자신을 높이려고 하며, 백성들을 모아 조정을 헐뜯고 깎아내리는 말을 퍼뜨리기도 합니다.

만약 이러한 일들을 엄하게 금지하지 않는다면 위에서는 황제의 위세가 떨어지고 아래에서는 붕당(朋黨)이 갈라질 것이니 실로 걱정입니다. 신이 청하옵건대 사관(史官)에게 명하시어 진()의 전적이 아닌 것은 모두 태워 버리게 하시고, 박사관(博士館) 이외의 곳에 있는 시() () 및 제자백가들의 저서는 지방의 관리들이 모두 모아 태우게 하며, 감히 시와 서를 이야기하는 자는 저잣거리에서 사형에 처하시어 백성들에게 본보기를 보이시고, 옛것으로 지금의 일을 나무라면 그 일족을 모두 죽이시옵소서. 또 이같은 일을 보고도 잡아들이지 않는 관리는 같은 죄로 다스리시고, 명령이 내려진 지 한 달이 지나도 책을 태우지 않은 자는 얼굴에 먹을 뜨고[] 멀리 변방으로 노역[城旦刑]을 보내소서.

불태워 없애지 않을 서적은 오직 의약(醫藥)과 점복(占卜)과 종수(種樹)에 관하여 쓴 것뿐이며, 만약 법령을 배우고자 하는 자가 있다면 다만 관리를 스승으로 삼게 하소서.>

아무리 법가(法家)의 논리라고 하지만 지나치게 철저하고 비정한 전개이며, 아첨이라면 너무도 지독한 아첨이다. 자신의 감정이나 이념에 맞지 않는다 해서 남의 책을 함부로 훼손하는 행위-어쩌면 진시황을 폭군 또는 반문화(反文化)의 상징으로 굳어지게 한 것은 바로 그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시황제는 그런 이사의 말을 받아들여, 그해 천하 모든 거리의 회벽(灰壁)이 책 태우는 연기에 검게 그을릴 지경이었다.

좋습니다. 남월(南越)5000을 보내는 일이면 어떻게 달래보지요. 그것도 멀지 않은 곳의 수자리라 오중 부로(父老)들에게 입이라도 떼어볼 수 있는 겁니다.”

이윽고 항량이 그렇게 절충으로 들어갔다. 은통이 어림없다는 듯 받았다.

나라의 명()에도 체면이라는 것이 있네. 장성(長城)의 역도(役徒) 또한 이미 말을 냈는데 어떻게 없었던 것으로야 할 수 있겠나? 그쪽도 5000은 보내야 하네. 남월 쪽은 1만을 다 채워야할 것이고.”

그렇다면 저는 이만 이 일에서 손을 떼겠습니다. 빈대도 낯짝이 있다고, 제가 무슨 낯으로 다시 이 땅의 늙은 부모들로부터 자식을 뺏고 아낙네들로부터 지아비를 떼어 낼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어쩌겠나? 우리 진나라의 엄한 법령은 아우도 잘 알고 있지 않나? 아우야말로 다시 한번 멀리 내다보고 방도를 내보게. 어떻게 조정의 노여움을 사지 않도록 저 사람들을 잘 달래볼 길은 없겠나? ”

그렇게 두 사람의 밀고 당기기는 한동안 이어졌다. 그러다가 마침내 이루어진 절충은 장성과 남월에 각각 5000씩만 보내되, 기일을 최대로 끈다는 것이었다.

(늙은 너구리같은 놈. 아마도 처음부터 절반만으로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오중 사람들을 위해 한 일이 있다면, 기껏 했자 그들이 조금 더 천천히 채비를 갖춰 떠날 수 있게 한 것뿐일지도 모르겠다.)

항량은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공연히 쓴 맛이 도는 차 한잔을 비우고 관아를 나왔다. 그런데 관아를 벗어난 항량이 저잣거리를 지나갈 무렵이었다. 누가 뒤따라오며 불렀다.

항 대협(大俠), 항 대협님

항량이 돌아보니 만구(曼狗)란 건달이었다. 정한 거처도 하는 일도 없이 저잣거리를 빈둥거리면서 이런 저런 허드렛일이나 잔심부름으로 겨우 입치레나 하고 지내는 녀석이었다. 항량도 일이 있으면 언제나 그를 불러 머슴처럼 부렸다.

무슨 일이냐?”

항량이 걸음을 멈추고 묻자 숨이 턱에 닫도록 달려온 만구가 헉헉거리며 말했다.

어찌 그리 소리 소문 없이 관아를 드나드십니까? 안에서 말씀 나누고 계시단 말을 듣고 진작부터 문밖에서 기다렸는데-문지기의 얘기를 듣느라 잠시 한눈 파는 사이에.”

무슨 일이냐니까.”

말 많은 것을 싫어하는 항량이 다시 그렇게 만구의 말허리를 잘랐다. 그제야 만구도 조금 숨이 가라앉았는지 차분하게 대답했다.

굴씨가(屈氏家) 노마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젊은 나으리께서는 통곡만 하고 계시고 몇 안 되는 족인(族人)들이나 이웃도 어찌할 바를 몰라 대협만 찾고 있습니다.”

굴씨(屈氏)는 초나라의 왕성(王姓)으로서, 경씨(景氏) 소씨(昭氏)와 더불어 삼대(三大) 왕족의 하나였다. 그러나 나라가 기울어지면서 왕족 또한 욕을 면할 길이 없었다. 먼저 굴원(屈原)과 굴개()가 원통하고 욕스럽게 죽어 머지않은 초나라의 멸망을 예감케 했다.

회왕(懷王)때 삼려대부(三閭大夫)였던 굴원은 이름이 평() 또는 정칙(正則)이고 자는 영균(靈均)이었다. 견문이 넓고 의지가 굳세었으며, 치란(治亂)에 밝고 문사(文辭)에도 능숙하였다. 그는 좌도(左徒)로 일하면서 제나라와 합종(合縱)하여 진나라에 맞서기를 주장해왔는데, 상관대부(上官大夫)인 근상()이란 자의 참소로 조정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 뒤 굴원은 별로 중용되지 못했으나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길이 있을 때마다 올바른 진언으로 회왕을 깨우쳤다. 연횡책(連橫策)을 앞세운 진나라 승상 장의(張儀)의 농간을 가장 잘 알아본 것도 그였으며, 진 소왕(秦 昭王)의 속임수에 넘어가 무관(武關)으로 가려는 회왕을 힘써 말린 것도 그였다.

하지만 자신을 다시 불러 써 줄 회왕은 끝내 무관으로 갔다가 진나라의 매복계(埋伏計)에 걸려 함양으로 끌려간 후 시체가 되어서야 초나라로 돌아왔다. 거기다가 회왕의 뒤를 이은 경양왕(頃襄王) 또한 간신의 참소에 넘어가 굴원을 다시 불러 쓰기는커녕 오히려 먼 곳으로 유배까지 보냈다. 그리하여 절망한 굴원은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지게 되는데, 그때의 애절한 심사는 그가 남긴 <어부사(漁夫辭)> 한 구절에 잘 드러나 있다.

<……내 들으니 새로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갓을 털고, 새로 멱을 감은 사람은 옷을 털어 입는다 하였다. 어찌 이 맑고 깨끗한 몸으로 더러운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으랴. 차라리 저 푸른 물결에 몸을 던져 물고기 밥이 될지언정 어찌 이 희고 맑은 이 몸으로 세상의 티끌을 뒤집어쓸 수 있으랴.>

굴개() 또한 회왕 시절의 장수로서 장졸들에게 두루 신망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회왕이 진나라로부터 땅 600리를 얻게 해주겠다는 장의의 꾐에 넘어가 제나라와의 맹약을 저버리게 되면서 고약한 싸움에 빠져들게 되었다. 결국 땅은 얻지 못하고 동맹국만 잃게 되자 성난 회왕이 진나라에 무모한 싸움을 건 탓이었다.

굴개는 왕명을 받아 갑작스럽고도 내키지 않는 싸움을 하러 진나라로 쳐들어갔다. 하지만 미리 사태를 예견하고 기다리고 있던 진군(秦軍)에게 단수(丹水)와 석수(淅水)가에서 여지없이 지고 말았다. 이때 초나라 군사 8만 명의 목을 잃었고, 한중(漢中) 땅을 진에게 빼앗겼으며, 장수인 굴개도 사로잡혀 욕되게 죽었다. 연횡책을 내세운 진나라의 간계(奸計)에 당했다는 점에서는 굴원과 비슷한 데가 있다.

그러하다 보니 통일을 이룬 뒤에도 진 조정이 굴씨(屈氏)들을 곱게 보아줄 리가 없었다. () 땅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눈을 부릅뜨고 그들을 살폈고, 구실만 찾으면 여느 사람들보다 몇 배나 가혹하게 다루었다. 이에 굴씨들은 초나라의 도읍인 영()을 떠나 사방으로 흩어졌다. 오중으로 흘러들었다가 방금 상()을 당한 그 집안도 그중의 하나였다.

항량은 생전의 굴씨가의 노마님을 본 적도 없고 집안의 다른 사람들과도 특히 친하게 지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전부터 동병상련의 정은 느껴오고 있었다. 먼저 그 집안의 형세가 외롭고 가난함을 헤아려 급한 일부터 만구에게 일러주었다.

알았다, 만구. 너는 상문객(喪門客)부터 몇 모아 보내라. 그리고 피리 부는 주오(朱五)네 패거리도 찾아보고.”

그 시대는 산 사람을 보살피는 일[양생]보다 죽은 사람을 보내는 일[喪死]이 훨씬 무겁고 귀하게 여겨지던 때라, 장례에 관련된 일로 벌이를 삼는 사람들이 많았다. 상문객(喪門客)은 장례식에 가서 삯을 받고 울어주는 사람들을 말하며, 피리 부는 사람[吹簫人] 또한 상가에서 일삼아 장송곡을 연주하는 악단의 일부였다.

항량은 먼저 상문객과 피리 부는 사람을 부르게 함으로써 장례의 겉모양부터 갖추게 했다. 하지만 장례의 실질은 죽은 이를 산 사람들로부터 떼어내는 일로, 그 과정에서 슬픔을 일정한 형식으로 나타내 객관화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사람이 필요하였다. 항량은 상가(喪家)로 가는 도중에 다시 몇 군데 들러 자신이 부릴 사람들을 더 불러 모았다.

상가에 이르니 굴씨가(屈氏家)의 젊은 상주(喪主)는 경황없이 울고만 있었다. 나라 잃고 떠돌아다니는 왕족의 군색함과 고단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살림이었다. 집안은 몇 안 되는 노복(奴僕)과 가동()들만이 어찌할 바를 몰라 오락가락하다가 항량이 불러들인 한 떼의 상문객들이 몰려들어서야 비로소 상가답게 어우러졌다.

이윽고 항량의 부름을 받은 오중의 자제들이 굴씨가로 몰려들었다. 항량은 그들을 맞아 평소에 알아둔 바 능력대로 일을 맡겼다. 셈에 빠르고 이재(理財)에 밝은 이에게는 장례에 쓰이는 금전의 출납을 맡겼고, 발이 넓고 물자의 흐름을 잘 살피는 이에게는 제기(祭器)와 장구(裝具)의 수급을 맡겼다. 또 상주의 친지와 연비(聯臂)를 많이 아는 이에게는 발이 빠른 젊은이를 붙여 되도록 널리 상을 알리게 했다.

문상 오는 손님들도 항량의 조직과 배치에서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예만 표시하고 돌아가도 되는 문상객은 그냥 보내 주었지만 쓸모가 있으면 붙들어 두고, 그가 있어야 할 곳에 있게 하였다. 상주를 대신하여 빈객을 맞아야할 사람이면 상주 곁에 두고, 잡일을 거들어야할 사람이면 각기 필요한 곳으로 보내는 식이었다.

항량은 이전부터 누구든 상사(喪事)가 있어 부탁만 하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 일을 도맡았다. 살림이 넉넉하고 권세 있는 자가 죽으면, 상가 한가운데 진세(陣勢)라도 벌이듯 자리 잡고 앉아 성대하게 장례를 치러줌으로써 상주의 허영를 채워주었다. 또 보잘것없는 저잣거리 늙은이가 죽어도 마찬가지였다. 가난하고 힘없는 상주라도 울며 매달리면, 항량은 평소에 알아둔 자기 사람들을 불러 모아 그 누구에 못지않게 격식을 갖춘 장례를 치러 주었다.

그 어느 편이든 그렇게 상사를 도맡아 치르는 항량은 마치 대병(大兵)을 부리는 장수 같았다고 한다. <사기(史記)>는 그런 항량의 능력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오중의 요역()과 상사가 있을 때마다 항량이 도맡아 일을 처리하였는데, 은밀히 병법(兵法)을 사용해서 손님과 젊은이들을 배치하고 지휘하였으며, 또 그로써 그들의 재능을 알아두었다.>

요역을 도맡아 처리했다는 것은 아마도 군수인 은통과 오중(吳中) 사람들 사이에 부역을 두고 벌어질 수 있는 긴장관계를 조정하고 절충한 일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또 은밀히 병법을 사용했다는 것은 그만큼 일을 꾸미고 사람을 부리는 재주가 뛰어났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그로써 그들의 재능을 알아두었다는 구절은 다른 뜻에서 눈길을 끈다. 곧 항량은 그때 이미 뒷날을 내다보고 나름으로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중 초나라 땅에서 봉기한 여러 갈래의 세력 중에서 초기의 조직과 배치가 가장 잘 된 것은 항량이 이끄는 세력이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가 장례를 통해 알아둔 능력에 따라 사람들을 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발인(發靷) 날을 받고 산역(山役)에까지 채비가 미쳐서야 상가는 경황 중에도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다. 날은 어느 새 저문 뒤였다. 항량이 비로소 한숨을 돌리며 술 한 잔으로 목을 축이고 있는데 젊은 가동() 하나가 찾아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주인마님, 급히 돌아가 보셔야 하겠습니다. 작은 주인마님께서.”

()? 우에게 무슨 일이 있단 말이냐?”

자식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조카의 일이라 어지간한 항량도 놀라 소리를 높이며 물었다.

주인마님께서 나가시고 오래잖아 한 장사가 찾아와 작은 주인과 무예를 겨루었는데.....”

그래, 우리 우가 패하기라도 했단 말이냐?”

그렇지는 않으나, 주먹과 손바닥을 맞대는 것에서 시작한 겨루기[比武]가 막대와 몽둥이를 지나 도검(刀劍)과 과극(戈戟)에 이르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피를 보고서야 끝이 날 것 같습니다. 날이 저물어 와도 겨루기를 그치기는커녕, 횃불을 마련해 사방을 밝히라는 작은 주인의 말씀에 걱정이 되어 이렇게 큰 주인마님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 장사는 누구라더냐?”

이름을 대기는 하였으나 낯설었습니다. 다만 환초(桓楚)의 수하(手下)라는 것 밖에는.”

환초의 수하?”

항량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몸을 일으켰다. 환초라면 오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장수감으로 알려진 사나이였다. 힘이 세고 무예가 높을 뿐만 아니라 제법 인망도 얻어 따르는 무리가 많았다. 겉으로 보아서는 항량보다 더 큰 오중의 세력가였다. 하지만 그렇게 겉으로 너무 드러나 있다는 게 오히려 탈이었다.

오중에서 누가 진나라를 상대로 일을 낸다면 그것은 환초일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그렇게 수군댔고 진나라 관부(官府)는 그런 환초를 눈여겨 살피고 있었다.

(정말 환초의 수하라면 서로 피를 보아서는 안 된다!)

항량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서둘러 말에 올랐다. 언젠가는 서로 부닥치게 될 지도 모르지만 진나라를 상대로 하고 있는 한 서로 등져서는 안 될 세력이 환초의 패거리였다.

저만치 저택이 보이는 곳에 이르니 수많은 횃불로 뒤뜰 하늘이 벌겋게 타오르듯 밝았다. 큰 야전(夜戰)이라도 벌어지고 있는 듯 병장기 부딪는 소리가 멀리까지 요란했다.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더해 집으로 돌아간 항량은 말에서 뛰어내리기 바쁘게 뒤뜰로 달려갔다.

짐작대로 횃불로 훤한 뒤뜰 한가운데서 두 사람의 장사가 길고 무거운 무기를 맞대고 있었다. 항우의 방천극(方天戟)과 낯선 사내의 장창(長槍)이었다. 칼을 빼고 뛰어들어 먼저 싸움부터 말려놓고 보려던 항량은 그들의 병장기가 뿜어내는 무거운 기세에 흠칫했다. 하도 빈틈없는 막을 이루며 얽혀 있어 뛰어들 틈이 보이지 않았다.

함부로 소리를 지르기도 두려웠다. 갑작스러운 고함이 한쪽의 기력을 흩어놓을 수도 있는데, 그게 조카인 항우가 된다면 여간 큰일이 아니었다. 그 바람에 엉거주춤 멈춰 선 항량은 한동안이나 다른 가동들처럼 싸움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얼마나 지났을까. 구경하고 있는 항량의 얼굴에 차츰 안도의 기색이 떠올랐다. 미세하나마 조카의 우세가 느껴진 까닭이었다.

(무엇 때문인가 저 아이가 한 수 접어주고 있다. 조금 전 그 한 초식도 한 치만 더 내질렀으면 저자의 목을 꿰어 놓을 수 있었다. 그런데 적아(籍兒=항우)는 오히려 방천극을 거둬들였다. 두고 볼 일이다.)

그런 항량의 헤아림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 밥 한 그릇을 다 비울 시간도 가기 전에 갑자기 항우가 한소리 큰 외침과 함께 방천극을 내지르더니 그 자루를 봉()처럼 휘둘러 상대의 오른팔을 쳤다. 상대가 가벼운 신음과 함께 창대를 놓쳤다.

(처음부터 상대를 다치지 않고 이기려하다 보니 시간을 끌었구나. 무슨 뜻일까.)

이제 항량은 느긋한 마음이 되어 조카가 하는 양을 살폈다. 무예에서는 한 수 뒤졌지만 인품만은 상대도 항우에 뒤지지 않았다. 비로소 사태를 알아차린 듯 두 손을 모았다.

병장기에는 눈이 없다는데, 이렇게 인정을 베풀어 주셔서 고맙소이다. 내가 미련해 진작에 항형(項兄)의 고명한 솜씨를 알아보지 못한 듯하오. 오늘 이 용저(龍且), 한 수 크게 가르침을 받았소.”

과찬의 말씀이시오. 무예를 배운 이래 용형(龍兄)처럼 날카로운 적수를 만나본 적이 없소.”

항우가 제법 그렇게 겸양을 했다. 그제야 항량이 나섰다.

장사 어디 다치신 곳은 없소?”

항형이 인정을 써 살 껍질을 조금 상했을 뿐이니 걱정 마십시오.”

다행이오. 그럼 안으로 들어갑시다. ()야 나는 먼저 들어가 자리를 마련할 테니 너는 손님을 모시고 뒤따라 들어오너라.”

그리하여 잠시 뒤 항량의 저택에서는 조촐하나마 정감 어린 잔치가 벌어졌다. 처음에는 그 용저라는 장사 뒤에 있는 환초라는 인물 때문이었으나, 차츰 용저를 위한 잔치가 되었다.

용저는 고향도 조상도 기억 못하는 떠돌이 무사였다. 어디서 배웠는지 모르나 무예가 빼어났고, 환초를 흠모하여 일찍부터 그 패거리와 어울렸다. 그러다가 항우의 힘과 무예가 뛰어나단 말을 듣고 겨뤄 보려 달려온 것인데 그때 그의 나이 스물, 항우와는 동갑내기였다.

항량은 용저를 통해 환초의 세력과 근래의 형편을 알아보았고, 더 깊게는 환초의 됨됨이와 그가 세력을 모아 이루고자 하는 바까지 캐물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그렇게 용저의 마음을 산 조카에게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나는 이 아이가 성급하고 고집이 세다하여 걱정했는데 뜻밖에도 사람을 알아보고 끌어들일 줄도 아는구나. 그렇다면 사람을 부릴 줄도 알 터이니 아버님의 장재(將材)는 오히려 이 아이가 물려받았다. 내가 미칠 바 아니다.)

하지만 항량을 감탄시킨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날 저녁 용저가 잠자리에 들고 숙질(叔姪) 둘만 남자 항우가 무겁고도 신실한 표정으로 말했다.

끝엣 아버님[季父]. 칼은 한 사람만 대적할 수 있을 뿐이니 오래 배울 만한 것이 못 됩니다. 저는 만인(萬人)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길을 배웠으면 합니다.”

만인에 맞서 싸우다니? 그 무슨 말이냐?”

항량은 짐짓 아무 것도 모르는 척 되물었다.

여정(呂政=시황제)의 세상은 머지않았습니다. 하지만 천하를 통일한 그 여세를 지우자면 어차피 한차례 큰 싸움이 있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더는 둘러말할 필요가 없었다.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겨있던 항량이 진작부터 생각해온 일인 양 말했다.

네 뜻이 정히 그러하다면 이제부터 병법(兵法)을 익혀 보아라. 그게 만인을 대적하기에 보다 나은 방책일 것이다

 

하비()의 가을바람은 쌀쌀했다. 장량은 옷깃을 여며 몸속으로 파고드는 찬바람을 단속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굳이 갈 곳을 정해놓지 않고 한가로운 마음으로 나선 길이었으나, 바깥날이 생각보다 차가워 어차피 산책이 길어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창해역사(蒼海力士)를 얻어 진시황을 죽이려다 실패하고 이리저리 쫓기며 떠돌다가 하비로 숨어든 지 어느덧 여섯 해, 그 사이 장량은 많이 변해 있었다. 옛 성()과 이름을 버린 그는 이후 자신뿐만 아니라 후손들까지 그대로 쓰게 될 장씨(張氏) 성과 량()이란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뿐만 아니라 장적(帳籍)도 새로 꾸며 가문까지 대대로 정()땅에 살다가 하비로 흘러들게 된 장사치 집안의 후예가 되었다.

장량의 모습도 적지 아니 변하였다. 반듯한 눈 코 귀 입이나 흰 살결은 아직 그대로였지만 그것들이 어울려 빚어내는 인상은 이미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깊어진 주름과 더불어 짙어진 얼굴의 음영은 여인네의 그것 같던 아리따움을 따뜻하면서도 함부로 범할 수 없는 위엄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 몇 년의 도인(道引=도가의 양생법)과 단련 덕분인지 장량의 호리호리한 몸매도 전과는 달라 보였다. 힘줄로 굳어지고 맺힌 곳 없는 팔다리며 가늘어 휘청이듯 하던 허리에도 여성적인 가녀림이나 말랑거림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보다는 한없이 부드러우면서도 만만찮은 기상 같은 게 서려 마주보는 사람을 은근히 위압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크게 변한 것은 장량의 정신이었다. 여섯 해 전 시황제를 저격할 때만 해도 그는 망국(亡國)의 한을 복수의 일념으로 바꾸어 외곬로 치닫던 한 자객(刺客)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뜻을 같이하던 이가 눈앞에서 다져진 고기가 되어가던 참상을 본 충격과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쫓겨본 경험은 그의 모난 성격을 둥글게 다듬고 앞 뒤 모르던 격정을 깊고 지긋한 사려로 바꾸어 놓았다. 거기다가 하비에 자리잡은 뒤의 독서와 수양은 장량에게 전에 없던 지식과 언변을 더해 놓았다.

기록에 따르면 장량도 하비에서 협객(俠客)노릇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닭 모가지 하나 제대로 비틀 힘이 없는 데다 무예조차 변변히 닦은 게 없는 그였다. 흩뿌려서 인심을 살 재물도 없고, 무엇보다도 황제를 저격하고 쫓기는 처지인데도 하비의 협객들 사이에 끼일 수 있었던 데는 먼저 그런 그의 정신적인 성취가 힘이 되었을 것이다.

거기다가 세월이 지나도 꺾일 줄 모르는 반진(反秦)의 투지와 망해버린 조국 한()을 부흥시키려는 열의도 틀림없이 하비 협객들의 마음을 사는 데 한몫을 했다. 언제부터인가 진의 관부에 쫓기는 자들은 모두 장량을 찾아와 보호를 구했고, 조국 부흥의 대망을 품은 육국(六國)의 다른 지사들도 한결같이 그와의 연결을 꾀했다.

하지만 장량을 하비 협객들의 보이지 않는 구심점으로 만든 데는 그 어떤 것보다도 모사(謀士)로서의 재주와 병가(兵家)로서의 능력이었다. 언제부터인가 하비의 뒷골목에는 그가 신인(神人)으로부터 천서(天書)를 얻어 위로는 하늘의 뜻으로부터 아래로 사람의 일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것이 없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바로 황석공(黃石公)과의 기연(奇緣)에서 비롯된 소문이었다.

장량이 황석공을 만난 것은 이곳저곳을 떠다니던 그가 하비로 숨어든 그 이듬해였다. 그 한 해 사람들을 달래고 관부를 구워삶아 어렵게 하비에서 자리를 잡게 된 그는 그날 모처럼 한가로운 기분으로 산책을 나갔다. 하비성() 안을 흐르는 작은 개울을 따라서였다.

한참이나 걷던 장량은 그 개울을 건너기 위해 어떤 다리를 지나게 되었다. 그런데 그가 다리 위로 올라섰을 때였다. 저만치서 마주 오고 있는 웬 늙은이 하나가 묘하게 장량의 눈길을 끌었다. 머리칼과 눈썹이 하얗게 세고 등이 휘어진데다가 거친 삼베옷을 걸치고 있는 그 늙은이는 얼른 보아서는 전란으로 자식을 잃고 떠도는 늙은 거지가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당당한 걸음걸이나 멀리서도 알아볼 만큼 이글거리는 눈빛은 까닭 없이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데가 있었다. 거기다가 가까이 다가온 늙은이가 하는 짓은 너무 이상해서 어처구니없기까지 했다. 장량의 눈앞에서 자신이 신고 있던 헌 가죽신을 다리 아래로 차 벗어 던지고는 꾸짖듯이 말했다.

얘야, 무얼 보고 있느냐? 얼른 저 아래로 내려가 내 신을 주워 오너라!”

그때만 해도 장량에게는 아직 젊은 자객의 혈기가 남아 있었다. 이미 나이 서른을 넘긴 자신을 아이처럼 불러대는 것도 못마땅했지만, 되잖은 심부름을 시키면서 오히려 거만을 떠는 게 더욱 참기 어려웠다. 늙은이고 뭐고 봐줄 것 없이 한번 혼을 내줄까 하다가 마음을 바꿔먹었다.

(손을 대기에는 너무 늙었다. 거기다가 나를 보는 눈길이 심상치 않으니 우선 참고 해 달라는 대로 해주자.)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다리 아래로 내려가 늙은이의 신을 주워왔다. 그런데 다리 위로 올라가 주워온 신을 내밀자 늙은이가 또 억지를 부렸다. 벗은 발을 쑥 내밀며 하인 나무라듯 했다.

신을 주워 왔으면 어서 신기지 않고 무얼 꾸물거리느냐?”

장량은 다시 한 번 불끈 화가 치솟았다. 하지만 이왕에 개울가까지 내려가 신을 주워온 터라, 이미 들인 공이 아까웠다. 거기다가 늙은이에게도 무언가 범상치 않은 데가 느껴져 시키는 대로 했다. 윗몸을 곧추세우고 꿇어앉아 주워 온 신을 신겨주었다.

늙은이는 조금도 미안해하는 기색 없이 장량 앞으로 발을 뻗어 신을 신기게 했다. 그리고 신을 다 신긴 장량이 짐짓 공손하게 먼지까지 털어주자 알 듯 말 듯한 웃음을 지으며 내려 보더니 갑자기 휙 돌아서서 가버렸다. 장량은 더욱 알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그런 늙은이가 멀어져 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늙은이는 뒤 한번 돌아보는 법 없이 휘적휘적 걸어갔다. 그러더니 한 마장이나 갔다가 갑자기 발길을 돌려 아직도 묘한 느낌에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는 장량에게로 돌아왔다.

너 이놈. 참으로 가르칠 만하구나. 닷새 뒤 새벽에 여기로 다시 나를 만나러 오겠느냐?”

늙은이의 그 같은 물음에 장량이 기다리고 있던 사람처럼 대답했다.

. 그리하겠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그 늙은이 앞에 꿇어앉아 예까지 올렸다. 그 늙은이가 무얼 가르칠 수 있으며, 그게 자신이 배울 만한 것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머리가 숙여지고 무릎이 꺾이는 게 스스로도 이상했다.

그 뒤 닷새를 장량은 참으로 묘한 기대와 궁금증에 싸여 보냈다. 그러다가 약속한 날이 되자 새벽 일찍 그 다리로 나갔다. 그런데 장량이 그 다리에 이르러 보니 늙은이가 먼저 와 있었다. 늙은이는 불같이 화를 내며 장량을 꾸짖었다.

도무지 너란 놈은 어떻게 된 놈이냐? 어른과 약조를 맺고서도 이렇게 늦다니!”

그리고는 장량이 변명할 틈도 없이 되돌아서면서 말했다.

그 정성으로 무얼 배우겠느냐? 닷새 뒤에 다시 이리로 오너라. 그때는 오늘보다 좀 더 일찍 와야 한다!”

그 바람에 닷새 뒤 장량은 새벽닭이 울기 바쁘게 그 다리 위로 달려갔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 늙은이가 먼저 와 있다가 전보다 더 화를 내며 꾸짖었다.

또 늦다니. 도대체 너는 어떻게 생겨먹은 놈이냐? 어찌하여 이리 늦었느냐?”

그리고는 찬바람이 도는 얼굴로 뒤돌아서며 말했다.

닷새 뒤에 좀 더 일찍 오너라!”

장량은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늙은이가 그렇게 억지를 쓸수록 그가 가르치려는 것이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그래서 닷새 뒤에는 아예 한밤중에 다리로 나갔다. 차라리 거기서 날을 새우면서 그 늙은이를 기다려볼 작정이었다.

하지만 오래 기다릴 것도 없이 그 늙은이가 나타났다. 그는 장량이 먼저 와 있는 것을 보자 비로소 기뻐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암 이래야지. 마땅히 이래야 하고말고!”

그리고는 품안에서 책 한 권을 내주며 엄숙히 말했다.

내가 너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여기 이 책 속에 다 들어있다. 이 책을 읽어 그 뜻을 깨달으면 너는 제왕(帝王)의 스승이 될 수 있을 것이며, 10년 뒤에는 뜻한 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부디 내 말을 소홀하게 듣지 마라.”

그게 책이란 것은 알았지만 어둠 속이라 무슨 책인지 알 수 없는데, 그 말이 너무 엄청났다. 그 바람에 장량은 잠시 어리둥절해져 무어라 대꾸해야할지 몰랐다. 그런데도 그 늙은이는 더욱 알 수 없는 말을 보탰다.

너는 13년 뒤 제수(濟水) 북쪽에서 나를 만날 것이다. 곡성산(穀城山) 아래에서 누런 돌 하나를 보게 될 것인데 그게 바로 나이니라.”

그리고는 돌아서서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린 장량이 이름이라도 듣고자 늙은이를 찾았으나 이미 자취를 찾을 길이 없었다. 그 뒤 장량은 하는 수 없이 그 늙은이를 그가 자신이라고 일러준 누런 돌[황석]에서 따 황석공(黃石公)이라 불렀다.

날이 밝아 그 책을 보았더니 <태공병법(太公兵法)>이었다. ()나라 무왕(武王)을 도와 은()을 멸망시키고 제()나라의 시조가 된 강자아(姜子牙)가 지었다는 책으로 그때는 이미 실전(失傳)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뒷날 <육도삼략(六韜三略)>이란 책이 바로 그 <태공병법>이란 말이 있으나 밝혀진 바로는 훨씬 후대에 만들어진 위서(僞書)라고 한다.

장량은 그 책을 기이하게 여겨 되풀이해 읽고 그 안에 든 가르침을 익혔다. 그러면서 때로 일을 꾸미는 데나 사람을 나누고 부리는 데 가만히 펼쳐 써 보면 신통하게도 잘 들어맞았다. 이에 믿음을 지니게 된 장량은 더욱 힘써 그 책을 익혀 그 무렵엔 눈을 감고도 훤히 욀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써야할 곳과 때도 곧잘 알아보았다.

(비록 책 한 권 물려주신 것에 지나지 않으나 그분이야말로 나의 참된 스승이시다. 다시 한 번 뵈올 수만 있다면)

장량은 저만치 보이는 그때의 그 다리를 바라보며 새삼스러운 아쉬움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다리 위로 올라가 난간을 쓰다듬으며 옛일을 더듬어볼 수는 없었다. 도인(導引)과 벽곡(辟穀=오곡을 먹지 않는 도가의 양생법)으로 원기를 돋우고는 있지만, 원체 병약한 그라 더는 찬바람을 견뎌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장량이 집으로 돌아가니 몇 년째 별채에 묵어온 주() 두식(斗食)이 의관을 갖추고 기다리고 있었다. 두식(斗食)은 녹봉이 1백 석 이하인 진나라의 하급관리를 말한다. 주 두식은 한때 진나라에서 두식으로 일했으나 무슨 일인가로 사람을 죽이고 쫓겨다니는 주()씨 성의 사내였다. 갈 곳이 없다기에 장량이 받아 몇 해째 돌봐주고 있는데 겪어볼수록 알 수 없는 구석이 많았다.

주 두식에게서 먼저 별나게 느껴지는 것은 그의 재주와 학식이었다. 누구든 그와 한 식경(食頃)만 얘기를 나누면 그가 두식이란 하찮은 벼슬과는 어울리지 않을만큼 총명하고 배운 게 많은 사람이란 것을 절로 느낄 수 있었다. 차분하면서도 어질고 너그러운 인품 또한 그랬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죽일 수 있었는지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장량은 진작부터 주 두식이 전력(前歷)도 이름도 숨기고 있음을 짐작했다. 목숨을 의탁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도움을 받으면서 기어이 자신을 숨기는 것이 서운하기도 했지만, 반드시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장량 자신도 엄한 진나라의 관리와 치밀한 법망을 피해 숨어 다닌 적이 있었을 뿐더러, 당장도 하비의 벗들뿐만 아니라 세상 모두에게 자신의 참 이름과 핏줄을 속이고 있었다.

장량의 거실로 찾아온 주 두식은 어디 먼 길이라도 떠날 사람 같은 차림이었다. 며칠 전 답답해서 세상이나 돌아본다고 나갔는데 돌아오자마자 떠날 채비라니 아무래도 이상했다. 거기다가 주 두식이 평소와 달리 이마가 방바닥에 닿도록 큰절부터 올리자 장량은 놀라기부터 먼저 했다. 장량보다 열 살 가까이 나이가 많아 비록 신세를 지고 있어도 그렇게 자신을 낮추는 법은 없었다.

아니, 주형. 갑자기 이게 무슨 일입니까?”

장량이 얼결에 맞절로 받으며 묻자 주 두식이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항()아무개 이제 떠날 날이 되어서야 지난 3년 대협(大俠)을 속인 죄를 청하오.”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항 아무개가 누구이며, 도대체 주형께서는 무얼 저에게 속이셨다는 것입니까?”

그러자 주 두식이 깊숙한 눈길로 장량을 바라보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장 대협(大俠)께서는 초나라 장수 항연(項燕)에 대해 들으신 바가 있으신지요?”

들었다 뿐이겠습니까? 병사들에게는 덕장(德將)이요, 초나라로 보아서는 충신이며, 망국(亡國)의 살아남은 신하들에게는 그 해야 할 바를 죽음으로 가르쳐준 분이시지요. 저는 일찍부터 항 장군을 스승처럼 우러르고 그 충의를 본받고자 애써 왔습니다!”

장량이 조금도 과장하는 기분 없이 그렇게 받자, 주 두식이 갑자기 두 눈으로 주르르 눈물을 쏟아내며 말했다.

그 분이 바로 이 항 아무개의 선친(先親)이외다. 내 이름은 전()이라 하고 자()는 형제의 서열을 따라 백()이라 하오.”

원래 그러하셨구려항백 대협.”

장량이 놀라움과 감격으로 그렇게 어물거리는데 항백이 소매로 눈물을 씻으며 이었다.

선친께서 왕전(王剪=초나라를 멸망시킨 진나라 장수)의 핍박을 받아 전장에서 자결하셨다는 소식이 오자, 나와 아우 중() ()는 처음 깨끗이 선친의 뒤를 따르고자 하였소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헤아려보니 그게 아니었소. 범같은 장부들이 어찌 적과 한번 싸워보지도 않고 스스로 목을 찌를 수가 있겠소? 생각 끝에 우리 삼형제는 가산(家産)을 흩어 장사들을 모으고, 병기를 마련한 뒤 칼을 짚고 일어났소. 그리고 먼저 진나라의 연횡책에 놀아나 망국을 불러들인 나라 안의 매국노들부터 처단하기 시작했소.

처음 한동안은 하상(下相)에 있는 진나라의 개들을 죽여 기세를 올리다가 나중에는 함양에서 보내온 진나라의 군사와 관리들에게까지 맞서게 되었소이다. 그때 선친의 이름을 앞세웠기에 그분께서 아직 살아 계신다는 소문이 나오게까지 되었소. 하지만 더 많은 진병(秦兵)이 밀려들고 진나라의 관부(官府)가 초나라 땅에도 자리를 잡게 되면서 처지는 바뀌었소. 진병을 등에 업은 매국노들의 반격으로 가운데 아우[]는 죽고 겨우 살아남은 막내[]와 나는 서로의 생사도 모르는 채 흩어져 오히려 살인자로 쫓기는 몸이 됐소.

그리하여 고단하게 세상을 헤매다가 흘러 들어오게 된 곳이 바로 이곳 하비였소. 장 대협께서는 나를 거두어 보살펴 주셨으니 생명의 은인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소. 은인에게는 진작부터 성과 이름이라도 바로 밝혀야 했으나 - 진나라의 법이 하도 엄하고 인심은 거칠어져 함부로 밝힐 수가 없었소. 또 그게 반드시 장 대협께 이로울 것 같지도 않아 하루하루 미루다가 이 자리까지 오고 말았소이다.”

그런데 오늘은 어찌하여? 더군다나 의관까지 갖추시고.”

실은 생사조차 모르고 헤어진 막내아우와 용케 살아남은 조카의 소식을 들었소. 막내아우 량()은 어린 조카 적()을 구해 이리저리 떠돌다가 멀리 오중(吳中)에서 자리를 잡았다 하오. 이제는 항량(項梁)이라면 늙고 젊고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알아줄 만큼 깊이 그곳에 뿌리를 내렸을 뿐만 아니라, 조카 적도 씩씩한 장부로 자라났다는 것이오. 특히 조카 적은 가운데 아우의 아들이자 이제는 우리 삼형제 모두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한점 혈육으로, 타고난 힘이 엄청날 뿐더러 무예까지 빼어났다고 했소. ()를 우()로 쓰며 벌써 나이 스물 둘인데, 오중의 소년들이 모두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우러르고 따른다는 것이오.”

그제야 장량은 왜 항백이 그렇게 나오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럼 이제 오중으로 떠나시려는 것입니까.”

그렇소이다. 하지만 그리하려고 보니 진작부터 마음을 열고 대해 주신 대협을 속인 게 새삼 마음에 걸려 이렇게 그 잘못부터 빌고 있소이다.”

그 일이라면 너무 마음에 걸려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실은 저도 항형(項兄)을 속여 온 셈이니 - 지금 형께서 알고 있는 저의 성과 이름 또한 참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원래

장량이 참으로 오랜만에 마음을 열고 자신의 원래 성과 이름을 밝히려 했다. 그때 항백이 그걸 말리듯 황급히 장량의 말허리를 잘랐다.

장 대협, 언제든 밝혀도 좋은 성과 이름이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습니다. 기껏 진나라의 개들이나 때려잡은 개백정 같은 우리와 진나라의 주인 여정(呂政)을 철퇴로 친 의사(義士)의 이름이 어찌 같을 수 있겠습니까? 박랑사(博浪沙)의 의거는 지금이라도 진나라 관원들이 알면 핏발선 눈으로 뒤쫓을 만큼 저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소이다. 그 크신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마시오. 내가 듣고 마침내 감당해 내지 못할까 두렵소이다.”

그렇게 추켜 말씀하시니 실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포악한 자를 치고 원수와 맞서는 일에 높고 낮으며 크고 작은 것이 따로 있겠습니까? 하지만 벌써 알고 계셨다고 하시니 참 이름을 숨긴 것은 서로 비긴 일로 하여 더 따지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런데 이제 오중으로 옮기시는 일은 또 깊이 헤아려 정하셨는지요?”

장량이 겸손하게 머리를 수그리며 그렇게 묻자 항백이 얼른 알아듣지 못하고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아우 분께서 오중에 자리를 잡았다 하나 그곳 역시 객지입니다. 형제분이 함께 있어 힘을 합치는데 좋을 수도 있지만, 진나라 관부의 의심을 키울 수도 있으니 반드시 좋은 일만은 아닌 듯합니다. 두 분 다 쫓기는 터라, 알아볼 사람도 배로 늘어나는 셈이니.”

내가 이곳에서 장 대협과 함께 지낸다 해도 반드시 더 나은 일은 못될 듯 싶소이다. 장 대협 또한 관부의 의심을 사서 안되기는 저와 마찬가지이니, 내 아우의 처지와 무엇이 다르겠소? 더구나 이곳 하비는 하상과 너무 가까워 지난 몇 년 줄곧 마음 졸여 왔소이다. 언제 나를 알아보는 자가 나타나 나뿐만 아니라 장 대협까지 위태롭게 만들지 모르는 일이외다. ”

그렇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이곳 하비에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아우도 장 대협 만큼은 오중을 주무르고 있는 것 같았소. 아무래도 우선은 그리로 가보는 것이 나을 듯하오.”

항백은 그 말에 이어 새삼 고마워하는 뜻을 드러내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일러주었다.

그런데 이번에 나가 돌아다니다가 회음(淮陰)에 한()나라 왕성(王姓)을 쓰는 괴짜가 하나 있다는 얘기를 들었소. 혹시 장 대협께서 찾고 계시는 이가 아닌가 해서.”

항백은 장량이 망해버린 한나라 왕실의 여러 공자들 중에서 횡양군(橫陽君) 한성(韓成)을 찾고있음을 알고 있었다. 횡양군 한성은 때가 와서 한나라를 다시 일으킬 때 임금으로 내세울 재목으로 장량이 첫 손 꼽고 있는 왕족이었다. 아우를 수소문하다가 그 한성 비슷한 느낌을 주는 사람의 얘기를 들은 항백은 말머리를 바꿀 겸해서 슬며시 그 일을 꺼냈다.

장량이 과연 긴장한 얼굴로 되물었다.

어떤 사람입니까?”

빈털터리로 저잣거리를 떠돌아다니기는 하지만, 성이 한씨(韓氏)이고 사람들에게 왕손(王孫)이라고 불린다 하였소.”

한씨 성을 쓰는 이가 한 둘이며, 왕손이라고 불리는 이가 한 둘입니까? 요즘은 아무 젊은이나 좀 높여 불러야할 때는 모두 왕손이라고 부르더군요.”

그래도 키가 크고 생김이 훤한 데다 늘 긴 칼을 차고 다닌다고 하였소. 품행이 단정치 못하고 살아가는 수완도 없어 남에게 빌붙어 지내기는 해도, 그를 범상치 않게 보는 이들 또한 적지 않다 하였소.”

그 말에 장량은 은근히 마음이 끌리는 눈치였다. 더는 말을 돌리지 않고 항백에게 물었다.

회음현(淮陰縣) 어디로 가면 그를 만날 수 있습니까?”

들은 대로라면 회음현 하향(下鄕) 마을로 가면 될 것이외다. 그곳에 남창(南昌)이란 정(=십리마다 하나씩 두었던 행정조직)이 있는데, 그 정장(亭長)이 그를 남다르게 여겨 거두어 주고 있다고 했소.”

항백은 그렇게 일러준 뒤 문득 작별을 서둘렀다. 그날 안으로 길을 떠나려는 듯했다. 하지만 그동안 들인 정이 있어 장량은 차마 그대로 보낼 수 없었다. 항백의 옷깃을 잡고 하룻밤만 더 묵어가기를 청했다.

항백 또한 마음에 품고 있는 정은 장량에 못지않아서 잡는 손길을 박정하게 뿌리치지 못했다. 항백이 길 떠나기를 하루 미루자 장량은 곧 작은 잔치를 마련하게 했다. 따로 손님을 더 부르지는 않아 크고 떠들썩한 것은 아니어도 차림만은 정성을 다한 술자리였다.

그날 밤 장량과 항백은 늦도록 술을 마셨다. 전에도 여러 번 술자리를 함께한 적이 있지만 그날 밤처럼 마음을 털어놓고 마시기는 처음이었다. 저마다 가슴 속에 품고는 있어도 함부로 드러내지 못하던 소회와 강개(慷慨)를 마음껏 풀어내고, 때로는 같이 앓고 있는 망국(亡國)의 한을 거리낌없는 비분(悲憤)으로 토해내기도 했다. 그러다가 자리를 파할 무렵 항백이 문득 정색을 하고 말했다.

장대협은 속 깊고 어질기가 실로 하늘이 낸 사람인 듯싶소. 몇 해 은혜를 입었다고 해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난 말이외다. 헛되이 나이만 먹어 앞으로 그런 기회가 올지 안 올지는 모르나, 만약 내 목숨을 던져 장대협을 구할 수 있다면 내 반드시 그리할 것이외다. 이는 사사로운 은혜갚음이 아니라 하늘의 뜻을 받들기 위해서요. 대협이 꾀하는 세상이 곧 하늘이 이루고자 하는 세상일 것이외다.”

이 장 아무개에게는 실로 과분한 말씀입니다. 항형께서는 어리석고 재주 없는 저를 너무 크게 보셨습니다. 지난 몇 해 오히려 가르치심의 은혜를 입은 것은 저였습니다. 앞으로 어느 하늘 아래에서 만나더라도 항형께서 모르는 척 지나가지만 않으신다면, 저로서는 그보다 더한 감격이 없겠습니다.”

장량은 그렇게 겸양으로 받았으나 알 수 없어라, 사람의 일이여. 그 밤으로부터 채 여섯 해를 넘기지 않아 항백은 정말로 그 다짐을 지켜, 바람 앞의 등불같이 된 장량의 목숨을 구해주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그 일은 실로 천명(天命)과도 이어져 마침내는 진()을 이을 왕조의 주인까지 바꾸어놓게 된다.

항백이 떠난 며칠 뒤 장량도 회음(淮陰)으로 급한 수레를 내었다.

장량은 항백이 일러준 사람이 바로 횡양군 한성은 아니더라도 한나라 왕실의 공자 중에 하나일 수는 있다고 보았다. 회음이라면 한나라의 유민들이 많이 몰려 살아 그 왕족들이 숨어 살 만한 땅이었다. 거기다가 항백이 떠나기 전 마지막 기억을 짜내 일러준 그 이름은 장량을 더욱 급하게 만들었다.

이제 떠올려 보니, 그 사내의 이름은 신이라고 하던가. 맞소, 한씨 성에 이름은 신, 한신(韓信)이라고 했던 것 같소.”

항백이 들은 이름이 맞고, 그게 공자 신()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그는 곧 한 양왕(襄王)의 얼손(f)이 된다. 비록 적통(嫡統)은 아니라 해도 엄연히 한나라 왕실의 혈맥인 데다가 제법 무예와 재능을 갖췄다는 소문이 있었다. 회양군 한성을 찾지 못하면 급한 대로 그를 왕으로 세울 수도 있었다.

장량은 젊은 시절에 공자 신을 만난 적이 있었다. 신은 키가 여덟 자 다섯 치에 몸집 또한 우람했다. 그런데 회음에 있다는 왕손 신 또한 키가 남달리 크고 허우대가 멀쑥하다고 하지 않는가. 이에 장량은 항백이 떠난 다음 날로 좋은 마차를 내어 회음으로 달려갔다.

장량은 먼저 회음현(淮陰縣)의 하향(下鄕)이란 마을에 있는 남창정(南昌亭)부터 찾아갔다. 항백으로부터 그곳의 정장(亭長)이 한신을 돌봐주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으나, 한신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정장은 한신을 아는 체조차 하지 않았다.

잘못 들으셨습니다. 나는 한신이란 사람을 모릅니다. 그런 이름조차 처음 듣습니다.”

남창 정장은 장량의 물음에 낯색 한번 변하지 않고 그렇게 잡아뗐다. 그러다가 장량이 이웃을 수소문하여 증인까지 세우자 겨우 털어놓았다.

실은 제가 한 이태 그 뒤를 돌보아 준 적이 있습니다. 비록 나이 스물이 넘도록 제 밥벌이조차 못하는 위인이었지만, 그 풍모와 기상이 남달라 사람의 마음을 끄는 데가 있었지요. 하지만 정장의 하찮은 녹봉으로 뒤를 돌봐준들 어디까지이겠습니까? 죽이건 밥이건 끼니나 함께하여 굶주리지나 않게 하는 게 고작이었지요. 그런데 대여섯 달 전의 일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내가 새벽에 밥을 지어 왔기에 아무 생각 없이 함께 먹고 상을 치워버렸습니다. 실은 어질지 못한 아내가 군식구인 한신을 미워하여 그리한 것이었지요. 나중에 아침을 먹으러 온 한신은 아내가 자신을 미워하여 일찍 아침밥을 지어먹은 것을 이내 알아 차렸습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되돌아서서 나가더니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내가 뒤따라 나가 아내를 대신해 잘못을 빌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더군요. 나중에 성 안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어도 인사조차 않고 의절(義絶)의 뜻을 드러냈습니다.”

정장이 자못 서운하다는 표정으로 전한 한신의 행적은 장량에게 적이 가슴 아프면서도 한편으로는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난세를 만났다지만, 하찮은 정장에게까지 밥을 빌어먹다 그 같은 욕을 당하는가.

그런데 다시 한신을 찾아 나선 장량이 수소문 끝에 두 번째로 만난 아낙은 그보다 더한 한신의 영락(零落)을 전했다. 그녀는 남의 빨래를 해주는 것으로 밥벌이를 하는 아낙들[표모] 중에 하나였는데, 자신이 마지막으로 본 한신을 이렇게 전했다.

우리 빨래터 근처에서 낚시를 하는데 늘 주린 기색이었지요. 그래서 그곳으로 빨래를 나간 한 철 내내 밥을 싸다 주었습니다. 그 또한 부끄러워하면서도 마다않고 받아먹더군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가 제법 그럴듯한 어조로 아주머니, 참으로 고맙습니다. 뒷날 반드시 크게 보답해 드리겠습니다하더군요. 하도 어이가 없어 내가 성난 얼굴로 나무라 주었지요. ‘대장부가 어찌 스스로 밥을 벌어먹지 못하고 공연히 큰소리만 하는가라고. 또 말해 주었지요. ‘내가 왕손(王孫)을 불쌍히 여겨 밥을 주었을 뿐, 어찌 보답을 바라 그리 했으리오라고. 그랬더니 몹시 무안했던지 다시는 그 물가로 낚시를 오지 않더군요. 며칠 뒤에는 나도 빨래 일이 끝나 그 물가로는 다시 가지 않게 되어 지금은 그가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실로 참혹했다. 그래서 장량은 더욱 마음먹고 한신을 찾아 하비로 데려가려고 회음 저잣거리를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어디로 갔는지 끝내 그는 찾지 못하고 또 다른 참혹한 일만 전해 듣게 되었다.

그라면 내가 본 듯하오. 이제 한 달포쯤 되었을 것이오. 성안 저잣거리를 걷고 있는데 한 떼의 불량배들이 키가 크고 희멀끔한 젊은이 하나를 에워싸고 있었소. 에워싸인 것은 분명 족하(足下)가 말하는 그 사람이었소. 입은 옷은 허름해도 칼자루에 제법 보석 장식까지 한 긴 칼을 차고 있는 게 평민의 자제는 아니더구먼. 그를 에워싸고 있던 치들은 회음 성안 뒷골목의 한다하는 건달들이었는데 그 가운데 백정[屠中] 차림을 한 녀석 하나가 나서더니, 한신인가 뭔가 하는 그 사람의 칼을 툭툭 치며 빈정거립디다. ‘네가 비록 허우대가 멀쑥하고 칼 차기를 좋아하나 네놈 속은 겁만 잔뜩 들어있을 뿐이다. 개발에 편자를 대고 원숭이에게 관을 씌운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그뿐만이 아니었소. 그 녀석은 한나라 왕실의 핏줄까지도 서슴없이 욕보이더군요. ‘너는 한()씨 성을 쓰며 은근히 옛 한()왕실의 자손임을 내세우는 모양이다만, 그게 어느 옛날 옛적 얘기냐? 천하가 모두 시황제 폐하께 돌아가고, 있는 것은 진()의 영천군(潁川郡)뿐인데, 무슨 한나라가 있고 그 왕손과 공족(公族)이 따로 있느냐? 그러니 사지가 멀쩡하면서도 제 밥조차 벌어먹지 못하고 비럭질이나 하고 다니지.’ 그러더니 그 앞길을 막아서서 작달막한 가랑이를 한껏 벌렸소이다. 그리고 이죽거리더군요. ‘네가 정녕 용기가 있다면 나를 찌르고 그렇지 못하거든 내 가랑이 밑을 지나가거라!’ 하고 말이오.”

우연히 한신이 저잣거리 불량배들에게서 모욕을 당하는 광경을 본 늙은 장돌뱅이 하나가 거기까지 말해놓고 잠시 말을 끊었다. 숨이라도 돌릴 양인 듯했으나 장량은 거기서 더 듣고 싶지가 않았다. 하지만 그대로 자리를 뜰 수가 없어 머뭇거리는 사이에 기어이 못 볼 꼴을 전해 듣고 말았다. 늙은이가 긴 한숨과 함께 얘기를 이어갔다.

그런데 한신이란 젊은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 큰 몸을 웅크려 작달막한 백정 녀석의 좁은 가랑이 사이를 비집듯 기어 지나갑디다. 내 이 저잣거리에서 비굴하고 겁 많은 치들을 본 게 한둘이 아니지만, 참으로 한심한 광경이었소. 한신이란 그 자, 아마도 나리께서 찾고 있는 공자 신()은 아닐 거요. 공자 신이라면 나도 전해들은 얘기가 있소. 그에게는 왕재(王才)가 있을 뿐더러 기개와 포부 또한 남다르다 했소. 하찮은 불량배의 행패가 무서워 그 가랑이 밑을 기어나가는 겁쟁이일 리가 없소. 왕족(王族)은커녕 시시한 공족(公族)의 곁가지[庶孼]나 잔뿌리[末裔]도 못될 것이오.”

그 말에 장량은 그 자리에서 곧장 하비로 돌아가고 싶었다. 장량이 유달리 속 좁은 사람도 아니고, 그 나이 또한 세상의 맵고 쓴 맛을 모를 만큼 어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음에 품고 있는 조국 한()왕실의 위신과 품위에 관련된 일이라 그랬는지, 한신을 느긋하게 헤아려줄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그 늙은 장돌뱅이와 헤어져 숙소로 돌아온 뒤에 다시 한 번 곰곰이 따져 보니 달리 생각할 수도 있을 듯했다.

(어쩌면 내가 너무 속되고 경솔하게 그를 헤아렸는지도 모르겠다. 이 같은 난세에는 그것도 몸을 감추고 때를 기다리는 한 좋은 방도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다음날 다시 저잣거리를 뒤지며 한신을 찾아보았으나 끝내 회음에서는 자취를 찾을 길이 없었다. 다만 세상 돌아가는 데 밝은 다른 건달한테서 횡양군 한성의 소문을 들었을 뿐이었다.

횡양군 한성이라면 대택향(大澤鄕)에서 보았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택향이라는 고을은 장량도 조금은 알고 있었다. 대택(大澤)은 흔히 치수(治水)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자연적인 큰 호수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당시 널리 알려진 대택으로는 맹제(孟諸) 거야(鉅野) 양우(楊紆) 여량(呂梁) 운몽(雲夢) 등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옛 초나라 땅에 있는 운몽대택(雲夢大澤)이 가장 이름이 높았다.

운몽대택에는 수백 리에 걸쳐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창하게 우거진 숲이 펼쳐져 있었다. 그 사이 사이에는 갈대가 무성하게 자란 수백 개의 못과 늪이 높고 낮은 언덕들과 어우러져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았다. 하지만 더러는 경관이 그림같이 아름답고 땅이 기름져 고을을 이루기도 했는데 대택 향(=12500호가 사는 마을)이 바로 그랬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 대택향은 죄를 짓고 쫓기는 사람들이 숨어사는 땅처럼 되고 말았다. 아무리 물샐 틈 없는 진나라의 법이요, 엄한 그 관리라 하지만 대택으로 숨어든 범죄자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법과 관리가 뒤쫓지 않을 때는 대택향에 나와 사람들과 어울려 살다가, 낌새가 좋지 않으면 연결된 못과 늪에 쪽배를 띄워 원시림과 갈대 숲 사이로 숨어버리면 그만이었다.

횡양군(橫陽君)께서 대택향(大澤鄕)에는 어떻게?”

장량은 마음에 짚이는 게 없지 않았으나 짐짓 그렇게 물어보았다. 그 건달이 세상 돌아가는 것은 혼자 다 안다는 듯 말했다.

세상이 자꾸 어지러워지니 옛 육국(六國) 왕족들을 보는 진나라 관리들의 눈길이 곱지 않을 것은 뻔한 이치 아니겠소? 그래서 그곳으로 피해 갔을 거외다. 아직도 어두운 구석이 남은 곳이라 일이 터지면 몸을 숨기기 좋은 땅이니까. 들리는 소문이지만, 삼진(三晋= 나라를 나눠 가진 韓 魏 趙)의 공자들이 모두 그곳 대택향에 몸을 숨기고 있다는 말도 있소.”

그 말을 듣자 장량은 다시 수레를 대택향으로 돌리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시황제 35. 천하는 진병(秦兵)들의 창칼 아래 안정되어 있는 것 같았으나, 하비 같이 큰 성안과 대택향처럼 진나라의 다스림이 미치지 못하는 곳은 많이 다른 듯했다. 시황제가 힘으로 아우른 천하는 어느새 깊이 금 가 있었고, 장량은 그걸 대택향에서보다 뚜렷하게 느껴보고 싶었다.

회음에서 대택향까지는 수레를 급하게 몰아도 하루길이 넘었다. 몸이 강건하지 못한 장량은 아예 길을 곱으로 늘여 잡고 수레를 천천히 몰게 해 대택향으로 갔다.

그런데 다음날 해하(垓下)를 지나 대택향으로 접어드는 길을 잡았을 때였다. 관도(官道)가 끝나고 소택지(沼澤地) 사이로 난 숲길 입구에 한 떼의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장량이 수레에서 내려 까닭을 묻자 기다리던 사람들 중에 하나가 말했다.

길섶 숲에 떼도둑이 들어 한둘씩 지나가다 보면 당하기 십상이오. 재물만 털리는 게 아니라 목숨까지 잃게 되니, 차라리 기다렸다 여럿이 무리를 지어 지나는 게 좋을 것이오.”

그 말에 장량은 오히려 한 가닥 숨통이라도 트인 듯했다. 물샐 틈 없는 진나라의 법도 미치지 못하고, 사납고 날랜 진나라 군사들도 지켜내지 못하는 곳이 있다는 게 기쁠 지경이었다. 느긋한 마음으로 수레를 세우게 해 더 많은 사람들이 이르기를 기다렸다.

장량보다 먼저 온 수레 한 대와 여남은 명의 행인들은 한참 뒤에 다시 수십 명의 일꾼들과 호위무사까지 몇 딸린 장사치의 수레 두 대가 더해지자 비로소 길 떠날 채비를 했다. 그러나 머릿수는 많아도 싸울 사람이 적고 병장기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은근히 걱정하는데 마음 든든해 할 일이 생겼다. 좋은 말을 타고 긴 칼을 찬 두 젊은이가 보태진 까닭이었다.

()나라 사투리를 쓰는 그 두 젊은이는 생김부터가 여느 길손들과는 달랐다. 둘 중에서 좀 더 나이든 쪽은 별로 크지 않은 키에 몸집도 우람한 편은 아니었으나 고요하면서도 깊은 눈길이나 침착한 말투는 함부로 다가갈 수 없는 위엄을 느끼게 했다. 보다 손아래로 뵈는 쪽은 헌걸찬 외모부터가 사람의 눈길을 끌었다. 여덟 자 가까운 키에 오래 단련된 근육으로 뭉친 다부진 몸매라 누가 봐도 한 솜씨 지닌 무사였다.

사람들의 짐작대로 그 두 젊은이가 예사 아닌 솜씨를 보여준 것은 그날 해질 무렵이었다. 일행이 갈대 숲 우거진 늪가 길을 지나는데 과연 소문대로 한 떼의 초적(草賊)들이 쏟아져 나와 길을 막았다. 그걸 본 두 사람은 일행에게 아무 말도 없이 말 배를 박차 달려 나가며 칼을 뽑아 들었다.

도둑 떼 가운데로 뛰어든 두 사람은 먼저 각기 한사람씩 베어 넘긴 다음에야 일행 쪽을 향해 손짓을 했다. 마치 약속하고 기다리는 대군에게 보내는 것 같이 거리낌 없고도 침착한 신호였다. 그걸 보고 힘을 얻은 일행이 목청을 돋워 외치며 내닫자 도둑 떼는 금세 기가 꺾여 오래 버텨보지도 못하고 갈대숲으로 달아나 버렸다.

일행과 함께 다가간 장량은 수레에 앉은 채로 가만히 두 젊은이를 살펴보았다. 숨결 하나 흐트러진 데 없이 앞장을 서서 가고 있는 모습이 여간 당당하지 않았다. 거기다가 조금도 뽐내는 기색이 없다는 게 더욱 장량의 마음을 끌었다.

나는 하비에 사는 장()아무개라 하오. 찾아볼 사람이 있어 대택향으로 가는 길이거니와 두 분 공자께서는 어디서 오시는 뉘시오?”

이윽고 날이 저물어 대택향 가까운 큰 마을에 묵게 되었을 때, 장량은 먼저 그 두 젊은이의 거처부터 찾아보고 물었다. 둘 중에서 보다 젊고 몸집이 우람한 쪽이 대답했다.

저는 적현(狄縣)에서 온 전영(田榮)이라 합니다. 그리고 이분은 제 종형이신데, 함자(銜字)를 담()으로 쓰고 있습니다.”

 

 

 

그러는 전영의 태도는 겸손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종형 전담(田儋)을 소개할 때는 무언가 존숭(尊崇)의 느낌을 담으려 애쓰는 듯한 데가 있었다. 장량이 다시 물었다.

산동(山東)의 적현에 사시는 두 분께서 대택향 같이 험한 곳으로 가는 까닭은 무엇이오?”

여정(呂政)이 스스로 시황제라 칭하고도, 일찍부터 동남쪽에 천자의 기()가 있다하여 이쪽을 자주 돌아본다 합니다. 하지만 여러 해 유심히 살펴도 별다른 기운이 느껴지지 않더니 근래 대택향에 의사(義士)들이 많이 모여든다 해서.”

전영이 장량에게서 무엇을 보았는지 망설임 없이 그렇게 대답했다. 그때 전담이라는 사내가 낮고도 무거운 목소리로 종제를 나무랐다.

아우, 아직은 진()의 천하이네. 너무 가볍게 입을 열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러자 전영이 새삼스레 장량을 살피다가 껄껄대며 받았다.

형님, 이 아우도 보는 눈이 있습니다. , 여기 이 장공(張公)께서 진나라 관리라도 되는 것 같습니까?”

아무래도 아우는 말을 너무 함부로 하는구나!”

전담이 그러면서 한층 더 살피는 눈길로 장량을 훑어보았다. 그 조심스러운 태도가 문득 떠오르게 하는 일이 있어 장량이 앞뒤 없이 불쑥 물었다.

공이 마침 전씨(田氏)라 하니 혹시 제()나라의 왕성(王姓)이 아니시오? 왕성이 맞다면 그 마지막 전건(田建) 왕과는 어떻게 되오?”

그러자 꾸미고 감출 줄 모르는 전영의 눈가가 불그레해지며 눈빛에 문득 불길이 일었다. 그러나 전담의 표정은 더욱 어둡게 굳어질 뿐이었다. 한참을 노려보듯 장량을 살피다가 차갑게 받았다.

적현의 한낱 촌놈이 망국의 욕된 군주와 무슨 연관이 있겠소?”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린 장량이 황급히 털어놓듯 말했다.

공께서는 박랑사(博浪沙)에서 여정(呂政)의 수레를 철퇴로 치고 달아난 자객을 아시오?”

그 자리에서 참살당한 장사 말고 달아난 자객이 하나 더 있었다고는 했습니다만 그게 누구라고는 밝혀지지 않았다 들었습니다.”

부끄럽소이다만 그게 바로 이 몸이오! , 그럼 다시 물어보아도 되겠소이까? 제왕(齊王) 전건은 공과 어떤 사이요?”

그러자 전담은 다시 한 번 장량을 한참이나 찬찬히 살피다가 비로소 털어놓았다.

제가 의사(義士)를 알아보지 못하고 함부로 의심하였습니다. 숨김없이 이르자면 제왕(齊王) ()은 바로 선친이 되오이다.”

그런데 어떻게 적현에.”

선왕(先王)께서 간신 후승(后勝=제나라의 재상으로 연횡책을 권하다가 나중에는 진나라에 항복하기를 권했다)과 빈객을 자처하는 진나라 간세(奸細)들의 농간에 넘어가 나라를 잃고 공()땅으로 끌려가실 때에 저와 종제 영(), (=田橫) 등은 가만히 몸을 빼내 달아났습니다. 그 뒤 선왕께서는 진나라의 박대로 아사(餓死)하시고, 저희들은 이리저리 숨어 떠돌다가 대여섯 해 전부터 적현에 자리 잡게 되었지요. 마음속으로는 항상 진나라에 원수를 갚고 옛 나라를 되세우는 일만 생각해 왔으나 늘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근년 들어 이곳 대택향에 한 가닥 반진(反秦)의 기운이 떠돈다기에 아우와 함께 살펴보러 온 것입니다.”

냉정하고 침착하던 전담이었으나 한번 속을 털어놓자 새삼 감정이 복받치는지 눈물까지 주르르 쏟았다. 장량도 같은 망국의 한을 앓아온 사람이라 마음이 처연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절로 콧머리가 시큰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장량과 전담, 전영 세 사람은 곧 자리를 함께 하고 술을 청해 오랜 지기(知己)처럼 어울렸다. 하지만 아직은 진의 세상이라 당장 함께 무슨 일을 꾸밀 처지는 못되었다. 이튿날 대택향으로 들 때에는 다시 남남이 되어 각기 가야할 곳으로 나뉘었다.

장량은 대택향에서 횡양군 한성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회음의 건달이 일러준 대로 횡양군은 미리부터 그리로 옮겨와 한()의 유민을 등에 업고 세력을 키운 공숙차(公叔借)란 토호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

서로 헤어진 지 이미 20년이 가까웠으나 장량의 옛 이름을 들은 횡양군 한성은 버선발로 뛰어나왔다. 장량이 그 손에 이끌려 공숙차의 객사로 들어가니 마침 그곳에는 귀한 손님 둘이 와 있었다. 환담이라도 나누고 있었던 듯, 횡양군이 그들에게 먼저 장량을 소개했다.

두 분 공자의 허락도 받지 아니하고 낯선 이를 끌어들여 죄스럽소이다. 허나 명색 한()의 왕족으로서는 결코 모르는 척 할 수 없는 집안의 사람이라 어쩔 수가 없었소. 여기 이 희공(姬公)의 조부 희개지(姬開地)는 우리 소후(昭侯) 선혜왕(宣惠王) 양애왕(襄哀王) 3대에 걸쳐 재상을 지냈고, 부친 희평(姬平)은 희왕 도혜왕의 재상을 지내셨소.”

그리고는 한번 망설이는 법도 없이 이번에는 두 사람을 장량에게 소개했다.

희공, 예를 올리시오. 저기 앉아 있는 분은 옛적 위()나라의 영릉군(寧陵君)이었던 위구(魏咎)란 공자이시오. 지금은 무도한 진나라가 서인(庶人)으로 만들어버렸으나 위나라의 왕통이 다시 이어진다면 저분이 바로 적통(嫡統)이 되오. 그 곁에 선 분은 공자 위표(魏豹)이시니 바로 영릉군의 종제가 되는 이외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장량은 전담 전영 형제에 이어 다시 위구 위표 형제를 만나게 된 것이 묘한 우연이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돌이켜 생각하니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만큼 때를 기다리는 사내들이 많고, 그들은 이제 대택향같이 진나라의 통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는 땅을 찾아 그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때도 멀지 않은 듯했는데, 특히 위구 형제로부터 그 무렵 시황제가 동군(東郡)에서 저지른 끔찍한 폭정의 소식을 들었을 때는 더욱 그랬다.

옛 위()나라 땅 동군에 하늘에서 커다란 돌이 하나 떨어졌는데, 거기에는 시황제가 죽고 땅이 나뉜다란 글이 씌어져 있었다 하오. 그 말을 들은 시황제는 사람이 새긴 것이라 보고 어사(御使)를 보내 그 부근을 샅샅이 뒤지게 했소. 그러다가 끝내 범인을 찾지 못하자 그 돌이 떨어진 땅 인근 백리에 사는 사람은 모조리 죽이고 돌은 불태워 버렸다고 하더이다.”

 

진나라는 다섯 집[오호]을 묶어 한 인()으로 삼고, 다시 다섯 인[五隣]을 묶어 1(一里)라 했다. 그리고 10리마다 하나씩 정()을 두어 정장(亭長)이란 낮은 벼슬아치에게 맡겼으니, 정은 곧 진나라에서 가장 낮은 행정단위인 셈이다.

정은 원래 관용(官用)객사로서 공무로 여행하는 관리들이 묵는 집이었다. 정장은 그 집의 책임자로서 오가는 관리들을 접대하는 게 가장 큰 일이었으나, 때로는 정에 딸린 번졸(番卒) 들을 데리고 좀도둑을 잡으러 나서기도 했다. 번졸이랬자 구도(求盜)와 정보(亭父) 둘 뿐이었지만 그래도 그들과 치안을 맡을 때는 정장도 제법 관리 같은 데가 있었다. 또 정장은 마을 사람들 사이의 작은 시비[爭訟]를 가려주는 일도 해서 그때는 이장(里長)과 비슷했다.

사수군(四水郡) 패현(沛縣) 동쪽에 사상(泗上)이란 정이 있었다. 시황제 37년 늦봄 어느 날이었다. 머지않아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큰 변괴를 앞두고 있었으나 폭풍우 전야의 고요함이라 할까, 세상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사상정(泗上亭)도 아직은 조용하기만 했다.

마을에서 유일하게 기와로 지붕을 덮고 회칠한 담장을 지닌 정()에는 그날 따라 묵고 있는 관리가 하나도 없었다. 가을걷이 뒤의 넉넉함 덕분일까, 마을에는 좀도둑도 뜸하고 시비도 일지 않았다. 이에 번졸들은 저마다 일을 핑계로 정을 빠져나가고 정장인 유계(劉季) 혼자만 남아 대껍질[竹皮]을 벗기고 있었다.

유계가 껍질을 벗기고 있는 대나무는 패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흔한 대나무가 아니었다. 구도(求盜)를 멀리 산동의 설()땅까지 보내 구해온 그곳 특산물로서, 대껍질이 질기고 유난히 반질거렸다. 유계는 그 대껍질을 가늘게 쪼갠 것[竹絲]으로 관[]을 만들어 썼는데, 나중에 천자가 된 뒤까지도 버리지 않았다고 한다. 뒷사람들이 이른 바, 유씨관(劉氏冠)이 바로 그것이었다.

당시 평민들은 머리에 관을 쓰지 않고 건()이란 천 조각으로 머리카락을 묶었다. 관은 원래 제후나 대부(大夫)들이 쓰는 엄중한 복식(服飾) 중에 하나였고, 벼슬이 없다 해도 학문하는 선비[]는 되어야 관으로 검은머리[黔首]를 가릴 수 있었다. 그런 시절에 유계가 세상에 있지도 않은 관을 만들어 쓴다는 것은 그의 특이한 개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드디어 자신을 저잣거리를 헤매는 여느 백성과 다르게 자각하기 시작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유계가 스스로 선비[]에 자리매김 하게 된 것은 그가 몇 해 전부터 맡게 된 정장(亭長) 일과 무관하지 않다. 기록에는 유계가 시험을 치러 그 자리를 따낸 것으로 되어 있으나, 정장이란 벼슬이 그 아래로는 아무도 없는 말단 중에도 말단이니 그 시험이란 게 또한 뻔했다. 임용을 작정한 현령이 겨우 문맹(文盲)이나 면한 응시자를 불러 몇 가지 훈계를 주고 다짐을 받는 정도였다.

유계가 그 자리를 얻게된 데는 소하(蕭何)의 힘이 컸다. 칼로 장난을 치다가 현청의 막일꾼인 하후영을 다치게 한 탓에, 노관 번쾌와 함께 함양(咸陽)에서 마음에도 없는 부역을 1년이나 살고 패현으로 돌아온 지 며칠 안 되어서였다. 술상을 차려놓고 유계를 부른 소하가 언제나 그러하듯 차분한 목소리로 권했다.

유형(劉兄). 이제 더는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말고 하찮더라도 구실을 맡아보시는 게 어떻겠소? 마침 사상정(泗上亭)에 정장 자리가 비었으니 뜻이 있다면 내가 한번 주선해 보리다.”

정장이라 - 그럼 나더러 일없이 오락가락 하는 관리 놈들 뒤나 닦아주라는 건가?”

유계는 처음 그렇게 빈정거리며 마다했으나 소하가 워낙 간곡하게 권해 마음을 바꾸었다. 그때 이미 유계는 소하에게서 단순한 우의(友誼) 이상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소하의 말은 언제나 빈틈없는 사려 뒤의 충언이었고, 그때 그때의 난처한 국면을 헤어나게 하는데 그치지 않은 충심 어린 보필이었다.

유계가 허락하자 소하는 그날부터 소리 소문 없이 현청(縣廳) 위아래로 손을 썼다. 그리고 며칠 뒤 시험이랄 것도 없는 형식적인 절차를 거쳐 유계를 정장 자리에 앉혀놓았다. 유계가 스스로 관을 만들어 쓰게 된 것은 그 뒤라, 하찮지만 그 벼슬이 어떤 자각을 주었음에 분명하다. 그런데 - 실로 돌이켜볼수록 알 수 없는 이가 그 모든 일을 주선한 소하였다.

소하는 패현 풍읍(豊邑) 사람으로 유계와 같은 현을 고향으로 삼고 있었지만, 그밖에는 특별하게 그들 둘을 얽고 있는 인연이 없었다. 평민의 아들로 태어난 소하는 조용하고 침착한 성품이라 남의 눈에 띄지 않았으나 일찍부터 형법과 율령(律令)에 통달했다. 자라서는 현청에서 일했는데, 출발은 주리(主吏=功曹)의 낮은 구실아치로부터였다.

소하와 유계가 처음 만난 것은 유계가 풍읍을 거쳐 패현 성안을 어슬렁거리기 시작한 뒤가 된다. 그 무렵 옥사(獄事)를 맡고 있던 소하는 우범자(虞犯者) 또는 잠재적 범인으로서 유계를 감시해야할 필요가 있었다. 입안의 혀같이 구는 노관()이라는 건달에다 수틀리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개백정 번쾌()를 좌우에 달고 패현 저잣거리를 휘젓고 다니는 유계는 수상하면서도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었다.

감시가 길어지고 조사가 세밀해질수록 유계에게서는 범법(犯法)의 혐의가 짙어졌다. 때로는 범죄의 단서가 될만한 것들까지도 소하에게 포착되었다. 실제로 유계는 가끔씩 도적질에 끼어들었고, 거기서 얻어진 것은 아무런 생업에 종사함이 없이도 언제나 무리에 둘러싸여 허풍을 떨며 지내는데 도움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유계가 범죄에 끼어드는 까닭은 대개 재물보다는 의리 때문이었다. 어울리는 무리 중에 급박한 곤궁에 빠진 자가 있어, 그를 위해 꾀해지는 도적질이면 유계는 구차히 빠지려 하지 않았다. 재물만을 노린 도적질이라 해도, 이미 그 모의를 다 알아버렸을 때 또한 마찬가지였다. 거기다가 죄를 지어도 되도록 패현은 피했고, 사람의 목숨을 해치지 않으며, 빼앗거나 훔치는 대상이 나름의 의리에 맞지 않으면 결코 가담하지 않았다.

유계가 지키는 그같은 원칙들이 주는 어떤 감동 때문이었을까, 언제부터인가 소하는 감시와 조사의 목적을 바꾸었다. 곧 죄를 입증하고 잡아들이려는 대신 보호하고 돕기 위해 유계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래잖아 소하는 은밀하면서도 빈틈없는 수호자로 바뀌었다. 그 과정에서 유계와 개별적인 친분을 쌓아가게 되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저잣거리만 떠돌던 유계의 발길을 현청으로 끌어들인 것도 소하였다. 패현의 관리 중에는 소하 말고도 유계를 수상쩍게 보는 이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나중에 소하 밑에서 옥리(獄吏)일을 보게 된 조참(曹參)같은 이가 그랬다. 어느 날 소하를 찾아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저 유계란 자. 무언가 엉뚱한 짓을 하고 다니는 게 틀림없습니다. 한번 뒤를 밟아 볼까요?”

자네 눈이 참으로 매섭지만, 이번만은 틀린 것 같네. 뒤를 밟아 잘못을 캐내고 벌주기보다는 우리가 보살피고 키워야할 인물일세. 내 말을 믿어주게.”

소하는 그렇게 조참을 한편으로 끌어들여 놓고 유계를 만나서는 넌지시 권했다.

유형, 틈이 나면 현청에도 자주 들리시오. 하찮은 아전바치라도 벼슬은 벼슬이외다. 그들과 사귀어 두어 나쁠 건 없을 거요.”

그리고는 다시 덧붙였다.

패현은 천하 서른여섯 군() 중에 하나를 다시 나눈 현()이지만 그래도 천하의 한 모퉁이이며, 그 현청 안에서 이루어지는 정사 또한 천하를 다스리는 일의 일부요. 그 다스림을 가까운데서 보아두는 것도 어쩌면 유형에게 쓸모 있는 일이 될 것이오.”

소하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유계가 정치적인 감각을 처음 익힌 곳은 아마도 그렇게 해서 드나들게 된 패현의 현청에서였을 것이다.

그 밖에도 소하가 유계를 보살펴준 일은 수없이 많다. 유계가 하후영을 다치게 했을 때 함양으로 부역을 보내 벌을 면하게 한 일 말고도, 소하는 몇 번이나 유계를 법망에서 구해주었다. ()조정의 명으로 엄중한 단속이 있을 때는 미리 귀띔을 해주었고, 꼬리가 밟혀 추적을 당하게 되면 한발 앞서 달아나 숨기를 권했다. 사상 정장이 된 것뿐만 아니라, 늦게나마 장가를 들어 자식까지 둘 수 있게 된 일 또한 어느 정도는 소하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유계의 장인인 여공(呂公)은 원래 산동 선보(單父)사람이었다. 일찍이 패현 현령과 친분이 두터웠는데, 원수진 사람이 있어 선보를 떠나 패현으로 피해왔다. 현령이 그를 반갑게 맞아 보살펴주자 패현의 호걸과 향리(鄕吏)들이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현청으로 가서 현령이 귀하게 여기는 손님에게 예물을 바치고 인사를 청했다. 현령의 마음을 사두려 함이었다.

그때 주리(主吏)인 소하가 찾아온 사람들을 맞이하고 예물 받는 일을 맡아하게 되었다. 소하는 찾아온 사람이 많아 현청 안이 소란스럽게 되자 예물의 많고 적음으로 손님들의 자리를 나누었다.

가져온 예물이 천 냥에 미치지 못하는 분들은 당하(堂下)에 앉아 주십시오.”

소하가 그렇게 말하고 손님들은 그에 따랐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사상 정장인 유계도 와 있었다. 평소 현청의 관리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온 유계는 그런 소하의 말을 전해 듣고도 터무니없는 허세를 부렸다. 늘 그렇듯 한 푼도 없는 빈털터리 주제에 이름을 쓴 쪽지 끝에다 하례금(賀禮金) 1만 냥이라 써서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 쪽지가 전해지자 여공은 놀라면서도 감격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 1만 냥이란 큰돈을 예물로 선뜻 내놓았으니 그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리에 그대로 앉아있지 못하고 달려 나가 유계를 맞아들였다.

유계가 별로 사양하는 기색 없이 방으로 들어가자 여공이 그를 윗자리에 앉히고 유심히 그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여공은 젊어서부터 관상보기를 좋아했는데, 그 무렵에는 제법 관상을 볼 줄 안다는 소리를 들었다. 한참이나 유계의 얼굴을 살피던 여공은 거기서 무엇을 보았는지 한층 공경하는 태도로 유계를 대했다.

저 유계는 언제나 큰소리만 치고 실행하는 일은 드뭅니다.”

소하는 나중에 여공이 크게 실망할까 두려워 미리 귀띔 삼아 그렇게 일러주었다. 그러나 여공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공손하기 그지없이 유계를 대접하는데, 꼭 무엇에 홀린 사람 같았다.

알 수 없기로는 유계가 그런 여공보다 더했다. 한 푼도 없으면서 1만 냥이나 내겠다고 허풍을 쳐놓고, 태연히 윗자리에 앉아 먹고 마시는 게 보기에 뻔뻔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다른 손님들이 안중에도 없다는 듯, 조금도 움츠러들거나 사양하는 기색 없이 웃고 떠드는 데는 그를 싸고도는 소하마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은 그 뒤에 있었다. 술자리가 끝나갈 무렵 여공은 눈짓으로 유계만 따로 잡아두었다. 그리고 다른 손님들이 모두 떠나기 바쁘게 유계의 소매를 끌며 은근하게 말했다.

"저는 젊어서부터 남의 관상보기를 좋아해 많은 사람의 상()을 보아왔습니다만, 귀공(貴公)만한 호상(好相)은 일찍이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부디 안으로 드시어 몇 말씀 더 드릴 수 있게 해주십시오.”

유계가 마지못한 듯 내실로 따라 들어가자 여공은 먼저 그의 아내를 불러 술상부터 새로 차려 오게 했다. 그리고 술상이 나오자 몇 순배 술잔이 돌기도 전에 문득 간곡한 목소리로 말했다.

옛말에 이르기를, 1만 가지 상 가운데서 마음의 상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萬相不如心相] 했습니다. 비록 공의 상이 좋다하나, 앞으로 한층 삼가고 힘써 마음의 상을 닦으셔야 그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청하는 바는 제게 딸이 하나 있는데, 키와 비[箕婢]를 들고 공을 따르게 하고 싶습니다. 받아주시겠습니까? 이 아이도 상()으로는 공을 해치지 않을 것입니다.”

유계로서는 뜻밖의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스스로 용의 아들이라고 우기고, 거리에 나가면 물불 안 가리고 따르는 주먹들도 몇 명 있었지만, 지난날의 그는 속절없는 장돌뱅이 건달에 지나지 않았다. 소하 덕에 겨우 정장의 자리를 얻어 검수(黔首=일반 백성) 신세를 면한 그때라고 해서 나아진 것은 별로 없었다. 벼슬자리라는 게 자신의 입에 풀칠하기도 바쁜 미관말직이요, 농군의 막내라 물려받을 재산도 없으니, 서른을 훌쩍 넘긴 그때까지 아무도 딸을 주려 하지 않았다. 멀쩡한 것은 허우대뿐 돌아볼수록 한심한 게 그때 유계의 처지였다.

그런데 비록 원수를 피해오기는 했지만, 만만찮은 인맥과 재력을 가진 여공 같은 사람이 딸을 주겠다니 어지간한 유계도 처음에는 그 말이 곧이 들리지 않았다. 겸양을 가장해 여공의 진심을 알아보려 했다.

실로 과분한 말씀입니다. 저같이 하찮은 필부(匹夫)에게 어르신의 귀한 따님이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그러자 여공은 오히려 후끈 단 얼굴로 물었다.

혹시 제 딸이 못생기고 둔하여 마다하시는 것은 아닙니까? 허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한번 보시고 정히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물리치셔도 좋습니다. 그때는 더 조르지 않겠습니다.”

그리고는 딸까지 불러들여 유계에게 떠맡기듯이 혼인을 성사시켰다. 나중에 소문으로 돈 말이지만, 그날 여공은 성난 아내와 한바탕 크게 다투었다고 한다. 남편의 처사를 못마땅히 여긴 그의 아내는 유계가 돌아가자마자 대들 듯 따지고 들었다.

당신은 예전부터 우리 딸이 비범하다 하시면서 귀인(貴人)을 골라 시집보내겠다고 하지 않으셨던가요? 그래서 패현 현령이 딸을 달라 해도 주지 않으시더니, 이제 와서 어찌 유계 같은 허풍선이에게 함부로 주어버리려 하세요?”

이 일은 아녀자가 알 바가 아니오. 내가 기다린 귀인이 바로 유계 같은 장부였소.”

여공은 그렇게 아내의 입을 막고. 며칠 뒤 맏딸을 유계에게로 시집보냈다. 뒷날 고후(高后)라 불리게 되는 여씨(呂氏)였다.

얼른 보아 이 혼인 일은 여공의 남다른 관상 능력을 신비화시키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조금만 곰곰이 헤아려 보면 실은 그의 남다른 눈썰미를 말해주는 일화임을 알 수 있다.

원수에게 쫓겨 낯선 땅으로 도망쳐온 사람이 가장 예민하게 살피는 것은 그 땅의 세력판도 내지 역학(力學)구조일 것이다. 이미 머지않은 난세를 예감한 여공은 곧 무너질 정규 권력구조 속의 현령에게서보다 감추어진 세력의 한 핵이 되는 유계에게서 자신의 일가를 지켜줄 힘을 느꼈음에 틀림이 없다. 거기다가 소하처럼 현청의 실권을 쥐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역 실정에도 밝은 관리가 유계를 대하는 태도는 그 느낌을 믿음으로까지 끌어올렸을 것이다.

실제로 그같은 여공의 눈썰미는 둘째 딸 여수(呂須)를 시집보내는 데도 활용된다. 여공은 둘째 딸까지 유계를 따라 다니는 개백정 번쾌에게 떠맡기듯 시집보내고 다시 성나 덤비는 아내에게 말했다고 한다.

유계보다야 못하지만 장상(將相)으로 제후의 열에 드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터, 부인께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여전히 관상을 내세우고 있어도 실제 그가 본 것은 번쾌의 비상한 충성심과 무용(武勇)이었을 것이다. 유계에게 바쳐지고 있는 그것들은 소하나 조참의 은밀하면서도 지극한 보살핌과 마찬가지로 때가 오면 눈부신 성취로 바뀌리라 믿었다.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늘이 정한 때[天時]를 말하며, 바람과 구름[風雲]의 조화를 기다린다. 그런데 그 때는 무엇이고 그 조화란 또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들이 내게 요구하고 있는 것은 어떤 일일까)

유계는 죽피관(竹皮冠)을 짜던 손길을 멈추고 하늘 높이 이는 뭉게구름을 바라보며 가만히 중얼거렸다. 일찍부터 스스로 용의 자식임을 떠벌리고, 허벅지에 난 일흔 두 개의 검은 점을 무슨 심상찮은 조짐이나 되듯 자랑하고 다녔지만, 기실 그의 내심은 아무 것도 믿고 있지 않았다. 남 앞에 이렇다 하게 내놓을 것이 없는 농군의 자식이라, 거기서 오는 열패감(劣敗感)이 오히려 그런 터무니없는 허세를 부리게 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별로 베푸는 것도 없는데 노관과 번쾌를 비롯해 적지 않은 무리가 따르고, 특별히 의도하지 않는데도 저잣거리에 자신의 전설이 쌓여가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좀 별난 느낌은 있지만 유계에게는 도무지 실감도 나지 않거니와, 구체적으로 그런 일들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더욱 알 길이 없었다. 당장 나쁠 것 없어 받아들이고 있을 뿐, 그것들이 뒤얽혀 빚어낼 앞날에 대해서는 아무런 예감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여공을 만나면서부터 모든 것이 조금씩 달라졌다. 여공이 말한 것은 관상이 아니라 자신에 향한 바람과 믿음의 표현이란 것을 깨닫게 된 게 그랬다. 그러고 보니 번쾌나 하후영처럼 스스로를 드러내는데 서투른 이들뿐만 아니라, 노관이나 소하 조참 같이 제법 말주변이 있는 이들이 마음속에 품고 드러내지 않는 것도 여공과 같은 바람과 믿음임에 틀림없었다. 세상이 내게 무언가를 바라고 있고. 또 내가 그것을 해내리라고 믿고 있다 - 그런 생각이 들자 알 수 없는 고양(高揚)까지 느꼈다.

거기다가 며칠 전에 들른 중양리(中陽里) 고향집에서 겪은 일은 유계에게 묘한 자신감까지 주었다. 정장의 녹봉은 두식(斗食=녹봉 1백석 이하) 중에서도 가장 낮았다. 그 녹봉으로는 따로 살림을 나기 어려워 유계는 아내와 아이들을 아버지 유태공(劉太公)에게 맡겨두고 이따금 휴가를 얻어 찾아보았다. 그런데 며칠 전에 다시 고향집을 찾으니 마침 들에서 돌아온 아내 여씨(呂氏)가 이상한 말을 했다.

제가 두 아이를 데리고 밭에서 김을 매고 있는데 어떤 늙은이가 지나가다 마실 것을 청하더군요. 보니 목마를 뿐만 아니라 주린 기색이 있어 저는 마실 것과 아울러 먹을 것까지 내주었지요. 그걸 달게 먹고 마신 늙은이가 문득 저를 쳐다보더니 한참 있다가 말했습니다. ‘부인께서는 천하에서 으뜸가는 귀인이 될 상()을 가지셨습니다. 부디 자중하시어 그 상을 이루십시오라고요. 그런데 그 말투나 태도가 왠지 그냥 해보는 소리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먼저 저는 머지않은 곳에서 뛰놀고 있는 영아(盈兒=劉盈. 뒷날의 漢 孝惠帝)를 불러 그에게 보였지요. 그러자 영아를 찬찬히 살펴본 그 늙은이가 감탄하며 부인께서 귀하게 되시는 것은 바로 이 아이 때문입니다라고 하더군요. 욕심이 난 저는 이번에는 노원(魯元=뒷날의 魯元公主)까지 불러 보였습니다. 늙은이가 다시 한참 동안이나 딸아이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역시 귀상(貴相)입니다. 오늘 이 늙은 것이 일생에 만나볼 수 있는 귀한 상을 한꺼번에 모두 뵙는 것 같습니다라고 하더군요. 정말 알 수 없는 늙은이였어요.”

그 말에 유계는 쉬고 있던 방사(旁舍=본채에 딸린 집)에서 한달음에 달려 나왔다. 장인 여공에게서 상 이야기를 들은 뒤로 유계는 야릇한 열정 같은 자기 확인의 욕구에 빠져 있었다.

그 늙은이가 어디로 갔소?”

유계가 그렇게 묻자 여씨가 들 한 모퉁이를 손가락질하며 일러주었다.

저리로 갔는데, 아직 멀리 가지는 못했을 거예요.”

이에 유계는 뛰듯이 따라가 그 늙은이를 붙잡고 자신의 관상도 봐주기를 청했다. 흠칫하고 발걸음을 멈춘 그 늙은이가 한참이나 유계를 뜯어보다가 공손히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조금 전에 부인과 아이들의 관상을 보았는데 모두 매우 귀한 상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귀함이 어디서 왔는지 궁금하더니, 이제 알겠습니다. 공은 말로 다 나타낼 수 없을 정도로 존귀하신 상입니다. 부인과 아이들의 귀함은 모두 공에게서 온 것 같습니다. 이제부터는 천하를 위해 자중하고 또 자중하십시오.”

유계는 전에 없이 섬뜩한 기분으로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비로소 두 어깨를 짓눌러 오는 천하의 무게를 느끼게 되었다. 그 늙은이의 관상을 믿었다기보다는 자기에게 특별하게 요구되는 어떤 역할이 있음을 드디어 확인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하지만 피하거나 떨쳐버리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정말 그 말씀대로라면 이렇게 일러주신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뒷날 귀하게 되면 반드시 어르신을 찾아뵙겠습니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예를 갖춰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며 그렇게 고마움을 나타냈다.

(전에는 노관이나 번쾌처럼 유별나게 가까이 지내거나, 소하나 조참처럼 무언가를 위해 애써 찾고 있던 사람들만 내게서 읽어낼 수 있었던 것들을 이제는 길 가던 사람도 알아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게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한단 말인가.....)

유계가 다시 그 늙은이를 떠올리며 그렇게 스스로에게 묻고 있는데, 갑자기 대문이 소리 나게 열리며 한나절 보이지 않던 정보(亭父)가 뛰어 들어왔다.

정장 나리, 정장 나리. 현청의 소 공조(蕭 功曹)께서 찾으십니다.”

소 공조라면 이제는 현에서 공조의 우두머리가 되어 있는 소하를 이르는 말이었다. 소하가 자신을 찾는 일이 흔치는 않았으나,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어디 있더냐?”

유계가 정보의 호들갑을 나무라는 뜻으로 목소리를 무겁게 하여 물었다. 정보가 여전히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리로 오고 계십니다. 저기 - 저기 오십니다.”

()에서 가장 낮은 관리인 정장(亭長)을 상관으로 모셔야하는 번졸(番卒)인 정보에게는 현의 주리(主吏)인 소하가 아득하게 보일 법도 했다.

청에서 일하고 있어야할 소하가 대낮에 직접 사상정(泗上亭)까지 찾아온 것은 유계에게도 조금은 별나게 느껴졌다. 관을 짜고 있던 대나무 껍질을 한쪽으로 치우고 손님 맞을 채비를 하는데, 소하가 벌써 마당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우리 공조나리께서 여기까지 어인 일이시오? 겨드랑이에 곰팡이라도 슬까봐 바람 쐬러 나오셨소?”

너무나 차분하고 빈틈없는 소하의 사람됨에 대한 반발인지 유계는 왠지 소하만 보면 짓궂어졌다. 말 한마디도 그냥 하지 않고 비꼬거나 뒤틀어 단단한 껍질 속에 든 것 같은 소하를 어떻게든 건드려보고 싶어 했다.

그런 면에서는 소하도 비슷한 데가 있었다. 한없이 크면서도 텅 비어있는 것 같은 유계의 인품을 경계해서일까, 그만 만나면 소하는 평소보다 몇 배나 깐깐하고 차가워졌다. 그날도 그랬다. 오랜만인데도 소하는 웃음기 한번 띠는 법 없이 깐깐한 목소리로 받았다.

유형과 급히 의논할 일이 있어 왔습니다. 들어가도 좋겠습니까?”

그리고 정 안으로 들어오더니 유계가 한 곁으로 쓸어놓은 대나무 껍질을 차가운 눈길로 잠시 훑어보았다. 그 따위 일에 몰두하고 있는 유계가 못마땅함을 드러내고 있는 셈이었다.

(안색을 보니 작지 아니한 일이 있는 듯 하구나. 더구나 뭔가 내게 따지고 다짐받을 일이 있는 모양이고.)

유계는 그렇게 짐작하면서도 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 소하가 차갑게 쏘아본 대나무 껍질 사이에 끼어있던 만들다 만 죽피관(竹皮冠)을 굳이 찾아냈다.

어떻소? 이만하면 나도 검수(黔首)는 면한 것 같소?”

유계가 어설퍼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그 관을 쓰고 빙글거리며 소하를 돌아보았다.

사람의 높고 낮음은 쓰고 있는 관에 달린 게 아닙니다.”

소하가 여전히 찬바람이 돌 듯한 얼굴로 그렇게 받았다. 그래도 유계는 빙글거리기를 그치지 않았다.

소도 말도 면류관(冕旒冠)만 쓰면 천자가 되는 게 아니고?”

그렇게 한 번 더 어깃장을 놓고 비로소 소하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때만 해도 탁자와 의자를 쓰던 시절이 아니었다. ()의 대청이라고 해봤자 흙봉당에 돗자리를 깔았을 뿐, 주인과 손님의 자리가 따로 만들어져 있지 않았다.

유계는 한군데 어질러져 있지 않은 곳에 소하를 앉게 하고 자신은 벽에 기대 눕듯 비스듬히 앉았다. 그 또한 무례하고 거만하다 하여 소하가 아주 못마땅해 하는 자세였다. 하지만 그때는 그런 자세도 유용했다.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지 않으려 함인지, 소하가 바로 찾아온 까닭을 밝혔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유형이 함양을 다녀와야겠습니다.”

함양으로 간다는 게 무슨 뜻인지는 유계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무슨 예감에서일까, 이제 겨우 쉰밖에 안된 시황제는 그해 들어 부쩍 자신의 능()공사를 서둘렀다. 여산(驪山)에다 살아생전의 영화를 그대로 재현한 어마어마한 무덤을 꾸미는데 수십만의 역도(役徒=인부)가 필요했다. 따라서 그 무렵 패현같이 멀리 떨어진 고을에서 유계같은 하급 관리가 함양으로 간다는 것은 바로 그 여산의 황릉(皇陵) 공사에 쓸 역도를 이끌고 간다는 뜻이었다.

역도로 끌려가는 백성들도 괴롭지만, 이끌고 가는 관원의 처지도 그들보다 나을 게 별로 없었다. 도중에 달아나는 역도가 많은데다, 기한은 촉박하고 진나라의 법은 가혹했다. 자칫하면 죄를 받아 매를 맞거나 옥에 갇혔고, 때로는 목숨까지 잃게 되었다. 잘해야 몸 성히 돌아오는 정도였는데, 그때도 오고가는 동안의 고생은 달리 호소할 데가 없는 덤이었다.

정장이 되고 난 뒤 유계에게도 몇 번이나 역도를 이끌고 함양으로 가야할 차례가 돌아왔다. 그러나 그때마다 소하가 들어 막아왔는데 이번에는 그렇게 되지 못할 듯했다. 하지만 유계는 아무 것도 모르는 척 능청스레 물었다.

함양이라니? 갑자기 내가 함양에는 왜?”

역도를 인솔해 가는 일도 정장의 소임입니다. 지금 패현의 정장들 중에는 두 번 세 번 함양을 다녀온 이도 있습니다. 더구나 이번에는 이 사상정의 역도들이 절반 넘으니 이곳 정장인 유형이 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유계가 능청 떠는 걸 아는 지 모르는 지 소하가 차근차근 사정을 털어놓았다. 그래도 유계는 말을 바로 받지 않았다.

들으니 요즘 함양길은 절반이 저승길이라던데 어찌 이리 무정하시오? 내 원래 정장 자리에 뜻이 없었음은 소형도 잘 알고 있지 않소? 게다가 처자도 기르지 못하는 녹봉도 녹봉이라고 사람을 죽을 자리로 내몬단 말이오? 차라리 정장 노릇을 걷어치울지언정 뻔히 알며 죽을 구덩이로는 들지 않을 것이오!”

그렇게 다시 어깃장을 놓았다. 소하가 고요하고 맑은 눈을 들어 한참이나 유계를 살펴보았다. 그제야 찔끔한 유계가 자신의 지나침을 난감해하고 있는데, 소하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차분함을 잃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살아있어도 죽는 것만 못한 삶이 있듯이, 죽을 곳에 오히려 살 길이 있다는 말도 있습니다. ()에 들어서는 공연히 나다니는 하찮은 관리들 뒤치다꺼리나 하다가 틈이 나면 대나무 껍질로 관이나 짜고, 정 밖으로 나가면 술집과 노름판 뒷전을 떠돌며 세월을 죽이는 게 진정으로 장부가 사는 모습일 수 있겠습니까? 어렵더라도 이번에 한번 길을 떠나 유형의 재주와 명운(命運)을 시험해보고, 아울러 세상 돌아가는 것도 차분히 살펴둠이 좋을 것입니다.”

세상이 어째서? 세상에 무슨 큰일이라도 났단 말이오?”

계가 더는 말을 비틀지 않고 솔직하게 물었다.

유형은 듣지도 못하셨습니까? 재작년에 시황제는 온 천하의 책을 불사르고, 도사와 유생(儒生) 460 여명에게 사죄(死罪)를 내려 산 채로 땅에 묻었습니다. 그리고 어진 태자 부소(扶蘇)가 그 그릇됨을 말하자, 크게 성을 내며 오히려 태자를 상군(上郡)에 있는 장군 몽염(蒙恬)에게로 내쫓아 버렸습니다.

작년에는 동군(東郡)에 살별이 떨어졌는데, 거기에 진시황이 죽고 땅이 나뉜다란 구절이 쓰여져 있었습니다. 시황제는 그게 누군가 사람이 조작한 것이라 보고 어사(御使)를 보내 철저히 캐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끝내 누구 짓인지 알 수 없자 인근 백리에 사는 백성들을 모조리 죽이고 그 돌을 불태워 없앴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시황제는 그러고도 마음이 풀리지 않았던지 박사들을 시켜 <선진인시(선진인시)>라는 것을 짓게 해 순수(巡狩)하는 곳마다 전령과 악사들로 하여금 노래 부르고 연주하게 하고 있습니다.

지난 늦가을에는 시황제의 사신이 밤중에 관동에서 화음으로 가다가 위수(渭水)가를 지나게 되었는데, 어떤 사람이 홀연히 나타나 길을 막고 기이한 벽옥(璧玉)을 내밀며 나를 대신해 호지군(滈池君)에게 갖다 주게라고 하더랍니다. 또 말하기를 금년에는 조룡(祖龍)이 죽을 걸세하고는 벽옥을 놓고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호지군이란 수신(水神)의 이름이니 수덕(水德)을 내세우고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조룡도 그렇습니다. ()에는 시작의 뜻이 있고, ()은 황제를 상징하니 곧 시황제(始皇帝)를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도 시황제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성난 소리로 말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보잘것없는 산귀신[山鬼]일 것이다. 산귀신은 겨우 한 해의 일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라고. 그리고 다시 덧붙이기를 조룡이란 사람의 조상을 가리키는 말이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중에 알아보니 그 귀신이 놓고 간 벽옥은 여러 해 전 순수 때 장강을 건너다 잃어버린 것이고, 점복(占卜)도 매우 불길하게 나왔습니다. 이에 시황제는 북하(北河)와 유중(楡中)3만 가구를 억지로 딴 곳에 옮기는 일로 액땜을 삼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움직이는 것이 길()하다 하여 금년 들어서는 시월 계축일(癸丑日)에 일찌감치 순수를 떠났습니다. 운몽(雲夢)에서 겨울을 나고 지금은 장강(長江)을 따라 떠돌고 있다는데 이 모든 것은 곧 시황제가 불안해하고 진의 조정이 흔들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소하는 평소에 꼼꼼하게 기록해둔 것을 외기나 하듯 근래 몇 해에 일어난 일과 심상치 않은 조짐들을 하나하나 짚어 나갔다. 어떤 것은 유계도 들은 적이 있는 일이었고, 어떤 것은 처음 듣는 일이었다.

하지만 귀신이니 용이니 하는 것은 그저 허황된 소문일 수도 있고, 함양이나 궁궐 안에서 벌어진 일들은 진 조정을 미워하는 이들이 꾸미거나 터무니없이 부풀려 하는 말일 수도 있지 않소? 그걸로 방금 무슨 큰일이 날 듯 걱정하는 소형이 오히려 지나친 게 아니오?”

유계도 머지않은 변화의 조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다시 소하의 속마음을 떠보기 위해 짐짓 그렇게 반문해 보았다. 소하가 별로 충동받은 기색 없이 받았다.

설령 그렇다 해도 그게 이렇게 요란한 소문이 되어 세상을 떠돈다는 게 바로 천하 풍운의 한 기미(機微)일 수 있습니다. 어떤 말이 널리 퍼져 나가는 것은, 정말로 듣고 싶고 또 꼭 남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좋소. 그렇다 칩시다. 하지만 그같은 기미와 내가 일꾼들을 데리고 함양으로 가는 게 무슨 상관이오?”

지금 유형께서 함양으로 가신다면 바로 그 기미를 몸으로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변화의 고삐를 잡고 새롭게 다가오는 세상과 슬기롭게 맞서야 합니다. 풍랑이 이른 뒤에 맞으면 그것에 내몰리게 될 뿐이지만, 스스로 나아가 맞으면 그걸 타고 더 빨리 원하는 곳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자 한동안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던 유계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알겠소. 내 소형의 말을 따르리다. 그럼 언제 떠나며, 어디 장정들을 데려가는 것이오?”

그런 게 바로 유계였다. 미심쩍은 데가 있으면 상소리로 어깃장을 놓고, 빈정거림과 놀림으로 상대의 부아를 건드리다가도, 한번 의심이 풀리고 옳다는 생각이 들면 말 잘 듣는 어린아이처럼 고분고분 그 말에 따라주었다.

풍읍(豊邑) 인근의 여러 정()에서 뽑은 300명인데, 그 중 80 명이 바로 이 사상정(泗上亭)의 장정들입니다. 떠나는 날은 정해져 있지 않지만, 4월 보름까지는 여산(驪山)에 이르라는 엄명이니 하루라도 빨리 떠나시는 게 좋을 것입니다.”

그럼 사흘 뒤에 떠나지요. 그렇게 마련을 해주시오.”

유계는 그렇게 결말짓고, 소하가 돌아가기 바쁘게 자신도 떠날 채비에 들어갔다.

유계가 패현을 떠나던 날은 볼 만했다. 그가 이끌고 갈 사람들은 비록 품삯도 받지 못하는 역도(役徒·일꾼)로 끌려가기는 하나, 그래도 죄수나 노예와는 달랐다. 제 땅에서는 저마다 하늘같은 가장이요 사랑하는 지아비며 피를 나눈 형제거나 귀하게 기른 자식이었다. 그들 300명이 먼 길 떠날 채비를 하고 현청 앞으로 모여드니 군대처럼 엄정한 대오는 없어도 자못 위의(威儀)가 있었다.

유계도 먼 길을 떠나는데다가 그들을 인솔하는 처지라 차림을 갖추다 보니 이전과 달랐다. 높은 코와 잘 생긴 수염은 나이 들며 더 짙어진 얼굴의 음영과 더불어 전보다 훨씬 성숙한 남성미로 사람의 눈길을 끌었다. 거기다가 자신이 공들여 짠 죽피관(竹皮冠)을 쓰고, 결 고운 베로 갖춰 지은 사대부 계층의 나들이옷을 걸치고 있으니 멀리서도 한눈에 가려낼 수 있을 만큼 훤칠한 장부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볼 만한 것은 그를 배웅하러 나온 패현의 유지와 호걸들이었다. 먼저 현령과 여공(呂公)을 중심으로 소하와 조참, 하후영 같은 이들이 평소 유계와 가까이 지내는 다른 향리(鄕吏)들과 함께 한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특히 자기를 칼로 찌른 유계를 덮어주느라 옥살이까지 한 적이 있는 하후영은 그때 현()의 사어(司御=말과 수레를 관장하는 관리)가 되어 있었는데, 유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게 못내 서운하다는 표정이었다.

유계를 따라 함양으로 가지 못하는 것을 한스럽게 여기는 이들로는 노관과 번쾌가 더 있었다. 그 사이 처자를 거느리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소하까지 말려 이번에는 함께 가지 못하게 된 그들은 공연히 풀이 죽어 유계를 배웅 나온 저잣바닥 건달들 속에 끼어 있었다. 그들 속에는 틈만 보이면 유계에게 맞서다가 근래에야 그 밑으로 들어온 옹치(雍齒)가 있었고, 누에치기로 살며 남의 상사(喪事)에 피리를 불어주는 주발(周勃)도 보였다.

아직 유계 밑에 들지는 않았지만 먼빛으로 흠모하고 있는 건달들도 여럿 나왔다. 그들 중에는 기신(紀信)과 주가(周苛)도 있었다. 비록 그들의 몸은 풍읍(豊邑) 인근의 농투성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나 그 마음은 이미 드넓은 세상을 향해 날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뒷날 둘 모두 유계를 위해 죽게 되는데, 어쩌면 그렇게 된 것은 그날 그들이 보낸 흠모의 눈길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웃 현에서 협객을 자처하며 평소 유계와 연결을 맺고 있던 건달들도 패현까지 배웅을 나왔다. 그 중에는 수양현(Q陽縣) 저자에서 비단 장수를 하는 관영()이란 사내가 있었다. 몸집은 작으나 말을 잘 타고 완력이 세었다. 성격이 불같고 두려움을 몰라 나중에 유계의 기장(騎將)으로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전장을 내닫게 되는데, 그 또한 그날의 배웅 때 이미 예정되어 있던 배역이었을 것이다.

그래저래 100여 명의 사내들이 저마다 크고 작은 예물을 가지고 유계와 작별하니 현청 앞의 넓은 뜰은 무슨 엄숙한 출정의 마당 같았다. 누가 보아도 한 시골 하급관리가 수백 명 일꾼을 도성의 노역장까지 데려다 주기 위해 떠나는 길 같지는 않았다. 아버지 태공(太公)이 늘 실속 없음을 걱정하고, 가깝게 지내는 소하마저 큰소리만 칠 뿐 실행하는 일이 적다고 빈정댄 유계였다. 그러나 턱없이 커서 늘 비어있는 것 같던 그 그릇은 어느새 적지 않은 사람들의 믿음과 기대로 채워져 가고 있었다.

역도로 떠나는 300명 장정들의 부모형제와 처자도 마지막 석별의 정을 나누느라 현청 앞뜰을 악머구리 끓듯 하였다. 서로 붙잡고 울고 웃으며 옷깃을 놓아줄 줄 모르는데, 유계 또한 그들을 박절히 떼어놓지 못해 출발은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날 유계와 풍읍의 장정들은 해가 중천으로 솟은 뒤에야 패현 성문을 나설 수가 있었다.

당시 역도들이 함양에 이르기까지의 숙식은 원칙으로 노숙(露宿)과 자급(自給)이었다. 게다가 돈으로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마을이 언제나 이어져 있는 것도 아니어서 장정들은 침구와 식량과 취사도구를 지니고 가야 했다. 대개 같은 동네 사람들끼리 식량과 도구를 모아 수레로 끌거나 등짐으로 번갈아 져 날라야 했는데, 그 때문에 처음부터 행군은 고달프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무겁게 지고 끌고 갈 짐이 있는 자들은 그래도 나았다. 이미 여러 해 시황제의 폭정에 시달린 뒤라 그나마 자기들이 쓸 것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끌려가는 이들이 있어 그 참상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다. 동료들에게 얻어먹기도 하고 지나는 마을에서 구걸하기도 하지만, 함께 가는 일꾼들에게도 마을 사람들에게도 그들에게 나눠줄 수 있는 게 많지 못했다.

가는 도중에 굶주려 쓰러지거나 뒤처져 비렁뱅이로 떠돌게 되는 게 그들의 운명이었다.

게다가 일껏 마음을 먹고 떠난 이들도 풍읍에서 멀어지면서 마음이 달라졌다. 고향에 남아있는 가족들이 받을 고초를 생각해 억지로 부역을 나서기는 했지만, 진나라의 기강이 흐트러져 돌아갈 날을 기약할 수 없게 된 게 딴 생각을 하게 했다. 고향에서는 부역을 떠난 것으로 알고 있어, 관리들이 가족들을 더는 괴롭히지 않을 것이라 믿고 달아날 틈만 노렸다.

유계가 이끌고 가는 장정들도 시황제 말년의 이런 저런 토목공사에 끌려가는 역도들이 빠져있는 그같은 처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풍읍의 경계를 벗어나기 전부터도 하나 둘 안 보이는 얼굴이 생기더니, 풍읍 경계를 벗어나면서부터는 눈에 띄게 장정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첫날밤을 묵고 나니 수십 명이 달아나고 없었고, 그 다음날 아침에는 이미 절반 넘게 보이지 않았다. 따라간 구도(求盜)와 정보(亭父)가 특히 유계를 따르는 젊은이 몇과 지킨다고 지켜보았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사흘째 되던 날 아침에 헤어보니 장정은 다시 전날 밤의 절반으로 줄어있었다. 아직 풍읍에서 서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늪지에서의 일이었다.

(이러다가는 여산에 이르기도 전에 일꾼들이 하나도 남지 않겠구나!)

유계는 어느 새 아흔 명도 남지 않은 장정들을 이끌고 다시 길을 재촉하면서도 암담한 느낌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함께 걸으면서 그들의 괴로운 처지를 보니, 굳이 함양까지 끌고 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을 다 보내주고 나면 이번에는 자신이 진의 엄한 법에 걸려 목을 잃게 되어 있었다.

떠날 때 그게 그리 쉬운 길이 아니리란 것쯤은 유계도 대강 알았다. 하지만 일이 그토록 절박한 지경까지 몰리게 될 줄은 전혀 짐작조차 못하였다. 거기다가 소하가 간곡히 권한 일이라 더욱 마음 느긋해져 떠났는데, 거기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으니 어지간한 유계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유계는 처음부터 깊이 있는 사유나 치밀한 논리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런 유계에게 어둡고 진지한 상념은 섬세하고 간드러진 감상만큼이나 맞지 않았다. 고약하게 되었다 - 라는 말 대신 잔뜩 찌푸린 얼굴로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특히 곁에 두고 손발처럼 부리는 정보를 불렀다.

모두 여기서 멈추라고 하고 너는 인근 마을로 가서 술을 사오너라. 사람을 데리고 가서 여기 있는 모두가 마실 만큼 넉넉히 사와야 한다.”

떠나올 때 이 사람 저 사람으로부터 받은 전별금(餞別金)으로 받은 돈을 헤어보지도 않고 한줌 덥석 집어 내밀며 유계가 그렇게 말했다. 진작부터 걱정으로 울상이 되어있던 정보가 알 수 없다는 얼굴로 유계를 쳐다보며 물었다.

술을사오라고 하셨습니까?”

그렇다. 혼자 속을 끓이고 머리를 쥐어짜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여럿이 마시면서 속을 터놓고 함께 의논해보자.”

유계가 정보의 속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듯 그렇게 대답했다. 그에게는 말로 조리있게 엮어 내지는 못해도 사물의 핵심을 한눈에 꿰뚫어보는 힘 같은 것이 있었다. 또 사람과 사물이 뒤얽히고 엉겨 빚어내는 변화의 기미들을 예민하게 읽어내는 감각도 남달랐다. 하지만 그때는 아직 그것이 자각되지 못하고 그저 본능적인 육감에 머물러 있었다.

유계가 여럿과 함께 술을 마시려고 마음먹은 것도 아직은 본능과도 같은 그 육감 때문이었다. 내 삶에서 무언가를 결단할 때가 되었고, 그 결단은 이들과 깊은 관련이 있다. 시달리고 짓밟히면서도 기댈 데 없는 이 가엾은 생명들 - 그 정도의 느낌으로 낮술을 퍼마시기 시작했다. 그런데 술이 거나해지자 미리 마음에 정해둔 바 없는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여러분. 여기서 모두 헤어집시다. 이제 더는 진나라를 위해 땀흘릴 까닭도 없거니와, 간다해도 돌아올 기약 없는 게 이 길이오. 차라리 진작에 달아나 각기 살 길을 찾는 게 낫겠소.”

유계가 장검을 짚어 건들거리는 몸을 바로 잡으며 장정들에게 그렇게 소리쳤다. 그러자 별나게 유계를 따르던 젊은이들 중에 하나가 근심스러운 듯 물었다.

저희들은 그렇게 살기를 도모한다 쳐도, 명색 나라의 녹을 먹는 정장나리께서는 어쩔 작정이십니까? 곧 뒤쫓아 올 진나라의 엄한 법과 모진 관리들을 어쩌시렵니까?”

나도 달아날 것이오. 달아나 깊은 산 속에 숨어 세상이 바뀌기를 기다릴 것이오!”

다시 그렇게 미리 생각해둔 적이 없는 말이 유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말을 하다 보니 아직은 막막하게만 느껴지는 그 망명(亡命)이 새삼스러운 무게로 가슴을 짓눌러 그의 목소리를 떨게 했다. 하지만 듣는 사람에게는 진지하게만 들리는 떨림이었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도 떠들썩하게 익어가던 술자리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유계의 말을 나름으로 해석하고, 저마다 서있는 자리에 맞춰 받아들이느라고 그런지, 한참이나 손가락 하나 까닥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마음들이 정해졌는지 수런거림과 함께 장정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먼저 혹시라도 유계의 생각이 바뀔까봐 겁을 낸 사람들이 서둘러 행장을 꾸려 떠났다. 이어 유계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죄스러워하며 떠났고, 다시 소심해서 법을 어기고 달아나기가 겁나던 사람들이 마음을 다잡아먹고 그 뒤를 따랐다. 그런데 그중 여남은 명은 끝내 떠나지 않고 지켜 섰다가 마침내 유계 앞에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저희들은 나리를 따르고자 합니다. 받아주십시오.”

유계에게는 뜻밖이었지만, 다른 사람의 공경이나 복종을 받아들일 때 미련스럽거나 뻔뻔하게 보일 만큼 당당한 게 또한 유계였다.

일어들 나시오. 이 무슨 일이오? 나는 여러분을 감당할 자신이 없소.”

그렇게 겸양을 하다가 이내 가슴을 젖히며 호탕하게 소리쳤다.

좋소. 그럼 새 날이 올 때까지 함께 고락을 나눕시다! 이 유()아무개, 비록 힘없고 어리석으나 여러분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겠소.”

그리고는 술을 더 사오게 해 그들과 함께 날이 저물도록 배짱 좋게 마셨다.

밤이 되자 유계는 거나한 중에도 숨어 지낼 곳으로 옮기려 했다. 어둠 속에서 움직여야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있고, 뒤쫓는 관리나 병사들을 따돌리기도 쉽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길이 낯설고 험해 모두가 떠나기 전에 먼저 한 사람을 보내 살펴보게 했다. 오래잖아 앞서 떠난 이가 여럿과 함께 되돌아와 말했다.

앞에 큰 뱀이 길을 막고 있어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함께 되돌아온 사람들은 낮에 일찍 길을 떠난 일꾼들이었다. 큰 뱀에게 길이 막혀 웅성거리고 있다가 유계가 보낸 사람을 만나자 함께 돌아오게 된 듯했다. 술에 취해 호기가 오를 대로 올라 있던 유계가 칼을 짚고 일어서며 소리쳤다.

장사(壯士)가 가는 길에 두려울 게 무엇이냐? 모두 나를 따르라!”

그리고는 앞장을 섰다. 함께 있던 일꾼들이 또한 술기운을 빌려 유계를 따랐다. 그러자 쫓겨온 사람들까지도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고 돌아섰다. 다만 몇 사람만이 변화를 살펴 움직일 양으로 그곳에 남았다.

바로 저깁니다. 저기 허옇게 엎드려 있는 게 그 뱀입니다.”

한참이나 밤길을 더듬어 나아가는데 먼저 와본 적이 있는 일꾼이 한곳을 가리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일러주었다. 앞장은 서도 갈수록 치솟는 취기 때문에 비척거리며 걷던 유계는 그 말에 정신을 가다듬고 앞을 보았다. 어둠 속에 무언가 허연 나무둥치 같은 게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게 보였다.

일꾼들은 그 뱀을 보자 겁에 질려 굳은 듯 멈추어 섰다. 그들 중 몇은 되돌아서 달아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에게는 뱀과 싸우는 데 쓸 만한 병장기가 거의 없었다.

그 바람에 홀로 앞서게 된 유계는 얼른 칼을 빼들고 그 뱀을 노려보았다. 뱀도 마주 노려보아 불길하면서도 쏘는 듯한 두 줄기 빛이 유계의 눈시울을 찔러왔다. 유계는 술이 확 깨는 느낌과 함께 가슴이 떨리고 오금이 저려왔다. 그대로 되돌아서서 달아나고 싶었다.

하지만 사람은 각기 하늘로부터 받은 바 명()이 있고, 때가 되면 그 명은 일상(日常)의 두꺼운 껍질을 찢고 그만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때까지만 해도 막연한 조짐일 뿐이었던 유계의 천명이 처음으로 그 유별난 빛을 뿜어낸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문득 빠르고 세찬 빗줄기처럼 유계의 가슴 속을 스쳐간 깨달음이 있었다.

(이게 바로 그 인 것 같다. 비록 머릿수는 많지 않으나 이 사람들은 나를 믿어 목숨까지 걸고 나를 따랐다. 나는 이제 저 뱀을 베어 그 믿음에 보답하고, 아울러 저들을 이끌고 다스릴 존재로서의 나를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상(非常)하지 않으면 나는 죽는다!)

유계는 자신을 내던지듯 칼과 몸이 한 덩이가 되어 뱀을 덮쳤다. 그 기세에 눌린 것일까, 뱀은 몸 한 번 움찔해보지 못하고 유계의 칼에 두 토막이 나고 말았다.

베었다! 정장나리께서 큰 배암을 죽이셨다! 이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어둠 속이지만 가까운 데서 보아 유계가 뱀을 죽인 것을 알게 된 일꾼들이 놀라 소리쳤다. 뒤돌아서 달아나려던 일꾼들이 되돌아와 감탄의 소리를 보탰다. 하지만 긴장이 풀린 유계는 갑작스레 다시 치솟는 취기 때문에 몸을 가누기가 어려웠다.

(이렇게 첫발을 내딛는 것인가. 이렇게 시작하는가.)

칼을 짚어 새삼 흔들리는 몸을 겨우 가누면서 그저 몽롱하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길이 열리자 일꾼들은 비척거리는 유계를 부축해 앞으로 나아갔다. 날이 밝기 전에 뒤쫓는 사람들이 닿지 못할 으슥한 곳에 자리를 잡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계가 워낙 취해 멀리 갈 수가 없었다. 겨우 몇 리를 가다가 끝내 곯아떨어진 유계를 나무 그늘에 뉘고 자신들도 부근에서 쉬었다.

새벽이 되자 형세를 살펴 움직이려고 처져 있던 사람들이 유계 일행을 뒤따라 잡았다. 그때 유계는 이미 술에서 깨어나 있었다. 뒤따라온 사람들이 한결같이 놀랍고도 괴이쩍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뒤따라오던 저희들은 정장나리께서 뱀을 베신 곳에서 실로 야릇한 일을 겪었습니다. 이제 와서 돌이켜봐도 알 수 없기는 매한가지 일입니다

무슨 일이 그러한가?”

유계가 그렇게 묻자 그 중에 하나가 나서서 입심 좋게 일러주었다.

저희들이 그곳에 이른 것은 한밤중이었습니다. 토막 난 큰 뱀의 시체 곁에서 한 할멈이 슬피 울고 있더군요. 허연 옷에 흰 머리칼을 흩날리며 울고 있는 할멈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아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고 물었지요. 그러자 할멈은 울먹이며 대답하기를, 어떤 사람이 자기 아들을 무참하게 죽인 까닭에 슬픔을 이기지 못해 통곡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우리 중의 하나가 다시 물었습니다. 할멈의 아들이 누구에게, 왜 죽임을 당했냐고요. 할멈이 더욱 구슬피 울며 대답했습니다. ‘내 아들은 곧 백제(白帝)의 아들이기도 하지. 금덕(金德)이 쇠하고 화덕(火德)이 성해, 그 화덕 가운데서도 새롭고 세찬 기운 한 갈래가 이곳을 지난다기에 내 아들은 큰 뱀으로 변해 그 길을 막고 있었어. 그런데 이곳을 지나간 게 바로 적제(赤帝)의 아들이었다고 하는구나. 그 적제의 아들이 한칼에 내 아들을 두 토막 내고 지나가 버렸으니, 이제 백제와 금덕의 시대는 끝나버린 셈이 아니냐? 그래서 이렇게 슬퍼하고 있는 거야.’ 저희들은 그 할멈이 공연히 허황된 소리를 해 사람을 홀리려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말로라도 혼내주려 하는데, 이런 신기한 일도 있습니까? 할멈은 한 줄기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실로 그 할멈의 말을 믿어야 할지, 아니면 저희 모두가 일시에 헛것을 본 것인지 저희로서는 얼른 가늠이 서지 않습니다.”

백제(白帝)는 고대 전설에 뱀신[사신]을 가리키며 금덕을 지닌 것으로 되어 있다. ()나라 문공(文公)이 꿈에 뱀을 보고 백제를 제사 지낸 이래로 진나라는 백제를 섬기는 것으로 되었다. 이에 대해 유계는 일찍부터 교룡(蛟龍)의 자식이며 적제(赤帝)의 아들임을 자칭해 왔다. 그렇다면 할멈의 말은 유계가 진나라를 망하게 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울 사람이란 뜻이 아닌가. 그런데도 그 말을 들은 유계는 눈 한번 깜박 않고 말했다.

그 할멈의 말은 어김없이 참말이다. 내가 교룡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적제의 아들이란 것은 풍읍(豊邑) 사람이라면 어린아이도 안다!”

그런데 사서(史書)에까지 버젓이 오른 이 신비한 일에 대해서는 두 가지 풀이가 있다. 유계에게 어떤 초월적인 소명이 있었음을 강조하기 위해 누군가가 연출한 것이란 점에서는 같지만, 그걸 실연(實演)한 게 할멈인지 뒤따라온 일꾼들인지는 의견이 갈린다.

그 할멈이 실제 나타나 그같이 말했을 것이라고 우기는 쪽은 그 배후로 유계의 하급자인 정보(亭父)나 패현에서부터 유계를 흠모해 따라간 건달들을 의심한다. 곧 그들이 아직 유계를 믿지 못하고 있는 패거리를 한편으로 끌어들이고자 인근의 할멈을 사들여 연출한 것으로 본다. 그때 그들은 유계의 신화를 증명하는 풍읍사람으로서의 역할에도 충실했을 것이다.

천명설(天命說)의 한 변형인 그 설화의 다른 풀이로는, 그게 뒤따라온 일꾼들의 자발적인 연출일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에 따르면 슬피 우는 할멈 같은 것은 원래 없었고, 다만 유계를 믿지 못해 망설이다 뒤늦게 합류하게 된 이들의 낯없음과 어색함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 때문에 그들은 며칠 함께 오면서 풍읍 사람에게서 들은 유계의 출생에 얽힌 풍설과 죽어 자빠진 뱀을 그럴싸한 신화로 엮어 유계에게 예물 삼아 바친 것이라고 본다.

진상이야 어떠하건 그 연출은 아주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한서(漢書)’는 그 효과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들이 고조에게 방금 있었던 일을 얘기하자) 고조는 마음으로 은근히 기뻐하며 자랑스레 여겼다[高祖乃心獨喜, 自負]. 고조를 따르던 모든 사람들도 (그 일로) 날이 갈수록 더욱 (고조를) 우러르게 되었다[諸從者 日益畏之].’

그리하여 수십 명으로 불어난 유계의 무리는 먼저 가까운 늪지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늪지는 달아나고 숨기에는 좋아도 먹고 입을 것을 마련하기에는 마땅치 못했다. 소택(沼澤)에 물고기가 흔하다 하나 그것만 먹고는 살 수 없고, 그렇다고 농사를 지을 만한 땅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다못해 다급할 때 지나가는 길손을 털기에도 늪지는 불리했다.

이에 유계는 대강 자리 잡기 바쁘게 패현으로 사람을 보내 소하에게 가만히 그곳의 사정을 알렸다. 소하는 낯 한번 찡그리는 법 없이 적지 않은 곡식과 돈을 모아 유계가 있는 곳으로 보냈다. 그 뒤 한()의 천하가 온전히 자리를 잡을 때까지 혼자 도맡게 될 병참(兵站)과 보급의 시작이었다.

또 유계에게 필요한 사람을 대주는 일도 소하는 그때 이미 시작했다. 평소 유계를 따르던 패현 저잣거리의 건달들에게 가만히 그가 있는 곳을 알리니, 그들이 다투어 유계를 찾아가 무리는 100명에 가깝게 불어났다. 그들이 유계를 중심으로 굳게 뭉치자 곧 인근 작은 고을의 이졸(吏卒)이나 구도(求盜)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세력을 이루었다.

하지만 어렵게 자리 잡은 그 늪지도 유계가 오래 근거 삼을 땅은 못되었다. 어느 날 노관이 드디어 가솔과 생업을 버리고 유계를 찾아와 말했다.

소하의 말이 근거지를 풍읍에서 보다 멀고 사람의 발길이 미치기 어려운 곳으로 옮기라 하네. 시황제의 순수가 이 봄에는 회계(會稽)에 미쳤는데, 이는 동남쪽에 천자의 기()가 있다는 말을 믿어서라더군. 곧 대군을 풀어 동남쪽에 뭉친 불온한 기운을 쓸어버릴 것이라 하니 사방이 트인 늪지보다는 깊은 산골짜기가 좋을 것이라 하네.”

시황제는 방술(方術)과 더불어 음양과 오행을 깊이 믿었다. 그런데 당시 음양가들의 일반적인 논의는 이러했다.

동방은 만물이 처음 나는 곳이며, 서방은 만물이 성숙하는 곳이다. 무릇 먼저 일을 시작하는 사람은 반드시 동남(東南)에서 일어나고. 실제로 열매를 거두는 곳은 언제나 서북(西北)이다. () () ()에서 진()까지는 모두 서북에서 일어나고 번성하였으되, 이제는 다르다. 새로운 천자의 기()도 마침내 번성할 땅은 서북이나, 그 시작은 동남일 것이다.’

아마도 그 같은 논의는 그 무렵 한창 새롭게 개척되는 강남의 왕성한 기운이나 동남이 대개 중원과는 이질적인 초()나라의 옛 땅이라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시황제는 그걸 믿어 진작부터 동남쪽을 날카롭게 주시하고 있었다. 특히 당장은 시황제가 몸소 대군과 함께 멀지 않은 회계에 와 있는 만큼 소하가 걱정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유계도 듣고 보니 두렵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에 무리를 이끌고 서남으로 100여리를 더 달아나 망산(芒山)과 탕산(碭山) 사이의 깊은 산골짜기에 숨었다.

 

산동(山東)의 유월 염천(炎天)이지만 평원의 나루터[平原津]에 이르니 더위가 한풀 꺾인 느낌이었다. 행렬이 나루를 건널 채비를 하는 동안 잠시 쉬며 쐬고 있는 강바람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온량거(轀輬車)안의 시황제는 달랐다.

얇은 일산(日傘)대신 두툼한 지붕을 얹고, 창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더위와 추위를 조절해, 겨울에는 따듯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수레가 바로 온량거였다. 진나라 제일의 명공(名工)들이 모여 머리를 짜내고 솜씨를 다한 것이라 한번 만들어진 뒤로 온량거는 대강 그 이름값을 해왔다. 그런데 사나흘 전부터 갑자기 수레 안이 덥고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창문을 열게 하고 사람을 불러 부채질까지 시켜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심화(心火)로구나. 병이 난 게야......)

시황제는 그렇게 짐작했다. 하지만 이내 세차게 머리를 저어 자신의 짐작을 부인했다. 갑자기 지난 가을 관동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는 산귀신[山鬼]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올해는 조룡(祖龍)이 죽을 것이네

시황제는 굳이 그 조룡을 조상으로 해석하였으나 속으로는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에는 시작[]의 뜻이 있고, ()은 임금[皇帝]을 가리키니 바로 시황제(始皇帝)가 되지 않는가.

불길한 일은 그뿐이 아니었다. 도성에 틀어박혀 있기보다는 나와서 움직이는 게 더 길하다는 말에 순수(巡狩)를 떠나, 회계산을 돌아보고 낭야(王良. )에 이르렀을 때였다. 선약(仙藥)을 구하러 간답시고 수많은 동남동녀(童男童女)와 재물을 배에 싣고 동해로 떠났던 서불(徐市)의 무리가 빈손으로 나타나 말했다.

봉래산(蓬萊山)에서 선약을 얻기는 어렵지 않으나, 그리로 가는 바닷길에 커다란 상어가 가로막아 이를 수가 없습니다. 바라건대 활과 쇠뇌를 잘 쏘는 이들을 뽑으시어 저희와 함께 보내 주옵소서. 그렇게만 해주시면흉악한 상어를 보는 즉시 연노(連弩)로 쏘아 죽이고 선약을 얻어 돌아오겠습니다.”

이태 전 노생(盧生)과 후생(侯生)의 무리가 갖은 발칙한 말을 남기고 달아난 뒤로 시황제는 그런 방사(方士)들을 믿지 않았다. 그들이 불로단(不老丹)을 만듭네, 불사약(不仕藥)을 달입네, 요란을 떨다가 제 허풍을 감당 못해 달아났듯이, 서불의 무리도 선약은 얻지 못한 체 숱한 재물과 사람만 잃고 돌아온 것을 변명하기 위해 지어낸 거짓말이라 여겼다.

그래서 엄한 벌을 내리려는데 그날 밤 시황제가 꾼 꿈이 야릇했다. 꿈에 바다귀신[海神]이라고 자처하는 괴물과 싸웠는데, 그 형상이 마치 사람 같았다. 박사(博士)들을 불러 꿈풀이[解夢]를 시켰더니 그 중에 하나가 말했다.

바다귀신은 원래 사람이 볼 수 없고, 다만 큰 물고기나 교룡(蛟龍)의 모습을 빌어 나타남의 징후를 삼습니다. 폐하께서는 제물을 갖추시고 예를 다하시어 제사를 드렸음에도 이러한 못된 귀신[惡神]이 나타났으니, 반드시 그것을 죽여 없애야만 착한 신[善神]이 폐하께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시황제는 서불의 말을 다시 믿었다. 서불로 하여금 큰 물고기를 쏠 수 있는 활과 쇠뇌를 실은 배를 다시 띄우게 하고, 자신도 물을 건널 때마다 잇따라 쏠 수 있는 강한 쇠뇌[連弩]를 몸소 잡고 큰 물고기나 교룡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낭야에서 북쪽으로 영성산(榮成山)에 이르기까지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더니 지부()에 이르는 뱃길에 들어서야 커다란 물고기들이 튀어 올랐다.

시황제가 몸소 한 마리를 쏘아 죽였지만, 그게 서불이나 박사가 말한 못된 귀신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때부터 마음은 의혹으로 더욱 어두워지고 몸도 전에 없이 무거워져 왔다.

(좋지 않다. 귀신들과 다투는 게 아니었다.......)

상수의 귀신[湘君]을 벌줄 때와 달리 그때 일을 떠올리던 시황제는 희미한 후회까지 느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더는 불길한 연상에 빠져드는 게 싫어 얼른 생각을 바꾸었다.

(허황된 귀신의 이야기나 짐을 속이고 세상을 속이는 방사들의 거짓말을 믿느니, 이치에 맞게 따져 이 심화(心火)와 신열(身熱)을 다스림이 나으리라. 돌이켜 보면, 짐에게 심화가 일게도 생겼다. 일통천하(一統天下) 혼일사해(混一四海)의 대업을 이루었건만 짐은 어찌 이리 갈수록 외롭고 쓸쓸해진단 말이냐.......)

그러면서 화려하지만 어둡고 적적하기 그지없는 온량거 안을 휘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온량거가 크다 해도 결국은 정해진 궤폭(軌幅)위에 얹힌 수레였다. 아무리 거창하게 얽고 요란하게 치장해도 원래가 많은 사람이 들 수 없는 공간이 없었다. 기껏해야 시황제의 침상 곁으로 서넛이 시립(侍立)할 수 있을 정도인데, 그나마 그 안에 들 수 있는 사람은 몇 안 되었다.

따라서 평소 수레 안에는 잔시중을 드는 환관이나 시녀 한둘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그 며칠 그들마저 성가셔 내치고 말았는데, 그날따라 수레 안이 빈 게 마치 온 천하가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시황제는 절대 권력의 절대고독을 그렇게 느낀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때 그런 시황제의 마음을 읽은 듯이나 대신들의 출입을 맡아 고하는 내시가 수레 밖에서 알렸다.

좌승상(左丞相)께서 들기를 청합니다.”

들라 이르라.”

시황제가 그렇게 허락하자 사람이 온량거에 오르는 기척에 이어 문이 열리며 좌승상 이사(李斯)가 들어왔다.

이사는 원래 초나라 상채(上蔡)땅 사람이었다. 일찍 글을 배워, 젊어서부터 고을[]에서 아전 노릇을 하면서 세상살이의 여러 국면을 관찰할 기회가 있었다. 어느 날은 관아 변소에 사는 쥐를 보았는데, 자주 드나드는 개나 사람이 놀랍고 두려워 그 더러운 먹이조차 마음 편히 먹지 못하였다. 또 넓은 곡식창고의 쥐를 보았는데 건물이 넓은데다 개나 사람이 드나들지 않아 기름지고 맛난 곡식을 먹으면서도 겁내는 것이 없었다. 이사는 문득 깨달은 바가 있어 무릎을 치며 탄식했다.

사람의 잘나고 못난 것이 저 쥐와 같으니, 그것은 자신을 어떤 곳에 두느냐에 달렸을 뿐이다. 내 어찌 작은 고을의 아전 노릇에 이 한 몸을 일생 가두어두랴!”

그리고는 그날로 아전 노릇을 치우고 순경(荀卿=荀子)을 섬기며, 그에게서 제왕을 도와 천하를 다스리는 법술(法術)을 배웠다.

여러 해를 배운 뒤에 이사는 자신이 몸둘 곳을 찾고자 세상을 돌아보았다. 모국인 초나라는 왕이 어질지 못해 자신을 제대로 써줄 것 같지 않았고, 다른 여섯 나라는 모두 작고 힘이 없어 거기서 무슨 큰일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오직 서쪽 진나라만이 자신의 포부를 펼쳐 볼만하다고 여겼다. 이에 스승 순경을 찾아보고 하직을 아뢰며 말했다.

저는 때를 얻으면 놓치지 말라는 말을 들었는데, 지금이 바로 그 때인 듯합니다. 이제 천하의 제후국들은 서로 싸우며, 진나라는 그 모두를 삼켜 천자로서 홀로 우뚝 설려고 하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벼슬 없는 선비가 바삐 서둘 때요, 오래 자신을 닦고 길러온 유세가(遊說家)에게는 다시없는 입신(立身)의 기회입니다.

낮고 천한 자리에 있으면서도 자기를 높고 귀하게 만들 계책을 펼치지 못하는 것은 짐승이 맛난 고기를 보고서도 사람이나 사냥개가 겁나 억지로 지나가는 꼴입니다. 비천함보다 더 큰 부끄러움은 없으며, 가난보다 더 깊은 슬픔은 없습니다. 오랫동안 낮고 하찮은 자리와 고달픈 처지에 놓여있으면서도, 세상을 두려워하고 그 사욕만을 탓하며 자신을 위한 계책을 펼치지 않음은 선비의 참된 마음이 아닐 것입니다. 이제 저는 서쪽으로 가서 진나라 왕을 찾아보고 유세하려고 합니다.”

이사가 진나라에 갔을 때는 마침 장양왕(莊襄王)이 죽고 시황제가 열 세 살의 나이로 즉위한 해였다. 이사는 먼저 어린 왕을 대신해 진나라의 국권을 틀어쥐고 있던 문신후(文信侯) 여불위(呂不韋)를 찾아가 그의 가신(家臣)이 되었다. 여불위는 이사의 재주를 기특히 여겨 집안에 받아들이고, 나중에는 낭중령(郎中令)에서 일하도록 해주었다. 또 몇 해 뒤에는 젊은 시황제에게 유세할 기회까지 얻어주었는데, 그때 이사는 말하였다.

지난날 목공(穆公=秦穆公)께서 패자(覇者)가 되시고서도 끝내 동쪽의 여섯 나라를 병합하지 못한 것은 힘 있는 제후들이 아직 많고 주()나라의 위세가 조금은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섯 패자가 번갈아 일어나 주나라 왕실을 떠받드는 형국이었지요. 허나 이제는 다릅니다. 효공(孝公)이래로 주나라 왕실은 쇠약해지고 제후들은 서로 병탄(倂呑)을 일삼아, 함곡관(函谷關) 동쪽에는 오직 여섯 나라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진나라가 승세를 잡고 천하를 호령한지 벌써 여섯 대가 지나, 지금 그 여섯 나라가 진나라에 복종하는 모습은 진나라의 군현(郡縣)이 그러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대저 그같은 진나라의 강대함과 대왕의 현명하심이라면, 부뚜막을 쓸 듯이 제후국을 쳐 없애 천하를 통일하고 천자(天子)의 자리에 오르는 대업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만약 그 일을 게을리 하시어 때를 놓치신다면 제후국들은 다시 강해질 뿐만 아니라 합종(合縱)의 맹약을 살려 서로 뭉치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비록 황제(黃帝)와 같은 현명함일지라도 일통천하(一統天下)의 대업은 결코 이룰 수 없습니다.”

그때 시황제의 나이 아직 스물이 차지 않았으나 그같은 이사의 말에 크게 마음이 움직였다. 이사를 장사(長史)로 삼아 승상부에 자리 잡게 함과 아울러 그의 계책을 받아들여 가만히 제후국들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이사가 내놓은 계책을 따라 먼저 진나라는 금은을 두둑이 지닌 사절(使節)과 날랜 자객들을 몰래 다른 제후국에 들여보냈다. 그 나라의 명사(名士) 가운데 뇌물로 움직일 수 있는 자는 후한 뇌물을 주어 진나라를 위해 일하게 하고, 말을 듣지 않는 자는 날카로운 칼로 찔러 죽이는 게 그 사절과 자객들이 하는 일이었다.

그밖에 이사가 다른 제후국들의 발밑을 파는 계책으로는 그 나라의 임금과 신하들을 이간시키는 것이 있었다. 시황제는 그 계책에 따라 한편으로는 솜씨 좋은 간세(奸細)들을 보내 뛰어난 장수나 어진 신하를 헐뜯는 헛소문을 퍼뜨리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능한 장군을 보내 그 헛소문을 뒷받침하는 군사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그때도 제후국 안의 의심과 혼란이 커지도록 상하에 듬뿍 뇌물이 뿌려짐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이사의 계책들은 잘 맞아 떨어져 많은 제후국의 명사들이 겉으로는 가장 저희 나라를 생각하는 체하면서 실은 진나라를 위해 연횡책(連橫策)을 우겨댔고, 더 많은 뛰어난 장수와 대신들이 진나라의 이간책에 걸려 자기 나라와 임금에게서 버림을 받았다. 모질고 독하지만, 진나라의 천하통일을 앞당기는데 그보다 더한 계책도 없었다. 이에 시황제는 이사를더욱 무거운 예로 대접하여 객경(客卿)으로 삼았다. 하지만 그 이사에게도 위태로운 때는 있었다.

()나라의 정국(鄭國)이라는 사람이 진나라로 벼슬을 살러 왔다. 정국은 수로(水路)를 여는 일과 관개(灌漑)를 돌보는데 재주가 뛰어난 사람으로 경수(h)에서 낙수(洛水)까지 3백 리에 이르는 큰 운하(運河)를 파서 농사를 위한 수로를 겸하기를 권했다. 겉으로는 진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일 같았지만, 실은 그 엄청난 공사로 진나라의 국력을 소모시켜 이웃을 침략할 수 없게 만들려는 한나라의 계책이었다.

그런데 오래잖아 그같은 한나라의 음모가 탄로 나고, 정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진나라로 와서 벼슬 살던 모든 이들이 쫓겨나게 되었다. 시황제로부터 받은 신임과 총애 탓에 진나라 토박이들의 시기를 받아오던 이사도 예외일 수 없었다. 그때 이사가 올린 글이 저 유명한 <상진황축객서(상진황축객서)> 또는 <간축객서(諫逐客書)>이다.

<........무릇 물건이 진()나라에서 나지 않았더라도 보물로 여길만한 것이 많고, 선비가 진나라에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진나라에 충성되기를 원하는 이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제 밖에서 온 (재주있는) 이들[]을 내쫓아 적국[諸侯國]에 보탬이 되게 하고, 찾아온 백성을 버려 원수의 나라에 이익이 되게 한다면, 이는 안으로는 나라를 비게 하고, 밖으로는 그 원망하는 마음을 제후들에게 옮겨 심게 하는 격이니, 나라가 위태롭지 않기를 바라도 그리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끝이 나는 그 명문(名文)은 젊은 시황제를 감동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시황제는 모든 빈객에게 내렸던 축출령(逐出令)을 취소하고 이사의 벼슬을 돌려주었다. 뿐만 아니라 도리어 이사를 전보다 더 무겁게 쓰니, 오래잖아 그의 벼슬은 구경(九卿)에 하나인 정위(庭尉)에 이르렀다.

시황제의 신임은 천하를 아우른 뒤에도 이어져 마침내 이사의 벼슬은 승상에 올랐다. 기록에 따르면, 시황제의 손꼽히는 폭정 가운데 하나인 분서갱유(焚書坑儒)도 실은 이사의 진언을 따른 것으로 되어있다. 법가(法家)다운 이단박멸(異端撲滅)의 의지를 시황제가 들어주었을 뿐이라고 한다.

근래 이사에게 있었던 일로 시황제가 전해 듣고 흐뭇해한 것은 어떤 술자리에서 이사가 스스로를 경계하며 내 쏟았다는 탄식이었다.

이사에게는 아들과 딸들이 많았는데 한결같이 높은 벼슬에 오르거나 지체가 귀해졌다. 맏아들 이유(李由)는 낙양(洛陽)을 치소(治所)로 삼는 삼천군(三川郡) 군수에 이르렀고, 나머지 아들들은 모두 공주에게 장가들어 부마(駙馬)가 되었다. 또 딸들은 한결같이 진나라의 귀공자들에게 시집가 벼슬 높고 재물 많은 대갓집 젊은 마님이 되었다. 아비 이사의 그늘이 미쳤음이라.

그런데 어느 날 삼천군수로 나가있던 이유가 휴가를 얻어 함양으로 돌아왔다. 이사는 오랜만에 돌아온 맏아들을 반겨 크게 술잔치를 열고 가까이 지내는 조정의 벼슬아치들을 몇 청했다. 그러나 황제로부터 신임 받는 승상의 위세를 겁낸 것인지 부르지도 않은 조정의 관리들까지 이사의 집으로 몰려들어, 대문간은 저자처럼 시끌벅적하고 넓은 뜰에 묶인 말과 수레는 수천이나 되었다. 그 광경을 내다본 이사가 문득 정색을 하며 탄식처럼 말했다.

아아, 나는 스승[荀卿]께서 세상 모든 사물은 지나치게 가득 차게 되는 것을 피해야한다고 말씀하신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무릇 나 이사는 상채(上蔡)땅에서 태어난 검수(黔首)의 자식이고, 촌구석 골목길에서 자란 보잘것없는 인간인데, 폐하께서 나의 못남과 모자람을 알지 못하시고 여럿 속에서 뽑으시어 오늘 이 자리에 있게 해주셨다. 지금 조정의 신하들 가운데 나보다 윗자리에 있는 이가 없으니 부귀가 지극한 곳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만물이 극도에 이르면 쇠퇴한다 하였는데, 실로 내가 어디서 멈춰야할 지를 모르겠구나!”

그같은 말은 시황제 같은 절대군주가 다스리기 거북한 이상(理想)이나 경계해야할 만큼 큰 야심도 없는 신하로서의 이사를 잘 드러낸다. 뿐만 아니라 속되지만 솔직하면서도 소박한 그 시대의 책상물림 하나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해 초 시월(진나라는 하나라 달력으로 10월을 새해로 삼았다) 시황제가 순수(巡狩)를 떠날 때, 우승상 풍거질(馮去疾)은 도성에 남기고 좌승상 이사를 데리고 나온 것은 그의 또 다른 재주 때문이었다. 남다른 수행(隨行)능력이 그랬다. 이사는 윗사람의 뜻을 잘 헤아리고 예절과 의전(儀典)에도 아울러 밝았다. 거기다가 변화에도 기민하고 적절하게 대응할 줄 알아 시황제의 움직이는 조정(朝廷)을 맡길만했다.

하지만 병심(病心)에서일까, 시황제에게는 언제나 미덥기만 하던 이사가 그날따라 곱게 보이지 않았다. 나이 예순을 넘겼으면서도 노쇠의 기색은커녕, 이제 갓 쉰이 된 자신보다 더 단단하고 꼿꼿해 뵈는 게 시황제 특유의 시기심을 불러 일으켰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좀체 목소리에 감정을 담지 않는 시황제가 누가 들어도 차게 느껴질 목소리로 물었다.

좌승상은 무슨 일로 짐을 찾았는가?”

활과 쇠뇌를 뱃전에 거는 일을 그만두도록 하셨으면 합니다.”

귀신이라도 황제의 위엄에 맞설 수는 없는 터이다. 짐은 그 활과 쇠뇌로 감히 짐의 꿈자리를 어지럽힌 요망한 물귀신을 쏘고자 하는데 좌승상은 어째서 그렇게 말하는가?”

폐하께서는 며칠 전 지부로 가는 뱃길에서 이미 그것을 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도 오히려 옥체 미령(靡寧)하시니 모두가 놀라고 두려워합니다. 차라리 태의(太醫)를 부르시옵소서.”

옥체 미령이라는 말에 시황제는 다시 울컥 짜증이 났다. 몸이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누구에게도 말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사가 알아보았다는 게 공연히 화가 났다. 평소 시황제는 자신이 어디에서 묵고 있는 가조차 남에게 알려지는 것을 꺼려했다. 함양 부근 2백리에 흩어져 있는 2백 일곱 곳의 별궁(別宮)과 이궁(離宮)을 옮겨 다니면서 자신이 머무는 곳을 함부로 발설하는 자가 있으면 가차없이 사형에 처했다.

짐은 조짐(兆朕)이거늘.....그러자 문득 이태 전의 일이 떠오르며 이사에게 직접 드러내지는 않았던 노기가 새삼 솟구쳤다.

그해 시황제가 함양 동쪽으로 조금 떨어져 있는 양산궁(梁山宮)에 행차했을 때였다. 높은 곳에서 보니 뒤따라오는 한 떼의 수레와 기마가 있었는데 의장이나 위세가 자못 당당했다. 시황제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저게 누구의 행렬이냐?”

좌승상과 그를 따르는 수레들입니다

곁에 있던 신하 하나가 그렇게 대답했다. 그 말에 시황제는 더 묻지 않았으나 언짢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한참이나 이사를 따르는 행렬을 노려보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사가 자못 위세를 부리는구나.”

그런데 그 자리에 있던 누군가가 그런 시황제의 말을 이사에게 가만히 전해주었다. 놀란 이사는 그날로 자신의 수레를 검소하게 꾸미고 따르는 수레와 기마(騎馬)를 줄였다. 며칠 뒤 그걸 알아본 시황제는 더욱 화가 났다.

이는 궁궐 안의 누군가가 감히 짐이 한 말을 이사에게 몰래 전해준 까닭이다!”

그리고 당시 곁에 있던 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하나씩 캐물었으나 아무도 자신이 그랬다고 하는 자가 없었다. 이에 모두 사형에 처했는데, 그래도 이사를 직접 벌주지는 않았다.

짐이 병들었다고 누가 말하던가?”

시황제가 엄한 얼굴로 그렇게 묻자 이사는 바로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렸다. 시침(侍寢)한 후궁이나 환관에게 들은 것도 있고, 수라간에서 알아본 식사량으로 짐작할 수도 있는 일이었으나 그들을 댈 수는 없었다.

폐하께서 환후(患候)가 있다는 뜻이 아니오라, 신이 보기에 심기 편치 않으신 듯 하와.....”“함부로 짐을 헤아리지 마라! 심기가 편치 않다는 것은 또 무슨 뜻인가?”

그러자 이사가 정색을 하며 받았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폐하께서 너무 요망한 무리의 말을 믿어 심기를 상하고 계신 듯합니다. 대저 황제란 왕들 중의 왕[王中之王]이요 귀신의 우두머리[天神之首]가 아니옵니까? 여섯 나라를 쳐 없애고 그 왕들을 모두 신하로 삼으신 것처럼, 귀신들도 폐하의 위엄으로 꾸짖고 부리시면 될 것입니다. 병마(病魔)와 요귀(妖鬼)는 엄히 벌해 쫓으시면 될 일이요, ()를 더하시려면 칠성노군(七星老君)에게 명하시면 될 일입니다. 구차하게 쇠뇌로 잡귀를 쏘는 것은 폐하의 위엄에 맞지 않은 일이옵니다.”

30년이 넘게 시황제를 모셔온 경험으로, 둘러대고 꿰어 맞추려고 하다보면 더 큰 낭패를 당한다는 걸 잘 아는 이사라 처음부터 진언하려던 말을 바로 털어놓았다. 이전 같으면 그 정도로 달랠 수 있었으나 그날은 달랐다. 시황제가 한층 목소리를 높였다.

좌승상은 있지도 않은 짐의 병을 말하더니, 이제는 수를 앞세워 감히 짐의 죽음을 얘기하는 것이냐?”

뭔가가 크게 잘못 되었구나 - 시황제로부터 뜻밖의 호통을 들으면서 이사는 등줄기로 식은땀을 흘렸다. 수많은 목숨들이 거기서 한발 잘못 디뎌 천길 나락으로 떨어진 그 벼랑 가에 자신도 드디어는 서게 되었다는 느낌이었다. 그 위기감이 순발력이 되어 입으로 쏟아졌다.

아니옵니다. 지금 저는 폐하의 병과 죽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도 한 분이시고 하늘에서도 한 분이신 폐하의 위엄과 권능을 아뢰고 있는 것이옵니다.”

거기서 잘못 응대해 어이없이 죽어간 숱한 목숨들이 곁에서 구경할 때는 그저 어리석고 미련스럽기만 했으나, 자신이 그 벼랑을 실감하고 보니 끔찍했다. 내가 이런 처지에 빠지다니. 아아, 나는 이미 멈추어서야할 곳을 지나버린 것은 아닌가.

오래 익숙했던 암시가 효과를 낸 것인지, 시황제는 이사의 진지하면서도 확신에 찬 말을 듣자 마음이 좀 가라앉는 듯했다. 뻔한 거짓말이라도 이사가 그만의 연출과 함께 정면으로 맞서오면 믿고 싶어졌다.

(그래, 아직은 더 네 말을 믿고 싶다. 아니 진실로 네 말과 같기를 바란다.)

시황제는 속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으나 표정은 엄하기만 했다. 한동안을 뱃속까지 꿰뚫어보는 듯한 눈길로 이사를 쏘아보다가 차갑게 말했다.

˝알겠노라. ()의 말을 믿겠다. 만사를 반드시 짐의 위엄과 권능에 어울리게 처결하겠다. 다만 앞으로는 경뿐만 아니라 누구도 병이나 죽음이란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일후 내 귀에 그 말이 들리면 모반의 죄를 물을 터이니 그리 알라!”

그리고 다시 덧붙였다.

활과 쇠뇌는 그대로 뱃전에 걸어 두라. 경의 말을 따라도, 귀신의 우두머리인 제()로서 하찮은 잡귀(雜鬼)를 벌하는 것인데 무엇이 놀랍고 무엇이 두렵단 말이냐? 앞으로도 큰 물고기나 교룡이 떠오르면 쏘아 그것들을 조짐으로 삼는 요망한 물귀신을 벌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의지만으로 막을 수 없는 게 병이고 죽음이다. 그날 이후 시황제 주위에서는 아무도 병과 죽음을 말하지 않았으나, 시황제의 병은 점점 깊어지고 죽음은 나날이 가까워졌다.

순수(巡狩)행렬이 하북(河北) 사구(沙丘) 부근에 이르렀을 때였다. 어지간한 시황제도 드디어 자신의 병이 깊었으며 그리 오래 살지 못할 것임을 짐작했다. ‘왜 황제인 이 나까지도 죽어야 하는가라는 분노에서 나를 죽지 않게 해준다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절대자와의 타협은 어쩌면 시황제가 방사(方士)들을 가까이 하고 그들로 하여금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선약(仙藥)을 찾게 하면서 줄곧 이어진 감정상태였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끝내 어쩔 수 없이 죽음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비로소 시황제는 후사(後嗣)를 돌아보게 되었다.

시황제에게는 스무 명이 넘는 아들이 있었는데, 맏아들이 부소(扶蘇)였다. 사람됨이 어질고 너그러웠으나, 시황제에게는 오히려 그런 부소의 인품이 못마땅했다.

진나라는 수덕(水德)에 의지하기 때문에 강인하고 엄혹하며, 모든 일을 법에 의하여 처리하고, 인의나 은덕, 관대 따위가 없어야 오덕(五德)의 명수(命數)에 맞는다고 믿었다. 따라서 시황제에게는 부소의 어짊이 나약으로만 비쳤고, 너그러움은 소심(小心)으로 여겨졌다. 거기다가 나이가 차서는 제법 치국(治國)의 식견을 보이며 간언(諫言)을 했는데, 그게 또 자주 시황제의 심기를 건들었다.

그들 부자를 멀리 갈라놓은 이태 전의 간언도 그랬다. 방사(方士)인 노생과 후생이 진시황을 비방하고 달아나자 노한 진시황은 어사(御使)를 시켜 함양 성안에 남아있는 요망한 방사와 서생(書生)의 무리를 잡아들이게 했다. 그러자 겁을 먹은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고발하여 잡혀온 자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시황제는 친히 판결에 임하여 그들 중에 죄 있다고 여겨지는 자 46십 명을 모두 산채로 땅에 묻게 했다. 그런데 그들은 거의가 방사보다는 선비라 흔히 그 일은 선비를 묻은 일[갱유]로 알려졌다. 그리하여 그 전해에 있었던 책 태우기[焚書]와 더불어 <분서갱유(焚書坑儒)>라 하여 시황제의 손꼽히는 폭정 중에 하나가 되었다. 그때 부소가 나서서 간언했다.

이제 막 천하가 평정되었으나 먼 지방의 백성들은 아직 우리 진나라에 마음으로 귀속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선비들이 <()><()> 외며 공자를 본받고 있음은 상하의 예()를 세우며, 나라의 기틀을 굳건히 하는 일이 됩니다. 그런데도 이제 폐하께서는 법을 엄히 하시고 형벌을 무겁게 키우시어 그들을 얽어매시니, 소자는 이로 인해 천하가 어지러워질까 봐 두렵습니다. 부디 굽어 살피시옵소서.”

두터운 은덕을 베푼 자신을 오히려 비방하고 달아난 방사 노생과 후생의 무리만으로도 치를 떨었던 시황제였다. 거기다가 죽어가면서도 악을 쓰며 대들던 선비들에게 마음이 상할 대로 상해 있던 시황제에게는 그런 부소의 말이 약하고 못나빠진 소리로만 들렸다. 엄하게 부소를 꾸짖은 뒤에, 상군(上郡)에서 대군을 이끌고 있던 장군 몽염(蒙恬)을 감시하란 구실로 도성에서 내쫓아 버렸다.

그 뒤 시황제가 아들 중에 총애한 것은 막내아들 호해(胡亥)였다. 겉으로 보아서는 호해도 강인하고 엄혹하지 못하기로는 부소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호해는 남달리 영민한데다 변화에 응할 줄 아는 기민함이 있었다. 그래서 일찍부터 조고에게 법령을 배우게 하였는데, 듣기로는 방대한 진의 법령을 거의 다 꿰고 있다고 했다. 이번 순수에도 아들 중에 유일하게 따라온 게 호해였다.

하지만 죽음을 앞두고 보니 역시 자신의 뒤를 이을 재목으로는 부소를 넘어서는 아들이 없었다. 특히 호해는, 비록 그 자질이 영민하다 하나 그릇의 크기는 부소에게 크게 미치지 못했고, 무엇보다도 둘째, 셋째도 아닌 막내아들이었다. 적장자(嫡長子) 계승의 원칙을 어겨가며 제위를 물려주어야 할만큼 빼어난 황제감은 아니었다.

누구 없느냐?”

황하 북쪽으로 펼쳐진 모랫벌을 느릿느릿 지나가는 온량거 안에서 신열에 들떠 있던 시황제가 문득 사람을 찾았다. 시황제의 변덕을 못 이겨 휘장 뒤에 숨어있던 환관 하나가 그림자처럼 조용히 침상 앞에 나와 섰다.

폐하, 부르셨습니까?”

중거부령(中車府令) 조고(趙高)를 불러들이고, 흰 비단과 필묵을 준비하라.”

그렇게 명한 시황제는 조고가 들기 바쁘게 그에게 일렀다.

태자 부소에게 글을 내리고자 한다. 받아쓰라.”

조고가 눈길 한번 마주침이 없이 흰 비단을 펼치고 붓을 들었다. 시황제가 자꾸 가빠오는 숨을 가다듬으며 불러나갔다. 가슴 가득 할 말이 있었으나, 길게 이어갈 수가 없었다.

<짐은 너 부소에게 짐에게서 비롯되어 만세(萬世)를 이어갈 황통(皇統)을 넘기노라. 너는 군대를 몽염에게 맡기고 함양으로 돌아와서 나의 영구를 맞아 장사지내라.>

대강 그렇게 이르고 나니 다시 숨이 가쁘고 정신이 혼미해 왔다.

이뿐입니까?”

그때 조고가 무얼 생각하고 있는지 모를 말간 눈을 들어 시황제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만하면 될 것이다. 경은 부새령(府璽令)을 겸하고 있으니 그 글에 옥새를 놓아 짐의 조서임을 명백히 하고 봉하라.”

알겠습니다.”

이번에는 더 묻는 법이 없이 조고가 대답했다. 그러는 얇은 입술에 무언가 뜻 있는 미소 같은 것이 떠올랐다. 하지만 다시 신열로 정신이 혼미해지고 있는 시황제에게는 그걸 따져볼 겨를이 없었다. 다만 의식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조고에 관한 기억과 정보들을 몽롱하게 더듬고 있을 뿐이었다.

조고는 진나라 왕성(王姓)인 조씨(趙氏)의 먼 곁가지였으나, 그 아비가 궁형(宮刑)을 받고 어미는 관비(官婢)가 되면서 비천해졌다. 특히 조고의 어미는 남편이 구실을 못하게 되자 다른 사내와 사통(私通)하여 조고 형제를 낳았다고 한다. 하지만 형제 모두 일찍이 거세를 당하고 환관이 되었으므로, 그들 형제가 은궁(隱宮)에서 태어났다는 말이 생겼다.

시황제는 조고가 비록 환관이지만 재주가 뛰어나고 아는 것이 많음을 보고 일찍부터 곁에 두고 부렸다. 조고는 법령에 밝은데다 윗사람을 모시고 아랫사람을 부리는데 아울러 능했다. 오래잖아 시황제의 신임을 얻어 중거부령(中車府令)에 올랐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야심도 만만찮아, 남몰래 막내 공자 호해와 가깝게 지내며 재주와 정성을 다해 법령과 송사(訟事) 다루는 법을 가르쳤다.

한번은 조고가 큰 죄를 지어 고발된 적이 있었다. 시황제는 장군 몽염의 아우인 몽의(蒙毅)에게 조고의 죄를 다스리게 하였다. 몽의는 감히 법을 어기지 못해 조고에게 사죄(死罪)를 내렸으나, 황제가 총애하는 자라 차마 죽이지 못하고 환적(宦籍)만 삭탈하였다.

얼마 뒤 시황제는 조고의 능력과 재주를 아껴 그나마 용서하고 조고의 관직을 되돌려 주었다. 하지만 조고는 자신을 감싸주지 않고 법대로 처결했다하여 그때부터 몽의뿐만 아니라 대를 이은 장군가(將軍家)인 몽씨(蒙氏)집안 전체에 앙심을 품었다. 몽의의 형이 되는 몽염에게도 감정이 좋지 않았음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날 시황제가 정신을 잃기 전에 본 조고의 미소도 몽씨들에 대한 해묵은 앙심과 무관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로 미루어 시황제의 글은 유조(遺詔)인 듯한데, 옥새를 놓고 봉인하라 했을 뿐 사자에게 주어 보내라 하지 않았으니 조고는 한시름 놓게 되었다.

시황제가 붕어하기 전에 조서가 상군(上郡)에 이르고, 이를 받든 부소가 함양으로 돌아와 황제로 즉위라도 하게 되는 날이면 큰일이었다. 듣기로 지난 이태 곁에서 모시면서 몽염은 장군으로서 부소의 신임을 샀고, 함양에 있는 몽의는 몽의대로 조정 대신들의 마음을 사 꼼짝없이 몽씨들의 세상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비록 옥새가 찍히고 봉인되었다 하나 아직 조서가 자기 손에 있으니 달리 틈을 노려 볼 수 있을 듯도 했다.

조고가 은근히 바란 대로 시황제는 끝내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다음 날 사구평대(沙丘平臺)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때 나이 겨우 쉰이었다. 어떤 이는 시황제의 그같은 단명(短命)을 약물중독 때문이라고 본다. 젊어서부터 불로단(不老丹)이네, 불사약이네, 하는 방사들의 말에 속아 함부로 써온 약물에는 수은이나 비소(砒素)같은 중금속과 독극물이 섞여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렇게 갑작스레 시황제가 죽자 전날 유조를 남겼다는 사실조차 아는 사람은 조고뿐이었다. 거기다가 평소 그 거동을 은밀히 해온 탓에 시황제의 죽음을 아는 사람조차도 다섯 손가락을 넘지 않았다. 공자 호해와 승상 이사, 그리고 중거부령 조고에다 평소 온량거 안에서 시황제를 모시던 환관 두엇이 고작이었다.

이사는 시황제가 도성을 떠나 천하를 돌아보던 중에 죽었고, 또 정식으로 태자를 책봉한 적이 없음을 걱정하여 우선은 그 죽음을 백관들과 장졸들로부터 숨기기로 했다. 유해를 온량거 안에 놓아둔 채로 백관들이 정사를 아뢰고 식사를 올리기를 전과 다름없이 하게 했다. 백관들에게는 유해를 모시고 있는 환관이 황제의 명을 전하는 시늉을 하고, 결재는 조고와 이사가 머리를 맞대고 앉아 황제를 대신했다.

그같은 대처는 승상인 이사로서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으나 조고에게는 못된 꾀를 펼칠 틈을 준 꼴이 되었다. 시황제의 죽음이 밖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입막음을 하기 바쁘게 조고는 옥새가 찍힌 시황제의 유조를 들고 호해를 찾아가 말하였다.

황제께서 붕어하셨지만 여러 공자들 중 누구에게 제위를 넘기신다는 조서가 없고 오직 맏이 되시는 부소 공자에게만 글을 남기셨습니다. 부소 공자께서 돌아오시면 바로 선황(先皇)의 적장자(嫡長子)가 되시니 곧 제위에 오르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되면 막내인 공자께서는 한치의 땅도 가지실 수 없을 것인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연하지요. 내가 듣건대, 유능한 군주는 신하를 잘 알고, 현명한 아버지는 아들을 잘 안다고 하였소. 선황께서 붕어(崩御)하실 때까지 아무도 제후로 봉하시지 않으셨으니 이 몸 같은 말자(末子)가 땅한 치 없는 게 당연하지 않겠소?”

그때까지만 해도 시황제의 착한 막내였던 호해는 알 수 없다는 눈길로 조고를 보며 그렇게 받았다. 조고가 한층 더 목소리를 깔며 말했다.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제 천하를 다스릴 큰 권한을 잡는 일은 공자님과 승상 이사, 그리고 저에게 달렸으니 도모하기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남을 신하로 삼는 것과 남의 신하가 되는 것, 또 남을 억누르고 다스리는 일과 남에게 억눌리고 다스림 받는 일이 어찌 같을 수 있겠습니까?”

그 말에 호해가 놀란 표정으로 두 손까지 내저으며 소리쳤다.

형을 가로막고 아우가 나서는 것은 불의이며, (, 곧 부소에게) 죽을까 두려워하여 선황의 조서를 받들지 않는 것은 불효외다. 또 재주가 얕고 능력이 뒤지면서 억지로 남의 공로를 빼앗는 것이야말로 참된 무능이 될 것이오. 이 세 가지는 사람과 하늘의 도리에 아울러 어긋나는 일이라, 천하가 복종하지 않을 것이고, 나아가서는 자신의 몸까지 위태롭게 될 것이외다. 어디 그뿐이겠소? 끝내는 사직(社稷)마저 성하게 받들지 못하게 될 것이오.”

그 말은 호해가 원래 지녔던 식견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끝내 그걸 지켜내지 못하고 조고의 꾀임에 넘어간 뒤의 자신이 겪을 앞일까지 자못 밝게 예언하고 있기도 하다.

호해가 뜻밖에도 고분고분 따라주지 않자 조고는 속으로 애가 탔다. 법령과 옥률(獄律)을 가르쳐준 스승으로서의 권위까지 은근히 내세우며 호해를 달랬다.

제가 듣건대, 탕왕(湯王)은 그 임금인 하()나라의 걸왕(桀王)을 죽이고 은()나라를 세웠으며, 무왕(武王)은 임금으로 섬기던 은나라 주왕(紂王)을 죽이고 주()나라를 세웠지만, 천하는 오히려 그들을 의롭다 여기며 칭송하고, 아무도 그 불충(不忠)을 나무라지 않습니다. 또 위()나라 임금[무공]은 자기 아버지를 죽였지만(실은 형을 죽임) 백성들은 그 덕을 받아들였고, 공자(孔子)도 그 일을 적으면서 불효라고 꾸짖지 않았습니다.

대저 큰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작은 일에 얽매이어서는 아니 되며, 큰 덕이 있는 사람은 천하를 위해 일하기를 사양해서는 안 됩니다. 게다가 마을마다 제각기 예절이 다르고, 벼슬아치마다 할 일이 따로 있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작은 일을 돌아보다 큰일을 잊으면 나중에 반드시 그 때문에 해를 당할 것이며, 결단을 내려 과감히 행하면 귀신도 피해가서 반드시 공을 이루게 된다 합니다. 공자(公子)께서는 부디 굳게 뜻을 세우시어 이일을 결단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호해도 마음이 조금 움직였는지 한숨과 더불어 슬며시 물어왔다.

하지만 승상이 뜻을 같이 해주겠소?”

따르게 해야지요.”

아직 선황께서 붕어하신 것도 모두에게 알리지 않았고, 장례도 치르지 않았는데, 어찌 이런 일을 가지고 승상을 달랜단 말이오?”

이사만 동의해준다면 조고의 뜻을 따르겠다는 말이었다. 그제야 힘을 얻은 조고가 자신 있다는 듯 그러잖아도 쇳소리 섞인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니까 더욱 서둘러야지요. 때가 때인 지라 일을 꾀할 시간이 너무 촉박합니다. 양식을 지고 말을 채찍질해 밤낮으로 달려도 때맞추어 닿을까 걱정일 만큼 크고 급박한 일이 앞에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공자께서 어서 결단을 내려 주십시오.”

그때는 이미 호해도 마음을 정한 뒤였다.

나는 일찍이 중거부령(中車府令)에게서 여러 가지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요. 이번에도 가르침에 따르겠소!”

그렇게 조고의 음모를 받아들였다. 결국은 그게 호해의 됨됨이였고, 짧게 끝날 진()제국의 명운(命運)이었다. 호해의 동의를 얻어내자 조고도 서둘렀다.

어서 빨리 승상을 끌어들이지 못하면 이일은 성공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신이 공자를 위해 승상을 만나보겠습니다.”

그리고는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 바로 이사에게 달려갔다.

황제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부소 공자에게 글을 남기셨는데, 거기에 따르면 그를 함양으로 불러 선제의 장례를 치르게 하고 후사(後嗣)로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아직 그 글은 부소 공자에게 보내지지 않았으며, 지금은 황제께서 붕어하신 것조차 아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특히 그 글과 옥새는 모두 호해 공자가 가지고 있고, 대통(大統)을 정하는 일은 군후(君侯·승상을 높여 부름)와 저에게 달려있을 뿐입니다. 군후께서는 장차 이 일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조고가 좌우를 물리친 뒤 이사에게 그렇게 묻자 이사가 허옇게 질린 얼굴로 대답했다.

"이 무슨 말씀이시오? 대통을 정하는 일이 우리 두 사람 손에 달렸다니 될 법이나 한 일이오? 경은 어찌하여 나라를 망칠 말씀을 그리 함부로 하시오? 그 일은 결코 신하로서 사사로이 논의할 일이 아니오.”

엄격한 법가(法家)로서 일생을 살아온 이사로서는 당연한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조고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차가운 눈빛으로 가만히 이사를 쏘아보다가 뭔가를 일깨워주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스스로 헤아리시기에 승상께서는 대장군 몽염과 견주어 어느 쪽이 더 재능이 낫다고 보십니까? 이제까지 세운 공은 몽염과 견주어 어느 편이 많습니까? 세운 계책이 원대할 뿐만 아니라 실패가 적었던 것은 어느 쪽입니까? 천하의 원한을 사고 미움을 받은 일은 어느 쪽이 더 적습니까? 선황의 맏이인 부소와 사귄 지는 누가 더 오래며, 그로부터 신임을 더 받는 쪽은 누굽니까?”

조고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이사에게는 송곳으로 고막을 찌르는 듯한 물음이었다. 이사는 한참이나 그 물음을 되씹어 보다가 깊은 한숨과 함께 되물었다.

왜 갑자기 그걸 물으시오? 나는 그 다섯 가지 모두 몽염 장군보다 못하오.”

그러자 조고가 굳이 달랜다는 느낌조차 주지 않는 어조로 받았다.

저는 비록 하찮은 환관에 지나지 않지만 다행히 법령을 문서로 작성하는 관리[刀筆吏]가 되어 진나라 조정에서 일한 지 벌써 스무 해가 지났습니다. 그 동안 위세 높은 승상이나 공신들은 많이 보았으나, 두 대[二代]를 이어가는 이는 보지 못했으며, 끝내는 파면되거나 형벌을 받아 모두 망하고 말았습니다. 또 스무 명이 넘는 선제(先帝)의 공자들은 승상께서도 모두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맏이인 부소는 살핌이 밝으면서도 강직해서 자신이 쓸 사람은 자신이 뽑을 터, 만약 그가 황제로 즉위하면 반드시 오래 친해왔고 깊이 믿는 몽염을 승상으로 세울 것입니다. 그리되면 승상께서는 결국 통후(通侯=列侯)의 인수(印綬)를 빼앗기고 쓸쓸히 낙향(落鄕)해야 하니 그 일을 어쩌시겠습니까?

그런데 공자 호해는 다릅니다. 제가 칙명을 받들어 공자에게 글을 가르치고 법사(法事)를 익히게 한지 여러 해가 됩니다만, 아직까지 이렇다할 잘못을 저지르신 적이 없습니다. 또 공자는 인자하고 독실하며, 재물을 가볍게 보고 인재를 무겁게 여깁니다. 마음속으로는 사물을 밝게 분별하고 계시면서도 말씀은 겸손하시고, 예절을 다하여 선비를 존중하실 줄도 압니다.

진나라의 여러 공자들 중에서 아직 이만한 분이 없으니, 후사로 내세워 볼만하지 않습니까? 승상께서는 다시 한 번 곰곰이 헤아려보십시오

하지만 시황제 밑에서 30년이 넘도록 벼슬살이를 하는 동안 골수에 박히다시피 한 법가의 정신은 쉽게 조고의 변칙과 일탈을 받아들일 수 가 없었다. 이사는 마음이 흔들릴수록 더 강경해져 꾸짖듯 소리쳤다.

그대는 그대의 자리로 돌아가라. 이 몸은 군주의 조칙을 받들어 하늘의 뜻을 이룰 뿐이다. 어찌 그같이 큰일을 우리가 함부로 정할 수 있단 말인가!”

평안함이 위태로움일 수도 있고, 위태로움이 평안함일 수도 있습니다. 제 한 몸의 평안함과 위태로움조차 마음대로 정할 수 없다면 어찌 어질고 밝다 이를 수 있겠습니까?”

조고가 이번에는 달래는 투로 은근하게 말했다. 이사는 그게 더 섬뜩해 자르는 듯한 말투로 받았다.

이 몸 이사는 상채(上蔡)의 한 평민이었으나, 다행히 선제께서 여럿 사이에서 뽑으시어 승상으로 삼고 통후(通侯)에 봉하시니 자손들까지 모두 높은 벼슬과 무거운 봉록을 받게 되었소. 그럼으로써 나라의 존망과 안위를 이 몸에게 맡기신 것인데, 내 어찌 그 뜻을 저버린단 말이오? 대저 충신은 죽음을 피하려 요행을 바라지 않고, 효자는 삼가고 애써 그 몸을 위태로운 곳에 두지 않으며, 남의 신하된 자는 각기 그 직분을 지킬 따름이오. 다시는 어지러운 말로 나로 하여금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게 하지 마시오!”

"대체로 성인(聖人)은 무엇에 얽매임 없이 해야 할 바를 하며, 사정이 변하면 시의(時宜)에 따르고, 끝을 보면 처음을 알며, 겨눈 곳을 보아 그 이를 곳을 헤아린다 하였습니다. 사물이 원래 이러하거늘, 굳게 정하여져 변함이 없는 게[固定不變]이 어디 있겠습니까? 바야흐로 천명은 공자 호해에게 이르렀으니 저는 그 걸 받들고자 합니다.

무릇 밖에서 안을 다스리려 하는 것을 ()’이라 하고, 아래에서 위를 억누르려 하는 것을 ()’이라 합니다. 이제 와서 부소를 태자로 맞아 후사를 잇게 하는 것은 바로 혹()이요 적()입니다. 그러나 공자 호해를 세우는 것은, 가을에 서리가 내리면 풀과 꽃이 시들고, 봄이 되어 물이 녹아 흐르면 만물이 일어나는 것과 같이 반드시 그러해야할 이치를 따르는 것이 됩니다. 승상께서는 어찌 이리도 결단이 늦으십니까?”

내가 듣건대, ()나라는 함부로 태자[申生]를 바꾸었다가 내리 세 임금[獻公,惠公,文公]이 평안하지 못했고, 제환공(齊桓公)의 형 규()는 아우와 임금의 자리를 다투다가 그 몸이 죽임을 당했으며, 은나라 주왕(紂王)은 골육을 죽여 가며 간언(諫言)을 듣지 않다가 나라는 폐허가 되고 끝내는 사직까지 잃고 말았다고 하오. 이 세 사람은 하늘의 뜻을 거역하여 죽어서도 종묘(宗廟)에 들지 못했소. 이제 그대가 하고자 하는 것도 골육간이 천하를 다투게 하는 것이니, 이는 곧 하늘의 뜻을 거역하는 일이 되오. 진나라의 신하되어 오래 봉록을 먹은 사람으로서 어찌 그같이 끔찍한 모반을 꾸밀 수 있겠소?”

이사가 그렇게 맞섰으나 간교한 조고는 이미 대답이 준비되어 있었다.

위와 아래가 한마음이면 오래 권세를 지켜나갈 수가 있고, 안과 밖이 뜻을 같이하면 어긋나 그릇됨이 없습니다. 승상께서 저의 말을 따라주신다면 오래도록 봉후(封侯)를 유지하며 대를 이어 고(·왕이 스스로를 이르는 말)를 칭하는 가문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왕자교(王子喬 · 적송자와 마찬가지로 전설 속의 선인)나 적송자(赤松子)처럼 오래 사실 수 있을 것이고, 공자(孔子)나 묵자(墨子)처럼 지혜로운 사람으로 길이 추앙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저와 공자 호해를 따르지 않으신다면 재앙이 자손에까지 미칠 것이니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듣기로 참으로 처신이 능한 사람은 재앙을 복으로 돌릴 줄 안다 하였습니다. 승상께서는 이제 어찌 하시겠습니까?”

그렇게 이익으로 꾀고 해악으로 위협하니 어지간한 이사도 더는 버텨 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한 가닥 남은 충정이 있어,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기를 잊지 않았다.

아아!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홀로 죽을 수도 없고 살 수도 없구나. 도대체 어디에 이 한 목숨을 맡겨야 한다는 것이냐!”

그리고 눈물까지 흘리면서 한숨을 내쉬다가 마침내 조고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조고는 그 길로 돌아가 호해에게 알렸다.

현명하신 태자마마의 명을 받들고 그것을 승상에게 전하였더니, 승상께서도 감히 그 명을 어기지 못하셨습니다.”

호해를 한껏 추켜올려 기세를 북돋아 주면서도 은근히 자신의 공을 상기시키는 교묘한 말재주였다.

그리하여 조고와 호해, 이사 세 사람에 의해 역사상 유례가 드문 큰 바꿔치기가 꾸며지고 이루어졌다. 없는 시황제의 조서를 뒤늦게 만들어 내 호해를 먼저 태자로 세우고, 맏아들 부소에게 미리 내린 조서는 새로 쓰여졌다.

<짐은 천하를 순시하며 명산(명산)의 여러 신들에게 기도드리고 제사를 올려 천수(천수)를 늘여보려 한다. 늘 궁궐을 비워두고 사방으로 떠도는 터라 도성에 남은 대신과 변방을 지키는 장수들에게 의지하는 바 크다. 그런데 너 부소는 장군 몽염과 함께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변경에 머문 지가 벌써 여러 해가 되었으나 한 걸음도 더 나아감이 없었고, 많은 군사와 물자를 써 없앴으나 한치의 공도 세우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도리어 여러 차례 상소를 올리어 짐이 하는 일을 비방하였으며, 그곳에서 하던 일을 그만두고 태자의 자리로 돌아올 수 없음을 밤낮으로 원망하였다. 이는 신하로서 충성스럽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식으로서도 효성스럽지 못한 짓이라, 이제 너 부소에게 칼을 내리니 스스로 목숨을 끊어 사죄하라.

또 장군 몽염은 부소와 더불어 도성밖에 머물면서 그 불충과 불효를 바로잡지 못하고 함께 세월만 허비했으니 그 지모를 알겠노라. 이는 또한 신하된 자로서 충성스럽지 못함이라 죽음을 명하노니, 군대는 부장(부장)인 왕리(왕리)에게 맡기고 어서 명을 따르도록 하라>

조고와 이사는 그렇게 고쳐 쓴 편지에 옥새를 눌러 봉하고, 호해에게 빌붙어 지내는 빈객(賓客)을 사자로 삼아 상군(上郡)으로 보냈다.

황제로부터 사자가 왔다는 말을 듣자 부소와 몽염은 놀라 뛰어나가 맞아들였다. 그러나 조서를 받아 읽어보니 마른날에 날벼락 같은 내용이었다. 함께 내려진 칼을 받은 부소는 울며 내실로 들어가 자결하려 하였다. 몽염이 그런 부소를 말렸다.

폐하께서는 지금 도성을 나와 계시고 아직 태자를 책봉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30만 대군으로 변방을 지키게 하시고 또 공자를 보내 저와 군사들을 감독케 하셨으니, 저희가 맡은 일의 여간 막중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 사람의 사신이 왔다고 해서 가볍게 자결해버리신다면, 그가 가져온 조서가 거짓인지 참인지는 어떻게 알아보시겠습니까? 한 번 더 용서를 간청해 보시고 그래도 죽음이 처분이 내려온다면 그때 자살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부소가 머뭇거리자 사자가 다시 시황제의 명을 내세워 매섭게 자결을 재촉했다. 어질고 소심한 부소는 그 재촉을 견뎌낼 수 없었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죽음을 내리셨는데, 어찌 구차하게 용서를 빌 수 있겠소?”

몽염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하고는 칼로 목을 찔러 죽었다. 하지만 몽염은 그래도 뻗대었다. 사자는 서두르다 일을 그르칠까 두려워 함부로 몽염을 죽이지 못했다. 그를 옥리(獄吏)에게 넘겨 가까운 양주현(陽周縣)에 가두어 두게 했다.

한편 거짓된 조서와 사자를 부소와 몽염에게 보내놓고 마음 졸이며 결과를 기다리는 조고와 이사에게는 새로운 골칫거리가 생겼다. 아무리 시황제의 죽음을 감추어도 7월 더위라 시체 썩는 냄새는 어쩔 수가 없었다. 조고가 다시 기막힌 꾀를 냈다.

여럿이 보는 데서 소금에 절여 말린 생선을 한 섬() 사다 수레에 실은 뒤에 온량거를 따르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그같은 조고의 말대로 해보니, 생선 자반 냄새와 시체 썩는 냄새가 뒤섞여 그 뒤로는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다시 사자가 돌아와 부소는 자결하고 몽염은 가두어두었음을 알렸다. 호해와 조고, 이사는 그 소식에 기뻐하며 일찍이 몽염이 뚫은 직도(直道)를 골라 함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재촉했다.

시황제의 죽음이 천하에 선포된 것은 순수 행렬이 아무 탈 없이 함양으로 돌아온 뒤였다. 조고와 이사는 발상(發喪)과 함께 거짓 조서를 앞세워 호해를 태자로 세웠다. 그리고 천하는 하루도 주인 없이 비워둘 수 없다 하여 호해로 하여금 황제 자리를 잇게 했다. 바로 이세(二世) 황제로, 그때 그의 나이 스물 한 살이었다.

이세 황제는 시황제의 장례를 첫 번째 일로 삼았다. 그 해 9월 시황제를 여산(驪山)에 안장(安葬)했는데, 허영에 찬 절대권력과 정당성도 정통성도 없는 그 계승자가 보여줄 수 있는 나쁜 본보기는 거기서 모두 보여주었다.

부패한 절대 권력이 가장 흔하게 부리는 허영은 시간과 공간을 향한 것이다. 시황제가 순수(巡狩)때마다 이름난 산천에 비석을 세우고 반반한 바위를 보면 글자를 새겨 되잖은 제 업적을 길이 전하려고 한 것은 시간을 향한 허영이요, 만리장성이다 아방궁이다 하여 세상에서 가장 크거나 높거나 긴 것을 세우기를 좋아한 것은 공간을 향해 부린 허영이었다. 그런데 그런 허영의 절정(絶頂)이 바로 젊어서부터 여산에다 조성하기 시작한 자신의 능묘(陵墓)였다.

천하를 통일한 뒤 시황제는 전국에서 끌려온 죄수 70여만 명을 그 일에 투입시켜 완공을 서둘렀다. 먼저 사방 십리의 땅을 깊이 파 큰 돌로 벽을 쌓고 위를 덮은 뒤, 녹은 구리물을 부어 틈새를 메웠다. 세상에서 가장 큰 현실(玄室) 외곽(外槨)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자신의 궁궐뿐만 아니라 망해버린 육국(六國)의 궁궐까지 큼지막한 모형으로 앉히고, 백관(百官)과 노비, 생전에 썼던 보배로운 물품과 값진 장식도 모형이나 진품으로 가득 채웠다. 현실 외곽 천장에는 천문(天文)을 도형으로 삼아 별자리와 은하를 펼치고, 바닥에는 지리(地理)를 본떠 세상의 모습을 베풀었다. 수은으로 그 백천(百川)과 강하(江河)와 대해(大海)를 채우고, 기계를 작동시켜 서로 이어 흐르도록 했으며, 인어(人魚)의 기름으로 양초를 만들어 오랫동안 무덤 안을 밝힐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공장(工匠)들에게 명하여 혹 무덤을 몰래 파들어 오는 자가 있으면 절로 화살을 쏘아 부치는 활과 쇠뇌를 만들게 해 여기저기 걸어두었다.

타락한 절대 권력의 허영처럼, 정통성과 정당성이 결여된 그 승계자가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쓰는 수법도 유형화(類型化)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흔한 것은 상징과 조작으로 앞선 절대 권력의 권위를 극대화하는 것인데, 이세 황제가 바로 그랬다. 시황제의 허영을 효도란 이름으로 이어 확대 재생산함으로써 자신이 의지할 권위를 극대화하려 하였다.

이세 황제는 시황제를 신비화, 절대화하여 그 권위를 키우기에 앞서, 효도를 핑계한 공포정치로 백성들을 먼저 위압했다.

선제(先帝)의 후궁들 가운데 자식이 없는 이들까지 궁궐 밖으로 내쫓는 것은 옳지 않다. 그들을 능묘 안으로 보내어 죽은 뒤에까지 선제를 모실 수 있게 하라.”

옛 진나라에 있었던 순장(殉葬)의 관습을 되살린 것일 수도 있지만 그로 인해 수백 명의 후궁들이 모두 산채로 시황제와 함께 무덤에 들게 되니, 그 참혹한 소문은 그대로 공포가 되어 사람들을 짓눌렀다. 그런데도 이세황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무덤 안을 지키는 기관을 만든 장인(匠人)들과 그걸 설치한 일꾼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이 모두 어디에 무엇이 설치되어 있는지를 알고 있으니, 만약 그게 누설된다면 아무리 정교하고 은밀한 장치라도 무덤을 지키는데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또 진기한 보물들을 옮긴 일꾼들과 값나가는 물품들이 놓인 곳을 아는 자들이 많으니 그 또한 누설되면 무덤 안이 온전히 보전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어떤 아첨꾼이 와서 그렇게 말하자, 이세 황제는 다시 아비의 무덤을 지킨다는 구실 아래 함부로 사람을 죽일 길을 찾아냈다. 장례식이 끝난 다음 설치될 기관이 다 설치되고, 들여놓을 보물들이 다 들여놓아지자, 이세 황제는 명을 내려 무덤 안 길[墓道] 가운데 문[中門]을 닫게 했다. 그리고 장인들과 일꾼들을 빠져 나오지 못하게 하고 다시 바깥문[外槨門]을 굳게 닫아거니 그 안에서 죽은 사람이 또 수천 명이었다. 그 일을 전해들은 사람들이 모두 몸서리치며 그렇게 할 수 있는 황제의 권력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이세황제가 죽은 시황제를 절대화하고 신비감을 주는데 공포만을 쓴 것은 아니었다. 의례와 제도를 통해 시황제의 권위를 극대화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돌로 된 엄청난 무덤 외곽(外槨)위에 두텁게 흙을 덮고 풀과 나무를 심어 산 같이 만든 뒤, 이세 황제는 다시 백관을 불러놓고 말했다.

선제의 침묘(寢廟)에 바칠 희생과 산천을 비롯해 선제를 위해 드리는 모든 제사에 쓰는 예물을 늘리고 규모를 키우도록 하라. 또 의례와 제도로서 위대하고 거룩하신 선제를 높이고 우러를 방도를 궁리해 보라.”

그러자 대신들은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여 시황제의 사당[]을 일곱 개나 세워 나라에서 가장 높이 받드는 조묘(祖廟)로 삼았다. 그리고 전국각지에서 헌상한 공물로 제사하게 하였는데 더 할 래야 더 더할 것이 없을 만큼 희생을 늘리고 공경하는 예를 두루 갖추었다. 특히 서옹(西雍)과 함양에 있는 사당의 제사에서는 황제가 친히 예법에 따라 잔을 올리게 하니 시황제의 권위는 죽어서 더욱 눈부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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